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4

  

 

 

 

[유우지]passion 4

 

 

 

 

 

 

 

 

 

8. 카일

 

 

 

남자는 오늘 대단히 운수가 나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열이틀 동안 머물면서 이미 두 번이나 소매치기를 당한 바 있었다. 그것도 똑같은 역에서, 처음 이틀 연속으로 털렸다.

 

사실 그는 그렇게 허술한 성격은 아니었다. 주위에서 '저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도 없을 거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새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하고 또한 낯선 사람이라도 언제건 친구로 삼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위에 접근해오는 낯선 사람을 무턱대고 다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정해진 수법 그대로, 신문이나 꽃다발 따위를 한 더미 끌어안고 무작정 떼지어 다가오는 사람이라면말할 것도 없다. 꽃다발로 얼굴을 후려칠 듯이 불쑥 들이밀고는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 어느 집시 아가씨의 손목을 잡아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가족처럼 어른과아이 몇 명이 무리지어 몰려오는 것도, 그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슬쩍 몸을 비켰다. 그러나 말끔한 얼굴로 다가와 길을 묻는 청년에게 잠깐 방심한 게 탈이었다.

 

곤란한 얼굴로 지도를 들고 길을 헤매는 그 청년에게 남자 자신도 잘을 모르는 길을 친절하게 지도를 보며 같이 연구해준 뒤 흡족한 마음으로 청년을 보내고 났을때, 그는 청년과 함께 자신의 지갑도 떠났다는 사실을알아차렸다. 그런 식이었다. 비슷하게 그는 다음날에도 역 근처에서 또 한 번 털렸다.

 

그 뒤로는 남자도 정신을 차려 낯선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보자고 생각하며 볼일을 보러 다녔다. 사람이 타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는 일이 이런 식으로 줄어간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열이틀 동안, 두 도시를 오가면서 겨우 이탈리아에서의볼일을 마친 그는 흡족한 성과를 낸 데에 만족하며 이탈리아에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를 타도 좋았을 테지만, 이탈리아에서의 볼일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스스로에게 일주일 동안 휴가를 주기로 했다.

 

마침 잘츠부르크에서는 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오스트리아에 들러 며칠 머무르다가 천천히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면 좋을 것 같았다.

 

11시가 되기 조금 전에 출발한 기차는 새벽 4시경 잘츠부르크에 닿을 예정이었다. 마지막날의 바쁜 일정을밤 늦게서야 간신히 다 소화해내고, 일을 다 마친 말끔한 기분으로 기차를 탄 남자는 피곤했다. 그래서 바로 이웃한 자리의 사람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데도, 평소라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 밤을 새어가면서라도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반시간 가량만 잠시 대화하다가 졸음을 참기 힘들어 눈을 감았다. 호텔을 예약해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도착한 뒤에 적당히 찾아 들어가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베네치아에서 점차 멀어지는 기차 안에서 까무룩하게 잠들었다. 잠깐이지만제법 깊이 잠들었었는지, 그는 누군가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흔들고나서야 힘들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몇 번이나 깜빡거린 다음에야 겨우 눈앞의 사람을쳐다볼 수 있었다.

 

차장이었다. 국경을 넘는 참인 모양이었다.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는 차장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는 여전히 묵직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하고 품을 더듬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잠도 확 달아났다. 거기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차장의 앞에서 그는 텅 빈 안주머니를 마구 뒤집었다. 안에서는 먼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주머니도, 거기에 뭔가를 넣어둔 기억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뒤적여보았다. 넣은 적이 없는 물건이 나올 리 없었다.

 

가방, 가방에 있을지도 몰라, 잠결에 내가, 없던 몽유병이 생겨 가방에 넣어두었을지 또 어떻게 알겠어, 남자는 가방을 찾았다. 그러나 가방도 없었다. 아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의 사정을 대충 짐작했다는 듯 차장이 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 하고 중얼거린 차장은 침대 아래에 가려진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있던 것을 주워들었다. 여권이었다.

 

"찾던 것이 여기 있군요."

 

여권을 넘겨본 차장은 다시 정중하게 그것을 남자에게돌려주었다. 남자는 여전히 아연한 얼굴로 여권을 받아들며 습관적으로 '고마워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침대 아래로 고개를 푹 숙여 차장이 조금 전 여권을 집어들었던 그 근처에 혹시라도 다른 것들이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먼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기 옆자리 사람은 뭔가 보지 않았을까, 남자는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차장은 짐작이 간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말했다.

 

"음료에 수면제를 타서 건네어주고 잠든 사이에 물건을훑어가는 수법이 요즘 번져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분실신고서를 작성하시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잃어버린물건들은 중요한 것인가요?"

 

남자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들은 없었다. 일단 그가 가진 것 중에 그나마 잃어버리면안 되는 거라면 여권이었는데, 고맙게도 다른 것 다 털어가는 와중에 여권은 남겨둔 모양이다.

 

남자는 잠들기 전 싹싹하게 말을 걸던 옆자리의 청년이주스를 권해줬던 걸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녀석들이 들으면 웃겠구나. 열며칠 사이에 벌써 세 건.

 

남자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속거나 배신을 당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건 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푼돈을 노리는 소매치기에는 가끔 속아넘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사람 보는 눈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이 어째 그렇게 당하냐'며 비웃곤 했다.

 

"그나저나 선생, 차표는 있으십니까?"

 

아연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남자에게 차장이 물었다. 남자는 멍하니 차장을 보았다. 이미 한 번 뒤적여보았던주머니를 다시 더듬어봤지만 역시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기차는 다음 역에서잠시 멈추어 섰고, 남자는 거기서 내려 역 안에 설치된파출소로 힘없이 걸어가야 했다.

 

 

 

 

 

 

남자는 오늘 대단히 운수가 좋았다.

 

파출소로 가서 분실신고를 작성 남자는 거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구석진 자리에서 쪽잠을 자다가 아침이 된 뒤에야 나왔다. 여름이라 해가 일러, 아직 상점들이 문을 여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간인데도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여권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발은 묶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발이 묶이지 않았다 한들 어디를 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은행에 가서 신분을 확인 받아 돈을 찾으면 되겠지만,국경 지나 내린 이 마을은 매우 조그만 시골마을이었다. 역에서 번화가까지 걸어서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다, 그 번화가라고 하는 것도 어느 동네 상점가 정도다.

 

은행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지역 은행이었고 남자가 거래하는 은행의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를 빙빙 돌며 찾다가 결국 찾아내지 못해 바로 옆에 보이는 은행에 들어가 물어보니, 친절한 직원은 어딘가에 전화해서 알아보더니 그 은행은 이곳에서 여섯 정거장 떨어져 있는 큰 역으로 가야 그 근처에 있을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여섯 정거장.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땡전 한 푼 없는 남자로서는 너무나 먼 곳이었다.

 

차라리 이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회사에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해서 이쪽 계좌로 돈을 넣어달라고 하면 어떨까도 생각해봤지만, 생각해 보니 해외 송금은 며칠가량 걸린다. 돈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며칠 동안 이 마을에서 머물며 지낼 방법은 뭐가 있을까.

 

접시닦이를 할까. 청소부 자리는 고작해야 사나흘 머물사람에게는 안 주겠지. 아니면 나중에 핀잔 좀 듣더라도 제임스에게 직접 여기로 와 달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 하지만 제임스는 오늘 타일러 쪽 경영진과만날 약속이 있던 것 같은데.

 

남자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면서 평소 생각할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그렇듯,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을은 작았다. 아늑하고 평온한 시골마을이었다. 국경을 지나는 기차가 하루에 몇 번 가끔씩 지나갈 뿐, 번잡하지도 않고 낙낙한 것이 살기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부모님도 도시에서 벗어나 살고 싶다며 교외로 가셨다. 아버지는 아직도 일 욕심이 왕성하셔서 종종 회사로 찾아오시지만 어머니는 뜰을 가꾸며 교외에서 조용히 삶을 즐기셨다.

 

나도 나이 먹으면 나중에 이런 동네에 집을 짓고 살아볼까. 남자는 어느새 고민을 잃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조그맣고 예쁜 집들에는 나트막한 담 너머로 흐트러지게 꽃이 피어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깨끗하게 손질된 거리가 아늑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간혹 멀리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조용한 주택가 사이사이에는 조그만 가게가 하나씩 끼어 있었다. 빵집도 있고 채소 가게도 있다. 옷 가게도있었다.

 

번창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장사에 급급하지 않고 넉넉하게 꾸려갈 듯이 보이는 그 조그만 가게들이 드문드문, 집들이 들어선 거리에 색깔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때, 한 가게가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헌 책방이었다.

입구가 대단히 좁아서 처음에는 가게인 줄도 몰랐다. 문 앞에 가서 보니 안쪽으로 길쭉하게 복도처럼 난 가게는 고작해야 서너 평이나 될까 싶었다. 그나마 책장이 가득 들어차 더 좁어 보였다. 한 사람이 간신히 책장사이로 드나들 수 있을 것처럼 좁았다. 게다가 책장 옆으로도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몸 한 번 잘못 움직였다간 책이 와르륵 무너질 것 같았다.

 

가게 저 안쪽에는 가게 주인인 듯 백발이 성성한 늙은노인이 앉아 창문으로 비쳐드는 볕을 쪼이고 있었다. 꼬박꼬박, 가끔 고개가 기울어지는 게 어쩌면 기분 좋게 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종일 파리만 날릴 것같은 가게였지만 의외로 가게 안에는 이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가방을 멘 청년이었다. 흥미로운 책이라도 있는 듯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손에들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런 가게도 장사가 되는구나, 남자는 괜히흐뭇해졌다.

 

그는 책을 대단히 좋아했다. 보통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니악할 정도로 좋아했다. 옛문헌 같은 데에 나와 꼭 읽어보고 싶긴 한데 이미 너무 오래되어 구하기힘든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그 기쁨이, 그가 아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구하기 힘든 옛날 책을 다시 복간하는 회사를 차리기도 했지만, 시작할 때부터본인 스스로도 예상했던 대로 그 회사는 아주 훌륭하게 망해버렸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지 않고서는 애정과취미만으로 이끌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지금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이윤을 내고 있는 회사를 꾸려가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고서적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서점도 좋아했고, 돈은 안 되는 이런 가게를 보면 꼭 번창하길 바라곤 했다.

 

"어디, 어떤 책이 있나…ㅡ."

 

남자는 가게 문밖에도 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책장을 주욱 훑어보았다. 직사광선이 바로 비치는 이런 데에 책을 함부로 내어놓는 걸 보고 혀를 찼다. 책 위에 쌓인먼지도 안쓰러운 마음으로 살짝살짝 털어주며 책들을살폈다. 이런 시골마을의 구석진 곳에 있는 이 정도 규모의 헌 책방은 대체로 책이 마구잡이로 꽂혀 있게 마련이었다. 주제별로 분류한 뒤 저자별로 모아놓으면 더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좀 낫다고 해봐야 비슷한 주제를 가진 책들을 적당히 모아놓은 정도다.

 

이 가게는 아무런 분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마구잡이였다. 요리책 옆에 소설이 꽂혀 있었고, 그 옆에 악보집이 꽂혀 있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책을 볕 아래 내어놓는 걸 보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책들이 이렇게 썩어가는 걸 보니 안타까웠다. 이 책들도 한 백여 년 지나면 귀해질 텐데.

 

남자는 학대받은 남의 집 아이를 보고 안타깝게 여기는마음으로 책등을 주욱 쓰다듬었다. 차라리 아이라면 경찰에 고발이라도 하지, 이것들은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때였다.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손가락 아래에낡아빠진 책 한 권이 있었다.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입도 저절로 벌어져다물 수가 없었다.

 

730일간의 고독-홀트 럼펠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꺼내었다. 낡아서 책장이 너덜너덜한 그 책의 뒷장을 조심스럽게 넘겨 통권을확인해본다. 1994년판. 하텐하르트 출판.

 

믿어지지 않았다. 1994, 독일판 럼펠스의 책은 그 당시 금서로 지정되어 소각처분을 받았다. 그 와중에 겨우 몇 권이 남아 몇 년 뒤 주위 다른 나라에서 소량 출판되어 나왔다. 그나마 얼마 안 가 절판되어 해외판으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런데 1994년판이라니. 심지어 독어판이잖아.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런 구석진 시골마을, 낡아허물어져가는 헌 책방에서 이런 보물을 발견할 줄이야.

 

남자는 소매치기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 소매치기가아니었더라면 남자는 이 역에서 내리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이 보물 같은 만남도 있을 수 없었다.

 

갖고 싶다. 아니, 이건 어떻게든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남자는 너덜너덜한 가죽 제본 책자를 연신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애초의 문제로 돌아왔다. 그는 돈이 없었다. 게다가 이 책이라면 보관 상태를흠잡아 싸게 깎는다 하더라도 5천유로는 줘야 할 텐데.

 

지갑만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수천 달러쯤은 기꺼이쥐어주고 책을 끌어안고 나왔을 테지만, 그는 지금 5천유로는 커녕 5유로도 없었다.

 

이걸 어쩐다. 역시 제임스에게 전화해서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얼른 이리로 오라고 할까. 그럼 오늘 저녁에는 올 수 있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사이에 누가 이 책을 사 가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보물 같은 책이니 지금 당장 누가 가져간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남자는 책을 끌어안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심지어는그대로 튀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지, 어쩌지, 하고 책장 앞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커졌다.

 

「앙상블-헨리 마치」

 

"헉……."

 

숨이 막혔다. 헨리 마치의 앙상블. 19세기 후반을 주름잡던 온갖 철학자들이 다들 호평에 마지않았다고 문헌에 나와 한때 미친 듯이 찾아헤매었지만, 그런 책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던 그 책이 아닌가.

 

남자는 황급히 그 책도 뽑아들었다. 심장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심장마비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시점에서 그는 눈이 뒤집혔다. 일단돈이고 뭐고, 현실은 뒷전이었다. 그는 이 쓰러져가는 보물 창고를 샅샅이 뒤지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바깥쪽 길가에 세워져 있던 책장을 훑었다. 처음에 발견한 두 권만큼 귀한 책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매에 내놓으면 값을 톡톡히 받을 수 있을 만한 책을 한 권더 발견했다. 남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서, 아쉽지만 그 책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비좁고 빽빽한 곳에서 다닐 생각을 하니 잠시 눈앞이 까마득해졌지만, 그래도 보물 창고라고 생각하니 그 괴로움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책방 안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건 바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책들을 일일이 짚어가며 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문에서 제일가까이 있는 책장부터 시작해 하나씩 짚어보며 안쪽으로 나아갔다. 가는 동안에도 귀한 책을 몇 권이나 발견했다. 그 중에 남자가 당장 빼내어 끌어안을 만한 책은한 권밖에 없었지만, 책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이 보면환장을 하며 이 책 저 책 다 끄집어내었을 거다.

 

오늘은 정말로 운 좋은 날이었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행복했던 날이 또 언제 있었는지 기억을더듬어 보았지만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거의 넋을 잃고서 몸을 바싹 굽혀 책장 제일 아랫단까지 빼놓지 않고 샅샅이 훑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쳐 나아가던 남자는 툭, 엉덩이에 뭔가가 부딪혀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의 그 모자 눌러쓴 청년이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헌 책방에 들어와 책을 보고 있던 기특한 청년. 아직도 책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미안합니다."라고 짧게 말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눈길 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사람을 아주 좋아하는 그이지만, 이 보물들은 사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정신없이 책을 훑고 있는 와중에 청년의 차분한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걸 느꼈지만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사과도 했는데 뭘. ……아. 이 책도 구하기 힘든 건데. 난 있지만.

 

어떻게 이런 보물 같은 책방이 소문도 안 나고 있는지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이런 보물 같은 책들만 모아놓은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저기서 졸고있는 저 범상해 보이는 영감님이 사실은 전설적인 중개상이라든가…….

 

곧 머리 위에서 청년의 시선이 떠나갔다. 다시 책장을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책방 안을 거의 다 훑어본 남자는, 품에 다섯 권의 책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 권도 빼앗길 수 없다는 기세로 꼭 끌어안고서 그는 마지막 하나 남은 책장 앞에 섰다.

 

"죄송한데 잠시만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청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모자를 눌러써서 잘 알아볼 수없었지만 코 아래로 보이는 골격이나 피부를 보니 동양인인 것 같았다. 남자가 말을 해도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그 청년은 말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어느 나라 말로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면서 청년이 읽고 있던 책을 넘겨다보니 영문서였다. 같은 말을 영어로 한 번 더 했다. 그러자 청년은 순순히 비켜주었다. 남자는 청년이 비켜준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보물창고에 남은 마지막 책장을 제일 윗칸부터 훑어내리기시작했다. 책이 두서없이 꽂혀 있는데다 책장 위의 남는 공간에는 가로로도 꽂혀 있었고 심지어 문고판형의책은 이중으로 꽂혀 있기도 해, 뒤적이는 데에 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남자가 그 책장까지도 마저 샅샅이 훑어보고 났을 때는제법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몸도 땀으로온통 젖어 있었다. 마지막 책장에서도 한 권의 책을 더찾아낸 남자는 대단히 흡족한 마음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렇게 보람된 마음을 느껴본 건 한 10년만의 일인 것 같다. 남자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책방 안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여기에 종종 와야겠다.

 

그제야 남자는 좀 차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생각할 수 있었다. 가만 있자. 그런데 돈이 없구나. 이를 어쩐다. 끄응, 하고 신음하며 고민하던 그는 문득 옆에 서 있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아직도 거기서 책을 읽고 있었다. 꽤 집중해서 읽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서점 주인이 제일 싫어하는 손님이, 사지는 않으면서 책을 읽고만 가는 사람이라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슨 재미난 책을 읽고 있나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흘끔 책표지를 쳐다보았다. 붉은 빛이 도는 가죽 장정의 책은 제법 오래된 티가 났다.제목은 금박으로 적혀있는 것 같은데 청년의 손가락이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곧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눈앞에 닥친 돈걱정이 우선이었다.

 

그때, 책을 읽을 만큼 읽었는지 청년이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책을 사려는 듯 노인이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눈에 책 제목이 얼핏 스쳤다.

 

"잠깐!"

 

남자는 청년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청년은 깜짝 놀란 듯 돌아보았다. 모자 아래로 입매가 움찔 굳었다.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이 들고 있는 책을 거의 빼앗아 들다시피 해서 살폈다.

 

이럴 수가.

 

밀로우 카블리.

 

인구에 회자되기만 하고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진담 섞인 농담이 오갈 정도로 희귀한 그 책이. 남자가 백방으로 손을 쓴 지 20년이 넘어서고 있지만 실마리의 끄트머리조차 찾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책이.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책장을 뒤적였다. 낡아서 누렇게변색된 책은 보관 상태가 별로 좋지 못 했다. 심지어 책뒷표지에는 곰팡이가 쓸쩍 슬어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었다. 지금 남자가 끌어 안고 있는 여섯 권의 책을 다 내놓아도 값어치가 상쇄될까말까만,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갖고 싶은 보물이었다.

 

"이 책, 살 겁니까?"

 

남자는 청년에게 물었다. 긴장되어 목소리가 쉴 것 같았다. 마치 험악하게 싸움이라도 거는 것 같은 그 말에청년은 놀란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남자는 바짝 긴장해서 청년의 입만 쳐다보았다.

 

살 것인가. 이토록 탐나는 이 책을, 이 청년이 사 가버릴 것인가……!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모르겠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시면 영어로 말해주세요."

 

"……."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청년이 무슨 말을했는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얼마나 급박했는지 청년이 독일어를 못 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이 책, 살 겁니까?"

 

남자는 정중히 사과하고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말했다. 청년은 그제야 아아, 하고 알아듣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려고 하는데요."

 

"……! 아까부터 이 책을 보지 않았던가요? 대충 다 읽은 게 아닙니까?"

 

남자가 다시 다급하게 말하자 청년은 그 맹렬한 기세에놀란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대충 훑어봤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사서 제대로읽어보려는 참인데요."

 

남자는 기절할 것 같았다. 눈앞에서 보물이 모래로 변해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는 아랍 상안의 심정이 이럴까. 그러나 낯이 하얗게 질리던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 청년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이 책의 값어치도 모르는 풋내기가 틀림없었다. 우연히 뽑아든 책을 넘겨보다가재미있을 것 같으니 읽어볼까 한다는 말투가 아니었던가.

 

"아……, 사실은 그 책이 말이지요. 제가 예전부터 보고싶어했던 책인데 좀체 잘 보이지 않았거든요. 기왕 이렇게 본 김에 저도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제게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거짓은 말하지 않되 곧이곧대로 모든 사실은 다알려주지 않은 화법으로 청년에게 예의바르게 말했다.그러자 청년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아쉬운 듯책장을 다시 몇 번 넘겨보던 그는, 이내 선선히 고개를끄덕이며 남자에게 책을 내밀었다.

 

", 그렇게 하세요. 여기."

 

". 고맙습니다."

 

남자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청년을 위해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재미를 떠나서 이 책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었다. 당신은 그 무지함 때문에 보물을 놓친 거야, 지금.

 

순진한 청년을 속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자신이 이 책을 이용해 금전적인 이득을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물건은그 가치를 알고 아껴주는 사람에게 들어가는 게 물건으로서도 행복하다. 이렇게 운수 좋은 날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속으로 눈물지었다. 앞으로 1년정도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안타까운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가엾은 청년은 담담한 얼굴로 다시 책장을 훑어보다가 문득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책들을 보았다. 책들을 주욱 살핀 청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럼펠스에 헨리 마치, 하인츠라……. 드문 책들을 찾으셨네요."

 

청년의 말을 듣고 남자는 멈칫했다. 흘끔 청년의 눈치를 보았다. 별 뜻이 있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이름들과 드문 책의 상관성을 알고 있다니,그냥 지나가다 들른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이 청년도 어지간히 책을 좋아하고 희귀한 책에 관심을 두나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순순히 카블리를양보해주던데. 남자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 우연히 눈에 띄어서요. ……오래된 책들, 좋아하시나 보지요."

 

그러나 청년은 별로 그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저으며 책방으로 나가려 걸음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니 전 그냥 얻어보기만 하는데 주위에 좀 그런 사람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 책방, 희한한 게 많이 있네요. 엊그제도 여기서 아이어스를 사면서 감탄했던 참인데."

 

"……――――!!!!!"

 

아이어스를 사면서, 까지 듣자마자 남자는 반사적으로청년의 팔을 움켜쥐었다. 청년은 또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이, 아이어스라면…ㅡ."

 

"……파블로 아이어스지요. ……. ……그것도 보고 싶으세요?"

 

청년이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블로 아이어스, 그 또한 남자가 애타게 찾아헤매던 책이었다. 남자는 이게 혹시라도 꿈이 아닐지 두려워졌다.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기를.

 

지상에 남은 유일한 천사 같은 청년은 이번에도 선선히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놔두고 와서 지금은 없는데,요 근처니까 잠깐 같이 가서 받아가세요, 라고 말하는청년에게 남자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 청년은 책의 값어치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너그럽게 자신에게 양보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취미를 공유하는 인간 자체가 얼마 되지도 않았거니와 심지어 이렇게 마음씨가 좋은 청년이라니. 헬레나가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소개를 시켜주는 건데.

 

남자는 아쉽게 생각하다가 그만 나가보려 하는 청년의눈치에 얼른 계산대로 달려갔다.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얼른 책을 사갖고 따라가야겠다.

 

그러나 그때, 남자는 이 현실이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는 여전히 돈이 없었다.

 

"……."

 

넋을 잃은 얼굴로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청년이 의아한 듯 다가왔다. 남자는 처연한 얼굴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 생각해 보니 제가 오늘 소매치기를 당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떠돌아다니던 참이라……. 돈이……."

 

남자는 우울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청년이 참 안 됐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고민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돈이 없었다. 비록 품에는 보물이 있었지만 그보물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시 제임스에게 전화해서 오늘 스케줄 다 펑크내고서라도 당장 달려오라고 해야…….

 

"괜찮으시다면 빌려드릴까요? 제가 지금 가진 만큼이라면 빌려드릴 수 있는데."

 

그는 천사가 틀림없었다. 남자는 하마터면 그 청년을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품 안에 있는 게 귀한 책들만 아니었더라면 그냥 팽개쳐버리고 청년을 끌어안았을 거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 책들의 가격은결코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아니, 이 책들의 가격을모두 합하면 여차하면 시골의 집 한 채 값은 넉넉히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계산대 앞에서 아직도 졸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가 가만히 그를 깨웠다. 끔뻑, 눈을 뜬 노인은 청년을 보자 아는 척을 했다. 엊그제도 왔었다더니 그새 얼굴을 익혔나 보다.

 

독일어를 못하는 청년과 영어를 못하는 노인은 손짓발짓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해 보이는게, 한 번 온 게 아닌 모양이다.

 

보다 못한 남자가 통역이라도 해줘야 할까 다가갔을 때에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청년은 지갑에서 50유로를 한 장 꺼내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흠칫하며 청년과 50유로와 노인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태연하게 그 돈을 받더니, 심지어는 얼마간 거슬러주기까지 했다.

 

청년은 웃으며 노인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고노인도 얼굴에 흐뭇하게 주름지으며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청년은 남자에게 고갯짓하며 앞서 나갔다.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청년가 노인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그 뒤를 따라나갔다.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간 청년은 남자가 따라나오길 기다려 앞장섰다. 책을 끌어안은 남자는 청년을 따라가며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역시 이 모든 상황은 꿈일지도 몰랐다. 이 보물들이 50유로 남짓. 그럴 리가 없었다.

 

"오늘 횡재하셨죠?"

 

청년이 돌아보며 웃었다. 모자를 약간 치켜올리며 웃음짓는 청년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어디서 보았었는지 남자는 금방 기억해내었다.

 

그러나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년은 다시 앞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취미로 하시나 봐요. 귀한 책이니 아니니 하는 건모르시고, 몇 년 전에 친척분이 돌아가시면서 그 분 책들이 갈 곳없어 헌 책방을 하는 저 영감님한테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워낙 작은 동네에 책들도 낡아빠졌으니, 손님도 거의 안 와서, 그냥 낮 동안 볕 쪼이다 가는 서재로 여긴다고 하시더라구요."

 

"아하……."

 

남자는 틀림없이 책의 가치를 알았을 그 죽은 친척이 참 안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손짓발짓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의외로 잘 통한다고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하는청년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숙소는 멀지 않았다. 두어 블록 떨어진 곳의 조그만 민박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는 동안 청년이 특정한 목적지를 두지 않고 여행을 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은 남자가 지난밤 겪은 불행한 사건을알게 되었다. 이탈리아 쪽은 소매치기가 원래 많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는 기차에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는걸요, 하고 중얼거리며 청년은 남자를 위로해주었다.

 

보면 볼수록 참한 청년이었다. 성격도 좋고 말도 유쾌하게 잘하고, 더욱이 취미가 훌륭하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고서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조예가 깊지는 않고 적당히 곁귀로 들은 게 많은 정도였지만, 그런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았다. 사람과 친해지려면 취미가 맞는 게제일이라고, 남자는 이 청년이 금방 마음에 들었다.

 

숙소 앞에 이르자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간 청년은 제법 오래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는 그리 오래는 아니었지만 책한 권 가지고 나오는 것치고는 시간이 꽤 걸렸다. 늦는걸, 하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다시 문이 열리며 청년이 나왔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손에는 큼직한 스포츠백을 들고 있었다.

 

"찾으시던 게 이거 맞죠?"

 

청년이 책을 내밀었다. 남자는 눈을 번쩍이며 그 책을받아들었다.

 

"파블로 아이어스!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찾아 헤맸던지!"

 

감격스럽게 외친 남자는 한 손에 책들을 끌어안고 다른손으로 청년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다.

 

"고맙군요, 고마워요!"

 

"아하하, 뭘요. , 그럼 이만……."

 

청년은 시계를 보며 남자에게서 손을 빼내었다. 남자는그제야 청년이 한쪽 옆구리에 끼고 있는 스포츠백으로시선을 주었다.

 

"어디로 가시는가 보군요."

 

", 원래 여기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조용하고한적한 게 좋아서 좀 지내다 보니 벌써 열흘이 지났네요. 한곳에 오래 있으면 불안하니까, 다른 곳으로 가 봐야죠."

 

왜 한곳에 오래 있으면 불안한지 알 수 없었지만 괴이한 성격이 다들 하나쯤은 있으려니 했다.

 

남자는 모처럼 대단히 마음에 든 이 청년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모처럼 만나게 되었는데 아쉽군요. 나중에 혹시라도 베를린을 찾을 일이 있거든 연락해요. 연락처는……아,이런. 명함이 없구나……."

 

남자는 습관적으로 품에 손을 넣다가 아무것도 없는 빈주머니를 더듬고는 아쉽게 손을 뗐다. 그러다가 번뜩 조금 전에 빌린 50유로가 생각났다.

 

"그렇지, ! 책값으로 빌려주셨던 돈은 돌려드려야지요.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반드시 돌려드리겠습니다."

 

"? , 연락처…ㅡ, 아니오, 괜찮아요. 다음에 언젠가다시 뵙거든 주세요."

 

청년은 연락처를 묻자 어째서인지 잠깐 난처한 얼굴을하더니 손을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문득 청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으음, 하고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사는 곳이 베를린이신가요?"

 

"? ,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잘츠부르크로 가던 길이지만요."

 

땡전 한 푼 없는 이 상태로는 잘츠부르크고 뭐고 아무래도 못갈 테지만.

 

아무래도 제임스를 불러야겠다고, 꼬장꼬장한 잔소리가 특기인 비서를 떠올리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청년은 다시 으음, 하고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가조심스럽게 말했다.

 

"잘츠부르크라면 방향이 달라서 곤란하지만, 제가 지금마침 베를린 쪽으로 가려던 참이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셔도 좋은데요."

 

2인승 리츠라서 좀 좁지만, 하고 덧붙이며 청년은 집 옆에 딸린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조그만 승용차를 가리켰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제임스에게 한동안 잔소리를 들으며 시달릴 걸 생각하면 기꺼이 잘츠부르크를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어차피 제임스를 여기로 부르면 잘츠부르크는 날아갈 게 뻔한 일이었다.

 

남자는 보물처럼 안고 있던 책을 옆의 우체통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청년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 청년은 천사가 틀림없었다.

 

"그 후의,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보답이라면 좀그렇지만, 혹시 베를린에 묵을 곳을 아직 정하지 않으셨다면 부디 저희 집에 묵으셔서 제가 조금이나마 은혜갚음을 할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집은 사는사람에 비해 넓은 편이니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남자는 정중한 청에ㅡ혹은 꽉 움켜쥔 손에ㅡ조금 당황하는 눈치이던 청년은, 난처한 듯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람이 얼마나 환경에 익숙해지는지 가끔 실감할 때가있는데, 때로 무서울 정도다.

 

처음 사관 학교를 들어갔을 때, 일주일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굴렀던 적이 있다. 죽는 줄 알았다. 잘 먹지도 못했다. 먹을 건 부족하지 않게 나온 편이었지만 몸이 피폐해지니 자연히 위장도 따라 쇠약해져, 밥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마 그때 정태의와 마찬가지로, 죽는 줄 알았다가 살아난 놈들 여럿될 거다. 동기들이랑 나중에 이야기할 때에도 그 훈련 때의 화제가가장 그립고 괴로운 추억으로 심심찮게 나왔다.

 

그런데 그 훈련이 알고 보니 분기 행사였다. 정규로 그런 훈련 과정이 있었던 게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굴렀다. 철이 바뀔 때마다 흙먼지 위에서, 뙤약볕 아래서, 아스팔트 위에서, 눈밭 위에서 골고루 굴렀다.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사실 괴로운 건 몸보다 정신이었다.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고스란히 따라야 했던 그 비합리적인 세계에서 정신이 얼마나 깎여 나갔을까.

 

그러다가 졸업을 했다. 졸업을 앞둔 무렵, 훈련은 훨씬견디기 쉬워졌다. 체력도 더 붙었고 또 요령이 생겨서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나름대로 익숙해졌던 것이다.

 

그건 그나마 낫다. 그런 식으로 환경에 익숙해지는 거라면 뭐라고 할 바도 못 된다. 정태의는 환경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떤건지 실감했던 것은 군대에 가서였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곧 어느 시골에 박혀 있는 군대에 장교로 들어갔다. 선택할 여지도 없이 끌려온 가엾은 어린 청년들이 정태의의 아래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거기다 대고 위세를 부릴 여유도 없었다. 정태의의 위에도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얹혀 있었다.

 

군대만한 계급 사회도 보기 드물 거다. 그곳은 거부라는 게 존재할 수 없었다. 위에서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핥았다. 정태의와는 별 교분이 없었지만 건너건너 이름과 얼굴이나 아는 정도인 중위가 하나 있었다. 이 중위가 다시없을 개새끼였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게다가 성벽도 더러워서, 나갈 때마다 사창가에 갔다와서는 부하들 모아 놓고 여자는이러이러한 게 명기라는 둥 역시 여자에게 몸을 풀고 오니 좋다는 둥 지저분한 자랑을 늘어놓는 주제에 좀 반반하다 싶은 부하는 어떻게든 한 번 깔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 개새끼에게 소위 '깔린' 녀석 중에 정태의도 아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안다고 하면 어폐가 있다. 행군을 하면서 몇 마디 말해본 게 고작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그녀석은 생긴 것만큼 성격도 유약했다. 딱 그 개새끼에게 찍히기 좋은 얼굴과 성격이었다.

 

당연히 그 녀석은 싫어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쩌나 불안해하고, 몇 번이나 토하고, 구석에서 울고, 심지어는 커터를 손목에 대고 덜덜 떨고 있는 걸 보고 동기 중의 하나가 놀라서 말렸던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 되자 그 녀석은 가끔 그 개새끼가 찾으면 그냥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찾아가서 몸을 섞고 왔다. 그 새끼 좆질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밝히기만 더럽게 밝혀, 지저분한 새끼, 하고 몇몇 친한 녀석들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그 녀석이 다른 후배를 건드리기도 했다는 말도들렸다.

 

그렇다고 그 녀석이 그런 쪽 길로 빠진 건 아니었다. 건너 건너 들었는데, 전역한 뒤에는 멀쩡하게 학교 졸업하고 일찌감치 결혼도 했다고 전해들었다.

 

동기와 만나 술을 마실 때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정태의는 생각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괴롭고 힘든 일이라도 어쨌든 익숙해진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능숙함이라는 전제조건만 붙지 않는다면 익숙해지는 것 자체엔 시간도 그리 오래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너무 익숙해진 건지도 몰라……."

 

정태의는 눈앞에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쌀쌀맞는 목소리가들렸다.

 

"내 속을 상하게 하는 데에 말인가요?"

 

움칫.

 

정태의는 기지개를 켜다 말고 침대 위에 내팽개쳤던 팔을 꾸물꾸물 움츠렸다. 그리고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문 앞에 한치 어긋남 없이 똑바른 자세로 버티고 선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니……설마 그럴 리가요, 리타."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도련님도 기다리고 계시니오십시오. 주인이 주인의 도리를 다 하면 손님도 손님의 도리를 다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노부인은 딱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하곤 돌아섰다. 빠르지 않은 몸짓이었지만 어찌나 냉기가 도는지 바람소리가 휭휭 나는 것 같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노부인의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하긴 고작해야 몇 달 만에도익숙해지는 일이 있는 판에, 수십 년 함께 해 온 얼굴이 낯설다면 안 될 말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몇 달 만에도 익숙해지는 일이있다. 지금 그걸 느끼고 있다.

 

고작해야 몇 달 UNHRDO에 있었는데, 나름대로 그 생활에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 순간 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숨죽이고 있으면 희미하게 들려오는 공조 장치의 소리, 창문이 없는 방,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공기, 몇 달 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그런 것들이 온 데 간 데 없었다. 지금 이, 햇빛이 비쳐드는 창문, 그리고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들, 가만히 맡아보면 뭔가 생활의 냄새가 섞여있는 공기, 이런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데도, 이 당연한 것들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UNHRDO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다.

 

정태의는 젖은 얼굴을 닦으며 그럴 만도 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 몇 달이면 뭔가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충분할 수 있는 시간이다. 고작해야 며칠만에 익숙해지는일도 있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또 꿈을 꿨다. 날마다 꿈을 꿨다. 가끔 꿈을 꾸지 않는날도 있지만 그때는 아무 꿈을 꾸지 않는 날이었다. 사람은 본인이 꿈을 꾸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꿈을꾼다고 하니, 정태의가 기억하지 못할 뿐 사실은 매일같이 그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꿈의 내용은 늘 달랐다. 그런데 나오는 사람은 늘 같았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는 일관성도 있다.

 

……일레이.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두 번 다시 안 보겠다고 결심하고ㅡ다시 보게 되면 인생 최후의 참사가 벌어질 거다. 왜 최후냐면 참사(慘事)가 아니라 참사(慘死)니까――나왔는데 설마 꿈에서 만날 볼 줄은 몰랐다.

 

어제도, 아니 바로 몇 분 전에도 그렇다. 이미 어젯밤 자면서도 짐작했지만, 또 일레이의 꿈을 꿨다. 이런 추세로 가면 오늘밤에도 내일밤에도 꾸겠지. 설마 평생이야 갈까마는,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어젯밤 자기 전에 누구에게인지도 모를 기도를 하고 잤다. 기왕 그놈 꿈을 꿀 꺼면 그나마 비교적 인간다운 모습인 그놈이 나오게 해 달라고. 이를테면 밥을 먹는 그놈이라든가, 교관 회의를 하는 그놈이라든가, 책을 보는 그놈이라든가.

 

"젠장. 내가 다시 기도하나 봐라……."

 

정태의는 양치질을 하면서 웅얼웅얼 투덜거렸다. 기도가 너무 잘 들었는지, 방향을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정태의가 보아온 가운데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었던 일레이의 꿈을 꿨다. 잠깐 멍하니 그 꿈을 떠올리고 있자니 섬뜩해져서 푸악, 입 안에 든 거품을 뱉어버렸다.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얼른 입을 헹군 정태의는, 집주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 리타의 말을 떠올리곤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신세지고 있는 주제에 식사 자리에 늦어서 집주인을 기다리게까지 해서야 미안한 일이다.

 

……뭐 그 주인은 전혀 신경 안 쓰고, 다른 손님들과 즐거이 환담을 나누며 전채를 들고 있겠지만.

 

정태의는 다이닝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내가 너무 쉽게 봤나.

 

정태의는 입가에는 어렴풋이 웃음을 띤 채로 맥주잔을톡톡 두드리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웃을 마음은 전혀 아닌데 웃고 있자니 시선이 허공에 붕 떠버려 몇 번이나 다잡았다. 아니, 쉽게 봤다기보다는 이건 실수다.왜 인간은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거듭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는데.

 

일레이의 맥주에 섞어넣은 이완제는 분명 무미무취였다. 넣기 전에 냄새도 맡아보고 찍어서 맛도 봤다. 정태의 역시 나름대로 감각은 예민한 편이니, 아무리 저놈이 인간이 아니라 해도 맥주에 섞어놓은 걸 알아차리진못했을 거다. 사실 모러를 후려쳐서 얻어온 그 이완제가 좀 약한 물건이긴 했다. 이완제라 해도 실질적인 효능은 오히려 수면제에 더 가까워,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는 물건이었다.

 

고작해야 몇십 분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멀쩡하게깨어나는 약이니ㅡ물론 정상적으로 작용한다면 깨어난뒤 한동안은 기운도 좀 없을 테지만ㅡ몸에 부담도 안되고, 가볍게 써먹기엔 좋다. 그런데 이게 저 괴물을 상대로는 안 듣나 보구나. 미리 몰랐던 게 실수다.

 

정태의는 안주를 씹으며 쳇,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 상관은 없다. 인사나 좀 제대로 해주려 했는데그게 이루어지지 않게 생겼으니 좀 아쉬울 뿐.

 

"왜 그렇게 넋을 빼놓고 있어."

 

두 잔째의 맥주를 비우고 세 잔째 부운 맥주를 두어 모금 마시고서 일레이가 불쑥 물었다. 접시 위의 깍지콩을 노려보고 있던 정태의는 흘끔 시선을 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찾아와선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러나 무서워지잖아."

 

일레이는 손톱만큼도 무섭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정태의는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가는 맥주를 쳐다보면서 내심 한숨을 쉬고는 자기 몫의 맥주를 삼켰다. 맥주를 마저 비운 일레이는 빈 잔을 협탁에 내려놓더니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웠다. 나른해 보이는 얼굴이 어딘지 졸린듯도 하다. 정태의는 말없이 자신의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물어볼 건 태산같이 많으면서도 실상은 하나도 없다. 이것저것 속시원하게 다 털어내라고 목을 붙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을 이 남자가ㅡ비록 능구렁이를 수백 마리쯤 잡아먹은 것 같다 해도ㅡ다알고 있을 리도 만무했고, 또한 알아서 뭘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태의가 말없이 소파에 기대어 일레이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일레이는 흐리게 웃었다.

 

"정 교관이랑 만났다면서. 거기에서."

 

정태의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일레이는 말문을 터주기라도 하려는 듯 먼저 운을 뗐다. 정태의는 술잔을 천천히 흔들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거기가 어디인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정태의는 묘한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입매를 찡그렸다.

 

"이놈의 동네는 하여간 소문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니까 ……. 너는 삼촌이랑 매일같이 전화통을 붙잡고 사나?아니면 시시때때로 만나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아하, 천만에. 4층에 일개 부원이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는 안보 차원에서 교관 회의에 회부되었거든. 조카를사랑하는 정창인 교관의 마음 씀씀이를 위해서 알려주자면, 그 이야기를 꺼넨 사람은 네 숙부가 아니라 총관이었어. 그 엘리베이터는 이동 기록이 다 남는단 말이야."

 

정태의는 가볍게 혀를 차긴 했지만 별 말 않았다. 그조차 별 상관없는 일이다. 설령 숙부가 먼저 회의에서 그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공적인 자리에서 숙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 정 교관에게서 들은 것 이외에?"

 

일레이의 목소리가 한층 나른해졌다. 눈가에 흐릿하게졸음이 덮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ㅡ분명한 확신은가질 수 없었지만ㅡ약기운이 도는 건지도 몰랐다.

 

……하여간 무서운 놈. 약하다곤 하지만 효능은 훌륭한약이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반잔만 마시고도 고꾸라졌을 텐데, 세 잔을 고스란히 마시고서야 조금 졸린 척이냐. 정태의는 아예 이완제 농축액을 통째로 섞어 저입 안에 들이부어버릴 걸, 하고 생각하며 묵묵히 자신의 잔을 비웠다.

 

"나랑 삼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다 들은 모양이지, 눈치를 보니."

 

정태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아마도 제딴에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숙부를 알고 있었다. 말을 할것과 안 할 것으로 잘 구분해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야기를 나눈 상대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기를바라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더욱.

 

정태의와 일레이는 서로 마주보며 어렴풋이나마 빙글빙글 웃었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웃나 싶기도 했지만다 좋다. 이제 너랑도 더 볼 일 없다, 이 인간도 아닌 놈아.

 

"궁금한 것 있으면 얼른 물어보지 그래. 슬슬 잠이 오거든."

 

일레이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반쯤 감긴 눈은 기분 좋은 듯 부드럽게 휘었다. 아하. 정태의는 빈 잔을 한 번,두 번, 세 번, 천천히 두드렸다. 아무렴 너도 인간의 부류에 발은 걸쳐야지.

 

"궁금한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세상사, 흘러갈 대로 흘러가는 법이니."

 

"운명론인가?"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지."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하얀 손길이 느리다. 나른하고 졸린 모습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일레이는 어느 결에 눈을 감았다. 정태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졸린가 보군."

 

"음……, 그렇기도 하고……, 잠깐 생각 중."

 

목소리가 점차 낮아져,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정태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물었다.

 

"무슨 생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다시금 빈 잔을 몇 번 천천히 두드렸다. 속으로 숫자를 하나씩 센다.

 

"일레이."

 

조용히 불러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사이를 둔 뒤 다시 한 번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는다든가 잠든 척을 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씩 힘을 잃고 늘어지는 어깨며, 고개, 그 사이로 나직하게 느려지는 규칙적인 호흡.

 

미안. 나는 네가 인간이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도나름대로 아직 인간의 여지가 있긴 했구나.

 

정태의는 주머니 안에서 쥐고 있던 손가락만한 약병을꺼내보았다. 반 넘게 비어 있는 약병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약간 남아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서넛은 충분히 거꾸러뜨릴 양이기는 하다.

 

"한쪽 발 발가락 끄트머리나마 인간의 영역에 남아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예 저쪽으로 떠밀어버리고 격리 처분을 호소하는 게 나은지……."

 

정태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약효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이내 다시 깨어난다고 들었다. 하긴 정량 이상으로 마셨을 경우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 시간이고 이대로 쿨쿨 자 주지는 않을 거다. 몇 시간이나 계속 잤다간 재미없지만. 오히려 재수없에 1, 2분 뒤에 예고 없이 깨면 그게 곤란하다.

 

"하긴, 일어나더라도 얼마간은 몸이 풀려서 평소처럼은못 움직일 테지만……이놈이 상대라면야 어디 방심할수가 있어야지."

 

침대 옆까지 다가간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곤한 숨을 내쉬며 잠들어버린 이 남자를 보다니 신기한 기분마저 든다. 잠든 얼굴만 봐서는 멀끔하고 상냥해 보이는 잘 생긴 청년인데.

 

정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렇게 내려다보고있으려니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아, 이유 없이 조금 처량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쩌면 약간 서운한지도 모르겠다. 뭐가 서운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들겠지만.

 

머릿속으로 하나씩 꼽아보았다. 짐은 다 챙겼다. 챙겼다고 하기도 우스운 게, 짐이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올 때에도 스포츠백 하나였다. 나갈 때는 그 짐조차 이곳에 버리고, 지갑과 여권 정도만 챙기니 거의 맨손이나다를 바 없었다. 가벼운 차림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배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두 시간 뒤면 이 빌어먹을 섬과는 영영 안녕이다. 이 빌어먹을 놈과도 안녕이다. 이 빌어먹을 기구와도. ……원한이 쌓인 숙부랑은 작별할 수 없을 테지만.

 

"자아, 시간도 많지 않으니, 그럼 어디 한 번."

 

이럴 때 이놈이 깨어나면 제 명에 못 죽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절그렁,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었다. 킹콩도 묶어둘 수 있으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받아왔지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탓에 좀 꺼림칙했다.

 

"그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 번쯤은 패기 있게 살아봐야지."

 

침대 다리에 수갑을 한 짝, 나머지 짝은 일레이의 오른쪽 손목에 채웠다. 언제라도 눈을 뜨면 당장 튀어서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시선을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 안에 들어온 그의 손목은 눈처럼 하얗다. 비록 쥐자마자 그 팔뚝의 피부 한꺼풀 아래에 숨어 있는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겉보기만큼은 하얗고 매끈한 손목이었다. , 정태의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손에 살짝 입술을대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돌아가 다른 손목에도 마찬가지로 수갑을 채운다. 두 팔을 벌린 채 고요히 잠들어 있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다시 그 옆에 앉은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에게 맺힌 원한도 한둘이아니다. 이대로 목을 졸라버리거나 얼굴에 젖은 수건을덮는다 해서, 이 세상 누가 자신을 탓할 수 있을까.

 

……손도 묶어놓은 김에 정말 얼굴에 수건이나 적셔서 얹어놓을까 보다. 아니, 그건 고개를 휘저어 수건을 떨어뜨리면 그만이니까 차라리 목을 콱…….

 

정태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일레이의 목을 살짝 쥐었다. 새하얀 목 아래로 언뜻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쳤다. 그아래에 흐르고 있을 피가 살갗을 따뜻하게 데운다. 정태의의 손가락 아래로 맥이 느껴졌다. 두근.두근.두근.

 

문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어릴 적 다락방에서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찾아내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사람의 맥박을 느껴본 게 언제였을까. 너무도 인간적인그 감각을 이 남자에게서 느낀다는 사실이 몹시 기묘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약간, 어렴풋이, 애틋한 기분도들었다.

 

"……."

 

"그래, 이제부터는 뭘 할 생각이지?"

 

한동안 가만히 목 위에 손을 얹고 맥박을 느꼈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눈을 감은 채 입술만 움직이며, 일레이가 말했다. 그러나 말을 마친 뒤에는 눈을 뜨고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그의 목에 올려두었던 손을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그리고 현실을 되새겼다.

 

그래, 지금은 이 괴물의 손을 봉쇄해두고 목을 졸라볼까 물수건을 덮어볼까 고민하던 차였다.

 

하지만, 어차피 금방 깨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몇분이나 지났다고…….

 

정태의는 예상했던 사태이긴 하지만 일레이의 손목에수갑을 거창하게 채워놓은 상황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등줄기가 식었다. , 이제 이놈이 화를 내며날뛰다가 재수 없게 저 수갑이 풀어지거나 망가지기라도 하면 오늘 내 짧은 인생 요절로 마감하는 거다.

 

물론 그런 재수 없는 상황을 막기 전에 수갑의 강도는미리 시험해 봤다. 특수 주문품이라는 저 쇠고랑은 분명 킹콩이라도 묶어놓을 수 있을 만했다. 킹콩이 어느정도의 힘을 가졌을지는 현실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코끼리 정도는 능히 묶어놓지 싶었다.

 

그러니 틀림없이 안전할 텐데도, 역시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일레이는 여전히 나른하고 기운이 없는 듯 몇 번이나 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절렁, 손목을 흔들자 들려온금속 소리에 눈썹을 치켜올린다. 정태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의외로, 소름끼치는 시선을 내쏠 거라고 생각했던 일레이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정태의를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깨어 있었나?"

 

"아니, 깜빡 정신을 놓쳤다가 지금 다시 깼어. ……대체 뭘 먹이려는 건가 했더니, 이거였나? 음ㅡ…, 이완제인가. 수면제나 마취제는 아닌 것 같고. ……청산가리를 먹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초조한 얼굴을 했어. 마시는 사람 불안하게."

 

몇 번 손목을 흔들어보다가 포기했는지 얌전히 손을 내려놓은 일레이는 조금도 화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격앙되거나 흥분한 빛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난 영화라도 보는 듯 피식피식 입가에 웃음이 돈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대단히 입맛이 쓴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 알고 있었어?"

 

". 술에 약 탄 거? 무슨 약인지까지는 몰랐지. 이놈이뭔가 탔구나 하는 건 대충 알았지만."

 

"알면서 왜 마셨어."

 

세상 오만가지 약물에 모조리 다 내성이라도 갖추었을리도 없고,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소매를 둘둘 걷어붙였다. 일레이는 셔츠 윗단추를 두어 개 풀며 소매까지 걷어붙이는 정태의를 보곤다시 픽 웃었다.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뭘 하려고 이러나 궁금했거든. 이렇게 어리석고 귀여운 짓을 할 줄은 몰랐지만. ……태이. 말해두는데, 나를 어떻게 한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걸. 여전히 내 형님은 무기를 찍어낼 거고,여전히 기구는 무기 유통망이 될 거고, 여전히 세상에무기는 퍼져갈 거고, 여전히 네 형님은 무기를 개발해내겠지."

 

"……. 일레이 리그로우."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그의 쇄골 바로 아래에 손을 짚고서 꾸욱 누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배를깔고 앉는다. 그대로 그의 목을 졸라버리기라도 할 듯.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거창하게 세계 평화를 읆는다한들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단 말씀이야. 내 형이 무기를 개발해서 어디다 팔아먹건, 네 형이 무기를 어떻게유통시키고 그 사이에 뭐가 끼어 있건, 생각해 보면 내알 바가 아니거든. 내가 뭐 적극적인 반전주의자도 아니고."

 

"아하……. 그래서?"

 

정태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자기 아래에 방석처럼 깔려있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손목이 묶인 채 미친 듯 날뛰어도 결코 그 형상이 곱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나 태연하게 피식거리는 모습도 결코 달갑지 않았다. 점점 심사가 뒤틀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야, 내가 네 목을 조르거나 가슴팍에 칼이라도 꽂아넣는다면 네가 그걸 피할 방도가 있겠어?"

 

턱턱,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그러자일레이는 짐짓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좀 어렵겠는걸. 아직도 졸린데다 몸에 힘이 제대로 안들어가니까. 게다가 이 수갑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너무 태평한 것 아냐, ?"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다시 일레이의 목덜미를 쥐었다. 일레이는 문득 웃었다. 고개를 조금 드는가 싶더니 비스듬히 기울여, 정태의의 팔목을 낼름 핥았다. 정태의는 움칫, 손을 움츠렸다. 꼭 맹수가 먹잇감의 맛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일레이는 나직이 웃더니 다시 베개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글쎄, 내가 생각해도 좀 태평스럽긴 하군. 왜 그랬을까. 그 맥주를 마시면서도 생각했거든. 내가 왜 얌전히 받아마셔주고 있는 거지. ,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하기도했지만."

 

일레이는 잠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무표정하게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는, 어느 순간 그대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서늘한 까만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섬뜩해졌다. 등줄기가 서늘하게 식는다.

 

정태의를 바라보면서도 어째서일까, 라고 중얼거리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일레이는 무슨 결론을 냈는지, 갑자기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불쾌한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목을 흔들었다.

 

"됐어. 맹랑한 장난질에 오래 응해주고 있을 필요는 없지. 이 수갑, 그만 풀어라."

 

얼핏 불쾌감이 서린 싸늘한 목소리에 정태의는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 얌전히 풀어주고 생명의 안전을 도모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다.

 

"……. 싫은데."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정태의는 그 섬뜩함만큼이나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목숨을 반쯤 내놓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탓인지, 일레이의 눈빛이 서늘해지는 그 모습에 심장이 욱신했다. 정태의는 웃었다.

 

표정 없이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그러나 온기는 없는 웃음이다.

 

"이건 또 웬 배짱이실까……."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손 좀 묶인 정도로 화낼 것 없잖아. 나는 말야, 이래봬도 오늘 엄청나게 화끈하게 해줄 생각이거든."

 

정태의는 조용하게 속삭이면서도 내심 씁쓸하게 혀를찼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참 어울리지 않는 대사다. 이남자의 흉내를 내어 조금 더 위협스럽고 은근하게 말해볼 생각이었는데,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그도 잘 되지 않았다.

 

"하하아. 화끈하게. 그것 기대되는군."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그가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어쩌면 '이 손만 풀리면 너는 죽었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 즈음에서 이미 정태의는 이 섬을 떠나고 없을 거다.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나만 실컷 당하고 뜨면 억울하잖아. 너도 분통 터지는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겠어? 그래도 나는 마음이 하늘처럼 넓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우니, 네놈이 나한테 한 짓을 고스란히 되갚아주지는 않고 아주 약소한 정도로만돌려줄 테니까, 고맙게 생각하란 말이다.

 

정태의는 원한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짚을 수도 없었지만, 역시 가장 속이 뒤집히는 기억을 꼽으라면 하나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아프고 분해서 기절했던 그날 밤. 정말로 다리 사이에서부터 몸이 둘러 갈라져서 죽는 줄 알았든 그때.

 

그 기억을 되살리니 새삼 원한도 함께 살아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 흉물스런 살덩이를 콱 뽑아버려도 시원치않을 것 같다.

 

"일레이. 네놈, 억지로 박히는 기분이 어떤건지 모르지."

 

정태의는 빙긋 웃으며 그의 배 위에서 슬슬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사타구니 위에서 멈추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느껴지는 양감은 평범한 상태에서도 금세 위화감을 느낄 수 있도록 두툼했다. 그 큼직한 양감이 느껴지자마자 다시 우울하고 분해졌다.

 

일레이는 일순 정태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기울이며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이내 하, 하고 웃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그의 얼굴 위로 곧 어이없다는 웃음기가 스쳤다. 그 웃음기는 곧 재미있다는 빛으로 바뀌었다.

 

"맞아, 몰라. 그래서, 네가 알려주려고?"

 

하하, 나직이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우습지도 않은농담을 대하는 투다.

 

그리고 정태의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에는이라는 방식을 애초에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강간이라는 형식 또한 거북했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 남자는절대로 안고 싶은 타입이 아니었다. 저 흉흉한 정신 세계를 알면서도 저 남자를 앞두고 물건을 세우는 인간이 있다면 꼭 한 번 구경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웃음에 과거의 아픔이 겹쳐져 울컥한 때에, 문득 일레이는자못 진지한 어조로 걱정스러운 척 말했다.

 

"정태이. 그런데 말이지, 너……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라도 받았나? 겁대가리는 어디다 두고 와서, 오늘 왜 이래. 좀더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한 가닥 남은 선량한 마음이 바닥났다.

 

정태의는 일레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칠게감정을 실어 한 번 흔들어줬다. 숨이 막혔는지 그가 두어 번 기침을 했다.

 

"말했지. 화끈하게 해주겠다고. 나는 네놈처럼 우격다짐으로 그냥 박아넣지는 않을 거란 말야. 고맙게 생각해야지."

 

멱살을 쥔 채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을 짓씹었다.그리고 곧바로 두 손을 젖혀, 일레이의 셔츠를 뜯어내었다. 그래, 생각을 바꿔 보자. 이 미친놈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밉살스럽긴 했지만, 사실 행위가 싫었던 건 아니다. 어쨌든 그 무시무시한 물건을 넣지만 않으면, 그 전단계까지는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쾌락으로 넋이 나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놈과의성행위라는 데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다.

 

셔츠를 걷어내었다. 젖혀진 옷자락 안쪽에서 몇 번이나겹쳐졌던 하얗고 미끈한 몸이 드러났다. 거침없이 손을내려 그의 벨트마저 풀어내었다. 꿈틀, 약간 움직이려나 싶던 다리는 곧 얌전히 다시 침대 위로 내려갔다. 정태의는 시선만 들어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예상 외로 그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이없다는 빛이 남아 있긴 했지만, 웃음마저 띤다.

 

"뒤쪽을 채워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지. ……뭐 좋아. 어디 솜씨 한 번 볼까. 하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언제라도 수갑을 풀라고.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와주신 바에야 책임지고 천국으로 보내줄 테니."

 

좋을 대로 해 보라는 듯 편하게 누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일레이는 짐짓 허리를 한 번 추어올렸다. 그 음란하고 노골적인 몸짓과 함께, 풀어젖힌 퍼스너 사이로 튀어나온 성기가 우뚝 부풀어올랐다.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물론, 설마 이 남자가 3류 포르노에나 나오는 것처럼 몸을 사리며 안 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외치리라고는 눈꼽만치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도리어 정태의가 질려서 떨어져나가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고스란히 되갚아 강제로 덮치겠다고 하는데도 뻔뻔하게 물건을 세우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젠장. 당황해하면서 싫다고ㅡ이놈의 성격으로 추측해 보아서는 죽여버리겠다고ㅡ외치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데.

 

그러나 정태의의 실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레이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욕망과 동시에, 그 나름대로 분명히 속이 편치 못하다는 분노의 빛을 서슬 퍼렇게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강제적인 성행위라는 점보다는강제적인 상황이라는 점에 분노하는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그 얼굴을 보곤 웃었다. 그래, 좀더 화내야지.그래야 떠나는 걸음걸음 유쾌하게 떠나지. 나도 전별금정도는 제대로 받아가야 하지 않겠어.

 

속옷을 헤집고 나온 남자의 성기가 점점 단단해지며 솟았다. 다시 봐도 질릴 정도로 육중한 그 물건을 보자, 심장이 욱신했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동시에 쾌감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저 남자와 함께 맛보았던 쾌감으로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던 그 강렬한 감각이 선뜩하게 되살아난다.

 

나만 좋았던가. 네놈은 그저 그랬어? ―――그럴 리는 없을 테지. 그래. 그러니 오늘, 제대로 한 번 죽어보라고.

 

정태의는 아플 정도로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한 번 움켜쥐었다. 어떻게 할까, 그 결론이 나왔다. 이놈을 덮쳐버릴까, 아무래도 이놈 상대로는 저 몸 속에 틀어박을 수있을 만큼 물건이 단단하게 설 것 같진 않지만 여차하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박아넣어서 그 아픔 고스란히 맛보도록 해버릴까, 잠시 고민했던 그런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그랬다간 그 흉측한 몰골을 보면서 자신도 괴로워해야 할 텐데, 스스로를 괴롭히면서까지 남을 괴롭히는 건 별로 좋은 수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남자가 어떨 때에 괴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이. ……기대해. 아주―――끝내주게 해줄 테니까."

 

정태의는 두 손으로 일레이의 얼굴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인 입으로, 그의 뺨을 베어물었다.그 새하얀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세게.

 

"정태이. 어쩔 작정이야."

 

이미 몸은 분명하게 달아올랐으면서도 일레이는 냉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열기를 띠었으나 침착하게 정태의의 표정을 살피는 서늘한 시선이 닿아온다.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막 나가는 게 이상하다 이거지.

 

". 일 다 치른 뒤 정말로 네 목이라도 졸라 죽일 것 같나?"

 

"네 배 위에서 죽는다면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ㅡ말이지."

 

잇새로 나직이 뱉어내는 말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지만그 한마디 한 마디에 어린 불쾌감과 희미한 분노를 민감하게 짚어낸 정태의는 유쾌하게 그의 목덜미에서부터 가슴, 배까지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톡톡 풀어내린다. 뒤이어 바지 버클과 퍼스너까지 풀어, 속옷째로 천천히 끌어내렸다.

 

일레이의 눈이 반짝였다. 셔츠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몸은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도 없었는데 마치 샅샅이 핥아내리는 듯, 그의 시선이 정태의의 몸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동시에 정태의가 올라앉은 아래쪽으로두툼한 살덩이가 꿈틀거리며 맥박쳤다.

 

"젠장……. 아무데나 널린 평범한 몸을 보고 그렇게 뻣뻣하게 세우면 아무리 그래도 이쪽은 민망하잖아."

 

엉덩이 사이에서 뜨겁게 움트는 살덩이 위로 천천히 허벅지를 문지르면서도 정태의는 혀를 찼다. 몸을 바싹 낮춰 일레이의 벗은 몸 위에 엎드린다. 드러난 가슴과 배가 맞닿았다. 사타구니에는 위로 치솟은 남근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타는 듯이 뜨거운 그 체온이 아랫배를찌르자 갑자기 이 행위가 더없이 노골적으로 실감되었다. 정태의는 옷깃을 풀어헤쳐 거의 벗다시피 한 채, 그다지 다를 것 없이 나체를 드러낸 일레이와 몸을 바싹맞대고 천천히 그 몸을 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문득 그 모양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뜨끈하게달아올랐다. 정태의의 사타구니도 뜨거워졌다. 그리고스 사실을 일레이가 모를 리 없었다.

 

정태의는 희미하게 솟구치기 시작한 샅을 그의 성기에대고 문지르며 허리를 움칫움칫 움직였다. 예전에 일레이가 했던 대로, 정태의는 일레이의 목덜미에서 쇄골을스쳐 가슴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나 이내 아차싶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가슴을 맞대고 문지르는 사이에 정작 일레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정태의는가슴께가 뾰족하게 솟았다.

 

'몸이 더 예민해지면 말이야, 젖꼭지만 만져줘도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게 되거든.'

 

얼마 전 일레이가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 정도까지야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몸을 맞대고 부대끼는 사이에 가슴의 돌기가 빨갛게 솟아 있었다. 정태의의 얼굴 위로 난감한 빛이 잠시 스쳤다. 일레이의 몸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정태의는 곤란한 듯혀를 차며 손끝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쓸었다. 기분 탓인지, 손가락이 스치자 더욱 꼿꼿이 서는 것 같았다. 움칫, 몸을 움츠리면서도 정태의는 손끝으로 그 낯선 감각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정태의는 멈칫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레이의 시선을 느낀 탓이다. 그 느낌을 색깔로 말하자면 새까만――――너무나도 시뻘게서 오히려 새까맣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불그스름하게 열기를 띠고 달아오른 정태의의 얼굴에서부터 목덜미, 손끝이 닿아 있는 가슴에서 배, 그리고단단하게 핏기가 오른 사타구니까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일레이의 시선이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리고 그시선은 내려간 길을 더듬어 다시 얼굴로 올라온다.

 

할짝, 입술이 바싹 말랐는지 일레이가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나는 듯 목울대가 울렸다.

 

"태이. ……이것 풀어."

 

그르렁거리며 쉰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귓가를 스쳤다.절그렁, 금속 소리가 뒤를 이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거대한 성기가 뜨겁게 미끈거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유쾌한 기분이 왈칵 솟구쳤다. 동시에 가슴속이 서늘해지도록 섬뜩해지기도 했다.

 

"절대로 그렇겐 못 하지."

 

정태의는 몸을 숙여 다시 일레이 위에 엎드리곤, 빙글거리며 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렇게 웃으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본능이 위험을 느꼈다. 인간의 탈이 서서히 벗겨져나가고 그 아래에서 본연의 그 본성이 드러나는 맹수를 눈앞에 둔 위험이다.

 

그래, 절대로 못 풀어준다. 단순히 이 남자를 갖고 논 탓만은 아니다. 지금 이 남자가 자유로워진다면 바로 그 순간, 정태의는 틀림없이 만신창이가 될 거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부짖고, 숨이 넘어가도록 가쁜 호흡으로 허덕이고, 심장이 뛸 힘조차 다하도록 바르작거려도, 이 남자는 용서 없이 자신을 먹어치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자신이 미친 것 같다. 이토록 가학적인 통쾌감이라니!

 

정태의는 웃었다.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아래로 뻗어, 허벅지를 찌르고 있는 그의 성기를 쥐었다. 끄트머리가희미하게 젖어드는 그 살덩이는 금세라도 폭발하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밑둥에서 젖어드는 끝까지, 검지 손톱으로 가만히 그어올렸다. 살덩이가 꺼덕이며 더욱 젖어갔다.

 

"태이……! 지금, 딱 한 번 기회를 준다. 얌전히 이 수갑풀도록 해. 그러면 철모르는 얼간이의 맹랑한 장난질이라고 여기고 봐주겠어. 그러니 이것 풀어. 그렇지 않으면, 무사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일레이의 목소리가 더더욱 낮아졌다. 저 밑바닥에서 쇠가 긁히는 것처럼 낮고 선뜩한 쇳소리가 섞였다. 심장이 더욱 높이 뛴다. 불안감과 함께 드높아지는 흥분감이다. 정태의는 딱 한 번 그의 성기를 훑어올렸다. 절정을 맞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러나 아득한 쾌감을 딱한 걸음 앞두어 안타까울 만큼 진하게.

 

"꼴좋다, 일레이 리그로우. 사람과 가볍게 몸을 섞고, 때로는 완력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감정 따위는 코웃음으로 날려버리는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 네 몸의욕구는 채우지도 못한 채 남의 욕구에 이용만 당하는 이런 상황을 네놈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겠지. ―――울화가 치밀어 죽겠지? 그래도 이 자식아, 넌 아프진 않잖아. 난 그때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

 

말을 하다 보니 기억이 떠올라 또 울컥했다. 정태의는  '이놈 자식, 너도 좀 아파 봐라'라면서 일레이의 귓불을덥썩 깨물었다. 상당히 아플 정도로 깨물었는데도 일레이는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시퍼런 열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때, 벽시계가 짤막하게 울렸다. 시계를 흘끔 쳐다본 정태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시간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어느 결에 흥분해 있는 자신의 샅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레이. 네놈이랑 자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어.그런데……좀 지치더라. 너랑 나랑은 기본 체력도 다른데다가 선호하는 섹스 스타일도 다르거든. 그러니 이제땅따먹기도 그만하자고. 각자 땅따먹기하면서 놀기 좋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따로 놀잔 말야. ……마지막으로 사소하게 내 분 좀 풀고. 너도 내가 좀 치사한 거, 알고 있었지?"

 

정태의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놓여 있던 넥타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부풀어 솟아 있는 살덩이의 뿌리 부분을 그대로 묶어버렸다. ……다시 봐도 소름이 끼친다. 이 망할 녀석, 이렇게 무식한 걸 틀어박다니 정말로 날 죽일작정이었구나. 나도 참 용케 안 죽었다. 이건 거의 주먹 수준―――아니, 생각 안 해야지.

 

정태의는 파르랗게 질린 얼굴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문득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 같이 으르렁거리는 분노로 가득찬 그 얼굴과 조금 다르다.

 

어딘가 못마땅하면서도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당혹스런, 초조한, 울컥한, 그러나 혼란스러우면서도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그런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에서 한 마디가 불쑥 흘러나왔다. 허를 찔린 듯멍한 목소리에,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그래, 마지막. 그럼 네놈 성질머리를 번연히 알면서 내가 내일도 여기에 있을까 봐서? 난 한 시간 뒤면 이미 이 섬을 떠나있을 거란 말이야. 신분도 말끔하게 바꾸고, 완전히 잠적해버릴 거거든. ――이걸 다시 잡아다가 찢어놓을 수도 없어질 테니, 화 많이 나시겠어,교관님."

 

"뭐……."

 

짤막하게 입을 열고서도 말이 막힌 듯 정태의를 쳐다만보는 일레이의 새카만 눈을 마주보며, 정태의는 그의 두 뺨을 감싸쥐고 입술을 겹쳤다. 뜨겁고 두터운 혀에 혀를 얽으며 흥분한 자신의 사타구니를 그의 묶인 살덩이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절정은 금세 찾아왔다.

 

쾌감의 폭발이 가로막힌 일레이의 성기가 조금씩 스며나온 점액에 흥건하게 젖어든 위로, 정태의는 짧게 몇번이나 소리죽여 밭은 신음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부옇고 끈끈한 액체가 남자의 사타구니 위로 점점이 덮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탈력감이 찾아들 때까지 일레이와 입술을 겹친 채 짧은 숨결을 뱉어내던 정태의는 아랫도리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겨우 허덕이며 입술을 뗐다. 그리고 아직 나른한 열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일레이에게 어렴풋한 시선을 주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일레이가 무심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심이 아니다. 이건 틀림없이, 더없이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끝간 데 없이 솟구치다 그 정점에서 얼어붙은 얼굴이다.

 

……이거야 정말로, 잡히면 그 길로 죽겠군.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앞으로는 오지 산골만 골라다녀야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처음부터 아예 나갈 작정을 하고 벌인 일이란 거지."

 

일레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이 그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정태의는 손을 뻗어 엄지로 그의 젖은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도 훔친다.

 

"나도 내 목숨이 소중한 줄은 알거든."

 

정태의는 천천히 나른한 몸을 을이켰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이 위험한 곳에서 한 시바삐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건을 집어들어 몸을 적당히 닦아낸 정태의는 다시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제대로 벗지도 않고 행위를 치른 탓에 여기저기 구깃한 주름이 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눈에 뛸 정도는 아니었다. 셔츠의 단추를 체우고, 바지의 퍼스너를 올리고, 벨트를 차고, 웃옷을 걸쳤다.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면서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목숨이 소중한 줄 알면 애초에 이런 짓은 벌이지 말았어야 했어, 정태이."

 

마지막으로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서, 정태의는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래. 나도 후환이 두렵긴 한데, 그런 만큼 아주 잘 잠적하려고.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도망치는 데에는 좀 일가견이 있거든. ――――아, 그래, 잊을 뻔했다."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빙긋 웃더니,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인정사정 없이 냅다 후려갈겼다. 처얼썩, 살갗이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엄청난 소리가 손바닥과 뺨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내가 그날, 진짜 이가 갈려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러고도 그 다음날 태연하게 얼굴 내미는 네놈이랑 같이 있는 게 얼마나 끔찍하게 싫었는지 알아? 다시는 보지말자, 새끼야."

 

정태의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을 하면서 구두를 신었다. 발에 딱 맞는 신발코로 두어 번 바닥을 두드렸다. 이제 떠날 준비는 되었다.

 

일레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욕설이라도 터져나올까했지만 의외롭게도 불안해질 정도로 조용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정태의가 뚜걱하고 발소리를 내며 걸음을돌렸을 때였다.

 

"그래서, 이대로 떠나시겠다……?"

 

음울한 목소리다. 눈앞에 먹잇감을 두고도 손을 내밀지못하는, 분에 차오른.

 

문쪽으로 향하려던 정태의는 잊었던 게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서 일레이에게 다가갔다.

 

저 서늘하고 얼음 같은 표정 아래 다급한 초조감이 스며 있었다. 이대로 놓치면 이놈을 어떻게 찾아내어 찢어발길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라도 솟구친 걸까.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조그만 병을 꺼내어, 티슈를 뽑아내어 흠뻑 적셨다. 클로로포름의 알싸한 냄새가 주위에 흩어졌다.

 

"만에 하나라도 곤란한 사태가 벌어져선 안 되지. 한숨푹 주무시라구요, 교관님."

 

설마 아무리 인간답지 않다고 해도, 클로로포름마저 안통하는 건 아닐 테지. 혹시라도 안 통하면 입에 재갈을물려놓고 얼른 튀어야지. 솔직히, 오늘은 배짱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지나칠 정도로. 만일 한 치라도 어긋났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핏덩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을거다. ……앞으로 정말 성심성의껏 잘 도망다녀야겠다.

 

정태의는 젖은 티슈로 일레이의 코와 입을 덮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시선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 새카만 눈을 조금 그립기까지 한 심경으로 마주보았다.

 

문득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때 한 가시 생각이 떠올랐다. 정태의는 여태 일레이라는 인간이 꺼려지고 화도 났을지언정, 그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지금 갑자기 생각났는데."

 

정태의는 조용히 말했다. 이미 정신을 잃었어야 될 시점인데 일레이는 아직도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눈의 초점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간힘을 쓰며 그는 눈을 부릅뜬다. 어쩌면 필사적일 정도로.

 

"난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너를 좋아했었는지도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말야, 이 정도는 이해해 줘.원래 마음에 들었던 사람한테 상처를 입으면 더 화가 나고 마음 아픈 법이잖아. ……그럼 안녕, 일레이. 그 동안ㅡ화도 많이 났지만ㅡ즐거웠다."

 

말을 하는 동안 어쩐지 안타까워졌다. 말 끝에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정태의가 조용히 말을 마칠 무렵, 아득하게 흐려져가는 시선으로도 무시무시하게 정태의를 노려보던 일레이는 클로로포름의 냄새 속에서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

 

 

 

배짱이 좋아도 너무 좋았지…….

 

이미 늦어버린 일이지만 정태의는 후회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인데, 그러다가 어디서 정말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막말로 진짜 죽어라고 운이 없어서, 길거리를 가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그 모퉁이 바로 앞에서 그놈이 오고 있다거나 하면.

 

거리가 어지간히 떨어져 있지 않고서야, 그놈 눈에 일단 띄면 그 손에서 도망쳐낼 자신은 없었다. 목표물을 보고도 놓칠 만큼 허술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알량한 희망을 붙잡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인간의 도리로 정태의는 일레이의 자존심은 지켜주기로 노력했다. 클로로포름으로 혼절해버린 일레이를 두고 그대로 떠나려다가 그 모습을 보니 좀 뭣해서,손목만 묶어둔 채 나머지 차림새는 제대로 정리해줬다.

 

(사실은 그대로 두고 떠났다간 누군지 몰라도 그를 발견할 사람이 흉측한 꼴을 보게 될 게 뻔해서 그 발견자를 위해 정리해줬다)

 

물론 그 괴물 같은 놈이 손목이나마 누군가에게 구속되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치욕적이라면 치욕적일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그래도 양반 아닌가.

 

정태의가 일레이의 매무새를 잘 정돈해주고 간 정성을참작해서 그대로 용서해주거나 아니면 죽일 걸 반신불수로 만드는 정도로 조정해줬으면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 성격에.

 

"역시 안 걸리는 수밖에. 그저 무조건 얼굴 안 마주치게피하는 수밖에 없어……."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때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시선이 느껴져, 정태의는 언뜻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안톤이 검지를 치켜세우고 흔들고 있었다. 저기요,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삿대질이라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치거든요…….

 

그러나 외국인에게 그런 말을 해서 문화의 차이에 대해도론할 생각도 없고, 사실 삿대질을 당한다고 해서 그 정도로 불쾌해질 정태의도 아니었다. 저 정도로 불쾌해질 성격 같았으면 이미 오래전에 홧병으로 죽었다.

 

"어쨌거나 얼굴을 안 마주치면 되는 거지! 방에 있는 전화는 선을 뽑아놓는 거야!"

 

안톤은 정태의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그를 쳐다보았다. 저 남자도 혹시 쫓기는 몸인가.

 

이 집에는 손님이 많았다. 많았다고 할까, 끊이지 않았다. 정태의가 여기에 머무른 지 닷새, 그 동안 새로운 얼굴을 다섯 번 봤다. 즉 닷새 내도록 손님이 한둘씩 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생각했지만 이 집의 집주인은 사람을 대단히 좋아했다. 정태의도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건 즐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집에까지 손님을 마구 불러들이진 않는데, 이 남자는 뭐랄까, 그런 면에서는 좀 오픈되어 있었다.

 

저렇게 위기감이 없어도 괜찮은가, 저러다가 수상한 사람이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집주인 대신 철벽처럼 날카로운 유모가 있었다. 집주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집주인을 비롯해 그들 남매들을 키웠다는 늙은 노부인이었다.

 

그 노부인이 지금 부엌에서 통으로 쪄낸 닭요리를 가져오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집주인에게 해꼬지를 할 만한 사람이 있나 없나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정태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양인을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치였다. 뭐 그런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해서 누구를 피하려고."

 

정태의는 아직 덜 마신 스프를 한 스푼 뜨며 물었다. 안톤은 장난기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야 물론 집주인이지.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할 여지를 안주는 거야. 어쨌든 만나는 걸 피하고 전화도 피하면, 연락할 도리가 없지 않겠나."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는 그에게 정태의도 예의상 웃어주고, 스프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끔 저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놈이 있다.

 

", 어제는 국립 도서관에 갔었다면서. 뭐 괜찮은 거라도 봤나?"

 

스프를 다 비우고 스푼을 내려놓는데,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집주인이 말을 걸었다. 정태의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 하고 잠깐 생각을 더듬었다.

 

"뭔가 이것저것 뒤적이긴 했는데 기억은 잘 안 나는 걸보니, 별 대단한 건 없었나 봐요."

 

정태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집주인은 담담히 웃었다.

 

"특별히 찾는 게 있다면 구해다 줄 테니 개의치 말고 말하도록 해, ."

 

", 감사합니다."

 

정태의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 건 없다니까. 수십 년 써왔던 이름을 갈아치웠는데도 며칠만에 익숙해졌다. 아직 조금낯설긴 하지만, 적어도 처음처럼 남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멍하니 대답도 안 하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다.

 

정태의는 닭요리를 조금 썰어내며 자신의 접시로 옮기면서 물끄러미 집주인을 바라보았다. 40대를 넘겼지만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그는 웃음을 그치지 않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태의는 저 남자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을 지나치게 된 건 우연히었다. 유럽에 오자마자 곧 리츠로 차를 빌려서 다니기 시작했다. UNHRDO의 특수 부원 취급은 안 해도 된다고 숙부에게 말했는데도 숙부는 반강제적으로 통장을 쥐어주었다. 사용처가 뻔히 나오니까 카드는 쓰지 않을 거라고 짚었던 듯하다. 돈을 빼서 바하마 쪽으로몇 번 돌리면서 세탁하면 출처를 지울 수 있으니, 네가흔적을 정 남기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서 사용하라고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어차피 UNHRDO에 특수경비로 올렸으니 걱정 말로 마음껏 쓰고, 모자라면 더연락하라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는 참 새삼스럽지만 삼촌, 기구에 손해 끼칠 일을 참 고루고루 하시는군요, 정태의가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더니 숙부는 웃었다.

 

'하지만 내가 기구에 이득을 가져다 준 게, 손해 끼친 것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많은걸.

 

그렇게 말하면서 숙부는 걱정 말고 쓰라고 큰소리를 쳤다. 기왕 주는 거 구태여 거절할 거 없겠지, 하고 정태의는 숙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숙부의 말에 따르면 걸인에게 적선하는 돈도 경비로 청구할 수 있다고 했으니, 어차피 다닐 거 편하게 쓰고 다니자고 생각했다. 각 대륙별로 돌아다니면서 가는 데마다 차를 새로 뽑아서다니고 등등.

 

그러나 역시 자라면서 형성된 성격이 있어서, 그렇게 돈을 쓰려고 해도 몸이 거부했다. 그래서 그나마의 사치를 부려 차를 빌려서 다녔다. 좀 헤매긴 했지만 그럭저럭 다닐 만은 했다. 그러다가 원래는 베를린 방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그 마을에 도착했다. 제대로 된 지도를 사서 좀 익히고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들어 그곳에서 하루 머무르면서 지도를 들여다봤는데,그러는 사이에 그 마을이 좋아졌다. 정태의가 좋아하는, 별다른 구경거리는 없지만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한 이레 정도 머물던 참이었다.

 

슬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헌 책방에서 저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사실은 그곳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그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예전에 홍콩에 나갔을 때 본 적이 있었다. 만나거나 소개를 받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본 것뿐이었다. 아마도알타와 함께 무기 브로커를 만나러 갔을 때였던 듯싶다. 그때, 옆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였다. 특이할 것도 없고 눈에 띄게 생기지도 않은 그 남자를 기억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인상에 남는 얼굴이었다. 평범하지만 그랬다. 한 번 눈여겨 보면 쉽게 잊혀지지는 않는 인상이다. 평범하게 생긴 가운데서도 시선이 강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사람을 바라볼 때의 시선이 강했다. 마음 약한 사람은 위압감을 느낄 수도있을 만한 눈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그는 글과 그림이 엉망으로 휘갈겨진 설계도와 같은 걸 보고 있었다. 사실은 이게 더 잊혀지지 않는 이유였는데, 정태의는 그가 갖고 있던 것과 비슷한 글과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

 

이제는 그가 그런 걸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지만.

 

정태의는 입맛이 조금 씁쓸해졌다. 음식 탓은 결코 아닌데도, 물잔을 들어 입을 한 번 헹군다. 남자는 그 강한 시선과는 달리, 좀 뜻밖의 성격이었다. 낯선 사람에게도 벙긋 웃으며 다가가도록 무턱대고 사람을 좋아하는 면도 좀 그랬지만, 그 헌 책방에서 이 남자가 보였던행동을 생각하면 정태의는 지금도 웃음이 났다.

 

그가 탐내는 책을 주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붙잡고 늘어져 울며불며 떼를 쓰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소위마니아라 불리는 인종들이 얼마나 특이하고 재미있는지, 때로는 골치아픈지,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멀리 갈것도 없이 당장 UNHRDO에도 그런 놈이 하나 있지 않았던가. 총 하나 때문에 사람을 쥐 잡듯 하던 놈이.

 

마침 희귀하기도 하지만 예전에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책을 발견한 정태의가, 숙부도 이걸 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으니 사서 다 본 다음에 숙부에게 부쳐주자고 생각하며 그걸 사려고 했던 때였다. 남자가 안색을 바꾸며 달려든 것은. 제목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그 범상찮은 기세에 당황한 정태의는 그 책을양보하기로 했다. 조금 아쉽긴했지만 저렇게나 탐내는데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또 누가 알겠는가. 마니아라는 족속을 생각하면ㅡ모러 때문에 차마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ㅡ, 저 남자가 이 책을 노려 자신을 몰래 뒤쫓아 다니다가 어느 인적드문 골목에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책을 빼앗아 달아날지.

 

정태의가 그런 생각을 한 줄은 모르고, 저 남자는 정태의를 대단히 선량하고 좋은 청년으로 본 모양이었다. 아주 감격한 눈으로 쳐다보며 연신 고맙다고 하는 그 남자를 보며, 정태의는 숙부도 고서를 좋아하지만 이 남자는 한 술 더 뜨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숙부가 생각나버렸다. 숙부도 어디 가서 원하던 책을 발견하며 이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그래서였다. 남자가 돈을 털렸다고 우울하게 말했을 때 그에게 선선히 돈을 빌려주고, 베를린까지 태워다 줄 마음이 든 것은.

 

빌려줬다고는 하지만 그 50유로를 굳이 도로 받을 생각은 없었다. 주면 받기야 하겠지만 꼭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숙부가 그러지 않았던가. 걸인에게 적선하는 돈도 청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좋은 마음으로 남자를 베를린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이 사례를 꼭 하고 싶다며 베를린에서는 자기 집에서 묵으라는 남자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차를 출발시켜 베를린까지의 여정에 오른 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봐도 정태의보다 여남은 살은 연상으로 보여, 정중한 말투는 관두고 편하게 말하라고 한 뒤였다. 남자는 격식에 딱딱 맞추었던 말투를 조금 허물어뜨렸다. 그리고 웃으면서, 마땅히 물어야 할 물음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못 들었군. 자네 이름이…?"

 

'아…ㅡ김영수입니다."

 

아직 스스로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말하며 정태의는 리어뷰미러 안으로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그럴 이유는 없는데도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든 탓이다.

 

일부러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과 이름이라는 그 이름을골라 여권 및 여타 서류를 만들었는데, 좀더 발음하기 편한 이름으로 하는 게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역시나, 남자는 낯선 발음이 쉽지 않은지 고개를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킴용수…ㅡ?'

 

'하하, 발음하기 어려우실 테니 그냥 킴이라고 불러주세요.'

 

정태의는 웃으며 말했다. , 하고 읆조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한국계인가?'

 

'한국계……라기보단 한국인이죠. 어떻게 잘 아시네요.보통 유럽인들은 이름을 듣고서도 동양인의 국적 구분은 잘 못 하던데.'

 

'내 친구 중에서도 한국인이 여럿 있거든. 특히 나랑 아주 친한 동기 녀석도 한국인이야. 그녀석도 고서를 좋아해서 나랑 취미도 잘 맞거든. 그래서 좀더 자주 연락을 하곤 하지.'

 

남자는 자랑스레 말했다. 정태의는 운전을 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은 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운전하기 편했다. 한눈 좀 팔고 정신 좀 팔면서 운전해도 한국의 대도시에서 운전하던 때보다 훨씬 더 사고 날 확률이 적다는 게 마음 편했다. 고서를 좋아하는 한국인 친구라. 마니아의 세계는 좁고 깊은 법이니, 어쩌면 삼촌도 그 사람을 알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맞장구쳤다.

 

'그렇군요. 저는 고서 쪽은 그냥 몇 가지 주워듣기만 했을 뿐 잘 모르는데, 제 숙부님이 그런 취미가 있으시거든요. 생각 있으시면 나중에 소개시켜 드릴게요. 서로 없는 책을 바꿔보거나 해도 좋을 거고…….'

 

그러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귀한 책은 빌려주거나 하는 게 아니지. 팔거나아니면 혹여 서로, 귀하긴 한데 자신이 좋아하는 류의책이 아닌 걸 아예 바꿔서 본다든가 하면 몰라도. 특히나 고서는 조심해서 다뤄야 하거든.'

 

', 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마니아는 마니아였다. 어딘지 모러랑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숙부는 이남자만큼 도거 지나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살짝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곧 빙그레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나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과 알게 된다는 건 즐거운 일이지. 언제든 자네 숙부라는 분을 뵐 수 있다면 좋겠군.'

 

그러게요, 라고 대답하며 정태의는 말을 이었다.

 

'숙부님도 고서를 좋아하는 분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계신 것 같으니, 여럿이 모여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해도 즐거우시겠군요.'

 

그러자 남자는 아아, 맞았어, 라며 즐거이 입을 연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지만 나도 예전에는 고서를 다루는 일을 했었거든. 그 일을 하면서 이쪽 사람들을 많이알게 됐지.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데, 일단 이야기가 쉽게쉽게 통하니까 좋아.'

 

'취미가 맞으면 그런 게 좋죠. 그런데 고서를 다루셨다면 헌 책방 같은 거라고 하셨었나요?'

 

'아니, 그건 나이 들어서 하려고 아껴두고 있고, 좀더 젊을 때에 사업을 했었어. 구하기 힘든 고서를 복간하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수요가 별로 없으니 회사를 굴리기가 힘들더군.'

 

'하아……, 예에…….'

 

정태의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돌덩이가 굴러든 것처럼 가슴이 묵직해졌다. 절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뭘까. 지금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맞아떨어지면 결코 좋지 않을…….

 

'그런데 이제 보니 아직 성함을 못 들었군요. 성함이……?'

 

정태의는 남자가 잠시 말을 맺은 사이에 조용히 물어보았다. 남자는 잠깐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런,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쓰게 웃었다.

 

'제일 기본적인 것도 말하지 않았었군. 미안하네, . 나는 카일이라고 불러주면 돼.'

 

', . 카일……, 좋은 이름이네요.'

 

정태의는 그 이름을 한 번 소리내어 보며 웃었다. 가슴의 돌이 걷혀나갔다. 그래. 나도 괜한 걱정이 늘었어. 설마 그렇게까지 운 없을 리가 있으려고.

 

'퍼스트 네임과 많이들 착각하겠어요. 보통은 카일이라고 하면 퍼스트 네임 쪽으로 많이 쓰니까.'

 

하지만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카일이라는 패밀리 네임을 쓰는 사람이 있긴 하지요, 라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말을 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평연하게 말했다.

 

'. 퍼스트 네임이야. 명함에는 풀네임을 적지만 말로할 때는 늘 퍼스트 네임으로만 부르지. 처음 보는 사람이든 여러 번 본 사람이든. 왜냐면 우리집 패밀리 네임은 내 동생이 독차지하다시피 했거든.'

 

'하아…….'

 

'내 동생은 퍼스트 네임을 불리는 걸 아주 싫어해서 말이지. 자기가 허락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이 실수로라도 자기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면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를 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추태를 보이거든……. 그래서 우리집에서는,그 녀석만 패밀리 네임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퍼스트 네임으로만 부르게 되었지. 하다 못해 공적인 일로 나가는 공식석에서도 카일이라고 부릴 정도야, 지금은.'

 

'…….'

 

어쩐지 머리가 띵해졌다.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지도 않고 차곡차곡 잘도 맞아들어간다.

 

정태의는 차마 더 물어보기가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은 말일수록 더 귀에 잘 들어오는법이었다.

 

'그 덕에 성 앞에 명칭을 붙여서 불러본 적이 없지. 미스터 리그로우라든가.'

 

빌어먹을.

 

정태의는 핸들을 콱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액셀을 밟았는지 차가 부웅, 하고 속도를 올린다.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봐서 황급히 액셀에서 발을 뗐다.

 

'아…ㅡ그러면…ㅡ, 카일 리그로우 씨……?'

 

'그렇지. 그렇게 풀네임으로 불리는 일도 거의 없지만.하하, 편하게 카일이라고 부르도록 해. 모두들 그렇게 부르니까. 게다가 리그로우라고 부르면 우리집에서는 내 동생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다들 헷갈려할걸.'

 

'아하, 그렇군요.'

 

정태의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눈앞에 하얗게 보였다. 길이 거의 직선으로 뚫려 있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땅덩이 좁은 나라의 대도시 한복판 같았으면 지금쯤 틀림없이 사고가 났을 거다. 정태의는 초조한 손으로 계기판을 더듬어 라디오를 켰다. 뭐든 다른 소리라도 들어서 정신을분산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가드레일에 차를 받아서라도 사고가 나고야 말 거다.

 

문득 잊고 있던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빌려준 50유로, 반드시 받아내야겠다. 걸인에게 적선은 무슨 얼어죽을. 날 때부터 다이아몬드를 물고 태어난 사람한테.

 

남자는 갑자기 라디오를 켜더니 입을 다문 정태의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올드팝을 흥얼거리며 나직이 따라불렀다. 정태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은 창틀에 걸쳐 턱을 괸 채 우울에 잠겼다.

 

왜 내 인생은 요즘 태클만 걸릴까. 괜찮은 인간이겠거니 해서 같은 차에 태워 가게 된 사람이 하필이면 상종하기도 싫은ㅡ이랄까 상종해서는 안 되는ㅡ놈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니.

 

혹시라도 모두 다 우연으로, 이 남자의 이름이 카일 리그로우이긴 하지만 동생은 정태의가 알고 있는 그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타 상황들이 미묘하게 맞아들어가는 것도 다 우연일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현실을 돌아보며 다시 우울에 빠졌다. 고서 복간 사업을 하다가 사업 자금을 홀랑 말아먹고 지금은 무기상을 하는 일레이의 형.

 

고서 복간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잘 안 되어 접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카일.

 

패밀리 네임이ㅡ당연히ㅡ리그로우일 일레이의 형.

 

풀네임 카일 리그로우인 이 남자.

 

아무도 감히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 UNHRDO의 미치광이 리그로우.

 

자기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면 난리를 친다는 카일의 동생.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지면, 그게 생판 남이라고 하면 그편이 더 놀랍다. 정태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옆에 카일만 없었더라면 경찰이 달려오든 말든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 위에 엎어졌을 거다.

 

ㅡ자기가 허락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이 실수로라도 자기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면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를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추태를 보이거든.

 

바로 조금 전에 카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렴 그렇겠지. 카일의 동생이 정태의가 알고 있는 그 미친놈이 맞다면, 날리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려 해도 차마 할 수 없어 경찰이나 감정의에게만 몰래 호소해야 할 만큼 부끄러울 핏빛 추태를 보일 거다. 정태의는 옆을 스쳐가는 그림 같은 정경들도 건성으로 넘기면서, 어떻게 하면 이 남자와 조금이라도 빨리 헤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일레이의 성격에 가족들과 그리 살갑게 연락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지금 이 남자에게 전화라도 했는데 그 결에 뭐가 잘못돼서 재수 없게 걸리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베를린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것, 베를린까지 최고제한 속도로 밟아서 얼른 가버려야겠다. 거기에 이 남자를 내려놓은 뒤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야지.

 

정태의는 굳게 마음 먹으며 흘끔 리어뷰미러로 카일을쳐다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라디오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일레이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 구석구석 뜯어보면 부분적으로는 닮은 데가 있을지 몰라도, 별로 닮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긴 나이차도 제법 난다. 이 남자가 숙부와 친구라고 했으니, 동생과 한 바퀴 이상 차이나는 셈이다. 정태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슬쩍 물어보았다.

 

'그런데 가진 것 다 도둑맞으셨다면……댁에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하시면요? 핸드폰이나 뭐 그런 건 그래도남겨두지 않았나요.'

 

'? 아니, 그렇지 않아. 여권 말고는 모두 가져갔더군.그래도 여권이나마 남겨줬으니 고맙다고 해야지.'

 

게다가 그 덕분에 저 마을에 들러 보물 같은 책들을 잔뜩 얻지 않았나, 하고 덧붙이며 카일은 책 생각만 해도입이 절로 벌어지는 듯 벙긋이 웃었다.

 

'……. 연락이 안 되어서 가족분들이 걱정하시겠어요. 동생분이라든가…….'

 

일단 일레이에게 만약에라도 전화가 걸려올 가능성은 사라졌으니 다소는 안도하며 정태의가 말하자 카일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정태의는 남자가 왜 저렇게 폭소하는지 그 이유를 익히알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아무렴. 나라도 저런 말을들으면 웃겠다.

 

걱정하는 일레이. 잠시 상상해봤다.

 

……웃겨죽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배를 붙잡을 것만 같은 정태의의 웃음을가로막아준 것은 이제 겨우 웃음이 잦아드는 카일의 말이었다.

 

'글쎄. 별로 걱정을 할 만한 녀석은 아니지만……. 내 동생이 좀 뭐랄까……,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정이 보통사람들보다 좀 부족하거든.'

 

정태의는 일레이가 참 좋은 형을 뒀다고 생각했다. 저런 성격을 특이하다거나 정이 약간 부족하다고 표현하다니, 눈에 콩꺼풀이 어지간히 씐 가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그런 놈을 가족으로 둔 게 부끄러워서 말을 유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녀석은 집에도 거의 안 와. 아니, 오히려 집에 오는 걸 싫어하는 편이지. 지금 일하려 외국에 나가있는데 가끔 볼 일이 있어 귀국하더라도 집에는 들르지않거든.'

 

정태의는 터져나오려던 웃음이 딱 멈추었다. 귀가 번쩍띄었다.

 

'집에는 오지 않아요? 그래도 자기 집인데…….'

 

'아니, 아니, 음……. 아마 내 동생을 본 적이 없으니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그 녀석은 정말로 그런 의식이 희박하거든. 집에는 집안 일을 돌봐주는 노부인이 계시는데, 그녀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면서 집에 안 온 지 제법오래 되었어. 요전에는 사람을 만난다며 같은 동네까지왔었는데도 집에는 얼굴도 비치지않고 돌아갔지 뭐야.'

 

그래서 리타가 잔소리를 하려고 그녀석에게 전화했지만 그 녀석은 용케 알고 전화도 받지 않았어, 하고 카일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어쩌면 자신의 운이 좀 트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놈이 절대로ㅡ는 아니겠지만 어지간해서는ㅡ오지 않는 곳을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저 말대로라면 어지간한 호텔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말이아닌가. 그래, 생각해 보면 등하불명이라는 말도 있었다. 정태의는 흘끔 카일을 쳐다보았다. 몇 분 전과는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베를린에 오면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한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집만이 자신이 살 길일 것 같았다.

 

"그런데 킴, 너 누구한테 쫓긴다며."

 

갑자기 안톤이 불쑥 묻는 소리에 정태의는 짧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어느 결에 접시를 다 비웠는지 닭요리는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집어먹지는 않았는지 배는 불렀다. 정태의는 엄지로 입술 끝을 닦아 낼름핥으며ㅡ리타는 뒤에서 눈살을 찌푸렸지만ㅡ으음, 하고 중얼거렸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진실과는 약간 다르게 퍼지곤 하는 법이다.

 

"쫓긴다기보단……마주쳐선 안 될 사람이 있는 거지."

 

"그래, 어떤 사람인데. 가만있자, 마주쳐선 안 된다고 한다면 역시 여자관계 아니면 돈관계?"

 

안톤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그러자 정태의의 옆에앉아 있던 알스벨트가 무심하게 말한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아주 안 좋지, 안 좋아……. 예를 들어 남부 이태리 남자에게서 여자를 가로챘다든가 하면어디서 총 맞아 죽을지 모른다고."

 

남부 이태리 쪽이라면 돈으로 원한을 만들어도 골치아파, 라고 맞장구치며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얼굴로 시시덕거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정태의는 어느새 시칠리아 섬에 여행을 갔다가 거기에서 우연히 마피아 보스의 여자인 요염한 집시 여인과 사랑에 빠져,보스의 돈을 가로챈 그 여자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정태의는 리타가 내어온 생선찜에서 살점을 뚝 떼어 입에 넣으며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다 좋은데, 그럼 그 집시 여인이랑 가로챈 돈은 어디 갔냔 말이지……."

 

"이미 한 발 먼저 보스가 보낸 자객의 손에 세상을 뜬 거지."

 

"그래, 그리고 너는 복수심에 불타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가 되는 거야."

 

"……."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안톤과 알스벨트는 웃지도 않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옆에서 카일이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안톤에게 고갯짓을 하며묻는다.

 

"자네, 그러고 보니 전에 말했던 그 건 어떻게 됐나. 카타리나 말이야."

 

"아아? 벌써 끝난 지가 언젠데. 지금쯤은 마크랑 둘이서 행복하게 있을걸. 물고기 뱃속에서."

 

안톤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정태의는 생선찜의 살점을 찍던 포크를 뚝 멈추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것 같다. 안톤이란 저 미국인이 갱단을 거느리고 있다고. 안톤이랑죽이 척척 맞는 알스벨트도 비슷하다고 들었다.

 

무기상과 갱단이라. 아주 끝내주는 조합이다.

 

정태의는 입맛이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배도 불러 포크와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다가 리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다.

 

주인이 워낙 사람을 좋아해 늘 손님이 넘쳐나는 이 집의 오늘의 손님은 정태의와 안톤, 그리고 알스벨트였다. 어제 아침의 식탁에는 정태의와 알스벨트, 그리고 어제 오후에 떠나 지금은 없는 어느 영국인이었다. 그저께는 정태의와 그 영국인, 그리고 역시나 지금은 없는 한 독일인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알스벨트가 떠날거라고 하니 내일은 정태의와 안톤이 남을 예정이었다.물론 오늘 다른 손님이 온다면 그 사람이 더해진다.

 

"오늘 회사에 나갈 거라고, 카일?"

 

알스벨트도 다 먹었는지 포크를 내려놓으며 냅킨으로입을 닦았다. 카일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알스벨트 자네는 언제 출발하려나?"

 

". 1시 비행기이니까 점심 먹기 전에는 나가봐야겠지. 그런데 주말까지 쉴 거라더니, 벌써 회사로 돌아가려고? 이런 일중독자 같으니."

 

"아냐. 일이라면 가능한 한 피하고 싶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일레이가 회사 쪽에 뭔가 연락을 해서닦달을 했나 봐. 연락을 하려고 해도 집에서 전화를 하면 받질 않으니, 회사에 가서 알아봐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옛 지인이 온다고도 하고."

 

정태의는 리타가 마지막으로 내어준 홍차를 마시며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일단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왔다.

 

일레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저 이름이 나오니어쩐지 낯설었다. 정태의는 저 이름으로 일레이를 부르는 사람을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가족에게까지 패밀리 네임으로 부르라고 윽박지르면 그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정태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왜 자신에게는 일레이라고 가르쳐 줬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예전에도 잠깐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 변덕스럽고 머릿속을 파보고 싶은 녀석이 하는 짓을 알 게 뭔가.

 

"오랫만에 옛 지인이 오신다면 오늘 오후에도 집으로 누군가 오시겠군요."

 

정태의는 불길한 이름이 나온 게 못내 내키지 않아 슬쩍 주제를 바꾸었다. 그러자 카일은 응? 하더니 고개를저었다.

 

"아니, 그 친구는 따로 볼일이 있어서 오는 거라서, 아마 오늘 오후에는 회사 쪽으로 전화만 올 거야. 만날 약속은 내일 오전에 했으니, 그 친구만 승낙한다면 내일 여기에서 머무르겠지."

 

그렇군요, 라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나 매일같이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게 이미 이 집에서는 일상이 된 듯했다. 가끔 정원사나 다른 사용인들이 하는말을 들은 바를 조합해 보면, 원래 이 집에서 살던 카일의 부모님이 교외로 옮겨간 뒤부터는 늘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그 전에도 카일의 손님이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가 이 집을 맡은 뒤로는 더 심해졌다고 해야겠다. 보통은 2, 3일 머무르다 가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몇 달이나 머무르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카일은 자기 집을 찾은 손님이 오래 머무른다고 하면크게 기꺼워한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이 정도쯤 되면 손님이 손님이라는 개념이 아니겠다. 그냥 늘상 있는 가족 같은데, 그 가족이 매일같이 얼굴과 성격이 달라진다는 느낌과 비슷한 걸까.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자신에게 그런 가족이없으니 역시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ㅡ성장을 제외하고는ㅡ외모도 성격도 변함 없는 형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형이라……. 그런데 대체 그 사람을 어떻게 찾나.

 

정태의가 사람을 찾는 중이며, 또한 쫓기는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이 저택 안의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일부러 정태의가 말하려 한 적은 없는데, 별다른 비밀도 없이 다 털어놓는 이 집의 분위기상ㅡ손님도 다들 그런 분위기였다ㅡ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그 정도의 정보는 흘러나가게 되었다.

 

카일은 사람을 찾는다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카일에게 형을 찾아달라고 부탁……. 천만의 말씀이다.차라리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남자에게만큼은 절대로 부탁할 수 없었다. 정재의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귀를 곤두세울 게 분명했다. 그러면 일레이에게 말이 들어갈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안 되지, 절대 안 돼.

 

정태의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야……, 제 힘으로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무난히 거절했다.

 

"그런데 말이지, , 너는 왜 카일에게만 예의바르게 굴고 우리한테는 안 그런 거지?"

 

홍차를 소리내어 마셔 다시금 리타에게 눈총을 받고 있던 정태의는, 갑자기 안톤이 못마땅한 듯 불쑥 묻는 말에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야 카일은 얼굴도 마주치고 전화 연락이 닿아도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고마운 주인이니까.그리고 당신들은 나와 마찬가지인 식객이지."

 

그러자 안톤은 반박할 말이 없는걸, 으으음, 하고 신음했고, 카일은 약간 고개를 돌리며 픽 웃었다. 그 얼굴이아주 조금, 일레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정태의는 잠시 동안 말없이 카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돌렸다. 그리고 약간 남은 홍차를 비워버렸다.

 

 

 

 

 

 

 

 

 

 

 

9. 모러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정태의는 뒤척, 몸을 옆으로 굴렸다. 넉넉한 비치 체어가 말랑하게 살갗에 감겼다.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옆을더듬거려 수건을 집어 얼굴 위를 덮었다. 햇빛이 가려져 한결 살 만했다.

 

얼굴을 가리고 나니 볕은 딱 좋을 정도였다. 어깨 아래로 온몸을 비추는 볕은 저온 사우나실에라도 들어온 듯딱 맞게 따끈따끈했다. 나중에 일어나면 살이 많이 그을려서 좀 아플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지금 이토록 기분이 좋으니 일어나기 싫었다.

 

"……."

 

정태의는 눈을 떴다. 커다랗게 하얀 비치타월이 얼굴 위에 덮여 시야를 하얗게 가리고 있었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고 나니 몸은 나른해도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나른함이 기분 좋아 정태의는 잠시 후몸을 반대쪽으로 뒤척여, 반대쪽 몸에 볕을 쪼였다. 흘러내린 수건으로 다시 얼굴 위를 가렸다.

 

정오쯤 되었을까. 한두 시간 잔 것 같았다. 잠들 무렵에는 허리 위로 차양 그늘이 드리워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까지 바로 볕이 비친다.

 

멀찍이서 새 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지저귀는 소리들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높고 낮게 이어졌다. 간간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뜨겁게 달아오른 살갗을 식히고지나갔다. 발치에는 맑고 널찍한 풀장. 가끔 들려오는 새 소리. 따끈한 햇빛. 여유로운 낮잠.

 

언제 이렇게 여유롭고 느긋하게 시간을 즐겨봤을까. 생각해 보면 군대에서 전역한 뒤에도 몇 달 동안 병원에다니고 몸을 추스르느라 마음 편하게만 쉬지는 못 했다. 그러다가 몸이 좀 나아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돌아온다 싶을 때 숙부가 들이닥쳤었다.

 

"나도 참 팍팍한 인생이었어……. 사람이 이렇게 느긋하게 쉴 때도 좀 있어야지."

 

정태의는 나른한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뒤척였다. 남의 집에서ㅡ심지어 집주인은 일이 바빠새벽같이 일하러 나가 집을 비운 상태인데ㅡ이렇게 한가롭게 뒤척이고 있는 게 좀 뻔뻔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카일은 전혀 정태의에게 눈치를 주거나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예의바르고 정중하게대했다. 집주인이 그러니 여타 사용인들도 마찬가지다.

 

정태의가 원래 눈치를 보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했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손님이 많았다. 며칠 머무는 사이에 깨달았다. 이 집에 살고 있는사람 중 리그로우 가의 혈연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노부모는 교외의 한적한 별장에서 지내며 회사 쪽에나 종종 갈 뿐 이 집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고 하고, 하나 있다는 여동생은 스물을 갓 넘자마자 자기와 띠동갑인 실업가와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고 한다. 즉 실질적으로 이곳에 살고 있는 가문 사람은 카일 리그로우 한 사람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대궐 같은 집에 혼자 살다니……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몇이나 되는 사용인들도 그렇지만 이 집에는 늘 손님이끊이지 않았다. 공적인 손님이든 사적인 손님이든 한두사람씩은 꼭 이곳에 머무르곤 했다. 리타의 말에 따르자면 '집에 사람 들이는 걸 너무 좋아하는 도련님'이었다. 늦잠을 자서 뒤늦게 아무도 없는 식당으로 가 리타가 챙겨준 야채 스프를 마시던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곤 멈칫하며 눈만 깜빡이다가 리타에게 슬쩍 되물었다. '도련님?' 하고. 그러자 리타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끄덕이며 '도련님.',이라고 다시 대답했다.

 

파릇파릇하던 나이일 때부터 이미 40여 년도 더 넘게 이 집에서 지냈다는 리타는 이 집의 아들딸들이 어릴 때에는 유모를 맡았다고 했다. 자기 손으로 키워낸 도련님들과 아가씨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에게 정태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 집 아들들 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키우셨어요?'

 

그러자 그녀는 딱잘라 대답했다.

 

'지금도 우리 어린 도련님들이지요.'

 

'…….'

 

정태의는 말없이 스프 접시에 코를 파묻고 꾸역꾸역 먹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리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낯이 익기 전에는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인상이었지만ㅡ지금도 그녀는 동양인인 정태의를 그리 미덥게 보지는 않는 눈치였지만ㅡ뭔가를 물어보면 꼬박꼬박 대답을 해줬고 정태의가 자칫실수라도 할라 치면 말없이 고쳐주고 도와주곤 했다.

 

정태의는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비록 자신에게못마땅한 시선을 보낸다고는 해도 그는 리타를 좋아했다. 무뚝뚝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챙겨주는 할머니였다.

 

"그런데 대체 그런 좋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인간이,왜 저런 흉악한 살인마가 됐느냔 말이지……."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뜨거워진 몸을 다시 한 번 뒤집었다.

 

하지만 리타를 탓할 일은 아니다. 똑같이 리타가 키웠을 카일은 아주 멀쩡하고 건실한 인간이 아닌가.

 

"그럼 역시 환경요인설보다는 유전설에……. 하지만 형제로 태어난 사람들이 유전자가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다고……."

 

결국 어째서 일레이가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정태의는 타월 밑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같은 환경에서 같은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자신과 쌍둥이형도 아주 다르지 않은가. 역시 환경이나 유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천부적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 그 미친놈은 잘 살고 있으려나……. 하긴 누가 그놈에게 해를 입힐 수나 있겠어. 사막의 열사 한가운데 던져놔도 멀쩡하게 살아올 놈을."

 

궁금은 할지언정 걱정은 되지 않았다. 형과는 다른 의미로, 일레이라는 인간을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하다 해도 소식을 자세히 알아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알아봐야 불안감과 두려움만 가중될 게 뻔한 탓이다. 섬에서 나온 뒤 숙부에게 두어 번 연락을 했다. 반드시 정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1, 2주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달라는 말이 있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 홍콩에서 출국하기 이틀 전 일부러 공항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숙부조차도알 수 없는 신분을 쓰게 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뒤를 쫓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답은 듣지 못했다. 예상컨대 발신지가 어딘지는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는 시점에서 이미 알아냈을 거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뒤를 밟히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일말의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정태의의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숙부는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발설하지 않으리라고.

 

일레이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찾으려 들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아예 잘라내고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성격을 생각하면 집요하게 찾아내어 뼈를 발라내버리겠다고 들 것 같았지만,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숙부에게 전화했을 때 슬쩍 물어보자 숙부는 그저 담담하게 웃더니, 짧게 말했다.

 

"그래, 만에 하나라도 잡히면, ……죽겠지."

 

그냥 곱게 죽지도 못할 거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고통스럽게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정태의는 몇 가지 알고 있었는데, 일레이가 자신보다 덜 알 거라는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가장 혹독한 살인 방법을 넘어서는 방법을 몇이나 더 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 잘 도망다니는 수밖에없겠다.

 

정태의는 만에 하나 잡히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호러 스릴러도 이만한 게 없을 거다.

 

"하지만 좀 아쉽긴 하군……."

 

더운 햇볕 아래서도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정태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기억은퇴색한다. 즐거웠던 기억은 더욱 즐겁게, 괴로웠던 기억은 그리웁게. 혹은 조금씩 잊어가며. 정태의는 그런 시간의 흐름을 좋아했다.

 

이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날 일은 없다. 혹여 언젠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칠 날은 있을지 몰라도 일부러 연락을 취해 만날 날은 오지 않을 거다. 더욱이 일레이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쪽은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니까.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기억도 퇴색하고, 윤색되면,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으로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조금이나마 둥글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온다면, 그러면 그때는 다시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성질머리가 나이 든다고 바뀔 거라는 생각은 지금으로선 도저히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좋다. 지금쯤 일레이가 어느 구석을 헤매며 뒤지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등잔 밑은 안전했다. 정태의라는 한국인을 백날 찾아 헤맨들 그런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홍콩에서 행방불명된 채 소식은 끊겨버렸다. 유유자적 흘러다니는 사람은 일레이 리그로우의 등잔 밑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는 김영수, 한국에서 가장 흔하다는 이름의 소유자일 뿐이다.

 

정태의는 다시 한 번 몸을 뒤척여 누우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쉬기는 아주 알차게 잘 쉬고 있는데……. 형은 어디가서 찾는다지.

 

물론 찾지 않고 적당히 시간 보내며 놀다가 '삼촌, 못 찾았어요. 그럼 이만 안녕'하고 끝내도 되겠지만 그래도 약속은 하고 나왔다. 찾는다고 보장은 할 수 없다고못을 박아두긴 했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낸 말이니 지키는 시늉은 해야겠지.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공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ㅡ이용할 수 있다 해서상황이 딱히 나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ㅡ그 신출귀몰한 인간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정재의라는 인간은 결코 누가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인간이 아니었다. 본인이 그러기를 원치 않으면, 또한결과적으로 그것이 정재의에게 행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를 만날 생각은 버려야 했다.

 

"자아……, 과연 어디서 유유자적 헤매고 있으시려나,우리 운 좋은 형님은……."

 

짚이는 데도 없으니 어렵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옛기억들 속에서 실마리를 더듬고 있는데, 그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누군가 풀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집에 머무르는 또다른 손님이거나, 혹은 새로 찾아온 손님이거나, 아니면 청소나 정원일을 하러 오는 사용인 중 하나이려니 하며 정태의는 머리 위를 덮었던수건을 걷어내었다. 발소리가 다가옴에 따라 말소리도같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건 현단계에서는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물건이라서 넘기기가 좀 곤란해. 1차 시험 사격도 못 했거든."

 

카일의 목소리다.

 

아침에 정태의가 일어났을 때 이미 일하러 나가버리고 모습도 볼 수 없었던 바쁜 집주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직 정오 가량이니 아마 잠시 들렀다가 곧 나갈는지도 몰랐다.

 

손님을 데리고 왔나 보다. 이 집에서 며칠 머물러 갈 사람인지 혹은 그냥 잠시 같이 들른 사람인지는 몰라도 얼핏 듣기에 무기 이야기가 나오는 듯했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사람을 좋아하는 남자다. 손님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하긴 그러고 보니 숙부도 유순해 보이긴 하지만 성격이 결코 만만한 사람은아닌데 그 사람과도 근 20여 년을 친구로 지내왔다고 하니, 다른 사람과는 오죽할까.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테스트는 해 볼 수 있도록 해주지. 모레 오후 정도라면 시간이 날 것 같은데, 괜찮나?"

 

목소리는 바로 근처까지 다가와,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마주칠 참이었다.

 

그래도 집주인이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싶어서 정태의는 셔츠를 어깨 위에 대강 걸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같이 온 손님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정말이세요? 물론이죠! 시간이야 언제든 낼 수 있죠! 없어도 내야죠! 1875년식 레밍턴을 리뉴얼해서 복각한모델이라니, 그 아름다운 아이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정태의는 도로 비치벤치에누워 비치타월을 덮어쓰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나올까 아예 둘둘 감아버렸다.

 

잊을 리가 없는 저 목소리. 총 얘기를 하면서 저렇게 감격에 젖어 외치는 어조. 무기를 두고 아름다운 아이라고 표현하는 저 살벌한 사고.

 

정태의가 아는 한 저런 사람은 딱 한 명 있었다. 치사하면서도 집요하기 짝이 없어서, 그 사람의 소장품 하나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두고두고 골치아픈 사람이 하나 있다. 어쩌면 세상에, 목소리도 똑같았다.

 

"그래, 그럼 모레 오후 3시 반에 회사로 오도록 하게. 루이에겐 말해둘 테니 바로 내 방으로 와. ―――이쪽 방이라네. 창문을 열면 바로 풀과 맞닿아 있으니 언제든좋을 대로 쓰도록 해. 가만 있자, 휴가가 다음 주말까지라고 했던가, 모러?"

 

", 토요일 저녁 비행기를 예약해뒀지요. 그때까지 신세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모쪼록 편히 지내게. ……이런. 먼저 온손님이 계셨군. 가만있자……."

 

카일의 목소리는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 선 또 하나의 기척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태의는 머리를 휘감다시피 한 비치 타월을 절대로 벗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카일에게 인사를 하는 게 신세지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테지만 지금은 절대로 안 된다.

 

모러. 모러! 모러!!

 

목소리뿐 아니다. 정태의가 아는 그 작자와 이름까지 똑같았다. 어째서 이 평화로운 저택에 저 빌어먹을 놈이 손님이라고 찾아왔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카일과는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빨간 타인인ㅡ심지어는 정체도 불분명한ㅡ정태의도 손님이라고 이 저택에 들러앉아 있었다.그런데 모러가 이 집의 손님이 되어선 안 될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 집주인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무기상이었고, 모러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무기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얼핏 모러가 일레이의 집안과도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UNHRDO에 입무하기 전에 그쪽 회사와 관련되어 일을 했었다던가.그렇다면 정태의가 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모러가 이 집에 있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타당한 일이었다.

 

"어느 분이 여기서 쉬다가 잠들어 계시나 그래……. 아하, 킴이군."

 

정태의가 얼굴을 둘둘 감아 숨기고 있어도 카일은 이내알아차린 듯 짧게 말했다. 옆에서 모러가 의아한 눈치라도 보였는지, "며칠 전부터 머무르는 손님아리네." 라고 설명한다. , 그렇군요, 라고 대답한 모러는 정태의에게 별 호기심은 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걸음 소리가 멀어지면서 "정원이 여전히 훌륭한걸요. 저쪽 길로 이어진 자작나무숲도 여전하겠지요?"라면서 화제를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카일의 발소리도 떨어져 가 정태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음주 토요일 저녁 비행기라. 그때까지 모러가여기서 머무른다는 소리인가. 당연히 얼굴 마주칠 확률도 높아지겠지.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오늘밤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야겠다. 이렇게 느긋하고편한 은신처를 떠나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은신처가 호랑이 소굴로 돌변해서야 견딜 수 없다.

 

모러, 저 망할 녀석. 너와 나는 정말이지 서로의 인생에도움이 되어주지 않는구나. 어쩌면 사실은 모러야말로 김소위에 버금가는 악연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래도 낫다. 이대로 조용히 눈치채이지 않은 채 헤어지면 더 곤란한 일은 없겠지.

 

정태의는 몸의 오른쪽 반이 햇볕에 뜨겁게 익어갔지만수건이 흩어질까 봐 몸을 뒤척일 엄두도 못 내고 죽은 듯이 누워 있기만 했다. 저들이 어느 다른 곳으로 가고나면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리라고 다짐하며, 수 걸음멀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가시거리에서 맴도는 저들의기척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 언제까지 그렇게 게으름 피우고 있을 거예요. 사람이 일어나서 좀 움직이기도 해야지. 게다가 지금은 밥시간이에요. 끼니를 제대로 먹지 않으면 속에 탈이 난답니다."

 

쌀쌀맞고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유리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리타. 냉담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을 잘 챙겨서끼니마다 꼬박꼬박 챙겨먹이는 친절한 그녀를 정태의는 늘 고맙게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결코 고맙지 않았다. 정태의는 깊이 잠든 척 꼼짝도 않고 대답도하지 않았다.

 

", 리타. 가만히 놔 둬요. 깊이 잠든 모양인데."

 

저만치서 카일이 고맙게도 거들어주었지만 유리문 밖으로 나온 리타는 정태의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낮잠을 이렇게 많이 잤다간 밤낮도 바뀌고 건강도 안 좋아진답니다, 도련님. 킴은 오전 10시부터 여기에 누워 있었어요. 게다가 살이 햇빛에 그을린 것 좀 보세요.이러면 나중에 따가워서 고생할걸요."

 

리타. 리타. 고마워요. 그런데 기쁘진 않아. 이 순간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않으면. 모러 저 놈은 결코 안심할 수 있는 놈이 아니란 말이야. 정태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리타에게까지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 일어나요!"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졌다.

 

눈앞에는 하얀 백금발을 깔끔하게 틀어올린 리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치벤치의 등받이 너머로 카일이 자신을 보고 담담히 웃는 얼굴이 보였다.

 

"여어, . 어제는 늦게 잠들었던 모양이군. 일어나게,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

 

"아하……, 예에……."

 

정태의는 어설프게 대답하며 흘끔 시선을 돌렸다.

 

카일의 뒤로, 자작나무숲 쪽으로 몇 걸음 더 떨어져 있는 모러가 보였다. 숲 속을 바라보고 있던 모러는 감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와아, 역시 멀리서 봐도 아름다운걸요. 저녁 무렵에 산책 겸 한 번 거닐어 봐야겠어요."

 

봐야겠어요, 라고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모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본 탓이다.

 

"그렇지? 개발 얘기가 나왔지만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저 숲은 천금을 준대도 버릴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남겨뒀다네."

 

미소 지으며 모러를 돌아보는 카일의 어깨 너머로 정태의는 귀신처럼 표정을 굳혔다.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모러를 쏘아보면서 정태의는 입모양만으로 '입 닥치고있어.'라고 말했다. 커다랗게 흡뜬 눈만 껌뻑이며 정태의를 쳐다보는 모러의 기색에, 카일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 지으며 카일에게 다가섰다.

 

"덕분에 느긋하게 쉬고 있던 참입니다. ……저 분은?"

 

"아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지. 모러. 모러 키이스라고 하는데, 지금은 UNHRDO의 아시아 지부에 있어.저래봬도 대단한 인재지. 모러, 인사하게. 며칠 전부터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는 킴이요. 킴용수."

 

사소한 발음의 차이는 대수롭잖에 넘기며, 정태의는 웃으면서 모러에게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영수입니다. 리그로우 씨의 후의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 카일이라고 부르라니까. 이 집에서 리그로우라고 하면 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했잖은가."

 

카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 너머로, 모러의부릅뜬 시선과 정태의의 사나운 시선이 교차했다.

 

그때, 리타가 저택 안으로 돌아가면서 카일을 불렀다.

 

"도련님, 게일이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더군요. 벌써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가엾으니 식당에 오시기 전에 응접실에 들렀다 와 주세요."

 

"게일이? 두 시간이나? 이런, 무슨 급한 일이길래. ㅡ아, 난 잠시 실례할 테니 두 사람 먼저 식당에 가 있도록 하게. 먼저 식사를 해도 좋아."

 

"아니오,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겠습니다. 식사는 같이 하는 게 더 맛나지요."

 

정태의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말했다. 카일은 하하 웃더니 가벼운 눈인사를 마치고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타이밍도 좋게,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그곳에는 정태의와 모러 두 사람만 남았다. 카일과 리타가 사라지자마자 정태의의 얼굴에서는 그 예의바른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자아, 그럼 식당으로 가 볼까. 리타의 요리는 아주 훌륭하거든."

 

"그래, 리타의 요리는 훌륭하지. 그런데――킴용수 씨?!"

 

"킴이라고 불러."

 

"그래, ."

 

모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부르더니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주 넉넉하고 사람 좋은 웃음이다., , 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러는 갑자기 고갯짓을 딱 멈추었다.

 

"……킴 좋아하네. 왜 네놈이 여기 있어, 태이! 네 패밀리네임이 언제부터 킴이었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저네 집으로 갔을 테지."

 

"이 매정한 놈. 너는 같은 지부에서 한솥밥 먹고 살았던동료가 그만뒀다는데 걱정도 안 돼?"

 

"이놈이……! 네놈도 걱정 안 하는 신루를 내가 왜 걱정해! 원래 유서있는 부잣집 아들내미였으니까 집에서 뭔가 회사라도 차려주든가 알아서 할 건데 나보다 잘 사는 놈을 걱정은 무슨 걱정."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모러는 꽥 소리를 질렀다. 정태의는 모러를 쳐다보다가 푹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그의 말이 맞기도 하다. 신루는 정태의의 인상 속에서만 연약하고 가냘픈 아이였을 뿐, 실제로는 몹시 영특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다른 사람이 걱정하지 않아도 뭐를 하든 잘 할 사람이었다. 차라리 정태의에게 매이지 않고 제 갈 길을 새로 찾아가는 게 그 아이를 위해서는 훨씬 나았다. 오히려 걱정을 해야 하는 건 신루가 아니라 자신이다. 정태의는 영차, 하고 힘든 듯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다시 모러에게 단단히 못을 박아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기운이빠져 윽박을 지르기도 힘들었다.

 

", 알고 있을 테지만 이 집 사람들한테 나를 안다는 소리도 하지 말고, 여기서 날 봤단 소리도 아무데서도하지 마. 아니, 여기든 어디든 날 봤다고 하지 마. 날 아예 잊어버리란 말이야. 우리, 서로 기억에 남고 싶은 사이 아니잖아, ?"

 

정태의는 모러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자 모러는 비비꼬인 얼굴로 정태의를 주욱 훑어보다가 문득 심술궂게말꼬리를 늘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신경도 안 쓰고살았는데……, , 릭이랑 묘한 소문도 돌았었지."

 

움칫.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러의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표정을 정리했지만 이미 늦었다. 모러 이놈은 이런 때에 한해서는 눈치가 대단히 빠른 놈이었다.

 

"들키면 안되는 게 사실은 그놈이구나아……?"

 

말꼬리를 늘이는 저 끈적한 말이라니, 저 말을 내뱉는저 입을 좍 찢어주면 그 소리가 비단 찢는 소리보다 상쾌하겠다. 그러나 정태의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모러가 눈매를 좁히더니 으스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미친놈 얼마 전부터 아주 사람을 제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해치고 다니는 게 기분이 아주 최악인 것 같더니,너 무슨 짓을 하고 튄 거야, 태이."

 

모러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에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입 속으로중얼중얼한다.

 

"난 몰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자기 귀로 들어도 너무 거짓말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모러는 마음에 안 드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혼잣말 했다.

 

", 차라리 신루면 또 몰라, 그 미친놈이면 함부로 말도 못 건다고……. 재수 없게 말 거는 순간 수 틀려서 목이 날아가면 어쩌라고. 요즘은 완전히 시퍼렇게 날을세우고 다니더만."

 

모러는 일레이에게 말을 전해서 정태의를 곤란하게 만들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정태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놈이 겁이 나서라도 일레이에게 말을 걸지는 못할 모양이구나.

 

그러나 모러는 정태의가 안심하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이죽이죽거렸다.

 

"뭐 그래도, 소문이라는 게 내 옆침대 놈한테 한 마디만해도 아주 잘 퍼져나가긴 하더라. 굳이 내가 직접 말 안해도, 말 전해줄 낮새나 밤쥐가 많단 말이야."

 

어이구, 돌아가자마자 일단 토우한테 알려 줄까나, 라고 짐짓 호들갑을 떨며 이죽거리는 저놈의 입에, 역시수건을 집어넣어주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가 뭔가 곤란해지겠다 싶으니까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조금 전에 '미안하다'라고 모러에게 사과를 하며 아주 잠시나마 약한 척 비굴하게 굴어줬던 정태의는 눈을 부릅떴다. 곧 표정을 거두었다. 씻어낸 듯한 무표정으로,그는 모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방 곳곳에 숨겨둔 그 이쁜이들은 잘 있어? 여전히 서랍장, 침대 매트리스 아래, 이불솜, 옷장 벽 안에서 잠자고 있냐?"

 

정태의가 느릿하게 말하자 모러는 윽,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사납게 정태의를 노려본다.

 

"거기 없어, 인마! 너 같은 놈이 손 댈까 봐 다 딴 데로옮겼단 말야!"

 

그렇게 외치는 모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불안에 젖어있었다. 정태의는 아하, 하고 웃었다. 여전히 거기 있구나. 하긴 딴 데로 옮겼다고 해 봤자, 섬에서 아예 가지고 나간 것도 아니면 따로 숨길 데도 없었다. 숨겨 봐야 방 안이다.

 

"부내에서 개인적인 무기 휴대는 금지란 거 알지?"

 

"이……이 새끼가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왜 그래. 다 알아!"

 

버컥 소리는 질렀지만 모러의 목소리가 많이 죽었다. 그래, 이래야지. 정태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적어도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건덕지가 생겼다.

 

"모러."

 

정태의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진지하게 부르자 그가할 말을 미리 짐작했는지, 모러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말해."

 

"너 돌아가면, 아무에게도 내 얘기 하지 마. 아는 척도 하지 마. 알겠지? 그럼 나도 지부에 괜한 제보는 하지 않을테니까. 다 좋은게 좋은 거라고, 너도 알잖아. ?"

 

"좋아. 당장은 입 다물어 주지. 하지만 사내실 불시검문을 해서 내 이쁜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그순간 바로 네 짓이라고 간주하고 콱 불어버릴 거다."

 

"……. 뭐 그러든가."

 

언제 할지는 모르지만, 평균적으로 한 해에 두어 번 하는 불시검문을 할 즈음엔 자신은 이미 이곳에 없을 거다. 아예 유럽을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괴물의 송곳니가 이쪽을 향해도 이미 늦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약조가 이루어졌다.

 

정태의는 어깨 위에 걸치고만 있던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채우며 돌아섰다. 이제 슬슬 식당으로 가봐야 했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틀림없이 리타는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정태의를 노려볼 게 틀림없었다. 예전에 이미 이 집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모러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정태의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둘은 나란히 식당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말은 이미 끝났고, 둘 사이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별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말을 해야겠다는의지도 없었다. 정태의는 저만치 식당 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그때 갑자기 생각이 나기라도 한 것처럼 슬쩍 물었다.

 

"그런데 요즘 지부는 좀 어때. 다들 잘 지내? 별 일은 없고? 뭐……교관 중 누군가 자리를 비웠다거나, 아니면 지부 자체 내에서 뭔가 수색원 같은 거라도 내어서사람을 찾는다거나……."

 

모러는 이상한 얼굴로 정태의를 보았다. 그가 뭣 때문에 이런 걸 묻나 짚어보는 듯한 얼굴이다. 잠시 고개를 기우뚱거리던 모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너 나간 지 별로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뭘 물어. 똑같지. 뭐……, 네가 없어져서 달라진 거라고 한다면 릭의교위 정도겠지. 지난 주 월요일로 네 번째 바뀌었다. 그네 번째 바뀐 놈이 지난 주 목요일에 외부 병원으로 호송됐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릭이 더 이상 교위는 필요 없다고 해서 사상자는 네 명에 그쳤어."

 

거기서 잠시 말을 그친 모러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너 진짜 무슨 짓을 하고 튀었길래 그래. 네놈 때문에 괜히 애꿎은 우리가 힘들잖아! 그 미친놈은 그래도 교관으로 오고 나서는 좀 자제도 하는가 싶더니 요새 인간 또 정신이 나갔더만. 조금만 수 틀린다 싶어도 아주인간을 작신작신 밟아놓던데. 아주 살벌해, 요즘. 내가봤던 가운데 요즘이 제일 아슬아슬해 보인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진짜로 죽을 것 같다고 중얼거린모러는, '그런 놈의 교위를 맡아야 했던 너도 생각해 보면 참 불쌍한 놈이야', 라고 정태의를 동정했다. 그러다가 '그런 놈의 교위를 다른 놈에게 떠넘기고 사고치고 튀어버리다니 너는 생각해 보면 참 나쁜 놈이야'라고 한 마디 더 한다.

 

내가 이러니까 이놈이 좋아지지 않지…….

 

정태의는 아까 이놈의 멱살을 쥔 김에 그냥 콱 목을 졸라버릴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쉽게 모러의 목을 쳐다보다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식당 문을 열었다. 식당에는 이미 카일이 와 앉아 있었고, 저만치에선 리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정태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라고 중얼거리고 재빨리 자리에 앉으면서, 정태의는 '나도 이제 막 온 참이야. 신경 쓰지말고 들게.'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카일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남자가 저 일레이의 형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정태의는 전채로 나온 야채를 집어먹으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도 이미 살벌한 놈이었는데 지금은 더 살벌해졌다니, 대체 거기서 더 발전형이 있었단 말인가. 그 이상살벌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설마 '나는 여기서 변신을 두 단계 더 남겨두고 있어'운운하는 건 아닐 테지……. 정태의는 장난처럼 생각했지만 생각이 떠오르고 나자 어쩐지 현실감이 들어 부르르 떨었다.

 

역시 화가 나긴 많이 났나 보다. 숙부가 '잡히지 마라',라고 말한 짧은 문장이 담고 있는 뜻이 몹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십중십, '잡히면 죽는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하면, 그래도 저놈이 직접나서거나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하려고 들지는않는다는 점이다. 별로 화가 안 났, ……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정태의를 반드시 찾아내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은 아닌 모양이었다.

 

"…….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째 좀 섭섭하네……. 약 좀더 올려주고 나올 걸 그랬나……."

 

정태의는 밥을 먹다 말고 중얼거렸다. 조그맣게 중얼거렸는데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모러와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얼른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이 집을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 오래 머무르진 않았지만 사람들과도 나름대로 친숙해졌고, 모처럼 마음 편하고 느긋하게 휴양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망할 모러놈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아무리 일단은 저놈의 입을 막았다고 하나 얼른 떠나야겠지. 일레이와는 다른 의미로 절대로 안심할 수 없는 놈이 저놈이었다.

 

몇 되지도 않는 짐을 도로 챙겨서 이곳에 올 때 그랬던대로 스포츠백 하나를 간편하게 꾸린 정태의는, 모러가머물고 있는 옆방과 이어진 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저놈만 아니라면 이 안락한 곳에서 조금 더 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여기에 눌러앉아 있어서야 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처없이 찾아헤맨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명목상으로나마 형을 찾겠다고 움직이고 있으려니, 정말로 형을 만나고 싶어졌다.

 

무심하지만 냉정하지 않은 그 얼굴을 보고, 조용하지만 잘라내지 않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 봐야 하나. 설마 북한 같은 데에굴러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난 거기만큼은 못 간다구……. 원천봉쇄되어 있단 말야."

 

정태의는 침이라도 뱉어서 점을 쳐볼까 생각하면서, 다 꾸린 짐가방을 툭툭 두드렸다. 시간이 늦어져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지만 아직 해는 지지않았다. 오늘 떠날 거라면 해가 지기 전에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훌쩍 일어섰다. 가기로 결심하자 마음은 아쉬웠지만 정리는 되었다. 가기 전에 카일과 리타, 그리고다른 사람에게 짧게 인사만 하면 되었다.

 

카일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낮에 모러를 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던 카일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뭔가 일거리를 끌어안고 오긴 했지만,아무리 오너라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회사를 넉넉하게 다닐 수 있나 정태의가 미심쩍게 쳐다보자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카일은 웃으며 '난 원래 오늘까지는 휴가라네.' 라며 서재로 들어갔다. 휴가라고 해봐야 일거리를 짊어지고 서재로 들어가면 아무 소용없는데요, 라고 닫힌 서재문에 대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회사원도 할 짓이 못 되는구나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왔었다.

 

정태의는 떠나려고 생각하니 한결 아쉬워지는 고즈넉한 복도로 나섰다. 모러의 방문을 한 번 걷어차 주고도 싶었지만 카일의 집이다. 모러 때문에 고마운 카일의 집에 험한 짓을 해선 안 될 말이다.

 

복도와 거실을 거쳐 서재로 가는 동안 정태의는 누구의모습도 보지 못했다.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리타의 기척, 바깥 정원에서 오가는 정원사의 그림자,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다른 손님들을떠올리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예전의 언젠가 일레이도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흉흉한 남자가 있었어도 이곳은 이런 분위기였을 것 같았다. 어딘지 일상과 한 걸음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서 쉴 수 있다면 좋겠다. 정태의는 한숨처럼 웃곤 걸음을 옮겼다.

 

거실을 지나 작은방의 정면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거기에 서재가 있었다. 서재만 달랑 하나 있어, 그 계단은그리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2층의 다른 방으로 가려면 다이닝 룸과 거실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서재는 이 집안에서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곳인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개인 서재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규모인 그곳에는 카일이 목숨처럼 아끼는 책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동시에 카일에게 있어 제 2의 회사이기도 했다. 카일이 있는 동안에는 그의 허락을 얻어 서재에 들어가 책을 볼 수 있었지만, 그가 없을때에는 늘 굳게 잠겨 있는 곳이었다. 책을 가지고 나올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어지간한 책마니아라니까, 정태의는 피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서재의 두터운 나무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희미하게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소리를 확인한 정태의는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고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서류를 바라보고 있던 카일은, 그 서류의 제일 아래에 뭐라고 짧게 적어넣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정태의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놀라고 말았다. 일을 하고있는 카일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은 그가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과는 퍽 달랐다. 생각해 보면 처음, 홍콩에서 보았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공기가 통하는 얇은 막을 두르고 있는 듯한. 주위와 친숙하게 교감을 하면서도 타아를 분명하게 구분한다고 해야 할까. 정태의는 그제야 카일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모습을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들어,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카일은 정태의를 보자 거의 무의식적인 듯 웃음을 지었다. 누구에게나 친근한 사람에게 그러는 것처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펜과 파일을 내려놓으며 안경을벗었다.

 

". 어쩐 일이야. 보고 싶은 책이 있나?"

 

이 안에서라면 원하는 대로 봐도 좋아, 라며 책장을 가리키는 카일에게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바쁘신가 보네요.회사 일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정태의는 조금 전 글자를 적어놓은 종이를 내려놓은 반대편에, 좀 과장해서 한 뼘은 되어 보이는 파일첩이 놓여 있는 걸 보곤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일은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며 웃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은데, 요 며칠 사이에 좀 귀찮은 일이 두 건이나 연이어서."

 

"…….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까요?"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도울 수 있을 만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기도 했고,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도와줄수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돕거나 할 만한 문제도 아니고,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까."

 

카일은 손짓으로 정태의에게 의자를 권했다. 정태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카일의 건너편인 그 의자에 앉으며 흐음, 하고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일어나는일이란 게 이 산더미 같은 파일첩일까 하고 흘끔 책상 위의 일감을 쳐다보자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카일이웃었다.

 

"이게 아니야. 이건 늘 있는 일거리고, 지금 좀 귀찮다싶은 문제는 무기 쪽을 다루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고질병 하나와, 내 동생 문제 하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내심 움칫 몸을 움츠리면서도귀를 곤두세웠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태연한 모습을 뒤집어썼다. 카일에게 그의 동생과 자신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을 통해 저 귀로 들어가도 곤란했고, 그렇다고 그에게 비밀을 부탁했다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것도 대답하기 어렵다. 역시모르는 척이 제일 나았다.

 

정태의가 조용히 카일을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카일은 한숨을 내쉬면서 혼잣말 반 푸념 반으로 중얼거렸다.

 

"군수업체라고 말은 듣기 좋게 하지만 사실 쉽게 말하면 무기매매상이거든. 그러니 당연히 공격도 많이 받아. 인권단체나 종교단체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반군이나 무장 테러 단체쪽에서도 협박을 받지. 이 경우는 무기매매를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자기네 측에 무기를 넘기라는 거지만."

 

카일은 마침 바로 위에 있는 서류가 거기에 관련된 것인지, 한숨을 쉬며 그 서류를 팔랑팔랑 펄럭이다가 내려놓았다.

 

"그것 참 귀찮겠군요."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반군이나 무장테러 단체에게는 당연히 무기를 팔 수 없다. 그들에게 판매한다면 무기매매가 아니라 무기밀매가 된다. 그렇게 했다가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당장 장사 접어야한다. 사실 무기상이 깨끗하게만 일을 할 리는 없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반군이라도 돈만 충분하고 요령만 좋으면 얼마든지 원하는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밀매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온다면 그건 요령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십중팔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치기 초보다.

 

정태의는 문득 쓰게 웃었다. UNHRDO를 떠올린 탓이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해냈다. 이 남자와 UNHRDO의 관계를. 좋지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해법은 없고 어둑한 무거움만 드리우는 기억이었다. 아마 카일도 그리 오래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을 거다. 무기밀매에 관련된 건이라면 그는 떳떳할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내가 지금 있는 회사가, 아무래도 일이 일인 만큼 정보망이 제법 좋아. 아마 어지간한 정보 기구만은 할 거야.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일 좀 알아봐 달라는 청도 많이 들어오거든."

 

거기까지 말을 한 카일은 생각났다는 듯이 '자네도 사람 찾는다는 그거, 언제든 마음 내키면 말하게. 반드시찾아준다고는 못 하나 알아봐주기는 할 테니'라고 덧붙여 말했다. 정태의는 난처하게 웃으면서 '말씀만이라도고맙습니다'라며 다시금 완곡하게 거절했다.

 

형의 이름을 이 남자에게 말하며 찾아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아마 카일도 찾을수 없을 거다. 숙부가 카일에게 말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카일이 알아냈더라면 숙부는 자신에게 형의 행방을 알아다주길 바라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동생이, 사람 하나를 찾아보라고 들볶는거야."

 

움찔.

 

정태의는 아, 그런가요, 라고 무심하게 웃으면서도 심장이 서늘해져 몰래 심호흡을 했다. 손바닥이 축축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바지춤에 한 번 문질렀다.

 

"어떤 사람인데요."

 

"음……. 그게."

 

카일은 어째서인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입매를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세히 말할 건 못 되는데, 조금 알아보니까 내 친구의조카더군.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 조카가 동생의 심기를 꽤나 거스른 것 같았어. 내 동생이,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성격이 좀 뭐랄까, 특이하거든. 거슬리는 사람을 그냥 봐 넘기지 못하는 녀석이야."

 

잘 알고 있답니다. 대단히 유하게 말해서 특이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성질머리를, 가족 말고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정태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조금도 자랑거리가 못 된다는 걸 깨닫고 우울해졌다. 동정 받을 거리로는 충분할지언정, 자랑은못하겠다.

 

"음……. 그래서, 동생부니 찾으신다는 그 사람은 찾으셨나요?"

 

정태의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문득 '그래……바로 너!' 같은 류의 괴담을 떠올리곤, 남의 일 같지 않아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아니, 짚이지 않아. 동생이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때 이후로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없더군. 아마 솜씨 좋은 곳에서 신분을 위조했을 텐데, 그러면 위조를 도와준 사람을 찾아서 물어야 하거든."

 

카일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남의 일이라는얼굴로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는 정태의가 신분을 얻는 데에 손을 써준 사람이 숙부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낸 눈치였다. 실상 거기까지는 일레이 역시근거는 없다 하나 짐작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숙부를 붙잡고 물어볼ㅡ다른 말로는 족쳐볼ㅡ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태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레이는 아시아 지부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줄들을 동원해 정태의의 행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숙부는 신분을 새로 내어준 것말고도, 정태의의 흔적을 지워준 모양이었다.

 

삼촌, 고마워요. 나 열심히 재의 형 찾아볼게요. 장담은못 하겠지만.

 

정태의는 들을 리가 없는 숙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곤 섬뜩해진 심장께를 문질렀다. 일레이의 소식을 들은 탓에 불안감이 짙어졌다. 정말로 이 집에서 나가도 될까.이 근처까지 오더라도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 집에 있는 게 어디보다도 안전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고민하다간 형을 찾으려는 의지가 사그라들어 다시 이 집에 눌러앉고 모러의 입막음에 골몰하게 될 것 같아서,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러자 카일은 정태의가 서재에 들어서면서 했던 말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마음 편하게말하라며 웃음 짓는 카일에게, 정태의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슬슬 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카일은 웃음을 지웠다. 놀란 듯 정태의를 보다가 약간 입매를 찌푸리며 묻는다.

 

"왜 이렇게 갑자기. 뭔가 불편한 거라도 있었나?"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곳에 있는 동안 아주편하게 지냈어요. 단지 저는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또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태의가 담담히 웃으며 말하자 카일은 잠시 그를 마주보다가 섭섭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익숙해져 있을 터였다. 언제나 손님이 왔다가 사라지는 집이니, 손님이 찾아오는 반가움도 손님이 떠나가는 섭섭함도 이미 그에겐 일상일 터였다.

 

"그래, 아쉽군. 어디로 갈 생각인가?"

 

"아……, 일단은 공항으로 가려고요."

 

슬슬 숙부에게 전화를 할 때가 되었다. 공항에서 전화를 한 뒤에 적당히 다른 곳으로 갈까 싶었다.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딱히 목적지도 없었다.

 

"공항? 멀리 갈 건가 보군."

 

"아니 그건 아니고 전화를 좀……."

 

"전화?"

 

정태의의 말에 카일은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제야 정태의는 괜한 말을 했나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음……, 전화해야 할 곳이 있는데 발신지를 남기고 싶지 않거든요. 공항에서 잠깐 전화하고 다른 데로 가려고……."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카일은 그제야 납득한 듯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그런 거라면 일부러 멀리까지 전화하러 갈 것 없어. 여기서하게. 내 서재는 내 회사만큼이나 보안 정비가 잘되어 있거든. 아무리 훌륭한 탐지기를 쓴다 해도 이 회선은 쫓아올 수 없어. 전화 외에 일부러 공항에 가야 할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곳에서 통화하도록 해. 마침 잘 되었군. 목도 마르고 피곤하던 참인데, 나는 잠시한숨 돌릴 겸 리타에게 차라도 한 잔 달라해서 천천히 마시고 올테니."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태의는 당황에서 어, 어어, 하고 우물거렸지만 카일은 그 의미를 다르게 생각했는지 '추적이 안 된다는 건 100% 보장해도 좋아.'라고 단언하며 서재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잠시 뒤에 계속 이야기하지. 자네가 출발할 날에대해서도 그렇고."

 

아니, 저는 오늘 저녁에, 지금 이대로 가려던 참인데요,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그가 미처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카일은 서재에서 문을 닫고 나갔다.

 

다소 갑작스럽게 서재에 홀로 남은 정태의는 잠시 동안눈만 깜빡이면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닫힌 문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흘끔 전화를 보았다. 카일이 말한 것은 아마 사실일 거다. 추적이 안 되는 전화라면 더 바랄 건 없었다. 어차피 전화를 하라고자리까지 비켜줬는데, 안 하면 오히려 미안하겠지.

 

정태의는 그러고도 몇 초 정도 전화를 쳐다보면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전화를 집어들었다. 일레이의 이름을 들은 탓인지,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느리다. 차라리 숙부에게 물어볼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러는 일레이가 더 흉악해졌다고 말했다. 그야 흉악해질 만도 하다. 성질머리가 그 성질머리다. 당장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생겼는데 그놈의 간 곳이 오리무중이니, 당연히 눈에 핏발이 설 만도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는 내 안위를 위해 다른 숱한 사람들을도탄에 빠트렸구나. 하지만 여태껏은 나 홀로 그 성질머리를 옆에서 지켜봤으니, 이렇게 해야 좀 공평하다.

 

정태의는 희미하게 솟아오르려는 죄의식을 억지로 눌러 앉히며 입맛을 다셨다. 일단 숙부에게 전화를 해서 그놈이 얼마나 흉흉한지, 어느 정도까지 뒤를 쫓는 눈치인지, 그거나 물어봐야겠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고 나자 수화기 안에서는 신호흠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을 때에야 정태의는 자신이 시차 생각을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정태의는 흘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그렇다면 그쪽은 자정을 넘어선 시각일 터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숙부는 비교적 늦게 자는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끊으면 나중에 다시 서재로 찾아와서 전화를 빌려써야 하는데, 그것도 애매하다. 더욱이 숙부는 낮에는 방에 없으니 아침이나 저녁의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까짓 것, 혹시라도 자다가 깬다면 깨라지 뭐, 정태의는 이 정도야 뭐 어떠냐는 마음으로 숙부가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여남은 번이 넘도록 신호음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깊이 잠들었을 수도 있고 혹은 방에 없거나 욕실에들어가서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일 수도 있다.

 

나중에 다시 전화해야 할까, 그렇다면 역시 공항에 가서 재빨리 전화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가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차였다.

 

달각, 신호음이 멈추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정태의는 다시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정태의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찰나에 숙부가 전화를 받은 건지도 몰랐다.

 

"……. 여보세요?"

 

정태의는 잠시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전화를 잘못 걸었나, 전화의 액정을 보았지만 번호는 숙부의 번호가 틀림없었다. 아니면 전화에 문제가 있나.

 

"여보세요. 삼촌?"

 

이번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으면 끊고 다시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다시 숙부를 불렀다. 대답은몇 초 정도 사이를 둔 뒤에야 들려왔다.

 

'2분만 빨리 전화하지 그랬어. 정창인 교관은 방금까지나와 얘기하다가 마오에게 연락이 와서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나직하고 무심한 목소리다. 조금은 느릿한, 그러나 그 안에 무시무시한 이와 발톱이 숨겨진.

 

"……."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마 한 10분 정도만 있으면 돌아올걸.'

 

정태의는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자신을 알고 있으리란 것도 안다.

 

'그 동안 내가 이야기 상대를 해 주지. 아니면 내게 용건을 이야기해도 괜찮아. 전해줄 테니까.'

 

목소리에 희미하게 웃음마저 섞여나왔다. 느리게 귓가에 전해지는 그 목소리를 한참 동안 곱씹다가, 정태의는 이윽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이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숙부가 잠들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을 줄은 몰라도, 그 전화를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선택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이 저 남자일 거라고는 더더욱.

 

'오랜만이야, 태이. 목소리를 들으니 잘 지내고 있나 보군. 박정하게, 연락도 한 번 없어서 걱정했잖아, 어디서다친 건 아닌지, 도통 소식을 알 수가 있어야지.'

 

그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정태의는 그의 그런 목소리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으면서도 깜빡 속을 뻔했다. 그가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찾고 있다고.

 

얼마만에 듣는 목소리일까.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아니, 사실은 바로 어제라도 본것 같았다. 매일 꿈에서 듣는 목소리이며, 매일 꿈에서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낯선 기분이 들 리가 없는데도, 퍽 낯설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 두근……,아주 느리게 뛰고 있었다.

 

'어디야.'

 

그가 짧게 물었다. 그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한 날이 어렸다. 닿는 것만으로도 벨 듯한 날이다. 덜컹, 심장이 잘린 것 같았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이윽고 쓰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섬뜩하게 몸을 움츠리는 동안, 동시에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은 이 남자의목소리를 듣고, 마음속 어느 구석에선가 희열을 느끼고있었다. 그 희열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를 그렇게 두고 온 것에 대한 통쾌함, 혹은 어쩌면, ……그래, 단지 반가운 것인지도 몰랐다.

 

정태의가 씁쓸하게나마 웃는 기척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일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기분 좋은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기분이 좋다니 나도 기쁘군. 좋은 일이 있으면 내게도 좀 알려달라고. 요즘나는 기분이 아주 죽을 맛이거든.'

 

일레이의 목소리에 천천히 날이 들어섰다. 시퍼러면서도 어두운 날이다. 어둡고 섬뜩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정태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남자의 옆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죽었겠구나, 하고.

 

"기분이 죽을 맛이라……. 네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일레이. UNHRDO는 잘 돌아가고 있을 테고, 거기서 너는언제나 네가 원하는 대로 행세해왔고, 뭐든 네가 내키는 대로 했었잖아. 그런데 죽을 맛일 이유가 뭐 있어. 뭔가 일이라도 잘 안 풀리나?"

 

정태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좀더 비아냥을넣고 싶었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익숙하지 않으니 그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괜찮다. 정태의의 어설픈 비아냥을 못 알아들을 저 남자가 아니었다.

 

'……. 아주 의기양앙하시군.'

 

이윽고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근, 심장이 크게 울렸다. 정태의는 이 섬뜩함이 마치 쾌감과같다고 생각했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쾌감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태이. 너는 여기에 있는 동안 제법 고생을 많이 했지.'

 

문득 일레이는 약간 맥락에 맞지 않는 듯한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 교위를 하면서 내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고, 그 이류로 동료들에게 질타 당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고, 게다가 네 성격에, UNHRDO의 치부에 너도ㅡ혹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ㅡ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이 퍽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정태의는 웃음을 거두었다

 

다시 떠올랐다. 그곳에서의 시간들이. 일레이의 짧은 말들에 하나하나,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미처 시간의 풍화를 겪지 않은 그 기억들은, 아직은 그립게 떠올릴 기억들이 아니었다.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군. 네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나 하나?"

 

그래서였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다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네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코웃음치며 하잘 것 없이여겼던 네가, 그 마음을 이해할 리 없다. 혹여 이해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던 거라면 정태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더욱 나빴다.

 

일레이는 웃었다. 정태의에게서 웃음이 지워진 게 몹시 유쾌하다는 듯.

 

'너무한데. 태이. 나는 지금 말이야, 그렇게 고생을 한 너를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해주려고 하는 참이란 말이지. 너를 위해 아주 중요한.'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아주 중요한, 에서 나직하게 낮추어지는 그 목소리가 마치 정말로 귓가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그것 궁금하군. 뭔데."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레이는 이를 갈듯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였다.

 

'잡히지 마라.'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숙부가 해 준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토록 섬뜩하지는 않았다. 숙부는 그 말뜻그대로, 정태의에게 충고를 해 주었던 것이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하얀 손이 바로 저만치에서 뻗어오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금세라도 자신을 움켜쥘 듯이.

 

"……충고 고맙군. 유념하겠어.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거든."

 

정태의가 씁쓸하게 말하자 문득 수화기 안에서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 소리에 정태의가 약간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일레이가 싸늘한 웃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목숨이 소중하시다……? 목숨이 소중한 놈이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나? 난 그날, 네가 목숨은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나 보다 생각했는데.'

 

"설마. 목숨이 소중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에서 그렇게 속 썩어가며 몇 달이나 버티진 않았지."

 

네놈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던 적만 몇 번인데, 내 목숨이 아쉬워서 참았지, 하고 덧붙이는 정태의의 말을 들으며 일레이는 하, 웃었다. 전화 통화인 탓인지, 혹은 이미 내친 김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속에서 나오는 그대로 말했다. 저놈이 언제 인간에게 치어봤을까. 어차피 전화이기도 하고 이미 내친 임이니 이럴 때에 할 말은 제대로 해야겠다.

 

'정태이. 난 정말로 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 대체 나중에 나랑 만났을 때 어쩌려고 이렇게 객기를 부리시나.'

 

일레이는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쥐 생각해주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이번에도역시 마음에서 우러난 말로 대답해주었다.

 

"당연히 안 만날 거니까 그렇지, 이 미친놈아. 너랑 만났다간 내가 죽을 걸 뻔히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널 만나냐? 잡을 수 있으면 어디 잡아 보라지."

 

정태의가 무심하게 내쏘고 나자 일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 ,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정태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수화기를 든 채, 한손으로는 의자의 팔걸이를ㅡ혹은 책상이라든가ㅡ천천히 두드리고 있을 거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문득 새카맣게 맺혀 있던 마음이 흐려졌다. 그는 여전히 그 익숙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마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렇게 있었다. 어쩌면 그립기도 하고 어쩌면 씁쓸하기도 한 느낌이, 까맣게 화가 치밀던 느낌 대신에 마음속에 도사렸다. 그곳에서 나올 때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던지, 그 기억과 함께.

 

정태의는 불현듯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은 아마도 UNH RDO의 생활을 언젠가 그리워할 수도 있을 거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깎여져 날카로운 모서리가 둥글어지면.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이 남자를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꿈에서 보는 탓만은 아니다. 그는 정태의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정태의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애매한 숨을 내쉬었다. 정태의의 말에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일레이가 문득 말을 꺼내었다.

 

'이가 갈리도록 싫다고 했던가?'

 

그의 갑작스런 말에 정태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기억을 뒤질 것도 없이 이내 그가 하는 말이 정태의가 UNHRDO를 떠나기 전, 그 마지막밤에 그에게 했던 말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의 말과는 약간 달랐다. 그러나 이가 갈렸던 건 분명하다. 억지로 묶어놓고 사람을 강제로 덮치는 그런 행위에 이가 안 갈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얼굴을 보고 싶다. 굳이 일레이의 말을 정정해줄 마음은 들지 않아 정태의는 침묵했다. 침묵은 일종의 긍정이었다. 일레이가하, 짧게 웃는다. 어이없다는 듯한 그 웃음은, 그 말을 하고서 그 역시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렸는지 천천히 분노가 스몄다.

 

'그래, 그렇게 목숨이 소중하다니 목숨은 살려주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웃음이 아니다. 그는 파랗게 분노하고 있었다. 억누르고 억누른 분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독액처럼 스며나와 그의 목소리를 채운다.

 

'ㅡ그렇게 쉽게 죽여줄 수야 있나. 나랑 같이 있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끔찍하게 살아봐. 매일매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살아보라고.'

 

서리서리 스미는 섬뜩한 말마디가 한 마디 한 마디, 정태의의 심장에도 스몄다.

 

'네가 어디에 있든, 설령 시간이 걸린다 해도, 내가 못 찾아낼 것 같나? 천만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다시 내 눈앞에 끌고 올 거다.'

 

그의 분노는 정태의의 심장에 스민 것처럼 그의 심장에도 스며 있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가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일레이의 저 성격에, 잠시 화를 내다가 그냥 넘어간다는 상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미친 듯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부으며 찢어죽이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어렵잖게 떠올랐다. 정태의는 자신이라도ㅡ혹은 누구라도ㅡ그토록 화를 낼 테니.

 

그러나 저렇게 낮고 조용하게 깔리는 분노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푸르스름하게, 어둡게, 어쩌면 끈적하게까지 내리깔리는 그 집요한 울분이 수화기를 타고 건너와정태의를 거머쥐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 할 수 있다면."

 

정태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화기 안에서는 그의 숨결이, 그의 분노가, 그의 몸짓이 흘러오고 있었다.

 

불현듯 두려워졌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만에 하나 그에게 잡히게 된다면 맞게 될 고통과 괴로움을 두려워함은 아니다.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저 분노가, 푸르고 어둡게 깔린 그 집요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 정태의는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삼촌에게 안부 전해 줘. 별일 없다고만 전해주면 돼."

 

정태의는 짧게 말했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두려움에 수화기를 오래 붙잡고 있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차단시키고 싶었다. 귓가로 새어드는 숨소리가 섬뜩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그의 영상을 보았을 때부터 느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그 동안 너무 가까이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눈이 흐려졌던 거다. 그 위험스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얼마나 위험한지 무뎌져 있었다. 어리석게도.

 

'―――잠깐.'

 

정태의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문득 수화기 안쪽에서어쩌면 조금 다급한 듯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조하게, 그가 정태의를 불러세운다. 정태의는 귀에서 떨어뜨리던 수화기를 다시 쥐었다. 그리고 그가 할 말을기다렸다.

 

하지만 일레이는 한동안 침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왜 불렀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한다. 정태의는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수화기와 송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것은 낮은 숨소리뿐이다. 이 전화선 너머에 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소리는 그것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침묵을 듣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태의는 희미하게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서재로 올라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고 다시 스쳐지나 멀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정태의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침묵에서 깨어났다. 이곳은 언제까지고 정태의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득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아마 카일은 이미 차를 다 마시고도 남았을 거다.

 

"……안녕."

 

정태의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달칵, 통화가 끊기는 소리가 난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도 정태의는 잠시 물끄러미 전화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이상한 기분이다. 일레이와 통화를 했는데도, 상상 속에서 걱정했던 것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새 기억이 풍화된 건가……. 깎일 부분은 깎이고, 윤이 날 부분은 윤이 나고."

 

정태의는 한숨처럼 혼잣말했다. 기억이 깎이고 닦이는데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그렇게 중얼거려 본다.

 

머리를 긁적였다. 이 아련한 마음이 뭘까 짚어보다가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봤다.

 

"나는 그놈과 만나고 싶은 건가?"

 

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당장 대답이 돌아왔다. 정태의는 부르르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평생 힘들어질 거라는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만나는 순간 인생이 험악해질 것이 불보듯 뻔했다. 아니, 역시 만나고 싶지 않다. 정태의는 고개를 몇 번이나 저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돌렸다. 홍차를 한 잔 마시고 돌아오겠다고 한 카일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돌아왔을 때 정태의가 여전히 통화를 하고 있을까 배려해준 것일 테지. 그렇다면 먼저 나가서 그에게 전화 잘 썼다고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게 옳았다.

 

그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그리고 떠나는 거다.이곳에서 떠나서―――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형을 만날 수 있을까. 짚이는 데라곤 한 군데도 없지만.

 

정태의는 흠,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마음이 편해졌다. 어딘들 어떨까.

 

"그나저나 정말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정태의는 서재의 무거운 나무문을 조용히 닫고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아까 정태의가 이제 그만 떠나겠다고했을 때, 카일은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을 했다. 사람이찾아오고 또한 떠나는 것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된 듯 익숙해져 있어도, 좋아하는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늘 아쉬워했다.

 

그렇게 아쉬워하니 떠나는 자신이 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픽 웃는다. 저렇게 아쉬워하며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니까, 늘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거겠지. 당장 정태의 자신만해도, 나중에 어느 때인가 시간이 지나고 여건이 되면 다시 이곳을 찾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모러 그놈만 아니면 여기서 좀더 머물고 싶었는데……. 역시 악연이야, 악연."

 

정태의는 불만스레 툴툴거리며 계단 위에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

 

폭이 좁고 단차가 높은 그 반질반질한 나무계단을 대여섯 단 남겨뒀을 때, 정태의는 보폭이 좀 컸는지 반쯤 비껴밟은 계단 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발 아래가 미끌하며 허전해지더니, 아직 발에 닿지 않아야 할 그 아래 계단들이 주르륵 닿았다. 그리고 다음 계단을 밟으려다가 미처 밟지 못한 발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소리를 질렀는지 안 질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정태의는 온 집안에 울릴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 * *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정창인은 멈칫했다.

 

문을 열자마자 피부에 와 닿도록 싸늘하게 따가운 공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책상 앞에 리그로우가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한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늘하게 식은 시선이 파랗게 보일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고작해야 1, 20분 방을 비웠을 뿐인데 그 동안 왜심경이 뒤틀려서 저러고 있는 걸까.

 

정창인은 방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잠시 갈등했지만, 달리 돌아서서 나갈 수도 없어 잠자코 들어갔다. 저렇듯 표정 하나 없는 얼굴 위로 눈동자만 파랗게 식어 있는 리그로우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정창인은 등뒤로 문을 닫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들어온 것을 알았을 텐데도 시선 한 번 주지않고 리그로우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ㅡ그의 형과, 그와, 정창인과, UNHRDO가 한 줄기로이어진ㅡ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에는 가능하면 직접 만나 이야기했다. 예전 그들 형제가 지구 반대편에 있을 때에는 보안 장치를 몇 겹이나 두르고서 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탐지를 방해하는 보안기를 그렇게 여러 겹으로 막아두면 누가 어떤통화를 하는지는 새어나갈 염려가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보안이 발동된 내역이 있었다는 사실은 잡히게 된다. 얼마든지 둘러댈 수는 있다고 하나, 그런 내역이 거듭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전화로는 대략적이고 간단한 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직접 만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인편을 이용했다. 그랬던 것이 습관이 되어, 리그로우가 홍콩으로 옮겨온 뒤로도 그들은 가끔 만나곤 했다. 기구의 특성한 UNHRDO에서는 보안장치가 된 외선보다 내선이 더 안전하다고 했지만, 같은 건물에 머무르면서 굳이 위험성이 있는 장치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일에 대해서 상의도 할 겸, 지부 내의 권력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겸, 오랜만에 리그로우가 정창인의 방으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하려는 차에 마오 리 인에게 연락이 와서ㅡ이 남자와도위와 같은 이유로ㅡ직접 찾아 갔다 왔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이야기는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 10여 분, 길어졌다 한들 고작해야 20분 남짓이었다.그 동안 책장이나 넘기며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리그로우는, 정창인이 방으로 돌아오자 표정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이건 별로 안 좋은데.

 

정창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가 괜찮은 결과를 끌고 왔던 기억은 없다. 게다가 상대르 이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놈이라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게 됐군. 책이라도 보고 있지 그랬어."

 

모르는 척 말했지만 리그로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생각에 잠겨 시선 하나 돌리지 않는다.

 

가만있자. 뭐가 거슬렸을까. 고작해야 몇십 분 사이에 이 모양이 된 원인이 있을 텐데.

 

정창인은 상관을 만나러 가느라 아닌 밤중에 챙겨입어야 했던 제복을 벗으며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하나씩, 짚일 만한 점을 떠올려 본다.

 

요 얼마간 리그로우의 상태는 과히 좋지 않았다. 사람이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도록 사나운 분위기를 두르고 다녔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정창인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날부터다. 정태의가 UNHRDO에서 떠난 그날 밤이었다. 그날, 정창인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조카는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러 왔었다. 그러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백 하나만 메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살짝 목례만 하고 돌아섰다. 정창인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그를 배웅했다.

 

ㅡ삼촌. 삼촌은 본인을 학대하는 것 같아요.

 

그날 4층에서 올라온 뒤 다시 방으로 돌아가며, 조카는한숨처럼 말했었다.

 

어쩌면 조카의 눈에는 자신이 그렇게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정창인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해도. 그러나 만일 그가 말한 학대가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맞았다. 비록 조카가 자신에게 화를 내든 원망하든, 정창인은 조카를 그리워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움과 다르다 하더라도. 정태의가 그렇게 떠난 뒤 정창인은 잠시 넋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소사호가 보잘 것없는 일들이지만 정창인 스스로 만들어낸, 치워버려야개운할 일들이다.

 

그는 리그로우를 찾아갔다. 어쩌면 그와 공범이라고 할수도 있을, 그를 도와준 남자다. 시각이 늦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는 깊이 잠들어 있다가도 자기 방 앞에 누군가 걸음을 멈추면 눈을 뜨는 남자다. 정창인은 거리낌 없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의외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욕실에 들어가 있거나 혹은 음악 따위를 듣느라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정창인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들어간다.'

 

정창인은 그렇게 말한 뒤 약간 사이를 두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숨조차 멈추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꿈속에서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그로우가 묶여 있었다. 침대 기둥에 엮은 수갑에 손목을 붙잡혀, 그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넋이 나간 듯 어렴풋하게 눈을 뜨고 있던 리그로우는 의식이 온전치 않은 듯 천천히 정창인에게 눈동자만 돌렸다. 그러나 동공이 또렷하지 않았다. 계속 흐려지는 의식을 안간힘을 써 되돌리려는 듯 연신 눈동자가 희번덕거린다. 동시에 정창인은 낯설고도 낯익은 냄새를 얼핏맡았다. 공조 장치에 많이 환기되었지만, 아직도 얼핏남아 있는 이 냄새는 클로로포름이었다. 리그로우의 의식이 혼탁한 이유가 그거였다.

 

누가 그를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정창인은 이 밎어지지 않는 광경에 가장 먼저 그 생각을 떠올렸다. 답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나왔다. 아무런 이유는 없다. 그저 그 물음이 떠오르자 직감적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녀석……. 나가기 전에 사고 한 건 제대로 치고 도망쳤구나. 정창인은 속으로 혀를 차곤 리그로우에게 다가갔다. 수겁의 열쇠는 보란 듯이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손을 뻗을 수 없는 리그로우의 시선이 닿는 지척에 둔 것도 심술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흐릿한 의식을 억지로 끌어오려는 이 남자의 눈에 과연 저 열쇠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정창인은 열쇠를 집어들다가 흘끗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정태의는 홍콩으로 나가는 배 위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 남자가 이대로 곧바로 뛰어나간다 해도 잡을 수 없는 시간이다.

 

정창인은 리그로우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협탁위에서 아직도 냄새를 피워올리는 클로로포름 수건을욕실 안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혹여 손목을 풀어주면, 아무리 클로로포름에 취해 있다한들 이 괴물 같은 남자라면 어떻게든 일어나 당장 부두로 달려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리그로우는 자유를 되찾고서도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 좀 괜찮나?'

 

정창인은 혀를 차며 물을 가져다주었다.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괴물 같은 녀석. 정창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클로로포름을 적신 수건은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냄새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저 휘발성이 강한 액체가 아직도 수건에남아 있다는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혼미하게 흐려지는의식을 억지로 다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제 형에게 '그놈은 인간 같지가 않다니까'라는 한숨 섞인 한탄을 들어도 어쩔 수 없겠다.

 

'……. 몇 시야.'

 

리그로우가 말했다. 이렇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정창인은 조용히 시간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리그로우 역시 시간을 가늠해보고, 늦지 않을 것 같으면 어떻게든 달려나가려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늦어버린 그 시간을 듣고, 리그로우는 침묵했다.

 

정창인의 부축을 받아 그는 일어나 앉았다. 물을 마시면서도 시선이 깜빡거린다. 물컵을 반쯤 비운 뒤, 그는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혼곤한 의식을 버텨내려는 듯 억지로 부릅뜨는 눈만 아니면, 앉은 채로 잠들었다고 해도 좋을 만치 꼼짝도 않았다.

 

이래서야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건 무리겠다고 생각하며정창인은 혀를 찼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조카를 생각했다. 어쩐지, 모순의 고사가 떠올랐다.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목표물을 놓칠 것 같지는 않았다.그러나 또한 정태의 역시, 정창인이 알고 있는 한, 마음을 먹고 움직이면 다른 사람의 손에 호락호락 채일 인간은 아니었다.

 

'당신, 대체 조카를 어떻게 키운 거야.'

 

잠든 듯 침묵하고 있던 리그로우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창인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목소리는 몹시 희미하게 흐려서, 마치 잠든 상태에서 몽롱하게 잠꼬대라도 중얼거린 것 같았다.

 

정창인은 예전에도 이 남자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었지, 하고 생각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끔 무모할 정도로 배짱을 부리지?'

 

리그로우의 말에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그래. 무모하다. 정창인이었더라면 아무리 지금 당장의 안전이 확실하다 해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미래를 생각하며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사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태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행동하는 걸 보면 정태의 역시 위험한 다리는 건너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혹은 만용으로 보일 만치 무모하게 앞서는 감정 그대로. 보는 사람이 섬뜩하며 또한 유쾌해지도록.

 

정창인은 가만히 리그로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얼굴이 부어 있었다.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뺨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부어 있었다. 정창인은 그 까닭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사고치는 김에 확실하게 치고 가자고 생각했었구나. 모쪼록잘 도망다니길.

 

리그로우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자신의 손으로 멍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하나, , 손가락을 꼽으며그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손이 어떻게 생겼나 탐구라도하듯이.

 

'그놈이 이걸 마음에 들어했었거든. 나는 다시 봐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리그로우가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다. 정창인은 이렇게멍하게 늘어진 리그로우를 처음 보았다. 그는 약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직한 숨이 새어나왔다. 묵직한 속을 풀어내는 듯 길고 낮은 숨이다. 리그로우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의식을 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해도 눈을 감으면 정신을 잃고 말리라는 걸 알면서,그는 눈을 감는다. 정창인은 그가 다시 깨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그는 내일 아침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를지도 몰랐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지금그는 무의식 쪽으로 급속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정창인은 걸음을 옮겼다. 불을 끄고 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잠에 취해 혼곤히 곯아떨어지는 나직한 목소리가 잔뜩 쉰채 새어나왔다.

 

'그놈은 내가 끔찍하게 싫었던 모양이지.'

 

정창인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너무도 낮고 희미한 목소리였다. 얼핏, 그렇게 말한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이 옳게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문 앞에 선 채 잠시 기다렸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대로 리그로우는 의식 너머로 다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창인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 뒤부터였다.

 

그 뒤로 리그로우는 사납고 거칠게 날이 섰다. 원래부터도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흉포한 남자였지만 그나마 아시아 지부에 교관으로 오면서는 많이 완하된 성싶었었다. 비록 의무반에 가볍고 중한 상처를 입은 부원들이 그치지 않게 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을정도로 심각하게 다치는 자는 한 손에 꼽을 만큼 나왔을 뿐이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리그로우가 아시아 지부로 영전해 올 때 '그놈을 교관으로 삼다니 UNHRDO가 미쳤나 보군', 하고 진지하게 말했던 카일도, 몇 달이나 지나도 죽은 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자 진심으로 놀라는 빛을 보였었다.

 

그러나 요 얼마간.

 

리그로우는 예전과 마찬가지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엔 그리 다를 것 없었다. 일정한 상황에 대처하는 표정도, 목소리도, 말투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서늘하나마 웃음도 짓고,느리고 무심하나 약간 비틀린 말투로 평연히 중얼거린다. 그러나 명백히 그는 거칠어져 있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쉽사리 그에게 시비를 거는 부원들도 나오지 않고있었다. 이미 둘이 죽어나간 탓이다. 사나흘,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교관이 어령에 들어갔다 나온 전대미문의 일도 벌어졌다. 딱히 이 부분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으나 누구도 느낄 수 있을 만치 선뜩하고 불안정해진 그 남자를, 지금은 정창인도 꺼려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더라면 리그로우는 정창인에게는 그래도 한 수 물러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은 누구라도 한 치만 거슬리면 두 말 없이 목을 비틀어 찢어내어버릴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쨌든 그는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고, 누군가 정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작정 손을 쓰지는 않았다. 정창인은 그에게 해를 입지 않을 정도가 얼만큼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낼 수 있었다. 사실 그 거리라는 것도, 일이 아니었더라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것이라 재기가 쉬웠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의 주말에 홍콩의 회사에 갔다 온 리그로우는 형에게서 조만간에 기별이 올 것 같다고 말할 바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외선으로 짧게 연락이 왔다며, 밤늦게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막 이야기를 꺼내려던 차에 정창인이 잠시 상관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 와 보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그로우가 섬뜩한 공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정창인은 제복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다시 돌아서며 천천히 리그로우를 살폈다. 그때, 리그로우가 문득 불쑥중얼거렸다.

 

"당신에게 전화가 왔더군.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제법 오래 신호를 끄는 외선이기에 대신 받았어."

 

정창인은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기분이 험악해진 원인의 실마리가 보였다. 외선으로 걸려온 전화라. 이 시간에 외부에서 전화를 해 올 만한 사람이라면 몇 명 있었다. 그 가운데…….

 

"…ㅡ."

 

정창인은 아는 사람들을 하나씩 짚어보다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일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리그로우가 선뜩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도.

 

"역시 당신이었나?"

 

그가 물었다. 정창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쉰다.

 

"그래. 내가 도왔어. …ㅡ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조카 하나를 잃고 말았을 테니까."

 

리그로우는 말없이 정창인을 쳐다보았다. 파랗게 가라앉은 그 시선이 싸늘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관두고, 원하는 것만 짧게 물었다.

 

"어디 있어."

 

"나도 알 수 없어."

 

리그로우의 말에 정창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그러나 웃기지 말라는 듯 리그로우의 매서운 시선이 날아와, 그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혀를 찼다.

 

"정말이야.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너를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려 들 만큼 바보가 아니고, 내 조카는 자신의 꼬리가 밟힐 여지를 나에게나마 남겨두고 갈 만큼 바보가아니지."

 

"……."

 

리그로우는 그 뒤로도 한동안 정창인을 바라보았지만,그에게 더 따져 물어도 대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 끝에 초조함이 묻어 나온다.

 

"이름과 신분을 새로 만들어서 떠났는데, 나도 그 아이가 어떤 이름을 쓰는지는 알 수 없어. 한 달에 두어 번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날짜를 지정한 것도 아니고. …ㅡ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내가 그 아이의 뒤를 캘 수있을 만한 징검다리가 되는 건 내키지 않았거든."

 

정창인의 말에 리그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창인은아무렇지 않은 듯 리그로우를 보면서도 내심 가슴속이서늘해졌다. 정태의를 저버리면서까지 네게 도움을 주는건 사양이라고, 정창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 당연하고도 자유로운 의견조차도 지금의 이 남자에게는 위험한 수위였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 끝에 약간 더 힘이들어가는가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뚝, 손을 멈춘 리그로우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정창인은 그의 눈이 얼마나 소름끼칠수 있는지를 알았다.

 

"태이는 여기에서 간만 키워 나간 모양이야……. 옹골자체 얘기하더군. 내 목을 따버리고 싶었던 게 여러 번이라고."

 

리그로우는 웃고 있었다. 입매만 틀어올려, 어쩌면 유쾌한 듯이 보일 수도 있도록 그는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정창인은 그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담담히 따라 웃는다.

 

"왜 새삼 화를 내고 있어, . 그런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텐데. 그런 말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잖아. 그렇게 앵앵거리는 놈들은 신경 쓸 것도 없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아랑곳 않았었지 않은가."

 

리그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창인의 말마따나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자만 해도 숱하게 많았기에, 뒤에서 말만 던지는 자들까지는 크게 개의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리그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상하게 말했다.

 

"그래, 당신 말이 맞군."

 

그 말을 인정은 하나 납득은 가지 않는다는 투로 애매하게 중얼거린 리그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정창인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리그로우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라…….

 

정태의가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정창인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리그로우를 보았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로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는데도,미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우울하기라도 한 듯이――라고 생각하던 정창인은, 픽 웃고 말았다.

 

그때 문득, 리그로우가 정창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똑바로 바라보는 그 시퍼런 시선을 정차인은 의아하게 마주보았다. 이윽고 그는 나직하나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을 징검다리로 쓰지는 않겠어.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당신을 죽여서라도 모든 걸 다 끄집어내면 좋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은 안 될 테고……. 그놈에 관련해서는 더 당신이 신경 쓰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그건 고맙군."

 

정창인은 미심쩍게 말했다. 그러다가 살짝 낯을 찌푸렸다. 그가 입을 열기 한 발 먼저, 정창인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이 간 탓이다. 그리고 리그로우는 정창인이 예상했던 바 대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태이를 찾아내면 그놈을 어떻게 하든, 당신은 일절 상관하지 마. 이건 그 녀석과 내 문제이니까당신은 상관할 일도 아니고, 상관한다고 하면 정당하지않지. 그렇지 않은가?"

 

정창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대답을 추궁하며 뚫어져라 바라보는 저 새카만 눈은 푸르스름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고, 단서를 덧붙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눈이다. 일레이 리그로우가 정태의를찾아낼 수 있다면, 정창인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정창인에게 바라는 바였다. 정창인은 물끄러미 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담담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해."

 

정창인의 대답이 떨어지자 리그로우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책상 위에서 깍지 꼈던 손에 천천히 힘을 주는 걸 보며, 정창인은 내심 쓰게 혀를 찼다.

 

그러나 정창인은 실상, 리그로우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상으로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사람의 삶에, 그가 원치도 않았는데 개입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또한 정태의는 자신의 삶에 섞여드는 사람들을 사랑할지언정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후자에 가까웠던 한 청년을 떠올렸다. 정태의가 이곳을 떠나자 바로 그 다음날,그 청년도 찾아왔었다. 이미 집무실에 사직서를 내고 오는 길이라며, 그 길로 부두로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그에게, 리그로우와 마찬가지 것을 물어보았다. 정태의의 행방을.

 

결국 대답은 얻지 못하고 떠난 그 청년은, 정창인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표정 없는 그 얼굴에 독처럼 서린 오기를 보며, 정창인은 혀를 찼었다. 그러고 보면 그 청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창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은 이미 자정을 훨씬 넘어 새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카일에게선 무슨 연락이 왔다고?"

 

 

 

* * *

 

 

 

정태의는 불행했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그 경우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잘 것 없고 대수롭잖은 일일 때가 많았다.

 

정태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몇 년 뒤에는 지금이 때를 대수롭지 않은 기분으로 떠올릴 수 있을 거다.기껏해야 그 이야기를 하는 몇 분 정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욕설을 중얼거리겠지만 그 뿐, 이 불행이 나중에도 여전히 같은 크기의 불행으로 느껴질 리는 없었다.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불행했다. 몇 년, 아니 몇 년까지 갈 것도 없이 몇 달만지나도 이 불행을 고스란히 되새기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 그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불행은 그가 발목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이 더운 계절에 깁스를 한 탓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든가, 발이 근지럽다든가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의 불행은 또한, 발목이 아파서도 아니었다. 이미 아픈 데에는 이력이 나서 이 정도는 눈썹 하나 까딱 않을수 있었다. 이 집에서 떠나려다가 발목이 작살나는 바람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는 것도 불행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정태의는 입이 과히 무겁지 않은 옛동료 때문에 수없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이곳이 싫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집에서 더 묵을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좋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놈의 멱살을 붙잡고 다시 한 번 '어디 가서 내가 여기 있단 사실을 입 뻥끗이라도 하면 네 그 빌어먹을 이쁜이들은 죄다 압수되어버릴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해준 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 집에 도로 눌러앉은 정태의는 불편한 발로 정원 산책도 즐기고 뜰에서 낮잠도 자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조금 더 만끽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묵는 것, 그 자체는 아니라 하나, 거기에서 그의 불행은 비롯되었다.

 

그가 머무르는 방의 옆방에 모러가 머물고 있었다. 바로 그, 입이 과히 무겁지 않은 옛동료다. 사이 역시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그 놈이 옆방에 묵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벽을 투시해서 그놈을 볼 것도 아니고, 수시로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벽이 얇은 것도 아니고, 옆방이라는 사실 자체는 괜찮았다. 정태의의 불행은 근원적으로, 그놈과 아는 사이라는 데에 있었다.

 

"아아, 너무 아름다웠어. 어떻게 그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지? 그 아이는 이 세상에 떨어진 천사야. 외롭고 쓸쓸하게 잠들어 있었지만내 손이 닿자마자 그 어떤 꽃보다도 화사하게 피어난 그 모습이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ㅡ."

 

정태의는 옆에서 영문 모를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넋을잃고 있는 모러를 흰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놈이 이런 헛소리를 한 지 벌써 한 시간째였다.

 

한 시간 전, 정태의는 평화롭게 풀 옆의 비치벤치에 앉아 멀쩡한 발을 가끔 풀 안에 담가 찰방거리곤 하면서소박하게 홀로 놀고 있었다. 가끔 정원사가 지나가며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지면 그 웃음에 정태의도 마주 웃어주고, 리타가 지나가다가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냐고 야단을 치면 그녀에게도 빙긋이 웃어주면서 정태의는 즐겁고 안락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시간이 깨어진 게 한 시간 전이었다.

 

모러는 오늘 오전, 카일과 함께 나갔다. 정태의는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몰랐지만 요전에 카일이 회사에서 새로 개발하고 있는 총기를 모러에게 구경시켜주기로 약속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 약속이 회사 사정 때문에 미루어져 며칠 늦어지다가 오늘에서야 지켜진 것이다. 총이든 무기든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정태의는 아침부터 모러가 나가고 나자 눈에 거슬리는 녀석도 없다며 기분 좋게 놀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막상 미운 사람이 보이지않으면 그 마음이 관대해지는 게 사람인 탓에, 모러 그 녀석 지금쯤 즐거워하고 있겠군, 기왕 간 것 실껏 쏘아보고 오려무나, 하고 너그럽게 생각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줬던 스스로가 미워질 지경이다.

 

정오를 조금 넘어 이른 오후에 홀로 돌아온 모러는ㅡ카일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고 한다ㅡ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멍한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머리에 꽃이 수십 송이는 핀 것 같은 표정으로 아스라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 좋긴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몸이 느긋해지니 마음도 느긋해진 탓에 그 녀석에게 착하게 말을 걸었다. 보려던 거 잘 보고 왔냐고.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괜히 물었다.

 

모러는 멍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더니, 무서울 만치빠르게 정태의에게로 다가왔다. 갑자기 코앞까지 확 다가오는 모러를 보고 흠칫 놀라 약간 뒤로 물러앉은 정태의였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정태의의 바로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모러는 정태의의 손을 꼭 잡았다. 눈앞에 있는 게 정태의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처음 봤어. 처음 본 순간 난 알 수 있었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틀림없이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질수 있을 거라는 걸, 난 확신할 수 있었어. 아아. 그 매끄러운 바디며 수줍은 그립, 요염한 공이치기……."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스레 외치는 모러를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마지막의 그 '매끄러운 바디며 수줍은 그립, 요염한 공이치기'가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이놈이 총기 시작품을 보러 갔다가 시범사격장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모러가 일컫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오늘 보고 왔을 그 총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태의는 경악스런 얼굴밖엔 달리 보여줄 수 없었다.

 

이놈이 열성적인 총기 마니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총만 쥐어주면 환장을 하고 기뻐하면서 희희낙락 혼자서도 잘 노는 놈이라는 소문은, 이미 UNHRDO에 있을 때부터 온 지부 안에 뜨르르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정태의는 총 이야기를 하며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몸을 움칫움칫 움츠리면서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는 모러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뭔가 이상한 걸 본 것 같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저놈의 사타구니가 부푼 듯이 보였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공포였다.

 

예전에 이 비슷한 종류로 공포스러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시골에 사는 농부가 닭을 상대로 성욕을 푼다는, 괴담같은 소문이었다. 그 당시 그 말을 듣고도 뜨악한 얼굴로 '으와, 설마 세상에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이제보니 그게 딴 세상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것과 그렇게 하는 걸 수간이라고 했었지, 그러면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총간인가.

 

머릿속으로 엉뚱한 생각만 맹렬하게 돌리면서 정태의는 모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모러는 공상의 세계에 빠져 홀로 황홀경에 젖은 채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정태의가 자기 대신 허수아비를 하나 갖다놔도 아랑곳 않고 계속 떠들 것 같았다. , 이 변태 놈아. 너는 마니아란 이름도 아깝다. 이 총기 변태야.

 

정태의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슬슬 문지르면서도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모러는 행복해 보였다. 모러는 어지간히 행복하고 기분이 좋은지, 심지어는 정태의의 손을 꼬옥 쥐고 상냥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오늘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모러를 털어내려고 휙휙 손을 내저었지만 미친놈이 힘이 좋다고, 평소 안 그렇게 보이던 모러는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팔을 뿌리치다 못해 이것 좀 놓으라고 소리쳤지만 황홀경에 빠진 모러의 귀에는 닿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힘이 빠져서 포기한 정태의는 모러에게 손을 잡힌 채 한 시간이나 그 옆에 꼼짝없이잡혀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잖아도 발목이 불편해서 거동을 잘 못하게 되니 기분이 썩 편하지는 않아 이렇게 혼자 평화롭고 소박한 즐거움을 즐기는 판인데, 옆에는 저 밉살스러운 놈이 눌러앉아 정태의로서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어서도 이해 못할 이야기를 혼자 즐겁다고 즐줄 늘어놓고 있었다. 정태의는 불행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겨우 그 찬사는 바뀌었다. 정확히는찬사가 바뀐 게 아니다. 호소하는 말의 종류가 바뀐 거다.

 

"나는 불행해…….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 아이와 사랑에 빠질 수 없다니……. 그 아이와 사랑에 빠지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나는 어떡하면 좋아……. 나는 지금 그 상태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카일은 저 상태로는 내보낼 수 없다고 고개를 젓잖아. 빨라야 1년은 족히 걸릴 거라는데, 그 동안 난 어떻게 기다려, 이 찢어지는 마음을 안고."

 

숫제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모러는 침울하게 울먹거렸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런 모러를 흰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그나마 마음에 깨알 같은 자비가한 조각 남아, 마음속에 담긴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꼴값한다……. 아주 주접을 다발로 떨어라.

 

아무리 가엾은 얼굴로 눈물짓는다 해도 한 시간이나 시달리고나자 도저히 고운 눈으로 모러를 볼 수 없게 된정태의는 진짜로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러를 보면서도 가엾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총간, 총간,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세상에 하 많은 인종들이 있다곤 하지만 어째 요 얼마 동안 만난 놈들은 죄다 이렇담. 차마 남에게 고운 얼굴로는 말하지 못할 습성들이 꼭 하나씩은 있잖아.

 

고개를 내저으며 한탄하던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올바르게만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남에게 말 못할 일들이 한둘 정도는있는 법이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의 손을 붙들고 울먹거리고 있는 이놈은 남에게 말 못할 일이 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정 그렇게 갖고 싶으면 일레이에게 부탁해 보든가."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러의 손을 어떻게하면 떼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모러는 뭔가 방법을 제시해주는 투의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좀 전에 분명히 눈물 짓는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눈이 보송보송하네 그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미친놈은원래 다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모러는 정태의가 원하던 대로 그의 손을 놓았다. 거의 한 시간 만에 손이 떨어져나가자 정태의는 휴우, 길게한숨을 내 쉬었다. 손이 끈적끈적하다. 발 아래에 찰랑거리는 풀에 슬쩍 손을 담그려고 허리를 굽히던 정태의는, 그러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정태의의 손을 놓은 모러가 이번에는 정태의의 어깨를 움켜쥔 탓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깨를 움켜쥐고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번뜩거렸다. 정태의는 이놈을 그냥 둘러메어쳐서 풀에 빠뜨려 버릴까 잠시 생각했다. 발목만 좀 멀쩡하게 힘이 들어가면 그렇게 했을 텐데, 하고 아쉽게 깁스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귀찮은 듯 모러의 손을 어깨에서 치웠다. 그러나 정태의가 어깨 위를 손등으로 털어내자 순순히 손을 놓는가 싶던 모러는 정태의의 손이 비키자마자 다시 그의 어깨를 움켜쥔다.

 

이 놈을 그냥…….

 

기왕 작살난 발목, 회복 좀 늦어질 각오하고 그냥 딛고일어서서 이놈을 메어쳐버릴까. 풀장에 던져 넣으면 아주 시원해하겠지. 이놈을 위해서라도 이놈의 머리를 좀식혀주는 게 인간의 도리 같았다.

 

정태의는 모러의 멱살을 턱 잡았다. 그리고 빙긋 웃어주곤, 아직도 머리 나사가 반쯤 불려 있는 그놈을 그대로 뒤돌아 메어쳐버렸다. 호쾌하게 반원을 그리며 허공에 부웅 떠오른 모러는, 그대로 풀장에 엄청난 소리를내며 떨어졌다. 물보라가 일순 확 피어올랐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그냥 봐서는 도무지 그렇게 안 보이는ㅡ잘 알고 보더라도 도무지 그렇게 안 보이는ㅡ놈이었지만, 모러는 UNH RDO의 촉망받는 부원이었다. 몇 단계에 걸친 엄격한 시험을 거쳐 들어간 유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정태의는 모러를 메어쳐 풀장에 던져넣는 순간, 어깨에서 잠시 떨어지는가 싶던 손이 덥썩 자신의 멱살을 잡고 살짝 위로 끌어 올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차…ㅡ.

 

혀를 찼지만 이미 늦었다.

 

모러에게 잡힌 정태의는 모러의 뒤를 이어 그대로 풀장에 머리부터 다이빙했다. 앞선 물보라와 거의 동시에 또 한 번의 물보라가 성대하게 피어올랐다.

 

"…ㅡ."

 

정태의는 물속에서 귀신처럼 직선으로 주욱 솟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바로 연달아 떨어졌던 터라 물 속에서 정태의에게 깔려 그보다 한 발 늦게 모러가 솟아올랐다.

 

"난 네가 참 싫다, 모러……."

 

". 나도……."

 

두 사람은 이렇게 둘의 마음이 맞는 일은 처음일 거라고 동시에 생각하며 우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풀은 그리 깊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돌아가면 수심 2미터는 되었지만 비치벤치가 있던 쪽은 정태의가 서면 명치까지 올 정도의 깊이였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아래를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물 안쪽에 깁스를 한 자신의 발목이 보였다.

 

"젠장. 너 때문에 깁스 다 젖었잖아. 이거 어쩌라고."

 

"이게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그래. 네가 먼저 날 풀장에다 메어꽂으려 들었잖아!"

 

"그러게 왜 손 놓으랄 때 안 놨어!"

 

정태의와 모러는 한동안 언성을 높이며 옥신각신 싸웠다. 두세 대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주먹으로 물을 걷어내면서 얼굴을 때리니까 더 아팠다. 이게 물볼기의 원리인가 보다, 하고 머리 한 구석으로 생각했다.

 

몇 방 서로 주먹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먼저 때렸던 정태의가 먼저 주먹을 거두었다. 공평하게 서로 세 대씩만 맞지, 라고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자신에 더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모러도 주먹을 거둔다.

 

정태의를 혀를 차며 풀에서 나갔다. 더운 오후라 춥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흠뻑 젖었다. 깁스에서 물이 줄줄새어나왔다. 이대로 볕에 내놓고 잘 말려 볼까, 아니면그냥 병원에 가서 자르고 다시 감아달라고 할까 고민하면서 정태의는 비치벤치에 앉은 채 물끄러미 시퍼런 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일레이한테 부탁해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정태의의 뒤를 이어 풀에서 나온 모러는 옷을 벗어 물을 죽죽 짜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정태의는 이제야 이놈이 좀 제정신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찬가지로 부루퉁하게 말했다.

 

"일레이가 이 집 아들이잖아. 몰랐어?"

 

"그거야 알지만 그렇다고 그놈한테 부탁하면 뭐가 나오냐 이 말이지."

 

". 전에 말하는 거 들으니까 회사에서 만든 물건, 시판하기 전에 시작품 보고 마음에 들면 미리 써 본다고말하던데. 즉 미리 빼낼 수 있단 소리잖아."

 

정태의가 심드렁하게 한 말에 모러는 부리부리하게 정태의를 노려보다가,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정태의는 눈매를 찡그리며 그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농담이었는데 농담으로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모러는 심각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미친놈한테 총 하나 내놓으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 않냐는 말이지."

 

"……. 당연히 어렵겠지……. 너 진짜 그 총이 갖고 싶은가 보구나."

 

정태의는 안쓰럽게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발휘해 제 몸 위험한 곳에는 얼씬도 않는모러인데, 얼마나 그 총을 보고 마음에 들었으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여 놓을 생각마저 하면서 간절히탐낼까. 정태의는 끙끙거리며 다시 고민에 잠겨드는 모러에게 혀를 차며 조금 더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차라리 어떻게든 카일을 설득해 보지. 비매에 시작품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너 그거 네가 가질 거지 바깥으로 내돌릴 거 아니잖아."

 

"당연하지! 그 사랑스럽고 고아한 아이를 어떤 놈 손에내돌리라고! 말도 안 되지!"

 

모러는 정태의의 말에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정태의는 이놈이야말로 물볼기를 호되게 맞아야 하는데, 하고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너 개인 소장할 거라면, 그렇게 말해서 카일을설득해보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 보든가. 일레이에게 말하는 것보다 그 편이 백 배는 더 가망성 있겠구만."

 

"아니야……, 그 반대야."

 

정태의가 투덜거리는 말에 모러는 어둡게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가 미심쩍게 쳐다보자 모러는 절망스런 얼굴을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이미 해 봤다구……, 7년 전, 아직 쏘냐가시판되기 전에, 한눈에 반한 그녀를 어떻게든 앋고 싶어서 별 짓을 다 했어. 회사 앞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도않고 드러누워 있어도 보고ㅡ경비원이 끌어내어도 계속 가서 누웠지ㅡ, 집 거실에 진치고 앉아서 카일을 볼 때마다 매달리면서 울어도 보고, 심지어는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서 이 집 욕실에서 손목도 그었단 말이야.……그래도 안 된다며, 안 주더라."

 

쏘냐가 누군지는 몰라도 십중팔구 총기이려니 생각하고 있던 정태의는 이어지는 모러의 말에 경악했다. 이놈은 정말로 제대로 정신나간 놈이다. 그런데 이놈의 정신나간 짓을 그렇게 오랫동안 대응해주고도 끄떡없었던 카일도 굉장하다. 정태의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싶어지는 마음에 가슴 주머니를 뒤적였다. 물에 흠뻑 젖은 담배가 도르륵 굴러 나왔다.

 

 

 

* * *

 

 

 

여름이라는 점이 별로 안 좋았다. 게다가 올해는 이상기온이니 뭐라느니 하면서 유난히 더웠다.

 

지금도 머리 위로 내리쬐는 빛이 몹시 세차서 현기증이날 것 같았다. 정태의는 그늘만 골라 걸으면서도 머리가 뜨거워 한숨을 쉬었다. 발목이 욱신거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침에 카일이 차를 준비해준다는 걸 병원이 그리 멀지도 않아 거절했는데 이제와서 조금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말한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긴 하다. 덥다고는 하지만 병원까지는 걸어서 20여 분 거리였던 것이다.

 

병원에 가서 깁스를 풀고 새로 감은 뒤 절뚝절뚝 걸어오면서,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원인을 만든 게 잘못이었다. 모러를 풀장에 던져넣으려들지 말 걸. ……하지만 그 주절거리는 헛소리를 더 듣고 있었다간 머리가 이상해졌을 거다.

 

풀에서 나와 옷은 갈아입었지만 깁스는 어떻게 갈아신을 도리가 없었다. 물에 푹석 젖긴 했지만 그냥 잘 말리기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볕 아래서 말리기도 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초등학교 때에 미술 시간에 석고나찰흙 따위로 뭔가를 만들면 응달에서 말리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 서둘러 그늘로 발을 옮기기도 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깁스는 그럭저럭 말랐다. 안쪽이 축축하고 찝찝하긴 했지만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괜히 귀찮게 깁스 풀고 다시 감고 할 것 없이 이대로 둬도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정확히는 정태의가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리타가 억지로 그 생각을 뜯어고친 거다.

 

'집에서 냄새가 나지 않나요. 게다가 푹 젖었던 걸 그대로 착용하고 있다니, 위생상 좋지 않습니다. 어서 병원에 가서 새로 하고 오도록 하세요.'

 

침대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정태의를 깨우자마자 리타가 서슬퍼렇게 한 말이 저거였다. 잘 자다가 두들겨맞고 깨어나 멍하니 리타를 올려다보던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발에서 냄새가 좀 난다는 걸 깨달았다. 젖기도 했거니와 심지어 여름이다. 사람이 자기냄새에는 둔한 편이란 걸 생각해 보면, 자기 코에 냄새가 날 정도면 다른 사람에게는 꽤 지독하게 날 터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식당으로 가자, 거기에는 카일과 모러, 그리고 어제 처음 본 뉴페이스가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손님이 늘바뀐다고는 하지만 숫자는 그럭저럭 일정하다. 여기 혹시 예약 숙박제인가.

 

늘 않는 자리에 앉자, 그 옆에서 문득 모러가 눈짓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내 방까지 들려오더라. 너 깁스에서 냄새난다며. 흐흐,병원가서 갈아야겠네. 오늘 날씨 우라지게 덥다던데, 아픈 다리 끌고 병원 갔다 오려면 고생 좀 하겠다.'

 

그러자 뉴페이스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카일은돌아보면서 상냥하게 권해주었다.

 

'힘들겠군. 페터에게 말해둘 테니 차 타고 갔다오게.'

 

정태의는 멀쩡한 발을 뒤로 꼬아서 반대편 옆자리에 앉은 모러의 발을 지그시 밟아주며 카일에게 웃으며 손을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가까워요. 걸어서도 금방 갔다올 수 있는데요, . 운동하는 셈치고 갔다 오죠.'

 

'그래, 그래도 일단 페터에게 말은 해 두지.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그에게 말해.'

 

, 감사합니다, 라고 웃으면서 정태의는 파닥거리는 모러의 발등에서 슬쩍 발을 치웠다. 넉넉하게 웃음 짓는 상냥한 집주인을 바라보며, 정태의는 문득 어제 모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ㅡ심지어는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서 이 집 욕실에서 손목도 그었단 말이야. ……안 주더라.

 

다시 생각해도, 모러 이놈도 참 골때리는 놈이다. 그러나 거기서 의외였던 건 카일이었다.

 

물론 냉철하게 칼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건 은연 중 느끼고 있었다. 아직 40대인 저 젊은 나이에 그 정도 규모의회사를 이끌어가려면 지금 이렇게 보이는 것처럼 다정하고 친절하기만 해서는 당연히 안 된다. 게다가 모러 놈이 했다고 하는 그런 유치한 협박에 넘어가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여태 정태의에게 그런 얼굴을 보인적은 없는 탓인지, 의외롭게 느껴졌다.

 

하긴 모든 걸 다 떠나서, 삼촌이랑 20년 넘게 친구 할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정태의는 숙부가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빵을 한 조각 찢어 덥썩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모러.'

 

정태의가 맨빵을 씹고 있는 옆에서 버터를 끌어안고 빵에 발라대고 있던 모러는 카일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들었다. 어젯밤 내도록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랑 이룰 수 있지' 하고 끙끙거리던 모러는 밤을 샜는지 퀭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카일이 부르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뻔히알면서도, 뭔가 기대에 찬 눈으로 돌아 본다.

 

변태라지만 저렇게 강아지 같은 눈으로 보는 걸 보니 좀 가엾구나…….

 

정태의는 빵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러면서 모러에게 눈을 흘겼다. 원래 빵에 버터를 바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버터는 필요 없는데도, 모러는 지레짐작해서 버터를 저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 빼앗아 갈까 두렵다기보다는 '너는 먹지 마'라는 유치한 몸짓이었다.

 

너 혼자 다 먹어라. 먹고서 엉덩이에 살이나 통통하고 붙으라지.

 

정태의는 코웃음을 치며 빵 한 조각을 더 뜯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대로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먹던 빵이목에 걸린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얼마 전까지 UNHRDO 아시아 지부에 있던 사람인데, 혹시 정태의라고, 알고 있나?'

 

, 소리를 안 내는 게 고작이었다.

 

갑자기 빵이 목을 꽉 메워 숨이 막혔다. 정태의는 온 힘을 다해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슬쩍 물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얼른 물을 삼켜 목에 걸려있던 빵을 넘겼다.

식도를 타고 꾸물꾸물 내려가는 빵덩어리의 감촉을 잠시 느끼면서, 정태의는 낯선 화제에 흥미를 느끼는 척 궁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왜 갑자기 카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지. 모러는 빵에 버터를 바르다 말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천천히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이런 눈치도 없는 놈, 거기서 내 얼굴을 보면 어떡해!

 

정태의는 속으로 고함을 지르며 모러를 빤히 쳐다보았다. '? ?' 하고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이면서. 그러자 모러는 곧 무심하게 버터그릇을 내밀었다.

 

'아니……, , 조금 전부터 먹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쳐다보길래. ―――아, 누구라고요? 정태이? . 알아요.저랑 같은 팀이 아니라서 얼굴이랑 이름만 아는 정도지만.'

 

모러는 평연하게 정태의에게 버터그릇을ㅡ반 티스푼도남지 않은ㅡ건네주곤 다시 카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태의는 모른 척 알량한 버터를 빵에 바르는 시늉을 하며 울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모러는 여기서 서툴게 정태의의 바람을 깨어버릴 생각은 없는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의 말에 무난하게 대답했다.

 

'그 청년 말인데, 혹시 뭔가 특이한 점이나 그런 거라도있었나?'

 

'글쎄요……, 저는 소문이 어두워서요. 그런데 별다른 소리가 안 들렸던 걸로 봐서는 무난했던 모양이에요. 뭐 다른 부원들과 다른 거라고 굳이 꼽자면, 정창인 교관님 조카라는 정도? . 그렇지. 정재이 연구원의 동생이지요. 그런데 그놈은 아주 평범했어요. 정말로 그 소문난 천재의 동생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멍청한 구석도 있고, 성질도 더럽고, 총 귀한 줄 모르고…….'

 

줄줄 읆어대는 목소리에 점점 사감이 섞였다. 정태의는벌레씹는 기분으로 빵을 씹었다.

 

하지만 갑자기 카일이 자신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걸까. 정확히는 이 자리에 있는 김영수가 아니라 UNHRDO에있던 정태의라는 인간에 대해 알려고 드는 걸 테지만.

 

UNHRDO에 있던 정태의, 라고 한다면 아마도 모러가 알고 있을 만한 정보는 카일도 알고 있을 거다. 아니 모러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가족 관계며 나이, 출신 학교 등등. 그러니 아마도 카일이 알고 싶어하는 건 그런게 아닐 터였다. 그러나 카일은 그리 심각하진 않고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본 것인 듯,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듣자 하니까 그 청년이 일레이의 교위였다고 하던데……혹시 동생과 뭔가 트러블이 있었나?'

 

'글쎄요. 개인적인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적으로는 별 말 없었어요. 오히려 그 미치광이…ㅡ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릭의 그 특이한 성격 아래서도 잘 버틴다고 다들 그랬었어요.'

 

모러는 태연한 얼굴로 일레이를 그의 형 앞에서 미치광이라고 부르면서ㅡ너무나 태연하게 미치광이라고 또렷하게 발음한 뒤 사과하는 걸 보니 실수가 아닌지도 몰랐다, 모러 이놈도 나름대로 난 놈이다ㅡ고개를저었다.

 

그 외에는 글쎄요,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는걸요, 하고 덧붙이며 모러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정태의는 조금 고마운 마음이들었다. 그래도 정태의에 대해 다른 곳에서 말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잘 지키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방 곳곳에 숨겨져 있는 그 이쁜이들 때문이라 할지라도. 정태의는 갓 나와 김이 피어오르는 생선에 칼을대면서 모른 척 애매하게 물었다.

 

'뭔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그 동생분께.'

 

그러자 카일은 약간 낯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녀석이 얼마 전부터 사람을 찾아내라고 회사 쪽으로 아주 닦달을 해 대거든. 우리 회사 말고도 다른 정보 기구 쪽으로도 알아보고 있는 모양인데,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해. 무조건 찾아내기나 하라니, . 게다가 행방도 묘연하거든.'

 

그래서 혹시 같은 지부 안에 있었던 모러라면 알지 않을까 하고 물어봤던 거지, 라고 덧붙이며 웃음 짓는 카일에게, 정태의도 그렇군요, 라고 웃음을되돌려주었다.

 

옆에서 모러의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너 정말 무슨 짓을 하고 튄 거냐, 그런 시선이다. 정태의는 꿋꿋이 모른 척했다. 그러다가 그 시선이 도통 거둬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모러를 쳐다보고 다시 웃으면서 '? ?'라고 속삭여줬다. 그제야 모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린다. 무슨 짓을 하고 튀었느냐. 묶어놓고 덮치고 뺨 때리고 욕해주고 튀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등 뒤에서 일레이가 나타날 것만 같은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ㅡ딴 사람을 때리고 도망쳤다는 게 뭐 남한테얘기할 만한 일도 아니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집이 저만치 다가와 있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이 더운 길을 걸어가자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길은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모든 인고에는 끝이있는 법이다. 정태의는 목발을 짚은 채 절뚝절뚝 걸으며, 그래도 회복은 빠른 편이라니까 조금만 견디면 다시 편해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위한을 했다.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는 다 나을 거라고 병원에서도 그랬다.

 

그러면 그때야말로 형을 찾으러 떠나 볼까. 애초에 숙부에게 말했던 기간은 훌쩍 넘어버리겠지만, 이제는 숙부와 약속했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정태의 자신이 형을만나고 싶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집으로 먼저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찾아다니는 편이 낫다.

 

발목이 나을 때까지는 집에서 책이나 보면서 조용히 칩거하고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점차 다가오는 집을 향해 부단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카일의 저택을 낀 길목 저편에서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길목은 차 두어 대가 넉넉하게 스쳐갈 수 있는 말끔한 길이었지만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러나 널따란 저택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라 차가 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 한 번 정원사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근처에 있는 집의 주인이 죽어 장례를 치렀을 때 한 번 길이꽉 막혀 혼잡했던 적이 있었다고만 들었다.

 

지금은 평일의 낮 시간이었다. 지나 다니는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길 저 앞에서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다.

 

차는 조금 전까지 길 끝에 세워져 있었다. 별로 유심히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저기서 내리거나 저기에 올라타는 모습은 못 본 것 같다. 그렇게 세워져 있던차가 정태의가 집으로 다가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스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차가 점차 다가올수록 의혹은 짙어졌다. 차는 은색 밴이었다. 사람 대여섯이 넉넉하게 타고 뒤에 짐도 제법 실을 수 있는 밴은, 유리가 온통 시커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꼭 연예인이 타고 다니는 차 같네, 그런데 뭔가 좀 느낌이 이상하다, 고개를 기울이며 그게 뭘까 생각하던 정태의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그 남자는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그 옆의 조수석에앉은 남자 역시,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ㅡ!"

 

정태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저 차는 자신을 향해서 오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차가 아니라, 분명히 정태의를 목표로 잡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 좋은데. 순간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일단 무엇보다 자신을 쳐다보는 저 남자들의 눈빛부터가 그렇다. 웃음기 하나 없이 냉정했다. 결코 호의로 다가오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리고 냅다달리기 시작했다. 목발로 지탱하던 발을 바닥에 내딛기가 무섭게, 체중이 실린 발목이 부러질듯이 아팠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우물거릴 때가 아니었다.

 

정태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차도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던 차는 그대로 중앙성을 넘어서 정태의가 있는 보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태의가 달리는 방향의 조금 앞에 차가 서더니, 그 안에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남자가 내렸다.

 

"당신들 뭐야!"

 

정태의는 자신을 움켜쥐려고 팔을 뻗는 남자의 머리를 목발로 후려갈겼다. , 남자가 머리를 감싸쥐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 틈에 정태의는 다시 달렸다.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아주 어릴 적, 형 때문에 가끔 정태의까지 유괴 당할 위험에 빠지긴 했지만 철이 든 뒤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 남자들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죽이려는 건지, 혹은 납치인지. 그러나 저 차량에 저 행태라면 십중팔구는 후자일 거다. 납치라면 어째서인지.

 

일레이인가!?

 

불현듯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일레이는 이런 짓을 할 인간은 아니었다. 만일 일레이가 꾸민 짓이었더라면, 저 차 안에서는 일레이 본인이 내렸을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누가. .

 

"잠깐, 혹시 사람 잘못 본 거 아냐?!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돈도 없어! 우리 집 가난해!"

 

젠장, 아니면 카일의 집에서 나오는 걸 보고, 내가 이 집 가족이라고 생각했나. 그래서 부잣집에서 돈을 우려먹으려고……. 하지만 범죄를 획책할 때엔 적어도 어느정도의 시간을 두고 알아보게 마련이다. 유럽인과 동양인이 가족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그 가능성도 패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형인가.

 

그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게 떠올랐다. 비록 정태의는 지금 형이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형은 그의 인생에 함께 들러붙어 있었다. 어릴 적에도 형 때문에 여러 번 납치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안 그럴 줄 알았지만, 알 게 뭔가. 가족을 잡아 그걸 빌미로 협박이라도 하려 들지.

 

그러나 오래 생각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목발에 맞고 비틀거리는 남자 뒤로, 차에서 세 명의 남자가 달려나왔다. 정태의는 카를의 저택을 돌아보았다. 저만치 보인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 다리로 이들을 따돌리고 달려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소리를 지른다고 들릴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체도 모르는 남자들이 험상궂게 달려드는데 얌전히 잡혀줄 수는 없었다.

 

"뭐야, 당신들! 사람 잘못 봤어! 누구를 노리는 건지 몰라도 난 아니라고! 당신들 나 알아?!"

 

목발로 한 사람을 더 두들겨 패서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까 비틀거리던 남자가 가세해 달려들었고, 다른 두 사람도 정태의의 뒤로 돌아들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정태의의 깁스한 발목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절로 비명이터져나왔다. 그나마 깁스를 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눈앞이 까매지도록 아팠을 거다.

 

뒤에서 정태의의 팔뚝을 움켜잡은 남자의 손을 무작정물어뜯었다. 살점이 뜯어져라 깨물어뜯는 정태의의 귀에 남자의 거친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다른 남자가 정태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 결에 입에 물고 있던 남자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입도 남자의 손도 피투성이다.

 

", 야…ㅡ, 사람, 잘못 봤…ㅡ."

 

정태의가 호흡이 막히는 신음과 함께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그때, 제일 처음에 목발로 맞았던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맞아. 모르지.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그는 아까 얻어맞는 결에 입 안이 찢어졌는지 피가 섞인 침을 내뱉더니, 주먹으로 정태의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세게 후려갈겼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가벼운 뇌진탕이 온 것 같았다.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카일 리그로우의 집에서 열흘이 넘도록 머무르는 그의 손님이지. 자기 집에 찾아드는 사람을 누구나 애지중지하는 카일 리그로우의 손님말이야."

 

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라도 괜찮아, 어차피 너 하나만은 아니니까. 라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뒷말은 아주 희미하게 의식 속에 들어왔다.

 

눈 앞이 핑글 돌아 눈살을 찌푸리며 흐릿한 시야를 되돌리려 애쓰는 정태의의 코 위로 젖은 수건이 덮였다. 그 수건에서 확하고 퍼져나오는 약 냄새에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젠장, 이거 얼마 전에 나도 썼던 수법이잖아, 하지만 난 그 괴물과는 달리 의식을 오래 유지하진못 한다고.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곧 까무룩하게 의식이 떨어져, 눈앞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머리가 아팠다. 의식이 깨어나면서 처음으로 인식한 감각이 두통이었다.

 

머릿속에서 맥박이 뛰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아픔을 인식한 순간 눈을 떴다. 그러나 눈으로 사물을 의식하기전에, 그는 구역질을 하며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세 번, 네 번, 연거푸 우웩거리며 구역질을 했다. 토사물은 나오지 않았다. 시큼한 위액이 목구멍 안쪽까지 올라왔지만 그 뿐이었다. 곧 구역질도 멎었다.

 

"젠장…ㅡ, 루터, 약…ㅡ."

 

정태의는 머리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어렴풋한 머리로 ', 루터를 찾으려면 의무반으로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속도 메슥거렸다. 두통약과 위장약을 같이 먹겠다고 하면 루터가 화를 낼 텐데.

 

"물이라도 좀 마시겠나?"

 

낯선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와 함께 입술에 뭔가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정태의는 조금씩 천천히 흘러나오는 그 물로 입 안을 적시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천장이 둥그렇게 움직이며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정태의는 다시 눈을 감고서 잠시 있다가 눈을 떴다. 여전히 천장은 돌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뜨자 좀더 나아졌다.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정신은 차릴 수 있어서정태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아직도 목 안에서 약냄새가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정신은 좀 차릴 만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욱신거리는 머리와 어지러운 시야사이로, 낯선 얼굴이 넷 있었다.

 

낯선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정태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없었던 탓이다.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다.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바깥에서 못질을 해서 막아놓아 바깥을 내다볼 수 없었다. 나무벽과 나무바닥, 나무천장으로 둘러싸인 방은 제법 널찍했다. 대여섯 평은 될 성싶었다. 그러나 그 넓은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 말고는.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모두 정태의가 한 번도 본 적없는 사람들이었다. 나이도, 인종도, 아마도 국적도 제각각으로 보였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자리를 잡고 기대어 앉아, 이제 막 깨어난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여긴……."

 

정태의는 고개를 설핏 기울이며 물었다. 뭐가 뭔지 알수없었다. 앞 뒤 기억이 사라져버리고 덩그러니 새로운세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가만있자, 뭐가 어떻게 되었더라. 그러니까……루터. 일어나면서 루터를 찾았었다. 루터라고 하면 UNHRDO.거기에서는 나왔다. 거기에서 나와 동남아 쪽으로 들어가서 육로로 중앙아시아로 넘어갔다가, 타슈켄트에서유럽으로 넘어 왔었지. 그리고…….

 

정태의는 계속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찌푸린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카일과 만난 게 생각났다. 카일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재수 없는 모러와도 마주쳤고. 그래서 거기서 떠나려고 하다가……왜 안 떠났더라. , 다리를 다쳤지. 그래서 병원에 갔다 왔다.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은 정태의는 그제야 생각났다. ,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가서 깁스를 새로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는 길에 수상쩍은 놈들을 만나서, ……그래, 약을 들이마신 데에서 기억이 끊어졌다. 그리고 현재.

 

정태의는 혀를 차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젠장. 그 망할 놈들이 대체 무슨 약을 흡입시킨 거야. 그냥 깔끔하게 정신을 잃게만 만들 것이지, 분량이나 흡입 시간이라도 잘못 지켰는지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리가 멍하니 생각이 잘 안나는 게, 꼭 바보가 된 것 같다. 아직 약에서 덜 깨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않는 것뿐일 테지만, 정태의는 이런 느낌을 싫어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감각이다.

 

그렇잖아도 가족 내 평균치에 비하면 형편없이 떨어지는 머리인데 여기서 더 나빠지면 어쩌려고, 하고 입 속으로 투덜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이구, 민망해라. 다 벗고 있네. 정태의는 전혀 민망하지 않은 얼굴로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내려다보면서도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부끄러워라. 다 벗고 있네. 역시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짐작이 갔다. 아마도 위협이 될 만한 소지품이나 여타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 소지품은 물론 옷가지까지다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는 잠겨 있는 듯한 방문을 쳐다보며, 그 바깥을지키고 있을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 아마 아까 정태의에게 얻어맞은 남자도 있을 거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몰라도, 속옷 한 장만 입고 있는 남자 다섯을 한 방에 몰아 넣어두다니 미의 개념이 참 없는 놈들이네……."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 옆에 있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돌아보니 그는 가죽물통을 잠그고 있었다. 조금 전 정태의에게 물을 먹여줬던 사람이 그 사람인 모양이었다.

 

ㅡ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카일 리그로우의 집에서 열흘이 넘도록 머무르는 그의 손님이지. 자기 집에 찾아드는 사람을 누구나 애지중지하는 카일 리그로우의 손님말이야. 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라도 괜찮아, 어차피 너 하나만은 아니니까.

 

정태의는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벽에 기대어 앉은 채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그 남자가 했던 말을 가만히 되새겨본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상황의 답이 나왔다. 정태의가 여기로 끌려온 이유는 정태의 본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미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인간인데다 어차피 나 하나만은 아니라면, 그냥 나 하나쯤은 빼줬어도 좋을 텐데.

 

정태의는 다섯 명의 사이에서 조금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든다. 카일은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특별히 어떠한 손님을 더 아끼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집에 머무르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이 아니었다면굳이 정태의가 아니라도 괜찮았던 것이다.

 

다른 네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태의가 없을때에 그 집에 머물렀거나, 혹은 정태의와는 다른 쪽으로 카일과 아는 사람인 성싶었다. 아마도 정태의보다는카일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들일 거다.

 

"내 참……. 그 집에서 한량처럼 놀면서 인생 좀 편다 싶었더니 또 이 꼴이네……."

 

UNHRDO에서 나온 뒤로는 딱히 나쁘거나 불쾌한 일이벌어지지 않아, UNHRDO의 터가 자신과 안 맞았다든가혹은 지부 내부의 인간 관계가 불운을 초래했다고 비과학적인 생각을 하며, 이제 불운을 끝난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납치 당한 건가요?"

 

정태의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조그맣게라고는 해도 방 안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다 들렸다. 다시 한 번 시선들이 모였다.

 

정태의의 질문을 받은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좀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음……. 난 길을 걸어가다가 차에서 내린 사람들한테납치되어 왔는데, 그쪽은 어땠나요."

 

"나도 비슷해요. 아침에 조깅하다가 끌려왔어요."

 

끌려왔는데도 별 대수롭잖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이 남자도 제법 물건이겠구나 싶었다.이제 보니 다들 비슷했다. 불안이나 공포에 질려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불편이나 불안 정도는 다들 엿보였지만, 그렇다고 납치된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며 위축된 것 같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흐음, 하고 다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과연. 자신은 누군지는 모르나 카일의 집에 제법 오래머무르는 잔챙이 손님에 지나지 않지만, 저들은 그렇지않은 모양이었다. 저건 이런 상황에 익숙하거나, 혹은자신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자들의 태도다. , 사회에서 윗자리에 앉은 자들이다.

 

카일의 귀한 사업상 손님이거나 혹은 공적인 친구 따위이려나. 정태의는 '기댈 데 없는 가엾은 나는 어떻게든이들에게 잘 들러붙어 살 길을 도모해 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떨어뜨려 다리를 보았다. 원래 아픔이란 의식하는 순간부터찾아드는 노릇이라, 조금 전까지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다리의 깁스를 보자 그때부터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 아까 이 발목에 체중을 싣고 뛰었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괜한 발목 혹사시키지 말고 얌전히잡힐 걸. 이거야, 아무래도 부담이 제법 간 것 같다. 무사히 살아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병원부터 가야 할것 같았다.

 

"젠장. 발목뼈 약간 금간 것 갖고 병원도 무지하게 자주 가게 생겼네……."

 

정태의는 깁스를 주물거리며ㅡ비록 발목에는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지만ㅡ투덜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걸 보고 혀를 차며 안쓰럽다는 듯 물었다.

 

"그렇잖아도 편치 않은 몸일 텐데 고생하는군요."

 

", 뭐……저만 그런 것도 아닌걸요. 다들 정체도 모르는 치들한테 끌려와서……."

 

정태의는 그를 보고 적당히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러자남자는 그렇군요, 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웃했다. 뭔가 개운한 대답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해 보다가 정태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놈들 누군지 아세요?"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낯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뭐어, 하고 입을 뗀다.

 

"카일의 회사 쪽으로 바라는 게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그 말만 하곤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확실치 않은 일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투였다. 다른 사람들도 몇 마디 뭐 그렇겠지, 하고 거들며맞장구친다. 정태의는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언젠가 카일이 말했었다.

 

ㅡ군수업체라고 말은 듣기 좋게 하지만 사실 쉽게 말하면 무기매매상이거든. 그러니 당연히 공격도 많이받아.인권단체나 종교단체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반군이나 무장 테러 단체 쪽에서도 협박을 받지. 이 경우는 무기매래를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자기네 측에 무기를 넘기라는 거지만.

 

"……."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하다고는 할수 없었지만, 대충 공식이 나왔다.

 

그러면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과연 카일은 어떻게나올까. 아마도 여태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을 테니 나름대로 방법이 있겠지만.

 

정태의는 소용없는 탄식을 했다. 역시 형을 먼저 냉큼 찾아내어야 했다. 어떻게 찾아내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형부터 먼저 찾아내어서, 다니더라도 같이 다녀야 했다. 그러면 과거의 전례를 보건대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 거고, 설령 처했다 하더라도 조금도 걱정하거나 불안해할 필요 없이 이 집의 벽이 갑자기 부실공사로 무너지거나 경찰 간부가 신의 계시를 받아 무작정 이 집으로 들이닥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을거다.

 

……정말 소용없는 생각이다.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두통도 좀 나아졌지만,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이 어지럼증도 두통도 가뿐히나아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연후에는……뭐 될 대로 되겠지.

 

 

 

* * *

 

 

 

카일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였다.

 

회사에서 귀가했을 때 그는 제법 기분이 좋았다. 오랫동안 난항하고 있던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려 하고 있었다. 벌써 몇 달째, 종적이 묘연하던 인물의 꼬리를 어쩌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하로 보내었던 게이블이 한참 동안 그 일대를 빙빙 돌다가 '조금 더 알아볼 여지가 생겼다'며 사우디아라비아로 넘어가겠다는 연락을 보내어 왔을 때 그는 거기에 약간의 희망을 보았다. 게이블은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을 할 때에는 지나칠 정도로신중했다. 경우에 따라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그가 '알아볼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보통 정보원들이 말하는 '꼬리가 잡혔다'에 가까웠다.

 

종적을 감춘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절친한 친구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카일 본인이 간절히 그를 찾아내고자 했다. 지극히 이윤 추구적인 목적이었는데,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간 설계도는 마지막 부분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회사 내부 연구소ㅡ온 세상에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고 끌어온 석학들의 집단ㅡ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그 설계도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설계도를 완성시킬 수는 있었지만 서너 가지의 경우의 수가 나왔다. 그 경우의 수들 모두 제각기 훌륭하게 신개발품으로 써먹을 수 있는결과를 끌어내었지만, 그렇게 되자 오히려 더욱 곤란해졌다. 애초에 개발자가 의도한 게 그 중의 어느 것인지도 알 수 없었을뿐더러, 어쩌면 그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상태로도 달리 개발해 상품화시킬 수는 있었을 테지만, 미심쩍은 부분을 하나라도 남겨뒀다간 나중에 커다란 사고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 이쪽 업계였다.

 

그 덕분에, 그 설계도를 뜯어보느라고 든 연구비만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결국 그 완성도는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개발자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미완성의 설계도 하나만 던져놓고 개발자는 사라져버렸다. 연구소의 소장은 몇 달이나 집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설계도를 붙잡고 수많은 도식들을 떠올리며 끙끙거리다가 결국 얼마 전 불 같이 폭발해버렸다. 천재인지 뭔지 몰라도 그 빌어먹을 개자식은 우리 모두를 엿먹이려고 이딴 짓을 꾸민 게 틀림없다고.

카일도 동의하고 싶었다.

 

한 통의 전화가 그들의 단란함을 갈라놓았다.

 

모러와 젠킨스와 함께 군수업체 관련의 이야기를 나누던 때, 리타가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은 카일은 즐거운 기분을 일시에 날려버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으면서, 낯선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낯선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때치고 좋은 기억으로 끝난 적은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의 감은 맞아떨어졌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겪었던 일이었다. 근래 몇 년 동안은 그런일이 없어 마음 놓고 있었던 게 불찰이었다.

 

"…ㅡ."

 

통화를 끊은 카일이 표정을 흐린 채 거실로 돌아오자,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친구는 그의 표정을 읽고는 웃음을 지웠다.

 

"안 좋은 연락이었나요?"

 

모러가 슬쩍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젠킨스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일은 으음, 하고 신음처럼 중얼거리곤 입을 열었다.

 

"볼리비아의 무장 단체였어. 이름을 도통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 규모는 작을 것 같지만, 내 친구들을 데리고 있다고 하는군."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카일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내 이 상황을 알아차린 것이다. 드물게 이런 일이 있었다. 무기를 넘기라는 것이다.

 

사실, 아무 무기나 상관없다면 무기를 구하기란 어렵지않았다. 숱하게 많은 브로커들이 불법으로 무기 거래를 돕고 있었고, 군수업체 측이 거기에 비공식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니 아무리 영세하고 무기를 조달할 끈이 없는 단체라 해도, 조금만 눈을돌리면 알아볼 방도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특정한 무기를 원하는 경우였다.

 

세상에 널리고 깔린 흔한 무기들은 아주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이 바라는 무기가 한정된 루트에서만 제공되는 물건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런 무기는, 판매하는 측에서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루트가 한정되면 한정될수록 어떤 경로를 거쳐 그 무기가 유통되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기는 쉬워진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골치 아프게 덮어쓸 여지가 지나치게 많은것이다. 그렇기에, 판매하는 측도 그런 무기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나 정상적인 경로를거친 유통이 아닌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신뢰할 수 있는중개인을 거치지 않으면, 예전에 거래한 적이 없는 쪽과는 십중팔구 거래를 하지 않았다. 자금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옳다.

 

지금 카일에게 연락 온 일은 그런 류의 문제였다.

 

루트가 한정되어 있는 특정한 무기를 바라지만 예전에거래했던 전적이 없는 경우는 그 사이에서 중개를 해 줄 수 있는 브로커를 찾아야 한다. 그런 브로커를 찾지못한 경우는 원하는 물건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가끔, 아주 드물게 이런 자들이 있었다. 협박이라는 방법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인질은 누구라고 하는 건가."

 

젠킨스가 표정을 찡그린 채 물었다. 카일은 그들이 말해온 이름들을 하나씩 꼽아보며 읆었다.

 

"……하인스, 루드비히, 그리고 킴."

 

마지막 이름이 나오자 젠킨스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일과 제법 오래 알아온 친구인 젠킨스는 다른 이름은 다 알겠지만 마지막 이름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기웃했다. 카일은 ', 얼마 전에 만난 청년인데 지금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다네'라고 덧붙여 설명해주었다.옆에서 모러는 뭔가 생각하는 듯 눈동자만 뒹굴거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사람들만 모아 놨군."

 

젠킨스는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못마땅하게 말했다. 카일도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부른 이름은 다들 카일의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친구이기 이전에 사업상의 동료이기도했다.제각각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는 가장 윗자리에 있는 자들이었다. , 죽이면 범인들로서도 매우 곤란해질 사람들이다. 물론 그런 만큼 카일로서도 곤란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젠킨스가 입매를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 두어 번 있었지."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모러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UNHRDO에 들어가기 전에 카일의 회사 연구소에서잠시 일했던 전적이 있는 그는, 이 회사의 짜임새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때는 해결할 방법이 있었지요."

 

"그렇지, 해결할 방법이 있었지. ……그때는."

 

모러가 무겁게 중얼거리자 젠킨스도 맞장구쳤다. 카일은 어두운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지금은 쓰기 힘들까요?"

 

모러는 은근히 물었다. 카일은 생각에 잠겼다. 쓸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는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도 많으면 달리 방법을 생각해 보겠는데, 인질이 잡혀 있으면 그리 오래 생각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연락은 해 봐야겠군. 그 녀석 요즘 심기가 편치 않은데."

 

카일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집어들었다. 모러는 입을 다물고 커피만 홀짝거렸다.

 

카일은 영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전화를 했다. 몇 년 전이런 일이 있었을 때에는 해결이 간단했다. 그때는 이런 류의 일을 해결하는 전담반과 마찬가지의 조직이 있었다. T&R Inc.와는 별개로 운영되는 사설 기동대였다.법인 등록도 따로 해, 아예 별개의 회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T&R에서 의뢰를 하더라도 규정대로의 지불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설 기동대가 군수물자를 매매하는 회사와 관련성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에서 비난의 여론이 일어ㅡ경쟁 업체의 입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ㅡ결국 설립 2년 여만에 해체하고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물을 만난 듯 활약하며 성질을 풀어대던 카일의 성격 특이한 동생은, 그뒤 UNHR DO로 들어가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그쪽 방면으로는 일류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들만 추려 모았던 기동대는 해체되면서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카일의 동생은 아직 그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성격들이 강해 좀처럼 불러모으기 힘든 그들을 모을 수 있는 것도, 그의 동생뿐이다.

 

"역시 안 내키지만……할 수 없지."

 

카일은 이미 전화의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는데도 안내킨다고 중얼거리곤 한숨을 쉬었다.

 

요 근래 그의 동생은 대단히 저기압이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게 좀처럼 안 되는 듯했다. 카일에게도 찾아내라고 닦달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내려는 사람도 찾기 쉽지 않았다. 이제 보니 동생이 찾아내려는 사람은, 카일이 찾아내려고 사방을 다 뒤진 개발자의 동생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집은 형제가 나란히 사람을 물 먹이고 있었다.

 

'…ㅡ왜 전화했어.'

 

제법 오래 가는가 싶던 전화음이 어느 순간 끊어지며,동생의 불쾌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생각해 보니 그쪽은 지금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전화하는 타이밍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의도움을 받아 인질들을 구해내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겼어."

 

카일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었다. 전화 안에서, 동생의 기색이 싸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건 어떻게 됐어.'

 

". 그건 알아보는 중이야. 아직은 별 소식이 없는데, 좀더 기다려 보도록 해."

 

'…ㅡ사람 하나도 제대로 못 찾고 뭘 하는 거야.'

 

동생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카일의 인상도 슬쩍 험악해졌다. 동시에 예전에도 몇 번 머리를 스쳤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그 남자는 뭣 때문에 찾는 거야. 그걸 알아야 단서를 잡기가 쉽잖아. 무작정 찾으라고 하면, 온 지구 땅덩이를 파헤쳐 보기라도 하란 소리냐?"

 

전화 안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다. 왜 찾느냐고 하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다 말고 카일은 한숨을 쉬며 다시물었다.

 

"정재이의 동생이라서 그런 거라면, 굳이 신경 쓸 것 없다고 전에 말했을 텐데. 길상천이라고 해봐야 정재이에게만 해당될 뿐, 그 남자를 찾는다고 해서 그 운이 네게돌아오는 건 아니야."

 

'뻔히 알고 있는 소리나 지껄이려면 끊어.'

 

끊어, 라는 말과 동시에 정말로 전화는 끊어졌다. 단절음이 흘러나오는 수화기를 쳐다보며 카일은 혀를 찼다.그 옆에서, 전화 음량이 큰 탓에 아주 대략적이나마 소리가 들리는 두 사람도 혀를 찼다. 그러나 동생의 성격이 대단히 특이한 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카일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걸었다. 받지 않았다. 세 번째로 다시 걸자, 그제야 겨우 다시 받았다.

 

"일레이. 도움 받을 일이 있다니까."

 

'내키지 않아. 형 일은 형이 알아서 해.'

 

"이건 회사에 관련된 일이니 네 일이기도 해. 규모가 작은 무장 단체에서 납치극을 벌이고 있단 말이다."

 

'그게 뭐.'

 

동생의 무심하고 짧은 대답을 들은 순간, 카일은 마음먹은 대로 안 되겠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동생은 한 번 안 한다고 하면 마음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카일은 혀를 찼다.

 

"네가 나서지 않겠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예전의 기동대원들에게 연락이나 해 줘."

 

'형이 직접 해.'

 

또 전화가 끊겼다. 카일은 다시 단절음이 흘러나오는 수화기를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쳐다보았다. 그러다가한숨을 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틀렸어. 그 방법은 이제 못 쓰겠군."

 

카일은 힘없이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옛 기동대원들은 카일의 연락으로는 잘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연락도 잘 되지 않았고, 연락처도 확실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동생에게 말해보려고 한들, 저 상태를 봐서는 먹혀들 리가 없었다.

 

"요즘 이놈이 계속 이런단 말야. 회사 일이라고 해도 뒷전이고, 사람만 찾아내라고 날뛰거든."

 

카일은 혀를 차며 그들에게 한탄했다. 그러면서 '왜 찾는지는 몰라도, 평생 못 찾아내고 펄펄 뛰어보라지, 그 녀석'하고 화풀이처럼 덧붙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드문 일이긴 했다. 아니, 사실 카일은 이런 경우를 처음 보았다.

 

일레이가 제 기분에 내키지 않으면 일을 거절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가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에게 억지로 일을 시킨다는 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책임 의식이랄까, 해야 할 일은 해 두는 놈이라서 일의 내용을 들어보고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일을 맡곤 했다. 얼마 전에 홍콩의 지사로 보내어버린 것도, 계획 단계에서 일레이본인은 귀찮다며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었다. 그러나 회사 일ㅡ즉 자신도 발 하나쯤은 걸치고 있는 집안 일ㅡ이라는 의식이 있어서인지 귀찮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가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홍콩 지사가 설립되어 운영하기 시작하기 직전, UNHRDO의 합동 훈련으로 홍콩에 보름 동안 갔다 오더니 의외로 홍콩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기꺼이 가겠다는 빛을 보였지만.

 

그런 녀석이, 해야 할 일이고 뭐고 뒤로 돌리고 사람을찾고 있었다.

 

신기할 정도였다. 카일은 동생이 이토록 뭔가에 집착을보인 예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는 용서라는 게 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어지간히 화가 나지 않고서는 이미 멀찍이까지 도망가버린 놈을쫓아가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멀찍이까지 도망가버리기 전에 죄다 잡아채어버리긴 했지만.

 

아마도 우리 빌어먹을 개발자의 길상천은 어지간히 동생을 엿먹이고 잘도 날라버린 모양이었다. 전례가 없었던 그 출중한 능력에 카일은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는 골치 아픈 문제거리가 하나 있었다.

 

"일레이의 손을 빌리는 게 가장 간단하고 쉽게 해결될테지만 그쪽은 무리인 것 같으니……,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뭐가 있을까."

 

카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방법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뾰족하게 좋은 방법은 없었다. 난감했다. 범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이 바라는 무기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중간에 믿을 만한 사람을 끼고 접근했으면 수월했을 텐데, 그들도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몰래 팔아줄 수도 없다. 밀매에도 요령이라는 게 있는데, 그들은 그걸 몰랐다. 그러나 무기를 내어줄 수 없다고 해서 친구들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범인들이 협박한 것처럼 함부로 죽이거나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사적으로는 인간적으로 친구를 못 본 척할 수 없었고, 공적으로는 귀중한 거래 상대를 잘라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다……."

 

카일은 혀를 찼다. 여태 살아오면서, 이 정도의 규모나 되는 회사를 꾸려오면서, 이 정도로 곤란한 문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마다 다 헤치고 나아갔다. 이보다더욱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벌어졌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일들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문제에 있어서도 카일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문제도 '과거에 있었던 몇몇 곤란했던 일들' 중 하나가될 거다. 그러나 역시, 그렇게 시간의 은혜를 받으려면지금은 어떻게든 그 해법을 생각해야 했다.

 

"으음…ㅡ."

 

나직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카일은 슬쩍 고개를들었다. 카일의 건너편에서, 모러가 깍지 낀 손에 턱을괸 채 눈을 감고 뭔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괴짜였다. 카일이 알고 지내는 숱한 사람 가운데 괴짜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몇 있었는데, 이 친구도 그런 류였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유능하고 똑똑한 청년이었다. 몇 년전 카일의 회사에 있을 때에도 그 나름대로 두각을 드러낼 만큼의 능력이 있는 친구였다. '역시 무기는 직접매만지면서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며 회사를 그만두더니 UNHRDO로 들어갔지만,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재미난 친구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머리가 사용되는 곳은 거의 대부분이 무기 관련이었다. 이런 류의 문제 해결에는 그리 뛰어나지는 못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는 카일을 위해 문제 해결에 골몰하는 모양이었다. 어쩐다, 어쩐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한참동안 고민에 잠긴다. 그러다가 천천히 결론에 이르러가는 듯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부리부리하게 눈을 빛내면서 무섭게 고민하던 그는, 어느 순간 불쑥 말을꺼내었다.

 

"카일."

 

", 말하게."

 

", 며칠 전에 보았던 그 시작품 말인데요."

 

카일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뜻밖의 말이 나와서 잠시 말을 잃었다.

 

원래부터 무기광인 남자라 머리에 무기밖에 없긴 했다.게다가 엊그제 카일이 보여주었던 개발 단계의 시작품은 그의 이상에 쏙 맞아떨어진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갖고 싶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었다.

 

하긴 요전에는 누군가 '너는 네가 가장 갖고 싶어하지만 이미 100년 전에 단종되어서 자료사진만 전해져와 박물관에서나마 볼 수 있는 1890년식 22구경 단총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수 있지?'라고 심술궂게 농담을 했을 때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단호하게 진지한 대답을 했었다. '.'

 

그런 남자이니 총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 꺼내어도 전혀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맥락에 어긋난 이야기를 뜬금없이 끌어낼 사람은 아닌데.

 

카일은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시작품이 왜."

 

카일이 되묻자 모러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 총을 생각만 해도 희열에 들뜨는 듯 손을 움찔거리며 볼을 발그레하며 붉힌 그는, 결심한 듯 눈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제게 주신다면, 리그로우가 이 일에 나서도록 도와드릴게요."

 

"뭐……?"

 

카일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 옆에서 젠킨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러를 쳐다보았다. 카일은 모러가 어떻게 일레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의아한 얼굴 그대로 젠킨스를 보았다. 젠킨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흘끔 카일을 본다.

 

모러와 일레이는 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이가 험악하다는 것도 아니다. 서로 그런 인물이 있다는 걸 알고만 있을 뿐 딱히 이야기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사이라고 알고 있었다.

 

"자네가 어떻게."

 

카일이 미심쩍게 묻자 모러는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며 말을 않았다.

 

카일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작품은 함부로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소량으로 시판용이 나오기도 전에 시작품이 나가버리면 좋을 게 없었다. 아직 미완성이기때문에 위험하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카일은 지그시 모러를 보았다.

 

"그럴 방법이 있다는 말이군. 그러나 만일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안 주시는 거죠."

 

모러는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는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됐고, 그런 얼굴이다.

 

카일은 잠시 더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모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레이가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그 물건을 자네에게 주지. 다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네의 개인 보관품으로, 결코 사용하거나 타인에게 넘겨선 안 돼."

 

"그건 당연한 말씀이지요."

 

모러는 웃었다. 잠시 황홀경에 빠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던 그는, 카일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서야 겨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 방법이란 건 뭔데."

 

카일이 물었다. 사실 시작품을 건네면서까지 모러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그것이 제일 나은 방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모러가 어떻게 일레이를 움직이겠다는 건지, 그게 더 궁금했던 까닭이다. 모러는 ', 그거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잡혀있는 인질 중에 태이가 섞여 있다고 알려주세요."

 

 

 

 

 

 

10. 자작나무숲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납치를 당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당할 뻔한 적은 어릴 적에 몇 번 있었지만 실제로 당한 적은 없었다. 형이라면 언제나 금방 돌아오긴 했지만 납치를 당한 적도 있다. 그래서 어릴 때ㅡ즉 아직납치를 당할 위험이 있었던 무렵에ㅡ는 '납치를 당하면역시 무섭겠지, 유괴범은 틀림없이 굶기기도 하고 때리기도 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무서워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가 좀더 들어서 머리가 굵어지고 어른들에게 유괴나 납치를 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커버린 뒤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되었다.

 

"설마 이 나이 되어서 납치를 당할줄은 몰랐는데……."

 

정태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에 한 번, 방학을 맞아 홀로 훌쩍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버스재킹을 당한 적은 있었다. 그곳도 나름대로 납치라면 납치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태의라는 특정인을 짚어서 납치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별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이었고 그 혼자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태의를 찍어서 납치했다.

 

이렇게 돌이켜 보니 참 파란만장한 삶인지도 모르겠다.버스재킹에 납치에. 그러고도 멀쩡하니 나름대로 운이좋은 삶을 살아왔다. 게다가 또 하나 굳이 운이 좋다고우겨서 말하자면, 난생 처음 맞는 납치범은 정태의가 어릴 적 걱정했던 것처럼 굶기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가두어두긴 했지만 때가 되면 먹을 것도 주었고, 별 일없이 거칠게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유순한 납치범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방 안이 좀 소란스럽다싶으면 방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두통과 현기증 속에서 잠들었던 정태의가 다시 깨어난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뒤였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서너 시간 정도는 잔 것 같다고들 했다. 시계도 없어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부르는 시간이 적게는 두 시간에서 많게는 네 시간이었으니 평균을 내어서 세 시간 정도 잤구나 하고 여겼다. 그래봐야 처음 깨어났던 게 언제인지 모르니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바깥에서 못질이 되어 바깥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일 위에는 못질을 한 판자의 길이가 부족해서 두어 치 정도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7시나 8시……정도 되었으려나. 아니면 좀더 늦나?"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두어 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불그스름한 빛이 아주 희미하게 섞인 군청색이었다. 해가 넘어가고 밤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정태의는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있는 동안 납치범이 방 안에 던져 준 빵을 주워서 씹으면서 주위를돌아보았다.사람들은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 긴장감도 없었다. 정태의는 좀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납치극이 벌어진 경우 인질 가운데 중요한 인물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원래 억울하게도 먼저 죽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마 만에 하나의 경우 이 중에 제일 먼저 죽는 것을 정태의 자신일테지만……. 그래도 납치되었다가 결국은 목숨을 잃었다는 케이스가 그토록 많이 보고되는 가운데 저렇게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도 좀 신기했다.

 

정태의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픽 웃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나쁘진 않다.

 

그들은 아는 사이도 있고 모르는 사이도 있는 듯했다.그러나 한 방에 몰아넣고 가둬놓은 상황에서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나뉘어 있을 것도 아니고, 머릿수도 고작해야 다섯이었다. 정태의는 그들의 대화 가운데 간간이끼어 맞장구를 치거나 하다가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문득 물었다.

 

"그런데 다들 괜찮으세요? 난 좀 무서운데. 바깥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뭐 설마 큰일이야 벌어지겠냐만……."

 

그러자 잠깐 생각하던 옆 남자가 위로하듯이 정태의의등을 두드려주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잘 될 테니까. 카일 같은 일을하려면 이런 일은 종종 있거든. 그 친구가 협상도 잘 하는 친구잖아."

 

옆 남자의 말을 받아 창문 아래에 앉아 있는 나이 먹은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 편하게 생각해. 사람 팔자라는 게, 죽을 팔자면 멀쩡히 놀라 나가서도 차에 치어 죽는 거고, 살 팔자면 전쟁통 한복판에 나가서도 사는 법이야."

 

"아하……, 그렇네요."

 

정태의는 픽 웃었다. 하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은 편하다. 어찌 되었건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으면, 설령 총에 맞아서 죽어간다 해도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면 병원일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비록, 죽음이 실제로 닥쳐오면 느낄 수 있다고해도.

 

개념이 아닌 실감으로 죽음을 접할 때, 죽음이 실제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실감할 때, 그럴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정태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이 꺼지는 그 순간을 스스로는 느낀 적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그 공포와 절망을 본 적은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어떤 눈을 하는지,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멀리 갈 것도없이 UNHRDO에서도 본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음…ㅡ하지만 납치라니, 카일도 곤란하겠군요. 요구 조건이 만만한 거면 괜찮을 테지만 곤란한 걸 바라면 힘들겠어요. ……하지만 만만한 요구 조건을 걸 거면 애초부터 납치는 안 했겠지."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을 하고 보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곤란한 요구를 하면 어떻게 대응할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닐 테니 나름대로 해결 방식이 있긴 있을 터였다.

 

"인질을 둔 납치범들과의 협상에는 응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한다든가……?"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미국도 아니고.

 

정태의의 의문에 애매하게나마 대답해 준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흑인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T&R에 이런 류의 일이 벌어지면전담으로 맡아서 해결해주는 부서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뭐라더라. 한 번 들었는데 까먹었네."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고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낯선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위험이 늘상 존재하는 회사라면 전담반이 있다고 해도 이해는 하겠다.

 

그러나 정태의의 얄팍한 이해를 흐트러뜨리며,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정정했다.

 

"아니, 그게 좀 틀렸어. 자네가 뭘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건 T&R의 내부에 있는 부서도 아니고, 게다가 지금은 이미 없어졌어. 어차피 한 2년 있었던 거라서 오래 있지도 않았지."

 

"아아, 그거 말이군요, T&R에서 자금을 대서 별개의 회사로 따로 뺐다는 사설 기동대."

 

정태의의 옆 남자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일 먼저 말을 꺼냈던 흑인 남자가 의아한 듯이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였다.

 

"기동대면 기동대지 그게 무슨 회사래요."

 

"아니, 그게 일종의 용병 회사 같은 거였어.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는데, 아는 사람은 다들 그냥 기동대라고 불렀지. 규모는 수십 명 정도로 아주 작은 편이었지만 이름만 들으면 다들 알 만한 기동대나 특전대 같은 데에서 사람을 끌어왔거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정태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자세하게 들은 적은 없지만 오래 전에 사관 학교에서 무기 공학을 배울 때, 여담처럼 각 무기 제조업체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T&R도 있었는데, 그때 잠깐 들었었다.

 

T&R과 같은 자금줄에서 나온 용병 회사. 대단히 소규모이지만 막대한 자금력으로 릴류 인재만 들여 내실이훌륭한 곳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론을 의식한 탓에 그 회사는 다시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 설명의 결론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무기 재조업체에서 전투원을 돌리는 회사까지 같이운용한다니 사회윤리적으로 대단히 어긋나는 행위이니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되겠다, 라고 매우 도덕적으로 났었다.

 

"하지만 없어졌다면 그쪽에서 도움을 주기는 곤란하겠네요."

 

정태의가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했는지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게다가 그들이 오면 난 별로 내키지도 않는 게, 다들 너무 억세단 말이야. , 납치 당한 몸으로 호사스럽게이런 말을 할 수도 없겠지만."

 

"억세요?"

 

". 아주 거칠거든. 내가 예전에 카일이랑 같이 있을 때 그들을 본 적이 있는데, 좀 막무가내라고 해야 하나,하여간 그런 구석이 있어."

 

남자가 씁쓸하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정태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호사스러우시네요'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무론 납치당한 것부터가 일단 자신들의 탓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누가 자신을 구해줄지 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누구든 구해만 준다면 감지덕지죠. 어쨌든 무사히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누가 구해줘도 뭐 어떻겠어요."

 

정태의의 옆남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별로 탐탁지 않은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고 싶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한 마디 더 했다.

 

"하지만 카일의 동생 같은 인간들이 드글거리는 게 거기였단 말이지."

 

순간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사람들도 움찔 표정을 찌푸렸다. 카일과 친하다는 그들은 모두 그 '카일의 동생'을알고 있는 듯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기색을 눈치 채고 남자가 덧붙여 말한다.

 

"아니, 내가 말을 좀 심하게 했군……. 그렇게까지 인간이 막되어먹은 놈들은 아니고, 어쨌든 그 반은 될 정도로 거칠거든. 그러니까, 나는 그 자들이랑 같이 있으면내 목숨을 멀쩡히 구해주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거지."

 

남자의 말에 이번에는 다들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 역시 그 중 하나였지만, 정태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심 한탄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일레이는 정말로 고루고루 인심을 잃었구나. 본인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테고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입맛이 씁쓸했다.

 

"리그로우 같은 사람이 구해준다면, 좀 걱정되긴 하겠군요. 과연 내가 그 남자 손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옆자리 남자가 중얼거리자 사람들이 농담을 하는 것처럼 빈 웃음을 웃었다. 옆자리 남자도 농담을 할 생각으로 중얼거린 듯 같이 웃는다.

 

그러나 정태의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저 창가남자에게 '정말 호사스러우시네요' 운운한 자기가어리석었다고 가슴을 쳤다. 분명 이 상황은 누가 자신을 구해줄지 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정태의는 선택지를 준다면 일레이의 손에 구출되느니 차라리 여기 남아 납치범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게 나았다.

 

"……. 설마하니……. 일레이가 구하러 오는 건……."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창가 남자도 그렇고 나머지도,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시선이 모여 정태의가움찔 고개를 들자 다들 경망된 소리라도 들은 얼굴로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 ? 저요?"

 

"큰일날 청년이군. 그 이름은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자네 아직 젊은데 몸조심해야지."

 

"내 아는 사람 중에서도 릭이랑 처음 만났는데, 아니 처음 만났으니까 잘 모를 수도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사람이 실수로 릭의 이름을 불렀는데, 전치 8주 나왔어요."

 

"그 이름은 말하면 안 돼. 말하면 큰일이 닥칠 이름이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웅성웅성 말했다. 정태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수그러들었다.

 

일레이. 진짜 인심을 많이 잃다 못해, 이건 거의 한발 물러서서 악마라도 보는 듯한 눈치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되기도 결코 쉽지 않을 텐데, 이젠 존경심까지 생길지경이었다. 정태의는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 웅성거리며 불길한 존재를 꺼리던 화제는 자연스럽게 정태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남자가 오지는 않겠지. 그 남자는 UNHRDO에 들어간 뒤로 일 두 가지를 같이 해야 하니까 바빠져서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던데. 요전에 이 비슷한일이 있었을 때도 그 남자가 연락해 준 다른 대원들이 처리했고, 그 남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남자의 말에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태의가생각하기에도 일레이는 몸이 둘이라도 부족한 것 같긴했다. 본인이 대단히 여유롭게 지내는 것 같긴 하지만 UNHRDO의 일도 사실은 장난 아니게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T&R 정도의 규모가 되는 회사의 지사라면 그쪽도, 그냥 구경만 하는 정도라고 하더라도 일이 상당히 많을 거다. 일레이의 일처리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그렇지, 정태의가 있을 무렵에도 그에게 주어진 일은 엄청났다. 게다가 또 하나, UNHRDO에 소속되어 있는 남자가, 그냥 회사 일을 살필 뿐이라는 명목으로 T&R의 지사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사건 진압에나선다면 그건 꼬투리 잡아 문제 삼을 수 있는 여지가 된다정태의는 하나씩 꼽아보면서 음, ,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생판 모르는 남ㅡ어쨌든 그는 김영수라는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ㅡ을 구하기 위해 그런 번거로움을 뒤집어 쓸 리는 없었다.

 

"……."

 

하지만 생각한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정태의는 팔뚝을 슥슥 문질렀다. 속옷만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춥치는 않았는데, 그 생각을 하자당장 등골이 서늘해졌다. 호사스럽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놈이 구하러 온다면 당장 차라리 납치범들에게로 도망갈 거다. 그들이 별달리 인질의 가치도 없는 자신을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사람이 이렇게 하릴없이 방에 갇혀 시간이 남아도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드는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태의는 어차, 하고 일어서 방에 딸려 있는 화장실로들어갔다. 마신 것도 없는데도 용변 생각은 나니, 인체의 신비다. 화장실 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물건들을 싹 치워버린 듯, 변기나 세면대 따위의 기본 구조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태의는 용변을 보면서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벽 위쪽으로 조그맣게 나 있는 환풍구에 닿았다. 환풍구는 가로세로 한 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는 크기다. 하지만 곧바로 바깥이랑 이어져 있는 듯 환풍 팬 뒤로 어둑어둑한 군청색 하늘이 보였다.

 

"으음…ㅡ."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뻗었다. 발을 딛고 올라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환풍 팬에 손이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팬 날개를 붙잡을 만은 하다.

 

, 손끝으로 날개를 돌려보았다. 벨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날카로웠다. 맨손으로 마구잡이로 움켜쥐고 힘을 준다면 손아귀가 찢어지겠다. 이번에는 팬 날개를 손 끝으로 밀어보았다. 꿈쩍도 않는 건 아니었지만 꽤단단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거야, 어설프게 붙잡고서는 어림도 없겠다.

 

정태의는 고민했다. 어차피 저 환풍구로는 도망칠 수도없다. 바깥에 대고 소리를 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납치범들이 그렇게 멍청하게 위치를 잡을 리는 없다. 그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 지나가기 전에 먼저 저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정태의의 입에 수건이라고 집어넣을 거다.

 

그러니 저 환풍구는 사실상 별 쓸모가 없다고 해야 할 테지만.

 

"……."

 

정태의는 잠깐 생각하다가 속옷을 벗었다. 그리고 속옷을 장갑처럼 손에 감고서 환풍구 아래로 갔다.

 

"어차…ㅡ."

 

환풍구 아래에 소늘 걸치고 턱걸이를 하듯이 훌쩍 매달려 오른 정태의는, 한 팔로 잠시 몸을 지탱하고서 속옷으로 감싼 다른 손을 뻗어 팬 한가운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환풍구에 손을 얹고 몸을 지탱하던 손도 마저 팬을 움켜쥔 손 위에 겹쳤다. 놓치지 않도록 팬을 잘 잡은 뒤, 발로 벽을 박찼다. 온 체중을 실어 팬을흔들어댔다. 몇 번, 정태의의 몸이 허공에서 흔들렸다.끼익끼익,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저 바깥, 화장실문 너머 방문 밖에 있는자들에게 혹여라도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화장실이라는 밀폐된공간에서 크게 울렸을 뿐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다고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세 번, 네 번, 벽을 박차는 반탄력으로 팬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속옷으로 손은 한 겹 쌌다고는 하지만 팬이손을 파고들어 아팠다. 팬 가장자리가 닿은 손가락마디가 끊어질 것 같았다.

 

"…ㅡ!"

 

다섯 번째로 벽을 박찼을 때, 끼이…ㅡ하고 쇳소리를 길게 내던 팬은 이윽고 환기창에서 분리되었다. 팬이 떨어져나오면서 그 팬에만 온 체중을 싣고 매달려 있던 정태의도 아래로 떨어졌다.

 

"으윽……!"

 

온몸으로 바닥에 부딪힌 정태의는 특히나 세게 박은 꼬리뼈를 문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파죽겠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큰 소리도 못 내니 더 죽을 맛이다.

 

화장실 바닥에 웅크리고 엎드린 채 꼬리뼈를 쥐어뜯던정태의는 시간이 지나고 겨우 아픔이 다소 가신 뒤에야겨우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거울이 없어 볼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멍이 시퍼렇게 들었을 거다.

 

"젠장, 아파죽겠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손가락마디로 훔치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팬이 떨어져나간 환풍구가 뻥하니 뚫려 있었다.

 

정태의는 욱신거리는 꼬리뼈 부근을 다시금 조심조심 툭툭 두드리면서 환풍구 아래로 다가갔다. 또 떨어지면꼬리뼈 근처가 조각조각날지도 몰라, 하고 우울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다시 한 번 환풍구에 매달렸다. 손짚는 데에 방해가 되는 팬이 사라지고 나니까 매달리기가 한결 편하다. 어차, 하고 턱걸이를 해 올라간 정태의는 워낙 환풍구가 작은데다 천장이 방해가 되어 자유롭게그 바깥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조금씩이나마 열심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나뭇가지였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풍성하게 뻗어나온 새하얀 가지. 고개를 옆으로 빼도, 위로 치켜올려도, 똑같은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이라곤 없이 고요한 가운데, 문득 멀리서밤새가 울었다.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그 사이로 들어온다.

 

"……."

 

정태의는 환풍구에서 떨어져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다.손을 보니 먼지가 흠뻑 묻어 있어 탁탁 털었다.

 

숲이었다. 어느 곳에 있는 숲인지, 여기가 그 숲의 어디쯤인지는 조금도 알 도리가 없었다. 숲 속에 지어진 산장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숲인지는 볼 수 없으니 단언할 도리는 없지만, 여기서 어떻게든 몰래 나가기만 하면 숲에 숨어서라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태의는 변기 위에 걸터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 좀 급한데 아직이냐고, 점잖지만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지금 나갈게요."

 

정태의는 선뜻 일어서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곧바로화장실에서 나가려다가 자신이 알몸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돌아서 속옷을 찾았다.

 

아직도 환풍 팬에 휘감겨 있는 속옷을 떼어내자, 거기엔 먼지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

 

정태의는 다시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속옷을 들고 묵묵히 쳐다보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납치 감금되어 있는 경우, 제일 편한 건 누군가 구해주길 기다리는 거다.

 

―――라고들 말을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거짓말 같았다. 제일 편한 게 아니라제일 구출 가능성이 높은 게 타인의 도움일 뿐, 그게 제일 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바닥에 누운 채 창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문을 가로막은 나무판자 위의틈새로 희뿌옇게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납치된 지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며칠은 된 것같았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있을만한 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만 하는 것처럼 고역인 게 또 있을까.

 

차라리 탈출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생각하며, 정태의는 뒹굴 몸을 뒤척였다. 아마 적당한도구라도 있었더라면 뭐든 시도는 해봤을 거다. 따분해서 죽느니 차라리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해서 맞아죽는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별로 낫지는 않겠다. 지난 밤,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렇다는 예민한 이유는 아니었다. 어제 약을마시고 끌려온 탓에 낮 동안 계속 혼수 상태 비슷하게 정신을 잃고 있었던 터라, 밤이 되어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고 나자 잠이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잠이잘 오지 않는 사이사이에 깜빡깜빡 졸다 깨다 하면서 이 시간에 이르렀다.

 

정태의는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완전히 개운하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몸을 뒹굴뒹굴하다가, 결국은한숨을 쉬며 일어나 앉았다. 잠도 안 오는데 방바닥에 누워 있기만 하는 것도 고역이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다른 건 아니었다. 비교적 잘 자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깜빡 얕은 잠에 빠진 사람도 있었고, 두 사람은 일어나 눈을 뜨고 있었다. 정태의는 양치질도 못해 개운치 못한 입을 쩝쩝 찼다. 그리고 다시 창문을본다. 저걸 잘만 하면 부술 수 있지 않을까. 나무판자라고 해봐야 비싼 원목판을 저런 데다 쓸 리는 없고 십중팔구는 싸구려 합판일 거다. 그러면 힘 좀 좋은 사람은맨손으로라도 부술 수 있을 터였다. 정태의 역시 합판정도라면, 나무결만 맞으면 부술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부수려면 있는 힘껏 두들겨야 할 텐데, 그런 소리가 들리면 당장 밖에서 뛰어올 거다. 정태의는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갔다. 그리고 창문을 가로막은 나무판을 툭툭 두드려보았다.

 

생각보다 손맛이 묵직하다. 이거라면 그리 호락호락 맨손으로 부수어버릴 수는 없겠다. 게다가 이 가운데 그나마 육체 노동을 좀 할 만해 보이는 건 정태의 본인인데ㅡ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많거나 혹은 딱보기에도 힘없어 보였다ㅡ, 그는 이걸 맨손으로 부술 자신이 솔직이 없었다. 정태의는 손끝으로 툭, , 나무판을 두들겼다. 위로 난 틈새로, 새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 너머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하늘이 언뜻 보인다. 오늘은 날이 몹시 좋을 모양이었다.

 

"아무 도구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도망치는 건 좀 힘들 텐데."

 

정태의가 창을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뜬 채로 그 아래에 누워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그렇겠죠,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경우 문제는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었다. 당장은납치되어 있는 이 상황이고, 도구가 없다는 문제도 있었고, 바깥 환경이 어떤지 모른다는 점도 난감했다. 게다가 도망치려다 한 번 실패하면 그 뒤로는 더 도망치기 힘들어진다. 말 그대로 바깥의 구원만 손가락 물고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진다.

 

"카일이 저 사람들과 의견 타진을 잘 해주면 좋을 테지만……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테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외부의 구조란 잘 되면 대박이고 못 되면 쪽박이었다. 잘만 되면 손 하나까딱 않고 얌전히 기다리다가 탈없이 돌아갈 수도 있었고, 재수가 없으면 여기서 몽땅 죽을 수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입장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 후자는 전혀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서민으로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정태의는 자연히 후자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졌다. 정태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창가에서 떨어져화장실로 들어갔다. 엊그제 떼어낸 환기 팬이 여전히 바닥 한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정태의는 묵직한 팬을집어올렸다.

 

"다만 후자를 염려해 이곳에서 나가려고 시도는 해 봐야겠다고 생각함에 있어 문제는……."

 

정태의는 손가락으로 팬을 툭툭 두드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잠깐 천장을 쳐다보다가 흘끔 밖을보았다.문 너머에 사람들의 면면이 보인다.

 

싸움이나 험한 일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서 떼지어도망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여기서 한 번 탈출 시도나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거였다. 차라리 군대나 UNHRDO 동료들이었다면 이야기는더 빨랐을 거다. 아니 그들이었다면 귀찮으니까 여기에 얌전히 앉아 구조나 기다리자고 주장하는 정태의를 채근해 이미 벌써 이곳에서 뛰쳐나갈 시도를 해 봤을지도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잡혀 오지도 않았을 테지. 혼자 몸으로는 어떻게든 도망을 쳐보겠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는 힘들었다. 그것이 정태의가 느끼는난점이었다. 도망을 치다가 실패해도 정태의 혼자라면 그냥 한 목숨 죽고 말겠다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이라면 그렇게도 안 된다.

 

그렇다고 놔두고 혼자서 튀어버릴 수도 없고. (이 경우 도래할 수 있는 골치 아픈 상황을 정태의는 앉은 자리에서 열 가지라도 가정할 수 있었다.)

 

"그냥 누가 구해주길 기다리며 눌러앉는 게 제일 편한가, 역시."

 

선현의 말씀을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화장실에서 나갔다. 정태의가 손에 들고 있는 팬을 보고 깨어 있던 두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태의는 그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 듯 생각에 골몰하며 손을 움직였다. 사실 괜히 탈출해보겠다고 움직이는 게 뻘짓일 수도 있다. 아니 뻘짓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매우 컸다. 이를테면 죽도록 애를 쓰면서 혼자서 다쳐가면서 일껏 탈출하고 났더니 그 시점에서 납치범의 협상이 끝나 사람들을 모두 얌전히 돌려보내주기로 했다든가 하면 혼자병신 짓을 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래도 변명거리 하나쯤은 생각해야지."

 

나중에 카일을 만나면 '나도 나름대로 노력을 해봤는데 ……,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고 말이라도 하려면 도주시도라도 해봐야겠다. 물론 이 상황의 원인이 카일이니마땅히 해결도 그가 해야 한다고 주장할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실상 정태의의 사고 방식은 아니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러다가 저들에게 들켜서 잘못되면 더 위험해질 텐데."

 

정태의가 움직이는 걸 지켜보던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중얼거렸다. 정태의는 흘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못마땅한 시선을 보면서 정태의는 이내 느껴지는 바가 있어피식 웃었다. 남자는 정태의를 걱정한다기보다는, 그로인해 벌어질지도 모르는 자신의 위험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긴 그게 당연하지. 남 때문에 내 목숨까지 위험해져서야 그 무슨 억울한 일일까.

 

그러나 저 남자는 간과하는 게 있었다. 그들은 중요하고 귀중한 인질이지만 정태의는 별 중요하지도 않고 대수롭잖은데 그 집에서 오래 머무른다는 이유만으로 잡아온, 말하자면 ''이었다. 즉 잘못 걸려서 운수가 아주 흉악해진다 해도, 납치범들은 정태의를 손쉽게 처리해버릴지 몰라도 나머지 남자들에게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죽더라도 나 혼자 모두 덮어쓰고 죽을 테니까."

 

정태의는 장난스럽게 말하곤 계속 손을 움직였다. 팬의구심부에서 팬 날개를 떼어내고 있는데, 이게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낸 팬인지 참 튼튼하게 잘도 만들었다. 나중에 회사에 투자하는 셈치고 이 회사의 주식이나 사야겠다.

 

정태의는 회사 이름이 새겨져 있는 구심부를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이윽고 네 장의 날개가 모두 떨어졌다. 날개를 붙잡고비트는 동안 손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견딜 만했다. 정태의는 비틀어낸 날개를 툭툭 손톱 끝으로 튀겼다. 역시나 그렇게 고생을 시킨 만큼, 날개도 단단했다. 정태의는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곤, 네 장의 날개를 겹쳐 들고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서면서 다시 나무판 위쪽으로 난 틈새를 보았다. 하늘빛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종종 새 소리도 들려왔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정태의는 흘끔 문 쪽을 보았다. 이럴 때 저 남자들이 들어오면 낭패다. 아마도 아침거리를 주러 들어오긴 할 텐데 언제쯤 들어오려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밥 먹으라고 챙겨주진 않을 테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저 남자가 했던 말대로,죽을 팔자면 죽고 살 팔자면 산다.

 

이렇게 어중간한 때에는 그 생각만 하며 움직이는 게 나을 때가 있었다. 달리 결론이 보이지 않는 걱정으로우물거려 봐야, 그 끝에 제대로 된 실마리가 보인 적은여태 한 번도 없었다.

 

"재의님 재의님, 제게 그 운을 좀 나누어주세요……."

 

팬 날개 두 장을 겹쳐 촘촘히 맞붙은 나무판자 사이로 억지로 비틀어 끼워넣으며 정태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태껏도 몇 번이나 기도했지만 별로 들어주지도않았고, 어디 있는지 행방도 묘연한 재의님이다. 그래도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행운을 시작하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예전에 계속 그랬다. 재의님재의님을 외어서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켜켜이 붙은 판자 사이로 팬을 집어넣는 건 제법 힘들었다. 끼익, 끼익, 나무판자가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그 틈새로 팬 끝을 끼워넣고 툭툭 두드려 판자 사이에 팬을 억지로 비집어 넣는 데에만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자고 있던 사람들이 깨었다.

 

끼이…….

 

판자의 가운데 근처까지 팬이 들어갔다. 나무판자의 겹쳐진 사이에 실낱 같은 금이 갔다.

 

정태의는 상처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문지르면서 스읍,하고 혀를 찼다. 베지는 않았지만 너덜너덜해서 뭔가 닿기만 해도 아팠다. 손가락을 입에 물고 주욱 빨면서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뒹굴고 있던, 날개에서 분리해낸 팬 구심부를 판자 사이에 끼워넣는 팬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지렛대를 움직이는 것처럼, 체중을실어 가볍고 빠르게 밀었다.

 

찌직―――. 나무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좁고 기다란 나무판을 맞붙여 놓았던 사이가 벌어졌다. 한 번, 두 번,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들며 밀 때마다 나무판이 찌직, 찌직, 결을 따라 갈라졌다. 이윽고 판자는 위와 아래만 겨우 붙어 있고 가운데는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 두엇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판자 사이가 길게 벌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면 이 판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면 나머지는 간단하다. 촘촘하게 이어진 나무판 전체를 뜯어내기보다 훨씬 간편했다.

 

정태의는 느슨하게 벌어진 판자 사이에서 흘러내리는팬 날개를 주워들었다. 두터운 날개를 두 장이나 겹쳤었는데도 크게 휘어지고 말았다. 이건 더 쓰기 힘들겠다. 접힌 팬 날개를 옆에 내버린 정태의는 남아 있던 팬 두장을 다시 겹쳐, 벌어진 아래 틈새로 끼워넣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이번엔 처음보다 훨씬 쉬웠다. 판자 한 장 사이가 다 떨어졌다. 사람이 나갈 수는 없지만 바깥을 내다보는 데에는 충분할 정도로옆의 판자들이 휘어졌다.

 

"…ㅡ."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역시, 숲이었다. 숲 속에지어진 산장의 2층이었다. 주위는 온통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차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뒤로는 울창하게 산이 이어졌는데, 나무판이 휘어져 내다볼 수 있는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제법 산세가 험한 듯싶었다.

 

"뭐야, 뭔가 좀 보이나? 어디…ㅡ."

 

뭔가가 벌어져 바깥의 정경이 언뜻 보였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보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다가왔다.다른 사람들도 어디냐고 조그맣게 묻는다.

 

이곳의 지리를 알 턱이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는 정태의의 옆에서, 바깥을 한참 동안이나 이모저모 살펴보던 남자는 슬쩍 눈썹을 찡그리더니 중얼거렸다.

 

"산속인데……제법 깊은걸."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의 대답은 꺼내지 못하고 물러서는 남자의 뒤로, 차례로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정태의라고 해도, 매일 드나드는 곳이 아니면 자기 집 뒷산 숲 속에 던져놓으면 그게 어딘지 모를 거다.

 

그때였다.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바깥에서 사람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태의는 다급하게 창문 앞에 선 사람을 밀어내었지만 그때 마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흑인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태의를 볼 뿐, 그 앞에서 비키려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외쳤다.

 

"사람이 온단 말이…ㅡ."

 

그러나 정태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그제야 깨닫고 흑인 남자가 미처 자리에 앉기도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흠칫, 흑인 남자는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머리를 짚었다.

 

한 손에 흑빵이 든 봉지, 다른 손에는 물을 들고 들어오던 남자는 방 안의 광경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틈새가갈라져 나간 판자를 보고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놈들이…ㅡ!"

 

남자는 손에 든 물건들을 내던지고는 바깥을 향해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듣고 다른 동료가 서너 명 달려왔다.그 동료들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남자가 벌어진 판자를 눌러보이자 그제야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어떤 놈이야, …ㅡ너냐?!"

 

남자는 손에 팬날개를 들고 씁쓸하게 흔들어 보이는 정태의를 보곤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제 보니 어제 정태의에게 목발로 얻어맞았던 남자다. 남자도 정태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 것이지 왜 헛짓을 하고 있어! 가만히 놔뒀더니 도망칠 궁리나…ㅡ!"

 

남자는 그대로 정태의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퍼억,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정태의는 남자에게 얻어맞은 것뿐 아니라, 그 반탄으로 등 뒤에 있던 나무판에등을 찧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사내놈들에게 부대끼는 환경에서 지내서 맞는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더럽게 아팠다. 아픈 데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난 때리는 데에도 이골이 났는데, 라고 속으로 생각한 정태의는 얻어맞은 얼굴을 문지르면서 부루퉁하게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그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 셋을 보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 어설프게 맞주먹질했다간 작신나게 얻어맞기 십상이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고 덤으로 하나 얹어 온 인질, 본보기로 하나쯤 죽이겠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재수 없는 경우를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역시 재수 없었다. 얌전히 가둬만 둬서 좀 괜찮은 치들인가 했더니, 별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나 이 남자는 더 재수 없었다.

 

몇 대 대충 때리고 말 것이지, 남자는 어디서 뺨이라도 맞고온 게 아닌가 싶도록 정태의에게 주먹질을 했다. 얼굴을 두어 대 더, 배를 서너 대, 그때마다 정태의는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서 조금이라도 덜 맞아보기 위해 비명도 적당히 흘려주면서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했다.

 

정말, 저 뒤에 있는 딴놈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콱 깨물고 늘어졌을 텐데. 아니면 지금이 납치된 상황이 아니라서 진짜로 죽을수도 있다는 위험이 없다면, 그냥 병원에 실려갈 각오를 하고 뒤에 딴놈들이 열이 있든 백이 있든 달려들었을 거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그 매질을 견뎠다. 내가 그 미친놈이랑 있다 보니 소심해진 건지, 대범해진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진짜 아팠다.

 

아무래도 이 남자도 때리는 데에 이골이 난 놈 같았다.정태의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태도나 분위기가 딱 군대에서 썩었던 분위기가 났다. 경찰이랑 군인은 밴리 밖에서 걸어와도 알아본다고 하더니, 대충 알겠다. 게다가 지원해서 군대에 들어가는 외국의 경우는 좀더 알아보기 쉬웠다. 군인 아니면 군인 출신. 짐작컨대 군대에서 나와 뭔가 반군이나 혁명군 쪽으로 들어간 놈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원래 출신지는 슬럼. 주먹이 아예각이 박혀 있다. 일레이한테서 도망 나왔더니 이게 웬일이람, 운수 한 번 더럽구나, 정태의는 아는 대로 욕설을 다 퍼부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한바탕 매질을 끝낸 남자는 정태의가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보고는 배를 한 방 더 걷어차더니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협박하듯이 소리쳤다.

 

"괜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들 있어! 너희들이 밖에서나 회장님, 선생님 소리 듣지 우리는 그런 거 안 따져! 여기서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허세에 가득찬 으름장을 놓은 남자는 툴툴거리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 뒤에서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하던 동료들도 뒤를 따라나갔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나가던 남자는 걸레짝이 된 정태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질 나쁜 놈들이랑은 달라서, 이야기만 잘 매듭지으면 멀쩡히 살려서 보내줄 거요. 게다가 여기는 산세가 험해서 길 잃기 십상이야. 밤이면 늑대도어슬렁거리는 곳이니, 괜한 생각 말고 얌전히 있는 게낫다고."

 

정태의는 아득한 눈으로 누워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다시 혀를 차더니 방에서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정태의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호되게 얻어맞긴 했는데, 그래도 뼈가 부러지거나 심각하게 몸이 상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때리는 데에 이골이 난 남자였는지, 아프기는 빌어먹도록 아프게 때리면서정작 크게 다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생명의 심각성을 두고 판단하는 것뿐, 겉보기는 아주 처참했다.

 

"이봐, 괜찮은가?"

 

옆에서 안쓰러운 듯이 남자가 물었다. 얼굴을 찌푸리며혀를 차는 게, 거울이 없어서 볼 수가 없었지만 상당히볼 꼴이 못 되는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입 안이 찢어졌는지 피맛이 비릿하게 감도는걸 꿀꺽 삼키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손등에 피가 묻어나왔다. 입가가 찢어졌나 보다. 그러나 다른 곳에는피가 나지는 않았다. 얼굴을 손으로 쓱쓱 쓸어봤지만 찢어진 데는 없었다. 다만 손을 대자마자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픈 게, 몇 시간ㅡ까지도 갈 것 없이 몇신 분ㅡ만 있으면 얼굴 전체가 시퍼렇게 부어오르지 싶었다.

 

"괜찮아?"

 

정태의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른 남자가 한 번 더물었다. 그 남자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같은 처지인 사람이 그렇게 얻어맞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는데 기분이 밝을 리 없었다. 순수하게 남의 일이라고 할수만은 없는 탓이다.

 

"아뇨……, 안 괜찮아요. 어우씨, 아파죽겠네……."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흘끔 창문을 보았다. 여전히 나무판자는 벌어진 채였다.

 

저대로 놔두고 가는 걸 보니, 저기로는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까 마지막 남자가 방에서 나가기 전에 했던 말대로, 저기로 도망치면 숲에서 죽기 십사일 수도 있다.

 

정태의는 한숨을 푹 쉬곤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벌어진 나무판을 두 손으로 비껴 쥐더니 있는 힘껏 비틀어내었다. 쩌적,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 , , 정태의가 두 손을 힘있게 양쪽으로 벌릴 때마다 나무판이 갈라지며 소리를 낸다.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정태의와 방문을 번갈아보며 만류했지만, 정태의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저었다.

 

"이왕 맞은 거, 시야라도 탁 트여 봐야죠. 게다가 이대로 놔두고 간 걸 보면 이 창문을 열어봐야 이리로 도망치기는 힘들다는 뜻인걸요. 그냥 시야를 가리려고 막아놓았던 것 같은데……이제 와서 뭘 새삼."

 

정태의는 얻어맞고 자포자기라도 된 듯 온힘을 다해 판자에 부딪쳤다. 판자가 쩍쩍 갈라지더니 결국 버텨내지못하고 서너쪽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시야가 확 밝아졌다.

 

". 훨씬 낫네요. ……음. 여기 넣어둔 이유를알겠다."

 

단순이 2층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바로 아래가 급하게 경사진 골짜기였다. 붙잡고 타고 내려갈 만한 관도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고 여기서 나가려면 무작정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냥 2층이면 뼈 한 군데 부러질 각오하고 뛰어내려 볼 만도 하겠지만 저 골짜기가 입을벌리고 있어서야 도저히 뛰어내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저건 뼈 한두 데가 아니라 운수에 몸을 걸어야 했다.

 

날이 거의 밝았다. 해가 막 다 떠오른 참이었다. 새벽이물러가고 아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마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더운 낮이 찾아들 거다.

 

"대충 7시쯤 되었으려나요……."

 

"한 예닐곱 시는 되었겠지?"

 

정태의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뒤에서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닐곱 시라. 아마도 저들이 카일의 회사로 연락하지는않았을 거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개인적으로 딜을 하는게 더 유리하다는 것쯤이야 생각할 테니까. 그러면 카일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야 연락이 갔을 텐데 그는 저녁 식사를 거의 늘 집에서 하니까 대충 일고여덟 시.

 

그때 연락이 되었다고 친다면, 벌써 12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하룻밤의 시간을 거쳐, 오늘은 결론이 날 테지. 오래 잡혀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어린애를 유괴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이런 류의 범죄는 시간을 그리 길게 끌지 않는다.

 

첫 번째는 요구를 들어주고 인질이 풀려나든가. 아마도이 경우는, 결론 자체는 오늘 안에 나겠지만 인질로 잡혀 있는 시간은 조금 오래 끌 수도 있었다. 요구 조건이충족되었다는 것은 확인한 뒤에 인질을 보내주려고 할 테니까.

 

두 번째는 양측이 원하는 바가 서로 맞지 않아 협상을 하며 조율하는 경우. 이 겨우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으니, 어지간하지 않으면 곧 결론을 낼 테지.

 

제일 안 좋은 게 세 번째인데, 요구가 결렬되고 인질의목숨이 위험해지는 거다. 아예 인질을 돌아보지도 않으면 그냥 죽는 거고, 요구는 들어우지 못하되 인질은 찾아야겠다고 전력을 투입하면, ……아마 그래도 죽겠지.소식이 들리자마자 당장 인질부터 죽일 테니까.

 

정태의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누구 담배 없냐고 물어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속옷 차림으로 앉아 있는 면면들을 발견하고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속옷만 입고 있는 그 모습이 과히 아름닺지 않았지만, 그래도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문질러내고도 여전히 거뭇거뭇하게 더러운 속옷을 뒤집어 입고 있는 자신보다는 한결 아름다웠다.

 

"……."

 

정태의는 담배 연기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이쪽 입장에서 제일 좋은 건 물론 첫 번째인데, 아마도 카일의 일처리 방식을 생각하면 두 번째가 제일 가까울거다. 어느 정도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지, 그건 정태의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빨리 여기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다. 우연히 산 속을 지나가는 심마니라도 보인다면 도와달라고 소리쳐서 구조 요청이라도 하겠는데,이렇게나 인적 드물고 사람없는 산이라니.

 

정태의는 창틀에 팔을 괴고 넋없이 바깥을 내다보았다.주위는 온통 하얗게 가지를 뻗은 자작나무였다. 그 고요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듯했다.

 

"뭐……어떻게든 되겠지."

 

정태의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곤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인생, 그렇게 나쁘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 딱 2분째, 정태의는 생각을바꾸었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조금 전과 달랐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태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뭔가 생각에 잠기거나 하면서. 그 모습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정태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의 모습에 뭔가 달라진 게 있을까. 그러나 바로 조금 전까지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광경에 달라진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걸리는데. 예를 들어 보이는 데에 이상이 없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멀찍이 숲 쪽에서 간간이 지저귀던 새들이 조용했다. 가끔 저 너머 반대쪽 숲에서는 여전히 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쪽, 빼곡하게나무들이 들어차 있는 쪽으로 새 소리가 끊겼다. 마치뭔가 무시무시한 맹수가 나타나기라도 한 듯.

 

새 소리가 끊긴 쪽은 길이 나 있는 쪽도 아니었다. 차가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흙길은 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오른쪽 앞쪽으로 나 있었다. 아마도 저 남자들은 이 길목만을 주시하며 감시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새가 불현듯 소리를 멈춘 쪽은 울창한 숲길이다.

 

자동차 따위가 달려오면 새 소리가 그치기도 하지만, 그쪽 방향에서는 차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묘하다는 생각이 든 것과 거의 동시였다.

 

우웅…ㅡ하고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얼핏 듣기엔 휴대전화의 진동 따위가 울리는 소리 같기도했다.그러나 이 방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고, 바깥에 있는 남자들의 진동 소리가 들릴 리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진동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고, 게다가 점점가까워졌다.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던 소리는 점차 그 소리를 키우며 다가왔다. 새들이 소리를 멈춘 방향이었다.

 

차가 다닐 수도 없는 그 좁은 오솔길에서, 뭔가 굉음을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숲 안쪽에서, 뭔가가 밀려 닥치고 있었다. 조그만 나무 따위는 그대로 헤쳐내면서. 굉음이 가까이 오자 콰직, 빠지직, 어린 나무들이 꺾이고 잘려나가는 소리도 희미하게 곁들여 들어왔다. 그 소리가 착각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 정도로 선명하게 들릴 즈음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창가로 다가왔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모터 소리 같은데……."

 

이런 숲 속에서 잔디깎는 기계를 돌릴 리는 없고, 라고누가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굉음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 소리를 깨달은 바깥의 사내들이 부산하게 떠드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가는 가장자리의 나지막한 자작나무를 무참하게 뭉개버리며, 그 굉음의 정체가 모습을드러내었다.

 

"저거……, 레와코……."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미 오래 전에 단종될 모델이잖아, 라고 덧붙여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정태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숲길을 처참하게 갈아내며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나타난 것은, 삼륜바이크였다.

 

삼륜바이크라고 해도 이름뿐이었다. 그저 바퀴가 셋 달렸을 뿐, 저건 이미 바이크가 아니었다. 아마도 산악용으로 개조를 한 듯, 몇 번 보아왔던 물건과는 확연하게외간이 달랐다. 그냥 보기에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흉흉한 거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탱크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홀로 산책이라도 나온 듯 한 손으로 바이크의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뭔가를 어깨 위에 끌어안듯이 걸머지고 있었다. 그 여유로우면서도 무심한 표정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멀리서 일별했다.

 

정태의는 넋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괴물 같은 바이크 위에 올라탄 괴물 같은 남자가 정태의를 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입가에 얼핏 표정이 스쳐간 듯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정태의의 낯이 삽시에 굳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크게 부릅뜬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본다. 몇 초, 분명히 그들은 시선이 마주쳤다.

 

"말도……, 안……."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서 희미하게 말소리가 나온다. 입술이 떨려 말소리도 흐려졌다. 옆에서 누군가 그 남자를 알아본 듯, 경악스런 목소리로 띄엄띄엄중얼거린다.

 

"아니 저건……, 리…ㅡ!"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 괴물 같은 남자는 짙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어깨에짊어지고 있던 무식하게 생긴 쇳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길죽하고 커다란 쇳덩이가 눈에 들어온 순간, 정태의는 경악했다. 판저 파우스트. 대전차포였다. 장갑차도 가뿐하게 망가뜨리는 놈이다.

 

"잠깐, 피…ㅡ!!"

 

그러나 정태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피식 웃으면서 대전차포를 이쪽으로 향한 그 괴물은, 삼륜바이크에서 일어나 한쪽 발을 핸들에 얹고서 빈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정태의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을무작정 때려눕히듯이 쓰러뜨리며 몸을 바싹 낮추었다.

 

이 미친 새끼…ㅡ!!!

 

정태의는 속으로 욕설을 내질렀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소리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귀에 들리지않았다. 그 대신,

 

쾅――――!!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음이 바로 귀 옆에서울렸다.

 

정태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연이어 들린 또 하나의 폭발음에 묻혀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사이로 흙먼지가 섞여 그 일대를 뒤덮는다. 돌조각이 튀었다. 크고 작은 돌덩이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태의는 머리를 두 팔로 가리고 납죽하게 엎드렸다. 어깨며 등, 온몸 위로 콘크리트 조각이 쏟아져내렸다.제법 큼직한 돌덩이가 어깨를 찍고 떨어져, 정태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돌비가 멎은 뒤,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온몸에서 하얗게 돌먼지가 흩어져 내렸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조각나 무너져내린 벽이 사람들 위로 덮여 있었다.

 

"미친 놈……, 이 정신나간 새끼……!!"

 

거의 제정신도 아닌 상태로나마 욕설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돌아보자 벽 한 면이 날아가고 뻥 뚫려 있었다. 판자가 붙어 있던 창문은 이미 온 데 간 데 흔적도 없고, 탁 트인 시야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벽뿐 아니다. 천장도 날아가고, 심지어는 창문이 있던 반대편 벽도 천장을 따라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사람한테 대고 대전차포를 쏘는 놈이 어딨어, 이 미친새끼야!!"

 

정태의는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들릴지 안 들리지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안 들릴 것 같았다. 저 옆쪽에서 폭발음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과 폭발음, 기관총 소리, 고함들이 한 데 뒤섞여 끔직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태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며 불렀다. 두 사람은 다행히도 정태의와 비슷한 정도로 다쳤을 뿐 의식도 또렷하게멀쩡했고, 한 사람은 잠깐 정신을 잃었지만 정태의가 몇 번 소리쳐 부르자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깨어났다. 아야야, 하고 중얼거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팔을 늘어뜨리는 모습이, 팔을 제법 다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넘어지다가 머리를 찧었는지 혹은 돌에 맞은건지, 머리 근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자 의식이 돌아올 듯 말 듯한지 낮은 신음처럼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않았다.

 

"젠장. 저 새끼 인질 구하러 온 거 아니었어?! 제 손으로 죄다 죽이러 왔냐?! 미친 새끼!"

 

정태의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일단은 한숨 놓았다.

 

살아는 있다. 멀쩡하다고는 못해도, 모두 목숨은 붙이고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남자를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이마에서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려 대충 손등으로 닦았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손에 피가 묻은 걸 보고서야 자신의 이마에서 관자놀이에 이르기까지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가 찢겨져나갔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아픔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

 

"미친 놈, 미치광이 릭…ㅡ."

 

누군가 중얼거렸다.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는 분노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그 남자를 욕하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어, 그 남자의 형이자 이 사태를 만들어낸 사람일카일에게 화살을 돌렸다. 미쳤지, 미쳤어. 하필 보내도저런 놈을 골라서 인질과 범인을 한 데 모아서 다 죽여버리고 깔끔하게 일을 끝낼 참이었나, ?! 카일!!

 

뒤이어 한 번 더 멀찍이서 포탄 소리가 울려퍼졌을 때,문득 정태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목숨이 남아있을 때, 그리고 저 미친놈이 좀 떨어진 데에서다른 놈들과 싸우고 있을 때 얼른 도망가야 했다. 다행히 이 근처는 울창한 숲이었다. 잘만 숨으면 안 들킬 수있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사람들을 한 번 더 흘끔 돌아보고는, 문 옆쪽으로 반너머 무너져서 의미가 없어져버린 벽을 타고 넘었다. 당혹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나중에 기회 닿으면 다시 봐요'라고 짧은 인사를 남긴 그는, 욱신거리는 발목이며 몸을 질질 끌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왜 저 남자가 여기 있을까.

 

정태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달리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았다. 아마도 확실하게 작살이 났지 싶었다. 그새 체력이 그렇게 떨어졌을 리도 없는데 몹시 숨이 찼다.

 

우연일까. 혹은 형의 친구들이 납치당했다는 소리에 의협심을 발휘해서 그들을 구하겠다고 스스로 나섰기라도 한 건가.

 

"……웃긴 소리.'

 

정태의는 스스로의 생각에 당장 비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눈빛을 시퍼렇게 불태웠다.

 

우연일 리가 없다. 아까 분명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놀란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평소에 그러던 것과 다름없이. 그는 여기에 정태의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러, 이 죽일 놈……!"

 

결론은 역시 그것밖에 없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태의가 잠시 눈을 뗀 사이 모러의 입에서 말이 새어나갔고, 그게 어떠한 경위로든 일레이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정태의는 이를 갈며 발을 옮겼다. 그리고 카일에게서 모러까지 골고루 돌아가며 욕을바가지로 퍼붓다가ㅡ그래도 카일에게는 신세진 것도 많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 '왜 저런 놈을 보내고 그랬어!'라고만 절규했다ㅡ급기야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때 떠났어야 했는데. 발목을 다치든 말든, 아니 아예발목이 똑 부러져서 꺾여나갔다고 해도 그날로 당장 딴데로 갔어야 했는데. 판단을 잘못 내린 게 그의 명줄을잡아먹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친구 하나가 말했었지.운은 판단력이라고. 그 친구가 말한 건 경제 생활에 관련된 일이긴 했다. 운 좋은 사람이 돈을 버는데, 그 운이라는 게 결국 알고 보면 어느 때를 잡을 것이냐 하는판단력이라는, 그런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이 순간 친구의 의도와는 좀 다르지만 그 말이 뼈에 사무쳤다.

 

그날 당장 떠났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이 집에 오질 말아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유럽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달리 갈 대륙은 얼마든지 더 있었는데 왜 하필 이 빌어먹을 땅덩이에 왔을까. 아니 그보다 더 전에…….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정태의는 이제는 인생의 원점과 같이 느껴지는시점, '숙부를 따라 UNHRDO로 가는 게 아니었다'는 부분까지만 거슬러 올라가고 후회를 멈추었다. 사실은 몸이 힘들다 보니 후회에 쏟을 정신력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숲 속, 제법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길을 확인해가면서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라도 길을 찾아나가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길 찾는 감각은 좋은 편이었다.

 

숲 속은 고요했다. 얼마 전부터 폭발음이 멎어 있었다.총을 쏘아 갈기는 소리도, 고함소리도,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달아났다곤 하지만 총포 소리는 생각보다 멀리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고함이나 비명은 멀어져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지언정, 총이나 포는 발사가 멈춘 게 틀림없었다.

 

폭발음이 연거푸 터지던 곳에 있다가 갑자기 조용해진탓인지, 왈칵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새소리 하나 없는 이 고요함이 유난히 스산했다.

 

문득 아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ㅡ게다가 여기는 산세가 험해서 길 잃기 십상이야. 밤이면 늑대로 어슬렁거리는 곳이니, 괜한 생각 말고 얌전히 있는 게 낫다고.

 

그 남자의 말마따나 숲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길을 잃어버릴 정도와 그렇지 않을 정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은 괜찮다. 이 정도는.

 

문제는 길이 아니라 신짐승이었다. 이제 겨우 아침이 시작되었으니 그나마 밤보다는 낫지만, 굶주린 맹수와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지금 정태의는 굶주린 맹수는 커녕 배부른 잡종개가 덤벼들어도 당해낼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지쳐 있었다.

 

정태의는 문득 걸음을 늦추었다. 귀가 먹먹했다. 몇 번이나 연거푸 터지는 폭발음을 지척에서 들은 탓이다. 귓속에서 조그만 풀벌레가 울어대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없었다. 더 이상은 한 걸음도 갈 수 없을 것같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나무등걸에 기대어 바닥에 널브러져 앉은 정태의는 이마에서 조금씩 흘러내리며 좀체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피가 스며들어 자꾸 흐려지는 시야를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손등에 말라붙은 피 위에 다시 핏자국이 겹쳐졌다. 피가 말라서 버석거렸다. 나도 다음부턴 장갑이나 낄까 보다. 괜히 힘없이 투덜거렸다.

 

이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목은 이제 질질 끌지 않고선 움직일 수도 없었고, 달려오면서 나무나 돌 따위에 부딪힌 몸은 온통 몽이 들고 살갗이 찢어졌는데도아픈 줄도 몰랐다.

 

"아…ㅡ, 진짜 죽겠네…ㅡ."

 

그러나 그때였다.

 

바삭. …ㅡ바삭. 바삭. 바삭.

 

풀소리였다. 정확히는 풀을 헤치면서 걷는 발소리다. 그 발소리는 처음에는 느릿한 듯하다가 점차 빨라지고있었다. 희미하게 가쁜 숨소리도 같이 들렸다.

 

정태의는 움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나무등걸과 바싹 붙어 있는 바위 뒤로 소리없이 조금씩 몸을 옮겨 그 안쪽으로 바싹 파고들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마구 교차하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초조하게 거친 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똑바로 정태의를 향해 다가오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정태의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이쪽 방향을 향해 불규칙하게 허물어지는 걸음이 가까워진다.

 

…ㅡ아니다.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심장이 반쯤 풀렸다.

 

발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일레이는 저토록 초조하고 급박하게, 금세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걷지 않는다. 그의 걸음 소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여유로우면서도 무게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저렇게 휘청거리면서 황급히 달려오는 사람은.지금 이 근처에 있을 사람이라면 두 종류밖에 없었다. 납치범, 아니면 인질.

 

그러나 마치 누군가에게서 도망을 치는 듯 초조하게 잰걸음을 걷는 사람이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뒤를쫓기는 그 초조함이 발소리에 묻어 나왔다.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자라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위 뒤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런 몸으로는 도와준다고 나서봐야 오히려 피해만 늘이는 게 고작이었다. 어젯밤 같은 방에서 지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룻밤 사이에 그리 친해진다거나 퍽 호감이 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 별개로, 그들은 어떤 면에서 정태의의 동료였다. 못 본 척할 수는없는 사람들이다.

 

몸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까. 정태의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천근처럼 무거운 팔을 들어, 산장에서 뛰쳐나올 때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어 주워 입고 나온재킷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바깥주머니, 안주머니, 앞주머니까지 모두 뒤적여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하다못해 1유로짜리 동전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냐. 정태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산장에 갇혀 있을 때와 다를바 없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가진 거라곤 상처투성이가 되어 까딱하기도 힘든 몸뿐이다.

 

할 수 없지. 그가 만일 인질 중 하나라면, 그가 위험에 처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수밖에.

 

도와줘야 하겠지만 내가 죽을 걸 각오하면서까지 반드시 도와준다고 단언은 못하거든,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그런 긴장 상태에서도 무겁게 닫히려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즈음이었다.

 

"나와. 태이."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릴 날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 없어야 했는데.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기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이 힘이 다 빠져나갔는데, 심장이 두근거리자 손끝도 따라서 절로 덜덜 떨렸다.

 

"네가 이쪽 방향으로 가는 걸 보고서 이놈을 이쪽으로몰아 온거야. 어차피 너도 많이 다쳤을 테니 이 근처에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했을 텐데. 어서 나와."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쥐죽은 듯한 숲 속에는 제법 멀리까지 그 소리가 울려갈 터였다.

 

일레이는 정태의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틀림없이 이 근처 어딘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숨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어느 나무등걸뒤에 숨었는지, 혹은 어느 바위 뒤에서 풀을 덮고 숨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정태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란다고 나가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무섭기도 했고, 나갈 힘도 없었다.

대답조차 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대로죽는 한이 있어도 저 남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려나. 그럼 이 일대를 샅샅이 뒤질 작정일까.그러나 숲 속의 이 근처 어딘가, 라고 해도 그 범위는 제법 넓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 하나를 찾아내기는 지나치게 넓다. 사람 여럿을 데리고 와서 수색을 한다면 모를까, 일레이 혼자로는 턱도 없었다. 이건 싸움으로 여남은 명도 능히 당해낼 수 있는 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안 나와……?"

 

일레이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조용했다. 별로 화난 빛도 없고 평온하고 담담하게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그러고도 몇 초 가량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정태의는, 비록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지만, 이대로 그가 포기하고 돌아가주길 바랐다. 혹은 정태의가 이 방향으로 가는 걸 보고 뒤따라 왔다는 말이 거짓말이고 그냥 넘겨짚어 말한 것이라, 정태의가 이곳에 없다고 여기고 다른 곳을 뒤지러 가줬으면 했다.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져가는 와중에도 숨도 못 쉬고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정태의는, 문득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가볍고 짧은 한숨이다.

 

"안 나오면 숲에 불질러버린다."

 

무심하게 심상한 말투였다.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정태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정태의는 눈동자만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여름이 한창이라 마른가지나 낙엽 따위는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무에 불이 안 붙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나무에는 불이 잘 붙지 않는다 하나 한 번 타기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주위는 당연하게도 온통 빽빽하게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삼림 방화라니, 범죄도 그런범죄가 없다. 정태의는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이놈이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고 해도, 사람이 버젓이 들어앉아 있는 집에 대고 대전차포를 쏘아대는 놈이라 해도, 그래도 이 정도 규모나 되는 넓은 숲에 불을 질러버릴 만큼 미치지는 않았을 거다. 방화가 얼마나 중한 처벌을 받는 중죄인지,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정태의가 숨을 죽이며 속으로고개를 내젓고 있는 동안, 역시나 몇 초 정도 기다려 준일레이는 입을 열더니 수를 세었다.

 

"타죽기 싫으면 어서 나와. 하나…ㅡ, 둘…ㅡ, ……. ……셋."

 

마지막 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천히 숫자를 세는 와중에도 마지막 ''은 조금 더 사이를 두고 세었다. 요즘 심성이 매우 거칠어져서 UNHRDO에서 아주 살벌하게 군다더니, 목소리는 제법 기분 좋게 들리는 것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저 숫자 세는 걸 보면 한동안 못 본 사이에 고양이 쥐 생각하는 법도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숫자를 세고 나서도 정태의가 나오지 않을 걸 짐작하고 있었는지, 일레이는 숫자를 다 센 다음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뭔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소리가 나서 정태의가 슬며시 눈을 뜨고 나무등걸과 바위의 틈새로 훔쳐보자,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고 있었다.

 

"……?"

 

정태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 커다랗고 흐물흐물한 가죽 주머니 안에 뭐가…….

 

그러나 그 생각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주머니를 풀어헤치자마자 싸아하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 ――――휘발유다.

 

일레이는 가죽주머니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 열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휘발유를 주위에 촤악 흩뿌렸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커다란 가죽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휘발유를 근처 곳곳에 좍좍뿌려대었다.

 

휘발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온 숲에서 피어오르는 휘발유 냄새 속에, 정태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진짜 불을 붙이려고.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도 아니고, 나 하나 끌어내자고 숲에 불을 지를 리가. 정태의는 온몸에 들러붙는 듯한 휘발유 냄새 속에서 속으로 비병을 질렀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의 속내는 아랑곳 않고, 일레이는 텅 빈 가죽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툴툴 털어내더니 맨손으로 그걸 찌익 찢었다. 찌익, 찌익, 그냥 봐도 상당히 두터운 두께인 그 가죽을 어렵잖게 찢어발긴 그는, 기름으로 잔뜩 절어 있는 그 가죽 조각을 한 손에 들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었다.

 

설마.

 

그러나 그 설마는, '설마'였다.

 

 

 

 

 

가죽 조각은 삽시간에 타올랐다. 매캐하게 가죽 타는 냄새가 휘발유 냄새와 섞여 코를 찔렀다.

 

눈을 더할 수 없이 커다랗게 부릅뜨고 그 모습을 보고있는 정태의의 몇 걸음 앞에서,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 불길을 내던졌다. 잠시 풀들이 그을리며 그 위로일렁이는가 싶던 불은, 바로 그 옆 일레이가 뿌렸던 휘발유에 흠뻑 젖어 있는 나무에 옮겨붙었다.

 

그 뒤로는 순식간이었다.

 

불길은 삽시에 나무에서 나무로, 잎에서 잎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태연한 얼굴로 버티고 선 일레이는 그 자신조차 불길이 넘실거리는 지척에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발치에서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담배 끝을 살짝 갖다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미친놈. 미친놈! 이 미친놈!!

 

정태의는 울분이 터져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벌떡 일어나지는 못했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힘이 따라주지 않아 몸을 한 뼘 정도 겨우 땅에서 떨어뜨리는가 싶다가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척은 일레이의 귀에 닿은 모양이었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바로 옆에 있던 바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정태의를 발견한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휘어졌다.

 

"아하…ㅡ."

 

낮고 조용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 웃음에 정태의는 같이 웃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 미친놈아. 이걸 어쩌려고 그래……, 이 사태를 대체 어쩔거야……!"

 

마음 같아서는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는데,그러기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고 끙끙거리면서 잇새로 한 마디 한 마디 간신히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정태의의 얼굴 옆에서 무릎을 굽혀 웅크리고 앉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다는 코 끝에 닿을 듯 가까워진 담뱃불이 더 신경 쓰였다.

 

"그보다는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태이."

 

일레이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어찌나 나직하고 부드러운지, 정태의는 일순 이놈이 사람을 잘못 보거나 뭔가 과거를 착각하는 게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그러나 이내 기억해내었다. 이 남자는 이토록 상냥하게읆조릴 때마저도 위험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문제냐, 이걸 어쩔 거냐고!"

 

"도와달라고 해 봐."

 

"숲에 불을 지르는 놈이 어딨…ㅡ. ……뭐?!"

 

기운만 따라준다면 길길이 뛸 기세로, 힘없는 목소리이나마 최대한 소리를 끌어내어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정태의는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길게 재가 붙은담배를 옆에 톡톡 털어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불길은미친 듯이 번져가고 있었다.

 

"불기운이 옆에 있으니 덥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이제슬슬 가보려고 하거든. 그런데 보아 하니 너는 네 힘으로는 움직이기가 힘들어 보이는군."

 

"……."

 

"도와달라고 해 봐. 그럼 도와줄 테니까."

 

일레이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문 채 선선히 말했다. 목소리도 표정도 너무나 심상했다. 정태의는 잠깐 어이없는 얼굴로 일레이를 보았다.

 

"도와달라고 안 하면 이 불길 속에 날 버려두고 갈 거라고?"

 

"."

 

일레이는 짧은 대답으로 긍정했다. 정태의는 그 비인간적인 대답에 기가 막혀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기억을 되살렸다. 이 남자는 불길 속에 산 사람을 밀어넣고도 태연하게 갈 길을 갈 인간이다.

 

"덥군. …ㅡ말 안 해? 그럼 난 간다."

 

", 이러려면 나더라 왜 나오라고 했어! 불타는 데에 던져놓고 갈 거면 나오라고 했던 의미가 없잖아!"

 

자신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정태의는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옆에서 몸을 일으킨 일레이는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서로 마주보기만 하는 시선이 오갔다.

 

그러나 그 눈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길이 정태의가누워있는 바위 근처까지 넘실넘실 다가왔을 때, 그 불길에서 끼쳐오는 열기에 숨이 막힌 정태의는 더 버티지않고 냉큼 말했다.

 

"도와줘."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며 재빨리 말을 내뱉자, 일레이는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입끝을 미묘하게 비틀렸다.

 

"오케이."

 

짧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일레이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정태의의 멱살을 쥐더니, 그대로 들어올렸다.

 

숨이 막혀 눈을 부릅뜨는 정태의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진 일레이는, 휘발유를 뿌려두지 않았던 방향 쪽으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걸어 불길 속을 빠져나왔다. 정태의는 그가 걸을 때마다 그의 어깨에 실린배가 눌려 숨쉬기가 불편했지만, 불길에서 벗어난 순간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때까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이 다시 점차 멀어져갔지만, 이번에는 굳이 눈을 부릅뜨지 않았다. 이미 잡혀서는 안 될 인간에게 잡혀버렸다.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긴장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의식이 새카맣게 떨어지는 와중에 일레이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태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11. 실마리

 

 

 

눈을 뜨기도 전에 생각했다.

 

, 또다.

 

예전에 몇 번인가 느꼈던 감각이었다. 얼굴 위로 물끄러미 시선이 내려오는 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따가운 것 같기도 한 느낌.

 

눈을 금방 뜨지는 않을 정도로 선잠이 들어 있으면 가끔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눈길이.

 

정태의는 그렇게 예민한 편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뚫어져라 쳐다본다 해도 금방 알아차리고 돌아보거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들어 있으면 본능적으로 감각이 예민해지는지, 어릴 때부터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잠들어 있지만 깊이 잠들지도 않아 머릿속 한구석은 깨어 있는 것 같은 때. 그럴때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가 자신을 바라보는지, 옆에서 책을 집어드는지, 팽개쳐진 옷을 정리하는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느껴졌다.

 

이 시선도 그랬다.

 

잠들어 있으면 가끔 그렇게 느껴졌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면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정태의는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부모에게 보이는 모습과 형제에게 보이는 모습, 친구에게 보이는 모습,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이 모두 다르며,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모습도 있다. 심지어는 스스로도 모르는 모습조차 있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알고있다고는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저 남자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셈이었다. 아니, 사실 보여주는 모습만 봐도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그가 태연하게 저지르는 숱한 일들을, 정태의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이를테면 바로 요 근래에 있었던 일ㅡ그게 언제였는지 기억하려고 하니 어쩐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아주 최근의 일인데ㅡ만 해도 그렇다. 제정신으로 숲에 불을 지르는 짓을, 누가 할까. 그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건 이미 여러 번봤다. 그러니 이제 그런 면에서는 놀랄 것도 없었지만,가끔 그 무모함과 더불어 상식을 무참하게 깨어버리는그 용기에는 감탄을 넘어서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하긴 제정신으로 숲에 불을 지른다고 해봐야 그는평소 상태가 제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그런 관점에서는 이해를 할 만도 하겠지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레이는 가끔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런 류의 일들을 떠나서 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왜 저런 짓을 하나 잘 모르겠다 싶은 일이다.

 

그 중의 하나가 저 시선이었다.

 

밤이면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가끔 찾아오곤 했다. 그냥이유없이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하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드물게는 교관으로서 일을 가지고 올 때도 있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밤에 이놈이 찾아오면 그 짓을하러 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대충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상당히 찝찝하고 불쾌하기도 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도 하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사실, 삽입만 제외한다면 허리 놀리는 솜씨가 매우 좋은 놈이라끝낼 무렵엔 기분이 좋아져, 뭐라고 불평할 처지가 못 되었다. 생각해 보면, 강간했던 걸 빼고 보면 나름대로잠자리 매너는 좋은 편인지도 모르겠다느 생각이 들었다. 제 욕심을 꼭 챙겨먹긴 하지만 어쨌든 제 욕심을 채우고 나면 반드시 정태의도 기분이 좋아 잠깐 정신을 잃도록 만들어주곤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는 전희에서 후회까지 다 챙겨주기도 했다.

 

…….

 

정태의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성적으로 조금만 덜 보수적이라면ㅡ사실 지금도 결코 보수적이진 않았지만 저놈을 앞두면 자신이 매우 보수적인 사람인듯이 느껴졌다ㅡ저렇게 즐거운 잠자리를 제공하는 놈을 만나기도 힘든 일이니 잘됐다 하고 맘 편이 즐겼을 텐데. 그러나 역시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지 않고 욕구만 충족시키는 상대와 몸을 겹쳐서야 온전히 즐겁지는않았다. 어쩌면 이런 부분은 보수나 개방과는 상관이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일레이의 표현을 빌어 한바탕 땅따먹기를 하고 나면 정태의는 나른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 그대로 잠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거의 십중팔구는 자는 동안 그 시선을느꼈다. 처음에는 별로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턴가 그랬다. 물끄러미 얼굴 위로 떨어지는 시선을 느낄 때면, 가끔 기분이 내키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지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을 마주보며 '', 라고 묻거나, 그조차 피곤하면 손을 들어 그의 눈꺼풀을 닫아버리며 '너도 자', 라고 한마디하고 도로 잠들곤 했다. 그러면 희미하게 웃는 기척이 나다가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피곤해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거나 귀찮을 때엔 그런 시선이 느껴져도 모른 척하고 잤다. 제가 마음대로 쳐다보는 걸 자신이 굳이 거기에 반응해줘야 할 이유도 없었고, 쳐다보는 시선이 시비를 거는 투도 아니라서 경계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깨어나면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잊어버려 낮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살다가, 가끔 그렇게 시선이 얼굴에 닿는 밤이 돌아오면 ', 그러고 보니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라고 무의식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잠에 취해 잠 반, 의식 반인 상태에서는 가끔 이놈이 왜 이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원래 낮에도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놈이긴 하지만 그건용건이 있을 때나 할 말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밤에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떠서 ''라고 물으면, 거기에 대답이 돌아오는 법은 없었다. 한 번은 그 대답 좀 들어보려고 졸려죽겠는데도 꾹 참고 눈을 뜨고 있었더니, 그놈이 웃더니 가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자라, 라고 말하면서.

 

그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억지로 이유를 캐묻는 것도 좀 뭣한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겨서 그냥 아무 말 없이넘어갔다. 사람 얼굴을 빤히 보면 뭐가 나오나 생각하면서. 그래. 어쩌면 꿈과 비슷한지도 몰랐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에 예전에도 꾸었던 적이 있는 꿈이라는 걸 기억하는데, 일어나고 나면 꿈을 꿨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잠들면 낮 동안엔 왜 잊고 있었을까 의아해하면서 다시 꿈의 기억을 되살린다. 꿈과 현실의 기억이 나누어져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처럼, 그 시선에 대한 생각도 좀 그런 느낌이었다. 자다가 일어나면 일어난 순간은 무슨 생각을 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는데, 현실 속에서 얼마간만 움직이다 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이런 것 같다. 잠든 동안에는 정말 끈질기게도 바라보는 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깨어나고 나면 기억이 날아가는 것.

 

"…ㅡ."

 

정태의는 눈을 뜰까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반쯤 각성하고 반쯤 잠든 채, 또 얼굴에 그놈의 시선이 닿는구나 생각했다. 적당히 하고 그만두겠지 했는데 계속, 계속, 계속 쳐다보았다. 유난히 몸이 힘들고 나른해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결국 정태의가 지고 말았다. 힘들게 눈을 뜨면서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너도 자라니까."

 

"……."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하자 턱을 괴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눈을 껌벅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번쩍 눈을 뜨더니 너도 자라면서 화를 낸 셈이니 놀랄 만도 하지만, 정태의는 평소라면 그냥 미묘하게 웃으면서 별 말도 안 할 놈이 왜 저렇게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나 잠깐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졸음이 해일처럼 몰려와 뻔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레이를 본 척 만 척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의식 반 무의식 반의 머리로 문득 생각했다.

 

가만있자. 그런데 왜 여기에 일레이가 있는 거지.

 

. 생각해 보니 사람 잘 때 곧잘 옆에서 구경하는 놈이다. 그런데 그건 알겠는데,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여느때라면 땅따먹기를 끝내고 헐벗은 차림으로 정태의를쳐다보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옷을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고ㅡ그래봐야 평범한 티셔츠에 면바지였지만ㅡ침대 옆에 따로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정태의는 눈을감고 반쯤 잠든 상태에서 문득 떠올렸다.지금의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갑자기 번뜩떠올랐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은!"

 

시퍼렇게 낯빛을 바꾸고 다급하게 외치며 일레이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일레이는 다시 좀 놀란 얼굴을 했다.놀랐다고 할까, 웬 헛소리냐는 얼굴이다.

 

"불이라니 무슨 불."

 

"너 불질렀잖아, ! 숲에 불질렀잖아, 자작나무 숲에! 휘발유를 아주 드럼통으로 들고 와서 좍좍 뿌려가며 다 태워먹었잖아!"

 

정태의가 퍼렇게 안색을 바꾼 채 미친 듯이 소리치자 일레이는 약간 눈살을 찌푸린 채 뚫어져라 정태의를 보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딘지 손 쓸 수 없는 바보를쳐다보는 듯한 그 시선에 정태의는 고개를 기우뚱하고 일레이를 마주 노려보았다. 이놈이 사람을 왜 이렇게 쳐다보나.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보다 먼저 말이야, 넌 지금 네 상황을 알고는 있나?"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실로 흥미롭다는 듯 묻는 그 말의 의미를 정태의는 이내 깨달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그를 마주보았다.

 

"내 상황이 왜."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레이는 다시 어이없다는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문득 손을 든 그는 정태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잠시 그대로 이마를 짚고 있던 그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놈은 열만 좀 났다 하면 꼭 앞 뒤 분간을 못 한단 말야……. 자라, . 병신 같이 납치나 당하고, 얻어터지기나 죄 얻어터져선."

 

일레이는 혀를 차며 정태의를 밀었다. 그 손에 밀려 그대로 침대에 누우면서 정태의는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대로 재워줄 생각인가 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금 자신이 좀 앞 뒤 분간을 못 하는상태인 것 같긴 했다. 머리가 몽롱하고 멍한 게, 어쩐지온몸에서 열이 좀 나는 것도 같다. 침대 위에 쓰러져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보니 이마며 관자놀이에 거즈 따위가 붙어 있었다. 이제 보니 팔꿈치며 무릎, 종아리 등등 상처가 좀 호되게 났던 곳은 모두 깨끗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발목도, 보이지는 않지만 바삭바삭한 깁스가 다른쪽 발에 느껴졌다. 자는 동안에 카일이 사람 불러서 다 치료해줬나 보다. 고맙게도.

 

정태의는 눈을 감은 채 스스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일레이의 말마따나 열이 좀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러나손도 뜨거워서 잘 모르겠다.

 

사실 다친 몸이 욱신거리면서 열이 나긴 했지만 머리에 열이 오른 건 아니라서 정신은 제법 말짱한 편이었다.

 

……정신이 말짱한 편이라서, 일레이가 자라고 밀었을 때 냉큼 누워서 자는 편을 택했다. 지금은 섬뜩하니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잠기운이 가시고 말았지만.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깨어서 지금 진지하게 일레이와 마주보며 대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태의는 꿋꿋이 눈을 감고 자는척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가 아는 한 일레이는 대단히 눈치가빠른 남자였으니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지는 않았을테지만, 그래도 납치까지 당해서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돌아왔으니 좀 불쌍했는지 일부러 깨워 일으키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면 이때 정태의가열 때문에 약간 제정신이 아니긴 했던 게, 아무리 납치를 당하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돌아왔다 해서 불쌍히여겨줄 인간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여전히 느껴졌다. 얼굴 위의 시선.

 

저렇게 빤히 쳐다봐서야 어디 얼굴이 뜨거워서 잠을 잘수나 있을까 싶었지만, 몸이 회복을 위해 본능적으로 잠을 이끌었음인지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다시 잠이 눈꺼풀을 덮었다.

 

그나저나 저놈이 웬일일까……. 나한테 품었을 원한을 따지고 보면, 설령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 응급실에서 기절해 있다고 하더라도 깨워서 주먹질을 옴팡지게 퍼부어야 할 인간인데. 못 본 사이에 개과천선을 했나 하고 생각하다가 휘발유를 퍼붓던 그 모습을 얼핏 떠올린 정태의는 얼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가장 타당한 결론을 냈다. 이건 꿈이다.

 

…ㅡ봐, 꿈이 맞다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조심스러운 손길이 살그머니 이마에 닿아 머리를 쓰다듬을 리 없었다.

 

이런 꿈은 좋지 않다. 예전에도 가끔 이렇게 이상하게 생생해서 꼭 현실 같지만 결코 현실에선 벌어질 리가 없는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이런 꿈은 꿀 때는 기묘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꿈은 꾸고 나면 우습지도 않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안 좋았다.

 

정태의는 그 손길을 피하려 몸을 뒤척였다. 머리 위에잠시 머물러 있던 그 손이 떨어져나갔다.

 

 

 

* * *

 

 

"별 이상한 꿈을 다……."

 

정태의는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아직 머리가 멍하니잠에 취해 있어, 자신이 소래내어 중얼거린 줄도 몰랐다. 악마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살갑게 구는 꿈을 꿨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놈은 분명히 악마가 맞는데, ,엉덩이 뒤로 뾰족하게 꼬리도 붙어 있는데, 손에는 시뻘겋게 피가 묻어 있는데,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상냥한 얼굴로 웃으면서 살갑게 구네.

 

계속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다가 눈을 떴다. 그런데눈을 뜨고 나서 깨달았다. 정태의는 그 꿈의 해답이랄까, 그 꿈이 계몽하고자 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악마에게 속아넘어가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고 속쓰려한다는 거다. 나중에 속쓰려하며 억울함을호소해 봐야 소용없었다. 처음부터 악마는 가면도 안 쓰고 자기가 악마라는 걸 만방에 드러내고 다녔다. 속은 놈이 잘못이다.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과 아주 잠깐씩 다정하게 대해주는 데에 속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매우 교훈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꿈이었다.

 

정태의는 멍한 머리로 천장을 껌벅껌벅 쳐다보았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조금 슬픈 꿈이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 더 슬프다.

 

정태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떠올리고싶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씁쓸한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다.

 

"……. 잠깐……."

 

문득 정태의는 번쩍 눈을 떴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사람을 절로 떠올린 순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물밀 듯 몰려 왔다. 바로 최근의, 아주 최근의 기억이다.

 

ㅡ아하…ㅡ

 

바위 너머에서 두 발짝, 옆으로 비껴서서 이쪽을 내려다 보던 그 새까만 눈동자. 눈이 마주친 순간 가느스름하게 기울어지던 그 눈을, 정태의는 아주 가까운 과거에 보았다.

 

"……!"

 

이럴 수가…….

 

정태의의 낯에서 삽시에 핏기가 사라졌다.

 

난 죽었다. 그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 안을 점령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편하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을까.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불길 속에서 태연하게 서 있던 그 남자의 모습이 망막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꿈이 아니다. 분명 그 괴물같은 남자는 거기에 있었다. 사람의 목을 잘라낸 칼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불길을들고.

 

맙소사.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욱신, 조여들며 멎는가 싶었던 심장은 다음 순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제기랄. 절대로 잡힐 수는 없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하필 그렇게.

 

정태의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낭패라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동시에 배짱 좋았던 자신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어떻게 하지.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만있자, 들키기 전에 얼른 다시 튀어버리면…….그래, 어차피 짐도 별 거 없으니 다 필요 없다. 이대로 창문이라도 타고 내려가 몸만 튀어버리…….

 

그때였다. 정태의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옆에서 팔락, 뭔가 넘어가는 기척이 났다. 정태의는 그제야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움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순간, 미친 듯 뛰놀던 심장이 다시 뚝 멎었다.

 

일레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아마도 정태의가 깨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그는, 뭔가 수첩 같은 것을건성건성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은정태의가 깨어난 걸 모르는 듯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젠장. 튀긴 글렀구나. 이제 내가 눈 뜬 걸 알았으니 당장 죽이려 들까. 아니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ㅡ그렇게 쉽게 죽여줄 수야 있나. 나랑 같이 있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끔찍하게 살아봐. 매일매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살아보라고.

 

문득 예전 언젠가 들었던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그때 말했었다. 죽을 때까지, 라고.

 

정태의는 슬그머니 눈동자만 옆으로 돌려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죽을 때까지 그러려고.당장 죽을 만치 팬 다음에 바로 죽이면서 그 직전에 '죽을 때까지 괴로웠지?'라고 말한다면 몰라도, 평생이라는 의미로 괴롭힐 수는 없었다. 아무리 24시간 감시한다고 해도 살아가면서 한 번 정도는 시선이 느슨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라도 튀어버릴 수 있을 거다.

 

정태의는 눈을 뜨자마자 튈 궁리를 하는 스스로가 조금가엾어졌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튀어야 하게 된 건 반쯤은 자기 탓이었다.

 

소심하게도 조금 후회해버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얌전히 짐만 싸서 지부에서 나올 걸. 뭘 굳이 이놈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런 짓을 하고 나왔을까. 무서운줄도 모르고. 정태의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태의는 틀림없이 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그 당시 정태의가 했던 선택은, 그 당시를 기준으로는 옳았다. 만일 누군가 진실로 후회하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을 거다. 선택이란 늘 그런 법이었다.언제나 후회할 여지를 남겨두는 게 선택이다. 훗날 천천히 되짚어보았을 때, 진심으로 후회하며 돌이키고 싶어하는 선택을 가능한 적게 하는 것이, 정태의가 생각하는 '잘 사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직 정태의는 자신의 삶에서, 훗날 돌아보았을 때 후회할 만한선택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 후회하지 말자. 저놈이 나한테 했던 짓들을 떠올려 보면 그 정도야 약관 아닌가. 까짓 것, 이렇게 된 바에는 남자다운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좀 (많이) 얻어맞고, 눈치 봐서 이번에는 절대로 안 걸리도록 더 멀리까지 튀어버려야지.

 

튀어버리겠다는 결심과 남자다운 마음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들자마자 얼른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일신의 평온을 위해 자존심을 잠깐 굽히는 것도 나름대로 남자다운, 힘든 결단이다. 궤변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도 들자마자 얼른 지워버렸다. 정태의는 소리 없이 가만히 한숨을 쉬곤 다시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일레이는 여전히 손바닥만한 수첩을 들고 넘겨보고 있었다. 팔락, 팔락, 느리긴하지만 그리 주의 깊게 보지는 않는 듯한 시선이 뭘 보고 있나 싶어 그 눈길을 따라가 보았다.

 

"…ㅡ."

 

. 속으로 터져나온 신음을 꾹 삼켰다. 일레이가 손에들고 있는 저 초록색 표지의 수첩은 여권이었다. 앞에금색으로 무궁화 마크까지 찍혀 있는 저 대한민국 여권은 정태의가 들고 다니는, 김영수라는 인물의 여권이었다. 앞에는 정태의의 사진이 곱게 들어가 있는.

 

내지를 다 넘겨본 듯 다시 제일 앞장을 펼친 일레이는 잠시 묵묵히 쳐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흐음…ㅡ. 김영수……. 여권번호 JR0203314, 19xx  6 12일생에 주민등록번호 1365814……."

 

"……."

 

"진짜는 생년월일밖에 없군."

 

"……."

 

일레이는 테이블 위에 여권을 툭 내던졌다. 정태의는 내심 벌레 씹은 얼굴로 혀를 찼다. 분명히 가방 안에 넣어뒀었는데 마음대로 꺼냈구나, 이 망할 놈.

 

일레이는 흐음,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침묵하다가, 흘끔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지기 무섭게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저 남자가 못 알아챌 리없어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도로 자려고?"

 

"……."

 

어차피 깼으면서 뭘 또 자려고, 하고 덧붙이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씁쓸하게 눈을 떴다. 일레이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글쎄, 하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보았다. 이상한 꿈을 꿨다 했더니, 그게 이놈이옆에 있어서 그랬구나. 그 악마가 나온 꿈도 그렇고, 그전에 잠깐 스치듯이 꾼 꿈에서도 이놈이 나왔던 것 같다. 그래, 딱 저 의자에 저렇게 앉아서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기웃했다.

 

"……?"

 

그러나 뭔가 묘하다 싶으면서도 짚이는 데가 없어, 몇번 고개만 기웃거리다 말았다.

 

그런 정태의를 일레이는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그 시선이 따가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딱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죽이려면 죽이라는 듯 정면으로 똑바로.

 

일레이는 정태의의 얼굴을 보더니 흘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곤 오호, 하고 중얼거리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가느다란 눈으로 정태의를 살핀다. 마치 뭔가를 탐색하기라도 하듯이.

 

어딘지 조금 전에 바라보던 시선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뭣씹은 얼굴로나마 그를 마주보았다. 알아채이고 싶지 않았지만, 정태의의 표정에 아주 약간서린 긴장을 일레이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문득 픽 웃었다.

 

"후회하나?"

 

갑자기 불쑥 묻는 말에 정태의는 잠깐 침묵했다. 후회하냐고 물었다. 어떤 점에 대해서는 정태의는 후회하는바가 없었다. 적어도,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일레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정태의는 대답하기 전에 잠깐 일레이의 표정을 살폈다.소심한 마음이 슬쩍 살아난 탓이다. 후회한다고 하면 좀 덜 아프게 때리려나. ……그렇지는 않겠지. 이놈의사전에는 용서라는 말이 없었다.

 

정태의가 혼자 머리를 굴리다가 혼자 아쉬운 얼굴을 하자 일레이는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묻진 않았다.

 

"아니……후회하지 않아."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레이는 지그시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미묘하게 웃었다.

 

"후회하지 않았어? 지금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데."

 

"음……. 후회했다고 말하면 좀 덜 아프게 때려주려나 해서. 그런데 과거를 생각해 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진 않고……. 역시 사람이 진실되게 살아야지."

 

정태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일레이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몹시 즐겁다는 듯. 하지만 그 시선이 음습하게 빛나기 시작했다는 걸 모를 정태의가 아니었다. 비록 그리 오래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이제 저남자에 대해 알 만큼은 알게 됐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후회하지 않는다, 라……. 그럼 말이야, 어떤 점에 대해서?"

 

"?"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의 말이 잠깐 이해되지 않은 탓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태의는 미심쩍은 얼굴을 기울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떤 점이라면……, 널 때린 거? 아니면 널 덮친 거? 아니면 널 묶은 거? 그것도 아니면 약 먹인 건가?"

 

짚이는 데가 너무 많아서 하나씩 짚어보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이들었다.제 입으로 그런 항목들을 줄줄 늘어놓아서 뭘 어쩌겠다고 이러나. 그러나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그나마 정태의가 눈을 뜬직후에는 그냥저냥 담담하고 무심하게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의 얼굴이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걸, 역시나 정태의는 몇 달간의 경험으로 잘 안다.

 

젠장. 술담배가 뇌세포를 파괴시킨다더니 정말인가 봐.이제 맥주 좀 덜 마셔야지. ……아니, 맥주가 무슨 술.맥주는 보리차지. 담배나 끊도록 해보자.

 

정태의는 몇 초 정도,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했다. 일부러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끔 하는 항목들을 제 입으로 열거한 어리석은 과거다.

 

"하하……. 듣고 보니 그것 꽤 많은걸. 그래, 나온 김에어디 더 말해 봐. 그것 말고도 많을 텐데."

 

일레이가 턱짓을 하며 뒤를 재촉한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살폈다. 이놈이 지금 진심으로 듣고 싶다고 하는 걸까, 잠시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정태의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말해보라니까.'라고 위혐스럽게 한 마디 한다.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일레이에게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점이라.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보면 저놈의 화를 돋울 만한 짓 중에서 들어야 한다는 건데.

 

"……. 너 욕한 거?"

 

정태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눈썹을치켜올리더니 이번에도 '더 말해 봐.'라고만 한다.

 

혹시 이런 식으로 괴롭힐 생각인 걸까. 말하고 또 말하고 생각 안 나도 계속 말하라고. 하지만 이렇게 계속 읆어봐야 그건 정태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일레이 본인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ㅡ실제로 괴로워하느냐 아니냐는 논의로 두고ㅡ.

 

자신의 험담이나 불쾌한 과거를 굳이 떠올리고 싶어할만한 특이한 취향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역시 이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봐라'인 걸까. 정태의는 묵묵히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떤 점에 가장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너에게 했던 일에 대해 후회하는 건 없어."

 

"전혀?"

 

"전혀."

 

일레이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는 듯 되물었지만 정태의는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흠, 하고는다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정태의를 바라보기만했다. 정태의는 그 대답을 하고서야 문득 생각났다.

 

과연 이 남자는, 자신이 했던 어떤 일에 대해 가장 화를내고 있을까.

 

따져보면 조금 전에 정태의가 읆었던 그 모든 일들이, 이 남자의 성격에서는 하나하나 화를 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때리고 덮치고 묶고 약 먹인 건 또 모르지만, 저 남자의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가 피떡이 된 놈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때리고 덮치고 묶고 약 먹은 게 욕한 것보다 훨씬 정도가 심하니, 틀림없이 그 항목들만으로도 화를 내기엔 충분할 거다.

 

그러나 지금 그의 물음은 어떠한 대답을 바라고있었다.뭔가 특정한 어떤 점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물었다. 아마도 그가 가장 분노했을 점에 대해.

 

하지만 정태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점에 대해 가장 분노했을지. 문득, 그것이 몹시 알고 싶어졌다. 자신이 했던 어떤 행위가 가장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그럼 너는."

 

정태의는 입을 연 다음 말을 잠시 끊었다. 물어보지 않는 게 나을까, 잠시 망설임이 머문다.

 

너는, 나의 어떤 점에 가장 화를 내고 있는 거지.

 

그걸 알게 되면 후회라도 할 건가? 그렇지 않다. 그의분노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자신이 그를 분노하게 만든 모든 행위의 원인이 된 자신의 분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문득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일레이와 정태의는 분노를 주고받았다.

 

몇 달, 거의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주고받아 결과로 남은 것은 분노밖에 없었던가. 그가 분노의 싹을 심고, 자신이 분노의 싹을 틔우고.

 

"……. 나는, 그렇지만은 않았어."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그와 지내면서 느꼈던 것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태의는 그에게 화가 났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억을 가진 것과 부정적인 감정이 지속되는 것을 별개의 문제였다. 친구라도, 싫어하려면 얼마든지 싫어할 수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싫은 점에 베어 아파하고 화낸 적도 많다. 그 기억들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과, 그 당시의 아파하고 화났던 감정이 계속 지속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태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일레이는 약간 입매를 찌푸린 채 정태의를 바라보았다.정태의가 드문드문 중얼거린 말의 맥락을 알 수 없었던탓이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런 끝에 무슨 생각을했는지 문득 입매를 약간 비튼다.

 

"뭐 좋아. 후회고 뭐고, 어차피 생각한들 소용없는 일들이다. 그런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아."

 

일레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로 다가온 그는정태의가 베고 있던 베개 옆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재미나다는 듯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엷은 웃음이 그의 압가에 보일 듯 말 듯 피어오른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이제부터 너는 네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ㅡ말했었지. 그렇게 끔찍하게 싫었던 내 옆에서, 매일같이 그렇게 괴로워해 보라고."

 

"…ㅡ."

 

마치 입술이 이마에 닿기라도 할 듯 바싹 다가왔다.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살갗을 타고 내려와 심장 위로떨어진다. 문득 일레이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태이. 나는 말이야, 그렇게까지 화를 내 본 적은 없었어."

 

정태의는 머리 바로 위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있어 초점은 맞지 않았으나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 나직하고매끄러운 목소리를 어떤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없었다.

 

"정말로, 아주, 그래―――끔찍할 정도로, 화가 났지."

 

어쩌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귓가를 소름끼치도록 서늘하게 파고드는 목소리는 희미한 벌레 소리처럼 낮게키득거렸다.

 

"네가 사라지고 한 일주일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아. 내가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일주일 동안 둘이나 죽였더군. 나는 기억도안 나는데 말야."

 

그래서 어령도 며칠 들어갔다 왔지, 아마 교관이 어령에 들어간 건 UNHRDO 역사상 처음이었을걸, 하고 일레이가 웃었다. 일레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 당시를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령에 가서 그나마 다행이었어. 생각할 여유가 생겼거든.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 거야. 정말로 미친 놈마냥 화가 나서 어쩔 줄을몰랐지. 그러다가 어령에서 나오기 전날이었나, 꿈에 네가 나오더라."

 

시나브로 가까워지던 그의 입술이 이윽고 정태의의 이마에 닿았다. 한때 익숙할 만치 익숙했던 감각인데도 한동안 사이를 두었던 탓인지, 혹은 그의 목소리가 소름끼칠 만큼 매끄러웠던 탓인지, 정태의는 움칫 어깨를움츠리고 말았다. 그걸 깨닫고 일레이가 입끝을 비틀어올린다.

 

"그 꿈에서……, 아니 뭐, 그 꿈은 아무래도 좋아. 그 꿈을 꾸고 깨어나서, 컴컴한 어령 안에서 눈을 뜨면서 불현듯 생각했지. 정신 차려야겠다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죽여놓고 기억도 못 할 정도여서야,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죽여선 안 될 사람을 죽여버리고 난 뒤였다, 이러면 곤란하잖아, ?"

 

그가 웃었다. 이마에서 천천히 내려온 그 웃음소리는 선뜩하게 귓가에 닿았다가 뺨으로 미끄러졌다.

 

정태의는 얼굴에 맞닿은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도 않고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채 그대로 침묵했다.

 

"…….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데 괴롭히는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살려두는 거라면, 일레이, 너를위해 하는 말이지만 죽이는 게 나아."

 

정태의는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 위로 다가왔을 때 조용히 말했다. 입술 위로 겹쳐지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해도,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말했다. 그의 정신을 위해서. 그것이, 정태의가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 건네는 조언이었다.

 

입술이 떨어졌다. 웃음은 조각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하얀 얼굴이 서늘하게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정태의는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뭐 나로서는……, 네가 날 죽이려 들면 도망치든 싸우든 애원하든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방도를 생각하겠지만."

 

난 죽기 싫거든,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가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일레이의 눈매에 피식, 찬 웃음이 돌아왔다.

 

일레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볼일은 끝났다는 듯 문 쪽으로 걸어가며 정태의에게 말했다.

 

"일어나면 다이닝으로 오라고 리타가 전해달라더군. 식사를 마친 뒤엔 서재로 오라고 형도 전해달랬어."

 

"어……?"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일레이를 보며 눈만 깜빡이는 정태의를 보고,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아니,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심쩍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 그냥 가는 건가 해서."

 

"?"

 

"아니……눈알 하나 정도는 내어놓아야 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정태의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일레이는 몇 초 가량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어이없다는 빛이 스치더니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는데."

 

"아니, 별로 원하지는 않아. 그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

 

틀림없이 일레이와 다시 마주치게 되면, 마주치는 그 즉시 목줄을 끊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한 대로 죽이지는 않되 계속 괴로워하도록 몸의 어딘가가 온전치 못하게 된다든가.

 

그래서 눈을 뜬 순간, 눈알 한쪽이라든가 팔 한쪽, 아니면 다리 한쪽 따위와 이별할 각오를 내심 굳히고 있었다. 정태의가 자신의 안녕한 몸에게 다행이라고 속으로중얼거리며 짐짓 발랄한 얼굴로 해맑게 일레이를 바라보자, 일레이의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는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두어 번 혀를 찼다.

 

"어서 리타에게나 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수프의 맛이 떨어진다고 리타가 잔소리를 해댄단 말이다."

 

정태의는 그제서야 일레이가 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기억해내었다. 과연. 리타의 잔소리에 대해짧게 읆조리는 얼굴이 아주 볼 만했다.

 

그래도 저놈이 거슬리는 걸 참아가면서 대하는 사람이있긴 있구나, 그 생각을 하며 정태의는 침대에서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 * *

 

 

석간을 샅샅이 훑듯이 읽어내리던 카일은 문득 기분이이상해서 고개를 들다가 움칫 놀라고 말았다. 언제부터거기 있었는지, 문턱에 일레이가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선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 들어 와."

 

카일은 그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하고는 읽던 기사를 마저 읽었다. 신문의 사회면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오늘 오전에 벌어진 산불 소식이 실려 있었다. 신문을 쥔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 와작, 신문이 구겨졌다.

 

신문을 반대 방향으로 접고 접어 그 기사가 제일 위에 오도록 해서 책상 위에 잘 보이게 놓아두었다. 그러나 그 기사를 봐야 할 사람은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있는 1인용 카우치에 풀썩 몸을 파묻었다.

 

카일은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일레이를쳐다보았다. 일레이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눈치로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몇 달만에 본 동생이었다. 몇 달만에 보면 반갑기도 하련만, 그는 전혀 반가운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예전에 그나마 같은 도시 안에 살며 회사에서 얼굴을 마주쳐 거의 매일같이 스쳐가긴 했었다. 그때는 가까이에 살아서 가족인데도 별로 반갑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달만에 동생을 보아도 별로 반가운 생각이 안 드는 걸 보니, 이건 가족이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일은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사회면에 났더구나. 그나마 다행히 방화라는 소리는 안 나서 망정이지."

 

일레이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아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려면 어떠냐는 표정이다. 카일은 낮게 신음했다. 사실은 은폐하기 위해그가 오늘 제임스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기사가 나간 뒤에는, 현장에 불길 진압을 했던 소방수들이 현장에 남은 증거로 보건대 이것은 방화라고 주장한다면서, 기사의 사실 여부에 대해 편집국으로 전화가 몇 통이나 왔다고 한다. 곤란하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편집국장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해야만 했다면서, 그 국장과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제임스는 아주 시퍼렇게 화를 냈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제임스의 비위를 잘 맞추며 지내야 하게 생겼다.

 

동생이 사고를 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제일 무마하기 힘든 게 살인이었는데, 그나마 고양이 쥐 생각해준다고 이 동생은 '증거는 남기지 않거나, 혹은 남더라도 밖으로 나돌지 않도록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쓸 것 없어'라고 형에게 마음 좋게 말했었다.

 

그게 아직 이 녀석이 성년이 되기 전이었다.

 

사실 일레이가 사고를 치면 그걸 수습하는 건 카일이 아니었다. 카일의 수석비서인 제임스가 도맡아하고 있었다. 일레이가 아직 혈기왕성한 주제에 증거를 제대로숨길 줄도 모르는 풋내기였을 무렵에는, 제임스는 과다한 업무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나마 일레이가 성인이 되고 제 일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게 된 뒤에는 일거리가 훨씬 줄었다면서 제임스가 가끔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사표를 낼 수 있을까 고민했었지요.'라고 그립게 과거를 읆조리곤 했다. 제임스처럼 유능한 비서가 없어지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않을 걸 뻔히 하는 카일은,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일레이를 비호하길 포기하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일레이는 카일이 모르는 데에서 사람 여럿 죽이고 망가뜨리고 다니는 모양이었지만 그나마 카일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괜찮도록 스스로 알아서 하는듯했다.

 

그래서 안심(방심)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주 대형으로 사고를 쳐버렸다.

 

사람을 죽인 건 괜찮았다. 오늘 이놈이 거기서 사람을 여남은 명 도륙내어 놓았지만 차라리 그건 무마하기 쉬웠다. 그놈이 연락하자마자 근처에서 대기시켜 놓았던사람들을 재빨리 보내 시체라든가 여타 눈에 띄면 곤란한 흔적들을 미리 치워놓았다.

 

그러나 흔적을 미리 치울수도 없고, 또한 무마시키기 가장 까다로운 부류의 사고를 치고 말았다. 카일은 소식을 듣는 순간 1초 정도 정말로 기절했었다.

 

 

 

 

 

일레이가 베를린에 도착한 건 새벽 6시 반이었다.

 

그 시간이면 카일은 가볍게 새벽 운동을 하고 난 뒤 그날의 조간신문을 훑어볼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새벽 운동은 하지 않았다. 어젯밤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밤에 푹 잠들지 못해 머리가 무거웠던 탓이다. 천천히 뜰을 몇 바퀴 거닐며 새벽 공기를 마시는 걸로 운동을 대신하고 서재로 간 참이었다.

 

납치에 대해서는 잠정적으로 결론이 난 상황이었다.

 

지난밤, 모러의 말을 듣고 카일은 킴이 바로 일레이가 그토록 열화같이 찾아헤매던 정태의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동생에게 전화했었다. 받기 싫은지 몇 번이나전화한 뒤에야 겨우 전화를 받으며 '왜 자꾸 전화질이야.'라고 신경질을 내는 동생에게 '오늘 납치된 사람들중에 네가 찾던 그 청년도 있어.'라고 했더니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뭐?'

 

일레이가 되묻는 소리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카일은 그 목소리를 듣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동요해도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녀석이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어지간히 찾고 있긴 찾고 있었나 보다.

 

'조금 전엔 그런 말 없었잖아.'

 

'조금 전에는 나도 몰랐으니까. 나도 방금 알게 된 사실이야.'

 

'……. 날 끌어들이려고 거짓말하는 거라면, 형 지금 엄청나게 실수하는 거야.'

 

일레이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차가워진그 목소리를 듣고 카일은 혀를 찼다. 오래도록같이 살아온 자기도 이렇게 등골이 서늘할 정도인데, 이 녀석 옆에 있는 인간들은 어떨까.

 

카일은 킴을 떠올렸다. 아니, 정태의라고 하는 그 청년을.

 

과연. 그 청년이 정재의의 동생이며 정창인의 조카였던거로군. 덧붙여 일레이의 교위였으며, 지금은 일레이에게 쫓기는 친구. 카일은 그제야 여태 킴에게서 의아스럽게 여겼던 것들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착한 청년에게 진심으로 애도하며 안타까워했다. 어쩌다가 저렇게 좋은 청년이 일레이의 교위를 맡게 되었던 걸까. 어쩌다가 저렇게 참한 청년이 일레이의 분노를 사서 찍혔단 말인가.

 

감싸주고 싶지만 일레이가 상대라면 카일도 감싸줄 수없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숱한 삶의 굴곡과 난관을 헤쳐오고 사람들을 대해 온 카일은 누구를 대하든 사람을어려워한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인 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로 그는 일레이만큼은 절대로 맞서고 싶지 않았다.

 

'글쎄. 나도 지금 모러에게 들었을 뿐이라서 확신을 할수는 없다만.'

 

카일은 의심하는 일레이에게 대답했다. 그 말의 진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고 신중하게 할하면서도 그는 모러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모러는 특이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매우 영리한 친구였다. 일레이까지 얽혀 있는 일임을 뻔히 알면서 거짓말을 해서 스스로의 명을 단축시킬 바보는 아니었다.

 

일레이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네 도움을 받고 싶구나. 네가 굳이 직접 나설 건 없고, 기동 대원에게 연락만 해 주면…ㅡ.'

 

'도와줄 테니, 그놈들의 위치나 확보해 둬.'

 

카일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일레이는 짧게 그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카일은 다른 말을할 여지도 없이 끊긴 전화를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는 두 사람에게 어깨를 으쓱하곤 '해결이 되긴 된 것 같은데.'라고 애매하게 말했었다.

 

(그 직후 모러는 어서 가서 이쁜이들을 피난시켜야 한다고 영문 모를 말을 하곤 서둘러 짐을 싸서 어젯밤 바로 나가 홍콩으로 돌아가버렸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일레이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종잡을 수 없긴했지만 일단 말을 했으면 지키는 녀석이었으니.

 

그럼에도 귀한 손님들이 인질로 잡혀 불편을 겪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아 제대로 푹 자지 못한 다음날의 정확히 새벽 6시 반, 신문을 읽고 있던 카일은 서재바깥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려 이런 시간에 집을 찾아올사람이 누구일까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리타가 부르리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1 30초 후, 카일은 서재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얼굴을 미심쩍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통화를 마친 지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에는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지구 반대편에 있던 동생이서 있었다. 일레이는 경악스레 쳐다보는 카일의 눈빛에도 아랑곳도 않고 들어오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레와코. 판저 파우스트 셋. 그놈들 위치.'

 

인사도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물품만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카일은 바로 물품을준비해주기에 앞서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너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그러나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대답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생각하면, 어제 전화를 끊고 바로 공항으로 가서 제일 빠른 비행기 편으로 왔다고 해도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UNHRDO 전용기.'

 

일레이는 짧게 그 말만 하고 어서 물건이나 내놓으라는듯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카일은 이런 놈을 UNHRDO의교관으로 앉힌 그네들의 인선에 혀를 찼다.

 

이미 단종된 물건을 사들여 개조까지 마쳤지만 별로 쓸일이 없어 차고에 박아뒀던 삼륜바이크의 열쇠를 넘겨주고, 지난밤 유능한 제임스가 알아다 준 그들의 위치 메모도 쥐어주었다. 그러나 동생이 요구한 무기에서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판저 파우스트를 세 대나 뭐 하려고.'

 

'귀찮게 시간 끌 생각 없으니까.

 

짧게 대답하며 잔말 말고 어서 내놓으라는 듯 손을 흔드는 일레이를 잠시 동안 뚫어져라 쳐다본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임스에게 연락해 어느 창고에서 조달하든 곧바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해서, 마지막 요구조건까지 맞추어주었다. 무기가 준비되는 동안 그들의위치를 확인한 일레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휘발유도 한드럼 요구했다. 카일은 그 요구품을 매우 수상쩍게 생각하면서도 화기를 높이기 위해서이려니 생각하며 갖다줬다. 그것이 그의 불찰이었다.

 

바로 몇 시간 뒤,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연락한 동생이'인질은 다 무사하고ㅡ병원에 가봐야 할 놈이 있긴 하지만ㅡ, 다른 놈들은 다 없앴고, 산장은 부쉈다.'라고 보고했을 때 카일은 그를 칭찬했다. 말하는 눈치를 보니 일을 험하게 처리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일이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동생이 전화를 끊기 전 생각난 듯이 말을 덧붙였을 때, 카일은 1초 동안 기절했다.

 

'. 그리고 숲에 휘발유 뿌리고 불 좀 질러놨어. 불이 제법 번지긴 했는데 아직은 불길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그거나 꺼 줘.'

 

 

 

 

동생이 양식 없는 인간이라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던 놈이다.

 

그러나 카일은 그 사실을 이토록 실감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신문 귀퉁이를 장식한 기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나름대로 무마가 되긴 되었고ㅡ제임스에겐 특별 포상을 주어야겠다ㅡ일도 일단락되었지만, 뒤에남겨진 일이 너무 많았다. 덕분에 오늘은 하루종일 제임스에게 시달리며 일더미에 묻혀 있어야 했다.

 

그런 뒤에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씻고 식사를 마친 참이다. 카일은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같이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하며 킴ㅡ아니 정태의의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은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카일은 일단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킴은, ㅡ아니 태이는, 일어났나?"

 

그러자 카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던 일레이가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사이를 둔 다음에야 짧게 대답했다.

 

". 조금 전에."

 

"그래. 잘 됐군. 좀 괜찮은 것 같나?"

 

". 지금은 리타에게 갔을걸. 형이 부른다고 했으니 밥먹고 나면 이리로 올 거야."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는 다시 입을다물었다.

 

카일은 여태 킴이라고 알고 지냈던 청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킴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정태의라는 낯선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킴이라고 부를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 정태의라는 이름도 그렇게까지 낯설지는 않았다. 이름만이라면 몇 번인가들은 적이 있었다. 정재의와 함께 일할 때에도 가끔 정재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었고, 친구인 정창인에게서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일레이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지만 일레이와 이야기할 때엔 정태의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길상천이라는 칭호로 가리켰으니그쪽이 더 친숙하다.

 

그렇군. 킴이 길상천.

 

저도 모르게 다시 킴이라고 중얼거리던 카일은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정정했다. 그리고 그 청년이 길상천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았다. 이유는 딱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납득이 되었다. 이미 10녀 년도 더 된 오래 전의이야기이지만, 한때 저 천재 정재의보다 정태의가 더 사람들의 호기심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이었지만, 정재의의 그 기적과 같은 행운이 정태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 돌았을 때, 여러 사람들이 정태의를 탐내었었다. 그 호기심과 욕심은, 정태의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건 정재의라는 사실을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몇 번이나 시험해 본 뒤에야 사그라들었다. 아마도 정태의는 한때나마 자신이 표적이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다. 당시 정재의와 정창인이 부단히 막아줬으니.

 

'태의는 알 필요 없어요.'

 

카일은 문득 언젠가 들었던 조용한 목소리를 떠올렸다.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나눌 일이 없었던 정재의와 딱한 번, 우연히 옥상위 야외 정원에서 둘만 마주쳤을 때가족이나 여타 잡다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다. 카일은 의외로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었다.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만약을 위해서도, 본인이 아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정재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자신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라고 여기며 그 이상 묻지 않았다.

 

"……."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렴풋이 그 천재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주 어렴풋이지만. 정태의는 그의 한결같은 정을 받는 존재였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는 무심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이에서 애매하게 앉아 있던 카일은 그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이 대체 뭘까 생각하며, 지금 그가 꺼내기에 가장 무난한 주제를 꺼내었다.

 

"그런데 몸은 괜찮은가? 이번엔 정말 미안하게 됐네. 설마 내 친구들에게 그렇게 피해가 갈 줄은 몰랐어."

 

카일은 일레이가 '형 친구가 납치당한 걸 내가 구해준것만도 여러 번 되는데'라고 말없이 비웃는 걸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정태의도 뭔가 좀미묘한 얼굴을 하고 카일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저야말로, 제가 좀더 주의하면 되었을 텐데 너무 부주의했어요. 차를 준비해 주시겠다고도 하셨는데 ……. 게다가 동생분이 구해주시기도 했는데요, ."

 

카일은 침묵했다. 나름대로 카일이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려고 동생분 이야기를 꺼낸 정태의도 침묵했다. 카일은 아마 지금 이 순간 정태의도 자신과 같은 걸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그 방화의 현장에는 이 청년도 있지 않았던가.

 

정작 방화를 저지른 사람은 평연한 얼굴로 있는데 괜히두 사람만 우울하게 침묵했다. 원래 주위에 특이한 인간을 두면 그 인간 본인은 행복하고 주위만 괴로운 법이라고, 카일은 인간 관계의 암묵적인 법칙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문득 정태의는 고개를 들며 그러고 보니,라고 말을 꺼내었다.

 

"모러는 지금 어디 있나요?"

 

"모러? 모러라면 급한 일이 있다며 어제 홍콩으로 돌아갔지. 자네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두 사람 사이가 좋은가 보지, 라며 카일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웃으면서 어라 싶었다. 아하하 그런가요,라며 웃는 정태의의 표정에 스산한 빛이 스친듯싶었다. 짧은 순간의 일이니, 어쩌면 잘못 본 건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새삼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정태이."

 

카일이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는 일순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그가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카일. 정태의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제이름을 대지 못했어요."

 

"사정이라……. 난 그 사정을 이해할 것 같군. 나라도 자네 입장이라면 그랬을 거야."

 

카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렴, 자신이라 해도 저렇게 성격 특이한 사람과 원한을 지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면 이름이고 뭐고 싹 바꿔버릴 거다.

 

생각해 보면 이 청년은 대단히 운이 없는 셈이었다. 하필 그런 타이밍에서 납치극이 벌어질 건 뭐란 말인가.납치 사건만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카일이 일레이에게 도움을 청할 일도 없었고, 이렇게 덜미를 잡힐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인질 가운데 정태의가 포함된 덕에 카일로서는 편했다. 일레이가 저렇듯 한달음에 달려와 줄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이 서 이는 가운데, 화제가 좀처럼 무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형제끼리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형제 중 하나를 빼놓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도 애매한 탓이다. 세 사람의 공통적인 화제라는 건 짚이는 데가 없었다.

 

카일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차피 정태의를 보자고 한 것도 인사를 하려 참이었다. 어쨌든 카일의 집에묵은 탓에 납치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다치기도 했으니, 카일로서는 미안하다고 인사를 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킴이 아닌 정태의와는 인사를 하지도 못했었고. 볼일은 끝났다. 적당한 화제도 없으면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게 좋다. 카일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했지만 이렇게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책상 위를 조금 정리하는 척하자 정태의는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 상황에 맞는 말을 골라서 꺼낸다.

 

"그럼 저는 이만 쉬러 가 볼까 하는데요."

 

"그래. 그럼 편이 쉬도록 하게. 푹 쉬어서 어서 나아야지."

 

카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목례를 하고 정태의가 방문을 나설 때, 카일은불현듯 생각이 나 그를 불렀다. 이름을 불린 정태의는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딛다 말고 멈칫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잊을 뻔했군. 정창인 교관에게도 소식을전했거든.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말해뒀지만 몹시 걱정하더군. 나중에 한 번 전화라고 해 주게. 뭣하면 여기에 있는 전화를 써도 좋아."

 

카일이 책상 위의 전화기를 가리켰다. 정태의는 어쩐지씁쓸하게 그 전화를 쳐다보았다. 그 옆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던 일레이가 문득 슬며시 입 끝을 틀어올린다. 과연, 여기서 전화한 거였군……, 어쩐지 전혀 흔적이 남지 않더라니,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한층 더 입맛이 쓴 듯 혀를 찰 뿐이었다.

 

 

 

* * *

 

 

 

리타가 묽게 끓여준 말간 스프를 마시고 있으려니 몽롱하던 정신이 좀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번뜩 생각이 나는 게 모러의 행방이었다.

 

그 약삭빠른 놈이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카일에게서 홍콩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열불이 솟았다.

 

십중팔구 지금은 아시아 지부 쪽에 전화해서 불법 무기휴대에 대해 찌르더라도 늦었을 거다. 시간상 이미 모러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그 이쁜이들을 싹 모아서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놨을 게 틀림없었다.

 

"젠장. 아무래도 한 번 돌아가야겠어……."

 

가서 내가 직접 그놈 방에 들이닥쳐 그놈 가진 것들 죄털어내어서 홍콩 앞바다에 가라앉혀 버려야지.

 

정태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모러 이놈의 자식, 내가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너와의 인연을 확실하게 악연으로 만들어주고 말 테다.

 

카일의 서재에서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낯빛을 시퍼렇게 굳힌 정태의는 자신의 방까지 단숨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 앞까지 다다른 그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모러가 몸을 뉘이고 있었던 옆방을 밉살스럽게 쳐다보다가 있는 힘껏 방문을 걷어차고 말았다.

 

"…ㅡ! …ㅡ!! …ㅡ!!!"

 

방문을 걷어찬 정태의는 발이 방문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그의 발은 정상이 아니었다.

 

산 속을 헤치고 다니느라 너덜너덜하게 엉망이 된 깁스는 정태의가 잠든 사이에 깔끔하게 교체되어 있었다. 의사를 아예 집으로 불렀는지, 몸 곳곳에 나 있던 상처들도 깔끔하게 거즈나 붕대로 감겨 있는 등 처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깁스나 붕대 등이 아무리 말끔한 것들이라 하나 그 안에 감싸인 내용물ㅡ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특히나 발목은 어젯밤부터 시작해 오늘 오전에는 그만한 수난은 다시 없다 싶을 만치 혹사당했다. 발목이 아작나도 하는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절뚝거리고 다녔는데 멀쩡할 리가 없다.

 

집 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고 다니던 차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깜빡 잊고 그 발로 방문을 걷어찼으니 그 발목이 역시나 성할 리가 없었다.

 

새파래진 얼굴로 복도에 엎어져 발목을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정태의를, 뒤에서 묵묵히 일레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정태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던 그는 혼잣말인지 뭔지 알 수 없도록 중얼거렸다.

 

"가끔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을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럴 때야……."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일레이에게 대꾸해줄 여력도 없었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발목을 붙들고 끙끙대고 나서야 겨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일레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

 

부루퉁하게 말하긴 했지만, 드디어 올 게 왔나 싶었다.새벽, 숲 속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렇고 집에 돌아와서 잠시 깨어났을 때도 그렇고, 이 남자가 불안할 정도로별 반응이 없었다. 마주치자마자 팔 하나 정도는 잘려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탓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혹시 고단수로, 이런 식으로 사람 피를 말리려는 걸까…….

 

정태의는 미심쩍게 생각하며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이미 내친 김이었다. 어차피 도망은 끝났다. 힘으로 당해내지도 못하니, 죽이려 들면 얌전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의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이는 지그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방의 창가에 놓여 있는 의자로 가서앉더니 흠, 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

 

"?"

 

"아까 서재에서. 이야기, 들렸을 것 아냐."

 

일레이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날이 서렸다. 희미하게 초조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들었다고 해야 할까잠시 망설였다.

 

정태의가 스프를 마시고 카일의 서재로 갔을 때, 막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안에서 일레이의 목소리가희미하게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발이 멈추었다.

 

내용이 들렸던 탓이 아니다. 일레이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가능하면 일레이를 피해다니고 싶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고 입매를 찌푸렸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카일에게 인사는 해야 했다. 납치라는 일이 터진 뒤에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라고는 해도 사실 어제 아침에 본 뒤로 고작해야 만 하루반 가량 지났을뿐이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정태의는 나무계단 위에 앉아버렸다. 일레이는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누군가의 방에 오래 머무는 성격이 아니었다. 용건이 있는 경우는 그 용건만 끝내고 곧 돌아가곤 했다. 형과 이야기를 하는 경우라면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야기가 그리 길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무계단에 앉아 하릴없이 '그러고 보니 모러 그놈은 어떻게 됐지'라는 생각 따위나 떠올리며 전의를 불태울 때였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부터 들었냐니까."

 

일레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좀더 낮아진다. 정태의는 쓰게 입을 다시면서 잠깐 더 망설였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찾아내는 대로 죽일 생각이었다는 것부터."

 

그러자 이번에는 일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잘 안 들렸어.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니었고, 가끔 몇 마디씩 들릴 뿐이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들린 건 아냐.내가 들은 얘기 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 싶은 이야긴 없으니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으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었다는 것은, 그 경위나 고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딱히 떳떳한 건 아니었다. 정태의는 '역시 거실로 가 있다가 저놈이 나오고 나면 서재로 갈 걸'하고 후회했다.

 

"……그리고."

 

묵묵히 있던 일레이가 불쑥 말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그를 보았다. 일레이는 마뜩찮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외엔 어떤 걸 들었어."

 

나직하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삭막했다. 순간 울컥했다. 아무리 떳떳치 않다고 해도, 고의는 아니었다. 게다가 엿듣게 된 이야기에 정태의 자신에 대한 화제가 상당히 섞여 있었다고 해도, 그건 정태의의 탓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걸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쁘다는 거냐, 지금?"

 

정태의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삐딱하게 입매를 찡그리며 정태의는 똑바로 일레이를 노려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입장 때문에 정태의가 할 말이 없을 뿐, 실상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정태의는 대단히 불쾌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렇게 궁금하면 말해주겠는데, …ㅡ그냥 보자마자 목을 따버리지 그 성질 참은 이유가뭐야. 직접 네 손으로 찢어죽여도 시원찮아서?"

 

정태의는 그렇게 내쏘곤 쯧, 혀를 찼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이라는 게 살다 보면 숱하게 생기는데, 이게 그런 경우였다.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우기고 말 걸.

 

정태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일레이의 차가운 시선이 말없이 정태의의 얼굴에 내려꽂히다가 비껴갔다.

 

"…ㅡ?"

 

뭔가 한 마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아무 말도없이 시선을 돌린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왜 시비 안 거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별로 새삼스럽게 놀랄일도 아니었다. 정태의는 숲에서 일레이와 눈이 마주친그 순간부터, 어떠한 상황이 닥쳐오든 이상할 것 없다고 각오했다. 그 각오가, 생각했던 것처럼 호된 결과가금방 다가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가슴속에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안으로 조금씩 흐려지는 것이 괴로울뿐이었다. 말려죽일 게 아니라면 단숨에 죽이는 게 나을 걸. 정태의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일레이."

 

정태의의 물음에 그는 대답없이 시선만 주었다.

 

"나도 궁금하던 차였어. 날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가 말한 것처럼 찢어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아? 하고 덧붙이자 일레이가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그 역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그가 속삭였다.

 

"글쎄……. 나도 그걸 생각하는 참이야. 어떻게 할까."

 

정태의는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죽이려면 차라리 빨리 죽이든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는 정태의에게, 문득 일레이는 비스듬하게 웃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건 분명 그때 말했던 것 같은데. 쉽게죽여주지 않는다고 했잖아. 죽을 때까지 끔찍하게 살아보라고."

 

정태의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차갑게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문득 일레이는 짜증스런 얼굴을 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 정태의에게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다가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이지, 저렇게 말은 했지만 난 널 만나면 죽여놓을 작정이었어. 산 채로 사지를 하나씩 잘라 볼까, 아니면 눈알과 혀부터 먼저 뽑아놓을까, 별별 생각을 다했거든. 아주 엄청나게――――화가 나더란 말이야."

 

"……."

 

"그러다가 드디어 너를 봤지. 저 산장에서. 아무리 거리가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겠더군."

 

일레이는 문득 웃었다. 그 웃음에 섬뜩한 무언가가 서린다.

 

"그 순간 죽이는 건 보류하자고 결심했어. 죽이는 거야언제든 할 수 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또 딱히 다른 방법을 생각했냐 하면 그건 아닌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태의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느새 정태의의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문득 그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도 씻은 듯 사라졌다. 인형처럼 무표정하고, 소름이 끼치는 시선을 지그시 떨어뜨렸다.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 정태의는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일레이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정태의의 두 뺨을 감쌌다. 바싹 댄 얼굴은 맞닿을 만치 가까웠다. 일레이의 눈이 마치 유리 같다. ㅡ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카맣고 비치지 않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유리다.

 

그 유리가 일순 번득인 것 같았다.

 

"내가 미친 것 같거든."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입술 위에 닿는 그 숨결에 정태의는 숨을 삼켰다.

 

"내가 미친 것 같단 말야. 도무지 영문 모를 짓을 계속하고 있거든. 왜 이럴까, ?"

 

연거푸 쏟아지는 말들에 정태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남자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

 

넌 원래부터 미쳐 있었어, 그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지만 겨우 삼켰다.

 

정태의는 바싹 붙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마치 기괴한 생물이기라도 한 듯 샅샅이 훑어보는 그를 말없이마주보았다. 그는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그 붉게 들떠 번들거리는 유리 같은 눈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걸……내가 어떻게 알아."

 

정태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를 마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간 보지 못한 사이에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가 비할 데 없이 불안정하고 거칠어졌다는 사실이다. 굳이 모러에게 듣지 않아도, 그를 보고 있으면서 깨달았다.

 

시선도, 표정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

 

그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저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레이는 별다를 게 없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ㅡ혹은 더ㅡ흉포하고, 사납고, 잔인하다. 정태의의 대답이 떨어지자 일레이는 마치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말을 잃었다.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정태의를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웃었다. 아주 천천히. 입가를 비틀어올리며.

 

"그래. ……그래. 너는 모르지."

 

정태의의 뺨을 감쌌던 손이 떨어졌다. 여전히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정태의는 아주 잠깐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전에느꼈던 감각과 닮아 있었다. 예전의 언젠가도, 그는 저손길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너무도 오래 전인 것 같았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그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절뚝절뚝 그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로 가서 앉았다. .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제부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과연 이 남자는 어떻게 할까.

 

젠장,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세워두었던 계획이 다 틀어졌다. 이 발목만 낫고 나면 형을 찾아 다시 정처없이 떠나볼 생각이었는데 재수 없게 걸렸으니, 이제 하루 종일 목숨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팔자인가.

 

……틈 봐서 다시 도망가든가 해야지.

 

정태의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미래를 생각하며 고심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레이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설령 UNHRDO를 그만둔다손 치더라도, 그에게는 홍콩에서 맡은 바 가업도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거기까지 자신을 끌고 가서 괴롭혀줄 거라고 주장이라도 할까.

 

사실상 사람이 누군가를 계속 옆에 끌고 다닌다는 것은어려웠다. 그 누군가의 동의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정말로 팔다리라도 자르지 않는 한 도망가거나 벗어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

 

괜한 생각을 했다. 팔다리를 자른다는 말을 떠올린 정태의는 으스스한 얼굴로 팔뚝을 주물렀다. 저 남자라면능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레이는 조금 전부터 말이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저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저렇게 서 있으니 못내 신경 쓰인다.

 

"몸은,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움칫.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일레이가 갑자기 말을 걸어, 정태의는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리고 약간 의외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꺼내는 말이 몸 걱정이라.

 

정태의는 그를 마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몸 걱정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진짜로 몸을 걱정해서 말하는 거라면 아까부터 다리를 절뚝이는 게 저 눈에 번연히 보였을 거다. 정태의는 인상을 찌푸리며 깁스한 다리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아아, 그래, 아주 살 만하지. 이젠 불이 난 숲에서 뛰쳐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 ……잘 됐군."

 

짧은 말이 돌아왔다. 깁스가 제법 무겁군, 하면서 다리를 내리던 정태의는 의아한 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러나 어느새 정태의는 시야가 막혀 있었다. 어느 틈엔지 일레이는 정태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ㅡ!"

 

미처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일레이의 입술이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정말로 짐승이 사냥감을 물어뜯는것처럼, 혹은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목 위로 단단한 이가 파고들었다. 송곳니가 닿는지 뾰족한 이의 감촉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일레이!"

 

정태의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꼭 흡혈귀 같다. 하필 눈앞에 커다란 전면 거울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정태의의 정면에 기다랗게 세워져 있는 거울에 그들의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커다란 체구의남자에게 갇히다시피 해 목을 물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언뜻 거울 안에 목을 깨무는 하얀 이가 비쳤다. 섬뜩해졌다.

 

", 왜 목을 물어뜯으려 그래! 네가 무슨 흡혈귀라고!"

 

"목이 아니면 또 어디가 좋을까."

 

그러나 정태의의 외침에 돌아온 대답은 매우 난데없었다. 정태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잠시 거울 안의 일레이를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난 목이 좋다고 한 적 없는데."

 

"아니, 내가 좋다는 거다."

 

일레이가 목 위에 입술을 댄 채 웃었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정태의의 목에 이를 박아넣었다. 피가 나도록.

 

"…ㅡ!"

 

정태의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심장이 선뜩해졌다. 목줄기를 물리는 순간 거의 본능에가까운 공포가 몰아닥쳤다. 생명의 끈을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데에 대한 공포였다.

 

", ! 갑자기 또 왜 이래!"

 

정태의는 다급하게 외쳤다.

 

놀란 것은 일레이가 덤벼들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 할 수도 있을 일이다. 놀란 것은, 그가 진짜로 목을 깨문 탓이었다.

 

"…ㅡ! 일레이! 일레이! 하지 마!"

 

정태의의 낯빛이 굳었다. 소름이 끼쳤다. 살짝 뚫린 피부의 상처로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핏방울을, 그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 자식이 미쳤나……! !"

 

목에서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이 섬뜩하게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였다.

 

정태의는 앞 뒤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일레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아얏……!"

 

목에서 그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목을 물고 있던 채로 떨어져, 피부가 조금 더 찢어졌다. 눈앞에 비친 거울에, 목에서 핏방울이 송글송글 솟아오르는 모습이 비쳤다. 정태의는 아연한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미친 정도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곤 하지만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일레이. ……정신차려."

 

정태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일레이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하고 있었다. 피식 웃으면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여느때와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얼굴로 태연하게 입술에 맺힌 핏방울을 닦는 모습이 더욱괴기스럽다.

 

과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눈앞에 흡혈귀가 나타났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정태의가 이미 알고 있는남자였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팔목을 덥썩 잡았다. 마치 그가 어디론가 가기라도 할 듯이. 그리고뚫어져라 그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내가 어떻게 도망치느냐 마냐 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진짜로 심각하게 정신병원이 필요한데.

 

정태의는 섬뜩하다 못해 미미하게 걱정까지 들기 시작했다.

 

"너……, 나랑 잠깐 병원 좀 다녀오자."

 

정태의는 심각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비록 언제든 눈치봐서 이 남자에게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각한 이상을 지닌 인간을 보고 그냥 모른 척할 수는없었다. 문득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 않은 웃음이었다.

 

, 바람 새는 소리로 시작된 웃음은 나직하지만 제법오래 이어졌다.

 

"병원이라……. 네 목에 피 나는 거 지혈하러 가는 거라면 따라가 주지."

 

일레이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나직한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태이."

 

문득 일레이가 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짙어졌다.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각인을 찍는다는 이야기, 들어봤나?"

 

정태의는 담담하게 웃는 이레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비슷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실제로 흡혈귀도 그런 설이 있었고, 짐승도 상하 관계를 구분지을 때 목을 물기도 한다. 혹은 성교시에.

 

마지막 경우를 떠올린 정태의는 홀로 내심 고개를 휘휘저었다. 남일이 아니니 더욱 떠올리기 싫다.

 

"그건 인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더욱이 나는 소유물이 아닌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남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듯 말 듯했다.

 

일레이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막 생각했어. 네가 내 소유라고 각인을 새겨두면 좋을 것 같다고."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일레이는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았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고, 터무니없었다.

 

게다가 그런 만큼 더욱 불쾌하고, 또한 불안했다.

 

"일레이. 농담은 관둬. 사람은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어. 각인? …ㅡ웃기는 소리. 그 따위 게 수백 개 있어 봐야 어디 가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나? 법정 가서 주장할 수 있겠어?"

 

"틀렸어, 태이."

 

일레이는 정태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그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어렵잖게 잡으며, 그는 조금 전에 물었던 쪽과는 반대쪽의 목으로입을 가져갔다.

 

물린다…ㅡ!

 

움칫해서 눈을 감았지만, 각오했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듯이, 그의 입술이 오갔을 뿐이다.

 

"사람은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있어. 그리고 그 소유는 법정 따위에서 주장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상징만으로도 충분해. …ㅡ모르겠나?"

 

일레이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몹시 간지럽고도 선뜩한 느낌이 들어, 흠칫, 흠칫, 몸이 떨린다.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ㅡ, 제기랄. 박고 싶으면그냥 박고 싶다고 해! 영문도 모를소리 지껄이지 말고!"

 

정태의는 나직이 외쳤다. 문득, 목 위에서 움직이던 일레이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 갑작스런 정적에 정태의는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정태의. 너는 모른다고 했지."

 

"…ㅡ."

 

갑자기 일레이가 속삭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갸웃하던 정태의는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ㅡ내가 미친 것 같단 말야. 도무지 영문 모를 짓을 계속하고 있거든. 왜 이럴까, .

 

ㅡ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그러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정태의는 다시 한 번 같은 대답을 했다. 그가 불안정한원인이 뭔지, 정태의가 알 도리가 없었다.

 

이 미친놈. 이제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정태의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목덜미에서 움직이던 입술을 귀로 쓸어올렸다. 귓바퀴를 느리게 핥는 혀가 꾸물거리는 감촉이 유난히 선뜩했다.

 

"상징은 곧 믿음이다."

 

"……?"

 

귓가에서 속삭이던 입술이 조그만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바라보았다고는 해도 그의 머리카락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사람을 가지는 건 간단해. 누가 누구의 소유인지, 인식을 하면 디거든. 아주 깊이. 무의식중에."

 

정태의는 몸을 굳혔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암시라도 말하는 건가?"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행동하게끔 만드는 행위 중에 그 만한 것이 또 있을까. 정신이 몸을 배반하는 것, 혹은 몸이 정신을 배반하는 것, 그러한 행위는 인간의 몸과정신을 분리시킨다.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을 점점 알 수 없었다.

 

일레이는 웃었다.

 

"글쎄……,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저 말이지,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야. 네가 내 소유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도 괜찮겠다고."

 

"…ㅡ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지금 나한테 암시라도 걸어서, 내가 네 소유라고 믿게끔 만드는 미친 짓이라도 하겠다는 소리냐?!"

 

정태의는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이 움직이는 게 싫었다. 타인이 의도한 것이라면 더욱.

 

하지만 정태의가 화를 내며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넌 또 틀렸어. 그게 아니야."

 

"그럼 뭘 어쩌겠다고. 뭐야, 날 죽이고 싶어? 그건 아니라면서. 그럼 괴롭히려고? 그러면 그냥 괴롭힐 방법을 알아보지 소유니 뭐니, 그게 무슨 영문 모를 소리냐고!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네 소유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태이. 틀렸다니까."

 

일레이는 한숨처럼 웃었다.

 

문득 정태의의 귓바퀴를 세게 깨문 그는, 가볍게 정태의의 몸을 밀었다. 그리고 한 발짝 정도 뒤로 물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태의를 훑어보았다.

 

할짝, 혀가 입술을 핥았다. 그 혀 끝을 보자 저도 모르게 심장이 욱신한다.

 

"네가 내 거라고, 네가 인식하는 게 아니야."

 

"뭐…ㅡ?"

 

"내가, 인식하는 거지."

 

정태의는 표정 잃은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일레이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풀고 있었다. 그 하얗고 여유로운 손놀림이 어쩐지 몹시 색정적이다. 단추를매끄럽게 만지며 풀어내는 손에, 정태의는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표정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정신 상태는 지금 좀 이상하거든. 평소의 내가 아니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모르겠단 말이야……. 일단 그 원인이 너라는 건 확실하거든."

 

그는 정말이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희미하게 찌푸린 눈가에 섞이는 숨결이, 정말로 곤란해하는 눈치다.

 

"그래서, 일단 뭐든 인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어. 뭐든 좋아. 하나를 인식하고 나면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거고, 부차적으로 가지를 뻗어나가 옳은 답을 찾을 수 있겠지."

 

일레이는 애매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잃었다.

 

정태의가 이해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 남자의 이상(異常)정도가 점점 이해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거다.

 

소유라니. 내가? 일레이의…ㅡ?

 

정태의는 아마도, 어지간히 경악스런 얼굴을 한 모양이었다. 셔츠의 단추를 다 풀어낸 일레이는 셔츠를 벗어의자 등받이에 걸쳐두면서 정태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그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음 지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넌 걱정할 것 없어. 네가 내거라고 인식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라니까."

 

 

 

 

* * *

 

 

 

천장이 아까부터 끊임없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시야 속에서 천장의 하얀 물결 무늬가 두서없이 흔들린다. 마치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릿속 같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 이 개새씨. 박고 싶으면 그냥 박으라고 했잖아, 이 망할 새끼야……!"

 

정태의는 입 속으로 끊임없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입밖으로 나와, 그 소리는 일레이의 귀에도 닿았다. 그러나 일레이는 오히려 유쾌한 듯 웃었다.

 

"지금 이대로 박아도 괜찮아? 넌 박히는 건 질색을 했던 것 같은데."

 

"개새끼야, 어차피 박아대려고 이 짓 하는 거잖아, 이 나쁜 놈아!"

 

정태의는 일레이의 여유로운 목소리를 듣자 더욱 부아가 나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등에 닿은 일레이의가슴이 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정태의의 땀인지도 모르겠다. 등이 미끈거려 그때마다 소름이돋았다.

 

정태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힌 채, 일레이는 정태의의 귓바퀴에서 목덜미, 어깨까지 남김 없이 잇자국을새기고 있었다. 단단한 이가 피부 위로 파고드는 아픔도, 다른 감각들에게 밀려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줄곧,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있었다.틀림없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정태의는 생각했다. 소리가 조금이라도 잦아든다 싶으면 이 빌어먹을 놈은 정태의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다리 사이를 끊임없이 드나들던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태의가 기겁을 하고뱉으려 들어도 일레이의 손은 정태의의 턱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입 안을 휘젓는 손가락에 타액을 묻히고 나면, 일레이는 다시 그 손가락을 아래로 밀어넣어 휘저어 질척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돌 것 같았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다리 사이를 문지르던 다른 손은 질척거리는 입구의 물기를 끌고 그대로 정태의의 살갗에서 떨어지지 않고 타고 올랐다. 회음을 거쳐 성기까지, 그리고 아랫배와 허리, 이윽고 가슴에 이른다.

 

그 손가락이 가슴의 가운데,뾰족하게 솟은 돌기에 이르렀을 때 정태의는 흠칫, 몸이 튀었다.

 

"아하……, 역시."

 

일레이가 나직이 속삭이며 즐거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수치와 분노가 울컥 밀어닥쳤다. 빌어먹을. 뭐가 역시냐!

 

정태의는 일레이의 몸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미처 일으키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일레이는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마치 쇠사슬에라도 묶인 듯,그의 팔을 풀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버둥거리다가 결국그의 손이 사타구니를 움켜쥐어 흠칫 움직임을 멈추고말았다.

 

"! 사람을 무슨…ㅡ.'

 

"가만히 있어."

 

정태의의 말을 자르며 일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한쪽 가슴이 그의 입 안에 먹혔다. 정태의의몸이 다시 한 번 튀었다.

 

뭐야, 이게. 이게 뭐냐고.

 

정태의는 당황했다. 당혹스럽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정태의의 가슴 위로 천천히 손가락을 덧그렸다. 그 간지러운 감각이 이윽고 몸속까지전해졌다.분명 처음에 조금씩 간지러워졌던 것은 가슴뿐이었는데, 그 가려움은 몸속, 다리 사이까지 번져간다.

 

움칫, 다리를 움츠리려 했지만 그럿도 안 되었다. 정태의의 한쪽 무릎을 뒤에서 붙잡고 안아올린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속에 집요하게 드나들던 손을 잠시 빼내었다.손바닥으로 그의 아랫배를 천천히 문지르는가 싶더니,도로 손을 내려 다시 엄지를 정태의의 몸속에 묻었다.나머지 손가락은 간간이 입구의 주변이나 회음, 혹은 성기의 뿌리 근처 따위를 문지른다.

 

정태의는 몸 곳곳에 퍼져나가는 감각 가운데 어디에도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성기가, 그 아래가, 모두간지러웠다. 때로 몸이 흠칫거리며 튀어오르는 걸 참을수 없었다.

 

"그만, 잠깐, , 간지럽…ㅡ."

 

초조하고 당황스럽게 외치는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아랑곳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페이스로만 가겠다는 듯 천천히 끈기있게 정태의의 몸을 더듬더간다.

 

다리 사이로 첫마디가 드나들던 엄지는 어느 새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엄지의 뿌리까지 집어삼킨 입구는 평소와는 비할 수 없이 벌어져 손가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제 그럭저럭 풀렸군. …ㅡ좋아."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긴 뭐가 좋아, 이 빌어먹을, 하고 정태의는 다시 욕을 주워섬겼다.

 

"태이, 알겠나? 이 몸은 내 거다."

 

귓가에서 일레이가 속삭였다. 정태의는 사나운 눈으로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얼핏 물기가 비치는 그 눈가를 일레이는 혀로 쓸어올렸다.

 

"이 몸의 어디건 내가 모르는 곳은 없어. 네 몸의 어디든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지. 그리고 여기는, 내 물건을 품기 위해서 있는 거야."

 

다리 사이를 주무르던 일레이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정태의는 짧게 신음했다. 아래의 틈새가 벌리면서, 그 안을 드나들던 손가락을 일부러 크게 휘저었다.

 

"태이. ㅡ…앞을 보란 말이야."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말았다를 거듭했다. 밭은 숨을내쉬며 일레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다시피 하고 늘어져 있던 정태의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초점이 흐린 눈으로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본다. 그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의자 앞에 있는 것은 커다란 전신 거울.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여태 의식하지 못했다.

 

거울 안에는 정태의 자신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일레이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의자의 팔걸이에무릎을 걸치고 벌린 다리 사이로, 일레이의 손이 흠뻑젖어 움직이고 있었다. 정태의가 거울로 시선을 주고 경악스럽게 표정을 굳힌 순간, 일레이는 웃었다. 그리고 커다란 두 손으로 정태의의 두 허벅지를 움켜쥐고 바깥쪽으로 젖힌다.

 

"일…ㅡ."

 

시뻘게진 얼굴로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아랑곳 않았다. 다리를 움츠리려 해도 그의 억센 손이그냥 놔두지 않았다.

 

"움츠리지 마. 내가 가질 몸이다. 어느 구석진 곳이든 내 것을 내가 보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지?"

 

", 기지 마……."

 

일레이의 느릿하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귓불을 핥았다.정태의는 숨이 막혀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정태의는 표정을 굳혔다. 자신이앉아 있는 그의 허벅지, 그 가운데에서――――정태의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거대한 남근이 솟아올랐다. 정태의의 고환을 찌르며 뻣뻣하게 고개를 든 그 남근이, 정태의의 사타구니만큼이나 노골적으로 거울에 비쳤다.

 

"태이. 그렇다면 잘 봐. 이건 내 거다. 그렇지."

 

"…ㅡ."

 

일레이는 허리를 한 번 흔들었다. 그의 무시무시하게 발기된 성기가 끄덕이며 흔들리면서 정태의의 허벅지를 두드린다. 살덩이와 살이 부딪히는 모습이 거울 속에서는 한데 뒤엉킨 듯 비쳐, 말을 잃을 정도로 외설스럽게 비쳤다.

 

"일레이……, 이 악취미의 미친 변태 놈……! , 치워!저런 건 왜…ㅡ!!"

 

"말했잖아. 나는 네가 내 거라고 인식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저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물론이고 지금 내 다리 위에 앉은 네 실체도, 내 거다."

 

"헛소리 마! 내가 왜 네 거야!"

 

정태의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이 미친놈 때문에, 정말로 돌 것 같았다. 머리가 익어서돌아버릴 것 같다.

 

정태의가 고개를 돌리면 일레이는 완강히 그의 턱을 붙잡고 거울 쪽으로 돌렸다. 눈을 감으면 정태의의 성기를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거세게 움켜쥐었다.

 

". 똑똑히 보란 말이다. 네게 인식하라고는 하지않아.네가 내 거라고 인식할 건 나라고 했잖아. 넌 그냥, 보기만 하면 돼. 네가 내 것이라고 내가 인식하는모습을."

 

"궤변이라니까! 일레이! 이 미친놈! 하지 마…ㅡ! 빌어먹을……. 내가 말했잖아, 이 개새끼야! 박고 싶으면 그냥박으라고, 그랬잖아! 왜 자꾸 이 따위…ㅡ."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머리 끝까지 화도 나고, 보기 싫어도 눈앞에 똑똑히 비치는 저 음란한 몸뚱이들에낯이 달아올랐다. 진짜 울고 싶다. 왜 이런 미친놈에게 걸렸는지, 왜 제대로 도망치지 못했는지, 왜 도로 잡혀버렸는지, 환장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득 몸이 부웅 허공으로 뜨는 것 같았다. 균형을 잃을 것 같아 당황해서 바르작거리는데, 등뒤에서일레이가 말했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니까 긴장하지 마. ……기껏 풀어놨는데 괜히 긴장해서 아픈 꼴 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니까."

 

일레이가 정태의의 벌어진 다리 아래로 손을 넣어 두 무릎을 각각 안고 들어올렸다. 허리가 허공에 뜨면서 다리가 벌어져 균형을 잃어버렸다.

 

"잘 봐. 태이. 눈 떼지 마. 바로 지금…ㅡ."

 

허둥거리는 정태의에게 나직하게 말하며 일레이가 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시선을 든 정태의는, 거울을 보았다.

 

그 순간 말을 잃었다.

 

눈을 뗄 생각도 못하고, 정태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겹쳐지려고 하는 일레이의 몸이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 조금 전까지 끈질기게 손가락이 드나들어 조그맣게 입을 벌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부를 보여주고 있는 그 입구에, 일레이의 귀두가 막 닿으려는 참이었다.

 

"알겠지. 너는 내 거다."

 

일레이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였다.

 

정태의의 다리 사이로 일레이의 성기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두껍게 부풀어올라 무시무시하게 성이 오른 귀두가 무지막지하게 몸 속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몸이 갈라졌다. 도저히 사람의 몸에 들어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커다란 살덩이가 정태의의 몸을 빡빡하게 벌리며 간신히, 간신히, 조금씩 머리를 들이밀었다.

 

"좋아, 좋아. 조금만 힘 빼고, 긴장하지 마. …ㅡ태이. 너는 내 거야. 이렇게까지 아래를 벌리고 내 물건을 잡아 삼키고 있잖아. , 지금 네 몸 속에 내가 들어가 있단 말이다. 네가 날 집어삼키고 있다고."

 

일레이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빡빡하게 파고드는 아랫도리가 아찔한 듯 그의 목소리에 욕망이 끓었다. 허리를 조금씩 추어올릴 때마다 정태의의 몸속이 조금씩젖어갔다.

 

그리고 정태의는 울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이 망할 새끼, 뭐가 괜찮아, 여전히 아파죽겠잖아, 이 인간도 아닌새끼, 넌 그냥 마굿간으로 가라 이 빌어먹을 놈아,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온갖 욕을 주워섬기면서, 정태의는 흠칫흠칫 몸을 움츠렸다.

 

일레이는 하아, 하고 숨을 토해내었다. 더운 숨결이 어깨에 닿아 선뜩한 기분이 들었다. 몸은 달아오르고 사타구니도 섰는데, 아파서 도로 사그라들어갔다. 정태의는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빼려고 안간힘 썼다.

 

그러나 그때, 정태의를 안아 올리고 있던 일레이는 그 손에서 힘을 늦추었다.

 

"…ㅡ!!"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숨이 꽉 막혀 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버틸 곳을 잃고 미끄러진 몸이 일레이의 성기 위에 체중을 싣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온몸이 가득찬 것 같았다. 둘로 갈라지는 것 같다.

 

"울지 마. 괜찮으니까. 괜찮아. 안 찢어졌어. 아주 잘 하고 있어. 힘 빼고. …ㅡ그래, 굉장히 잘 하고 있으니까, ――――착하지."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일레이는 욕망으로 가득차 나직하고 거칠게 터져나오는 목소리로 그렇게 읆조렸다. 정태의는 조금이라도 덜 아프려고 목놓아 울면서도 무심결에 몸을 움츠렸다.

 

"악……!"

 

그러나 몸을 움츠린 순간, 정태의는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몸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것이 오히려 부풀어오른 탓이다. 일레이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좋아, …ㅡ좋아. 한다. 힘 빼고. 자…ㅡ."

 

그의 허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기절할 것 같은데 몸속으로 점차 세게 드나들기 시작하는 모습이 거울 안에 비쳤다. 정태의가 훌쩍이며 고개를 돌리면 일레이는 쾌락으로 신음하는 와중에도 정태의의 턱을 붙잡고 돌리며 그의 뺨에 입을맞추었다.

 

"울지 마. 그리고 잘 기억해. 네가 보는 대로 기억하면되는 거다. 네가 다리 사이로 삼키고 있는 건 내 성기이고, 내 성기가 드나드는 곳은 네 몸 속이야."

 

정태의는 울었다. 아프기도 아팠거니와, 눈앞에 똑똑히드러난 이 적나라한 광경을 참을 수가 없었다.

 

뺨에 입을 맞춘 일레이가 정태의의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리고 입술을 핥아올린다.

 

점차 허리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정태의는 다리 사이의 감각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 속에서 뱃속을 쳐올리며 새찬 물줄기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짧은 신음을 내뱉은 일레이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허리를 추어올린다. 맞물린 살덩이 사이에서 희뿌연정액이 비어져 나왔다.

 

일레이는 울다지쳐 늘어져버린 정태의의 목이며 귀,,얼굴, 입술이 닿는 곳마다 샅샅이 핥아올리며 입을 맞추었다. 마치 한군데라도 닿지 않는 곳이 있어선 안 된다는 듯이, 집요하게.

 

"잘 기억해, 태이. 오늘부터――이제부터는 매일, 너는 내 거다."

 

상냥하고 달콤한 속삭임이 보드랍게 뺨을 핥아올렸다.

 

정태의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욕할 기운도 다 사라진 머릿속으로 짧게 한탄했다.

 

이 미친놈. 이게 뭐가 '네가 인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인식'이야. 이러면 결국 내가 세뇌되는 거 아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 * *

 

 

 

정태의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리타가 세 번째로 깨우러왔을 때였다.

 

리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30분전에 한 번, 그리고 15분전에 한 번, 이렇게 두 번이나 정태의를 깨워 식사를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태의는 두 번 모두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며 곧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그녀는주장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정태의 스스로는 리타가 처음 깨웠을 때 얌전히 잘 일어났다고 기억하는데, 그 처음 깨우러 왔을 리타가 몹시 역정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세 번이나 헛걸음시키지는 말아주면 좋겠군요."

 

그녀는 쌀쌀한 얼굴로 딱부러지게 말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정태의는 어, 미안합니다, 라고 잘못한 기억도 없었지만 일단 사과를 하고는, 멍하니 방문을 쳐다보다가한숨을 쉬었다. 요즘엔 그래도 그녀가 나름대로 살갑게대해주는 것 같았는데, 오늘 이렇게 한 방에 다 말아먹는구나. 정태의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멍하니방문을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왜 이렇게 멍하니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번엔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왜 이래, 정태의……. 정신차려."

 

머리가 멍하니 생각이 좀체 돌아가지 않았다.

 

정태의는 스스로의 두 뺨을 따끔할 정도로 철썩 두들기고는 눈을 떴다. 뺨이 따끔했던 탓인지, 조금 정신이 깨었다. 그리고 깨자마자 그는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몸이 아파 죽겠다. 나른하고 피곤해 죽겠다. 허리에 힘이 안들어가서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호되게 한 바탕 고역을 치른 몸으로 침대 위에서 몸부림쳤다. 왜 사람은 기억을 자유로이 소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걸까. 기계의 그런 능력만큼은 진짜 부러웠다. 정태의는 침대에 널브러져 아침부터 우울함에 젖어 있다가, 거실에서 괘종시계가 나지막이 댕,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일어났다. 어서 식당으로 가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리타가 정말로 화난 얼굴을 하고 올 거다. 몸이 두쪽으로 쪼개지는 일이 있더라도 리타가 다시 오기 전에는 식당에 가야지. 정태의는 이 집에서 리타가 제일 무서웠다.

 

침대 밖으로 조심조심 기어나갔다. 발로 땅을 딛자마자허리 아래가 엄청나게 욱신거려 한동안 허리를 펼 수 없었지만, 조금 지나니 그래도 움직일 만했다.

 

정태의는 테이블을 붙들고 엉거주춤하게 선 채 가만히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것도 한 적이 있는 거라고처음보다는 낫구나. 처음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고는 다음날 침대에 틀어박혀 일어나질 못 했는데. 하지만 오늘도 하루종일 변기에서 피 보는 건 피할 수 없겠지.

 

우울했다. 몸이 아픈 것도 우울했고, 어제의 행위를 생각하면 더 우울해졌다. 정태의는 울고 싶어졌다.

 

저 망할 놈. 박고 싶으면 그냥 박으라고 했더니, 정말로그 무식하게 큰 걸 진짜로 박아 넣냐. 전에 나 그 짓하고 죽어난 거 알면서. 진짜로 못된 놈.

 

정태의는 천천히 제자리걸음을 해 보았다. 발을 뗄 때마다 사타구니가 욱신욱신했지만 그래도 좀 느리게나마 걸을 수 있겠다. 정태의는 작살난 발목 때문에 짚고다니는 지팡이가 오늘이야말로 정말 요긴하게 쓰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딱 하나.

 

딱 하나 용서해줄 만한 건. 행위 뒤에 침대 위에 널브러져 부들부들 떨면서 꼼짝도 못하는 정태의의 뒤처리를말끔하게 다 해준다는 점이다. 어제도 거의 기절해 있는 정태의를 욕실로 들쳐안고 가 몸 안팎을 씻어주고, 옷도 다시 입혀주고, 의자도 닦아주고, 침대도 정리해주고, 더러워진 옷이나 시트 따위는 걷어다가 내다놓아 주었다. 그래. 그거 하나만큼은 예전에도 잘 했었다.

 

정태의는 불편한 몸을 천천히 움직여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리타가 다시 한 번 달려오기 전에 서둘러방을 나섰다. 그러나 운수 없게도, 문을 향해 절뚝절뚝걸어가던 정태의는 문득 문 옆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별 이상한 데는 없는지 무심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살피던 정태의는 문득멈칫했다.

 

"……."

 

얼굴이 뜨끈해졌다. 얼굴만이 아니다. 귀도, 목도, 머리까지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아침부터 생각해선 안 될 걸 생각해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돌아버릴 것 같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그놈은 미친놈을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도약을 하려는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정태의느 그 도약에 결코 밑거름이 되어주고 싶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태의는 손등으로 마른 뺨을 훔쳤다. 손등에 닿는 뺨이 아주 뜨겁다.

 

다시 세수를 하고 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욕실로 걸음을 되돌리려던 정태의는, 저만치 식다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난 것 같아 얼른 다시 방 바깥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만 천천히 절뚝거리면서ㅡ지금 이 순간 정태의는 발목이 작살난 게다행이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ㅡ식당으로 향했다. 저만치서, 얼음 같은 얼굴로 막 걸어나오려던 리타가 정태의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세수하고 오려고 했더라면 리타에게 단단히 미움 받을 뻔했다. 정태의는 걸음을 옮기면서 문득, 어라, 하고 생각했다. 잠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듯 마는 듯하다. 리타에게 미움받으면 안 돼, 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나는데.

 

"……."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어렴풋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리타는 그녀의 말대로 아침에 세 번 왔었다.

 

처음 그녀가 왔을 때에도 비몽사몽으로 의식이 거의 혼곤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대답 비슷하게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다시 고꾸라졌던 것 같다.

 

두 번째로 그녀가 왔을 때에는 그나마 처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의식은 수면층 너머에서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화난 목소리로 '두 번 걸음 시키지 마세요'라며 돌아가는 리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얼른 일어나야 돼, 안 그러면 리타에게 미움받을 거야, 그럼 안 돼, 라고 끙끙거리며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기절하듯이 잠들고 말았지만.

 

그리고 세 번째, 조금 전에 겨우 일어났다.

 

"……. ……?"

 

정태의는 잠깐 묵묵히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 세 번만이 아닌 것같기도 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련하고 아득한 기억에, 누군가를 붙잡고 '제발 저놈 좀 데려가주세요'라면서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설마 일레이 본인을 붙잡고 그놈 좀 데려가달라고 했을 리는 없고, 리타를 붙잡고 그랬을 리도 없고ㅡ그럼 리타는 화냈을지도 모른다. 우리 '도련님'을 푸대접한다고ㅡ.

 

역시 착각인가.

 

정태의는 다시 삐걱삐걱 걸음을 옮기면서 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레이와는 함부로 잘 게 못 된다.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하다.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해대니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나마 어제는 낫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 한 번은줄창 해대서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깜빡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다시 의식을 되찾고 보니, 아직도 그놈이 허리아래를 붙들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정태의는 무서운 기억을 떠올렸다.

 

ㅡ오늘부터ㅡ이제부터는 매일, 너는 내 거다.

 

일레이가 거친 숨결을 몰아쉬며 귓가에 속삭였던 그 목소리가 불현듯 떠오른다. 또 다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리는 없으리라 보지만, 설마 앞으로 그 짓을 자주 하자는 걸까.

 

정태의의 낯이 굳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발치를 쳐다보았다.

 

"……. 집어넣지는 않지만 오래 하는 거랑, 그렇게까지오래는 안 하지만 집어넣는 거, 어느 게 더 견디기 편하려나……."

 

정태의는 괴롭게 혼잣말했다.

 

어제는 아파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예전의 그때는 피곤해 죽는 줄 알았다.

 

"둘 다 안 돼, 둘 다……. 역시 저 놈은 안 돼……."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누가,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정태의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는지, 넉넉하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물어왔다.

 

움칫 고개를 들자 테이블 앞에서 카일이 정태의에게    '좋은 아침이군'하고 인사를 덧붙이고 있었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정태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그러다가 건너편에 앉은 남자와 흘끔 눈이 마주쳤다.

 

"……."

 

"이 집에는 리타가 있으니 늦잠도 자기 힘들지?"

 

삽시에 부루퉁해지는 정태의의 얼굴을 봤는지 못 봤는지, 건너편에서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일레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저만치서 리타가 뭐라고 토달토달 잔소리를 하자 얼굴을 찌푸린다.

 

"……."

 

갑자기 울컥 화가 났다.

 

아침부터 저 땅 끝까지 떨어진 것만큼 우울해진 사람이여기 하나 있는데 저 남자는 별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정태의는 말없이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런데, 그래서?"

 

"? ……네?"

 

묵묵히 식사만 하는 정태의에게 카일이 접속사로만 물었다. 정태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들어오면서 그랬잖은가. 둘 다 안 된다고. 뭔가 고민거리라도 생겼나 싶어서."

 

카일은 정태의가 그새 잊어버린 눈치이자 다시 말해주었다.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 하고 중얼거렸다.그러나 입을 벌린 채 잠시 동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안 집어넣고 오래하는 거랑 집어넣고 금방하는 거에 대해서 잠시,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태의는 적당히 웃으며 얼버무리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일도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음식과 접시로만 눈길을 번갈아주며 식사에 전념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우울함은 저 인물이 원흉이다. 지금 굳이 쳐다봐서 우울함을 더 가중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런 젠장.

 

정태의는 어느 순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선이 느껴졌다.

 

포크를 든 손등에 턱을 괴고, 일레이는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매우 노골적으로ㅡ를 넘어서, 그냥 대놓고 보고 있었다.

 

"……."

 

정태의는 잠시 동안은 못 본 척했지만 그 시선이 아무리 기다려도 거두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고개를들었다. 그리고 그를 못마땅한 얼굴 그대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볼일이라도?"

 

"……아니."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를 마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아니라고 하면 기분이 곱게 가라앉지 않는다.

 

"할 말 있으면 해."

 

정태의는 일레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싸움이라도 거는 투였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정태의는 '나도 참 대담해졌다. 이제 막 나가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어쩐지 이젠 무서울 게 없는 기분이었다. 죽이려먼 죽이시든가, 그런 기분이다. 일레이는 다시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나서, 포크 끝으로 정태의의 접시를 가리켰다.

 

"별 건 아니고, 네가 집어간 그 닭다리, 내가 먹으려고 떼놓은 거였거든."

 

"……. 도로 줄까?"

 

정태의는 반쯤 뜯어먹은 닭날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걸 흔들며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문득 희미하게 웃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내 거니까…ㅡ됐어."

 

내 몫의 닭이니까 네가 먹어도 돼, 라고 친절하게 부연설명까지 덧붙인 일레이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정태의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그 얼굴을 보고 일레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

 

정태의는 뜨거워지려는 얼굴에 연신 손등을 대어 식혔다. 그러나 얼굴보다 머리가 더 뜨거워졌다. 순식간에확 열기가 치밀었다.

 

ㅡ너는 내 거다.

 

어젯밤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귓가에 읆조리던 그 목소리는,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귀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았었다. 정말로 암시라도 걸거나 세뇌라도 할 작정인가 아닌가싶을 정도로.

 

'네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거' 좋아하네.

 

미친놈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방에 돌아가면 도착하는대로 바로 그놈의 거울부터 깨부숴버릴까 보다.

 

정태의는 갑자기 밥맛마저 떨어져 먹다 남은 닭다리를내려놓았다.

 

내 거 같은 소리.

 

정태의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얹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타인의 삶을 자신이 짊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지로는 물론, 타인의 의지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다. 함께 평행선을 그리며 걸어가는 관계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겹쳐진 선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일레이. 평생 괴롭혀주겠다고 했었던가.

 

정태의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잠시만 눈 돌려라. 그럼 나는 그 즉히 다시 도망쳐 버릴 테다. 어디 쫓아오려면 또 쫓아와 보라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새로 신분증을 만들 수는 없다. 그가 쓸 수 있는 신분은 김영수의 것. 그리고 정태의 자신의 것 두 가지뿐이다. 그리고 그 둘 모두 이미 일레이는 알고 있었다.신분이 없이는 일을 할 수도, 비행기를 탈 수도, 하다 못해 은행에 갈 수도 없는 바에야, 어디로 가건 그는 이제 흔적을 찾아내어 쫓아올 수 있을 터였다.

 

정태의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일레이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자신의 삶을 계획 짜는데 일레이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이 현실에 쓴웃음이 났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이곳, 이 현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울해진 정태의가 야채류만 몇 가지 집어먹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휴대전화인 듯, 소리는 일반전화가 놓이지 않은 식당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테이블 근처에서.

 

전화의 주인은 카일이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거 미안하군', 하고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전화를 받았다. 친한 사람인지 표정이 밝아졌다. 포크를 내려놓는 걸로 봐선 통화가 길어질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흘끔, 건너펀에 앉은 일레이를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표정도, 몸짓도, 손짓도, 분위기도, 정태의가 알고 있는 여느 때의 일레이였다.

 

가끔 리타가 잔소리를 할 때에는 노골적으로 낯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지만ㅡ그리고 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그들을 키워낸 리타는 그래도 끄덕 않고 잔소리를하지만ㅡ, 다른 때에는 여느 때와 같았다.

 

……그래, 완전히 같다.

 

정태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이는 UNHRDO에서 정태의가 알고 있던 그 남자와완전히 같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토록 불안정하게 보이던 남자인데, 지금 그는 여유롭고 넉넉한 평소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도 기웃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짚이는 데는 없었다.

 

아무래도 좋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미친놈보다는 침착하고 냉정한 미친놈이 훨씬 대하기가 나았다. 정태의는 물을 주욱 들이키며 생각했다.

 

"태이."

 

그때 카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태의는 입에 든 물을 얼른 삼키고 컵을 내려놓으며,그가 여전히 전화를 들고 있는 걸 보곤 대답 대신 무슨일이냐며 고갯짓 했다. 그러자 카일은 웃으며 전화를 내밀었다.

 

"창인이야."

 

"……. ?"

 

정태의는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만 깜빡거리다가되물었다. 아침에 숙부와 통화. 그런 기억은 없는데.

 

정태의가 어리둥절하게 내가 언제요……라고 중얼거리자 숙부는 다시 웃었다.

 

'너 오늘 아침 몇 시더라……, 하여간 정규 일과 시작하기 조금 전에 갑자기 나한테 전화했었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돌려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전화하는 일 자체가 드물고, 게다가 오늘 아침이라고 해봐야 지금도 오늘 아침인데…….

 

그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불현듯 시차를 떠올렸다. 숙부도 거의 동시에 그걸 떠올린 듯 ', 아마 거기는 한밤중이었겠다' 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의 오차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태의는 짚이는데가 없었다. 한밤중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는 일이 거의 드물기도 하거니와, 숙부에게 전화를 할 만한 일이 있었다면 기억할 거다.

 

"삼촌. 그런데 전 전화한 기억이 없는데요……."

 

정태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삼촌은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오늘 아침에 나랑 전화한 거 기억 안 나나 보다 그랬지. 음ㅡ…아침 8시 정도였으니까 거기는몇 시냐, 새벽 1시인가? 그때쯤 전화 왔었어. 울면서.'

 

"……."

 

숙부는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거짓말하는 투도 아니다. 심지어 정황 설명까지 한다. 울면서. 숙부의 말만 들으면 정말 자신이 전화한 것같았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전 전화 안 했다니까요. 제가 무슨 몽유병도 아니고……."

 

거기까지 말했던 정태의는 점차 말을 흐렸다. 뭔가 머리에 살짝 걸리는 게 있었다.

 

ㅡ제발 저놈 좀 데려가주세요.

 

아까 식다으로 오면서 얼핏 머리속에 떠올랐던 문장 하나.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런 젠장.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정태의가 자신을 쳐다보다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태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버렸다.

 

"…….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아요."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숙부가 다시웃었다.

 

'너 오늘 진짜 웃겼어. 난 전화 받자마자 갑자기 어떤 놈이 엉엉 울길래 이게 웬 곡소린가 했다.'

 

"……. 제가 그랬어요?"

 

'. 그랬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남의 탓을 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배려심으로 '별로 그렇지 않았어'라고 해주는 고마운 마음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이 참 많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 원인을 거슬러 가면 원인 먹이사슬 도중에 자신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만. 그러고 보니 너어릴 때도 그랬었지. 재의가 잘못했는데 오해받고 네가대신 혼났을 때, 밤에 멀쩡히 잘 자다가 애가 갑자기 일어나서 엉엉 울면서 내가 안 그랬어요, 난 안 그랬어요,하고 울더라고 형수님이 그러셨지.'

 

몽유병 아닐까 걱정도 하셨지만 그건 아니었고, 어릴 적의 기괴한 버릇이 아직도 그렇게 남아 있는 걸 보니나는 어쩐지 기쁘구나, 라고 말하는 숙부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릴 적의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얼굴에 불이 날 것 같다.

 

정태의는 어젯밤 뭔가 울면서 전화를 한 것 같긴 한데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덜컥 걱정스러워졌다.

 

"제가 혹시 전화해서ㅡ…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숙부는 잠시 동안 으음, 하고 웃음을 띤 채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 말 안 했어. 그냥 목놓아 울면서 저놈 좀 데려가 주세요, 저놈 제발 좀 데려가 주세요, 하고 어찌나 애달프게 흐느끼던지. 듣는 내 마음이 좀 아프긴 하더구나.'

 

정태의는 침묵했다.

 

분명 어제는 심신이 몹시 피곤하긴 했다. 두 번 다시는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나왔던 괴물 같은 놈이랑 딱 마주쳐버렸다, 게다가 그놈이 대전차포를 쏘아대는바람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게다가 그놈이 숲에 불을 질러버리는 바람에 역시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게다가 밤에는 알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지껄이던 그놈이 무작정 박아대서 마찬가지로 역시나 하마터면 죽을뻔했다. 저 정도면 스트레스로 인해 없던 몽유병이 생긴다 해도 이해할 것 같았다.

 

갑자기 스스로가 가엾어졌다.

 

내가 여태 살면서 날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이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그냥……좀 힘들어서 그랬어요……. 이해해주세요, 삼촌……."

 

정태의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숙부는 나직이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숙부가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정태의는 머쓱하게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라고 전제를 달며 물었다.

 

"언제쯤 돌아가나요……."

 

차마 옆에서 본인이 보고 있는데 '저놈은 언제쯤 되어야 이곳에서 떠나나요'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주요 단어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숙부는 정태의의 뜻을 능히 짐작한 모양이었다. 숙부는 막 웃더니 얘기했다.

 

'그놈 휴가원도 제대로 내지 않고 무단으로 나간 거야.그렇게 오래는 못 있을걸. 돌아와서도 시말서를 한 다발 써야 할 테고. 글쎄도……, 오래 머물러야 사나흘?'

 

사나흘. 그 정도면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비록 사나흘이 지난 다음에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하려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애매한 상황을 오래끌지는 않겠다. 정태의는 그것이 숙부 덕분인 것도 아닌데, 그저 다해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합니다, 삼촌'  , 하고 넙죽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일레이의 이야기를하려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안색을 싹 바꾸었다.

 

"삼촌. 거기 모러 돌아갔나요."

 

'모러? 아하. 돌아왔지. 이번 휴가 때 독일에 가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이를 보고 왔다고 황홀경에 젖어 있던데.'

 

"……. 보고 가긴 뭘 보고 가요. 가지고 갔지."

 

날 팔아서.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열이 확 받았다. 발목만 남으면형을 찾아 떠나려고 했는데, 행적을 알 수 없는 형은 일단 차치해두고 UNHRDO 아시아 지부로 돌아가서ㅡ어차피 일레이에겐 잡혔겠다, 더 무서울 게 뭐 있을까ㅡ그놈부터 요절을 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숙부는 아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숙부 역시, 모러가 그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이'를 보기만 하는 데에 만족하지는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확 그놈 방이나 덮쳐서 무기 적발이나 해주세요."

 

'아하하, 이미 늦었을걸.'

 

숙부의 말에 정태의는 분하지만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태의가 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휭하니 홍콩으로 튀어버린 모러가 제일 먼저 했을 것은 십중팔구 '이쁜이들'을 도피시키는 일이었을 거다.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에 그놈을 보기만 하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리라. 정말로 희귀하고 아름다운 총기를 하나 구해서, 그놈이 보는 앞에서 조각조각 분해해버려야지. 그리고 그 분해한 조각들은 다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릴 거다. 그놈이 보는 앞에서. 정태의는 유효적절할 복수 방법을 떠올려 머릿속에 새겼다.

 

'하지만 너도 참……나간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금방 잡히냐.'

 

문득 전화 안에서 숙부가 혀를 찼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옆에서, 일레이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를 가만히 마주보면서 숙부에게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내가 그러니까 모리에게 원한이 쌓였죠, 라고 중얼중얼덧붙였다.

 

'그런데 의외로…….'

 

숙부는 뭐라고 하려다가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그 뒷말을 할까 어쩔까 하는 눈치로, 숙부는 잠시 말을 끊는다.

 

정태의는 이야기의 맥락을 살피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있어 한숨을 쉰다.

 

"의외로 멀쩡한 것 같죠, 저……?"

 

'아하하. 눈치도 빠른 녀석.'

 

정태의는 말없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숙부는 보지 못할 테지만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스스로도 의아하다고 여긴다.

 

의외인 상황이긴 했다.

 

정태의는 틀림없이 일레이 리그로우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혹은 죽는 거에 비등한 상황에 처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 숲 속에서, 그 불길 속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까지 이어졌었다.

 

"……."

 

알 수 없었다. 이 남자가 뭘 생각하는지.

 

정태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상황이 흘러가는 바를 바라보는 수밖에. 예측하고 대비할 방도가 없는 걱정이라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정태의는 흘끔 시선을 돌려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는리타가 가져다 준 홍차를 마시면서 가만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시선을 떼지 않는다.

 

UNHRDO에서부터 줄곧, 정태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를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그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정태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자, 숙부는 잠시 침묵했다. 형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한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 정태의는 숙부의 뒷말을 기다렸다. 숙부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외의 소식을 담고.

 

'재의가 있는ㅡ아니 있을지도 모르는ㅡ곳이라면 실마리가 하나 잡혔어.'

 

"……어, 그래요? 어딘데요."

 

정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그토록 찾을 수 없었던 형이다. 무작정 돌아다니는 정태의가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쳐도, 온갖 정보부를 다 아우르고 있을 숙부조차도 단서 하나를 잡기힘들다고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니.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귀에 바싹 대었다. 그렇게 하면 말이 더 잘 들리는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고작해야 실마리 하나가 생겼달 뿐인데도 마음은 이미 형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숙부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약간의 웃음을 담아, 숙부가말했다.

 

'그건 나보단 카일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다. 그녀석이 알아낸 거니까.'

 

"카일……."

 

정태의는 옆에 사선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의아했는지, 거기에 앉아 있던 남자도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래, 몰랐구나. 하긴 아무리 동생이라 해도, 물어보지 않는데 함부로 말할 만한 류의 정보는 아니지.'

 

숙부는 웃었다.

 

정태의는 빤히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알고 있다. 형이 있는 곳을.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 향방은 네가 결정하려무나. 실마리가 잡힌 이상 아마도 UNHRDO에서는 이쪽 나름대로 찾아낼 방법을 도모할 테니. ……하지만 찾으러 갈 생각이라면 내게도 종종 연락해 다오.'

 

숙부는 마치 농담을 하듯이 말하곤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정태의는 숙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끊은 전화를 다시 카일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카일을 바라보았다. 침착하게 전화를 받아든 카일은 의아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기다려도 정태의가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자, 그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네었다.

 

"네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 재의 형이요."

 

정태의는 짧게 말을 꺼내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 카일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빤히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숙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건지 대충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정태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재의였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는 사람은 제 형이었고 도망쳐야 할 사람은 당신 동생이었지요, 이미 그가 알고 있을 이야기를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그렇군, 하고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다. 그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있던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정재의를 찾아서 어쩌려고."

 

정태의는 일레이의 물음에 낯을 찡그렸다.

 

"형을 찾는 데에 이유가 어딨어. 내 형이고 오래 못 봐서 보고 싶으니까 찾으러 가는 거지."

 

"흐음……. 그래서, 정재의를 찾으러 가시겠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방해할 건가?"

 

정태의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본다.

 

만일 방해할 거라면.

 

그렇다면 정태의는 일레이와 싸울 의지가 있었다. 육체싸움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어떤 형태가 되든, 정태의는 그의 방해를 받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마도 일레이는 정태의의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얼핏,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정태의가 그와 싸워서라도 자신의 일을 강행하겠다는 것이 거슬리는지도 몰랐다. 혹은 뭔가 달리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레이는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가기가 힘든 곳인가요?"

 

"아니야. 힘들지는 않아. 그 섬 자체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

 

카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태의는 그 뒤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카일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섬은 원래부터 아랍계 왕족이나 부유층이 별장을 지어놓고 가끔 이용하곤 하는 곳인데, 관습상 그네들의저택도 그렇고, 부분적으로 외지인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곳이 있는 모양이야. 게다가 상당히 폐쇄적이라서외부에서 내부 사정을 알 수도 없고."

 

"……. 재의 형이 그 안에 있다고요?"

 

"글쎄……. 그게 확실하지 않아.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있다는 이야기가 들어왔지. 현재로서 단서는 그것 하나뿐이니까."

 

정태의는 좀체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해 봤지만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미심쩍게 물었다.

 

"어째서 형이 아랍계 왕족인지 부유층인지의 별장에 있다는 건데요."

 

그러자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었으니, 뭔가 짐작가는 바는 있는 눈치였다.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랍 부족 내부의 권력다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정재의에게 무기 개발을 부탁하려고 납치 감금한 것 같다는 말이 들려오더군."

 

카일이 말을 맺었을 때, 정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더 물어볼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물어보려고 들면 궁금한 게 수없이 많았고, 그렇지 않으려면 이미 저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다른 것은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정재의가 있기만 하면되었다.

 

"거기가 어딘가요?"

 

정태의가 조용히 물었다. 형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 벌써 몇 달이나 소식을 알 수 없이 연락도 안 되는 형이, 어쩌면 그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카일은 잠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세링게. 아프리카 동부 해안 쪽에 있지. 다르에스살람에서 경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는, 조그만 섬이야."

 

 

 

 

4권 끝. 5권으로 계속.

 

 

 

 

 

 

 

 

 

 

*hidden track

 

 

 

 

 

 

 

 

 

 

 

 

 

 

 

꿈은 불현듯 사라졌다.

 

나는 다시 어령의 새카만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꿈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나는 어리둥절하게 나의 손을 들었다.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손에는 틀림없이 피가 묻어 있을 것 같았다. 내 손으로 죽여버려 이제 더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정태의의 피가 거기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어쩌면 소리를 질렀던 것도 같다.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내 귀에만 들렸다.

 

ㅡ정신 차려.

 

ㅡ정신 차려, 일레이 리그로우.

 

나는 심장 위의 살갗을 쥐어뜯으며 속삭였다.

 

마치, 그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내가 어령에 들어오게된 이유, 꿈처럼 흐릿하게 기억하는 현실, 나도 모르는사이에 순간적인 분노가 이끄는 대로 누군가를 죽여버린 그것과, 그 꿈은 같았다.

 

현실에서 나는 꿈인 듯이 두 사람을 죽였다.

 

꿈에서 나는 현실인 듯이 그를 죽였다. 둘 모두, 나는 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사라진 뒤로 나는 내 감저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ㅡ정신 차려, 일레이. 정신 차려, 일레이 리그로우.

 

나는 몇 번이고 고함을 질렀다. 비명 같은 고함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나는 그래야만 했다. 이 몽롱한 혼돈 속에서 깨어나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로, 나는 그를 죽이고 말 터였다. 그런 뒤 한 발 늦게 다가온 현실 속에서,나는 꿈에서 느꼈던 그 몸서리쳐지는 상실감을 느끼게될 거다.

 

나는 몸 속에서 비명처럼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일레이.

 

더 이상은 그 분노가 무엇인지 생각지 않았다. 분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분노하고 있었고,또한 그 분노를 나는 스스로 다스려야 했다.

 

그런 연후에 나는 그를 다시 내 손으로 끌어와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를 두 번 잃게 될터였다. 그것만이 지금의 내겐 중요한 사실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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