Passion 5
[유우지]passion 5권
16. 심장의 충고
세링게섬 [Seringe I.]
면적 약 840㎦.
인구 약 15만. 인도양 연안,
탕가니카의해안에서 약 45㎞에 있다. 산호석회암으로
된 평탄한 섬으로 열대계절풍 기후에 속한다. 4~5월이 우기, 6~10월이 남서계절풍이 부는 신선한 건기이며, 11~12월이 우기, 12~3월이 북동계절풍이 부는 더운 건기이다. 연평균강수량 1,500㎜ 전후이며, 기온이 높은 건기도 바람 때문에 비교적 쾌적하다.
최대 농작물은 코코야자와 정향나무(향료의 원료)이며저습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그밖에 식량작물과 과실류도 재배되며, 어업과 함께 주민의 식량자급을 가능하게 한다.
* * *
정태의는 문단을 통째로 외워버리기라도 할 듯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덮고 말았다.
아프리카 동쪽 해안, 인도양에 떠 있는 섬 하나가 몇 평방킬로인지 인구가 몇 명이나 사는지, 기후는 어떻고 산업은
어떻게 되는지, 알 게 뭐람. 차라리 지도 같은 거나 나오면 그게 더
쓸만하겠건만 그런 건 어느 맵서비스 사이트를 뒤져봐도 나오지도 않았다.
조그만 섬이라고 했다. 조그맣다고 해도 제주도의 반에약간 못 미치는 저 넓이면 저 안에서 사람 하나 찾아내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지만,
알량한 설명이 실린 백과사전보다 더 쓸모 있는 카일의 짧은 설명을 듣자면 다행히도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서너군데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타지인ㅡ주로 중동 지역의 부호들ㅡ의 별장이 있는 곳은 동남부 연안의
일부 지역.
그 어딘가에 정재의가 있다. 아니,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정태의는 절뚝이며 침대로 가 털썩 몸을 내던졌다. 태양은 머리 위로 떠올라 있었다. 차양에 가리워 방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종종 문 대신으로 쓸 만큼 널찍하게 트인 창문의 창틀까지는 들이쳐 눈부시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침대보다 한 뼘 남짓이나 높을까 말까한 그 커다란 창에 한쪽 팔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파랗게 시원해 보이는 풀장이 바로 몇 걸음 앞에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묵직하게 깁스를 한 다리를아쉬운 듯 까닥거리면서 정태의는 그 풀장을 바라본다.그리고 풀장 옆, 비어 있는 비치벤치도.
벤치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누가 있었다는 증거이기라도 한 양 책 한 권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이제 보니 그 옆의 조그만 나무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맥주도 한 캔 있다. 그 캔은 이제야 봤다.
"……."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그 캔을 노려보았다. 슐타이스다. 젠장. 나도 맥주 마실
줄 아는데. 너 혼자 마셨냐.
정태의는 조금 전까지 거기에 앉아 있었던 남자를 떠올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조금 느지막이 점심을 먹은 뒤 정태의가 방에서 뒹굴거리는 동안 그 남자, 일레이 리그로우는 서재에서 집어왔는지 낡아빠진 책을 들고 와선 풀 옆에 앉아 읽었다.그러다가 날이 더워지면 그대로 풀에 뛰어들어 한 바탕헤엄을 치고 나와 다시 책을 집어들곤 했다. 실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정태의로서는 대단히 다행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정태의가 뭘 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방에서 낮잠을 자든 식당에서
간식을 얻어먹든 서재에서 책을 뒤적이든, 그는 간섭을 하기는커녕 풀에서 수영을 하거나책을 읽곤 하며 자신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뿐이었다.
하긴, 어쩌면 그리 의외는
아닌지도 모르겠다.UNHRDO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정규 일과
외에는 정태의가 뭘 하든 아랑곳도 않았다. 비단 정태의뿐 아니라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누구에게나 무관심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든 무관심하면서도 누구든 꿰뚫어보는 듯한 일면이 있다는 점이 가끔 무섭긴 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이 문득문득 섬뜩해지도록 동물적인 감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누구든 꿰뚫어보는 듯한 일면'과 일맥상통하는 것도 같았다.
이를 테면 그런 거다.
아까,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정태의가 리타에게 뭔가 간식거리를 얻어먹을까 하고 일어서려다가 문득 창 밖을 보았을 때. 일레이는
막 헤엄을 치고 나왔는지 비치타월로 몸을 훌훌 털어내듯이 닦고는 벤치에 앉으며 책을 펼쳐드는 참이었다.
정태의의 거동에는 거의 신경도 안 쓰는 그를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에라도 가는 척 나갔다가 그 길로 냅다 튀어버리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없을까, 5할 정도의 진심을 담아 생각했다. 아마 어지간한 상대만 되었더라도정태의는 시도해봤을 거다. 일대일이라는 상황이라면,지키기는 어려워도 피해내긴 쉬운 법이다. 어지간해서는 무사히 도망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저놈은 결코 어지간하지가 못하단 말씀이야…….
정태의는 책장을 넘기는 일레이를 보면서 내심 혀를 차곤 한숨을 쉬었다.
딱 그때였다.
'성공의 가부는 대체로 판단력에 좌우된다. 이것은 대부분의 방면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전제이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핵심적인 지혜란
바로 이런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손끝으로 책장을 톡톡 두드리면서 문득 그가 나지막이글월을 읽었다. 움칫,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일순간 움츠러든 가슴께를 아무렇지
않은 척 문지르면서 정태의는 글쎄?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이는
책에서 무심한 시선을 떨어뜨려 정태의를 흘끗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그게 뭐? 라고 덧붙이면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레이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별 뜻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를테면 위험한 모험을 하기 전엔 자신의 컨디션이 최상일
때를 택한다든가……그 정도만 해도 나름대로 괜찮은 판단력이라 할 수 있겠지. 과연 그 모험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서라도.'
'…….'
정태의는 깁스를 한 발로 탁, 탁,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허리 아래를 중심으로,
아침부터 물먹은 솜처럼 나른하기 그지없는 몸은 잠시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저놈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람.
정태의는 내심 욕을 바가지로 쏟아내며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 갈까 했었지만ㅡ별다른 꿍꿍이도 없이ㅡ그 생각도 뚝 떨어져 버렸다
리타에게 에그타르트를 얻어먹고 얌전히 방으로 돌아온 정태의는 창 밖 풀 옆에서 태평하게
책을 읽고 있는 일레이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곤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그럴 즈음
리타가 일레이를 부르러 왔던 것이다. 홍콩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니 서재로 가 보라고.
홍콩에서 연락이라는 말에 일레이는 마치 휴가 기간중에 회사에서 연락이라도 온 것처럼
잠깐 싫은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자리를 떴다.
하긴 저렇게 편히 쉬는 참에 일 때문에 방해받으면 참 싫기도 하겠지……라고 노트북으로
시선을 준 채 속으로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일레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놈은 휴가 중에 연락을 받은 게 아니었다. 엄연히 무단 이탈 중이었던 것이다. 저래놓고 연락이 왔다고 싫어하면 그거야말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홍콩에서 연락이라. 조속한 귀환을 촉구함. 뭐 그런 연락인가. ……언제 가려나……."
침대 위에서 반바퀴 굴러 돌아누운 정태의는 눈이 아프도록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실 궁금한 것은 일레이가 언제 홍콩으로 돌아가느냐가 아니었다. 일레이가 자신의 향방을 어떻게 결정짓느냐다. 그가
UNHRDO를 그만두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홍콩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그
시점에서, 그는 정태의를 어떻게 하려고 할까.
순순히 놓아준다, 홍콩까지 끌고 간다,
말끔하게 없애버린다, 사지라도 부러뜨려서 어딘가에 가둬버린다.
당장 생각나는 가능성들을 하나씩 꼽아보던 정태의는제풀에 섬뜩해져 손가락을 도로 펼쳐버렸다. 마지막이 제일 싫다. 차라리 세 번째가 낫겠다. 죽었다 깨어나도 첫 번째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고, 상황을 종합해서 따져보자면 두 번째가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을것 같지만…….
"역시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정태의는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차라리 어제이기만 했더라도 '홍콩이든 어디든 저놈과 같이 있다면 세상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라며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정태의는 가고 싶은곳이 있었다.
세링게.
형이 있다는 곳이다.
여태 온갖 곳에서 백방으로 손을 써도 알아내지 못했던 형의 행방이 잡혔다는 그곳. 정태의조차 이미 한참동안 만나지 못한 형이 있다는 그곳이다.
정태의는 하늘빛이 눈부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 그 빛을 가리며 문득 혼잣말을중얼거렸다.
"납치 감금이라…."
퍽 생소했다.
정재의와 납치 감금. 더없이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그렇게 걸맞지 않은 조합도 별로 없을 거다.
예전부터 정재의를 탐내는 사람이나 기구는 숱하게 많았다. 납치라는 강경한 수단을 불사하려는 자들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불온한 시도가 성공했던 전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일 정말로 정재의가 납치 감금된 거라면…….
"형보다 더 운 좋은 사람이 범인인 게 아니라면야……."
"그런 인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설령 있다
해도,그토록 운이 좋은 인간이라면 애초에 정재이를 납치할 필요도 없었겠지."
불쑥, 지척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사람이 무슨 농담을
못해.
정태의는 가늘게 떴던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기분 탓인지 갑자기 다리가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문을 닫고 들어온 기억이 나는데, 또한 정태의의 기억이 맞다면 저 문은 경첩이 뻑뻑해서 문을 여닫을 때 희미하게 삐걱이는 소리가 나는데,
어느새 저 남자는 소리 하나 없이 문턱에 기대어 있었다.
"평화롭군. 햇살 받으니 잠이 잘 오나 보지."
"……음……. 어제 거의 못 잤거든."
정태의는 최대한 나른하게 들리도록 애쓰며 중얼거렸다. 실제로도 나른했기 때문에 그리 힘들일 필요는 없었다. 눈을 감은 김에
입도 다물고 싶었지만 저 남자에게 묵비권이 통하지 않으리란 건 굳이 시험해보지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자리가 불편했나? 형은 손님 방에는 특별히 공을들이는데. 그래, 지금 네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따로 주문해서 몇 달 걸려 받아본 물건이거든."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서 있던 일레이가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끼익, 나무로 짜 넣은 바닥이 조그맣게 울렸다. 순간 욱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잠자리가 불편했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씹어먹을 놈의 자식아.
그러나 일레이는ㅡ남자의 형이 대단히 순화해서 '특이한 성격'이라고 표현하는 저 빌어먹을 일레이 리그로우는ㅡ번연히 알면서
그렇게 말한 게 틀림없었다. 반사적으로 욱한 마음에 이불을 움켜쥔 정태의의 주먹 위로 하얗게 튀어나온 관절을
가벼운 손길로 톡톡두드리는 걸 보면.
"손에 힘은 왜 주나……. 곰이라도 때려잡겠군."
미묘하게 웃음이 섞인 그 목소리에 정태의는 다시 실눈을 떴다. 자신의 손등, 관절을 천천히 짚듯이 두드리는 길고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유리알 같은 손톱이빛에 반들거렸다. 확실히 저 하얗고 아름다운 손보다는 정태의의
평범하고 무난한 손이 더 무기를 쥐거나주먹을 쥐는 데에 어울릴 법은 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 하얀 손가락 아래에서 슬쩍 자기손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하늘에 맹세컨대, 곰을 때려잡는다면 그건 내 손이 아니라 네 손일 거다."
일레이는 웃었다. 그리고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이불째로 깔고 앉아 정태의의 몸 위에 덮여 있던 이불이 한 뼘 정도 슬슬 끌려가는데도 매트리스는
별달리 출렁이지도 않는다.
마치 고양이과 짐승 같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런데 곰도 때려 잡을 만한 고양이과 짐승이뭐가 있더라…….
정태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저어 비비적거렸다. 오늘은 영 컨디션이 안 좋다. 아침부터 계속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좀체 하나의 사고에집중이 안 된다. 몸이 안 좋아도 집중력만큼은 괜찮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인간 정태의도 이제 한물 갔구나.
짧게 한숨을 쉬던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앉은 뒤로 일레이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맹수가 이렇게나
조용하면 불안한 법이다.
정태의의 시선이 일레이 쪽으로 간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날아왔다. 하마터면 콧잔등을 호되게 얻어맞을 뻔한 정태의는
간 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맥주캔이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어 왔으니 시원할걸."
"……거 고맙군."
곱게 줬더라면 더 고마웠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혹여라도 맥주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조심스레 풀탑을 뜯었다. 미처 받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얻어맞았더라면 지금쯤 코뼈가 성치 못했겠다.
입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그의 말마따나 더없이 시원한 맥주를 단숨에 비워버린 정태의는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맥주를 비우고 나니 오히려 살짝 갈증이 일었다.
텅 빈 맥주캔을 아쉽게 흔들던 정태의는 하나 더 가져올까 생각하다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그는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우나 무심한 눈이다. 톡, 톡, 시트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보니 또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다.
"……."
정태의는 입매를 설핏 찌푸렸다.
가만있자……. 별로 기분 상한
기색은 아닌데 또 뭘 생각하면서 저렇게 쳐다보고 있나.
정태의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법랑주전자를 끌어당겼다. 짤막한 주둥이를 답싹 물고 주전자를 기울였다.리타가 보면 질색을 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컵이 일레이의 바로 뒤, 책장 위에 있었던 탓이다.
갈증이나긴 했지만 굳이 꼭 물을 마셔야 할 정도로 목이 마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멀뚱히 쳐다보면서 아무말도하지 않으려니 입이 멋쩍다.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저 남자가 생각에 잠길 만한건수라면 역시, 조금 전에 홍콩에서 왔다는 연락일까.
생각해 보면 휴가원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나간 주제에 절차도 밟지 않고 거의 탈취하다시피
해서 전용기까지 썼으니, UNHRDO의 잡다한 규약 따위는 모르는정태의가 대충 따져 봐도 일레이는
아주 단단히 사고를 친 셈이었다. 하긴 저 정도로 인명에 관련된 일도 아니겠다, 그 동안 숱하게 벌여온 사고에 비하면 훨씬낫다. 시말서를 한 다발 쓰든 강등을 당하든 어령에
처박히든 눈 하나 까딱할 인간도 아니고.
"……."
어령이라……. 다만 몇 달이라도
갇혀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는데.
정태의는 주전자에서 입을 뗐다. 그리고 슬쩍 일레이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홍콩에서 연락 왔다면서.
UNHRDO에서? 여기 온 것때문에 그런가 보지. ……아. 아니면 군수품 연계랑 관련된 일인가."
입을 열고 나서야 후자의 가능성도 제법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나 본론이야 어쨌든, 무단으로 임지 이탈을 한 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어. 어서 돌아오라는 거였지. 내일 안으로 귀환하라더군. 무려
총관님의 친필 서명까지 들어간 메시지였어."
"내일 안? 내일 안이라면…ㅡ."
"시차까지 고려하면 오늘 출발해야 하지."
정태의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 뒷내용을 일레이가 이어 말했다. 정태의는 잠깐 멍한 얼굴로 그를보았다.
"오늘……."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 위를 지난 해가 슬슬 본격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할 시각이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적잖이 남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즉각적으로 해외로 출국하기에는 결코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일레이를 보았다. 머릿속으로 잠시, 아까 생각했던 첫 번째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이내 지워버리고
말았다.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출발하려면…ㅡ."
정태의는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말이든 하기를 기다렸다.
일레이는 그래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뭐 그렇게생각할 게 많은지 한동안도 애꿎은 시트만 툭툭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이윽고 그 손가락을 멈추었다.
"정재이를 찾으려 가시겠다……?"
그러나 입을 연 일레이에게서 나온 말은, 다소 의외라면 의외로운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정태의는 깨달았다. 또한 동시에, 역시나
의외였다. 타인의 의향을 먼저 짚어보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들의 일반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 남자의 방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태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게 훨씬 아 남자다운 태도이리라 생각했는데.
"……그래. 도와주려고?"
정태의는 짐짓 웃으며 되물었다.
이 남자는 홍콩으로 가야 한다. 정태의는 아프리카로가고자 한다. 그는 이제야 겨우 덜미를 잡은 정태의를순순히
내버려둘 것인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거기에서 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의 시선이 가느스름해졌다.얇은 유리날 같은 그 눈은, 이미 숱하게 봤다곤 하지만 볼 때마다 선뜩했다.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웃음을 거두며 투덜거렸다.
"쏘아보지 마.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그냥 방해만하지 말아 주라."
마지막 한 문장이, 정태의가 가장 원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자신의 앞날이기도 했다.
일레이의 입매가 아주 희미하게 휘어지는가 싶었다. 웃는지 아닌지 모를 입술이 짧은 말을 뱉어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태의, 너는 오늘 밤 비행기로나와 함께 홍콩으로 간다."
"……."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럴 것 같더라니.
이게 이 남자의 방식 맞지.
이러려면 왜 물어봤어, 라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시점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두말 할 나위 없이그냥 홍콩으로 잡아끌고 간다면 정태의가
피할 도리는 없었다. 두 손 두 발 멀쩡한 이 남자가 두 눈 다 뜨고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도망칠 방도도 없었고, 그렇다고 정면으로 들이쳐 때려눕히고 그 위를 넘어갈 능력도 없다.
그러면 역시 지난범처럼 방심한 틈을 노려약을 뒤집어씌워버리고 냅다 도망을……, ……쳤다간 ……, 신분증을 새로 만들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공항게이트에
들어서기도 전에 목덜미를 낚아채이고 말겠지.
신분을 새로 하나 조달해보는 게 차라리 빠를 성싶었다. 과연 이 남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똑같은 수에 두 번 당할인간도 아니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머리를 벅벅 긁다가 흘끔 눈을 치켜올려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혹시 거부권은 있나?"
"없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간다면?"
"베를린에서 다르에스살람으로 가서 경비행기로 갈아타
세링게로 들어가고, 거기서 정재이를 찾아낸 다음에 다시 다르에스살람으로 나가 베를린――――아니,
거기서는 차라리 요하네스버그가 빠르겠군, 요하네스버그를 경유해 홍콩으로,
내일 안에 도착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아."
"……."
유유자적하게 중얼거리는 저 입을 속시원하게 한 번 찢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게 여태
몇 번이더라, 속으로 손꼽아 보던 정태의는 두 손으로는 부족해져서 헤아리길 포기하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지 많지만, 그 중 어떤 말이든말해봐야 본전도 못 건지리란 걸 뻔히 알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입을 열었다.
"태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도 한데 말이지."
"……?"
"정재이는 지독하게 운이 좋아. 납치 감금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그 자가 진심으로
바랐더라면 손 하나 다치지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조차 없었단 말이야. 심지어 네게도."
"……."
"어쩌면 정재이는 애초에 너를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정태의는 일레이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놀리려는 투도, 떠보려는 투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난 그대로를말하고 있다는 듯, 심상하게 말하며 고갯짓한다.
"글쎄……그럴 수도 있겠군. 뭐 그렇다면야 내가 세링게로 간다 한들 형을 만나지는 못 하겠지."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세링게는커녕 저 방문 바로 앞에 정재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정태의를 만나기 싫어한다면 정태의는 절대로 그를 볼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나를 만나고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꼭 나를 만나기 싫어한다는 뜻으로
연결되지는 않거든."
정태의는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사실,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다. 어느 해이든 연락을 하고 넘어갔던 생일 무렵에도 형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지금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도록 뭔가에
열중해 있나 보다, 라고.
"싫어한다, 라……. 그런 가능성도 있겠군. 생각도 못했어."
정태의는 감탄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으로서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는 전제인데도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떠올려도, 역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태평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한쪽 눈썹을 보일
듯 말 듯 치켜올렸다.
"사이도 참 좋은 형제시군."
"음――――? 그렇다기보단, 글쎄……. 사이가 나쁠래야나쁠 만한 건수가
없었거든."
원래부터가 형과 나는 부딪힐 만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 아니야, 성격이 잘 맞는다기보다는 안 맞는다고 할만큼이나마 겹치는 성향이 없거든,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잠깐 형을 떠올렸다.
확실히 죽이 척척 맞는 형제는 아니었다. 같이 손잡고 오락실에 간다든가 야구나 농구 따위를 한다든가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기호를 주장하며 다툴 만큼 확연하게 부딪치는 구석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무미건조한 관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나는 형을 만나고 싶거든."
그러니까 너와 함께 홍콩에 가고 싶지는 않아.
정태의의 말뜻을 일레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정태의가 원치 않는 것마저도 눈치채는 남자였다. 일레이의 시선이 좀더
가늘어졌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그 시선을, 정태의는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태의. 너는 네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보나?"
"……. 없어?"
정태의는 잠깐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 뒤 슬쩍 눈치를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3초 전만 해도 나름대로 당당했는데, 현실의 문제로 끌려 돌아오니 이 모양이다.
정태의가 애매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일레이는잠깐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없다면. 또 기회 봐서 묶어놓고 달아날 텐가?"
"뭐……."
그럴 수도 있고,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자신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거나 돌리는 건 제법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아무래도 고쳐야 할 것 같았다. 한 치 앞 행동을 짐작할 수가
없는데다 머리까지 비상한 놈을 상대하면 이래서 힘들다. 어지간해서는 거짓말이 안 통하거든. 그렇다고 순순히 네, 네, 따라다니기도 싫고.
그러나 정태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고심해 봐야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그 시간을 기다릴 만큼의 여유는 되는지에 따라 곤란함의 정도는 다를 테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빠르면 몇 달, 혹은 몇 년, 어쩌면 더욱
길게 가더라도, 정태의는 일레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와 집요는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탓이다. 그러면 그 어느 날, 정태의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평생토록 기회조차 없으리라곤 결코 생각지 않았다.
……이 놈 경우는 적당히 머리가 식으면 그냥 귀찮아질 것 없이 죽여서 없앤다, 라는 선택을 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게 좀 난점이긴 했지만.
정태의는 뺨을 긁적이곤 여전히 좀 못마땅하게 혀를 차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미약하게 저항해보았다.
"그런데 말야. 재의 형을 찾으면 너네 회사측에서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냔 말이지. 여태 계속
찾고 있었잖아?"
"회사? 글쎄.
그 정도로 망할 만한 회사도 아닐 테고,무엇보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닌데."
회사는 엄연히 형의 관할이지 내 관할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하며 일레이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정태의는 다시 한 번 저항해
본다.
"그렇다면 UNHRDO는 (어차피 네가 거기에 소속감을가졌을 거라곤 손톱만큼도 생각 안 한다만) 그래도 네가 속해 있는 조직인데, 그곳에서 애타게 찾고 있는 인물을 찾아내는 데에 협조를 해
줄 생각은 없어?"
"내가?"
일레이의 대답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가 모든 답변을 대변하고 있었다.
졸지에 비웃음을 산 정태의는 이럴 것 같더라, 속으로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저런 말을 해봐야 '과연 그렇군, 그럼 네가 가서 찾아오렴' 하는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왜 굳이 말을 꺼냈는지, 생각해 보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태이. 그렇다면
그 물음을 그대로 돌려주지."
"……?"
정태의는 갑작스런 일레이의 말에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정재이는 분명 네가 말한 대로,
T&R이나 UNHRDO에는 물론, 여타
관련 조직 사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핵심적인 인물이지. 즉 그 말은, 행방의 실마리가나온 이상 굳이 네가 안달하지 않아도 그를 구하러 가려는 작자들은 널리고 깔렸단 뜻이다. 그런데 왜 굳이네가 구하러 가야 하지?"
"구해? 난
형을 구하려는 게 아냐. 보고 싶은 거지."
게다가 구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을 만한 형도 아니고, 라며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숙부가 정태의에게 정재의를 찾아보라고 당부한 것은 단순한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해주려는 뜻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런 셈속을 짚고서도 정태의는 정재의를 만나고 싶었다.
이렇게나 연락이 안 되니 궁금하기도 하다. 또한 이 상황에서는, 정재의가 싹둑 가위질하고 나간 그 빨간 실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내 팔자가 꼬여버린 게 운 좋은 형과 연이 끊어져서 그런 것 같다니까, 하고 투덜거리다가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아무런 감흥도 반응도
없이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 보던 그는 느리게 운을 뗐다.
"가고 싶나?"
어디를, 이라는 목적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태의는잠깐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고 싶다면, 보내줄 건가?"
"아니지. 너는 나와 함께 오늘 밤 비행기로 홍콩에 가야 하니까."
정태의는 무심결에 약간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이놈이 말장난을 하는 눈치는 아닌데, 대체 뭐야.
"일레이. 생각해 봐. 너는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인간은 아니지. 나는 그 정도는 알아. 그리고 내가 그 정도는 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지. 그러면 말이지. 지금 여기서 내가 나 홀로 내 형을 찾아 아프리카로 간다 하더라도 어차피 너는
이번에는 금방 찾아낼 수 있다는 소리야. 그러면 굳이 나까지 대동하고 홍콩으로 갈 이유는 없잖아.
언제든 네가 원할 때 찾아내어 숨통을조일 수 있을 텐데."
정태의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일레이는 나직이 코웃음쳤다.
"태이. 너는
하나 잊고 있어."
"뭐?"
"내가 말했을 텐데. 나랑 같이 있는 게 끔찍하게 싫다는 너에게. 죽을 때까지 매일같이 그렇게 끔찍하게 살아보라고."
"……."
그의 말마따나 잊고 있었다. 저 뱀처럼 집요하고 포악한 성정을 한 시라도 잊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정태의는 서슴없이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의자등에 걸쳐두었던 셔츠를 낚아채어 팔을 꿰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가자,
그 빌어먹을 홍콩. 가서 어령에 가둬두든, 홍콩 앞 바다에 시멘트로 발라 던져버리든, 맘대로 해라."
오늘밤 비행기라면, 이놈이 언제 집에서 나갈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리 느긋하게 있을 상황은 못 된다. 어차피 챙길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적당히 정리할 건 정리하고, 카일이나 리타 등등에게 인사도 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보고 인사해야 할 텐데, 느지막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회사로 간 카일에게는 전화나 서면으로 인사를 남겨야 할 성싶다.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해 두고 싶었는데.
망할. 저 놈에게 잡힌
시점에서 이미 인생을 반쯤 포기하긴 했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사대로 움직일수 없는 이 상황에 속을 슬쩍
뒤틀렸다.
"행방이 묘연하던 사람의 위치란 건 말이지,
한 사람에게만 꼬리가 잡히면 그 뒤로 소문 퍼지는 건 순식간이야."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옷을 꿰어입고 있는 정태의의 귀에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어깨 너머로 시선만 흘끔 주면서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세링게에 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여기저기로 새어나가겠지. 분명히 내가 아니라도 거기에서 형을 끌어낼
사람은 태산같이 많을걸."
그러니까 홍콩으로 간다잖아, 하고 투덜거렸다.
끼익, 나무바닥이 울리며
일레이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아 정태의의 뒤에 다다른 그는 손을 뻗어 정태의의
귀를 움켜쥐었다. 마치비틀듯이 문지르는 손길은 느리고 부드러우면서도 가차가 없었다. 귀에 핏기가 돌 만한 아픔에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재이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ㅡ?"
정태의는 고개를 내젓자 선선히 놓아준 귀를 한 손으로 덮으며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간 곳이 묘연하던 사람의 행방에 대한 소문. 이 맥락에서 그건 당연히 정재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정태의는 잠시 고개를 기울인 채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도 조금 더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깜빡였지만 일레이는 굳이 자신의 입으로 말할 생각은 없는 듯 아무 말도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마주보던 정태의는 이윽고 설핏 눈살을 찌푸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그래, 너."
정태의는 넋 나간 얼굴로 일레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검지로 자신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래……그거야 뭐……이제 삼촌도 내가 어딨는지야알게
됐겠지. 그게 뭐."
"잠시라도 내 먹잇감을 다른 놈이 낚아채려 들면,
그것도 유쾌하진 않단 말이야. 홍콩에 놔두고 지부에 들어갔다 오는 정도라면 여차한
경우에 곧바로 손쓸 수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필경 내가 독일을 뜨는 순간에 곧바로 달려들걸."
정태의는 여전히 넋 나간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범인은 이해할 수 없을 소리를 지껄이는 건처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태 정태의는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하지만 영 쓸데없는
흰소리를 하는 인간은 아니니까, 이건 역시 자신의 이해력이 떨어졌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말고 날 노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정태의는 어이없이 불쑥 중얼거렸다. 사람은 주변 사물이나 타인을 판단할 때 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이남자만큼 인생을 막 살지는 않았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을 심어놓을 만큼 원한을 살 짓을 한 기억은 없다.
분명 그의 말마따나 요 얼마간 행방이 묘연한 사람은정재의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정태의도 나름대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재의와 정태의는 다르다. 정태의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가 특별한 원한을 가지고
집요하게 뒤를 쫓을 인간ㅡ이를테면 눈앞에 있는작자 같은ㅡ이 있다면 또 모를까.
"왜 없어. 당장 생각나는 놈만 꼽아도…ㅡ."
정태의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일레이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도중에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다물고 만다.
"꼽아도 뭐."
정태의가 재촉했지만 일레이는 삭막하게 정태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정태의는 잘못한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 투덜투덜.
일레이는 문득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재이라……."
"……?"
"어쩌면 그쪽이 더 까다로울지도 모르겠군."
정태의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화제가 미묘하게 튀어다니고 있는데 그 갈피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정태의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나한테 원한을 갖고 있는 놈이, 너보다 한 발 먼저 나를 작살내버릴까
봐 날 대동하고 홍콩에 가야겠다? 아니면 그냥 매일같이괴로워해 봐라?"
몹시 화가 났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말하고 싶었지만, 정태의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별로 신경 쓸 위인이 아니었고, 정태의 또한 영 탐탁지 못하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얽거리면서 정태의는 생각했다. 일 한 번 잘못 치고 도망쳤다가 잡히니 이 꼴이 되는 구나. 이런 걸
두고 업보라고 부르는가 보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줄곧 뭔가 생각을 하는 듯 정태의에게 시선을 붙박아두었던 일레이는
주머니에 손을넣더니 폰을 꺼내어 정태의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정태의는 손 안에 들어온 핸드폰을 의아하게쳐다보았다.
"어느 쪽이든 좋을 대로 생각해. 홍콩행은 변하지 않으니까. 30분 뒤에 출발할 테니, 떠난다고 형에게 전화해. 번거롭게 여러 단계 거칠 것 없이 그거면 직통으로 연결되니까."
"아, 예에."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며 폴더를 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30분 뒤에 출발. 번갯불에 콩도 볶아먹겠구나.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누르다 말고 정태의는, 문 쪽으로걸음을 향하고 있는 일레이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전용기 타고 왔다면서, 그럼 비행기 시간도 따로 없을 건데 왜 꼭 그렇게 급하게 30분 뒤야."
생각해 보면,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카일이 돌아온 뒤같이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라도 하고 제대로 인사를한 뒤 헤어져도 전용기로 돌아간다면 충분히 맞출 수있는 시간이다.
"……."
일레이는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표정 없는 얼굴에 슬쩍 드러난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고서 정태의는 재빨리 다시 핸드폰 액정화면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 강압에 못 이겨
강제적으로 끌려왔을 파일럿이그 자리에서 얌전히 일개 교관을 기다리고 있을 리 만무하지. 게다가 개인 전용기도
아니고 UNHRDO의 전용기였다면 운용 스케줄도 이미 짜여져 있었을 텐데,그게 어긋나서 차질도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정말로 번갯불에 콩이군……. 비행기표 예약은 된 거야?"
물어본다기보다 반쯤은 혼잣말이었던 정태의의 말에,막 방밖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던 일레이가 대답했다.
"물론. 여권번호
JR0203314 김영수 씨."
"……. 비아냥거리는
솜씨 한 번 일품이라니까…."
정태의가 질린 듯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두어 번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곤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그러나 선선히 말했다.
"입 닫고 얌전히 따라 와. 정재이를 못 만나게 하지는않을 테니."
"음?"
통화대기음이 떨어지는 전화를 한쪽 귀에 대고 있던정태의는 일레이에게 조금 멍한 시선을
주었다. 말을못 들은 건 아닌데 의외의 말이었던 터라, 혹시 잘못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되물어 확인할 사이도 없이 일레이는 그 말만
남기곤 다시 걸음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윽고 대기음이 끊기고 전화 안에서 '무슨 일이야.'라는 짤막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정태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일레이의 자취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 * *
카일은 바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는 오른쪽 귀에는 멀리 바다 건너에서 직통으로 걸려온 전화기를 끼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펜, 왼손에는 바로 5분전에 막 팩스가 왔다며 제임스가 가져온 종잇장을 들고 있었다.
사실 어지간한 일들은 대부분 제임스가 보고 끝냈다.아마 카일에게 소식이 오기 전에 제임스 선에서 그치는 일들이 전체 일의 9할은 훨씬 넘을 거다. 제임스는 정말이지 유능한 비서였다. 잔소리가 좀 지나치게 많긴 하지만, 일더미에 깔려 스트레스로 심리상담까지받다가 급기야는 사표를
내겠다고 길길이 뛰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카일은 무조건 죽어지내야 했다.
오늘도 느지막한 아침을 먹고 회사에 나오자마자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거리를
보고 카일은 한숨을 쉬며 '일이 너무 많아'라고 중얼거렸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7시에는 이미 회사에 와서 오늘의일을 미리 한 바퀴 둘러보고 9시가 넘어서야 출근하는
상사를 데리러 그의 집까지 갔던 제임스의 날카로운 시선 아래 말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실상 제임스는 이 상사를 반쯤 포기한 실정이었다. 카일은 분명 세간의 일각에서는 기린아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인물이었지만, 결코 근면성실한 인간은 못 되었다. 일당백의 저 두뇌가 아니었더라면 이 회사는 쓰러져도 애저녁에
쓰러졌을 거다.
카일의 그 변덕스러운 성정과 게으른 일면을 익히 알기 때문에 제임스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의 선에서 일을 처리했다. 카일도 기꺼이ㅡ대단히 기쁜 마음으로ㅡ그렇게 하라고 했고,
물론 일이 태산같은 만큼 제임스는 칼 같이 자신의 급료를 막대한 액수로 정산해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 만큼, 카일에게까지 넘어오는
서류라면 '반드시봐야만 하는' 건이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귀찮단 말야.
슬쩍 게으름이라도부려서 대충대충 넘겨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거든. 응?
단 하나도! 없단 말이지. 젠장,
저 일귀신 같으니."
팩스를 넘겨주고 제임스가 나가자마자 카일은 투덜거리며 제임스를 흉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화 속에서,바다 건너에 있는 친구가 웃었다.
'제임스에게 그렇게 말해 봐. 일 좀 줄여달라고.'
그리고 그 친구가 예상했던 대로 카일은 펄쩍 뛰었다.
"농담 말게. 그랬다가 저 친구가 이번에야말로 진짜로사표를 내버리기라도 하면 난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하하, 알긴 아는군.
혹시라도 제임스가 그만두면 내게 좀 알려주게. 그 유능한 친구, 내가 얼른 주워가야겠으니까. 나말고도 벼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
"안 돼, 안 돼. 제임스를 주워가려면 나까지 같이 주워가."
카일 자신보다도 훨씬 유능한 비서가 사라진 뒤의자신의 생활을 생각해 보곤 오한이 서리는
듯 어깨를움츠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소심한 말투와는 전혀걸맞지 않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서류를 주욱훑어보면서 군데군데 펜으로 체크를 해나가고있었다.
그러던 때였다. 안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카일은 펜과 종이를 한 손에 모아 쥐고 전화를 꺼내었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녀석이 어쩐 일로 전화야."
'전화 왔나? 그럼
조금 있다 다시 걸까?'
"아냐, 일레이야.
어차피 용건만 말하고 곧 끊을 테니상관없어. 하지만 바로 두어 시간 전에 본 놈이
갑자기 왜 전화람."
'아하, 릭이라.
작별 인사쯤 되겠지. 그놈, 내일 안에 지부로
귀환해야 하거든.'
"그래? 그럼
오늘 바로 가야겠군. 아냐, 그래도 이놈이 작별 인사처럼 귀여운 짓을
할 놈이 아니지. 잠시만 기다려. …ㅡ무슨 일이야."
카일은 친구의 전화를 잠시 대기로 돌려두고 폰을 받았다. 용건이 없이는 전화를 하는 동생도 아니었고, 또한 어지간한 용건 정도로
전화를 하는 동생도 아니었다. 하물며 작별 인사라니, 그런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친구도 그건 뻔히 알 테니 물론 농담을 한거다.
그러나 카일의 무뚝뚝한 대응에 돌아온 대답은, 약간머뭇거리는 빛을 띤 순한 목소리였다.
'카일? 저 태의입니다.'
"태이?! 아, 그래."
카일은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려 액정을 다시 한 번확인해보며 대답했다. 액정에 뜬 번호는 분명 동생의번호가 맞았다.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찍으며
고개를갸웃거리면서도 카일은 저절로 부드럽게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 일이야, 일레이 전화로. 그놈이 전화하라고 시키기라도 했나?"
반농담조로 웃으며 말하자 수화기 안에서 정태의는 다시 조금 머뭇거렸다.
'그게……곧 홍콩으로 떠나게 됐습니다. 일레이와 함께요. 미리 알았더라도 아침에 제대로 인사를 드렸을텐데 갑자기 이렇데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감사합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응? 간다고?
언제 떠나는데."
'30분 뒤에요.'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말을 듣고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아니 저녁이라도 들고 가지.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일레이가 좀 급한가 봐요. 내일까지 홍콩 지부로 귀환해야 한다던걸요.'
"그거야 그놈 사정이지. 먼저 보내던가 하고 자네는 좀더 머무르지 그래."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죽어도 못 가겠다 그래."
'……그러면 정말로 죽어요, 저."
갑자기 전화 안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카일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저 말의 현실성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 특이한 성질머리를 동생으로 둔 자신만큼불행한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게. 아쉽군. 다음에 독일에올 일이 있으면 꼭 들르도록 하고."
'예, 그 동안 정말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감사합니다.'
일단 결정된 일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길게 늘어놓지않는 건 카일도, 수화기 안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청년은 몇 마디 인사를 더 하곤 전화를 끊었고, 카일도 가벼운 한숨을 쉬며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뒤에야 대기상태로 놓아두었던 전화를 다시받아들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2분하고 약간 더. 괜찮아. 나도 일 좀 정리하던 참이니까. 그래,
릭이 뭐라던가?'
"음. 작별
인사였어. 지금 바로 홍콩으로 가게됐다고."
'…….'
수화기 너머에서 짤막한 침묵이 돌아왔다. 릭과 작별인사의 상관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자네 조카더군. 일레이 번호가 뜨길래 그놈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아. 태의?
홍콩으로 간대? 탄자니아가 아니라? ……아.
하긴 릭에게 걸렸지.'
가엾은 녀석, 이라고 덧붙여 중얼거리는
수화기 속 목소리는 농담조가 아니었다. 그 말에는 카일도 진지하게 공감했다. 카일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문득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거 참 희한하네, 희한해……."
그 나직하고 애매한 혼잣말은 수화기 건너까지 들렸을 텐데 친구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하긴 어디 자신만 희한하다 여길까. 카일은 잠시 고심했지만 역시나 결론이
나지 않아 친구에게 묻고 말았다.
"태이는 대체 일레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서 튀었던
거야?"
'……글쎄. 얌전히
죽어지내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지수가 한도치를 넘었던 것 같은데……. ……다소는내 잘못이군.'
친구의 목소리까지 우울해졌다. 카일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머릿속이 개운치 않았지만, 그즈음에서 적당히 화제를 접기로 했다. 손에 쥔 팩스를다 훑어본 탓이다.
"그나저나 자네 조카…ㅡ우리 연구소의 최대 공적(公敵)이 되다시피 한 천재께서는 세링게에 있는 게 맞나보군."
'새 소식이라도 들어 왔나?'
"음. 아무래도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같아."
'라만……아아. 혹시
알 파이살 왕자 아래에 있다는 그 남자인가?'
카일은 입을 다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이 친구에게는 놀라게 된다. 물론 그쪽에도 독자적인 산하
정보 기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 남자를 알고 있는 건 정보망의 유무와 별개의 문제였다.
"잘도 아는군. 그렇게 두각을 드러낸 적도 없이 조용히 묻혀있는 남자라, 나도 정재이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들어본 이름인데."
'아니, 우연이야.
몇 년 전의 일인데, 그 남자를 만났던 적이 있었거든. 정확히는 파이살의 시중을 들며 따라왔던 그 남자를 봤던 것뿐이라서 제대로 이야기를나눈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왕족이라 해도 계승권 순위는 한참 아래라고 해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었지.'
"계승권 순위가 아래라서 기억에 남았다?"
'음…ㅡ아쉬운 인물이었거든.'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나름대로 신중하게 말을 맺는 친구의 목소리에 카일은 하아, 하고 중얼거렸다.
"아쉬운 인물이라. ……사람 잘 봤군. 일찌감치 왕위다툼에서 노선을 바꾼 파이살의 사업체가 크는 데에일익을 담당한
자라던걸.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하. 이를테면
T&R의 제임스 같은 인물인가 보군.'
친구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카일은 씁쓸하게 입맛을다셨다.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라는 뜻이라면. 어쨌거나―――그 친구가 우리 연구원님을 아주 정중히,
비밀리에, 다소 강압적으로, 모셔간 모양이야."
'……. 하지만 내가
알기론 파이살은 군수품은 다루지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뭐 그거야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조금 더 알아봐야 할 일이야."
'흠. 세링게에 라만의
별저가 있던가?'
"응. 가장
땅값 비싼 곳을 통째로 사들여놨지. 게다가요 1년 가량,
라만은 몸이 쇠약해져서 그곳에서 그리 자주 나오지도 않는 모양이야."
친구는 흐음, 하고 중얼거렸다.
수화기 너머로, 그가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카일은 게이블이 보낸 자료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그 자료를 기본으로 진위를 알아보거나 예상되는 경우의 수를 소거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들을 메모했다.
이 메모를 제임스에게 건네면 또 일거리가 늘었다며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오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성과급을 듬뿍 줘서 해결이 된다면 좋겠지만, 더 이상은 돈으로 어떻게 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되려 자신이 돈을줄 테니까 일 좀 하라고
닦달 당하기 십상이었다.)
"이봐, 창인.
난 제임스가 무서워."
메모지 몇 장을 잡아먹은 조사거리를 다시 읽어보며카일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친구는 할 말이 없는지 그래그래, 하고 카일을 위로해주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재이를 거기에서 끌어내는 건 자네가 좀 책임져주게나."
'아? 아…ㅡ그래,
그러지 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임스만 무서운 게 아니야. 우리 연구소 소장도 무섭다네. 정재이의 J만 꺼내도 눈에
흉흉하게 핏발이 선다고. 자기가 죽기 전에 반드시 그 빌어먹을 천재놈의 머리를 꼭 해부해 본 다음에 죽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 그러기 위해서 뇌해부학 연구과 정을 밟아야겠다고 얼마 전에 진지하게 알아보고 있더라니까."
친구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소리내어 웃었다. 카일은한숨을 쉬었다. 농담이 아니라고,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친구는 한 동안 웃음을 그칠 생각을 않았다.
'그래, 게이블이 알아보고
연락을 주었을 정도면 십중팔구는 재이가 거기에 있을 테지. 그러면 생각해 봐야할 건 어쩌다가 그 운 좋은
아이가 납치감금씩이나 당해 몇 개월 동안 그러고 있나 하는 건데…….'
겨우 웃음을 그친 친구가, 그럼에도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일은, 친구 역시번연히 생각하고 있을 대답을 간결하게 말했다.
"거기에서 풀려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나 보지,
뭐."
그것말고는 답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정재의의 그 놀라운 행운이 사라지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은. 그러나 수십 년이나 지속된
그 행운이 갑자기 사라질 이유는또 뭐란 말인가.
'글쎄……. 실을 잘라버려서
그 꼴이 났는지도 모르지.'
친구가 문득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기도 한 그 애매한말에 카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별 말 없이 버튼을 눌러
제임스를 호출하며 다음 서류를 집어들었다.
"어쨌든, 오늘 들어온 소식은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자네에게 맡기지."
'그래. 별로 순탄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나도 갑자기 모러에게 없던 원한이 생길 것 같군.'
잠시 뭔가를 따져보는 듯하던 친구는 한숨 섞인 말을중얼거리곤 두어 마디 인사와 함깨
전화를 끊었다.
* * *
오늘따라 리포센터가 심상해 보이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정태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유독 오늘만은 아니다. 앞으로
리포센터가 심상해 보일 날은 정태의 자신의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서
T&R이 나가면 또 모를까…….
"아니, 설령
이전을 하더라도 내 머릿속에 이미 리포센터는 깊은 외상이 되어 남아버렸다고."
정태의는 투명한 유리 너머 정면으로 보이는 리포센터를 아련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중국의 풍수지리사는 제법 영험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객실에 비치된 바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었다.
홍콩에 온 지 며칠째. 리포센터 건너편에 있는 호텔의객실에 정태의는 감금되어 있었다.
사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뜻하는 '감금'과는 조금 달랐다. 정태의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호텔에 구비된 카지노나 바에서 놀 수도 있었고 혹은 아예 바깥으로 나가 홍콩 시내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딱히 전화할 만한 곳은 별로 없었지만 누구에게든 자유로이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도, 정태의는 며칠 전
사와서 방 안에 쌓아두었던 책을 읽다 말고 따분해져서 하릴없이 거리를돌아다니다가 막 들어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감시가 붙어 있으면 그게 감금이지딴
게 감금인가."
정태의는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혹시 또 모른다. 이 객실에도 감시 카메라라든가 도청 장치 따위가 붙어 있는지도.
하지만 아랑곳 않았다. 들으려면 들으라지.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벌써 며칠 째, 정태의는이렇게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혀 있었다.
홍콩으로 돌아오자마자 호텔에 정태의만 혼자 처박아두고 일레이는 홀로 UNHRDO 아시아 지부로 들어가버렸다. 며칠 얌전히 놀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그 외에는 아무런 부가적인 설명도 없이 일레이가 사라져버린 뒤,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일레이가 갔다.
정태의가 달아나거나 틈을 엿볼 의지도 없이, 일레이가 먼저 말끔하게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아주 잠깐,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곧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뾰족한 수라도 다시 궁리해내지 않는 한, 당장 일레이가 눈앞에 사라졌다 해서 달아날 도리가 없었다. 여권이나 여타
신분증명을 하지않고 외국으로 나갈 수단, 밀입국 같은 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그리고 물론, 제대로 도망칠 작정을 하고서 신분도 없이 밀입국을 하는 얼간이는 없다.
신분.
합법적이지 못한 짓을 할 때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다. 신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우 적었다. 안전성까지 고려하면 거의
없다고 봐야 옳다.
한 번 더 새 신분을 위조해서 튀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생각도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곧 지워버렸다. 일레이라는 인간이 같은
수법에 두 번 넘어갈 놈도 아니었고, 정말로 제대로 위조 신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정태의는 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런 기술자와 접선할 방법도 알지 못했거니와, 설령 시도를 한다 해도 그 기술자와만나는 자리에 일레이가
대신 나와 버티고 앉아 있을상황이 아주 환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서라. 얌전히 있어도 언제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판에 죽으려고 용쓰는 것도 아니고.
정태의는 침대에 널브러져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훌쩍 일어났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흉흉하게 서 있는 리포센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어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놈이 일부러 이 객실을 잡은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아주환하게 잘
보이는 위치였다. 정태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미 해는 저문 지 오래였지만 불야성의 거리는 대낮처럼 환했다. 이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어쩐지 무척 낯설어 보이는 이 대도시로, 정태의는
떠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아 되돌아오고 말았다.
기세 좋게 도망쳐놓고 어째 좀 한심하다…….
정태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걸음을돌렸다.
한동안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홍콩으로 다시 돌아온 첫날이다. 게다가 앞으로야 어쨌든 지금 현재는 홀로 남았다. 암담하고 처참할 미래를
위해, 구룡반도가건너다 보이는 어느 포구에 앉아 맥주라도 홀로 마시자.
설마 객실 문을 열면 그 안에서 누군가 지키고 서서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정태의가 호텔에서 나가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말그대로 아무런 거칠 것도 없이, 정태의는 호텔에서 나왔다. 이대로 튀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아주 잠깐 떠올린 순간이었다. 호텔에서
딱열 발짝 나간 시점이다.
그때, 정태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
정태의는 별도 보이지 않는 불그스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등 뒤에 붙은 놈이
하나……둘……. ……아니 하나인가.
호텔 정문으로 발걸음을 가볍게 나가다가 갑자기 문에서 딱 열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정태의의 등 뒤로 벨보이의 의아한시선이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어딘가에서그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하나 더.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픽 웃으면서 걸어나섰다. 절뚝, 아직껏 성치 않은 발로 땅을 디딘다.
사람을 그렇게까지 바보로 보지는 않았을 테고, 저 정도 인간을 붙여놓은 바에는 정태의가 이내 알아차리란 것도 일레이는 알고 있었을 거다. 다리가 멀쩡하지않은 이 꼴로는 어지간한 놈을 붙여놔도 도망가기 힘들다. 어쩐지.
그래, 먹잇감을 우리에서 풀어놓은 채 유유히 사라질 리가 없지. 아니 그보다 저건 감시를 위함이 아니다. 그냥 내버려둔 게 아니라는 걸 정태의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정태의가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은 보이지 않는
창살 안이었다.
사실 딱히 그리 불쾌하지는 않지만, 이게 불쾌해하려면 얼마든지 불쾌해할 수도 있는 문제거든…….
정태의는 산책이라도 하듯이 슬슬 길을 따라 아무 데로나 걸어가면서 가늠해보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마음만 먹으면 적당히 따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라면 도망치는 데에는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만일 저쪽이 한 명이라면,
발만 멀쩡했더라면, 아예 이대로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듯이 무작정 달려서라도 따돌릴 수 있었을 거다.
비록 발은 멀쩡하지 않지만 한 번 시도나 해볼까 하다가 정태의는 단념했다. 굳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면 일부러 그렇게까지 해서 괜한 체력만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한 설령 저 감시를 따돌려버리고 아예 홍콩에서 무사히 떠버린다해도 이미 신분까지 드러나버린 바에야 일레이 리그로우까지
따돌려버릴 자신은 솔직히 말해 없었다.
다시 달아났다가 잡힌다면……오오, 찬란한 인생. 그때는 정말로 사지가 전달 날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자작나무 숲에서 일레이와 마주쳤던 그때의까마득한 심정을 떠올리자 심장이 절로
두근거렸다.자신이 조금만 더 마음 약했더라면 그 순간 심장이 멎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뒤통수에 낯선 시선이 붙어 다니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는 없는 일이었다. 늦게까지 영업을하고 있던 서점에 들어가서 책도 사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다가
음료수도 사 마시고, 밤시장에 가 주전부리도 하고,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카메라 장비 따위를파는 상가에 들어가 구경도 하곤 하다가 바닷가의 구석진 곳에 있는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맥주 두어 잔 즐긴 뒤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내도록 시선을 따라붙었을지언정 아무런간섭은 받지 않았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하면, 일레이 본인이 옆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있는 듯없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백 번 낫기도 했다.
그 뒤로도 줄곧 마찬가지였다.
정태의가 어딘가 산책이라도 갈라 치면ㅡ정확히는 객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ㅡ뒤를 쫓는
시선은 줄기차게따라다녔다. 그러나 일체 간섭은 없었다.
그저께는, 과연 어디까지 간섭이
없을까 싶어서 여권과 지갑 등 필요한 것만 달랑 챙겨들고 공항 가는 버스를 타 봤다. 끝까지 아무런 개입이
없으면 그대로 슬쩍 해외로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아주 약간 정도는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까지 풀어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알아볼수 없는 번호였지만, 받기 전부터 이미 누가 전화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냐, 나 정말로 나가려
한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라고, 열심히 변명을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 변명도 이미 뻔히 예상했던 듯하다. 별반
화나지도 않은 투로, 익히 예상했던 목소리가 그저 귀찮은 듯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금 네 여권ㅡ혹은 김수영의 여권ㅡ으로는출국 안
되니까, 공항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 지금 나는 나가기 어려우니까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태의는 공항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전화를 노려보았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출국금지라.
그래, 손 못쓸 데가 없다는 거지. 어느새
출국금지까지 시켜놓으시다니, 자신이 무슨 대단한 범죄자라도 된 성싶었다.저 뒤에 따라붙은 저 감시놈의 목이라도 꺾어버리고 진짜로 밀항선이라도 타버릴까 보다.
그러나 결국 정태의는 그의 말대로 공항 구경이나 하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호텔로돌아오자마자 객실의 미니바를 깡그리 비워버렸다.
500mI짜리 하나에 어지간한 칵테일바의 음료 가격이 붙어 있는 생수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음료와 간식거리를ㅡ맥주만
빼고ㅡ다 화장실에 부어버리며, 그 정도 돈이 나간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않을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열심히
솜뭉치로 두들겨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체크아웃할 때 객실 요금을 나더러 계산하라고한다면
그야말로 낭패보는 거지……."
정태의는 리포센터를 사납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도 저물어가고 있었다.모레는금요일이다.
일레이의 일상이 예전과 같다면, 주말에는 리포센터로 가 회사 일을 보는 그는 모레 밤 홍콩으로 나오게 된다. 어쩌면 정태의의 짧은 여유도 이걸로 끝일지도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쩔 작정일까.
어차피 평일이 돌아오면 일레이는 지부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은
UNHRDO에 소속되지 않은 정태의는 그리로 들어가지 못 한다.
설마 이대로 계속 호텔에 박아둘 작정은 아닐 테지. 주말에만 나와서 사람을 혹사시키고 평일에는 가만히내버려둔다거나. 설마.
무슨 현지처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맥주 맛이 순식간에 뚝 떨어져 꾸에……하고 괴기한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인생 정말 갈 데까지 갔냐, 정태의……, 어이."
어서 머릿속에서 섬뜩한 단어를 지워버리고자 안간힘을 쓰며 괴롭게 버둥거리던 정태의는
제풀에 지쳐서 늘어져버렸다. 힘없는 눈으로 넋없이 천장을 쳐다본다.
문득 어렴풋이 들었던 목소리가 얼핏 뇌리를 스친다.
ㅡ입 닫고 얌전히 따라 와. 정재이를 못 만나게 하지는 않을 테니.
"……."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정태의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훌쩍 일어나 앉았다. 정재이를 못 만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정태의가 아는 한,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몹시 종잡을 수 없고 맞추기 힘든 인간이긴 했어도 빈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런 류의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실 정태의가 나름대로는 얌전하게 호텔에 박혀 있으면서
가끔 산책이나 다니는 것도, 어쩌면 그 말 때문이기도 했다.
"형을 이리로 잡아끌고 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불쑥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생각은 기각. 정재의쯤 되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질질 끌려온다니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건 역시 '얌전히만 있으면 네 형 찾아 떠나도록 풀어줄게', 이건데…….
혹시 또 몰랐다. 마음을 착하게 쓰기로
결심한 일레이가 정태의를 파격적으로 봐주기로 마음먹었는지도.
"……사람이, 시간이 넘쳐나니 별 생각을 다 하는군."
마을을 착하게 쓰는 일레이라니, 누군가에게 질질 끌려오는 정재의와 마찬가지로 안 떠오르는 그림이다.
짚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 가운데 현실을 따졌을 때 가장 그럴 듯한 건 하나였다.이해 관계다.
정재의를 찾아낸다는 것은 혹자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을테지만, 적어도 일레이와 관련된 기구나 회사에 있어서는 확고한 이득이라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선점─정태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인간적인 조직 측에서 보면 이미 정재의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었다─을 빼앗길 경우 커다란 손실을 볼 수도있었다.
즉, 정태의가 정재의를
데리고 오는 것이 조직에, 나아가서는 일레이 리그로우에게도 유리할 터였다. 어차피 다시 튀어버릴 수도 없게 된 정태의가 세상 어디로 가든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바에야, 일레이로서도 하찮은 원한은 접어두고 정태의를 정재의에게 보내는 것이 이득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별로 내키진 않는단 말야."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형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형을 데리고 온다거나, 구해낸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모처엄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나 나누어 그리움을 풀고 '그럼 안녕. 나중에
또 보자.'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정태의는 입맛일 다시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형을 데리고 온다는 조건으로 풀어준다고 하면 정태의는 스스로의 일신의 평안을 위해 당연히 응낙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점점 가슴과 머릿속이 복잡해져, 정태의는 멀정한 머리카락을 괜히 쥐어뜯었다. 그저 기구한 팔자를 원망할
따름이었다.
정태의는 울쩍 일어섰다. 조금 전에 객실로 들어온 참이지만 그예 다시 갑갑해졌다.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에는 몸을
움직여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게 가장
나았다. 우울할 때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 점차 그 우울함이 괴물처럼 스멀스멀 부풀어올라 이윽고는 자신을
집어삼키고 만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결코 유쾌한 기분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차린 것은 호텔에서 나선 지 반시간 남짓 지났을 때였다. 정태의는 미드레벨의 벤치에 앉아 오렌지 주스를 빨아먹으면서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꼬리가 둘로 늘어나 버린 이유가 뭘까.
처음에는 미처 몰랐다. 익숙해지지 않는 건 없다고, 어차피 며칠 줄기차게 붙어다닌 감시라서 신경을 끄다시피 하고 있었다.
못 볼 꼴을 보일 것도 없고, 정말로 항구로 달려가 밀항선을 탈 생각도 없었다.
정도를 지나치지 않으면 저쪽이 자신에게 간섭하지 않는 바에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다니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뭔가 좀 묘한 위화감이 드는데 뭘까.
하고 태평하게 생각하다가 알아차렸다. 꼬리가 어느새 둘로 늘어나 있었다.
정태의는 주스를 단숨에 다 마셔버리고 빈 컵에 꽂혀 있던 스트로를 입에 문채 빼내어
까닥거리면서 가만히 짚어봤다.
공항으로 튀어버리는 척해서 하나 더 붙였나. 어차피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저나 나나 뻔히 아는 처지에 괜히 하나 더 붙인들 뭐 효용이 있다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새로 붙인 꼬리라도 해봐야 그리 유능한 꼬리도 아니었다. 어느 놈이나 마음만 먹으면
따돌릴 수 있겠다.
"아무리 내가 다른 데도 튈 수 없는 몸이라 해도
이거 너무한거 아냐……. 아예 기척도 미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유능한 놈을 붙여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거야 원."
정태의는 스트로를 씹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스트로를 다시 컵에 꽂아넣고 벤치 바로 옆의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일어섰다.
좋게 생각하자. 같이 사이좋게 놀라고
한 놈 더 붙여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야 뭐……놀아봐야지."
그렇잖아도 심심하던 차다. 나름대로 잘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태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나섰다.
그리고 산책이라고 하듯이─실제로도 산책이었지만─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며 슬슬 주위를 살폈다.
이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어 블록만 올라가면 골동품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한 블록 옆으로 가면 영화를 종종 찍곤
한다는 곳이다.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큰길이 나왔다. 그래서 해가
저물어든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이들 오가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지역치고는 그리 말끔하게 정돈되지는 않았다. 딱 좋다.
사람 뒤에 붙을 정도라면 인근의 지리는 훤히 꿰뚫고 있을 테지만, 원래 남을 쫓는 일은 남에게서 도망치는 일보다 몇 배로 힘들게 마련이었다.
정태의는 걸음을 서서히 빨리 했다.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 그 골목 끝에서 방향을 틀었다. 아래의
큰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유유히, 그러나 제법 빠른 걸음으로
찻길로 향했다.
택시는 잡아탈 수 없었다. 그러면 가벼운 장난이 아니라 본격적인 추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큰길을 넘어서 더 걸어내려가면 관광객이 그리 찾지 않는, 이곳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별 볼 일 없는 재래시장이 나온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재래시장을 통과해서 빠져나오다가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아하. 사람이 늘었군.
그럼 슬슬, 적당한 위치를 찾아볼까.
정태의는 즐거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한 바퀴 대강 거리를 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봐둔 곳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또 하나,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조그만 샛길이 있어서 스쳐가는 동안 잠깐
고민했지만 거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처럼 느슨하게 쫓길 때는 괜찮을 것 같았지만 만에 하나 진짜 심각하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이곳은 위험하다. 한 블록 너머는 신정비 구역이었다. 여차하다가 한끝 차이로 길을 잘못 들면 도망치기 어렵다. 게다가 여차하면 달려야 하는데,
지금 정태의는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음……. 역시 거기가 낫겠다."
룰룰, 콧노래가 한층 발랄해졌다.
기분이 경쾌해지는 듯했다. 꼬리가 붙어 있는 것도,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다. 물론 꼬리가 붙어 있는 자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레이 본인이 붙어 있는 것보다는 비할 데 없이 나았다.
만일 저 뒤에서 좇아오는 사람이 일레이 리그로우였더라면.
"……. 왜
난 자꾸 무서운 생각만하지……. 마음에 병이 생겼나 보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웃음이 가신 입매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꼬리가 그 놈이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놀이를 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일레이 리그로우가 지척에서 뒤를 쫓아오고 자신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상황이라면…….
"우와……. 안 돼, 안 돼,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냐,
정태의"
정태의는 핏기까지 가신 입술을 세차게 문질렀다. 아주 잠깐 생각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호러도 그런 호러가
따로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깨를 잡히는 순간 심장마비로 이승을 뜰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그때 자작나무 숲에서 그놈과 마주쳤을 때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자신은 무척
담대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해줄 만했다.
정태의는 이 더운 계절에도 순식간에 서늘해진 팔을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정태의는 아까 봐 두었던 곳에 이르렀다.
한 층 반 가량의 높이를 둔 구름다리다.
조그맣게 거미줄처럼 번진 샛길들의 위에 놓여 보통 대로변의 구름다리보다 야트막했다. 하지만 그대로 뒤어내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높이다.
정태의는 구림다리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가만히 아래를 쳐다 보았다. 뒤로 따라붙던 걸음이 늦추어졌다. 정태의의 기색이 평소보다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이 평소보다 더욱 주의 깊었지만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지는 않고 두고 보려는 모양이었다.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으면 냉큼 쫓아와서 목덜미라도
붙들고 도로 끌고 가야지, 이사람들아……."
정태의는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적당히 큼직한 돌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주워들자 손맛이 묵직하다. 벽돌에서 부서져나온 조각인
듯 한 손에 가득 차는 그 돌덩이로는 사람도 잡을 수 있을것 같았다.
구름다리 조금 아래에 겹쳐진 집의 지붕 아래도 비죽이 연통같은 걸쇠가 나와 있었다. 정태의는 그 돌을 한 번 던졌다 받으면서, 그 길로 바로 그 돌을 걸쇠에
세차게 내던졌다. 땅! 단단한 소리가 울리며 돌이 두세 조각으로 쪼개어져
아래로 투두둑 떨어졌다. 걸쇠는 흠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오케이……. 뭐 여차해서 떨어져도 이 높이면……. 좀 다치긴 해도 죽지는 않겠지."
장난 좀 치다가 다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억울하긴 하겠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손목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두어 번 심호흡한다.
다음순간, 정태의는 시선이
다가오는 어느 곳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손도 한 번 흔들어준다. 동시에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정태의는 구름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
멀찍이서 짧은 고함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눈앞에서 빠르게 건물벽이 솟구치면서 당이 가까워졌다. 그 가운데쯤, 걸쇠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정태의는 정확하게 그 걸쇠로 두 손을 뻗었다. 놓쳐버리거나 못 잡으면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다.
"─…!!"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도중의 짤막한 쇳덩이에 한순간에 걸리는 체중을 지탱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뛰어내리면서 온 체중에 실린 가속도가 두 팔에 닥쳤다.
정태의는 짤막하게 혀를 차며 낯을 찌푸렸다. 미끌, 한 손이 걸쇠를 잡았지만 미끄러졌다. 황급히 다른 손으로 버틴다. 그 손을 버팀목 삼아 미끄러진 손으로 다시 걸쇠를 움켜쥔다. 휘청하며 몸이 출렁였다.
"어차……, 위험하다, 위험해."
정태의는 두 손으로 단단히 걸쇠를 잡아 몸을 지탱한 뒤에야 낮게 중얼거렸다. 추처럼 흔들리는 몸이 천천히 느려진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의 구름다리로
두어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자 땅바닥까지의 거리는 대략 2미터남짓.
정태의는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꼬리들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바이바이, 그들이 들었을지 안 들었을지 모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쇠를 놓았다. 잠시 후 발 아래에 땅바닥이 묵직하게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정태의는 다시금─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좀더─낯을 찌푸리고 말았다. 멀쩡한 다리 한 쪽에만 체중을
싣다시피 해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딱, 하고 땅에 부딪힌 깁스를 통해
저릿하게 온 다리를 뒤틀어버릴 듯한 통증이 전해졌고, 멀쩡한 다리에도 다소 무리였다.
몸을 굴려 충격을 분산시켰지만 그래도 몇 초 가량은 아야야, 하고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잠시 지난 뒤에야
느릿느릿 일어선 정태의는 발목이 몹시 아프긴 했지만 다니는 데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거 천천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저 무조건 달리는 수밖에.
정태의와 같은 방식으로 저들이 뒤따라오지 말라는법도 없었다. 그러나 낭패한 얼굴을 하는 꼬리들을보자 나름대로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서, 정태의는웃으면서 그들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좀 있다 호텔에서 봐요. 산책이나 하고 돌아갈 테니까."
가볍게 걸음을 돌려 절뚝거리면서도 재빨리 달려나서는 정태의의 등뒤로, 구름다리 위의 남자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태의는 못 들은 척했다. 잘 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중국어로 외쳐봐야 정태의가 알아들을 도리도 없었다.
정태의는 적당히 그 자리에서 멀어져 더 이상은 등뒤에서 꼬리가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왔을 때에야 멈춰섰다.
사실 모처럼 손쉽게ㅡ아마 그들이 방비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쉬웠을 테지만ㅡ따돌렸으니
이대로 능력껏 달아나도 좋을 테지만, 일주일 뒤에도 멀쩡하게 잡히지 않고 있을 자신이 없는
바에는 포기다.
"괜히 따돌렸나. 내일부터는 꼬리가 셋으로 늘어나는 거 아닌가 몰라."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반 반성하는 기색은보이지 않으며 유유히 걸었다. 다리가 욱신거렸지만 마음은 상쾌했다. 정태의는 아직 한동안은 더 있어야
풀 수 있을 깁스를 툭툭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생각보다
몸이 참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나 보다, 하고.
그나저나 여기는 어딜까.
대충 위치를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방향 감각 하나만은 자신있었다. 낯선 골목의 정경을 즐기며 천천히 샛길을
지나지나 걸어갔다.
한적한 주택가였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 없지도 않아서 저녁 무렵의 흔한 골목이 나타났다. 군데군데조그만 가게도
보인다.
여태 감시가 붙어 있을 때에도 없는 듯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리를 활보했었지만, 실제로 감시가 없는 상황에서 다니니 그 맛이 각별했다. 정태의는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금방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별로 갈 데도 없어, 그대로 큰길로 나가 바로 호텔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진 이런 기분도 모처럼이라, 정태의는 걸음을 늦추었다.
저만치 앞에 허름한 밥집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식사 때가 되었지, 하고 생각하며 여유롭게 그리로들어가 천천히
밥도 먹었다. 딱히 맛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만족스럽게 배불리먹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 내어주는 차와 과일조각까지 느긋하게 즐기고 나오자 시간이 제법 늦어져 있었다. 이미 하늘은 컴컴했다.
"그러면 슬슬 돌아가 볼까."
오늘만큼은 돌아간 뒤에 그 놈에게 전화로 욕을 얻어먹는다 해도 즐거운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기지개를 켜곤 걸음을 내디뎠다.그리고 큰길을 향해, 좁다란 골목길을 지났다.
하지만 그때였다.
정태의는 아주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가 곧 다시 평소처럼 걸었다.
그새 따라붙었다.
"생각보다 훌륭하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정태의는 픽 웃었다. 따돌렸다가 다시 들킨 셈이었지만, 별반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즐거운 게임 한 판 뛰고나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라 별달리 불쾌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얌전히 호텔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정태의는 그들이 쫓아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큰길로 통한 샛길에는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았다. 조용한 골목에 정태의의 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마치 정면으로 멀리 달이 보였다. 한가로운 기분으로 달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정태의는,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걸음을 다시 늦추었다.
어딘지 묘하다고 느꼈던 그 느낌은 걸음을 늦추자확신으로 다가왔다.
뒤를 쫓는 발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정태의가 아예걸음을 멈추어 서도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는 도리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뒤만이 아니었다. 바로 사선으로 난
골목 옆에서도동시에 걸음소리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어쩌면 그냥 스쳐가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정태의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사선 방향, 걸음소리가 다가오는
쪽으로 달려나섰다. 몇 걸음 달리지 않아 정면으로 마주친 남자에게 두 말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흠칫 걸음을 늦추며 가까스로 그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정태의에게 주먹을 되날렸다.
……빙고.
그냥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단 다행이다. 뒤에서도 또 한 사람이 달려드는 이 상황은 결코 다행이 아니었지만.
"어이, 여보세요들.
장난 한 번 쳤다고 당장 주먹질을ㅡ…."
부웅,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쳐간 주먹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야, 장난이
아니잖아……. 맞으면 죽겠는데. 잠깐, 잠깐, 나 이대로 호텔 갈 생각이었다고. 나 지금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라니까, 아저씨들."
열심히 피하면서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두 남자는 일언반구 없이 무작정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때려눕혀서 끌고
갈 기세다.
정태의는 초조하게 혀를 찼다.
아까 구름다리 위에 서 있던 남자들과 다른 사람들이었다. 과연, 꼬리가 둘로 늘어났다 싶더니 이쪽이 그 두 번째 꼬리인가보다.
젠장, 놀려먹은 건 첫
번째 꼬리인데 왜 주먹질을하려 드는 건 두 번째 놈들이냐고.
정태의는 흘끔 고개를 돌렸다. 인적 드문 샛길이라해도 사람 하나쯤 지나가지 않을 리는……하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라, 때마침 저만치 멀찍이 골목으로 접어드는 그림자가하나 보였다.
정태의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그 그림자를 깨달은 남자들은 빨리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주먹이
한결 흉흉해지는가 싶더니,남자 중 하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아무것도적히지
않은 회색 스프레이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경험적으로,
저런 물건이 나와서 좋은 꼴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십중팔구는 마취나 마비용이다.
저런 물건까지 나온 바에는 시간이없었다.
"이놈들이 미쳤나……, 얌전히 따라다니다 말고 갑자기 왜 이래, 응?!"
정태의는 나직이 외쳤다. 그리고 혀를 차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첫 번째 남자의 구둣발을 팔꿈치로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동시에 젠장, 하고 입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깁스한 발로 두 번째 남자의 목을
걷어찼다.
억!, 그 남자와 정태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 발목은 아무래도 평생 성치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눈물방울이 찔끔 흘러나온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눈앞으로 당그르르 굴러오는 스프레이통이 보여서 얼른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첫 번째 남자의 머리통을 미친 듯이 후려갈겼다.
젠장,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놈들이 왜 갑자기 핀트가 나가서 사람을 때려잡으려 들고 난리야.
스프레이통이 움푹 찌그러질 정도로 그 모서리로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후려갈긴 정태의는
내친 김에숨을 멈춘 채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그의 코앞에 대고 스프레이를 내쏘았다. 기괴한 고함소리가 들리다가 조금 잦아드는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스프레이를 있는 힘껏 내던져 남자의 머리를 맞혀버린 정태의는 뒤돌아서 냅다
달렸다.
일레이 이놈 자식, 사람이 살짝 장난처럼 감시들을따돌리고 전화 좀 꺼놨다고 당장 이렇게 나오냐. 너무하잖아.
어차피 멀리 못 갈 거 피차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입 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면서
한달음에 큰길까지 달려나온 정태의는 흘끔 뒤돌아보았다.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어쩌면 저 남자들은 그대로 저 골목 길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가서 상황을
살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정태의는 마침 가까이 다가온 택시를 잡아탔다. 호텔 이름을 말하고, 택시가 출발하고 조금 더 지나서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욱신거리는 다리가 뜨끈뜨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다리병신
되겠다.
"과연……, 사람을 이런 식으로 피 말려 괴롭히려는 거구나……."
어째 며칠 편하게 놔둔다 싶더라, 라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말았다.
* * *
차라리 자신에게 도박 중독이 될 만한 기미라도 있었더라면, 매일같이 언제든 카지노에 드나들 수 있는 이 상황이 얼마나 매력적이었을까. 심지어 손에는 (남의 돈이긴 하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두둑하게 쥐고 있었다.
돈이라는 게 아무리 많아도 도박판에서 날리려고만 들면 한순간이라고는 하지만, 다행이랄까 유감스럽달까 정태의는 도박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두세 게임 몇십 달러 가량의 푼돈을 걸고ㅡ마음껏써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을 만한
남의 돈으로 주머니가 풍족한 상태에서는 몇백 달러까지ㅡ즐겁게 즐길 수는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돈이 오가는 게임판에 뛰어들 만큼 배포가 좋지도 않았고,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전문적인 꾼들에게 고스란히 손해보는 짓을 즐기지도 않았다.
카지노 안쪽에 마련된 '즐기기 위한' 푸른 빛깔 테이블에서 포커나 몇 게임 즐기자 이내 게임에도흥미가 떨어져 일어서서
나오면서,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저께 호텔로 돌아온 뒤, 한 번도 나가지않았다.
한가롭게 산책을 즐길 셈이었는데 갑자기 흉흉한추적을 받아서야 나갈 맘이 안 들 법도
했거니와,무엇보다 발목이 아주 끝장이었다.
원래부터 작살이 나 있던 발목이었는데, 그 발목을 쉴 틈도 없이 혹사시켰다. 멀쩡한 발목도 나갈 지경인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까지는 어떻게든 절뚝거리며 걸어갔는데 객실 플로어에 도착한
시점에서 몸까지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객실로 들어서 문을 닫은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발목도 발목이거니와, 그 남자들에게 스프레이를 뿌려대면서 숨을 멈춘다고 멈췄지만
가스를 약간 들이킨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땅이 들썩거리며춤췄다.
설마 이대로 못 일어나지는 않겠지, 그 생각이 의식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객실 문 앞에 누워 있었고, 시계는 다음날 점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간이 넘도록 눈 한 번 뜨지
않고 꼬박 잠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두통이 심하지는 않은 걸 보면 질 나쁜 가스는 아니었나 보다, 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며 정태의는 일어났다. 정신은 들었지만 여전히
발목은 아프기 이를 데 없었고, 배도 고팠고, 목도 말랐다.
그래도 잠든 동안 좀 진정은 되었는지 절뚝이나마 그럭저럭 걸을 만은 했지만, 나가서
돌아다닐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날은 하루종일 방에서조차 나가지 않았다. 룸서비스로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내도록 침대에 박혀 덜 읽은 책장만 넘겼다. 도중에 한 번씩 다리를 흔들어 보면서 조금씩이나마 통증이가라앉아가는 걸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감시를 따돌려버린 것 때문에 일레이에게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ㅡ연락이 오면
그 감시꾼들 탓에 발목을 아예 못쓰게 되어버렸다고 마구 부풀려서 불평을 쏟아놓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었지만ㅡ의외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정태의가 객실로 돌아온 것은 확인했을 테니, 얌전히 돌아가기만 했다면
감시를 따돌린 정도로 터치하지는 않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날 내도록 방에서 유유자적 뒹군 정태의는, 자고 먹고 놀면서 꼬박 하루를 그렇게 보내자 역시나 따분하기도 해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바깥까지는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호텔 안을 천천히둘러보고 다니면서 그 시설들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취미만 맞는다면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곳은 카지노일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데에 빠져드는 성격은 아닌 터라 정태의는
몇 게임만 하고는 나와버렸다.
해야 할 일도 없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고역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전역을 하고 UNHRDO로 가기 전까지 집에서 몇 달 지내면서 정태의는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놀 수 있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친구를 만날 상황이 못 된다는 걸 빼고는 별다를 것 없었다. 원할 때에 외출하고,
원할 때에 책 읽고, 원할 때에 자고, 원할
때에 먹고, 심지어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까'라든가 '슬슬 돈을 벌어야 할 텐데' 같은 걱정도 하지
않았다.
역시 문제는 하나다.
분명히 이 평화가 조만간에 깨어지긴 깨어질 텐데그게 언제일지 모른다는 이 불안정함이, 여유로운시간을 느긋하게 즐기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일레이 리그로우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 길로 평화는 박살나는 것이다.
"젠장. 그냥
나 혼자 세링게로 가서 형 소식을 수소문이나 해보고 있었더라면 좋았잖아."
입에서 절로 불평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이렇게 하릴없이 있을 바에는 소일 삼아서라도 할 일이 있는 게 나았다.
카지노에서 나와 지상층으로 걸어서 올라온 정태의는 계단의 마지막 단을 딛고 올라서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지상층의 로비 정면 그랜드홀에서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른한 재즈로편곡되어 홀을 채우는 moon river. 정원으로 이어지는
전면창으로는 날이 어둑하게 저물어들고 있었다. 서너 시간만 있다가 연주했더라면 딱 좋았을 곡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조용한 달밤이면 가끔 음반을 걸어놓곤 했던 곡이었다. 오랜만에 들으니 그립기도 하고 꼬여 있던 심사가 좀 풀어지기도 해, 정태의는
로비를 차지하고 있는 탁 트인 카페의 한 자리에 앉았다.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피아노 소리를 즐기다가 객실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다가온 급사에게
적당히차를 부탁한 뒤 고개를 돌리던 정태의는 시야 끝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한 듯 흘끔 시계를 보면서 서류철을
넘겨보고있는 그 남자는 정태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봤더라,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만났을 때도 딱 이 호텔, 이 로비였다.
앉아 있는 테이블 정도만 달랐을 뿐이다.
정태의와 손을 섞은 적이 있는 무기밀매 중개인이었다.
"……아."
"어……."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야기를 나누기엔 먼 거리였다. 그러나 정태의는 선뜻 일어서 그자리로 건너갔다.
반가워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다가
이렇게 아는 얼굴을 보니 나름대로 반가운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홍콩으로
돌아온 뒤로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라곤 호텔 직원이나 가게 점원
정도일까.
"오랜만이네요. 오늘도 여기서 일이 있으신가 봐요."
"아, 그래.
자네도 오랜만이군. 혼자인가?"
브로커는 반가운 빛을 띠며 응대했다. 정태의는 예, 하고 대답하며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두세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말을 붙이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터놓고 말하지는 못할 거래를 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일은 잘 되냐고 인사치레로 묻는 정태의도, 정태의에게 대답하는 그 남자도,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전에 함께 왔던 그 유쾌한 친구는 어때,
물건은 잘 쓰고 있다던가? 품질에는 틀림이 없었을 거야.거 몇 마디 이야기 나눠보니까 물건 제대로 쓸 줄을 아는 친구더만."
간결한 인사를 몇 마디 나눈 뒤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한 순간 정태의는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탓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라면 UNHRDO의 제 방구석에 박혀서 그 이쁜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희희낙락하고 있겠죠,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글쎄요,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라며 얼핏 웃어 보였다.
이쁜이 좋아하네, 언제 한 번 날잡아서
그놈의 방구석을 샅샅이 훑어서 그 무기들 긁어모아다가 황산이라도 확 들이부어버려야지.
사실 모러에 대한 원한 때문에 정태의는, 일레이가 자신을 이 호텔에 집어넣어 두고 UNHRDO 지부로 가려고 했을
때 그를 붙잡고 말했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엔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그래, 그때 일레이는 꽤
기묘한 얼굴을 했었다. 갑자기 정태의가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하니까 몹시 의외였던 모양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정태의를 한동안 바라보았지만 그 이유가 좀처럼짐작이 가지 않았는지 '왜.'라고 짧게 물었었다.
'모러에게 볼일이 있거든.'
정태의가 사납고도 진지하게 말하자, 그제야 일레이는 납득한 모양이었다. 아하, 하고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더니, 이내 딱 부러지게 말했다.
'안 돼. 너는 이미
UNHRDO의 외부인과 다름없는데, 너도 알겠지. UNHRDO는 특정 사유가 없이는 외부인 출입금지다.'
'아니, 모러 그 놈만
한 번 보고 살짝 나올 거라니까. 딴 짓 안해.'
말을 꺼내고 보니까 더 열불이 솟아서 일레이의 옷자락을 콱 틀어쥐었다. 일레이는 그 손을 흘끔내려다보더니 냉정하게 떨쳐내어 버렸다.
'규칙은 규칙이야.'
얼음이 뚝뚝 떨어지도록 차갑게 말하는 그 입을 붙잡고 흔들어주고 싶었다.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규칙을 잘 지켰다고.
사납게 노려보는 정태의의 시선 속에서 일레이는 주름진 옷깃을 손끝으로 털어내며 덧붙였다.
'게다가 따지고 보자면 나는 그 놈 덕분에 네 소재를 파악할
수도 있었던 셈이니.'
그래, 바로 그 점에 정태의의
원한이었다. 잡아서포를 떠도 시원치 않을 그 엄청난 원한이, 당연하게도
일레이에게는 전혀 원한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 놈 때문에 내가 네놈한테 도로 잡히고 말았잖아! ――――라고 일레이에게 원한을 토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태의가 속으로 분을 삭히며 씨근거리고 있으려니,
객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일레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그 시제품이 없었더라면 필경 그놈은 네놈 소재를
알면서도 내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테지. 네놈이 납치되기 전에도 그놈, 지부에 정기연락을 하면서 그 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않았었단 말야.'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래, 총기에 대한 그 광적인 욕심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모러는 정태의의
소재를 일레이에게 알리지는 않았을 거다. 아무리 사이가 험악했다고 하더라도, 그럴 만한 인간은아니었다. 일부러 정태의더러 엿먹어보라고 일러바친 건 아니다.
그런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이었다.
망할 녀석, 하고 투덜거리는
정태의를, 일레이가 흘끔 돌아보았다. 부루퉁하게 부어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는 갑자기 손을 뻗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 다가왔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움칫 물러서고 말았다. 의식하거나 생각하고 한일은
아니었다. 정말로 반사적이었다. 여태 한동안 일레이의 옆에 있으면서
저 하얀 손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긴장하지 말라는 편이 무리였다.
반걸음쯤 물러선 것과 동시에 정태의는 내심 아차 싶었다. 뻗어오던 손을 멈추고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일레이의 저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실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너 같으면 물러서지 않겠냐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단순히 생존 본능이 살아 움직였을 뿐인 걸
어쩌라고. 아니지, 네놈이라면 물러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맞공격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아예 그 손을 잘라내어 버렸을걸.
들리지도 않을 변명을 속으로 줄줄 늘어놓으며 정태의는 겸연쩍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멈칫 멈춘 손을 천천히 뒤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새끼손가락부터 천천히 구부려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사람 하나쯤 때려잡기에 딱 좋을 주먹이었다.
'아니, 별 뜻은 없었거든.
난 그냥, ……. 어우, 너라면 너 같은 놈이 손 내밀면 얼씨구나 목 따 가라 하고 들이밀겠냐!'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정태의는 얇고 찬 시선이 다가오자 울컥해서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십중팔구는, 이 주먹을 한 번 휘둘러볼까 말까 하는 고민이었을 거다.
정태의의 생각이 옳았는지 그 뒤로도 몇 초쯤 아쉽게 주먹을 바라보던 일레이는 다시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그 손바닥으로 도로 정태의에게 뻗었다. 이번에는 조금 움칫하긴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주 약간 고개만 뒤로 빼면서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
목 바로 앞까지 내민 손바닥을 쳐다보면서 정태의가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짧게 말했다.
'목. 들이밀어 보라고.'
'…….'
말실수했다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목을 따버릴 생각인가.
정태의는 가만히 그 손을 노려보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 이토록 흉흉해 보이기는, ……처음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낯익은 손이라 해도 그 흉악함이경감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로 묵묵히
있어도 그가 손을 거둘 것 같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찼다. 그리고
마음껏 조르라는 듯, 자포자기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끝에 목이
닿았다.
그리고 그때.
능히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그 손이 정태의의 목을 움켜쥐었다. 경동맥 조금 아래를 짚은 억센 손가락에 순간 숨이 막혔다. 절로 낯을
찌푸리며 밭은 숨을 내뱉은 순간. 거침없이 목을 잡아당긴 일레이가 다른 손으로 정태의의 턱을 쥐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서슴없는 손길에서, 이 남자의 심사가 그리 편치 못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태의는 숨을 삼켰다. 자신의 입을 뒤덮는 일레이의 입이, 숨결 한 올 새어나갈 여지도 가로막고 있었다.
숨을 쉬든 말든, 그대로 숨이 넘어가든 말든 아랑곳 않겠다는 기세로 정태의의 입안
깊이 혀를 들이민 그는 저도 모르게 도망가려는 정태의의 혀를 빨아들여 세게 깨물어버렸다. 악,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지만 그 소리마저 그가 삼켜버린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어느 결에 등을 쓰다듬으며 타고 내려가 정태의의 엉덩이에 닿았다. 잡아뜯을 기세로 두어 번 거세게 움켜쥐는 손길에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뺐다. 앞에 서있던 일레이와몸이 바싹 붙었다. 뭉클하게 닿은 샅 쪽으로 더욱 끌어당기듯 정태의의 엉덩이를
다시금 움켜쥔 일레이는, 샅을 문지르듯이 느릿하게 허리를 한 번 비빈 뒤에야ㅡ명백히 정태의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걸확인하고서ㅡ, 어느 순간 손을 놓았다. 두 손 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태의에게서 떨어졌다.
정태의는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면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입가를 닦으면서 숨결을 고른 정태의는 사납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계를 보고 있었다. 홍콩에서 UNHRDO 아시아 지부로 뜨는 마지막 배를 타려면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순간 번뜩 정신이 든 정태의는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슬쩍 부풀어오른 기미가 보이는 일레이의 바지 앞섶과 남은 시간 사이에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못마땅한 듯 일레이가 한 번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간의 여유도 채 없는 시각을
확인한 정태의는 순간 선뜩해졌던 심장이 다시 안도로 가라앉는 걸 느끼며 가슴께를 두드렸다.
'……빨리 가. 뭐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규칙이라니 할 수 없지.'
모러고 뭐고 자신의 몸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제 몸을 해쳐가며 원한을 갚을 만한 집요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다행이다.
5분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도 이놈은 필경 한 번 박고 나서 가겠다고 덤볐을 거다.
어서 가라, 어서 가.
빨리 가버려.
정태의는 내심 소금을 훨훨 뿌리면서도 한편으로는이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냐마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성격 가운데 하나가 이거였다. 때로ㅡ주로 이런 경우에ㅡ일레이는
뱀처럼 싸늘한 그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탐난다는 듯 정태의를 쳐다볼 때가 있었다. 대부분은 아래가 당기는
경우와 겹친다. 그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한을 갚으려고 그 상대에게 굴욕을 주는 방편으로반강제적인 성교를 택한다는 방식 자체도
매우 내키지 않지만ㅡ뭐 사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정태의가 치떨리게 굴욕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ㅡ, 그 방식은 동시에, 결국 자신도 원치 않는 상대와 섹스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 그게 좋냐? 좋아?!
정태의는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물었다가 재수 없게 저 놈이 '아하, 그렇군. 그러면 다른 놈에게 시켜서 네놈을……', 이런
말을 지껄였다간 낭패다.
정태의가 객실 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늦겠다, 어서 가'라고 사뭇 걱정스러운
척 말하자 일레이는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부풀어오른 사타구니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하얀 손이 문득 멈추었다.
'아주 희색만면이시군. 시간이 넉넉지 못하니 그렇게 좋은가?'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희미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젠장. 난 이놈이 웃으면 어째 등꼴이 오싹하더란 말야.
정태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생각을 배신하지도 않고 일레이는 벨트 버클을 풀었다. 철컥, 쇳소리가 객실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퍼스너까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시간은 부족했다.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었다. 도저히 침대에서 뒹굴 만한 시간은 빼지 못한다.
'어이, 너 오늘 안에
지부로 돌아가야…ㅡ.'
'아아. 돌아가야지.
금방 갈 거야. ―――그래, 모러에게 볼일이
있다고 했었지? 내가 그 볼일, 네 대신 봐주지. 돌아올 때엔 네놈에게 선물을 갖다주겠어. 그러니 넌 여기서 기다리면서 며칠 쉬고 있어.
어차피그 뒤로는 못 쉴 테니까.'
'그래, 다 좋은데,
너 시간 없…ㅡ.'
'빨아.'
열어젖힌 앞섶 사이로 반쯤 고개를 든 물건을 가볍게 쥐고 흔들면서 일레이가 심상한
투로 말했을 때,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시간 없으니까 간단하게 마치자고. 입 벌려.'
'야, 인마.
너 지금 그걸…ㅡ.'
'시간이 급해질수록 마음도 급해져서, 나도 모르게 우격다짐을 하게 되거든. 그러기 전에 서로 좋게 끝내야지. 그나마 아직 구음을 할 만한 여유는 있으니까.'
외출하기 전에 물 한 컵 마시고 갈 만한 여유는 있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투로 말하면서 다가오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경악스런 얼굴로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손을 뻗어 정태의의 어깨를 내리누르려 했을
때, 정태의는 발작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며 외쳤다.
'서로 좋긴 뭐가 서로 좋아! 너만 좋잖아!'
'아?'
눈썹을 치켜올리며 짧게 중얼거린 일레이는 이내 아하, 하고 피식 웃었다.
'그래, 듣고 보니
딴엔 그렇군. 좋아, 다음 번엔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네가 이해해라. 입 벌려. ……깨무는 척이라도 했다간 턱을 부숴버린다.'
'잠깐, 이자고 뭐고
필요 없어, 난 됐, 어이, 잠깐,
잠…―――――!'
정태의는 그때 자신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당황으로 시작해서 반울음과 욕설이 뒤섞여 웅얼거리는 신음소리로 끝났던 걸 아주 환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 물건은 원래가, 자꾸 매만져주고 잘 품어줘야온전히 자기 가치가 되는 법이거든. 처음에는 좀 안맞다 싶어도 좀
자주자주 접하고 친해지면 자기한테도 딱 맞게 된다고."
"맞긴 뭐가 맞아요, 목구멍 찢어질 뻔했는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눈앞에서 깜짝 놀란 듯 입을 다물고 눈만 껌뻑거리는 브로커를 보고 아차 했다.
"아니,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요즘 조금……일이 있어서요."
중얼중얼 대충 둘러대면서 정태의는 말을 얼버무렸다. 무심결에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귓불까지 뜨끈해져
있는 체온을 느끼곤속으로 욕설을 쏟아내었다.
기억이라는 건 머릿속에서 얼른 지워버리려고 하면할수록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법이라, 정태의는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거울을 볼 필요도없이,
지금 자신의 얼굴이 그야말로 볼 만하리라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온통 벌겋게
달아오른 건 물론이고, 울상을 지은 표정도 남부끄러운 모습일 게 틀림없었다.
입매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이었지만, 정태의는 공연히 턱 주위를 문질렀다.
젠장.
거대한 살덩이가 단숨에 목구멍까지 두들긴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젖을 두드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는데 구역질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욱욱거리면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가능했더라면 정말로 뒷일이고 뭐가 생각지 않고 콱 물어뜯어버렸을
거다.
그러나 그 낌새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ㅡ혹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는지ㅡ정태의의 입을
벌리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태의는 말소리마저 막혀버린 입으로,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지만 더럭아프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 우악스런 손아귀에 아래턱이 윗턱과
분리되는 줄 알았다.
그때의 기억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젠장. 애써 잊으려고 노력해서
다소 까먹어버린 참이었는데 다시 생각나고 말았다.
정태의는 그대로 있다가 입맛에 남았던 맛이며 냄새, 온도 따위까지 떠올랐다간 정말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러다가 번뜩, 형형한 눈으로 브로커를 쳐다보았다. 의아한 빛으로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던 브로커는 갑작스레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거 오늘 안색이 좀 안 좋아보이누만……?
괜찮은가?"
"아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일은 요즘 잘 되세요? 얼핏 듣기론 요즘 단속이 심해졌다는 것 같던데,
힘드시겠어요."
정태의는 화제를 돌렸다. 뭔가 얼른 화제를 만들어 집중하는 편이 백 배 나을 듯했다.
"단속 그거 해 봤자지. 전혀 쓸모 없는 잔챙이나 좀걸릴까, 나 정도 되면 바로 이 자리에 공안이 뜬다 해도 아무렇지
않아."
브로커는 정태의의 화제에 무난하게 따라왔다. 손을내저으며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옆에서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약간은 허풍기가 있는 사람이니 저 말도 약간은 깎아서 들어야겠지만, 이런위험한 일을 하면서 같은 자리에서 종종 약속을 잡곤 하는 걸 보니 분명 믿는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 믿는 구석 하나쯤 없이는 발 들이기 어려운 업계였다.
급사가 차를 가져왔다. 조금 전에 앉아 있던 테이블쪽으로 가던 그에게 손짓을 해서 이쪽으로 불렀다.
정태의는 브로커의 앞에 이미 놓여 있는 찻잔으로 흘끔 시선을 주면서 자기 몫의 찻잔을
집어들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더니 이야기가 떠버렸다. 흩어져버린 화제가 허공에서 맴돈다. 역시 아무 이야기나 줄줄 늘어놓아도
위화감이 없을 만치 친한 상대가 아니라면 둘만 있는 상황은 그리 편하진 않았다.
그나마 이런 데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닌 정태의는 뭐 어때,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은 도리어
상대 쪽이었는지, 앞에서 브로커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아. 그럼 제가 자리를 옮겨야…ㅡ."
정태의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넋을 빼놓고 있느라 미리 짚지 못했다. 온사방에 다 알릴 만한 거래가
아닌 이상은 다른 사람이이 자리에 섞여 있을 까닭이 없었다. 거래인이 내키지 않아할 것도 뻔하다.
그러나 정태의가 일어설 기색을 비치자 브로커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아직 약간 정도는 여유가 있으니까 마시던 거나 다 마시고 가게. 내가 좀 일찍 오긴
했거든."
"하아, 예……."
정태의는 반쯤 일어서려다가 조금 머뭇거린 뒤 다시 앉아버렸다. 어차피 혼자인데 테이블을 옮겨서 홀로차를 마시고서 일어나기도 뭣하고, 그냥 얼마 뒤 그 거래인이 온 눈치가 보이면 그때 일어나서 객실로 가자 싶었다.
"그런데 뭐……요즘 괜찮은 물건은 있나요?"
정태의는 받침에 내려놓은 찻잔을 습관적으로 약간 돌리며 흘끔 브로커를 보았다.
어떤 물건을 거래하러 왔냐고 묻는 것은 금기였다. 그래서 보통은 돌려서 묻곤 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렇게 돌려서 물어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았고 그가누구에게 뭘 팔든 개의치 않았다. 대규모 무기 밀매까지 눈앞에서 빤히 본 바에야
개인적으로 소소하게무기 거래를 하는 정도는 이제 이런 데에서 차 한 잔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데이 익숙해지다니 인간적으로 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며 정태의는 속으로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러니까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하는 거지.사람이 저 혼자 악해지는 게 아니라니까.
정태의가 그저 무심하게 말이나 이으려고 물어본 말을, 브로커는 다소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가 누구에게 어떤 물건을 파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모양인지, 당장 그 방향으로 오해한 듯하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아니, 오늘은
뭐 그리 대단한 거래는 아냐. 누가 여권 하나 구해달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좀."
"여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정태의는 멈칫했다. 씁쓸하고안타까운 기억이 떠오른다.
완벽한 신분증을 수백 개 가진들, 재수 없으면 어디서든 걸린다니까. 여권을 구해달라고 한다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장 이 브로커가 남의 장사 방해하나고 도끼눈을 뜨지 싶다.
"……."
이제 와서 새삼, 새로 신분을 하나
꾸며내서 다시 같은 방법을 시도해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도망을 시도해 보면 모를까.
똑같은 방식은 똑같은 결과를 낳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여권이라……. 쓸 만해요?"
정태의는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며 나직이 물었다. 브로커는 음? 하고 눈을 치켜뜨더니 "그럼, 물론이지!"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디 볼 텐가? 하고 품속을 뒤적이는 게, 아예 보여주기까지 할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유가 있어서 만든 위조여권일 텐데 모르는
사람에게 막 보여줘도 괜찮아요……?'라는 물음을 삼킨 정태의는 브로커가 내미는 빨간색 여권을 받아들였다.
일전에 숙부가 마련해줬던 신분은 완벽했다. 사실 정태의는 위폐나 위조신분증을 봐도 금세 구별할 만큼 눈썰미가 좋지는 않아, 어지간히 서투른 물건이 아니라면 어떤 게 훌륭한 위조이고 어떤 게 어설픈 위조인지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태의는 손에 든 이 여권이 과연 브로커가 당당히 자랑할 만한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넘겨보기에는 진짜 같은데……, 전문가는 뭘로 구별하는지 몰라.
정태의는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위조 신분이라. 기본적으로 작은 나라, 특히 독자적인 언어가 있는 작은 나라 출신인 사람에게는 제한이 큰 방법이다. 정태의만 해도,
형의 영향도 있어 어릴 때부터 외국에 종종 드나들었기 때문에 영어도무난하게ㅡ제법 유창하게ㅡ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발음이나 억양이 네이티브와 차이가 났다.
"역시 어려 번 써먹을 만큼 좋은 방법은 아냐……."
정태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하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이런 거, 괜찮게 해서 하나 만들려면 어느 정도나……."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등 뒤, 정태의의 어깨 너머에서
손 하나가 뻗어나왔다. 말끔한 감색 장갑을 낀 손이 우아하게 정태의의 손에서 그 여권을 빼내었다.
"왕리밍? 어지간히 언어가 유창하지 않다면, 타국적으로 위조하는 건 관두는 게 좋아."
팔락팔락, 여권을 넘기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느릿하고 평연한 그 목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정태의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았다.
"게다가 이런 걸로는 공항 게이트를 넘기도 전에
공안 구경을 먼저 하게 될걸. 구하려면 제대로 된 걸로구해야지. 꼭
필요하다면 내가 괜찮은 쪽을 소개시켜줄 수도 있는데, 태이?"
"……나중에 부탁하지. 지금은 '전혀' 필요 없거든. 그냥, 이런 건 얼마나 하나 궁금했을 뿐이야. 뭐든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정태의는 '전혀'를 강조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결코 그 말에 거짓은 없었는데 이 상황에서 이 말을하려니, 자기 귀로 들어도 굉장히 거짓말처럼 들린다. 봐, 보라고, 재수없으면 이렇다니까. 신분증을 아무리 훌륭한
걸로 구해서 갖고 다닌들, 운수 사나우면 당장 이 꼴이라고.
정태의는 어느새 소리도 없이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던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씁쓸하게
혀를 찼다. 저 단정한 감색 장갑이 유난히 심상찮아 보였다. 저 장갑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흠뻑 젖어 버려질 텐데,모쪼록 저걸 적시게 될 사람이 자신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본 적이 있다곤 해도 여전히 낯선 양복 차림의 일레이는 무심한 눈으로 여권을 몇 번
뒤적이다가 흘끔,정태의 건너편에 앉은 브로커에게 시선을 주었다. 브로커는 움칫 몸을 움츠리더니 불안스레 정태의와일레이를 번갈아 보았다.
"이, 이쪽
분은 혹시……."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브로커는 도중에 말을 흐렸지만, 일레이를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일레이에게서는 전혀 그런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아, 예전에
저와 같이 UNHRDO에 있었던 일레이…ㅡ리그로우입니다."
일레이, 까지 말한 정태의는
흘끗 일레이의 눈치를 보곤 풀네임을 밝혔다. 어차피, 부르지만 않을
뿐 그의 풀네임이 비밀은 아니었다.
"아, 역시!
T&R에 계시는 리그로우 씨로군요. 저, 저는 예전에 한 번 형님을 뵌 적이 있…ㅡ."
"이놈한테 위조여권 넘기시려고?"
반색을 하며 브로커가 막 이야기를 꺼내었지만 일레이는 듣는 척도 않았다. 따분한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중얼거린 일레이는 여권을 브로커의 무릎팍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정태의를 보며 심사하게 물었다.
"이놈은 아니지, 네놈한테 여권 만들어줬던 거?"
"음? 어,
아닐걸."
아마, 라고 덧붙였다.
사실 정태의도 여권을 만들어준 장본인을 본 적은 없었다. 숙부가 알려준 통로로통해서
완성된 신분증을 받기는 했지만, 감히 아무나 만날 수 없다는 그 '장인'이 이 브로커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하긴
정창인이 소개시켜줄 만한 사람쯤 되면이 따위를 팔고 다니진 않겠지. 게다가 나는 요 얼마간 정신없이 바쁘다가
이제야 겨우 한가해져서 기분이 퍽 좋단 말야. 당신 오늘 목숨 건졌군. 가 봐."
일레이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한 어조였다. 시선조차 주지 않고 중얼거려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말인 줄도 몰랐던 브로커는 잠시 멍하니 눈을 껌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읆는다고, 정태의는 대번에 낯을 찡그렸다. 아마도 리그로우를 알긴 알되 제대로는
모르는 게 틀림없는 브로커가 아직도 눈치를 못 챘는지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리그로우는 아무렇지
않은 손짓으로 한 번 장갑을 매만졌다.
"…ㅡ전 그럼 이만!"
정태의는 단숨에 차를 들이키고 찻잔이 깨어져라 받침에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모르는 척리그로우의 앞을 막아섰다.
경련이 일 것 같은 얼굴로 억지로 웃으면서 정태의는 브로커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저도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이만 가봐야겠군요.
오늘 거래 잘 성사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뵙죠."
"응? 아,
아아, 그래, 그런데…ㅡ."
엉겁결에 대답을 하면서도 브로커는 아쉬운 듯 리그로우를 흘끔거렸다.
그래, '거물'의 동생이 눈앞에 있는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겠지. 게다가 이놈도 나름대로ㅡ일각에서는
오히려 제 형보다도 더욱ㅡ유명하지 않은가. 유명인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ㅡ젠장, 하지만 왜유명한지는 알고 있어야지, 이 양반아ㅡ,
정태의의 선량한 마음은 이 브로커를 도우라고 말하고있었다.
정태의는 일레이의 그, 장갑을 매만지던 손을 가만히 잡으면서 짐짓 환하게 웃음 지었다.
"객실로 가자. 그렇잖아도 할 말도 있었는데."
"……."
일레이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정태의의 머릿속으로어떤 생각이 굴러가는지 이미 짐작이 간다는 듯, 얼마 사이를 두지 않고 그
입술에서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
할 말이라는 게 뭔지 궁금은 하지만, 그보다 좀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으니 조금 있다 올라가보도록 하지."
일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움켜쥔 정태의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UNHRDO도 아니야. 치외법권이 아니라고.
호텔 한가운데서 사람을 죽――――."
"……."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듯, 일레이는 입끝을 보일 듯말 듯 치켜올리고서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웃음은 필경 비웃음이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태이, 네놈이 들고있었던 저게 제대로 된 여권이었더라면 몰라도, 저런 어설픈 물건을 팔고 다니는 잔챙이에게 굳이 손을 댈 만큼 나는 극악무도하지 않아."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면서 일레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말인데도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안타까울뿐이다.
옆에서 어설픈 물건이니 잔챙이니 하는 말을 들은 브로커의 얼굴빛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졌지만, 그는 그게 바로 전화위복이라는 걸 알지못했다. 제대로 된 훌륭한 물건을 파는 거물 위조범이었더라면
그는 오늘 재수 없으면 죽을 뻔했다.
요 얼마간 줄곧 운수 사나운 정태의와는 달리, 브로커는 몹시 운수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마침 그의 거래인인
듯한 사람이 왔는지, 그는 아쉬운듯 정태의와 일레이를 번갈아 보면서도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 브로커와 낯선 중년 남자가 저만치 걸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일레이와
대치하고 있던정태의는, 그가 모습을 감춘 뒤에야 한숨을 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없던 피로가 몰려오는 것같았다. 정태의는 빈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건너편자리에 일레이가 앉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여기 있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물론 연락 한 번 없던 남자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이유를, 정태의는 그제야 물었다. 일레이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짧게 반문한다.
"금요일이니까. 그새 잊었나?"
그저께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언제나 주말만 되면 회사 일을 보기 위해 섬에서 나와 홍콩으로 왔었다.
일레이는 급사를 불러 마실 것을 주문했다. 메뉴판을 두드리는 그 손짓이 경쾌했다. 스스로 말한 대로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급사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상으로나마 웃어주기까지 했다.
정태의는 급사가 채워준 물잔을 집어들다 말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냐고 눈짓으로 물어보는
그에게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오늘은
기분이 퍽 좋아 보여서."
"흠…ㅡ?"
일레이는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봐, 역시 기분이 좋아
뵌다니까. 눈매가 약간 휘어졌잖아.
정태의는 괜히 말실수했다가, 모처럼 선선한 기분인듯한 저놈을 쓸데없이 자극하지 않도록 입을 다물었다. 나쁠 것 없다.
기분이 나쁠 때보단 기분 좋을 때가 훨씬 감당하기 편했다. 게다가 며칠만에 보는
얼굴인데 불쾌한 기분이라 좋을 것 없었다.
단 하나 굳이 마음에 걸리는 점을 찾자면.
"그――――장갑 좀 벗지?"
굉장히 흉흉해 보이거든, 하는 뒷말을 삼키면서 정태의가 말했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의외로 순순히 장갑을
벗었다. 저 섬뜩한 장갑 안에 담겨 있다고는 상상도 가지 않는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드러났다.
"그래, 넌
이 손을 좋아했었지. ……아니, 그렇지도 않았던가. 이렇게…ㅡ."
저도 모르게 잠시 그 손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정태의는, 갑자기 그 손이 자신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움칫했다. 반사적으로 약간
몸을 뒤로 물리며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본능적으로 떠오른 경계심을 얼른 갈무리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픽 웃으며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소파에 편안히 기대며 묻는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날 기다렸는지나 들어볼까."
"뭐?"
정태의는 갑자기 이놈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몇 초 가량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조금 전 자신이 브로커에게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아, 그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둘러댈까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 일레이가 즐거이 못을 한 번 더 박았다.
"객실까지 가서 해야 할 말이라는 게 뭔지 궁금한걸."
"어……."
정태의는 우물거리면서 일레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 할 말은 생각해 보면 많이 있었다. 대놓고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이라
그렇지, 언제든 할 말은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반감금 당하다시피한
채로 며칠을 보낸 상황에서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라는 거냐든가, 하다못해 사람을 감시할거면 그 기척이라도 느끼지 못하도록 좀 제대로 된 놈을 붙여놓으라든가.
"아, 그래.
너 말야. 어차피 알고 있잖아. 내가 정말로
감시를 따돌리고 어디로 튈 작정은 아니라는 거."
정확히는 못 튀는 거지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자연히 발목의 아픔도 떠올랐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말 않고,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사람이 심심해서 가볍게 잠깐 따돌려버리고 홀로
한가롭게 산책을 즐겼기로서니, 응? 발목도 성치 않은 환자를 진짜로
두들겨 패고 마취스프레이까지 써서 끌고 가려는 경우가 어딨어. 기껏 나아가던 발목인데,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투덜거리는 정태의에게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차가운 눈동자가 잠깐 허공을 맴돌았지만 그는 곧 담담히 입을 열었다.
"발목도 성치 않은 환자치고는 몇 미터 높이의 구름다리에서
잘도 뛰어내렸다더군. 그 말을 듣고 난 또,다 나은 줄 알았는데."
"그거야…ㅡ그 정도 높이라면 괜찮을 줄 알았으니까뛰었지.
설마 그 정도로 진짜 사람을 때려잡으려 들 줄 알았겠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레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은,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피식 웃고 만다.
"얌전히 호텔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과연."
그는 유쾌한 듯 잠시 나직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때급사가 다가와 테이블 위에 차를 올려두고 물러갔다. 찻잔 위로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정태의는 입매를 약간 찡그리며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웃는 걸까 가늠해 본다. 그러나 주어진 힌트가 너무 적었다.
하다못해, 얼굴에 뭔가묻기라도 했나 싶어 공연히 얼굴을 한 번 쓸어보기도 했다.
일레이는 이윽고 웃음을 그쳤다. 그러나 눈매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네 그 달아나는 솜씨를 기특하다고 해줘야겠군."
"응?"
"구름다리에서 네가 뛰어내린 걸 기점으로,
그 뒤에벌어진 일은 내 소관이 아니란 뜻이다."
정태의는 뚫어져라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흠, 하고 즐거운 듯 숨을 내쉬더니 벗어두었던 장갑을 집어들어
다시 손에 끼기 시작했다. 그 심상찮은손짓을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또 왜 껴."
"아까부터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그게뭔지 이제야 알았거든. 잠깐 기다리고 있어.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올 테니."
"뭐…ㅡ."
그러나 정태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일레이는 가벼우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서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뭐라고 할 여지도 없이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로비 건너편,
데스크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고 있던 남자가 일어서 호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일레이는 조금 웃는 듯하더니 약간 걸음을 빨리했다.
그의 모습도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홀로 남은 정태의는 아연하게 그쪽으로 시선을 준 채
눈만 깜빡였다.
"어……?"
애꿎은 머리만 긁적이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천천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보기 흉한 꼴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나름대로 근거가있는 예감이었다.
정태의는 눈앞에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찻잔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지금 얼른 객실로 가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보기 흉한 꼴을
본다 해도, 만인 환시 속에서 그 사태에 처하는 것과 개인적인 공간에서 그사태에 처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ㅡ그 흉한 참사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것 같은 경우라든가ㅡ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하 성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정태의는 뜨거워 보이는 차를 노려보다가 흘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다시 보일 기색은 없었다. 하긴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붙잡기 힘든 거리였고, 설령 전력질주로 붙잡는다 해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을 터였다. 총으로 쏘아서 다리라도 맞힌 다음에 질질 끌고 오지않는 다음에야…….
그런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얼른 객실로 몸을
피해 있는 게 낫겠다. 아무래도 저 장갑을 끼고 나간 게 심상치 않았다. 정태의는자신이 살인마나 그에 비등한 사람이랑 아는 사이라고 사방에 알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그는 재빨리 지갑이며 웃옷 따위를 챙겨들었다. 어차피 객실은 저놈도 알고 있으니까 돌아와서 자신이 자리에 없으면 그리로 오겠지.
"여기 계산서…ㅡ."
바로 옆을 지나가던 급사를 부르자 급사는 상냥한 웃음과 몇 마디 인사와 함께 정산대를
가리켰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절뚝거리면서 허둥지둥 자리에서 뜨려고 한 정태의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테이블에서 미처 몇 걸음 떨어지기도 전에, 호텔 저쪽에서부터 짤막한 비명 몇 마디와 술렁이는 소리,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급사도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자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급사의 부릅뜬 눈을 보면서 속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 발 늦었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른 척 정산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넋 잃은, 혹은 질린 표정 앞에서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 정적이 자신의 몇 걸음 뒤에서 멈추었을 때, 차마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정태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벌써 차가 식었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달각, 찻잔을 집어올려 한 모금 마시는소리까지, 정적 속에서 고스란히 들렸다.
"역시 아직 안 식었잖아.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태이."
"……."
네가 무슨 관운장이냐, 정태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천천히 돌아섰다.
예상했던 광경이었다. 결코 바란 바는 아니지만 예감했던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일레이는 한 손에
가볍게 쥐고 있던 것을 옆의 빈 의자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털썩,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빈 의자에 늘어지는 것은ㅡ아마도ㅡ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에 젖은
솜뭉치 같았다.
짓뭉개진 얼굴은 사람의 형상을 잃고 있었지만, 저건한 방이다. 하긴 저 주먹으로 두 방 때렸다간 얼굴 뭉개지는 걸로
안 끝났겠지. 팔 '살짝' 부러지고,
다리 '살짝' 부러지고.
안 봐도 그림이 떠올랐다. 미친 듯이도망치는 놈을 잡아서 당장 다리부터 꺾어놨을 거다. 그런 다음에 못 움직이도록ㅡ혹은
움직일 생각조차 안 들도록ㅡ만들어서 질질 끌고 왔을 테지.
저 남자가 느릿느릿 조깅이라도 하듯이 달아난 것도 아닐 텐데 그 거리에서 이렇게 금방
따라잡아 끌고 오다니, 역시 이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일 수가 없었다. 정태의는 다음에 카일을 만나게 되면, 정말로 그 회사의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게 무기 분야인지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레이는 군데군데 시커멓게 젖어 물들어 있는 장갑을 벗어 그 남자 위에 팽개치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직도 따뜻하게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찻잔을 집어들어 입술을 축였다.
"……."
정태의가 우두커니 서서,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흘끗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리도 불편하다면서 왜 서 있어."
"……. 생명이
경각에 달려 일분일초를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한 자리에 앉을 기분은 별로 들지 않아서."
정태의는 으윽,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남자가 늘어져 있는 의자 위로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일레이는 하하,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니야, 머리를 좀 다쳐서 피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거든. 목숨에는 지장이 없도록 병원에 보낼 거야. 그 전에 이놈한테 하나만 물어보고."
정태의는 의자 위에 고인 핏물을 노려보았다. 피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유감스럽게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혀를 차며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정태의는 마뜩찮게 중얼거렸다.
"물어볼 게 있으면 빨리 물어 봐.
난 얼른 객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정태의는 과연 이 남자가 대답을 할 수는 있을까 다소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공안이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싶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태연하기 그지없게, 일레이는 약간 몸을 돌리더니 저만치 떨어진 기둥 옆에 서 있던 한 남자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남자가 자신을 쫓아다니던 감시 중 하나라는 걸 알아본 정태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번뜩, 바로 옆에서 피투성이로 늘어져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보니, 얼굴의 형상이 터무니없이 일그러져 있어서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저께 자신을 쫓아왔던 그 남자다. 스프레이를 꺼내어 들었던.
"어……."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그 앞에서 일레이는 차를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누가 이렇게 너를 열렬히 쳐다보나 했지.
너는 또 어디서 이런 꼬리를 붙이고 온 거야."
"네가 붙인 거 아니었어?"
정태의의 물음에 일레이는 대답 대신 기둥 옆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피투성이남자를 쳐다본다.
"그럼 이놈은 뭐야."
"그래, 이제부터
그걸 물어보자고. 오래 걸리진 않을테니 그것만 물어보고 객실로 올라가지."
일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절한 듯이 늘어져 있는 남자에게 심상하게 물었다.
"누가 이놈 따라다니라고 시키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정신을 잃은건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기절한 거 아니야? 설마 죽…ㅡ."
"죽지도 않고 기절도 안 했어. 기절하면 곤란하니까 잡아서 다리를 부러뜨리자마자 각성제제부터 들이부었거든. 성분에 문제가 좀
있어서 시판되지는 못하는거지만 약효가 아주 괜찮아서, 한동안은 잠도 못 잘걸. ……수술할 때 힘들겠군.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정신 말짱한 채로 부러진 뼛조각 맞추려면 고생 좀 하겠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라고 눈 하나 깜짝 않고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삽시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미처 생각을 못 했을 리가 없었다. 과연 기절하지는 않은 듯한 남자가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움찔거리자일레이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픽 웃었다.
정태의는 파래진 입술을 쥐어뜯으며 입을 다물었다.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놈한테 원한을 샀지, 사람을 산 채로 포를 떠낼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알면서 내가 왜그랬을까, 정태의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입 속으로 한탄을 읆조렸다. 그러는 동안 일레이는 혀를차더니,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누가 이놈 따라다니라고 시켰냐고 물었잖아.
아니,정확하게는 기회 봐서 이놈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끌고 오라고 했을 테지만."
"……."
"……. 내
참. 세상엔 머리 나쁜 놈이 참 많이도 있단말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를 잠깐 쳐다보던 일레이는혀를 찼다. 그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였다.
불안스레 술렁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부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가운데, 남자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흠칫 몸을 움츠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녀린 비명소리가 덩달아 두세 차례 이어진다. 저만치서 호텔측 사람인 듯한 남자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쪽은 본 척도 않고, 일레이는 부러져서 너덜거리던남자의 팔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놓은 손으로 그의 뺨을 두어 번 두들겼다.
"한 번. 한 번만 더 묻는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네가 이제부터 갈 곳은 병원이 아니야.
객실이다. 객실에 나랑 같이 오붓하게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를나눠보자고.
사람 몸에 뼈마디가 몇 개나 있는지, 몸속의 장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알아보면서.
응?"
담담하게 웃으면서 평연하게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정태의의 귀에까지 들렸다.
정태의는 입술을 쥐어뜯고 또 뜯으며 복잡한 얼굴로그 남자를 보았다. 감시를 왜 붙였냐고 말을 꺼낸 게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갔더라면 이 꼴은 안 났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그게 이놈이 붙여놓은 건지 딴 놈이 붙여놓은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놈이 아니면 세상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하릴없이 자신의 뒤나 쫓으라고 할까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이, 일레이,
이거 혹시 애먼 사람 잡는 건…ㅡ."
뭔가 오해가 있어 엉뚱한 사람을 잘못 잡았다간 그 무슨 천벌 받을 짓이란 말인가 싶어ㅡ물론
오해가 없다 해도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으면 필시 천발 받지 싶었다ㅡ정태의가 말을 섞었지만, 돌아온 것은 어이없는 비웃음이 담긴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남자의 턱을 가볍게 틀어쥐었다. 가볍게, 라고 해도 저 하얗고 아름다운 손의 악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정태의는 일그러지는 남자의 얼굴에서 가만히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럼 다시 묻지. 누가 시켰어."
일레이가 나직이 물었다. 격앙되지도 않고 평온한 말투와 표정은, 바로 앞의 저 피투성이 남자를 붙잡고 있지만 않았다면
어디에나 있는 온유한 청년이라 해도 좋을 법했다. 필경 저 얼굴에 속은 사람도 많았을테지만,
적어도 저 남자는 아니었다.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담담하기만 한 일레이를
보며 푸르스름한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그 입술은 어쩌면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혀끝이 질려서 말이
나오지않는지도 몰랐다.
일레이가 그를 위해 기다려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눈을 한두 번 깜빡이는 동안이었을까.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옆으로, 그때야 한발 늦게 호텔의 매니저인 듯 말끔한 제복을 입은 사람이 달려왔다. 그 뒤로 건장한 남자 서넛이 따라왔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잠시…ㅡ."
"전화로――――."
그러나 일레이는 제복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짤막하게 말을 잘랐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던 그는 일레이의 말에 입을 다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연락이 갔을 텐데. 아직 지시가 제대로 안 내려왔나?그러면 말해두지. 이건
'친구끼리의 사소한 다툼'이니까 전혀 신경쓸 것도, 걱정할 필요도 없어. 친구와화해를 해야 하니 객실만 하나 내놓으면 돼."
일레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네 객실에 피비린내가 나는 건 싫겠지?"
"당연하지."
정태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했다. 그 객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는 차에 자신이 머무르는 방을 내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복 남자는 태연자약한 일레이의 태도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간에희미하게 주름이 갔다. 호텔에서 행패를 부리는 소란꾼을 보는
눈이었다.
"죄송하지만 당 호텔의 방침상 손님이 바라시는 점을들어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 전에 공공 장소에서의 소란은…ㅡ."
국어책을 읽는 듯 딱부러지는 말투로 제복 남자가 말을 하는 옆으로, 그 뒤를 따라온 건장한 남자들이 일레이의 양옆과 뒤쪽으로 돌아갔다. 충분히
위협적일만도 했지만, 물론 일레이는 눈하나 까딱 않았다. 그저 귀찮은
듯 입매를 찡그렸을 뿐이다.
"태이. 혹시
장갑 여분 가진 것 있나?"
일레이가 불쑥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정태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없지……. 난 더 이상 네 교위가 아니라고. 뭐 하러 장갑 여분을 가지고 다니겠어."
오늘 이놈이 사람 하나 잡는 걸로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이미 지금 현재만으로도 공안이 달려오기 일보직전인데, 사람을 몇 이나
잡으려고 저러나.
정태의는 제복 남자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시선이 자신에게까지 쏟아지는 걸 민감하게
느끼며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은 이 미친놈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저만치서 사이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안차인지 앰뷸런스인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일레이의 앞에 늘어져 있던 피투성이 남자의 얼굴에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겨우 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거기까지였다.
제복 남자의 품속에서 핸드폰이 울림과 동시에 남자의 희망은 깨어졌다.
전화를 받고서 '예,
지금 로비입니다. 잠깐 소란이 있어서요. 금방
정리하고 가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던 제복 남자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기묘한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네, 네,라고 전화에 대고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점차 낭패스러운 빛을 띠었다. 일레이의 주위로 다가서는 건장한 남자들에게 얼른 내젓는 손길에 초조함이 담겼다.
"나 먼저 방으로 가 있으면 안 될까."
정태의는 그러라는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중얼거렸다. 이미 UNHRDO에서 일레이의 교위를 했을 때부터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은 한층 각별했다.
"금방 끝날 거다. 뼈마디마디 모조리 부수는 데에 그리 시간 많이 걸리지 않으니. ―――리우. 공안이면 보내버리고 구급차면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잠깐 올라갔다 올 테니."
일레이는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게 말했다. 그말에 대답한 사람은 건너건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정태의가 그리로
시선을 주자, 역시나 정태의에게 붙어 있던 꼬리 중 하나다. 남자는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돌렸다.
제복 남자는 벌레 씹은 얼굴로 못마땅하게 일레이 주위의 남자들을 물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객실 잡아드려. ……그럼 선생님, 친구분과 모쪼록천천히 대화 나누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저희 호텔의 이미지도 있으니 부디……."
그러나 그 씁쓸한 목소리나 말투와는 달리 얼굴은 상업용의 정중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었다. 저 남자도 나름대로 무서운 남자였군,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갑자기 답답해지는 심장께를 몇 번 두드렸다.
일레이의 연락을 받았는지 로비 쪽에서 달려온 종업원이 건네어주는 열쇠를 받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사색이 되어 시퍼렇게 질려 있는남자를 돌아보았다.
"자. 잠깐
올라가서 조용히 따로 좀 보자고, 친구."
늘어져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가뿐하게 일으켜 세우며, 일레이는 웃었다.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다리를바닥에 질질 끌면서 일레이의
손에 매달린 남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술, 손,
발 따위가 점차 세게 떨려, 나중에는 몸 전체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남자는 치아도 몇 남지 않은 입으로 핏물을 내뱉으며 죽기 직전의 짐승처럼 그륵거렸다.
"리ㅡ…."
남자는 필사적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입을 열 때마다 핏물이 쏟아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일레이는 난처한 듯이
웃더니, 남자의 뺨을 가볍게 한 대ㅡ철썩, 살찢어지는 소리가 나도록ㅡ후려갈겼다.
"못 알아듣겠군."
일레이가 짧게 말하자,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안간힘을 써서 한 마디 한 마디 뱉어내었다.
"링……어르……신……이……."
느릿하고 혀 짧은 소리라 다소 불분명하긴 했지만 알아들을 만은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정태의는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링 어르신……? 그게 누구야."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전혀 들은 바없는 사람이었다. 일레이와는 전혀 별개로 자신을 따라다닌
사람이라고 해서, 정태의는 숙부나 혹은 형 관련으로 누군가 붙었나 했다.
삼촌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고 머릿속을 뒤적여 보는정태의의 앞에서 남자는 제 풀에 질려 열심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리, 링
가……작은 도련……. 저 남자……데려 오라……."
"……?"
남자의 피투성이 손이 정태의를 가리켰다. 피에 흠뻑 젖은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통에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기웃했다.
"나? 아니
그래, 그야 물론 나겠지. 날 쫓아다녔으니까. 근데 그게 누군데."
행방이 묘연한 형을 뒤쫓으려는 사람일까,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태의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웃고 있었다. 입 끝을 아주 약간 올려 웃고 있다. 정태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일레이는 어쩌면 이 남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부터 그 대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ㅡ."
그러나 정태의가 일레이의 이름을 미처 부르기도 전에, '과연'하고 중얼거린 그는 남자의 반대쪽 뺨을 후려갈겼다.
또 한 차례 핏물과 비명들이 터져나왔다.
"제때 대답했어야지. 이미 늦었어……라고 말할까 했지만, 오늘은 기분이 썩 좋거든. 게다가 어서 객실로가고 싶다고 안달하는 놈도 하나 있고. ――――치에. 이 놈 데려 가."
일레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외쳤다. 조금 떨어진 기둥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는
가족이 본다 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린 핏덩이를 들쳐메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돌아섰다.
미묘한 정적과 조금 더 떨어진 곳의 술렁거림 속에서, 일레이는 태연히ㅡ아니 다소 못마땅한 얼굴로, 손에 묻은 피를 떨어내었다.
그러다가 문득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당황스럽고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호텔 제복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가늘고 선명한 시선이 닿자 제복 남자는 흠칫, 자세를 바로 폈다.
여유롭게 그에게 다가간 일레이는,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는 제복 남자의 바로 앞까지가더니 그의 가슴주머니에 곱혀 접혀 꽂혀
있던 하얀손수건을 빼내었다. 천천히 일레이의 손을 훑은 그 비단손수건은 금세 검붉게 물들었다.
"객실 취소해도 되겠군."
일레이는 빙긋 웃으며 더러워진 손수건을 남자의 가슴주머니에 다시 찔러넣었다. 질린 얼굴로 굳어 있는그에게서 돌아서, 일레이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정태의를
향했다.
"그럼 거슬리던 것도 대충 알아냈고,
올라가 볼까."
"……."
정태의는 정말이지 여기서 이 남자와 함께 나란히 자리를 떠서 '저 두 놈은 아는 사이'라는 주위의 인식을공고히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어서 자리를 떠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듯 마는 듯하면서 바로 걸음을 돌려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던
정태의는 가던 도중에 얼핏 테이블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던 브로커와 눈이 마주쳤다. 얼빠진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던 그는 아마도 자신의 행운을 그제야 조금 알아차린모양이었다.
당신은 정말 행복한 거야. 봐, 눈앞에서 사라진 걸 끝으로 이제 다시는 저놈과 만날 일도 없잖아. 나는 이게 뭐냐고. 앞으로 이 호텔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정태의는 일부러 로비에서 멀찍이, 신관 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간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로갔다. 등 뒤로 따라 붙던 숱한 시선들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피냄새가 코 끝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저 자리와는 바이바이인데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정태의의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홀에 서서, 정태의는 십몇 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삼키며 돌아보았다.
"그래. 그래서――――그건
누구야."
"그거?"
"무슨 어르신이라고 했잖아."
정태의는 눈매를 찡그리며 재차 물었다.
이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몰랐더라면 그 남자를그냥 보내주지 않았을 거다. (아니 지금도 물론 그냥보내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링 어르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링가의 작은 도련님이 자신을 데려오라고 했다던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입 안이 망가져 피를 물고 있는 혀는 또렷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 모른다고."
정태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정태의를, 일레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링 가라고 하면 제계에서는 알아주지.
현재 그 집안우두머리는 링훠렁이라는 일흔 먹은 영감인데 그 나이에도 여전히 온갖 방면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완이 좋으면서도
포악하고 욕심사납기로 유명해. 들어본 적 없나?"
"몰라."
"그래? 그럼
그 영감이 쉰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당시 스물도 안 된 어린 계집애에게 한 눈에 반해서 거의 강탈해 오다시피 해서 일곱 번째 마누라로 들여 애지중지한다는
것도모르겠군.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
정태의는 점점 뜬금없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일레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성지에나 나올 법한그런 얘기를, 심지어 20년도 더 되었을 얘기를 정태의가 알 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이 이야기와, 그 링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의 연관성을 찾아보려고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미심쩍게 말했다.
"그 일곱 번째 마누라와 내 형이 내연의 관계라는
말만 안 해주면 좋겠군."
물론, 재의 형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라고 하지만 여자를 꼬시는 주변머리는 없는 사람이었다.
혹여 마음먹고 꼬시려 들었다면 모를까, 정태의가 아는 한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유부녀라니. 게다가 계산해보면 열몇 살이나 연상일
여자를.
농담으로 말해놓고 슬쩍 상상해본 정태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과연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정재이와 그 여자가? 천만에. 그 여자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만 온 정성을 다 쏟고 있단 말이지. 링훠렁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공언한 막내아들 말이야.
심지어는 가족에게까지 은밀히 욕을 먹을 정도로 지독한 그 영감이, 그 모자에게는
아주껌벅 죽거든. 오죽하면 위에 형들이 두 손으로도 겨우 꼽을 정도로 줄줄이 있는데도, 그 막내아들이 작은 도련님 소리를 듣겠어."
"…ㅡ."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문득, 뭔가걸리는 것이 있었다. 희미하게 마음속에서 갉작거리면서 꿈틀거리던 그 의혹이 어느 순간 가슴을 후려친다.
"그, 아들이…ㅡ."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쏟아지는 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일레이는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살짝 가늘어진 눈이 마치 얼굴 구석구석을 핥듯이 쳐다본다.
"풀네임은 잊어버린 모양이지? 무심하다고 그 꼬맹이가 울겠군. 아니, 화를 내려나."
"링――――신루……."
정태의는 얼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실제로 머릿속에서 정신이 반쯤은 빠져나간 것 같았다.
ㅡ게다가 그놈 그래 봬도 혈통이 아주 좋게든. 중국 재계에서 말만 하면 알 정도로 재력이 있는 유수 명문가 아드님이란 말이야.
ㅡ하긴 그놈 집안 자체가 욕심이 많은 집안이긴 하지. 그래도 길상천을 얻어보고 싶다고 덤빌 줄은 몰랐는데.
ㅡ원래 유서 있는 부잣집 아들내미였으니까 집에서뭔가 회사라도 차려주든가 알아서 할
건데 나보다 잘사는 놈을 걱정은 무슨 걱정.
숙부의, 일레이의,
모러의 짤막한 말들이 뒤섞여 기억 속에 떠올랐다. 신루. 링신루. 그 사랑스럽고 귀엽던 아이. 잊었다.
잊고 있었다. 이 남자를 다시 만난뒤로 이제껏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태의는 아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넋이 나갔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한 번도 생각조차 안하고, 그 사랑스러웠던 아이를 어떻게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지냈던 걸까.
"…――!"
정태의는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정신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못 봤다. 정태의가 섬에서 떠나온 뒤 곧바로 신루도 UNHRDO를 그만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당연하게도 소식은 끊겼다.
원망하고 있을까. 한 마디 말도 없이
나왔다. 그래서원망스러워서, 그래서 데리고 오라고 한 걸까.
그렇다면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되었는데. 신루가 찾고 있다고, 그러면 정태의는 순순히 따라갔을 텐데.
그러나 다시 로비로 서둘러 걸어가는 정태의를 뒤에서 억센 손길이 붙잡아 세웠다. 어깨를 세게 움켜쥔손아귀에 정태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초조하게 돌아보자 일레이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 놈은 이미 병원이든 어디든 갔을 테고,
설령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해도 너를 데리고 링 가로 갈 상태는 못 돼."
"거긴 어딘데."
정태의는 곧바로 되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않았다. 그대신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을 뿐이다. 약간 사이를 둔 뒤 느릿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가려고?"
"……."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싸늘한 눈길 아래에서 현실을 떠올렸다.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점령했던 감정도 차차 가라앉는다.
간다면. 다시 신루를 만난다면.
과연 뭔가가 바뀌어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신루는 여전히 정태의가 아는 신루일 테고, 정태의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바뀌는 것은 없다.
하지만 뭔가 할 말은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하지 못한채 남겨둔 말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뭘까,
정태의는 생각하면서 묵묵히 일레이를 마주보았다. 문득 그가 짧게 혀를 차는가 싶었다.
"내 참……. 아주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을 못 차리는군. 정태이. 하나
말해둘까. 장담하는데, 넌 그 집안으로 들어가면 평생 못 나와.
시체 되기 전에는."
정태의의 어깨를 쥔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듯하더니,그 가지런한 손가락이 어깨를 천천히 두드린다. 마치말 안 듣는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처럼.
"안 만날 수는 없어."
한 번은 만나야 했다. 그리고 뭔가 이야기해야 했다.이대로는 계속 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설령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람의 관계란 그렇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맺음 짖지 않으면그 상황은 영원히 이어지는 법이다.
문득 정태의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멈추었다. 일레이의 시선도 멎는다.
"그래……."
일레이는 정태의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가벼이 한숨을 쉬며 약간 물러선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기라도 할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요 며칠 좀 정신 없이 살았더니 머리가 좀
풀렸나 보군.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고."
그는 쯧, 한 번 혀를 찼다.
그리고 사뭇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로――그러나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말했다.
"결론만 간단히 말하지. 못 가."
못 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에도 뭐라고 몇 마디 한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복부 한가운데에 그의 주먹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간신히 이해한 것도, 아픔을인식하고 몇 초 가량 지나서였다.
"…ㅡ."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울컥 토사물이 치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자리에 무너지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가볍게 한 팔로 지탱했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귓속에 지잉하고 이명이 울리면서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틀림없이 뱃속의 장기가 죄다
조각조각으로 부서졌을 것 같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죽어서 다시는 눈을 못뜰 게 분명하다. 반쯤 정신을 잃다시피 한 정태의는 마치 암막 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해 슬라이드 화면을 쳐다보는 것 같은 감각으로,
눈앞에서 땅이 흔들리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태의를 어깨에 들쳐 멘 일레이가
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는 동안,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끔찍하게 아팠다. 아니,
아프다는 감각을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죽음을 실감케 하는감각이었다.
엘리베이터가 객실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낄 즈음에야 정태의는 겨우
입술을 달싹거릴 수 있었다.
"아까 그 놈……진짜 안 됐다……."
자신도 얻어맞아 놓고 이런 말을 하려니 어쩐지 우스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떠올랐다. 차라리 단매에 죽는 게 낫겠다.
정태의는 몸에서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박살난 발목으로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 더 아팠다. 기절이라도하면 편할
텐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흔들흔들, 일레이의 어깨 위에 늘어진
채 '이 놈은 괴물이야. 괴물…….'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태의가 그럭저럭 정신을 차리고 좀 움직일 만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객실 앞에 있었다. 아직도 얻어맞은 배를 움켜쥐고 있는 정태의의
품속에 일레이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넣고 주머니를 뒤적여 카드키를 꺼내어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태의는 걸음을 뗄 때마다 욱신거리는 배를 한 손으로 누르고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그리고 침대로 가서 그대로 풀썩 쓰러지듯이 누워버렸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기척엔 아랑곳 않고 창가로 가서양복 웃옷을 벗어 의자등에 걸쳐놓았다. 넥타이를 마저 풀어 옷 위에 걸친다. 그리고 늘어져 있는 정태의의 옆을
스쳐 미니바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었다.
"……."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근육통처럼 배가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누워 있으면 괜찮았다. 정태의는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상하게 한 마디도 없다. 평소에도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 적당히한두 마디 정도는 던지는 편이었다.
또 무슨 생각에잠겨서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걸까.
정태의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배를 문지른다. 젠장, 어지간히 호되게도 후려갈겼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얌전히 있으라고 그냥 그렇게 말하면 그
말귀 못 알아들을까 봐 친히 주먹질까지 해 주셨나 보다.
정태의는 맥주캔을 들고 창가로 가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일레이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불시에 그놈이 돌아볼 때를 대비해 눈치를 보는 건 잊지
않는 스스로가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던 때였다. 문득 맥주캔을 단숨에
비우고 캔을 창가에 내려놓는가 싶던 일레이는, 갑자기 그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쾅!! ㅡ사나운 소리를 내며, 큼직한 원목 의자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데스크에 부딪혔다. 데스크 바로 뒤의 벽면에 붙어 있던 거울이 와장창 깨어져 조각조각 부서져내렸다.
침대 위에서 배를 문지르고 있던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창가에서 몸을 돌리는 일레이의 표정은 평소와 별 다를 것 없었다. 무심하고, 약간은 나른한 듯도 한 얼굴이다. 그는 거울을 깨뜨리고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의자 쪽으로 걸어가, 의자 프레임을 후려치듯이 내리밟았다.
빠직, 굵은 원목재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바삭바삭, 거울조각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 남자의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은 이미 숱하게봤다.아니, 일상 자체가 비정상적인 인간이었다. 바로 조금 전에도 사람 하나를 백정처럼 때려잡지 않았던가.사람도 그렇게 때려잡는데 물건 좀
부수는 게 뭐 대단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태의는 일레이가 특별한 목적도 없이ㅡ이를테면 탁자 다리를 부러뜨려서 그걸로
사람을 후려갈긴다든가, 흉기를 가지고 덤벼드는 놈을 테이블로눌러버린다든가ㅡ물건에 대고 저렇게
화풀이라도 하듯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화풀이로 물건을 부수기라도 하면 그 편이 차라리 더 인간적이겠지만 별로 그럴
만한 인간도 아니다. 화가 난다면 그 원인을 제공할 사람을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여버릴 게 저
일레이 라는 인간이었다.
"……."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뵈더니 갑자기 왜 아무 데나 대고 발길질이야, 저 놈이.
정태의는 험악한 소리를 피워올리면서도 표정만큼은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레이를 기묘한
얼굴로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울리지 않게 왜 물건에 대고 화풀이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정태의는 아차 싶었다. 잘못들으면 오해할 여지가 매우 큰 말이다. 아니 그렇다고 나한테 대고
화풀이를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고, 라고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해 보면 이놈이 화풀이를 할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정태의가 숫제 도망이라도 쳐서 신루를 찾아봐야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조금 전도, 굳이 주먹질을 하지 않아도 말로 했으면ㅡ어차피 이길 자신도 없으니ㅡ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 놈의 심기가 갑자기 언짢아진 게 자신이 신루를 만나봐야겠다고 말한 것 때문인 듯한데. 그 말은 즉 자신이 신루를 만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저 놈이 자신이나 신루를 좋…ㅡ.
정태의는 잠깐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하나의 가장 손쉬운 가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가설을 떠올리자마자 이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런 인간적인 감성이 있을 만한 놈이 아니다. 더욱이 그 감성은 인간의 숱한 감정들 사이에서, 저 남자의 본성과가장 동떨어진 종류의 감정이었다.
차라리 붕어와 스페이스 셔틀 개발을 묶는 게 더 이해하기 쉽겠다.
그렇다면 뭔가, 자신이 신루를 만나선
안 되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그게 뭘까.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아."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정태의는, 무척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결론에 이르렀다.
아예 자기 말에 토를 달지도 말라는건지도 모르겠다. 제가 얌전히 객실로 가자는데 도로 로비로 돌아가려그래서 심기가 상해버렸다면, 그래, 차라리 그러면 전혀 문제없이 이해가 된다.
저놈의 성질머리하곤, 정태의가 투덜투덜하고 있으려니 거울조각을 밟고 선 채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하하아, 내가 이러면 어울리지않나? 그러면 어떤 게 어울리지?"
웃는 듯 마는 듯 나직이 말한 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정태의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온다. 정태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젠장,
밟았다. 꼬투리를 줬구나.
"마침 잘 됐군. 좀 물어봐야겠어. 나도 요즘 말이야,나한테 어울리는 게
뭔지 모르겠거든. 요즘 들어 상당히 혼동이 오던 참이야. 여태까지는
전혀 그런 게없었는데 요 근래, 여기가 말하는 거랑……여기가 말하는 게……다르단 말야."
머리를 짚은 검지가 심장 위로 내려갔다. 일레이는 가슴에서 잠시 그대로 손을 멈춘 채 난처한 듯 웃었다. 어쩌면
정말로 곤란한 것도 같았다. 그 미묘한 웃음은, 그가 정태의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 하나없는, 인형처럼 무심한 얼굴로 지그시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태이. 너는
때로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을 저지르기도하지만 그래도 제법 머리가 좋거든. 그러니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
머리의 충고와 심장의 충고. 어느 게 옳을까."
"……."
일레이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허리를 굽혀 정태의의 머리 위로 몸을 기울인 그가 조용히 속삭이며 정태의의 목덜미를 쓸어올린다.
조금 전까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던 그 손은 너무도 매끄러웠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의는 문득, 어쩌면 이것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 뼘 가량 위에서 일레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지껏 다른 사람을 거칠게 대할 때 말이야.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그래. 조금 전의 그 남자를 때려눕혔을 때."
"흠……?"
정태의가 진지하게 입을 열자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그때는 머리의 충고와 심장의 충고,
어느 쪽을 따랐어?"
사람의 초주검으로 만들어놨다는 말을 '때려눕혔다'로 대단히 순화해서 말하면서, 정태의는 내심 사람을 그렇게 핏덩이로 만들어놓으라는 충고를 머리가했든 심장이 했든 어느 쪽이라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사람을 작살내든 감정적으로 작살내든 나을 것 없었다. 그래서,
일레이가 어떤 쪽으로대답을 하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다시금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 머리와 심장은 그렇게 이율배반적이지 않아.
대부분의 경우 매우 사이가 좋지. 누군가의 목에 칼을박아넣든 심장을 뜯어내든,
한쪽이라도 반대를 한 적은 없었거든."
일레이의 말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양심의 가책이란
걸 모르는 놈이었구나. 내 인생, 어쩌다 이런 놈이랑 상종하게 됐지…….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든 심장이든, 사람을 그렇게나 해치는 데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느 쪽을 따르든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아무 쪽이나 따라. 어차피 내 보기엔 똑같아 보이는 구만.'이라고 대답하면 또 좋은 꼴 못 보겠지.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가, 일레이라는 인간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라면 그럭저럭 맞아떨어질 만한 대답을 했다.
"머리가 낫겠다, 머리가. 아무래도 감정보다는 이성에 맡기는 게,나중에
후회할 여지도 더 적어지겠지."
이성부터가 글러먹은 상태라면 소용없겠지만, 이라고 속으로 덧붙이면서 정태의는 결론을 내렸다.
일레이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중얼거렸다.
"머리라. 감정보다는 이성이 말하는 대로 따르라……?"
"음. 그게
낫다고 보는데."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정태의가 보건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때로 무서워질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정재의와는 다른 방향이다. 사람의 속내를 짚어내거나, 그렇게 짚어낸 속내와 그 사람의 행동 패턴으로 벌어질 앞날을 예측하는 데에는 섬뜩해질 만한 구석마저 있었다. 그러니 그의 이성은 그의 앞길에 후회하지 않을길을 열어줄 것 같았다.
"이성이 말하는 대로, 라."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눈으로 가만히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손을
미끄러뜨렸다. 정태의의 목덜미를 쓸어올려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다시 내려와 목을 감싸쥐었다.엄지가 목 한가운데, 인후 위를 지그시 누른다.
정태의는 살짝 낯을 굳혔다. 문득 예전, 언젠가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다. 목을 움켜쥔
하얀 손. 살갗을 찢고 근육을 헤치며 목을 꿰뚫었던 그 손가락.
지금, 이 남자는 그럴
마음을 먹는다면 일순간에 정태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정태의는 미동조차
않고 가만히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시선을 마주본다. 자신의 생명을 손가락 하나 아래에 두고 있는 그를.
목 위로 얹힌 손가락에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정태의의 손이 시트를 움켜쥔다. 인후를 짚은 손가락이 천천히,
서서히 숨이 막히도록 살갗을 눌러왔다.울컥, 호흡 곤란보다 먼저 치밀어오르는 격통에 정태의의 얼굴 근육이 움찔 움츠러들었을 때.
정태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느리게 그의 숨통을누르던 일레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뗐다. 그리고 잠시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의손을
내려다보았다.어쩌면 조금 아쉬운 듯도 했다.
정태의는 쿨룩, 반사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침을 몇 번 삼키면서 목을 감쌌다. 얼얼하게 욱신거리는 목을 문지르면서 흘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 이성이 말하는 대로 따랐더라면."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소매부터 시작해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어나가는 그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정태의는 새삼 깨닫는다. 말을 꺼내었다가 잠시 입을 다문 그는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풀어 벗어던지면서
말을 이었다.
"태이. 너는
이미 몇 번은 죽었어."
"네 이성이 날 죽이라고 하던가?"
그 이상 참 살벌하고 한가하기도 하군, 정태의는 목을 문지르며 마뜩찮게 중얼거렸다.
"글쎄. 적어도
나를 묶어놓고 클로로포름을 덮어씌운 놈을 아직껏 살려두지는 않았겠지."
"……."
그렇게 말씀하시면 지은 죄가 있는 몸으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셔츠의 뒤를 이어 벨트 버클을 푸는 그 손길이 못내 신경 쓰여 다시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일레이, 지금 네가 옷을 벗는 이유가――――."
"정태이. 예전에 너, 내가 그 꼬맹이랑 하는 걸 봤었지."
일레이는 미심쩍게 입을 여는 정태의의 말을잘랐다.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는 거라니 뭘 하는 거, 라고 물을 만큼 멍청하지는않았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몸을 뒤섞고 있던
신루와 일레이의 모습을 반사적으로 기억에서 떠올렸으니. 동시에, 그
순간 느꼈던 그아득한 혼란과 불쾌감도 절로 같이 떠올랐다.
"……그게 왜."
"지금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말이야.
내가 어리석었어."
일레이는 심상하게 말했다. 철걱철걱, 몇 번의 금속음과 함께 벨트가 풀린다. 이어
퍼스너가 내려가는소리가 몹시 생생하게 뒤를 이었다.
"신루와 잤던 게 후회된다고……?"
정태의는 갑자기 이놈을 한 대 사정없이 후려갈겨주고 싶어졌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그 당시 정태의가 신루를 그토록 좋아했었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 신루와 단순히 거래를 위해서, 그렇게 잤었다. 정태의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눈앞에 들이대듯이 그렇게 신루와 몸을 섞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지금 이 놈을 후려갈기면, 이 놈은 이번에야말로 이성의 소리를 듣겠지.
정태의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다시 펴면서 불편한 심기를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일레이는 바지를 벗었다. 이제 그의 몸을가린 것은
속옷 한 장이었다. 그나마, 뚜렷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일어선 살덩이를
고스란히 비추어 속옷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틀렸어. 그게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 반대였어야
했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일레이는 정태의의 앞에 섰다. 몇 뼘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그의 반라를 두고, 정태의는침대 위에 앉은
채로 슬슬 물러앉았다. 그러나 슬금슬금 물러앉다가 등에 벽이 닿았을 때, 정태의는 후회했다. 이렇게 물러앉아서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올공간을 마련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 봐, 잠깐, 그, …ㅡ."
덜컥 다급한 마음이 든 정태의가 뭐라고 제대로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침대 위로 올라온
일레이는 정태의의 바지에 속을 걸치고 있었다.
"그때, 그
놈과 하는 걸 네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너와 하는 걸 그 놈에게 보여줬더라면."
"…ㅡ!"
허리 아래의 살갗이 드러나면서 침대 시트며 이불이피부를 직접 스쳤다. 그러나 그 서늘하고 버석한 감촉보다도 더욱 서늘하게, 그의 낮은 속삼임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
"그랬더라면 지금은 좀더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편하다니 뭐가……, 아니 그보다 잠깐, 지금…ㅡ."
"생각하지 마. 잊어버려. 다시 만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그러니까 너는 그 놈에대해 생각하지 마."
다리에 바짓자락이 휘감겼다. 거치적거리는 그 옷가지가 움직임을 방해한다. 셔츠마저 걷어내어버리는손길과 함께,
나직하게 귀를 간질이는 소리가 몸을데었다.
유감스럽게도 정태의는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신루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버둥거리는 몸에서 어렵잖게 떨어져나가는
옷가지들 아래로 살갗이 드러날 때마다 와 닿는 서늘한 공기가 그의 정신을 얼렸다.
"일레이, 잠깐, 얘기하던 도중에 이게 뭐야, 왜 갑자기,
…ㅡ제기랄! 왜 갑자기 세우고 지랄이야, 이
자식아!"
당혹스럽게 일레이를 밀어내던 정태의는 마지막으로 사수하고자 했던 속옷마저 쉽게 떨어져
나갔을 때, 갑자기 울컥했다. 속옷의 천을 들추다
못해 바깥으로 머리를 내민 그의 성기가 허벅지에 닿아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정태의는 일레이와
몸을 섞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신루의 이야기를 꺼내어 마음이 가라앉은 탓도 있었고, 심신이 피로한 탓도 있었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침대 위에 누운탓도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고, 그 사실에 더욱 욕지기가 치밀었다.
하지만 정태의가 욕설을 내뱉건 말건 일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태의의 몸을 짓누르고 그위에 엎드리며 그의 허리를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고작해야 열흘도 채 안 되었는데 그새 잊었나 보지.태이, 지난번에 내가 뭐라고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네가 뭘…ㅡ."
"이 몸은 내 거라고. 너는 내 소유라고, 그렇게 인식한다고 했지. 그렇게나
쏟아부어서, 잘만 하면 아직네 몸 안에 내 흔적이 남아 있을 만도 한데, 그걸 까먹었다고? 그럴 리는 없겠지."
"…ㅡ."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정확하게는 말을 잃었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혀뿌리가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잊었을 리가 없다. 너는 내 거다, 귓가에 입술을바싹 대고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속삭이던 그 목소리 하나 하나가
지금도 불현듯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그 말과 함께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손으로, 혀로, 이로 아로새겼던 흔적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샤워를 하다가 문득 그 보일 듯 말 듯한 흔적을 발견하곤 일순 숨을 멈추었을 정도다.
젠장.
정태의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누가 들어도 거짓이란 걸 뻔히 알 만큼 노골적으로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난,
모르겠거든, 무슨 말인지."
"……아하. 모른다……?"
고개를 슬쩍 돌린 정태의의 위에서, 일레이가 피식웃는 기척이 났다. 그 순간 정태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아직 목덜미의 잇자국이 다 사라지지도 않았는데,고작 며칠 지났다고 까먹어서야 안 될 말이지. 그래,태이,
내가 말했었지. 앞으로 너는 매일 내 거라고. 매일 인식시켜줘야만 기억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해 주지. 네 다리 사이에서 정액이 마를 날이 없도록. 그래야만 네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얼마든못할까."
그의 뜨끈한 혀가 목덜미를 핥았다. 목의 피부를 타고 올라와 귓속을 파고 드는 그 말에, 정태의는 오싹소름이
끼쳤다.
"내, …ㅡ가
아니라 네가 인식한다면서! 말이 다르잖아!"
"하하아. 이제야 기억이 났나?"
일레이는 웃었다. 정태의의 목에서
가슴팍으로 미끄러뜨리는 손길이 느릿하게 피부를 누르며 지나갔다.
"야, 건들지
마, 난 몰라, 네가 멋대로 인식한댔지 나는 그런다고 한 적 없어!
건들지 마! 왜 내가 네 거야! 누구 맘대로
네 거야!"
"글쎄, 나도
그걸 생각해 봤는데 어쨌든 네가 내 거라는 결론만 나고, 이유는 나름대로 짐작이 가긴 하는데 확실치 않아.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만한 과거의 근거가 없단 말야……."
일레이는 혀를 찼다. 귓불을 가볍게 깨문 채 혀를 차는 그 가느다란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정태의는 왈칵,
반사적으로 일레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세게 밀어낸다. 조금 밀려나 몸에서 떨어지는가 싶던 그 몸은, 그러나, 이내 바위처럼 꿈쩍도 않았다.
하, 헛웃음이 들렸다.
어깨를 마구잡이로 밀어젖히는 정태의의 손아귀로 흘끔 시선을 준 일레이는 맹랑한 꼬마애라도 보는 듯 정태의에게 시선을옮겼다.
"정태이. 이 손 놔."
나직하게 말하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버팀목처럼 일레이의 어깨를 떠받들고
있는ㅡ정확히는 밀어젖히고 있는ㅡ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놔. 두
번 말 시키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정태의는 잠시 고민했다. 현명하게 '예!'라며 얼른 손을 거두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꼴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이미 더 비참해질 데도 없지만.
정태의가 좀더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기만 할 뿐,잠깐 망설이던 그 손을 움직일 기색이 없는 걸 깨달은 일레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가끔 바보짓을 할 때가, 바로 이럴 때야. …ㅡ뭐 좋아, 나로서는 상관없지.
그 바보짓을 부숴버리는 재미도 만만찮거든."
느릿하게 중얼거린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였다.
아름다운 겉모습게 걸맞지 않게 억세고 사나운손이,정태의의 샅을 움켜쥐었다. 성기와 그 아래의 고환까지 뿌리째 한 손에 잡는다.
조심스러움이라곤 조금도 없는 억센 악력으로, 꽉.
"아! …ㅡ!"
숨을 들이쉬었다. 눈앞에 별이 튀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눈앞이 새카매지더니 번쩍, 불통이 사방으로 튀며 흩어졌다.
일레이의 어깨에서 손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새파래진 얼굴로 일레이의
팔을 붙들고 손톱을 박아넣고 있었다.
"놔, 놔……,
놓으……. ―――놔 줘, 제발 좀 손…ㅡ."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 말아먹을 자식아, 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개새끼야. 그러니까 그 손 좀 놓으란 말이야, 이 호로자식아!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입 안팎으로 나누어 구분한 것만 해도 용했다. 정태의는 아득한 정신으로 속삭였다. 눈앞은 계속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아먹다 못해 뼈까지 발라먹어도 시원찮을 놈은 어쩌면 정말로 정태의의 아랫도리를
못 쓰게 만들어놓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정태의가 숨을 삼키며 다급하게 호소를 하든 말든,
그 소리가 아예들리지 않는 것처럼 샅을 틀어쥔 손을 두어 번 세차게 쥐어뜯듯이 흔들었다.
정태의는 기절했다. 아마도 고작해야 3, 4초 가량일테지만,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의식이 되돌아온 이유도 아래를 쥐고 흔드는 고통 때문이었다.
"놔……, 네 어깨, 놨잖아, 놨잖아, 이 자식아, 그러니까 네놈도 그 손 좀, 놓으란 말,
…ㅡ!"
띄엄띄엄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아득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이제 평생토록 남자 구실은 다 한 게 아닐까 하고. 그때까지 정태의가
뭐라고 말하건 들은 척도 않았던 일레이는 문득 그 손에서 아주 약간힘을 풀었다. 그래봐야 집채로 누르던 걸
바윗덩이로 누르는 걸로 바뀐 정도였지만, 그 약간의 차이에정태의는 넘어가던 숨을 그나마 돌릴 수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몽롱한 눈을 뜨자 바로 앞에서일레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이. 손."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아련한 정신으로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일레이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서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그의 팔뚝을 붙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스스로의 손을,
정태의는 그제야 인식했다. 얼른 그 손을 놓았다.
"자, 놨어.
놨다고. 그러니까 너도 좀 놓……."
"목에 둘러."
"뭐?"
"내 목. 부둥켜안으라고. 네 팔로."
정태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아니, 잠깐 이해하긴 했지만 자신이 너무 아파서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나
의심했다. 목? 목을 콱 졸라버리……라고 했을 리는 없고,
지금 목을 부둥켜안으라고 했나?
정태의는 식은땀이 흥건히 솟아 반쯤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그를 보았다. 무심한 얼굴이 바로 위에서자신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고개를
기울이려니, 샅을 움켜쥔 손에 꾸욱 힘이 들거가기 시작했다. 거의 혼비백산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정태의는 소름이 주욱 끼쳐 다급하게 일레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젠장, 그래, 네 놈이 말한 대로해 주마.
아주 꽈아악.
목을 그대로 콱 졸라버릴 기세로, 정태의는 그를 거세게 끌어안는다. 맞닿은 피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타고 넘어왔다. 팔 안에 듬직하게 차는 목과 어깨를 꼭 끌어안고서, 정태의는 자신의 입술 앞에 있는 그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됐잖아. 좀 놔줘……. 진짜로 아파 죽을 것 같아. 너도 남자라면
알 것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라고 뒤에 붙은 말은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나 이대로 풀어주면 미친놈이 아니었다.
잠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일레이는 갑자기 손아귀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악!! 으…ㅡ엄마……."
결국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눈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왈칵 배어나온다. 기어코 머리에서 나사가 하나
풀리고 말았다.
"야, 이
망할 새끼야! 뭐가 불만이야, 뭐가! 네가 하란 대로 했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사람을 고자로
만들려고 작정했냐, 이 더럽고 치사한 새끼! 손 좀 놔,
손 좀! 제발 좀!!! …ㅡ제발 좀 놔 달라고……."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붓다가 애원으로 말을 맺은 정태의는, 그런 와중에도 착실하게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사실은 팔을 풀고
말고 할 정신도 없었다. 그때, 귓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태이, 아프긴 아픈 모양이지. 간을 배 밖으로 내놓고."
"너라면 안 아프겠냐, 이 미친놈아……."
"그대로 있어. 팔에 힘 풀지 말고. …ㅡ그래. 그럼 하나만 더.
네 입으로 말해."
"뭘. 뭘
말하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정태의는, 눈앞의 이 악마 같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라고 하든 그대로 말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었다. 주인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이든 혹은 저는 세상에서 제일 바보랍니다, 이든, 자존심이고 뭐고 챙길 여유도 없다.
그러나 일레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뭐……?"
"그 꼬맹이. 링신루. 만나지도 않고 만날 생각도 않겠다고 말해."
정태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정태의가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신루를 만나지 않겠다니.
그것은 정태의의 의지를 벗어난 문제였다. 좋고 싫고를 떠나, 정태의는 언제가 되었든 그를 만나야 했다.
딱히 할 말이나 볼 일이 없더라도 그것이 최소한의 의무였다. 정태의가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자, 곧 서슴없는 악력이 샅에 밀어닥쳤다. 등줄기에,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악! 으,
으으, ㅡ악……!! 아파, 아파, 아파…ㅡ!!"
"그렇게까지 만나야겠다면, 만나봐야 써먹지 못하도록 아예 뭉개버리도록 하지."
"써먹긴 뭘 써먹는다고――――제발,
제발 좀…ㅡ, ……내가, 내가 먼저는 안 갈게…ㅡ.
내가 먼저 찾아가지는 않을게, 그럼 되잖아."
"찾아와도 만나지 마."
"…ㅡ어떻게 그러라고!"
정태의는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펑펑 솟을 지경이었다. 이 괴물에게 인간의
심경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게 너무도 어려운 난제라서 눈물이 났다.
"너도, 일단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생각을 좀 해 봐라! 결과야 어찌 되었든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잘 다니던 훌륭한 직장도 나 때문에 그만 둔 셈인데, 그런데 그걸 아예 못 본 척하라고?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고!"
정태의는, 네놈도 숨통 막혀서
좀 죽어보라는 심정으로 일레이의 목을 죽어라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치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게 낫지, 인간 같지도 않은 이
놈에게 대고 인정을 호소하다니.
"……."
그러나 고통으로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정태의는 끄윽끄윽 흐느끼면서 딸꾹질까지 하느라, 어느 순간자신의 샅을 짓이기던 손아귀가 떨어져나간 걸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좋아. 네가
먼저 찾아가지는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태이. 기억하겠지?"
귓가에서 속삭이는 낮고 다정한 목소리. 정태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막혔다. 딸꾹질이 멎지 않았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제야 사타구니의고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마비라도 된 듯얼얼한 감각은 그대로 남았다. 정말로 못 쓰게 된 건 아닐까 머릿속 한구석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태의는 딸꾹, 딸꾹,
여전히 콱조르듯이 부둥켜안고 있는 일레이의 목에 대고 딸꾹질을 했다.
좋아, 지금은 일단 그
정도로 해 두지, 일레이의 혼잣말이 얼핏 들렸다. 코알라처럼 달라붙어있는
정태의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어쩐지 여느때보다 상냥하다. 젠장. 병주고 약주고 다 해라.
"……. 그
꼬맹이가 그렇게 좋은가?"
문득, 한동안 말없이 정태의의
등을 쓰다듬고만 있던 일레이가 나직이 물었다. 정태의는 딸꾹, 훔쳐먹다
들킨 사람처럼 커다랗게 딸꾹질을 한 번 하곤 입을 다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
그가 재차 묻는다. 정태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점이 좋을까. 생각해 봤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좋고, 상냥하게
웃는 앵두 같은 입술이 좋다.수줍어 보이는 표정도, '태이 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도 좋았다. 그렇게 귀여운 아이가 또 있을까. 애지중지한다는 링 어쩌고 어르신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였다.
하지만.
정태의는 계속 딸꾹질을 하면서 물끄러미 일레이의등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얘기해봤자 이해도 납득도 안 할 거면서 그런 건 왜 물어.
정태의는 속으로 부루퉁하게 생각했다. 일레이는 잠시 침묵했지만 굳이 정태의에게서 대답을 들으려는건 아닌 듯했다.
"정태의. 너는 내 거다. 알겠지. 너는 내 거야."
귓속을 파고드는 분명한 발음으로, 그가 느리게 말했다. 그 말에도 굳이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등을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허리로 내려갔다. 그 아래의엉덩이까지.
정태의는 움칫, 몸을 움츠렸다.
아주 미묘한 동요였지만 정태의에게 꼭 끌어안겨 있던 일레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정태의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간다.
"괜찮아. 예전에도 했었잖아. 뭘 긴장하고 있어. 힘 빼."
"……. 꼭
넣어야겠어……?"
이제는 아예 안 한다든가, 가벼운 손장난만 하고 넘긴다든가, 그런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삽입만 하지 않아도 고맙다고 할 지경이다. 게다가
아직도ㅡ아마 앞으로 한동안은ㅡ얼얼하니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정태의의 성기는 조금도 서지않았다.
생각해 보면 화가 치미는 의문도 피어오른다.
왜 나야.
아니,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래, 난생 처음으로 그놈에게 한 방 먹이고 달아났는데,
저 미친 성질머리에 안 죽이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런데 왜 꼭 그 못살게 구는
방식이 섹스냔 말이다. 정상적으로 사고하자면 섹스는 어딘가의ㅡ이놈 정도의 다이아몬드 숟가락쯤 되면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미녀도 능히 품을 수 있겠건만ㅡ미녀와 즐겁게 즐기고, 증오스럽고 밉살맞은 놈은 후려갈기거나 못살게
부려먹기나 어느 골방에 평생 처박아두는쪽이 옳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대채―――.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는 먼 기억 속의 말을 떠올렸다.
ㅡ정태이. ……생각지도 못
했는데, 아주 끝내주게명기더군. 어찌나 찰기 있게 오물거리던지,
잡아먹히는 줄 알았거든. 아파죽겠다고 울면서도 그 모양이라니 대체 익숙해지면 어떤
물건이 될지, 생각만으로도 뻐근해질…….
"……."
내 몸이 그렇게 끝내주나.
정태의는 때려죽여도 입 밖으로는 절대 꺼내지 못할 말을 제법 심각하게 생각했다. 정태의 스스로는 본인과 섹스를 할 수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미심쩍은 눈으로 흘끔 일레이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목을 부둥켜안고 있는 실정이라 얼굴은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정태의의 엉덩이사이로 주름을 젖히며 파고든 손가락 하나가 안쪽을넓히고 있었다. 윽, 정태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뜨끔한 신음이 새어나온다. 젠장. 기어코 넣을 작정이구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무리 경험한 적이 있다곤 해도, 그래서 죽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어도,본능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아니 경험한 적이 있으니 더 섬뜩했다.
"어이……, 꼭 넣어야겠냐고……? 그냥 손으로하자.내가 해줄 게.
내가 아주 잘 해줄 수 있거든."
정태의가 얼른 초조하게 말했다. 그러나 코웃음치는소리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애들 장난하냐. 엉덩이에서 힘이나 빼. 고작 며칠 비워뒀다고 도로 빡빡해진 네 몸이나 원망하라고.
맛이 아주 좋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빡빡한 건 내 취향이 아니야. 적당히 낙낙하면서
찰진 게 좋은데……뭐 좋아. 한동안 휴가니까 천천히 공들여서 내 물건에 딱 들어맞는 구멍으로 만들어보자고."
딱 들어맞는 구멍은 무슨 얼어죽을―――하고, 낯부끄러운 말에 펄쩍 뛰려고 하던 정태의는 문득 그 말에서 걸리는 부분을 깨달았다.
"지금 뭐라고?"
"음? 딱
들어맞추겠다고 했는데. 내 물건이 아니면 모 싸게 되도록 만들어주겠다고."
"뭐가 네 물건 아니면 못 싸! ……아니 젠장, 그게 아니라, 휴가라고?"
벌컥 소리를 지른 정태의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묻자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
빼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그 덕분에 요 일주일 동안 다 합해서 스무 시간도 채
못 자면서급한 일 처리해버리느라, 나도 지금 꽤 피곤하거든.그러니까
그렇게 사색이 될 건 없어. 가볍게 끝낼 참이거든."
"어, 그래.
그건 다행이지만……아니아니 잠깐, 휴가라니."
휴가라니, 근무지 무단 이탈에
전용기까지 탈취하다시피 해놓고서, 시말서를 산더미처럼 쓰고 어령에 몇 달 처박혀 있다가 나와도 할 말이 없을
인간이 꺼낼 단어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뚫어져라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휴가라니 어떻……."
"병가를 냈어. 요즘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장기로 5주."
평연하게 중얼거리는 그 대답에, 이번에야말로 정태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몸이……많이……쇠약……."
좀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되풀이하면서, 정태의는 일레이의 목을 부둥켜안고 있던 팔을 풀고 약간 몸을 뒤로 물려 빤히 그의얼굴을 쳐다보았다.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일레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예전에 보았던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건장하고 단단한 몸이 있었다. 그 아래에 흉악하게 고개를
치켜든 중심부까지, 기억에 있는 그대로다.
"병 있는 건 아니지……?"
정태의는 미심쩍게 물었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가 픽 웃는다. 그
웃음이 대답이었다.
이 사기꾼 같으니. 병가는 무슨 얼어죽을 병가야. 그런 핑계에 맞춰주는 지부도 지부다. 맨손으로 소라도 때려잡을 이런 놈에게 병가라니, 지나가던 붕어가 웃을 일이다.
정태의가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때 몸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윽,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움츠르는 정태의에게, 일레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팔, 제대로
안고 있으라고 했을 텐데."
그 말과 동시에 샅 위를 묵직하게 누르는 손바닥의감촉에, 정태의는 얼른 일레이의 목을 콱 부둥켜안았다.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귓바퀴에 입술이 스친 것 같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휴가. 휴가라.
5주. 설마 5주 동안 이 미친놈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건가.
정태의는 눈앞이 까마득했다. 게다가 조금 전 이놈이 심상찮은 말을 지껄인 것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아."
또 하나 손가락이 파고든다. 천천히 꾸물거리며 몸 속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마치 그 자체로 살아 있는것처럼 내부를 쓰다듬었다. 소름이 주욱 끼쳤다.
괜찮다.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 정도까지는 괜찮다. 저 정도까지만이라면.
하지만.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를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벌려대던 손이 겨우 빠져나간 순간, 정태의는 편안함보다 먼저 희미한 공포를 느꼈다. 그의 목을 감싸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힘 빼라니까."
혀를 차며 말하는 목소리와 함께, 막 방금 손가락이빠져나간 곳을 뜨끈하게 문지르는 살덩이가 닿아왔다. 으윽,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허벅지를 닫으려 해도 이미 그의 몸이 다리 사이에 자리잡았다.
두 손이 양쪽 엉덩이를 잡는 게 느껴졌다. 바깥쪽으로 움켜쥐어 벌리면서, 그 사이에 다시 묵직한 살덩이가 닿았다.
"잠, 잠깐만!
차라리…ㅡ이, 입으로 하자. 입으로."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소리치고 나서, 목구멍을 찢을 듯이 벌리며 들이닥치던 과거의 기억을떠올리고
조금 후회했지만, 그래도 아래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입으로 하면, 어기적거리면서 걸어다니지는 않아도 되었다.
일레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대로 허리를 추어올려 박아넣기 직전에, 여전히 성기를 정태의에게 맞댄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몇 초 정도 지났을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말로
힘이 들긴 한가 보군."
"힘들어, 엄청나게 힘들다고!"
정태의는 얼른 대답했다. 일레이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터라, 그의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박으려고 들면 오늘은 정말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고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긴장했다.
"…….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오늘 하루 피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닌데."
"앞……."
정태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결심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놈에게서 달아나야겠다고. 이제는 원한의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문득 일레이는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정태의의 팔을 두드렸다. 정태의는 팔을 풀었다. 일레이는 몸을떨어뜨리며 지그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내 참……. 살다보니 내가 별 짓을 다 해보게 되는군."
혀차는 소리가 섞인 혼잣말이 얼핏 들렸다. 그러나 험악한 말투와는 달리 표정은 별반 위험스럽지 않았다. 오히려ㅡ어쩌면
그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지도모르겠지만ㅡ재미있다는 듯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별 짓이라니 무슨 별 짓……그러나 그렇게 묻기도 전이었다.
정태의의 무릎 뒤를 붙잡은 일레이는 그 무릎을 앞으로 밀었다. 몸이 구부러지면서 허리가 공중에 떴다. 그리고 정태의는 숨을 삼켰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것은 축축하게 젖은 작은 살덩이였다. 다리 사이를 넘어서 몸
속을 샅샅이 핥아버릴 듯, 그는 정태의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일…ㅡ, 어이, 잠깐, 그, 악……."
연체동물처럼 꿈틀거리며,혀가
몸 속을 파고들었다.손가락이나 성기 따위와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압박감이나 부담감은 없었으나 등골까지 소름이 주욱 끼치는 그 감각에, 정태의는 몸을 퍼득 뒤틀었다.빠져나가려 해도 무릎 뒤를 누르고 엉덩이를 움켜쥔커다란 손이 가로막았다.
"아니, 입으로
하자는, 게, 네가 아니라 내…ㅡ."
정태의가 버둥거리면서 외쳤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정태의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리도 없을 그는, 혀를 밀어넣고 있는 그곳에
다시 손가락을같이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흘끔,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이 웃고 있었다.
"네 입으로는 나중에. 오늘 나는 꼭 넣어야겠거든. 네 몸 속에 꼭 박아넣고 싸야겠단 말야. 하지만 그렇게 새파랗게 질리다니 가엾기도 해서, 녹진하게 풀어준 다음에 넣을 테니 고맙게 생각하고
몸에 힘이나 빼고 있어."
치부에 입을 댄 채 중얼거리는 말이 고스란히 귓속을 파고들었다. 연이어 끈적하게 질척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정태의는 기절할 것 같았다. 아니 기절하고 싶었다.
그냥 해라. 차라리 그냥 해버려.
그냥 깔끔하게 얼른넣고 얼른 싸서 얼른 끝내버리는 게 낫겠다.
정태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결심했다. 이렇게 낯부끄럽고 민망한 꼴을 당할 바에야 앞으로는 말없이 얌전히 말뚝 박히고 말겠다고.
* * *
정태의는 멍하니 눈만 껌벅거렸다.
안 아픈 데가 어딘가 몽롱하게 생각해 봤다. 슬쩍, 슬쩍, 몸을 오른쪽 왼쪽으로
반 바퀴씩 굴려봤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으우우우……. 이러다 필경 죽고 말지……."
정태의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도닫지 않고서 샤워를 하는 그 놈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를
들을수록 정태의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더 깊어졌다.
몸이 삐걱거렸지만 옆으로 돌아누웠다. 뜨끈하고 욱신한 감각이 몸 여기저기를 타고 흘렸다. 아야야,
또낮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어지간하면 꼼짝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있고 싶었지만 미처
덜 마른 머리카락이 찝찝해서 머리 위치라도 바꾸려고 고개를 돌리면서 몸도 조심조심 돌렸다.
모로 누워 한숨을 내쉬자 얼핏 샴푸 냄새가 났다. 자기 머리에서 나는 냄새다. 정태의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죽을 때까지, 어딜 가서든 차마
자기 입으로는 말 못할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어쨌든 차라리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서 흙 덮고 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정태의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고, 몇 번째인지기억도 안 나는 사정을 정태의의 몸속에서 마치고
나서도 그대로 엎드려 있던 일레이도 이윽고 정태의의 위에서 비켜났다.
정태의의 입에서 으, 하고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을 아예 둘로 쪼개어버릴 기세로 끝간 데 없이파고들어 한참
동안 그 안에 담겨 있던 살덩이가, 좀체 매끄럽게 빠져나가지 않았다. 뻑뻑하게 조금씩,조금씩, 일레이가 추삽질을 하듯 허리를
밀어가면서살덩이를 빼내는 동안 정태의는 윽, 윽, 윽,
속으로신음을 삼켰다.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평소에도 적당한 크기의 딜도라도 넣어둘까.
그럼 자연히 벌어져서 편해질 텐데.'
입구가 찢어지지는 않았나 살피는 듯 엄지로 주름을하나씩 만지는 감촉이 닿았다. 정태의는 꼼짝도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일레이의 말을 들으면서, 농담도살벌하게
한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지그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중간 크기부터 시작할까.'라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입을 떼기도 싫을 정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움켜쥔 주먹을 보고 일레이는 픽 웃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아, 그럼.'
지쳐떨어질 만도 한데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침대에서 훌쩍 일어선 일레이는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정태의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욕실로 걸어갔다.
때려죽인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것 같아꼼짝도 않는 정태의를 어렵잖게 씻겨주고
몸 속까지 말끔하게 정리해 준 그는, 배스타월로 꼭꼭 닦아서다시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런 뒤에야 도로 욕실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태의는 샤워소리를 들으면서 푹,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묘한 데에서 매너가 좋은 척하는 괴물이었다.
정태의는 한쪽 팔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물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아랫도리는 물론 뻐근하게 아파서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불쾌한 감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임을 주장하는 유일한 매너로군……."
정태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얼거렸다고 해도,목이 온통 쉬어서 목소리도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
아니, 사실 원망과 원한을
빼고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잠자리 매너 자체가 그렇게 막되어먹은 놈은 아니었다. 예전에 강제로 덮쳤던 걸 보면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건 확실했지만, 잠자리 매너가 지저분하지는
않다. 어쨌든 제 욕심만 채우고 나 몰라라 내빼는 일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들이대지도 않고.……사람 말을 대단히 안 들어먹기는 하지만.
어쩌면 저놈의 아랫도리가 저렇게 괴물처럼 생겨먹지만 않았더라도 정태의는 꽤 흔쾌히
저놈과 종종 몸을 섞었을지도 몰랐다. 그래, 기왕 이
꼴이 된 것,열심히 힘내서 어서 익숙해져보도록 애써볼까. 어쨌든 테크닉도
정력도 빼어난…….
…….
아니, 역시 안 되겠다.
괴물을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다. 정태의는 어떻게 내삐야 하나 고민했다.
"정말로 신루가 보낸 남자에게 순순히 잡혀갔더라면
좋았을지도 몰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흘끔 욕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다행히 물소리에 가로막혀 정태의의 꺼져들어가는 혼잣말은 거기까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들렸더라면 고이 안 끝났을 거다. 신루를 만나야겠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사람을 고자로 만들려 들었던 놈이다.
"……. 내
참……. 알 수가 있어야지, 알 수가."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져서, 정태의를 침대에 눕히면서 일레이가 손 닿는 곳에
꺼내어두고 간 맥주로 손을 뻗었다. 엎드린채 상반신을 일으키면서도 정태의는 어구구, 나 죽겠다, 하고 중얼거렸다. 풀탑을 뜯어 차가운 맥주를네댓
모금 마시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생각을 해 보았다. 저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알 수 없는 머릿속을 힘들여 짐작해 본다.
ㅡ만일 이성이 말하는 대로 따랐더라면 태이. 너는 이미 몇 번은 죽었어.
문득 그의 낮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ㅡ생각하지 마. 잊어버려.
다시 만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너는 그 놈에 대해 생각하지마.
ㅡ나도 그걸 생각해 봤는데 어쨌든 네가 내 거라는결론만 나고 이유는 나름대로 짐작이
가긴 하는데 확실치 않아.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만한 과거의 근거가 없단 말야.
ㅡ그 꼬맹이. 링신루.
만나지도 않고 만날 생각도 않겠다고 말 해.
ㅡ그 꼬맹이가 그렇게 좋은가?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
ㅡ정태의. 너는 내 거다.
알겠지. 너는 내 거야.
연이어 몇이나 떠오르는 말들. 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던 손길. 정태의가 그의 목을 끌어안자 낮게 웃으며 귓바퀴에 살짝 입맞추고
스친 입술. 행위를 마친뒤 정태의의 몸을 살피던 시선까지.
"……."
정태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꿀꺽, 목을 넘어가는 맥주가 생각에 잠겼던 동안 입 속에서 데워져 미지근했다.
"거참, 죄다
똑같은 결론을 내리기 편한 근거들이네……."
천천히 맥주를 삼키면서 정태의는 점점 더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저 말들을 해주면 그 사람도 필경 같은 결론을 낼 거다. 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이 평소에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나, 타인에게는 일체 아랑곳 않는 그 성격을굳이 덧붙여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설마
저 놈이 정말로 날 좋……."
정태의는 침대 머리맡, 벽지의 꽃무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끝맺기 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얼마 전에도 한 번 떠올랐다가 지워버린 그 생각은, 스스로가
생각해놓고 너무도 어이없다. 정태의는 아냐,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냐. 그건
아냐. 그것만큼은 아니다. 그런 인간적인 감성일 리는 일단 절대로 없고.
……대체 뭐냔 말이지."
정태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이래봬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있는데,
하다못해 저 빌어먹을 김소위 정도만 됐어도 정말로 날 ……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봤을거거든.하지만 저 놈은 아냐. 그런 인간적인 면모는 절대로없는 놈이라는 데에 내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네 것도 아닌 인생을 네 맘대로 어디에 걸어."
어느 결에 나왔는지, 등 뒤로 날아오는 목소리에 정태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손에 쥐고있던 맥주캔에서
맥주가 찰랑, 흔들렸다.
돌아보자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오는 참인 듯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일레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재미난 혼잣말을 하는 것 같던데,
어디에 인생을 건다고?"
"어? 아…ㅡ음…ㅡ내
감과 눈치에 말야, 뭐 그냥."
정태의는 애매하게 중얼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일레이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어 다가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를 주욱 마시는 그의 옆모습을, 정태의는 뻗은 채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내면을 배신하는 외견이었다. 아직 물기가남아 있는 나신은 저 흉흉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단정하고 건실했다.
정태의는 맥주를 넘기면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태의가 스스로의 취향을 알아차린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정태의는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아마 하려는 마음만 먹는다면
여자도 괜찮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태의는 곱고 사랑스럽게 생긴 소년을 좋아했으니까.
그래.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
해도, 눈앞의 이 남자는 딱잘라 말해 정태의의 취향이 아니었다. 정갈하고
멋지다고 말 못 할 것도 아닌 외모도, 당연한 말이지만 저 성격도 정태의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고 심지어 정태의는
아래에 깔리는 입장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그냥 어쩌다 보니 잠깐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엔 상대가 여러 가지 의미로 지나치게 막강하다. 역시 이것저것 따져보면 가장 타당한 결론은, 믿어지지는 않지만, 이놈이 자신을 좋…….
"……. 아니야…….
나도 어지간하면 그렇게 생각하겠는데, 그 정신세계를 생각해 보라고…….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정태의는 미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거의 들리지않을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어떻게 그 말을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일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정신세계라. 누구의?"
"아…ㅡ, 체력 만땅에 건장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병가를 내주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지."
정태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분명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는데도 창밖은 희끄무레했다. 마천루마다 불을 밝힌, 밤이 찾아들지 않는도시다. 그러나 확실히 낮과는 달라, 밤 특유의 정적이 저 너머에 감돌고 있었다.
정태의는 아무렇게나 둘러대면서 말을 하고 나서야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휴가를 받았다고했다. 병가. 5주라고 했던가.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그야 물론 진짜로 병가라면,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입원이라도 하든가 요양이라도 해야
한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병가가 5주나 나올 리는 없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5주나 받은 거야."
정태의는 몸을 뒤척여 모로 누우며 중얼거렸다. 몸을 움직이자 절로 어구구, 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온다.
일레이는 가만히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맥주캔을 먼저 비웠다.
"정재이를 만나고 싶다고 그 입으로 말해놓고,
그새잊어버렸나? 아니면 이제는 만나고 싶지 않아?"
대수롭잖게 중얼거리는 그 말에 정태의는 어? 하고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빤히 그를 쳐다본다.
잊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정태의는 여전히 정재의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아니…ㅡ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은데. 너도 가려고?"
정태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5주. 그
안에 만나지 못하면 포기해."
정태의는 다시금 망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진짜로 보내주려는 모양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레이 역시
함께 갈 눈치지만, 정태의는 정재의를 만나러 갈 기회를 얻었다. 물론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금방 떠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정태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해관계가 일치한
거구나.
정재의를 찾고 있을 UNHRDO의 입장과, UNHRDO에 소속되어 있는 일레이의 직위와, 5주라고 하는 턱없이 긴 휴가, 그리고 정재의를 만나고 싶어하는정태의와, 별 근거는 없지만 정태의라면 보다 쉽게정재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의 기대. 그런 것들이 어우러진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정태의는 일어나 앉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흐늘흐늘 휘청거렸지만, 움직이려고 드니 그래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체중이 내리눌러 허리 아래가 지독하게 아픈 탓에, 제대로 앉지는 못하고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이고 말았지만.
낯을 찌푸리며 잠시 그렇게 앉아 있던 정태의는 저릿하게 허리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아픔이 좀 가시자 한숨을 쉬었다.
"보기보다 영 약골이군."
그런 정태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일레이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한 정태의는 사납게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약골인 게 아니라 네놈이…ㅡ!"
"내가?"
"……. 너랑
했던 사람들은, 하고 난 직후에도 죄다멀쩡하게 잘 다녔나 보지."
"글쎄……."
일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내 알 바 아니었기 때문에 모르겠는데."
이 자식, 사후 매너만큼은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니었어?!
정태의는 어이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곧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수수께끼는깊어질 뿐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가는 건가? 세링게로?"
문득 기분이 들떴다.
갈 수 있다. 그곳으로.
창살 없이 갇혀 지내던 이곳에서 벗어나서. (그 창살을 둘러놓은 놈과 같이 간다는
점이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저도 모르게 기대에 차오른 눈으로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몸을 내밀었다. 맥주캔을 한 손에 들고 검지로 톡, 톡, 두드리면서 일레이는 가만히 정태의를 마주본다.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지."
"그야…ㅡ나쁠 이유는 없지."
정태의가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일레이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한동안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언제든 네가 원할 때. 다만 어제 날짜로 새어서 정확히 5주 안에는 돌아와야 한다. 정재이를 만나고 말고에 상관없이."
5주. 그것이 과연
짧은 시간일지 충분한 시간일지는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미 장소를 알고 있는 바에는, 중요한 건 운 일 따름이었다. 운이 따라주면 만날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정재의를 만났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선, 어지간해서는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해야겠지. 어쩌면
5주는커녕 5년을 지내도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가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실은,
정재의가 싹둑 잘라버렸다. 더 이상은 운이라는 게 따라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럼 오늘. 날 밝는 대로 바로."
정태의는 두 번 생각지 않고 말했다. 그리로 가는 가장 빠른 편의 비행기를 타고, 그는 정재의를 만나러 갈
터였다.
일레이는 정태의가 그렇게 대답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러나 픽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6시간 뒤에 있는 13시간짜리 비행기를 지금 그 몸으로 탔다간 비행기 안에서 의사를 찾게 될 걸. 오늘은 잠이나
자. 얼굴 꼴이 꼭 유령 같으니까."
"어?"
정태의는 슬금슬금 얼굴을 문질렀다. 그야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대단히 퀭할 것 같긴했다. 실제로도,
누가 툭 밀면 그대로 쓰러져서 못 일어날 것 같다. 조금 전에도 일어나서 앉기만
하는데 몸이 흔들흔들 휘청거렸다.
"음…ㅡ그래, 좀 위험한지도 모르겠다."
체력 소모에 수면 부족. 피로 누적.
그럼 언제 가지, 하고 고민스럽게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어깨를 일레이가 옆으로 밀었다. 저항도 없이픽 쓰러지면서 정태의는 다시 노인네 같은 신음소리를
낸다.
"내일 비행기로 잡아두지. 오늘은 잠이나 자.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끙끙거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정태의를 다소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힘없는 와중에도 눈꺼풀에 온 힘을 다 주고 일레이를노려본다.
"네가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안 났다고."
"내가 건드리면 그 다음날은 이 꼴이 난다는 뜻인가?"
"여태 늘 그랬잖아……!"
이 자식이 왜 모르는 척이야. 사람은 힘들어죽겠는데. 그러나 정태의의 부릅뜬 시선에도 꿈쩍 않고, 일레이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말했다.
"그럼 내일 비행기를 타든 모레 비행기를 타든 마찬가지일
텐데. 그냥 오늘 갈까."
정태의는 나름대로 이 남자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괜히 몇 달이나 옆에서 교위 노릇을 했던 게아니다.그래서 그의 그 말에
농담과 진담이 섞여 있다는 것도 이내 깨달았다. 다만 정태의가 그 말에서 농담이길 바라는 부분과 진담이길
바라는 부분이 들어맞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좀……살려……주라……."
시트에 얼굴을 묻으면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의 인정에 호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엾고 불쌍해 보이려 안간힘을 써서 힘없이 중얼거린다. 어쩌면 통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과연 일레이의 눈에도 정태의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태의의 바람은 어느 정도는 통한 것 같았다. 일레이는 문득 픽 웃었다.
"그래. 세링게에
도착할 때까지는 여기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해 보지."
하얀 손이 뻗어와, 엎드린 채 뻗어 있는 정태의의 허벅지에서 엉덩이까지를 쓸어올렸다. 움칫,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지만 엉덩이와 허리 근처에서 잠시 맴도는가 싶던 손은 이내 떨어졌다.
그러나 안도할 사이도 없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쓰다듬은 손은 정태의의 턱을 쥐었다.
"……?"
턱을 쥐고 살짝 잡아당겨 고개를 든 통에 눈이 마주쳤다. 정태의가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엄지손가락이 정태의의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짝, 손끝을 넣는다.
그 하얀 손끝이 혀를 지그시 눌렀다.
정태의는 순간 눙늘 부릅떴다. 입 안을 살짝살짝 드나드는 손가락은 그때마다 혀를, 이를 매만졌다. 타액으로 젖은 손은 입술 위를 덧그리듯이 문지른다.
"……!"
정태의는 세차게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망할, 입은부담이 안 되는 줄 아냐.
정태의의 시선이 말하는 바를 일레이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반응도 그가 예상했던 바였던 듯, 다시 피식 웃는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면서 다른 손가락으로 가만히 뺨을 쓸었다. 톡톡, 뺨을 두드리며 찔러보던 손가락이 유쾌한 듯 슥슥 뺨을 문질렀다. 정태의는 희한하게도 오래 웃음이걸린
그 눈매를 미심꺽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말이지. 사람을 지분거리는
게 좋고 싫고를 떠나서ㅡ굳이 따지자면 뺨이며 입이며 목덜미며되는 대로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그렇게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ㅡ그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꼭…….
……아냐. 그건 아니라니까.
이놈에게 인간다운 감정이라니 그게 어디 될 법한 소리냐고. 아냐. 아냐. 그건 아냐.
정태의는 잠깐 고민했다. 아까부터 뭔가 석연찮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한 의혹이 가슴속에서 갉작거리고 있었다. 뭐랄까.
하지만 알기가 좀 무섭기도 하고, 알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 뭐
어때."
결국 잠시 고민한 끝에,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로 정태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입술을 매만지던
손가락은 그 소리를 움직임으로 느낀 듯 의아하게 혀를 두어 번 두드렸지만,정태의는 그 손가락을 가만히 한
번 깨물어줬다.
슬쩍 나가는가 싶던 손가락은, 그러나, 다시 들어와혀를 꼬집는다.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정태의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잠시 그대로 얼굴 위에 덮여 있던 손은 이윽고 떨어졌다. 그 뒤로도
한동안 얼굴 위에서 시선이 머무른것 같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대로
아스라하게 의식을 잃고 잠들어버린 정태의는 꼬박 12시간 동안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세링게
그 남자의 첫인상은, 몹시 과묵하고 무뚝뚝했다. 서른이 조금 넘었을까, 어쩌면
마흔에 가까운 듯도 했다. 쉽게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이 게이트 앞의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입 끝을 조심스럽게 살짝 올리고 눈가에 두어 줄기 주름을 지으며 웃을 때면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하게 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자는 그다지 잘 웃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과 좀체 열리지 않는 입을 고수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그 앞을 둘러싸고서 손님이나 친구, 가족을 기다리거나 혹은 호객 행위를 하는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 남자는
바로 눈에 띄었다. 세 시간 반 전에 떠나온 경유지 요하네스버그에는 그나마 백인들도 제법 보였는데,
다르에스살람 국제공항은 온통 흑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백인 남자라
단연 눈에 띄었다.
국제공항이라고 해도 여느 시골의 버스터미널과 별로 달라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공항
청사 안에서,그 남자는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그들을 보고 자세를 바로했다.
"오랜만이군요, 릭."
오랜만이라며 손을 내미는 그 남자의 얼굴에는 반갑다거나 기쁘다는 빛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일레이와 무뚝뚝하게 형식적인 악수를 나눈 다음에야 남자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손을 내밀며 그는 말했다.
"정태의 씨? 사장님께 말씀은 전해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리
게이블입니다."
"아…ㅡ반갑습니다. 정태의입니다."
정확하게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이 어쩐지 어색하게들린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런 대책도없이 여기까지 날아와서, 인포메이션에서 호텔부터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리 게이블, 하고 이름을 반추해보던
정태의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 스치듯이 들은 적이 있었다.카일의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정재의의 행방을 찾아 중동을 헤매고 다녔다는 남자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무심한얼굴로 공항을 돌아보고 있었다.
"작군."
"아프리카엔 처음이던가요? 아프리카에선 국제공항이라도 대부분 이 정도 규모입니다. 요하네스버그 공항 같은 곳이 특이하게
규모가 큰 경우지요."
게이블은 사무적으로 말하며 뒤돌아서 걸어나섰다.
정태의는 별달리 기다려줄 기색은 없어 보이는 그의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오래 기다리셨죠. 비자를 받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현지 비자라서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일처리가 느렸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게이트를빠져나간 다음에야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 누가 기다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느긋하게 나왔더니.
"기다리실 줄 알았다면 좀 서둘렀을 텐데.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정태의 씨."
정태의는 정중히 대답하는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분명한 발음이다. 하지만 정태의, 라고 할 때만은 약간 말이 느려지는 걸 보면 특별히 신경 써서 발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태의는
픽 웃었다.
"그냥 태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게이블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수 적고 무뚝뚝한 서양인은 오랜만이다. 물론 카일의 집에 머무르면서도
말수 적은 손님이라면 몇이나 봤고 정원사인 페터와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말을 섞기 어려웠지만, 이 남자는 한층
각별하다.
"정재이는?"
정태의의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일레이가 불쑥 물었다.
"세링게에 있을 겁니다."
"확실한가?"
"확실하다고 말하긴 어렵겠군요."
"가능성이 어느 정도야."
"글쎄요. 7, 8할 정도는."
짧은 대화가 몇 차례 오갔다.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 밖으로 나가자 바로 그 앞에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게이블이 올라타자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인이 기어를 풀었다. 짧은
인사가 오간 뒤, 곧 차가 출발했다.
정태의는 홍콩에서 근 17시간의 비행을 거쳐 겨우 제대로 땅을 딛은 기분이 들어, 딱딱한 시트에 기대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7, 8할이라. 가능성으로
치면 낮지 않은 숫자이긴 하지만, 5주라는 시간을 들이부어 모험을 걸기에는결코 높은 숫자도 아니었다.
숙부나 카일이 낮은 확률에 걸 리는 없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기껏 여기까지 와서, 알고 보니 여기에 없더라고 하면. 그럼 다시 원점이다. 5주 동안 머나먼 나라에서 휴가나 즐기고 돌아가는 거다.
나쁠 거야 없겠지, 라며 머리를 긁적이는 정태의의옆에서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저 남자의 입에서 7, 8할이란 말이 나왔다면, 분명히 있다고 보면 돼. 이제
너는 그저, 어떻게 하면 정재이와 만날 수 있을지만 고심하면 되겠군."
일레이의 말으 듣고 정태의는 흘끔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리어뷰 미러 안으로 게이블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대로 시선을마주하고 있던 그 과묵한 남자는, 어쩐 일인지 먼저입을 열었다.
"정재의 씨의 동생이라고 했죠."
"아, 예."
그러자 다시 그는 말없이 정태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봐야 거울 안이라서 얼굴 언저리 약간이었지만, 지그시 훑어보던 그는
짧게 말했다.
"닮았군요."
그런가요, 라고 대답했지만
그 뿐이었다. 닮아서 어쨌다는 건지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인사치레였는지도
모른다. 하긴 생각해 보면 서양인은 대체로 동양인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니, 얼굴이 좀 평평하고 피부빛이 노르스름하고 머리가 까만색이면 다 비슷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세링게로 갈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게이블의 말에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섬이라고 했다. 다르에스살람에서 경비행기를타고 들어간다고
들었다.
차는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야트막한 낡은 건물들이 늘어선 시장통에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넘쳐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온통 새카만 인파들이 거리를
메워 차가 거북이처럼 나아가는 가운데, 정태의는 희미한 멀미를 느꼈다. 타이어가 타는 냄새가 나서 더 그런 것 같다.
어지간해서는 멀미를 느끼지 않는데 오랜 비행에 곧바로 불편한 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길을 달리니,아무래도 속이 거북해졌다.
"다르에스살람은……넓은가요?"
정태의는 물을 한 모금 삼키며 물었다. 게이블은 리어뷰 미러로 흘끔 시선을 주어디 말했다.
"탄자니아에서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인구가백만을 훨씬 넘어서니."
"백만……."
광역시와 비슷한 정도일까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다시 물을 마셨다. 메슥거리는 속을 그렇게라도 가라앉히려고 하며 바깥으로 시선을 준다. 그
옆에서흘끔 정태의를 쳐다본 일레이게 불쑥 물었다.
"경비행기 이착륙장이 항구 옆에 있다고 했었지.
항구까지는 오래 걸리나?"
"15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거기에서 경비행기를 갈아타 40분 가량 가면 세링게에 닿습니다."
15분이라는 말에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물통이 비어버렸다. 빈 물통을 가볍게흔들며 흠,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일레이가 물통을 하나 던졌다.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들며 정태의는 일레이를
보았다.
"체력이 그래서야 정재이를 만나더라도 끌고 나올힘도
없겠군."
"애초에 별로 끌고 나올 생각은 없는데.
형이 원치 않는다면 내가 끌고 나올 도리도 없고."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물통 뚜껑을 열었다. 생각 없이 주욱 들이키다가 풉, 뺨에 불룩하게 물을 채운 채 번뜩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물통에 붙은 라벨을 보았다.
"……그렇잖아도 메슥거리는데 탄산수가 다 뭐야."
벌레 씹은 얼굴로 물을 삼키고서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보고,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는 일레이는 픽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차는 사람들로 혼잡하기 짝이 없는 시장통을 지나 겨우 제대로 된 차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게이블의 말마따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와 붙어 있는 조그만 이착륙 청사 건물에 다다랐다.
정신의 고행보다는 육체의 고행이 차라리 견딜 만하다고도 하지만, 정말이지 길고 오랜 고난의 길이었다. 길의 마지막 끝까지 정태의는 고난
속에 나아갔다. 4인승의 낡아빠진 경비행기의 비좁은 좌석 뒤는 짐칸이었다. 뭔가 카펫 같은 큼직한 두루마리가 짐칸에서 좌석으로 비죽이 튀어나와, 세링게로 날아가는 동안
내도록 정태의의 등덜미를 짓눌렀다.
앞좌석 등받이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해서 40분 동안 경비행기의 요란한 모터 소리를 들으면서, 정태의는 차라리 배로
갈 걸, 하고 후회했다. 시간이 몇배나 더 걸린다고 하지만,
뒤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짓눌려서 고행을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배로 가기를 택했을 거다.
"배로 오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경비행기에서 거의 기다시피 해서 내린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힘 빠진 얼굴로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어쩐 일로 이 남자가
인간다운 걱정을 다 하나 싶었다.
"오면서 내려다보니까 바닷빛이 근사하던데.
배로 천천히 오면서 즐겨도 좋을 뻔했어."
"……."
인간다운 걱정을 한 순간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바보다. 정태의는 스스로를 탓했다. 또한 한편으로는,바닷빛이 근사하다는 둥 하는 인간다운 감탄을 할 리가 없는 인간이니 필경 정태의의 부아를 돋구려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놈은 왜 점점 더 성질머리가 나빠지지……. 캐면캘수록 더러운 성질이 더 발굴되어 나오는 것 같아.이것도 일종의 화수분이다,
화수분.
정태의는 그래도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차가운 바람을 들이키자 금세 속이 나아져, 울렁거림이 잦아드는 명치께를 문지르며 크게 호흡을 했다.
"여기에서 숙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차로 한 10분……. 여차하면 지름길로 걸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두어 시간 걸어야 할 테지만."
아직도 푸르스름한 정태의의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게이블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으음, 하고 정태의는 위장 언저리를 몇 번 두드렸다. 바람을 맞고 심호흡을 몇 번 하자 속은 한결
나아졌다. 10분 정도면 차를 못 탈 것도 없다. 게다가 원래는 멀미를
그리 심하게 하는 편도 아니었다.
정태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날이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두어 시간 지나면 제법 어둑해져 있을 것 같다.
"지도는 있나요."
그렇게 물어보는 정태의가 걸어갈 셈이란 걸 깨달았는지, 게이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길을 압니다. 그럼 걸어가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게이블은 잠깐 시선을떨어뜨렸다.정태의는 자신의 깁스한 발을 살피는 그의 시선을 깨닫곤 아아, 하고 발을
까닥였다.
"걸을 만해요. 달리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길이 험합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괜찮습니까?"
정태의는 게이블이 다시 묻는 말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발은 괜찮지만 그보다, 지도만 있으면 찾아갈 수 있으니 굳이 게이블 씨까지 걸어가실 건 없는데요."
제가 이래 봬도 독도(讀圖)는 아주 잘 하거든요, 라고 덧붙이는 정태의에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은 게이블은 성큼성큼
걸어나서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곤 그를따라나섰다. 아주 잠깐 늦게 나섰을 뿐인데 어느새 여남은 걸음은 앞서가는 게이블의 뒷모습을 보며 정태의는 거참, 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말수가 적은 사람인걸."
"아아, 원래
그런 편이지."
옆에서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흘끔 그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보지."
"음. 원래
제임스와 같이 일했거든. 내가 미성년일 때에는 우리 집에도 종종 드나들었어. 그러다가 부서가 바뀌면서 거의 못 봤지만."
정태의는 예전에 카일의 집에 머무르면서 한 번인가 스치듯이 보았던 제임스라는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카일 아래에서 일했다면 아는 사이일 만도 하다.
정태의는 이쪽의 기척을 재고 있는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가면서도 놓칠 만큼 멀리 떨어지지는 않는게이블의 뒤를 따라가며 천천히 주위를둘러보았다.
이착륙장에서 떠나 큰길가를 잠시 걷다가 널찍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평범한 길이 나타났다. 차 두대가 넉넉하게 스쳐갈 만한 아스팔트 길과
가로수가 주욱 늘어선 한적한 인도. 포장된 길이 있다고는하지만 차는 드문드문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게이블은 저 앞의 횡단보도에서 멈춰서, 차가 다니지도 않는 도로의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신호등을 쳐다보고 있는 게이블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정태의는 그의 뒤로 가 섰다. 갓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녀들이스쳐가며 신기한 듯한 눈빛을 보낸다. 히잡을 휘감아 조막만한 얼굴만 빼꼼하게 보이는 그
순박한 눈망울에 정태의는 웃음을 흘렸다. 소녀들이 놀란 얼굴로 저만치 사라져간다.
"아프리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이거야 회교도의 도시인걸."
"이 섬은 아랍계 사람들이 먹여살리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따로 산업이 발전할 만한 환경도 아니고 본토에서 원조를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라, 아랍부호들이 머무르며 쓰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연히 문화도 회교권이나
같아요. 중동의 소도시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러니
여자들에게 함부로 웃거나 말을 걸면 안 됩니다."
게이블이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어, 그래요? 하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정태의는 내심 '조금 전에 위험한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군'하고 생각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고 사람들도 가끔 한가하게 걸어 다니는 이 한적한 길을 가며, 정태의는 문득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나 갔을까, 아담한 회교 사원을끼고 안쪽 골목으로 돌아들었다.
찻길은 아니었지만 차가 한 대 정도는 그럭저럭 다닐 수 있을만한 넉넉한 골목길은 두서없이
미로처럼 세워진 집들 사이로 나 있었다. 골목 옆으로 회벽을 바른 집들이 단초롬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끔 나무문으로 어린애가 뛰어나오거나 대문 앞의 볕드는 자리에 의자를 내어놓고 노인이 거기에 걸터앉아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는 햇볕을 가리는 나무들이 풍성한 가지를 뻗쳐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사각 사각, 잎이 스쳐 상쾌한 소리를 냈다.
"나는 이곳이 좋은걸."
정태의는 문득 불쑥 중얼거렸다. 굳이 말하려고 뜻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말이었다.
게이블이 흘끗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오른 모습을 보았다. 그 웃음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지만.
"살기 좋은 곳이지요. 한적하고 평화로워서."
아. 정태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절로 깨달았다. 이 남자도 이곳이 마음에 든 것이다. 정태의는
공연히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그때였다. 별 말 없이 옆에서
걷고 있던 일레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유로이 다니면서 몇 달 휴양하기는 딱이군.
물이랑 떨어져 있으면 원하는 물건들을 바로바로 구하기는 다소 힘들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리긴 하나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없지요.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바헵 거리에서ㅡ섬 남쪽의 바닷가에 인접한 마을인데 파도가 좋아서 서핑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로 가지요ㅡ야시장도 열리는데, 다르에스살람에서 구할 수있는 거라면 거기서도 대부분
구할 수 있어요."
"야시장?"
"저녁 예닐곱 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바헵의 중앙광자에서
열리는데, 상업적인 시장 말고도 벼룩시장처럼 아무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요.
가끔 재미난 물건들도 나와서, 늘 사람이 북적거리지요."
하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태의는 그것 재미있겠군요, 라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다가 재차물었다.
"세링게에는 관강객이 많은가요?"
게이블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 관광객은 여기까지는 잘 오지 않아요.
다르에스살람에서 더 가까운 잔지바르로 가는 게 보통이니까. 여기는,
여기에 별장을 두고 또 다른 거처로 삼는 중동 쪽의 왕족이나 거상들이 주로 머무르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이 무렵이면 조류 때문에 파도가 좋아서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제법 찾아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때고,
이 무렵이 지나면 외지인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조용히 묻는다.
"그럼 외지인이 돌아다니면 금방 눈에 띄겠군요."
게이블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걸음을 늦추며 정태의를 일별한 그는 말없이 걸었다.
이곳에 정재의가 있는지 없는지,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건,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지 않는다는 듯이다. 그러나 정재의와 같은,
아프리카인도 아니고 아랍인도 아닌 사람이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면 이곳에서는 필경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 근처에서 소문을 수집해 봐야 소용없어요."
말없이 한동안 걷던 게이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랍 부호들의 별저가 모여 있는 곳은 바헵에서도좀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는 구역인데, 그곳은 섬회 다른 지역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시피 하니까.
이곳의 소문은 거기까지 갈지언정, 그곳의 소문은 여기까지 오지 않지요."
"그러면 왜 형이 거기에 있다고…ㅡ."
"거기가 아니면, 정재의가 있을 곳은 이 땅 위에 더는 없으니까요."
게이블은 말을 맺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보폭을 벌여, 다시 앞으로 저만치 나아가 그들과 여남은 걸음쯤 거리를 두었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겸연쩍게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슬쩍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화나게 한 건가."
"음? 아.
원래 저런 사람이야. 좀 무심한 편이지."
"……."
이 남자에게 무심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니, 저 사람도 인생 막장이구나.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다가, 하고 입속으로 중얼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게이블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일레이가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응?"
"네 말이 맞아."
"……? 뭐가."
정태의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다가 되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나 떠올려봤지만, 자신이 한 말 가운데 어떤 말에
대해 그가 이렇게 말하는지 좀체 알 수 없었다.
"네 말대로 이곳에서 외지인은 너무 눈에 띄어.
특히나 동양인은 드문 만큼 더욱. 어느 구중심처에 가둬두지라도 않는 이상은 수소문해내기가
아주―――쉽겠는걸."
"아? 응,
그렇지. 형, 정말로 어느 별저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있으면 어쩐다지.만날 도리가없는데."
정태의는 인상을 쓴 채 중얼거렸다. 차라리 어느 별저에 있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밤중에 몰래 담치기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동남부 지역에 있는 별저들에 모조리 다 숨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한숨을 쉬었지만 금세 좋은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숙소에 가서 좀 씻고 푹 쉬면서
생각해 봐야 할 모양이다.
정태의가 어떻게든 되겠지 뭐, 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걸 바라보던 일레이는 짧게 혀를 찼다.
"눈에 띄는 건 네놈도 마찬가지란 거지……."
"음? 아,
그래. 동양인이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띄더라고 하면 그 소문이 형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호기심을 가진 형이 나와 볼…ㅡ. ……리가 없지. 소문에 귀가 밝은 사람도 아니고 그런 면으로는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도 아니고."
차라리 '동양인이 어슬렁거린다'가 아니라 '정태의라는 동양인이 어슬렁거린다'로 소문을
퍼뜨리면 어떨까, 그러면 또 알아, 금방 만날지,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리는 정태의를 바라보며 일레이는 뜻에 어긋난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진 않았다.
게이블이 말했던 대로 두어 시간, 정확히는 10분이모자라는 두 시간을 걷고 나서야 그들은 숙소에 다다랐다.
해는 이미 저물어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어둑어둑한 골목 안쪽, 널찍한 돌담으로 두른 집의나무문을 열면서 게이블은 여남은 걸음 뒤에서 오는 그들을 기다려주었다.
한적하고 선선한 길을 거닐어 온 두 시간 남짓의 산책은 마음 편하고 즐거워, 그리 힘든 길이아니었다.
이곳에서 앞으로 대략 한 달을 보낸다. 이 섬의 어딘가에 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형 역시 이 안온하고한가로운
공기 속에서 지금쯤 쉬고 있을까.
정태의는 웃었다. 그리고 게이블이
열어준 나무문을 스쳐 들어갔다.
* * *
"회교국에서 갑자기 휴양 관광지에 떨어진 기분이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숙소는 아담한 2층짜리 백패커였다.
아담하다고는 하나 갖출 것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1층의 중앙에는 거실처럼 쓰는
홀과 그 옆에 딸린 널찍한 주방, 그 옆으로 세탁실과 사무실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복도 안쪽으로는 방이 몇 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2층에는 방이 서넛, 일자로 난 복도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2층 객실의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집 앞 너른 정원의과실수와
한쪽에 조그맣게 딸린 풀장이 보였다. 잔디에는 과실수에서 점점이 과일이 떨어져 있었고 과실수 사이사이에는
해먹이 걸려있다.
"전형적인 백패커네……. 관광객도 별로 없다면서 숙박업을 해도 괜찮은가 몰라. 우리 말고는 손님이없나."
"아마 통째로 빌렸을 테지. 여기저기 소문을 내면서사람을 찾아다닐 작정이 아니라면."
양쪽 창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창틀에 걸터앉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레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선 그들을 맞아준 사람은 안나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젊은 여주인이었다. 어쩌면 정태의보다도 어리겠다 싶은 그 여주인은 그들을 2층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가장 볕이 잘 들고 좋은 방이라며, 나란히 붙은 방을 하나씩 주었던 것이다.
젊다못해 어리게까지 보이는 여주인을 다소 어리둥절하게 쳐다본 걸 깨달았는지, 그녀는 웃으면서 '제가 여기 주인이 맞답니다.'라고 굳이 말을 해두고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인 뒤에야 내려갔다. 게이블은 1층의 안쪽 방을 쓴다고 덧붙이고서.
"한가로운 거리군. 이런 데에 집 사놓고 게스트하우스라도 차려서 한가롭게 가끔 손님을 들이며 살면 좋겠어."
"노인네 같은 바람이군."
창틀에 앉아서 중얼거린 정태의에게 일레이의 웃음 담긴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씻을 작정인 듯,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있었다. 제 방에도 욕실은 있을 텐데 왜 여기서.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에서 출발해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하루가 걸렸다.
말이 하루지, 줄곧 비행기며 차 따위를 갈아타며 보낸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나마 좋은 것은, 이렇게 저녁에 도착하면 피곤해서 바로
뻗어버려 아침에야 일어나기 때문에 시차에 적응하기 편하다는 정도일까.
약 한 달간 머무르게 될 이 섬은 마음에 들었다.
다르에스살람가지만 해도 정태의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음들 속에서 피로가 한층 더 누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섬에 도착해 한가롭고 안온한 길을 걸으면서,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살아났다. 가끔 스쳐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안에 섞여 있는 호의도 따뜻하게 스몄다. 회교 특유의 엄격하면서도 낙락한 그 분위기도,
정태의는 좋아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자 나무바구니를 들고 뜰에 나와서 떨어져 있던 과일을 주워담던 어린 흑인 소녀가 정태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집에 고용되어 집안일을 도와주는 소녀인 것 같았다. 흑인의 특징이 더
진하게 드러나 있지만 아랍계와 혼혈인 듯한 생김새다. 그러나 회교도는 아닌 듯, 히잡을 두르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교도 여자가 아니라면 말을 걸거나 해도 위험하지는 않겠지. 그전에, 여자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어린 소녀였다. 열 네댓이나 되었을까.
정태의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소녀가 귀여워서 설핏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소녀는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리더니 허겁지겁 과일을 주워담아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흘끔 정태의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는 눈매가 부드러웠다. 그저 수줍을
뿐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웃었다.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 숙소에 손님이 든 게 신기한 걸까. 아니면 단지 보기 드문 동양인이라서 희한한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시선을 돌렸다. 담장 너머로 야트막하고 아담한 집들이 조용히 이어져 있었다. 어슴푸레한 저녁의 어둠에 잠겨
창으로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다. 멀리 어디선가, 엄마가 아이를 부르는
듯한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 그런 점은 세상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인가 싶어 다시 웃고 말았다.
이런 느낌이 좋았다. 낯설면서도 그립다.
그때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그쳤다. 고개를 돌리자 일레이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샤워부스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창틀에서 내려왔다.날벌레
따위가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방충망을 닫아둬야겠다고 생각해 창 바깥으로 몸을 내밀어 방충창을 당겼다.
그러다가 문득 돌담 밖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기척을 깨달았다.
어둑해서 잘은 보이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 옆에서 한 소년이 정태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 소년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골목 저편으로 마구 뛰어가버렸다.
"……?"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동양인이 신기하긴 신기한 모양이다. 아니면 단순히 내성적인 사람들이 많든가.
하지만 지나가다가 쳐다본 듯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정태의가 제대로 생각을 전개시키기도 전에 일레이가 등 뒤로 다가왔다.
"날 다 저물어서 어두운데 뭐가 보이긴 하나?"
그러나 그가 말을 막 마치자마자 정원에 설치된 조그만 등 서너 개에 불이 켜졌다.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밤이라도 정원을 거니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만은 했다.
"음. 아주
잘 보이는데. 과일을 따먹을 수도 있겠고 풀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겠어."
정태의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보다 말고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몸의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아 방울방울 몸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나신은 뻔뻔하게도 수건
한 장초자 두르지 않았다. 정태의는 흘끔, 아래를보았다.
그래도 세우고 있지는 않으니 그나마 낫군. 하긴 샤워하면서 흥분한다면 그건 문제가 심각한 거지.
정태의는 돌아서 창틀에 손을 짚고 기대어 섰다. 그 옆으로 다가온 일레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틀이 그다지 높지 않아
다 벗고 있다는 게 밖에서 훤히 보이겠다고 정태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줍은
건 저놈이다. (수줍어할 놈도 아니었다.)
"지금 뭔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일레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정태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등골이 싸늘해졌다. 이런 귀신 같은 놈. 귀만좋은 게 아니라 감도 무시무시하다.
골목 모퉁이에서 흘끔흘끔 여기를 쳐다보던 흑인 소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말 안 하기로 했다. 이야기해서 하등의 도움이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음. 나도
뭔가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봤는데, 어두워서 잘 모르겠던걸."
"흠……?"
섣불리 '난 전혀 못 들었는걸'
같은 말을 하면 되려더 피박을 쓸 것 같아서 정태의는 모른 척 적당히 흘려 말했다. 일레이는 흘끗 정태의를 보았지만 별 말 하지 않았다.
"어. 또
나왔네. 안녕――――."
정태의는 군데군데 불이 밝혀진 어두운 정원으로 다시 자박자박 걸어오는 아까의 그 흑인
소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늘의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가는건지 옷을 갈아입고서 문
쪽으로 걸어가던 소녀는 수줍게 힐끔 2층을 올려다보았고, 정태의가 웃으며
손을 젓자 이번엔 화들짝 놀라거나 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손을 마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 얼른
문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정태의가 낮게 소리내어 웃자 옆에서 일레이가 미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정태의는 그 시선을 눈치채곤 왜 그러냐는 듯 응? 하고 중얼거렸다.
"왜. 귀엽지
않아?"
"여자 취향이 저랬었나, 정태이?"
"뭐?"
희한하다는 투로 말하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멍하니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 말뜻을 깨닫고 어이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야, 저게
무슨 여자야. 아직 열 네댓밖에 안 되어 보이던데. 저런 쬐그만 애를
무슨……. 어린애가 바지런하게 다니니까 귀엽잖아."
"몸은 어린애라도 머릿속은 여자애인 것 같던데.
하긴 너는 여자랑은 못하는 성향이었지."
순간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어진 정태의는 윽, 하고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거의 사실이긴 한데 뭔가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못하다니, 안 하는 거지. 사람을 무슨 불능처럼 말하고 있어."
정태의가 투덜투덜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불능이 아닌 건 익히 알고 있어."
문득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아차, 하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의 손이 정태의의 바지춤에 앞섶을 그러쥐었다. 억세지는 않지만느슨하지도
않게 그의 손이 바지위로 샅을 쥔 순간,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손이 성기를 짓이길 듯이 틀어쥐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남아 있는 탓이다.
정태의의 얼굴이 굳어진 걸 알아차렸는지 일레이는희미하게 웃었다. 바로 귓가까지 얼굴을 가까이 한그는 낼름, 정태의의 귓불을 핥았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쥐어 터뜨리지는 않을 테니까."
즉 이유가 있으면 쥐어 터뜨리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건 얼마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붙여버릴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샤워하는 동안 창틀에 앉아 꼼짝도 안 하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했어."
정태의의 샅에서 손을 떨어뜨려 허리께를 쓰다듬으며 일레이가 정태의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귓바퀴에, 뺨 언저리에 미끄러지는
입술이 간지럽다. 이놈이 대체 왜 이렇게 나쁜 버릇이들었지,나를 보면
섹스밖에 생각이 안 나나. ……하긴 UNHRDO에있는 동안에 이 자식,
날 손쉬운 자위도구쯤으로 여겼었지.
그 기억을 떠올리자 갑자기 울컥 불쾌감이 솟아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네 방에도 욕실이 딸려 있을 텐데 왜 굳이 내
방으로 찾아와서 내 욕실, 내 샴푸, 내 비누를 쓰나,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볼멘 중얼거림을 미처 다 듣기도 전에 일레이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욕실의 샴푸와 비누가 좀더 신선하더라고.
참을수가 있어야지."
샤워의 욕구를 참을 수 없었나. 그렇다면 다른 욕구도 참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다.
정태의는 옷깃 사이로 파고 들어와 허리에서 슬슬 가슴 쪽으로 올라오는 손길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간지러워서 몸이 흠칫거렸다.
이상하단 말야. 원래 이렇게 절조
없는 놈이 아니었는데. 둘만 있으면 사람을 집요하게 건드려대는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태의는 이내, 어쩌면 단순히 자신이 몰랐을 뿐 이 남자는 원래 이랬는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하긴 이 남자가 누군가와 몸을 섞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도 몇번 있었다.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그런 모습은 우연히라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다.
"그래, 정재이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귓가를 간질이며 일레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슬슬 떨어뜨리려 하자 하얀 손이그 얼굴을 잡아 고정시킨다. 괜한 짓 말라는 듯 귓불을 깨무는 이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뜨끔한 아픔에 눈살을 찌푸리며 정태의가 어깨를 움찔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뺨을 덮었던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졌다.
"글쎄, 모르지.
아직 이 집에서 나가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
"흐음. 쌍둥이라면
뭔가 나름대로 감각이라든가……그런 건 있지 않나?"
"다른 쌍둥이는 어떤지 몰라도 나에게 그런 게 없는건
분명해. 그런데, 저녁 먹어야 하지 않아?"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일레이의 어깨를밀어보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순순히 손을 놓으며 가볍게 장난을 친 것처럼
물러서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그럴 낌새가 없었다.
정태의는 어느새 바지 앞섶을 듬직하게 찔러오는 살덩이를 느끼면서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았다.
"……일레이."
"음?"
"……. 내가
그렇게 좋아?"
말하고 나서야 이거 여차하면 얻어맞을 농담인가 생각했지만, 그렇게 유머 감각이 없는 놈은 아니다.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한 번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가, ……웃음을 샀지.
정태의가 생각했던 대로, 정태의의 입술 위를 입술로 지분거리던 일레이는 잠시 멈칫했다. 그대로 머무르는가 싶더니 약간
몸이 떨어진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게 있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만큼은 느껴졌다.
다음 순간,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매우 유쾌하다는 듯 한참 동안 소리내어 웃으며, 그는
선술집에서 멋진 친구라도 만난 듯이 정태의의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이. 너는
정말, 내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잘도 한단 말야. 그래, 그래. 전에도 그랬었지. 그때 어떻게 했더라……. 아, 맞아. 널좋아한다고 하면 얌전히 다리를 벌려줬던가? 듣고싶다면야 얼마든지 말해주지."
"아니, 듣고
싶은 건 아니거든……."
"태이,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벗어."
웃음 섞였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괜한 말을 해서 본적도 못 건졌다는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일 거다.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뒤로 빼며, 그제야 시야에서적당한 거리가 생겨 얼굴이 보이게 된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았다. 조금 놀랐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눈꼬리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눈의 착각이겠지만 상냥하게 마저 보이는 저런 웃음기가 떠오른 눈매라니, 꼭 정상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얼굴도, 제가 말한 대로 재깍 벗지 않으면 당장 평소의 그 미친 놈 얼굴이 되겠지.
벨트 버클을 붙잡고 정태의는 잠시 우울하게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도착한 지 세 시간도 채 안 되었다. 심지어 이 숙소에 이르러
짐을 내려놓은 걸로 따지면ㅡ내려놓은 짐이라고 해봐야 거의 없다시피했지만ㅡ한 시간도 채 안 됐다. 만 하루의
고행을 거쳐 겨우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또다른 고행의 시작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하다.
침울한 얼굴로 벨트 버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정태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창틀에 기대어 선 그를 팔 안에 가두 듯 손을 내밀어 창틀을 짚으며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었다.
"나도 같은 걸 물어보도록 할까. 정태이. 너는 싫은가?"
"어?"
정태의는 잠깐 그의 질문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뭐가 싫으냐고 묻는 건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상황과 맥락에서
보자면 둘 중 하나다. 네놈이 싫든가, 행위가 싫든가.
"……."
정태의는 다시 짧은 고민에 잠겼다.
이놈이 싫은가. 그런 전제를 던지자마자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게 있었다. 그럼 이런 살인광이뭐가 예쁘다고 좋아할까. 게다가 언제든 내 목을 따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건 물론, 평생토록 옆에 두면서 죽도록
괴롭게 만들어주겠다고 벼르는 놈을.
……. …….
그런데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스스로도 웃기는 얘기였지만, 이 남자가 싫은 건아니었다.어쩌면 언젠가 이 남자에게 이야기했던 친구들과 비슷한 맥락인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그의 어떠한부분을 분명 싫어했지만, 그 부분이 그에
대한 감정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면 일단 첫
번째는 아니라고 치고.
그럼 이놈과의 행위가 싫은가. 두 번째 전제를 던지자마자 다시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마구간에 가야 할 법한 저 빌어먹을
아랫도리를 그럼 어떻게 좋아하라고. 한 번 넣었다 하면 그 다음 날은 하루종일 침대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또, 아주 좋게 생각해준다면,
삽입만 제외하면 행위는 나쁘지 않았다. 정태의는 나름대로 담백한 편이라 굶주리면
굶주린 대로도 얼마든지 살 수있었지만 성적인 쾌락을 즐기긴 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쪽 방면으로는 더없이
만족스러워, 늘 확실하게 정태의를 절정까지 끌어다주었다. ……그래.그 빌어먹을 아랫도리만 빼면.
정태의는 분연히 외칠 수 있었다. 그놈의 성기 반으로 깎아내고 오면 얼마든지 좋아하겠다고.
잠시 동안 머릿속으로 사고를 굴리는 정태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문득 그의
눈매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싫은가 보지. 뭐……, 싫어도 할 수 없고."
"어?"
정태의가 멍하니 대답을 제대로마치기도 전이었다.
그의 손이 덥썩, 정태의의 샅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울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조금 전보다는 세게, 보다 선명한 뜻을 담고서.
정태의는 그 순간 불현듯 생각했다. 이 남자는 오늘정말로 끝장을 볼 작정인지도 몰랐다.
"어이!"
정태의는 일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말없이 일레이는 시선만 정태의에게로 떨어뜨린다.
"내일부터는 형을 찾으러 돌아다녀야 할 것 아냐.
게다가 오늘은 이제 막 도착한 참인데다 나는 배가고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그런데
종일 침대에만 박혀 있는 신세가 되면, 날더러 정말로 죽으라고?"
그러나 일레이는 피식, 입매만 올려 웃을 뿐이었다.
"그건 네 사정인데."
정태의는 붙잡은 일레이의 팔을꽈아악 움켜쥐었다.자신의 악력이 이 남자에게 못 미친다는 사실이 분해졌다. 이 남자였더라면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팔을 또각또각 바스러뜨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기운이 빠져서, 팔을 놓고 말았다.
"그럼, ……적어도
밥이나 먹고 하자. 나 진짜로 기절할 것 같다고. 너도 시체처럼 기절한
사람에게 대고 그 짓을 하고 싶진 않을 것 아냐."
정태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만일 이대로 굶고서극심한 체력 소모를 한 다음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해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으면, 정말로 죽고 말 거다.
일레이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걸음을 돌렸다.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야 물론 애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의외로 인간적인 면 도 있는…ㅡ
그러나 정태의가 제대로 감탄하기도 전에 그는 침대로 올라가서 앉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아무렇게나 뻗은 다리를 보란 듯이 벌렸다.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사타구니는, 조금 전 느꼈던 대로, 부풀 만큼
부풀어 있었다.
"밥 먹고 나서 해도 좋겠지. 하지만 그 전에 급한 불은 꺼야지. 이리 와, 태이.
그러고 보니 엊그제, 입으로 하겠다고 했었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일레이가 정태의를 불렀다. 정태의의 시선은 그의 사타구니에 못박혀 있었다.
그야 물론 그때는 급한 김에 그렇게 말을 하긴 했는데, 저건 다시 봐도 참…….
질린 얼굴로 그 살덩이를 노려보는 정태의의 귀에,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태이. 와."
흘끔, 시선을 들었다.
일레이의 서늘한 눈길과 마주쳤다. 빌어먹을, 또 어디서 수가 틀려서 기분이 상했나, 저놈 자식이. 정태의는 아, 정말, 하고 투덜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일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래, 마음대로 써먹어라. 내가 정말, 얼른 기회 잡아서 다음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튀어버려야지, 원.
"정태이. 엉뚱한 생각 마."
정태의는 가끔 이 남자의 짐승 같은 감이 무서웠다.어쩌면 머릿속을 투시해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생각이 들어서 가능한 한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하며 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 앞에 앉아 절로 머리가 비었다.
다시 봐도 이건……진짜 흉기다.
주춤거리며 질린 얼굴을 풀지 않는 정태의를 지그시 쳐다보던 일레이는 갑자기 정태의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사납게 자신의 사타구니로 머리를 누른다. 숨을 들이킬 여유도 없이 균형을 잃고 엎어진 정태의의 얼굴을 뜨끈하게 솟은 살덩이가 문질렀다.
"예전에는 형편없었어. 이번에는 제대로 해 줬으면좋겠군.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다면 네가 굶어죽든 말든,
나는 네 아랫구멍에 박아넣을 생각이니까. 잘 빨아."
희미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미친놈.
갑자기 속에서 욱하고 불덩이 같은 게 치밀었다.
정태의는 눈앞에서 불뚝 솟아 있는 살덩이를 두 손으로 그러쥐며 거칠게 중얼거렸다.
"너 다시는, 좋아하니 사랑하니 그 따위 소리하지 마. 그런 농담을 하는 놈에게 이런 짓을 당하면 더불쾌하니까.
네가 바라는 대로, 그래, 빨라면 빨고 핥으라면
핥아야지."
정태의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자마자 그 살덩이를 입에 물었다. 빌어먹을. 입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니, 그보다 입에 물자마자 후회했다. 끝부분만 겨우
입안에 담았는데도 한계까지 벌어진 목이 숨통을 눌러, 숨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젠장. 제기랄.
이걸 대체 어쩌면 좋지.
정태의는 입을 뜨끈하게 채운 이 살덩이가, 이렇게나 한가득 집어삼켰는데도 아직 반도 채 안 들어가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입에 무는 게 아니라 핥아야 할까. 끄트머리만 겨우 문 채 어쩔 줄을 몰라하던 정태의는 흘끔
눈을 치켜올려 일레이를 보았다.그러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최악이다. 표정 하나 없이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냉랭한 얼굴은, 분명 끔찍하게 뒤틀려버린 기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분이 뒤틀려야 할 건 이쪽인데 왜 네놈이, 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이 뻗어왔다.
한 손이 정태의의 머리를 움켜쥐고 지그시눌렀다. 컥, 밭은 숨이 섞인 신음이 입안에서 터져나오다가 살덩이에 눌러 가로막혔다.
"빨라면 빨고 핥으라면 핥는다? 말 잘 했어, 정태이.빨고 핥아. 앞으로 매일 부대낄 물건이니 제대로 기억해 둬야지. 오늘 내가 싸는 걸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간
정말로 지옥을 보게 될 테니, 열심히 삼키는게 좋을 거다."
아직까지 내가 덜 본 지옥이 뭐가 남아 있다고, 그렇게 되쏘아주고 싶었지만 입안이 가로막혀서 말할수가 없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통에 거대한 살덩이가 목구멍까지 파고 들어왔다. 목젖을 세개 후려치는 탓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치민다.
저도 모르게 몸을 버둥거렸지만 머리를 움켜쥔 억센 손은 꿈쩍도 않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에 맺혔지만 정태의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했다.
"왜 그래, 입이 안 움직이잖아. 건방진 말을 지껄일 때만 잘 움직이나, 이 입은?"
일레이가 거칠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실례합니다, 라는 게이블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순간 정태의의 사고가 멎었다. 아주 잠깐, 정태의의머리를 누르던 손길도 멎은 듯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손은 다시 정태의의 머리를뒤흔들었고, 입 속을 가득채운
살덩이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정태의는 마구 몸을 뒤틀었다. 거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당혹스러움이 머릿속을 메워 다른 뭔가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는 게 정확했다.
그러나 정태의를 붙잡은 일레이의 손은 늦추어지지않았고, 달칵, 문이 열렸다.
정적이 흘렀다. 정태의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았다. 그저 정태의의 입 안에 추삽질을 하는 일레이의허리만 조금씩 움질일 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버린 정태의의 위로, 일레이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급한 일인가?"
그러자 잠시 사이를 두고, 그와 마찬가지로 별반 동요하지도 않은 듯 담담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급할 건 없지요. 그럼 아래층에 있을 테니 끝나면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찰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뿐이었다. 외부의 짧은 간섭은
그걸로 끝나버렸다. 게이블이 정태의에게 뭐라고 한 것도, 사납거나혹은
경멸스런 시선을 보낸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없었다는 듯 그저 담담하게 심상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나중에 다시 정태의와 얼굴을 마주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대할 거다.
하지만.
"…ㅡ."
정태의는 가슴속에서 치솟아오르는 신음을 겨우 삼켰다. 아니, 신음을 흘리려 해도 어차피 입을 가로막은 살덩이에 막혀서 불가능했지만.
굉장히 속이 상했다. 아니, 속이 상했다는 표현은 다소 어긋나 있었다. 온몸을
조각조각으로 찢기는것처럼 처참하고 아팠다. 예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감각이었다. 한 발 뒤늦게야 정태의는, 이것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느낌이란 걸 깨달았다.
별로 대단한 자존심도 아니었다. 여태 자신에게 그런 게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생각할 일도 없이 지내왔다. 자신의 내부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할 자아라는 게 있다는 생각도 의식적으로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늘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짐승처럼 엎드려서 꼼짝도 못하게 머리를 억눌린 채 다른 남자의 사타구니를 물고 있다는
자신의 이 꼴이, 절절하게 비참했다.
"……."
머리 위에서 문득 일레이의 시선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 시선을 느끼지도 못했다. 저도 모르게 눈꼬리에 한
방울 떠오른 눈물은, 숨이 막히고 입이 아파서 힘든 탓이 아니다.
스스로를 비참하다고 여기는 그 끔찍한 감정 속에서,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것은얼마나 부정적이고 처참한
느낌인지.
"……태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은 듯 꼼짝도 하지않았다.
"태이. …ㅡ태이!"
다시 두어 번, 희미하게 초조한
빛을 띤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정태의는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일레이가 몹시 기묘한 얼굴을 하고서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저게 대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정태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일레이는 문득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혀를찼다. 그리고 정태의의 머리를
누르던 손을 풀고 거칠게 정태의를 밀어내어버렸다. 하마터면 침대 위에서 나동그라져 바닥에 떨어질 뻔했지만,
일레이가 얼른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
정태의는 참담한 심경 그대로 묵묵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전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흉흉한 물건이 앞에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레이는 훌쩍 일어서 침대 밖으로 나갔다.
말없이 욕실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는 듯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온 방을 뒤흔들도록
고함을 지른 그는독일어로 뭐라고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마도 욕설일 듯한 말을 마구 쏟아내며,
그는 잠시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 제가 소리지르고 난리야. 소리지르고 화내야 할 건 이쪽이라고.
정태의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화도 나지 않았다. 화를 내기엔 지나치게 의식이 우울에 젖어 있었다. 침울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오도카니 앉은 정태의는 말없이 욕실로 들어선 일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레이는 화장실 변기 앞에 서 있었다.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욕구를 풀어내고 있었다.
거칠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ㅡ기분 탓인지 가끔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 사이사이로 정태의의 이름이 섞인 것 같았다ㅡ아래를
마구 훑던 그는, 어느순간 손을 멈추었다. 변기 안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제법 오래 울렸다.
곧 돌아서 욕실에서 나오는 일레이의 표정은 사나웠다. 평소의 그 무심한 얼굴도 아니다. 눈매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바지를 집어들어 아무렇게나 꿰어 입던 그가 문득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노려본 게
아니다. 쳐다본 거다. 유리처럼 푸르스름한 눈으로.
정태의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죽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눈이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다. 살육에 젖은 자가 희생자를 쳐다보는 눈이다.
"……그래, 그럼 이것저것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도끝이거든."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푸르스름한 칼날 같은 그새카만 눈이 번들거리는 열기를 띠고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죽일까. 죽여버릴까.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숨쉬기도 힘들만큼의 살기가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몇 초, 혹은 몇 분. 어느 순간 한 걸음 정태의 쪽으로 발을 내디딘 일레이는 멈춰섰다.
다시 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제길."
낮게 욕설을 내뱉은 그는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방에서 나가버렸다. 쾅, 거칠게 문이 닫히는소리만 뒤에 남았다.
묵묵히 그 문을 노려보던 정태의는 한참 동안은 넋잃은 인형처럼 그렇게 앉아 있다가
여느 때인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그 말은 내가 할 말이다. 기껏 기분 좋았던 게 다 날아가 버렸잖아……."
도움이 안 되는 놈,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눈가에 손을 대었다.
이미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아까는 어찌나분하고 참담한지 절로 눈물이 막 솟더니.
정태의는 벌레 따위 들어오려면 들어오라지, 라고 중얼거리곤 방충망을 다시 열어젖혔다. 그리고 창틀 위로 올라가 앉았다.
어둑어둑한 정원이 발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힘들다. UNHRDO에서
허구한날 사람을 핏덩이로 만들어버리던 그를 따라다니던 때보다 더힘들었다.적어도 그때는 일관성이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겠다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감정의
기복을 좀체 종 잡을 수가 없었다.
"……. 그래도
저 짐승 같은 놈이, 저도 좀 민망하긴했나……? 아니,
그럴 놈은 아닌데."
정태의는 아직도 얼얼하게 아픈 턱을 문지르고 칼칼한 목을 쓰다듬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하다 말고 비켜버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 역시 용서가 안 되네. 용서가 안 돼."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저놈이 사람 속을뒤집어놓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것도 역시 용서가 안 된다.
사람에게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여지는 줘야지.
"게이블의 얼굴을 어떻게 본다지……."
물론 그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대할것 같았지만, 그리고 정태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는멋쩍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정태의는 얼굴을찌푸리며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 몰라.
난 이제 몰라. 몰라몰라몰라몰라……."
어차피 이런 민망한 꼴을 보인 게ㅡ이렇게까지 적나라한 민망함은 아니었지만ㅡ처음도 아니다. 이제와서 뭘 멋쩍어할 게 있을까.
사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게이블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저 상황에서 자신을 바닥으로 깔아뭉갠 저 일레이라는 남자에 대해,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을 다루는 상황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과연……. 그래, 옆에 있으면서 이렇게 괴로워하라는 거구나."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머리를 쥐어뜯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에이, 몰라……,
힘없이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때였다. 뺨 언저리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진 것은.
"……?"
정태의는 고개를 돌렸다. 돌담 바깥쪽이었다. 담 너머 어느 곳에서 누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바라본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물들어 있는 골목 모퉁이가 있을
뿐. 아까, 그 흑인 소년이 서 있던 곳이다.
"……. 거기
누구야."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태의는 말을 던졌다. 소리를 높이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소리 하나 없는 고요한 정원을 스쳐 바깥까지 닿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라고 문 너머에서
말하는 높다란 목소리에 정태의는 창틀 위에서 내려오며 아, 예, 하고대답했다.
끼익, 문이 두세 뼘 가량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아까 보았던 여주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먹을 것 준비해뒀으니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예? 아,
예. 고맙습니다."
정태의는 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은 생긋 웃어 보이곤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정태의는 열어놓은 창 밖을 잠시 쳐다보다가, 뭐 어때,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곤 걸음을 돌렸다.
1층으로 내려가면서, 식당에서 게이블이나 일레이와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으면 것도 참 개운치 못한기분이겠다고 생각했지만, 할 이야기가 있다며 게이블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그들은 결국 정태의가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 접시까지 비우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2층으로 올라올 때까지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눈을 떴다. 나른한 숨을 토해내며
희미하게 눈을 뜬시야에 낯선 천장 벽지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 라고
의문을 제대로 떠올리기 전에 정태의는 이내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딘지 기억해냈다.
아. 그래.
세링게였다.
거처를 옮기면 익숙해질 때까지 며칠 정도는 그 장소에 낯설음을 느낀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주로이렇게 아침, 무의식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였다.
앞으로 사나흘 정도는 이렇게 낯선 감각과 함께 깨어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뒤척이던 정태의는 미처 다시 눈을 감기전에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흠칫,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
순간적으로 혀가 얼어붙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괴성을 지를 뻔했다.
정태의는 일순 뚝 떨어졌다가 이내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쓰다듬으며 눈을
깜빡였다. 바로 눈앞에, 단정하게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얼굴이보였다. 이미 익숙하게 본 얼굴이었다. 얼굴만으로
혼비백산할 만큼 끔찍한 얼굴은 아니다. 바로 코앞에서 본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니 예상치 못하게 그 얼굴과 맞닥뜨린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펄쩍 뛰어오르도록 놀라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마자 바로 코앞에서 살육 맹수가 쩌억 벌린 시뻘건 아가리 속으로
목젖을 보는 데에는 차라리 놀라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를지언정, 이건 아니다.
정태의는 머리맡을 더듬거려 물컵을 집어들었다. 서너 모금 물을 마시고 나서야 심장이 좀 가라앉는다. 잠이 깨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본 게 이 얼굴이어서야 잠이 깰 만도 하다.
정태의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복잡한 심경으로 물끄러미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알 수 없었다. 분명 어젯밤에도
잠자리에 들 때 정태의는 홀로 침대를 넉넉하게 차지하고 잠들었다.그야 당연하다. 자기 방이니까. 그런데 눈을 떠보니옆에 사람이 하나 누워 있었다.
이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잠귀는 제법 밝은 편인데……도대체 어떻게 내가 알아채지도 못하게 침대로 기어들어온 거지. 아니 그보다 제 넓은 침대 비워두고 왜 여기를 비집고 든 거야.
정태의는 한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잠은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잠이 확 달아나기는 했지만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멍한 머리로, 정태의는 천장의 벽지와 옆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러다가, 기억났다.
그래, 기억났다.
어제 또 하나 쌓인 원한. 누가 들어오든 말든 사람을 비참한 꼴로 엎어놓았던 그
비정함이 번뜩 머릿속에 떠올라, 잊고 있던 원한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결국 어제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린 일레이를 보지 못했다. 그야 식사할 때도 못 봤고, 정태의가 일레이의 방을 찾아가지도 않고 그가
이 방으로 오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못 봤다.
결국 정태의는, 다른 사람에 대해
화를 내고 있으려면 자기가 먼저 피곤해지는 통에 늘 그렇듯이 제풀에 지쳐 에이하고 중얼거리며, 그냥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눈뜨자마자 본 이
얼굴.
"……."
정태의는 부스스한 얼굴 그대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기억도 났겠다, 다시 어제의 원한을 불태워볼까.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 번 피시식 꺼져버린 원한은 다시 어제처럼 생생하게 타오르진않았다. 그래. 하긴 원한도 인간 같은 놈한테나 가질 거지, 아예
인종이 다른 놈한테 품을 건 아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서 나오려고 이불을 걷는 순간, 정말로 잠들어 있었던 건지 때로는 의심이 될 만큼 잠귀가
밝은 이 남자가 눈을 떴다. 졸음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또렷한 눈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늘 이렇다. 이 남자는 언제든 정말로 잠들어 있다가 갓 눈을 떠도, 전혀 잠기운이 없이 서늘한 눈이었다.
"몇 시야."
"5시 반."
시계로 시선을 준 정태의가 대답하자 일레이는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더 자."
"아니, 난
잠이 다 깨어버려서."
정태의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일레이가 다시 눈을 떴다. 옷을 꿰어입는 정태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었다. 조금 전 정태의가 반 너머 비운 물컵을 들어 단숨에 다 비운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일레이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형에게 전화가 왔더군.
안부 전해달라던 걸."
"카일이? 음…ㅡ나중에 전화나 해야겠네."
티셔츠에 팔을 꿰어넣으며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어라, 했다.
어쩐지 굉장히 평연하다. 어제 분명 저놈은 살기를 펄펄 피워대면서 나갔고 나는 분명 원한에 가득 차서 끝 간 데 없이 우울했는데.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무심한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일레이 역시 일어날모양이다. 쏴아,
물줄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놈이또 내 샴푸랑 내 비누 쓰는구나, 라고 멍한 머리로 생각했지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하곤,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뭔가 좀 기운이 빠졌다. 결국 자신이 화를 내든 우울해하든 저놈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평연한 태도를 보니
자신도 덩달아 기운이 빠져버렸다.
그래, 인간관계라는 게
그런 거지 뭐. 사람 사이에좋은 일만 쌓일 수 있나. ……저 놈과는
좋은 일이 쌓인 적이 거의 전무하지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사무실 쪽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여주인은 이미 일어난 모양이었다. 현관으로 가면서 유리문을 사이에 둔 사무실 앞을 스쳤다.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지,
잠가두었던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노트 따위를 꺼내고 있던 그녀는 정태의를 보자 활짝 웃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말을 건네는 그녀와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았다.
일어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복도 안쪽에 있는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있는 욕실ㅡ1층의 객실에는 따로 욕실이 딸려 있지않은 모양이었다ㅡ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뒤를잇는다. 아마도
게이블도 이미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거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네, 속으로 감탄하면서 정태의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날이 부옇게 흐렸다. 그리 어둡지는 않은데도 해가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안개가 끼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슬이 맺혀
있는 풀잎이 신발에 부딪혀 신발코를 적셨다. 정태의는 사박사박 풀잎 스치는 소리를발 아래로 즐기며 정원으로
나섰다. 고요하고 기분좋은 새벽의 정적이 공기 속에 감돌고 있었다. 멀찍히 어디선가 삐걱, 대문 경첩 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 어느 집 큰아들이 이른 새벽에 일터를 향해 나가는 소리일까.
정태의는 과실수 사이에 비끄러매여 있는 해먹으로다가갔다. 가느다란 지푸라기로 성기게 짠 해먹은 금세라도 끊어질 듯 약해 보였지만 보기보다 훨씬 튼튼해서,
정태의가 그 위에 올라타 누워도 끄떡 없었다. 다만 이 시간에는 밤새 이슬로 축축해져
그 위에 올라앉은 엉덩이를 흠뻑 젖셨지만.
아차, 하고 축축해진 바지엉덩이를
쓰다듬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태의는 기왕 젖은 것, 하고 포기하고서
다시 해먹 위에 앉으며, 바로 발치에 떨어져 있던 과일을 집어들었다. 충분히 익어 말랑말랑해진 망고다. 두 손으로 충분히 만지작거린 다음에 한쪽 끝을 베어물고 과육을
쭈욱 빨아먹으면서, 정태의는 흔들의자처럼 해먹을 흔들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새벽이었다. 집 안에서는 가끔 사람이 깨어 움직이는 기척이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고요한 정적 속에 정태의
홀로 있었다.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이 평화로우면서도 한 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곳에서, 하루라는 시간이시작되고 있었다.
정태의는 해먹 위에 누워버렸다. 엉덩이뿐 아니라 등이며 허리, 머리까지 축축하게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눈앞에는 부연 새벽하늘이 있었다.
콧노래까지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시간, 문 밖 길 저편에서 타박타박 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소리는 이 집의
문 앞에서 멎었다. 끼익, 낡은 나무문이 거슬리지 않는 경첩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낯익은 소녀가 들어왔다. 어젯밤
2층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면서 눈이 마주쳤던, 이 집에서 일하는 흑인 소녀였다.
뛰어왔는지 가볍게 상기된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들어오던 소녀는, 해먹에 누워서 망고를 입에 물고있던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금세 그 눈에 수줍은 기색이 어린다.
정태의는 일어나 앉았다. 작달막한 소녀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귀여워, 웃으면서 소녀에게 손짓했다.
혹시 화들짝 놀라 집 안으로 도망치듯이들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소녀는 화들짝 놀란
것 같긴 했지만 망설이면서도 머뭇머뭇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네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선다.
좀더 가까이 와, 하고 손짓하자 소녀는 한 걸음 더오고 멈춘다.
낯설고 수줍어 경계는 하면서도 꺼리지는 않는 그 풋풋한 눈빛이 어린 동생처럼 사랑스러워, 정태의는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잘 익은 망고를 주워들어바지에 깨끗하게 닦아 흙을 털어낸뒤 가볍게 던져주었다.
소녀는 움찔하면서도 망고를 받아든다.
"일찍 왔네."
정태의가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못
알아듣는 듯했다. 정태의는 난처한걸, 하고 생각한다.
"집이 가까워? 집."
다시,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아듣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히는 정태의가 한 말 중 쉬운 단어 하나 정도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집,
하고 따라서 중얼거린 소녀는 멀찍이 담 너머를 가리켜 보였다. 그쪽 방향 어느 언저리에
소녀의 집이 있는 모양이다. 정태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아침 먹었어? 아침식사. 밥."
그러나 이번에는 못 알아듣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에게, 정태의는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러자 소녀는 환하게 얼굴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형제라곤 위로 하나밖에 없는 정태의는 자신과 나이차가 한 바퀴는 족히 나지 싶은 소녀를
푸근하게바라보며 몇 마디 더 말을 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간단한 의사소통은 몸짓으로 전해지는법이다.
수줍은 듯 정태의의 눈치를 살피던 소녀의 얼굴에 점점 더 친근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정태의도 마주웃어준다. 어린애는 이래서 좋다. 속내가 고스란히드러나기 때문에 대하기가 편했다.
정태의가 몇 마디 더 하려고 할 때, 현관문이 열렸다. 천천히 걸어나오는 사람은 게이블이었다.
그는정원 한구석에 있던 정태의와 소녀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소녀에게 조용히 뭐라고 말했다. 정태의는 알아들을 수 없으나 소녀는 알아들을수 있는 말이었다. 소녀는 웃는 낯으로 뭐라고 종알거리더니,
정태의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보이곤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녀와 스쳐 바깥으로 나온 게이블은 잠시 현관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정원으로내려왔다. 주무른 내용물을 다 빨아먹어 주름진 망고를 한 손에 들고 있던 정태의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다가 풀장 옆에 붙박이로 놓인 나무 의자에 앉는 게이블에게 인사 대신 물었다.
"하나 드실래요?"
그러자 게이블은 고개를 저었다. 아, 예, 하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다시 주름진 망고를 죽죽 빨았다.
침묵이 흘렀다.
누구와 함께 있건 그 침묵을 그리 어려워하거나 어색해하는 정태의는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해먹 한 겹 아래에 바늘방석이 한 장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더 이상은 먹을 것도 없는 망고를 입에 문 채, 정태의는 흘끔 게이블을 보았다.
비스듬한 옆모습반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인상을 살필 수 있었다.
어제 본 그대로, 무뚝뚝하고 무표정했다.
그렇다고과히 딱딱한 얼굴은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소녀에게 말을 걸면서 얼핏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리는 얼굴은 퍽 다정해 보였다. 사실 어제 잠깐 웃는 걸 봤을 때도 그랬지만, 의외라고 해야 할까, 놀랐다. 표정 하나로 얼굴이 저렇게
달라 보이는 사람도 드물거다.
좀 웃고 지내면 말 걸기도 편할 거고, 보기도 훨씬 좋을 텐데. 정태의는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었다.
"웃으니까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이시는데요."
그러자 게이블은 흘끔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연다.
"웃으면 얕잡혀 보이는 일이 많아서 곤란합니다."
"……."
아니, 그야 원래 생김새가
단정한 편이라서 웃으면좀 많이 상냥해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볼 만한 분위기는 절대로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망고를 잘근거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제임스와
함께 일을 했다면 이 남자는ㅡ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ㅡ상당히 젊을 때부터 T&R에서 일을 했다는
소리다. 어쩌면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 때부터 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분명 어리다고 얕잡아 보는 사람을 대한 적이 있었을 소지도 다분했다.
이 남자가 겪었을 서러운 과거에 대해 생각하면서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눈앞에 휙하니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잡아들자,노오랗게 잘 익은 망고였다. 퍽, 잡아챈 손 안에서터져
끈적한 즙이 묻어나온다.
"익어서 떨어진 건 얼마든지 먹어도 됩니다.
이미 다 먹은 망고는 그 옆에 버려둬요."
게이블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그가 던진통통한 망고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새 망고를 입에 물었다.
"릭은……."
문득 게이블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흉흉한 이름을 입에 담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잠깐,
망고의 맛이 뚝 떨어졌다. 정태의는 망고를 입에 문 채 멈칫했다.
생각나버렸다. 어제 게이블이 그
모습을 봤었다.
정태의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지금 샤워하는 중이니까 아마 곧 방에서 나올걸요.뭐 볼일이라도 있으시면 제 방으로 가 보세요."
"아니, 딱히
볼일은 없습니다. 다만……. ……태이 씨 방에 있다고요?"
"예? 아……예.
제 방 욕실의 샴푸랑 비누가 더 신선하대요."
그 기이한 설명을 고스란히 전하며, 정태의는 망고를 주물거렸다. 죽죽 비어져나오는 과육이 달콤하다.
게이블의 묘한 시선이 날아왔다. 아무렴, 샴푸와 비누의 신선도를 따지는 이야기에 뜨악할 만도 하다.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그 놈이 한 말이라는 걸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는데.
정태의는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썼다간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일레이가 한 말이에요'라고 덧붙였다. 게이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묘한 시선도 날아오지 않았고, 일레이를 화제에 올리는 일도 없었다.
그래, 과히 좋은 화제는
아니지.
정태의는 뒷담화와 욕설밖에는 더 나올 거리가 없는 일레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형을 가둬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중동
부호라는 게 어떤 사람인지, 혹시 아십니까?"
생각해 보면 이 남자가 정재의의 행방을 알아냈다고 한다. 어디로 갔는지 행적이 묘연했던 그의 실마리를 알아냈다는 것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 점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이 섬에 별저를 가지고 있는 중동의 누군가가 정재의를 가둬두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였다.
혹여 아직 외부에ㅡ비록 정태의가 친동생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외부인이었다ㅡ알려서는 안 된다며 말해주지 않는 건 아닐까 했지만, 게이블은 별로 꺼리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있습니까?"
정태의는 잠시 기억 속을 짚어보았다. 그러나 오래짚어볼 필요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애초에 아랍권 사람
가운데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들어봤다고 해봐야 뉴스나 신문일 테지만, 그렇게 길고 낯선 이름자들은 기억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 알 파이살은 알고 있습니까?"
게이블이 다시 물었지만, 정태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게이블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꺼내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외무장관은 반다르 알 파드
왕자입니다. 현명한 사람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데, 그래서 그 뒤로 라쉬드 왕자와 알리 왕자가 외교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지요. 알 파이살
왕자는 알리의 동생으로 동복에서 난, 매우 사이좋은 형제입니다. 그는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빠져 사업체를 세웠는데…ㅡ."
천천히 말을 잇던 게이블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눈살을 찌푸리고서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정태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보며 암투관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간결하게 말을 이었다.
"알 파이살은 십여 년 전에 죽은 이복동생의 외아들의
후견을 맡고 있는데, 그 외아들이 라만이라는 남자입니다. 날 때부터
병약한 사람이라 대외적으로는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지요. 가끔알 파이살이 그의 가족들을 대동하고
공식적이고 중요한 자리에 나올 때 함께 나온다고는 합니다만."
정태의는 아―――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역시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형제 다툼에 엉뚱하게 말려들었단 소리군요,
형은."
"굳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중동은 내부적으로도외부적으로도 군수품이란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라서, 분명 정재의 연구원의 도움이
있다면 큰 이점을얻을 수 있을 테지요."
"……."
정태의는 망고를 입에서 떼고 말았다. 정말로 먹을 맛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주 잘 하는 짓이다. 동생은 국제기구의 인선 암투에 말려든 끝에 사람 잘못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고, 형은 타국
왕족의 권력 암투에 말려들어 갇혀있고. 아주 형제들 나란히 참 보기도 좋다.
쓰게 입맛을 다시며 망고 껍질을 나뭇가지로 짠 조그만 쓰레기통에 버린 정태의는 입술에
묻은 망고즙을 엄지로 닦았다.
"그래서 그 병약한 왕족의 별저에 갇혀 있다,
이거네요."
"확실치 않지만 그럴 소지가 큽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납치 감금되었다면 변변한 이유일 리는 없겠지만, 왜 이렇게 엉뚱한 데에 말려들었나 모르겠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자신도 만만치 않다.
"삼촌을 따라 UNHRDO로 떠날 때만 해도 내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놈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꿈도 못꿨거든."
그런 놈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지, 라고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게이블은 정원 건너편 가장자리에 있는 커다란 과실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정재의 연구원의 동생이라면 정창인 교관이 숙부
되시겠군요."
"아…ㅡ예, 맞아요. 삼촌과 아는 사이세요?"
"아닙니다. 사장님과 친하셔서 예전에 가끔 찾아오시곤 해서 얼굴 정도나 뵈었을 뿐이지요. …ㅡ그러면,
릭과는 UNHRDO에서 알게 된 겁니까, 아니면
사장님이나 정창인 교관을 통해서 소개를……?"
"아. UNHRDO에서요."
세상 숱한 사람들이 동경해마지않는다는 UNHRDO,그곳이 불운의 시작이었지. 정태의는 아득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 남자도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카일이나 정창인이 정태의에게 일레이를 소개시켜 줄 리가 없었다. 만일
소개로 알게 되었더라면 평생 원망을 들을 각오는 해야 했을 거다.
정태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게이블을 보았다. 뭘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이블에게, 정태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의외로 그런 걸 궁금해 하시네요.
별로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을 안 두실 줄 알았는데."
말하고 나서야 비꼬는 투로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얼른 '아, 별로 불쾌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라고 덧붙였다. 그냥 단순히, 정말로 의외였을 뿐이다.
워낙 말수도 적고 무심한 얼굴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었던 일체 신경쓰지
않을줄 알았다.
게이블은 미묘한 얼굴로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실례했군요. 별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릭이…ㅡ사람과 잘 지내는 성격은 아니라서 좀 신기했습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의 어떤 점에 대해 먼저 짚어야 할지, 짚고 넘어갈 게 너무 많아서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사람도 카일과 같은 과인가 보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에 대해 대단히 순화해서 말하고 있었다. '사람과
잘 지내는 성격은 아닌' 정도가 아니다.게다가 저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즉 정태의가 일레이와 나름대로 잘 지내는 듯이 보였다는 뜻인데, 대체 어떤 점을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이는지
정태의야말로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 아니면 그가 말하는
'잘 지낸다'라는 건 혹시성적인 뜻일까.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그런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려 해도 말이 안맞는다. 사람과 잘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니, 그렇게성적으로 거침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또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태의는 게이블의 짧은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한동안 심각하게 고심했지만 결국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하길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입을 열었다.
"뭐……그렇게까지 사교성 없고 악한 놈은 아니에요."
반은 진심, 반은 겉치레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스스로의 말에 대해 다시 반추해보았다. 영거짓말도 아니다.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사람을 끌어당길 줄도 알았고ㅡ그 방식에 좀 문제는 있을지언정ㅡ, 인성에
매우 다대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그렇다고 온전히 나쁘기만 하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정태의의 말에 게이블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설령
연쇄살인마라 해도 그 사람이 죽으면 안타깝게 여겨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요."
"……."
정태의는 일순 뜨악한 얼굴로 게이블을 보았다. 그러나 게이블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도 못하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어……, 일레이와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신가 보죠."
정태의가 짐짓 웃어 보이며 물었지만 게이블은 좋고말고 할게 없다는 듯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정태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생각 외로 범상찮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화의 맥락을 떠나
그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설령 온세상의 지탄을 받는 연쇄살인마라 해도, 흉악하기 짝이 없는 범죄자나 배신자라해도, 혹은 수백만을 학살한 나치의 괴수 같은 인물이라
해도, 그런 점을 다 알면서도 그를 가엾게 여겨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을 거다. 이를테면 정태의 자신이 어느 곳에서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정재의는 자신의 등을 다독여줄 것처럼.
그러나 일레이 리그로우 같은 남자라도, 그의 흉악하고 잔혹한 성정을 고스란히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그를 쓰다듬어 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거다.
분명히 나쁜 놈인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밉지는 않은걸, 하면서.
"……. 음……?"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뭔가 어라,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어째 그리 개운치는 않은 생각이 아주 잠깐 떠오른 것 같았는데 그게 뭐였지.
뭔가 머릿속에서 걸릴 듯 말 듯 간질거리는 생각 하나가 있었는데 좀체 잡히지 않았다. 정태의는 미간의 주름을 문지르며 으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생각의 가닥이 미처 잡히기도 전에, 훼방이 끼어들었다.
"둘이 뭔가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나?"
낮고 심상한 목소리가 현관 쪽에서 다가왔다. 굳이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그 음성이, 점차 이쪽으로
걸어왔다.
정태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흘끔 돌렸다. 바지 한 장만 걸치고 웃통을 드러낸 일레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레이는 게이블에게서 정태의, 그리고 다시 게이블로 시선을 주고는 그가 앉은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뭔가 내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는데…ㅡ?"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정태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게이블이 먼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만났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흐음, 그래.
별일이군. 게이블 당신이 먼저 말을 걸다니, 저놈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지?"
게이블은 침묵했다. 긍정이라기보다는 뭔가 생각에잠긴 것 같았다. 그러나 몇 초 정도로 그 생각에 결론을 지은 듯,
게이블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행동하며 사람을 찾게 될 텐데 서로 기본적인것들은
알아두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을뿐입니다.그 뿐이지요."
'그 뿐이지요'에 강세를
두어 말한 게이블은 잠시 사이를 둔 뒤에,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이 시간에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지요."
그러자 일레이는 몇 걸음 앞에 있는 조그만 풀장을흘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여전히 새벽마다 수영을 하는 모양이지. 나나 태이가 방해한 셈이군,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헤엄치도록 해."
"아닙니다. 둘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나는 10분 거리에 해변이
있으니 그리로 갔다 올 테니까 안나가 날 찾으면 그렇게 말해주세요."
게이블은 선뜻 일어서더니 걸음을 옮겼다. 대문 쪽이 아니라 풀장을 빙 둘러 정원 안쪽으로 수풀에 가려지듯이 나 있는 조그만 길로 모습을 감추는 그의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정태의는 저기에도 따로 문이 나 있나 보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수영을 좋아하나 보지."
"예전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마다 물에는
꼭들어갔다 나왔었어. 지금도 그러나 보군."
일레이는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게이블 쪽을 보았다. 이미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수영이라……. 어쩐지 늘씬하니 체격이 좋더라니,운동을 했었구나."
정태의가 주억거리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레이가 픽 웃었다.
"군대에 있으면서, UNHRDO에 있으면서, 여태 네가대해 온 사람 중 운동 좀 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긴……'하고 맞장구치면서정태의는 석연찮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장구치고보니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운동했다고
다 몸매가 저렇게 나오진 않거든."
하긴 생각해 보면 수영이라는 운동이 반드시 멋진 체격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겠다.정태의의 친구 중에서도 수영으로 전국 선수권까지나간 놈이 있었는데,
체격이 좋긴 했지만 늘씬하고멋지다기보다는 우람한 느낌이었다.
근육 자랑이 취미이던 친구를 생각하며 추억에 젖어 있던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벤치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느슨하게 늘어져 앉은 일레이가 풀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뭔가 특정한 것을 쳐다본다기보다는 시선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있었다.
저 남자도 몸은 아름다웠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실은 몸뿐 아니다. 손도,
발 모양도 매끈했고, 가끔은 귓바퀴의 선이나 턱선 같은 것도 매끄럽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곤 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저 성격이 참 아쉽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성격을옆에서 겪어야 하는 내 신세도 참 아쉽다.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남자의 집요한 원한이 좀 흐려지고 나면 다른 데로 갈 수 있을까. 아니,
저 성격을 생각하면 '이제 괴롭히는 것도 재미없고 지겨워졌으니 그냥 죽이자'라는결론을 맞을 수도 있었다.
……너무 현실성이 있다.
정태의는 섬뜩해져서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입맛을 다셨다.
"네 마음대로 아무데나 막 나다니지 마."
그때,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풀을 바라보던 일레이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말도 없이 혼자 나다닐 생각 하지 말라고."
일레이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정태의는 애매한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좁은 섬에서 달아나 봐야 몇 걸음도
채 못 가서 잡힐 텐데."
달아날 때에는 제대로 계획을 세우고 확실한 때를 노려서, 아예 쪽지까지 적어두고 갈 생각이었다. 더이상 나를 찾지 마시오.
누가 봐도 속을 긁어놓으려는 의도라는 걸 분명히 알 만한 문구로.
그러나 정태의가 별 뜻 없이 한 말은 일레이가 뜻한말과 방향이 달랐던 모양이다. 문득 그가 하아, 하고 눈동자만 돌려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달아나신다.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
그런 뜻으로 말한 것 아니었어? 하는 얼굴로 정태의는 눈을 껌벅였다. 젠장. 말실수를 했나 보다.
이놈이 또 사람을 쥐잡듯 하려나, 정태의가 내심 혀를 차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그는 말없이
벤치 등받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저 손짓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손끝. 그리고 그 생각 끝에 정태의에게 좋은 일이 생긴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면 하나 물어볼까."
그 손가락이 딱 멎었다. 동시에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태의는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봐, 역시 이렇다니까. 여기서 변변한 물음이 나올 까닭은
없거든.
"글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뭔데."
"달아나려는 이유가 뭐야."
정태의는 입을다물고 지그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심상했다. 정태의의 대답 따위에는 별 흥미도 없다는 듯, 풀의 맑은 물을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가 물어보려는 의도를 알 수 없어 고민했다. 설마 몰라서 물어볼 리는 없다. 비록 정신의 핀트가 좀 심각하게 어긋난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다.
달아나려는 이유라.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말이 나오게 마련인데, 그걸 꼬투리 삼아 사람을 한 번 밟아보자는……,
이니지. 마음에 안 들면 이유 따위 필요 없이 그냥 밟지, 일부러 이유를 붙여서 핑계를댈 인간은 또 아니다.
"너라면 안 달아나겠냐."
정태의는 결국 고민을 포기하고 해먹 위에 뒹굴 몸을 눕히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밉살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라면 달아나지 않았지. 승산없는 내기는 애초에하지 않거든."
그래, 어디 달아날 테면
달아나 보라 이거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경고의 의미로 꺼낸 이야기였나 보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를 맺은 줄 알고 있었더니, 잠시 뒤 일레이가 다시 채근했다.
"말해보라니까. 달아나려는 이유."
"…….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몇 가지가 떠오르긴 하는데 그 중 과연 어떤 걸까생각하는
중이지."
그 심드렁한 어조를 한 귀로 흘리면서 정태의는 하늘을 보았다. 슬슬 날이 밝아오면서 새벽의 옅은 안개도 걷혀가는지, 하늘이 점차 푸르스름하게
빛을띤다.
달아나려는 이유라.
속으로 생각하고 말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이 남자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 눈치였다.
"갑자기 제 욕을 듣고 싶어하는 심보는 또 뭐야…….
에이. 네 옆에 있으면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서 그런다."
정태의는 투덜거리면서 대답했다. 반농담조로 말했지만, 사실 그게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어떤 식으로 죽을지는 몰랐다. 수틀리면 이 놈 손에 죽을 수도 있고,
혹은 이놈을 노리고 달려드는 괴한의 손에 엉뚱하게 잘못 맞아 죽을 수도 있고, 혹은
이놈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화병이 생겨서 죽을 수도 있었다. 죽을 만한 이유는 숱하게 많다 하나 결론은 하나,
틀림없이 제 명에는 못 죽을 것 같았다.
"그래……. 분명히 생명의 보전은 가장 일차적인 문제지. 그리고?"
"뭐?"
"그것뿐인가, 내게서 달아나려는 이유가?"
여전히 별 흥미 없는 듯 나른하게 물으며, 일레이는다시 검지 끝으로 벤치 등받이를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또
생각한다, 또 뭔가 생각한다. 정태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 손가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참, 하고 중얼거리며
해먹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못마땅하게 입매를 찡그렸다.
"요전에 튀었던 거야 네놈을 묶어놓고 덮치고 때리고
날랐으니까 당연히 할 수 없었던 거고ㅡ지금 네 입으로 그랬지, 생명 보전이 가장 일차적인 문제라고ㅡ,
지금은 봐. 현상황이 힘들어죽을 지경인데, 사람이면 보다 편한 환경에서 살고자 애쓰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도 마찬가지지."
"지금 환경이 왜. 그렇게 애로사항이 많나?"
정태의는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번연히 알면서 태연하게 말하는 저 미운 입을,언제쯤 쭉 찢어놓을 수 있을까.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너 말이야, 그때 말했었지.
날 만나면 죽이려고 했다고. 죽이지는 않겠지만앞으로 평생 괴롭혀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평생 얌전히 괴롭게 살겠다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설령 있다 해도 그 얼간이가 자신은 아니다.
정태의는 이렇게 고스란히 속내를 다 말하는 것도그리 현명하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변명할 말도 없었고 과거에 실제로 들었던 말들이다. 도리어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는 이놈이 이상했다.
"평생 괴롭혀……? ―――아, 그래. 나랑 같이 있는 게끔찍하게 싫다고 했었지."
일레이는 정태의의 말에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등받이를두드리던 손가락에 문득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 다시 물어볼까. 왜 싫어."
"응?"
정태의는 미간의 주름을 펴지도 못하고 계속 그를쳐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대답하기 힘든 것만 묻고있다. 대답을 하려 들면 몹시도 쉽겠지만,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도 진지하게는 해 본 바가 없다.
그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풀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잠에서 덜 깬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잠에서 갓 깨어나자마자라고
해도 그가 잠에서 덜 깬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생각해 봤는데 태이. 내가 네게 실제로 위해를 가한 적은 별로 없었단 말야."
느릿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에 정태의는도끼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위해를 살인과 같은 의미로 여기는 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어떻게 할까. 아니, 게다가 정태의가 조금만 더 눈치가 없었고
제 몸을 간수하지 못했다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차가운 땅 속에서 흙을 덮고 있었을 거다.
정태의가 대답 없이 입매만 잔뜩 찡그리고 있자, 그침묵을 일레이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도 현실을
영 모르지는 않았는지 중얼거린다.
"가할 뻔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남자가 또 무슨 심사로 이런 말을 하나. 하지만 그의 말의 여러 군데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하나는 확실하다.
"분명히 너랑 같이 있으면 끔찍한 일들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지거든."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그 모독적인 처우. 그렇게 가슴속이 뜨겁게 갈래갈래 찢어지는 느낌은 어쩌면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인격적인
대우는, 저 남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그런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있을 수는 없었다. 자아를 존중할 수 없게 될 테니.
"사람은 보통 아주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ㅡ너랑은
좀 달라ㅡ,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건 자기자신에 대한 감정이거든. 삶
자체를 지탱하는 밑바닥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그것만큼은 흔들리면 안 돼."
그러나 이 남자와 있으면 그게 안 된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대단히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정태의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지나치게 비범한 형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별 특이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으레 다들 그러겠거니
하고 지냈다.
사람이 나고 자라면서 부모에게, 형제에게, 비뚤어지지 않은 올바른 형태의 애정을 충분히 받고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혜택받은 일인가를 그가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내가 저런 놈 옆에서도 이렇게 보살 같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다 부모님 덕분이라니까…….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개미 소리만하게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성격은이미 좋으니까 운도 좀 좋게 해주세요.
나도 좀 살아야죠.
"그래서, 나랑 같이 있으면 네가 너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가다듬을 수 없다?"
그러나 갑자기 불쑥 말을 하는 일레이 때문에 정태의는 부모님께 걸던 말을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가다듬을 수 없다기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는
건데……."
정태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 놈이 왜 새벽댓바람부터 이런 거나 묻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대답하기도 힘들다. 딱히 정답이 있는것도 아니다.
정태의는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는 조금 세게 북북. 그러다가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로 훌륭한 포커페이스였다. 가끔 이렇게 작정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짐작조차 안 간다.
내가 왜 싫어, 이걸로 대화를 시작하는
인간이 자신의 지난 인생에 또 있었던가 생각해 봤다.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시초부터 틀렸다. 아예 방향 자체를 잘못 잡은 건 아닌데 시작점이 틀려버렸다.
정태의는 다시 해먹에 누웠다. 새벽이라고 해도 하나 춥지도 않고 이대로 다시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 남자만 없었더라면
도로 잠깐 눈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틀렸어. 사람 말은 한 치로 크게 달라진단 말야. 나는 너랑 같이 있는 게 때로 대단히 싫긴 하지만,
너 자체가 싫다고 한 적은 없거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하면서 정태의는 생각했다. 설마 '나랑 있는 게 왜 싫어'라는
물음이 나오지는…….
"나랑 있는 게 싫은 이유라면, 뭐야."
"……."
정태의는 해먹에서 고개만 돌려 일레이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느끼든 신경도
안 쓰면서 그런 건 왜 물어.내 의지야 상관없잖아."
"말해 봐."
"봐, 지금도
그렇지. 너는 아예 나라는 인격이 있다는 걸 인식도 안 하고 있잖아. 인격적으로 동등하지못한 인간관계에서 희희낙낙 있을 놈이 어딨어."
정태의는 혀를 찼다. 어차피 이 남자도 모를 일이 아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멍청하지도둔하지도 않다.
자기 일이라면 눈이 흐려지는 족속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성적으로 다 알면서ㅡ자신이라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서도 익히 알면서ㅡ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새삼스럽게 굳이 묻는 심보를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일레이가 처음으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풀에서 무심한 시선을 돌려 정태의를 흘끗 본다. 그가 희미하게 낯을 찌푸리고 있는 그 미묘한 표정을, 정태의는 처음 보았다.
"정태이. 자신과 상대의 인격이 동등한가 아닌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네가 나와 동등하지 않다고, 너 스스로 그렇게생각한 적 없잖아."
"그래. 그런데
그 생각을 자꾸 네가 갉아먹으려고 하고 있잖아. 당장 가깝게 생각해 보자면 어제도."
정태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어제도. 정확히는 바로 몇 시간 전에도.
일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정태의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시선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혹은 다른 뜻인지는 읽을 수없었다. 어차피 이 남자를 설득시킬 생각은 없었다.정태의는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돌아누웠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는데 판 깨졌다.
"어제는, ……."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한 마디를 꺼내고는 다시 말이없다. 돌아누운 정태의의 등뒤로 뭔가마뜩찮은
기색이 풍겨왔다. 몰라몰라몰라. 난 잘 거야. 정태의는 점차 푸른빛이 또렷해지는 하늘을 곁눈질로 쳐다보곤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또 화나는 일이다.
어제, 바로 몇 시간 전에
사람 속을 한 번 뒤집어놓고 왜 굳이 그 기억을 파헤쳐내고 그래.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라니.
이 남자가 다음에 또 같은 걸 물어보면 '바로 이런 점에 싫은거야'라고 말해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눈 감고
입 다물었다.
"어제는, …….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그때였다.
낮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한숨 쉬는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그런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인형처럼 멍한 눈동자가 절로 일레이를 향해 주욱 옮겨갔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뭔가 잘못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잘못된 소리랄까, 말의 내용 자체에도 문제가 없고 목소리에도 문제가 없는데, 그 말의 내용과 목소리의 합치에
다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어쩌면 자신의 귀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린 정태의는 미심쩍은 눈으로 뚫어져라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정원 건너편의 과실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눈만 깜빡이면서 멍하니 일레이를 보다 못해, 숫제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
해먹에 비벼댄 통에 부스스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정태의는 잠에서 막 깬 듯한 얼굴로 계속 그를 보았다.
…….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나 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아니 세상 사람 다 죽어도 저 입에서나올 말은 아니었다. 어제 분하긴 어지간히 분했던모양이다.
이렇게 헛소리까지 다 듣다니. 아니면 요근래 너무 지쳐서 그런가.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인 채 눈만 껌벅이며 그를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잘못
들었지 싶었다.
뭐야. 환청이었잖아.
역시.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쉬곤 다시 누웠다.하지만 환청이라 해도 참 희한한 환청을 들었다. 자려고 눈을 감았던 참이라
그런가. 모르는 새 살짝 잠이 들었었는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눈앞에 보이는 하늘을 본다. 이제는 새벽이 아니었다. 어느새 아침이 찾아들어 있다. 새파란아침이었다. 이런 아침에 다시 눈을 감는다니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아까움을 즐기는 것도 여유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또 누가 알까.
이 자리에서 이렇게 잠들면 또 조금 전과 같은 희한한 환청을 들을 수 있을지.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 더 이상은 일레이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말을 걸었을 때부터 그 내용들이 다 이상했었다.어쩌면 이 상황이 아예 통째로 다
꿈인지도 모르지.
눈을 감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때이지만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른하게 다가오는 무의식이 기분 좋다. 단 하나, 그 무의식을 방해하는저 시선만 제외한다면.
눈길이 느껴졌다. 필경 지금 눈을
뜨면 저 남자가 자신을 보고있을 거다. 그 눈길이 못내 신경 쓰이긴했지만, 설마 죽이기야 할까.
사박, 발소리가 들렸다.
풀잎을 밟으며 천천히 다가온 발소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멎었다.
아침잠을 방해하려는 모양이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눈을 떴다.
"또 왜……."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던 정태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갑자기 정태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해먹에서 가뿐히 끌어올렸다.
잘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상반신이 허공에 붕 뜬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왜 그러냐고, 부루퉁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먼저, 혀가 입 안을 채웠다.
"…ㅡ?!"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한 손으로 정태의의 뺨과 귀를 감싼 일레이는 다른 손으로는 멱살을 쥔 채, 정태의에게 입을
맞추었다.
정확히는 입을 맞추었다는 귀여운 행위가아니었다.마치 입을 통해 몸속으로 파고들어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입 안을 헤집고 있었다. 혀에서 치아, 잇몸,한 군데라도 빼놓을 수 없다는 듯
탐욕스럽게 입 안을 헤집는 그 혀에, 이에, 입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일레이, 그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 말조차 그의 입속으로 먹혀버린다.
"이――――, 잠,…… 숨…ㅡ."
숨이 막히니 잠깐만 비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느 단어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용케도 그 말을 그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 단어들을 다 집어삼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대로 숨이
막혀 기절하겠다 싶은 때, 눈앞이 새카매질 찰나, 정태의는 해먹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호흡이 돌아와 몇 번 기침을 하며 숨을 허덕이던 정태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먹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는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일레이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었다.
곧 걸음을 돌려 집 쪽으로 걸어가버린다.
"…─."
목깃을 움켜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태의는 멍하니 그의 뒷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내 현관 안쪽으로 들어가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정태의는 눈을 깜빡이며 그 닫힌 문을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닫힌 문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 너머로 사라진 일레이의 자취를.
정태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쥐어뜯듯이 문질렀다. 손끝이 약간 젖었다. 이미 뒤섞여서 누구의 것인지도 구별도 못할 타액이
손에 묻어나온다.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이 그저 입만 맞춘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뜬금없이, 전혀 상관없는─듯한─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대로 사라져버린 적이 여태
있었던가. 아니 없었던 것 같다.
"어……."
정태의의 얼굴에 천천히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어제는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뭐야, 그거.
잘못 들은 거 아녔어……?"
천천히 얼굴을 감싸쥐었다. 턱과 입을 문지르는 손길이 초조했다. 어, 어라,
하고 입에서 의미 없는 말이 흘러나온다. 안 되는데. 저 놈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면 안 되는데. 미안하다니, 그건 저 놈이 할 말이 아니다. 저런 말을 해서 뜻밖에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면 안 되는데.
정태의는 두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덮었다. 목덜미부터 뜨끈뜨끈하게 올라온 열기가 귓불과 뺨을 타고 흘러 온 얼굴에 전해졌다. 아마 온통 발갛게 잘 익었을 거다.
정태의는 해먹어서 내려갔다. 그리고 풀로 달려가, 그 안에 머리째로 얼굴을 첨범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과 머리, 목까지 감쌌다.
보글보글, 물 위로 숨결이
기포를 내며 피어올랐다. 그러나 숨도 차지 않았다. 조금 전만큼은 차지
않았다. 차가운 물에 한참 얼굴을 담그고 있어도 좀체 얼굴이 식지않았다. 이러다가 오히려 풀장의 물이 뜨거워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안되는데.
"……푸…─!"
숨이 끊기기 직전이 되어서야 물에서 얼굴을 건져내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얼굴이 뜨거워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들어온 것 같았다. 환하게, 반짝. 그간 이해할 수 없던 몇몇 일들이 하나로 주욱 연결되었다. 어둠에 묻혀 있던 그 연결점의 시초가
보인 것 같았다.
"저 놈, 설마, 아무래도, 아마, 날……."
"……뭐합니까?"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눈앞에 보인 신발코를 주욱 따라올라가 몇 걸음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바다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머리를 적신 채 개운한 얼굴로 게이블이,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고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안 되는데 말예요……."
정태의는 넋 나간 사람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낭패다. 만에 하나라도
정태의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이 맞아떨어진다면, 정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정말로 도망 못 친다.
"어떡하죠……."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습니까?"
게이블은 정태의의 영문 모를 말을 듣고 슬쩍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으며 정태의의 이마를 짚었다.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건 그런게 아니었다.
정태의는 딱 솟아오른 열기가 떨어질 생각을 않는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으아, 어떡하면 좋지,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 * *
세링게는 넓었다. 적어도 크게 소문내지
않고 한 사람을 찾아내려 들기엔, 넓었다. 아마도 막연하게 세링게라는
섬을 하나 던져주고 그 안에서 사람을 하나 찾으라고 했으면 꽤나 막막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섬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은 서너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한 군데는 상업 지역이라
낮에만 북적거리고 밤이 되면 인적이 드물어진다. 즉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은 세 구역이었다.
그 중 하나는 정태의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서남쪽 해안 근처로, 육지를 오가는 경비행기의 이착륙장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가장 번잡하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세링게 섬에 사는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서쪽 해안에 치우쳐 있는 조그만 거리로, 원주민들이 주로 살았다. 농업이나 어업이 주요 수입으로,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나가서 일하다가 가끔씩 휴일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치안이 그리 좋지 않아 외부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좀도둑이나 소매치기 정도가 많을 뿐,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동남부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이다. 바닷빛도 바닷속 산호초의 정경도 절경으로 유명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스쿠버다이빙 장소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정경을 보았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이, 이 지역은 바다라 해도 프라이빗 비치가 대부분이라
아무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바닷가로 늘어선 웅장한 별저들 역시 마찬가지로, 넘을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높다란 담장이 둘러진 집들은 출입문마다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었다.
아랍권이나 유렵의 부호들이 지니고 있다는 별저들이었다. 물론 그 지역 자체에 발 들일 수 없는 건 아니다.
누구든 길을 다니는 건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길뿐이었다. 가게나
식당 따위도 없었다. 그저 널찍한 길을 사이에 두고 높은 담장들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공원이나 휴양림이나……아니면 부자들 놀기 좋은 승마장,
뭐 그런 것도 없어요?'
정태의가 어이없이 묻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모두 별저의 담장 안에 갖춰져 있으니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게이블의 담담한 대답에 잠시 동안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정태의는 해먹에 올라앉아 망고를 죽죽 빨면서 게이블에게서 얻은 동남부 지역의 지도를 보았다. 외울 정도로 보았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열심히 외울 것도 없었다. 지도는 지도의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그 위에 나타난 그림은 그저 칸칸으로
개인 주택을 표시해놓은 곳과 그 사이에 줄처럼 길죽하게 표시되어 가지를 친 길뿐이었다.
반듯반듯하게 구역이 구분되어 집, 집, 집만 있다.
"이게무슨 지도야. 이런 걸 돈 받고 팔아?……헉, 3천 실링?!
이런 도둑놈들!"
지도의 뒷장을 넘겨본 정태의는 한구석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는 3000Tsh. 이라는 글자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이 나라의 물가를 생각하면,
또 이 지도 같지도 않은 내용을 생각하면 정말로 엄청난 가격이다.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 지도는 찍어낸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거든요.
그나마 지금은 그 회사가 망해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촤악, 물소리에 이어 게이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넓지않은 풀장을 몇 바퀴나 돌거나 혹은 그 안에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 멍하니
지도를 보던 정태의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빠져 죽었냐고 외치는 소리를 듣기도 한 게이블은 개운한 얼굴로풀장에서 나왔다. 물이 죽죽 흘러내리는 몸을 상체만 대충 닦아낸 그는 젖은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벤치로 가 앉았다.
한가로운 오후 나절이었다.
새벽에 한 번, 오전에 한 번,
그리고 지금, 오늘만 해도 세 번째로 정태의는 게이블이 풀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정태의는 지도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종잇장을 접으며 말했다.
"정말 수영 좋아하시나 보네요."
"예. ……."
짤막하게 대답한 그는 흘끔 정태의의 다리를 보았다. 정태의에게도 수영을 권하려다가 그 다리에 붙어 있는 깁스를 보고 입을 다문 게 틀림없었다. 그시선을 눈치챈 정태의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곧 풀 수 있을 거에요. 적어도 세링게에서 떠나기 전에는. 가기 전에 그 멋지다는 바닷속은 꼭 구경하고 가야죠."
정태의가 웃자 게이블도 그 무뚝뚝한 얼굴에 모처럼 살짝 웃음을 떠올렸다. 예, 하고 짧게 대답하는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었다.
적당히 몸이 말라 가뿐해진 듯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정태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현관께에서 멈칫하더니돌아보았다.
"태이."
"에?"
정태의는 한동안 그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그가 부르는 소리에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얼른 다시 '예'하고 제대로 고쳐 대답했다.
게이블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만히 한숨을쉬며 짧게 말했다.
"평화로워 보여도 생각만큼 그렇게 치안이 좋은 곳은
아니니까,마음대로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아요."
정태의는 게이블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되돌아오는 시선을 마주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웃으며 고개를끄덕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천만예요."
게이블은 무뚝뚝하게, 그러나 냉정하지는 않게 대답을 하며 걸음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좀 아쉽다. 다시 웃어줄까 했는데.
삭막하고 냉랭한 인상이 웃음 하나로 저렇게 바뀌는 사람도 드물었거니와, 저렇게 기쁜 듯이 순하게웃을 줄 아는 사람은 더 보기 드물었다. 좀 자주
웃으면 좋을 걸.
그러나 정태의는 이곳에서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저 게이블이란 남자가 주로 어떨 때
기쁘게 웃는지깨달았다. 대부분은 물이나 바다 이야기를 할 때다.전새에 물고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물을 좋아하는 그는, 집 안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볼일을 보러 나갔거나 혹은 바다에 나갔다.
그러고 보니 여기 바다가 그렇게 아름답다면서요,라고 일전에 정태의가 물었더니 그는 무심한 표정을 일시에 허물어뜨리며 조그맣게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알려주었다. 이 섬에서 특히나 아름다운 바다는 거의 프라이빗 비치라서 외부인은 못
들어가지만,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멋진 곳을 안다고. 그러면서 약속했다.
정태의가 깁스를 풀면 그곳을 안내해주겠다고.
"……."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할 때 옆에 있던 일레이의가느스름한 시선이 심상찮았던 것도
같다. 정태의는 지도를 잘근거리며 생각했다. 젠장. 얼굴이 또 빨개질 것 같잖아.
정태의는 지도로 마구 부채질을 했다.
오전에 외출갔다가 들어온 뒤로 일레이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5주 간의 휴가라 해도 제대로 된 휴가는 아니라서ㅡ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누가 저 놈에게 진짜로 병가를 주겠는가ㅡ하루종일 팩스로 일거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팩스가 좀
조용하다 싶으면 메일함 따위가 미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외롭게도, 저 흉신악살이 나름대로 맡은일은 제대로 처리한다. 아예 써먹지 못할 망나니는아니었다.
일적으로는. 아니 사실 일 자체는 매우 능률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처리한다는 걸 정태의는알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교위로 있으면서 익히 느꼈던 일이다. 성격만 좀
인간적이면 이 세상에 퍽 도움이 될 만도한 인간인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다시 미친 듯이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내 참 곤란하네, 곤란해……."
혼잣말을 중얼거린 정태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괜한 생각이나 하느니 차라리 거리 산책이나 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흘끔 집 쪽을 돌아보았다. 간혹 사람들이 움직이는기척은 났지만 바깥을 향한 시선은 날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냉큼 대문밖으로
나섰다. 정태의가 정원에라도 나갈라 치면 늘 입매를 찌푸리며 일레이가 말했다. 마음대로 나다니지 말라고.
그렇다고 평생 갇혀 있을 수도 없었고, 얌전히 집 안에만 있을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거리는 정태의의
마음에 들었다.
나무문을 빠져나가면 바로 눈앞에 이국의 거리가 펼쳐진다. 차는 지나다니지 않는 널찍한 흙길 골목양쪽으로 흙담이나 돌담이 주욱 이어져 있고 그 안쪽으로는 낯선 구조의
집들이 하나씩 담겨 있었다.
그 정돈되지 않는 미로 같은 길을 걷고 있으면 간혹스쳐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가오고, 정태의는 그호기심 어린 시선에 아무렇지 않는 듯 웃음을 걸었다.
이 길의 오른쪽으로 한참 나아가면 골목이 넓어지면서 큼직한 시장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흙길옆으로 키작은 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길이 트이면 모래사장이 나온다.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망설이던 발은,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싸늘하게 말하던 얼굴을 떠올리곤 투덜투덜, 왼쪽으로 향했다.
오전에도 걸었던 길이다. 다만 이 길의 중간까지였지만.
오전엔 동남부 해안 쪽의 지역에 갔다왔다. 부호들의 별저가 있는 그곳이다. 이 길의 가운데, 찻길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빠져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서 한 40분 달렸다.
낙락하고 여유로운 거리의 분위기를 창밖으로 즐긴끝에 다다른 그곳은, 여태 정태의가 지나온 길과는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은 이슬람의 어느 도시를 뚝떼내어 가져온 것 같았다. 아니, 그 도시에서도 호화로운 집들만.
지금 생각하면 그 지도와 정말로 똑같았다.
길가 집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그 집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담장이 높았다. 담장 너머로집
귀퉁이마다 비죽하게 솟아 있는 탑루만 보였을뿐이다. 게다가 길을 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고요하게 시간이 멎은 듯한 곳이었다.
'이래서야……담치기도 못 하겠네.'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레이가 흘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고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리며덧붙였다.
'여차하면 집집마다 담 넘어 들어가서, 형이 있나 없나 엿볼 작정이었지.'
'관둬. 그러다가 걸리면
골치 아파지니까. 회교도가어떤 인종인데.'
일레이는 딱부러지게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제대로 길게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친분을 맺지는 않았지만,
UNHRDO에 있을 때 다른 팀에 중동 출신인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별 다를
것 없었던 것 같다. 율법에 따라 정해진 시간마다 기도를 하거나 라마단을 지키는 등 종교적인 이유의 특이점을
제외하면, 평범하게 잘 웃고 평범하게 잘 뛰고 평범하게 말도 통하는 남자였다. 적어도 담치기하다가 걸렸다고 해서 곧바로 목을 베어내겠다고 덤벼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레이는 정태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놈들은 융통성이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아주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담치기는 융통성이 없는 부분인가 보지.'
'없어.'
일레이는 딱잘라 말했다. 정태의는 그래……? 하고 목을 긁적였다. 그래도 제법
넉넉하고 융통성 있는치들인 것 같던데, 하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들의 율법에 나와 있는 규율은 말할 나위 없고,책임과 권리에 관련된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게이블이 그들의 대화를 거들듯이 말했다.
'책임과 권리…….'
'다시 말하면 의무와 책임, 권리라고 해야겠군요. 의무가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이라면 책임은 그들이 지켜야 할 가족과 친우,
권리는 그들의 인격입니다. 담치기를 한다면 책임이라는 부분을 거스를 소지가 있지요.'
율법, 달리 말하자면 가치관이라든가,
가족과 친우,그리고 인격이라면 굳이 회교도가 아니라도 안 건드려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정태의는 굳이 말하자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마저, 리어뷰 미러를 통해 게이블이 살핀 모양이었다.
'경우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자칫하면 반응이 아주 격렬하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곳에 별저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부와 권력 양자를 모두 갖춘 사람이니, 건드려서 좋을 것 없겠지요.'
아하, 하고 그제야 정태의는
납득했다. 과연, 격렬한 반응이라는 게 때로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돈도 힘도 다 갖춘 사람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도.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정태의의 옆에 그런 인물이 하나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저 담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건 꼭 구경해보고 싶군.'
일레이의 무덤덤한 목소리를 듣고 정태의는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가 보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새도 넘어가지 못할 만큼 높다란 담장이 철벽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래서 못 하겠다고 그랬잖아, 못 하겠다고.'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부루퉁한 그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 일레이가 피식 웃었다.
어떤 곳인지 둘러보고, 운이 좋다면 형의 소식이 될만한 것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온 곳이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 암담해졌다.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다니는 것은 오직 차들이다. 대궐 같은 별저의 대문이 열리면거기에선
사람이 아닌 차가 나왔다. 게다가 죄다 시커멓게 선팅이 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영화에 보면 흔히 나오잖아요. 왜, 시장 보러 나오는 하인을 붙잡아다 매수든 협박이든 해서 정보를얻어낸다든가.'
'새벽마다 배달차는 들어간다고 하니, 그 차를 얻어탈 수 있으면 얻어타고 들어가 봐.'
정태의의 말에 심상하게 돌아온 대답은 이번에도 일레이의 목소리였다.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찾아볼 생각이 있긴 한 거냐.'
'찾으려고 해서 찾아질 인물이면 게이블이 꼬리를찾아내려고
고생할 것도 없었지.'
저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목에 주먹을 박아줬으면……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옳다.
뭐든 시도를 해서 통할 만한 상황이었더라면, 저 숱한 사람들이 여태 손 하나 못
썼을 리가 없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래서였다. 오로지 운 하나를 믿고 왔던 것이다. 요행, 바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운이나 요행이라고 해 봤자, 그런 걸 달고 사는 사람은 정태의가 아니다. 정재의였다.
정재의가 바라지 않는 이상은 정태의가 세링게 아닌 저 별저의 안방까지 들어간다 해도 그를 만날 수는 없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이는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는ㅡ별로 찾으려는 의욕도 보이지
않으며ㅡ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냥 5주 동안 쉬다가
돌아갈 요량으로 있으라고.
"네놈이야 5주 동안 휴가를 받았으니 쉬다가 돌아갈 요량으로 있으면 되겠지만, 나는 휴가 때문에 온게 아니라고.
형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거란 말이다……!"
정태의는 문득 울컥해서 걸음을 멈추고 내뱉었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던 여자 두 명이 움찔하며 걸음을 늦춘다. 히잡 자락을 움켜쥐며 경계 어린 눈초리로 정태의를 바라보는 게,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골목에 멈춰서 혼자 화를 터뜨리니 옆을 지나가기가 불안한 눈치였다.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리는 그들을 보고 정태의는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을 위협할 의도는정말로 손톱만치도 없었다는 걸 납득시킬 방도도 없었고, 납득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이방인은 호기심과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눈이 마주쳐버렸다. 여자들은 아예 걸음을 멈추었다. 더 난처해졌다.
정태의가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면 움찔하며 물러설낌새였고, 그렇다고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웃기다. 말이 안 통하니
'저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거든요' 하고 안심시켜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미 미심쩍은 인물로 찍힌 판에그 말을 믿어줄 리도 없다.)
어떻게 할까. 그냥 휙 달려서
스쳐가버릴까. 하지만달리는 순간 비명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은데. 그냥집으로
갈까ㅡ이 사실을 알면 일레이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러니까 네멋대로 나가지 말랬잖아'라고 지껄이겠지, 제길ㅡ.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맹렬히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 여자들에게는 다정하게 대하자는 걸 기본 태도로 삼고 있는 정태의는 동네 산책은 나중에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막 걸음을돌리려 할 때.
"바닷가로 갈 거면 이쪽 길도 통하는데."
어눌한 영어로 머뭇머뭇 말을 거는 낯선 목소리가,옆으로 난 좁은 골목에서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처음 보는 흑인
소년이 서 있었다. 집에서 일을도와주는 저 흑인 소녀보다 서너 살 위일까.
"아, 그래.
고마워."
정태의는 일단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그쪽 골목으로접어들어 여자들의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피했다. 뒤통수에 따갑게 꽂히는 시선이 돌담에 가리웠다. 곧 그녀들이 머뭇머뭇, 하지만 잰걸음으로 뒤를 스쳐 길을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지난 뒤에흘끔 돌아보자 그녀들은 이미 저만치 가 있었다.
그냥 동네 산책을 하는 것뿐인데 것도 쉽지 않군, 하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을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라, 하고 속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어디더라. 사실 서양인이 동양인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과마찬가지로,
정태의도 다른 인종들의 얼굴은 많이들 닮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러니 어디선가 달리
본 흑인 소년과 인상이 겹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정태의는 기억 속을 더듬어보았다. 그리 많이 뒤적이지 않고 기억해냈다. 정태의가 이 섬에 온 날,
집의 담장 밖에서 정태의를 올려다보았던 그 소년이다.
"……. 안녕.
난 태이라고 해."
"나는 토투. ……나, 당신 본 적 있어요. 비비가 일하는 집에 머무르고
있죠?"
흑인 소년이 콧망울을 문지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정태의는 오늘 아침에도 수줍게 인사를 해 오던 그흑인 소녀를 떠올리며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아이 친구니?"
"아니오. 그냥 이름만……. 어……. 좀 친하긴 해요.
조금. 사실 그 애와 나는 아주 친하거든요."
정태의는 물끄러미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더듬더듬, 쉬운 단어만 이어서 어법에 안 맞으나마 열심히 말하는 그의
말뜻을 가만히 되새겨본다. 정확히는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을.
"……. 그래,
친구. 앞으로도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주렴."
정태의는 담담히 웃으며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소년은 '오케이, 문제 없어요'라고 입술을잘근거리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돌아섰다.
"바다, 가는
길이죠?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가면 돼요. 따라와요. 안내해 줄게요."
이미 길목에서 마주쳤던 여자들은 저만치 사라졌고, 정태의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몇 발짝 앞서가다 돌아보는
소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그는 문득 픽 웃고는 소년의 뒤를 따랐다.
"그래, 가
보자. 원래 생각했던 것과 길이 좀 다르지만, 어차피 가려고 했던 길이니."
정태의가 웃음 짓는 얼굴을, 소년은 어쩐지 불안한듯 흘끔흘끔 올려다보았다. 그를 안심시켜주기라도하듯, 정태의는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소년은 흘끗 그 손을 보고는 어색하게 몇 걸음 앞서나갔다.
정태의는 소년을 따라 걸었다. 사람 둘이 딱 붙어서야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한 좁은 길목에는 달리 인적이 없었다. 타박타박,
소년이 걷는 소리와 저벅저벅, 그가 걷는 소리만 나란히 울릴 뿐이었다.
"아침에는 어디 갔다 왔어요? 근사한 차 타고."
몇 발짝 앞에서 걷던 소년이 물었다. 정태의는 숙소에서 준비해준 낡아빠진 사륜구동차를 떠올리며 으음,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다른
동네에. 혹시 내 형이 없을까 하고."
"형?"
"응. 나한테는
형이 있거든. 어쩌면 이 섬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몰라.
난 형을 찾아다니고 있어. 혹시 요 근래에 나랑 닮은 남자를 본 적 있니?"
소년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양인이 흔치 않은 곳이니 보면 금세 기억했을 거다. 소년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유는 달리
있을 테지만.
소년이 초조하게 돌아볼 때마다 정태의는 선선히 웃어주었다. 그러면 마주 웃지 않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 모습에서 다소 애틋함을 느낀다.
별 이야기도 없었다. 정태의는 앞서가는 소년의 뒤를 따라 여유롭게 걷기만 했다.
소년은 몇 번인가 골목을 돌아들었다. 지름길이라면서 소년이 앞서간 길은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을 여러 번 꺾어들어야 했지만,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았다. 저만치 앞에서 골목이 끝나며, 야트막하게허물어져 가던 담장도 끊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는키 작은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선다.
"저기, 저
앞으로 가면 바다가 있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자기 키보다도 작은 나무 앞에 멈춰선 소년이 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의 말대로 저 앞에 바다가 보였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 너머로
하얗게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뒤로 바다가 있다.
정태의는 감탄하고 말았다. 빛깔이 몹시 아름다웠다. 경비행기를 타고 이 섬으로 들어올 때에 저 높이 하늘 위에서 보았던
그 빛깔 그대로, 청보랏빛이감도는 투명한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 모래가 야득하게 펼쳐진 저 너머 해안에서는 반바지 하나만 걸친 청년들 서넛이
이제 막 돌아온 듯 조각배를 뭍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보다더 너머,
사람이 점처럼 보이는 멀찍이에 드문드문,얕은 바다 위로 띄우는 조그만 배들이 몇
척인가 더있다.
사박, 어느 새 흙길이
끝나고 발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밟혔다. 바람이 불었다. 알싸한 바닷냄새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몄다. 옷자락을 팔락이고, 피부를 기분좋게 때린다.
어느 결엔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정태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정말로 아름다운곳이구나,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 인사나
받고 가면 좋았을 걸."
정태의는 아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땅히 잡히는
게 없었다. 몇 원 가치도 없는 동전 몇 개가 잘랑거렸을 뿐.
곤란하네,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발치를보았다. 하얗고 고운 모래에 신발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마땅히 주워들 만한 돌멩이도 안 보인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손가락 만한 조개껍질이 보였다. 얇게 갈라진 그 조각을 모래 속에서 주워들었다. 그 갈라진 부분을 살짝
손으로 쓸어보았다. 제법날카롭긴 하지만 물렀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지겠다.
"적당히 무기가 될 만한 게 필요하다면,
태이 형. 제 걸 빌려드릴게요."
등 뒤, 어깨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숱하게 들었던.
정태의는 모래를 뒤적이던 손을 털어내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무기가 필요할 만한 짓을 네가 내게 할 리도,
내가네게 할 리도 없잖아."
예닐곱 걸음 앞,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정태의의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야위었고조금 더 가라앉은 인상이었지만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분명 신루였다.
정태의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작해야 몇 달 만인데, 그 풋풋하고 사랑스럽던 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듯했다. 수척한 얼굴은 완연하게 수컷의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무기가 필요할 만한 짓……."
그렇게 중얼거린 신루는 난처하게 웃었다. 밝고 환하던 그 웃음이 아닌 낮고 담담한 웃음이었다. 낯익은 얼굴의 낯선
표정이었다.
"왜. 하려고?"
정태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낭팬데, 하고 중얼거린다. 정태의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가볍기 짝이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동전 몇
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제가 원래 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요. 제대로 된 수단과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잘 지키는데,
그게 아니면 어쨌든 목적을 이루는 게 최우선이거든요."
"그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세네.
그런데, 잘 지냈어?"
정태의는 그렇게 묻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모래가 앉은자리 옆으로 조그만 둔덕을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리는 정태의를 보고 신루는 가만히 웃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 물며 정태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담배 피웠었어, 신루?"
"UNHRDO에서요? 잘 안 피웠어요. 가끔 피우고 싶은 기분이 드니까, 언제
그럴지 몰라서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안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죠. 일부러 사서 피울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은 피우는 정도였달까. 형이랑 비슷하죠?"
"음. 하지만
UNHRDO에서 담배가 많이 늘었지, 나는……."
도대체가 속을 안 썩이는 인간이 있어야지, 너 빼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필터를우물거렸다.
신루는 품속을 뒤적여 라이터를 꺼내었다. 찰칵, 불을 켜 내밀었다. 바람이 불어와 꺼졌다. 다시 불을
켜고 다른 손으로 바람을 막아 정태의에게 내밀었다.
"……."
라이터를 쥐고 무방비하게 내민 손. 마음만 먹으면당장이라도 그 손을 움켜쥐고 꺾어버릴 수도 있는손이다. 정태의도
알고 있고, 신루도 알고 있었다.또한, 정태의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그들은 알고있었다.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UNHRDO에서 나온 뒤로 담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래요?"
"음…ㅡ, 전에 한 번 피웠던가? 잘 기억이 안 나는걸. 그런데
UNHRDO에서 나온 뒤로는 거의 안 피웠어. 적어도 내 돈 주고 담배를 산 기억은
없지."
"피울 일이 없으셨나 보죠. 나는 UNHRDO에서 나온 뒤로 담배를 달고 살았는데."
신루는 자신도 담배를 한 개피 꺼내어 입에 물며 정태의의 옆에 앉았다. 찰각, 라이터 소리와 함께 이내 연기가 또 한 줄기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괜찮아?"
"그 사람이요?"
"홍콩에서 내 뒤에 붙었던 사람. 일레이한테 잘못걸려서 병원으로 실려갔었는데."
"아아. 그
놈요? 죽었어요."
대수롭잖게 대답하는 신루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멈칫했다. 그리고 기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일순 '죽였다'로 들렸다. 그러나 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고, 정태의는 말없이담뱃재를 털어내었다. 괜히 더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저 '안 됐군'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안 됐죠'라는 무성의한 대답이
돌아온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겠다."
"그렇지도 않았어요.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보다, 아프리카 오지에라도 있는 걸 알고서 찾아가는 게백 배는 더 편하죠.
형이랑 만날 수 있어서 좋은걸요."
신루가 웃으며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빛은 전혀 없었다. 정말로 기쁜 듯이 웃으면서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 입에 물려 있는 담배가 참 낯설다. 그러나 그휘어지는 눈웃음을 보고서 겨우 낯익은
구석을 찾아낸다. 담배는 어느새 필터 가까이까지 타들어가 있었다. 담배를
손에 든 정태의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래에 살짝 묻었다 빼내었다. 새하얀 모래에 담배를 끄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루. 미안했다."
정태의는 불이 꺼진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파도 소리며 바람 소리,
저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들에 뒤섞여 자신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 소리를 신루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 역시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모래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빙긋이 웃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형이 잘못한 건 없잖아요.
그냥 감정적으로 미안해하는 거야 형 성격을 보면 이해하겠지만, 실제적으로는 형이
내게 사과할 일이아니죠.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지."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자 신루는 우스운 말이라도 들은 듯이 짧게 웃음을터뜨렸다.
"자……그럼 슬슬, 형."
"슬슬 뭐. 끌고 갈 거야?"
때려눕혀서, 아니면 약으로,
아니면 힘으로? 그렇게 말하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흘끔 신루의 고운손목을 보았다.
아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 가녀려 보이는 손목은 놀랄 만큼 힘이 좋았지.
정태의에게 막 손을 내밀려고 하던 신루는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곤란한 얼굴로 정태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려고 했는데……. 싫으세요?"
"당연히 싫지. 끌려가는 걸 좋아할 놈이 어딨어."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해. 안 끌고 가면 되지."
"하지만 형 얌전히 절 따라오진 않으실 거잖아요."
"음. 난
내 형을 찾아야 하거든."
"정재이 말인가요? 굳이 찾을 필요 없잖아요. 그 사람은 어디에 가든 잘 먹고 잘 살 사람인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묘하게 찌푸린얼굴로 그를 본다. 신루는 평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진지해졌다.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형더러 정재이를 찾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든,
나는 상관없어요. 나는 정재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되든 좋아요. 나는 형만 있으면 돼요."
"신루."
"그러니까 나랑 가요, 형."
신루는 일어섰다. 모래가 부스스 떨어진다.
정태의에게 그 모래가 가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서 모래를털어낸 뒤, 신루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요전엔
제가 잘못했어요.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그래서 견딜 수 없었어요.
형도 날 좋아하는데 자꾸 뭔가가 안 맞아서, 자꾸 어긋나서,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요. 어떻게든 형을 갖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모두 다. 모두 다 형이 좋아서 그랬던거예요."
정태의는 조금 초조하게 들뜨는 신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 앞에 내민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손이다.
예전의 언제였던가, 이 손을 만져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던 때가 있었다.
정태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았다. 연신 웃으면서도 불안이 어려 있던 신루의 표정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태이 형."
"신루. 지금은
어때. UNHRDO를 그만두고, 잘 지내고 있어? 넌 그곳에서 일하길 좋아했잖아."
신루의 손을 잡은 채, 정태의가 담담히 물었다. 환해졌던 신루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야……잘 지내고 있어요. 아버지가 조그만 사업체를 하나 넘겨주셔서 얼마전부터 일을 배우고 시작했어요. 그것도 즐거워요."
"그래, 잘
됐구나.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가 볼게."
"……형."
신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움찔, 정태의의손에 맞닿은 그 보드라운 손이 움츠러든다.
"미안해."
정태의가 속삭이자 그 손이 더더욱 움츠러든다. 그손은 이윽고 주먹을 쥐며, 정태의의 손에서 벗어났다.
"……형. 날 좋아하잖아요."
신루가 조용히 말했다. 표정없는 얼굴로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일순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그래, 지금도
좋아해. 너는 사랑스러워. 귀엽고. 그런데……미안해. 네가 바라는 관계와 내가 바라는 관계는 다른 것 같다."
"아니, 형이
바라는 관계가 제가 바라는 관계예요."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내가 바라는 관계'가 바뀐 거야."
정태의는 조용히 말한다. 말하고 나자, 저릿한 아픔이 혀 끝에 남는다.
바뀐 것은 자신인지도 모른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지금도 사랑스럽다고 여겼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응해줄 수가 없었다.
감정이 조금씩 빛바래어 예전과는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느낀다.
그것은 아쉽고 안타까운 느낌이었다.
신루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낯설과 어른스러운 얼굴 위로 얼핏 분노가 비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 분노에 슬픔이 섞이고, 원망이 섞이고, 안타까움이
섞인다.
"나는요, 형. 안 돼요. 나는 UNHRDO에서 나온 뒤로 형밖에 생각 안 했어요. 형이 없으면 안 돼요.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형은 내 옆에 있어야 해요.안 그러면 안 돼요. 어째서 내 옆에는 없는 형이 다른 사람 옆에 있는 거죠?
형은 내 옆에 있어야 하는데. …ㅡ나는 그 생각만 했어요, 형."
"내가 바라지 않아도?"
정태의의 낮은 물음에 신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짧게 대답한다.
"바라지 않아도."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루가 내민 손을잡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어낸다. 부스스,
모래가 떨어져 신발에 부딪힌다.
"그런 점 때문에, 너와 나는 같이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런 점 때문에 나는 너와 같이 있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
정태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희미하게 험악한 기운이 서리는 그 빛을, 신루도 알아차린 듯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정태의는 불현듯 생각했다. 이 거슬리는 완강함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예전 UNHRDO에서 신루에게 느꼈던 것 외에도.
오래 생각할 것 없었다. 그 남자와 비슷했다. 바로 저기, 키 작은 나무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느긋하게 걸어오는 저 남자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뻐근한 듯이 주무르면서, 일레이 리그로우가 걸어오고있었다.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은 정태의에게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느리고 여유로운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흙길을 지나 하얀 모래에파묻힌다.
그 몇 걸음 뒤로 게이블이 오고 있었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 하나 없이 무뚝뚝했다. 흘끔
신루를 보아도 별다른 동요가 없다. 그제야 정태의는 게이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치안이 좋지 않으니 홀로 나가지 말라는.
치안이 안 좋은 게 아니다. 게이블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정태의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일레이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정태의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향하는 것을깨닫고 신루가 돌아보았다. 허리를 반쯤 돌려 고개만 돌린 신루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얼굴이었는지,신경 쓰는 척도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점 때문에 나랑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나요,형."
신루가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씩이나마 순한 웃음을 짓던 그 얼굴이 아니다. 선명하게 바뀐 그 얼굴은 이제 막 어른이 된 젊은 사자와 같았다. 거침없고 물러서지 않는,
자신만만한.
"그건 변명이에요. 왜냐면 형은 저 남자와 있으니까."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그의 말은 옳았다. 자신의 뜻을
억지로라도 관철시키는 그 점은 신루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신루가 아닌 일레이와 있다.
"즐거워 보이는데, 나도 끼어도 되나? 모처럼 반가운 얼굴도 보이는데."
느린 목소리가 신루의 어깨 너머로 끼어들었다. 얼핏 유쾌한 빛마저 띤 그 목소리가 신루의 뒤로 다가왔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두…ㅡ
정태의가 움직인 것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아직 예전의 버릇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흉포하고잔인한 남자에게서
사랑스럽고 순한 아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비호.
신루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 뒤로 정태의가 나섰다.일레이와 신루의 사이를 막아서며, 정태의는 순간실수했다 싶어서 혀를 찼다.
머리로 계산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막 손을 들어올리던 일레이는 멈칫 그 손을 멈추었다. 서늘하나마 웃음마저 띠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가신다. 그는
내밀다가 도중에 멈춘 손을 뒤집어 아무것도 없는 그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내가 악수라도 하고 싶은 반가운 얼굴은 네가 아닌데,
태이."
"……."
정태의는 곤란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대로 물러서는 것도 우습고, 계속 앞을 막아서고 있어도 우습다.
"음……내가 악수하고 싶어져서. 너랑. 반가워서."
정태의가 띄엄띄엄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접어주먹을 쥔 그 손에서 다시 손가락을 붙잡아 펴면서두 손으로 감싸쥐고 슬슬 흔들었다. 악수, 악수, 하고 중얼거리며.
"……."
"……."
고개를 숙인 정태의의 정수리 위로 따가운 시선이쏟아졌다. 일레이의 뒤에서 픽, 게이블이 웃는 기척이 들렸다. 흘끔 시선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태의는 자신의 두 손 안에 가득 찬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왜 이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역시, 이 괴물의 송곳니에 신루가 물어뜯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태이…….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는 저 꼬맹이에 대해 뭔가 약간 오해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뭐,
상관없지."
머리 위로 한숨이 내려왔다. 나직한 일레이의 목소리가 끝나면서 동시에, 정태의가 쥐고 있던 그 손이도리어 정태의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거세게 잡아당긴다.
"……!"
정태의가 신루를 자신의 등 뒤로 돌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레이가 정태의를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고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래, 그러면
반가운 얼굴인데 다시 인사를 할까.링신루. 링훠렁 어르신은 잘 계신가?"
일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약간 비틀어 올리는 입술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금세라도 사람 하나는쉽게 물어죽일 수 있을
듯 섬뜩하고 단단한 이다.
정태의는 그 이를 보곤 공연히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뭔가 편치 않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커다란 체구로 버티고 선 일레이를 앞두고, 신루는별반 움츠러드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그의 앞에 마주선다.
설핏 그의 눈빛에 싸늘한 빛이 스쳤지만 곧 갈무리한다.
"덕분에. ……잘도 찾아냈군.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행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고맙게도 덕분에 나도 다시 형을 만날 수 있었어."
신루는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숙부의 도움을 얻어 새 신분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의외로 자신을 찾아다닌 사람들이있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형도 그렇고,
형제 둘이 나란히 숨바꼭질을 했구만. 그럼 이제 형만 나오면 된다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미묘하게 웃고 있던일레이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꼬맹이.
이건 내 거야. 네가 넘볼 게 아니라고."
신루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태의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이런 점 때문에 저와 같이있을 수 없다고 했던가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정태의가 씁쓸하게 혀를 찼다. 그 혀 차는 소리에 흘끔일레이가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왜, 아닌
것 같나? 정태의, 너도 그래? 아닌 것 같아?"
일레이가 웃었다. 비틀리는 입매를
본 순간 정태의는 흠칫했다. 한 걸음 정태의에게 다가서며 내미는그 하얀 손을 보며 몸을 굳힌다.
그 손은 정태의의턱 아래에서 멈추었다. 마치 턱을 받치듯 손가락으로 턱 아래를 쓸며,
엄지로 입술을 문지른다.
정태의의 낯빛이 바뀌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비참한 꼴을 하고 있었던 자신의 기억.
순식간에 굳어지는 정태의의 얼굴을 보고 일레이 역시 잠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순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일레이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허를 찔린 듯 표정이 지워졌던 조금 전과 같은 얼굴이 아니다. 여느 때와 같은 무심하면서도 웃는 듯 마는 듯 서늘한 표정을 띤 채, 그는 잠시 시선을 허공으로
띄었다.
"이 꼬맹이가, 좀 안 보이는가 싶더니 그새 어디서간만 키워왔나 보군."
하하, 하고 낯게 웃는
일레이의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린 정태의는 그 다음에야 발견했다. 일레이의어깨 너머로, 신루가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어들고있었다. 22구경의, 익숙해지면 한 손으로도 다룰 수있을 만한 단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총이라도 이 거리에서라면,
또한 정확하게 맞춘다면, 사람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리그로우. ……쏜다."
신루는 조용히 말했다.
정태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보았다. 턱을 쥐고 있는 일레이의 손도, 얼마 전의 기억도, 신루가 일레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이 상황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신루의 손에 담긴 총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조용한 말이 흘러나온 그 조그만
입술을.
낯설다고 느끼는 건, 이런 순간이다. 저 손가락이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리란 걸 확연히 느끼는, 이런 순간.
정태의는 깨달았다.
낯설게 느끼는 건 자신의 잘못이다. 신루가 바뀐 게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이 그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픽 웃었다. 정태의의 입술
위에서 살짝 움직인 엄지가 천천히 떨어졌다. 낼름,그가 엄지를 핥았다.
웃음이 담긴 눈이 그러는 동안에도 지그시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말했잖아. 네가 오해하고 있었다고. ……뭐, 그렇다 해도 네 인식이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일레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그 몇 걸음 앞에서, 총구가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찰칵, 공이치기를
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신루!"
정태의가 외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금세라도 불을 뿜을 듯 고개를 치켜든 총을 사이에 두고, 일레이는 틀림없이
태연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웃었다.
"역시……아니거든."
그의 낮은 속삭임에 신루는 가만히 시선만 향했다.일레이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이 놈은 이런 짓을 해도 제법 맛깔나게 논다 싶었는데,
넌 아냐. 이거야 그냥――――겁 모르는 하룻강아지란 말이야."
일레이가 슬쩍 손을 치켜올렸다. 그 조그만 움직임과 동시에 신루가 손가락을 당겼다. 그 때였다.
철걱.
둔탁하게, 쇳덩이가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 정태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그러나 곧 깨달았다. 소음처리가 된 총의 공이쇠가탄환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막 당기던 신루의손에서 총이 날아갔다. 쥐고 있던 손에서 벗어나 튀어오른 총은 저만치
뒤, 바닷물에 밀려왔다 쓸려가는 경계선 위쯤에 떨어졌다. 총신이 뒤틀려
있었다.
손목을 접질린 게 틀림없을 신루가 손목을 움켜쥐며 낯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정태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둔탁한 쇳소리는 정태의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들의 뒤에, 게이블이 서 있었다. 무뚝뚝한얼굴
그대로 총을 쥐고, 그 총구 끝을 신루에게 겨누고 있었다.
"죽여버리지."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신루에게 향한 총을거두지 않은 채, 게이블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위험한 역할은 스스로 맡아요.
나는 링 가와원수 맺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이미 틀린 것 같은데."
"아니지요, 나는 이래봬도 목숨을 걸었거든."
게이블은 대수롭잖은 듯이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100여 미터 남짓 떨어진 곳,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숲 어딘가에서 장총을
겨누고 있을 사수의 가늠쇠가 정확히 자신을 조준하고 있다는 걸 그는 이미알고 있었다.
링신루. 링훠렁이 아끼는
아들이다. 홀로 이런 곳에있을 리 없었다.
손목을 약간 움직여보던 신루는 흘끔 게이블을 노려보았다.
"저건 뭐야. 죽을래, 자식아?"
표정만큼은 별로 격앙되지 않은 그대로였지만 신루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익숙지 않은 아픔에 분노가 일시에 터져나온 듯이. 게이블은 약간낯을 찌푸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일레이 같은 괴물을 비호하려다가 되려자신이
죽으면 그건 정말로 억울한 일이겠다, 정태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신루. 많이 다쳤어?"
정태의는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절로 입에서 나가는 말에 염려가 스민다. 그제야 신루의 시선이 정태의에게
돌아왔다. 표정없이 시선이 싸늘해져 있던 그 얼굴에, 삽시에 아픈빛이
번졌다.
"아파요, 형. 손목뼈가 부러졌나 봐요. 너무 아파요."
말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듣는 사람까지 아파질듯한 목소리였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그 어깨를 일레이가 움켜쥔다. 그러나 그 손을 가만히 움켜쥐어 떼어내며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어딜 가."
"손목이 상했다잖아. 나, 그런 건 잘 봐. …ㅡ일레이. 막지 마. 안 가니까."
정태의가 마지막 말에 강조점을 두어 말했다. 꿈틀,일레이가 입매를 찌푸렸다. 그가 입을 열며 막 뭐라고 하려 한 찰나, 정태의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그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알았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를 잡아당겨 신루 쪽으로 끌고 간다.
"그래, 그럼
너도 같이 가면 되잖아. 같이."
정태의는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질질 끌고신루에게로 갔다. 그리고 바다 반대쪽에 그를 세워두고, 그 앞에 신루를 두었다.
마지막으로 바다 쪽에 정태의 본인이 서서, 정태의는 신루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신루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보았다.
신루는 기묘한 표정으로 정태의를 보았다. 신루를사이에 두고 정태의와 마주보는 자리에 선 일레이역시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게이블은 총을 내렸다. 그의 위치에서는 더 이상 신루를 노릴 수 없었다.
일레이가 시야를 가린 탓이다.
마찬가지로, 얼마간 떨어져 있는
숲에서 정태의를겨누고서 장총을 들고 있던 사람도, 시야가 가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정태의는 홀로 진지한 얼굴로 신루의 손목을 살폈다. 손목과 손등에 걸쳐
조심스럽게 짚어보며 잘못 다친 곳은 없는가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그런 그를, 신루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약간 접질린 정도일 것 같지만,
많이 아프면병원에 가 봐. 그래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으니까."
"……태이 형."
"그런 점 때문이다, 신루."
정태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신루의 손목을 꼼꼼히살펴본 후 괜찮다며 놓으면서, 정태의는 신루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말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본다.
"네 옆에 있지 않은 나라면, 너는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
"그런 점 때문이야."
신루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정태의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긁적였다.
죽이려면 저놈 죽여, 저놈, 내가 딱 위치도
잡아줬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턱짓으로 일레이를 가리킨 정태의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는 신루를 보고 조금 멋쩍은 얼굴을 했다.
처음부터 눈치채거나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정태의는 누가 가르쳐준
바 없어도 절로 깨달았다.
신루를 지킬 저 사수가 노리는 사람은 일레이가 아니었다. 물론 게이블도 아니었다.
그가 노리는 사람은 정태의였다. 아마도 뭔가 조그만 몸짓, 신루의 조그만 신호로, 장총의 길고 가는총탄은 삽시에 정태의의 머리를 꿰뚫을 터였다.
정태의는 공연히 자신이 멋쩍어져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신루의 뒤쪽에 서 있는 일레이를 흘끔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죽이려면 저 놈을 죽이지 왜 나야."
미워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저 놈이잖아, 라고, 일레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신루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신루는 정태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가만히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어느 순간웃었다. 조금은 힘없이, 혹은 재미있다는
듯.
"리그로우는 내가 직접 죽일 작정이었지요.
아버지가 쓸 만한 사수를 구해주긴 했는데, 미리 당부했더라고요. 나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그쪽 집과 트러블은 일으키지 말라고. ……게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신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저 남자가 죽는 것과, 형이 내게로 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니까."
그래서, 여차하면 날 죽이려고?
――――라고, 정태의는 다소 뜨악하게 말을 하려다가 입을 도로 다물고말았다.
갑자기 오래 전 숙부가 했던 말이떠올랐다.
ㅡ그 녀석이 말이지, 의외성이 있어.
의외성. 그 빌어먹을 의외성.
생각지도 못했던 그 의외성은 여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앞으로 더 나타날까.
부디 이보다 더 험해지지는 않았음 좋겠다.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지만 신루의 그 힘 빠진 목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힘이
빠져, 한숨을내쉬고 말았다. 신루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조금전까지 정태의가 진짜로
다치지는 않았나 진지하게 살폈던 손목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은 마치 혼잣말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잠시 더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신루는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설핏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선선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안 되면 차라리 시체라도 데리고 돌아가려고했는데,
관둘게요."
정태의는 그, 오랜만에 보는 해맑은
웃음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 경우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정태의가 고민을마치기도 전에 픽 웃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시체가 된다 해도 네 몫은 없어.
저 놈이 시체가 되었더라면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남기지 않고 다 삼켜버릴지언정 네 놈에게는 안 줘. 땅에도 안 묻어."
느리고 나른한 목소리가 신루의 뒤, 일레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잠깐 표정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다는, 굳어버렸다.
아. 지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 놈이 말하면도무지 농담으로 안 들린단 말야. 워낙에 정신
상태가 비정상인 놈이어야지.
정태의는 서늘해진 팔뚝을 슥슥 쓰다듬으며 질린 얼굴로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언뜻 웃는다.
신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인형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신루는 입매를찡그렸다. 낮게 혀 차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왔다.
"한 시라도 저 놈 옆에 놔두기 싫지만,
……태이 형. 말해줘요. 나랑 같이 가시겠어요?
형이 가겠다면어떻게 해서든――――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형을데려갈 겁니다.
단, 그러면 형은 내 거에요."
드물게도 진지한 목소리다.
등 뒤에 선 일레이와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듯,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신루가 말했다. 조용하나마분명한 어조로.
정태의는 물끄러미 신루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시체를 가져가서 뭘 하게. 가죽 벗겨서 옷 만들려고?"
"아니오. 죽부인에 씌워놓고 잘 때마다 안고 잘 건데요."
"……."
대체 이 놈들은 농담이 왜 이렇게 살벌해…….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어, 그러냐, 하고 중얼거렸다. 정태의의 그 씁쓰레한 얼굴을
보며 신루는 가만히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정태의도 웃었다.
"같이는 가지 않아."
조용히 대답하자 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기다릴게요."
"어, …ㅡ음?"
"언제든 좋아요. 형이 원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간다고 했잖아요. 형 근처에 있으면서 천천히기다릴게요."
신루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태의는 그를바라보며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언뜻, 그 말을 피상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바짓단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는 신루의 말에는 뭔가 걸리는 데가 있었다.
그게 뭘까 생각하는 정태의의 옆에서, 시선이 서늘해진 일레이가 입을 연다.
"근처에서 맴도시겠다……?"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바짓단을 세심하게 털어낸 신루는, 다시 허리를 펴 자세를 바르게 한 뒤에야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태이
형이 원한다면 어떻게든 데려올 거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만 되면,
형은 네 눈에 두 번 다시 띄게 할까 봐. …ㅡ딱 한 마디. 데려가 달라고만 하면 나는 형을 데려갈 거에요. 설령, 그래, 내가 죽더라도. 하지만 그 대신,
그럼 형은 내 겁니다."
뒷말은 정태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겠다면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그러나 그 뒤로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정태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몹시도 입맛이 써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간만 키워온 꼬맹이군. 응?"
일레이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험악함이 깃들고 있었다.
"아버지를 너무 지나치게 믿고 있어,
신루."
일레이는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줄곧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더 이상은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정태의는 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레이!"
문득 왈칵 닥쳐온 불안에 정태의는 그를 불렀다. 막걸음을 내디디려던 그가 흘끗, 눈동자만 돌려 정태의를 본다.
"나는 가지 않아.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일레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정태의를 내려다보는눈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까닥, 손가락이움직인다. 움켜쥐어 뜯어내어버릴 목줄기를
아쉬워하듯이. 이윽고 그의 시선은 신루에게 옮겨갔다.
신루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혹여 일레이가 그를 해치려 들면 수십 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수십 초.
일레이와 신루의 눈이 마주쳤다. 희미한 긴장이 떠오른 신루의 눈 위로 언뜻 웃음이 겹쳐졌다. 그 불그르슴한
웃음에, 일레이의 눈매가 좁아졌다.
수십 초. 신루가 사수에게
손짓해 정태의를 황천길의 동반자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충분한 시간이다.
일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신루를 내려다볼 때였다. 정태의가 에이, 기껏 바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뭐 이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쉬곤 말했다.
"난 그만 돌아가야겠어. 댁들은 더 있다 올 거면 더있다 오든가. 그리고 신루. 다음에 보자. 그런데 그 전에."
일레이와 게이블을 향해 말한 정태의는 신루를 휙돌아보더니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을 크게뜨고 정태의를 바라보는 신루의 앞에 멈춰선 정태의는, 문득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뻐억, 거친 소리와 함께,
정태의의 주먹에 얻어맞은신루가 얼굴을 감싸쥐고 모래 위로 나뒹굴었다.
"태, 이
형…ㅡ?!"
아프다기보다는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신루가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에고고, 잘못 때렸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주먹을주물거렸다. 자기가 때려놓고도 억울하다는 표정을하고선 신루를 쳐다본다.
"너는 오늘 좀 맞아야 되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녀석을
많이는 못 때리겠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난 너 또 때리기 싫어.
내가 아프니까."
"……. 마음이요,
주먹이요?"
"둘 다! 너 앞으로 또 그러면 또 맞는다."
신루는 얼굴을 감싸쥔 채 물끄러미 정태의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고 대답하는 그가 과연 뭣 때문에 맞았는지 이해는 했을까 하고
정태의는 잠깐 생각했지만, 굳이 더 말하지는 않았다. 멀쩡한 사람 목숨을
네 맘대로, 운운하고 말을 시작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말해도 별로 알아먹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의는 복잡한 심경으로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모래 위에 뒹굴며 앉아 있는 모습도 처연하고 예뻤다. 하지만 분명 그
얼굴 뒤에는 선명한 의외성이있었다. 일으켜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돌아섰다. 그러다가 앞에 서서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더 있다 갈 건가?"
"글쎄……, 생각 중인데."
"생각할 거면 같이 가지."
"흠……글쎄……."
"……. 같이
가면 좋겠는데."
조금 더 머무르다 갈 눈치인 듯한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슬쩍 중얼거렸다. 일레이의 시선이 정태의에게로
떨어졌다.
"왜. 네가
가자마자 저 꼬맹이를 어떻게 할까 봐?"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아까 여기로 데리고 온 애가 너무 길을 돌아왔어. 어떻게 돌아가야 되는지 길을 모른다고."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태의의 길 감각이 매우좋다는 걸 모를 그가
아니었지만, 잠시 침묵한 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지금은 그냥 돌아가도록 할까."
일레이는 나직이 말했다. 흘끗 신루에게 눈길을 던진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왔던 때와 같이 느릿하게앞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게이블이 그 뒤를 잇는다.
정태의는 우두커니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한숨을 쉬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태이 형."
등 뒤에서 신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걸음을 늦추며 고개만 돌렸다. 왜 부르냐고, 시선으로 묻는다. 신루는 아직껏 모래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형. ……좋아해요."
그가 조그맣게 말한다. 이미 예전에도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또한 정태의가 그에게 말하기도 했던말이다.
그 묘한 무게감에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졌다.
정태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는 자신의 얼굴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치며, 다시 돌아서 서걱서걱 걸음을 내디뎠다.
* * *
어쩌면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UNHRDO를 떠나오기 전부터, 어쩌면 정태의는 알게 모르게 깨닫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루가 그 고운 얼굴로 독하기그지없는 말을 하는 걸 들으면서도
정태의는 뜨악하긴 했지만 크게 충격을 받거나 진저리를 치지는않았다. 그러한 사실들이
신루에 대한 정태의의 감정을 변색시키지는 않았다. 더 좋아질 것도 덜 좋아질 것도 없이, 신루는 신루 그대로였다.
다만 놀란 것은, 저것이 진짜 신루의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한 점.
정태의가 낯익게 대했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약간야위고 수척해진 그 얼굴은 임의대로 예전의 그 사랑스럽고 해맑게 웃는 얼굴을 떠올리기는 했지만,아슬아슬한 불안감을 내포한 위험을 담고 있었다. 고운 얼굴 안쪽에 담긴 것은 선명한 수컷의
얼굴이었다.
실수했다,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떠나, 그가 무의식 중에라도 계산하지못했던 것은 예상보다 더한 신루의 집착이었다. 찾아다니거나 쫓아오는
것까지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반응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
사면초가. 진퇴양난.
진퇴유곡. 여우 피해 호랑이.앞에는 절벽이요
뒤에는 호랑이라.
아까부터 정태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런 말들뿐이었다.
호랑이, 여우.
절벽. 어째 죄다 저 꼴이람.
어느 쪽이든 선택할 만한 게 못 되었다.
"…ㅡ어으, 대체 왜 이래, 뭐가 이래."
정태의는 샤워기 아래에 우두커니 서서 차가운 물줄기를 맞고 있다가, 어느 순간 으으윽, 하고 신음처럼 소리지르며 마구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카락이 한 줌 수북하게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성
탈모증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정태의는 일레이의 방에 있는 것보다 더 신선하다는 비누를 통째로 들고 몸에 문지르다가
욕실 벽을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모두 다 UNHRDO가 나쁘다. 그곳에서 온갖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인연들 중 제대로 된 인연은 하나도 없는 성싶었다.
"차라리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간다,
라."
분명히 의외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저 놈도 정상이 아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볼수록,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정황을 살펴보면 분명 농담이 아니었다.
"삼촌 성격이 그 꼴이 된 것도
UNHRDO 탓인지도 몰라. 거기 출신인 놈들 중에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 없다니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지."
하긴 교관부터가 일단 저 놈이잖아, 이미 불 장 다 봤지, 정태의는 투덜투덜거리면서 몸의 비누 거품을 씻어내었다.
물은 제일 차갑게 돌려놓았지만 속에서 뜨끈하게 열이 솟는 탓인지 그리 춥지도 않았다. 비누 거품이 몸에서 다 씻겨 내려가도 정태의는 한동안 샤워기 아래에서 비키지 않았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물 아래 몸을 맡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ㅡ가고 싶으면 가 봐. 그러면 내 손에 시체가 될 테니까.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삼켜주지.
문득, 집으로 돌아와 나무문으로
들어설 때 일레이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정태의는 문턱 위를 넘어서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는 시체로 만들어서라도 끌고 간다고 하고,하나는 가기만하면 시체로
만들어서 먹어치운단다.
'이리 기단 저리 가든 결국 난 시체 신세냐…….
너무한 거 아냐? 신루까지 날 죽여서 끌고 가겠다니.'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운이 없다없다했더니 급기야는 엎어치나 메치나 다 시체란다.
문 앞에 버티고 선 일레이의 옆을 스쳐 집으로 들어가려던 정태의는, 팔을 움켜쥐는 손 때문에 걸음을멈추어야 했다. 혀를 차며 돌아서자 그가
냉랭하게내려다보고 있다.
'정태이. 시체로 만들려면
내가 벌써 만들었어. 죽일 생각이었으면 내가 이미 죽여버린 지 오래란 말이다. 내가 너를 살려뒀는데, 다른 누가 네게 손댄다고?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해. 너를 죽인다? 너를?'
코웃음을 치며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바싹 붙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새어나오는 숨결이 귓불을 간질였다.
그때, 정태의는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바닷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을때부터인지도 모르고,
혹은 이야기가 오가던 도중의 어느 때부터인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일까.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저 푸르스름한 웃음이 짙어지고 눈빛이 얼어붙은 게, 언제였지.
오래 기억을 되새길 필요는 없었다. 곧 기억났다.
신루가 손목을 접질러 정태의가 그리로 다가갔을 때부터다. 숲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사수가 정태의를 겨누었던 때부터.
'나는 죽지 않아. 그에게도. ……너에게도.'
정태의는 조용히 말했다.
문득, 귓가에 바싹 다가와
있던 그의 숨결이 잠시 잦아드는가 싶었다. 얼굴 위로 그의 시선이 내려왔다.
'정…ㅡ.'
'본사에 답변을 보낼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희한한 얼굴로 정태의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일레이를 가로막은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게이블이었다.
'하던 일을 버려두고 나갔던 일이 일단락되었으니,버려뒀던 일을 다시 해야겠지요.'
게이블은 손목시계에서 시선을 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레이는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일레이는 오늘 일이 많다고 했다. 월말에는 회사의 일이 거의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거의
얼굴을 못 보았었다. 아마도 그러던 차에 나왔던 모양이었다.
일레이는 한 걸음 떨어졌다. 한 걸음 더 떨어질 때까지 정태의의 뺨에 머물러 있던 손이 천천히, 천천히 떨어졌다.
그 손끝이 정태의의 입술을 한 번 문지르고 떨어졌던 그 감각이, 아직껏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넋을 잃고 있었던 걸까. 문득 피부가 따끔거린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각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어, 하고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부가 시퍼랬다.
한참 동안 샤워기의 차가운물 아래에 드러나 있던 살갗이 얼어붙어 푸르스름할 지경이다.
정태의는 그 빛깔을 보고서야 추위를 느끼고 얼른샤워기 아래에서 비켰다. 다리가 굳어 그나마 잘 움직이지 않았다. 버석, 깁스한 다리를 꽁꽁 묶어놓은비닐이 타일바닥 위에서 미끌거려 하마터면 넘어질뻔했다.
어차차, 하고 벽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한정태의는 얼어서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샤워부스에서 나왔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내 몸 학대하지 말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호랑이굴에 가도 살아난다는데."
정태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샤워부스 밖으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다 입고 나서도, 몸에서 선뜩한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뼛속까지 찬물에 절어버린 것 같다.
"어으, 추워.
…ㅡ진짜 정신 나갔나. 이 꼴이 될 때까지 얼음물을 맞고 있는 놈이 어딨어.
아주 혼을 빼두고 다니는구나, 정태의."
정태의는 몸을 주무르며 욕실에서 나왔다. 깔개에 젖은 발을 막 내딛다 말고 멈칫했다.
침대 위에, 욕실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얹혀 있었다. 이불 채로 깔고서 커다랗게 모로 누워침대를 온통 다 차지하고 있는 그 침입자를,
정태의는 잠시 지그시 노려보았다.
일레이 리그로우.
그가 거기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정태의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그리로 다가갔다.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가도 일레이는 눈을 뜨지않았다.
어차피 잠귀가 무서울 만큼 밝은 남자였다. 이름 한마디라도 부르면 바로 눈을 뜰 테지만 정태의는 굳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 별다른 볼일이 있어 찾아온것도 아닌 눈치였다. 그럴 필요가 있었더라면 정태의가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이미 눈을 뜨고 있었을 남자다.
앞에는 절벽, 뒤에는 호랑이.
둘 다 싫다. 떨어져서 요행히
살아남을 만한 절벽도아닐 것 같았고, 싸워서 이기거나 혹은 솜씨 좋게 도망칠 수 있을 만한 호랑이도 아닐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 가든 인생 막장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
정태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묵묵히 생각에 잠긴 채 머리를 문질렀다.
과연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자신에게 나을까. 혹은,과연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상대에게 나을까.
전자에 대한 결론은 금방 나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없이 잠깐 떠오른 얼굴이 있었지만 정말로 아무런이유도 근거도 없었기에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후자에 대한 결론은.
역시나 뚜렷한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쉬이 떠올랐다.
매우 인간적이었으나 정태의와 알게 된 이후 지금은 비인간성이 부각되게 된 사람이 하나. 그리고 애초부터 비인간적이고 지금도 여전히 비인간적이지만 미묘하게 인간적인 면모가 보일 듯 말 듯하게 된사람이
하나.
자신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인간성이 떨어지는 인간보다는 그 반대가, 이 세상을 위해서도 낫겠지.
정태의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방 안에 나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일레이."
그 숨소리만큼 조용하게, 정태의가 속삭였다.
그곳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가 눈을 뜨지도 않았다.조그마한 움직임조차 멎어버린, 정적으로 찬 공간.
정태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돌렸다. 침대위로 반쯤 올라앉아, 한 손으로 일레이의 머리 옆을짚었다.
베개도 베지 않은 그의 머리 옆으로 시트가움푹 패었다.
정태의는 시선 바로 아래에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미동조차 없는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마치 사소한 흠이라도
잡아낼 듯이 살핀다.
어느 순간이었다. 그것은,
정태의가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어느 순간이었다.
"……어."
정태의는 문득 중얼거렸다.
입술에 뭔가 닿아 있었다. 따뜻하게 메마른, 조금은까슬한 감촉의 익숙한 느낌이, 유난히 낯설게 닿았다. 일레이의 얼굴이 몹시 가깝다. 시야를 가득 메워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정태의는 몸을 일으켰다. 어……? 그렇게 한 번 더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두어
뼘 아래에 있는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약간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깜빡이지도 않으면서 정태의를 올려다본다.
시선을 마주한 채 정태의는 세 번째로 어……, 하고 중얼거렸다.
잠시 정태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입은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닫혔다. 그러나 이내 다시 열린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멋대로 입을 맞춰놓고 뭐가
어, 야."
그 무심하고 평연한 목소리는, 그러나, 여느 때보다미묘하게 낮아져 있었다. 그 말만
하고 그는 다시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렇지……?"
"뭐?"
"지금 내가 너한테 입 맞췄지, 응?"
정태의는 반쯤 넋이 나간 듯 물었다. 일레이는 살짝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정태의를 마주보기만
한다.
정태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앉아당황한 듯이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뭐……?"
일레이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는 그 외마디 말에, 정태의는 조금 더 당황하고 만다.
정태의의 기억은 일레이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데에서 아주 짧은 순간 끊겨 있었다. 어쩌면 그 직전에 그의 입술로 시선을 주었던 것도 같다. 정신을차리고
보니 그의 입술 위에 입술을 겹치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정태의는 사뭇 심각했다. 낯빛까지 당혹스레 굳어 중얼거리는 그를, 일레이 역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일레이의 그 눈빛 역시 '이 놈이 미쳤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이, 정태이.
너…ㅡ."
일레이는 혀를 차며 손등으로 정태의의 팔을 툭툭두드렸다. 그러나 그러다 말고 다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뭘 한 거야."
"응? 아.
샤워. 찬물로 했더니 좀."
너무 놀라서 추위도 잊어버렸다. 정태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다시 온몸에 들러붙은 추위가 떠올라팔을 문질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기분이었다.
문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앉은 일레이는손등으로 정태의의 팔이며 허리, 다리 등을 쓸어내리더니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와서 제가 한 짓을제가
모르나 했더니, 얼음물 속에다 정신 담가두고왔나? 정신 차려,
정태이."
허벅지까지 내려갔던 손등이 다시 올라와 정태의의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태의는 넋이 나가다 못해우울해진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래, 진짜 갑자기 우울해졌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모르다니, 이건 정신분열의 초기단계일지도 몰랐다.
이 정신분열이 진행되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뺨 위를 문지르는 손등의 감촉을 느끼면서 정태의는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 역시 정태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몹시 기묘한,
희한한 어떤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 왜
거기서 자고 있어."
정태의는 여전히 우울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일레이는 천천히 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정태의의손ㅇㄹ 잡고 입가로
끌어당긴다. 그 차가운 손끝을따끔할 정도로 깨물었다.
"잠시 눈만 붙이고 있었을 뿐이야."
"게이블의 말을 듣자니 일이 산더미 같다던데."
"음…ㅡ꼭 봐야 할 것만 보고 나머지는돌려보냈어.병가를 받은 사람이 과로를 해서야 안 될 말이지."
"병가……."
정태의는 손끝에서부터 시작에 손목까지 혀를 미끄러뜨린 그의 널찍한 어깨며 앏은 셔츠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 따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네 병가신청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건 대체 누구야."
"교관의 휴가에는 총관과 차관의 허가가 모두 필요하지.
매우 기꺼워하며 총차관에게 허가를 얻어준 건 정창인 교관이었지만."
그래, 그것 봐.
UNHRDO에 제정신인 인간 없다니까.
정태의는 어이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깨를 움켜쥐고 밀어젖히는 손길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누운 몸 위로 일레이가 올라왔다. 묵직하게 가슴 위를 누르는 큼직한 몸집에 숨이 무거워졌다.
답답해, 하고 말하려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답답함보다 먼저, 싸늘하게 식어 있던 몸에 체온이 건너와 따뜻해졌다.
불평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도로 입을 다무는 정태의를 보고, 정태의의 다른 쪽 손에 입술을 대던 일레이가 피식 웃었다. 가끔 얼음물에
담가둬야겠군,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정태의는 몸에서 힘을 빼고 누운 채 멀거니 천장을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당혹스러움을 떠올린다.
"……."
시선을 떨어뜨렸다. 정태의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대고 있는 일레이가 보였다. 손목을 쓰다듬듯이 문지르고 있는 그
입술을 쳐다본다.
모양 좋은 입술이었다. 딱히 특이할 것은 없지만 지나치게 얇지 않고 보기에 따라서는 육감적이라고 못 할 것도 없는 입이다. 하지만 정태의는 한 번도 그 입술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문득 무서운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정신분열의 진행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지에 대한 무서운 생각이었다.
아냐. 아냐,
아냐. 이러면 안 되지. 마음의 병이 인생
말아먹기전에 어서 고쳐야 하는데.
속으로 혀를 차며 침울하게 생각하고 있던 정태의는, 일레이가 속삭이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겠군',하는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아 정신을 차린다.
"아. 못
들었어. 뭐라고?"
팔꿈치 안쪽까지 올라왔던 일레이가 흘끗 정태의를곁눈질했다. 서늘한 눈매가 잠시 정태의의 표정을훑고 떨어졌다.
"만나봐야 한다고 하더니, 만났으니 좋겠군. 오랜만에 보니 그리움이 좀 풀리던가?"
주어가 빠진 그 말을 듣고 몇 초쯤 생각한 뒤에야 겨우 정태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스스로의 정신분열 초기증상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터라 조금 멍해져 있었다.
"아…ㅡ, 그래……, 그래, 만났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루를 떠올렸다.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하고, 혹은 전혀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설마 죽이겠다고 사수를 준비해뒀을 줄은 몰랐지만."
"하하아, 그래서 나를 사수가 있는 방향으로 밀어뒀나?"
그 목소리에는 비웃음에 가까운 유쾌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흘끔 일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신루의 손목을 보러 가면서,일레이를 끌고 가서 사수와 자신의 사이에 세웠다.실상 '나 대신 이 놈을 쏘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태도였다.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정태의는 속으로잠깐 안도했다. 정신 분열인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머릿속이 좀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걸."
한숨 섞인 변명을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신루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정확히 예측하고 그랬던 건 아니다. 그건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서 피하려
하는.
"왜. 나는
총에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아서?"
일레이가 여전히 빙글거리며 물었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것도 있지만, 갑자기 기억이 나더라고. 그래도 생각해 보니까 너는…ㅡ."
말하다 말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꺼내고나서야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건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상황에서는 크게 상관이 없어진 기억인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신루랑 잤잖아. 그러니까 설마 너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 순간, 팔 안쪽을 거쳐
겨드랑이 가까이까지 올라왔던 입술이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입을 찡그리면서 고심에 잠긴 듯 으음, 하고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따지자면 신루와 보다 깊은 관계인 건 정태의보다 일레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몸도 섞었고,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부대끼기도 하지 않았던가. 아주 약간방향만 바꿔서 말하면 이 두 놈의 치정 싸움에 엉뚱하게 자신이 끼어든 셈이었다.
내가 고이 빠져줄 테니 두 사람이 계속 얽히고설키면 안 될까, 하고 제법 진지하게 생각하던 정태의는다음 순간 "아야!"하고 외치고 말았다.
겨드랑이 조금 아래, 팔 안쪽의 연한 살점을 단단한이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눈물이 찔끔 배어나왔다. 반사적으로 팔을 움츠렸다. 물린 곳을 엄지로 문지르며 살피자 선명하게 잇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핏기마저 약간 비친다.
"한 번뿐이었어."
낮고 거친 목소리가 어깨 위에서 목덜미로 기어올라왔다. 팔을 문지르던 정태의는 어느 결에 차가워진 몸을 다 데운 그 커다란 몸이 자신을 보다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아래, 사타구니 사이에
불편하게 머무르고 있는 두둑한 질량감도.
"한 번뿐이었다고."
"알아, 알아.
그때 봤잖아."
"네가 본 그때 이후로 그 놈을 건드린 적은 없어.
…ㅡ아니 다른 놈도."
그 거친 목소리는 이미 귓가에 닿아 있었다. 두텁고뜨거운 혀가 턱을, 뺨을 핥아올린다. 마치 화가 난것처럼 힘이 들어간 손끝이 정태의의 허리를,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정태의는 그 억센 손이 자신의 허벅지를 움켜쥐어 들어올리는 순간ㅡ별 소용은 없을 것
같았지만ㅡ얼른 이 놈을 밀어젖히는 게 신상에 이로울까 짧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직껏 싸늘한
다리를 움켜쥔 손의따뜻한 체온이 아쉬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그 고민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허리 아래로 든든한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살덩이가 있었다. 사타구니를 찌르는 그 큼직한 살덩이를 느낀 순간 그의 팔을 움켜쥔 정태의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ㅡ일레이."
"쉬었을 텐데. 충분히."
정태의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듯, 정태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는 짧게 잘라 말했다.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뜻하는 의미 그대로, 그야 충분히 쉬었다. 지금은 오랜 여정으로 지쳐 있지도 않았고 몸 어딘가가 심각하게 불편한
상황도 아니었다. 배도 고프지않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그와 이런 식으로 맞닿지 않았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가이 섬에 도착했던 첫날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그때 이후로, 그는 정태의를 건드리지 않았다.
문득 정태의의 머릿속에,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별로 상상은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저 인간답지 않은 일레이 리그로우의 내부에도 존재할지도 모르는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
갑자기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정태의는 그 사실에 당황했다.
그게 왜. 확실히 누군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하면 다분히 자아도취적인 면에 있다는 소리를 들을 여지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낯붉힐 일은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뭘. 나 정도면 괜찮은 놈인데 누가 내게 확고한 호감을 품고 있다 한들.
하지만…….
그때, 정태의의 뺨을 입술로
쓸어내리던 일레이가약간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정면에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정태의는 지레 찔려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워낙 눈치가 빠른 놈이니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을 고스란히 다읽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다시 생각해도역시 비현실적이고 동떨어져 있는 생각이라, 좀체 이렇다 할 확신이 들지 않았다.
"뭔가 재미난 생각을 하나 보지. 눈동자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가 속삭였다. 나직한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밴다.
그래, 분명 재미난 생각이긴
하다. 무섭고 멋쩍어서차마 확인해볼 수는 없는 생각.
"태이, 다른
생각하지 마라."
턱을 깨무는 이가 뜨끔하게 살갗에 박혔다. 정태의는 움칫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뺨을 감싼 손이 그 얼굴을
다시 돌린다. 입술 위에 입술이 맞닿았다.
문득 감촉이 떠올랐다. 바로 조금 전의 감촉이다.
자신은 이 입술에 입을 맞추었었다.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그에게 입을 겹쳤다. 그 순간의 짧은 기억은
머릿속에서 휘발된 것처럼날아갔는데도, 입을 겹치는 찰나 그 감각은 익숙하게 되살아났다.
그래. 어쩌면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는 일레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은 그 메마른 입술을 건드려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본능적인 욕망과도 같이.
그래. 그래.
그래. 그냥 하고 싶었다. 이유 따위 알 게
뭐야.
정태의는 입속으로 밀려드는 익숙한 혀를 느끼며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정태의의 시선이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그의 입술을 한 번 아플 만치 세게 빨아댄 일레이가 약간 얼굴을 떨어뜨렸다.
"오늘따라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군.
…ㅡ오랜만에 그 꼬맹이를 만났더니 넋이 빠졌나?"
말이 끝나는 순간 뜨끔하게 아랫입술을 물어뜯는 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는 정태의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가 다시 속삭인다.
"하긴 기구에 있는 동안에도 너는 그 놈 일만 되면정신을
못 차렸어. 풋풋한 어린애처럼 온 얼굴에 좋아 좋아, 적어놨었지."
"…ㅡ."
"그 놈이랑, 잤나?"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근히 떠보는 듯한 그 목소리에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얼얼하게 아픈 입술을 핥으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자놓곤 왜 나한테 채근이야,
채근이."
"그 놈에게, 좋아한다고는 숱하게 말했지."
일레이는 혼잣말인 듯이 나직이 속삭였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뻔히 다 아는 일을 굳이
물으면서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래서야 꼭……, 이래서야
정말로…….
다시 한 번 가슴속이 뜨끔했다. 심장이 텅텅 튀면서감을 전한다.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이내 우악스럽게입술을 겹치며 세게 이를 박아넣는 그 사나운 아픔에 절로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악! 야,
아파…ㅡ!"
"태이, 팔
감아."
"머?!"
입술이 겹쳐지고 혀까지 깨물려서 발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거세게 힘이들어가고 나서야 정태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이해했다.
그의 목에 허겁지겁 팔을 둘렀다. 한 시라도 지체했다간 아예 입술을 죄다 짓씹어놓을 기세였다.
예전과 같다. 그때도 미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비록그가 말해서 끌어안은 팔이라고는 하나, 마치 자신쪽에서
자신의 의지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 같다.
"그래. 그래……조금
더 세게."
정태의의 팔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라 치면 어김없이 입술이든 뺨이든 베어물며 더 세게
안으라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깊은 산중에서마주치는 굶주린 호랑이 목을 끌어안은
기분이다, 정태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틀림없이 그 굶주린 호랑에게 머리끝부터 잡아먹힐 거다.
"그 놈한테는……."
문득 귓가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낮은 목소리가 미처 듣지 못했다. 정태의는 응?
하고 되물었다. 한동안 돌아오지 않던 대답은, 뺨을 물어뜯는 아픔과 함께 돌아왔다.
"어떤 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했어. 상냥한 남자처럼 말했나? 아니면 수줍고
무뚝뚝하게? 그것도 아니면 물오른 창부처럼 허리를 흔들면서 말했어?"
점차 목소리가 험해졌다. 말을 하다가 욱한 듯 갑자기 입을 다문 일레이는, 낮게 혀를 찼다. 거침없는손이다가와 정태의의 옷을 잡아뜯듯이 벗겨내었다.저만치 내던진 옷이 땅에 내려앉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정태의는 엉덩이에 타는 듯이 뜨거운 살덩이가 와 닿는 걸 느꼈다.
"잠깐, 왜
너 혼자 말하고 너 혼자 화를…ㅡ."
"태이. 말해
봐. 어떤 식으로 말했어, 응? 말해 보라고."
일레이가 정태의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가볍게, 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이라,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호된 아픔이 얼얼하게 번졌다. 아야, 하고 소리지른 정태의가 울컥해서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깨물었지만 아랑곳도 않았다.
"이 새끼가 미쳤나, 왜 아랫도리는 벌떡 세우고서 사람을 때리고 이 짓거리야!"
"팔에서 힘 빼지 마!"
정태의가 욱해서 소리쳤으나 일레이도 마주 고함을쳤다. 그 험악한 목소리에 정태의는 얼른 그의 목을감았던 팔에 힘을 주면서 스스로를 약간 비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바로 입 옆에 있는 그의귀에 대고 정태의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어떤 식으로 말하긴 뭘 어떤 식으로 말해.
그런 걸일일이 생각하고 말하는 놈이 어딨어. 그냥 말하는거지. 좋아해――――하고."
좋아한다고, 예전 언젠가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어딘지 빛바랜 사진처럼 그리운 느낌으로,정태의는 그 그리움이 조금 아쉬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좋아해.
그러나 그 마지막 마디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아니, 일레이가 삼켜버렸다.
입을 통째로 뜯어먹을 듯이 밀어닥치는 그 거친 입맞춤에 숨조차 돌리지 못하던 정태의는, 그러나, 바로 다음순간 더 큰 위기가 닥쳐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 …ㅡ!"
그러나 그 위기가 위기임을 깨닫기도 전에, 그것은현실로 나타났다.
어깨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허벅지를 움켜쥐고 앞으로 민 하얀 손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나
싶었다. 바로 그 순간, 허벅지 사이를 푸욱,
파고드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소리는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태의의 귀에는 분명 그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ㅡ!!"
벌어진 입에서 터져나온 비명은 이번에도 그가 삼켜버렸다.
몸이 둘로 갈라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몸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 그 살덩이는, 몸 속이비좁은지 입구
근처에서 몇 번인가 얕에 몸 속을 파헤치며 살짝살짝 드나들듯이 움직였다. 이미 끄트머리가 젖어 있었는데도
뻑뻑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야, 아,
하, 어, …ㅡ으, 흐, …ㅡ!"
정태의는 몸을 버둥거렸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 얼굴 위에 겹쳐져 있는 그의 얼굴을 밀어낸다. 침대 위를 기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아래에 말뚝처럼 박혀 몸을 반 너머 고정시킨 살덩이는 빠지지 않았다.
"태이, 태이…….
조금만 힘 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말고, 자, 괜찮아, 찢어지진 않았어, 잘 하고 있어, 만져 봐,
괜찮지?"
귓가에서 짤막짤막한 단어들이 하나의 말을 이루었다. 일레이는 파랗게 굳어진 정태의의 눈가를 입술로 훔치면서 그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몸이겹쳐져 있는 곳을 그 손 끝으로 더듬게 했다.
반쯤 정신이 날아간 정태의는, 자신의 손 끝에 닿는아랫도리의 감촉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빌어먹을,분명 하루에도 몇 번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쥐었던 자신의 물건에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박혀 있는데,
손 안에 쥔 느낌이 너무도 차이났다.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이지만,
나란히 놓여 있는 성기 둘이 얼마나 확연하게 비교가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아득한 머리에 떠올랐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다시 한 번 남자의 자존심이 박살나서 정태의는 왈칵 울어버렸다.
"이 인간도 아닌 새끼야, 왜 이런 걸 나한테 들이대고 그래. 아파죽겠단 말이야. 아파죽겠다고."
"안 아프게 할게. 그럼 아프지 안하게 할 테니까, 한 번 더 말해 봐."
"말하긴 뭘 말해, 개새끼야! 뭐!"
정태의는 벌컥벌컥 소리를 지르면서도,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래가 당겨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결국 그는
침대 위에 늘어진 채 졸도하다시피 해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좀 해 봐, 넣든 빼든, 끼어서 꼼짝을 안 하잖아, 아파죽겠단 말야.
차라리 얼른 넣었다 빼더라도,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정태의는 울먹이면서 허리를 당겼다. 그러나 비좁은 너트에 억지로 비틀어넣은 볼트처럼, 몸 속에 반쯤 파고든
물건은 꼼짝도 않았다. 정태의는 전생에자신이 저질렀을 죄를 생각하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팔에 힘 빼지 마.'라고 말하는 남자를 그냥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어그 목만 팔로 콱 졸랐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 속을 파고든 채, 팔을 뻗어 침대 협탁의 서랍을 열어 뒤적였다. 그러다가 뭔가손에 집혔는지
달각거리는 소리가조그맣게 들렸다.
이윽고 엉덩이, 정확히는 일레이의
성기가 꽂혀 있는 곳에 뭔가 질척한 것이 흘렀다. 차갑게 미끌거리는 액체가 엉덩이를 타고 흘러 허리까지 방울져내렸다.
기름이다.
움찔, 샅이 움직였다.
살이 살을 조여물고 있는 사이로 기름이 조금씩 배어들었다. 찌걱, 찌걱, 살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겨우.
빼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콱 틀어막고움직이지를 않던 성기가 움직일 기색이라도 보이는게 다행스러웠다. 정태의는
일렁거리는 시야 안에담긴 일레이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한 번 더 말해 봐, 태이."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척상냥하게 들렸다.정신없이 울고 소리치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이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다니.
"좋아한다고, 한 번 더. ……한 번 더 말해 줘."
그러나 다시 들려온 목소리도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다.
문득 정태의는 몽롱한 머리로 아아, 하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단단히 비틀려 있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여 있다 못해, 아예 사고회로가 손쓸수 없도록 뒤엉켜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밖에는
못 나오는 거다.
정태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너, 나
좋아하지."
"뭐?"
"좋아한다고."
주체가 애매한 말을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잠시 말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던일레이는,
곧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움직임은 점차 빨라졌다.
아, 아,
아, 그가 추삽질을 할 때마다 정태의의 입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절로 터져나왔다.
얼른 넣었다 빼더라도 어떻게든 해 보라고 했던 스스로의 말을 후회하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몸 속에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살덩이가 끝간 데 없이 밀려들어, 온 뱃속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정말로속이 찢어지겠다고,
공포에 가까운 감각이 덮쳐왔다.
정태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또 울고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태의의 얼굴 위로 조심스레내려온 하얀 손이 얼굴을 닦아준다. 그 따뜻하고
마른 손길을 느끼며 정태의는 힘들게 눈을 떴다. 그렁그렁한 시야에 일레이의 얼굴이 비쳤다.
……. 괜히 봤다.
눈을 뜨는 게 아니었어.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었다.
아마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땀에 젖고 욕망에 절은 채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표정에는 정태의가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던 그의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허리 아래로 둔중하게 들어찬 살덩이 때문에 여전히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맑아졌다.
어떡하지. 이러면 곤란한데.
이렇게 눈빛으로, 표정으로, 손길로,
숨결로, 저렇게 노골적으로 호소하는데 모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정태의는 곤란한데, 곤란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마음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걸 느꼈다.그걸 깨닫고 조금 당황하다가, 아까 자신이 그에게입을 맞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미치겠다. 정신분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
봐. 이 놈을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걸 보라고. 그래도 이 놈이 별로
밉지않은 걸 보란 말야, 미친 게지.
정태의는 눈을 떴다. 그의 어깨 너머로 천장이 보였다. 이 놈이 나를 좋아하면. 그러면 이래도 되나? 이 놈이랑 이렇게 몸을 섞을 수 있어? 아래를 가득 채우다 못해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숨조차 쉬기 힘든데? 좋아한다고 해서,
이럴 수 있냐고? ……설마 죽지야 않을 거고, 그럴 수도 있지 뭐.
정태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생긴 것만 인간 꼴을 하고 있을 뿐 머릿속은 전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놈도 인간이었나 보다. 정태의의 뺨을 쓰다듬는 손이,
눈꺼풀을핥는 혀가, 코 끝에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이."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가.
"태이."
다시 한 번 그가 정태의를 불렀다. 정태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마주본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어떤 눈을하고 있는 지 알까. 그 기묘하면서도 어딘지 감동스럽기까지 한 눈에서 정태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놈도 인간이었구나. 이 놈도 사람의 감정이라는걸 가지고는 있었던 거야.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문득, 다시 한 번 이 남자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정태의는 그의 목에 둘렀던 팔에 힘을 주려 했다.
그때였다.
"그럼, 넣는다."
일레이의 입에서 짧은 말이 떨어졌다.
넋이 나간 듯한 머리 한구석으로 '응……?'하고 아련하게 생각하던 정태의는, 다음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뭐……?"
"아래, 넣는다.
힘 빼. 그렇지 않으면 다치니까."
"무슨 소리야. 다 넣었잖아!"
"……. 아직
반은 더 남았다. ……힘 빼."
정태의의 뒤집어진 외침에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는가만히 정태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어쩌면 자신을 조금은 가엾게 여기는지도 모르는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그
몸짓은 상냥하지 못 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다시금 비명섞인 울음을터뜨리며,여태껏 떠올렸던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인간은 무슨 얼어죽을.
18. 재회
아침부터 머리가 무거웠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일 수도 있고, 혹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와중에도 고뇌가 머리를 짓누른 탓일 수도 있다. 아침에 느지막하게 눈을 뜬 순간부터 머리가 묵직하고 정신이 산만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립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어릴 적의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꿈을 꾸고 나면 보통은 그랬다. 때로는 하루종일 기분 좋게 지낼 만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렇게 그립고 아쉬웠다. 어쩌면 자신은 생각보다 어린 시절을 사랑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정태의는 생각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그때를 아쉬워하며, 꿈속에서 그때를 보고 또 보는 것이다.
두통까지는 일지 않았지만 머리 위에 돌이 하나 얹힌 듯 묵직해, 잠에서 막 깨어 그런가 보다,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생각하며 정원에 나가
뒹굴거리다가방에서 책장을 넘기곤 했다. 그러나 점심이 지나 오후로 접어들도록 좀체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았다.
이건 아무래도 약물의 도움이라도 좀 받아야겠다 싶어, 뭐라도 마시고 정신을 좀 차리려고 맥주를 가지러 2층 방에서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중이었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에 발을헛디뎠다.
"…ㅡ!"
발 아래에 디딜 땅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가슴언저리가 서늘해졌다. 반사적으로 옆의 난간을 붙잡고 끌어안았지만,
약간 늦었다.
쾅,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계단에 엉덩방아를찧고 말았다. 그나마 거꾸로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지만 온체중을 받은 탓에 엉덩이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아, 아야야……."
정태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소리를 들었는지 주방에서 여주인이 나왔다. 난간에 어중간하게 팔을 걸치고서 계단 위에 다리가 꼬인 채로 앉아 있는 정태의의 모습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온다.
"어머, 괜찮아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아, 괜찮아요.
엉덩방아를 찧어서 엉덩이는 좀 아픈데 다른 데는 별로……."
"다리는 괜찮아요?"
여주인이 걱정스레 정태의의 깁스한 발목을 가리켰다. 정태의는 아, 이거요, 하고 태연하게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안 아파요. 전에도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다쳤는데 또 계단에서 부러지면 억울하지……. ……진짜 안 아프네."
정태의는 통통, 발뒤꿈치로 바닥을
두들겼다. 발목으로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프진 않았다.
텅텅, 좀 세게 찼다. 역시나,
아플 법도 한데 아프지 않았다.
"어머, 이제
거의 다 나았나 봐요."
"어머, 그런가
봐요……."
저도 모르게 여주인의 말투를 따라 되풀이하면서 중얼거린 정태의는 빤히 여주인을 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날짜를 생각해 보았다.
깁스를 한 뒤로 하도 일이 많아서 종종 다리를 혹사시켜 다시 악화시키긴 했지만, 홍콩에서 떠난 뒤로는 얌전하게 지냈다. 원래 회복도 빠른 편인데다 시간도
그럭저럭 지났다.
"어머, 나을
때가 됐나 봐요……."
정태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리다가, 말투가 입에 붙기 전에 얼른 놀라나간 정신을 붙잡아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난간을 붙잡고 훌쩍 일어서 따각따각 소리를 내면서 복도를 몇 번 오간 정태의는 심각한
얼굴로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여주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 병원이 있긴 한가요?"
* * *
정태의는 체질적으로 수술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유달리 거부 반응이 심한데다 약물에 따라 타인에게는 멀쩡한 약에도 쇼크반응이 있어, 병원 자체가정태의에게는 그리 구원줄이 아니었다.
이 다리도, 뼈에 몇 군데 금이
가서 단단히 고정시키고 깁스를 해 둔 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는 정도로 그쳐서 망정이지, 만일 뼈에 철심을 박아넣는 등의 수술이라도 해야 했더라면 고생 깨나 했을 거다. 군대에 있을
때에 한 번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조금과장하자면 상처 자체 때문에 아니라 수술 때문에 죽을 뻔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가급적이면 수술을 할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했다. 그런데도 깁스한 발로 정상인보다 더 고된 상황을 지냈으니 스스로 무덤을 판 거라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다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무리하지 마시고, 매일 물리치료 받으셔야 합니다."
과연 원래는 하얀 색이었을지 의심이 되는 노르스름한 가운을 입은 의사가 말했다. 단단하게 테이핑한 발목을 슬쩍 움직여보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깁스를
풀면 얼마간은 두 발목의 두께가 다르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털도 무성하게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예전대로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좀 신기한 마음으로 다리를 쳐다보며, 정태의는의사가 하는 말을 건성건성 들었다. 몇 번 다쳐본 경험으로 봐선
이런 경우에 그들이 하는 말을 대개비슷했다. 정태의는 그가 그럭저럭 말을 마쳤다 싶을 즈음에야 고개를 들고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딱 한 마디 했다. 고마워요,
라고.
더 이상은 아프지도 않고 혹시나 싶어 테이핑도 단단하게 했지만 그 동안의 습관 때문인지, 발로 바닥을 디디면서 약간씩 절뚝였다. 그나마 몇 걸음쯤 걷는 사이에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걸음으로 돌아갔지만.
여주인이 알려준 병원은 제법 깔끔하고 큼직했다. 섬에 하나밖에 없는 제대로 된 정형외과라는 말에기대했던 바에는 미치지 못하는, 좀 큼직한 동네병원 정도의 규모였지만 내부 설비는 괜찮았다. 게다가 위치도 찾기 편한 곳에
있었다. 숙소에서 좀 떨어져 있다는 점이 유일하게 안 좋은 점이었다.
가늘 길이 장날이라고, 일레이는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다가 숙소의 설비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어,
문명의 이기를 찾아 다르에스살람으로 새벽같이 나갔다. 저녁에는 돌아올 거라고 하고
나갔으니, 돌아오려면 아직 한 나절은 있어야 한다.
게이블은 정재의의 행방에 대해 뭔가 더 뒤적여 볼여지가 나온 듯, 엊그제부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예멘인지 오만인지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말도 언뜻 들은 것 같았다.
"찾을 수 있긴 한 건가 몰라…ㅡ."
정태의는 병원문을 열고 나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세링게에 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발목의 깁스를풀어낼 만큼의 시간이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재의를 찾아낼 기미는 전혀보이지 않았다.
손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틈만 나면동남부 지역에 가서 어슬렁거리거나, 뭔가 아주 조그만 소식이라도
들어오면 그 소식을 쫓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뿐, 이렇다 할 만한 확실한 수단이라곤 무엇 하나 없었다.
"사실 이럴 때야말로 판저 파우스트가 필요한지도
몰라. 괜히 애꿎은 숲에 불지르거나 대전차포를 쏘아대지 말고, 그 의심쩍다는
아랍인의 집에다 대고확 쏘아버리면 좋았잖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중얼거리다가 문득 번뜩정신을 차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 미친놈의 그 무지막지하고 무모한 수단을 그리워하다니 나도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병원이 있는 3층짜리 낡은 건물에서
막 나와 거리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다 끝나셨어요, 태이 형?"
마치 처음부터 같이 병원에 와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건물 앞의
화단에 기대어앉아, 신루가 웃음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정태의는걸음을 멈추고 빤히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응.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형이 병원에 들어갔을 때부터요. 아, 깁스 풀었네요. 다 나은 거예요?"
"응. 그래도
한동안은 조심해야 할 테지만, 이젠 그냥 다녀도 괜찮아."
정태의는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차며 말했다. 이거야 원, 멋대로 집에서 나갔다가 신루와 마주쳤다는얘기가 그 놈 귀에
들어가면 또 작살나겠구나. 상상만 해도 벌써 한숨이 났다.
분명히 정태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준 숙소의 사륜구동차가 병원 앞에 서 있어야 할 텐데도
차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십중팔구는 이 녀석이 손을 썼겠구나 싶었다.
차가 있었던 빈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흘끔 신루를 쳐다보자, 신루는 왜 그러냐는
듯고개를 갸웃하며 웃음 지었다.
"계속 세링게에 있었던 거야?"
정태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예, 하고 대답하며 신루가 따라온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는 있었다. 길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고 외길로 나 있어서, 찾아가라면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차로 거의 반시간 남짓 걸린 그곳까지 걸어서 돌아가려면 근 열 시간은 쉼 없이 걸어야 할 거다. 깁스 풀자마자 열 시간은 너무 과하다.
그러나 문제는, 걸어서 돌아가라면
갈 수 있지만 버스나 다른 교통편으로 돌아가려면 큰일이었다. 그리로 가는 교통편을 알 리가 없었고,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해도 외부인이 거의 없이 현지인이 대부분인 이곳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요한 건, 정태의는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잘랑거리는건 턱없이 부족한 동전 몇 개뿐.
마지막 수단은 택시다. 택시를 타고 가서 숙소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돈을 가지고 오는 건데……예전에 여주인에게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부를
들은 바가 있었다. 치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나 또 썩 좋다고도 할 수 없으니, 택시는 함부로 이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정태의는 잠깐 하늘을 보았다.
그 모든 걸 다 계산하고 차를 돌려보낸 건 아닐 테지만 어쨌든 곤란하게 됐다.
옆에서 따라오는 신루를 보았다. 정태의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던 신루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었다. 그 수줍은 얼굴은 예전에 익숙했었던 그 얼굴이었다.
"엊그제 봤던 얼굴이랑은 또 다르네……."
"저요?"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신루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소리내어 웃었다.
확실히 다르다. 엊그제 봤던 얼굴과도
다르고, 이렇게 보니 UNHRDO에서 겪었던 신루와도 다르다.
같은 틀에서 찍어낸 똑같은 꺼풀을 쓴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그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신루. 기다리겠다고
했지.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 하지 않고, 내 의지가 따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정태의는 일단 숙소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가며말했다. 옆에서 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또 내 앞에 나타나면 그 놈이 또 난리칠걸"
"기다리겠다고는 했지만 그 동안 전혀 안 만날 수는
없잖아요, 태이 형."
신루는 꺼리는 빛도 없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둔 뒤에 약간 빛을 바꾼 목소리로 덧붙인다.
"사실은 지금도 가끔씩 고민이 되긴 해요.
어떻게든 데려가고 싶다고, 마음속에서 계속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요.
어떻게 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내 곁에 두고 싶다고."
"……. 죽여서
가죽 벗겨서 죽부인에 씌워두고서?"
정태의가 중얼거리는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신루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말을 한 신루가
어쩌면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져서 가슴주머니를 두드렸다.재빨리 눈치채고서 신루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내밀었다. 한 개피 입에
물자 얼른 불까지 붙여준다. 고마워, 하고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후우, 하늘을 향해 연기 한 모금을 내뿜었다.
사실 정태의는 당황하고 있었다. 굳이 이 순간만이아니다. 요 얼마간, 그는 저으기 당혹스러웠다. 신루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 남자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신루가 나타난 날 이후로, 매일 밤마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방으로 왔다. 그렇다고 늘 몸을 섞는 건 아니었다.
전날 지나쳤다 싶거나 지칠 만한 일이 있으면 페팅 정도로 그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을 여기저기 매만지고 쓰다듬다가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럴 때면 대체로 피로에 절어 거의 기절하다시피 주욱 뻗어서도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조그만 소리에도 곧 눈을 뜨는 일레이가잠든 듯이ㅡ정말로 잠들었는지 그냥
눈만 감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ㅡ누워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무어라 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것이 싫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심경이 복잡했다.
"신루. 내
생각엔 기다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담배 연기를 가만히 뿜어내며 정태의가 조용히 말했다. 비록 길거리가 번잡하긴 했지만 그 조용한 목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못 들은 것처럼 옆을 걸어가며 담담하게 웃고 있다가, 갑자기 정태의를 곁눈질하더니
물었다.
"태이 형. 형이 피우고 있는 그거, 사실은 담배 아니에요."
"어?"
정태의는 이미 반 넘게 타들어간 담배를 여전히 입에 문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처음 맛보는 맛이기도하고 좀 진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별로 특이한건 모르겠는데…….
"피워본 적 없구나……. 그거 아편이에요. 담뱃잎이랑 블렌딩을 잘 하고 순도를 조절해서 피우기 편하게 만들긴 했지만."
"푸헉!!! 쿨럭, 쿨럭쿨럭……."
정태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ㅡ아니 담배가 아니라고 했던가ㅡ를 뱉어내며 미친 듯 기침을
했다. 연기를 헛들이켜서 목이 몹시도 따가웠다.
가슴을 두드리며 기침을 해대는 정태의에게 신루가'그렇게 놀라셨어요? 다 피우신 다음에 말씀드릴걸'하고 걱정스레 중얼거리며 물이 담긴 페트병을 내밀었다. 그러나 기침이 잦아든 정태의는 미심쩍은눈으로
그 페트병을 바라볼 뿐, 받아들려 하지 않았다. 신루는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그리고 형이 피운 것도 담배 맞아요. 설마 제가 형한테 아편을 줄까 봐서요."
"……."
이 놈도 어째 성격이 좀……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손등으로 마른 입가를 훔쳤다.
"그런데 실제로 블렌딩을 하고 손을 좀 봐서 담배처럼
파는 아편도 있어요. 우리 집에서 뒷문으로 파는 물건 가운데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도록 잘 팔리는 물건이지요.
물론 당당히 시판되지는 않지만."
정태의는 신루가 '그냥 물이라니까요.'라고 건넨 페트병을 받아 들어 마시다가 희한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루는 즐거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영화 이야기라도 하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이었다.
"그게, 한
며칠 피우면 금방 손을 뗄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람 하나쯤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간단하대요."
정태의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시체를 가져갈 작정이 아니라 이제는 아편중독자로 만들어서 끌고 갈요량인가 보다.
"그래서 뭐……사실은 그런 방법도 생각해 봤어요.게다가 그렇게 망가지면 아무도 형을 줍지 않을 테니 내가 독차지할 수도 있고."
"……신루."
정태의가 짤막하게 말했다. 신루는 그제야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정태의는 신루의 그 농담 같은 말에 약간 정도는 진심도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고 신루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한숨을 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주위에 감당 못 할 미친놈은 하나로 그치면
좋겠다."
그러자 신루가 소리내어 웃었다. 언젠가와 같이 사랑스럽게, 예쁜 구슬이 반드르르 굴러가는 것처럼.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여기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온갖 생각을 다 했는데, 막상 형을 보니까……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신루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태의보다 두어 걸음 앞서 걷다가 돌아서서 마주선 신루의 머리 위로 하늘이 떠올라 있었다. 신루는 고개를 한껏 뒤로젖혀 '아, 예쁘다'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하늘은 몹시 아름다웠다. 노을이 지고있었다. 태양 반대쪽 하늘은 아직도 새파란데 해가저무는 곳은
청보랏빛이 연하게 깔려 그 파란색과섞여들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 하늘만큼이나 예쁜 신루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곱고 사랑스럽다. 저 머릿속에 어쩌면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르는 괴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살뜰하게 기울였던 정은 그리 쉽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이 아이에게 욕망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호텔에도 같이 들어갔었다. 서로 바라는바가 다르다는ㅡ혹은 지나치게 똑같다는ㅡ걸
알고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
어차피 깔리는 신세가 될 거였으면, 저 비인간적인놈보다는 신루로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신루는그래도ㅡ머릿속이야
어쨌든몸만은ㅡ인간적이잖아.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우울해져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루. ……기다리지
마."
정태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신루는 여전히 하늘을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돼요?"
"……음."
"그럼 안 되는데……."
신루가 중얼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떨어뜨려 정태의를 보며, 빙긋이 웃는다.
"아직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얘기를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또 든단 말이에요."
"그건, ……안
되지."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저랑 놀아요. 아, 그렇지. 태이 형, 우리 시장 가요, 시장."
신루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태의의 소매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시장?"
"이 근처에 바헵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일주일에 한 번 야시장이 선다잖아요. 그게 제법 재미있대요.
딱 좋네요. 여기서 한 10분만 차 타고 가면
된다고 하니 가깝기도 하고, 날짜도 맞고."
정태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도 두어 번 가 보았던 곳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혹여 뭔가
괜찮은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열린다는 날이면 그곳으로 갔었다.
물론 건질 만한 수확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이블이 물뱀 모양 우산 손잡이ㅡ우산도
없이 손잡이만 덜렁 남은 그 나무조각을 대체어디에 쓰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ㅡ를 하나 샀을 뿐이다.
형, 어서 가 봐요,
라며 소매를 붙잡고 흔드는 신루의 옆에서 정태의는 흘끔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녁에
오겠다고 한 일레이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이 놈이 먼저 돌아가기라도 하면,
또 멋대로 나갔다고 아주 사람을 쥐잡듯 할텐데.
"아니, 난
오늘은 좀……."
"형. 같이
가요. 거기 사람도 많다면서요. 그럼 어떤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기는 좀 무서워서요."
신루는 눈을 크게 뜨며 속삭였다. 살짝 처지는 눈꼬리는 정말로 겁먹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눈꼬리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지금 저 말에 속는다면 자신은 정말로 바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에……가자. 오늘은 그만 돌아가봐야겠어. 미안."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신루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그는 곧 방긋 웃으며 정태의를 보았다.
"그런데 태이 형. 여기서 형이 묵는 백패커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데, 어떻게 돌아가시려고요?"
"……."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돈푼도 없고 마땅한 교통 수단도 알지 못하는 채 길 한복판에
덜렁 서 있었다.걸어갈 길이야 알지만 걸어가면 필경 내일 자정도 훨씬 넘은 한밤중에야 도착할
거다.
깁스 풀자마자 또 발병나게 생겼다.
정태의는 침중한 얼굴로 신루를 쳐다보았다. 신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저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섬의 남쪽 해안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 거리, 바헵은 조용한 곳이었다. 8월에서 10월, 계절풍이 불어 선선하고 날 좋은 건기가 찾아들면 서핑을 즐기러 찾아든 사람들로 북적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늘 한산하고 조용한, 고즈넉한 거리였다.
그곳은 일주일에 딱 하루, 금요일 밤이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온 세링게 사람들이 다 몰려드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북적였다. 금요일 밤이면 바헵의 중앙 광장에서 야시장이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정작 필요한 물건이 있어 특정한 물건을 사러오는, 단순한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시장이라면 다른 곳에도 일주일 내내 서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바헵의 널찍한 중앙 광장, 그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분수대를 끼고 그 주위에는 전문적인 장사치들이 자리를 깔고 물건을 팔았다. 보통 시장에서 흔히 볼만한 것들도 많았지만 보다 드문것들, 도매 시장에서 묶음으로 볼 만한
것들도 제법 나왔다.
그리고 분수대의 반대쪽으로, 지금은 이미 무너져서 흔적밖에 남지 않은 성터 근처에는 벼룩시장이섰다. 누구나 집에서 안쓰는
물건이라든가 수공으로 만든 물건 등, 아무거나 가지고 나와서 그곳에 적당히 자리를 펴고 앉아 팔 수 있었다.
미리 예정된 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곳은 때로는 몹시 북적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한산하기도
했다.
정태의가 신루와 함께 바헵 거리에 도착한 것은 해가 막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탓인지 광장은 한산했다. 가끔 몇 군데 목좋은 자리를 미리 잡아놓은 장사치들도 보였지만, 아직은
구경을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슬슬 장이 서기 시작할 거라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백인이 손에 들고 있던 여행책자를 보곤 귀띔해주고 갔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실려 있는 마니악한 여행 책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정태의는
그 백인이 들고 있는 책자를 눈여겨 봐두었다. 잘 팔리지도 않을책을 내는 출판사는 꼭 이름을 기억해두고
아껴줘야 한다는 게, 베를린에서 머무르는 동안 귀에 못이박히도록 들은 카일의 지론이었다. 그런 책을 내다가 결국 사업을 접었다고 하는 그의 과거가 떠올랐지만 정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쪽 빈터에 뭔가 돌담 같은 게 있는데요.
음…ㅡ뭔가 영역표시 같은 건가."
신루는 바헵 거리에 오자 아직 사람도 별로 없는 그광장을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다가
문득 조금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판판한 흙바닥이 드러나 있는 옆으로 허물어진 돌담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 뒤로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아아, 성터라고
하던데."
"성터? 이
섬에 그렇게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거예요? 성까지 남길 정도로?"
신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면서 그리고 곧바로 걸어갔다. 몇 시간만 지나면 벼룩시장이 설 곳이었다.
"여기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원주민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다더군. 몇 백 년 전부터 이곳에는 놀랍도록 발전된 문명이 있었다고."
"음.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주장이군요. 하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귀한 유적을
너무 허술하게 관리하는 것 같은데요."
한달음에 돌담으로 달려간 신루는, 원래는 켜켜이 겹쳐진 원형이었을 것 같지만 지나치게 허물어져 이제는 그 흔적만 겨우 볼 수 있는 돌담을 신기하다는
듯 살폈다.
이곳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벼룩시장이 설 정도니까, 허술하게 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남겨둘 생각이 없었던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몇 걸음 늦게
신루를 따라갔다.
이미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 성터라는 돌더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던 정태의는 돌담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드러냈다 하며 열심히 뛰어 다니는 신루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며 픽 웃었다.그리고 아까 신루에게서 갑째로 받았던 담배ㅡ아직도 의혹이 다 씻긴 건 아니었지만ㅡ를 꺼내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조금만 있으면 일레이가 돌아올 텐데. 오늘 돌아가면 또 죽어나겠구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뾰족한 수도 없다.
정태의는 옆에 쌓여 있던 돌담 위에 걸터앉으려고하다가 멈칫했다. 비록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적이라는데 그 위에앉으면 안 되겠지.
그는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큼직한 바위 위에 얌전히 앉았다.
하늘은 이미 짙은 남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하늘에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남은
태양의 흔적이 마저 사라지고 나면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그곳에 자리 잡을 거다.
여태 정태의가 발 딛고 살아 왔던 먼 나라의 대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남반구의 적막하고 광활한별밤이다. 이 섬에 찾아와서 밤하늘을 흐르는 강물처럼
선명하게 머리 위로 지나가는 은하수를 보았을 때, 정태의는 한동안 말을 잃었었다.
그 아름다운 곳에, 지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 형이 있다. 신루도 있고, 일레이도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 벅찬 감정을 공유할 만한 누군가가 있었다.
그 점이 문득 기뻐졌다.
정태의는 진남색 하늘로 후우 연기를 뿜어내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는 이 인간적인 마음을 그 놈과 과연 공유할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야……."
"저라면 공유할 수 있는데요, 형."
흡, 정태의는 숨을 멈추었다.
하마터면 또 담배연기를 들이삼킬 뻔했다. 쿨럭, 한 번 기침을 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저만치 떨어진 돌담 아래에서
열심히 뭔가를 바라보고 있던 신루가 어느 새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위프라도 했나, 놀라운 눈으로 신루를
빤히 바라보며 정태의는 담배를 빨았다. 신루는 정태의의 옆에있는 그 돌담에 앉으려다가 멈칫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정태의가 앉은 바위 위에 살짝 걸터앉았다. 정태의는 눈매를 구부렸다. 정태의가 신루를 좋아했던 데에는 저런 점도 들어 있었다.
"아……역시 좋구나. 형 덕분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신루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없이 담뱃재를 떨어내었다. 신루는 곧 얼핏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아프리카에 왔던 적이 있거든요.
UNHRDO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지원자를 위해 지부를 개방해서 견학시켜주거든요.
어느 지부를 견학하는지 선택할 수 없는데, 제 경우는 아프리카 지부를 견학했었어요.
그래서 요하네스버그에 며칠 머물렀었죠. 그때, 아프리카까지 기왕 온 김에 몇몇 군데 돌아보고 돌아갔었어요."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그 뒷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단순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신루가 UNHRDO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리운얼굴을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정태의는 담배연기에 씁쓸한 마음을 담아 후우, 불어내었다.
사람은 누구든 뭔가를 얻기 위해 다른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정태의도 그런 점이 몇 번이나 있었다. 얻고 싶은 것은 사소한 것일 때도
있었고 중요한 것일 때도 있었다. 포기해야 했던 것들 역시, 사소한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과거의 선택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는 않았으니 후회와는 달랐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루는 정태의 때문에 UNHRDO를 포기했다. 본인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 자체에 정태의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정태의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성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혹은 그리 오래지 않아─신루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어쩔 수 없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니, 정태의는 입 속으로 쓰게 중얼거리며 담뱃재를 털었다. 어쩌면
UNHRDO를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신루는, 그러나 그곳과는 관계없는 주제로
말을 이었다.
"이곳의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예요.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눈이 아프도록 새파랗게 뻗은 그 하늘과, 눈부시게 하얀
그림자가 진 그 구름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신루는 마치 꿈을 꾸듯 속삭였다.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 그 새카만 하늘에서 정태의도 그가 말한 하늘을 본 듯했다. 그저 침묵할 수밖에는 없는 그 아름다운 정경을.
"가지고 싶었어요. 내가 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다른 어떤 정경을 본다 해도 그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거예요. 어쩌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하늘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제 다시는 그만큼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는 없을지도 몰라요. 그 순간 나는 정말로 너무나──그 하늘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
"사진 따위로 남겨놓을 수는 없었어요.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쓴들, 인간의 눈이 담아내는 만큼 그렇게 고스란히 담아낼 수는
없으니까."
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를 생각하는지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그는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태의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살짝 꺼내어 가 그 안에서 한 개피를 꺼내어 물었다. 찰각, 조용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한 모금, 두 모금,
연기를 뱉어낸 뒤에야 신루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흘끔, 정태의를 보는 눈에 희미하게 웃음이 담겨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만큼 절망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아요. 미치도록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그건 정말……."
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젖어드는 신루의 옆에서, 정태의가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위 위에 톡톡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하늘은 벗겨다가 방에 걸어놓을 수도 없고, 아편으로 물들일 수도 없고."
신루가 와락 웃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듯이 말한다. 나는 원하는 건 모든지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거든요, 어릴 적부터, 라고.
정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나 하늘이나 마찬가지야, 소유물이 될 수는 없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하늘도
나라마다 자기네 영공입네 하며 나눠가지는 판에,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하늘 위에서 인권론자들이 떠드고 있을 때 땅 위에서는 사람이 가축과 매한가지로 팔려 나간다. 자신의 의지로, 혹은 타인의 의지로.
당장 스스로만 해도, 정태의는 별로 자신 없었다. 만일 신루가 정말로 정태의에게 몇날며칠 동안 아편이라도 들이부어서
중독을 시키면, 거기에서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가 자유로이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약물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까지 손에 넣지 않으면 아무런가치가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렇지 않은 사람도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정태의는 신루를 좋아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러니 신루를 위해서.
그는 신루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비록 신루 본인은 그러한 종류의 행복으로 만족한다 하더라도, 정태의는
그가 다른 종류의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네가 바라는 형태대로,
네 옆에 계속 있고 싶다고 바라게 될까?"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렸다. 사실은 묻는 말이 아니다. 혼잣말이었다. 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두 개비째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 대답은, 알 수 없다.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정태의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당장 오늘 이 순간 자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정도이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마음 한구석에서, 불확실하나선명한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라고.
ㅡ한 번 더 말해 봐, 태이.
문득 나직하게 귓가에 들러붙던 목소리가떠올랐다.
"ㅡ…."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잠깐 숨을 멈추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져 낯빛까지 살피기는 어려워진 어슴푸레한 어둠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발치에 풀벌레라도 지나가는 것처럼신발코를 쳐다보면서,
별로 쌓이지도 않은 담뱃재를 괜히 툭툭 털었다.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때의 그 목소리, 목소리에서린 열기, 귓가에 닿던 젖은
숨결, 살갗을 매만지며 쓰다듬던 손길, 그런것들이 바로 지금의 일인
양떠올랐다.
이상하다. 또한 당혹스럽게
여겨졌다.
돌이켜 보면 정태의는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몇 번인가 있다. 매일 얼굴을 부딪히는 생활권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싫을 것은 없었다. 곤란할 것도 없었다. 고맙긴 하지만 그 뿐이다. 정태의가
그 상대에게 마음이 있는게 아니라면 거기에서 그치는 일이었다. 신경쓸 것도 없고 동요할 것도 없이.
그런데.
……혹시 무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불안해서 그런가. 일반적인 대응을 해나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서, 그래서 불안한 탓인지도 몰라.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생각도 해 봤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만약에 자신을좋아한다면. (아니,
'만약에'를 붙일 것도 없었다. 정태의는 자신이
그렇게 둔하지도, 자의식과잉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혹시 내가 그 놈을 좋아하는 걸까.
깊이 생각에 잠겼던 정태의가 다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다시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이번엔 귓불에서 얼굴까지 열기가 옮아간다.
"태이 형……?"
옆에서 신루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묵묵히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손에 쥔채로 타들어간 담배를 다시 한 번 털어내곤
입에 물었다.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어둡긴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충분히 보인다. 게다가 정태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신루의 눈치가 비상했다.
"태이 형."
그가 다시 한 번 불렀다. 정태의는 음, 하고 나직하게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역시,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정태의는 신루가 바라는 형태대로 신루의 옆으로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기다려보라고할 수가 없었다.
"신루. 미안하다."
정태의가 나직이 말했다. 신루는 말이 없었다. 그저정태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슬슬 시장이 설 때가가까워져,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성터 앞에서 잡다한 물건들을 짊어진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펴고
앉았고, 저만치 중앙 광장의 분수대 쪽에서도 장사치들이 물건들을 보기 좋게 늘어놓고
있었다. 이제 막 오늘밤의 장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장사치들 사이로 벌써오가며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을 보고 싶다며 이곳에 찾아온 신루였지만, 막상 시장이 서기 시작해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해도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정태의만 바라볼 뿐이었다.
"형이 먼저 날 좋아했잖아요."
이윽고 신루가 꺼져들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는, 어쩌면 안타깝게 매달리는 것도 같았다.
정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신루를 마주보기만 했다.
어느 순간, 신루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긴 듯 발치를 내려다보던 그는 곧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조금 전의 애처롭거나 안쓰러운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평소와 같이 언제든 웃음을 담을 수 있는 평연한 표정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급하다니까요, 형. 벌써 그런 얘기를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싶지 않아진다고, 그랬었잖아요."
"……."
"나는 시간이 많아요. 썩어서 넘칠 만큼 시간이 많지요. 그러니까, 내 걱정은
안 하셔도 좋아요."
신루는 웃었다. 그리고 바위에서
일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엉덩이를 툭툭 터는 시늉을 했다.
"그럼 슬슬 돌아볼까요. 시장이 서는 모양인데. 뭔가 특이하고 멋진 걸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프리카의 오지에 서는 벼룩시장이라니, 뭔가 있을 법한 어감이잖아요?"
"……. 그래,
뭔가 좋은 걸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구나. 어쩌면 기대하지도 않았던 멋진 걸 찾아낼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픽 웃었다. 마음이 가라앉은 탓인지 웃음에는 힘이 없다. 그러니 신루는 모른 척하기로 한 모양이다.
정태의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먼저 보고 있어. 나는 한 대만 더 피우고 갈 테니까."
정태의는 담뱃갑에서 새로 뽑아낸 한 개비를 살짝들어 보였다. 입에 물고 불까지 붙인다.
"형. 그렇게
연달아 피우면 몸에 안 좋아요. ……. 그래요, 그럼 분수대 근처부터 보고 있을 테니까 얼른 와요, 태이 형."
아마도 신루는 정태의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다고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린 듯 짐짓 웃어보이곤 걸음을 돌렸다.
고마워, 정태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루가 짐작했을 것처럼, 정태의는 지금 혼자 있고 싶었다.
밤바람 속에서 머리는 맑은데 마음은 산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후우,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미 신루는 저만치 분수대 쪽으로 갔다. 슬슬
사람이북적거리기 시작했지만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게다가이보다 두세 배는 더 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해도 금방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설령 자신이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신루가 먼저 이쪽을찾아낼 거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네놈이 나쁘다니까."
정태의는 연기와 함께 혼잣말을 흘려내었다.
쏟아질 듯한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그 이름을 되새기던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정말로 그 놈을 좋아하는 거라면 어쩐다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안 좋은
기억들을 굳이 되새겨보았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 때문에 불쾌했던 기억이라면 열 손가락으로는 다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잔뜩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순식간에 속이 울컥 치밀도록 화가나거나,
불쾌하거나, 섬뜩한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들과 나란히 그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아, 그래. 화나지, 화만 나나, 무섭기도 하지. 그 놈 옆에 있으면 필경 오래 살지 못 할걸.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거나, 아니면 모진 놈 손에죽거나."
정태의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장 오늘 집에 들어가서 그 놈이 뒤집을
거 생각해도 걱정이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왜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었나
이제는 생각해도 소용없을 생각을 하며 한숨지었다.
정태의는 담뱃재를 털어내며, 뭐 하는 수 없지, 하고 생각했다. 여태 늘 그랬듯이,
시간의 해결을 기다리는 수밖에. 자신이 달리 어쩔 도리가 없으면 그 수밖에 없다.
조용히 숨죽이고 그 상황이 스쳐지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는.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는되지 않는 상황과 때가. 죽도록 힘든데, 정말로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은데, 죽도록 발버둥쳐도 도저히 수가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숨죽일 수밖에 없다. 머리 위로 짓누르는 그 '때'에 잡아먹히지않도록, 그저 숨죽일 밖에.
시간은 지나간다. 그 뒤에는 기억만이
남는다. 점차흐리게.
정태의는 톡톡, 재를 떨어뜨렸다.
그 손짓에 문득 일레이의 하얀 손이 떠올랐다. 뭔가 생각에 잠긴 때면 테이블 따위를
톡, 톡, 천천히 두드리는 그 하얀손이다. 정태의는 그렇게 하얗지도 매끈하지도 않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픽 웃고 말았다.
"그러면 한동안은…ㅡ그냥 그 놈 옆에 있어 볼까."
내 의지로, 그 말은 조용히
입 속으로 삼켰다.
필터까지 바싹 타들어간 담배는 이제 딱 한 모금 정도나 남았다. 이걸 마저 피우고 나서, 신루를 찾아 분수대 쪽으로 가 보면 될 것 같았다.
정태의는 짤막해진 담배를 입에 물며 고개를 길게뺐다. 이미 광장에는 사람들이 한가득 오가고 있었다. 분수대 근처에도 잡다한
소리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넘쳐난다.
그 가운데 어디엔가 신루가 있을 터였다. 당장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눈에 띄지 않지만, 이 한 모금을 피우고 일어서
몇 걸음 걷다 보면 이내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정태의는 마지막 한 모금을 길게, 길게 빨아들였다.필터를 그을리며, 담뱃대 끝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던 불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후우……, 아주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 뒤 그는 가뿐히 바위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일단은 신루랑 좀 놀다가 숙소로 돌아가자. 설마하니 신루가 오늘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고 가지야 않을 테지. 숙소로 돌아가면 득달같이 날아올 그 칼날 같은 시선이 벌써부터 섬뜩하지만, 하는 수 없다.
한동안 그 놈과 있어 볼까 마음먹은 바에는, 어차피앞으로 숱하게 봐야 할 시선이었다.
정태의는 픽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신루를 찾아보려, 걸음을 내디뎠다.
"어디쯤 있으려나……."
뭔가 좋은 걸 찾아냈을까. 기대하지도 않았던 멋진걸 찾아내고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사람들 사이로 발을 내디디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퍽 많았다. 분수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과 옷깃이라도 스치지 않고 지나가기가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나이 먹은 노인도 있었고 아직 학교에 다닐 성싶은아이도 보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남자도, 머리를 틀어올리고 신기한
듯 주위를둘러보는 여자도 있었다. 회교 문화권이라 해도 다같지는 않아 복장은 미묘하게 조금씩 달랐다.
수수한 빛깔의 히잡을 두르고 물건들을 살피는 여자도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부르카를
둘러써 온몸을 다 가린 여자도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에 가끔 들르는 사람들도, 이곳에 딱 한 번 들러 다시는 걸음할 일이 없을사람들도 한 데
뒤섞인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정태의는 느긋하게 걸어들어갔다.
그러던 때였다.
별 뜻 없이, 신루가 어디에 있을까,
그나저나 이 어두운 곳에서 차도르에 베일까지 둘러쓰고 있으면 앞이 보이긴 할까, 회교권 여자들은 불편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여남은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여자를 보고 스친,
그 때다.
"……. ……아."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나 늦추던 걸음을 이윽고 멈추면서도, 정태의는 자신이 왜 멈춰섰는지 몰랐다. 그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음, 하고 눈살을 희미하게 찌푸릴 뿐이었다.
뭘까. 지금 뭔가 살짝
걸리는 게 있었는데.
정태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면서 걸어온 길을 다시 주욱 살핀다. 그러나 별반 이상할건 없었다.
여느 곳에나 있는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흥정을 하거나 혹은 구경하면서 지나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
뭐가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뭔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얼굴을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신분열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안 되는데."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신루를 찾으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생각만큼 금방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좌판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몇 걸음 걸어나서다가, 괜히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서 앞만큼이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정태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웃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얼른
신루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래서 좀 놀다가 돌아가야지."
여기서부터 숙소까지는 죽어도 못 걸어간단 말야,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가던 정태의는 옆을 스치던 사람과 부딪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고ㅡ미안하다거나 실례했다거나 그런 말일것 같았다ㅡ지나간 그 사람이 정중하게도 신발끈까지 밟은 통에, 끈이 풀렸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사람들이 좀 적은 쪽으로 비켜서서 웅크리고 앉아 신발끈을 고쳐매었다. 잘 풀리지 않도록 끈 끝을 엮은 끈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양쪽 모두 고쳐맨 뒤 신발코에 묻은 흙을 손톱으로툭툭 털어내며 고개를 들던 정태의는, 조금 떨어진곳에 놓인 좌판으로 시선을 주었다. 앞으로 사람들이 스쳐가기만
할 뿐 발걸음을 멈추는 이는 거의 없는 그 좌판은 애들 장난감 따위를 팔고 있었다. 장난감 총이라든가 깜짝상자
따위의 시시한것들이다.
그러나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곤 피식웃는다.
"그립네."
아주 오래 전에 정태의의 집에도 있었던 깡통로봇이 거기에 있었다. 단순한 구조ㅡ구조라고 할 만한것도 없었다ㅡ의 그 로봇 장난감은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칠도 벗겨져 있었다.
설마 저런 걸 이런 아프리카의 외딴 섬에서 볼 줄은 몰랐다.
정태의는 일어서 그쪽으로 갔다. 공짜로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을 법한 낡아빠진 장난감들 사이에서 그 깡통로봇을 막 집어들려고 할 때,
그 옆에서뭔가 손바닥만한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사람이그걸 사려는 듯 주인에게 손짓했다.
정태의는 별 뜻없이 그 상자를 흘끔 보았다. 뭔지는알 수 없었지만 깜짝상자류인 것 같았다. 주인이 그사람에게 내보여주듯이
상자의 어딘가를 만지작거리자 갑자기 따당, 하고 상자 뚜껑이 열렸다. 그 뿐이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오지도 않고, 들어 있지도
않았다.
특이하군, 하고 잠깐 생각했다.
뭔가 내부에 격발 장치라도 있는지 상자를 열 때에 공이쇠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저런 건 형이 좋아하는데. 저런 걸 갖다주면 다 뜯어보면서 갖고 놀거든.
어릴 적에도 그랬다. 정태의가 로봇을 가지고 평범하게 놀고 있으면 그 옆에서 정재의는 뭔가 좀 특이하다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일일이 풀어헤치곤 했다.
그런 뒤에 원래대로 말끔하게 조립해놓았기 때문에, 새 장난감을 망가뜨린다고 야단맞을
일도 없었다.
정태의는 자신보다 반걸음쯤 앞에서 그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던 사람을 흘끔 보았다. 비스듬한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은 의외롭게도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잿빛 차도르를 두르고 그위에 베일까지 쓰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못 하는지 손짓으로 그 장난감이 얼마냐고 묻고 있었고, 장사꾼은 말을 할 줄 알면서도 눈앞의 사람이 손짓으로 말하자 덩달아 입을 다물고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어 장사꾼에게 넘겨주었다. 장사꾼은 웃으면서 어눌한
영어로 "Thank you, thank you!"하고 인사를 했다. 그 장사꾼을 헤벌쭉한 웃음을 보며 정태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가지로군.
여자는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말을 못 알아들었을 뿐인 모양이다. 그녀는 자리를 뜨면서 속삭이듯이
영어로 짧게 "천만에요."라고 대답하곤다시 인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깡통로봇을만지작거리면서 '이거 녹이 잔뜩 슬었는데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긴 하나',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정태의는 '어라,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라고 머릿속 한구석으로 멍하니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 어…….
어……?"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자욱하게 길을 메우고 있었다. 그는 깡통로봇을 어느 결인지도 모르게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까치발을 하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벌써 수십 걸음을
떨어진 곳에 잿빛 차도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태의는 생각을 떠올리기보다 먼저 달려나서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저 장사꾼은
못 들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정태의보다 더 가까이 있었을 다른 사람도 못 들었을 거다. 그만큼 작고희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정태의의 귓속 깊이 파고들었다. 어느 경우에도 높아지거나 격앙되지 않는, 한결같이 조용하고 담담한 그
목소리를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조용하고 가뿐한 저 서슴없는 발걸음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누가 부르기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고 앞만향하는 저 반듯한 등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정태의는 길을 가득 메워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마구 헤치면서 그 잿빛 차도르를 쫓아
달렸다. 언뜻언뜻 시야가 가로막히면 혹시라도 종적을 놓치게 되지는 않을까,
초조한 마음이 솟았다.
"잠깐, 잠깐만요…ㅡ."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걷어내며 그 옆을 정신없이 지나갔다. 가끔 욕설도 들렸고 뭐라고 투덜거리는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사과할 시간도,
아랑곳할 시간조차 없었다.
잿빛 차도르를 입은 그 사람은 볼일을 다 본 듯 광장에서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정태의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스쳐가던 중 '태이 형?'하고 부르는 신루의 목소리도 언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조차 귀에 담지않았다.
"잠, 잠깐
비켜주…ㅡ. 좀 비키라니까!"
정태의는 잿빛 차도르가 골목을 꺾어들어 시야에서사라진 순간 좌판 앞에 웅크리고 앉아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에게 벌컥 소리를 질르고 말았다. 그리고 혀를 차며
아예 뒤로 돌아서, 광장을 반대 방향으로 비잉 돌아서 달렸다. 여전히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듯이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차라리 그쪽이 한산했다.
잘못 보지 않았다. 잘못 듣지도 않았다. 그 목소리도, 그 뒷모습도,
그 걸음도.
정태의는 잿빛 차도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정태의를 부르며 뒤를 따라오는 신루의 기척이 잠시 느껴졌지만 그 역시 인파에 가로막힌 듯, 그 기척도 곧 사라졌다.
광장에서 멀어지자 금세 인적이 끊겼다. 괴괴하게달빛이 쏟아지는 고요한 골목에, 정태의의 다급한발소리만이 울렸다.
잿빛 차도르가 꺾어섰던 골목으로 돌아섰지만 이미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도 아까워,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욱신, 욱신,
발목이 아팠다. 그럴 만도 하다. 이제 겨우
나으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할까 보다.
내 발목 끊임없이 수난 시대구나, 정태의는 한숨을쉬면서도 걸음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곧바르게 난 골목에는 곁가지처럼 난 다른 골목들이 몇이나 붙어 있었다. 마구 달려나서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돌려 그 골목들을 쳐다보면서 스쳐지난다.
어딜까. 잘못 봤을 리는
없다. 어느 쪽으로 갔지.
"제길……, 무슨 술래잡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ㅡ."
이를 갈며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 저 끝에서 얼핏 흔들리는 옷자락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을 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ㅡ."
정태의는 오래 생각지 않고 그쪽으로 달렸다. 사람한둘 정도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그 골목으로, 희미하게 불확실한
흔적을 쫓는다.
제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길. 혹은 적어도 멀리가지 않았길. 아니, 그냥 뒷모습이 보이기만이라도하길.
"빌어먹을, 평소에 그렇게 걸음이 빠른 편도 아니면서 뭐가 이렇게 쏜살같아……. 혹시 딴사람 아냐,딴사람?"
정태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딴사람일지도 모르는 그 뒷모습을 쫓았다. 딴사람일 리가 없다고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골목을 돌아들었다. 타닥,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잿빛 차도르가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쫓아오는 걸 알고 있었던 듯, 거기에 서서 기다린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어째서 쫓아오냐고 물을 요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발 뒤늦게, 정태의는 골목의 모퉁이 바로 옆에 숨듯이 서 있던 그림자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어, 어린애의머리만한 억센 주먹이 명치를 파고들고 있었다.
"…ㅡ!!"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콱 막혔다.
정태의의 명치에 주먹을 박아넣은 그림자ㅡ텁수룩하게 수염이 난, 매서운 눈초리의 아랍인ㅡ가 뭐라고 험악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묻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누구냐고 먼저 물어본 다음에 때렸어야 옳지……, 그렇게 말할 틈도 없이, 정태의는 의식이 흐려졌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잿빛 차도르를 바라보았다. 베일 안에서 흐릿하게가려져 있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정태의를 본 그 눈이 커지는 듯했다.
정태의는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 그것이, 그가 의식을 잃기 전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 * *
그것은 그리운 꿈이었다. 혹은 안타까운 꿈이었다.
그는 오도카니 홀로 사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없었다.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발밑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자기 자신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홀로 있었는지 모르겠다.어쩌면 찰나인 듯싶었고, 어쩌면 영원인 듯싶었다.
인형처럼 망연히 홀로 서 있다가 그는 어느 순간 기억해냈다. 그는 줄곧 홀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의 옆에는 누군가 있었다.
기억도 못하고 의식도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오래 전부터, 거기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어느새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건 누구였을까. 어디로 갔을까.
언제부터 홀로 있었을까.
그는 궁리했다.
원래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자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상실감은 상실한 순간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 상실감을 실감한 순간에야 다가왔다. 상실하는 때와그 상실을 실감하는
때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옆에 있었을 그사람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그는 간신히 또 하나의 사실을기억해냈다. 자신에게는 그 사람을 찾을 단서가 있었다.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는 여태까지는 보지 못했던 빨간 실이 묶여 있었다. 그 실 끝은어디론가 멀리멀리 뻗어나가,
그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로 가면. 실이 이어진 그
끝을 찾아가면.
그는 걸어나섰다.
실을 따라가기는 쉬웠다.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기도 했고 복잡하게 얽혀 꼬여 있기도 했지만 그 실은가야할 곳으로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 너머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드디어, 그 사람 앞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실이 끊겨 있었다. 그 사람의 발치에서. 분명히 원래는 하나로 이어져 있던 실인데 끊겨 있다.
저걸 묶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다다르기 전, 누군가가
그 실 끝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그 실을 자신의 손가락에 감아버렸다.
그는 멈춰섰다. 어,
어,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중얼거리는 사이에, 원래 거기에 서 있던 사람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사람은 웃은 것 같았다. 상냥하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조금은 씁쓸해 보였다. 더럭, 마음이 아팠다.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쳐 조금씩 멀어져 가던그 사람은 어느 순간 돌아섰다. 그리고 느리지만 망설이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나섰다.
그 사람의 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묶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람과는 그렇게 이어지지 못하게 될거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치 오래 전부터 의식조차못 하면서도 늘 같이 있었는데.
실을 풀어내어 다시 그 사람과 묶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로이 나란히 걸어갈 사람은 옆에선 사람이다. 하지만 그 상실감만은 계속
거기에 남아 있었다. 아쉽고 그립게.
* * *
눈을 떴다. 깜빡,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이상한 꿈을 꿨다, 그렇게 생각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꿈에 잠겨 있었다. 아직도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 텅빈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희뿌연
안개 너머에는 여전히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누군가다.
그러나 눈을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깜빡이는사이에 꿈은 삽시에 흐려졌다. 자신이 뭔가 꿈을 꿨다는 건 기억나지만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그리움, 그러나 후회하며 돌이키지는 않을 어떠한 결심과 같은 감각.
그런 감정들이 어우러져 잠에서 깬 뒤에도 계속 눈꺼풀 뒤에서 맴돌았다.
불현듯, 정말로 불현듯ㅡ어쩌면
꿈과 상관있는지도모르겠다. 그러나 꿈은 점점 기억이 흐려져 이제는애틋한 감정들조차 기억 너머로 희미해져,
알 수 없었다ㅡ정태의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ㅡ그럼 나도 괜찮아질 거야.
조용하고 조그만 목소리였다. 그 말을 했을 때 그는웃고 있었다. 밝고 환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을 말하며 습관처럼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게 그러니까……아. 언제더라……. 기억이 안 나네."
정태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팠을 때의 기억이니까, 정말로 어릴 때다. 그것은
정태의가 어릴적에 자신이 앓아누웠다는 걸 기억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기억이었다.
아마 지금 정태의의 허벅지 높이만큼도 키가 자라지 않았을 언젠가, 정태의는 열이 펄펄 끓어올라 누웠던 적이 있다. 그게 처음은 아니었을
거다. 어머니가 몹시 슬퍼하고 걱정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앓아눕는 것이야 종종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정태의가 열을 내며 눕자, 그 옆으로 아직 정태의만큼 어렸던 정재의가 와서 그 옆을 파고들어 누웠다.
어머니는 '동생은 아프니까
지금은 옆에 있으면 안돼'라고 타이르며 정재의를 떼어놓았다. 아마도
정재의까지 옮아서 같이 앓아누울까 염려했던 것 같다. 말을 듣기로는, 정태의가 앓아누우면 꼭 정재의도 같이 앓았다고 하니까.
'따로 있어도 어차피 아플 텐데……. 태의랑 같이 있을래요. 쓸쓸하니까.'
정재의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나중에 아주 오랜 뒤에 어머니에게 들었다. 너희들이 어릴 때 그랬다면서,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그때 아버지는 친가 쪽의 종친회가 있어 가봐야 했다. 친가 쪽과는 무슨 연유인지 거의 왕래하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뭔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나흘 가량 머무르다 와야 한다며 아버지가 갈 때, 정태의를 간병하기 위해 집에 남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정재의를 데려가라고 했다. 이 아이들은 너무 잘 옮으니까 차라리 떼어두는 게 낫겠다며.
정재의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만,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집에는 정태의와 어머니만 남았다.
정태의가 앓기만 하면 꼭 옮아서 같이 앓는 정재의였지만 그는 먼저 아픈 일은 거의 없는 '건강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 밤, 원래라면 내모레나
되어야 돌아올아버지는 밤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열이 펄펄 끓어정신을 잃은 정재의를 안고서.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방에 나란히 이불을 깔고 누웠다. 어쩌면 이 애들은 이렇게 꼭 같이 아플까, 어머니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듯이 그렇게 속삭이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의 기억은 정태의에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정태의가 기억하는 것은 온몸이 뜨겁고 움직일 수없는데 시야만 묘하게 선명한 가운데, 옆에 정재의가 누워 있었던 정도다.
의식도 없이 한참 동안 앓다가 어느 순간 열이 내려눈을 떴을 때, 옆에서 정재의가 누워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에 들떠서 몽롱한 눈을
깜빡이면서, 정재의는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가쁘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괜찮아? 안 아파?'
정태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땀에 흠뻑 젖어 추웠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다시 꼬물꼬물 이불로 기어들어가며
말했다.
'안 아파. 근데 추워.
형 아파?'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속삭이자 정재의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닥, 하닥, 병에 걸린 작은 새처럼
조그만 가슴이 오르내렸다. 발갛게 익어 힘들어 보이는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숨결이 몹시 뜨거웠다.
정재의는 말하기도 힘든 듯 가쁘게 쌔근거리다가 띄엄띄엄 말했다.
'네가 안 아프면 돼. 그럼 나도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정재의는 눈을 감았다. 쌔근, 쌔근,정신을 잃은 듯이 눈을
감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추운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 그러고
보니……되게 억울했겠다."
정태의는 문득 불쑥 중얼거렸다.
멍하니 기억을 떠올리다가 생각났다. 어릴 적, 정재의는 정태의가 아플 때마다 꼬박꼬박 따라 아팠다고,
어머니가 그랬었다. 드물게 정재의가 먼저 아플때에 정태의가 뒤따라 아픈 일은 별로
없었지만, 정태의가 앓아누우면 정재의는 꼭 같이 앓았다고. 멀리 떨어뜨려
둬도 꼭 그랬다고, 어머니는 '쌍둥이라서 그런지 참 신기하지 않니?'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엔 그렇구나, 신기하다, 그렇게 넘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재의는 참 억울했을 법도 하다. 자기가 아플 때는 혼자 앓는데, 동생이 아플 때는 꼭 옮아 같이 앓는 것이다. 억울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정태의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을 문질렀다. 바삭바삭, 눈곱이 떨어졌다.
가만 있자. 그런데 어째 햇빛이
안 비친다. 평소에는 눈을 뜨면 바로 옆에 난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서얼굴이 따가울 지경인데.
오느른 날이 흐린가.
정태의는 그제야 어……, 하고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뭔가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가 몽롱하니 넋이 나간 채 다른 생각을
하는 탓에 그냥 넘겼는데…….
"어디야, 여기……."
정태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천장이 저만치 높이 있었다. 마치 천장 하나가 통째로 뚫려 윗층의 천장이 보이는 것 같다.
어……하고 다시 멍하니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바로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잠이 덜깬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방이었다. 천장이 높은 탓인지
더욱 널찍해 보이는 이 방의 안쪽, 풍성한 천개가 반만 드리우고 반은 걷힌 침대 위에 정태의는 앉아 있었다.
"……."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한동안 눈을 껌벅거리며 그 방을 둘러보던 그는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왔다. 매끈한 나무
바닥이 발바닥에 기분 좋게맞닿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폭신하고 보드라운 러그가 발을 감싼다.
방은 실제로는 그리 넓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와 그 옆으로 낙낙하게 놓여 있는 화분 약간. 그리고 불편하지
않게 걸어다닐 만한 공간 정도였다.
정태의는 그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발로 가려진 뚫린 문을
보곤 그리로 나섰다.
문 너머는 바깥이었다.
아니, 바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곳은 가운데를 틔워놓고 네모지게 둘러지은 건축물의 한가운데였다. 네 줄로 네모지게 난 회랑에 갇힌 그곳, 침실에서 바로 이어져 있는 바깥에는
편평하고 곱게 간 돌바닥이 깔려 있었다.
정태의가 발을 내딛자 머리 위로 햇빛이 눈부시게쏟아졌다. 그리고 발 아래로는 햇빛에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돌바닥이 딱 기분 좋은 온도로 닿았다.
사방의 벽에는 각각 회랑 중앙에 웅장한 문이 하나씩.
어지간한 강의실 서넛 모아놓은 넓이는 됨직한 그갇혀 있는 안마당 가운데에는 여남은
사람이 들어가기에 족할 만한 네모난 못이 있었다. 돌을 반듯하게 깎아낸 그 네모 모양의 웅덩이 안에는 투명한
물이 담겨 있다.
"……무슨 사원에 들어왔나."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느 고즈넉한 회교 사원에라도 온 듯한 그 돌바닥위로 한 발, 또 한 발, 못을 향해 걸어나섰다.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손에 쥔 조그만 상자를 지그시 살피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 듯 흔해빠진 깜짝 상자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태의는 곧바로 그를 향해 걸었다. 아마도 정태의가 다가서는 걸 알았을 텐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상자만 만지작거린다.
이윽고 정태의는 그에게서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섰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깜짝상자에 설치할 만한 격발장치라면 거기서
거기일 텐데, 그건 좀 특이한가 보지."
정태의가 불쑥 묻자 그는 여전히 시선을 상자에 고정시킨 채 으음, 특이하다기보다는, 하고 중얼거렸다.
"스프링이 열두 개 들어가 있어. 이 끝의 나무판이공이쇠 역할을 하는데, 조작물을 쳐올린 다음에 다시 수납되었다가 시간차를 두고
다시 한 번 더 쳐올리게 되어 있거든. 두 번째로 쳐올릴 때는 스프링이공이쇠 역할을 하는 거지.
발상이 재미있잖아."
그는 담담히 말하며 상자를 덮었다. 그리고 정태의에게 '보고 싶어?'라며 그 상자를 건네었다.
정태의는 웃었다. 한동안 가만히 소리
없이 웃은 뒤, 그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어차,
하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이 상자를 열어서 뜯어봐도 정태의는 내부 구조 따위는 알 수 없을거다.아니, 이런 간단한 장난감 상자 정도라면 그래도 알수 있을 테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은 그가 건네어주는
물건을 정태의가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정태의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 여기가
탄자니아령이라는 건 알아?"
왜 이런 걸 자기가 가르쳐주는 입장이 되어야 할까잠깐 한탄도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정태의가 말했다. 그러자 반쯤은 설마하고 반쯤은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나서 말했다.
"아프리카였구나……, 몰랐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랄까, 별로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범상했다. 하긴 이것도 예상은 했던 바다.
바로 오늘 아침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듯이 심상하게 대답한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어번 눈을 깜빡일 만큼 생각에 잠겼던 그는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남반구에 있는 회교 문화권이라면 어딜까 했었는데…….
그러면 잔지바르――――아니 세링게인가."
"음. 세링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정태의는, 자신은 말을 들을 때까지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고작해야 몇 마디 말을 듣고 이내 이 구석진 섬의 이름을 꺼내는 그의
말을 듣고 별반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실감했을 뿐이다. 정말로 지금
내 옆에 있는 게 이 사람이 맞구나, 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갇혀있었던 남자에게, 정태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데에 박혀 있으니 연락이 안 되지.
그래도 생일 때는 연락되겠거니 했는데."
"아……뭔가 연락을 할 수 있을 만한 매체를 찾으려고
했는데 다 치워뒀더라.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사이에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그만 잊어버렸어."
남자는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크게 표정 변화가 없는 그 얼굴에서 어렴풋이미안함을 느끼고,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엊그제 네 꿈을 꿔서, 이제야말로 슬슬 어떻게든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
"……응……과연. 그래서 만났군."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여전하다. 그야 몇 달만에
변할 리도 없겠지만, 이 남자는 정말로 변한 바가 없었다. 그리워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갑자기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새파란 하늘 아래, 이 낙락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정태의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팔을 뻗자 못을 채운 차가운 물이 손 끝에 찰랑였다. 드러누운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을 거꾸로 올려다보면서, 정태의는 말했다.
"좀 많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형."
그러자 그는 설핏 웃었다. 담담한 얼굴 위로 상냥하게 떠오르는 그 웃음은, 틀림없는 정재의의 웃음이었다.
정태의의 형, 몇 달만에야 겨우 보게 된 그가,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생일
축하한다, 태의."
5권 끝. 6권으로
계속.
ONE-ACT
방 안에는 찾던 사람이 없었다.
게이블은 비어 있는 방 안을 잠시 둘러보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2층에 있는 게 분명한 사람이 자신의방에 없다면, 남은 건 옆방뿐이다.
함께 동행한 청년의 방이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과연, 문 안쪽에서 뭔가 기척이들렸다. 말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몸싸움을 하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척은 아니었다.
게이블은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게이블이 찾는 남자는 게이블이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의 첫단을 밟았을
때부터게이블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잠시 실례합니다."
문을 두드리고 짧게 말한 게이블은 1, 2초 가량 사이를 두고 문고리를 밀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문 안에 있는 사람은 일일이 대답할 만한 남자도 아니었다.
문을 열었다. 게이블은 그 안으로
한 발 들어서다가걸음을 멈추었다. 짐작했던 대로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남자와 청년이다.거기까지는 미리
짚었던 바 그대로지만 한 하나,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상황이다.
"……."
아무도 말이 없었다. 게이블도, 남자도, 그 청년도,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청년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게이블에게 등을 돌린 채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군.
게이블은 남자가 아니라 청년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청년은 침대 위에 올라앉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 청년의 머리를 움켜쥐고 누르고 있는 남자의 저 하얀 손ㅡ저 매끈하고 아름다운손이 얼마나 억세고 괴력을 가졌는지
게이블은 익히 알고 있었다ㅡ을 보아하니, 떨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청년을 억지로 눌러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엾게도 청년은 게이블의 기척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남자의 성기를 끄트머리만 간신히
입에 담은 채얼어붙어 있었다.
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다시 파래지는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게이블은 침묵했다. 게이블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던 남자는 한 손으로 청년의 머리를 누른 채로 게이블에게 말했다.
"급한 일인가?"
"급할 건 없지요. 그럼 아래층에 있을 테니 끝나면내려오십시오."
알겠다는 듯 가볍게 손짓하는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게이블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올라왔던 그대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미대사가 오래지 않아 바뀌리라는 뒷소식이 들어온 정도였다.
공표되려면아직 한참은 멀었고 지금 당장 급박한 소식도 아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홀의 카우치에 앉으며 게이블은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몇 종류의
석간 신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 신문을 펼치면서, 게이블은 가만히 혀를 찼다.
남자는 옷을 벗고 있었다. 게다가 미묘하게 가늘어진 눈매는 평소보다 더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저래서야 구음으로 끝날 리가 없다. 입에 한두 번 사정한 다음에 필경 본격적인 삽입에도 들어가기 십상이다. 흐음, 게이블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옆을지나가던 여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고 물어왔다.
게이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시체를 치워야하게 될지도 몰라서."
"어머나. 설마 여기에서는 아니겠죠. 경찰을 부를 만한 일은 피해주세요."
여주인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대답하곤 사무실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게이블은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었다.
이런 상황에 게이블이 처한 적은 숱하게 많았다. 외부로 돌기전까지 그는 T&R 본사에서 제임스와 함께 카일의 뒤지다꺼리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임스가 게으른 상사 대신 회사를 꾸려가고 게이블은 상사의 사적인 문제들을 도맡다시피
했다.
상사인 카일은 굳이 문제점을 열거하자면 두 손 다꼽아도 모자란 사람이었지만, 그가 끌어안고 있는가장 커다란 문젯거리는 그의 가족이었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동생이다. 둘 있는 동생 가운데서도 남동생.
그 남동생ㅡ바로 2층에 있는 저 남자다ㅡ은
철도 들기 전부터 이미 문제덩어리였다. 그 동생이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때 카일은 심각하게
'아무래도 내 동생의 이름을 잘못 지은 게 아닌가 싶어. 데미안이라고 개명하는 게
옳을 것 같단 말야.'라고 말했었다고, 제임스에게 전해 들었다.
동생과 터울이 많이 져서 당시 이미 성인이 다 되었을 나이였던카일은, 촉망받는 영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머리로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저 녀석의 머릿가죽 어딘가에 666이 박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모르는 사람은 농담으로 알아들었지만 게이블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물론 그 동생을 아는 사람들은대부분 그를 이해했다.
원래는 남동생이 치는 사고 대부분을 제임스가 처리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일거리에 치이다 못해 폭발한 제임스가 심리상담을
받으러 드나들고 사표를 내버리겠다고 길길이 뛰었을 때, 제임스가하던 일의 일부를 게이블이 맡았다.
그 일거리 안에저 남자의 뒤치다꺼리가 들어 있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시체를 치운 적이 있었다.
자기 인생에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면서 게이블은 묵묵히 시체를 치웠다. 정당방위와 과잉방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갈까 생각하며, 게이블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얼어붙은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는 아직 소년이라 불러도 될 나이였다. 미처 성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첫살인ㅡ유일한 살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ㅡ이라,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게이블은 무뚝뚝하게 물었었다.
'놀랐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게이블은 자신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때를 떠올랐다.
물론 그는 죽이려고 원해서 죽였던 게 아니다. 젊을때 잠깐 국방성에서 일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그 순간, 뜨거운 피내음이 확 끼쳐오던 그 기억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잊혀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상대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100% 게이블이 죽었을 테고 그 모든 원인조차 상대에게 있었으니 죄의식이나
양심의가책을 느낄 여지는 없었지만, 그런 문제와는 별개다. 첫살인이란
그런 거였다.
처참하게 핏덩이가 된 시체를 보며 그 남자에게 따뜻한 말을 해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피묻은 손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했다. 놀랐냐고.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피냄새,
피의 감촉, 눈앞에서 살아 있던 생명이 죽어버린 사물로 바뀌어가는 그 생생한 현실
속에서, 놀랐냐고.
그러나 그때, 게이블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
시선을 돌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게이블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물수건 같은 거 있어? 피가마르기 전에 닦아내었어야 하는데,굳어서 안
닦여.'
게이블은 말없이 근처의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시체 치우기에 매진했다.
남자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이블이나 제임스, 여타 다른 사람들이 몰랐을 뿐 그는 이미 살인따위는
말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쯧, 다음부턴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 하나, 하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맞아. 원래 저런 사람이지.
인간적인 감각을 가지고는 대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석간 신물을 다 읽은 참이었다.머리 한구석으로는 다른 생각을 굴리면서도 다른 한구석으로는 신문도 제대로 읽었다. 오늘도 세상은 어수선했다.
게이블은 흘끔 2층 쪽을 보았다.
2층에서는 아무런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식탁 위 바구니에 담겨있던 과일 하나를 바지에 슥슥 닦아
베어 물었다. 와삭와삭, 창밖으로 보이는 조그만
광장을 내려다보면서 과일은 금시에 먹어치우고 다시 홀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자신 앞으로 팩스가 온 걸
확인했다. 금방 답변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걸 따로 골라내면서 천천히 홀로 향한 게이블은, 그제야 어느새 2층에서 내려와 카우치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신문을 흥미 없이 넘겨보고 있는 남자는, 바로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왔다는 걸 자랑스레 내세우기라도 하듯 바지만 대충 걸친 허술한 차림새였다.
팔뚝에 손으로 쥐어뜯은 듯한 자국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게이블이 온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신문만 훑어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게이블은 2층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제 시체를 치워야 할 때다.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다. 한참 더 있어야 내려올 줄알았는데, 그 점은 몹시 의외였다. 혹시 게이블이 보지 못한 몇 년 사이에 정력이 고갈되기라도 한 걸까. 혹은 섹스의 성향이 바뀌었나.
그것도 아니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상대의 몸이찢어지고 뜯어져 그대로 기절하든 말든 아랑곳 않고 얼른 욕구만 풀고 가뿐하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그랬었다.
몇 년 전, 게이블이 이 남자의
뒤치다꺼리를 한 지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남자는 성년이 되었고, 어린치기를 벗어나 더욱 교활해진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이 친 사고에 남의 손을 굳이 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때를 맞추어 게이블도 외직으로 돌게되어
독일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 전까지
게이블은 종종 시체 정리를 했다.
시체는 물론,정말로 죽은 시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이런 경우다.
남자가 어디서 여자를ㅡ혹은 남자를ㅡ끌고 와서 한판 침대에서 뒹군 경우.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시간이나 상황의 제약이 없으면 남자는 몇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침대에서 나왔다. 볼일만 마치면 바로 욕실로 가 남자가 씻는 동안, 게이블은 가엾은 그날의 희생자를 수습했다.
대체로는, 주로 아랫도리가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혹은 다른 체액으로 범범이 되어 기절해 있는 사람을 재빨리 병원으로
실어가는 게 일이었다. 상대가 남자인 경우 십중팔구 내장 파열이나 심각한 탈항 등, 병원에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럴 만도 하다. 게이블도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남자의 물건은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심지어는 멋모르고 따라왔다가 남자가 옷을 벗는
순간 새파랗게 질려서 울부짖으면서 돌려보내 달라고난리쳤던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들 가운데는 고소하겠다고 드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거의 공통적이었다.
싫다고 하든 울든 애원하든 빌든 화를 내든 애걸하든, 남자는 그들의 반응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듯 무작정 밀어넣어, 찢어진
몸에서 피가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 이불을 흥건하게 적셔도 제 볼일을 채울 때까지는 아랑곳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볼일을 채우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상쾌하게
홀로 욕실로 가버렸다.
게이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절한 그들을 병원으로 실어나르는 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한 그들을 보면ㅡ때로는 눈을흡뜨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게이블이야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ㅡ정말로 시체가 따로 없었다.
게이블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2층으로 향했다. 몇 년만에 만났는데도 저 남자는 여전했다.
하지만 저 남자가 데려온 그 청년, 아마도 지금 2층에서 처참한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있을 그 청년은미리
카일이 당부를 한 바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일레이와 함께 갈 텐데, 정재이의 동생으로 참좋은 청년이다. 잘 보살펴서 도와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잘 보살펴서 도와주기 전에 이미 도착한 첫날부터 시체 신세다.
설마 진짜로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인상이 좋은 청년이라서 게이블도 마음에 들었던 터라 절로 혀를차게 된다. 어디서 저 비인간적인 남자에게 찍혀서잡여왔을까. 부디 섬 안에 있는 의료 시설로 처리가가능한
정도이기를, 물으로 나가서 큰 병원으로 가야 할 만큼 처참한 꼴은 아니기를 바라며 게이블은2층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계단을 두어 단도 채 오르기 전에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지, 게이블."
게이블은 자신을 부르는 심상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신문을 손에 든 채 남자가 따분한어조로 묻고 있었다.
게이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야…ㅡ정리를 하러 가지요."
시체를 치우러 간다는 말을 유하게 돌려서 게이블이 입을 열자 남자는 낮게 혀를 차더니
짤막하게 내뱉었다.
"가지 마."
게이블은 빤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게이블은 말없이 다시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이런. 하마터면 바보짓을
할 뻔했다. 몇 번이나 공백이 생긴 탓인지 둔해졌다. 예전에는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금세 알아차렸었는데.
지금 이 남자는 지독하게 기분이 안 좋았다. 무심한얼굴과 평연한 어조, 태연한 손짓으로 신문을 넘기면서도,
그는 보기 드물게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이럴 때 아주 사소하게라도 잘못 건드리면,
'진짜 시체'를 보게 된다.
게이블은 의아함을 감춘 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서슬 퍼렇게 불쾌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까 그가 2층에 올라갔을 때, 2층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던 그때부터 이 남자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이블은 급한 일이냐고 묻던 그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뭔가 저 청년과 좋지 않은 다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생겼다.
게이블이 아는 한 이 남자는 마음에 안 드는 인간과동행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동행은커녕, 마음에 안 드는 시점에서 이미 이 세상에 시체를 한 구 더늘였을
거다. 아니, 애초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일리는 없었다.
명칭이다.
공항에서 마중나가 처음으로 그 청년을 보았을 때,게이블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몹시 놀라고말았다.그 청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 남자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태, 적어도 게이블이 직접 본 가운데에서는 가족 외에는 이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남자에게도 이런 친구가 생길 수 있다니, 하고 진심으로 불가사의하게 여기던 게이블은, 카일에게서 전혀ㅡ아무런 언질도
들은 바 없는데 정재의의동생과 이 남자가 몸을 섞고 있는 모습을 맞닥뜨렸을 때 다시 놀랐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의외로웠다.
정재의의 동생이라서 봐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엔, 이 남자가 그런 이유로 누군가를 봐주고 말고 할 남자가 아니었다.
"게이블."
문득 남자가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열었다. 게이블은 말없이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가 흘끔 게이블을 바라보았다.
얼음날처럼 선뜩한 시선이다.
"다시는 나와 그놈이 같이 있을 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오지 마라. 그리고 아까 본 것, 잊어."
"……. 알겠습니다."
이 또한 이 남자답지 않은 주문이다. 아무래도 게이블이 모르는 몇 년 동안 이 남자도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어. 볼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아. 사장님께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별개로, 사우디의 주미대사가 바뀔 것 같더군요.
아마 UNHRDO 쪽으로도 소식이 갈 테지만요."
"그래? 누구로."
"아자르 계보가 가장 유력할 테니,
그쪽의 왕자 둘중 하나겠지요."
"그러면 무스타…ㅡ."
신문을 접으며 말을 잇던 남자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게이블은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생각이끝나길 기다렸다. 뭔가 일 이야기에
관련해서 도중에 떠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게이블에게 돌아온 말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군. 네 방으로 가서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문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서는 남자의 뒤를 따라 게이블도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한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다가,
갑자기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게이블은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모른 척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 주인한테, 그놈 밥 좀 먼저 챙겨주라고 해. 배가 많이 고프다고 했으니까."
혀를 차며 거칠게 내뱉는 그 말에 게이블은 잠깐 침묵한 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먼저 방에 가 있으라고 하고 자신은 주방으로 가 여주인에게 말을 전했다. 이미 제법 오래 여기에머무르는
동안 게이블과 그럭저럭 친해진 여주인은생긋 웃으면서 '그렇죠'라고 대답하곤
그 길로 바로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이블은 맥주 몇 캔을 집어들고 방으로 향하면서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살다 보니 별 꼴을 다 본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볼일은 5분도 안 되어 끝났다.
사실 볼일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여러 정세들을 일러주고 거기에 대해 카일이 방침으로 세운 것들이나 예측할 수 있을 만한전개를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이 남자와의 대화는 늘 간결하게 끝났다.
판단을 내릴 만한 일이 아니라면 사실을 전달하는 걸로 끝이었고, 판단이 필요한 일이라면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몇 가지 사항만 체크하고 나서 곧바로 결단을 내리는 게 이 남자였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카일이나 이 남자나 비슷한 데가 있었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 게이블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답답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이상입니다."
"음."
게이블이 말을 맺자 남자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게이블은 잠시 그대로 앉아서, 할 이야기는 다 마쳤으니 남자가 이제 그만 일어나서 이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기다란 소파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앉은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톡, 톡, 무릎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생각에서헤어나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 이렇다. 분명 게이블의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었다. 그가 하는 말에 반문도 하고 대답도 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자세히 캐어묻기도 했다. 그러니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남자는 건성이었다.
한쪽 머리로는 게이블의 말을 들으면서도 한쪽 머리는 다른 생각에 넋이 팔려 있었다.
그 생각이 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이 남자가 극도로 기분이 불쾌해져 있는 원인이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게이블은 생각에 잠겨 있는 남자의 앞에 그대로 앉아 있다가 아까 주방에서 가져온 맥주캔을
하나 땄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면서 지난밤 동안 읽다가 접어두었던 책을 펼쳤다.
뭔지는 몰라도 고민을 할 거라면 본인의 방으로 가서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기분이 험악해져 있는 남자에게는 섣불리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멍하니 넋이 나가 있는 건아닌 남자는 자신도 맥주캔을 집어들어
풀탑을 당겼다. 그리고 꿀꺽꿀꺽, 물 마시듯이 넘긴다.
"슐타이스라. 그놈이 좋아하겠군."
불쑥, 그가 중얼거렸다.
게이블은 책에서 잠깐 시선을 떨어뜨려 그를 보았다. 굳이 게이블에게서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듯, 혼잣말을 한 모양이었다. 게이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러다가 때 되면 돌아가려니.
그러나 남자는 돌아가지 않았다. 계속 잠자코 맥주를 들이켰다. 물처럼 쉼없이 맥주를 들이키니 맥주가 남아날
리 없었다. 게이블이 1000ml 짜리로 네 캔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한 캔을 느긋하게 마시며책을 보는 사이에 나머지 세 캔을 남자가 다 비워버렸다.
그가 마지막 캔을 비우고 그 캔을 테이블 위에 또각내려놓았을 때, 게이블도 마침 책의 마지막장을 넘겼다. 그는 눈으로 빈 캔을 훑어보곤
말했다.
"더 갖다 줄까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게이블은 긍정으로 해석하고, 자신도 더 마시고 싶었던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주방으로 갔다.
주방에는 여주인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게이블을 보곤 반가이 말했다.
"유리. 저녁
먹어야지?"
"음. 좀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다 먹었지?"
"다른 사람이라고 해 봐야 태이밖에 없는걸.
벌써 후식까지 다 먹고 올라갔어. 많이 피곤했는지 먹으면서도 졸던걸.
아마 지금쯤은 자고 있을 거야."
"그래. 난
나중에 따로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마. 맥주 가져간다."
게이블은 그녀에게 인사 대신 뺨에 입을 맞추고 맥주를 서너 캔 더 꺼내어들어 돌아왔다.
방에서 게이블이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남자가 앉아, 여전히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나 표정이 좀더 사나워져 있었다.
게이블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 앞에 캔들을 내려놓았다.
"태이 씨는 식사를 마치고 올라갔던걸요.
지금은 자고 있을 거라고 안나가 그러더군요."
"자?"
갑자기 남자의 미간에 짙게 주름이 졌다.
"잔다고? 자?!"
"……. 글쎄
알 수 없지요. 밥을 먹으면서도 꾸벅꾸벅 졸 정도 였다니 아마도 잘 것 같지만 말입니다."
게이블이 무덤덤하게 말하자 남자는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게이블은 평연하게 맥주를 뜯었다.
"고작해야 그 정도 일로 울었던 주제에,
잔단 말이지."
탁, 탁,
무릎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나직해지는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게이블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울었다, 라. 원, 영문 모를 말들뿐이군
"말해두는데 그 놈은 진짜로 싫어하는 게 아냐.
처음엔 피곤하니 귀찮다느니 해도, 결국은 그 놈도 쌌단 말이야. 싸다가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고. 이 내가 그렇게나 해 줬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게이블은 살짝 입매를 찡그렸다. 살다 보니 별…….
"그러니까 울었다고 해도, 사실은 진짜로 운 건 아닐 거야. 그렇지 않나?"
"……. 글쎄요.
나는 말의 맥락을 잘 모르겠군요."
정말로 모르겠다. 지금 이 남자가
하고 있는 말은,그 이상 이 남자와 안 어울릴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의문을 품을 여지도 없었겠지만 이 남자가 말하니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놈은 진짜로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아마 분명히 그럴 거야."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맥주를 다시 물처럼 마시면서 홀로 생각에 잠긴다.
게이블은 잠시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물었다.
"진짜로 싫어하는 거라면, 뭐 곤란한 거라도 있습니까?"
아직껏 맥락이 짚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심상하게묻자, 일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의 표정이 기묘해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못마땅한듯 입매를 찡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없지."
게이블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결론은 났다. 남자 역시 그렇게 대답하고 나선 그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게이블은 다시 남자가 비운 맥주캔을 세어보았다. 1000ml짜리 맥주 몇 개로 취할
남자도 아니다.
정말이지,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본다. 아니,어쩌면 사실 취한 건 저 남자가 자신인지도 모른다.자신이 알고 보면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꿈을꾸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그게 더 그럴듯하겠다.
아무래도 정원에 나가서 바깥 공기 좀 마시고 와야겠다고 게이블이 생각하던 차에, 남자가 자리에서일어섰다. 그제야 겨우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 여주인은 정원에 불을 밝혔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불빛도 아니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문득 뜰을
산책한다든가 혹은간혹 밤중에 갑자기 손님이 들 때를 위함이라며 새벽이 와 부옇게 날이 밝아올 때까지 정원에 불을 몇군데 켜 두었다.
덕분에 선천적으로 밤눈이 다소 어두운 편인 게이블은 한밤중에라도 발 아래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 편하게 정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가끔 내킬 때면 풀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헤엄을 칠 기분은 아니라, 정원의 과실수 아래를 천천히 오가거나 하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바삐 움직여야 할 거다. 물론 여태껏도 실낱같은 정보들을 하나하나 모으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다. 이 나라 저 나라, 인도에서부터 중동까지 아주 사소한 기척이라도 있으면 천 리를마다 않고 오갔다.
그래서 겨우,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실제로 찾아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찾아낼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정재의의 동생이라는 청년이다.
카일이 말했다. 그 청년이라면 될
거라고. 왜냐고 물어보자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딱히 근거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청년이면 될 거라고 했다. 그 청년이 그의 길상천이므로.
게이블은 카일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 편이 현명하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서늘한 밤공기 속에 정원은 거닐다가 문득 2층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비비ㅡ여기에서
5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조그만 집에 사는 아이로 안나의일을 도와 집안 일을 하는, 낯을 가리는 흑인 여자아이였다ㅡ가 몹시 수줍어하는 기색으로 게이블에게 머뭇머뭇 물었었다. 2층의 방에 있는 오빠는 누구냐고. 정원에서 과일을 줍다가 눈이 마주쳤는데무척 다정하게 웃어주더라고.
2층의 끝방이라기에 남자와 청년을 동시에 떠올리며 그 중
끝방을 쓰는 사람이 누구일까 잠시 고민하던 게이블은 다정하게 웃어주더라는 설명에 두 말없이 청년을 짚었다. 청년의 이름을 가르쳐주자 비비는 태이, 태이, 하고 어설픈
발음으로 몇 번이나 속삭였다.
게이블은 청년을 떠올리며 비비의 그 수줍어하는 얼굴을 납득했다. 분명 알게 모르게 호감을 살 만한청년인 듯도 했다. 게이블은 담장 바로
안쪽, 비비가 망고를 주웠을 과실수 옆에서서 2층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이 위치라면 2층의 끝방이 잘 보인다.
무심하게 2층 방을 쳐다본
게이블은 고개를 기울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안나의 말로는 이미 푹
잠들었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2층 끝방, 그 창가에 사람 그림자가어른거렸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침대 쪽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 옆모습은, 조금 전까지 게이블의
방에서 맥주를 물처럼 들이부었던남자였다.
"……."
게이블은 눈을 한 번 비볐다. 그리고 다시 그쪽을 보았다. 여전히 거기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아무리 거리가 있어도 그 시선을 눈치 못 챌 남자가 아닌데, 그는
침대 쪽만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그렇게 볼 만한 게 저기 있다고 저렇게 넋없이 보고 있을까. 있을 만한 거라곤 잠들어 있을 청년뿐일 텐데.
게이블은 담장에 기대었다. 그리고 팔짱까지 끼고서 천천히 지켜볼 태세를 갖추었다. 저 남자가 언제까지 저렇게 영문 모를
짓을 하나 보려는 심산이다.
남자 역시 게이블과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창문에 가볍게 머리까지 기대고 그 자리에 진득하게 붙어 있을 모습으로 꼼짝도 않고 침대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남자는 창에서 몸을 약간 떨어뜨렸다. 뭘 봤는지, 무겁고 표정 없는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남자가 문득 피식 웃었다. 팔을 뻗어 침대쪽을 약간
건드리는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다시 원래대로 창에 기대어 팔짱을꼈다.
게이블은 인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슬슬 지겨워졌다.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지켜봐야 할이유도 없다.
시계를 보았다. 이미 밤이 깊었다. 슬슬 들어가서
잘 시간이다.
게이블은 담장에서 몸을 떨어뜨리며 다시 한 번 2층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그대로 있었다.
저러다 설마 저기서 잠드는 건 아닐테니, 라고 게이블은 농담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저 남자에 한해서는 그러 리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잘 만한 인간이
아니다.
게이블은 흠,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리고 가만히 발치를 내려다보며, 이번엔 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게이블은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세상에는 사람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숱하게 많고, 사람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한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한없이많았다.
게이블은 잠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냥 그런 일 중 하나가 있는가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덧붙여
생각해 보았다. 이해 못 한다고 뭐 곤란한 거라고 있을까.
그는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결론이 조금 더 빨리 났다. 없다.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뭐 어떨까.
다른 사람의 일에 말을 섞지 않고 말수도 적은 그는, 속으로 그렇게만 중얼거리고 생각을 맺었다. 어쨌든 시체를 치우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만해도 자신에게는 잘 된 일이라고 여겼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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