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6
[유우지]passion 6권
19. 천국에 가까운 곳
…ㅡ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외무장관은 반다르 알파드 왕자입니다. 현명한 사람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데, 그래서 그 뒤로 라쉬드 왕자와 알리 왕자가 외교주도권을 두고 암투를벌이고 있지요. 알 파이살 왕자는 알리의 동생으로동복에서 난, 매우 사이좋은 형제입니다. 그는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빠져 사업체를 세웠는데…ㅡ.
어디에나 있는 지저분한 이야기였다.
힘이 있는 곳에는 벌레가 꼬인다. 거기에 돈이 있으면 더하다. 그 벌레들이 늘어나게 되면 양상은 더더욱 더럽고 복잡해졌다.
벌레는 타인의 눈에 띄는 외부보다는 오히려 내부에 많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그 내부는 상상도 못하도록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터였다.
"어이구……, 참 바람 잘 날이 없구나, 그쪽 동네는."
정태의는 건자두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말랑하게 말린 과일은 몹시 달았다. 뜨거운 열사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입에 꿀이 될 그 과일을 손끝으로 조물거리면서, 정태의는 말을 이었다.
"자기가 원해서 그 난장판에 끼어든다면 무슨 말을하겠냐만, 괜히 상관도 없는 엉뚱한 사람을 끼워넣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나는."
정태의는 아까부터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투덜거림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눈앞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책장을 넘기느라 정태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고ㅡ그럼에도 정태의가 뭔가중요한 말을 하면 분명히 다 듣고 있었다는 듯이 평연하게 대답할 거다ㅡ,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화병을 끌어안고 화병의 물을 갈기 위해 회랑을 지나가고 있는 저 베일 쓴 하얀 옷 아가씨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말이 통했다 하더라도 아마 이야기를 나눌수는 없었을 거다. 이 건축물 안쪽의 공간은 탄자니아령인 세링게가 아닌 아랍이었으니까.
일 때문에 이란에 갔다가 길을 잃어서 지나가던 여자에게 멋모르고 말을 걸었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예전에 고교 동창이 이야기했던 걸 떠올리며, 정태의는 아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애초에 정태의는 요 근래 한동안, 남자라면 또 모를까 여자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여자의 아름다움'이라는 데에 감탄할 수는 있을지언정 여자는 그에게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정태의의 순수한 마음을, 회랑 모퉁이에 칼을 차고 서서 이쪽을 감시하듯이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는 아랍 남자가 알아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맥주만 있으면 딱인데."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회랑 가운데에 아담하게 돌이 깔린 중정의 바깥쪽,회랑 끝에 난 조그만 쪽문으로 나오면 단아한 정원이 있었다. 나무나 수풀따위가 무성하게 드리운 그곳은 식물원을 축소해서 옮겨온 듯, 갖가지 고운 꽃들이며 풀들이 살랑이고 있었다.
그 안쪽에 있는 고무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정재의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사박거리는 잔디 그늘에 누워, 정태의는 아까 그 하얀 옷 아가씨가 정재의의 옆에 놓아두고 간 과일바구니를 끌어당겨 주전부리를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쩌면 가장 천국에 가까운 곳이란 이런 곳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번잡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고요하고 조용한 공간에, 바람 스치는 소리, 수풀이나부끼는 소리, 수풀 위에서 새가 때로 우짖거나 날갯짓을 하는 소리, 아득하게 멀리서 하얀 옷 소녀들이 웃음을 웃는 소리, 그런 것들이 들려올뿐이었다.
눈앞에는 빠져들 듯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그리고 옆에는 가장 사랑하는 혈육이 있었다. 간간이 책장을 넘기는 익숙한 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힌다.
"어쩐지 우스운걸. 저 지저분한 난장판에 한쪽 발을 담근 사람의 별저가 이렇게나 천국에가깝다니."
정태의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정재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왜 계속 이곳에 갇혀 있었어. 다른 사람들이 다 찾고 있는데. 설령 가둬둔다 해도,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도 있었을 것 아냐.'
정태의가 그에게 묻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었다.
'편하거든.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재의의 대답에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하긴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 가둬둔 귀한 몸이니 귀하게 대접해주나 보다, 싶었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따로 거처를 주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고 생활하는 공간을 둘러봐도, 험하게 다룬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아닌 듯하면서도 최대한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도록 곳곳에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은 보였다.
'집주인에게 인사는 안 해도 돼? 그래도 남의 집에막 온 셈인데, 나.'
형을 납치해다 가운 범인을 만나서 '안녕하세요, 신세지겠습니다.'라고 인사할 걸 생각하면 그것도 웃겼지만, 인사를 떠나서 일단 그 얼굴은 좀 봐둘 만도 하겠다.
그러나 정재의는 고개를 저었다.
'나흘 전에 잠시 본국에 돌아갔어.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하는 사람이라서 한 달에 한 번은 나가거든. 보통 일주일쯤은 있다가 오니까 한 사나흘은 더있어야 할 걸. 게다가…ㅡ.'
정재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을 멈추었다. 잠시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마주쳐서 별로 좋을 건 없을 거야.'
'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나를 여기에 데려왔는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적어도 그 일은 너를 비롯한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거지. 즉…….'
'……. 나도 가둬두거나, 혹은 나를 고문이라도 해서 누가 알고 있는지 볼게 하거나, 아님 둘 다일 거라고?'
'그럴 가능성은 있지.'
'그럼 어떡해.'
'그 남자가 돌아오기 전에 너는 여기서 나가는 게 나을걸.'
'형은?'
정태의가 묻자 정재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고 이내 정태의는 깨달았다. 정재의는 갇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 부드럽고 고요한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스스로의 의지로 머무르고 있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럼 나 혼자 돌아가야지 뭐. 형 얼굴은봤으니까.'
혼자 돌아가면 숙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할 테지만, 애초에 정태의는 정재의를 데리고 그들에게 가기 위해 그를 찾아나선 게 아니었다. 단순히 그 자신이 그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 안녕, 형.'하고 나가려던 정태의의 걸음은 도중에 막히고 말았다.
이 별채ㅡ드넓은 별저의 한쪽 구석에 따로 위치해 있는 집채라고 한다ㅡ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아예 별저 밖은커녕, 별저 안의 본저나 여타 다른 건물로도 넘어갈 수 없었다. 이 별채는 통째로 격리되어 있었다.
외부로 이어지는 문은 서쪽 회랑 끝, 딱 하나였는데그 앞에는 큼직한 칼을 찬 남자가 지키고 서있었다.딱 보기에도 손에 익도록 쓴 흔적이 있는 그 칼을 흘끔 내려다본 정태의는 곧 그 문지기 남자를 기억해냈다. 어젯밤 정태의의 명치를 후려갈겼던 그 아랍인이다.
'나가고 싶은데요. ……나 좀 내보내 주지.'
정태의가 말했지만 남자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못 알아듣나 싶어 그냥 옆으로 비껴서며 문을 열려고 했지만, 정태의가 문고리를 잡으려 하자 남자가 칼을 집째로 들어 정태의의 손목을 두드리며 가로막았다.
하릴없이 다시 정재의에게 돌아간 정태의가 사정을말하자 정재의는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하는 투다.
'굳이 나가려고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별채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 같긴 하더라. 그래도 야시장 같은 데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면 선선히 허락해주던데. 차도르로 온몸을 꼭꼭 여미게 하긴 하지만.'
'그런데 나는 왜 가로막아. 야시장에 갈 시간이 아니라서? 차도르를 안 입어서?'
'아마 너에 대해서 이미 보고를 했고 거기에 뭔가 지시가 내려온 거겠지. ……그 야시장은 일주일에한 번 열려, 태이야. 그리고 차도르는, 네게는 좀 안어울릴 것 같다.'
어차피 온통 다 가리는 차도르에 어울리고 말고가 어디 있느냐든가, 형한테도 안 어울린다든가, 그보다 애초에 차도르는 남자가 쓰라고 만들어놓은 물건이 아니라든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여럿있었지만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그럼. 나도 갇힌 거야? 나 못 나가?'
'당장은 그런 모양이네. 며칠 있다 라만이 돌아오면이야기해봐. 의외로 흔쾌히 보내줄지도 모르지.'
'마주쳐서 좋을 것 없다며.'
'이 상황에서야 어쩔 수 없지.'
'그랬다가 나마저 갇히거나, 고문이라도 당하거나 하면 어쩌라고.'
'음…ㅡ뭔가 수가 생기겠지.'
정재의는 어디까지나 평연했다. 정태의는 그런 형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팔자 사나운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 여차하면그 아랍인을 인질 삼아서 나가는 방법도 생각했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라는 그 아랍인은, 듣기로는건강이 썩 좋지 않다고 들었다. 병약한 탓에 대체로별저에서 지내면서 거의 대외적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정태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는 탓에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사람을 두고 인질로 잡을 생각을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비겁하고 치사하다.
하지만 내 한 목숨 사는 게 먼저지.
정태의는 하는 수 없이 정재의가 머무르는 별채에눌러 앉았다.
그렇게 한 나절.
정태의는 정재의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곳에서 굳이 나가고 싶다고 생각지 않는 그 마음을 딱 한 나절 지내보고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은 천국과 같았다. 더욱이 정재의에게는 아마 더욱 잘 맞는 공간일 것이다.
원래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잘 나가지 않고 홀로 조용하게 있는걸 좋아하는 정재의라면 이곳은 마치 그에게 딱 맞춘 듯이 잘 맞는 곳이었다.
정태의는 그 새파란 하늘이 눈이 부셔 가늘게 뜬 눈으로, 문득 정재의를 보았다.
그가 머무르는 곳은 이 별채뿐이다. 그러나 이 탁 트인 감옥은 그에게는 감옥이 아니다. 평온하게 머무를 수 있는 이곳에서, 그는 매일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한가로이 책을 읽거나, 명상을하거나, 혹은 보다 복잡한 어떠한 생각에 잠겨.
정태의는 웃었다. 이 남자는 어느 곳에 있거나 불운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다행스러웠다. 정태의가어디에 있건, 정재의의 소식을 얼마나 오랫동안 못듣건, 그는 괜찮았다.
"그런데 형."
정태의는 문득 입을 열었다.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어쩌면 하지 않아도 될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형에게도, 정태의는 자신이 어떠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알려야 했다. 탓할 뜻은 없이, 그저 형이 알고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태의는 다시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가느스름하게눈을 뜬다.
책장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으나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하고.
"형을 가둬둔 그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뭐야."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 대신 시선이다가왔다. 하늘만 뚫어져라 노려보는 정태의의 얼굴 위를 정재의의 시선이 더듬었다.
어쩌면 그대로 계속 대답이 묻힐 수도 있을 것 같아, 정태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혀끝에서, 조용한 말이 나온다.
"무기 만들어 달래?"
"……. 알고 있었어?"
탁, 들릴 듯 말 듯 가만히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정재의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침묵했다.
정태의는 정재의가 언제나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지금쯤 정재의는, 정태의가 정재의의 행방을 쫓아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왔을 사람이나, 그 사람에게서 들었을 만한 말들을 떠올리고 있을 거다.
그리고 아마도 정태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들까지 생각하고 있겠지.
"UNHRDO의 지하에 있는 거 봤어. 형이 마지막으로 만든 거라던데. 아름답더라."
"그건 너야."
정태의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거꾸로 보이는 정재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재의는담담하게 말했다.
"삼촌이 이름은 말해주지 않았어? 그건 Tay야.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설계식은 얼마든지 변형시켜서 다른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내가 가장 공들여서 만들었어. 마지막으로."
정태의는 응……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천천히일어나 앉았다. 과일바구니를 더듬어 손에 잡히는대로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이건 살구구나. 이 근처에선 나지 않을 텐데 잘도 구해다 놨네.
"……. 숨길 것 없었는데. 일부러 그런 거였다면, 굳이 나한테 비밀로 할 건 없었어."
정태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정재의가 자신에게 뭔가 꺼리거나 떳떳하지 못한 기분을 품고 있다면, 그건 정태의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정재의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마지막까지 그를 감싸줄 터였다. 정재의가 그러할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관계든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정태의 역시 정재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찾아보면 몇 가지 있었다.
그러니 그 역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괜찮다.더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가 자신에게 미안해한다면, 그것은 정태의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사실 나한테 미안해하거나 거리껴할 일도 아니고……."
그가 무기를 만들어내는 걸 정태의가 탐탁지 않게생각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정태의에게 미안해할 일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고 정태의는 그렇기때문에, 그가 무기를 만드는 게 싫었다.
정태의는 정재의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더는 만들지 않아.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리고 또 무슨 말을 들었어, 삼촌에게?"
정재의가 조용히 말했다. 짐작은 할 수 있다 해도 확신은 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이 묻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때 깨달았다. 정재의가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기 개발 건보다는 차라리,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묻는지 정태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운 좋은 천재. 그 논라운 운의 근원. 그러나 아직 정태의는 이해할 수 없는ㅡ아마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ㅡ그 행운의 뿌리가, 과연 그대로 조용히 흙 속에묻혀 있는지 혹은 이미 누군가 파헤치고 말았는지.
"내가."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자 어쩐지 거북해져서 정태의는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아마도 이즈음에서 이미 정재의는 정태의가 할 말을 깨달았을 터였다.정태의는 조금 더 침묵하다가 뒷말을 이었다.
"내가 형에게 행운을 준다고. 그런 말을 들었어. 삼촌에게서는 아니었지만."
말을 마친 뒤, 정태의는 과일바구니를 향하고 있던시선을 들었다. 언제나와 같이 고요한 형의 얼굴을기대하며. 거기에는 아주 희미하게 흐려진, 그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 그럼 누구에게?"
"아. 일레이가…ㅡ,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인데, 형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걸."
정태의는 정재의의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얼른 말을 바꾸려 했다. 정재의는 오래 생각지 않고곧 그 이름을 떠올린 눈치였다.
"그렇구나. T&R의……."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문득 이름을 입에 올린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일레이 리그로우.
지금은 자신을 찾고 있을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멋대로 나가 행적이 묘연해졌다며, 몹시 화를 내면서.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그가 정태의의 행적을 짐작해내기란 쉬운 일이었다. 정태의와 같은 동양인은 이 세링게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정재의처럼 차도르로 감싸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 모습그대로 돌아다닌 정태의를 본 게 기억난다는 세링게인을 찾아보면 한 트럭은 나올 거다.
그렇다면, 이리로 찾으러 올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설령 정태의가 정재의와 같이 아랍인의 별저에 있다는 사실까지 짚어낸다 하더라도, 찾으러 올 수는 없었다. 상황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정재의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세링게 동남부, 부호들의 별저가 늘어서 있는 구역안에서도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라는 자의 별저에있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그들은 정재의를 찾아내지 못했다.
중동 가운데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과 부호들의 별저가 모여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금세 알아내었지만, 하나의 거대한 담장 안에서 수많은 본별채들로 나뉘어 있는 그 건물들 가운데 어느 곳에 그가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용병이라도 고용해서 복면 쓰고 무력으로 집집마다 들어가면 안 되냐고, 정태의가 말했던 적이 있다.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농담에도 부정적인 대답이돌아왔다.
왕족이 머무르는 별저에는 당연히 무장경호가 숱하게 붙어 있는데,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지 않는 한 바깥에서 안쪽으로 뚫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용병을 고용한다고 해도, 어지간한 솜씨 좋은 자들이 아니면 입구에서 상당이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별채까지 뚫고 들어가기는 힘들다고.
"그러고 보니 나도 형이랑 같이 갇혀서……같이 행방이 묘연해진 셈이네."
정태의는 그제야 깨달은 듯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야, 나중에 돌아가면 그놈이 사람을아주 잡아먹겠다는 걱정을 넘어서, 어쩌면 심각한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의 구조를 바랄 수 없으면 안에서 나가는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갇힌 실정이다.
어떻게 한다, 정태의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재수가 없어서 만에 하나 일레이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태의가 냉큼 도망친 거라고 여기기라도 하면ㅡ심지어 어젯밤 야시장에 신루와 같이 갔던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한 트럭 추려낼 수 있을 터였다ㅡ이번에야말로 정말로,걸리면 죽을지도 몰랐다.
아냐, 아냐, 난 신루랑 같이 간 게 아니라고, 입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문득 조용한 시선을 느끼고 손을 멈추었다. 정재의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머쓱하게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뭣 때문에 그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지.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길다. 게다가 남자간의 치정으로 목숨마저 위험한 상태에 얽혀 있다는 말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를테면 이런점이다.정태의가 정재의에게 굳이 하고 싶지는 않은 몇 가지 일들은.)
그러나 정재의는 그런 것은 묻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의야. 네가 내 길상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ㅡ."
그러나 침묵 끝에 나온 그의 말은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정태의는 처음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남자는 계단 위, 별채의 뒷회랑 위에 서 있었다.
입을 열다가 문득 말을 멈춘 정재의의 시선이 정태의의 어깨너머로 옮겨갔다는 것을 깨닫고, 정태의는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낯선 얼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스치면 모래먼지가 묻어나올 듯한, 모랫빛이 도는 하얀 옷을 걸친 그 아랍 남자는 다섯 단의 계단 아래 안뜰에 앉아 있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황급하게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였다. 아마도 저 아랍남자는 그 남자가 옆에 붙어서 따라오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서슴없이 걸어들어 온 모양이었다.
가뭇하게 각이 진 얼굴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 속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이 차갑게 닫힌 새카만 눈만이, 그가 어린 애송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낮고 굵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정태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을 알아들은 그 옆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시 무어라 했다.
정태의를 바라보던 무표정하고 새카만 눈이 이윽고 정태의의 뒤로 넘어갔다. 아마도 정재의를 바라볼그 시선은 잠시 거기에 멎었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느리고 묵직한그 걸음이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공기가 무겁게얼어붙는 듯한 압막감이 함께 다가온다.
정태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약간 고개를 돌려 정재의에게 물었다.
"누구야, 이 사람은."
정태의가 속삭이자 남자는 약간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쩌면 정태의가 말한, 그 남자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시중꾼 같지는 않았다. 아니, 이런 남자가 시중꾼일리는 없다. 이 남자가 시중꾼이라면 틀림없이 얼마가지 않아 그 주인 되는 사람은 목을 베이고 그 자리를 찬탈당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감시나 경호일까.
흘끔 남자를 살폈지만 칼이나 흉기가 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옷자락 아래에 총 따위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지.
문득 정태의는 약간 맥락에서 동떨어진 생각을 했다.
확실히 이런 위압적인 남자가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다면, 여기에서 도망칠 생각도 들지 않을지도모르겠다. 당장 정태의만 해도 이런 남자가 감시를서고 있다면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는 데에 지금보다 배 이상은 되는 고뇌를 할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곧 돌아왔다.
정태의에게 대답을 하면서 돌아온 답이 아니었다.정재의가 그 남자를 불렀기 때문에, 정태의는 그가누군지 알 수 있었다.
"라만. 일찍 오셨군요."
의외로이 말하는ㅡ그러나 아마 다른 사람들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평연하다고 생각할 말투였다ㅡ정재의의 말에, 정태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알았다.
라만.
놀란 얼굴로 잠시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던 정태의는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계단에서 다 내려와 뜰로 걸음을 내디딘 남자는 그들에게서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추었다.
"이 남자가 라…ㅡ."
"내가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입니다. 내 별저는 마음에 드시는 지?"
정태의가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귀에 설게 들리는 영어로 말했다. 영국식의 발음으로 이르는 그 굵은 저음은 조금 전 저 위에 선 감시에게 말을 할 때와는 달리 약간 부드러운 빛을 담고 있었다. 단순히 언어의 차이는 아니었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다. 선뜩함마저 느껴지도록 냉정했던 그 얼굴에는 담담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마치 다른 사람 같다.
"……. 정태의라고 합니다. 아주 훌륭한 집이군요."
과연 어느 쪽이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일까. 그 싸늘하고 엄준하던 얼굴과, 집에 든 손님을 환영하며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얼굴.
"정태의. 아아, 동생인가 보군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남자, 라만은 보기드물게 분명한 발음으로 정태의의 이름을 한 번 되읆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유난히 이르게 오셨군요. 본국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이곳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들었다기에 일을 접어두고 왔지요."
라만은 눈꼬리에 주름을 지으며 정태의에게 시선을주었다. 정태의는 '손님이라기에는 여기에 올 때의기억이 전혀 없는데요'라고 중얼거리면서 흘끔 저뒤에 있는 감시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엊저녁, 저 남자에게 명치를 호되게 얻어맞고 기절한사이에 끌려왔다.
그러나 그런 말을 호소해 봤자, 애초에 정재의를 비슷한 방법으로 끌고 왔을 이 남자가 귓등으로라도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태의는 정재의와 간단한 안부 따위를 주고받는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대체 어떤 놈이야, 이런 남자를 두고 병약하다고 한놈은. 게이블이었나? 게이블이었지? 형이 있는 곳에 대한 실마리를 처음으로 찾아내었다는 그 훌륭한 정보력으로 어떻게 이 남자를 두고 병약하다고 할 수 있지?! …ㅡ아니 또 모른다. 겉으로는 건강해보여도 속병이 있는지도. 그래, 게다가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기도 한다지 않은가.
정태의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도, 여차하면 이 남자를 인질로 잡아 위협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계획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우울하게 생각했다.
정태의가 옆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남자는, 처음에 몇 마디 인사를 건넨 뒤로는 일체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정재의만 직시하면서 몸이 아픈 데는 없는지, 지내는 데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든지, 그런 의례적인 말을 했다. 그러다가 그인사의 연속이기라도 하듯,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을 잇는다.
"제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좀 드셨습니까?"
아주 미묘하게, 조금 더 상냥해진 목소리다. 마치 늑대가 양을 꾀어내려 교묘하게 거짓말을 할 때에 저런 목소리로 말할까 싶은, 낮고 다정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가 어떤 목소리로 말하든 별 감흥이 없는듯 정재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실망한눈치도 보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 종류, 한 가지면 됩니다.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시중에 돌고 있는 대전차포보다 아주 약간 더 나은 성능이면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작 무기 자체라기보다는ㅡ물론 무기도 대단히 중요합니다만ㅡ'정재의의 손이 닿은 무기'이니 말입니다."
언제부터 정재의가 유명 무기 브랜드가 됐나 그래, 정태의는 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흘끗 정재의의 시선이 날아왔다. 정태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무기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정재의의 대답이 들렸다.
"제 제의를 받아들여주시기 전에는 이곳에서 나가실 수 없다고 해도 말입니까?"
저건 제의가 아니라 협박이잖아. 형에게 들어먹을 만한 협박은 아니지만.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 위의 새들을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질 나쁜 납치범은 아닌 모양이었다.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한두 평짜리 지하감옥 같은 데에다 정재의를 처박아두고 먹을 것도 변변하게 안 주는 등의 각박한 방법은 쓰지는 않지 않은가.
물론 아무리 훌륭한 환경에 있다 해도 그곳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면 감옥은 감옥이었지만, 정재의라는 인물에 한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충족된다면, 바깥으로 널리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제의를 받아들이시면 이곳에서 곧 풀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뿐 아니라 그의 상응하는 보답도 할겁니다."
라만이 덧붙여 말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정재의는 말 없이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잠시 그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여태 몇 번이나 거듭한 대화인 듯, 라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요. 생각이 바뀌시길 기다려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시면 말씀해주시길."
정재의는 여전히 대답 없이, 고개만 애매하게 끄덕였다.
무기만 하나 만들어내면ㅡ그것도 뭐 그리 복잡하고엄청난 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ㅡ곧바로 여기서 내보내준다, 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훌륭한 상황이라 할 수도 있겠다. 원하는 만큼 이 천국 같은 곳에서 낙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대로 즐기다가, 슬슬 이생활에도 질렸다 싶으면 그제야 적당히 설계도 하나 그려주고 떠나면 되는 거였다. 물론, 더 이상은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저 결심이 꺾인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테지만.
"그러면 여기 동생분 말인데…ㅡ."
이야기를 매듭짓는 듯하던 라만은 문득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그 화제에 불쑥 튀어나온 정태의는 움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ㅡ저요?"
짐짓 환하게 웃어보이며 스스로를 가리킨 정태의는이 남자가 뭣 때문에 자신을 부르나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보고 싶으니 내보내달라고 말해야 한다. 어차피 자신은 정재의처럼 무기를 만들거나 하는 이용 가치도 없으니, 이대로 내보내줘도 될 일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는지?"
라만은 빙긋 웃으면서 물었다. 잘 오셨습니다, 라고하는 것과 다름없이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정태의는 그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내심 곤란한데,라고 생각한다. 저런 웃음에 속을 것 같으면 정태의는 여태까지 살아 있지 못했다. 오로지 눈치와 감 하나로 UNHRDO에서부터 지금껏 무사히 살아남지 않았던가.
"저는 여기가 어딘지 모릅니다만."
정태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라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태의는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뒷말을이었다.
"바헵 거리의 야시장에 갔다가 우연히 형을 만나서쫓아가던 중에 저ㅡ기, 저 분께 맞아서 쓰러진 뒤로기억이 없어요. 그러다가 깨어보니까 이곳에 있더군요."
정태의가 손가락질로 뒤에 선 감시를 가리켰다. 감시는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약간 눈을 크게 뜨긴 했지만 별로 당황하지도 않는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라만은 흘끔 감시를 돌아보며 다시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뭔가 묻는 것 같았다. 그러자감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라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태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요. 바헵 거리의 야시장이라……."
문득 그가 웃었다. 눈꼬리에 잡힌 주름이 좀더 짙어졌다.
"세링게에는 친구분들과 놀러 오셨는지?"
"아…ㅡ. ……아니죠. 형 찾으러 왔죠. 도무지 연락이 안 돼서 말입니다."
정태의는 몇 초쯤 고민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붙어 있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섬 세링게에 우연히 왔다가 거기서 어쩌다 보니 또 우연히 형과 마주쳤지 뭐에요'라고 말해봐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이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이 섬에서 보기 흔치 않은 이 동양인이 어디에 묵고있는지, 누구와 묵고 있는지, 그 동행들은 뭘 하는사람들인지, 알아내는 데에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않을 거다. 아니 어쩌면 벌써 조사서가 작성되어 지금 이 별저의 문을 넘어서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정태의의 동행.
게이블. 그리고 ……일레이.
정태의는 라만이 '누구랑 같이 왔냐'고 묻는다면 당장 솔직하게 대답해 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일레이랑 같이 왔다는 말은 그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정재의의 행적을 찾고 있는 사람은 그냥 둘 수없다며 마찬가지로 잡아가두려고 든다면, 게이블은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일레이만큼은 절대로 걱정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라만은 정태의에게 동행이 누군지를 묻지 않았다. 한동안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되물었을 뿐이다.
"세링게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글쎄요…ㅡ, 저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 정작 찾아낸 건 다른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듣자 하니 그 사람도 상당히 고생을 했다고 하더군요. 바라나시에서 갑자기 행적이 온 데 간 데 없이 끊겼었다고, 오히려 궁금해하던데요. 그렇게나 깔끔하게 행적을 숨기고 끌고가다니, 어떻게 했을까 하고."
라만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을 뿐,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이라는 숲에서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는 사람을 감추는 것이 몇 배나 쉬운 법이지요. 하지만……."
라만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만히 턱을만지작거렸다. 턱에 난 수염을 엄지 끝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순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유리처럼 싸늘한 눈이 마치 심장을 헤집는 것 같다. 감정이 없고 냉정한 눈길은 마치 고깃덩이를 저울에 올려놓은 것처럼, 냉랭하게 뭔가를 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웃었다. 웃었다기보다는 입끝을 비틀어올리는 것에 가까웠다.
"위치가 알려지면 곤란하거든……. 어차피 내가 데리고 있다는 거야 끝까지 비밀로 할 수 없으리란 건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위치만큼은 함부로 드러낼 수가 없단 말이지. 알고 있는 사람은 최소로 남겨두는 게 좋아."
미묘하게 말투가 바뀌었다. 가슴속 깊은 곳부터 얼리는 듯한 그 무감정한 목소리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정태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때.
"태의가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조용하게 말한 사람은 정재의였다.
비장하게 말해야 어울릴 법한 그 말에는, 그러나, 비장함도 긴장감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렇다고 협박을 하거나 애원하는 빛도 아니었다.
그 자체의 사실을 알려주는 담담하고 평온한 목소리였을 뿐이다.
라만은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은 무표정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바라보며 띠었던 부드러운 웃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천천히 정재의를 돌아보았다. 거슬린다는 듯이, 그러나 여전히 정중하게, 묻는다.
"이 남자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했습니까?"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이 잠시 정태의의 얼굴에 닿았다가 어색한 듯 떨어졌다. 정태의는설핏 얼굴을 찡그렸다.
라만이 정태의를 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깐, 표정이 스친 듯싶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혹독한표정이었다.
"이 남자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
라만의 낮은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성큼, 정태의에게 한 걸음 다가선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정태의의 턱을 움켜쥐려 한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약간 낯을찌푸리며 스스로의 목을 문지른다.
요즘 왜 이렇게 목을 노리는 놈들이 많지. 아니, 그래도 한 놈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일이 좀 줄겠구나 싶었는데, 달리 목숨을 노리는 놈이 나타날 줄이야.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해봐야 소용없을 말을중얼거렸다.
"안 돼요.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되거든요."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내 멋대로 행적을 감춘 끝에죽기라도 했다간 난 일레이한테 죽는다고, 정태의는 미묘하게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을 하며 혀를찼다.
라만은 굳이 뒤를 쫓아 정태의를 잡을 생각은 없는듯했다. 걸음을 멈추고 손도 거둔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정재의에게 몸을 돌렸다.어느새 그는 조금 전의 그 웃음 띤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지요. 그에게는 손대지 않겠습니다. …ㅡ하지만 동생이 죽으면 자신도 목숨을끊겠다고 할 만큼 우에가 좋으신줄은 몰랐습니다."
"우애가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재의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정태의를 보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라 ,하고 머뭇머뭇 말하는 형에게 정태의는 알겠다는 듯 손을 끄덕여 보였다.
"태의는, ……제 길상천이기 때문에."
정재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맺었다. 말꼬리에 희미하게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길상천."
라만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말뜻을 몰라서되풀이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의아한 빛은 없었다.
"당신의 동생이 당신에게 행운을 준다는 말은 들은바 있지만, 그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게서 받은 행운이니까요."
정재의의 말에 라만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조금불쾌한 듯도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태의는 문득 그의 얼굴 위로 뭔가 기묘한 빛이 떠오르는 걸 보았다. 놀람과는 조금 다르다. 뭔가 중요한 것을 기억해낸 듯한, 혹은깨달은 듯한, 어쩌면 조용한 경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그 표정을, 정태의는 의아하게 바라본다.
"…ㅡ?"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한 저 아랍 남자의 얼어붙은표정과,그 앞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정재의.마치 두 사람이 짜고서 정태의에게 뭔가 숨기기라도 하는 것 같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납득할 만한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계속해서 침묵만 이어질 것 같았다. 이 기묘한 분위기도 어딘지 꺼림칙했고 묘하게 씁쓸한 기분도 들어, 두어 번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있으려니 참 쑥스럽달까 거북하달까……, 그렇게 훌륭하게 말씀해 주시니까 고맙긴 한데……."
정태의는 멋쩍은 얼굴을 감추지도 않고중얼거렸다.
길상천. 정재의의 길상천. 여태 몇 번이나 들은 말이다. 이유도 모른 채, 진위도 모른 채 정태의는 주위에서 부르는 대로 그 이름을 기억했다.
그러나 정작 정재의 본인에게 그 말을 들으니 멋쩍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그에게 엄청난 은혜라도 베풀어 주는 듯하지 않은가.
그러나 정태의는 뒷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말을 흐렸다.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던 탓이다.
라만은 표정을 지운 채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유리 같은 눈은 정태의의 구석구석, 머릿속까지파헤쳐버릴 듯 쳐다보다가, 이윽고 돌아섰다.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걸음을 돌렸다. 인사도 없이 일별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회랑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버리는 그의 뒤를 따라, 뒤에시립하고 있던 감시도 함께 물러갔다.
안뜰에는 정태의와 정재의만 남았다.
그가 이곳에 들이닥치기 전과 무엇 하나 변한 바 없었다. 여전히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했고 푸른 하늘은 눈이 부셨다.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도, 바람이 불 때마다 짙고 옅게 향기를 흩뿌리는꽃도, 그대로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그들은 처음으로 둘만남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까와 같지 않았다. 고즈넉한 고요가 아니었다. 무겁고 숨막히는 침묵이었다.
정태의는 가만히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방에서 회랑으로, 중정으로, 안뜰로, 다니는 곳마다 맨발로 거니는 정재의를 따라 정태의도 발벗고 다녔다.
발바닥이 상할 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편평하고 매끈한 돌바닥이 깔린 중정도, 회랑도, 보드라운러그가 깔려 있는 실내도, 심지어는 폭신한 흙 위로수풀이 자라 있는 안뜰조차도 발을 다치게 할 만한것이라곤 무엇도 없었다. 거기까지도 세심하게 손을 썼는지, 풀 아래 숨어 있는 조그만 돌멩이 하나조차 없다.
발가락을 까닥였다. 풀 아래에서 흙이 보슬보슬 발가락을 간질였다. 그 흙의 감촉을 맛보다가, 정태의는 천천히 돌아섰다.
정태의의 뒤에서, 정재의는 아까 앉았던 그 자리에앉아 다시 책을 펼치고 있었다.
"……."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졌다. 마음속을 단단히 묶고있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야. 나만 무겁고 숨막혔어."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정재의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수풀 위에, 옷에 풀물이 드는 것도 아랑곳 않고 주저앉는다. 무릎을 끌어안고서 거기에 한쪽 팔을 걸친채, 나른하게 정재의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머무는 것처럼 거기에 앉아 있는 형의 모습을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정말 내가 길상천이야?"
책장을 훑던 정재의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정재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랑, 책장이 한 장 넘어간다.
"어째서."
이번에는 시선이 다가오지 않았다. 책에 집중해서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태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 머지않아 대답이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정재의는 입을 열었다.
"그냥."
"……."
딱 한 마디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태의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서 이봐, 형니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시 묵묵부답으로 돌아간 정재의에게, 정태의는 이번에는 얌전히 기다렸다간 평생 가도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예전에 주워들었던 말들을 던져보았다.
"어릴 때 내가 아팠을 때마다 형도 덩달아 아파서?"
"그건 근거는 될 수 있겠지만 이유는 아니지."
"그럼 그 이유가 뭐야. 내가 아프면 형도 아프기 때문에 내가 형에게 행운을 주는 거야, 이건 너무 비과학적이잖아."
"원래 과학이란 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의 공통된 결과의 집합물에 지나지 않아."
"……. 아니 내 말은……."
정태의는 혀를 찼다.
이 형은 말을 못 달아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태의가 한 마디를 던지면 거기에서,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부분까지 짚어내는 게 이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태의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웅크리고 앉은 그대로 고개만 들어 하늘을 본다. 해는 머리 위 가장 높다란 곳을 지나 서서히 내려가기시작하고 있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날은 저물테고, 오늘 하루라는 날은 어둠속으로 잠겨들게 된다. 매일이 그렇듯이.
대단한 건 없었다. 바뀔 것도 없었다. 이 세상엔 결국 대단한 문제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정태의가 길강천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자신으로인해 불행이 온다면 몰라도 행운이 온다면, 그걸로좋았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가 말하기 싫어한다면, 억지로 끌어내어서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정태의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흠, 한숨을 내쉬며 빙긋 웃는다.
"태의 너는 눈치가 빠르지. 어릴 적부터 그랬어. 감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때, 정재의가 입을 열었다. 책갈피를 끼워넣고 책을 덮으면서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다. 정태의는 빙긋 웃던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사람이 기껏 안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나도 그래."
정재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도 보는 듯이, 천천히 정태의를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샅샅이. 그 안에서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정태의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시선을 떨어뜨려 무릎에 걸친 자신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붙어 있었던, 늘 함께 있었던 손인데 유난히 낯설어 보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정재의만큼이나 낯설어 보인다. 어쩌면 그의 눈에도 자신이 지금 그렇게 보이는 걸까.
정태의는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정재의였다. 정태의가 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정태의다. 그는 웃었다.
"이유가 너무 빈약하잖아……."
정재의도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할 말은 다 마쳤다는 듯, 그는 일어섰다. 정태의의 앞을 스쳐 계단을 올라가는 느리고 가벼운 걸음을,정태의도 훌쩍 일어서 따라갔다.
하얗고 반드르한 돌 위에 흙이 묻었다. 그 흔적을 따라 걸으면서 정태의는 다섯 걸음 앞에서 가는 정재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언제나와 같이 바르고 곧았다. 그의 성정이 그런 것처럼.
* * *
이곳은 완벽하게 바깥과 차단되어 있었다.
네 회랑 각각의 가운데에 웅장한 문이 하나씩, 그리고 회랑이 맞닿은 모서리에 조그만 쪽문이 하나씩,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음에도 이 별채는 완벽하게 격리되어 하나로만 존재했다.
네 개의 웅장한 문은 분명 장식은 아닐 텐데도 굳게잠겨 있었다.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커다란 철문은, 잠겨 있지 않더라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회랑 끝의 쪽문 네 곳은 각각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실내로 이어지는 문과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실내로 이어지는 문은 침실이나 서재 등, 건물의 내부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은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잠겨 있었다.
그 하나, 안뜰로 이어지는 문으로는 나간다 한들 물론 온전한 바깥은 아니었다. 높다란 담장으로 구분되었으나 폐쇄적인 느낌을 받지는 않을 만치 널찍한 안뜰은 막다른 공간이었다.
나머지 세 개의 문이ㅡ각각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ㅡ이 별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문일듯한데, 두 군데는 잠겨 있었다. 잠겨 있을 뿐 아니라 문 틈새에 회반죽이 빈틈없이 발려, 아예 문 자체가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 유일하게 남은 출입구. 그곳에, 그 아랍 남자가 서 있었다. 정재의를 감시하며 문 앞을 지킨 남자다.
정태의는 중정에 네모나게 파인 연못ㅡ그 용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풀인가 했지만 허벅지까지밖에오지 않는 그 물에서 헤엄을 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목욕탕이라고 생각하기엔 물이 너무 찬데다가 그 위치가 중정 한가운데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ㅡ가에 엎드려 물을 손으로 찰랑거리면서 으음, 하고 신음했다.
곤란했다. 머릿속에 그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 벌써 며칠째, 정태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동안 정태의는 정재의와 함께 이 안에 갇혀 있었다. 정재의는 벌써 몇 달이 넘도록 그렇게 지내왔듯이, 평연하게 물이 고인 듯한 삶을 영위했다.
사실 정태의도 그렇게 못할 건 없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정재의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고싶었다.
실상 그는 지쳐 있었다.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쉬이며 지냈던 날이 너무도 멀었다. 시간과 상황에 쫓겨다녔던 몸도, 거기에 혹사당했던 정신도, 이 고요한삶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놈이 무섭단 말이야……."
정태의는 엎드린 채 팔에 고개를 묻었다. 찰랑, 물속에 팔꿈치까지 담긴 팔이 서늘했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그는 지금 바깥에서 뭘 하고 있을까. 일단 그의 기분이 아주 대단히 안 좋으리라는 사실은 내기를 해도 좋았다. 그러나 기분이 안 좋은 정도에 그치지 않을 인간이니 문제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이 되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불안했다.
"……."
정태의는 찰박, 찰박,손바닥으로 물 표면을 때렸다.수면 저 위에 두어 송이 떠 있던 커다랗게 빨간 꽃잎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일레이 ……."
가만히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어보았다.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게, 바람 소리처럼.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곳에 있으면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외부에서는 이곳을 건드릴 수 없다. T&R이나 UNHRDO의 입김이 닿을 수도 없었다. 그들이 자칫손을 대려고 하면 이곳의 주인은 정재의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섣불리 손을 뻗을 수도 없다.
이제 정재의와 같은 배를 탄 셈이 된 정태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으면 그 집요한 추적도, 끊임없는 광기도,위협도, 피할 수 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다소 부자유스럽겠지만, 그 정도야 뭐 어떨까. 그 소름끼치고 무서운 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잘 된 거지. 어쩌면 횡재했다고 아주 기뻐하면서 희희낙낙 여기서 지내도 좋았을 거야.……내가 정신분열만 아니었다면."
정태의는 조금 드는 듯하던 고개를 다시 풀썩 숙여버렸다. 갑자기 귓불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슬금슬금, 엎드린 채 몸을 앞으로 밀어 머리를 그대로 물속에 담가버렸다. 보골보골, 입에서 새어나오는 기포가 뺨을 간지럽히며 수면 위로 올라갔다.
어떡하냐. 이건 말도 안 돼. 기껏 그놈에게서 (임시방편적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왜 다시 그리로 돌아갈 궁리를 하느냔 말이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정태의.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놈은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놈 또 달아났네',이러고 그냥 혀만 몇 번 찰지도 모르잖아.
……. ……. ……. 그럴 리 없지.
그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레이는, 본인이 정태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있다고 여기고 있을까.
"……푸합!"
정태의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더 이상은 숨을 참을수 없었다. 물에 흠뻑 젖은 머리에서 물이 줄줄 타고 흘러내렸다. 목과 옷이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면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정태의는, 그제서야 자신의 두어 걸음 옆에 서 있는발을 발견했다.
일순 이질적인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물끄러미 자신의 발을 보았다. 다 드러난 벗은 발이었다. 두어 걸음 앞에 낯선 발이 보였다. 그는 가죽으로 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쩐지 드러낸 맨발과 신발 안에감추어진 발이 너무도 선연히 달라보였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낮은익으나 친근하지는 않은 얼굴이다.
별채에 올 때면 으레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라는 긴 이름의 그 남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아…ㅡ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정태의가 머리의 물기를 쥐어짜며 말을 붙였다. 라만은 조금 전부터, 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물끄러미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별채에 온 건 알고 있었다. 아까 회랑을 지나 서재로 가는 걸 봤다. 낮 동안 정재의가 주로 있는곳은 서재 아니면 안뜰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서재로 먼저 갔다가 거기에 정재의가 없으면 그 다음에야 안뜰로 나가곤 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빼먹지 않고 별채를 찾아와 정재의를 만나보곤 했다. 그렇다고 딱히 오래 머무르거나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늘주요 용건은 하나였다.
오늘은 내 제의를 수락할 마음이 들었는지.
수락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수락한다면 이곳에서 내보내줄 것은 물론, 그에 상응하고도 남는 충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말들에 대한 정재의의 대답도 늘 한결 같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정재의가 이곳에 갇힌 뒤로줄곧 그 문답이 거듭된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라만은 새삼스럽게 실망하거나 화내는 기색도 보이지않고, 정재의가 거절하면 그러냐면서,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곤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서재로 들어가면서 정재의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여느 때와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인사말을 꺼내는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서, 정태의는 그쪽에서 관심을 돌려 중정의 연못 옆에 드러누웠던 것이다. 정태의가 뒹굴거리면서 가만히 회랑의 구조를 짚어보고 물에 머리를 담그기도 하며노는 사이에 오늘의 이야기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도 없이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만을 마주보며, 흠뻑 젖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었다.
연못에 머리 담가서 화났나. 설마 종교적으로 뭔가의미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정태의는 짐짓 웃어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어째 표정이 무서운데……, 설마 제가 여기 머리 담그고 있는 동안, 그대로 머리를 움켜쥐어서 익사라도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도 하신 거 아니에요?"
정태의가 농담을 하며 웃자 라만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하하,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정재의의 동생이군요. 감이 좋은 게, 닮았어요."
"……."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농담에는 농담인 걸까. 아니면 설마 진담인가.
정태의는 미심쩍게 입맛을 다시면서 흰눈으로 그를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담이니 진담이니 하는 말도 없이 화제를 바꾸었다.
"이곳은 어때요, 지내기 괜찮습니까."
"아…ㅡ바깥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좀 답답하긴 한데, 괜찮아요. 내부는 아주 쾌적한데요."
"그것 다행이군요."
라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얼마 전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정태의를 죽이려 들었던 그 남자가 이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바로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에게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면서, 이중인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며칠 짧게 짧게 그를 겪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곳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가급적 대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사악하다거나 야비하다는 뜻을 떠나, 정태의와는 도무지 맞지 않을 성격처럼 느껴졌다.
사실 사람이 사악하거나 야비하거나, 어쨌든 인간성이 개판인걸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을정태의는 이미 하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남자와도성격이 잘 맞는 건 결코 아니었다. 누가 '너희는 성격이 참 잘 맞는구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을 부욱 찢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 라만이라는 남자는가까이에 있으면 불쾌감과 비슷하게 마음이 언짢아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성격이 이상한 면모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의미로 찬탄할 만한 인간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미묘하게 이 남자는 껄끄럽다. 그래, 그것은 불쾌감과 몹시 닮았다.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말을 건 것이 그저 형식적인 인사 때문이었는지 곧 걸음을 돌릴 눈치를 보이는 그를 얼른 붙잡았다.
"아, 그런데."
그러나 붙잡은 직후 후회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움켜쥐고 말았는데, 그의 얼음처럼 까만 눈이그 손을 흘끔 쳐다보았다. 얼른 손을 놓자 그는 말없이 소매를 한 번 털어내며, 목소리만큼은 여전히부드럽게 대답한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여기서 나가고 싶습니다만."
씨도 안 먹힐 거라고 뻔히 알면서도, 정태의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라만이, 거절당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매일같이 정재의에게 가서 무기를 만들어달라고 청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지도 몰랐다.
라만은 정태의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다.
"나가고 싶다?"
"예. 저는…ㅡ바깥에, 아직 맺음을 짖지 못하고 남겨둔 일이 있거든요."
"바깥이라. 혹여 그 맺음 짖지 못하고 남겨둔 일이라는 건 T&R의 일레이 리그로우와, 링훠렁의 아들링신루와 관계가 있습니까?"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설핏, 입매가 일그러졌지만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정태의가 어떠한 경로로 여기에왔는지 모두 거슬러 조사를 마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
정태의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다가 픽 웃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제 저녁 모스크에서 이곳의 고국 친구들과 만나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거기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라만은 웃는 듯 마는듯 입술 끝을 약간 치켜올렸다.
"어제 아침에 휴양차 이곳의 별저를 찾은 친구 하나가 나갔다가 리그로우라는 자에게 봉변은 당했다하더군요."
"봉…ㅡ."
"나를 찾더라면서."
라만의 입술이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나 별반 즐거운 빛은 아닌ㅡ오히려 귀찮고 거슬린다는 빛에 가까운ㅡ시선이 정태의에게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내려다본다. 마치 정태의의 얼굴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뱀이나 그런 파충류 따위가기이한 것을 훑어내리는 시선이었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만치 섬뜩한 시선이라면 얼마든지 받은 적 있다.이 정도로 움츠러들지 않을 만큼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소름끼치고 불쾌한ㅡ그래, 불쾌에 가까운 그 기분은 불길함이었다ㅡ감각은 정태의가 여태받았던 어떤 위협과도 달랐다.
"당신을 찾는다……?"
"물론 나는 그때에, 내 집에 달갑지 않은 손님이 하나 생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접어두고 달려오던 길이라 세링게에는 없었지만, 그 가엾은 친구는 단지 이 부근에 별저를 가진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잘못 걸려 봉변을 당한 탓에 당장 다시 세링게에서 나가야 했지요. 이 근처에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의료 설비를 갖춘 곳은 없으니."
"…ㅡ."
"그 뒤로 안타깝게도 내 친구들이 그 괴한을 두려워해 외출이 꺼려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누구냐고. 그래서 나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쉬웠지."
라만은 느리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정태의를 미묘한 눈으로 노려본다.
"소문으로 익히 들은 바 있는 인물이라 알아보기도 쉬웠어. T&R의 손쓸 수 없는 망나니, 일레이 리그로우. 그 유명한 인간과 동행을 할 정도면 너도 겉모습처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만은 아닌 모양이지."
라만의 말투가 바뀌었다.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매끄럽다. 그러나 그 희미한 웃음을 띤 얼굴만큼은 전혀 바뀌지 않아, 그것이 더욱 아련한 불쾌감을자아내었다.
"잘못 생각하면 안 돼. 아무리 크다 해도 한낱 기업체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동양에서나 큰소리치는 조그만 집안일 뿐이야. 그들이 나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나? 천만에. 그들이 다른 곳을 찔러서 나를 자극한다 해도, 어려울 것 없어. 정재의와 너를 아무도 모르는 지하 감옥에처박아두고 그런 사람들은 알 바 없다고 모른 척하면 끝이다. 그들은 제 발로 나갔다, 나는 그들을 놓아줬다, 그렇게 말하면. 그들이 내 집에 흙발로 들어와 헤집어볼 수나 있을 것 같아서? 천만에. 결코그럴 수 없지."
나직하게 귓속으로 파고드는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정태의는 표정 없이,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곳에서, 정태의만큼이나 서슴없는 시선으로 그도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게 길상천이라고……."
문득 싸늘하게 경멸 어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갑고 잔인한 눈이 정태의의 얼굴 위를 다시 훑는다.마치 증오와도 가까운 시선이다. 하지만 증오라니,자신이 그에게 그런 감정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그 반대라면 모를까.
"너는 정재의와 전혀 닮지 않았어. 이 볼품없고 너절한 놈이, 그에게 복록을 준다? 우습군. 우습지도않아."
라만이 잇새로 내뱉었다. 그러다가 문득 기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노려보며 나직이 말한다.
"어째서 너 같은 놈이지……?"
대답을 구하지는 않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정태의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어째서 나인지 모르겠고 그 전에 내가 형에게 복록을 준다는 생각은 않으니, 내가 들어도 우습고도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이지만…ㅡ그 볼품없고너절한 놈을 잡아가둔 사람 입에서 듣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군요."
라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웃는 듯 마는 듯 입술을 열며, 다시 종전과 같이 돌아간 어조로, 매우 정중하게 말한다.
"결론을 말하자면,당신은 여기서 나가지 못합니다.정재의가 나가게 될 때 같이 나갈 수 있겠지요. 그러니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당신이 나를 도와, 그가내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줬으면 좋겠군요."
라만은 서슴없이 말했다. 그 거침없는 말에, 정태의는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그 말을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한결같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과연 저 눈에 열기가 맺히는 일이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정태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들었을 테지만 나는 그에게 과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붙은 무기, 그거면 됩니다. 물론 그가 직접 만드는 거라면 틀림없이훌륭하리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가 만드는 거라면 평범한 대전차포와 별반 차이나지 않은 물건이라고 해도 좋아요."
"…ㅡ형의 이름이 그렇게나 유명한 무기 브랜드가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당신과 대치하고 있는 누군가가, 정재의라는 이름을 아주 질색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정태의가 마뜩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나직이 말하자 라만은 소리내어 웃었다. 큰소리로 웃을 때라 해도언제나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저 시선이 아무래도 거슬렸다.
"당신은 정재의만큼 상황 파악이 빠르지는 못하군.그는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순간부터 이미 모든 걸 파악하던데. …ㅡ중요한 건정재의의 이름을 걸어 아군으로 끌어올 수 있는 자들이야. 사소하게 듣자면, 군수업자 몇몇 정도는 쉽게 포섭할 수 있겠지."
자람은 즐거운 듯 웃으면서 정태의에게로 약간 몸을 내밀었다. 얼굴을 가까이 한 그는 소리를 낮추어유쾌하게 말한다.
정태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이 남자가 바라는 것은 무기였다. 정재의라는이름의 무기다. 정재의가 그에게 새로운 설계도를 넘겨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이름도 같이 넘겨준다는 암묵의 동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라만은 샅샅이 살피듯이 정태의의 얼굴을 구석구석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세를 바로하며, 다시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웃는다. '정재의는 정말로보기 드문, 훌륭한 인재잖습니까.'라고 말하는 그 말투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형. 난 이 놈이 싫어.
정태의는 그 순간 확고하게 생각했다. 만일 옆에 정재의가 있었더라면 이 남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외쳤을 거다. 잡힌 처지를 감안해서, 한국어로.
라만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에야말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당신도 들었을 테지만, 정재의가 무기만 하나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즉시 당신과 정재의를 이곳에서 내보내주지요. 그러니 모쪼록 당신도 정재의를 설득해주면 좋겠군요."
"나는 형이 하고 싶지 않다는 일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라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어깨를 으쓱하며 "편하실 대로."라고 하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전까지는 여기에 머물러줘야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도록 해요. ……아, 그렇군. 당분간은 바헵의 야시장 구경도 삼가줬으면 좋겠군요."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예의바른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럼, 하고 걸음을 돌렸다.
정태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서편 회랑 쪽으로 걸어가 그 끝에 난 문으로 나서는 그의 모습을바라보기만 했다. 얼핏 열리는 문 밖으로는 정원수인 듯 키 작은 나무들이 보였다. 나무들 사이로는 회벽을 바른 담이 언뜻 보였다.
"……칫. 저 정도로는 여기가 어딘지 감도 안 온다고."
정태의는 열렸던 문이 도로 닫힌 뒤,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에 흠뻑 적셨던 머리카락에서는 더 이상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머리를만지면 손에 물기가 묻어났지만,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새에 조금은 마른 모양이다.
"난 저 놈이 싫어. 라만ㅡ아비드ㅡ알ㅡ사우드. 난 저 놈이 싫다고. 젠장. 귀신은 저런 놈이나 얼른 잡아갈 것이지."
정태의는 그 이름을 뚝뚝 끊어 힘줘서 발음하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인지 감시인지 흘끔 돌아보았지만, 알 바 없었다. 고자질하려면 고자질하라지. 한국어를 알아들었다면 말이지만.
ㅡ어제 아침에 휴양차 이곳의 별저를 찾은 친구 하나가 나갔다가 리그로우라는 자에게 봉변을 당했다 하더군요. 나를 찾더라면서.
"…ㅡ."
정태의는 멈칫,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움츠렸다. 손톱에 돌바닥이 긁힌다.
찾고 있다고 했다. 리그로우가. 라만을. …ㅡ나를.
문득 가슴이 욱신했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얼굴로 그 누군가를 잡았을지, 정태의는알 것 같다.
자신을 찾고 있다.
이미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그 사실이, 어쩐지 귓가를 뜨겁게 두드렸다.
"어……."
정태의는 손을 들어 뜨거운 귓가에 대었다. 그러나햇볓을 잘 받는 돌바닥에 데워진 손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바로 머리맡에 있던 연못 쪽으로 누운 채 슬슬슬 기어가, 다시 그 안에 머리를 담갔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정태의는 기절할 만큼 오랫동안 물에 머리를 담그고 있어도 좀체 목이 식지 않아, 저만치서 바라보다가 의아하게 여긴 감시인이 다가와서 정태의를 두드릴 때까지 꼼짝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을까.
정태의는 연못 옆에 앉아, 미치놈을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주욱 훑어본 뒤 다시 문 앞으로 돌아가는감시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
뭔가 이곳에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어렵겠지."
그리 오래 생각지도 않고 정재의가 대답했다.
"어……역시 그래? 뭔가 없을까. 이슬람식 건축 양식에는 혹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개구멍 같은 게있다든가……."
"성새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건축물을 지을 때에는 그런 걸 기대해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별장인 이곳에 그런 게 있을지는 알 수 없고, 설령 그런게 있다 해도 이 별채에는 이어져 있지 않겠지."
개구멍이 있는 별채에 사람을 가둬둘 만큼 바보는 아니거든, 이곳 주인이, 하고 정재의는 심상하게 덧붙였다. 정태의는 그래, 하고 실망스레 중얼거리며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정태의의 표정을 살피던 정재의가 조용히 물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그의 낮은 물음에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가고 싶다. 그리고 아마 정태의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데에서 정재의도 그 대답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정태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까, 바깥의 짤막한 소식을 들었던 직후와 같은 급박한 초조감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는잔물결처럼 잘박, 잘박, 초조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건 간단하다. 라만이 말했듯이, 정재의가 그가 원하는 대로 적당한 설계도를 내어주면 된다. 정재의는 분명히 그러기를 내켜하지 않았고 다시는 무기를 만들 생각이 없노라 했지만, 필경정태의가 청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거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정재의가 뜻에 반하는 일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정재의 역시 정태의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기에,정태의가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 역시 알면서도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정태의는 끄응, 불만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쥐어뜯듯이 문질렀다. 이젠 거의 다 말라서 수건에 더 닦여나올 물기도 없었다.
정태의는 흘끔 정재의를 보았다.
그는 서재의 한쪽 옆,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던 참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불편하지 않도록 가져다 주겠다는 라만은 그 자신이 말대로, 정재의가 듣고 싶어하는 음반이라거나 읽고 싶어하는 책이 있으면 두 말 없이 구해다 주었다.
그래, 나야 나가고 싶지만 사실 형이야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게 훨씬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머리를 닦던 수건을 목에 걸며 조금 질린눈으로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이 서재에 들어왔을 때의 그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얼핏 보기엔 단촐한 듯이 보이는 서재였다.큼직한 책상과 책장, 창가에 따로 놓인 의자ㅡ지금정재의가 앉아 있는 그 의자였다ㅡ, 선반에 놓인 몇가지 장식품이며 조그만 꽃나무가 자라난 화분, 책장 반대쪽에는 음향기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반들.
저 책상과 책장은 UNHRDO의 총관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인지는 몰라도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부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책상과 책장이 멀티미디어용 강의실 하나 전체를 꾸미는 비용과 맞먹었다고 들었다.
저 의자ㅡ그래, 정재의가 앉아 있는 그 의자다ㅡ는군대에서 전역하고 얼마 있지 않아 해외 유명 가구아티스트 전시회에서 봤었다. 전시장 제일 마지막 코너에서 따로 칸막이가 설치된 부스 안에 귀하게 전시되어 있던, 전시회 소개 카달로그를 보니 천문한적인 가격을 자랑한다고 했던 그 의자랑 몹시 닮아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저 화분들과 장식품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눈에 띈 음향기기에서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마니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 친구들이 차나 오토바이에 관심을 가진 만큼 정태의는 음향기기에 관심을 가진 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 스피커 하나만 해도 대도시의 조그만 아파트 전세값 정도는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우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지만, 이 별저의 주인은 무려 아랍 왕족이었다. 계승순위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해도 무려 오일 머니를 쥐고 계신 분인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라만의 얼굴을 떠올리며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하긴 이런 곳에 이 정도 규모의 별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이미 할 말 다 했다.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입에 문 놈들에게 편견이 생길 것 같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일레이라는 놈도, 신루도,게다가 저 라만이라는 남자도, 어째 죄다 흡족하지못한 성격들이었다.
"아니면 돈이 많아서 성격들이 그 꼴이 됐나……."
정태의는 진지하게 그 편견을 고찰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정태의는 편견의 희생자를 형으로 둔 탓에 어릴 적부터 머릿속으로그렇게 되뇌고 자랐다.
그렇게나 머리가 좋다니 분명히 성격이 좀 이상할거다, 그렇게나 머리가 좋다니 사회성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나 머리가 좋다면 어쨌든 재수없기 그지없는 인간이겠지, 그런 뒷말들을 정태의가우연히 들은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일반적인 편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했지만. 라만이라는 인간을 떠올리자 편견이 깊어질 것 같았다.
정태의는 집값과 비등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 형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되었든 그는 정재의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환경적으로든 행동으로든 폭력적인 처우는 행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원하는대로 책이나 읽고 연구하고 싶은 일들을 연구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도 정재의에게는 행복한 삶일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는 바닥에 앉은 채 무릎에 걸친 팔에 턱을 괴고서 가만히 정재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쑥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저렇게 기다리다 지쳐서, 당장 만들어내지 않으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날뛰면 어쩔 거야."
정태의는 라만의 그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을 떠올렸다. 그렇게 열기를 띠고 날뛸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재의는 어떻게 할까.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 고개를 끄덕일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태의가 알고 있는 정재의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뭔가 양자 모두 만족할 수 있을 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가장 정재의다울 것 같았다.
뭐……설령 목을 베겠다고 달려든다 해도 저 정재의라면 칼날이 갑자기 동강나기라도 해서 목숨을 건질 테지만.
정재의는 정태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감정적이거나 다혈질적인 사람은 아니야. 참을성이 있으면서 매우 치밀하고 냉정하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감정을 죽이고 기다릴 수있는 사람이라서 별로 그럴 걱정은없을걸."
정태의는 라만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오래 그를 보았을 정재의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가 떠올라,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누구랑은 정반대네."
정태의는 감정이 말하는 대로, 피가 끓는 대로 즉시에 사람을 찢어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를 떠올린 순간 정태의는 다시 뜨거워지려 하는 얼굴을, 머리를 닦아 젖어서 차가운 수건으로 마구문질렀다. 이 별저의 담장 바깥 어디선가 미친 듯이화를 내며 날뛰고 있을 그 얼굴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 여기서 숨어 지내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햇었다. 그래, 그 미친놈 옆에서 언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삶을 사느니 여기서ㅡ갇혀 있으나 좀 부자유스럽긴 하지만ㅡ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즐기는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저 라만이라는 남자는 여차하면 지하 감옥 운운했지만,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는 정재의를 위해 돈을발라가며 갖추어 주고 귀한 손님으로 극진하게 대접을 해주는 그 태도를 생각하면,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 조그만 낙원에서 형과 함께안온한 삶을 살아도 좋을 테지만.
"……."
그래도 역시 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초조감에 정태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던 차에 손톱에 뺨이 긁혀 아야,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정재의는 말없이 정태의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 정반대라는 사람은 누군데."
"음? 어…ㅡ, 일레이……리그로우."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바로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설마 그 괴물 같은 남자와 정태의의 자초지종을 정재의가ㅡ아무리 그가 무시무시한 천재라 할지라도ㅡ알 리가 없는데도 정태의는 괜히 멋쩍어져서 잠시 사이를 띄운 뒤에야 천천히 그 이름을 말했다.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카일의 동생이었던……."
정재의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공연히 머쓱해진 정태의가 우물쭈물 별 말 안 하는 동안 계속해서침묵하고 있던 정재의는 그 상당한 침묵 끝에 입을열었다.
"그 사람이라면 나도 본 적이 있는데……태의, 그 사람이랑 친해졌어?"
정재의의 조심스러운 그 말에 정태의는 대단히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친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사이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친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친하냐고 묻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를 본 적이있다면 정재의는 분명 그놈이 어떤 놈인지 파악했을 거다.
그런데도 친하냐고 묻다니, 형 너무한 거 아냐…….
정태의는 일순 정재의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의외로 정재의와 일레이는 나름대로 좋은 인상을 가질 만한 짧은 만남을가졌었는지도 모른다. 카일의 소개로 예의바르게 인사 정도나 나누었다든가.
"아니 그렇게 친하달 것까지는 없지만……, 형은 어떻게 만났는데, 일레이랑."
"음……. T&R 쪽에서 총을 만들어서 시제품을 시범발사할 때 였는데 내 운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며 나한테 총을 쏘았었지."
정재의가 대수롭지 않은 듯 하는 말에 정태의는 경악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일레이 리그로우, 그 성질머리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런 짓을 했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런 일을 태연하게 말하는 이 형이라는 인간도, 그놈이랑 친하냐고 묻는 건 또 뭔가.
"안 친해, 안 친해. 일레이 그놈은 아주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정태의는 손을 내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세하게 말할 만한 사실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정태의는 거기에서 말을 그쳤다.
정재의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태의는 그 침묵 속에서 가만히 바닥의 나뭇결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물었다.
"그래서 형은, 그놈이 싫어?"
말하고 나서야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봐서 어찌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정재의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정태의가 알 바도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닌데. 아니 분명히나쁜 놈인건 확실하지만 그렇게 총을 쏘려고 했던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충분한 놈이지. 아니 그래도…….
정태의는 입속으로 중얼중얼, 칭찬이라기보다는 욕에 가까운 생각들을 주워섬겼다. 그런 정태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정재의는 입을 열었다.
"그 남자와는 그 뒤로 만난 적도 없고 마주칠 일도없어서 싫다는 생각을 할 만한 일도 없었어. 그런데, ……좀 싫어질지도 모르겠다."
"어? 왜."
정태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정재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걸어두었던 음반이 그쳤다. 판이 다 돌아가 소리가 멈춘다. 정재의는 자리에서 일어서 컴포넌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선뜻한 뒷모습을 보고 정태의는 그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놈이 나쁜 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잘라서 싫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니 그리 개운치는 않다.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데도 있는 놈인데, 라고 중얼거리려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 좋은 데라는게 어떤 점인지 꼽아보라고 하면 대답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빼곡하게 꽂혀 있는 음반 중 어느 것을 뽑아낼까 그 위를 사르륵 스치는 정재의의 하얀 손끝을 보면서,정태의는 문득 기억에 선명한 하얀 손을 떠올렸다.
정태의는 그 손을 알고 있었다.
그 손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감촉인지, 살갗 위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정태의는 알고 있다.
문득, 그 손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늘 흉흉한 장갑 속에 가려져 있는 그 하얗고 아름다운 손.유리처럼 매끄러운 손톱. 힘이 담겨 있으나 투박하지 않은 그 손짓.
"……."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고 있잖아.
바닥에 누웠다. 서늘한 나무바닥은, 햇볕에 데워진 바깥의 돌바닥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 좋은 감촉을 등으로, 어깨로 느끼면서도 정태의는 하얀 손을 생각했다.
"나 정말로 정신분열인가 보다……."
정태의는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스로의 뺨을 철썩 두드렸다. 제법 아프게 뺨을 때리고 지나간 그 손길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매웠다.
아야야, 얼굴을 감싸며 뒹굴 옆으로 돌아누운 정태의는 눈물을 글썽이며 뺨을 문지르다가 정재의가 돌아와 다시 의자에 앉는 기척을 등뒤로 느끼고는일어나 돌아앉았다.
"왜 갑자기 자학을 해."
정재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정태의는 아니, 뭐, 하고 얼버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혼자서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라면, 생가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멱살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멱살을 쥐었던 손목을 부러뜨려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정태의는 정재의의, 일레이와는 다른 하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괜히 그 손을 한 번 잡아본다. 정재의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 손을 가만히 맞잡고 있으면서 정태의는 다 큰 형제 둘이서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옆에서 보면 참 뭣한 광경이겠다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그조차 아무려면 어떨까 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문득 정태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손만큼 하얀 발이 거기에 있었다. 조금 전 안뜰에 나갔다 왔는데도 흙이 묻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말끔한 발이다.
그러고 보니.
"신발은 어디 가고 맨발로 다녀."
정태의가 묻자 정재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며칠이나 지나는 동안 마찬가지로 발벗고 다니던 그가 새삼스럽게 묻는 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한그는, 자신의 벗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정태의도 아마, 아까 라만의 발을 보지 않았더라면이곳에서 나가게 되는 그날까지 묻지 않았을 거다.이곳에서는 원래 그러려니 하고 이상하게 여기지도않았을 거다.
그러나 그 뒤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들ㅡ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라든가 가끔 회랑을 스쳐가는 여자라든가ㅡ은 단정하게 신발을 신고 있었다.
"글쎄. 여기에 들어온 뒤로 신발을 본 적이 없어서.가끔 바헵에 구경을 나가도 된다고 허락해줄 때에만 신발을 가져다주거든.별로 신경 쓰지않았는데."
정태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떤 의미로 신발을 주지 않는지 그 속뜻을 정확히알 수야 없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의미는 감금이다.물론 신발이 없다고 바깥 땅을 못 밟지야 않을 테지만, 감금이라는 말이 그 의미 그대로의 이미지로 불현듯 떠올랐다.
"……마음에 안 들어."
정태의가 불쑥 말했다. 정재의는 그 말의 맥락을 더듬어보는 듯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신발을 안 신는 게?"
"아니 그게 아니라, …ㅡ저 남자. 여기 집주인.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정재의는 부루퉁한 빛이 드러나는 정태의의 얼굴을들여다보았다.
"너한테 뭐라고 했어?"
"특별히 어떤 말을 했다기보다는 그 성격이라든가 행동 방식이, 좀 안 맞아."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꼭 어린애 같은 말투다. 그는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거나 들지 않는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일이 그다지 없었다. 하물며 대놓고 말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바깥 소식을 말하던 그 미묘한 어조의 목소리. 웃으면서도 웃지 않는 그 눈. 그를 관찰하는 듯한 서늘한 시선.
"……. 어차피 계속 거절당하면서 그렇게나 자주 올 건 뭐야.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라면, 좀 뜸하게 오라고 하지."
"그래도 요 며칠, 그렇지, 네가 오고 난 뒤로는 걸음이 뜸한데."
정태의는 희한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매일 오잖아."
"음…ㅡ하지만 그 전에는 거의 이곳에 머무르다시피 했거든."
"……. 여기서 뭘 하는데."
정태의는 정재의를 빤히 쳐다보았다.
라만이 이곳에 올 때마다 묘하게 이 별채의 구석구석에 익숙한 듯이 보이는 것은, 여기도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정재의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소유라서가 아니라, 이곳이라는 공간 자체에 익숙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주로 궁금한 걸 묻지. 너도 내게 자주 했던 것처럼."
너도 내게 자주 했던 것처럼,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곧 납득했다.
이 조용하고 말수 적은 형은, 다름 사람에게 먼저 활발하게 말을 걸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일은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도 필요한 말만을 간단하게 되돌려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비단 사전적인 지식뿐만이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의 판단, 이해, 합리적인 추론, 그 모든분야에서 그는 탁월했다.
정태의 역시 깊이 생각해야할 만한 일이 생기면 정재의를 붙들고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러면 정재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그 이야기에서빠진 부분을 물어서 채워넣고 넘치는 부분을 빼내거나 고쳐가면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결론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친구와의 다툼일 때도 있었고, 풀리지 않는 과제일 때도 있었고, 삶을 살아가면서 거쳐야만 하는 중요한 선택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정재의와 이야기를 나누어 얻어낸 결론은 한 번도 정태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형은 나중에 먹고살 게 없어지면ㅡ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일거리가 없이 굶어죽어도 형만큼은 그럴 리가 없을 테지만ㅡ카운슬러라도 하면 되겠다고, 언젠가 정태의는 웃으면서 장난처럼 말했던 바가 있었다.
"……여기서 카운슬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하지만 저 남자는 도무지 카운슬링을 필요로 할 만한 인물로는 안 보이는데, 대체 뭘 묻는 거야."
"글쎄, 주로 세력 다툼의 추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별로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을 만한말은 아니지."
정태의는 하아, 하고 중얼거렸다.
밉게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 남자도 참 편하게 사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무기를 만들어내라고 납치해서 감금한 걸로 모자라서, 매일같이 카운슬링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의 머리를 쥐어짜내는 걸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가엾은 우리 형, 하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스르륵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뭇결이 뺨에 닿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태의야."
그 서늘한 나무바닥만큼 기분 좋게 닿는 목소리. 잠든 건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었으면좋겠다 싶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른다. 정태의는 대답대신 눈을 떴다.
"밖에 나가고 싶어?"
정재의가 조용히 물었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도 고개를 끄덕일 거다. 정태의가 나가고 싶다고 하면 그는 정태의를 위해서 나갈 방법을 모색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하나다.
정태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삼촌이 형을 찾았어. 그래, 카일도 형을 찾고 있었지."
"……."
"난 형을 데리고 돌아가고 싶어서 찾은 건 아냐. 그냥 형을 만나기만 하면 그걸로 됐어. 한참 동안 못봐서, 보고 싶어졌을 따름이니까."
정재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건지, 아니면 자신도 그렇다는 건지,언뜻 알 수 없었다.
"난 혼자 돌아가도 상관없어."
정태의가 말했다. 정재의가 이곳에 머물겠다면 정태의는 혼자 돌아가도 괜찮다. 그 말은 또한, 정태의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재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는 이내 알 수 있었다. 라만은 정태의가 홀로 나가 정재의의 감금을 위협할 여지가 생기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정태의는 나가고 싶었고 또한 나가야만 했지만, 정재의의 뜻을 꺾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생각은없었다.
"……."
미안, 일레이. 너는 거기서 한동안 나를 열심히 찾고 있으려무나. 나는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그러나 어쩌면 네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초조감은 나 역시 나눠가지고 있으니, 너무 화를 내지는마. 그리고……나중에 언젠가 만나게 되면 단매에 날 죽이진 말아 줘…….
* * *
선잠에서 깨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뜨자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ㅡ레이……?"
정태의는 조금 전 자신을 부른 듯한 사람의 이름을불렀다. 분명히 그 사람이 자신을 부른 것 같았다.
그러나 일어나 보니 그곳에는 자신밖에 없어, 이내꿈을 꿨나보다 하고 깨닫는다.
어둔 밤에 파고드는 꿈이란 덧없이 기억에서 녹는 것이라, 그는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곧 자신의 기억이 녹아드는 걸 느꼈다. 꿈이 머릿속에서 빠른 속도로 희미해졌다. 아마 몇 분만 더 있으면 자신이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났는지도 잊어버릴것 같았다.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드랗고 감촉 좋은 이불 위에 내팽개쳐지듯이 놓여 있는 손은, 어둠 속에서 아스라하게 보였다.
햇빛이 바로 들지 않도록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창에서는, 닻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한 시, 두 시. 일러야 자정을 조금 넘은 정도일까. 깊어지는 밤의 어드메.
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나면 신기하게도 그랬다. 몸이 느끼는 것처럼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적이긴 하나마, 그 시간은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이르게 잠든 탓인지도 몰랐다. 밤중에 갑자기 선명하게 눈이 뜨인 건.
하……,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정지한 정적 속에서 그 조용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대로 누워서 잠을 청하면 곧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저 눈부시게비쳐드는 달빛을 보니 어쩐지 아쉬워져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다 잠들었을까. 이런 시간이면 다들 잠들어 이 별저 안은 가끔 순찰을 하며 안을 돌아다니는 경비몇을 제외하고는 고요 속에 젖어들어 있을 터였다.
침대에서 나갔다. 그리고 창가로 가 선다.
달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머리 위에 떠, 창에가려져 있었다. 창에 바싹 고개를 가까이 해 올려다보아야 그 시퍼런 빛이 얼굴에 비친다.
보인 것은 달보다 더 밝은 별들이다.
두텁게 굽슬거리는 하얀 줄기가 하늘 위에 있었다. 은하수. 이곳 세링게의,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다운 별바다가 머리 위에서 흐르고 있었다.
정태의는 다시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돌렸다. 밖으로 나간다. 중정에 누워 하늘을올려다본다면.
문득 어릴 적의 기억이 났다. 몹시 어릴 적이다. 그러나 기억에는 부분적으로 언뜻언뜻 남아 있었다.
그날은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었다고 한다.
유성우의 예측이 선 날을 며칠 전부터 기다려, 그날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 형제를 데리고 어느 산 속으로 들어갔었다. 지루하게 차를 몇 시간이나타고 갔던 것 같지만, 어릴 적의 과장된 기억이니 실제로는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컴컴한 산으로 차를 달려들어가다가 기슭에서차를 세우고, 거기서 또 한참을 걸어올라갔다.
소풍을 가는 듯이 기뻤던 게 기억난다. 간식거리 따위를 준비하며 들뜬 기분으로 출발해 어린 그들은 싫증을 낼 만큼 오랜 길을 더듬어 도착한 그곳은, 산중턱쯤 오목하게 파여 탁 트인 땅이었다. 숲 가운데에 거기만 뻥 뚫려, 키 큰 나무도 키 작은 나무도 없이 수풀만이 발 아래에서 사박거렸다. 그곳에는 이미 그들 말고도 다른 사람이 몇 명 와서 서성이고있었다. 아마 그들도 유성우를 보러 온 사람인 것 같았다.
두텁게 옷을 껴입고 왔는데도 밤이 되자 산 속은 무척이나 추워, 덜덜 떨면서 연신 '언제 별이 떨어져요?'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는 가운데도 정재의는 말없이 하늘만 넋잃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 역시, 언제 별이 떨어지냐고 몇 번이나 묻다가 어느 결엔가 그 물음을 삼키고 말았다.
하늘에 빼곡한 별.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던 은하수.
아련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저 별들이 모두 쏟아진다면. 그러나 동시에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구석에 조그맣게 있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저 차갑고 따끔따끔해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뒤집어쓴다면.
하늘을 가득 채운 그 별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이몹시 뜨겁고 갑갑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이라면 그 느낌을 감동이나 감격이라고 부르겠지만, 그감각은 언어보다도 더욱 강렬하고 애틋한것이었다.
"……그러다가 잠들어서 결국 유성우는 못 봤지……."
정태의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깜빡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이었다. 왜 안 깨워줬냐고 토라져서묻자 가족들 모두가 '깨웠는데 안 일어났어'라고 주장했다. 기껏 기대하던 유성우를 보지 못한 정태의가 부루퉁한 얼굴로 토라져 있자, 한숨도 자지 않고그 하늘을 바라보았던 정재의가 정태의에게 조용히말했었다. 기다리다 보면 오늘과 같은 유성우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거기가 어디였을까."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리며 기억을 되새겼다. 집에서 차를 타고 제법 오래 갔다는 것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도 있을까. 이미 스무 해도 훨씬 더 지났다. 어쩌면 그곳은 이미 개발되어 깎여내려가 지금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불현듯 기억난 추억은 그곳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었다.
"형이라면 알지도 몰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가 기억이나 하려나,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중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회랑으로 나서다가, 그는 걸음을 멈칫하고말았다. 어두운 가운데 달빛이 중정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움직이는 것 하나 없이 멈추어 있었다. 연못위에 쓸쓸하게 떠 있는 꼿잎마저 흔들리지조차 않고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다.
그 옆에, 뒷모습이 있었다.
연못 옆에 가만히 앉아 넋을 잃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뒷모습은 정재의였다. 정태의는 멈칫, 회랑의 차양 그늘에 서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타박, 돌바닥 위로 발을 내딛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그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정재의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에게 다가가 몇 걸음 뒤에서 멈춰서 가만히있었다.
"어릴 때 유성우를 보러 갔었는데……."
그가 자리에 앉은 순간, 정재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멈칫,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재의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조금 전까지 정태의가 떠올리고 있었던 그 때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릴 때 유성우를 보러 간 기억은 그 때밖에 없으니아마도 그 때일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떠올렸던 걸까. 어쩐지 기뻐져서 정태의는 빙긋이 웃음 지었다. 정재의의 말이 이어졌다.
"유성우도 몹시 아름다웠지만 별들이 너무 많아서,유성우보다 그 하늘이 더 기억에 남았어요."
정태의는 다시 멈칫했다.
정재의는 혼잣말을 하는 인간도 아니고ㅡ정태의 본인은 마음의 병을 살짝 의심할 만큼 혼잣말을 가끔중얼거렸다ㅡ,그렇다고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던모양이다.
"……. ……. ……어……."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재의는 약간 어깨를 움츠리는가 싶더니,조금 놀란듯이 돌아보았다.
"태의였구나."
"음."
"어쩐 일이야, 이런 시간에."
"그냥 갑자기 잠이 깨어서. 누구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응? 아닌데."
정재의야말로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정태의도 똑같이 의아한얼굴을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아니,조금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아서."
"응? 아아. 라만인 줄 알았어. 가끔 밤에 찾아오거든. 여기가 별저에 있는 건물들 가운데 가장 지대가높다면서, 이 중정이 별저 안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곳이라고 하더군. 그래서인지 밤하늘이 가장 가까워 보인다던가."
"그래봐야 표고 몇 미터나 차이난다고 수천수만 광년 떨어진 별들이 더 가까워 보인대."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토달거렸다. 정재의가 가만히 웃는다.
정태의는 그대로 몸을 뉘었다. 낮 동안에는 볕에 데워져 따끈따끈한 돌바닥이 지금은 선뜩할 정도로 차갑다. 정태의가 눕자 그 옆으로 정재의도 누웠다.직각으로 누워 머리만 나란히 맞대고, 한동안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본다.
문득 정태의는 픽 웃었다. 그 숨소리가 들렸는지 정재의가 약간 돌아보는 기척이 난다.
"아니, 조금 전에 말했던 그 유성우."
"아……."
"난 그때 자느라고 못 봤는데."
"응. 깨웠는데 안 일어났었지."
"어. 그런데 재작년에 유성우가 한 번 왔었잖아. 군대에서 그때는 안 자고 소대놈들이랑 같이 봤는데,아름답더라. ……그런데, 나도 그때 그 생각했었어.어릴 적에 보았던 그 별하늘이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고."
정태의는 푸근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감정의 공감이라는 것은 이렇듯 따뜻하게 가슴속을쓰다듬는다. 누군가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같은 감정을 맛보았다는 기억은 살아가는 가운데 조그만 영양분이 되었다. 오래도록 사귀어 온 친구가 소중한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알 수 있었다. 정재의도 분명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그는 기분이 좋아져 조그맣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여기서 보는 하늘도 어쩐지 그때 본 하늘과 똑같아 보이는걸."
"그럴 리가……. 우리나라는 북반구에 있어, 태의야."
"……."
잠시 잊고 있었다. 형은 가끔 그 조용하고 담담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확 깨는 말을 할 때가있었다.이렇게, 그 상황을 확 깨어버릴 때도 있다.
사람이 모처럼 감동에 좀 젖어 있으려는데, 하고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자 여전히 하늘로 시선을 주고 있던 정재의가 가만히 웃더니 문득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강원도."
"응?"
"홍천이었어. ……나중에 가 보자."
정태의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가 보자고 속삭이는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 하고 중얼거리며 그도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별이 정말 많았다.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은하수를 눈앞에서 바라보며, 정태의는 불현듯 언젠가의 정재의를 떠올렸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서늘한 공기속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어떠한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습이다.
지금도 마치 그때처럼. 그는 어떠한 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러나 저 아득한 하늘속에 빠져 있으면 귓가에서 자락자락, 자락자락, 끊임없이 속삭일 저 하얗게 빛나는 돌들의 소리를.
"형이야말로……."
정태의는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잠시 사이를 띄운말은 정재의의 침묵 뒤에 이어졌다.
"가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 내가?"
"누군가에게 행운을 준다거나…… 뭔가 그런 신기한 사람이 정말로 있다면, 그건 나보다는 형이 더 가까울 테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정재의와 헤어진 뒤 정태의는 숱한 고난을 겪지 않았던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미친놈을 만난 것도, 쫓겨다닌 것도, 잡힌 것도, 게다가 지금에와서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병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여기에 갇힌 상황이었다.
"형이 나한테 복록을 가져다주었던 것 같아."
정태의는 조그맣게 말했다. 어렴풋이 그 목소리에 고마운 빛이 담겼다. 실제로 복록을 주고말고, 그것과는 상관없다. 정태의는 정재의에게 고맙다고 생각할 만한 수많은 것을 받았다. 지금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평온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저 끝없는 별들과 같이 침묵도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어느 순간 낮은 목소리가 그 침묵을 흐트린다.
"태의야."
싸늘한 돌바닥 위에서,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스라이 저만치서 다가오는 졸음을 느끼던 정태의는 조용한 형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네가 없으면 나는 죽어."
"……. 왜 자꾸 이상한 소리야. 별로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구만."
가만히 웃는 소리가 잠시 들린다.
"항상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네가 먼저 찾아왔어. 사람들에게 유괴를 당했을 때에도, 납치를 당했을 때에도, 하다못해 교통사고가 날 뻔했을 때에도. 그런날이면 늘 네가 날 먼저 찾아오는거야. 우리는 반도 다르고 같이 모여 노는 친구도 달라서, 밤에 집에서나 같이 있지 학교에서나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 때면 늘 따로 있었는데. 그런데 가끔, 그냥 갑자기 형이 보고 싶어져서, 라면서 우리 교실에 네가 고개를 들이밀고 빙긋 웃어주고 가고 나면 그 날은 꼭 무슨일이 생겼지."
"…….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정태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그나마 중고교에 들어간 뒤에나 같이 나란히 앉아 제법 진지한 척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 어릴 때에는 성향이 다르기도 하고 그때 이미 정재의는 보통 어린애들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거의 따로 놀았다. 저녁이 되어서나 나란히 앉아서 책을 보거나 가끔 장난을 치곤 했을뿐이다.
가끔 친구들과 복도를 뛰어다니며 장난치고 놀다가 문득 갑자기 형이 생각난다 싶으면 형의 교실로 후다닥 달려가서 형의 얼굴을 확인하곤 했었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교실에 형이 없기라도 하면 화장실로, 교무실로, 다른 반으로 마구 돌아다니며 형을찾았다. 그러다가 얼굴을 보면 그냥 안심이 되어서씨익 웃고는 다시 후다닥 돌아가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날들에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기억나지 않았다.
"네가 아프면 나도 같이 아팠잖아. 내가 먼저 아플때는 그냥 나 혼자 아팠고."
정재의가 말을 이었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너무 어릴때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늘 그렇게 말을 했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했어?"
"그렇지 않았어. 다만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래, 나도 기억이 안날 만큼 어릴 때부터,나는 생각했었어.너와 나는 뭔가로 이어져 있다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내게 이어진 어떤 끈을 갖고 있다고 느꼈는데.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혹시 네가 내 역신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뜬금없이 날 보러 오면 그날은 꼭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잖아."
"……. 길상천 다음엔 역신이냐……. 너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인데."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목덜미를긁었다.자신이 형에게 행운을 준다는 건 그냥 믿기지 않는일 정도이지만, 자신이 형에게 불행을 준다면 그건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그러다가 열두 살 때였나. 네가 학교 뒷산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서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었거든."
정태의는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기억난다. 정태의는 철이 든 뒤로 감기나 여타 병이랄 만한 건앓은 적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친구들과 놀다가몸 한 군데쯤 상하는 일은 제법 있었다. 몸에 멍이그칠 날이 없었다.
그때라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전에 한 번 크게 다쳐서 수술대에 올랐을 때 거부반응이 일어,그때도 끙끙거리고 울면서 병원으로 가면서도 걱정했다.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하고. 다행히 뼈가아주 깨끗하게 부러져 그냥 그대로 얌전히 고정만시켜놓으면 되었다.
그때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하게 남은 이유는, 아파서가 아니었다. 정태의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정재의는 또다시 납치 사건에 휘말렸다. 그때도 그 엄청난 운수로,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왔지만. 아마도 정재의를 둘러싼 납치나 유괴 등의범죄는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기억을 하는지 모르겠는데……너를 간병한다고 같이 병원에서 묵었던 어머니가 아침에 갑자기 전화를 한 거야. 태의가 너를 꼭 보고 싶다고 보챈다고, 어머니가 타일렀는데도 떼를 쓴다면서 학교 가기 전에 잠시 들렀다 가면 안 되겠냐고. 하지만 나는 그때 학급당번이었기 때문에 병원에 들렀다 갈만큼의 시간이 없었지. 게다가 당장 죽어가는 것도아니고 그냥 다리가 부러진 거니까 오후에 들른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니고."
"……. 기억 안나."
"응. 그 한참 뒤에 내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너 기억 못 하더라."
정재의의 말에 정태의는 다시 머쓱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야 옆에 누운 이 남자는 첫걸음마를 떼었을때의 기억도 난다고 하지만 그건 이 남자가 이상한 거다.사소한 건 잘 기억 못하는 자신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혹시 그 날이 그, 납치 당한 날이었어?"
"응. 그 날 널 보러 병원에 가다가."
"하지만 그때도 멀쩡하게 돌아왔었잖아. 나랑 안 만나도. 운 좋게."
한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재의는 다른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말이 없었지만, 이윽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날 아침에, 학급당번이라 시간이 없기도했지만,어머니한테 전화를 받는 순간 사실 난 덜컥 무서워졌어. 그때 나는 네가 내 역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너랑 만나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안 그러던 네가 갑자기 날 보고 싶다고 떼를 쓴다고 하길래 또구나, 싶었어. 그래서 안 갔지.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ㅡ끌려갔던 거야."
"……."
정재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도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정태의가 병원에 입원했던 어느 날, 정재의가 또 납치되었다는 말이 들렸다. 그러나 여태 워낙 숱하게일어났던 일이기도 하고, 또 언제나 기적적으로 운 좋게 돌아왔기에 가족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마음을 높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여느때와 같이, 저녁 즈음 정재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그건 어쩌면 그날이었을까.
병원에서 자다가 깨어보니 어느새 옆에 정재의가 와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정재의만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침대 옆에 걸터앉아서, 정재의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가만히. 정태의도 어째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결인 듯,혹은 꿈결인 듯, 정재의를 마주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재의는 병실에서 나갔고, 정태의는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았지. 내게 닥쳐오는 불운을 상쇄시켜주는 게 너라고."
"……잘 모르겠어."
정태의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재의는 잠시 사이를 둔 뒤에 조그맣게 웃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실 그 일이라든가, 혹은 네가 군대에서 전역하기 직전에 다쳐서 수술을 하다가 위험해졌을 때 나도 집에서 꼼짝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든가, 뭐 그런 헤아릴 수도 없는 일 때문은 아니야. 이것은 말로는 할 수 없으나 거기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지."
"너무 막연해……. 형. 나는 그렇게 신비스럽고 굉장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내가 납득할 만한 건 뭐 없어?"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다니까, 하고 정태의는 한숨섞어 말했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심령프로그램이나 신비체험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정재의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정태의는 정재의가 다 말하지 않은 게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도 정재의가 이야기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정태의는 그가 오늘 몫의 이야기는 다 했다는 걸 느꼈다. 다시 한번 가뿐한 한숨을 쉰다.
그러나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그 모든 것은 우연히 아니고, 정말로 정태의 자신이정재의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랍고, 또한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인연일까.
문득 가슴 한구석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아픔과는전혀 다른 그 압박감이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그 무게감을 싣는다.
"그 정도야. 더는―――없어. 사실은 네가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지."
정재의가 말을 맺으려는 듯 속삭였다. 정태의가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빛이 희미하게 섞였다. 아마도 정태의가 길상천이라는 그 말을 숙부에게서든 어디서든 듣지 않고 몰랐더라면, 정재의는 결코 그에게 먼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를 굳이 인식할 필요없었는데.그 무겁고 서먹한 끈을."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목소리.
그 아쉽게 흐려지는 목소리에 정태의는 침묵했다. 불현듯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에 어렴풋이떠올랐다.
"ㅡ…난 그렇지 않아."
"……?"
"나는 아직 길상천이니 뭐니, 이해도 못 하고 납득도 못 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무겁지도 서먹하지도 않아. 그런 것 때문에 형을 무겁거나 서먹하게, 혹은 멀거나 이질적으로 느낄 일이 뭐가 있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비상하게 강한 인연이 철썩 붙어 있으니까 좋은데."
정태의는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뭐야, 형은 여태 날 그렇게 생각했구나, 젠장, 그럼난 짝사랑 한 거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마뜩찮게입매를 삐죽이며 찡그렸다.
그렇게 농담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그는 이 관계를 그렇게 여기고있었다.그것은 그가 정태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정태의는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 관계를 무겁고 힘들다고 여기고있었다.
정태의는 그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든, 상황을 무겁게 여기기는 할지언정 그 관계를 무겁다고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젠장……. 이게 뭐야. 화나잖아. 형이 잘라버린 그 빨간실인지 뭔지, 도로 이어, 도로 이어. 왜 멋대로 가위질을 하고 집에서 뛰쳐나가고 그래. 그 덕분에지금 이렇게 갇힌 신세잖아."
정태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기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정재의가 보였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면서 정태의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손바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별로……잘리지도 않은 것 같아. 그런 걸로 잘릴 리가 없지."
"자른 건 인연이 아니라 형의 마음이었을 테니까 그렇지."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무뚝뚝하게 정재의의손을 잡아 끌어당기는 그를, 정재의는 다시 기묘한얼굴로 쳐다본다.
"손 이리 줘 봐. 다시 묶자. 가만 있자, 새끼손가락이었나?"
"응? 어……근데 다시 못 묶어."
손을 잡힌 채 정재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 기묘한 얼굴을 하고 계속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야 못 묶겠지. 보이지도 않는 끈을 어떻게 묶어.하지만 가위질을 해서 자를 수 있었다면 묶을 수도있겠지. 묶어보자고."
"그게 아니라……. ……. 아니 뭐, 상관 없나……."
정재의가 뭐라고 하려다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흘끔 쳐다보며 새끼손가락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실을 집어낸 시늉을 하면서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상관없어졌다. 이것은 상징이다.
ㅡ상징은 곧 믿음이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일레이가 했던 말이다.
그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정태의를 자신이 가지겠다고 했었다. 어쩌면 그 역시 그때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며, 어쩌면 지금 정태의가 하려는 것처럼, 정태의를 끌어와 자신에게로 묶어버렸는지도 몰랐다.
"…ㅡ."
정태의는 정재의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표정이, 손길이, 감촉이, 바로 옆에 있는 듯이 떠올랐다.
ㅡ알겠지. 너는 내 거다.
그 나직하고 열기가 어렸던 목소리가.
ㅡ잘 기억해, 태이. 오늘부터…이제부터는 매일, 너는 내 거다.
그 델 듯이 뜨거운 숨결이, 손길이, 체온이, 온몸에들러붙는다.
"태의야?"
옆에서 정재의가 의아한 듯 불렀다.
정태의는 밤하늘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저 별들이 지금 반쯤만 눈감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길 수 있도록.
정태의는 아니, 별 거 아냐, 라고 중얼거리며 뜨거운 얼굴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때였다.
그때 문득 이유모를 이질감을 느끼고,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 서편 회랑 끝, 나무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회랑의 차양 그늘 아래에 커다란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마치 야행성 맹수처럼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얼음처럼 가라앉은 새까만눈으로, 이 별저의 주인이 가만히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일순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척도 없이 남자는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밤이면 가끔 찾아온다고, 아까 형이 그랬었다. 이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기위해 간혹 온다고. 아마도 오늘이 그런 날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적막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정태의가 그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그는 걸음을 돌려, 다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서쪽 회랑을 등지고 있던 정재의와 눈이 마주쳤다. 정재의는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태의야."
"어? 아니 지금……. ……. 아냐. 내가 잘못 봤나 보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두어 번 더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에이 몰라, 하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옆에 앉은 정재의의 묵묵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한참 동안 그렇게바라보고 있다가, 그도 도로 따라 누웠다.
다시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누워, 그들은 말없이 눈앞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아까는 같은 것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이제는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정태의는 조금 아쉬운마음으로 그렇게생각했다.
* * *
ㅡ너는 내 거다.
괜한 생각을 떠올렸다.
정태의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한숨을 쉬며 속으로 한탄했다.
"나는 일레이 게 아니다."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면 혹시라도 그 말이 상쇄될까 싶어서.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펴보며 개미 기어들어가듯 조그만 목소리로 속살거린 탓인지,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라니까. 나는 내 거라니까."
정태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팔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스스로의 의지로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자 해그 옆에 있을 수는 있을지언정, 뜻에 반해 억지로 소유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의 몸도. 자신의마음도. 자신의 정신도.
그러나 자신의 것이기에, 또한 온전히 그 모든 부분을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책임지고, 정신차려야지……."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동시에 문득 생각한다. 바깥에서는 지금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정태의가 이곳으로 들어온 뒤, 일레이가 어떤 아랍인을 곤죽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별반 화가 나거나 신경 쓰는 눈치도 보이지 않으며 라만이 말해줬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일절 전해들은 말이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설마 닥치는 대로 아랍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죄다 잡아다가 박살을 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랬다간 만약 아랍권의 공적이 되어, 한 손에는 쿠란을 든 아랍인들이 다른 손에 칼을 들고 그놈을 덮칠지도 모른다.
"우와……, 진짜 작살이겠다."
내가 그놈 교위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이 그의 옆에 없을 때에 벌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하고 있을까. 정태의가 이곳에 있으리라는 건 아마도 짐작할 터였다. 상황을 짚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달리 손쓸 도리가 없었다. 정재의가 라만의 별저에 있으리란 걸 번연히 짐작하면서도 손쓰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은 여전히그곳에서 발이 묶여 있을 거다.
일레이는,……조금은 태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링게로 오면서, 아니 그 전부터도 정재의를찾든 말든 별로 아랑곳 않는다는 태도였다. 정재의라는 인물이 그가 다리를 한쪽씩 걸치고 있는 T&R와 UNHRDO 양측 모두에게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거기에 초연했다. 어쩌면 정태의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재의가 행방불명이든 말든 한 치의 신경도 안 썼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러면, 조금은 열심히 찾기 시작했으려나. ……하지만 사람을 찾을 방편으로는, 아랍인들을 하나씩 해치고 다닌다면 그건 좀 문제가 큰데.
이러는 동안 담장 밖에서는 숱한 아랍인들이 떼지어 공적을 없애러 가겠다고 봉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
연락을 할 도리가 있다면 좋을 텐데. 뭔가 아주 잠깐이라도 연락을 할 수 있다면.
중정의 연못 옆에 주욱 뻗어 엎드려 있던 정태의는흘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회랑 끝의 유일하게 잘움직이는 문 앞에는 감시인이 서 있었다. 정말로 뽑히기는 할까 의심도 되는 큰 칼을 허리에 차고, 그는 나무 의자에 앉아 지금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참이었다.
……저 남자를 때려눕히고 저 문밖으로 나간다면.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정태의였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마 저 문을 나가도 별저의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터였다. 별저의 거대한 담장 안에 지어진 숱한 별채 가운데 하나가 이곳이다. 그렇다면 저 회랑 바깥으로 나간다 한들 결국은 별저 안의 어딘가를 헤매게 될 거다.
게다가 운 좋게 이 별채가 별저의 대문 가까이에 있는 곳이라서 잘 숨어 있다가 그 대문이 열릴 때 기회를 봐서 튀어나갈 수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수 있을 가능성은 일단 적었다. 정태의가 별채의 담장을 넘어서는 순간 별저 전체에 비상 경계가 설 게뻔하다. 더욱이 만일 이 별채가 별저의 가장 깊숙한곳에라도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별채가 별저 안에서 가장 지대가 높다고 했었지……."
정태의는 얼마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어린애가 발로 그린 것 같았던 지역지도를 떠올렸다.
동남부의 해안선을 따라 빙 둘러져 있던 이 부근의별저들. 그 중 어느 별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형을생각했을 때 별저 안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있는 별채라면 필경 별저의 정문에서 상당히 떨어져안쪽으로 깊이 들어온 곳일 터였다.
즉, 대문에서 가장 먼 곳.
"도망칠까 봐 수고롭게 제일 깊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주셨나 보지. 내 참……. 나라면 몰라도, 재의 형이 어디 도망갈 만한 사람이냐. 저 사람은 그런 수고스러운 짓은 안 한다니까."
정태의는 투덜거리면서 서편 회랑 끝의 쪽문을 아쉽게 쳐다보았다. 결국 저 감시인을 물리치고 나서봐야 별저의 대문을 넘어서기 전엔 잡히기 십상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정태의는 저 아랍 남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처음 만나는 순간에 이미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처음 마주치자마자 피할 새도 없이 명치를 얻어맞은순간이다.
정확했다.
비록 정태의가 뒤를 쫓아 달려오는 것을 미리 알고있었다고는 해도, 정태의가 모습을 나타난 바로 그타이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명치를 노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기절할 만큼의 힘을 실어 가격을 한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상당히 어려운일이었다.
맞는 순간 '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며칠 동안 낙락하게 놀면서 그를 살펴보는 동안에도 바뀌지 않았다. 생긴 건 중동의 어느 시장 골목에 널려 있는 흔해빠진 아저씨처럼 땅딸막하고 둥글둥글한데, 저 남자와 제대로 맞붙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몇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일단 저 아저씨 하나에, 어디 보자……,둘, 셋, 넷,……다섯? 모르겠다. 넷이나 다섯, 그 정도인 것 같은데."
정태의는 중얼중얼하면서 손을 꼽았다.
아마도 정태의가 뭔가 수상쩍은 짓을 벌이거나 난동을 피우기라도 하면ㅡ그리고 그게 저 땅딸막한 아저씨 하나로는 감당을 하기 힘들 만한 일이라면ㅡ당장 모습을 드러낼 만한 사람이 몇 더 있었다.
결론적으로, 스스로 무력으로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부로부터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여태 라만의 별저에 정재의가 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확인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당장 나가지 못해도 좋으니까 연락이나 할 수 있다면 좋겠구만."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별채 안에서 외부와의 접촉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편지 따위도 쓸 수 없었고 전화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나마 정태의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금요일이 되면 정재의는 라만의 허락을 얻어ㅡ비록 차도르를 휘감고 그 위에 베일까지 써야 하며 뒤에 감시인도 달고 있긴 했지만ㅡ야시장에 잠깐 구경을 나갈 수는 있었다. 아마도 정재의가 섣불리 도망치려 하지는 않을 인물이라는 걸 파악했던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 금지였다. 정재의도 나갈 수없고 정태의도 마찬가지다.
정태의는 다시 흘끔, 감시하는 아랍 남자를 보았다.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하고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부탁하면 혹시라도 빌려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시나마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비웃었다.
정재의를 감시하기 위해 하루종일 별채 안에 덩달아 갇혀 있는 셈인 그들은 물론 외부와 연락할 매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만에 하나의 사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
한 번 시도나 해 볼까.
정태의는 문득 위험한 생각을 떠올렸다.
UNHRDO에 있을 때 알타에게 배운 게 있었다. 언제였던가 주말이 홍콩에 나갔다 온 알타는 웬 얼간이 소매치기가 자기를 뜯으려다가 걸렸다며, 괘씸해서 도리어 그놈한테서 자기가 뜯어왔다고 웃으면서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정태의를 붙잡고 제대로 소매치기를 하려면 이렇게 하는 거라고, 친히 몇 번이나 시범을보여주면서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옆에서 카를로며 다른 부원들이 '그렇잖아도 잔재주 많은 놈인데 그런 것까지 가르쳐주면 그거 골 아파서 어쩌려고 그래, 관 둬, 관 둬'라고 말렸지만 술이 들큰하게 들어간 알타는 듣는 척도 않았다.
별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알타가 주정을부리면서 붙잡고 늘어지는통에 익히긴 했는데…….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배우고나서, 제법 재미있어서 몇 번 써먹기도 했었는데 그러다가 시들해져서 거의 안 했다. 아직껏 손이 제대로 움직이려나 모르겠다.
흘끔, 아랍 남자를 보았다. 그 시선이 심상찮았는지무뚝뚝하게 앞만 보고 있던 아랍 남자가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무심하면서도 날카로움을 갈무리한 눈이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 역시 안 되겠다. 저 남자는 안 돼, 안 돼. 여차하면 내가 죽겠다.
정태의는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남자는 퉁명한 얼굴 그대로, 그러나 까닥 목례를 해 보이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정태의가 어떻게 할까 생각을 굴리려 할 때,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회랑 안쪽을 향해 뭐라고 외쳤다. 곧 회랑 안쪽에서 어린 청년이 뛰어나왔다.
저 아랍 남자도 여기에서나 감시인이지 다른 데 가면 의외로 신분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를 게, 그 청년은 그에게 붙어 다니며 시중을 드는 듯했다. 청년이 나오자 남자는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고 자리를 떴다. 화장실이군, 하고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남자 대신 잠시 자리를 지키는 청년의 그 풋풋한 면상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라면, 어쩌면.
정태의는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가 회랑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종종걸음으로 그 청년에게로 갔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청년은 정태의가다가오자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좀 내보내주면 좋겠는데."
정태의는 문을 가리키면서 빙긋 웃었다. 물론 정태의가 모국어로 한 말을 청년이 알아들을 리는 없었지만, 문을 가리키는 몸짓을 보고 그 뜻을 짐작했는지 청년은 굳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좀 내보내주지. 응?"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싱글싱글, 충분히 뻔뻔한 놈으로 보일 만한 표정을 띠고서 막무가내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청년은 그때까지 몇 달이나ㅡ물론 정태의는 그보다훨씬 짧은 기간이었지만ㅡ얌전히 있던 인질이 갑자기 나가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당황했는지 잠시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지만, 곧 사명감에 불타오른 듯 정태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 서투룬 손짓을 보며 살짝 웃고는 가볍게 손목을비틀어 그 손을 떨쳐내었다.
어이없이 쉽게 놓치자 청년은 당황과 분노가 솟은 모양이었다. 뭐라고 거칠게 외치더니ㅡ짐작컨데 사람이 봐주니까 건방지게, 운운하는 말이지 싶다ㅡ손목을 교차시켜 정태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매우 깔끔하게 정태의를 내던져버렸다.
아, 뭔가 배우긴 배우는 놈이구나, 라고 정태의는 허공을 부웅 날면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낙법을 쓸 타이밍을 약간 놓쳐버렸다. 돌바닥에 엉덩이를 퍼억 부딪혔다.
"아약!!"
정태의는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혹여 멀리 화장실까지 갈까 싶어 소리를 죽이고, 스으……하고 아픈 숨을 들이쉰다. 등뒤에서 청년이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무뚝뚝한 얼굴에 절대 못 비켜주겠다는 기색을 떠올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고, 돌바닥이니까 진짜 아프네, 그나마 엉덩이살이 쿠션이 되어줘서 망정이지, 정태의는 엉덩이를문지르며 일어섰다. 한쪽 엉덩이가 욱신거려 걸음마저 절뚝거리면서, 그는 침실 쪽으로 걸었다. 짐짓원망스럽게 청년 쪽을 흘끔 보자 청년은 사명감으로 가득 찬 얼굴 그대로 정태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젊은 혈기는 저래서 좋단 말이야, 정태의는 속으로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침실 쪽 문을 통해, 안뜰로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화장실에서 그 아랍 남자가나오지 않길 간절히 빌며.
정태의는 천천히 걸음을 빨리했다. 그 걸음은, 그가안뜰 끝에서 서재 쪽에 붙은 바깥 회랑으로 돌아들무렵에는 거의 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자 그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아직 쓸 만하네. 하도 오래 안 해서 손이 굳었을 줄 알았는데."
저 놈이 좀 둔한 것 같기도 해, 라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그가 원래의 감시인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겼다. 아마도 원래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그 큰 칼을찬 아랍 남자였더라면 이렇게 깔끔하게 성공하진 못했을 거다. 정태의는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하며 휴대폰의 플립을 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언제 뒤에서 쫓아올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이라도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전화가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바로 쫓아올지도몰랐다.
어디가 좋을까. 쫓아오는 사람을 따돌리기 위해 가장 나은 곳. 혼자 있기 좋은 곳은―――화장실이다. 하지만 화장실은 안 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인동시에, 도망칠 길이 없는 막다른 곳이기도 했다.
역시 가장 나은 건 움직이기 편한 곳일까. 되쫓아온다 해도 무작정 달려서 도망치면서라도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통화 도중에 전화를 빼앗기더라도 최대한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제일 나았다. 손가락은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정태의 자신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번호다. 그러나 교위로 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연락처를 알려줄 일은 많았던 탓에 자연히 외우게 되었다.
일레이.
정태의는 처음으로 그 미친놈을 교관으로 맞은 UNHRDO의 인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어디에 가든 자동으로 로밍이 되는 교관의 전화번호가 아니었으면 어디로 연락할 수 있었을까. ……설마 재수 없게, 이 세링게 자체가 아예 전화가 안통하는 오지로 분류되어 있는 건 아닐 테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어쨌든 그의 손 안에는 멀쩡한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문득 심장이 두근, 울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만이더라. 잠깐.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일단 가장 급박한 건 만에 하나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당장 주장해야 하는, '나 도망간 거 아냐.' 아랍인을 하나 찍어서 박살냈다고 하니 설마 정태의가 도망갔으리라고 생각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두 번 도망가면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하라고 했었던 그 서슬 퍼런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해야 할 건, 그래, 여기 위치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혀를 찼다.
여기 위치라니, 그런 건 정태의도 몰랐다. 여기가 라만이 소유한 별저 안이라는 건 확실한데 그 안의 어느 별채인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나갈 수도 없는데. 그래도 일단 지대가 가장 높은 곳이라니 입구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테고……그런데 그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나 있을까. 설마 또 판저 파우스트를 들고 들이닥치진 않을 테고.
……아랍 왕족을 상대로 그 짓을 했다간 형님의 군수사업게 막대한 지장을 주겠지.
정태의는 개조 레와코를 타고 어깨에 판저 파우스트를 걸쳐메고 들이닥치는 일레이를 상상하다가 부르르 떨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랬다간 진짜로한 손에 쿠란을 든 아랍인들이 줄줄이…….
그러고 나서는 무슨 말을 하지. 가만 있자, 뭔가 할말이 더 있지 않았던가. 분명히 중요한 뭔가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뭐였더라. 뭔가, 확인해야 할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정태의가 초조하게 생각하는 동안, 전화 안의 신호음은 그치지 않았다. 여남은 번이 넘어서도록 끊어지지 않는 신호음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아차, 하고 혀를 찼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거나, 잠들었다거나,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졌다거나.
받아. 받으라고.
정태의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공연히뒤를 돌아보았다. 설령 이 전화기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 그가 전화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라도 치면 끝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 초조할 때면 바라는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호가 몇 번이나 울려도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나지 않았다. 결국 자동응답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 전화의 주인은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플립을 닫았다. 받지 않은 전화에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 제깍 받을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시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며 막다른 곳이 아닌 데가 어딜까 고심하며 회랑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서재로, 거기에서 다시 안뜰로 계속 자리를옮겼다. 그러는 동안 신호는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고 있었다. 아홉 번, 열 번, 이번에도 또 자동응답으로 넘어갈 모양이었다.
"……제길, 좀 받아라, 이 미친놈아!"
정태의는 울컥해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혹여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까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러나 충분히 전화 너머에는 들릴 만한 크기였다.그 목소리는, 바로 그때 전화를 받은 사람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을 터였다.
'…ㅡ. 태이?'
낮고 느린 목소리.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전화를 움켜쥐었다. 초조했던 마음이 일시에 가슴속에 확 치밀어 올랐다.
낯익은 목소리. 아마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들어도 선명하게 떠오를 목소리다. 정태의는 입술을 악물었던 잇새로, 엉겁결에 외쳤다.
"너 지금 어디야!"
어, 이게 아닌데,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말문은 텄다.
'태이. …ㅡ어디야.'
수화기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낮고 느리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납고 거친 맹수의 것으로빛을 바꾼다.
'어디야. 태이. 너 지금 어디 있어. ……태이!'
몇 번이나 거듭해서, 그 목소리가 정태의의 이름을불렀다. 정태의는 문득 말이 막혔다.
"어……."
어떡하지.
초조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머리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수화기 저편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들이 어느 곳을뒤적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찾아 헤매고 있은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찾고 있으려니, 그렇게 생각하던 현실이 지금 귓가에서 선명하게 색체를 띠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초조해졌다. 언제 누가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는 다른 초조였다. 갑작스레 치밀어오른 그 기묘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확인할 것도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뭔가 물어볼 게있었다. 물어보는 게 두렵기도 하고, 만일 예상하는대답을 들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고심하기도 했다.
그게 뭐였지. 그 말은.
정태의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와 전화기를 다른 손에 바꿔쥐었다. 초조하게 바짓자락에 손을 닦는다. 그러니까, 그게…ㅡ.
'태이, 대답하라니까! …ㅡ제길. 너 몸은 멀쩡한 거지. 네멋대로 다치기라도 했으면 죽을 줄 알아라. ……대답 좀 해! 태이, 정태이! ……정태의!"
아, 또다. 이 놈은 가끔씩 발음이 좋아지더라……. 누구한테 발음교정 개인교습이라도 받았나.
멍하니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던 정태의는, 귀를 간질이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불쑥,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못하며, 말해버렸다.
"야. 나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어, 이게 아닌데.
말하자마자 또 아차,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좋다. 말문은 텄다. 그런데 내가 지금 뭐라고 했나. 뭔가 정신분열의 기색이 살짝 돌면서 생각에도 없던 이상한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정태의는 초조하게 손끝으로 입술을 훔쳤다.
수화기 안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뚝 끊겼다. 저 너머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잇, 일레이!"
설마 전화가 끊긴 걸까. 이 급박한 상황에 전화가 끊기면 곤란하다.
정태의는 당황스럽게 그의 이름을 두세 번 외쳤다.
그때였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그냥 스쳐가는 건지 회랑 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기척은저벅거리는 발소리로 바뀌어 점점 다가오고있었다.
정태의는 얼른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려 속도를 높였다.
"야, 지금 끊기면 어떡하라고, 전화도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ㅡ일레이!"
'…ㅡ듣고 있어. 지금 어딘지나 빨리 말해.'
"어, 여기, 라만의 별저. 따로 나 있는 별채인데, 별채에서는 한 발짝도 못 나가서 이 별채에 별저 안의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별저 안에서 제일 지대가 높은 데에 있다더라."
'별저 안에서 제일 지대가 높은 곳…….'
정태의는 혀를 찼다. 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은아무래도 우연히 스쳐가는 기척은 아닌모양이었다.정태의가 가는 방향대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정태의도 점점 속도를 높이는 통에 발소리를 죽일 수가 없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정태의는 흘끔, 뒤돌아봤다. 그때 회랑의 모퉁이를 돌아서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그 청년, 이 전화기의 주인이다.
그 청년은 정태의를 보자마자 뭐라고 소리치며 시뻘건 얼굴로 마구 달려왔다. 그리고 당연히 잡힐 수는 없었던 정태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젠장. 어이, 오래 전화 못하겠다. 여기서 나가기가좀 힘들 것 같아. 라만 그놈이 형한테 무기 만들어내라고 하고 있거든. 안 그러면 안 보내주겠다면서.그렇다고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오면 지하 감옥에라도 숨겨놓고 모른 척하겠다던데. ……어쨌든, 그러니까 당분간 못 보겠지만, 나 도망친 거 아냐. 나중에 혹시라도 나 만났을 때 다짜고짜로 나오면 안 된다고."
'…ㅡ제길. 거기는 외부에서는 빼내기 힘들어.'
수화기 속에서 조금은 초조한 듯한, 그러나 얼피 듣기엔 평소와 별 다를 바도 없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소 낮아진 목소리는 어쩌면 화가 난 건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외부에서 빼내기 쉬웠다면 정재의가 이 안에 여지껏 갇혀 있을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물이 뒷생각을 안 한다고 해도, 이곳으로 들이닥칠 수는 없다. 중동 쪽의 왕족이란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줄줄이 벌집이었다.
"알아, 알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태이. 거기에서 나오고 싶나?'
정태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불쑥, 일레이가 말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야 나갈 수 있다면야…ㅡ."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등 뒤로 따라붙은 인간이어느새 둘로 늘어났다. 설상가상, 저 앞에서도 사람하나가 튀어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전화를 오래 사수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는 이윽고 무겁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 짤막하고 묵직한 대답에 이어 그의 느리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태이. 분명하게 기억해둬라. 그러기 위해서내가 내걸어야 하는 몫만큼, 반드시 네게서 돌려받을 테니까.'
"뭐…ㅡ."
정태의는 도중에 말을 흐렸다.
어쩐지 선뜩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실수한 것 같은느낌이 가슴속에서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면 이런 느낌일까.
정태의는 어, 어,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그러나 점점 뒤를 쫓는 사람들과의거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세 명이 쫓아오는 바에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놈이 덥썩, 어깨를 잡았다.
"젠장."
정태의는 짧게 중얼거리며 이판사판으로 그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후려치고 보니 전화기 주인이었다.조금 미안하다.
'태이?!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전화 좀 하려고, 쫓기고 있다. 아, 젠장, 곧 잡히겠네."
정태의는 헐떡거리면서 짤막짤막하게 대답했다. 뛰랴, 뿌리치랴, 전화하랴, 이러다 숨 넘어가서 죽겠다. 어차피 곧 잡힐 건 뻔했다. 정태의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금방 잡힐 바엔차라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는 게 단 몇초라도 더 벌 수 있겠다.
쾅ㅡ!!
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가 사정없이 닫아버렸다. 그러나 문을 잠그기 직전에 한 놈이 몸으로 부딪쳐,미처 걸쇠를 걸지 못했다.
'태이! ……빌어먹을……. 너 네 맘대로 몸 함부로 상하게 하지마!'
"몸 상해봐야 내가 아프지 네가 아프냐……아야야야――――!"
문을 닫으려다 문틈에 손가락이 끼었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만큼 아팠다. 전화 한 통 하려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생각하니 눈물이 더 돌았다.
고작해야 몇 초나 버틸까. 아마 이 전화가 끊기고 나면 그 뒤로는 다시는 같은 수는 못 쓰겠지. 어쩌면 여기에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외부에 하는 통하일지도 몰랐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정태의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내 걸 왜 네 맘대로 상하게 해! 빌어먹을, 왜 네 놈은 함부로 졸랑졸랑 쫓아가서……!'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던 정태의는 그가 막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친 고함소리에 움찔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눈을 크게 떴다.
이 남자가 화내는 모습은 숱하게 봤다. 화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을 개 잡듯 때려잡는 모습도 봤고, 더 이상 이 남자의 서슬 퍼런 모습에 새삼스러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되도 않는 말을 하면서 화내는 소리를 듣는 건 어쩌면 처음인 것 같다.
"……."
갑자기 생각났다. 이 남자에게 해야 했던 말. 확인했어야 할 것.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보고 싶었는데. ……아니 어쩌면, 직접 대놓고 물었다간 당장 괴물처럼 이를 드러낼지도 모르니까 멀찍이 떨어졌을 때 전화로 묻는 게 더 현명한 건지도모르지. ……아냐, 하지만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러나 그 망설임은, 정태의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화장실문이 세 남자의 힘에 의해 활짝 열리고 만순간, 일순간에 치밀어오른 다급함으로 날아가버렸다.
"일레이, 너,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정태의는 또 혀를 찼다. 이게 아닌데.
아니, 물어보고자 하는 건 정확히 그 말이었다. 그러나 보다 무난하게 돌려서 말할 여지도 있었을 텐데, 너무 급박해서 대뜸 소리쳐버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정태의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수화기 너머의, 허를 찔리기라도 한 듯한 짧은 침묵이 끝나기를 미처 기다리기도 전에 아까 얻어맞았던 청년이 우악스럽게 전화기를 빼앗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야!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는데 네 맘대로 끊어버리면 어떡해!!"
정태의는 남자들에게 짓눌린 채 벌컥 고함을 질렀다. 정태의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봤자 그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고 또한 따지고 보면 전화를 도둑맞은 피해자이기도 한 그 청년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얼굴이었다. 아마도 그가 따르는 저 원래 감시인인아랍 남자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은 모양이다.
그 청년의 무지막지한 욕설과 함께ㅡ다행스럽게도 정태의는 그 욕설을 알아듣지 못했다ㅡ, 정태의는 청년의 분노에 찬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 * *
정태의는 거울을 보며 한숨 쉬었다.
얼굴, 오른쪽 관자놀이에 시퍼렇게 멍이 하나, 눈은양쪽 다 퉁퉁. 입술도 찢어져서 그 위에 피딱지.
"딴사람 성격이 비인간적이라고 욕할 게 아냐…….세상에 이 얼굴만큼 비인간적인 광경이 또있을까."
정태의는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슬슬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세게 건드리면 아프니까ㅡ상처에 따라선닿기만 해도 아프니까ㅡ살살,조심스럽게 문지른다.
연고라도 좀 발라두게 약 좀 달라고 했지만 남자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결국 지나가던 하얀 옷 소녀에게 불쌍한 척을 해서 몰래 하나 얻어내었다. 아랍권에서 여자에게는 절대로 함부로 말 걸지 말라는 철칙을 지켜, 중정의 연못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소녀가 하나 지나갈 때를 노려 몹시 아픈 척을 했더니 고맙게도 몰래 조그만 연고 튜브를 침대 협탁 위에 하나 놓아두고 갔던 것이다.
그걸 보고 정재의는 감탄스러운 듯 '너 여기 사람들한테 배 한 번 팔아봐라'라고 사뭇 진지하게말했다.정태의도 '그래 볼까'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팔 배가 없다.
사실, 얼굴이 워낙 티가 나게 상해서 그렇지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그 청년은 마음 같아서는 아예 요절을 내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가 적당히 두드린 시점에서 그 뒤에 서 있던 감시인이 그 청년을 말렸다. 비록 실질적인 형식은 납치 감금 피해자였지만 명목적인 형식은 귀한 손님이었다. 귀한 손님을 그렇게 때릴 수야 없지않겠냐는 모양이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그 감시인 아랍 남자는, 말릴타이밍도 아주 절묘하게 잘 잡아서 말렸다. 청년이후련하게 때린 탓에 얻어맞을 만큼은 얻어맞은 정태의가 '이 정도면 그래도 죄값은 치른 것 같은데 더 맞아줄까 말까' 슬슬 고민할 시점에서 청년을 말렸던 것이다.
"그래도 그 남자가 직접 주먹을 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에고고."
정태의가 약을 바르며 신음했다. 그렇게 맞은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아팠다.
얻어맞은 뒤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엊저녁 늦게야 침실에서 약을 발견한 정태의는 어제 자기 전에약을 한 번 바르고, 지금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한 뒤에 다시 바르는 참이었다.
얻어맞은 상처는 맞은 당일에는 별로 티가 안 나더니 며칠 묵혀두니 상처가 아주 잘 익었다. 퍽 비인간적인 몰골이다. 며칠 전 얻어맞았던 그 다음날 부스스한 얼굴로 식당에 가서 앉았더니,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정재의가 정태의의 얼굴을 보곤 눈을 크게 뜨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미 한바탕 얻어맞은 정태의의 얼굴은 본 터였다.그러니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없을 텐데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자고 일어나 얼굴이 더 부었나 보다 싶었다.
'얼굴 많이 부웠어?'
자고 일어나서 그냥 세수만 하고 온 터라 거울도 못본 정태의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 도리가 없었다. 별로 아프진 않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정재의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묻자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태의야. 너 예전에 휴가 나왔을 때 김소위라는 동료랑 싸우고 들어온 적이 있었잖아.'
'어? 아, 있었지.'
아침부터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름을 들어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그 정도 이름은 귀엽게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놈은나름대로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그때보다 더 부었다.'
'……. 거울 보기 무서운걸.'
정태의는 얼굴을 슬슬 문지르다가 아야, 아야, 중얼거리곤 식사를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얼굴을 보니 아주 화려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자 시퍼렇게 들었던 멍은 보랏빛과 노르스름한 빛이 뒤섞인 색깔로 바뀌어, 보기에는 더욱 화려해졌다. 아픔도 그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드리면 아프다.
"때리려면 겉으로는 표시 잘 안 나고 속으로는 왕창 아픈 데를 골라서 잘 때려야지, 이게 뭐냐, 겉으로는 왕창 표시나고 몸은 말짱하니. 내가 이래서 젊은 혈기를 좋아한다니까……."
아마 감시인에게 맞았더라면 그렇게 맞았을 거다. 혹은 저 청년이 솜씨가 좋아서 그렇게 때렸더라면저 감시인은 조금 더 지켜보다가 천천히 말렸을 테지. 정태의는 연고를 다 바른 뒤 다시금 거울을 보았다.아주 볼만한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정태의는 워낙 적은 용량이라 어젯밤과 오늘 아침두 번 발랐는데 벌써 다 써버린 연고 튜브를 아쉽게만지작거리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루터가 사랑해마지않는 호랑이 연고가 그리워졌다.
한숨을 폭 내쉬곤 밖으로 나갔다. 서재로 가서 책이나 볼까 싶었다. 그러나 걸음을 내딛던 정태의는 멈칫, 발을 멈추고말았다. 막 서재로 들어서고 있는 뒷모습이 멀찍이서 보인 탓이다.
라만이다.
방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어 시계를 보자 과연 그가 올 시간이었다.
정태의는 슬쩍 낯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안뜰로 걸음을 돌렸다. 안뜰의 안쪽에 있는 고무나무 옆이라면 서재의 창문을 통해 안쪽을비스듬하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기에 좀 있으면서 안쪽의 동정을 살피다가 라만이 돌아가고 나면 서재로 가자 싶었다.
라만은 매일같이 별채에 들렀다.
정재의의 말에 따르면 정태의가 오기 전에는 좀더 자주 왔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뜸해진 편이라고 했다.그러나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한 번도 많다.
사실 그에게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용건이라고 해봐야 늘 같은 말이다. 무기를 만들어줄 생각이 이제는 들었는가.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재의의 대답도 늘 같았다.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다.
"난 이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울 수 있을 것 같아."
정태의는 고무나무 아래에 앉아 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흘끔 창을 쳐다보자 역시나, 고개를 젓는 정재의의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잠시 사이를 두고 라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게 갑갑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약간 변화가 있다. 저 말의 기본형은'무기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여기서 내보내주지 않는다'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심하게 배려해주신 덕분에 불편한 것도 없고."
정재의의 조용한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라만의 저 갑갑하지 않느냐는 말 뒤에는 당연히 요구를 들어주면 갑갑하지 않도록 내보내주겠다는 말이 따라와야 했다. 그러나 저런 대답이 돌아가면 할 말이 없어진다.
과연 라만의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
어쩌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정태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언제나ㅡ가끔의 예외는 있지만ㅡ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도 눈은 웃지 않는 그 냉정한 인상의 남자가난감한 얼굴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좀처럼 상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정중하니까 다행이지."
정태의는 입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벌써 몇 달째 허탕을 치고 있었다. 정재의를 데려다가ㅡ잡아다가ㅡ온갖 편의를 아낌없이 제공하며 바라는 것은 외출 빼고 뭐든 다 들어주면서도,정작 그가 바라는 요구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인내에 한계가 올 법도했다. 게다가 언제 수락할지 기약도 없으니, 협박을하거나 거친 방법을 써서 억지로 무기를 만들어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정중하게 예의바르게 최대의호의를 베풀며 정재의를 대했던 것이다.
정태의는 아무래도 저 라만이라는 남자가 좋아지지않았지만, 그 점만큼은 나름대로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금납치범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또 뭐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 무기 개발은 급하지 않은 걸까.
당장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는 해도, 기약 없이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해도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들어 정재의에게 의향을 묻는 그의 모습에는 초조한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시면 말씀하십시오. 그때까지는 모쪼록 편안히 지내시길. 혹시 뭔가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서재에서는 여느때와 같은 대화가 이어지고있었다.이제 정석적인 대화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 그러면 책을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음반도 약간. 여기에 적어뒀습니다. 그리고 슬슬 머리가 거치적거리는데 이발사를 다시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공연히 자주 부르면 귀찮으실 테니 이번에 이발사를 부르면 아주 짧게 깎는 게 낫겠어요."
형도 나름대로 강한 데가 있다.
무심하고 조용한 외견이라, 정재의를 몇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으레 그를 내성적이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리고 정재의는 물론 내성적이고 섬세하긴 했지만, 보통들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다.
그러나 엉겁결에 딸려오고 만 정태의와는 달리 정재의는 비록 납치 감금된 신세는 마찬가지라고 하나 엄연히 '귀한 손님'이었다. 여태껏도 정재의는 가끔 이렇게 원하는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을 했고,그 말은 며칠 지나기도 전에 즉각 이행되었다.
문득 정태의는 뺨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혀를 찼다.
새삼스럽게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지만, 정태의가 이곳에 갇힌 지 며칠 뒤지 않았을 무렵에 서재에서 용수철이 설치된 깜짝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정재의가 거기에서 불시에 튀어나온 용수철에 얻어맞아 뺨에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적이 있었다.
다음날 여느때와 같이 정재의를 찾아왔다가 그 모습을 본 라만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면서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감시인과 하얀 옷의 소녀 하나ㅡ정재의에게 따로 딸려 있는 소녀였다ㅡ를 불러 호통을 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호통을 들은 소녀가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얼른 약을 가지고 안 뒤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정태의는 상당히 뜨악했던 기억이 난다.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은 정재의의 태도가 의외라 나중에 물어보자, 예전에도 한 번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면도를 하다가턱을 살짝 베었는데, 정재의 본인의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날부터 시중으로 다른 소녀가 붙었다. 정재의가 마뜩찮게 몇 마디 하자 라만은 고개를저으며 '면도날을 잘 드는 것으로 잘 갈아놓았더라면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귀한 손님인데 허술함이 있어서야 안 될 말이지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 뒤로 정재의는 다치지 않게 조심한다고, 경악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정태의에게 말했었다.
"저 나라의 사고체계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어쨌든 정재의를 귀한 손님으로 받들어 주고 있다니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지만.
정태의는 원판과는 완전히 딴판이 되어 있는 얼굴을 문지르며 씁쓸하게 혀를 찼다. 아무리 딸려온 덤이라지만 이렇게 태도가 달라서야 원.
정태의는, 자신이 요구해서는 이발사를 불러줄 턱이 없으므로 정재의가 이발사 이야기를 꺼낸 데에 기뻐했다. 그렇잖아도 한동안 겨를이 없어 이발을못 했는데, 이발사를 부르면 자신도 같이 깎아달라고 할까 싶었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필요한 게 생기면 '귀한 손님',형에게 부탁해야겠다. 일단 약부터 좀 부탁해놓자,그리고 뭔가 더 필요한 게 없던가.
……. 전화가 하나 필요하다고 하면……. 그건 아무리 형이라도 안 되겠지.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고작해야 1, 2분이나 했을까 말까한 대가치고는 좀 과하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
정태의는 괜히 멋쩍어져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날 밤, 망가진 얼굴을 문지르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말도 많이 했다 싶었다. 게다가 더 안좋았던 건, 제대로 대답도 못 들었다.
ㅡ너 혹시 나 좋아하냐.
생각해 보면, 자의식 과잉 환자나 할 만한 말이다. 정말로 그런거면 몰라도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면,그런 말을 물어본 스스로의 입을 돌로 찧어야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놈은 어떤 얼굴을 했을까.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그렇다면 정태의는 그 얼굴에서 좀더 많은 걸 알 수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냐. 아니지. 그 대답은 안 듣는 게 나았을 거다.아냐, 내가 잘못했지. 물어보는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별로 좋을 게 없잖아."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예전에도 몇 번이나 얼핏 어라, 하고 생각했으면서도 곧바로 물어보지 않았던 이유가 그거였다.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좌의식 과잉으로 찍히는 거고, 그렇다고 하면.
……. 그러면 상황은 좀더 무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에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에서 나갈 날을 요원하고, 당장 뭔가 닥쳐드는 것도 아니다.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막말로 한 10년쯤 여기에 갇혀서 지낸다면, 대답이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더 여기에 있어야 할까.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흘끔 서재 쪽을쳐다보았다. 그 안에,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될 열쇠를 쥔 두 명이 있었다. 어차피 한쪽이라도 그 열쇠를 내어놓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문이었지만.
"이제 슬슬 갈 때가 됐는데……."
평소의 대화는 한 바퀴 돌았고, 라만은 돌아갈 때가되었다. 정재의가 필요한 것들을 적은 쪽지를 건네어주고 그걸 받아든 그는, 이제 적당히 몇 마디 인사만 하고 돌아가면 되었다.
"……. 여기서 나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라만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까도 했던 말이다. 정태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 번 물은 말을 그 날 안에 다시 묻는 경우는 여태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다시 묻는다는 건, 혹여 그의 상황이 급박해지기라도 한 걸까.
별로 그런 기색은 없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정재의 역시 아까와 비슷한 대답을 한다. 라만은 그렇습니까, 라고 조금 느리게 말을 이었다.
"확실히, 동생분이 온 뒤로는 덜 적적하겠군요. 퍽 사이가 좋으시니."
"예, 뭐……덕분에요."
형, 또 대답이 약간 엇나갔잖아.
'덕분에'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댁이 동생까지같이 가둬준 '덕분에' 덜 적적한 것도 아니다.
정태의는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곧라만은 잠시 침묵한 뒤 인사를 남기고 서재에서 나왔고, 정태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서재 쪽으로 걸었다. 안뜰의 계단을 올라가던 정태의는, 그러나, 조금만 더 늦게 일어설 걸, 하고 후회했다.
서재에서 나온 라만은 잠시 회랑에 멈춰서서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태의가 다가가자 그 기척을느끼고 흘끗 시선을 주었다.
정태의는 움칫, 입매를 찡그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기분 탓…ㅡ은 아니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라만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까이 가면 그 순간 칼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생각이 불현듯 들도록 냉혹하다.
그러나 그대로 멈춰서서 대치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 정태의는 최대한 느리게 걸었다.
"리그로우와 통화를 했다더군요."
라만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신호로 정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소식이 갔을 줄 알았다. 외부와 통화를 시도했다는 말이 그의 귀에 안 들어갈 리는 없었다. 리그로우라는 이름이 나와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던 정태의는 이내 납득했다. 번호가 남아 있는 바에야 상대를 알아내는 건 손쉬운 일이다.
"외부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짓을 했군."
"…ㅡ. 뭐……, 오랜만에 친구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니까요."
정태의는 내심 스스로의 말에 걸리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하나 둘 세어보면서도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내 '친구' 일레이는 내게 '기운'을 복돋어줘요.
라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라. 그렇군. 일레이 리그로우와 링신루였던가요. 당신과 함께 세링게로 왔던 게."
"……."
"그들은 이미 세링게에 없습니다."
라만은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것과동시에, 정태의의 얼굴에서 잠깐 표정이 사라졌다.
일순 자신이 영어를 잘못 알아들었나 했다. 그는 분명 '그들은 세링게 없다'고 했다.
정태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을 언뜻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일레이에게 전화를 한 게 며칠전이었었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아무런 변화도 특이할 것도 없는 단조로운 나날이연이어졌던 터라 금방 꼽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았지만, 사흘, 아니 나흘인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세링게에 없다면……."
정태의는 말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서자신의 표정을 살피기라도 하듯이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미심쩍게 올려다보았다.
거짓말, …ㅡ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손을 썼습니까?"
"내가? 천만에. 그들은 자기 발로 직접 나갔습니다.링신루는 당신이 이곳으로 온 며칠 뒤, 그러니까 그는 나간 지 제법 한참 되었고, 리그로우는 사흘 전나갔지요. 아. 유리 게이블이라는 남자도 있었지. 그는 링신루를 데리고 나갔어요. 제대로 운신을 할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축할 사람이 필요했다고 하더군요."
"예? …ㅡ뭐?"
정태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무심하게 말하던 라만의 얼굴 위로 얼핏 웃음 비슷한 표정이 스쳤다. 그 서늘한 웃음이 정태의의 가슴을 선뜩하게 베고 지나간다.
"링신루와 리그로우의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링신루 쪽이상당히 심하게 다쳐서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ㅡ어차피 한동안은 만날 수 없을 이들이니, 친구가 다쳤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만아플 터라 말하지 않았었지요."
미묘한 어투로 말을 맺는 그는 마치 뭔가 더 알고 있다는 투였지만, 그 이상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니, 어, ……."
정태의는 멍하니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입을 열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좀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복잡하게 뒤엉켜 제대로 된 단어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ㅡ그들은 이미 세링게에 없습니다.
ㅡ링신루 쪽이 상당히 심하게 다쳐서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정태의가 일레이와 전화를 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그때 이미 링신루는 다치고도 한참 뒤였다. 그러나일레이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일부러 링신루가 다쳤다는 말을, 자신과 싸워서 다쳤다는 말을 굳이 할사람이 아니었다. 싸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사소한 일로도 얼마든지 싸울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싸울 만한 이유를 정태의는 앉은자리에서 수백 가지는 꾸며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신루가 다쳤다는 건지. 일레이가 어째서 나갔다는 건지. 갑작스런 말들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있었다. 정태의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정태의를보고 라만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정태의는 그가 자신의 이런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라만은 정태의를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그러나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저는―――나가야겠군요."
정태의는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 잃은얼굴을, 라만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이윽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 유감이로군요. 들어드릴 수 없으니."
* * *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이미 뒤늦은 일이었고, 새삼스러울 수도 있었다.
정태의가 이곳에 들어온 지는 이미 달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이곳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신루가 다쳤다면, 지금은 이미 어떻게든 결론이 났을 거다. 이미 말끔하게 나았거나, 혹은 아직 거동이 불편하지만 적당히 다닐 만하게 나았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어쨌거나 결론은 이미 났다. 정태의가 나가서 살핀다 해도 뭔가 바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정태의는 한 손으로 입과 턱을 덮듯이 문질렀다. 그 손에 초조함이 묻어나오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위험한 지경이라니, 얼마나 위험했던 걸까. 지금은 어떨까. 괜찮을까. 그렇지 않을까.
일레이는 이곳에서 나갔다고 했다. 정태의와 전화를 마치고 거의 사이를 두지 않고였다. 그는 어디로갔을까. 이곳을 떠나.
"……."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억측만 수만가지나 피어올라 마음을 어지럽힌다.
흐트러진 마음은 손끝에 나타났다. 입술을 문지르는 손가락에 초조하게 힘이 들어갔다.
나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가고싶었다. 그런데도 기약 없이 잡힌 몸이라니. 아니, 어쩌면 지금 당장은 참아낼 수도 있을 거다. 며칠 이곳에서 더 갇혀 있다가 나간다면 그건 참을 수도있었다. 이성은, 이미 그가 나간다 해서 바뀔 사태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초조하게 태우며 새카맣게 그을려들었다.
……설마 큰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게이블이 부축해서 나가야 했을 정도면 그리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게이블이 있었다면심각하게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았을 거다.
……부디.
정태의는 어느 순간 아픔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니 검지의 둘째 마디를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살짝 꺼풀이 벗겨져 불그스름하게 부어 따끔거렸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진정해, 정태의. 알고 있잖아. 동요해봐야 도리 없다고. 진정해."
정태의는 가슴께를 두드렸다. 심장 위, 그곳을 조금세게 두드린다. 그러나 그래도 가슴속을 새카맣게 태우는 상념이 그치지 않았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둑한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차라리 중정의 연못에 아예 숨이 막혀 기절할 때까지 머리를 박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그러나 회랑으로 발을 내딛다가 조금 놀라고 만다.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태의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저물어드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르고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계속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정신 제대로 챙겨야지, 정태의. 마음 가라앉히고."
정태의는 혀를 찼다.
좋지 않았다. 넋을 놓은 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만 젖어 있는 것이 정신에 얼마나 지대한 악영향을주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처 알아차리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고뇌는 마음을 파먹어 병들게 한다.
정태의는 다시 심장 근처를 조금 전보다 좀더 세게,몇 번이나 두드렸다. 그러다가 문득 중정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못 옆에 반듯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정재의다. 해저물녘의 하늘에는 새가 수십 마리,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키우는 듯했다. 별채와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건물에 머무르는 누군가, 오랜 시간을들여 야생의 새들에게 모이를 주면서 길들였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주어지는 모이에 익숙해진 새들은 이렇게 해저물녘이면 그리로 모여들어, 그 누군가가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는 대로 둥글게 선회한다. 하늘 위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휘도는 새떼. 저만치 어디선가 휘이, 새를 모는 늙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재의의 머리 위로, 중정 위로 새떼가 지나갔다. 머리 위로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수없이 뒤섞여 스쳐갔다.
정재의는 그 정경을 좋아했다. 정태의 역시 좋아했지만, 아마도 정태의보다는 정재의가 훨씬 그 모습을 좋아했을 것이다. 언제나 이 시간이면 그곳에 앉아, 그는 그들이 머리 위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머리 위를 뒤덮는 날개소리들이 스쳐가기를.
그는 이곳에서 평생 이렇게 갇힌 채 머무른다 해도 틀림없이 불평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중정으로 다가갔다. 그 발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정재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 오래지않는 이 짧은 시간에, 어쩌면 저 새들과 함께 하늘을 휘돌아들고 있는지도 모를 시간에, 그는 오롯이젖어 있었다.
정태의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그도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수천 수만장의 종이가 펄럭이는 것과도 같은 웅장하고도 상쾌한 소리가 머리 위로 스쳤다. 한 번, 그리고 한참 있다가 또 한 번. 간간이 노을 저편에서 휘이, 하는 구성진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들었다. 손톱만큼 남은 해가 쏜살같이 넘어가자, 날은 삽시에 어두워졌다.
담장 너머의 누군가도 들어가고, 새들도 흩어졌다.
그곳에는 청보랏빛으로 물들어 점점 짙은 쪽빛으로바뀌어가는 하늘과, 어둠만 남았다.
"머리, 그렇게 길어 보이진 않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길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저분해보이진 않아. ……그래도 이발사를 부르면, 내 머리도 좀 잘라달라고 그래야겠다."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정재의를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정재의는 이제 텅 비어버린 하늘을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가, 그제야 정태의를 바라본다. 생각해 보니 아침식사를 한 뒤로 정재의와마주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실에 있었던 탓이다.
그리 넓지는 않고 활동 반경도 한정되어 있는 이 별채 안에서는 낮 동안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으레 몇 번은 마주치게 마련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정재의는 뭔가에 집중을 하면 며칠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 정태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발사라……."
정재의는 생각이 다른 데에 가 있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도 들리는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아, 하고 말을 덧붙인다.
"아침에 서재에 가려다가 그 남자가 먼저 들어가길래, 안뜰에서 기다렸거든. 형, 이발사를 불러달라고했잖아. 짧게 깎아버리겠다며."
"응. 그렇지. ……괜히 불렀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재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그를 말끄러미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깎기 싫어졌어? 그럼 나라도 깎지 뭘. 안 그래도 앞머리가 내려와서 귀찮다 싶던 참인데."
"그건 아니고…ㅡ."
정재의는 입을 열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그시 정태의를 본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 어슴푸레한 공기 속에서, 정재의의 표정은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이, 그리고 아직도 생각에 잠긴 듯이, 그는 정태의를 보았다.
"……?"
정태의는 의아한 빛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저 표정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혹은 생각이 정리는 되었으나 어떤 식으로 말을꺼낼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말해 봐."
"나갈까, 태의야."
정태의가 고갯짓을 하며 먼저 말문을 트자, 정재의는 그 이상은 망설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을 잃었다고 해야옳겠다. 그는 물끄러미 정재의를 바라보며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갑자기 왜, 라고 어리둥절하게생각하다가 이내 깨달았던 것이다.
라만과 정태의가 나누었던 대화가 아마도 그에게도 들렸던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별채 자체가 하나의 트인 공간이었다. 문이나 덧문이 있다 하나 구분을 한다는 의미 외에는 없었다.
"……. 나가고 싶어?"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 없이 그에게 반문했다. 정재의는 글쎄, 하고 중얼거렸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어."
"그래……. 그럼 나갈까."
"네가 바란다면."
정재의의 대답은 간결했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어느 순간 살짝 낯을 찌푸리며 머리를긁적였다.
"나가는 건 좋은데, 어떻게 나가려고."
"글쎄……어떻게든."
정재의는 그다지 고민하는 빛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하긴 정태의는 정재의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떠한 선택을 눈앞에 두고 묵묵히 생각에 잠기는 일은 있을지언정, 괴롭다는 의미가 내포된 '고민'은 정재의의 몫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 것이, 정태의가 아는 한 정재의는 뭔가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기적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기뻐할 일도그에게는 일상과 같았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도 만일 그가 원한다면 인근에 지진이라도 나서 담벼락이 무너져 아무런 어려움 없이 걸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운을 자신이 그에게 가져다주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납득할수가없었지만.
"……."
정태의는 한숨처럼 웃으며 그를 보았다.
그러나 정재의의 행운은 그가 기대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어떠한 일을 바랄 때는그 일을 이룰 방법을 구상한다. 그러면 그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일상에서의 그의 행운이었다. 그렇기에, 정태의는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형. 무기 만들어주려고?"
정태의가 조용히 물었다. 정재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정태의는 담담히 웃었다. 그 웃는 숨결에 조용한 한숨이 섞인다.
"형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까지 나가려는 게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사실은 나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좋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정재의에게 그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정재의에게서는 얼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시선이 다가왔을 뿐이다.
정태의는 그 미묘한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살짝입매를 찡그렸다. 그러자 정재의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그렇게 의지가 굳은 인간도 아니고, 딱히 도덕률에 얽매인 인간도 아니야. 네가 상관없다면 나는 무기를 만들어도 괜찮아. 네가 그 일을 싫어하지 않고 내가 그 일을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한 것뿐이야."
정태의는 희한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눈만 깜박이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그가 말하는 것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납득도 할 수 있었다. 분명 그가 말한 대로, 정재의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천성 자체가 그리 비뚤어지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굳세고 곧은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때로 도덕 윤리가 애매하게 흐려진 부분도 찾을 수 있었다.
정태의의 기묘한 얼굴을 바라보던 정재의는 조용히말을 덧붙인다.
"네가 나가고 싶지만 나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리라생각한다면, 나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닐지라도 너를위해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
"……. 하지만 사실은 무기, 만들기 싫잖아."
"내가 상관하지 않는다면, 나는 좋아. 네가 싫어할테니까 하기 싫을 뿐이었어."
"……. ……음……. 확실히 형이 무기를 만드는 건,내가 싫긴 하지. 하지만 말이야……."
정태의는 으음,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주름진 미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정태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형도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분명 형이 무기를 만드는 게 내키지 않고, 형을 만나면 볼을 한 번 꼬집어 주려고도 했었거든. 그런데……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정재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아주 약간 크게 뜬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그를 보고쓰게 웃었다. 뭐야, 진짜 몰랐냐, 하고. 그러자 정재의는 웃었다.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저릿하게 움츠러들었다. 언제였던가. 누가 말했었던가.
ㅡ정재이가 너보다 불안과 고뇌를 더 많이 앓으리라는 점일까. 그런 게 인간적이라는 거지.
그래. 일레이였다.
어쩌면 그는 바깥에서, 정태의가 선 자리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저마다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고, 그 자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정태의는.
"……."
조금 아쉬운지도 몰랐다. 그가 볼 수 없는 정재의의어떠한 면을, 그는 아쉬워했다. 틀림없이 그것은 아름답고 애틋할 터였다.
그것은 타인이 손을 댈 수 없는, 오롯이 자신만이 감내해야 하는 면이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정재의에게서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가 좋았다. 누구에게든, 누구를 향해서든,가장 가까운 자리는 원한 적 없었다. 가장 적당한 거리. 사람마다 다른 그 자리를 정태의를 바랐다.
"너라면."
어느 순간 정재의가 입을 열었다. 한 순간도 시선을떼지 않고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물었다.
"네가 내 위치에 있다면. 그러면 너는 무기를 만들고서라도 여기에서 나갈까."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론을 내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러나 그 생각을 마치고서도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정재의가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았기때문이다. 그리고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정재의는, 그리고 정태의 역시, 알고 있었다.
* * *
ㅡ나갈까, 태의야.
"어……, 응……."
정태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자신이 그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침실이었다.
"어……?"
정태의는 다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세 번째로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바로 조금 전에 그렇게 말을거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침실에는 정태의 혼자만 누워 있었다.
그제야 그는 꿈을 꿨다는 걸 겨우 알아차렸다. 잠에서 깨기 직전에 꾼 꿈이 몹시 생생했던 것이다.
아……하고, 한숨인지 기지개인지 알 수 없을 숨을내쉬며 정태의는 일어나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아직 잠이 미처 가시지 않는 눈을 반쯤감고서, 손을 옆으로 뻗어 더듬거렸다. 침대 옆의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물병이 손에 잡혔다.
물병을 들어 그 부리에 곧바로 입을 대고 물을 마시면서 어렴풋한 머리 한구석으로 '이러다가 리타에게 들키면 잔소리를 엄청나게 들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깨어나는 머리로 ,하지만 리타는 없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천천히 물을 목으로 넘겨 서너 모금을 마시고 나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태의는 조금 전 꿈결에 들었던 목소리가 그냥 꿈만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냈다.
나갈까, 태의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 말 그대로, 정재의가 정태의에게 말했었다.
"……."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어떠한 결론을 짖지는 않은 채, 그들은 그곳에서 완연한 어둠을 만났다. 머리 위로 다시 쏟아질 듯한 별이 바삭거릴 때까지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혀 상관도 없고, 하잘 것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던것 같다. 예전, 둘만 있을 때 곧잘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그립기도 한, 담담한 시간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유리물병을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고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바깥에서 오가는 인기척을 느끼곤침대에서 나왔다.
시간은 평소보다 약간 일렀다. 아직 새벽의 부연 공기가 미처 다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이른 새벽도 아니라 천천히 아침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새벽 공기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침실에서 나선 정태의는 새벽과 아침의 공기가 뒤섞인 회랑에 서서 물끄러미 중정을 바라보았다. 그가운데 연못에 물결도 없이 고요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그 위로는 노랗고 빨간 꽃이 한 송이씩, 연꽃처럼 떠 있었다. 아마도 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같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은 언제나 정태의가 일어나기 전의 이른 새벽에 연못 위에 꽃을 띠우고, 화병의 꽃을 갈고, 침실을 제외한 다른 곳을 닦아놓았다.
정태의도 별다른 일이 있지 않으면 늦게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곳에서는 언제나 그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 해도 감시 역할의 아랍 남자와 그에게 딸린 청년, 그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집안을 다듬어 두지만 때때로 회랑을 스쳐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하얀 옷의 여자들 두엇이 고작이었지만.
하긴 부지런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람의 아래에서 일하기는 힘들지, 정태의는 갓 갈아꽂은 게 분명한 회랑의 화병 앞을 스치며 생각했다.
꿈결에서까지 정재의의 목소리를 들은 탓인지, 절로 발걸음이 그의 침실로 향했다.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어제의 화제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재의 형, 들어간다."
정재의의 침실 앞에 다다른 정태의는 덧문 앞에서 외치곤 문을 열었다. 저만치, 회랑 끝에 우뚝 서서이쪽을 쳐다보는 감시인 아랍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저쪽에까지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저 무뚝뚝한 아랍 남자는 오늘도 별다른 반응을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약간 고개를 끄덕인다.
정태의는 픽 웃으며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 딱딱한 얼굴을 한 아저씨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고ㅡ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언어를 못 알아들었지만ㅡ그들을 감시하는 입장에 있긴 하지만, 그 주인 되는 남자만큼 재수 없지는 않았다. 이제 조금 있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별 일이 없으면 그 남자는 또 찾아올 거다. 찾아와서 할 말도 뻔했다.
"좋게 말하면 끈기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끈질긴 거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침실로 들어간 정태의는 두어 걸음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침대가 비어 있었다.
어,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회랑 안쪽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역시나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보다 일찍 일어나는 정재의는 새벽에는 대체로 회랑의 연못 옆에 앉아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정태의가 침실에서 나왔을 때에 회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침실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침실도 비어 있다.
"……."
정태의는 검지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물끄러미 빈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기웃하며 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평소와는 하루의 시작이 좀 다른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 의아해할 건 없었다. 반드시 정해진 일과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건 아니었고, 가끔 정재의는 예측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곤 했다.
어차피 가 봐야 별채 안이다. 회랑이나 침실에 없다면 나머지는 안뜰이나 서재, 욕실 정도일까. 아직 식사 시간은 되지 않았으니 식당에 가지는 않았을테고.
정태의는 서재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로 가는 길에바깥쪽으로 난 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안뜰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서재에 있든가 아니면 욕실에 있든가 둘 중 하나다.
새벽의 산책이라도 즐기듯이 한가로운 걸음으로 서재에 이르른 정태의는, 그곳에서 정재의의 모습을발견했다.
"여기 있었구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정재의를 보고 정태의는 웃으며 그리로 다가갔다. 뭔가 한창 적고 있던 정재의는흘끗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더니 "응, 일어났어?"라고 짧게 인사하곤 다시 책상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목소리뿐 아니라 얼굴도 나른했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안색을 살피곤 약간 입매를 찡그렸다.
"혹시 안 잤어?"
"음……."
정재의는 건성인 양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정재의는 예전에도 곧잘 밤을 새곤 했다. 원래 뭔가하나에 집중을 하면 침식을 잊는 성격이었다. 책을보거나 골똘이 생각에 잠긴 채로 밤을 새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정태의는 밤중에 자다가 깨어화장실에 가거나 할 때에 그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정재의의 방에 부스스한 얼굴로 가서 '아직 안 자?'라고 중얼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별채에 있으면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격리된 이 조그만 낙원에서 정재의는 평온하고 규칙적인 삶을 지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밤을 샌다고 해서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쩐 일로 또 밤을 샜어. 그렇게 몰두할 거라도 있었어?"
정태의는 정재의의 등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면서 어깨 너머로 책상 쪽에 시선을 준다. 정재의가 붙들고 골몰하면서 밤을 샐 만한 종잇장이라면 정태의가 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종이 위에 빼곡하게 적힌 정재의의 고뇌의 흔적들을 보는 걸 정태의는 좋아했다.
그러나 정재의가 책상 위에 수십 장이나 켜켜이 펼쳐놓은 종이들을 보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가 그린 것처럼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그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들은, 종이를 더해감에 따라 점점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게 다듬어져갔다. 그리고 그 종잇장마다 적혀 있는 알 수 없는 수식과 부호들은 종이를 더하면서 점점 세분화되어, 복잡할 부분은 더욱 복잡하게, 단순화될 부분은 더욱 단순화되어 여백을 채웠다.
"이거……."
정재의가 다르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정태의였지만, 그 그림과 글들이 뭔지는 이내 알아차렸다. 예전에 몇 번인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때에는 그것이 실제로 매매될 물건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제 이것 때문에 밤샜어?"
정태의는 그림 가운데 가장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종이를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그림 자체는 어설프고 유치했지만, 그 내용물이 뭔지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부의 기본 골격만을 명확하게 그려넣은 그 그림은, 대전차포였다.
그러나 곧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어쩌면 대전차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그림은 그가 알고 있는 대전차포와는 달랐다.
일단 포신 부분이 지나치게 가늘고 짧았다.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물건을 예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탄을 충분히 받쳐줄 만한 길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 무기는 위력이 그리 대단치 않을 터였다.
무게를 경감시키거나 휴대성이 좋을 수는 있을 테지만 이래서야 무기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어긋난다. 아니,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조금만 더 손보면 끝나. 잠시만 기다려 봐. 아침 식사 전에는 마치고 싶으니까."
정태의는 표정을 잃은 얼굴로,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정재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된다. 고작해야 하룻밤, 그 사이에 무기를 고안해서 기본 설계까지 짜낼 수는 없었다.
"재의 형, ……형 정말 천재였구나……."
그러나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정태의는 곧 정신을 차렸다. 내성이 있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정재의는 믿기지 않는 일을 여럿 해치웠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라니, 지나치다 싶지만.
정태의의 얼빠진 목소리에 정재의는 흘끔 그를 보았다. 그리고 머쓱한 듯 아주 약간 얼굴을 어색하게찌푸리더니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손을 계속 움직이면서 말한다.
"아냐. 예전부터 생각은 해 뒀던 거야. 그냥 생각했던 걸 적어서 조금씩 손만 보는 거니까 그리 대단치않아."
"……."
정태의는 손에 든 종잇장을 팔락거리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의자로 가서 앉아 물끄러미정재의를 보았다.
ㅡ나갈까, 태의야.
어제, 중정에서 정재의가 조용히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도 그 말을 입밖으로 내는 순간부터, 이렇게 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태의가 '나가고 싶지 않다'라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ㅡ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뜻을 굽히더라도ㅡ나가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태의는 금세라도 그의 어깨를 붙잡고 싶어지는 오른손을 가만히 눌렀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그만하라고,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손이었다.
ㅡ네가 나가고 싶지만 나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리라 생각한다면, 나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닐지라도 너를 위해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
그 말은 분명 정재의의 본심이다.
그렇다면 정태의가 말리는 것이 오히려 그의 뜻에 어긋난다.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정태의 역시그의 위치에서는 같은 일을 했을 테니.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왼손으로누른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왼손을 뗐다.오른손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힘을 풀었다.
"……. 외형을 특이하고 멋진데……. 그거, 실제로 쏠 수 있겠어?"
정태의는 정재의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마 지금도 정태의의 기척에 신경쓰고 있을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정재의는 잠시 손을 멈추는가 싶었다.그러나 곧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해 정태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수십 초 가량 뭔가를 더 적어 넣더니, 이윽고 팬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태의를 돌아본다.
그는 잠시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힘이 빠진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서, 정태의는 그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정태의의 기색을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정재의는 조금 전에 필기를 해넣었던 종이를 집어들어 훑어보면서 말했다.
"쏠 수 있어. 어지간한 동급의 포보다 더 편하게 쏠수 있을 거야. 위력면에서는 크게 특이할 만한 점이없이 보통이겠지만, 일단 휴대하기 편하게 만든 연발식이니까, 제법 요긴하게 쓸 수 있을걸."
"응?"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이게 연발식 대전차포라고?! 포탄은 어디에 장착할 건데. 이 길이의 포신이라면 장착이 마땅치 않을텐데."
정태의는 정재의가 그려놓은 어설픈 그림을 다시금노려보았다. 혹시 그림을 너무 어설프게 그려서 내가 못 알아보는 건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뜯어보았지만 역시나, 연발식일 수가 없는 구조였다.
"음. 그러니까 이 포에는 전용 포탄이 필요해. 그건요전에 설계식을 적어뒀던 게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거든. 이만한 크기의 일반 사이즈 탄두인데, 연발로 세 번, 위력을 약간 줄인다면 다섯 번까지 터뜨릴 수 있을 거야. ……속이 쓰리다……. 아침부터 먹고 올까. 거의 다 끝났으니."
정재의는 심상하게 말하며 손으로 포탄의 크기를 가리켜 보이더니, 위장께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거의 완성에 가까운 설계도와 펜을 집어들고식당으로 향했다.
정태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재의라는 인물을 과소평가했던모양이다. 자신의 형이 시대의 총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태의가 잘 이해하지 못할 종잇장들을 늘어놓곤 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ㅡ비록 예전부터 생각을 해뒀다고 하더라도ㅡ저만큼이나 물건을 완성시키다니, 게다가 더 심상한 태도를 보면 저 정도는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과연……, 저 정도면 기구에서 혈안이 돼서 찾을 만도 하지. 나라도 납치 감금해 놓고 부려먹고 싶겠다."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재의는 여전히 심상한 얼굴 그대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끔 종이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삭제하거나 첨가해 적어놓곤 했다. 그렇게 해서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다됐다."라는 말과 함께 펜의 뚜껑을 닫았다.
정태의는 질린 얼굴로 픽 웃고 말았다. 집중하면 밤을 새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피로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는 정재의를 그는 지그시 바라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여, 마지막 한 술을 떠 자신도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온 정재의는, 밤을 새고난 다른 때라면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로 갈 텐데도,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정태의는 그를 따라가며 의아하게 물었다.
"좀 자지 그래. 피곤하지 않아?"
"음. 약간.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라만이 오면 이걸 주고 바로 나가자. 그러려면 짐을 챙겨둬야지.애초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가지고 나갈 만한 내물건은 거의 없지만."
정태의는 약간 걸음을 늦추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묻는다.
"바로 나가다니. 오늘 오전에?"
그러자 도리어 정재의가 이상하다는 듯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 조금이라도 빨리나가고 싶은 것 아니었어? 기왕 나가기로 했으면 빨리 나가는 게 낫잖아."
평연하게 말한 정재의는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그러모아 그 중필요한 것은 따로 가려놓고 나머지는 묶어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 외에도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 원래 있던 자리에 놓고, 하다못해 자신이 앉았던 의자의 방석까지도 털어내어 천자락을 정돈했다.
자신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그 말끔한 정리를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책을 꽂거나 하는 간단한 정리를 도왔다. 잊고 있었던 건 아닌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하는건 오랜만이라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정재의는 늘 평연하고 조용하게, 시간과 공간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택하거나 결정한 일에는 서슴지 않고 움직였다.급하게 서두르는 것과는 달리, 의지에 반한 시간의낭비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행동력이 좋은 줄은 몰랐지만, 결정한 일은 속전속결로 끝내는 점은 예전에도 그랬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다른 자리에 놓여 있던 마지막 책 한권을 책장에 꽂았다. 정재의 역시 책장 위에 놓여 있던 마지막 펜 한 자루를 서랍에 넣고 그 서랍을 닫는 참이었다.
다라락,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나면서, 정돈이 끝났다. 잠깐, 서재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더 이상 이곳에는 정재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것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곳이 그의 장소가 아니었던 탓인지도 알 수없었다. 자신의 물건이라고 애착을 가졌던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이 서재는 오로지 '빌린' 것이었다. 그가 라만에게 부탁해서 받은 책도, 음반도, 다른 물건들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않았다.
정태의는 잠시 그 주인 없는 서재를 둘러보다가 물었다.
"방에는. …ㅡ침실에는, 챙길 거 없어?"
정재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도 내 물건은 없어,라고 말한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정재의는 애초에 납치되어서 이곳으로 끌려온 셈이었다. 그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게 남아 있을 리 없다.
정태의는 "그래,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냥 몸만 나가면 되겠네."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권이나 돈 따위는 모두 백패커에 남겨둔 채로 왔는데, 돌아가면 그대로 있겠지.
문득,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묵었던 곳이다. 마음에 들고, 어쩌면 사랑스럽게까지 한 공간이었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평온한 곳에서 다시 머무를 시간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돌아올까. 이렇듯 낙원과 가까운 곳에서.
나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그들의장소가 아니었다.
"자, 그럼…ㅡ. ……잠깐. 그런데 여권은."
정태의는 불현듯 생각난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정재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생각난 듯이 둥그러니 눈을 뜨고 가만히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그게 없구나."
"어디 뒀는데."
"바라나시까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정신을 잃고 여기에서 눈을 뜬 뒤로는 까먹고 있었네."
나갈 일도 없어서 전혀 생각을 안 했어, 라고 중얼거리는 정재의를, 정태의는 잠시 흰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내 흠,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야 라만이 손써주겠지. 무기만 주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고도 했었고."
저 남자가 당당하게 말할 만한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이라면 분명히 막대하다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여권 하나 정도 어떻게 해 주는 건 별 문제도 안 될거다. 정태의가 뭔가 잊어버린 건 없나 자신의 짐들을 떠올려 보는 옆에서, 정재의가 무심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이라……. 별로 필요 없는데. 또 유전 같은 걸 주면 귀찮기만 하고."
음, 하고 정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정태의는순간 멈칫했다.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뭔가 자신이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뭘 줘?"
"유전. 예전에 하나 받은 적이 있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거 권리서가 있구나. ……. 태의 너 혹시유전 필요하지 않아? 너 줄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귀찮다는 듯이 심상하게 말하는 정재의를, 정태의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빤히 쳐다보았다.
유전이라. 유전이라면 역시 그거겠지. 중동에서 펑펑 솟아나는 그 까만 황금.
"……. 그걸 형이 받았다고? 누구한테?"
"라만이. 규모가 그리 큰 건 아니지만 제법 쓸 만한거라고 주던걸."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정재의를바라보았다. 정재의가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말해.나는 필요 없으니까."라고 말했지만 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러니까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입에 문 놈들에게 편견이 생기고야 말지…….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차피 가둬놓았으니 줘본들 아무 소용도 없는데 그런 걸 주는 놈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삭막하고 서늘하게 생겨먹은 얼굴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지간히 형의 환심을 사고 싶었나 보지. 그렇게 무기가 필요했나. ……그런데도 만들어달라는 건 안 만들어주고 태평하게 놀기만 했으니, 그 남자 용케도 화 안 내고 참았군."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정재의는 가만히웃었다. 그래서 만들어주잖아, 라며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둔 종잇장을 두드린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건, 이제 나갈 수 있다. 나가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만나고픈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문득 손끝이 움찔 떨렸다.
머릿속을 스치는 사람이 하나.
이곳에서 나가면 아마도 가장 먼저 연락을 할 사람이다.
"……. 결국 나는 정신분열 못 고치고 가네……."
정태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썩 기분이나쁘지는 않았다. 피식,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그때였다.
저만치 회랑 끝에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묵직하면서도 선뜻한 걸음이다.
정태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발소리는 이윽고 한 사람의 모습과 함께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군요."
외례적인 인사말을 먼저 던지며 들어온 사람은 라만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이었다.
서재로 들어서던 그는 정태의의 모습을 발견하곤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같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얼굴이다.
하긴 여태 정태의는 서재에 볼일이 있더라도 라만이 올 시간이면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다른 곳에있다가 그가 돌아가고 나면 서재로 가곤 했다.
"형제분들이 우애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라만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여느 때라면 내키지 않았을 그 웃음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뜩찮게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은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라만이 말하며 정재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여느때와 같은 말을 읆조리는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다소 분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이 남자의 손에 무기를 안겨준다는 것이 못내아쉬웠다. 그가 바란 것은 무기 자체가 아니었다. 무기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정재의라는 이름을 탐내었던 것이다.
저 남자에게 정재의라는 이름이 이용당할 것을 생각하면, 비록 정재의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해도 정태의는 기분이 씁쓸해졌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태의는 입맛이 씁쓸해졌다. 약간은 표정을 흐린다.
그러나 정작 이름을 이용당하게 될 정재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 따위에는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투다.
오히려 지금 정재의는 기분이 좋은 듯도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태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던 남자에게 어찌 되었든 그 뜻을 이루어줄 수 있다는 데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심경인지도 몰랐다.
정재의는 웃음 지었다. 평소의 어렴풋하거나 담담한 웃음이 아니다. 정말로 기꺼운 듯이 웃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라만이 멈칫했다. 오히려 그의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정재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 몇 장을 집어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예전에 말씀하셨던 바에 맞추었습니다. 대전차포를 원하신다고 하셨었지요. 아마 따로 손볼 것없이 이대로 쓸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첫장은 여기 적어둔 대로 탄두의 구조이고……."
종잇장을 넘기며 정재의가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익숙한 사람이 보면 이내 파악할 수 있게 적어두었다고 말을 덧붙이면서, 정재의는 그의 눈앞에서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종이를 넘겼다.
그러나 라만은 종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평소의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표정하나 남아 있지 않은, 선뜩해 보이기까지 하는 무표정한 얼굴이 정재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한쪽 옆, 창가 의자에 앉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분하게 여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틀림없이기꺼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땅히 기꺼워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그런 표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매일 이곳을 드나들면서도 좋은 대답을 얻지 못했으니 이렇듯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도 못하게 떨어진 기대의 충족을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 탓일까.
예닐곱 장 가량 되는 종이를 하나씩 넘기며 모두 설명을 마친 정재의는 그제야 그의 표정 없는 시선을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잠시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던 정재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서 말을 이었다.
"개략적인 내용이지만 꼭 필요한 것들은 기록해두었으니 아마 전문가가 보면 따로 첨언할 필요 없이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혹여 애매한 점이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이곳에서 나가면아마도 곧 집으로 돌아갈 테니, 그리로 연락주시면됩니다."
정재의가 말을 마치며 종이들을 라만에게 넘겨주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정재의를 바라보던 그는,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종이 위로 떨어뜨렸다.
"어제만 해도 거절을 하셨던 것 같은데……이걸 하루만에 마쳤습니까?"
라만은 조용히 말했다. 종이를 넘겨보는 그 느린 손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냉정한 눈으로그 내용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의례적으로나마 띠고 있는 웃음조차 없었다.
"아, 예전에 생각해두었던 것이 있어서 그걸 약간 손봐서 정리했을 뿐입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웃음이라곤 온 데 간 데 없이 냉랭하게 굳어진 라만의 표정을 보며, 정재의가 의아하게 물었다. 라만은마지막장까지 다 훑어본 뒤 종이를 덮으며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외한인 제가 봐도 대단히 쓸 만한 물건이 나올 것 같군요. 훌륭합니다."
라만은 겉치레라고는 할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겉치레가 나올 수도 없는 완성물이었다.
정재의는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다행이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는 정말로 기쁜 얼굴이었다. 정태의는 정재의를 보면서, 어쩌면 그도 이곳에 머루는 동안 그렇게 온전하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생각을 했다. 하긴 저 남자는 정재의가 원하는 것이라면 매사에 아낌없이 퍼부어댔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는다 해도,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다는데 전혀부담스럽지 않았을 리는 없다.
정태의는 어차, 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에게ㅡ정확히는 그들 너머에 있는 문 쪽으로ㅡ한걸음 다가섰다.
"그럼 슬슬 가자, 재의 형.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태의는 라만과 정재의의 사이를 뚫고 지나듯이 스쳐 문을 향해 나아가며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에라만과도 눈이 마주쳐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도 했다. 그다지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남자였지만 그렇게 크게 피해를 본 것은 없었다. 게다가 감금을 하긴 했으나 생활하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함도 없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라고 진심을 담아 인사를 한 정태의는문 앞에 섰다. 그리고 정재의가 나오길 기다렸다.
정재의는 잠시 동안 말없이 라만을 쳐다보았다. 그가 내어준 설계도식을 한 손에 든 채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라만과 시선이 마주치자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덕분에 불편하지 않게 지냈습니다. 언젠가 다시 뵐때까지 건강하시길."
그러나, 그렇게 인사를 한 정재의가 걸음을 떼려고할 때였다.
"지금 바로 나가는 겁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요."
라만이 가볍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약간 뒤로 물러서며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옮긴 정도였지만, 걸음을 내디디려던 정재의는 앞이 막혀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그간 오래도록 모셨던 귀한 손님을, 하물며 이토록훌륭한 선물까지 주셨는데 이대로 보내서는 제 체면이 안 설 일이지요."
라만이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문 앞에서 정재의를 기다리고 있던 정태의는 약간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결에 라만의 얼굴에는 다시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거슬렸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볼일이 있어서요. 그 동안 지나친 후의를 베풀어주셨으니 이 이상은 받지 않아도 이미 과분합니다."
정재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약간 옆으로 비껴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번에도, 라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좀더 옆으로 기울여 정재의의 앞을 막았다.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정재의도 미미하게 표정이 굳었다.
한 번이라면 그렇다 칠 수 있지만 두 번이라면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태의는 그들을 향해 돌아서며, 자신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는 라만에게 느릿하게 말을 걸었다.
"지금 어쩐지 길을 막고 있는 것 같은데…ㅡ."
"이런, 그랬습니까?"
라만은 흘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은 평소와 같았다. 입매는 웃고 있으니 눈매는 섬뜩할 만치차갑다. 그는 천천히 다시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재의는 애매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라만이 진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 없이 이 정도의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생각을 잘못했다는 말씀은……?"
정재의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나 정재의의 희미하게 찌푸려진 눈가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보내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얼마든지 더 나은 것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게 되니,적에게 유리해질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사전에 막아야겠지요."
라만의 나직한 대답이 고요한 서재 안에 선명하게 퍼졌다. 잠시 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가운데 선선한 웃음을 띠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라만뿐이었다.
"이거 너무한데……. 말이 다르잖습니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요즘 운수가 워낙 사나워야지. 그래도 형이 함께 있으니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운수 사나운 내 팔자가 더강하다면 좀 서글픈 일이다.
정태의의 못마땅하며 힘없는 항의에도 라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그는 정태의에게서 등돌리고 정재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를 기다리는 듯.
정재의는 한동안 침묵했다. 시선을 떨어뜨려 라만의 가슴께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는 더 이상은 무기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드린 것이, 아마도 마지막이 되겠지요.그러니 다른 사람이, 당신이 제게 했듯이 같은 것을요구하고 받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라만은 낮게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사람의 말이란 믿을 수 없는 겁니다. 그 증거로 당장 지금을 보아도, 더는 무기를 만들지 않으리라 하던 당신이 이렇듯 새로운 무기의 도식을 내게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태의가 어이없다는 듯하, 하고 한숨 섞어 외쳤다.
"그런 논리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수도 없는걸요. 자신의 말을 굳건히 지키며 무기를 만들지 않으니 평생 가둬두든가, 아니면 한 번 말을 어겼으니 앞으로도 계속 말을 어겨 다른 데에 무기를 만들어줄 수있으니까 계속 가둬둔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 이 양반아, 라고 모국어로 덧붙이며,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러나 라만은 물러설 뜻이 없는 듯했다. 그저 고개를 젓는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정재의가 입을 열었다.
"라만. 당신은 제게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바라는대로 무기를 넘겨주면 그 즉시 이곳에서 내보내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을 하리라고. 보상은 필요없습니다. 이미 당신에게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저는 그저, 전자의약속을 이행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 점은 사과드리지요. 내가 생각을 잘못 했습니다."
라만은 태연히 자신의 말을 어기며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이대로 저 남자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봤다간 울화병이 생길 것 같아 등을 돌렸다.
예상치도 못 했다. 설마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라만이 말한 대로, 그가 바라는 것을주면 그 길로 바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이런, 어처구니없는 난관이 닥쳐오리라곤.
"거, 왕족쯤 되시면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태의는 묵직하게 속이 얹힌 듯해 가슴께를 쓰다듬으며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뒤통수에 얼음 같은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을 깨는 것은 나로서도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위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면 위신을 깎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어깨 너머로 라만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한 번 속이 울컥 치밀어오른다.
이래서 다이아몬드 숟가락들은 상종할 종자가 못 돼. 이래서.
정태의는 아무래도 수정되기는 틀린 듯한 편견을 곱씹으면서, 치밀어오르는 속을 다스렸다. 자신이 뭐라고 말한다 한들 씨가 먹힐 것 같지도 않아 등을돌린 채 무거운 가슴만 두드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보내주시겠습니까."
정재의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라만이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내 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현명하군요. 다른 방도의 제시라……."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정재의를 내려다본다. 정재의는 말없이그의 생각이 끝나고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라만은 약간의 사이를 둔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유감이지만 마땅히 그럴 듯한 대안이 없군요. 내게뭔가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 주시기를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물론 여태껏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지내시는 데에는 아무런불편도 없을 겁니다. 그것만큼은 저와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라만은 그 이상은 다른 이견을 듣지 않겠다는 듯, 거기까지 말을 맺고는 걸음을 돌렸다. 그럼 편히 쉬시길,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방에서 나오던 그는방 앞에 등을 돌리고 선 정태의의 옆을 스쳤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의 목을 부퉁켜안고 거기에 칼이라도 들이대어 협박이라도 하면……, 하고 잠시 정태의는 흉악한 생각을 했지만, 유효하게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아 생각이 떠오른 시점에서 이미 단념했다.
정태의는 흘끔, 옆을 스쳐가는 라만을 보았다.
라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중정을 가로질러 서편 회랑 끝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이윽고 그의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고 그 문이 다시 굳게 닫혀이 고요한 공간을 다시 바깥과 격리시켰다.
정태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정재의가 우두커니서 있었다.
"……. 안 내보내주겠다는데."
어떻게 말문을 열까 고민하다가, 정태의는 정재의도 이미 번연히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중얼거리며어깨를 으쓱했다. 정재의 역시 이런 상황은 생각지못한 듯했다. 그의 표정에 언뜻 약간의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될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정태의의 의견을 구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정태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 앞의 땅바닥에주저앉은 채,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정재의는 문득 정태의를 보았다. 약간 우울한 듯이 앉아 있는 정태의를 본 그는 이윽고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숨결만큼이나 조용하게 말한다.
"괜찮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정태의는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위로하는 빛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뭔가 달리 좋은 수라도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어쨌든, 만인이 눈독들여 마지않는 천재적인 인물이아니던가.
묵직하게 우울함에 젖어 있던 마음이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정태의는 정재의를 마주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면 가르쳐 줘."
"아니, 방법은 없는데……, 나갈 수 있을 거야."
정재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심상하게말했다.
정태의는 빤히 그를 보았다. 문득 뭔가 어렴풋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유도 없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라면…ㅡ.
"……왜."
"네가 나가고 싶어하니까. 그래서 내가 나가고 싶으니까."
정재의가 아무렇지 않는 듯,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 말이 과도한 허풍도, 근거없는 자신감도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다.
정태의가 일순간이나마 형을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태의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소리내어, 한참을웃는다. 일시에 울화도 우울도 날아가버렸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이 조그만 낙원 안에 갇혀 있었고, 이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논리적인 방도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하는 수 없지, 다른 방도가 생기겠지, 뭘',하는 태평한 얼굴로, 한 번도 생활이 얽힌 문제에 있어서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을 정재의를 바라보면서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정재의의 무시무시한 운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과의 상관성을 떠나서, 그의 그 운을 헤아릴 수도 없이 봐 오지 않았던가.
정태의는 한참 웃어도 여전히 웃음이 걷히지 않은얼굴로 정재의를 보았다.
사실, 정태의는 정재의의 그 기적적인 운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미리 기적을 기대하며 기다릴 만큼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운이란 것은 아무리 숱하게 거듭되어도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고굳은 확신을 가지고 철석같이 믿는 건 아니었지만,그럼에도 분명히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정재의가 가져다주는행운인지도 몰랐다.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되기 딱 5분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일어났다. 정재계의 요직에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해 무차별적으로, 그들의 거처에 소규모 폭격이연이었다.
그 범인도 목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날이 밝았고, 분쟁 지역인 중동 내부에서도 비교적 안전 지대였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는 발칵 뒤집혔다.
20. 탈출
눈을 뜬 순간 정태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듯해 눈을 뜨자아직도 바깥은 어두컴컴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다. 잠기운이 미처 가시지않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정태의는 다시 눈을감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멀찍이서 들리는 소리였다.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다.
정태의는 눈을 떴다. 머리맡을 더듬어 시계를 집어들었다. 아직 새벽 3시를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침대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별채의 회랑은 고요했다. 중정도, 안뜰도, 실내의 다른 방들도 쥐 죽은 듯이 고요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곳은 별채의 담장 너머, 별저의 다른 건물들이었다. 가끔 가까운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 부산하게 달려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잠든 이들을 깨우는 듯한 그 목소리는 멀리서,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고요한 곳은 별채뿐인 것 같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두고 나뉜 이쪽과 저쪽은 평소에 격리되었던 그대로, 지금도 격리되어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정태의는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중얼거렸다. 혹시나 시계를 잘못 봤나 다시 확인했지만 조금 전에 본 데에서 몇 분 정도 지나 있을 뿐이었다.
비정상적인 소란이었다.
이 시간에, 저 담 너머에서는 숱한 사람들이ㅡ어쩌면 별저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이ㅡ깨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모두들 다 함께 어디론가 갈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정태의는 중정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얼어 시커먼 어둠 속에 묻혀 있는회랑으로 시선을 주었다. 서편 회랑 끝의 문, 한밤중이라도 언제나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그곳은 지금도 한 사람쯤 있을 법 한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성큼성큼 그리로다가간다. 하지만 문을 두어 번 밀어보다가 혀를 차고 말았다. 문은 바깥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뭐야, 이게.밖에서 불지르면 꼼짝없이 다 죽겠네."
정태의는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 해도 이래서야 나갈 수 없다. 바깥에서 걸어놓은 빗장을 풀 도리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땅한 도구도 없이 쉬이 부술 수 있을 만큼 허술한 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이런 시간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이고 있다면 어지간한 일은 아닐 터였다.
정태의는 잠시 턱을 문지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바깥과는 전혀 달리 고요함으로 감싸인 별채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무엇하나 없었다. 마치 별채 안에 정태의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정태의는 불현듯, 정말로 홀로 동떨어진 것만 같아정재의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중정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정재의의 침실에 막 다다르기 직전에 그 안에서 정재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재의도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흐트러진 차림새로,그러나 졸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중정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만히 바깥의 소리를 듣는다.
"…….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태의."
"나도 좀 시끄럽다 싶어서 막 방금 일어났어. 저 소란은 그리 오래 되진 않은 것 같은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간이 지나도 인파의 술렁거리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커지는 듯싶었다.
"불이라도 났나."
새카만 밤공기를 보며,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재의는 생각에 잠긴듯 말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생각해볼 수 있는 거라곤 몇 가지 정도였다. 밤중에 갑자기 귀빈ㅡ저 정도의 인파가 다 떠들썩하게 일어날 정도라면 어지간한 귀빈은 아닐 거다ㅡ이라도 예고 없이 들이닥쳤든가, 혹은 떼강도 같은 침입자라도 들이닥쳤든가, 그렇지 않으면 숱한 사람들이 모두 일어날 만한 어떠한 참변이라도 벌어졌든가.
정태의는 다시 회랑 안을 돌아보았다.
바깥과 선명하게 구분되어 적요한 별채 안에는 그들밖에는 움직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멈추어 있다. 시간도, 소리도, 공간도. 마치 그들밖에 없는 것처럼.
그때였다.
소란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듯, 보다 조그만 무리의소란이 이리로 가까워졌다. 담장 너머로 다가온 발소리 여럿은 낮게 수군거리는 목소리들과 함께 이쪽으로 가까워진다.
그 발소리는 서편 회랑 끝의 문 너머에서 멈추었다.대여섯 가량의 인기척이 거기에 있었다. 곧 절컹, ㅡ덜걱, 묵직한 소리가 두 번 연달아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며, 마치 저편의 소란이 이쪽으로 옮아들어온 것 같았다. 별채 안은 여전히 고요했는데도 그문 사이로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선 사람은 별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깨우러 오기라도 한 듯 다소 급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두어 걸음 들어오다가 중정에 나와 있는 정재의와 정태의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주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일어나 있었군요. 여기까지 시끄럽던가요?"
라만이었다.
그는 하얀 토베와 구트라를 두르고 있었다. 이 깊은밤중에 멀리 열사의 나라에서 갓 도착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이제 막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모래 내음이 풍기는 차림으로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정태의의 얼굴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무심하게 그 위를 스쳐 정재의를 바라본다.
"잠시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지금 곧 본국으로 가봐야 할 듯 합니다. 아마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겁니다."
깊은 밤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엔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 불안스럽게 술렁이는 바깥의 분위기에는 조금도 잠식되지 않은 냉엄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자세하게는 가 봐야 알겠지만 무장 테러가 일어났다고 하는군요. 특정인ㅡ고위 요직에 있는 사람들ㅡ을 노린 테러라, 무장이 가능한 자 몇몇을 데리고잠시 본국에서 상황을 살피다 와야 할 것같습니다."
라만은 평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남자의 본국이라면 간간이 테러 위협을 받기는 하나 그나마 중동 지역에서는 상당히 치안이 안정되어 있는 나라일 터였다. 그런 곳에서, 특정 계층을 노렸다면 종교 관련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크고 작은 분쟁이ㅡ메스컴에서 잡지도 않을 소규모의 테러까지도ㅡ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땅이라고 하지만, 차라리 종교 지도자를 잡았더라면 좀더 이해하기 쉬운 일이었을 텐데.
"모쪼록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정재의가 조용히 인사했다.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그를 내려다보던 라만은 문득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입술을 달싹이는가 했지만, 그의 입은 결국 열리지않았다. 그럼 이만,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그는 서슴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왔던 그대로 다시 돌아나갔다. 단순히 인사를 하러만 들른 듯이.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깥에서 잠기지는 않았다. 라만의 뒤를 이어 네댓 명의 사람이 들어와, 그 중 하나가 문 앞에 섰던 것이다.
평소에 그 자리를 지키는 아랍 남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야윈 남자다. 달리 들어온 사람들은, 두엇은 낯익은 얼굴이고 두엇은 낯선 얼굴이었다. 무장이 가능한 자 몇몇을 데리고 간다는 게 그 뜻이었던 모양이다. 쓸 만한 자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생각해 보면 이곳은 그의 별장이었다. 이곳에주인도 없는 동안 무장 경호를 세워두는 편이 더 이상했다. 그러니 그가 돌아가는 동안은 무장 경호도같이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처럼.
아마도 원래 있던 자들만큼의 솜씨는 되지 못할 새얼굴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태의는 곧 한숨과함께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들의 솜씨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어지간한 초보가 아니면 어차피 안쪽에서 그들을 밀어넘기고 나가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정태의는 딱히 싸움의달인인 것도 아니라 그저 남만큼ㅡ혹은 일반적인 남들보다는 약간 더ㅡ싸움에 익숙할 뿐이었고, 정재의는 싸움이라는 면에서는 결코 쓸 만한 전력이되지 못했다. 한 사람이 아무런 도구도 상황적인 제약도 없는 상황에서 네댓 사람을 상대해서 넘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애초에, 그렇게나 솜씨 좋은 놈들로 여기를 지키게 한 게 좀 우스웠지."
이 평화로운 휴양의 섬에서, 설령 온세상에서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휘말릴 만한 이 외딴 섬에서 무슨 분쟁거리가 그렇게 일어날 거라고, 싸움꾼을 줄줄 넣어두었단 말인가. 그들은 지금처럼, 라만을 따라 본국으로 가서 분쟁에 대비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별채에서 나간 라만은 그 길로 바로 나간 듯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별저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점점 그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윽고 별저 안에는 불온한 정적이 찾아들었고, 별채 안은 사람의 면면이 바뀐 것만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요에 잠겼다.
"……. 외부에 나가 있는 놈들까지 불러들일 정도라면 사건이 제법 크게 났나 보지."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나라의 지도자층을 대상으로 한 테러라. 목적도정체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정재의를 흘끔 보았다.정재의는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태의는 물끄러미 정재의를 바라본다.
어쩌면 뭔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이를테면 테러가 아니라 쿠데타라서 정변이라도 난다거나 하면……. ……저 나라가 우리 나라도 아니고. 어차피 혈투가 나봐야 다 같은 혈족 안에서 노는 나라인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침실로 걸음을 옮기며, 아직도 동이 트려면 제법 더 있어야 할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별은 쏟아질 듯 많아,잠시 시선을 앗기운다.
지난밤에는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일단 잠든 시간부터가 늦었다.
기껏 나가리라고 생각했는데 무산된 뒤, 설마 이곳에서 평생 있어야 하지는 않을 테고 언제쯤 기회를노려 나갈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라만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울컥 치미는 통에 잠을쉬이 이루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잠들면 제법 푹 잘 자는 편인데 지난밤에는 때아닌 소란에 새벽에 다시 잠을 깨었다. 두어 시간을 그렇게 어수선한 소란 속에 있다가 날이 밝기 얼마 전에 잠들었다.
그러니 정태의는 졸릴 만했다. 원래 일찍 깨는 편이지만 이런 날은 늦게까지 자도 괜찮다. 이런 날이 아니더라도 시간은 썩어날 만큼 많은 요즘은 하루종일 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종일은자려야 잘 수 없었지만.)
그렇게 때문에 정재의가 정태의를 깨웠을 때, 그는어라, 하고 잠에 취한 채 생각했다. 얼핏 잠결에 누군가 건드린 것 같아 눈을 뜨자 정재의가 침대 곁에앉아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 남짓.
평소에 일어나는 것보다 더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정재의가 깨울 만큼은 아니었다. 예전에, 저녁에 일찍 잠들었는데도 오후 3시까지 일어나지 않자 걱정이 되었는지 정재의가 두드려서 깨운 뒤로 정태의는 정재의가 깨워서 일어나 본 적은 없었다.
"왜."
정태의는 손가락 마디로 뻑뻑한 눈꺼풀을 누르며 일어났다. 흘끔 다시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며, 충분히 자지는 않았지만 슬슬 일어날까 생각했다.
"바깥이 시끄러워."
정재의가 조용히 말했다.
워낙 심상하고 태평한 어조라 정태의는 잠시 그의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바깥이야 이 시간이면 그럭저럭 소란스러울 만도 하지. 어젯밤에 소란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떠들어대는가 보지 뭐. 어차피 별채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바깥이 시끄러워 봐야……."
정태의는 별 걸로 사람을 다 깨운다는 듯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지는가 싶었다.
그리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동시에, 정태의는 말을흐렸다.
바깥이 시끄럽다.
정재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언뜻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얼핏,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멀리서 무거운 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익숙한 소리였다. 예전에 익히 들은 바 있는소리다.실제로 직접 들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 군대에서나UNHRDO에서 전략전술 관련 강의를 들을 때 자료영상을 보게 되면 흔하게 터져나오는 소리였다.
포탄 소리다.
대물무기, 아마도 대전차포나 박격포에 비등할 만한 위력을 가진 무기의 소리와 몹시 비슷했다.
그러나 설마, 잘못 들었겠지. 이 평화롭고 무난무탈한 섬에서 무슨 포탄 소리가 날 일이 있다고. 설령저 바다 너머 본토에서 전쟁이 일어나 탄자니아령의 온 영토가 다 전화에 휩싸이더라도 이 섬까지 거기에 휘말려 포탄이 날아다닐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정태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여전히 시계는 8시 남짓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식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할 평화로운 시간이다.
"마른하늘에 날벼……아니 날천둥인가. 날씨는 좋은데 어째 천둥소리가……, ……포탄 소리랑 되게비슷하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빤히 정재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우울해졌다.
오늘 왜 이래. 새벽ㅡ이랄까 한밤중ㅡ에도 갑자기바깥에 떠들썩하니 난리가 나서 사람 잠을 깨워놓더니, 이제 아침이 되니 익숙은 하나 상쾌하지 못한소리가 또 잠을 깨운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잠들기 어렵다는 게 아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 웅장한 소리는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뿐 아니라 얼마 있지 않아 그 소리에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따위가 섞이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설핏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깥으로 나갔다.
침실 밖으로 나가자 그 요란한 소리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담장 너머 상당히 멀리에서 아득하게, 온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곳에서부터불이 번지듯이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며 드높아졌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이렇게 연달아 터지는데 그걸잘못 들으면 그는 예전에 군인이었다는 말을 어디 가서 절대로 하면 안 된다. UNHRDO라고 해도 빈축을 사기 딱 좋았다.
"좀 전의 그건 어째 박격포 소리 같은데……."
격발 소리와 타격음의 시간차가 거의 없는 걸 보면아마도 경박격포, 혹은 대전차포……이제 기관총 소리까지 들린다. 그리고 그 소리는 별저 전체로 번져나가, 온 곳곳에서 하늘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와포탄 소리가 들렸다.
"어이어이, 사람이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이러면 어쩌란 말야."
정태의는 낮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당연하게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대물 파괴용 무기 앞에 통할 만한 무기가 딱히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러나 정태의에게는 조그만 호신용 단총 하나, 아니 나이프 하나조차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포탄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만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유가 된 테러와 연관이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ㅡ동일한 날에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동일한 특정층을 대상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더 어렵다ㅡ,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요격을 한다고 해도, 상대가 가장 타격을 입을 만한장소를 노려 적확하게 깨부수는 게 모든 전투의 상식이었다. 이렇게, 막말로 집채가 통째로 다 날아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는다 해도 윈선에는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휴양용 별장 따위를 공격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정태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슬쩍 낯을 찌푸렸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기묘한 기시감마저 느껴진다. 이런 조용한 아침. 사람들과 함께 모여 그 고요 속에 잠겨 있는데 그 정적을 찢어발기면서 들어왔던 엔진 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벽 한켠이 완전히무너져내린 집.
지금 현재와 비슷한 거라곤 조용한 아침을 찢어발기는 요란한 소리라는 점뿐이었는데도 등줄기가 오싹한 이 이상한 기시감이 온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하니.
…ㅡ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봐, 사방에서 펑펑 터지는 저 소리를 봐도 그렇다. 혼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게 아니라면, 동시다발로 사방에서 포탄이 터질 수야 없는 법이다.
정태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슬슬 문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설마.
만일 정태의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그놈은 정말로 미친 게 맞다.
점차 가까워진 포탄 소리는 이윽고 별저의 가운데쯤까지 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담장 바깥과는 언제나 격리되어 있는 별채, 지난밤의 소란에도 마치 다른 세상인 듯 담장 안쪽만은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던 이곳의 중정에도 동요가 번지고 있었다.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혹은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안에서 상주하는 사람들이 당혹스럽거나 겁에 질린 얼굴로 회랑 근처를 기웃거렸다. 성질 급한 남자들은 벌써 총을 빼들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별채에서 나가 대체 별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변을 당하지는 않았는지확인하고 싶은 듯 초조한 기색에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맡은 임무가 있기에 차마 곧바로 뛰쳐나가지는 못하고 망설이던 그들은, 이윽고 결심한 듯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두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문 쪽으로 화급히 뛰어갔다. 뒤에 남은 두 사람은 금세라도 쏠 수 있도록 무기를 손에 쥔 채 정태의와 정재의를 딱딱한 시선으로 살폈다.
그때였다.
세 남자가 밖으로 뛰쳐나가려 문을 연 순간, 마치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이 덮쳐왔다.
예측도 못한 일이었다.
성대한 굉음은 제법 거리를 둔 곳에서 울려오고 있었고, 별채의 바로 근처는 아직 불온한 평화에 잠겨있었다. 설마 그 바로 앞에서 누군가 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공격하리라고는,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다.
정태의가 서 있던 곳에서는 문에 가려져 잘 보이지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고함에 가까운비명을 질렀다는 것이고, 뒤이어 듣기에 섬뜩한 소리ㅡ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ㅡ들이 들려왔다.
남자들의 안색이 대번이 굳었다. 손에 들고있던 장총을 거머쥐고 문 쪽을 향해 내갈기기 시작했다.
삽시에 별채는 귀청을 찢는 총 소리로 가득 찼다. 불안한 얼굴로 회랑까지 나와 있던 하얀 옷 소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정태의는 낯빛을 바꾸며 정재의를 잡아당겼다. 그를 회랑의 아름드리 기둥 뒤로 밀어버리고 자신도 그 옆으로 들어갔다.
혀를 찼다. 저런 위험한 소리를 들으면서 멍청하게중정 가운데까지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실내로 달려들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움지이는 표적이되어 저들을 자극시키면서까지 실내로 도망쳐 들어갈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형이라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테니 그냥 보내버릴까.
정태의는 흘끔 정재의를 보았지만, 정재의는 정태의의 마음속을 짚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전혀 긴장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시끄러운 것만이 거슬리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을 뿐이다. 갑작스럽게, 불현듯, 그 사실이 몹시 이질적이라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덩달아 자신까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행운의 별 아래 태어나 어떤 상황에 처하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 행운을 내가 주었다니 거 기쁘고 뿌듯하긴한데, 그럼 남은 문제는 나란 말야. 정작 나는 그런행운이 없거든."
정태의가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재의가 시선을 들었다. 아마도 사방에 난무하는 총소리며 비명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한 듯 의아한 얼굴을한다. 정태의는 웃으며 손을 저어 보였다.
정태의가 기둥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을 때, 상황은 반쯤은 정리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감시하며 회랑과 중정을 서성이던 남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다눈히 초장에 얻어맞고 기절한 듯이 보이는 남자도 있었지만 제법 심각해 보일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정태의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문 안으로 밀고 들어온 네댓 명의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전문인 자들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ㅡ혹은 사람을 해치는 일에ㅡ익숙해져 있는 자들 특유의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다.
정태의는 일순 어라, 하고 생각했다.
특이하게도 그들 모두가 동양인이었다. 생김새로 보아 아마도 중국계―――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그들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태이 형!"
반가운 듯, 그러나 미묘한 무게감을 담고 선뜻 외치는 그 목소리를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남자들을 밀쳐내고 그 사이로 다가오는 그 여유롭고 경쾌한 걸음도 눈에 익다. 정태의를 본 순간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는 그 얼굴도.
"……신루."
정태의는 일순 허를 찔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허를 찔렸다기보다 넋이 빠졌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조금도. 손톱만치도,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정태의의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루는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건강하게 잘 지내셨어요?"
"……어."
"그날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언질이라도 주고 가셔야지, 형이 갑자기 막 달려가서 얼마나 당황했는데요. 사람들을 헤치고 뒤늦게 쫓아갔더니 이미 형 모습은 보이지않고."
신루는 문득 토라진 듯이 입술을 내밀며 토달거렸다. 정태의는 그 말에도 "어……", 라고 얼빠진 소리를 읆는다. 그런 정태의를 바라보던 신루는 문득 묘하게 웃었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얼굴이네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어……, 아니, 그건 아니고……."
정태의는 희한한 표정으로 신루를 바라보았다. 신루는 정태의의 기억에 있는 것과 똑같은 얼굴로 미소지으며 정태의를 마주보고 있었다.
뭘까. 뭔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달라진 데는 없는데, 신루를 마주보고 있는 동안 정태의는 어째서인지 가슴속이 서늘하게 식어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신루를 뚫어져라 살펴봐도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만 기웃거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했나요?"
신루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여전히 웃음을 띤 목소리였지만 아주 약간 느려진 음색이 정태의의 마음을 뜨끔하게 잡아당긴다.
그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은. 너 혼자 왔어?"
"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같이 왔지요. 아버지가알아봐주신 분들인데 아주 솜씨가 좋으시거든요."
신루는 "저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왔겠어요." 라고 웃으며 덧붙이면서 뒤에서 회랑 구석구석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경계하고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어, 그래,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 정태의는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신루의 어깨를 덥썩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니, 너, 다쳤다면서! 괜찮아?"
신루는 갑자기 정태의가 화급하게 붙잡자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눈을 약간 크게 뜨며, 그 눈으로 빤히 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또다. 뭔가, 뭐랄까, 미묘하게 어긋난 듯한 느낌. 그러나 뭐가 어긋났는지는 알 수 없는.
신루는 곧 웃었다.
"어떻게, 아셨네요. 이 안에 갇혀 있어도 바깥소식이 들리기는 하셨나 봐요."
"아니, 네가 상당히 심하게 다쳐서 위험한 지경까지갔었다고, 그 말만 들었는데……."
정태의는 신루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서 천천히 신루를 훑어보았다. 신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니, 마음껏 보라는 듯 양팔까지 벌렸다. 옷을 입어서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움직이는데에 불편이 없어 보였다.
"…ㅡ괜찮아?"
"아. 지금도 통원치료 다니고 있어요. 뼈 몇 군데 부러지고 내장 좀 상했는데, 이제 다닐 만해요. 살갗찢어졌던 것도 다 아물어들었고. 거의 나았어요. 달리 다친 거야 뭐 그냥……."
신루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더니 빙긋 웃었다.
정태의는 뚫어져라 신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린다.
"다행이다……. 나는 일레이랑 다퉈서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고 해서, 혹시…ㅡ."
정태의가 말을 하다가 끝을 얼버무리자 신루가 웃으며 그 말을 잇는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걱정하셨어요? 아하하, 죽을뻔은 했어요. 형이 그렇게 사라지고 그놈이 며칠 동안 온 세링게를 다 헤집으면서 난리를 치다가, 나중에는 제 분을 못 이겼는지 저한테 왔더라구요. 제가어딘가 숨긴 것 아니냐며, 아니란 걸 뻔히 아는 주제에 그냥 사람을 아주 잡는데…….죽는 줄 알았죠.아마 게이블이 그놈을 따라와서 말리지 않았더라면죽었을걸요."
신루는 남 이야기를 하듯이 태평하게 웃었다. 정태의는 그런 신루를 겸연쩍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곧 다시 한숨을 내쉰다.
갑자기 마음에 여러 겹으로 얹혔던 묵직한 돌 가운데 한 겹이 내려온 것 같았다. 아직도 돌덩이는 여럿 남아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무거운 축에 들던돌이 하나 사라지고 나니 살 것 같았다.
"그래……, 다행이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때, 신루가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정재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문득 신루의 눈이 고양이가웃는 듯 가늘어졌다.
"아하……, 이 분이 그, 정재이 씨군요."
정재의는 보일 듯 말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루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청하며 인사했다.
"링신루입니다. 태이 형이랑은 UNHRDO에서 만났어요."
정재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정재의입니다."라고 자기 이름만 말했다. 그리고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는 듯했지만,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잠시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좀체 나오지 않는듯한 애매한 침묵이다.
그 짤막한 침묵을 깬 것은 신루였다.
"그럼 늦기 전에 가 볼까요. 자칫하면 만사 다 망쳐버리니까."
"응……?"
신루는 한 걸음 물러서며 열린 문을 고갯짓했다.
정태의는 어, 그래, 하고 엉겁결에 따라나서다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별채의 담장 바깥쪽에서는 여전히 폭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 별저에 해묵은 원한이라도 있다는 듯이온 건물을 다 때려부술 기세로 울려퍼지는 그 폭음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루는 정태의보다 한 걸음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서고 있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정재의를 재촉해 정태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 가까워지는 폭음에 귀를 기울인다.
"신루, 그런데 사람들을 얼마나 데려왔기에 아예 이 별저를 때려부술 것처럼 저렇게……. 나중에 곤란하지 않겠어?"
"예? 아아, 저 소리요."
신루는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린 신루는 대답 없이 서편 회랑 끝의 문을넘어갔다.그리고 그 뒤를 따라 정태의도 문을 나선다.
이 별채에서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 별채 밖의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곳에 들어올 때에도 물론이 문으로 들어왔을 테지만 그때는 정신을 잃고 있었던 터라 보지 못했다.
별채 바깥은 드넓은 정원이었다. 아니, 정원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정원처럼 보이도록 깔끔하게 다듬은정원수가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야트막한 정원수 너머로 저만치 떨어진 곳에 널찍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에 가리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에도 어렴풋이 또다른 건물이 보였다. 정태의가 갇혀 있었던 별채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 별저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었던 듯, 약간 바깥쪽으로 외벽 담장이끝이 보이지 않도록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신루는 그 외벽의 안쪽, 별채와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나 있는 외문 쪽으로 걸었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빠른, 그러나 어쩌면 즐거운 듯 경쾌한 걸음이었다.
정태의는 이미 별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물에까지 다가온 폭음에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문득, 옆에서 걷고 있던 정재의가 조용히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몇 걸음 앞에서 가는 신루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태의야. 저 사람…ㅡ."
그러나 그때.
바로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렸다. 땅이 울리고 공기가 부르르 떨릴 만큼 엄청난 소리에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낯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도 태연한 듯은 하나 약간 어깨를 움츠리거나 고개를 움칫한다. 문득 신루가 걸음을 늦추었다. 한두 걸음 정도까지 정태의와 거리를 줄인 신루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볼일 마쳤으면 굳이 부술 것 없잖아. 어서 사람들을 물리는 편이 나을 텐데."
"저 사람들은 제가 물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신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곤란한얼굴로 웃어보였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물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니, 그럼 저건…ㅡ."
그때 또 한 번의 폭음이 울렸다. 퍼억 깨진 건물벽이 와르락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태의는 고막을 울리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감싸쥐었다. 그쪽으로 잠깐 시선을 준다.
그리고 그때.
정태의는 보았다. 새끼손톱만하게 보이도록 멀찍이떨어져 있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한 손으로 몰며, 한쪽 어깨에 경박격포를 걸머지고, 그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한참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남자는 아직 이쪽을 발견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눈앞으로 다가온 건물을 향해, 그 위치를 가늠하는 듯 잠깐 주위를 보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의 어깨와 턱으로 지탱된 경박격포가 커다랗게 진동하는가 싶더니, 그 앞의 건물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일…ㅡ."
"맞아요. 아마 저 남자만 저들을 물릴 수 있겠지요.하지만 지금은 물려봐야 별로 남아날 것도 없을 거예요. T&R의 예전 기동대에 있던 괴물들을 다 끌어모아 왔으니까 이제 이 별저는 못쓴다고 봐야 할걸요."
넋이 나간 듯 걸음을 멈춘 정태의의 뒤에서, 신루의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서, 신루가 웃고 있었다. 즐거운 듯이 그가 말을 잇는다.
"저렇게 화려하게 때려부숴서 사람들이 다 저쪽으로 간 덕분에 저야 도움 받은 셈이죠, 뭐. 그 덕에 편하게 태이 형을 빼냈으니까."
"같, 이 온 거 아냐?"
"제가요? 설마."
정태의가 띄엄띄엄 말하자 신루는 어이없다는 듯이웃음을 터뜨렸다. 고개까지 내젓는다.
"어서 가요, 형. 저 남자 눈에 띄면 빠져나가기 힘들테니까. 아직 이쪽을 보지 못한 것 같으니 이 틈에 어서 나가자구요. 문 바로 앞에 차 세워뒀으니까."
신루가 정태의의 손목을 잡았다. 온유하게 웃는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거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쉽게 뿌리칠 수도 없이 단단히 움켜쥐며, 신루가 정태의르 잡아끈다. 그러나 정태의는 신루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신루가 잡아끄는 손목에 힘을 주고 버틴다.
"아니. 전에도 말했을 텐데, 신루. ……나는 너와 가지 않아."
정태의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루는 그런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 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등 뒤에서는 연이어폭음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이에는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놓인다.
신루는 기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어쩌면 즐거운 것도 같았다. 혹은 화난 듯도, 슬픈 듯도, 혹은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신루는 천천히 정태의의 손을 놓았다. 정태의는 풀려난 손을 거두며 물끄러미 신루를 본다.
"신…ㅡ."
정태의가 신루의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잠깐신루가 정태의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정태의의 뒤쪽에서 커다란 물체가 무너지는 듯한 묵직하고 조용한 소리가 들린다.
정태의는 얼핏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들의 제일 뒤에서 그들을 엄호하듯이 따라오던 중국 남자가, 눈을 감은 채 무너져내린 정재의를 한쪽 팔로 받아들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은 뭔가 약물이 묻은 듯한 수건을 정재의의 얼굴에 덮어씌우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길상천의 가호를 받은 행운아라도 약이 통하긴 하는군요. 하긴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라나시에서 그렇게 감쪽같이 납치당하지도 않았을테지."
정태의가 정재의에게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중국 남자는 느릿하지만 익숙한 손짓으로 군용나이프의날을 세웠다. 그리고 정태의가 잠시 멈칫하는 틈에신루의 뒤쪽, 외문으로 향했다. 정태의는 그 남자와 자신의 사이에 가로막듯이 서 있는 신루와 대치했다. 신루는 짐짓 걱정스럽다는듯이 정태의의 어깨 너머로 저만치에 보이는 조그마한 사람 그림자를 쳐다보더니,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웃었다.
"어서 같이 가요, 태이 형. 정재이 씨가 차에 먼저 타고서 형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정태의는 묵묵히 신루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신루가 난처하다는 듯이 낯을 흐렸다.
"화내지 마세요, 태이 형. 저한테는 달리 남겨진 카드가 없단 말예요."
"……. 신루. 말해두자면, 재의 형은 인질로서의 가치는 빵점이야. 저 사람은 납치 감금되어도 세상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산 사람이라고."
"아하하, 그랬어요? 하긴 여기가 알 사우드의 별저였지요. 돈이야 썩어나도록 많다 못해 땅속에서 펑펑 솟구치는 사람이니까 그럴 만도 했겠네. 그런데전 그럴 만큼은 돈 없어요. 인질은 그냥 인질인 거죠."
신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질은 그냥 인질, 결코 유순한 처우가 주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의미가 내포된 그 말에, 정태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쉰다.
"재의 형은 죽이거나 해치려 든다고 당할 사람이 아니야. 납치를 당하든 유괴를 당하든 사고를 만나든,심지어 일레이 저놈이 총으로 쏘았다는데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사람이라고."
그 말에는 신루도 놀란 듯했다. 잠깐 웃음을 지우며눈을 크게 뜬다. 그러나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잔잔히 웃었다.
"대단하군요. 하긴 그 행운은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그렇다고 그 행운을 끊어놓자고 태이 형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것 곤란하네요."
신루는 곤란한 듯 으음, 하고 중얼거렸다. 정태의의어깨 너머로 넘어간 그의 시선이 약간 옆으로 음직였다. 정태의는 신루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일레이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저만치 뒤에서 부웅, 귀청을 찢는오토바이 소리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 놀라운 행운 때문에 그를 죽일 수는 없다면…ㅡ죽지는 않을 정도의 가벼운 해는 어떨까요. 이를테면 아편이라든가. 아까 보니까 약물은 통하는 것 같던데……."
"신루."
정태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낯빛이 조금 더 굳어진다.
소용없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정재의는 협박이라는게 들어먹히는 인간이 아니라고, 정태의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크게 위험하다고 여기며 불안해할 어떤 사고를 맞닥뜨려도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의는 눈앞에서 정재의를 미끼로 내거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재의는 한결같이 정태의를 위했다. 바로 요전, 본인이 기꺼워하며 원치는 않았음에도 그는 정태의를위해 라만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것은 빚으로 여긴 건 아니다. 정태의가 그의 입장이라 해도 마땅히그랬을 일을, 그 역시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태의는, 역시나 정재의라면 마땅히 했을 그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태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신루는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태이 형. 내가 말했었죠. 나는 형이 길상천이라서 좋아한 게 아니라고. 분명 그 때문에 흥미는 가졌을지언정 그 이유만은 아니었어요. …ㅡ그러면 이번에 그 말을 증명할 수 있겠군요. 형을 길상천으로 둔 저 놀라운 행운을 지닌 천재가, 내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통하든 통하지 않든, 나는 얼마든지 그의 살을 가르고 뼈를 베어낼 수 있어요. 나한테 저 사람은 태이 형의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가치도 없으니까. 저 사람을 아편굴에 밀어넣고 가둬버리는 일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있던 그는, 이윽고 조용히말한다.
"신루. 내 말을 이해했던 게 아니었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아. 적어도 내 정신은."
이미 신루에게 말했었다. 몇 번이나.
UNHRDO을 나오기 전에도, 세링게에서 만났을 때에도, 바헵의 그 무너져가는 성터에서도.
정태의는 신루를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다. 처음에 보았을 때의 그 풋풋하던 모습도, 이제는 저 안에 비뚤어진 마음을 숨기고 있는 웃음도, 정태의가 사랑스럽게 여기는 신루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은 신루가 바라는 감정이 아니다. 정태의가 신루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신루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신루 역시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신루는 정태의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어떠한 수단으로든.
신루는 조용히 말한 뒤 입을 다무는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득 신루는 약간 웃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웃지 않아, 그 표정은 기묘하게균형이 맞지 않았다.
"태이 형. 나는 형이, 내가 바라는 걸 내게 주지 않으리란 걸 알아요."
신루의 목소리가 정태의의 귀에 닿는다. 신루는 으음,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고민은 하지 않으나 그저 말을 망설인 건지도 모른다.
"나는 뭔가 확실한 게 필요해요, 형. 확실하게 형이내 몫이 아니라는 뭔가가 필요해요."
정태의는 신루의 한숨 섞인 말을, 표정 없이 듣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정태의의 그 표정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문득 신루가 웃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는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정태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저 남자가 아주 지독하게 미워요. 소름이 끼치도록."
나직한 웃음으로 말을 맺는다. 너무 좋다는 고백이라도 하면 차라리 어울릴 목소리로 속삭인 신루는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뒷걸음질친다.
"처음에는 나와 약속했던 걸 어기고 형을 빼앗아가서 미워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런 기억들과 상관없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 자체가 끔찍하게 미워요. 생각만 해도 눈앞이 빨개질 정도로."
신루는 검지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 까만 눈이 고양이처럼 웃었다.
한 걸음씩 천천히 물러선 신루는 이제 정태의에게서 제법 멀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철창을 질러놓은의문에 가까워진다. 외문 밖에는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까만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문 바로 옆에서 신루는 멈추어섰다. 거기에서 그는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십여 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데 너무도 먼것 같았다.
"태이 형. 이쪽으로 와요. 형의 발로. 그렇지 않으면나는 과연 정재이의 행운이 어디까지인가, 내 목숨을 맡기더라도 시험해보고 싶을 거예요."
정태의는 말없이 신루를 바라보았다.
그때, 신루의 시선이 정태의의 어깨 너머로 살짝 옮아갔다. 무언가를 본 듯 그 시선이 고정되는가 싶더니, 이어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그때.
"태이!"
등뒤에서, 아직 한참은 떨어져 있을 그 멀찍한 어느 곳에서, 정태의를 부르는 커다랗고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정태의는 몸을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겨우 모습을 분간할 수 있을까 말까 싶은 곳에서, 굉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그 오토바이에 올라탄 라이더의 얼굴이 다가왔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그 남자가 거기 있었다.
똑바로 정태의를 보면서 다가온다.
어깨 위에 걸머졌던 경박격포가 번거로운지, 이제는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포신이 마침 그 옆에 있던 작은 연못에 내리꽂혔다. 첨벙! ㅡ요란한 물보라가 피어오르며 돌을 반들하게 깎아만든 연못의 한 귀퉁이가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정태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감정을떠난 본능이었다. 저 압도적인 남자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닥쳐들고 있었다.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만다.
그가 웃고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는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그 희미하고 서늘한 웃음이 아니었다. 저 웃음은, 그래, 마치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기 직전과 같은, 그런 웃음이다.
기쁜 듯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반가운 듯이.
그는 가느스름하게 굽어진 눈으로 정태의를 직시하고 있었다.
"일ㅡ…."
"태이 형!"
정태의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한 순간이었다. 정태의의 뒤에서 신루가 나직이 소리쳤다.
정태의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신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선택지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정태의에게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는 선택지였다.
신루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그 시선에는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얼어붙은 뭔가가 있었다.
신루는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 기다리던 차에 올라탔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피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정태의는 다시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신루의 모습을 본 듯했다.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표정 하나 없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이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본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는 눈짓이, 정태의에게 영문을묻고 있었다.
정태의는 삽시에 거리를 좁혀드는 일레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도, 정태의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그 사이에서 시간과 공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이야기를 해야 할까.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일레이에게 잡힌다면, 그는 정재의에게 갈 수없었다. 그리고 신루는 떠나버릴 테고, 그는 정재의를 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정재의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태의는 정재의에게 가야 했다. 설혹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저 조그만 낙원에서 이제 막 나온 지금만큼은.
"젠장……. 저게 말이 좀 통하는 놈이면 오죽 좋아……."
그렇다면 말마디라도 나누고 떠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지금 일레이의 팔에 붙잡힌다면 정태의가 뭐라고 말한들 그는 놓아주지 않는다. 정재의에게 가봐야 한다고, 잠시만 갔다가 금방 오겠다고 말해도 납득할 인간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레이의 눈빛이 바뀐다. 순식간에 그 눈이 서늘하게 식었다.
"태이. 이리 와."
정태의가 가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이미 그 한 발짝만으로 그는 모든 걸 파악한 듯, 나직이 외쳤다. 오토바이의 굉음에 섞여 그의 으르렁거리는 외침이들려온다.
"금방 다시 갈게."
정태의가 외쳤다. 그러나 그가 깔고 앉은 오토바이의 굉음과 무서운 속도로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정태의의 목소리를 막는다.
그가 초조한 듯 다시 외쳤다.
"태이. 이리 와. …ㅡ제길, 오기 싫으면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벌컥, 그가 고함쳤다.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친 오토바이 기체를 눈앞에 두고, 정태의는 돌아섰다.
빌어먹을.
입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달렸다. 오토바이가 달리는 속도와 그가 달리는 속도. 오토바이와 그 사이의 거리가 그와차 사이의 거리. 그 거리의 차이와 속도의 차이가, 아슬아슬하게 맞물려들었다.
"태이 형!"
열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신루가 외쳤다.
정태의는 달리면서,원망스럽게 신루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신루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정태의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진짜 더럽네……."
정태의는 잇새로 중얼거렸다.
바아아앙ㅡ! 고막을 찢는 엔진 소리가 바로 등뒤에서 들렸다. 등골에 소름이 주욱 끼쳤다. 머리카락까지 쭈볏하니 서는 것 같았다.
지금 잡히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태이!!"
지척에서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낚아채는 순간 그대로 찢어죽이기라도 할 듯한 무시무시한 포효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ㅡ…!
정태의는 열려 있는 차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
차문을 닫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다. 정태의가 가까이에 다가왔을 때부터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한 차는 정태의가 뒷자석에 올라타자 순식간에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 뒤로, 고작 몇 걸음 뒤까지 정태의를 따라잡았던 오토바이가 따라붙었다.
고막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차 바로 옆에 바싹 붙었다. 퍼억,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퍽, 퍽, 퍼석! ㅡ뒷자석의 닫힌 차창에서 방사형으로 금이 간다. 그 위로 몇 번째인지 모르도록 바깥에서 그 괴물 같은 남자가 팔꿈치와 주먹으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몇 번만 더 하면 유리가 깨어져나갈 것 같았다.
뒷자석에 거의 내동댕이쳐지듯이 구겨져 들어간 정태의의 시야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남자는 괴물이다. 이 놈은 정말로 괴물, 그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차유리를 깨부술 정도의 힘을 실어 주먹을 휘두르는 그런 짓을,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다.
"태이! 내려!!"
그 고함소리에 정태의는 일순 현기증마저 느꼈다.
생각을 좀 다시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어쩌자고 이런 괴물과 얽혔는지,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것 같았다. 요즘 다소 분열증세를 보이던 정신이 다시 말끔하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애초에 아예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이미 이 차에 탄 이상 정태의는 내리면 죽은 목숨이다. 아마도 이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ㅡ그들을 처음 보는 그 중국계 남자들까지도ㅡ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아니, 내가 그게 아니라…ㅡ."
그러나 정태의가 변명하려고 더듬거리는 말이 그의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신루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모습이 정태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정태의의 표정이 굳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신루가 품에서 꺼낸 그 물건은 은색으로 미끈하게 빛나는 권총이었다. 한 손에 들어올 만한 크기이지만, 사람을 해치기에는 충분한.
"창문 열어."
신루가 운전석에 앉은 남자에게 짧게 말했다.
"신루! 하지 마!"
정태의가 낯빛을 바꾸며 외쳤다. 그러나 신루는 정태의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앞자리의 창문이 내려가면서 찰칵, 격철을 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신루!!"
정태의가 고함을 치며 다급하게 손을 뻗는 것과 동시였다. 똑바로 일레이를 겨눈 신루가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ㅡ귀청을 찢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한순간 잘라내며, 총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차장에 바싹 붙어 있던 커다란 몸이 떨어져 나갔다.
"일레이!!"
오토바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바로 옆으로 일레이가 차도 옆의 흙길 위에 뒹군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차의 뒤쪽으로 멀어졌다.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고 차 뒷유리를 내다보았다. 아득하게 모습이 멀어져가는 가운데 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곧 차는 모퉁이를 돌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딘가 다쳤는지 아닌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선뜩해졌던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약간이나마 숨을 돌리고 나자 지끈거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래. 생각해 보면 클러스터를 던져 넣은 무도실에서도 살아남았던 괴물이 아닌가. 저 정도로 몸이 상할 리가 없었다.
"어쩐지 이건 재의 형이 위험에 처할 리가 없다는 것과 비슷한 류의 믿음인 것 같아……."
정태의는 긴 한숨이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위장 위를 두드렸다. 이러다 아무래도 제 명도 못 죽겠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주욱 빠졌다.
만일에 괴물이나 우주인 따위가 나오는 스릴러 서스펜스 영화처럼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뒷유리에그놈이 떡하니 들러붙어 있다거나 하면……. ……그런 영화에 출현하는 인물치고 변변한 꼴을 당할 인물이 없었으니, 나는 그냥 얼른 죽어버려야겠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식은땀마저 배어나온 이마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끄응, 낮은 신음을 흘린다.
흘끔, 옆에 정신을 잃은 채 앉아 있는 정재의를 보았다. 조용히 잠든 것 같이 보였다.
"빗나갔군요."
신루가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로 아쉬워하는 빛도 아니었다. 다행스럽게 여기는 빛도 물론아니다. 그저 본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담담한 어조였다.
"신루. ……정말로 그놈, 죽일 작정이었던 건가?"
"반드시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요. 제 자랑 같아서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제가 사격 솜씨는 좋았던 편이라서 그래도 맞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바로 지척에 있기도 했고. 그런데 역시……아직은 좀 거리감이 안 잡히네요."
사각도 있고, 라고 중얼거리며 신루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총을 갈무리해 다시 품속에 집어넣는 신루를, 정태의는 미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고개를약간 기울인다.지금 그가 한 말이 어딘지 거슬렸다.그 말은 마치…ㅡ.
"신루. 너……."
"아. 그렇지. 태이 형은 아직 모르시는구나."
신루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몬드 모양의 큼직하고 예쁜 눈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이 살짝 휘어지면서 웃음을 띤다. 그 새카만 눈에서 언뜻 느껴지는 아스라한 위화감.
"오른쪽 눈, 못 보게 됐어요. 요전에 릭에게 당했을때 가볍게, 다쳐서요."
신루는 평연하게 말했다. 마치 즐거운 이야기라도하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아직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생활하는 데에 별탈은 없어요"라고 덧붙인다.
어렴풋이, 새카만 눈 위로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막이 한 겹 덮인 듯한 그 오른쪽 눈을 보았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제야 아까부터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 *
"……."
눈꺼풀이 유난히 무거웠다. 왜 이렇게 눈이 안 떠질까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머리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요즘 잠이 부족하던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하다고 생각한 기억이 별로 안나는 걸 보면, 어쩌면 잠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눈꺼풀이 무거운 건 그런 감각이 아니었다. 졸려서 눈이 안 떠진다기보다는, 눈 위를 뭔가로 눌러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눈꺼풀만큼이나 무거운 손을 들어 더듬더듬 눈 위를 훑어보았지만 물론 돌 따위가 얹혀 있을 리는 없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머리가 영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눈을 감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찾아보자.
중정에 밤하늘을 보고 들어와서 잠들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형 방에 가서 책을 보다가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백패커의 해먹에서망고를 먹다가 잠든 것……이건 이미 너무 먼 기억같고. 보다 가까운 기억을 오랫동안 헤맨 끝에 겨우하나가 떠올랐다. 약이었다.
'형 일어나면 형한테 인사만 하고 난 갈 거다. 그 다음엔 몰라.그 다음엔 네가 형을 잡아놓건 가둬놓건, 나는 형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면 갈 거야.'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도록 축 늘어져 자고 있는 형을 바라보며 그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신루가 웃으며 그랬다.
'태이 형,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졌어요. 안 되겠네……. 형도 피곤할 텐데 일단 이거 먹고 좀 자고 있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손을 내젓는 그의입에 새끼 손톱만한 정제 하나를 억지로 밀어넣었다. 얼른 도로 뱉어내려고 했지만 약은 입에 들어오자마자 녹아버렸다. 그나마 뱉어내려 했지만 연이어 입안에 물을 들이붓는 통에 실패했다.
그래. 그리고 이게 대체 무슨 약이냐고 다그치다가,거기에서 의식이 끊긴 것 같다.
"아편 아냐, 아편……?"
아편에 수면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제 신루가 건네는 약이나 담배는 심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들어 묵직한 눈꺼풀을 문지른다. 그럭저럭 정신은 제대로 돌아왔는데도 눈꺼풀이 무거우니 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태의는 억지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약간 멍한 머리로 시야에 들어온 방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린다.
호텔 방이었다.
자신이 왜 여기 있을까,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는 사이에 신루가 옮겨나 놨겠지. 궁금한 건 여기가 어디며, 왜 자신은 혼자 있는가 하는 거다.
정태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조금 묵직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를 바 없었다. 약을 먹어서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걱정했는데 그냥 수면제였던 모양이다.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고 덧문을 열었다.
바깥은 이미 새카만 밤에 찾아들어 어두웠다. 그리고 창 아래에는 까마득히 아래에 차들이 다니고, 길건너로 높고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형적인 도회지의 모습에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어쩐지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하고 생각하고 보니 제법 오랜만이기는 하다.
홍콩에서 떠난 뒤로 대도시라고 할 만한 곳에는 가지 않았다. 그 뒤로는 거의 세링게에 갇혀 지냈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휘이 둘러보았다. 찾던 것은 욕실 건너편에 있었다. 미니바였다. 정확히는 미니바에 비치된 맥주.
맥주를 하나 꺼내어 다시 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창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전경을 내려다본다.
좀체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맥주의 풀탑을 따 캔의 반을 금세 비웠다. 조금 지나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이러다 알콜 중독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에이,맥주가 무슨 술이라고, 알콜 중독은."
게다가 곰곰이 따져보자면 세링게에 간 뒤로는ㅡ정확히는 라만의 별저에 갇힌 뒤로는ㅡ맥주는 구경도못하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어쩐지맛있더라니. 맥주캔을 들어보았지만 처음 보는 상표였다. 정태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비운 맥주캔을 창틀에 올려두고서 걸음을 옮겼다.
대도시에 있는 호텔이라면 어딘지 궁금해할 것도 없다. 프런트에 전화해서 물어볼 필요도 없다.
"어디……."
정태의는 객실에 비치되어 데스크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안내장을 펼쳤다. 안내장의 제일 첫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글줄들을 시선으로 주욱 따라내려갔다. 그러다가 제일 아랫단에서 잠시 시선을멈춘다.
"……ㅡroad rosebank Johannesburg, REPUBLIC OF SOUTH AFRICA……."
중얼중얼 읆조리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탄자니아의 세링게에서 잠들었었는데 일어나 보니 남아프리카 공하국의 요하네스버그였다.
"……. 호텔 안내장이 잘못 비치되었을 리는 없고……."
정태의는 안내장을 뒤집어보았다. 가죽장정의 뒷면아래에 호텔 이름이 금장으로 멋지게 새겨져 있었다. 안내장을 내려놓고 정태의는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맨발이 보였다. 아까 맥주를 가지러 갈 때 욕실 앞에서 슬리퍼를 본 것 같은데, 하고생각했지만 굳이 신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을 여기로 데려다놓은 사람은 역시 신루 외에 달리 있을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능력도 좋아, 그놈……. 내 여권은 어떻게 처리했나."
생각해 보니 정태의 본인의 여권만이 아니다. 정재의도 여권이 없을 터였다. 한 사람에게 손 쓸 수 있다면 두 사람에게 손을 못 쓸까.
정태의는 거기에 대해서는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끄덕였다. 그런데 대관절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는 객실 안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역시 이 안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다시 침대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하릴없이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TV를 켰다. 굳이 뭔가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몇 번 채널을 돌리다가 적당한 데에서 멈춰놓고 다시 침대에 모로 누웠다.
"……."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깊이 생각해 볼여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왔던 정보들이 하나씩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의 정도를 처리하기도 전에 다른 하나의 정보가 그 위에 겹쳐져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오늘 새벽부터 따져보자ㅡ설마 오전에 약을 먹고 하루 반을 기절해 있다가 다음날 밤에 깨어나지는않았겠지ㅡ.
라만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본국에 뭔가 테러가 일어났다고 했다. 그게 제법 크게 터졌는지 별저에 있던 무장 경호원들을 대부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런 다음에, 운 좋게도 경비가 허술해진 바로 그 틈을 타서 일레이가 밀고 들어왔지. 대단히 무식한 방법으로. 별저를 거의 초토화를 시켜놓았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신루가 별채로 먼저 들어와서 형과 자신을 데리고ㅡ끌고ㅡ나오고……자신은 정신을 잃었다.
"내 참……. 뭐 이래."
정태의는 침대 위에 풀썩 얼굴을 묻었다. 뭐 하나라도 입맛에 맞게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으니, 이놈의 운수가 대체 왜 이 모양일까. 별채에서 나가자고생각하자마자 당장 나올 수 있었던 형의 운수를 이럴 때는 꼭 좀 나누어 가지고 싶었다.
"……"
ㅡ태이. 이리 와.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오토바이의 굉음과 함께 터져나오던 그 나직한 외침이 귓가에 되살아난다. 그때의 표정도.
정태의는 혀를 찼다. 갑자기 심장께가 무거워진다.
"기분이 이상하잖아.그놈이 그런 얼굴을 하고……"
불쑥 중얼거린 혼잣말이 스스로의 귀를 파고든다.
ㅡ태이, 이리 와.
새파랗게 갈아놓은 얼음처럼 날카로운 눈이 정태의를 직시하고 있었다.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아니, 어쩌면ㅡ단순히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ㅡ불안한 얼굴 같기도 했다.
"진짜 안 어울렸지……."
정말로 안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냉정한 그 얼굴에는 가끔 떠올리는 희미한 비웃음 같은 게 제일 잘 어울렸다. 그 남자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참 재수도 없고 섬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런 얼굴이 낫다. 저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불안스런 얼굴을 할 바에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ㅡ태이!
정태의의 이름을 외치던 목소리가 귓가에부딪친다. 별저 안에서 처음 정태의를 발견했을 때.
그렇게 이름을 외치고, 별저 건물을 닥치는 대로 깨부수고 있던 일레이는 그 즉시 정태의에게 곧바로 달려왔다. 오는 동안에도 박격포를 내던져ㅡ일부러의도한 건 아닌 듯했지만ㅡ못도 하나 부숴놓으면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태의에게 달려왔다.
웃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정태의를 발견한 순간부터, 달려오던 도중까지. 정말로 반가운 듯이, 어쩌면 스스로도 인식을 못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기쁜 듯이.
"……. 그 얼굴은 더 안 어울렸어……."
정태의는 신음하듯이 괴롭게 중얼거렸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다 못해, 머리 위로 이불을 잡아당겨 덮어버렸다.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 전에도 비슷한 얼굴은 본 것같다. 가끔 정태의가 놀라서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정도로, 그 비슷한 의외로운 얼굴을 본 적이 몇 번인가는 있었다. 저 성질머리에, 만일 평소에 저렇게 웃는 버릇이라도 있다면 저건 사기죄로 수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즐거운 듯 웃을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을 이미 몇 번이나 봐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음에도, 아까 보여줬던 그 터질 듯한 웃음은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두려울 정도로. 두려워서 심장이 욱신거릴 정도로 낯설었다.
"그놈은 어디서 그런 안 어울리는 표정을 배워 와서……."
정태의는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중얼중얼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심장에 나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쩌다 보다 보면 그것도 익숙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얼굴은 삽시간에 굳었다.
정태의의 어깨 너머에서 신루의 얼굴을 본 순간, 그리고 정태의가 신루를 향해 가려는 기색을 보인 순간.
"……. 내가 굉장히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젠장."
정태의는 신음을 웅얼거렸다. 한참 동안 그렇게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꼼짝도않고 있다가, 정태의는 어느 순간 이불을 훌쩍 걷어내고 일어섰다.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표정이 머릿속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않는다. 그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이 번갈아 머릿속을 오가면서,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 괴물 같은 놈이 어울리지 않게 그런 얼굴을 해서 그래……."
정태의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연락을 해야겠다는생각이 들자, 문득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마도 정태의가 일레이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한다면 신루는 막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딜 갔는지 그가 없는 지금 연락을 해야 했다. 정태의는 협탁 위에 놓인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 옆에 설명이 붙어 있는 대로, 국제전화의 코드를 누른다. 일레이의 직통 번호는 이미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해서 무슨 말을 할까.
문득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전화를 해서 할 말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는 미안……? 지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
둘다 안 된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에게 전화를 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아까 그런 식으로 신루와 함께 왔던 것에 대해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
……아. 그래. 그거다.
정태의는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가셨다.
바보 같이 왜 생각을 못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까 그건, 조금 다르게 보자면 정태의는 일레이에게서 도망친 셈이었다. 다시 도망가면 어쩐다고 했더라. 그때야말로 정말로 죽인다고 했던가.
"으와……. 나 진짜 다음에 만나면 죽겠구나…….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고."
정태의는 얼른 번호를 눌렀다. 일단 전화로는 아무리 그래도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미리 변명을 해두는 게 훗날의 생명도모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흘끔, 객실 문을 보았지만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신루가 들어와서 전화를 빼앗아 끊기라도 하면 낭패다.
"왜 난 전화도 내 맘대로 못 하나, 그래……."
어쩌다 자기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한탄하며, 정태의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지 않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신호음이 이상하다. 딱 다섯 번까지 울리다가 뚝 끊겼다. 자동음답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혹시 전화를 잘못 건 걸까, 아니면 전화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의아해하면서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신호가 몇 번 울리다가 끊어지고, 그걸로 끝이었다. 자동응답이라도 넘어가면 거기에 대고 변명의 말을 남기기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안 된다.
"……. ……?"
정태의는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물끄러미 수화기를 바라보다 내려놓고 말았다.
어쩐지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 원인을 알 도리가 없어, 정태의는 전화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속이 답답한 것이 맥주를 하나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바에서 맥주를 한 캔 더 꺼내었다.
"고작해야 두 캔만 넣어놓다니. 프런트에 전화해서 더 갖다달라고 할까. ……그런데 호텔비는 신루가내겠지?"
정태의는 혼자 달랑 방에 있는 상황 하나, 그리고 가진 것은 땡전 한 푼도 없는 상황 하나, 이 두가지를 동시에 떠올렸다.
일순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진짜 다 어디 간 거야……. ……. ……어……."
맥주의 풀탑을 뜯고 한 모금 마시던 정태의는 무심하게 TV로 시선을 주다가 멈칫했다. TV에서는 심야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국제뉴스가 나오고 있는 그 화면에는, 호화로운 저택이 포탄을 맞은 듯 한구석에서 불이 확 피어오르는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비슷한 영상이 연이어 서너 개 나오는 걸 보니 같은 주제인가 보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대충대충 흘려듣자하니 테러 소식인 모양이다.
"야포라도 쐈나 보네……. 저렇게 훌륭한 저택에 대고 폭격을 하는 나쁜 놈들이 대체 누구야."
정태의는 침대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세상이 하 수상해서 그런지 온 세상 사방곳곳에서 태러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는 주장은, 실질적인 피해자들 앞에서는 안 먹히지."
정태의는 혀를 쯧쯧 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에 라만이 본국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간 것도 테러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혹시 저 뉴스가 그거일까 하고 보는데, 아래에 자막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라고 나왔다.
……맞나 보다.
정태의는 그제야 좀더 주의 깊게 뉴스를 보았다. 사실 라만이 테러를 당하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 낯을 익힌 사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관심은 간다.
'…ㅡ아직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본 사건의 용의자는ㅡ….'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예닐곱 명의 사진이 화면 안에 주르륵 나왔다. 그 나쁜놈들의 사진인가 보다.
정태의는 별 생각 없이 그 면면들을 보았다.
그 순간.
"…ㅡ푸학!! 크, ……쿨럭, 쿨럭쿨럭…ㅡ."
맥주가 기도로 넘어가버렸다. 정태의는 침대에 엎어지며 미친듯이 기침을 했다. 속이 꼭 조여들듯이아팠다. 어지간히 심하게 사레들렸는지 숨이 안 쉬어졌다. 숨넘어가도록 기침을 하면서 호흡 곤란을일으키는 사이에 눈가까지 벌게진다.
머리가 이상해졌나 보다. 눈이 헛것을 본 듯했다.
정태의는 기침을 너무 하다보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다시 TV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 뉴스는 지나가고 영국왕실이 화면에 잡히고있었다.
콜록콜록, 조금 잦아든 호흡은 겨우 가다듬으면서 정태의는 황급하게 채널을 돌렸다. 어딘가 다른 데에서 뉴스를 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조금 전에 본 것이 헛것임을 확인해야 했다.
몇 번이나 채널을 더 바꾼 다음에야 정태의는 다시 그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기사내용의 토씨만 좀 다르고 나머지는 다 같았다. 내용도, 영상도.
그리고 정태의는 보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TV에 비친 모습을.
사진 아래에는 이름도 나오고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 그리고 그 사진 아래, 공범이라고 표시된 동료들의 얼굴 가운데에는 또 하나의 대단히 낯익은얼굴이 있었다. 매일같이 거울에서 보는 얼굴이다.그 옆의 자막에 곱게 적힌 이름. 정태의.
"……헤?"
입에서 외마디의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서 입수했는지 모를 그 사진은 벌써 몇 년이나더 전에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에 찍었던 사진이었다. 지금과 별반 달라진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사진이 왜 거기에 있는지, 그걸 알 수 없었다.
망연하게 뉴스를 보던 정태의는 자신이 뭔가 잘못들었나 해서, 그 뉴스가 끝난 뒤에 다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지나치게 늦어지고 채널도 그리 다양하지 않아 더 이상은 뉴스를 하는 곳이 없었다.
"……."
정태의는 멍하니, 심야토크쇼를 시작한 TV를 바라보았다. 게스트들이 웃고 떠드는 화면이 스쳐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상에 나왔던 사진 예닐곱 장 가운데 아는 얼굴 둘. 그 두 얼굴 모두,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레이 리그로우. 그가 왜 거기에 얼굴이 올랐는지.
그놈이 물론 대단히 나쁜 놈이긴 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반열에 오를 만한 짓을 했던가. 적어도 정태의가 아는 한은 없었다. 혹은 설령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새벽에ㅡ자정 전후라고 했으니 이미 만 하루가 지났다ㅡ일을 벌인 게 그놈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테러리스트라니. 국가 단위를 넘어서 수배령이 내려지는 그런 짓을, 그놈이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정태의는 아연히 TV만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ㅡ태이. 거기에서 나오고 싶나?
언젠가의 대화가 떠오른다.
ㅡ그래……, 알았어. 하지만 태이. 분명하게 기억해둬라. 그러기 위해서 내가 내걸어야 하는 몫만큼, 반드시 네게서 돌려받을 테니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곳에서 나오고 싶으냐고, 정태의가 별채 안에 갇혀 있을 때 그렇게 말했다. 딱 한 번, 그와 겨우 통화할 수 있었을 때에.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리모콘이 발등을 가볍게 찧은 탓에 정태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ㅡ."
손끝이 초조하게 움츠러들었다. 당황스러운 그 손가락을 거두어 입매를 문지른다.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손가락이 입술으 쥐어뜯었다.
"누가……."
정태의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가, 그런 짓을 하라고 했어. 미친놈."
미쳤다. 그 말밖에는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행위를 한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 이유가 만일정태의가 생각한 대로라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정말로 미친 거였다.
"환장하겠네……."
정태의는 입술을 쥐어뜯던 손으로 초조하게 머리를쓸어올렸다. 길게 자란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다시흘러내렸다.
어떡하지. 저 정신나간 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정태의는 흘끔, 다시 TV로 시선을 주었다. 더 이상은 뉴스를 하는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채널을 죄다 돌려보았다. 역시 뉴스를 하는 곳은없었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훌쩍일어섰다.
"아, 신문."
뉴스에 날 정도면 틀림없이 신문에도 났을 거다. 멀리 떨어진 타지역 소식인 바에야 그리 크게 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작은 소식 하나라도 더 봐둬야할 성싶었다.
정태의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쓰러져 있었던 스스로의 복장을 한 번 내려다보고 객실에서 나갔다. 초조한 발걸음은 객실에서 멀어질수록 빨라졌다.
호텔에서 한 걸음 나오자마자 정태의는 깨달았다.
뉴스도 하지 않는 이런 시간에 신문을 파는 데가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돌아봤지만 가판대는 이미 다 닫은 뒤였다. 편의점이라도 있을까 찾아봤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원하던 바를 얻지도 못하고 터덜터덜 다시 호텔로돌아오면서, 정태의는 공연히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애매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프런트에 있는 직원들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것같았다. 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사람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고, 객실로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스쳐진 사람도 자신의 뒤통수를노려보며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어 경찰에 연락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모자부터 사야겠다…….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산다니까."
정태의는 좀 긴 듯하게 흘러내리는 앞머리로 괜히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자신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TV에 나올 정도의 죄를 지은 기억은 없었다. 이거야말로 누명이다. 억울했다.
"리야드에서 테러가 났을 그 시간에 나는 세링게의별채에 갇혀 있었거든요……."
누군가 물어보면 그렇게 호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정태의는 객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카드키를 꽂아 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거기에는 카드가 꽂혀 있었다. 방 안에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참 골치 아프게 됐어."
웃옷을 벗으며 객실 안쪽으로 들어가던 정태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를 듣고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말의 내용에 비해 그리 골치 아픈 것 같지는 않은, 어쩌면 즐거운 듯이 들리기도 하는 그 목소리는 숙부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방 안에 숙부가 있을 리가 없는데.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고 욕실 앞으로 좁게 난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정재의가 있었다.
테이블 앞에,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신물을 펼쳐놓고 묵묵히 그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신문을 형은 어디서……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정태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방안에는 정재의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숙부의 목소리가 들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기구 쪽도 아주 난리도 아니다. 그놈이 사고를 쳐도 아주 단단히 쳤지, 이번에. 덕분에 어젯밤꼬박 샜어.]
숙부의 목소리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아, 과연,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의는 예전에 집에 있을 때도 종종 그랬다. 자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뭔가 다른 일을 하던 중이면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그 일과 통화를 동시에 진행할 때가 있었다.
그 모습에 익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정태의는 가끔 감탄하기도 했다. 대화를 하면서 TV를 본다거나 대화를 하면서 청소 따위를 하고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대화를 하면서 얼핏 들여다봐도 머리에 쥐가 날것 같은 복잡한 이공계 원서를 탐독하고 있으면, 그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였던가,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과연 책을 제대로 읽고는 있나 싶어 그가 전화를 끊은 뒤책 내용이 어떤 건지 기억은 나냐고 물었더니 그는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책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하긴 그런 일로 일일이 감탄하다간, 정재의의 동생노릇을 하기는 힘들지, 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붙박이 벽장에 비치되어 있는 가운을 꺼내며 옷을 벗었다. 정태의가 들어온 걸 보고 정재의는 눈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할 때에는 정태의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고 정태의도 마찬가지였다.
정재의는 다시 신문을 시선으로 떨어뜨렸다. 정태의가 그의 어깨 너머로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혀를 차고 말았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아랍권의 신문을 펼쳐놓고 있었다. 저래서야 정태의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흔해빠진 영자 신문도 못 찾고 돌아왔는데 저런 건어디서 가져왔지, 하고 궁금해하면서 정태의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아하니 테러 소식이 매우 대대적으로 실린 것 같으니 나중에 정재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신문 아랫단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테러 용의자들의 사진을 보고 윽, 입을 다문다.
[그래도 네가 무사히 나와서 다행이구나. 다친 데는 없고?]
스피커에서 숙부의 말이 이어졌다.
그 순간, 숙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신문에 집중하고 있던 정재의가 문득 어깨를 움츠리는 듯했다. 정재의의 바로 뒤에 서서 그의 어깨 너머로 신문을들여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이내 그 조그만 기색을눈치채고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ㅡ. 삼촌, 그게……."
어쩐지 당황한 듯 정재의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 저편에서 숙부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태의가 괜찮다면 너도 괜찮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해라. 루터가 네 차트 다시 제대로 보고 싶다고, 너랑 연락이 되면 정밀 검사 받으러 왔으면 좋겠다고――――.]
"삼촌."
정재의가 짤막하게 소리쳤다. 그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정재의는 난감한 듯 약간 입매를 찡그렸지만 이내조용히 한숨을 쉬며 다시 신문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형, 몸 안 좋아?"
정재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정태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전화를 할 때에는 말을걸지 않지만,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을 만큼 둔감하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하게 혀차는 소리가 들린다.
[태의구나. 너, 나갔다더니 언제 들어왔어.]
"막 방금요. 저 혹시 들으면 안 되는 얘기 들었어요?"
정태의는 숙부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정재의에게주었다. 정재의는 말없이 신문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미묘하게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얼굴로 돌아온다. 정태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지그시 그를 보았다. 지금의 그 이야기라니, 마치 정재의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 같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초 가량,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형. ……뭐야. 왜 사람 불안하게 만들어. 무슨 병인데."
"그렇지 않아. 아무런 병도 없어."
"그런데 정밀 검진은 왜 해."
정재의는 내키지 않는 듯 입매를 찡그렸다. 정태의는 몸에 걸치려고 손에 들고 있던 가운을 침대 위에아무렇게나 팽개쳤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숙부가 입을 열었다.
[형제 싸움은 나중에 하고, 10분 후면 교관 회의에가야 하는 나랑 이야기를 좀 하면 안 될까, 테러 용의자 정태의 씨.]
숙부가 느릿한 웃음을 담고서 말하자 정태의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게 뭐에요……. 말해두건대 난 억울해요. 그 시간에 나는 형이랑 같이 세링게에 갇혀 있었단 말이에요. 결백을 주장하겠어요. 어으, 대체 어떤 한가한 놈이 나한테 그런 혐의를…ㅡ."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정태의는 그러고 보니, 하고생각한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그 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해서 그 때문에 정태의가 같이 혐의선상에 올랐을 리는 없다. 정태의를 거기에 끌어넣을 만한 사람이라면 누가 있을까.
언뜻 생각나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태의 너는 그 안에 갇혀 있으면서 대체 뭘 어떻게했길래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에게 미운털이 박혀버렸어.]
아……역시.
당장 떠오르던 사람의 이름을 숙부에게서 곧바로 듣고 나니, 정태의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힘이 빠졌다.
"그걸 제가 알겠어요……? 젠장. 그런데 왜 나야. ……아. 혹시 세링게의 제 별저 박살낸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제길,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담장 안에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였는데 내가 어떻게 그 넓은 별저를 초토화시키겠어, 라고 투덜거리는 정태의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까지 들렸는지 숙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세링게의 별저라……. 그래, 거기가 가장 확실하게 망가졌다고 들었지. 어차피 리야드 쪽에서 포탄을 쏘아댄 건 외부에 나가 있는 무장 경호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으니.]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은근히 물었다.
"일레이는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돼? 그놈은 어떻게 될 게 없지. 잡히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어떻게 된 건 UNHRDO이랑 T&R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발칵, 뒤집어졌거든.]
어제 새벽에 잘 자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 깨어난 뒤로 한숨도 못 잤단 말야, 하고 짐짓 피곤한 듯중얼거리는 숙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하긴 저렇게 대대적으로 뉴스에 난 이상은 이미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물에 대한 신상 정보는 다 나갔다고 해야 한다. 아마 한동안 UNHRDO과 T&R은애꿎게도 동료(혹은 가족)를 잘못 둔 죄로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할 거다.
[카일도 지금 죽을 맛일걸. 이번 일은 대충 무마시킬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고. 심지어는 릭이 동원시켜서 우르르 끌고간 놈들이 죄다 T&R의 옛기동대에 있던 놈들이니, 한동안 아주 죽어나는 거지.]
그놈은 예전부터 동생 하나 잘못 둔 죄로 참 많은 굴곡을 겪었어, 그렇게 말하는 숙부의 목소리가 어쩐지 회한에 젖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정태의는 잠시 카일의 비서 제임스에게 비슷한 동정심을 느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아까 전화해보려고 하니까 연락도 안 되던걸요."
[전화라. 어디로 했는데.]
"직통 번호 있잖아요. UNHRDO에서 쓰는."
정태의가 말하자 숙부는 아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웃었다.
[그 번호야 이제 못 쓰겠지. UNHRDO 교관이 아닌놈한테 지급되는 번호가 아니니까.]
"예?"
[릭은 더 이상 UNHRDO의 교관이 아냐. 오늘부로 잘렸어.]
숙부는 저녁 식사는 뭘 먹었다고 말하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한숨을 쉬며 그렇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하기도 하다. 테러범을 UNHRDO의 교관으로 두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자칫하면 같이 말려들어갈 여지가 있는 문제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가슴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젠장. 왜 그랬냐고. 나 때문에 그랬다고하면 그놈을 그냥 콱 쥐어비틀어놓을 테다.
정태의는 호흡도 쉽지 않을 만큼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이제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도망자 신세였다. 바로 어제 까지만 해도 뭘 하든 당당하고, 거만하고, 위압적이던 그 남자는 이제 다른 사람의 추적을 피해 숨어다니고 도망다녀야 한다. 앞으로는 뭔가 제대로 일을 할 수도없었다. 자유로이 움직이기도, 나다니기도 힘들다.
"……."
정태의는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목이 울컥 뜨거워져서 괜히 마른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때였다. 정태의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문득 숙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말이지, 정태의.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너는, ……용감하구나.]
말을 맺기 전에 잠시 사이를 둔 숙부의 침묵이 어쩐지 거슬렸다.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용감하다는 말 대신에 다른 말을 넣고 싶으셨던 거 아니에요?"
그러자 숙부는 웃었다.
[아니, 설마. 그렇지 않아. 하지만 글쎄, 생각해 보면 다른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군. 그 배짱 좋은 행동은 대체 뭐야, 응?]
"무슨 배짱 좋은 행동이요."
소심한 탓에 라만을 인질로 잡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계속 갇혀 있었구만, 하고 툴툴거리며 정태의가 말하자 숙부는 픽 웃었다.
[릭이 네놈 찾아내겠다고 그 짓을 벌이고 심지어 세링게까지 돌아가서 라만의 별저를 때려부수고 있는데, 그 틈에 너는 신루랑 손잡고 도망쳐서 지금 거기에 있다면서.]
"누가 그래요?!"
정태의는 벌컥 소리치며 제일 가까이에 있는 정재의를 휙 돌아보았다. 정재의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손을 저었다. 그래, 형은 그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지,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태의에게 곧 숙부가 해답을 들려주었다.
[릭이 혼자 벌인 짓이 아닌데 말 새어나올 구멍이 하나 없었으려고. …ㅡ정태의. 넌 목숨 잘 챙겨야 돼. 알고는 있나? 너는 릭 그놈을, 닭 쫓던 개로 만들어버린 거야.]
숙부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슬며시 사라졌다. 진지하게 말을 맺는 그 말투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닭 쫓던 개.
문득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또 심장이 울컥하니 아프다. 오늘 그놈한테 안 어울리는 거 여럿 나타나는구나. 그 표정들도 그렇고, 저 말도 그렇고.
그런 비참한 말을 일레이에게 붙이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 정태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간이 별로 없잖아……. 사실은 재의한테할 말이 있었는데. 재의야.]
숙부의 말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숙부가 말한 교관 회의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시차 계산을 해보면 지금은 교관 회의가 있는시각이 아니니, 아마도 일레이가 벌인 일 때문에 한창 내부가 뒤집어진 참인 것 같았다.
숙부가 부르는 말에, 여전히 신문을 탐독 중이던 정재의는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너, 다시 UNHRDO에 들어와라.]
숙부의 말에 정재의는 잠시 침묵했다. 정태의는 말없이 정재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숙부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수도 없고, 다시 태의한테 너 찾으라고 보낼 수도 없어. 만일 이번에, 네가 어딘가ㅡ 굳이 UNHRDO가아니더라도ㅡ소속이 있었더라면 너를 찾기 위해 손을 쓰기가 한결 쉬웠겠지. 이번에도, 만약 네가 UNHRDO에 소속이 되어 있었더라면 비록 형식에 지나지 않더라도, 라만에게 도움을 요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우리측 사람이 그쪽 별저에 있다는 말이 들리던데,라고 말이지.]
비록 그렇게 한다 해도 미리 다른 곳에 옮겨두고 별채를 내보여주면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적어도 형식을 갖출 요건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정재의는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한다.
"삼촌. 저는 UNHRDO에서 요구하는 연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UNHRDO에서 무기에 관련된 일만 판다고, 누가 그러던.]
숙부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되물었다. 정재의는 한동안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그래. 그럼 내일 곧 UNHRDO로 가 있으렴. 오늘내일은 일이 있으니 모레 내가 그쪽으로 가마. 요하네스버그에도 UNHRDO 지부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있으면 돼. 당장 며칠이라도, 내가 가기 전에 문제가 생겨선 곤란하니.]
요하네스버그 지부에는 내가 연락을 해서 내일 일찍 마중을 가도록 일러두마, 숙부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정태의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삼촌. 그런데 저희는 지금 신루한테 붙잡혀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러자 숙부는 웃었다. 그리고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 말한다.
[신루는 재의의 행방에는 신경쓰지 않을 텐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은 가끔 아는 게 뭐고 모르는 게 뭔지 궁금하다. 분명 그의 말대로,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신루는 더 이상 정재의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정태의는 생각에 잠겼다.
신루가 바라는 것.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정태의는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직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정태의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숙부는 회의 시간이 임박했는지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하자꾸나'라며말을 맺었다. 전화를 끊기 바로 전이었다.
[……태의야.]
문득 숙부가 정태의를 불렀다. 정태의는 갑작스런 부름에 눈썹을 치켜올리곤 예, 삼촌, 하고대답했다.그러나 숙부는 말이 없었다. 마치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망설이는 듯.
결국 숙부는 [아니다. 잘 지내렴.]이라는 말만 하고전화를 끊었다.
정태의는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숙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들었다. 아마도 그는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어떤 것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정태의는 픽 웃었다. 괜찮아요, 삼촌, 그렇게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전화를 마치자, 잠시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정태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정재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신문, 어디서 가져왔어? 나는 신문 사려고 봐도 죄다 문 닫아서 파는 데가 안 보이더만."
"호텔 1층의 비즈니스 센터. 언어별로 다 갖추어져있는걸."
"……."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 생각해 보면 호텔에 신문이 없을 리가 없는데, 멍청하게 자신이 헛짓을 한 거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물었다.
"UNHRDO에 들어가려고?"
"음……. 삼촌 말이 옳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될 수 있지. 이번에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있었더라면 아마 라만도납치감금 같은 수단은 택하지 않았을 테고…ㅡ네가이런 사태에 처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정태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하지만 정재의는 정태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씁쓸한 기분이 들어 혀를 찬다.
그러다가 문득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몸. 어디가 아픈 건데."
정재의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약간 곤란한 눈으로 정태의를 본다. 정태의는 말없이 그를마주보았다. 물러서지 않고, 조용히 그에게 대답을촉구한다. 정재의는, 어쩌면 그대로 침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어느순간 한숨처럼 속삭인다.
"아픈 게 아냐. 나는 정말로, 아무런 병에도 걸리지않았고 아무데도 아프지 않아."
"그럼 왜…ㅡ."
"너만 멀쩡하면."
정태의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그 말을가로막으며 정재의가 짧게 말을 잇는다.
정태의는 기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곧이해를 할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인다.
정재의는 잠시 신문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신문을 읽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생각하는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다시 정태의의 얼굴 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 말하다 말았었지.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나는, 너도 알다시피 정상적이지 않은ㅡ어떤 의미로든ㅡ인간이니까, 정밀 검사를 받을 일도 종종 있거든. 그러면 그 결과가, 그렇게 나와.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 뭐야, 그게."
"말 그대로, 나는 몸속이 너덜너덜하단 말이야. 심장도, 내장도, 혈액도, 제대로 뛰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닳았어. 죽을 날을 바로 앞둔 노인처럼. 그래서 어릴 적엔 병원에서 숱하게 검사도 받곤 했는데, 늘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거지."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물끄러미 ,정재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재의는 그저 평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끊은 다음에야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아프면 같이 아픈 거야."
"……. 모르겠어. 그게 예전에 했던 말과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고, 나는…ㅡ."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선은 떼지 않고 정재의를 바라보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였던가 정재의가 그런말을 했을 때, 정태의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고 그렇게 말했을 때, 그때 라만은 매우 기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보았었다.
그 얼굴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태의는 지그시 정재의를 보았다. 정재의는 말끄러미 그를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돌렸다.
"무거워?"
시선을 돌린 채, 그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그 순간, 정태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것은 언젠가, 요전과 같은 감각이었다. 형에게 느끼는 애틋하고도 안타까운 감각.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도록 이어진 끈을 그는 무겁다 여기고, 또한 정태의가 무겁다 여길까 그 사실을 또한 무겁게 여기고.
자신이 바라지도 않은 사이에 씌워진 굴레 안에서,정재의는 언제나 인간적인 불안과 고뇌 속에 살고있었다. 정태의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는 이것이, 정태의가 선 위치에서는 볼 수 없는 정재의의 얼굴이다.
"형. 나는……."
정태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재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듯이, 혹은 처음 보는 듯이 바라보며, 그는 이 애처로운 사람에게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이 위치야. 바뀌지 않아."
말없는 시선이 다가온다.
정태의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니,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 속을 더듬어야 했다. 평소에는의식 위로 떠올리지 않는 생각들을. 그리고 그 가운데, 그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낸다.
"형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형을 생각할걸."
그가 무겁게 여긴다면 자신도 딱 그만큼만, 서먹하거나 숨막힌다면 자신도 딱 그만큼만.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틀림없이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아는 탓이다. 그리고자신 역시 마찬가지.
정재의는 가만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는 웃었다.
부드럽게. 금세라도 꺼질 듯 희미한 웃음은, 그러나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정재의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어쩌면 그 역시,여느 때에는 의식 위로 떠올리지 않는 것들을 더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본다.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언젠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를 무겁거나, 혹은숨막힌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정태의는 늘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의 사이에 두는 거리가 늘 조금씩 바뀔 테지만, 정태의는 늘 그 자리다. 그 안정된 자리에 있었다.
아마도 내일이 되면, 정재의가 UNHRDO로 들어가고 정태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또다시 한동안은 볼 수 없게 될 테지만.
정재의와 정태의가 있는 자리는 늘 안정되어 있는그곳이었다.
"그런데, 신루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정태의는, 그제서야 생각이나서 물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을 그를 잠에서 깬 뒤로 한 번도 못 봤다.
다른 객실을 잡아서 자고 있으려나. 하긴 지금은 잘시간이긴 하다. 그러나 한 번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서 묻자, 정재의는 글쎄, 라며 대답했다.
"아까 비즈니스 센터에서 잠시 보긴 했는데, 글쎄."
"비즈니스 ……. 신루가 거긴 왜."
"원애 오늘 비행기로 바로 여기에서 갈아타서 홍콩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막혀버린 셈이니까."
"왜 막혀."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뭔가 어수선하게 돌아간 것같았다. 하긴 TV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 어수선한 일이 또 있을까마는.
아까 보았던 뉴스를 다시 떠올린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태의의 물음에, 막 잠자리에 들려는 듯 침대에 눕던 정재의가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짧게물었다.
"TV에 뉴스 나온 거 봣잖아."
정재의의 물음에, 정태의는 그제야 그가 하는 말을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신루가 비행기편을 취소해야 했는지 깨달았다.
필경 정태의와 함께ㅡ아마도 그가 약을 먹고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ㅡ홍콩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신루는, 그 빌어먹을 뉴스 때문에 오늘 함께 돌아가리라 했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을거다.
오늘 바로 뉴스에 떠서 따끈따끈하게 얼굴이 알려진 테러범을 얌전히 태워줄 비행기는 없다. 아니, 비행기를 타기 전에 먼저 공항 검색에서 끌려갈 거다. 사실 얼굴과 신분이 알려진 범죄자라 해도 조금만 손을 쓰면 비행기 따위는 얼마든지 탈 수있었다.그러나 오늘 바로 연결되는 비행기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사진이 공개되었다면 미처 손을 쓸 시간이없었을 거다.
"ㅡ…."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만일 저 뉴스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정태의는 하늘 위에서 눈을 뜨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당연히 도중에 내릴 방도도 없이 홍콩까지 가야 했을 터였다. 정태의가 복잡한 심경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시 객실문이 열렸다. 카드키를 대체 몇 놈이나 갖고 있는 거야, 라고 정태의가 생각할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양반이라고는 할 수 없을 사람,신루였다. 신루는 정태의를 보곤 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웃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한 두어 시간은 더 주무실 줄알았는데."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신루가 억지로 수면제를 입에 집어넣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독한 약이었어?"
"독한 게 아니라 잘 듣는 약이죠. 그거 좋은 약이에요. 깨어나고 나서 한동안 머리가 좀 몽롱해서 그렇지, 부작용도 없고 중독도 안되고, 잘 만든 약인걸요."
신루는 환하게 웃었다. 도저히 사람에게 약을 억지로 먹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신루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 그래, 사람을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어쩔 셈인데."
"어쩔 셈이라니요."
신루는 무슨 말이냐는 듯 픽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침대에 누워 잘 채비를 하고 있는 정재의를 보더니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알아차린 듯, 정재의도 미묘한 얼굴을 했다. 아마도 신루가 미묘한 얼굴을 한 이유가 짐작가지 않아서인 듯했다.
신루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정재의에게 말했다.
"거긴 제 자린데요."
" ……음?"
정재의는 일순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정태의도 빤히 신루를 쳐다보았다.
트윈룸인 이곳에는 침대가 둘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정태의가 뒹굴거린 침대의 옆 침대에 정재의가누워 있었다. 또한, 그렇기에 당연히 신루는 따로 방을 잡았겠거니 했다.
정재의와 정태의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신루는 으음, 하고 중얼거리더니 곤란한 듯 말한다.
"아, 그렇구나. 제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갔었군요.비행기를 수배하려고 사람을 좀 급하게 만나야 했었으니까……. 재의 씨 방은 따로 잡았어요."
정태의는 어이없이 신루를 보았다. 정재의도 그리다르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는않았다. 이런 경우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한 형제들이 같은 방에 묵는 게 보통이다. 일부러 형제 중하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앉으려는 경우는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정재의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프런트의 숙박 명부에는 어떻게 기재되어 있습니까?"
"이 방에 저랑 태이 형ㅡ태이 형의 이름은 적지 않았지만ㅡ, 그리고 다른 방에 재의 씨 이름을 적었지요. 아, 다른 방이라곤 해도 바로 이 건너편 방이에요."
형제분의 우애를 생각해서 일부러 가까운 방으로 잡았지요, 라고 덧붙이며 웃는 신루는, 정태의는 더더욱 뜨악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순히 일어났다.
"삼촌이 내일 일찍 UNHRDO 쪽에서 사람을 보내도록 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그리로 가는 게 낫겠다. 내 이름이 기재된 곳으로 연락이 올 테니 그것도 그렇고."
"어……."
정태의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선뜻 일어서 옷가지 따위를 챙기며 나갈 채비를 하는 정재의를 보니어딘지 어렴풋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제 한동안은 정재의를 볼 수 없을 터였다.
어쩌면 잠시일 수도 있고, 혹은 제법 오랜 시간일 수도 있다.
"……."
정태의는 흠,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괜찮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때로 서로의 삶이 스칠 때에 마주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 그걸로 족했다. 설령 생각보다 긴 시간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자리는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어진 채.
정재의도 정태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거의 없다시피 한 짐을 챙겨 방에서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입을 여는 듯했다. 그러나 조금 벌어지려던 입술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닫혔다. 말을 자아내는 대신 희미한 웃음을 지어낸다.
"내일, 마중나온 시간이 이르면 그냥 그대로 갈게.자고 있을지도 모르니."
잠깐 떠올랐던 웃음을 어느 결에 갈무리하고서 정재의가 말했다.정태의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정재의는 약간 목례를 하고, 또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신루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다.
찰각, 조그만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정태의는 이제는 보이지 않는 그의 흔적으로 눈으로 쫓으며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본다.
언젠가 그가 자르는 시늉을 했었던 그 보이지 않는실을, 다른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만져지지 않는 그 실의 감촉을 즐긴다.
피식,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좋아요?"
그때 문득, 목소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 신루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음지었다. 그리고 옆침대에 걸터앉는다.
"재의 씨는 다시 UNHRDO로 간대요? 곤란하네……. 그럼 난 이제 뭘로 태이 형을 잡아놓지……."
신루는 짐짓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정태의는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정태의의 눈길을 느낀신루가 시선을 든다. 까만 눈이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 눈 아파?"
정태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신루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커다란 눈으로 빤히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그는 어느 순간 소리내어 웃었다. 몹시 우습다는 듯, 잘랑거리는 목소리로 잠시 웃는다.
"역시 그걸 제일 먼저 묻는군요."
이미 정태의가 물을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신루가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 말했다. 정태의는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신루는 미묘하게 웃었다. 뭐라고 할까, 꼭 비밀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 같다. 혹은 어떤 말을 할까 고르는지도 몰랐다.
"이제 아프진 않아요. 이십 년이 넘도록 불편없이 써왔던 게 갑자기 사라지니까 아직까지 좀체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정태의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신루의 오른쪽 관자놀이 위에 조심스럽게 닿은 손으로, 그 엄지손가락으로 신루의 눈꺼풀을 아주 살짝, 쓰다듬는다. 신루는 그 손을 피하지 않고 잠자코 있으며, 그 동안 내도록 까만 왼쪽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입가에 버릇과 같은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나직이 속삭인다.
"이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괴로웠어요."
"……그래."
"시력을 잃어서 괴로웠던 게 아니에요."
신루는 웃었다. 정태의는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그러나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신루는 잠시 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온몸이 만신창이라서 꼼짝도 못하고 입원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누운 채로 그 말을 들었죠. 앞으로 이 눈으로는 보기 힘들 거라고. 그때…ㅡ나는 릭을 증오했어요. 차라리 내가 죽어서라도 그와같은 땅에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증오란 건 참 신기하죠. 분명히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이상으로 그를 증오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시간이지나면 나는 그 시간만큼 그를 더욱 더 미워하고 있거든요."
신루는 정말로 신기해요, 라고 말을 덧붙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치 다른 생각에 빠진 채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조금은 몽롱하게, 말한다.
"그때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건,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던 거예요. 절대로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을."
신루는 말을 마치고도 잠시 넋이 나간 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태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가 뒷말을 잇기를. 그러나 신루는 그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반짝 정신을 차린 듯, 신루는 정태의와 시선을마주치곤 빙긋 웃었다.
문득 느리게, 그러나 서슴없이, 신루의 손이 뻗어왔다. 그 손은 정태의의 턱과 뺨을 스쳐 귓가까지 감싼다. 정태의에게로 몸을 기울인 신루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마치 과자로 어린애를 꾀어내는 것처럼 상냥하게.
"형은 나랑 홍콩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가 숨겨줄게요. 내가 막아줄게요. 릭이 형을 쫓아오더라도, 아무리 날뛰어도,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도록 내가 형을 지켜줄게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뺨을 스치는 가운데서, 정태의는 기묘한 기분으로 신루를 보았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이 모습에서,그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그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그러나 또한 조금씩 천천히, 가슴속에 번져간다.
정태의는 한동안 말없이 신루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이다.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이다.그런 사람에 대한 그 깨달음은, 서운하다기보다는 조금 애틋했다.
"……신루. 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갈 거다."
정태의는 조용히 말했다. 멈칫, 정태의의 뺨을 쓸어내리던 신루의 손이 멈추었다. 신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어라 하기 애매한 눈으로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릭에게로?"
그의 짧은 물음에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신루는 말끄러미 그를 보았다. 문득 신루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다.
"태이 형. 태이 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릭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지. 얼마나 종잡을 수 없고 변덕이 심한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모르는지. …ㅡ그가 설령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언제 그 잔혹한 성정에 손을 내맡겨 어느 순간 형을 죽여버릴 수도 있는지."
알고 있다. 신루가 말하는 대로 정태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아니 신루가 말하는 것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일반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 하얀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는지, 그가 그 사실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정태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또한, 그의 그러한 성정은 결코 바뀌지 않을 터였다. 신루의 말대로, 어쩌면 어느 날엔가 정태의는어떠한 계기로든ㅡ혹은 종종 그렇듯 아무런 이유도 없이ㅡ일레이의 손에 죽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무심하고 냉정한 눈으로 정태의의 죽음을 보면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ㅡ태이.
ㅡ태이.
ㅡ태이.
일레이는, 그렇게 정태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안타깝게, 혹은 아쉬운 듯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희미하게 미묘한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ㅡ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ㅡ정태의가 잘못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신루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
정태의의 귀에는 일레이가 그렇게 부르는 소리가 몹시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좀 나은 줄 알았던 정신분열이 역시 안 나았었나 봐……."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 영문모를 말에 신루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지만 묻지는 않았다.
"네 말이 맞아, 신루. 나는 그놈이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편치 않아. 그놈이 설령 지금 나에게 약간 잘해주는 듯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는 여전히 잔혹하고 악하지. 아마 그 사실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다."
정태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말을 하다보니 험담할수 있는 거리가 얼마든지 더 생각난다. 하나씩 손을꼽아보자니 순식간에 손가락이 다 차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분해서 죽을 만큼 그놈에게 화가 난 일도 있고ㅡ지금 생각해도,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두고두고 계속 화가 날 만한 일이고ㅡ. 아무래도 가까이 해서 좋겠다는 느낌이 드는 인간은 절대로 아니야."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런데 자기는 왜 이러나 싶었다. 약간은 침울한 듯이 입을다문 정태의를 바라보며, 신루가 짧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도.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쉰다.
"그런데도 나는 그놈이 싫어지지 않아. 어떻게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신기해질 지경이라도, ……정말로 싫다는 생각은 안 들어."
신루는 그 남자를 생각할 때마다 증오가 더욱 새로이 깊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 마음을 머리로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익히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쩐지 내가 건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놈 건사 못할 것 같고……. 그럼 필경 나중에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는 꼴이 날것 같고……."
중얼거리다 보니 어쩐지 점점 더 우울해졌다. 앞에서 신루가 픽 웃고 만다. 그게 뭐예요, 형이 호미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리 기껍지는 않게 웃었다.
"게다가."
정태의는 말문을 열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ㅡ내가 내걸어야 하는 몫만큼, 반드시 네게서 돌려받을 테니까.
얼마 전 전화 너머로 들었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는 이미 그때 자신이 내걸어야 할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는ㅡ비록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배짱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ㅡ그 일이 가볍게 저질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돌려줘야 하기도 하고."
정태의는 쓰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역시, 이런 짓을 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얌전히 갇혀 있는 쪽을 택했을 거다. 범국가적으로 쫓기는 몸이 될 줄 알았더라면.
신루는 정태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쓰게 웃음 짓는 입가며 살짝 찡그리는 눈매 따위를 시선으로 훑는다.
"그래서. 릭에게 돌아가시겠다고요?"
이윽고 신루가 되물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나는 싫은걸요. 나는 태이 형을 보내주고 싶지 않아요."
신루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물러설 뜻없이, 곤란하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야겠다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 매끄러운 웃음을, 정태의는 함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조용히, 입을 연다.
"네가 바라는 건 이미 이루어졌잖아."
신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정태의는 그 모습을, 조금은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신루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그대로, 신루는 몇 번인가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낸다.
"내가 바라는 게 뭔데요."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루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매우 영리했으니.
"네가 바란 건 오늘ㅡ아니 이제 어제인가ㅡ, 그 자리에서, 일레이의 그 얼굴을 보는 거였잖아. 그, 바라던 걸 잃은 얼굴을. 그러니 너는 이미 만족했을텐데."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조금씩, 한방울 한방울 먹물처럼 떨어지던 그 미묘한 느낌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새카맣게 변하는 것처럼, 불현듯 떠올랐다.
신루가 바라는 건 정태의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태의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독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만큼 그 독이 더욱 켜켜이 쌓이는 동안, 그 독은 바람을 넘어서버렸다.
신루는 웃음을 지웠다. 표정이 사라진 그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치 하얗게 빚어놓은 인형처럼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적이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이 느껴진 어느 순간.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어요."
불쑥, 말이 흘러나왔다. 신루는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예전의 기억 어딘가를 더듬으며, 그는 잠시침묵했다.
"나는 그런 건 평생 깨닫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일그러진 마음이다. 바라던 것을 잃은 원망이 미움이 되고, 미움은 증오가 되고,이윽고 그 증오가 마음을 삼켰다.이제는 애초에 바라던 것마저, 거기에 삼켜져버렸다.
신루는 자신의 손 언저리로 시선을 주었다. 알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속삭이는 입술이 애달프다.
그러나 문득, 신루는 웃었다. 한숨처럼 웃는다. 그 얼굴은 이내 처음과 같은 그 웃음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태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분명히, 태이 형이 좋은 것보다 그놈이 미운 게 지금은 훨씬 더 강렬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난 정말로 태이 형 좋아해요."
처음에 보았을 때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 웃음을 앞두고, 정태의는 말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안, 하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네 증오에 어울려줄 수는 없어. 네 증오보다 나는 내 바람이 더 중요하거든. 그러니까 나는, 일레이에게 돌아가야겠다."
어쩌면 내가 바보짓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하고 덧붙였다.
딱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한다든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만나야 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얼굴이ㅡ다시 생각해도 역시나 그 인간과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그 표정들이ㅡ계속해서 마음을 에이는 탓이다.
"……싫어요."
문득 신루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 사랑스러운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고양이 같은눈이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라도놓치지 않을 듯이.
"못 가요, 형."
"간다."
"못 가요."
"간다니까."
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도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은 불필요하게 똑같은 대화가 오갈 뿐이었다.
흠, 신루가 숨을 내쉬었다. 살짝 찌푸려진 눈매 아래로 씁쓸한 웃음이 돌았다.
"그러지 마세요, 태이 형. 나는 억지로라도 형을 데려갈 수 있어요. 괜히 형도 힘들고 나도 힘들게 하지 마요."
"그렇다면 내일 날이 밝자마자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런데, 그래도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야. 나는 갈 거야."
문득 정태의는 생각했다. 자신은 왜 굳이 가려고 하는 걸까. 언젠가 가는 거라면 조금쯤은 늦어도 괜찮다. 아니, 차라리 그의 분노가 다소 가라앉았을 어느 때에 가도 괜찮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몹시 기쁜 듯이 웃던 그 낯선 얼굴이 눈꺼풀에 남았다. 절망과 닮은, 그 허를 찔린 듯 파랗게 굳어지던 낯선 표정은 심장에 패었다.
"태이 형. ……지금이라도 날 좋아해줘요. 날 좋아했잖아요. 내가 그런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나를 다시 좋아해줘요. 태이 형. 그러면 나도 다시 이 새카만 기분보다 형을 생각하는 기분이 더욱 커질 테니까. 틀림없이."
신루의 애틋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더없이 괴로운 빛을 띠고 정태의의 손을 감싸쥐고 있었다. 제발, 그렇게 애원하면서.
그러나 정태의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줄 수 없었다.미안, 그렇게 말한다.
문득 신루의 애원이 멎었다. 정태의의 손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미끄러져 나간다. 신루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정태의를 보았다. 그 희미하게 푸른기가 도는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을 그 눈이 똑바로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이 형. 나는요. 그놈 때문에 많은 걸 잃었어요. 형도, 형을 그저 좋아하기만 하던 마음도, 눈도, ……그런데, 어째서 그놈은 그렇지 않은 거죠? 이건 불공평해요. 나는…ㅡ절대로 형을 보내줄 수 없어요."
신루는 웃고 있었다. 해설프나 단호한 눈으로 그는 정태의에게 말했다. 보내주지 않는다고.
정태의는 묵묵히 앉아 있다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 눈을 줄게."
"…ㅡ예?"
"내 눈을 줄게. 네게서 눈을 빼앗은 건 반은 내 책임이니."
신루는 넋을 놓은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언뜻 떠오르지 않은 것도같았다. 신루의 눈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가 밝혀내기라도 하려는 듯,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시선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럴 것 없다.
정태의는 정말로 줄 수 있었다. 그가 바란다면 눈 하나 따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걸로 그가 조금이나마 편해진다면.
"……둘 다는 못 준다."
정태의는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신루를 마주보며, 문득 불쑥 덧붙였다. 움칫하는 신루에게말을 한 번 더 덧붙인다.
"하나는 줄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네가 바라는 걸로."
정태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외눈이라면 살아가는 데에 불편이야 하겠지만, 지금의 신루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정태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눈 시력이 짝짝이라서 오른쪽이 더 나쁘거든,그런데 왼쪽눈은 오른쪽보다 안구건조가 좀더심해.잘 생각하고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정태의는 사뭇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넋을 잃은 듯 정태의를 보고 있던 신루는, 문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필요 없어요……."
"……. 난 정말로 줄 수 있는데."
"그러니까 필요 없단 거예요."
신루는 입맛이 씁쓸한 듯했다.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피곤한 듯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다. 어쩌면 한숨이 아니라 신음이었는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가만히 신루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잃은 걸 내가 채워줄 수 있다면, 채워줄게. 그런데 네가 말한 것 가운데 채워줄 수 있는 건 눈뿐이라서, 그것밖에 안 돼. 나는, ……일레이가 잃은것도 채워줘야 하거든."
이미 일레이는 바로 며칠 전과는 달랐다. 며칠 전에는 당연하게 가지고 있던 것들이, 지금은 그에게서멀어져버렸다. 정태의가 바란 것이 아니라 하나 정태의 때문에 잃은 것들이다.
"그놈이 잃은 게 뭐가 있어요."
신루는 투정부리는 어린애처럼 중얼거렸다. 힘이 빠진 그 목소리가 조금은 마음 아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일레이가 잃은 것은 많았다. 신루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제 일레이는 자유로이 나다니지 못한다.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할 수도 있고,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런 것들을 잃었다.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정말로 잃어버렸구나.
"……비인간성."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린 말에 신루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놈은 비인간성을 잃어버렸어, 하고 정태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예전과 같이, 어느 한곳도 인간 같지는 않은 일레이였더라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정태의때문에 중요한 것을 내던지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기쁜 얼굴도 하지 않았을 거고, 그렇게 초조한 얼굴도 하지 않았을 거다.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신루는 힘이 빠진 듯했다.
"그래서, 그 비인간성을 채워줄 건가요."
"그건……, 내 능력으로는 좀 벅차고."
그렇다고 인간성을 채워주는 것도 내 능력으로는 힘들지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잠시 사이를 둔 뒤 말을 이었다.
"나는 일레이의 약점이 되기 위해서 돌아가는 거야."
그래. 분명 그런 거다.
정태의는 돌아가면 일레이의 약점이 될 터였다. 정태의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문득 가슴이 뜨거워졌다. 또한 덜컥,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어떡하지. 이제 보니 이건 정신분열 정도의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어쩌면, 내 인생 그대로 잡아먹으라고 갖다바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정태의의 얼굴은 퍽이나 기묘했던 모양이다. 그를 바라보던 신루는 문득 힘없이 물러나 앉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약점……. ……그럼 나는 다시 형을 데리러 갈 거예요."
눈을 감은 채, 신루가 혼잣말처럼 속삭인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동안 그렇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그건 너를 위해서구나."
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잠들어버리기라도한 듯,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로, 신루는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움칫, 턱이 떨린다. 정태의는 신루에게 손을 뻗었다. 감은 눈꺼풀이 떨리는 것 같아 쓰다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솟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손은 신루에게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21. Not bad
자신이 과연 옳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1층에 닿을 때까지 한 번도 멈춰서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홀로 묵묵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후회하는지도 모른다. 희미하게 마음속에 일렁이는 이 뜨끔한 가시 같은 불안은 후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건사, ……진짜 할 수 있으려나."
건사, 하고 입밖으로 말을 꺼내자 갑자기 그 말이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보살피고 돌본다는 의미의 건사가 아니다. 그런 일방적인 의미가 아닌 쌍방향적인 의미로, 사람이 사람을 건사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대하고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지 몰랐다.
타인은 기본적으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에, 전혀 다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들끼리라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결정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그런 보통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 있을 결심을 하고 감당하려고 해도, 틀림없이 엄청나게 힘을 들여야 할 거다.
힘들다는 것과는 달랐다. 힘을 들여야 했다. 그렇게힘을 들이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있다.그런 걸 두고 자신과 맞는 사람, 안 맞는 사람이라고 구분해 부르는지도 몰랐다.
보통 다른 사람이라도 감당하려면 그토록 힘든 각오를 해야 할 텐데, 하물며…….
"어째 영 자신이 없어진단 말야……."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일레이 리그로우. 공식적인 미친놈이다. 그 남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게 뻔했다.
어쩌면 신루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그에게서 벗어나 보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게 더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신루가 그를 붙잡고 다시 선택지를 제시한다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할 거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에게로, 그는 간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정태의는 로비로 걸어나섰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결국 정태의는, 그 뒤로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신루를 밤새도록 바라보았다. 간간이 다른 생각에 잠기었다가, 다시 바라보다가, 다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한숨도 자지 않고, 방에서 나와버렸다. 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탓이다.
미처 날이 밝지도 않은 시각, 로비에는 사람이 뜸했다. 사람들과 마주치자마자 정태의는 지난밤에 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여태 잊고 있었던 생각이다.
"음……. 모자부터 사야 하는데……."
정태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신루의 지갑에서빼내어 온 카드가 손끝에 걸렸다. 카드가 박혀 있는신루의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아무것도 되찾지 않은 정태의를 임의로 여기까지 데리고 온게 신루였으니까, 이 정도의 책임은 져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중에 갚으려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에서, 정태의는 문득 멈춰섰다.
이렇게 서서 생각해 보자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주머니에 돈 될 만한 카드는ㅡ그나마 자신의 것도아니다ㅡ있었지만,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권이 없으니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다. 여권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 테러범으로 수배된 상황이니 공항에서 섣부르게 나가려고 할 수도 없다. 당장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것부터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막막한 상황은 또 처음이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경우에 그가 할 수있는 일이라곤…….
정태의는 로비 한구석에 있는 공중전화를 발견하고그리로 걸어가려다 멈칫했다. 주머니에는 카드뿐. 은행을 찾아 돈을 뽑아서 그 돈을 동전으로 바꾸어 전화를 한다는 방법은 퍽이나 번거롭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도 좀 꺼내어 올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고민하던 정태의는 로비에 접해 있는 비즈니스 센터로 시선을 주었다. 24시간열려 있는 그곳에는,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한 사람만 앉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리문에는 각종카드 그림이 붙어 있었다.
정태의는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안에서 연신 하품을 하고 있던 남자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앉았다. 그리고만면에 웃음을 띤다.
정태의는 그에게 카드를 건네어준 뒤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찰각, 시각의 경과를 가리키며 액정에표시되는 숫자를 흘끔 보면서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시차를 계산해보았다. 지금쯤 그쪽은 점심 무렵에 가까웠을 거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이며 강의에 들어갔으면 곤란한데, 라고 정태의가 조금 걱정하던 찰나에 달각, 신호음이 끊어졌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예, 정창인입니…….]
"삼촌. 저 태의에요."
그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잠시 사이를 둔 뒤, 숙부는 웃음을 터뜨리듯이 말했다.
[오오, 우리 가문의 자랑스러운 테러범 둘째 조카가 아닌가.]
정태의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앞으로 한동안은 저 꼬리표가 따라다니겠다. 아니, 그 전에 진짜로 잡혀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삼촌……. 저 좀 도와주세요."
정태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느 때라면 농담으로 대답할 법한데도, 숙부는 그의 말투에서 지친 기색을 느꼈는지 잠시 웃다가 대답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뭐가 필요해. 위조 여권? 공항에서 연행되지 않도록 너를 도와줄비리경찰?]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숙부의 말은 농담 같으면서도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눈치 빠른 사람이 꺼내는 말은 정확하게 정태의에게 필요한 것을 짚어내고 있었다.
"둘 다요."
[좋아. 언제 필요한데.]
"지금이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려는데, 혹시 될까요."
그러자 숙부가 잠시 말을 끊었다. 생각해보는 듯하더니, 숙부는 이내 선선히 대답한다.
[비리경찰은 되는데, 여권은 그렇게 급하게는 좀 어려울 것 같구나. 장기적으로 쓸 게 아니라 이번에만 잠깐 쓸 거라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아. 그러면 돼요. 지금 당장 잠깐 쓰고 말 테니까."
[좋아. 그러면 지금 곧 연락해서 공항으로 보내도록 하지. 연락처를 알려줄 테니 공항에 도착하면 그리로 전화해 봐.]
"예. ……고마워요, 삼촌."
[천만에. ……. 그런데 이 정도의 일이라면 신루도 할 수 있을 텐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머뭇거렸지만, 어차피 숙부에게 말하지 않을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숙부에게는 물어볼 것도 있었다.
"신루랑 따로 있어요. 저는 갈 데가 있어서, 신루랑같이 갈 수 없기 때문에요."
수화기 안에서는 잠시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곧 의외라는 듯, 그러나 그 의문을 굳이 표현하지는 않으며 숙부가 묻는다.
[갈 데라……. 어디로 갈 건데.]
"그것 때문에 또 여쭤봐야겠는데요."
정태의는 약간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숙부는 말해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정태의는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일레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시나요."
대답은 금세 나오지 않았다. 제법 오래, 정태의가 "여보세요?"라고 중얼거릴 때까지, 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태의가 한 번 더 "여보세요, 삼촌, 전화 끊겼어요?"라고 말한 다음에야, 숙부는 '아니, 안 끊겼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한동안 더 침묵하던숙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 혹시, 그놈한테 가려고?]
"예."
정태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런 뒤에 픽 웃는다.
"괜찮을 거에요. ……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좀 걱정……]
숙부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걱정이 아니라 좀 걱정? 하고 수화기 너머에서 혼잣말처럼 덧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정태의는 문득 지난밤 숙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ㅡ정태의. 넌 목숨 잘 챙겨야 돼. 알고는 있나? 너는 릭 그놈을, 닭 쫓던 개로 만들어버린 거야.
정태의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떠한 이유였든, 분명 정태의는 자신을 찾으러 온일레이의 앞에서 돌아섰다.
지금 다시 그 상황으로돌아간다 하더라도 정태의는 똑같이 행동할 터였다. 그 상황에서 정태의가 우선시해야 할 것은 일레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뒤늦게도, 정태의는 일레이를 생각한다. 숱한 것을 내던지며 찾으러 왔던 그의 앞에서 걸음을 몰렸던 정태의에게,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직 한동안은 좀더 비인간성을 지켜도 좋았을 텐데."
정태의는 아쉽게 중얼거렸다.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허를 찔린 듯 삽시에 굳어지는 그 초조한 얼굴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듯심장께에서 옥죄진 않았을 텐데.
정태의는 또 기억이 나버려 심장께가 지끈거리는 탓에 두어 번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숙부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화 많이 났다나요?"
[글쎄,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니 말하기 어렵지만 태의, 나라면 기왕 이렇게 된 것, 돌아가느니 차라리영원히 릭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겠어. 돌아가자마자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잖아.]
정태의는 으음, 하고 낯을 찌푸렸다.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무섭잖아요……. 안 그래도 무서워서,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가슴이 벌령거렸다. 틀림없이, 돌아가면 결코 좋은꼴은 못 볼거다. 그래도 설마 당장 죽이지야 않겠지. 아니면 죽이더라도 실컷 팬 다음에 죽이겠지.
정태의는 나름대로 각오도 굳히고 있었다. 일레이가 주먹을 휘두르는 동안 그 주먹은 피할 도리가 없으니 고스란히 맞으면서, 어쨌든 맞아죽기 전에 해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얻어맞아 윽윽거리면서 해명할 생각을 하니 조금 암담하긴 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다스렸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요."
정태의가 묻자 숙부는 결국 갈 거냐, 라고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숙부의 걱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져 쓰게 웃었다.
"그래도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겠다고 했으니까."
그놈은 못 들었을 테지만, 하고 정태의는 한숨을 쉰다.
[지금은 나도 모르겠구나. 그놈이 사우디에서 사고를 치고 세링게로 간 것까지는 들었는데, 그 뒤로는여기에서도 그 사고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수습이라……. 그냥 일레이를 면직시키기만 한 거아니었어요?"
[그 건으로만 써야 할 보고서가 일곱이다.]
아마도 테러가 벌어진 그 시점부터 거의 제대로 못잤을 숙부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날이 섰다. 에고, 더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정태의는 얼른 물러섰다.
[곧 알아봐 줄 테니까, 공항 도착하면 전화해라.]
"공항 도착해서 전화할 데 많네요. 위조여권 브로커에 비리경찰에 삼촌에……."
[같은 맥락에서 거론되기에 썩 내키지 않는구나. 그런데 여권은 경찰이 가져갈 거다. 그쪽으로는 전화 한 통만 하면 돼.]
"……. 경찰이 위조여권에까지 손대고 있으면 그거문제가 심각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비리경찰이지.]
숙부는 웃었다. 정태의도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곧 숙부는 공항에 도착하면 전화하라는 당부를 한 번 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비즈니스 센터에서 나온 정태의는 그 앞에 머물러서서 잠시 세상을 개탄했다.
수배범이 잡히지 않도록 힘을 써주는 경찰, 위조여권까지도 취급하는 경찰, 그런 경찰을 알선해주는국제기구원. 하긴 비리가 어디 그것뿐이랴,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호텔에서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호텔 바로 맞은편에 섰다. 프런트에 물어본 바로는 한 시간에 평균 세 대가 오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이면 한 시간에 한 대가 고작일거라고 했다. 시간이 미묘하게 안 맞아서 한 시간 고스란히 정류장에서 기다리지만 않기를 바라며 정류장 앞까지 간 정태의는, 30분 뒤에야 버스가 오리라는 예정 시각표를 확인하곤 벤치에 앉았다.
딱 운 좋게 5분 뒤, 이러면 좋았겠지만 소박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1분전에 이미 버스가 출발한 뒤인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릴없이 주위를 둘러보자 정류장 앞에서는 카드서비스 부스와 음료수 자판기가 나란히 있었다. 음료수 자판기 안에 있는 맥주를 지그시 바라보던 정태의는, 신루의 카드로 넉넉히 돈을 찾아 맥주를 한 캔 뽑았다.
이른 새벽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늘은 새카만 밤빛에서 군청색의 새벽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거리는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이럿듯 푸르고 고요한 새벽녘에 버스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신다는 것도 나름대로 정취 있는 일이었다.
"지금 출발하면 언제쯤 닿으려나……. ……그놈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목적지를 정해서 시간 계산이라도 하지."
정태의는 맥주를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돌아간다.
정태의는 일레이 리그로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도 들고, 희한한 기분도 들고, 암담한 기분도 든다. 내가, 정신분열기가 좀 보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숙부의 말대로 차라리 이대로 영영 도망치기를 시도하는 게 보다 현명할 수도 있었다. 신루가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그런 충고를 받아도 마음은 한 방향을향하고 있었다.
"그놈이 잃어버린 거, 내가 주워줘야지. ……인간성주워주는 건 이미 포기했고 그저 그 비인간성이나 좀 떨어지면 좋겠구만."
정태의는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문득 현실적인 생각을 떠올린다.
공항으로 가서, 공항에서 그놈이 있을 그 어느 나라로 가서, 그놈이 숨어 있을 곳ㅡ설마 테러범이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지는 않겠지ㅡ을 찾아가서, 그놈을 앞두면.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어렵잖게 상상이 되었다.
틀림없이 그 순간은 소름이 주욱 끼칠 거다. 그 괴물 같은 놈을 앞두고 두렵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필경 심경 사나울 텐데.
"역시 얻어맞는 동안 최대한 빨리 해명하고, 한 대라도 덜 얻어맞는 게 상책이겠다."
'얻어맞는다'라고 상정하면서도 돌아가려니 좀 서글퍼졌지만,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그 낮선 표정들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금방 돌아갈게."
이미 이야기했으나 들리지 않았을 그 말을 다시 한번 읆조렸다. 문득 마음이 가라앉으며 담담하게 웃음이 났다.
그러던 차다.
이제 한 10분만 더 있으면 버스가 오겠구나, 하고 시계를 볼때였다.
문득 몇 걸음 떨어진 앞에서 차 한 대가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별 뜻 없이 고개를 들자 택시가 한 대,정태의의 앞에 멈추고 있었다.
혹시나 택시를 이용할 고객이라고 생각이라도 한 걸까 생각한 정태의는 택시 기사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뒷자석의 문이 달칵 열리더니, 그 안에서 사람이 내렸다. 손님을 내려주려고 멈춰 섰던 모양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호텔 앞에서 내리다니, 공항에서 바로 오기라도 한 걸까.
정태의는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이 따랑,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막 내린 남자는 여유롭게 택시문을 닫은 뒤 허리를 폈다. 주머니에서 막 꺼낸 깨끗한 장갑을 두 손에 천천히 끼면서 아주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는 정태의를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서늘하게 선뜩한, 그런 웃음이다.
"감이 좋은 태이. 내가 올 줄 알고 도망치려던 참인가 보지."
남자가 말했다.
느긋한 목소리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정태의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반쯤 넋을 놓은 채그 남자를 보았다. 그는 정태의의 앞을 스쳐 두어 걸음 옆에 있는 예정시각표를 본다. 그러다가 피식웃었다.
"이거, 10분만 늦었더라면 또 놓쳤겠네."
그는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저만치 위에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장신의 남자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 정태의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혼자야. 그 꼬맹이는?"
정태의는 여전히 넋을 빼고 그를 쳐다보면서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혀를 찼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뭐 좋아. 그 꼬맹이는 다음에 다시 요절을 내도록 하지. 중요한 건 그놈이 아니니까."
남자는 빙긋이 웃더니 허리를 구부렸다. 정태의의 이마에 콩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린 그는 정태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했다.
두어 번 달싹이던 입이, 즐거운 듯이 속삭였다.
"잡았다, 태이."
정태의는 그 바람소리처럼 낮은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의 몸이 얼어붙은 것을 느꼈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여기서 보게 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남자가, 지금 옆에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등줄기가 오싹하게 얼어붙고 혀끝이 굳어버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예상 밖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예상이 잘 맞아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와 막상 마주치면 두려우리라고 생각했다. 그 즉시 도망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은 소름이 끼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그랬다.
마주치는 순간 절로 발이 얼어붙었다. 그 희미한 웃음을 보는 순간 혀도 얼어붙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서 그 사이에 해명을 해야겠다고, 장난처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야 정태의는 그게 얼마나 섣부른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ㅡ나라면 기왕 이렇게 된 것, 돌아가느니 차라리 영원히 릭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겠어. 돌아가자마자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잖아.
불현듯 숙부의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났다.
어쩌면 그가 옳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정태의는 이토록 서슬이 퍼런 일레이를 본적이 없었다. 아니, 서슬이 퍼런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서슬이 퍼렇다기보다 이건, 맛이 가 있었다.
웃는 얼굴로, 그는 평소와 확연하게 달랐다.
장갑을 낀 손이 정태의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렸을 때, 정태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잠, 깐, 일레…ㅡ."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뭐든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벌어진 입에서는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느릿한 웃음을 띠며, 그가 말한다.
"말할 필요 없어."
그 말과 함께, 하얀 손이 뻗어왔다. 그 손은 덥썩, 정태의의 턱을 쥐었다. 턱을 단단히 움켜쥐는 용서없는 손길에 말이 입안에서 막힌다.
"말은 입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이윽고 자기자신까지 속이거든."
바로 한 뼘 앞에.
눈앞으로 딱 한 뼘 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일레이는 소름끼칠 정도로 매끄럽게 속삭이더니 문득 웃었다. 턱을 움켜쥔 손에 낀 장갑의 보드라운 감촉이 그렇게 섬뜩할 수 없었다.
아냐. 그게 아냐. 난 지금 네게 가려던 참이란 말이다.
정태의를 자신의 턱을 움켜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잠깐만, 잠깐만 놓아주면 그는 바로 말할 터였다. 네게로 가려던 참이라고. 네게 가려고 지금 공항으로 향하던 거라고.
ㅡ…ㅡ그러니까 잠깐만 좀 놔, 이 자식아!
정태의의 간절한 바람을, 일레이는 그 눈빛에서 읽어내었는지도 몰랐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린다. 얼핏 웃음 비슷한 것이 그의 눈 위로 스치고 지났다.
"왜. 말을 하고 싶어서?"
"…ㅡ."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 도와줄 것 같은가?"
일레이는 픽 웃었다. 이른 새벽의 정류장, 거의 다니는 사람이 없는 이곳. 그러나 가끔씩 길을 지나는사람 한둘은, 이 기묘한 대치를 흘끔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일레이가 웃었다. 그리고 정태의의 턱을 쥐었던 손을 가만히 뗐다.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자마자, 정태의는 욱신거리며아픈 턱을 감싸쥐며 바로 그에게 외친다.
"난 지금 공하…ㅡ."
공항에 가서 네게로 가려던 참이다, 그렇게 말하려했다. 그러나 그 입은 다시 막히고 말았다.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일레이가 약간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장갑을 벗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장갑을 정태의의 입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빙긋이 웃더니, 정태의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ㅡ!!"
아주 깔끔하고 정확하게. 간신히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
울컥, 속이 역류하는 듯한 느낌과 눈앞이 빙글 도는현기증 같은 느낌이 동시에 닥쳐왔다. 정태의는 쓰러지다시피 몸을 구부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도 언젠가 이놈에게 제대로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끔찍할 만큼 아팠던 것 같다. 그래, 적어도 지금만큼 아팠다. 하지만 그때에도 지금보다 더 아프진 않았다.
구열질을 하려고 해도 입에 들어 있는 장갑 때문에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태의는 아득하게 쓰러져 아련한 의식을 억지로 주워모으려 애썼다.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어렵잖게 훌쩍 안아들었다.
"네가 어디서 소리를 치든 사람을 불러모으든 소용없지만, 아무래도 귀찮단 말야."
흐느적거리며 늘어지는 와중에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정태의를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그가 정태의를 들쳐매고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ㅡ정태의가 어제 묵었던ㅡ호텔로 들어갔을 때,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몸에 모였다.
시간대가 시간대라 사람은 그다지 없었지만 일레이의 어깨에 걸리다시피 해 늘어져 있는 정태의를 대단히 기묘한 얼굴로 쳐다보던 호텔 직원의 시선이 선명하게 얼굴에 꽂혔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레이는 즐거운 듯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도망을 치려면 제대로 쳤어야지. 차라리 지난번이더 깔끔했어. 죄다 이름을 숨기고 육로로 튄다고 해도 부족할 판에, 요하네스에서 홍콩으로 가는 표를그렇게 막 취소해버리면 어떡하나, 정태의 씨?"
한쪽 어깨에 아주 가벼이 걸머진 정태의의 다리를 탁탁 두드리며, 그가 기분 좋은 듯 웃는다.
입을 열면 그대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ㅡ실제로는 입안이 가득 막혀 그렇지 않았을 테지만ㅡ입을 다물고, 아직까지도 온몸을 저릿하게 감싸고 있는 고통으로 의식을 유지하는 데에 안간힘을 쓰던 정태의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객실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침대 위에 내팽개쳐진 순간 욱신, 맞은 곳이 저려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는 입안을 막은 장갑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겨우 고통에서 정신을 차릴 만해진 정태의가 입에서 장갑을 꺼내려 했지만 욕실에 갔다가 막 나온 일레이는 그 장갑을 다시 밀어넣고, 욕실에서 가지고나온 수건을 길게 찢어 그 위를 묶어버렸다.
"정태이. 너는 말할 필요 없어."
일레이가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느릿하고 여유로운 그 낯익은 목소리는, 그러나, 듣는 내도록 가슴속이 덜덜 떨릴 정도로 섬뜩했다.
"아니, 말을 하면 좀 곤란해. 네가 뭐라고 말하든, 울든, 애원하든, 빌든, …ㅡ아 그래, 혹은 화를 내든, 지금 나는 들을 귀가 업거든. 그런데 네가 애원이라도 하면 그런 귀가 생겨버릴지도 모른단 말야. 별로 그러고 싶진 않거든."
네 말은 일체 듣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며 비틀어올린 잇새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날카롭고 가지런한그 이가 얼마나 단단한 지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사람 하나 정도는 충분히 물어뜯어 발기발기 찢어놓을 수 있을 만큼.
"음…ㅡ! 읍…ㅡ!!"
아냐, 아니란 말이다! 젠장, 사람 말부터 좀 들어!
정태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입 안에서 막혀 다시 목구멍 안으로 되돌아갔다.
정태의가 뭐라고 외치며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소리를 지르는 옆에서, 일레이는 반쯤 납은 수건으로 정태의의 손목을 어렵잖게 뒤에서 묶어버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엎어두고서, 픽 웃으면서 정태의의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울컥,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마치 가지고 놀 유희거리를 찾은 듯 가볍고 거침없는 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울컥하는 분노만큼이나 선명하게 솟아오르는 것은 아차 싶은 냉패감. 그 낭패감만큼의 선뜩한 두려움.
정태의에게 일말의 배려도 친절도 보이지 않는 이 정신나간 남자와 그 남자가 보이는 장조가, 가슴 속이 싸늘해지는 결론을 자아내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죽는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진짜로 죽을지도 몰랐다. 이 남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새파랗게 질려서 입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허무한 소리를 질러대는 정태의의 옆에서, 남자는 셔츠를벗어 내던지고, 그 위에 바지를 겹쳤다. 속옷마저 그 위에 포개어지자, 그는 나신이 되었다.
이미 외울 정도로 보았던 몸인데도 지금은 전혀 낯설게 다가오는 공포와 당혹감에 정태의는 버둥거리며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무릎 걸음으로 침대 시트를 밀며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남자는 지금 그를 죽일 거다. 아니, 적어도 죽든 말든 전혀 아랑곳 않을 거다.
비참하게 기어가 봐야 침대는 금방 끝이 났다. 그 안쪽은 벽이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벽까지 닿기도 전에, 억센 손이 발목을 먼저 잡았다.
"…ㅡ!!"
발목 관절이 뽑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잡아당기는 손.
무릎이 미끄러져 침대 위에 엎어지며 어깨를 침대 매트리스에 부딪혔다. 출렁, 푹신하게 몸을 받치는매트리스는 아프지는 않았지만 온 체중이 실린 탓에 뻐근한 충격이 갔다.
침대 위에 엎어진 정태의의 등을 누르는 손에 묵직하게 힘이 실렸다. 고작해야 손 하나로 누른 것뿐인데 정태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구 몸을 요동치려했지만 천 근 바윗돌이 얹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다.
사람 말 좀 들으라고 했잖아, 이 미친놈아! 왜 사람말을 안 듣냐고!
정태의는 속으로 울화를 터뜨리며 시트에 짓눌린 고개를 돌렸다. 비스듬한 각도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얼음 같은 싸늘함과 불 같은 열기가 뒤섞인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마저 떠올라 있었다.
애타게 그를 바라보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마주친 눈은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곧 가느스름한 웃음을 띠었다. 웃음이 아니다. 광기다.
"태이. ……태이. 말했지. 두 번 달아날 생각은 말라고."
일레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귓가를 쓸어내리는, 무섭도록 상냥한 목소리였다.
정태의가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시트에 비벼서 입을 막은 천조각을 끌러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입 안을 가득 메운 천은 신음 소리마저 온전히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때, 금방 다시 가겠다고 했잖아! 그야 물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네 놈에게 들렸을 리는 없지만,지금도 너한테 가려던 참이라고! 말이나 좀 들으란 말이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젓는 정태의의 눈에서 분한나머지 눈물방울까지 맺혔다. 그러자 일레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귓바퀴를 핥으면서,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인다.
"알아. 그래. 세링게에서 알 사우드의 별저에 갇힌건 물론 네 의지가 아니었겠지. 그것까지는 나도 안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일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음 순간, 정태의는 신음을 삼켰다. 눈 앞에 하얗게 뜨거워졌다.
귀가 아팠다. 아프고 뜨거웠다. 한 순간 지난 다음에야 정태의는 그가 자신의 귀를 물어뜯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의 얇은 살갗이 찢긴 듯, 뚝뚝뚝 시트 위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별처가 뚫리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그 꼬맹이랑 같이 도망가버린 그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단 말야."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귀가 몹시 뜨겁고 욱신거렸다. 그러나 귀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저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대로 정태의를 죽인다 해도 전혀이상하지 않을 저 목소리.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흉악한 살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거친 분노를 선연하게 담아낸다.
"태이.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야. 널 찾으면 어떻게 할까, 계속 생각했거든. 정말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어. 여기로 오는 동안 내도록, 정말 단 한 순간도 빼먹지 않고 계속 널 생각했단 말야. 도대체 어떻게 할까. 역시 가장 편한 건 그냥 죽여서 삼켜버리는 건데…ㅡ."
찢긴 귀를 핥는 혀가 닿을 때마다 화끈거렸다. 그 혀는 귓바퀴를 타고 뺨으로 흐르는 핏방울을 정성스럽게 핥아올랐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혀가 귀에 닿았다.
"뼛조각 하나,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씹어 삼켜버리면 그때는 도망도 못 가고 온전하게 내 게 되거든. 아…ㅡ정말 대단히 유혹적인 생각이었어. 정말로 그렇게 할까. ……딱 10분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그래, 택시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
웃음 섞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귀에 꽂혔다.
미칠 것 같았다. 공포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달랐다. 그것은 오히려 고통에 대한 공포, 혹은 공포에 대한 공포라고 하는 게옳을 것 같았다.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두려울 줄은 몰랐다. 조금도, 정말로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는다'라는 거라도 예측을 할 수 있다면 낫다.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이, 등을 짓누른 손이, 꼼짝도할 수 없을 힘을 싣고 정태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손은 어느새 정태의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내며 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 손이 내려오는 길마다옷가지가 벗겨져 나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이윽고 정태의 역시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나신으로 남아, 침대에 엎드린 채 억눌렸다.
"택시에서 내리기 조금 전부터 정류장에 앉아 있는 널 보고, 나는 역시 널 그냥 꿀꺽 삼켜버려야겠다고생각했어. 이놈이 또 공항에를 가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얌전히 놔둬서야 가만히 있을 게 아니겠더란 말야. 그래서…ㅡ호텔방을 하나 빌려서 한 채로씹어먹을까, 죽인 다음에 삼켜버릴까, 계속 그 생각을 했지. 어떻게 먹어버릴까."
등골에 소름이 주욱 끼쳤다. 그의 말은 농담인 듯 가볍게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냥 농담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로 정태의를 죽여서 먹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밀폐되어 있는 이 객실에서, 정태의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 얼굴을 봤는지 나직한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그래서 죽일 생각을 하고, 그럴 요량으로 말끔하게준비해 온 장갑까지 꼈거든. ―――내가 가진 장갑 중에 제일 질이 좋은 걸로. 그래서 너를 잡았는데."
말을 중간에 끊으며, 일레이는 정태의의 귀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입술로, 이로, 혀로, 잘근잘근 귓바퀴를 깨물던 그는 느릿하게 정태의의 뺨을 핥아올렸다. 관자놀이께를 사정없이 깨물어버리는 단단한치아의 감촉이 뺨 위를 파고들었다.
정태의가 다시 뜨끔한 신음을 삼켰다. 일순 숨이 막힌다. 선명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택시에서 내리던 일레이. 택시문을 닫고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장갑을 꺼내어 끼던 그 평연한 손짓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 되겠다. 나는 정말로 미쳤었나 보다. 어떻게 이런 놈을 건사할 생각을 했던 거지. 딱 한 순간만수가 틀려도 사람을 죽여서 먹어버리겠다고 진심을담아 말하는 이런 미친놈을.
정태의는 막혀버린 입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어리석은 스스로에게 미친 듯이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물론 그보다 열 배는 더 되는 욕을, 등뒤에 달라붙은 미친놈에게 퍼부었다.
너 인간성을 대체 어디다 버려두고 왔어,이 새끼야!
원래 그런 게 없는 줄은 알았다만,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사람을 잡아다놓고 식인을 논할 놈일 줄은몰랐다.
정태의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는 이 놈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먹어라. 죽여서 먹을 수 있다면 먹어라. 테러범으로 감옥하나 살인에 식인으로 감옥 들어가나 어차피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다 이거지ㅡ아니 식인까지 간다면 정신 감정을 받아야하니 감옥 대신 병원으로 갈 소지가 다분했다ㅡ.
하지만 죽여서 먹기 전에 사람 말을 좀 들어보란 말이야……
공포와 분노가 한 데 뒤섞였다.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건드리고 있으려니까 또 삼켜버리기는 아까워지더란 말야. 통째로 삼켜버려서 온전히 내 걸로 만든다는 건 지금도 여전히 끌리는 생각이지만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된다는 건 아쉬우니까. ……다 씹어 삼켜버리고 나서도 그대로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 온전히 내 걸로 만든 다음에도 계속 이렇게 쓰다듬을 수 있다면. 응?"
이렇게, 라는 소리와 함께 그의 커다란 손은 정태의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가 한 말대로 살점이라도 뜯어내어 삼키고 싶은 듯이, 정태의를 움켜쥔 손에 거침없는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곧 생각을 바꿨어. 어쨌든 도망을 못 가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내 곂에 둘까 하고. 그 다리를 삼켜버리는 거지. 계속 도망갈 궁리를 하는 그 다리를."
일레이의 손이 정태의의 엉덩이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허벅지를, 무릎 안쪽을, 종아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그 손에 정태의는 움칫거리며 몸을 움츠린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여전히 입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도망가려던 게 아니란 말야. 왜 말도 안 듣고 이 지랄이야.
억울했다. 정태의는 그를 찾으러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차라리 아예 그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 전이라면 낫겠다. 주위에서 만류하는데도 뿌리치고 돌아갈 결심을 굳히고 막 떠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알아본 차에 이렇게 되다니,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찾으러 갈 생각 따위 안 하고 그냥 멀리 멀리 도망칠 걸 그랬다. 그러다가 잡혀서이 꼴을 당하면 억울하지나 않았다.
정태의는 울었다. 이 제정신이 아닌 남자의 광기가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섬뜩한 공포가눈물샘을 자극했다. 또한 억울한 분노. 그나마 말을쏟아내어 그 분노를 토로하면 나을지도 모르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억울함이 눈물이 되어 새어나왔다.
정태의의 발목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문득 멎었다. 잠시 멈춘 채 움직이지 않던 일레이는, 발목에서 손을 뗐다. 문득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가 정태의의 뒤쪽으로 돌아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침대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는 정태의의등뒤로 가, 정태의의 등에 가슴을 겹치듯이 뒤에서 정태의를 끌어안았다.
"울어? 이 정도로 울면 안 되지. 가엾어서 마음이 아프잖아, 응? 울지 마. 설마 정말 다리를 잘라내려고.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 …ㅡ이 정도로 무서워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도망칠 궁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태이."
하얀 손길시 살며시 정태의의 뺨을 어루만졌다. 시야를 흐리며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손끝으로 가만히 문지르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일레이는 그의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로 가엾다는 듯이, 애처로운 어린애를 위로하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울지 마……응? 벌써 그렇게 울면 안 돼. 이제 시간이 지나 밤이 오고, 그 밤이 다시 아침이 되고, 그 아침이 다시 밤이 되도록 계속해서 울어야 할 텐데,벌써부터 울면 나중엔 눈이 아파 못 견디게 될걸."
미친놈. 이 미친놈. 정태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순간 당장 그 말을 수백 번은 외쳐주리라고 다짐했다. 지금은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다.
"울지 말라니까…ㅡ. 지금은 역효과야, 태이. 네가 그렇게 울면 지금 나는, 더 화가 난단 말이야……!"
화가 난단 말이야, 라고 말을 맺는 순간이었다.
등뒤에 붙어 있던 일레이가 허리를 조금 띄우는가싶더니, 바로 다음 순간 못을 때려박듯이 거침없이퍼억, 밀고 들어왔다.
"…ㅡ!!"
입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비명은 몇 번이나 입안을 감돌다가 다시 목으로 넘어간다.
눈앞이 하얗다. 그 하얀 시야는 곧 새카매졌다가, 그 뒤에야 다시 부옇게 시각을 되찾았다.
다리 사이를 비비며 발기해 있던 성기의 감촉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ㅡ하물며 식인이나 절단 따위의 이야기를 하다가ㅡ갑자기 파고들줄은 몰랐다.
용서도 거침도 없는 힘으로 허리를 부딪쳐올린 그 성기에 꿰뚫린 몸이 경련하듯 퍼득였다.
아무런 전희도 없다. 손가락 하나 정도로 풀지조차않았다. 한동안 닫혀 있었던 그 단단한 근육을 단숨에 꿰뚫으며 깊이 파고든 그 우악스러운 성기가 몸속의 내벽을 꽉 메웠다. 아주 조금 허리를 놀릴 때마다 그 커다란 살덩이에 불거진 핏줄 하나하나가 내벽의 주름을 밀어젖힌다.
비좁은 몸 속으로 뻑뻑하게 들어찬 몸이, 이윽고 추삽질을 시작했다.
"…ㅡ! …ㅡ!!"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 대신 눈물이 비오듯흘렀다. 등덜미에 흥건이 고인 식은땀이, 몸이 흔들릴 때마다 후두둑 쏟아진다.
"아파? 아주 딱 죽겠다는 얼굴인데. 아파 죽겠어? 아니면 좋아서 까무라치겠어? 아하. 그래도 노려볼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부족한 모양이지."
정태의는 아득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일레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노려보려 해도 눈에 가득 담긴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래도 온갖 원한을다 담아 노려본다.
이 빌어먹을 자식. 미친 새끼. 수틀리면 그저 억지로 덮치고보지.
그러나 뱉어낼 수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몸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정태의의 몸 속에서 자라난 것은 아닐까 싶도록 빡빡하게 달라붙어 있는 거대한 흉물이 몸 속을 파헤치며 벌렸다.
죽을 것 같았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그 압박감때문에 죽을 것 같다. 정말로 어느 순간 몸이 아래에서 둘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벌써 까먹었어? 그 안에 달포쯤 갇혀 있으면서,그래, 좀 덜 박혔다고 그새 까먹었나? 정태이, 내가 말했지, 넌 내거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건데 그걸 까먹어?"
등뒤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거칠다. 잇새로 내뱉는말이, 말을 할 때마다 점차 분노로 차오르는 듯 허리의 추삽질에 힘이 들어갔다.
퍽, 퍽, 퍽, 아슬아슬할 지경까지 벌어진 입구를 아플 정도로 두들겨대는 살점이 부딪쳐 소리를 낸다.젖지도 않아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던 성기가 몸속에서 조금씩 윤기를 찾는지 조금씩 흔들리며 몸안팎을 오가기 시작했다.
정태의가 얼굴을 문지르는 침대 시트가 흥건히 젖어들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고, 압박감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시트를 흠뻑 적신다.
"정태이, 정신 제대로 챙겨……! 내가 말했잖아, 넌 내 거라고. 네 맘대로 몸 함부로 상하게 하지 말라고, 내 거니까. 그런데, 그런 걸 그냥 네 멋대로 튀어버리신다? 정신 나갔군."
그의 목소리는 점차 거칠어졌다. 몸속을 파고들던 성기가 그 거칠어진 목소리와 함께 점점 더 부피감을 늘렸다. 몸속을 찢어질 듯이 벌리며 가득 채우고있던 물건이 점차 더 부풀어오르는 것이 생생하게느껴졌다. 그 압박감으로 배가 터질 거 같다.
"흐. 으, …ㅡ."
정태의는 울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어린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억울하다. 아프다. 화가 나고 슬프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도 억울했다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그래, 그야 생각해 보면 분명 정태의는 그에게서 달아난 셈이었다. 그날, 정태의 하나 때문에 거기까지치고 들어온 일레이의 앞에서 달아나버렸다.
하지만 반드시 곧 돌아갈 셈이었고, 그에게 말도 했다. 물론 말을 해봐야 못들을 거리에 못들을 상황이긴 했지만, 저런 식의 억지 논란에 맞추자면 못들은 저 놈도 잘못이었다.
지금도, 신루도 숙부도 말렸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이 남자에게 돌아가려고 공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쥐잡듯 하다니,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웠다.
정태의는 입안에 담겨 있는 장갑의 감촉에도 다시억울해졌다. 이 놈은 정말로ㅡ설령 일순간이었다 해도ㅡ자신을 죽일 작정이었다. 이 장갑을 정태의의 피로 적실 생각을 잠시나마 했던 것이다.
이런 놈에게 돌아가려 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고, 그만큼 또 더더욱 억울해져서 정태의는 흠뻑 젖은 얼굴을 시트에 비비며 막힌 입으로나마 목놓아 흐느꼈다.
"울어? …――울어? 지금 네가 울면 역효과라니까, 정태이. 왜 말을 안 듣지?"
퍼억, 온몸이 뒤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쐐기 박는 성기가, 끝간데 없이 부풀어 있었다.
몸을 낮추어 정태의의 등에 바싹 붙은 가슴에 땀이맺히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깨물고 세게 빨아당기던 입술이 뺨을 타고 올라왔다. 온통 젖어서 눈물범벅인 얼굴을, 그 입술이 살며시 훔치고 다닌다.
거칠고 잔혹한 목소리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상냥한입술에 정태의는 더더욱 서러워지고 말았다.
이런 것 때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 이 괴물 같은 남자에게도 인간의 성정이 남아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얼간이 같이 이놈을 건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미친놈을 도대체 어떻게 건사하고 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태이. …ㅡ태이. 이걸 풀어주길 바라나?"
온뺨을 적신 눈물을 천천히, 그러나 남김없이 샅샅이 핥아올리던 일레이가 어느 순간 귓가에서 은근히 속삭였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목에 억지로 힘을 줘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 말을 좀 들어. 사람 말을.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과연 이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눈물을, 방울이 맺힐 때마다 남김없이 빨아마시며 일레이는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면 네 입으로 말해. 이걸 풀어주면, 네 입으로똑똑하게 말하란 말이다. 너는 내 거라고. 정태의라는 인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일레이 리그로우의 것이라고, 네 입을 말해. …ㅡ말할 건가?"
준엄하고도 매서운 말투였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어주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정태의는 너무 울어서 멍해진 머리로도 잠시 멈칫했다. 그건 그냥, 네가 그렇게 인식할 뿐이랬잖아.왜 내 입으로 말하게 하려 들고 그래.
젖은 눈으로 의아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거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문득 일레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말 안 해? 그럼 계속 입 막힌 채로 가 보자는 거지.…ㅡ좋지. 시간은 충분하고, 나도 바쁠 것 없거든."
없거든, 하고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허리를 커다랗게 추어올렸다. 몸 속의 내자을 후려갈기듯이 거침없이 더욱, 더더욱 파고드는 살덩이가 몸을 끝간데 없이 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몸 속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부풀어올랐던 살덩이가 팍, 터졌다.
"…ㅡ!!"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뱃속을 더할 수 없이 채운 성기에서 몇 번이나, 간헐적인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몸 속을 때리며 채워든그 끈적한 액체가 뱃속에서 고였다.
어깨 너머로 일레이의 낮은 신음이 들린 것 같았다.그리고 정태의 역시, 막힌 입 안으로 신음을 흘렸다. 뱃속을 두드린 세찬 물줄기마저 벅찬 압박감으로다가왔다.
그러나, 끝났다.
정태의는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떠올렸다.
무겁고 거대하게 뱃속을 두드려대던 저 빌어먹을 흉물이 이제는 나갈 때가 되었다. 그것만이 오로지다행스러워, 안도감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운을 잃고 늘어져 있는 정태의이 허리를 끌어올리며, 일레이는 다시 추삽질을 시작했다. 정태의는흠칫 눈을 뜬다.
몸속을 뿌듯하게 채운 성기는 나가지 않았다. 아니,부피조차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뱃속에 잔뜩 내보낸 액체로 몸이 젖어들자 더욱 움직이기 편해진 듯이, 허리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아래쪽으로 미친 듯이 살갗이 마찰할 때마다 안쪽에 고여 있던 부옇게 흐린 액체가 같이 방울져 밀려나왔다. 엉덩이 아래로 타고 흘러 정태의의 성기까지 적시면서 방울방울 시트 위로 떨어졌다. 언뜻 보면 마치 정태의가 흘려내는 것처럼.
죽을 것 같았다.
몸의 압박감보다 먼저 숨이 가빠서 죽을 것 같다.
쉴 새 없이 쳐올리는 일레이에게 뒤흔들리는 몸은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힘들었다.
정태의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눈물을 시트에 비벼닦아내었다. 이내 그걸 알아챈 일레이가 정태의의턱을 움켜쥐어 가로막는다. 그리고 한 방울이라도 그냥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이 샅샅 핥아올렸다.
그러는 사이에 두 번째로 몸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정태의는 아득하게 의식이 흐려지는 머리로 생각했다. 이제 끝났겠지. 이제는풀려날 수 있을 거야.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래를 움칫, 움츠렸다.착각인지는 몰라도 몸 속을 뿌듯하게 채운 그 흉물도 조금은 움츠러든 것 같았다.
귓가에서 일레이가 다시 속삭였다. 네 입으로 말하겠냐고.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 정확히는, 의식이 혼곤해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자 세 번째로, 일레이가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세 번째를 마칠 즈음, 정태의는 기절할 것 같았다. 허리 아래에 감각이 없었다. 그저 입구가 몹시화끈거려 마치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울다 지쳐 시트에 늘어진 채, 정태의는 말을 내보낼 수 없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살려 줘. 더 하면 몸이 정말로 망가지고 말 거다. 뭐든 네 말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좀 살려 줘,이 개새끼야…….
그렇게 울고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다시 서러워져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정태의에게,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린다. 상냥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며 물었다.
"네 입으로 말하겠다면 풀어주지. 네 입으로, 나를 보면서,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정확하게 말한다면."
"…ㅡ."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았다. 뭐든 해 줄 테니까 제발 조금만, 조금만 그냥 눕혀뒀으면 싶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할 만큼 늘어진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일레이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하. 더 해보시겠다?"
귓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정태의는 불현듯, 저렇듯이 웃는 그가 전혀 지치지 않았다는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괴물 같은 체력으로, 그는기분 좋게 운동을 하는 정도의 땀만 살짝 비치면서다시 정태의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태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더 하면 정태의는 정말로 몸이 망가져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이미 아래는 너덜너덜하게 망가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태의가 와락 울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이자, 일레이가 웃었다. 마구 끄덕였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 약간 턱을 위아래로 까닥인 정도였지만,일레이는 진하게 웃으며 정태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태 정태의의 입을 막고 있던 천조각을 풀어내고, 그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축축하게젖어 있는 천조각을 꺼내어 내팽개쳤다.
그런 뒤에도 손끝으로 그의 혀의 감촉을 즐기는 듯천천히 혀나 입천장, 잇몸 따위를 덧그리다가, 어느순간 손을 빼내면서 동시에 그 입술을 세게 깨물어버렸다.
아프다고 외칠 기운도 없었다.
내가 다시는 이 놈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봐라……. 인간성은 무슨 인간성……,
정태의는 훌쩍거리면서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인간성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게 분명한일레이는, 정태의의 눈꺼풀을 입술로 보드랍게 쪼면서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태이. 말해. 네 입으로."
"…ㅡ."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다. 그저 너무 운 탓에목이 꽉 잠겨서 금방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주 잠깐 말을 머뭇거리자, 일레이는 거침없이 정태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정태의는 흠칫하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ㅡ거다. ……니까, ……해."
목이 잔뜩 잠겨서 정태의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일레이는 그리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정태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대며 말했다.
"다시. 내게 제대로 들리도록."
"…는, 네 거라고. …ㅡ네 거란 말야, 이 …ㅡ끼야……."
온힘이 다 빠져 서럽게 훌쩍거리면서도 속삭이는 그 말의 말미에는 틀림없이 뭔가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던 것 같지만, 일레이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입술에 다시 입술을 겹치며, 겹친 채로 말한다.
"다시. 이름까지 제대로 들리게. 내게는 들리지 않았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분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이 빌어먹을 일레이 리그로우……, 정태의는 일레이 네 놈 거란 말이다.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
몸에 남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ㅡ내든 말든,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고,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ㅡ일레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웃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정태의의 입안에서 사라졌다.
"또 도망갈래?"
입술을 겹치고서 속삭이는 말을 간신히 알아들은 정태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일레이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광기와 열기가 뒤섞인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도망간 거 아니라니까. 아까도 네 놈에게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단 말이다.
이제는 입을 가로막는 게 없어 말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정태의는 입을 열기도 피곤할 만큼 지쳐있었다.
정태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약간, 보일 듯 말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일레이는 알아본 모양이었다. 정태의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빨아들여잘근잘근 깨문다.
"정태의."
문득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뚜렷한 그 발음을 들으며,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지쳐서 온몸이 물먹은 솜 같았다.
천천히, 그가 정태의의 몸을 돌려 눕혔다. 침대 위에 바로 눕히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정태의는 시체처럼 널브러졌다.
그러나 오래 쉴 수는 없었다.
때려죽여도 못 일어날 것 같다고 아득하게 생각하며 누워 있던 정태의는, 자신의 위에 실리는 묵직한무게감에 눈을 뜨고 말았다.
정태의의 위로 일레이가 겹치듯이 올라와 엎드렸다. 정태의는 일순 공포에 질렸다.
안 된다. 정말로 죽는다. 이대로 한 번이라도 더 했다간 틀림없이 죽을 터였다. 아마도 정태의의 커다랗게 뜬 눈에 드러난 빛을 읽은 모양이었다. 정태의의 몸 위에 엎드리다시피 한 일레이는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아, 하고 생각했다. 이 놈 정신이좀 돌아왔구나. 아까는 정신을 어디다 빼두고 다니는 미친놈 같더니, 지금은 정신이 좀 돌아온 미친놈이었다.
"괜찮아. 이제 심하게는 안 할 테니까. ……네 입으로 한 말만 네가 착하게 잘 지키면, 심하게 안 할 거야. 자, 울지 말고, 겁먹지 말고, 가만……."
은근히 울컥했다. 어린애를 어르는 그 말투가 어쩐지 몹시 거슬렸다. 내가 울긴 뭘 울어, 라고 말을 하려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태의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줄줄 울고 있었다.
스스로가 울고 있다는 걸 인식한 순간, 갑자기 정태의는 서글퍼졌다. 그 울음의 이유를 깨달은 탓이다.
이런 미친놈과 어떻게 상종하나.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정태의가 속으로 힘없이 한탄하는 가운데도, 그는 정태의의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었다.
들릴 듯 말 듯하던 정태의의 울음이 조금 더 커졌다.
"괜찮아. 착하지. 가만 있어봐. ……넣고만 있을게.안 움직이고 넣고만 있겠다니까. 그냥 그게 기분 좋아서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봐. 넣기만 하면 끝이라고."
일레이는 입술로 정태의의 볼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러면서 정태의가 고개를 젓든 말든, 그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조금씩 허리를 들이밀었다.
천천히 미끄러지며 파고드는 압박감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윽고 몸을 꽉꽉 눌러가며 성기가 반 너머 들어왔을 때 정태의는 결국 윽, 흑, 하고 또다시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악물었다.
그러자 약간 입매를 찌푸리고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가만히 있어, 내 물건에 몸을 맞춰놔야 앞으로 네가 편하다고."
그렇게 말한 그는 정태의의 몸 위에 엎드렸다.
정태의의 머릿속은 일순, 당장 그 말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말이 수십 가지는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말을 늘어놓을 기운도 없었고, 말해봐야 씨도 안 먹힐 게 뻔했다.
네 물건에 몸을 맞췄다간 늙기도 전에 고생할 게 뻔하다……,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며 우울해졌다.
정태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쉬면서 오르내리는 가슴과 가슴이 미묘하게 어긋난 채로 겹쳤다. 배가 맞닿는다. 마주친 살갗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정태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에서 힘을 풀었다.
이런 고난은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아무래도 줄서기를 다시 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건사하기에 너무 벅찰 듯싶었다.
"정태의. …ㅡ너, 나 좋아하지."
다시금 선명한 발음으로ㅡ가끔 발음이 퍽 분명할 때가 있었다. 이놈이 아무래도 몰래 발음 연습이라도 했나 보다ㅡ이름을 부른 일레이는, 잠시 사이를 둔 뒤에 그렇게 말을 이었다.
정태의는 번쩍 눈을 떴다. 번쩍이라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 눈꺼풀을 밀어올린 거였지만.
지금 뭔가 희한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정태의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다가, 기분 탓인지 그 순간 아래에 겹쳐져 있던 몸이 흔들, 허리를살짝 추어올린 것 같아서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멍한 머리로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ㅡ정태의. 너 나 좋아하지.
그런가……하고 저도 모르게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사람에게 암시가 더 잘 먹힌다고 하는, 예전 어디선가 본 연구 결과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렇게 번뜩 차렸던 정신은 다시 슬슬 힘이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떠올려 본다.
과연 정말로 내가 이 놈을 좋아하는 걸까.
그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쳐갔다. 그 과거는 주로 일레이 리그로우라는인물에 대한 이미지로, 하나씩 그 과거가 스칠 때마다 정태의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아니, 좋아하려야 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 놈이 저지르지 않은 악행이 뭐가 있단 말인가.
살인을 안 했나, 강간을 안 했나, 강도를 안 했……이건 기억나는 바가 없지만 이 놈은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태연하게 강도도 했을 놈이었다.
……아니다. 생각해 보면 강도도 했구나. 품목이 좀 달라서 그렇지, 한때 자신에게서 신루를 가로챘던 적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어쩐지 그 반대되는 형국이고.
이런 인간을 좋아한다면 그건 성인군자이거나, 아니면 바보다. ……그것도 아니면 정신분열이거나.
정태의는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목덜미에 닿은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 귀에까지 전해진다.
"그때, 네가 전화했을 때."
문득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그랬잖아. 날 좋아한다고."
그 단호한 맺음에 정태의는 까마득한 머리로 기억을 억지로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단언할 수 있는데,그렇게 말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 말을 그렇게 들었던 걸까.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그때 분명하게 생각했어. 이건 내 거다."
"……."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쳐서 입을 열기 싫기도 했지만, 맞붙은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기분 좋기도 했고 나직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기울이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직전에 네가 나더러, 널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일레이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정태의는 언뜻 몸을 움츠렸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분명 그러리라고 마음속으로 선명하게 전해지는 감각은 있었지만 그때 그의 대답은 듣지 못한 채 전화가 끊어졌었다.
대답이라.
사실 굳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싫어한다고 대답한다면 그거야 과히 유쾌한 기분은아니겠지만 그보다 불쾌한 말을 들은 것도 숱하다.
좋아한다고 대답한다면, ……그것도 좀 곤란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뭔가, 걷잡을 수 없어질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건 대답 안 해도 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렇게 끊어진 목소리는 한참 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만 꺼내어놓고 잠들다니 그건 뭐냐 싶었지만, 묵직하게 몸을 누르는 무게감에 허덕이던 정태의도 천천히 잠이 왔다.
삼촌……, 어쨌든 죽지는 않았어요. 정말로 죽는 줄알았지만.
문득 정태의는 숙부의 염려섞인 목소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깜빡, 깜빡, 수면과 현실의 경계선 사이를 넘나들며천천히 현실 저 너머로 의식을 떨어뜨리려 할 즈음,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역시……내 거지."
그 낮고 조용한 말과 함께 귓가에서 뺨으로 뭔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게 무슨 감촉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낯익은 감촉이다.
뭐야, 그 논리는……, 아득하게 흐려지는 머리로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흐려지는 머리 끝에, 문득 허리를 꽈악 끌어안은 세차고 억센 팔이 느껴졌다.
"내 거다. 태이."
* * *
눈을 떴을 때 정태의는 제일 먼저 아득한 머리로, '살아 있네……'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었다.
정태의는 손을 들어올렸다.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어깨뿐인가, 팔에서 손끝까지 다 아프다.
가만히 손가락을 까닥여 보면, 실제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살갗이 욱신거려서, 정말로 아픈 걳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살갗이 욱신거리는 까닭은,누가 꼭꼭 잘도 주물러놨기 때문이다.
"……."
팔이고 다리고 머리고, 그 우악스런 손으로 움켜쥐쥐 않은 데가 없었다. 온몸이 근육통처럼 아파도 이상할 게 없다. 천천히 신경을 온몸으로 한 번씩 돌려보았다. 온몸이 아프기는 해도 정작 다치거나 한 곳은 없는 듯 했다.
허리 아래는 감각이 없는 걸 보니, 또 며칠 고생하겠다.
정태의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몸을 조금 뒤척이자 당장 욱신, 허리 아래가 아팠다.
"……! ……! ……!!"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더 아픈 것은 다리 사이, 그 안쪽이었다. 정태의는 소리 없는신음을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덜컥 걱정이 들었다.
혹시 진짜 왕창 찢어지거나 했으면 어떡한다.
전에도 한 번 찢어졌다가 며칠 화장실 갈 때마다 고생을 했었다. 그때의,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번거롭기도 이를 데 없는 고새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한숨을 삼켰다.
어쩐다…….
정태의는 잠시 고민했다. 곧 굳은 결심을 하고, 욱신거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손으로 엉덩이 사이를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악……! ……!!!"
엉덩이 안쪽의 입구를 손끝으로 스치는 순간, 정태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볼 수는 없었지만 감각적으로 느끼건대 통통 가엾을 정도로 부어올라서 다친 입구는, 틀림없이 향후백 년쯤은 낫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찢어졌을지도 몰랐다.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놈이랑 이 짓을 하면 내 성을 간다……!"
이를 갈면서 앓는 소리를 내던 정태의는, 그러나 그 특유의 소심함이 살아나, 움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슬슬 고개를 몇 센티쯤 틀어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눈동자만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 누워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욕실인가. 아니면 잠시 나갔거나.
가만히 누워서 기척을 살폈다.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지만, 기척으로 보아 정태의는 홀로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입까지 자유로이 놀리지 못해서야 살 맛이 아니다.
"……젠장……. 미친놈을 상대하다가 내가 먼저 골로 가겠다……, 줄을 잘못 섰어."
정태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천천히,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억울함은 풀지 못 했다. 오히려 그런 혹독한 처우를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의 죄값이 컸느냐 하는새로운 억울함이 하나 더 늘었다.
"……."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닭 쫓던 개.
숙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하나, 그 말은 일견 사실이었다.
그때 일레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바로 눈앞에서 자신이 물러섰을 때.
문득 가슴이 욱신, 저릿하게 아팠다. 숨결이 조금 높아진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억울해할 일은 아닐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었다.
"……."
한편으로는, 어쩌면 지금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섰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인간적이지 않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정말로 심각하게,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 체력은 범상치 않은 정도를 벗어났다. 게다가 찬찬히 생각해 보면 머릿속도 범상치 않았다.
비록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보통은 그렇게 과격하고 파괴적인ㅡ보기에 따라서는 자기파괴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ㅡ방식을 쓰지는 않는다.
과연 저 남자에게 돌아온 게, 정확하게 말하자면 돌아가려고 하다가 붙잡힌 게, 잘한 짓일까.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욱신거리며 아픈 몸까지 생각하니 더더욱 우울해진다. 저런 놈을 정말로 건사해야 할까. 건사라는 단어가 너무 벅차도록 과격한 저 남자를 감당할 자신이, 잠들기 전을 생각하면 할수록 없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상책은 역시, 튀어버리는 거다. 물론 그랬다가 다시 잡히면 그때는 상상도 하기 싫은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거다. 산 채로 뜯어먹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모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천리 만리 밖으로 달아나버리는 게 제대로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훌륭한 선택지였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건사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잠시 침묵핟가, 말 한 부분을 바꾸어본다. 저걸 도대체 누가 건사할까.
분명히 잘라 말할 수 있는데 저 남자를 건사할 수 있을 인간은 없었다. 장담해도 좋다. 그나마 눈치 있게 목숨 부지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치면,
"……나구나……."
정태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푹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ㅡ내 거다, 태이.
문득 낮고 애틋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난다.
잠들기 직전.
몸 위에 무겁게 겹쳐진 몸은, 한숨을 쉬듯이 그렇게 속삭였었다.
"……. 내 거는 무슨 얼어죽을……."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아픈 팔을 움직여 이불을 줄줄 끌어올렸다. 목 위까지 바짝 끌어올려서, 눈 아래를 덮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보나마나 얼굴 아래가 불그스름할 것 같았던 탓이다.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됐지.
여태 숱하게 생각했지만 끝끝내 결론은 나지 않은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며, 정태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내가 진짜, 이놈의 정신분열을 얼른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버려야지 원……."
"정태이. 지금 꿈꾸시는 건가, 아니면 일어나서 정신차리셨나?"
아마 몸만 멀쩡했더라면 천장까지라도 튀어올랐을 거다. 정태의는 자신밖에는 아무도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방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의 아픔도 잊고 휙 돌아보자, 데스크와 창문 사이에 장식된 커다란 화분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일인용카우치에, 일레이가 앉아 있었다.
딱히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 넉넉하게 팔짱을 낀채 지그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멍하니 부릅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기억을 되살렸다. 젠장, 내가 좀전까지 무슨 소리를 했더라.
정태의의 찌푸린 얼굴을, 일레이는 별반 기분 상한빛도 보이지 않고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쩌면 뭔가생각에 잠긴 것도 같았다.
"왜 기척도 없이 거기 앉아 있어."
"음…ㅡ?"
정태의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혹은 지금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어딘지 나른해 보이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본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지."
이윽고 그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그래,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태의는 어쩐지 그 생각이라는 게 못내 신경 쓰였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저울에 올려두고 가늠해보는 기분이다.
일레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정태의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 바로 옆에 선 그는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버티고 일어나 앉은 정태의는,아무래도 혼자서 앉아 있기는 힘들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슬그머니 침대 머리맡에 기대었다. 그리고 일레이의 시선을 질세라 마주본다.
"먼저 말해주자면."
그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켕기는 마음이 있어 속으로 흠칫하며 그의 입을 쳐다본다.
"찢어지지는 않았다. 좀 헐고 붓긴 했지만 며칠 있으면 나을거야."
"……."
봤구나.
정태의는 스스로 입구를 매만져보고 그 쓰라림에 몸부림쳤던 조금 전을 떠올리며 벌레 씹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말해주자면."
일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또 흠칫했다.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혼잣말하면서 험담 좀 할 수도 있지……아니 그 전에 험담도 안 했잖아.
"너는 성을 갈아야 할 거다."
일레이가 무심하게 하는 말에 정태의는 잠시 응? 하고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말일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봤지만 별달리 짚이는게 없었다.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저게 뭐에 대한 무슨 뜻의 말일까 고민하는 눈치인정태의를 내려다보면서 문득 피식 웃은 그가 혼잣말로 '태이 리그로우라도 괜찮겠군'하고 중얼거린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일레이가 세 번째로 그 말을 꺼냈을 때, 정태의는 세 번째로 또 흠칫하면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무슨 기억력이 그렇게 좋다고 일일이 짚어준담.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잠시 침묵했다.
문득 그가 침대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몸을 기울여, 정태의의 위로 몸을 굽힌다. 바로 이마 위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태이. 너는 내 거다. 어제 네 입으로 분명하게 말했듯이."
"…ㅡ아니 그건 네가―――."
"네 입으로 말했지. 분명히. 정확하게 다시 읆어주자면 '이 빌어먹을 일레이 리그로우, 정태의는 일레이 네 놈 거란 말이다,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였던것 같은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숙부가 그랬던가, 혹은 카일에게 들었었던가. 이놈이 성격이 아주 특이해서 그렇지 머리는 비상하게 좋은 놈이라고. (성격이 특이하다고 순화해서 말한 걸 보니 카일이었나 보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의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래, 네 거 해라, 네 거 해."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웃었다.
그 순간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웃음이다. 그 웃음과 몹시 닮았다. 라만의 별저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기쁜 듯이, 그저 순수하게 기쁜 빛을 띠고 다가오던 그때의 웃음과 닮았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낯선 표정이, 지금 일레이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심장이 지끈, 울렸다.
몇 번이나 생각했던 얼굴이다. 몇 번이나 생각했던표정이었다. 자신을 본 순간 저렇게 기쁘게 웃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정태의는 문득 손끝이 떨렸다. 어쩌면 손끝이 저린것도 같았다. 그래서 손을 마주쥐고 가만히 손가락을 주물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저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런 말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그래, 너 다 해……."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그러다가 문득, 한편으로는 울적한 생각이 들어서 입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원래 내 꿈은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 건데, ……에휴."
그러나 정태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몹시 귀가 좋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일레이는 문득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하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반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듯 픽 웃는다.
"온 세상 다정한 놈 다 죽여놓을까."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니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문지른다. 이 남자가 말하면 도무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하긴 농담이 진짜로 농담이고, 진담이 진짜로 진담이었던 경우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다정한 놈을 어떻게 골라내려고."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다정하다는 기준은 너무도 애매모호하다. 그 기준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많이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눈앞의 이 괴물 같은 남자도 다정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이내 대수롭잖게 말했다.
"네가 알려줄 테지."
"내가?"
"네가 만나서 잘 먹고 잘 살려고 덤비는 상대라면 다정하고 상냥한 인간이겠지."
"……. 다정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나냐."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기준 한 번……,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하고 만다. 이 놈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겠다고.
이거야, 어쩐지 점점 더 이 놈을 자신이 건사해야만할 것 같았다. 자신이 이 놈을 건사하길 포기하고 팽개쳐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리면 이 놈은 집요하게쫓아와서 자신이 만날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을 유심히 지켜볼 것 같았다.
정태의가 자신의 인생이 점점 늪으로 빠져들어가는심상에 빠져 가만히 손끝만 보고 있는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리고 또 하나 더 말해두지."
"아직도 남았냐……."
도대체 나는 무슨 말들을 한 거야.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이놈은 기억력도 참, 대단히 비상하다.
정태의는 더 이상 나올 말이 뭐가 있으랴 싶어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말해보라는 듯 슬쩍 고갯짓하자, 일레이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태의가 앉아 있는 옆에 앉아, 그의 위에 엎드리기라도 할 듯 한쪽 팔로 정태의의 너머를 짚었다. 팔 안에 갇힌 위협적인 형국에서,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더 남은 말이 뭐라고.
"달아날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조용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울렸다. 정태의는 말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얼핏 했던 것도 같다. 분명히 아까, 하루라도 빨리 달아나는 게 자신의 인생 설계를 위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달아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는 일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조용했다. 다소는 의외롭게도, 거칠게 화를 내거나 협박을 하듯이 으르는 빛은 없었다. 마치 밥 먹으라는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평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세 번째는 안 돼."
그가 말을 잇는다. 정태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평연한 얼굴로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뭔가 찾아내기라도 할 듯 구석구석 바라보던 그는 다시 입을 연다.
"이번에도 나는, 너를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으니까.죽여서 삼켜버려서 다시는 달아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려고, 반 넘게 진심으로 생각했었어."
"……."
정태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렇게 말을 하면서도, 일레이라는 남자는 그런 생각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미안해하는 빛은 전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언제든 내키면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살짝, 심장이 떨린다.
정말로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한숨을 쉰다.
"그러니까 세 번째는 안 돼. 세 번째에는 나는 정말로 너를 죽이게 될 거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 ……부탁이니까."
마지막 한 마디에 정태의는 고개를 든다.
이 남자의 입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마지막 한 마디가 퍽이나 낯설었다. 누구나 쉬이 말하는 그 흔한 말 한 마디에, 정태의는 다시금 움칫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진짜로 이 남자가 비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왔나…….
정태의는 문득 심각하게 생각했다. 신루에게 말했을 때에는, 그 말이 정태의의 진심이긴 했지만 말 자체는 어느 정도의 농담을 담고 있었다.
정태의는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이것도 기분이 괜찮다.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이 남자의 의외로운 점ㅡ그 대부분이 이런, 다른 사람이라면 이를 데 없이 평범한 일이라는 점이 안타까웠지만ㅡ을 발견할 때마다 문득문득 웃음이 났다.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나는."
정태의가 입을 열었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아주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공항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나는 공항에 가서, 너한테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 섞어 말했다.
말하고 보니 또다시 아련하게 억울함과 분노가 솟았지만……뭐 그냥 넘기자. 의외성을 하나씩 발견하는 대가라 치고.
시선을 들자, 일레이는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 기묘한 얼굴이었다.
마치 대단히 기괴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한,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 희한한 시선이 빤히 다가오자공연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자신도 괜히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마주본다.
"……. 거짓말 아냐."
아무래도 저 괴이쩍은 시선의 정체가 그거지 싶어서 정태의는 굳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자 일레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혹은 단순히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인지, 혹은 다른 생각이었는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하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 잘 하던 놈이 갑자기 입을 다무니 온 세상이 조용하다. 그렇게 되자 이상하게마음이 침착해지지 못했다.
그때 문득.
"내가 내건 만큼만."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잘 못 들어 응? 하고 되물었다.
"내가 내건 만큼만, 내가 너를 위해 내걸었던 몫만큼만. 그만큼만 돌려주면 돼."
평연한 어조였다.
지나가며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정태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미심쩍게 물었다.
"……. 혹시 그 몫이 좀 크거나 한 건 아냐……?"
그 말을 들은 일레이는 문득 얼굴에 짙은 웃음을 띠었다.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진하고 큼직한 웃음이다.
"글쎄. 자신 없나?"
그의 애매한 대답에 정태의는 머리를 천천히 긁적이며 중얼중얼 말했다.
"아니, 받은 만큼은 줘야지. 네가 잃은 몫만큼도."
정태의는 그가 잃은, 제법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어쩐지 돌려주려면 만만찮을 것 같았다.
"이번 일 때문에 너는 많은 걸 잃었을 테니까."
'이 앞 뒤 분간도 못하고 달려드는, 계획도 없는 놈아'라고 한마디 덧붙여주고 싶었지만 그 말은 삼켰다.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아주 잠깐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정태의가 알아차리고 의아한 빛을보내기 전에 아무렇지 않은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그만큼만 주면 돼. ……좀 벅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받아낼 테니."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운 희미한 말이었다. 정태의는 얼핏 스치듯이 응?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일레이는 옅은 웃음을 띤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 *
정태의는 욕실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화장실에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죽을 고생을 하면서 볼일을 다 본 것까지도 좋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욕실문이 너무 멀어보였다.
"저 놈을 다시 부를까……."
잠시 그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일레이의 도움을 받았다. 부끄럽지만, 정말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혼자 오려고 침대 밖으로 기다시피 해서 나왔는데, 바닥을 내디딘 순간 무릎이 풀썩 꺾이고 말았다.
오늘자 신문을 보면서 '아하, 기자들이 기사 쓸 게별로 없었나보군. T&R과 UNHRDO이 쌍으로 두들겨 맞는 걸 보니.'라고 남일처럼 말하며 빙글거리고있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후두둑 쓰러지는 걸 보곤얼굴의 표정을 지우며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 발 늦게 다가와 정태의를 훌쩍 일으켜 침대에 앉혀주며, '멀쩡히 있다가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왜 넘어져' 라고 묻는 얼굴이 몹시 희한하다는 투다.
그 순간 정태의는 정말로 원망스럽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 표저에서 일레이는 원인을 짐작한 모양이었지만,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살을 슬쩍 찌푸린다.
'체력이 그렇게 바닥이어서야, 세상 살아가기 힘들겠군.'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정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이 자식아, 너는 네 놈이 박혀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나라고 내가 이런 처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래놓고 남일이라고 말을 그따위로!
정태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한편으로는 과거에 그간 자신과 행복한 성생활을 즐겼던 사랑스러운 몇몇 청년들이 겪었을 고통을 이제야 깨닫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만하지는 않았을거다.그들이 언제 마구간 종자와 섹스를 해 봤을까.
침대에 앉은 채로ㅡ앉으나 서나 힘들었지만ㅡ주먹을 움켜쥐고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으려니 일레이는 그래도 잃어버린 인성을 찾으려고 노력은 해볼 작정인지, 정태의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며 물었다.
'누워 있지 왜. 맥주라도 갖다 줘?'
'아니, 화장실 가려고. ……맥주도 갖다 줘.'
정태의는 원래의 볼일을 말하고 나서, 그의 제안에도 혹하는 바가 있어 둘 다 말했다. 일레이는 픽 웃더니 정태의를 훌쩍 들쳐 메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화장실에 앉혀놓고, 바로 그 건너편에 있는 미니바에서 맥주도 하나 꺼내다주었다.
화장실에 앉아서 맥주를 먹는 것도 좀……,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뭐 어떠랴 싶어 풀탑을 뜯어 꼴깍거렸다. 그러다가 화장실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는 일레이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왜.'
'맥주 다 마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 왜.'
'못 일어서잖아, 너. 화장실 타일 바닥에서 넘어지려고?'
'……. 나 여기서 맥주 마시고 바로 일어서서 나갈 거 아닌데.'
설마 맥주 마시러 화장실에 왔을까,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일레이는 아니,하고 손을 저었다.
'볼일 보려면 일어서서 옷을 내려야 할 것 아냐. 큰거면 세워서 옷 벗겨 다시 앉혀주고, 작은 거면 내가 등뒤에서 붙잡아 세워줄 테니까 그대로 볼일 보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일레이의 그 말에 정태의는 뜨악해졌다. 부릅뜬 눈으로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 말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거동 불능한 환자도 아니고, 앉은 채로 어떻게든 옷은 벗을 수 있다. 작은 볼일이라도 않은 채로 보면 된다.
'사람 있는 데서 무슨 볼일을 봐.'
정태의는 이것도 이놈의 비인간성 중 하나일까 생각하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넌 공공화장실은 안 가나?'
'세상 어느 공공화장실이, 등뒤에서 사내놈한테 끌어안긴 채 볼일을 본다던!'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 그대로 벌컥 소리쳤다.
아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일레이는 '좋으실 대로.'라고 하면서 화장실 문턱에서 물러섰다. 그러나다시 객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정태의를 흘끔 보면서 피식 웃는다.
'네가 싸는 걸 내가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
그거랑 그거랑 같냐! ㅡ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전에 이미 일레이는 걸어가버렸다.
아무래도 저 놈은,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는 투덜투덜하면서, 찢어지는 고통 속에 볼일을 봤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 생각했다. 내가 정말 저 놈과 다시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별로 현실성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런 허무한 결심을 하고 나니 정태의는 어쩐지자기자신이 좀 가엾어졌다.
"그나저나……이제 앞으로는 어쩌나."
정태의는 화장실에 멍하니 앉은 채 중얼거렸다.
당장 급한 일이 일단락되고 나니, 그제야 앞날이 막막해진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정태의는 현재 테러범 명단에 올라 있었고, 실질적으로 처지는 일레이와 마찬가지였다. 아마 카일이 일레이 때문에 이번에 곤욕을 단단히 치렀을 것과 마찬가지로, 숙부도 정태의때문에 곤욕 깨나 치렀을 거다.
테러범이 어딘가에 취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심지어는 마음 편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도 없었다.무엇보다 앞으로는 추적의 손길을 피하며 다녀야 하게 생겼다.
어디로 가야 할까. 뭘 먹고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날이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는 어떻게 하려나. 그래도 저 놈은 다이아몬드 숟가락이니 좀 나으려나. 그러나 돈이 있다 한들 부자유스러운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어딘가 숨어서 살기에 적당한 곳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인가에서 뚝 떨어진 숲속의 오두막 같은건 어불성설이고…….
정태의는 끄응,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여차하면 그냥 억울한 옥살이를 하거나.
정태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크게 내쉬곤, 아까부터노려보던 욕실문을 향해 걸어갈 시도를 시작했다.
아픈 것만 좀 참으면, 힘이 빠졌을 뿐 구조상으로는멀쩡한 다리인데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무릎을 적당히 두드리며 다리를 주무른 뒤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그래, 안 움직일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몸인데, 앓아누운 것도 아닌 바에야.
정태의는 탁탁, 발바닥으로 가볍게 타일 바닥을 두드렸다.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싶어, 옆의 세면대를 짚고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약간 휘청하긴 했지만 무사히 일어났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나마 천천히 걸어 욕실문을 열고 나온 정태의는, 역시나 아프구나, 하고 벽에 잠깐 기대었다. 허리 아래가 어찌나 아픈지,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들었다.
여하튼, 저 놈이랑은 그 짓을 할 게 못 된다. 적어도 하루, 심할 경우는 사나흘은 아프다아프다 하고 살아야 하는데 이번엔 족히 일주일은 갈 것 같았다.
다시금 원망이 솟아 투덜투덜하면서 객실로 나가던 정태의는,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고함소리에 움칫걸음을 멈추었다.
"너 지금 태이랑 같이 있지! 죽였어? ……죽였냐고?!"
자신의 이름이 섞여 있는 문장을 우렁차게 고함치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정태의는 처음에는알 수 없었다. 몇 초쯤 지난 다음에야 그 목소리를 자신도 들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카일이었다. 카일의 고함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잠깐, 저게 카일의 목소리라는 걸 못 알아들었다. 스피커폰에서 그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는동안 태평한 얼굴로 미니바에 있는 먹을거리를 적당히 꺼내어 테이블에 펼쳐놓고 있던 일레이는 귀찮은 듯 혀를 찼다.
"죽이긴 뭘 죽여. 여긴 어떻게, …ㅡ왜 전화했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던 일레이는 이내 짐작이 간 듯 '그냥 현금으로 지불할 걸 그랬군, 객실비', 하고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귀찮은 전화라면 한두 마디만 하고 그냥 끊어버리는 그가 어쩐 일로 귀찮은 티는 다 내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마 수화기 너머의 상대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주 사고도 대형 사고를 내놓고 왜 전화는 뭐가왜 전화야. 내가 너 때문에, 제임스에게 고개를 못들겠다.]
"어차피 나 아니어도 형은 제임스에게 고개 못 들어. …ㅡ왜 전화했냐니까."
일레이의 목소리에 약간 험악한 빛이 섞였다. 이제슬슬 본격적으로 귀찮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욕실에서 어기적거리면서 걸어나오는 정태의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문득 그 시선에 얼핏 웃음기가 섞였다. 그 웃음을 보고 정태의는 울컥해서입매를 찡그렸다.
"뭐가 웃겨."
"아장아장 걷는 게 웃겨서."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웃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도끼눈을 떴다.
그때, 나직하게 말했는데도 정태의의 목소리가 저 너머까지 닿았는지 전화 스피커에서 정태의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태이, 같이 있나?]
"아, 예."
정태의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통에 움칫 놀랐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여태껏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안도의 빛을 띠었다.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예? 저요?"
정태의는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대답했다.
[창인이 걱정하던걸. 연락이 없다고.]
"예? …ㅡ아아."
정태의는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공항에 가서 숙부에게ㅡ그리고 예의 비리경찰에게도ㅡ전화를 하기로 했었는데, 그럴겨를이 없었다.
"맞다, 그랬었지……. 곧 전화드려봐야겠네요."
정태의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숙부의입장이라도 걱정은 엄청나게 했을 거다.
아마도 숙부는 정태의의 부탁대로 일레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봤을 터였다. 그리고 일레이가, 정태의가 있는 요하네스버그로 갔다는 것까지도 알아냈을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곧바로 공항에 가서 전화를 하겠다고 하던 조카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이거야, 정태의를 만나면 죽일까 어쩔까 잔뜩 벼르고 있었던 일레이를 아는 바에야 숙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자칫하면 정말로 숙부의 걱정대로 죽을 뻔했다.
ㅡ세 번째는 안 돼.
문득 일레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 번째.
정태의는 알 수 없었다. 무어라 확언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일로 인해 상황이 어떻게 나아갈지, 그런 건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래, 이 남자의 인간성 상실이 더 심해지지만 않는다면.
……과연 여기서 더 상실할 인간성이 과연 변변하게 남아 있기나 할지는 차치하고.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카일에게 인사를 한 뒤 정태의는 다시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누웠다. 앞으로 적어도 한 사흘은 이렇게 있고 싶었다.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다.
……혹시 사흘쯤 이렇게 있으면 어느 순간 테러범을 검거하겠다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정태의는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은 경찰에 잡힐 만한 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니까, 혹여 정태의 홀로 잡혀 감옥에 갇히기라도 하면 또 대전차포를 쏘아대서 구해주겠지, 하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대국가 테러를 태연하게 하는 놈이 감옥에 대고 포를 못 쏠까. 안심하고 잠이나 자자.
"……."
눈을 붙이려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이 무슨 생각을했는지 퍼뜩 깨달았다. 저 놈이랑 같이 있으면서 저놈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주워지긴 커녕 자신의 인간성마저 망가지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일과 일레이의 통화는 이어지고있었다. 별로 엿들을 생각은 없는데도 자연히 들려오는 대화에, 정태의는 귀를 기울이고 만다.
[너, 어차피 갈 데도 마땅찮을 테니 당분간 집으로 들어와 있어라.]
카일이 씁쓸하게 말했다. 일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저 너머에서 보이기라도 한 듯 딱부러지게 덧붙였다.
[내 집까지는 허락이 없는 한 들어오지 못하게 해 뒀어. 일단 당분간은 들어와 있어라.]
어차피 들어오더라도 날마다 나가 돌아다닐 테지만, 하고 못마땅하게 말하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태의는 카일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카일의 집에 있는 동안 나날이 바뀌었던 카일의 친구들 가운데서는 희한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숱한 친구들 가운데 검경 관련 고위직 하나쯤 없으리란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나 친구들을 달고 사는데 그 중하나쯤 없으면 이상하다.)
그러나 일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 마디로 대답했다.
"싫어."
[그럼 어디에 가 있으려고!]
"뭐 적당히. 있을 곳은 많아."
[그랬다간 내가 리타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듣는지 알아?]
"그 잔소리, 나한테까지 넘길 셈인가 보지. 난 안 가."
일레이는 딱부러지게 대답하곤 더 이상 통화할 생각이 들지 않는 듯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때였다.
"카일, 베를린은 안전한가요?"
그렇게 물어본 사람은 정태의였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던 정태의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리였다.
정태의의 목소리를 들은 카일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 집은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지. 태이, 그러면 자네만이라도 와 있도록 해. 언제든 환영이라네.]
"그래도 괜찮나요? 그래도 일단은 범죄자인데, 은닉해줘도 피해는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라고 하지 않았겠지. 날 믿어. 내가 가진 건 없다고 하나 그래도 그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
카일은 웃으며 말했다. 정태의는 대단히 회가 동한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일레이가 미심쩍은 얼굴로 정태의를 지켜보고 있다가 정태의가 몹시 흥미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표정이 약간 험해졌다.
"어이, 너 설마……."
"그럼 죄송한데, 신세 지도록 할게요.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거든요. 어떻게든 일이 좀 해결이 날 때까지,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고국에도 돌아갈 수 없고, 딱히 몸둘 데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상당히 고민하던 차였다. 정태의는매우 기쁘게 카일의 제의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 옆에서 일레이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난 안 가!"
[그래, 어차피 너야 싫다면 말을 안 들어먹는 놈인걸 리타도 알 테니 내가 잔소리 좀 듣고 말도록 하마. 그럼 태이, 언제 올 건가? 방 비워두고 기다리도록 하지.]
"아, 그게요, 여기서 2, 3일만 좀 쉬다가 바로…ㅡ."
"태이!"
일레이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정태의는 한숨 돌린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디고 그를 돌아본다.
"어, 나 불렀어?"
"거길 왜 가! 난 안 가!"
"그래? 그럼 나 혼자 가 있지 뭐. 가끔 놀러 와. ……너도 알겠지만 이건 달아나는 거 아니다. 엄연히소재가 확실하잖아?"
정태의는 혹시나 싶어 못박아뒀다. 또 달아난다느니 하면서 날뛰면 대단히 곤란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한 침묵을 지키는 스피커폰을 쳐다보았다.
버젓이 다 들릴 텐데, 이러다가 괜한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다.
정태의는 얼른 전화에 대고 말했다.
"그러면 이번 주 안에 가 뵙도록 할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뵈어요."
정태의가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맺자, 카일은 이내 그가 전화를 끊으려 한다는 눈치를 채었는지 아,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이번 주 언제든 오게. 출발하기 전에 미리연락 주면 페터에게 말해서 공항으로 마중나가게 하지.]
"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예의바르게 인사를 마친 정태의는 저편에서 전화를끊는 걸 확인하고느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옆에서, 일레이는 대단히 못마땅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쫓기는 것 때문에 그런다면 걱정할 것 없어. 백 날 쫓아봐야 날 잡을 수 있을 만한 놈은 없으니까."
"아니, 쫓겨다니는 게 싫어서……."
"그러면 적당한 데에 거처를 구하면 되잖아."
"그래봐야 언제 이사할지 모르도록 불안정할 것 아냐. 역시 난 베를린으로 가야겠다. ……좀 아쉽네. 종종 놀러 와."
정태의는 진심으로 약간 아쉽다고 생각하며 일레이에게 미리부터 손을 저어 인사를 했다. 어쩌면 아쉽다고 생각하는 표정이 드러났는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를 노려보던 일레이는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혀를 찼다.
"……. 꼭 거기로 가야겠어?"
"음. 가고 싶은데."
사실 거기가 편했거든, 읽을거리도 많고, 손님도 끊이지 않으니 심심할 새도 없고, 집의 장점을 하나씩꼽아보며 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는 지그시 옆에서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려보든 말든 아랑곳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일단 거처는 해결됐네. 이제 먹고사는것만 걱정하면 되겠어. 으음…ㅡ."
수배령이 내린 범죄자의 몸이 되고 보니 할 만한 일이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숨어사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 테고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지 않겠지, 정태의는 이 걱정도 나중에 하기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기야 그렇다 치고, 이 남자는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못마땅한얼굴로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보면서, 정태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이 남자는 정말로 사회성이 바닥이었다. 정태의가 만나 온 사람들 가운데 이 남자보다 정상적인 곳에서 일해먹기 힘든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사람 잡는 것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잘 했으니 UNHRDO 같은 데에서는 무려 교관 자리씩이나 차지하며 잘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꽝이다.
사람 잡는 기술을 살릴 수 있을 만한 데를 생각해 봐도, 테러범이란 딱지가 붙은 채로 일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옳았다. 갈 수 있는 데라고 해 봐야 불법 지대나 무법 지대인데, 그런 곳에서 또 이놈의 성질머리에 잘 배겨낼 수 있을 것 같지가않았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야말로 이제 큰일이다. UNHRDO에서는 쫓겨났지, 더 이상은 T&R에서도 일할 수 없을 테지,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지, 수배령은 내렸지. 어떻게 하나. 정태의는 우울해졌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던 남자가 이렇게 되었으니 더 안타깝다. 그가 내걸어야했던 몫이 너무나 컸다.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할 만한 건 이 남자가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물고 태어났다는 건데, 세상은 돈으로만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정태의가 우울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여태 불쾌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일레이는 "뭐야."하고 묻는다. 정태의가 한숨처럼 말했다.
"넌 진짜 어떻게 하냐……. 나도 걱정이지만 너도 참 힘들겠다."
"뭐?"
정태의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일레이에게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너, 뭐 해 먹고살 거야?"
정태의가 묻자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시 "뭐?"하고 묻는다.
그래. 하긴 생각해 보면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앞날부터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힘들게 살지는 마라. ……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라도, 여차하면 내가 책임지고 먹여살려 줄게."
정태의는 비장한 책임감마저 느끼며 말했다. 일레이는 뭔가 뜨악한 얼굴을 하고 눈을 깜빡이며 정태의를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다시 뭔가를 생각하는눈치더니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책임진다?"
"음. ……완전히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굶지는 않게 해 주마. 비록 실업자 신세에 일자리 찾기도 글렀고 심지어는 쫓기는 몸이지만ㅡ너나 나나 그건 마찬가지지만ㅡ그래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정태의는 씁쓸하게 말했다.
테러 같은 사고를 터뜨리면서까지 구해줄 줄은 몰랐지만ㅡ어떻게 생각하면 구해줬다기보다는 오히려 재난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을 테지만ㅡ정태의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설령 일레이가 멋대로 벌인 일이라 해도 그렇다.
실질적 책임은 없더라도 도의적 책임은 느꼈다.
정태의의 묵묵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입매를 미묘하게 찡그리는가 싶더니,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야 고맙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한 번, 어쩌다가 자신의 신세가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본다.
어떠한 시초도 있을 수 없고 숱한 상황들이 맞물려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UNHRDO에 들어간 이래, 수난과 고생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었다. 그런 고생 끝에 결국은, ……낙이 오지는 않았지만.
정태의는 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깊이 숨을 들이쉰다.
전도다난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서 하나씩 따져 생각해 보면 결국은, 그리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아직은 과연 길일지 흉일지 정확하게판단할 수 없는 건 역시…….
정태의는 지그시 일레이를 보았다.
카일의 전화를 끊은 후 줄곧 언짢은 얼굴로 생각에잠겨 있었던 일레이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풀린 듯언뜻 희미한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이 남자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흉이지, 대흉.'이라고 말할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 역시 지금 누군가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이 사귀어도 좋을 만한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의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이 남자가 얼마나 악한지 익히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 악행에 걸려 두고두고 속을 끓였던 바있다. 지금도 화를 내려면 얼마든지 낼 수 있도록, 이 남자가 한것들은 아주 비인간적이었다.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결국은 싫어지지 않았으니, 사실은 현재의 신세 타령을 하려야 누구를 붙잡고 할일도 아니었다.
"나쁘지 않지, 이것도."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지만 굳이 물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과연 자신이 말한 '나쁘지 않다'와 그가 말한 '나쁘지 않다'가 같은 류의 문제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그래.
나쁘지 않았다.
6권 끝. <Passion 완.>
hidden track 1st.
그들이 베를린으로 간 것은 딱 사흘 뒤의 일이었다.
사흘 동안 침대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하면서 몸을쉬인 정태의는, 그 동안 일레이가 어디선가 구해 온 여권ㅡ썩 좋지는 않아서 오래 쓸 물건은 못 된다고하는 걸 보니 숙부에게 전에 부탁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이지 싶었다ㅡ을 챙겨들고 그와 함께 베를린으로 갔다.
요하네스버그를 뜨는 날 아침에야 정태의는 거의 없다시피 한 짐정리를 하며 일레이에게 물었다.
"넌 어디로 갈 건데."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아침부터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던 그는, 어디로 갈 거냐는 정태의의 물음에 마뜩찮은 시선을 흘끔 던졌을 뿐이다. 서운한 것과 개운한 것의 중간쯤 되는감정으로, 어쩌면 서운한 쪽이 조금 더 크다 싶기도한 마음으로 정태의는 그와 함께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한 뒤에야, 일레이가 자신과 같은 곳에서 발권을 받는 걸 보고 정태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베를린? ……거길 경유해서 다른 데로 가려고?"
"아니."
일레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침부터 그는 대단히 심기가 언짢아 보였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으음, 하고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슬쩍 물었다.
"너도 집으로 들어가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 화가 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구겨버렸을 뿐이다.
아하. 과연.
정태의는 상황을 짐작하고 입다물기로 했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리타의잔소리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갈 정도라면 차라리네가 말했던 대로 어디 다른 데 집을 얻지 그래."
"너는 베를린의 본가로 들어가겠다며."
"어, 뭐 나야 그렇지만."
그러자 다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구겨진 티켓이 한 번 더 구겨졌을 뿐이다.
숙부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 비리경찰의 도움을받아 요하네스버그 공항을 무사히 뜨기 전에 정태의는 카일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출발한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일레이도 함께 간다고 하자 그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 평정을 찾고 공항으로 페터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래서―――베를린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차가 막히는지 늦어지는 페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고 자리를 뜬 일레이를 기다리면서 정태의는 페터가 언제쯤 오려나, 하고 생각했다.
시간 관념이 딱 부러지는 페터의 성격을 떠올리며, 차가 막혀서 도로 위에 서 있다면 지금쯤 꽤나 초조해하고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픽 웃었다.
연락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정태의는 이미 휴대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일레이는 폰을 가지고는있다고 하나 배터리가 다 되었다며 꺼두었다.
"문명의 이기란, 있을 때는 편한 줄 모르는데 없어지면 불편하단 말야……."
정태의는 역시 다시 만드는 게 편하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는 얌전히 집 안에서만 살아가며 조심스럽게 은둔생활을 해야 하는 몸이다. 전화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당분간 문명의이기는 몸에 걸친 시계 정도로 충분할 듯했다.
정태의는 흘끔 시계를 보았다. 30분 째. 사람을 기다리는 데에야 자신이 있지만 멀거니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재미없는 법이다.
"화장실에 갔다는 놈은 빠져죽었나."
토달토달거리면서 정태의는 화장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옆에 놓여 있는 자판기를 발견했다. 그 안에 보이는 슐타이스.
"오……."
정태의는 주머니 속에서 딸랑거리는 동전을 매만지며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내 몫만 사면 아무래도좀 그렇지, 하고 캔을 둘 뽑는다. 자기 몫의 풀탑을 뜯어 몇 모금 마시면서 정태의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일레이의 몫을 들고,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좀체 나오질 않았다.
정태의는 화장실에서 쓰러진 건 아닐 테고, 하고 중얼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당황했다.
혹시 객실로 들어갔나 하고 생각했지만 객실은 다 비어 있었다.
"……."
화장실 간다고 사라진 놈이 정작 화장실에는 없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다 마신 자기 몫의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나머지 캔의 풀탑마저 뜯어버렸다.
두 번째의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정태의는 과연 그가 어디를 갔을까 고심해 보았다. 그러다가, 때 되면 오겠거니 생각하며 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얼핏 중간층에 일레이의 모습이 보인 듯도 싶었다.다시 고개를 돌려보자, 중간층 저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중간층은 항공 사무실이 늘어선 곳이라 1층처럼 북적거리진 않았다. 하지만 일레이가 항공 사무실에 볼일이 있을 까닭이 무얼까.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동쪽으로 나 있는ㅡ거기에서 더 가까운ㅡ계단을 올라 중간층으로갔다. 그러나 사무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 중간층에는 가끔 사무실 사람들이 화장실이나 휴게실을 오갈 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그럼 이놈은 대체 어디로 간 거람.
정태의는 몇 모금 채 남지 않은 맥주를 찰랑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화장실에나 가야겠다 싶어 중간층의 가운데에 있는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1층과는 달리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곳이라 보다 조용하고 깨끗했다.
화장실로 들어선 정태의는 멈칫했다. 화장실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레이다.
"뭐야, 화장실 간다더니 여기 있었구나. 그런데 왜 굳이 중간층까지……."
사람 없는 데가 편해서 그런가. ……하긴 나라도 그런 무식한 물건은 다른 사람 눈앞에 내보이기는 싫을 거야. 정태의는 문득 일상의 우울한 기억이 떠올라 우두커니 멈춰서고 말았다.
일레이는 아마도 안쪽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배터리 다 됐다더니, 어느새 충전했었나 보다.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남은 맥주나 다 마시고들어가자 생각하며 맥주를 주욱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전화에 대고 말하는 일레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얼마, 150만? …ㅡ글쎄. 그래, 보수도 그리 탐탁지않고. 나는 이번엔 그냥 패스하지. 아, 그렇지. 한동안은 연락하지 마. …ㅡ음. 필요하면 내가 연락할 테니까. 그래, 한동안은 나는 실업자로 살기로 했어. ……그래야 책임지고 먹여살려 준다는 놈이 있어서. …ㅡ알았어. 괜히 전화하지 마. 그놈 눈치 빠른놈이니까 금방 알아."
……꿀꺽.
정태의는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어째 유난히 쓰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막히게 맛있는 맥주였는데 어째서 몇 모금 사이에 이렇게나 맛이 바뀌었을까.
정태의는 발소리를 줄여 조용히 화장실 앞을 떠나며, 맥주 탓인지 유난히 씁쓸한 입을 쩝쩝 다셨다.
"……."
눈치 빠른 그놈은 아직 몇 모금 남은 맥주를 쓰레기통에 고이 버렸다. 그리고 우울하게 1층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거기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있으려니, 저쪽에서 돌아오는 일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할까. 그냥 확 뒤집어버릴까. 하지만 그래봐야 소요없겠지. 그나저나 저놈은 대체 무슨수상쩍은 일을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애초에 왜 내가 저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먹여살리겠다고 했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사람 얼굴을 빤히 보면서."
유유히 걸어온 일레이는 침울해져 있는 정태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저만치 화장실 옆에 있는 자판기를 보곤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슐타이스를 두 캔 뽑아왔다. 자, 너 좋아하는 거,라고 말하며 건네어주는 캔을 받아들며, 정태의는 우울하게 '고마워.'라고 말했다.
흘끔 일레이를 쳐다본 정태의였지만, 정태의는 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았다. 말을 꺼내어봐야, 이미 허튼 말을 약속해버린 다음에야 이제와서는 씨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정태의는 침울하게 맥주를 홀짝거렸다. 옆에서 의아한 얼굴로 일레이가 '왜 그래, 갑자기'라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을 폭로한들 탄압받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게 여차할 경우 먹여살리겠다고 약속한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사실이었다.
Fin.
hidden track 2nd.
"으."
정태의는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으, 라고 신음을 흘린 입모양 그대로, 그 순간의 그 경악스런 표정 그대로,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굳어버린그의 손에서 팔랑,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그는 차마 주울 엄두도 내지못했다. 1초도 채 안 될 짧은 시간 동안 얼핏 보았을 뿐이지만 그 사진에 찍힌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으로 머리에 각인되어 눈꺼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않았다.
"내가 지금 뭘 봤지……."
정태의는 시퍼렇게 질려서 얼어붙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지 않아 시선만 흘끔 떨어뜨렸다. 엄지발가락 바로 앞에 엎어져서 떨어진 사진을, 믿어지지 않는 걸 보듯이 망연하게 쳐다본다.
아니, 어쩌면 잘못 봤을지도 몰라. 가끔 사람이 헛걸 보기도 한다잖아. 그래, 게다가 지금은 만성적으로 수면이 부족한 나날이 아닌가. 밤에 잠을 푹 못자고 그 잠을 낮에 잠깐잠깐 보충하는 나날이니 헛걸 봐도 이상할 것 없지.
정태의는 내키지 않는 몸을 슬슬 구부렸다. 그리고머뭇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집어들었다. 뒤집혀 있는 그 사진을 뒤집어 볼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이 헛걸 보았다는 걸 확인해야 하기에 정태의는 큰맘 먹고 그 사진을 뒤집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숨결이 새어나왔다. 안도의 숨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것은비탄 어린 신음이었다.
"신이시여……."
그의 손가락 사이로 다시 사진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다시금 발 앞에 떨어진 사진은, 이번에는 뒤집히지도 않고 그 내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멈추었다. 그 사진 안에서는 정태의가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울부짖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대에 묶인 채 몸의 치부는 다 드러낸 채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아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고 하면 틀렸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엉덩이 사이에ㅡ더 정확히 말하자면 항문에ㅡ권총의 총신을 깊숙이 박아넣고 있었으니.
* * *
오늘 모러가 온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침에 식사를 하다가 카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이, 모러랑 아는 사이였지."
정태의는 야채스프를 뜨던 손을 멈추고 카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그렇죠. 알죠."
"그래, 맞아. 예전에 우리집에 있을 때 친하게 잘 지냈었지."
"아니 잘 지낸 기억은 별로 없지만……그런데 그놈이 왜요?"
정태의는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숱한 기억들을곱씹으며, 갑자기 스프 맛이 뚝 떨어져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엄지로 입가를 문질렀다. 옆에서 리타가 싸늘하게 노려보는 걸 깨닫고 얼른 엄지를 내보이며 '아무것도 안 묻었어요, 그냥 습관이 돼서.'라고변명을 했다.
카일은 정태의의 그 씁쓸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혹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건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오늘 오후 늦게 모러가 올 거야. 연말 휴가를이쪽에서 보내기로 했다더군. 아마 오늘은 이 집에서 묵을 것 같아. 내일부터는 고향에서 지낼 거라지만."
정태의는 아, 예, 하고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괜히 한 번 더 훔쳤다.
그러고 보니 T&R에서 최근에 뭔가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공들여 준비하는 야심작이라던가. 누가 들으면 환장을 하면서 달려들 이야기로구나, 하고 넘어갔었는데, 정말로 찾아오는구나. 그 총기 마니아 녀석.
"그거 잘 됐네요."
정태의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날 수있어서 반가운걸요, 하고 말을 덧붙인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놈에게 쌓인 원한이 있었다. 한 번 꼭 만나보기는 해야 했다. 잊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정태의는 흘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 앉은 일레이를 보았다. 요즘 뭔지는 몰라도 일거리에 치어 사는일레이는 지난밤에도 산더미처럼 쌓아둔 일을 하다가 갑자기 정태의의 방에 찾아와 한 바탕 뒹굴고, 할 일이 남았다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 새벽녘에야 겨우 조금 눈을 붙였을 그는, 별반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가면 다시 침대에 들어갈 것 같았다.
리타의 잔소리를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레이는저 성질머리에 놀랍게도, 리타가 하는 말은 거스르지 않았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더 자고 싶은 걸 리타가 '자더라도 아침 식사는 하고 다시 자도록 해요.'라고 말하며 세 차례나 침실로 찾아가 깨워서 억지로 일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일레이는, 여느 때라면 식사를 하면서 한두마디 정도는 말을 섞을 법도 한데 오늘은 말이 없었다.
정태의는 묵묵히 식사를 재개했다.
그래. 어떻게 모러에게 쌓인 원한을 잊을 수 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원한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놈의 의도를 생각하면원한을 품어 마땅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미친놈에게 쫓길 당시, 그에게 잡혔다간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러 그 나쁜놈은 고작해야 총 한 자루에 태연하게 정태의를 팔아넘겼다. 원래 사이가 좋은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총 한 자루에 사람의 목숨마저넘겨버리다니.
정태의는 그때의 원한을 가슴속에 잘 새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얼마 전 일레이의 방에 책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발견한 한 장의 사진.
책상에 소홀하게 꽂아두었었는지, 정태의가 책상 저만치 위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을 한 권 꺼내자 먼지와 함께 사진이 한 장 떨어져내렸다. 도로 올려두려고 사진을 집어들던 정태의는 별 뜻 없이그 사진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그 안에는 모러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냥 흔해빠진 인물사진이 아니었다. 차마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할 수 없을 모습을 한ㅡ자칫 잘못 말했다간 오히려말하는 사람이 백안시당할 수도 있는ㅡ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왜 일레이의 방에 있었을까. 그런 사진을가지고 있을 정도라면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건데, 설마 일레이와 모러가 예사롭잖은 관계라든가…….
정태의는 다시 숟가락을 놓았다. 생각을 하던 중에아름답지 못할 걸 상상하고 또 입맛이 떨어져버렸다.
그 사진에 대해 일레이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요즘그가 일에 짓눌려서 살기도 했고 정태의 역시 한가하지는 않아 깜빡깜빡 까먹고 말았다. 이렇게 생각이 날 때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거나 해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을 때였다.
사실, 그들이 예사롭잖은 관계이리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 사진을 보고 정태의가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일레이가 그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것도 아니고, 모러가 그런 사진에 찍혀 있다는 사실그 자체였다.
……콜트 45구경이었지.
눈이 썩는 것만 같았던 그 사진을, 정태의는 의외로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모러의 다리 사이에 박혀 있던 것은 콜트 45구경 단총이었다.
"콜트 하나 갖고 나한테 두고두고 그 난리를 피우더니……."
포크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살벌함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카일이 고개를 기울였다. 정태의는 얼른 웃으면서 그 포크로 익힌 야채를 찍었다.
사실 그때 일레이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물어봐도 좋앗을 걸 차마 물어보지 못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러만큼 악독하지 않았던 정태의는 그의 명예를 위해 어딜가서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사실 정태의가 볼 때 모러는 마니아를 아득하게 넘어서 있었다.예전 언제였던가, 모러가 총 하나를 두고 경탄해 마지않으며 찬탄을 늘어놓을 때, 정태의는 경악했던적이 있다. 황홀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총 예찬론을 펼치는 그의 사타구니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혹시 모러 그놈, 총에 미치다 못해서 아예 총과 섹스를 하려고 들게 된 건…….
정태의는 세 번째로 입맛이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즐겁게 아침 식사를 할 팔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그대로 식사를 마칠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후 늦게 모러가 오면 저녁은 함께 먹게 될 거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더욱 입맛이 안 돌 테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잘 먹어두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래서 정태의는 다시 포크를 집어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제법 오랜만에 보는 셈이었다.
몇 년만이었더라, 하고 손가락을 꼽아 세어보던 정태의는 생각보다 시간이란 게 빨리 흘러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조금 놀라고 만다.
거의 형식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국제적인 범죄자 신세가 된덕에 대외적으로 나다니지는 못했다. 나름대로 조용하고 건실하게 사는 척했고ㅡ물론 그런와중에도 일레이는 아슬아슬 사고를 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ㅡ, 그렇기 때문에 그럭저럭 한가하고 온유한 생활을 보내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 게, 공식적으로 모습이 비칠 만한 자리에 얼굴 안 내밀고 사는데도 그리 한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일에 밀려서 사는 탓일 거다.
시간은 점점 살같이 지나간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저만치 뒤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모러, 이 놈을 보는 것도 퍽 오랜만이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참 오랜만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얼굴 마주치니 또 원한이 새록새록 솟아난단 말야.
정태의는 커다란 스포츠백을 옆에 비끌러 메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 몇 년만에 봐도 변한 게 없는낯익은 얼굴을 가만히 팔짱끼고 쳐다보았다. 몇 년이 지나도, 사람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이 집의 구조를 이미 꿰고 있는 모러가 손님방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정태의를 보았다. 그래, 고작 몇 년에 그리 변하는 것도 아니다. 모러도 당장 도끼눈을 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흉악 테러범."
"……."
진짜 변하지 않았구나. 자연히 정태의의 눈도 도끼눈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적반하장 아닌가.
정태의가 기억하기로, 그는 분명 모러에게 빚을 갚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빌어먹을 콜트, 분명 갚았다. 그런데도 저 놈은 정태의를 사신에게 던져두고 새 총을 홀랑 챙겨서 날아가지 않았던가.
그 원한이 울컥 치솟아, 그래도 상당히 치명적이고 사적인 문제이니 나중에 천천히 기회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정태의는 미묘한 어감을 담아 말했다.
"콜트 45구경은 잘 있으신가?"
좀 말을 지나치게 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을 들어도 이 놈은 알아채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 사진을 정태의가 봤다고는 생각지 못할 테고, 게다가 어쩌면ㅡ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ㅡ사실은 그 사진과 같은 일이 숱하게 있어, 그때마다 총이 바뀌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콜트 45구경이뭐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긴, 게다가 몇 년이나 지난 일일 테니 이 놈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러의 시선이 시퍼레졌다. 순식간에 그 눈에 살기가 감돈다. 마치 억눌렀던 원한이파르르 살아났다는 듯.
"콜트 45……, 그럼 아주 잘 있지.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방 안 깊은 곳에 아주 잘 뒀지. 총에는 죄가 없거든. 나쁜 건 다……네놈이지!!"
스포츠백을 바닥에 퍽 내동댕이치면서 모러가 손가락으로 정태의를 가리켰다.
설마 이런 격렬한 반응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태의는 일순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눈을 크게 뜨고 두어번 깜빡이다가 뒤늦게야 그의원한에 찬 말이 귀에 들어와서 눈을 부릅떴다.
"뭐가 나쁜 건 다 나야! 네가 콜트 45구경을 미묘하게 갖고 논거야 네 취향이 이상하게 생겨먹은 탓이지!"
"내 취향이 아냐! 아니란 말이다! 내 귀하고 사랑스런 그 아이들을 어떻게 그런 데에다……!"
모러는 절규했다.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그 범상찮은 외침에 정태의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 뭐야, 그럼. 왜 그러고 놀았어."
정태의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춰서 미심쩍게 묻자, 바닥에 내팽개쳤던 스포츠백 위에 과장스럽게 엎어진모러는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우는 것처럼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의 괴로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체 무게에 납작하게 눌리는 저 스포츠백에서는 뭔가 단단한 게 천 아래로 슬쩍 비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한 손에 들어갈 만한 단총이다.
휴가를 즐기러 오면서도 꼭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성에 찬다니, 이 놈은 정말로 총에 혼을 쏟았나 보다. 그래, 어차피 총과 그 짓도 하는 바에는, 총이랑결혼해라, 총이랑.
대체 저 총을 갖고 홍콩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대단히 의심스럽게 여기며, 정태의는 부들부들떨며 흐느끼는 그가 고개를 들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가……네가 릭 그놈한테 흉흉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아니, 나는 괜찮아!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나는 뭐, 똥구멍이 좀 찢어져서 며칠 동안 화장실에 갈 때마다 고생했지만 그건 괜찮다 치자고! 대체 내 사랑스러운 귀염둥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콜트 45구경이, 그 대중적으로 쓰이는 그 효율적이고 손맛 좋은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 태이 네 놈은, 네 놈은, 콜트사에 무슨 원한이라도 진 거냐?!"
순식간에 한 바가지 쏟아내는 말 가운데 적당히 들은 건 듣고 거를 건 거르는 와중에 정태의는 눈살을찌푸렸다.
"릭? ……일레이? 그놈이 왜. 내가 그놈한테 무슨 흉흉한 부탁을 했다고……."
그러고 보니 그 사진도 일레이 방에서 나왔었다.
모러의 말을 되새겨보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잠깐 진짜로 믿을 뻔했잖아.그 사진 보니까 배경이 딱 UNHRDO 아시아 지부 사내실이던데! 일레이가 UNHRDO에 있을 때라면 이미 그게 몇 년 전인데, 그 당시에 그놈이 뭐, 누가 뭔가 부탁한다고 잘 들어줬던 놈인 줄 알아?!"
당장 지금만 해도 뭐 하나 좀 제대로 부탁을 하려면꼭 조건을 걸고서야 들어주는 놈인데!
약간 방향이 엇나간 분노이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정태의는 '그까짓 총으로 좀 뚫렸다고 화를 낼 정도면 나는 이미 고혈압으로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인마!'라고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러게 누가 그놈한테 찍히랬냐! 제가 알아서 무덤파고 들어가 뗏장쓰고 누운 주제에 왜 남 탓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기 때문에ㅡ그리고 그랬다간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ㅡ정태의는 그 고함을 삼켰다.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놈이, 너랑 약속한 바가 있다면서 나를, 나를 그 꼴로 만들었단 말이다!"
모러가 벅벅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다시 스포츠백 위에 엎어져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 이제 보니 저쪽 사이드에도 총이 하나 있구나. 불쑥 튀어나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대체 저 가방 안에 총을몇 정이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정태의는 질린 얼굴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러의 말에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렸다.
일레이가 말을 했다면 그냥 대충 둘러대거나 헛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게다가 공연히 멀쩡히 있는사람을 붙잡고 그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모러의말이 옳다고 보는 게 흐름상으로는 타당하다. 타당하겠지만.
"아? 아아, 까맣게 잊고 있었군. 너 가져. 선물이다."
정태의가 일레이의 코앞에 사진을 들이밀자 뭐냐는듯 흘끔 시선을 준 그는 아아, 라고 중얼거리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정태의는 팔을 쭈욱 뻗어 그 사진을 자신의 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린 뒤 곁눈질로 슬쩍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선물을 하려면 좀 그럴 듯한 걸로 해야지 어디 이런 흉측한 걸 선물이라고……."
정태의는 사진을 손끝으로 팔랑팔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새벽 2시가 넘어가는데도 모니터에 창을 여럿띄우고 그래프와 차트를 짚어보고 있던 일레이는 흘끔 정태의를 보더니 돌아앉았다. 그러나 아직 일거리는 많이 남았는지 전원은 끄지 않는 걸 보면 단순히 잠시 쉴 생각인 모양이다. 그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두며 정태의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왜. 맘에 안 드나? 네 대신 모러에게 그 원한을 갚아주겠다고, 그때 그랬었잖아. 그 사랑해 마지않는총으로 뚫렸으니 그 녀석에게는 이 이상 가는 타격은 없었을 텐데."
일레이는 정태의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들어 무심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내 대신 원한을 갚다니 무슨……."
말을 하다 보니 뭔가 머릿속에서 살짝 걸리는 게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이야기가 오갔던 것도 같다. 그게 언제였는지 딱하니 떠오르지 않는데, 분명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일레이는 정태의의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보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잊었나? 네가 달아나서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걸 끌고…ㅡ아니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갔었을 때인데. 그래, 세링게로 가기 전. 그때 내가 UNHRDO 지부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네가 같이 가겠다고 우겼잖아. 모러에게 볼일이 있다면서."
"……아."
정태의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났다. 그래, 그때였다. 희미했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랬었다. 그때 모러에 대한 원한에 불타오르던 자신은 기왕 홍콩으로 되끌려서 돌아온 바에는지부로 돌아가서 모러나 박살내어주겠다고 별렀다.그러나 외부인은 UNHRDO 출입금지라고 해서 결국홍콩에 있어야 했다.
그때. ……그때.
기억을 떠올린 정태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그래……그때. 이거……."
정태의는 얼음 같는 눈으로 사진을 노려보았다. 이따위 것, 이 따위 사진 하나 때문에.
"너도 다시 기억나는군. 그때 네가 입으로 빨아주면서 부탁했었지."
"한 적 없어!"
아니, 입으로 빨긴 했지만 그러면서 '부탁'한 기억은 없었다. 그 당시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먼 훗날 모러와 만날 날을 기약할 걸, 왜 그놈에게 입을벌리고 말았을까.
그때 정태의는 그렇게 확실하게 구음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전에도 물론ㅡ아직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을 무렵에ㅡ사귀던 사람과입으로 애무를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깨나가슴, 허리 정도였다.
정태의는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태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마르고 닳도록 했으면서 뭘 그러고 있어. 너, 또 얼굴 익었다."
그 앞에서 정태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가 일레이가 픽 웃었다. 정태의는 힘없이 바로 뒤의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르지, 달라.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그래, 그 말마따나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미 구음이특이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었다. 이미 마르고 닳도록 했다. 어쩌면 총괄적으로 세어보면 아래로 삽입한 것보다 입으로 한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이 많아서 바빠 죽을 지경이라 도무지 수십 분의 시간도 빼지 못할 때에는 정태의를 끌고 와서 입에다 자신의 성기를 물려놓은 채 서류장을 넘긴 적도 있는 놈이었다.
그런 일을 눈물을 삼켜가며 숱하게 당하고 난 지금이야 그래, 어찌할 도리 없이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참 풋풋하고 건전한 시절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다가, 일레이가책장 아랫단의 조그만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를 내밀어 겨우 정신을 차렸다.
풀탑을 뜯어 벌컥벌컥 마시고 나자 속이 좀 가라앉았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보았다.
"모러 그놈은, 그래도 여전히 총에 환장을 하더군."
한참을 스포츠백 위에 엎어져 있던 모러가 '이런, 이러다가 우리 귀염둥이들 눌려서 망가지면 안 되지'라며 얼른 몸을 일으켜 손님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걸 보며 그 뒤통수에 대고 '그 정도로 눌려서 망가질 것 같으면 그게 어디 총이냐'라고 대단히 타당한 주장을 했지만 모러는 들은 척도 않았다.
심지어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스포츠백의내용물을 쏟아놓는데, 총이 몇 정이나 와르륵 쏟아지는 걸 보고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도대체가 저렇게 많은데 저걸 못 잡다니 공항 검색도 다 헛거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한숨 섞어 물었다.
'넌 그 꼴을 당해도 총이 좋은가 보지.'
'총에 무슨 죄가 있어!'
간단하면서도 모러의 머릿속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대답이었다. 그래. 총은 죄가 없지. 죄는 사람이 짓는 거지. 그 총으로.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모러가 총을 하나하나 집어들고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그가 막 방문턱에서 떨어질 때, 등뒤에서 모러가 조금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래도 45구경 콜트는 그 뒤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차마 못 지니고 다니겠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아픈 건 마음이 아니라 다른데겠지,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바로 지금 이순간, 지난밤의 성교 때문에 허리 아래가 묵직하고나른한 스스로의 처지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마음에 안 든다면. ……그냥 시체로 만들어 가져다주는 게 더 흡족한 선물이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 정태의의 눈앞에서 일레이가 그 자신도 맥주를 마시면서 사진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정태의는 얼굴을 기괴한 표정으로 굳히며 손을 내저었다. 이 남자가 말하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아마 농담도 아닐 거다.)
"그래도 뭐……덕분에 45구경짜리 콜트는 다시 못갖고 다니겠다니까 그 기종 하나만이라도 고쳤네. 그 병. ……저 놈 총에 환장하는 그 병 고치려면 초을 기종별로 싹 모아다가 한 번씩 다 넣었다 빼주면되는 거 아냐?"
마지막 두어 모금의 맥주를 마시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태의는 그래, 그것 좋은 생각이다, 라고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다음 순간 다시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놈의 병을 고쳐줘야 할 만한 친분도 없었고, 무엇보다 대체 누구를 시켜서그럴 것인가. 자기 손으로 하기는 절대로, 죽어도 싫었다.
"글쎄, 아닐걸."
그러나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가 심상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맥주캔에서 시선을 올려 그를 흘끔 보았다. 일레이는 맥주캔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찰랑, 소리로 봐선 반쯤 남은 모양이다. 정태의가 손을 내밀자 그는 이내 눈치채고 자신이 들고 있던 캔을 건네었다. 장난감을 받아든 어린애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맥주를 마시는 정태의를 보고 피식 웃는다.
"요전에 정창인 교관에게 전해 들었는데 토우였던가, 모러랑 같은 방 썼던 놈. 그놈이 이상하다면서 말하더군. 모러 그놈, 환한 얼굴로 총을 하나 하나 손질을 하다가 콜트 45구경을 닦을 차례만 되면 우울해진다고. 하지만 우울한 얼굴을 하고서도 45구경을 제일 정성 들여 닦는다지."
"엉……?"
"총신 끝부분을 닦을 때에는 집념의 기미조차 보인다고, 토우가 무서울 지경이라고 했다던걸."
언젠가 또 박힐 때를 위해 미리 손질해두는 거 아닌가? 하고 일레이는 대수롭잖게 덧붙였다.
그러나 정태의는 얼굴을 팍 찌푸리며 맥주캔을 쥔손을 늘어뜨렸다. 젠장. 맥주맛까지 떨어지겠다. 아냐, 맥주에 무슨 죄가 있어. 그래도 마셔야지.
일레이는 말없이 맥주를 꼴깍거리는 정태의를 보고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미묘한 눈으로 쳐다보며중얼거렸다.
"그놈쯤 되면 어지간해선 그 총에 대한 집착 못 버리지. 그건 이미 중독이야. 네가 맥주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엉? ……사람을 무슨 알콜 중독처럼 말하고 있어.그냥 가끔 속시원해지라고 한두 캔 마시는 걸."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든 캔을 일레이에게 내던졌다. 쉽게 받아내며 그는, 반이나 남아 있던 1000ml짜리가 그새 다 빈 걸 보고 흐음, 하고 웃었다.
"적당히 좀 줄여. 안 그러면 나도 너, 맥주만 보면 우울해져서 다시는 맥주를 마시고 싶지도 않을 기억을 하나쯤 만들어줄 테니까."
평연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그 느릿한 말은 농담인 듯도 하고 진담인 듯도 한 빛을 담고 있었다.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뭐야, 그게. 정원의 풀장을 맥주로 가득 채워서 그 안에 하루종일 처박아두기라도 하려고?"
만약 짐담이라면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이 남자의 인성을 생각해 보며 정태의는 상상을 굴려봤다. "가끔 들르는 게이블이 그 모습을 봤다간 크게 슬퍼할 거야."라고 덧붙이면서, 그 자신은 그래도 좋겠다는생각을 했다. 하루종일 맥주 안에서 헤엄치고 자칫해서 들이켜도 시원한 맥주맛이고. ……김이 빠질테니 맛은 좀 없겠지만 그래도 뭐.
그러나 일레이는 벨트 버클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바지 단추를 풀고 퍼스너를 지익 내리면서 "아니, 그게 아냐."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심상찮다. 정태의는 저 몸짓이 가리키는 신호를 퍼득 깨닫고 움찔 몸을 움츠렸다.
"너, 일 많이 남았잖아. 놀 시간이 어딨어."
"두어 시간이면 끝나. 그러고 나면 한 일주일은 좀 한가할 거다. 그리고, 일 따위보다 너랑 즐기는 시간이 더 중요해."
"어…ㅡ어어어, 그것 참 고마운데…ㅡ나는 좀 졸린데……."
"그래. 그럼 잠부터 깨게 만들어줄까. 조금 전의 이야기를 계속하지. 맥주가 꼴도 보기 싫어지게 만들려면, 네 성격으로 보건대, 간단해. 풀장에 가득 채울 만큼 대량의 맥주를 허비할 필요도 없지. 몸 속에 직접ㅡ, 고정쇠로 구멍을 벌려놓고 네가 똑똑히쳐다보는 앞에서 네 직장 속에 곧바로 맥주를 들이부어도 될 테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만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이 옳았다. 잠이 확 깼다.
이런 류의 말에 있어서는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는 놈이라, 그상황을 상상해본 정태의는 섬찍해져서 몸을 움츠렸다.
딱딱하게 굳어서 말끄러미 그를 노려보는 정태의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일레이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벌어진 바지 앞섶과 속옷을 헤치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살덩이를 꺼내었다. 아직 발기하지 않아 무겁게 늘어진 그 물건은,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며 두어 번 손으로 쓰다듬어준 것만으로도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니면, 맥주를 연상시킬 만한 걸 맥주 대신 네 입에 부어줘도 되겠지."
"뭐?"
의아하게 되묻는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는 피식 웃으며 말없이 보란 듯이 자신의 성기를 두세 번 흔들어 보였다. 영문 모를 얼굴로 그 성기와 일레이의미묘한 표정을 번갈아 보던 정태의는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굳히다 못해 시퍼렇게 낯빛까지 바뀌었다.
"야!!!"
벌컥 뒤집힌 목소리로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얼른 침대 반대편으로 옮겨가 앉는 정태의의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일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유쾌한 듯이 한동안 소리내어 웃다가, 슬쩍 손을 내젓는다.
"아니, 농담이다. 나도 그렇게 해서 네 원한을 살 생각은 없으니까. 이건 그저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지.네가 지나치게 맥주에 빠져 살 경우의."
"……."
정태의는 그 즉시 맥주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짓까지 당했다가는 정말로 재기불능상태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저 남자와의 성교에 그럭저럭 익숙해져서 이제는 저 끔찍하게 커다란 게 밀고 들어와도 쾌감을 느끼며 허리를 움직이게 된 지금도 완전히 인생 막장이라고 생각하는 판에.
정태의는 45구경 콜트를 손질하는 모러만큼이나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우울에 오래 잠길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네 말마따나 일은 빨리 마치는 편이 좋으니, 지금은 간단하게 할까. 자기 전에 일 다 마치고 내일부터는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침대에서 공을 쏟을 테니까, 응?"
"아니, 아냐, 공 안 쏟아도 돼. 평소처럼만 하면 돼."
평소처럼만 해도 네 놈의 그 괴물 같은 체력을 따라가려면 난 충분히 죽음이거든, 정태의는 여전히 우울하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레이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거절해 봐야 들을 놈도아니니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입으로 하는 게, 당장은 숨이 막혀서 힘들어도 나중에는 몸이편했다.
정태의는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반쯤 일어선 성기의 밑둥을 잡았다. 거의 매일같이 접해도,볼 때마다 참 징그럽게도 크다 싶은 그 끄트머리에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 순간 꿈틀, 물건이 좀더 위로 치솟았다.
끄트머리에서 밑둥까지 혀로 덧그리며 내려간 정태의의 뺨에, 일레이의 손이 닿았다. 턱에서 뺨, 귓불을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욕정이 묻어난다. 또 하나의 손이 목덜미에서 어깨를 쓰다듬더니,옷 속으로 파고들어 곧바로 정태의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손톱으로 거칠게 가슴의 돌기를 긁고 따끔하게 잡아당겼다. 아, 낮은 신음을 삼키며 정태의는몸을 움츠렸다. 그러다가 얼굴이 확 뜨거워지고 만다.
"날마다 공들여서 빨아준 보람이 있군. 곧바로 뾰족하게 솟잖아."
머링 위에서 일레이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정태의는 못들은 척, 뜨끈뜨끈한 얼굴을 숙이며 무작정 일레이의 샅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그가 재미있다는 듯 돌기를 매만지거나 가끔 비틀듯이 잡아당길 때마다 몸이 절로 움찔움찔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태이."
문득 그가 이름을 불렀다. 그 숨결에 선명하게 욕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미 입에 넣기도 힘들 만큼 부피가 늘어난 그 욕망을 핥으며, 정태의는 몸을 움츠렸다.
"지금 네 얼굴. 죽여주게 야한 거 알고 있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아차. 이런 젠장.
정태의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순간이었다. 몸이 부웅 뜨는가 싶더니, 정태의의 등 뒤로 매트리스의 반탄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태의를 침대 위로 가뿐하게 눕혀서 내려놓는 일레이가 그 위를 타고 오른다.
"역시 일은 나중에. 한숨 자고 나서."
정태의의 몸 위에 올라앉은 일레이가 슬쩍 웃으면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 * *
생각해 보면 좀 가엾다.
모러는 나름대로 정신적인 외상이 생긴 셈이었다.
비록 그 뒤에도 공들여 총들을 아끼고 사랑한다지만, 그 사랑해 마지않는 총으로 인한 아픔을 겪은 데에는 틀림없다. 총에 대한 저 비정상적인 애정을생각하면, 제법 충격적인 아픔이 마음에 남았을 거다. (물론 45구경 두께쯤 되면 몸에도 매우 충격적인 아픔이 남았겠지.)
정태의는 반드시 자기 탓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ㅡ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게 왜 자기 탓인가ㅡ그래도 나름대로 옛동료로서 한 푼 어치의 애정 정도는있었기 때문에, 모러를 보니 좀 씁쓸해졌다. 기분 탓인지 스포츠백에 튀어나온 총의 흔적을 쓰다듬는손길에도 애수가 어린 것 같다.
"모러."
아침을 먹은 뒤 회사로 나가는 카일을 따라 함께 나가서 현재 개발중이라는 시제품을 본 뒤에 그 길로고향으로 갈 예정이라는 모러는, 벌써 짐을 다 챙겨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백을 비끌러 메고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같이 나서려던 카일은 방에서 나오기 직전에 전화가 와서, 모러에게 먼저 나가서 차에 타고 있으라며손짓했다.
대문 안쪽으로 대기하고 있는 카일의 차, 조수석에는 이미 제임스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뒷자리의 안쪽으로 들어가 앉은 모러는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정태의를 보고 마뜩찮은 얼굴로 창을 열었다.
"뭐야."
"그래도 이제 언제 볼지 모르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치고 인사는 해야지."
"네가 주는 떡 따위 안 먹어. 그랬다가 또 릭이 달려와서 네 떡 먹었다고 지랄발광을 하면 어쩌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던 모러는 문득 뭘 봤는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현관에서 트레이닝복 바지 하나만 걸친 일레이가 나오고 있었다. 어깨에 새빨갛게 남은 멍ㅡ지난밤 하고 또 하다가 견디지 못할 만큼 지친 정태의가 울컥해서 깨물어버렸다ㅡ을 태연하게 달고서, 잠이라도 덜 깬 것처럼 목덜미를 긁적이고 있었다.
물론 마중을 나올 인간은 결코 아니었으니, 아마도집 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정태의가 어디에 가 있나 돌아보던 참이 분명했다.
그때 일레이의 뒤로, 통화를 다 마쳤는지 카일이 나왔다. 아무리 집이라도 옷은 제대로 챙겨입으라고 리타 같은 잔소리를 짧게 던지며 걸어온 카일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부웅, 차가 움직이려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미운정도 있는데, 하고 생각하며 모러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래도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총에 너무 안 좋은기억을 갖지는 마라. 45구경 그거 한 번……한 정도야, 그냥 가볍게 넘기고 잊어버려. 닳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고 나서야 이 말이 어쩌면 위로가 아니라 비아냥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마 정태의의 표저이나 목소리 따위로, 그 말이 위로의 뜻이었다는 건 모러에게도 전해졌을 거다.
잠시 침묵하던 모러는 대문이 열리면서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드물게도 따뜻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얼굴에는 말간 웃음까지 띤 채, 정태의에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너는 그래서, 45구경 따위는 댈 수도 없이 굵은 그걸 밤마다 아래위로 삼키나 보지. 어제 지나가다 잘 봤다. 앞으론 문 잘 닫고 해라. 바이바이."
"…ㅡ!!"
정태의의 얼굴이 그래도 굳었다.
동상처럼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정태의를 남겨두고 차는 대문을 빠져나갔다. 다시 대문이 닫힐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는 정태의의 옆으로, 일레이가 다가왔다.
"아하……저 놈이었군. 얼핏 복도 밖으로 누가 지나가는 기척이 있어서 누군가 했더니."
"……어제 문 닫혀 있지 않았어, 방……?"
"네가 들어오면서 두어 뺨쯤 열어두고 왔잖아. 보나마나 언제든 튀어버리기 편하게 그랬을 거면서, 기억 안 나나 보지."
정태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였다. 자칫하면 얼른 튀어버리려고, 늘 그의 방에 갈 때는 문을 약간 열어둔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아침에 방에서 나올 때, 문이닫혀 있었는데?!"
"모러 저 놈이 그래도 나름대로 널 배려해주는 것 같던데. 지나가면서 살짝 문을 닫아놓고 갔거든."
정태의는 망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린다.
"넌 알고 있었어……?"
"뭐."
일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 다음 순간, 정태의는 그의 두 어깨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흔들며 소리쳤다.
"그럼 말을 했어야지, 말을!!"
"말한들 달라질 게 뭐 있다고. 게다가 저 놈이야 앞으로도 몇년에 한 번쯤은 이 집에 찾아올텐데, 알아두면 편하지."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하곤 개운하게 풀에나 한 번 들어갔다올까, 하고 풀장 쪽으로 걸어가는 일레이의 뒷모습을 넋없이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 뒤에 리타가 지나가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는 게 아닙니다.'라고 잔소리를 할 때까지, 정태의는 더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꼼짝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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