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min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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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내 최애는 개복치다
“흑……, 흑흑……. 우리 루민이가 무슨 죄라고 이러는 거야!!”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나서 스마트폰 액정을 향해 외쳤다. 이로써 이 게임을 하며 루민이의 죽음을 열다섯 번째 맞이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캐릭터인 루민스 할데르프, 내 안의 애칭 ‘루민이’는 여성향 연애 게임 <아란다스트 사가>의 공략 캐릭터이다.
<아란다스트 사가>. 아란다스트라는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마법사인 여주인공이 대륙 멸망의 위기를 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도 맺어진다는 정통 판타지 로맨스 게임. 소재도 좋고 RPG풍 시스템도 내 마음에 쏙 들고 최애가 생긴 것도 좋은데…….
문제는 내 최애 루민스가 ‘개복치’라는 사실이었다.
이 게임에는 공략 가능한 캐릭터가 5명 있는데, 여주가 다른 남자랑 맺어지면 루민스가 죽는다.
그렇다면 본인이 여주와 맺어지는 루트는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중간에 선택지를 하나만 삐끗해도 죽는다.
RPG 요소가 있는 게임에 배드엔딩을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개발사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죽음 지뢰가 산재해 있다.
나는 현재 루민스를 포함하여 4명의 엔딩을 보고, 마지막으로 이 게임의 진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루트를 거의 끝내 가는 참이었다.
‘그래도 대단원인 진히어로 루트니까 우리 루민이, 안 죽겠지?’ 이런 희망을 안고 시작한 마지막 루트의 플레이. 우리 루민이도 클라이맥스까지 무사하길래 안심했더니, 최종 보스 바로 전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주인공 일행을 구했다…….
그 이후로 나는 내 손가락이 액정을 터치하는지 액정이 내 손가락을 누르는지 구분도 안 되게 넋이 나간 상태로 최종 보스 전투에 승리했다. 화면 안의 캐릭터들 모두가 감격하는데 궁상스럽게 최애 장례식 모드인 나 혼자만 소외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몸 안에 갇혀 있던 나를 구해줘서 고맙다.】
뭔가 전개가 바뀌네. 다른 엔딩에서는 진상이 썩 개운하게 밝혀지지 않고 떡밥도 다 회수되지 않는데 말이다. 아마 최종 보스 안에는 원래 착한 신이 봉인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진히어로 루트답군.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왔군.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게임 내에서 뺑뺑이 돌리면서 ‘소원의 조각’이라는 아이템을 모으게 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대사를 넘기자 선택지가 뜬다.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주세요!’, ‘이 세상에 신은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로 살아가겠습니다.’ 등등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나는 외쳤다.
“내 루민이 살려내! 우리 루민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나니 허무했다.
엔딩이나 보자…….
다시 액정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스마트폰에서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히익, 뭐야. 연출인가?”
그와 동시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게임 연출 맞네. 그렇게 끄덕이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 온 방을 채웠다.
스마트폰의 액정 밝기를 최대로 해도 쏟아내기 어려운 밝기의 빛. 흡사 밤중에 라이트를 바로 들이대는 것처럼 눈이 부셔서,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네핀 님, 세네핀 님.”
“어?”
“세네핀 님,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멈춰서더니 그렇게 놀란 얼굴로…….”
“……엉?”
눈앞의 여성이 나를 세네핀이라고 부르며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곤혹스러운 건 난데. 난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게임 하고 있었다고. 이게 무슨 일이야.
근데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 얼굴. 잡티 하나 없는 눈부신 피부에, 뻗치지도 않고 예쁘게 정돈된 금발 곱슬머리, 호수같이 깊은 푸른 눈동자. 무지무지 익숙한 이 외모는…….
“벨키나?”
“앗,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
정말 벨키나……? 고아 출신이지만 희귀한 마법 재능으로 세상을 구할 그 아이? 게임 <아란다스트 사가>의 주인공인?
“역시 어디 불편하신 부분 있으신가요, 세네핀 님?”
세네핀……?
게임 초반에 나와서 벨키나 구박하다가 정의구현 당하는 그 악녀?
그렇다는 건, 지금 여기가…….
“아란다스트 사가…….”
“앗, 네. 바로 이곳이 아란다스트 대륙이죠. 진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그렇구나.
개꿈이다.
분명히 루민스가 죽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베갯머리를 적시다가 게임 엔딩을 목전에 두고 그대로 잠이 든 것이겠지.
“오호호, 아무것도 아니에요, 벨키나 양. 어제 잠이 부족했던 모양이네요.”
꿈이라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연기가 나왔다. 악녀 타입 중에서도 너무 고전적으로 세기말 순정만화 악녀 같아서 오히려 정이 가던 세네핀의 연기가.
꿈인데 악녀에 빙의하다니 이게 뭐람. 이왕 <아란다스트 사가> 꿈을 꿀 거면 내 최애 루민이 얼굴을 보여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잖아도 자주 죽어서 눈물을 흩뿌리게 만드는 내 최애 얼굴이라도 배 터지게 구경하고 잠에서 깨게 해달라!
속으로 투덜거리던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키나가 살포시 미소를 보내더니 손을 흔들며 답했다.
“아, 잠깐 세네핀 님이 불러서 이야기 중이었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뚜벅뚜벅 걸어와 벨키나 옆에 서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세네핀 양.”
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동공이 흔들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조금 전에 투덜거려서 미안합니다! 역시 꿈이라 내 마음대로군요!
물감을 탄 듯 선명한 보라색 머리칼, 선해 보이는 인상의 금색 눈동자, 오뚝한 콧날. 그렇지만 어딘지 이지적인 분위기.
아아, 신이시여! 존재한다면 감사합니다!
내 최애 루민스 할데르프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에게 인사해주는 이 순간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천년 만에 환생한 전생의 연인이라도 재회한 듯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말았다.
◇◇◇
“…….”
“……?”
주변이 고요해지고 내가 울면서 콧물 삼키는 소리만 장내를 가득 채웠다.
아, 망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최애를 만난 감격에 북받쳐 무슨 추태를 보인 걸까. 이 망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이대로 눈물이 멎으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억지로 짜내서 대성통곡을 했다.
“어헝, 어허허허엉, 허엉!”
나라 잃은 것처럼 울고 있으려니,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저기, 벨키나. 대체 세네핀 양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이러는 거야?”
“어어? 오해하지 마, 루민스. 갑자기 눈물을 흘릴만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어.”
“정말이야? 몰래 쿡쿡 찌르면서 괴롭힌 거 아니고?”
“에이, 루민스도 참.”
연애 게임이라서인가, 이 짧은 순간에도 깨알 같은 친목을 쌓고 있는 둘에게 감탄, 아니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지. 수습 어쩔 거야.
안 나오는 울음을 짜내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 봤다. 지금 벨키나가 입고 있는 옷은 ‘마법 연구원’의 수습 마법사 복장이다. 현재 시점이 게임 초반이라는 의미였다.
꿈이니까 타임라인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게임을 플레이한 내 머리에서 나오는 꿈이니까 대충 거기에 맞추지 않았을까?
게임 초반, 고아 출신인 벨키나는 특별한 마법 재능이 드러나 스카우트를 받고 왕국의 마법 연구원에 수습 마법사로 들어가게 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낙하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긴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 몸의 주인인 세네핀 크롬웰.
그런데 벨키나가 세네핀을 ‘세네핀 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기 이름에 님 붙여서 부르라며 구박하는 이벤트가 지나간 다음인가?
“세네핀 님, 우선 진정하고 숙소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이걸로 눈물 닦으시고…….”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벨키나가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자기를 괴롭혔던 세네핀을 상대로 저렇게 친절한 대응이 가능한 걸 보니 과연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아까 벨키나가 ‘세네핀 님이 불러서 이야기 중이었다’라고 언급한 점, 그리고 루민스가 아직 나를 ‘극혐’하는 얼굴로 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벨키나를 불러서 따귀 때리고 마법 연구원에서 나가라고 하는 이벤트가 일어나기 전이었나 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 이벤트가 일어난 다음이면 루민스가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봤을 거 아니야? 휴, 루민아. 누나는 잘못 없다, 알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후, 나는 대충 상황을 둘러댈 만한 핑계를 떠올렸다. 벨키나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천천히 말했다.
“상냥한 벨키나 양……. 정말 고마워요. 어쩜 이렇게 마음씨가 고운가요.”
“세, 세네핀 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랍니다. 앞으로는 그냥 세네핀이라고 불러요. 존대하지 않아도 돼요.”
벨키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나 같아도 날 왕따시키던 애가 갑자기 눈물을 짜내며 착한 척하면 뭘 잘못 먹었나 싶을 거다.
그치만 지금 내가 꿈속에서 악녀 짓 그대로 해 봤자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걸! 심지어 루민스 앞에서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그냥 하루아침에 뭘 잘못 먹었는지 개과천선했다는 설정으로 밀고 나가고, 우선 벨키나에게 사과를 하자고 생각했다.
“정말 염치없지만, 저는 그간 당신에게…….”
“벨키나.”
내가 사죄의 말을 끝까지 입에 담기도 전에, 청년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저도 모르게 눈물 닦는 것도 잊고 고개를 들자, 루민스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키나도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세네핀 양이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까, 내가 숙소까지 바래다줄게. 넌 오늘까지 마무리할 업무가 있었지?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봐.”
“그렇지만…….”
“세네핀 양도 용건 있으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그 말투에는 이쪽의 가부를 묻는다기보다 무조건 자기 말을 따르라는 포스가 담겨 있었다.
물론 최애가 웃으면서 말하는데 NO를 말할 수 있는 내가 존재할까? 그야 존재 안 한다.
“네……♡”
헉, 나도 모르게 말끝에 하트 마크 붙여 버렸어. 정신줄을 단단히 붙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키나와 헤어져서 나는 루민스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
숙소로 가는 길의 중앙 탑은 초록색과 보라색이 섞인 빛의 안개 같은 것에 감싸여 있었다. 오래된 성당의 것처럼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고 탑과 다른 건물을 연결하는 회랑에 들어섰다. 어둑어둑한 밤이라 복도 양쪽으로 마법 등불이 두둥실 길을 비추고 있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판타지 게임이라서 가능한 풍경이 조금 신기했다.
묵묵히 마법 연구원 사람들이 공용으로 쓰는 기숙사로 향하는 와중, 루민스는 말이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 사이인데.
뒷모습이나 실컷 감상하자. 도트 그래픽이 튀지 않는 고화질 최애를 4D로 체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네핀 양.”
“넵?”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이름을 불러서 당황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이런 말 실례일지 모르지만, 세네핀 양이 벨키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어.”
아…….
그렇군, 게임에서 묘사는 안 되었지만, 루민스는 따귀 이벤트 이전부터 벨키나가 괴롭힘당하는 걸 알았나 보구나.
하긴, 루민스는 벨키나가 마법 연구원에 와서 첫 번째로 사귄 친구라는 설정이었다. 벨키나 본인이 괴롭힘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문이나 주변 상황으로 짐작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따귀 이벤트 때 너무 타이밍 좋게 루민스가 나타나서 막는다고 했어. 그야 알고 있었으니까 막아준 거겠지.
이렇게나 친구를 아끼는 우리 루민이, 누나가 자랑스럽다!
그렇게 게임의 숨겨진 설정으로 시작하여 ‘루민이부심’으로 사고를 전환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물론, 벨키나가 정식으로 마법 연구원 입단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마음에 차지 않는 건 이해해. 그래도 너그럽게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우수에 젖은 쓴웃음이 각도별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덕에 “네, 그럴게요……♡” 하고 또 정신 놓은 반응을 보일 뻔했다. 최애 앞에서 수상한 사람이 될 수는 없지!
“루민스 군이 걱정하시는 마음 이해해요. 실제로 제가 그동안 질투심에 추한 모습을 보였어요. 많이 반성해서 아까 벨키나 양에게 사과하려고 했던 거고요.”
“사과?”
“네……. 오늘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려서 소란을 피웠습니다만,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벨키나 양에게 그간의 몹쓸 짓을 사과할게요.”
뭐, 꿈에서 깨어나면 사과할 기회 따위, 사실상 없겠지만 말이다.
내 말을 들은 루민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얼굴 하는 우리 루민이도 귀엽네. 하지만 난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아까 마음 쓰게 한 점 정말 미안합니다.”
“잠ㄲ……”
나는 쏟아내듯이 그렇게 말한 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얼른 여자 기숙사 쪽으로 달려갔다.
이 이상 루민이 앞에 있다가는 최애에 대한 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범죄자로 붙잡혀 가는 엔딩은 사양하겠습니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세네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민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네핀을 불러 세우려고 내밀었던 손이 허공에 어색하게 멎어 있었다. 손을 거두어들이며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설마?”
세네핀이 사라진 복도 저편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멈칫거리며 몇 걸음을 떼어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알면서도 자신은 무얼 확인하려는 것일까.
짧게 한숨을 내쉬고 루민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떠올랐던 기대만큼 무거운 실망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기숙사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루민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루민스!”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들자 금발을 흩날리며 낯익은 여성이 그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벨키나. 왜 그래?”
“세네핀 님은? 먼저 갔어?”
루민스의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벨키나는 곧 시무룩해졌다. 찾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이었다.
“넌 일거리도 많은 애가 연구실에는 안 가고 왜 여길 왔어.”
어딘지 구박하는 듯한 루민스의 말투에 벨키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세네핀 님이랑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단 말이야. 혼자만 데려가고 치사해!”
“치사한 문제인가? 너 괴롭히는 사람을 데리고 사라져줬으면 오히려 감사해야지.”
루민스가 담담히 지적하자 벨키나는 찔끔 목을 움츠렸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숨겼던 사실이 들통나버려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깐 뒤 벨키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말 안 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아무튼, 너한테는 인상 안 좋은 사람이잖아.”
“그렇지만 세네핀 님 아까 막 울었는걸. 그 얼굴이 어쩐지…….”
말을 잇던 벨키나는 스스로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겠는지 조금 머뭇거렸다.
“어쨌든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사실은 좋은 사람 같기도 했고…….”
잠시 생각하던 벨키나가 손바닥을 마주쳐서 짝 박수 소리를 냈다.
“맞아, 앞으로 아주 친한 친구가 될 사람을 만난 느낌? 엄청 반가운 사람을 본 느낌이었어. 루민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벨키나가 기대에 찬 얼굴로 말을 맺었지만 루민스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침묵에 벨키나는 눈치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네핀 님이 먼저 갔으면 어쩔 수 없지. 내일 더 이야기해볼래. 잘 자!”
“응, 잘 자…….”
연구동 쪽으로 다시 뛰어가는 벨키나를 바라보던 루민스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에 빠진 것처럼 굳어 있던 그의 미간이 좁혀지고, 입술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
꿈속이라서인가, 혹은 그동안의 반복플레이 덕분인가, 나는 마치 내 것처럼 이 세계의 지식과 세네핀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루민스의 배웅 없이도 세네핀의 방이 어디인지 바로 알고 찾아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아~ 꿈 최고야~~”
루민이 앞에서 망가지지 않으려고 발악하다가 이제야 겨우 표정을 풀었다. 꿈속이라고 달려들어서 “우리 루민이, 냄새 좋은데?” 이러고 주접을 떨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의 견고한 이성을 칭찬할 만했다.
그대로 씻지도 않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은 다음, 더듬더듬 회중시계를 꺼내니 오후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지만, 어차피 꿈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다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루민이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일어나고 나서도 꿈 내용이 머리에 잘 남아야 할 텐데.
내일은 게임 진히어로 엔딩 마저 본 다음에, 루민이 루트나 재탕해야겠어…….
……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 되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에 마른 세수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제 조금은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니고, 무슨 게임이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이 세계에 빙의를 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예감을…….
“꿈 아니네…….”
뺨을 꼬집으니 아프다. 얼얼한 통증은 내 몸이 여전히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울을 봐도 변함없었다. 얼굴만 봐도 한 성깔 하게 생긴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한 서양 아가씨가 나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임에서는 엑스트라처럼 실루엣으로 대충 나와서 몰랐는데, 인상 진짜 더럽네.”
억지로 미간을 펴서 미소 지어 보았지만, 어딜 봐도 상대방을 협박하려는 악랄한 웃음으로 보였다.
“내 인상이야 아무래도 좋고……. 역시 이건, 어제 그 소원인지 뭔지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주인공의 소원을 이루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가 게임에서 제시된 선택지를 무시하고 “내 루민이 살려내! 우리 루민이 행복하게 해달라고!!”라고 외쳤으니까. 그 소원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우리 루민이가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남을 거라 보장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어제 확인했듯이 현재는 게임에서도 가장 초반부 전개에 해당했다. 벨키나의 남자 사람 친구 포지션이라서 비교적 등장이 빨랐던 루민스나, 벨키나를 마법 연구원에 스카우트해온 의문의 청년 알프를 제외하면 아직 주요 남성 캐릭터들도 다 등장을 안 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후반부 전개까지 뭐가 잘못되더라도 나야 뭐, 살아 움직이는 최애에게 인사도 받아봤고 단둘이 이야기도 나눠봤으니 여한이 없었다. 루민이와 악수라도 해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과욕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우리 루민이는……. 온갖 사망 플래그가 사방팔방에서 덤벼드는 우리 루민이는 과연 괜찮을까?
“우리 루민이 개복치인데.”
벨키나의 마음이 팔랑팔랑 다른 남자한테 가버리면 루민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의미였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제 직접 목소리도 듣고 나한테 인사도 해주고 단둘이 이야기도 나눴던, 살아 있는 루민스가 죽을 수도 있다니.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해…….”
게임에서 진행 가능한 다수의 루트와 그에 따른 엔딩 중 루민이가 사망하지 않은 경우는 ‘루민스 루트’를 탔을 때뿐이었다. 즉, 루민스가 살아남는 엔딩은 여주와 맺어졌을 때뿐. 그렇다면 방법도 하나뿐이다.
루민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벨키나와 붙여주는 수밖에!
그리고 벨키나와 다른 남자 캐릭터들의 관계 진전을 막는 수밖에……!
그 소원에 따라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이라면, 분골쇄신하여 내 최애의 안전을 보장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주는 것이 나의 소명 아닐까!!
“잠깐, 그것보다 세네핀한테 따귀 맞는 이벤트 다음날이라는 건……. 헉!”
나는 고개를 들었다. 게임 순서대로라면 오늘은 한 마리 고고한 늑대 같은……, 같다기보다 늑대 수인이 맞는 공략 캐릭터 ‘진’과 벨키나가 만나는 날이었다.
02. 그 플래그, 분쇄하겠다!
공략 가능 캐릭터 중 한 명, 늑대 수인 ‘진’. 늑대로 변신했을 때의 야성적인 분위기가 매력인 캐릭터이다.
그런 진을 나는 내 마음속의 애칭 ‘흰둥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모습이 하얀 늑대고 인간 모습일 때도 흰색에 가까운 은발이라 백구 같은 게 친근해서 그만.
하지만 나한테 흰둥이가 친근한 것과 별개로, 벨키나와 흰둥이의 관계는 진전을 반드시 막을 수밖에 없다. 흰둥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 최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굳게 결심한 채로 어제 이벤트부터 이어지는 게임 초반의 흐름을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게임에서 벨키나가 세네핀에게 따귀를 맞고, 그 현장을 마주친 루민스가 그녀를 감싸준다. 타인의 악의를 생생하게 접하고 눈물을 참지 못한 벨키나를 루민스는 다정하게 위로하는데…….
“어라, 혹시 나 벨키나 안에서 루민스 호감도 올라가는 이벤트를 막아 버린 거야?”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루민아, 오해하지 마. 누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꿈인 줄 알았다고!
누나 믿지? 우리 루민이의 매력이라면 어제 이벤트가 없었어도 괜찮아!
그렇게 마음속으로 변명을 해보지만 내가 생각해도 루민스의 중요 이벤트를 뭉개버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다.
벨키나와 루민스의 러브러브♡이벤트는 차후에 세팅하기로 하고,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다른 방향의 공략.
이렇게 된 이상 더 철저하게 다른 남성 캐릭터의 플래그를 박살 내는 수밖에!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고이 접어 날려 버린 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벨키나와 진의 만남 이벤트가 벌어질 장소로 달려갔다.
◇◇◇
마법 연구원 뒤에 있는 숲을 한참 헤치고 들어가면 나오는 ‘고요의 호수’는 이름 그대로 사시사철 잔잔한 호수다. 심지어 겨울에 얼음도 얼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요동치지 않았다.
그렇게 무척 판타지 설정에 충실한 호숫가를, 금발의 청순한 아가씨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달리느라 흘러나온 땀을 케이프 자락으로 쓱쓱 닦아내며 나는 아직 혼자 있는 벨키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산허리를 감싼 구름이 흩어지듯 내려오며 아침 안개를 호수 전체에 드리웠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이슬을 머금은 물망초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백그라운드에 두고 꿀리지 않게 아름다운 벨키나는 과연 게임 여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 언니가 이렇게 아부도 떨어주니까 벨키나, 우리 루민이 잘 좀 부탁해.
이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벨키나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곧 발생할 벨키나와 진의 만남 이벤트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게임에서 벨키나는 호숫가에 있는 물망초를 자세히 보고 싶어져서, 산책로를 벗어나 호수 가까이 걸어간다.
그러나 이 ‘고요의 호수’는 평온을 방해하는 생물에게 무자비한 곳이었다. 마법 연구원에서 보호 조치를 해둔 산책로를 벗어나 호수에 가까이 가면, 발을 내디딘 곳이 무너지는 등 크고 작은 함정이 생성된다.
마법 연구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벨키나가 그런 호수의 비밀을 알 턱이 없다. 때문에 벨키나는 발을 헛디뎌 심하게 발목을 접질리게 된다.
위험한 거 알면 마법 연구원 측에서 출입금지 표지판이라도 크게 써 붙여놔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행정적인 미비함을 느끼지만, 게임의 설정 구멍이겠지. 대충 넘어가자.
어쨌거나 게임 전개로 돌아가면, 발목을 다친 벨키나가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는데 흰둥이, 아 아니, 늑대 수인 진이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준다. 은인의 이름을 벨키나가 물어보지만 흰둥이는 대답하지 않고 신비롭게 퇴장하고, 그걸로 첫 만남 이벤트가 종료.
내가 생각해도 은발 미남이 멋있게 등장해서 이동하지 못하는 나를 ‘공주님 안기’하고 데려다주면 마음이 흔들리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 헉 아냐 루민아 누나한테는 너뿐이다, 알지?
흰둥아, 미안! 그 플래그, 분쇄하겠다!
◇◇◇
어제 뜬금없이 울다가 헤어진 주제에 산책하는 사람 붙잡고 하하호호 억지로 마법 연구원으로 끌고가기는 애매하다. 그렇다고 다칠 예정인 거 아는데 벨키나가 다리 접질릴 때까지 두고 보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너무하다. 내가 공주님 안기 해줄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벨키나가 물망초를 보러 산책로를 벗어나는 타이밍을 노리기로 했다. 그때 나타나서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벨키나 양! 산책로를 벗어나면 위험해요!”라고 경고한 후 안전한 쪽으로 잡아끄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계획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벨키나가 드디어 움직였다.
으억, 그런데 왜 저렇게 걸음이 빨라! 이대로라면 따라잡기 전에 다치겠어!
손목을 먼저 붙잡겠다는 단계부터 스텝이 꼬여서, 나는 일단 벨키나를 향해 뛰어가며 다급하게 외치기부터 했다.
“네?”
벨키나가 나를 돌아보느라 멈추었다. 좋았어, 이 언니가 위기에서 구해줄게!
“그러니까, 그 호수에는 함정이……”
“꺄아아아아악!”
어, 뭐, 뭐지? 그냥 발을 헛디디는 거지 이렇게 뒤로 넘어진다는 묘사는 없었는데?
나는 당황하여 벨키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까지 중심이 무너져서 같이 쓰러지는 바람에 호숫가를 구르고 말았다.
풍덩!
기세 좋은 물소리와 함께 나와 벨키나는 호수에 빠져 버렸다.
“하아, 하아……. 윽, 헉.”
코에 들어간 물을 어떻게든 수습했다. 다행히 발이 닿는 수위였다.
마찬가지로 코로 물을 먹은 듯 정신이 없어 보이는 벨키나 쪽을 보았다. 휴, 역시 여주는 물에 빠져도 예쁘네.
“죄, 죄송해요, 세네핀 님……. 여기 함정이 있다고 말씀하시려고 한 거죠? 거기 걸려서 중심을 잃었나 봐요.”
어제 존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입에서 바로 떨어지진 않는구나. 당연히 그렇겠지 생각하면서 나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리를 움직여 뭍으로 걸어가려는데, 무언가가 양팔과 양다리를 휘어잡는 느낌이 들었다.
“어?”
“……이, 이건?”
벨키나도 같은 감각을 느낀 듯 얼굴을 굳혔다. 나는 물 밑을 내려다보았다.
가슴까지 찰랑대는 물 사이로, 내 팔과 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몸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투명한 끈 같은 것이 내 팔다리를 칭칭 엮고 있는 감각이었다.
“팔이랑 다리가, 안 움직여요. 이건……. 저 때문인 거죠? 저 때문이죠? 죄송해요…….”
“치, 침착해요. 벨키나 양.”
나는 벨키나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아……, 그런데 정작 내가 진정 안 돼. 게임 중반부가 떠올라버렸단 말이다…….
이 ‘고요의 호수’는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마물과 같았다. 호수에 다가가면 함정이 생성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게임 초반에는 발 잠깐 헛디디고 끝이지만, 이 호수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의 수준이 달라진다.
그리고 다름 아닌 루민스 루트에서 이 호수의 위험을 알 수 있는 이벤트가 있다.
게임 중반부에 필수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은 다시 이 호수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벨키나가 호수의 정체를 모르고 방심하여 물에 빠진 후, 지금의 우리처럼 온몸이 속박되어 호수에 붙들린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그녀를 루민스가 멋지게 구해준다는 이벤트였다.
참고로 이 이벤트에서도 삐끗 잘못하면 루민스가 죽을 수도 있다. 정말 뭐 하는 게임인지.
“벨키나 양, 뭔가 쓸 수 있는 마법은?”
“죄, 죄송해요. 이제 겨우 수습 마법사라 제대로 된 스펠을 얼마 배우지 못해서…….”
그럼 그렇지. 아직 게임 초반인데 뭘 바라겠어.
어떡하지? 이게 바로 공략 캐릭터님이 등장하시는 강제력 같은 건가?
이대로 물속에서 덜덜 떨다가 진이 나타나서 구해주는 걸 기다려야 해? 그렇게 되면 그냥 산책하다 발 접질린 거 공주님 안기로 구해주는 것보다 임팩트 크지 않아?
심지어 우리 루민이 루트 중반부 이벤트인데 가로채는 거잖아?
“이대로는 안 돼!”
내가 외치자 벨키나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벨키나와 시선이 마주친 나도 움찔했다. 아차, 나도 모르게 소리 내버렸구나…….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돼!
그러잖아도 나는 어제 루민이가 벨키나에게 점수 따는 이벤트를 뭉개버렸다. 그런 마당에 후속 주자 흰둥이에게 점수를 더할 순 없어.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해.
내가 빙의한 세네핀 크롬웰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마법사다. 마법을 써서 어떻게든 안 될까?
루민스는 그 이벤트에서 어떻게 구해줬더라? 뭔가 얼음으로 어떻게…….
뭐더라, 벨키나를 제외하고 호수 전체를 얼려버린 다음, 그 얼음을 박살 내서 물리치던가 그런 느낌이었는데.
……호수 전체를 얼린다니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천재 마법사 설정인 우리 루민이랑 얼굴 그래픽도 제대로 없는 조무래기 악녀 마법사의 실력을 개발사가 동등하게 설정할 리도 없고.
“세네핀 님…….”
벨키나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아냐, 다리만 접질리고 넘어갔을 걸 내가 개입해서 문제가 커진 거란다. 사고 쳐놓고 언니가 무능해서 미안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벨키나 양.”
“네, 넵?”
“제가 마법으로 벨키나 양의 주변을 얼리고, 바로 충격을 주는 마법을 써서 깨뜨릴게요. 그 순간 주저하지 말고 팔다리를 움직여서 뭍으로 기어 올라가세요.”
“헉,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선배 마법사다우세요!”
우리 루민이 방법 열화 짝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 혼자만요? 세네핀 님은요?”
그게 문제였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 실력은 고작 한 사람의 주변을 얼리고 깨뜨릴 수준이었다.
그 한 명만 빠져나가 도움을 청하러 가고, 다른 한 명은 호수에 남아야 했다.
“제가, 그간 벨키나 양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벨키나 양의 재능을 질투해서 그간 심한 소리도 많이 했죠.”
“아, 아뇨. 제가 오해받을 만한 상황이라서…….”
“그렇다고 해서 벨키나 양이 인격적으로 모독을 받을 이유는 되지 않아요. 어제 그걸 절실히 깨닫고 반성하며 울었어요.”
“아…….”
벨키나가 감동하는 목소리를 냈다. 휴, 혼신의 힘으로 반성하는 목소리를 짜낸 연기가 통했나 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행위를 사과하고 싶어요. 이런 저를 용서한다면, 지금 먼저 빠져나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주시겠어요?”
“다, 당연하죠! 세네핀 님은 하나도 안 나빠요! 제가 죽을 만큼 뛰어서 다녀올게요!”
좋았어, 성공! 벨키나가 먼저 빠져나간다!
가장 큰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벨키나를 남겨서 흰둥이와 만나게 한다? 내가 호수에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은 못 본다.
“그럼 시작할게요. 얼음이 깨지자마자 바로 뭍으로!”
“네!”
“물에 스며든 시련의 냉기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이 세계관 특유의 중2병이 연상되는 부끄러운 스펠을 읊으며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다행히 스펠은 깔끔하게 들어가서 바로 호수의 수면이 얼어붙었다.
그걸 신호로, 나는 바로 충격파를 일으켜 벨키나 주변의 얼음을 깨뜨렸다.
원래 물속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소리가 전해질 리 없지만, 마법의 힘이기 때문인지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호수에서 풀려난 벨키나는 망설이지 않고 뛰다시피 뭍으로 기어 올라갔다. 젖은 옷이 거치적거릴 텐데도 눈 깜짝할 새 안전한 산책로까지 도달한다.
아주 잠깐 내 쪽을 돌아보고 굳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하아, 이제 어쩌지.”
벨키나를 보낸 건 좋은데, 고요의 호수가 더 노한 거 같지……? 호수 속에서 스펠까지 써버렸으니 당연한가.
착각이 아니라 팔과 다리를 붙들고 있는 투명한 힘이 이제는 몸까지 꽉 짓누르기 시작했다.
벨키나가 도와줄 사람을 데려오기 전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흰둥이든 누구든, 아무나 빨리 와줘…….
아주 서서히, 몸을 붙들고 있는 힘이 나를 호수로 끌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최애를 구하려다 익사한다니 사랑 깊은 죽음이었다…….”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온몸이 떨렸다. 벨키나를 구하느라 마법으로 만든 얼음 잔해가 주변을 떠다녀서 그런가, 얼음물 고문 수준으로 물도 차가웠다.
물속으로 턱밑까지 끌려 들어가고, 이제 정말 포기해야 하나 눈을 감은 순간.
챙!
쇠붙이가 부딪치는 듯한, 날카로우면서 커다란 소리가 땅을 울렸다.
“……어?”
몸을 감싸는 찰랑거리던 액체의 감촉이 사라졌다. 눈을 뜨니 주변은 새하얀 얼음.
그걸 깨닫는 동시에.
쿠르르르르르르르르릉!
아까의 소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사방을 채웠다.
산산이 부서진 얼음 가루가 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약한 물망초 꽃잎 위로 마치 싸락눈이라도 내리는 듯 소복하게 그 가루가 쌓였다.
그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광경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산책로 위에 서 있는 청년을 올려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네핀 양, 괜찮아?”
……우리 루민이 대박 짱 최고 존엄 슈퍼 울트라, 아무튼 나의 허접한 어휘력을 몽땅 동원해도 부족할 만큼 멋있다…….
03. 우리 루민이, 착하기도 하지
최애캐가 활약해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물론 반쯤 농담이고(반은 진담이다), 사실만 기술하자면 나를 구해준 루민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현기증이 심해져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멀쩡했다면 무슨 주접을 떨었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기절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된 일 아닐까.
루민스가 호수 전체를 얼리는 모습은 게임에서 본 적 있었지만, 작은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4D 체험은 스케일이 달랐다.
휴……, 이렇게나 킹 갓 제너럴 엠페러 먼치킨 마법사 루민이가 개복치 속성인 건 말도 안 되는 모함 아니냐. 우리 루민이가 너무 세서 밸런싱 붕괴를 염려한 개발사의 농간 아니냐.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부옇게 보이는 건 누군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정신이 몽롱했기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물…….” 하고 중얼거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조르륵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 사람이 누워 있는 내 등 아래쪽으로 팔을 넣어 천천히 나를 일으켜 주었다. 멍하니 부축을 받고 나자 차가운 유리잔의 감촉이 입술에 닿아 입을 벌렸다. 물이 입안을 적시고 목구멍을 넘어 흘러 들어가자 그제야 갈증이 해소되었다.
부옜던 시야도 정상으로 들어오고 정신도 맑아져서, 나에게 물을 마시게 해준 사람 쪽을 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 세네핀 양?”
“――!! ――!!!!! ――!! ――??? ――!!!!!”
내 안면근육이 표현하려던 감정을 상하 곡선 그래프로 표현하자면 여백이 부족할 것이다. 경악, 감탄, 혼란, 기쁨, 즐거움, 두려움, 현실부정, 괴로움 등 온갖 감정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나갔다.
루민스 할데르프가 나를 부축해서 물을 마시게 해줬다는 사실에.
“……루, 루, 루민스 군……?”
“응.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네. 아까는 정말 위험했거든.”
루민스는 내가 처했던 상황과 치료 경과에 관해 설명했다.
정신을 잃고 있어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내 상태가 보기보다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차가운 물에 몸이 계속 잠겨 있었던 것도 그렇지만, 마물이나 다름없는 호수의 독기에 너무 오래 노출된 것이 안 좋았다나 뭐라나. 그 때문에 정신을 잃은 후 10시간 넘게 계속 의식불명이었고, 내가 눈을 뜬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나는 마법연에서 의료 고문도 겸하고 있으니까, 세네핀 양의 상태를 살피러 온 거야. 일단 다시 누워.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진 않아서 푹 쉬어야 해.”
마법 연구원에서 의료 고문……. 맞아, 다재다능한 우리 루민이는 그런 설정도 있었어.
그 때문인지 게임상에서도 공격 마법사보다는 힐러 비슷하게 부려 먹힌 경향이 있다. 그건 아마 마법사 포지션이 겹치는 여주 벨키나가 활약하는 장면을 빼앗지 않으려는 게임 개발사의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맞아, 벨키나.
“벨키나 양은 괜찮나요? 같이 호수에 노출되었는데…….”
“무사해. 세네핀 양보다 노출된 시간이 짧아서인지 마법 저항력의 차이인지.”
그건 100% 재능의 차원이 다른 벨키나의 마법 저항력 덕분 아닐까. 이제 와서 이 몸의 보잘것없는 재능에 슬퍼할 일도 없지만.
“아까까지 자기 책임이라고 엉엉 울면서 세네핀 양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독기에 당한 영향이 적지만 그쪽도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금 전에 내보냈어. 세네핀 양이 일어난 걸 알면 기뻐할 거야. 부를게.”
“어, 어머. 괜찮아요. 저는 이제 눈도 떴고 쌩쌩하니까요! 저 같은 것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벨키나 양에게 가보세요! 벨키나 양이야말로 루민스 군의 간호가 절실히 필요할 거예요!”
연애 게임에서 병간호 이벤트가 얼마나 중요한가. 약해진 몸만큼 약해진 마음 사이로 상대의 따스함이 스며드는 순간……☆
벨키나보다 아파 보이는 바람에 그런 중요한 이벤트를 망치다니 내 약해 빠진 마법 저항력에 살의가 든다.
“그랬다간 오히려 걔가 나한테 화낼걸. 쓸데없는 생각 말고 눕도록 해. 벨키나 부를게.”
루민스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꾸물꾸물 다시 누우면서 이불을 어깨까지 덮었다. 그사이 루민스는 휴대용 수정구를 통해 벨키나에게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벨키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금방 이쪽으로 오겠다고 답변했다.
연락이 끊기고 방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루민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놓아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우리 루민이가 책을 읽는 이지적인 옆모습이 아름답고 두근거리고 정말 다 좋은데,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내 방에 루민스와 단둘이! 이게 현실인가!
혼자 있는 거면 침대를 구르면서 우리 루민이의 활약이라도 곱씹을 텐데,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이미지 관리를 하느라 오히려 덕질에 차질이 온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정작 고맙단 소릴 안 했어……!
배은망덕해지기 전에 나는 얼른 루민스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경황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못 드렸네요. 루민스 군, 저를 구해주시고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루민스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더니 내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보지? 내가 뭐 실수했나? 뭔가 말을 더 해야 하나 고민할 만큼 침묵이 이어졌을 때, 그는 담담히 답했다.
“아니, 마법연 동료로서 당연히 할 일인걸.”
얼마 전까지 자기 친구 괴롭히던 얄미운 애한테도 저렇게 다정한 마음씨……. 역시 우리 루민이다.
“저한텐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에요, 솔직히 그때 체념하고 있었거든요. 벨키나 양이 도움을 구하러 갔지만, 호수에서 마법연의 탑까지는 거리도 멀고……. 그런데 루민스 군이 생각보다 일찍 와주셔서요.”
“아. 실은 아침에 벨키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찾으러 갔거든.”
헛, 그건 게임에서도 본 적 없는 금시초문 이벤트인데. 벨키나가 산책하러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벨키나랑 세네핀 양 둘 다 호수로 가는 걸 누가 봤다고 그러길래. 경험했다시피 위험한 곳이니까 찾으러 가던 참이었어. 그러다 벨키나랑 마주치고,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호수로 간 거지.”
그래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루민스가 일찍 도착했던 거구나. 진짜 천운이었다.
“……. 벨키나가 그러더라, 세네핀 양이 지금까지의 일들을 사과했다고. 그러면서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해줬다고 말이야.”
“앗, 네. 그게, 남 입으로 들으니 부끄럽네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루민스 군이 아는 것보다 벨키나 양에게 제가 잘못을 많이 했거든요.”
따귀를 갈기는 이벤트야 넘어갔다고 하지만, 세네핀은 게임에서 전형적인 악녀답게 굴었다. 그전에도 사사건건 시비 걸고 자기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라고 하지 않나, 아직 신입인 애한테 무리한 업무를 떠맡기지 않나, 직장에서 할 수 있는 신입 갈구기는 종류별로 했을 것이다.
“그럼 그 잘못을 사과한 이유는?”
“네……?”
갑자기 루민스가 질문해 왔다. 금색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 왜 사과를 했느냐고?
내가 직접 저지른 잘못이 아니긴 하지만, 일단은 내 몸이었던 애가 저지른 일이라서?
하지만 그가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지금 상황은 내가 알던 게임의 이벤트와 100만 광년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게임에서 세네핀하고 루민스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몇 있기나 하던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타이밍 좋게 초인종이 울렸다.
“세네핀 님……!”
방문객은 예상대로 벨키나였다. 그녀는 루민스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침대로 달려와서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울먹거리는 얼굴이 가련하여 이성애자인 내 마음조차 두근거릴 정도였다. 과연 여주인공…….
“워워, 진정해. 벨키나. 환자 상대니까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면 못쓴다.”
루민스가 주의시키자 그녀는 화들짝 침대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오, 오호호……. 걱정할 것 없어요. 저는 이제 정말 괜찮아요. 벨키나 양이야말로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벨키나가 없으면 이 대륙의 미래도 끝장난다. 궁극적으로 루민이뿐만 아니라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그녀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다. 역시 살려서 다행이야.
“그것보다 어제도 말했지만, 저에게 님이라느니 존칭 붙이면서 존대하는 건 그만둬요. 벨키나 양. 제가 괜히 심술부리느라 그랬답니다.”
“세네핀 님……, 아니, 세네핀도 그럼 말 편하게 해줘! 루민스도 그렇고 다 동갑이잖아. 우리끼리 말 놓는 게 어떨까? 루민스도 찬성이지?”
그 말에 루민이가 천사 같이 미소지었다.
아아……. 루민이가 미소를……. 우리 루민이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후광이…….
나 혼자 덕질 좀 하게 해줘……. 침대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게 해줘……. 내 정신상태가 지금 한계야……. 언제까지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 거야…….
그런 나의 고뇌를 알 리 없는 루민스는 “그러게, 나도 일방적으로 하대하는 것 같아서 찝찝했는데.”라고 끄덕였다.
헉, 잠깐. 말을 편하게 놓자고?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놔두면 안 된다.
“이건 그……, 그냥 제가 편한 말투라고 할까요! 호호!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도 마음속으로 루민아 벨키나 부르면서 내적 친근감만 가득 쌓인 상태인데,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가면을 벗으면 무슨 실수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거리를 유지하는 존댓말은 내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양’이나 ‘군’을 붙이지 말고 그냥 이름만 불러주면 안 될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벨키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으윽,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거기다 그녀에게 동의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루민스까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렇게 해요. 벨키나. 루민스.”
활짝 웃으며 만세 포즈를 취하는 벨키나를 보니 귀엽긴 하지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더 정신줄 확 조이고 이미지 관리 빡세게 해야겠어……!
◇◇◇
몇 마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슬슬 두 사람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벨키나가 먼저 내 방을 나섰고, 루민스는 치료를 위해 가져왔던 마법 기구들을 회수하고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이제야 혼자만의 시간이 돌아오는구나. 루민이까지 떠나면 한숨 돌릴 수 있겠지. 덕심을 누르느라 정말 힘들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수정구로 연락해.”
그러니까 얼른 밖에 나간 벨키나 따라가서 알콩달콩 이야기라도 나누며 애정을 쌓으렴, 루민아. 그렇게 속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는데, 설치해놓았던 마법 기구들을 챙겨 넣으며 루민스가 입을 열었다.
“세네핀. 아까 대답 못 들은 질문 다시 해도 될까?”
“네? 어떤…….”
벨키나가 방문한 덕분에 대답할 타이밍이 끊겼던 질문. 그걸 굳이 다시 캐묻는 루민스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질문인가?
뭔가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최애캐한테 당하는 취조라니 기쁘긴 하지만.
“으음, 왜, 라곤 하셔도……. 자기가 잘못한 일을 깨닫고 사과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 아닐까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온화해 보이는 금색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는 어딘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미소를 지었다.
“세네핀은 말이야. 사람이 갑자기 변한다는 걸 믿어?”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믿지 않는 쪽이겠네요.”
“그렇구나. 나도 그래.”
마법 기구를 다 챙긴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밀어 열면서 루민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한 번 지켜볼까 하고.”
그의 금색 눈이 담은 온도가 차갑지는 않지만 어딘지 낯설었다. 게임에서도 저런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네……?”
하지만 그 낯선 표정은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고, 그는 평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밤사이에 이상 없으면 정상 출근해도 돼. 내일 보자.”
그 말을 남기고 루민스는 내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밖에서 루민스와 벨키나가 몇 마디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
흠…….
“역시 루민이야! 갑자기 내가 변한 척하고 벨키나 뒤통수칠까 봐 걱정하는 거구나! 착하기도 하지!”
그간 참았던 격정을 대변하듯 침대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펑펑 내려치며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던 루민이의 대사를 곱씹었다.
“걱정하지 마, 루민아! 누나는 네 편이고 너와 맺어질 벨키나 편이야!”
그러니까 이 누나한테는 신경 끄고 어떻게 하면 벨키나한테 어필할지나 고민하렴!
휴, 좋은 걸 봤다……. 오늘은 정말 좋은 것만 골라서 눈과 마음의 보양을 했다…….
04. 자연환경 함부로 파괴하지 말자
“준비됐다!”
기숙사 부엌에서 온갖 소란을 피운 끝에 샌드위치 세 박스를 완성했다. 조리 음식도 아니고 샌드위치니까 더럽게 맛없거나 그렇진 않겠지……?
그 밖에 햄이나 포도주, 치즈, 과일 등 곁들여 먹을 음식도 준비했으니 정 샌드위치가 별로면 그걸로 때우자.
피크닉 바구니에 음식들과 돗자리 대용으로 쓸 커다란 천, 양산을 쑤셔 박고 채비를 마쳤다.
해가 눈부시게 비추는 토요일, 그야말로 피크닉하기 좋은 날씨다. 한창나이 남녀 둘이서 시간을 보내면 없던 사랑도 100배속으로 쌓일 듯한 절호의 찬스!
뭐, 내 사랑은 아니고 남의 사랑 쌓이라고 고사 지내는 거지만.
여성향 연애 게임이 흔히 그렇듯이, <아란다스트 사가>도 공통 루트 종료 때 가장 호감도가 높았던 캐릭터의 루트에 진입하게 되어 있다. 여주인공인 벨키나의 호감도만 잘 관리하면 루민스 루트로 유도할 수 있는 셈이다. 호감도를 일정 이상 쌓지 못하면 누구 루트도 타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웬만해선 그럴 일은 없었고.
즉, 내가 할 일은 그 벨키나가 루민스 루트에 진입하도록 우리 루민이를 팍팍 밀어주는 일이었다.
◇◇◇
루민스 루트 진입 대작전의 첫걸음으로 내가 피크닉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피크닉? 좋지, 좋고말고! 응, 루민스도 당연히 좋지?”
돌아오는 토요일에 셋이서 피크닉을 가지 않겠느냐고 묻자, 벨키나는 반색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 그렇게까지 기뻐하면 왠지 미안한데…….
루민스도 가볍게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았어, 무대는 마련되었다.
“탑 동쪽에 환희의 숲 어떨까요? 요즘 히아신스가 잔뜩 피어 있어서 참 아름다울 거랍니다. 벨키나는 아직 가본 적 없지요?”
“응! 마법연에 오고 나서는 정말 즐거운 일들뿐이야. 역시 이곳에 오기 잘했어!”
대꾸하는 벨키나의 얼굴이 잔뜩 들떠 있었다. 고작 피크닉 하나로 저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짠하다.
<아란다스트 사가> 게임 안에는 자세하진 않아도 고아였던 벨키나가 좁은 세계에서 다소 불우하게 살았다는 것이 암시되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 벨키나는 마법 연구원에 온 뒤로 하루하루가 신선했겠지.
그 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윽.”
“세네핀?”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몸을 울렸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더니 다행히 통증은 금방 가라앉았다. 딱히 감기 기운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병약 미소녀도 아닌데 왜 이런담! 간밤에 잠을 잘못 잤나?
“오, 오호호, 피크닉은 제가 얘기를 꺼낸 거니 음식이나 밑준비는 제가 다 해두겠습니다. 두 분은 몸만 오세요.”
그래, 중요한 건 아무튼 즐거운 피크닉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들러리 역할에 힘쓰는 일이었다.
이 언니를 믿어, 벨키나! 겸사겸사 추천하자면 네 옆에 있는 그 남자 정말 괜찮거든! 그러니까 꼭 잡기다!
◇◇◇
그리하여 토요일, 나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약속 장소로 향하게 되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환희의 숲 광장. 나는 준비할 게 있으니 먼저 가 있겠다고, 둘에게는 조금 늦게 찾아오라 말해두었다. 신입이라 마법연 근방 지리를 모르는 벨키나는 루민스가 에스코트하도록 안배했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 섬세한 세팅이다.
“도착했다!”
음식도 준비했으니 이제는 데이트 장소 선정이다. 나란히 앉았을 때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이 좋겠지? 무릎을 굽혀 이곳저곳 앉아 보며 시선을 확인하고 위치를 정했다.
그리고는 갖고 온 체크무늬 천을 바닥에 깔고 바구니와 포도주병, 물병 등 무거운 물체들로 고정했다. 음식들을 보기 좋게 늘어놓고, 나도 한숨 돌리기 위해 천 위에 앉았다.
“휴…….”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뻔뻔하게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조금 있다가 두 사람이 오면 급한 일이 생겨서 나는 이만! 하고 썸 타는 두 명을 밀어주는 들러리 포지션답게 퇴장할 예정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땀도 말라가고, 햇볕이 따스하다. 노란색 히아신스도 바람에 흔들려 좋은 향이 난다. 이런 환경에서 둘이 이야기 나누면 참 행복한 기분이 들겠지. 내가 생각해도 잘했어.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데,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바람 소리인가 싶어서 별생각 없이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흙먼지 때문에 꼬질꼬질해 보이는,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 사이즈의 자그마한 회색 강아지가 아장아장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귀여워, 너어무우 귀여워어! 숲에 사는 야생 강아지인가? 당연히 종은 다르겠지만, 진돗개 새끼 같은 솜털 뭉치가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쓰다듬고 싶었지만, 야생에 사는 동물을 놀라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주변의 물체 A가 된 양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라?”
강아지가 천 위까지 올라왔다.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고 쫓아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약간 비틀거리는 것 같더니, 늘어놓은 음식 중에서 햄을 물려고 시늉했다. 그러나 주둥이가 닿기 직전,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천 밖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아지는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멍멍아? 멍멍아……!!”
나는 깜짝 놀라 강아지를 붙잡았다. 기운이 있는 야생 동물이라면 내가 건드리자마자 물어뜯거나 도망치는 등 반응을 보일 텐데, 강아지는 축 늘어진 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맥박은 있고, 딱히 외상은 없어 보였다. 조심스레 만져 보니, 겉으로는 털에 덮여 알아채기 어렵지만 몸뚱이며 옆구리에 살이 거의 없다. 영양실조 아닐까.
나는 샌드위치를 담으려고 가져왔던 접시를 꺼내 물을 부었다. 늘어져 있는 강아지의 입가에 대주자 본능적인 행동인지 혀를 내밀어 할짝댄다.
가지고 온 음식 중에 강아지에게 먹여서 그나마 탈이 덜 날 것 같은 건 햄인 듯했다. 염장이 되어 있어서 나트륨이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잘게 부숴서 조금만 먹이자.
햄을 잘라 잘게 부순 후 물과 마찬가지로 강아지의 입가에 대주었다. 삼킬 힘도 없는 것인지 몇 번 핥듯이 입에 넣었다가 캑캑 소리를 냈다.
역시 안 되겠다. 내가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 마나 원소 소질로는 그쪽 마법을 구사하는 게 어렵다. 빨리 탑으로 가야겠어.
나는 마나 흔적으로 영양실조인 강아지를 구조하느라 급하게 돌아가니 나 신경 쓰지 말고 잘 놀고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어째, 거짓말할 필요도 없이 진짜로 용건이 생겨버렸네.
여하튼, 나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곧바로 탑으로 뛰어갔다.
탑으로 돌아가 보니 비상 연락 담당으로 주말 근무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내가 울상으로 강아지를 데려가자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강아지에게 사료 대용으로 먹일 수 있을 만한 식료품도 몇 가지 챙겨주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강아지를 침대에 눕혔다. 지친 건지 강아지는 치유 마법을 받은 후 계속 새근새근 잠든 상태였다.
강아지가 깨어나는 대로 먹이를 줘야지 싶어서, 가져온 식료품을 잘게 다듬은 다음 용기에 넣어 단단히 봉하고 서늘한 곳에 두었다.
작업을 완료하고 나니 침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아지가 깼나 싶어서 얼른 손을 씻고 달려갔다.
내 침대 위에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소년이 전라 상태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경계하는 얼굴로 이쪽을 보며 시트를 잡아당겨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 은발의 머리 위를 장식하는 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은색의 동물 귀.
나는 알고 있다, 이 설정을.
그리고 분명히 동물 귀를 달고 있는 미소년 따위 본 적이 없을 텐데, 어쩐지 그 얼굴이 무척 낯익다.
“다, 당신은 누구……?”
반신반의하며 물어보자, 귀를 움찔거리며 소년은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진’이라고 한다.”
진?
벨키나의 공략 캐릭터 중 하나인 진? 은색 늑대 수인 캐릭터라서 내가 흰둥이라고 부르는 그 진……?
야, 근데 너 소년 캐릭터가 아니고 청년 캐릭터잖아?
◇◇◇
<아란다스트 사가>에서 진 루트도 플레이했지만, 내 기억에 진이 이렇게 쬐끄만 강아지 형태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고고한 은빛 털을 자랑하며 멋있는 늑대 상태로만 나왔지. 그러니 강아지가 된 얘를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 강아지 상태에서 못 알아본 거야 그렇다 치고. 원래 늠름한 청년인 진이 왜 소년 상태인 거지?
내가 얘의 등장 플래그를 꺾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나?
“그대는 놀라지 않는가.”
가늘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진이 입을 열었다. 인간 상태로도 헐떡이고 있는 걸 보면 몸 상태는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 아차, 내가 너무 침착한 반응이었나 보다.
마법이 존재하고 호수가 마물이기도 한 세계지만, 수인이라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니 강아지가 갑자기 늑대 귀를 달고 있는 (전라의) 소년으로 변했는데 비명도 안 지르는 내가 이상했겠지. 나는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댔다.
“어머, 그게……. 저는 당신 같은 존재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예전에 할아버지한테 들었답니다~. 다들 그냥 옛날 동화라고 했지만 저는 실제로도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믿고 있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영양실조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지, 흰둥이는 “그런가.” 하고 짧게 답하고는 다시 웅크리듯 시트에 턱을 파묻었다. 저런 동작은 정말 인간 모습인데도 강아지 같아서 귀엽네.
“저기 일단……, 뭔가 드시겠어요? 그런데 강아지인 줄 알고 준비한 음식이 날것이라, 사람 음식을 다시 준비해야 할지…….”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먹을 필요가 없다.”
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게임 내에서 이런저런 식사 이벤트가 나오지만 진과 벨키나가 뭔가를 같이 먹는 이벤트는 본 적이 없었지. 그게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설정 때문이었나 보다.
“그럼 영양실조는 아닌가 보군요. 하지만 무척 쇠약해 보여서…….”
피크닉 바구니 쪽으로 오자마자 햄을 먹으려고 하길래 당연히 많이 굶주린 건가 했는데, 그럼 뭔가 다른 병에 걸린 건가.
“……영양실조는 맞을 것이다. 음식은 아니지만, 섭취해야 하는 마나가 고갈되었다. 우리 수인족은 자연에 있는 마나로 존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아, 이것도 게임에서 나온 설정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수인이 일종의 요정 비스름한 거라서 강한 마나가 있는 환경에서 숨어 지낸다. 진은 규격 외의 소질을 지닌 벨키나가 있었기에 그녀의 마나를 받아 제약 없이 함께 모험할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에 있는 고요의 호수가 완전히 힘을 잃으면서, 내가 섭취해야 할 마나도 사라졌다.”
“…….”
일 났다.
흰둥이의 마나 보급처가 고요의 호수였다는 건 금시초문이라고……!
생각해보니 중후반 게임의 중요 아이템도 고요의 호수에서 구해야 하지 않던가?
호수가 완전히 박살 났는데 괜찮은 거야? 게임하고 너무 달라지지 않았어, 전개?
아, 어차피 그냥 픽션이고 게임인데 왜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긴 왜야, 우리 루민이가 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픽션 캐릭터고 뭐고 우리 루민이가 죽는 꼴은 못 본다!
그렇게 자아 분열 수준으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정신 차렸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제, 제 마나라도 섭취할래요? 일단은 마법사라서요.”
나는 어디까지나 루민스 루트로 벨키나를 진입시키기 위해 진의 등장 플래그를 박살낸 거지 수인을 멸종시킬 생각은 없었다. 진은 이 대륙에 유일하게 남은 수인이라는 설정이라고…….
내 제안에 대답하지 않고, 그는 맑은 에메랄드색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세네핀 크롬웰이라고 해요.”
진이 그런 질문을 할 만도 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난생처음 보는 종족의 알몸 소년에게 이렇게까지 호구처럼 친절한 반응을 보일 이유는 없으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갑자기 내 방 초인종이 울렸다.
“누, 누구세요?”
“나야. 루민스야.”
“강아지를 구조해왔다며? 도우러 왔어. 잠깐 문 좀 열어줘.”
마나 흔적으로 남겨놓고 온 메시지가 떠올랐다. 큭, 내가 너무 사유를 정직하게 써 놨구나……! 나는 홱 흰둥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뱉었다.
“지금 당장 수화 상태. 빨리 얼른 즉시!”
너무나 다급해서 세네핀 크롬웰 특유의 ‘여유 있는 존댓말을 쓰는 아가씨’라는 캐릭터조차 상실하고 있었다.
내 말투에 짓눌린 것인지 진은 조금 당황하더니 강아지 상태로 수화했다. 좋았어.
“지, 지금 열게요!”
나는 현관문을 얼른 열었다. 언제나처럼 잘생긴 루민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외출용인지 평소 업무 복장과 다르게 캐주얼한 차림이 멋있다. 물론 우리 루민이에게 뭔들 안 어울리겠냐만!
“어, 어서 와요, 루민스. 그런데 벨키나랑 피크닉은 어쩌시고……?”
“네가 메모만 놓고 사라졌는데 피크닉이 되겠어?”
그렇게 답하며 루민스는 내가 숲에 놓고 왔던 피크닉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아, 부엌에서 악전고투했던 나의 결과물이…….
“벨키나는 필요한 물건 구하러 갔고, 내가 먼저 살피러 온 거야. 강아지는 어디?”
기껏 피크닉 하기 좋은 자리를 열심히 찾아서 정성껏 세팅했는데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한탄할 때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마지못해 침대 쪽을 가리켰다.
자그마해진 흰둥이가, 하반신을 시트로 덮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귀엽긴 한데, 나는 속이 벌렁벌렁하다……. 진이 제때 수화해줘서 다행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알몸의 소년이 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일 뻔했잖아. 루민아, 누나 그런 사람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줘!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다가가던 루민스가 문득 멈칫했다. 침대 옆에 우뚝 멈춰 서더니 잠시 흰둥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침묵한 채 흰둥이를 바라보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뭐, 뭐야, 저 심각한 분위기?
잠시 후 루민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말을 꺼낼 듯이 입을 반쯤 벌렸다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내 무표정한 얼굴이 된 루민이가 선언하듯 말했다.
흰둥이와 저도 모르게 눈을 맞췄다. 그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나 지금 인간으로 보이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아냐, 너 강아지로 보여.”라는 대답을 대신했다.
“세네핀은 몰랐던 거야? 위장하고 있는 건가?”
루민스가 마법이라도 쓸 듯 손을 뻗어 오자, 흰둥이가 강아지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됐다, 인간. 그대가 짐작하는 것이 맞다.”
“어, 어떻게 아셨나요……?”
내가 그렇게 묻자 루민스가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나의 흐름 자체가 동물이랑 다르잖아. 물론 완전히 인간하고 같지도 않지만. 수인이지?”
저는 미천한 법사라서 천재 법사님과 다르게 마나의 흐름 같은 거 몰랐습니다…….
“……그대도 수인의 존재를 아는가?”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왕국에서는 대대로 정보를 일부러 숨겨온 것 같지만.”
“그렇군…….”
귀를 움찔거리며 시트에 턱을 대는 흰둥이의 동작이 무지무지 귀엽지만 속지 말자. 흰둥이, 아니 진의 진정한 정체는 덩치 큰 은발 미청년이다.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으니 모습을 드러내지 그래?”
“자, 잠깐만요!”
나는 루민스를 제지했다. 그리고 내 옷을 잡고 펄럭이는 포즈를 취한 다음, 흰둥이를 가리키고, 다시 두 팔로 X 표시를 만들었다.
차마 쟤 지금 홀딱 벗고 있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나의 필사적인 발악이 통한 건지, 루민스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알았다고 답했다.
“당신 마나가 쇠약하다는 건 알겠어. 마나 계통에 문제가 있는 건가?”
과연 의료 고문, 잠깐 마나의 흐름만 보고 문제를 파악하다니. 나처럼 흰둥이도 꽤나 감탄한 눈치였다.
“그렇다. 수인족은 자연 마나로 존재를 유지한다.”
“자연 마나라. 북쪽에 있는 고요의 호수가 파괴된 영향인가 보군.”
상큼하게 핵심을 찔러버려서 나는 놀랐다. 천재 마법사는 이 작은 단서 하나로 모든 게 파악되나?
그것보다 루민아, 그 화제 꺼내도 괜찮은 거니? 호수 없앤 사람이 너니까, 흰둥이의 원수인 거잖아……?
나의 걱정은 아랑곳없이, 루민스는 팔짱을 끼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고했다.
“우선 밝혀두자면, 그 호수를 파괴한 건 나야.”
제 입으로 원수라는 사실을 밝혀버렸어……!?
안돼, 여기서 서로 결투 플래그 꽂혔다가 둘 중 누구 하나 죽으면 어떡해!
나는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그, 저기! 미안해요, 진! 제가 바보같이 호수에 빠지는 바람에, 그걸 구해주려고 루민스가 어쩔 수 없이 호수를 없앤 거예요. 루민스는 조금도 잘못 없으니 차라리 저를 원망해주세요!”
당장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진은 뜻밖에 무척 침착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 마나를 제공한다고 했던 건, 그에 대한 죄책감이었나.”
찔끔했다가 이미 다 들통난 마당이라 순순히 끄덕였다.
“……네. 미안해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숲에서 나를 보호하려 한 네 마음은 진실 아닌가.”
흰둥이 너 너무 쿨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니?
둘이 결투라도 했다간 바로 루민이 사망 플래그 아닌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달까……. 쿨하게 받아줘서 고맙긴 한데, 왠지 복잡한 기분…….
우리를 지켜보던 루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니 난 사과하지 않겠어. 하지만, 당신이 연명할 수 있도록 마나 제공은 가능해. 어찌 되었든 이쪽 때문에 피해를 본 상황이니, 책임지도록 하지.”
진에게는 좋은 조건이니 나쁠 건 없으려나……? 당연히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 괜찮다. 나는 이 인간……, 세네핀에게 마나를 받겠다.”
“어?”
“네?”
나와 루민스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설득을 시작한 건 루민스 쪽이었다.
“저기, 딱히 무시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 객관적으로 세네핀이 가지고 있는 마나 수준으로는 지금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게 고작일 거야. 마나 형태로 추측해보면, 당신 원래 모습은 그것보다 크지 않나?”
그야 그렇다. 수화한 흰둥이는 원래 덩치가 2m쯤 되는 은색 늑대니까. 지금처럼 조그만 강아지 사이즈가 아니라. 그러나 흰둥이는 고개를 젓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 전부는 아니다.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중간에 깨달음 얻는 무협 소설 주인공처럼 멋있는 답변이긴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이미 그녀에게는 목숨을 빚졌다. 수인족의 예로서 나는 그녀에게 내 등을 바치겠다.”
‘내 등을 바치겠다.’라는 어디서 많이 들은 대사에 나는 흠칫 떨었다.
게임에서 벨키나한테 하던 소리잖아!
뭐더라, 등을 바친다는 건 상대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있으면 칼을 들어 찔러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상대에게 헌신하겠다는 의미라던가 뭐라던가.
그런데 그 소리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설마 그 말의 의미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루민스도 뉘앙스가 심상찮다고 느낀 것인지 나만큼이나 당황해버린 눈치였다.
“하지만―,”
딩동.
루민스가 채 말을 잇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 왔어~! 강아지 어딨어!? 나 강아지 진짜 좋아하는데!”
예상대로 벨키나였다. 나는 또 처음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다시 머리가 아파져 왔다…….
◇◇◇
“그렇구나―. 그럼 그냥 세네핀이 키우면 되지 않나?”
벨키나의 명랑한 답변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고 싶어졌다.
“키우……, 아뇨 벨키나, 수화가 가능한 것뿐이지 진은 사람이에요.”
“마법연에서 수인같이 연구대상 삼고 싶어 할 만한 존재를 드러낼 순 없잖아. 인간으로 있기는 어려우니 동물 모습인 게 낫지 않을까?”
생각 없이 던진 소리가 아니라 나름 핵심을 찌른 이야기였나 보다.
그런데 음……. 벨키나 방에서 같이 지내는 게 아니니까 다행이긴 한데, 진이랑 계속 같이 있으면 내가 덕질을 할 시간이 없지 않나? 표정 관리하느라.
“당신은 그걸로 괜찮나요?”
귀를 쫑긋거리며 진이 답했다. 귀여워라……. 그래봤자 정체는 (이하생략)이니까 넘어가면 안 돼.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민스가 가로막았다.
“마나 제공은 그렇다 쳐도, 거처를 이곳으로 하는 건 반대야.”
“음? 세네핀의 방에서 진이 살면 안 된다는 말이야?”
어느샌가 진과도 통성명하고 말을 놓고 있는 친화력 만렙 소녀 벨키나가 되묻자, 루민스가 끄덕였다.
“지금이야 새끼 늑대의 형태지만, 원래는 성인 남성체니까.”
지금은 변신해봤자 소년인데, 마나 흐름으로 거기까지 파악한 건가? 역시 우리 천재 마법사 루민이는 다르다니까!
“어, 그랬구나? 모습이 강아지라서 내용물도 꼬마일 줄 알았어. 미안, 진.”
“괜찮다.”
근데 기껏 몸을 바쳐 첫 만남 플래그 꺾어 놨더니 진이랑 벨키나랑 통성명하고 수인이라는 정체를 밝히는 이벤트까지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는데 괜찮은 건가…….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당신은 내 방에서 같이 지내도록 하지.”
루민스의 제안을 듣고 진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등을 바친 세네핀과 함께하고, 세네핀을 지킬 것이다.”
“그건 꼭 거처가 세네핀 방이 아니더라도 가능해. 세네핀도 그게 마음 편하지?”
“네, 네에. 확실히 남성분과 같은 방인 건 저도 꺼려지네요, 오호호…….”
물론 흰둥이가 벨키나와 같은 방에서 지낸다는 흐름이었다면 100번 내 방에서 같이 자는 한이 있더라도 막았겠지만, 루민스 방이야 상관없지.
흰둥이가 어딘지 시무룩하게 코를 이불에 몇 번 묻었다가 귀를 축 내렸다.
“……세네핀이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그러니까 귀여운 외모로 사람 동정심 사려는 행위 금지!
나는 침대에 다가가 흰둥이 옆에 앉아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마나는 가져가세요. 지금도 힘든 상태죠?”
흰둥이가 아까부터 시무룩해 보이는 건 물론 기분 문제도 있겠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어서 계속 침대에 기대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진이 고개를 들어 연두색처럼 보이는 깊고 푸른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내 손등을 몇 번 핥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꼬질꼬질해서 회색에 가까워 보였던 털이, 부드러운 결을 자랑하는 은색 모피로 변했다. 진에게 허락을 받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자 비쩍 말라 있던 몸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그러게! 와, 진짜 요정 같은 거구나. 마나를 흡수하자마자 외견이 변하다니 신기해. 나도 만져봐도 돼?”
벨키나가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묻자, 얌전히 내 손에서 쓰다듬을 받던 흰둥이가 그대로 내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매달리듯 앉으며 답했다.
“내 등은 세네핀에게 바쳤으니, 세네핀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
등을 바치면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까지 내가 결정하게 되는 거야? 당연히 괜찮, 아, 아니다. 여기서 이 부드러운 털을 만져보고 벨키나가 진한테 반하면 어쩌지? 내가 만져봐도 정말 반할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인데.
아, 물론 털은 없지만 누나는 너뿐이야, 루민아.
“호, 호호. 괘……, 괜찮고 말고요. 진이 기분 나쁘지만 않다면.”
하지만 안 된다고 할 만한 명분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까르르 웃으며 벨키나는 흰둥이의 등을 쓸어 만져 보고 “와, 진짜 부드러워!” 하고 기뻐했다. 반면 내 심경은 복잡했다. 진도 벨키나도 서로를 너무 편히 여기는 것 같아서다.
진한테 반하면 안 된다, 벨키나? 너는 루민이랑 러브러브하는 미래만을 걸어가야 한다고? 언니랑 약속이다……?
이렇게 셋이서 놀고 있는 와중, 루민스가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루민이도 흰둥이를 만져 보고 싶나? 그렇다면 얼마든지, 라고 답하려고 했는데 그는 평소처럼 침착한 말투였다.
“마법연 내에서 나 말고도 마나 흐름을 읽어서 인간이라는 걸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부분은 내가 처리해둘게.”
사무적인 손동작으로 흰둥이의 미간과 등, 다리를 만지면서 스펠을 외우더니 루민스가 손을 떼었다.
동물을 안 좋아하나? 이렇게 귀엽고 털이 부드러운 흰둥이를 상대로 저렇게 냉정한 반응이라니. 물론 루민이 취향이면 존중하기로 했다.
◇◇◇
“아! 피크닉은 아니지만 이렇게 모인 김에, 다 같이 도시락 먹는 거 어때? 세네핀이 일부러 잔뜩 준비해준 건데, 아깝잖아.”
진을 실컷 만지고 만족한 벨키나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루민스도 그 말을 거들어주었다.
구제되는 건가, 나의 도시락? 흑흑 다행이야……. 새벽부터 고생했다고.
“……나도 먹겠다.”
슬슬 남이 만지는 게 귀찮았던지 나와 벨키나의 손을 꼬리로 탁탁 쳐내며 앉아 있는 위치를 내 머리 위로 바꾼 진이 말했다.
“마나 섭취하니까 음식은 안 먹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먹어도 도움이 안 되는 것뿐, 맛은 느낄 수 있다.”
인생의 즐거움을 손해 보는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네.
“거기 남자.”
“루민스 할데르프야.”
“루민스. 옷을 내놔라. 인간 상태로 먹겠다.”
“……. 털 세 가닥만 연구용으로 떼어주면 생각해 보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쟤네 사이 나쁜가?
그리하여 털 세 가닥을 희생하여 루민스의 큰 옷을 억지로 빌려 입은 꼬맹이 진과, 여느 때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천사 같은 루민이와, 그렇게 맛있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절찬하며 먹어주고 있는 귀염둥이 벨키나가 함께하는 늦은 점심시간은 즐겁게 흘러갔다.
의도했던 대로 루민이와 벨키나가 단둘이 데이트할 자리를 만들어주지는 못한 게 천추의 한이지만, 또 좋은 기회가 오겠지.
그때까지 이 누나는 벨키나가 푹신푹신 털의 매력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한편, 다른 캐릭터들과의 플래그 파괴도 힘낼게!
……이벤트 순서대로라면, 다음 타자는 강적이 될 것 같은 이 나라 왕세자 저하니까.
05. 캐릭터 호감도는 제각각이다
우리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왕립 마법 연구원은, 아란다스트 대륙에서 큰 땅덩이를 차지하고 있는 ‘페이넌스 왕국’ 내에 있는 연구 기관이다. 지구로 따지자면 국립 과학 연구 센터랄까.
문헌을 발굴하고 해석하여 소실된 고대 마법을 재현하거나 독자적인 마법 법칙을 연구하는 등, 흔히 마법 연구라고 하면 상상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곳이다.
나는 마법사의 소양이 다소 부족하지만, 고대 언어 해석 능력은 그럭저럭 있어서 그쪽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능력이 아니라 세네핀의 능력인 거지만, 다행히도 빙의되고 나서 편리하게 그녀의 능력이나 지식도 쓸 수 있었다. 게임 빙의 굉장해~.
한편 루민스는 고정된 부서가 아니라 중요 연구 과제에 따른 유동적인 부서에 속해 있고, 새로운 마법 법칙의 증명과 실험을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벨키나는 수습이지만 그 마법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 마법사 자격을 따기 위해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렇듯 연구원을 구성하는 인원은 우리 루민이나 벨키나처럼 엄청난 마법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다른 분야에 특화되어 있어서 마법 재능 자체는 별것 없는 사람도 있었다.
연구원 내에서 따지자면 전자의 사람은 드물고, 후자인 사람이 많다. 마나와 원소의 사랑을 받는 행위적 마법 재능과 연구 머리가 있느냐는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루민이는 둘 다 뛰어나지만 말이지!
그렇게 느긋하고 목가적인 직장인 마법 연구원의 자랑 중 하나는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식당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향하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곧 등장 예정인 왕세자를 어떻게 막을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양 판타지 배경인 여성향 게임이라면 공략캐 중 한 자리쯤은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왕자 포지션. 당연히 <아란다스트 사가>에서도 등장하는 그 남자.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 주인공인 벨키나가 금발이라서인지 금발의 왕자님은 아니고, 흑발의 왕자님이다. 심지어 붉은 눈이다. 치명적인 남자라고 너무 뻔한 디자인 아니야?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게임에 단골로 등장하는 바람둥이 작업남 속성마저 있다. 부담스러워하는 벨키나한테 줄기차게 들이댄다. 물론 이런 캐릭터의 클리셰 반전답게 실은 벨키나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용 가치가 있어 보여서 그랬다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 결국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는 자신의 진심을 깨달으며 후회남이 되지만…….
의욕과 긍정적인 뉘앙스가 없는 설명으로 짐작하겠지만, 사실 나는 이 캐릭터가 조금 거북한 편이었다.
‘후회남 될 거면 처음부터 우리 벨키나한테 상처는 왜 줬니?’라거나, ‘이런 놈을 지키려고 우리 루민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건가?’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조금 미워진다.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지만, 군주로서는 자기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좋은 왕족 캐릭터긴 하다. 근본적으로 나쁜 놈 아닌 것도 알지만…….
“아니, 정신 차려야지!”
그렇게 불쑥 외치자, 내 팔짱을 끼고 걸어가던 벨키나가 깜짝 놀랐다.
“세네핀, 왜 그래? 졸려? 낮잠 자면 피로가 좀 풀릴지도 몰라.”
……큭, 고민이 너무 깊은 나머지 캐릭터 붕괴 상태로 대사를 내뱉었다.
“오, 오호호.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벨키나가 루민스 루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호감도를 팍팍 올려줘야 했다.
얼마 안 있으면 벨키나와 루민스는 세계를 구하는 모험의 첫걸음으로서 이 마법연을 떠나 수도로 출발할 것이다. 공통 루트는 그 뒤 얼마 안 있으면 끝난다. 나의 임무는 그들이 수도로 떠나기 전까지 루민스 루트 진입에 차질이 없도록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다.
큭, 게임처럼 호감도가 보이는 창이라도 있으면 편할 텐데, 게임 안으로 들어오니 이게 너무 불편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호감도를 못 본다면 조금이라도 더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면 되지! 바로 지금부터 말이다.
“벨키나, 점심은 루민스와 둘이 먹어요. 저는 이만 볼일이 있어서 진이랑 가볼게요.”
찡긋 윙크를 하며 나는 벨키나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어? 난 세네핀이랑…….”
“자자, 사양하지 마시고요.”
벨키나의 어깨에 앉아 있던 진을 내 품으로 데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데? 업무 밀린 거면 도와줄 수 있는데.”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루민스가 친절하게 말했다.
루민아……! 우리 루민이 잘생긴데다가 마음씨도 곱구나! 근데 지금 그거 아니거든!
“정말 괜찮아요! 벨키나랑 둘이 맛있게 드시기예요!”
나는 재빠르게 튀었다. 뒤에서 두 사람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품에 안겨 있던 진이 귀를 쫑긋거리며 달려가는 나에게 말했다.
“세네핀. 정말 괜찮은가?”
“네?”
“벨키나가 울 것 같은 얼굴이던데.”
“……네?”
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정신없이 달려와서 어느샌가 마법연 탑 앞이었다.
“나야 그대들과 알게 된 시점이 늦었으니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원래 그대는 벨키나와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다면서?”
“그, 그렇죠…….”
“다시 미움받았다고 오해하지 않았겠는가?”
“네에?!”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물론 벨키나는 우리 루민스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중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나는 <아란다스트 사가>의 주인공인 그녀를 순수하게 좋아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는데도 모난 데 없이 밝고 올곧은 성격이란 마음이 여간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 정말 그런 거 아닌데.”
“그렇다면 오해를 푸는 게 좋지 않겠나. 루민스도 좀 섭섭해 보였고.”
“네…….”
두 사람을 이어주려는 마음이 앞서서 실수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게임이란 건 어차피 1과 0으로 프로그래밍된 세계 아닌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집어넣으면 각 캐릭터가 A의 상황에서 B로 반응하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삶은 지나치게 현실에 가까웠다.
게임 초반 이후에 언급조차 안 되는 얼굴 없는 악녀 캐릭터를 상대로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준비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게임 캐릭터한테 과몰입해서 죽으면 싫다느니 상처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느니 고민하게 되는 거 아냐. 마치 여기가 게임 속이 아니라, 정말 실재하는 세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깨질 듯한 두통이 머릿속을 뒤덮자 방금까지의 생각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다. 다행히 짧은 호흡을 거듭하자 두통은 곧 사라졌다.
좋지도 않은 머리로 궁리했더니 무리가 왔나 봐. 그냥 심플하게 생각하자.
아무튼 나한테 중요한 건 최애캐 4D 사망 체험은 사양하고 싶다는 것, 호감이었던 여주랑 친구 비스름한 관계가 된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도 나온다.
“돌아가 볼래요.”
“그래, 잘 생각했다.”
◆◆◆
볼일이 있다며 둘만 남기고 세네핀이 급히 떠나버린 이후로 벨키나와 루민스는 묵묵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연구원 식당에 도착한 후에도 벨키나는 메뉴를 정하지 못한 채 고민만 거듭했고, 루민스는 그런 그녀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루민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글쎄. 너는 원래 모든 사람들한테 친한 척 잘 하지 않아?”
“아 진짜 도움이 안 돼요…….”
벨키나는 테이블에 그대로 이마를 들이박았다. 청순한 미녀라며 은근히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일부 마법연 남성들이 봤다면 환상이 깨질 장면이었다.
“그거야 남들한테 호감을 사는 게 편하니까 그런 거고! 세네핀이랑은 정말 친해지고 싶었단 말이야.”
“…….”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벨키나의 뒤통수를, 루민스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벨키나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이마는 테이블에 박은 채였다.
“솔직히 루민스도 그런 거 아냐? 다른 사람하고 벽 쌓고 사는 주제에 세네핀한테는 친절하잖아.”
“너한테도 친절한데.”
루민스는 커피잔을 쥔 채 스푼으로 내용물을 저으며 질문했다.
“왜 그렇게 집착해? 넌 남들 호감 사는 연기 잘하잖아. 마음만 먹으면 세네핀 말고도 친구야 몇십 명이고 만들 수 있으면서.”
담담한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루민스의 목소리는 씁쓸하게 들렸다. 혹은 무언가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체념하고 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벨키나가 툴툴거렸다.
“다른 사람이랑은 달라. 너도 그렇고, 세네핀도 그렇고, 진도 그렇고. 정말 깊이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예감 같은 게 있다니까.”
“논리도 근거도 없다는 소리군.”
“애초에 사람 관계는 논리도 근거도 없어!”
발끈하며 벨키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왜 그래?”
“세, 세네핀이 왔어!”
루민스는 저도 모르게 벨키나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시선이 닿는 끝에서 세네핀이 걸어오고 있었다.
◇◇◇
우와, 놀랐다. 루민이와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던 벨키나가 테이블에 머리를 쾅 박아서. 뭐지, 버그인가?
그대로 이마를 박은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길래 정말 버그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다행히 벨키나는 다시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그대로 내 쪽을 발견하더니 얼굴을 붉히곤 이마를 문질렀다.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일단 사과하러 돌아왔지만, 두 사람의 좋은 분위기를 방해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는데 발견당한 이상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이상했다.
“저기, 벨키나. 아까 뿌리치고 간 것처럼 그래서 미안했어요…….”
“세네핀! 아니야. 고민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눈치 없이 굴어서 내가 미안하지.”
“루민스도 미안해요. 일부러 도와준다고까지 말해주었는데.”
“괜찮아, 본인이 내키지 않는 도움은 민폐니까. 하지만 정말 난 괜찮으니까 뭐든 말해.”
“말씀만으로 고마워요.”
내 품에 있던 흰둥이가 가벼운 동작으로 테이블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래서? 그대들은 식사 끝난 것인가?”
“아니, 그냥 차 마시면 이야기 나누고 있었어. 이제 제대로 먹을 수 있겠네.”
루민이가 생글 웃으며 자신과 벨키나 사이의 비어 있는 자리를 나에게 권했다.
왠지 커플 사이에 끼어 앉는 기분인데……? 그렇지만 사양하기도 뭐해서 나는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일 있다는 건 끝난 거야?”
벨키나가 순수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서 양심에 찔렸다.
“아뇨, 그게 실은. 두 분한테 너무 친한 척한 거 아닌가 하고 반성이 되어서요. 용서받았다곤 해도, 제가 벨키나한테 많이 잘못했잖아요?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루민이도 어쩐지 옅게 웃었다. 앗, 그 표정 내 마음의 사진집에 저장…….
아니, 이게 아니라. 왜 갑자기 웃는 걸까?
“아, 미안해. 실은 방금 전에 나도 비슷한 소리를 했거든. 세네핀한테 너무 친한 척해서 부담 주지 않았나 하고.”
“네에?! 전혀 아니에요.”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테이블 구석에 앉아서 꼬리를 흔들던 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 둘 다 비슷하군. 결국, 서로 친해지고 싶단 소리 아닌가?”
저도 모르게 벨키나를 바라보았더니,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푸른색 눈이 사르르 접히며 예쁜 미소를 만들어냈다.
“정말이야?”
“그, 그럼요!”
솔직히 친해져서 우리 루민이를 잘 붙여보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많이 섞였지만, 그래도 벨키나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란다스트 사가>를 플레이하는 동안 나는 벨키나의 명쾌하고 다정한 면모를 많이 보았고, 이런 애라면 그야 사랑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겠다고 동경하곤 했다. 설마 내가 게임 세계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내내 호감이 있었던 아이랑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엄청난 행운 아닌가. 게임 캐릭터라고 해도 말이다.
“나도 그래! 앞으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 가자!”
“네, 네에……!”
그런데 어쩐지, 뭐라고 해야 하나, 게임 호감도 창을 볼 수가 없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루민스 루트 뚫어야 하는데 벨키나 안에서 내 호감도가 오른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인가……?
아냐, 오히려 주인공의 친한 친구가 되면 좋은 남자라며 루민스를 푸시할 기회가 늘어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불길한 기분을 저편으로 밀어버렸다.
◇◇◇
이후로도 어영부영 루민스와 벨키나를 단둘이 있게 해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건만, 큰 성과가 없었다.
물론 벨키나가 루민스와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음, 그런데 뭔가 핑크빛 무드가 빠진 느낌? 동네에서 10년 지낸 남자 사람 친구 느낌?
으, 칼트 왕세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호감도 진도를 빼두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네. 걔가 등장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벨키나와 루민스는(그리고 진도) 마법연구원을 떠나게 된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첫걸음이 되는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마법연의 엑스트라 악녀 세네핀 크롬웰이 두 사람 사이를 푸시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세네핀, 무슨 일 있어?”
벨키나가 걱정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루민스도 말을 보탰다.
“뭐 고민 있는 거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심각한 표정이던데.”
우리 루민이 다정하기도 하지. 이 누나는 기쁜데……, 밝힐 수 있는 고민이 아니라 지금은 기쁘지 않구나.
“요즘 한숨도 잦은 것 같았다.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군.”
내 무릎 위에 터를 잡고 치즈를 먹고 있던 흰둥이도 그렇게 말했다. 너무……, 티가 났구나.
남한테 상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서,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호호, 잠이 좀 부족해서 그래요. 내일모레 왕실 측에서 시찰단이 오지요? 그것 때문에 저희 부서도 일이 많거든요.”
“연례행사니까 어쩔 수 없긴 하지. 우리야 그렇다 치고 의전 담당하는 부서랑 연구 발표 담당들은 난리 난 것 같아. 며칠째 밤새고 있다던데.”
루민스가 속한 부서는 최첨단 마법 연구를 다루고 있어서 본인도 발표 자료 준비가 필요했을 텐데 벌써 끝내놨나 보다. 역시 우리 루민이 엘리트…….
“시찰단이 오면 어떤 걸 해? 그냥 둘러보고 가는 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벨키나가 질문했다. 루민스는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감시하러 오는 거지. 예산이 엉뚱한 데에 쓰이고 있지는 않은지, 작년 목표로 세웠던 내용은 제대로 달성이 되었는지. 그 밖에는 우리 마법연구원 돈줄이 오는 거니까 파티 개최해서 재롱 좀 피워주는 거고.”
게임에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꽤 신랄한 뒷사정이 있는 행사였구만.
“그렇구나아. 높은 사람들 오는 거야?”
“이번에 오는 건 연구 성과를 검증할 수도의 마법 협회 높으신 분들하고, 방계 왕족 출신 귀족 몇 명인가 그랬어. 어차피 멀리서 잠깐 인사하고 나면 마주칠 일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긴장하진 말고.”
……그렇게 알려져 있다만, 루민아, 불행히도 이번 시찰단에는 왕세자 저하가 섞여 있단다.
왕세자는 아직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 요청으로 방계 왕족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나타난다.
이러고 나중에 실은 내가 왕세자다~ 하고 정체를 밝혀서 벨키나를 심쿵하게 만든다는 계산속 빠삭한 칼트의 큰 그림으로…….
아 근데 나 얘 정말 거북한가 보다. 좋은 말이 안 나오네.
진처럼 첫 만남 이벤트를 꺾어버린다고 왕세자로부터 벨키나를 아예 격리할 수는 없었다. (진이랑 격리하는 것도 실패했지만.) 이번 시찰단 인원에 칼트가 섞여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일개 마법사인 내가 시찰단에서 칼트를 빼버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왕세자라는 포지션상 연애랑 별개로 벨키나가 대륙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아예 절교하는 것도 곤란했다.
……그렇다면, 벨키나 옆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저 남자가 해오는 플러팅을 다 쳐내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사실 그 결론을 며칠 전부터 내고 있었는데, 막상 실행할 의욕이 안 나서 지금 이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다. 다른 근사한 방법이 없을까 계속 고민했지만, 내 머리로는 무리였다.
그 남자의 숨 쉬는 듯한 플러팅을 옆에서 보면서 계속 가드…….
“하아아…….”
“세네핀, 역시 그대가 괴롭다면 나에게 모든 것을 밝혀라. 그대를 괴롭히는 자의 생명을 끝장내줄 수 있다.”
“진도 차암~. 생명을 끝장내지 않아도 삶의 의욕을 끝장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온화하게 가자구.”
“너네는 고민하는 애 앞에서 무슨 뒤숭숭한 소리를 하는 거냐.”
“혼자 착한 척해서 세네핀한테 점수 따려는 거지, 루민스!?”
언제 지들 셋이서 베프 먹었는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고 있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다시 마른세수를 했다.
◇◇◇
나의 괴로움은 어찌 되었든 간에, 벨키나와 칼트의 첫 만남 이벤트가 발생하는 날짜가 되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으로 아침부터 벨키나를 찾아갔다. 평일이 아니었다면 벨키나의 기상부터 취침까지 옆에 붙어 있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오늘은 평일이라 마법연에서 업무를 마쳐야 했다. 가능하다면 월차를 쓰고 싶었지만, 저번 호수 사건 때문에 병가를 써버린지라 월차가 남지 않았다.
제길, 제비 왕자(결국 봉인을 풀고 만 내 안의 호칭) 이 자식, 월차 리필되는 다음 달에 올 것이지, 정말 타이밍도 도와주질 않네!
오늘은 금발을 땋아서 올려묶은 사랑스러운 벨키나가 방실방실 웃었다.
큭, 벨키나가 너무 예쁘니까 제비 왕자 같은 놈이 분수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거 아냐!
“오늘도 벨키나가 아름다워서 제가 힘드네요…….”
“아하하, 잠이 덜 깼나 보구나! 세네핀이 훨씬 예뻐!”
빈말인 것이 틀림없는데도 조금도 밉게 들리지 않는 것이 과연 벨키나의 장점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 벨키나?”
“응, 얼마든지.”
“실은, 제가 어제 꾼 꿈이 조금 불길해서요. 벨키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무서워요. 혹시 싫지 않다면, 마법연 연구실에 있을 때 빼고는 저랑 계속 함께 있어 주실 수 있나요?”
정말 택도 없는 핑계였지만, 이거 말고는 연구실 바깥에서 벨키나를 커버할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보나 마나 수상하게 여기겠지 싶어서 거절당할 각오를 했는데, 뜻밖에 벨키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날 그렇게 걱정해준 거야? 고마워. 그런 거 아니더라도 난 세네핀이랑 항상 같이 있고 싶어.”
앗,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루민아. 누나는 너뿐이고 그쪽으로 편견은 없지만 이성애자야!
그렇게 아무도 묻지 않은 핑계를 마음속으로 대며 나는 벨키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벨키나! 그럼 우선 아침 먹으러 갈까요?”
“응, 오늘 후식으로 벌꿀 아이스크림이 나온대!”
◇◇◇
제비 왕ㅈ……, 아니다, 진정하자. 칼트가 등장하는 타이밍은 게임 내에서도 오늘이라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시간은 불명확했다. 게다가 다른 캐릭터들처럼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 이미 벨키나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로 본인이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장소로 피하든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놈이 제정신이라면 내일 정식으로 방문할 예정인 마법연구원 내부까지 쳐들어올 리는 없었다. 만나게 된다면 마법원 바깥일 테고, 온종일 같이 있기로 했으니 벨키나가 나를 떼어놓고 멀리 갈 일은 없으리라 계산했다.
예상대로 점심 식사가 끝난 후, 벨키나가 나에게 권했다.
“세네핀, 소화도 시킬 겸 잠깐 산책하러 가는 건 어떨까?”
“호, 호호. 좋……지요.”
예감이 들었다. 분명히 그 ‘제비 왕자’를 만나게 될 운명의 산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어차피 닥칠 현실이라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지. 전쟁터에 나서는 듯한 비장한 각오로 벨키나 옆에 서자, 그녀는 얼른 내 팔에 팔짱을 끼었다.
마법연구원 남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은 그 옆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새삼스럽지만 마법연 터는 사방으로 자연환경이 아름다웠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게 단점이긴 하지만, 도시 생활이 그리울 때 휴가받아서 놀러 가면 그뿐이고. 요즘 같은 특수한 시기 아니면 업무 강도도 높지 않으니, 제법 꿀 직장 아닌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두려움을 떨쳐 내는 중, 앞에서 한 청년이 걸어왔다.
……하, 왔다.
윤기가 나는 흑발, 요염한 붉은 눈. 왕세자 자격으로 방문하는 게 아니라서 가벼운 옷차림인데도 좔좔 흐르는 귀티.
누군지 모른다 해도 신분 높은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났다.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 이 나라의 정식 왕위 계승자, 왕세자 저하다.
“오, 아가씨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네에, 안녕하세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 바른 벨키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쪽에 있는 금발 아가씨에게, 용건이.”
“어떤 일이신가요?”
“실은 제가 열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
안 되겠다, 이거 안 된다. 다음 대사가 예상되어서 소름이 오스스 돋는다.
“바로 제가 당신이라는 천사에게 한눈에 사로잡혀 열병에……”
“오호호. 벨키나, 이 사람은 무시하고 얼른 가요. 저기요, 잡상인 아저씨. 여기 일반인 출입금지니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본인을 지칭해서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욕적인 칭호가 머릿속으로 소화되지 않은 것인지, 칼트가 먹통이 된 컴퓨터처럼 버벅거렸다.
다시 전원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어서, 벨키나의 팔을 끌며 홱 마법연구원을 향해 진로를 틀었다.
“저 사람 잡상인이었어, 세네핀?”
“요즘은 겉이 멀끔해 보여도 그게 다 장사 수단이래요. 옥장판 같은 거 강매당하지 않게 조심해야죠.”
“옥장판……?”
“보석으로 만든 카펫 같은 거예요. 요즘 수도 홀르나에서 유행하는 물건이랍니다.”
아무 말이나 뱉으면서 나는 제비 왕자에게 선취점을 따낸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거 게임이었으면 ‘대륙 최초 왕세자를 잡상인 아저씨라 부른 자’ 뭐 이런 타이틀 얻지 않았을까?
잡상인 아저씨 운운한 건 쬐끔 미안했다. 그래도 칼트가 벨키나한테 접근하는 건 막았으니까, 뭐.
쟤는 벨키나한테 진심 아니고 이용해 먹을 마음 만만한 놈이란 말이야. 벨키나가 루민스랑 맺어져야 하니까 플래그를 부수고는 있지만, 꼭 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벨키나를 나쁜 남자랑 짝지어주고 싶지 않은 친정 엄마의 마음이랄까, 그런 점에서도 칼트는 허락하고 싶지 않다고!
◇◇◇
첫 만남에서 한 방 먹여주긴 했지만, 진정한 전투는 오늘 시작이었다.
어제 칼트는 간을 보러 온 것에 불과하고, 제대로 이름을 밝히는 건 오늘 오후에 있을 시찰단 파티 때니까.
왕세자가 아니라 대귀족이라는 임시 정체를 밝히는 셈이지만, 뭐 어쩔 건가. 어제 수상하게 군 건 그쪽이잖아. 대귀족이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잡상인이라고 불러서 모욕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난 알고 그런 거지만.)
오늘 칼트가 대귀족으로 이미지를 세탁해 봤자 벨키나에게 첫인상은 잡상인 아저씨니까, 정말 내가 큰일 해냈다.
파티 준비를 위해 오늘은 오전 근무만 진행되었다. 의전 담당 등 실무자들은 마지막 점검을 하느라 바빴고, 다른 사람들도 본인의 파티 참석 의상을 챙기는 등 분주한 오후였다.
아무래도 파티에 흰둥이를 데려갈 수는 없어서 미리 말은 해놨다. 진은 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눈치였으나, 시무룩한 얼굴로 잘 다녀오라고 해주었다.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대접해야겠어.
이런 와중, 나는 뜻하지 않게 벨키나에 의해 인형 놀이를 당하고 있었다.
“오늘 시찰단 환영 파티는 세네핀도 예쁜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니까!”
“아뇨……. 저는 됐고 벨키나 오늘 정말 예쁘니까 꼭 루민스랑 춤춰주세요!”
“맨날 얼굴 보는 것도 지겨운데 내가 왜 루민스랑 춤을 춰. 그럴 거면 세네핀이랑 출 거야!”
큭……. 루민아 너 그간 벨키나한테 어필 전혀 안 한 거니? 이쯤 되면 네 위치가 남사친을 넘어서 지긋지긋한 악우쯤으로 넘어간 거 같은데 착각이니?
이 누나가…… 어서…… 어떻게든 할게…….
“벨키나. 그럼 저랑 가위바위보 해요. 이긴 사람이 루민스랑 춤추는 것으로…….”
“아, 혹시 세네핀이 루민스랑 춤추고 싶은 거야?”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니!
“설마요! 그럴 리가요! 절대요! 그런 일은 없어요!”
온 힘을 다해 부정하자 벨키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래, 그래.” 하고 넘겼다. 하지만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기 직전이다. 무도회 이벤트가 이렇게 흐지부지되어선 정말 곤란했다. 연애 게임에서 공략캐랑 춤을 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이벤트인데. 한 번에 호감도가 엄청나게 상승한단 말이야. 그 중요한 기회를 날릴 수는 없잖아.
“진짜로 루민스랑 안 출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요.”
아직 개별 캐릭터 루트가 확정되려면 시간이 남아 있지만, 내 마음은 초조했다.
소설 보면 남들은 원작 비틀기니 뭐니 잘도 하던데, 난 왜 원작에 있는 루민스 루트 밀어주기조차 이렇게 뜻대로 안 되는 걸까?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의 서러움 따위 모르는 벨키나는 나한테 초록색 비단과 노란색 비단을 번갈아 대어 보았다. 드레스에 장식할 리본을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정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초록색이 좋겠어!”
한참 고심 끝에 색을 결정한 벨키나가 비단으로 장식 리본을 만들어주었다. 이윽고 화장 솔로 내 얼굴을 쓸어주고 연지를 발라주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 세네핀은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이런저런 화장 도구나 액세서리가 방에 남아 있었다. 정작 나는 연구원 생활에 찌들어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모아둔 상자에 먼지만 쌓여가던 걸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될 벨키나를 위해 봉인을 푼 셈이다. 그런데 어쩐지 벨키나는 그걸로 나를 꾸미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마무리로 자그마한 크리스털 귀걸이와 목걸이를 나한테 걸어준 후 벨키나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봐봐, 예쁘지?”
내 어깨를 잡고 전신 거울을 보여주었다. 화장하고 드레스까지 갖춰 입은 내 모습이 낯설다. 물론 옆에 있는 환상적인 미모의 벨키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좀 죽이는 방향으로 화장을 해서인지 평소보다 봐줄 만한 거 같긴 하다.
오히려 벨키나의 드레스가 소박한 것이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다. 그야 고아 생활 하다가 연구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무슨 제대로 된 드레스가 있겠냐마는……. 액세서리는 빌려줄 수 있어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옷과 구두를 빌려줄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하지만 푸른색 생화로 머리를 장식한 게 숲의 요정 같으니까 분명히 벨키나가 오늘의 주인공일 거야. 그래, 고급 드레스는 나중에 또 잔뜩 입힐 일 있을 테니까!
◇◇◇
몸단장을 마무리하고, 나와 벨키나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홀(평소에는 연구 발표회 같은 걸 하는 곳이다)로 이동했다. 아직 시찰단 도착 예정 시간이 20분쯤 남았으나 꽤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우리도 입구 근처 테이블 하나를 잡아 앉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인터넷에서나 보던 결혼식장에 참석한 느낌이었다. 신랑 신부 입장하기 전에 미리 앉아서 사람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의…….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벨키나가 “아, 루민스다.”라며 입구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나는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
옅은 회색 재킷은 은사로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안에 받쳐 입은 셔츠와 짙은 남색 크라바트가 조화롭게 어울렸다. 허리까지 이어지는 재킷의 라인은 나무랄 데 없이 딱 떨어지고, 회중 시곗줄과 연결된 브로치가 과하지 않게 절제된 화려함을 보여준다. 평소와 가르마를 다르게 타서 뒤로 넘긴 머리도 평소의 이지적인 분위기와 상반되게 관능적이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러 심장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루민이와 처음 이 세계에서 맞닥뜨렸을 때처럼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견고한 이성에 감사하며 나는 그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발견한 루민스가 황금빛 눈을 가늘게 뜨며 활짝 웃는다.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보라색 머리칼이 성스럽다.
오늘이 인생의 종막이라도 여한이 없겠다. 어제 왕세자 상대로 간 부은 짓도 했는데 죽음이 대수랴. 아니, 이곳이 천국 아닐까?
“둘 다 일찍 왔네. 어차피 와 봤자 별것도 없을 텐데.”
“나눠준 칵테일 맛있어. 여기 카나페랑. 다 먹으면 다시 채워주나?”
“아주 덕담을 하세요, 덕담을.”
어떻게 벨키나는 루민이를 상대로 저렇게 이성을 갖추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걸까? 나도…… 제대로 된 이성을 되돌리고…… 대화를…….
“세네핀도 얼른 먹어. 저러다가 저 먹보가 테이블보까지 다 먹어치우겠다.”
남들보다 10배 정도 빛나 보이는 루민스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건다. 지금 이건 너무 비현실 공간……. 정신줄을 되돌려야…….
“……네.”
앞에 있는 카나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뭔 맛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루민이가 권했으니 먹어야지! 암!
그렇게 삐걱거리며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모를 음식을 주워 먹다가, 목이 막혀서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이 글라스를 제대로 잡지 못해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앗.”
“아…….”
아이고, 정신 놨다가 일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색의 칵테일은 테이블보에 불규칙한 무늬를 그리다가 가장자리로 뚝뚝 액체를 떨구었다. 당연하게도 그 액체는 고스란히 내 드레스에 떨어졌다.
차라리 사고를 치고 나니 그나마 머리가 냉정해졌다. 내가 꽃단장해서 부귀영화 누릴 것도 아니고 좀 더러워진 정도야…….
그런 생각을 하며 대충 수습하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에 앉아 있던 루민스가 재빠르게 의자에서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드레스 자락에 묻은 액체를 냅킨으로 닦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루, 루민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망설임 없이 꼼꼼하게 드레스 자락을 훑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드레스 색상이 짙어서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것 같네. 나중에 세탁은 맡기고.”
“다행이다, 세네핀! 유리잔 깨져서 다치진 않은 거지?”
루민스의 다정한 목소리, 벨키나가 걱정해주는 목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 급사가 해줬어도 되는 뒤처리인데, 저기, 미안해요…….”
“그렇지만 세네핀, 긴장했잖아?”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이고 루민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전했다.
“그럴 때 급사까지 불러서 주목받으면 네가 더 긴장할 것 같아서. 괜찮아, 괜찮아. 여기 온 사람들 아무도 안 잡아먹어. 이따 올 높은 사람들도 우리랑 상관없어.”
“루민스…….”
“평소랑 같아. 먹보긴 하지만 벨키나가 있고, 내가 있고, 진은 없는 게 아쉽지만, 셋이서 평소처럼 밥 먹는 거야. 이따 춤도 무리해서 출 것 없으니까 맛있는 저녁 먹고 돌아간다고 생각해.”
옆에서 벨키나가 툴툴거리는 소리, 거기에 몇 마디 얄미운 말을 돌려주는 루민스의 소리, 실내악단이 연주하는 우아한 선율이 엉켜서 윙윙거린다.
실은 긴장한 게 아니라고. 그저 루민이 너를 보고 이곳이 너무 환상 같아서 숨이 막혔다고.
그렇게 대답하지는 못하며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아란다스트 사가>를 하며 너무나 마음에 위로를 주었던, 다정한 루민스 할데르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베풀기만 하는 그가 행복하기를 무엇보다 바랐기에, 내가 이 게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빛나기만 해서 쳐다보기만 해도 힘들던 루민스가 이제야 제대로 눈앞에 초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것이다. 이곳의 다정하고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모두 즐겁고 행복한 엔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 카나페 더 먹어도 돼요. 벨키나. 저 벅차서……, 아니, 속이 꽉 찬 거 같아서.”
“에이 차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먹보라는 걸 긍정하는 거 같잖아.”
“이 자식이…….”
그래, 악우에서 시작하는 사랑도 있으니까 이 두 사람의 현재 관계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긴, 게임에서 루민이 루트도 우정 루트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담백하긴 했지……. 안 친한 것보다는 친한 게 백 배 낫잖아.
“호호, 싸울 만큼 친하다고들 하니까 역시 루민스와 벨키나는 둘도 없는 사이인 거네요. 이따 두 분 꼭 같이 춤춰주시는 거죠?”
“됐거든.”
“됐다.”
……그리고 혼자서 너무 감동 모드였던 바람에, 나는 그 뒤에 다가올 폭탄에 대해서 까맣게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
시찰단 일행이 도착할 시각이 되자, 홀의 문 쪽으로 꽃잎이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의 결혼식장에서 뿌려대는 종이꽃이 아니라, 진짜 꽃잎이다. 사람이 일일이 흩뿌리는 게 아니라 바람 마법으로 제어하는 점이 무척 마법연구원다웠다.
“저런 건 누구 취향일까요?”
“우리 연구원 원장님 취향 아닐까? 설마 손님 측에서 저런 악취미 환대를 요구했을 거 같진 않은데.”
“나도 원장님에 두 표!”
고양이를 키우는 조금 로맨틱한 취향의 독신 중년에 대해 가차 없는 평을 내리는 두 사람을 훈훈하게 바라보다가, 나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의전을 맡은 사람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것 같았다.
원래 식순대로라면 사회자가 들어오는 손님을 확인하고 이름과 작위, 직책 등을 호명하게 되어 있다. 순서는 신분이 높은 쪽부터 낮은 쪽까지고, 모두 다 호명되면 원장의 환영사 및 간단한 인사 타임 후에 댄스로 넘어가는……. 그런 분위기의 약식 파티다. 애초에 의전 쪽에서 긴장할 이유가 거의 없는 행사인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새하얀 얼굴이 된 의전 담당자가 들어와 사회자한테 가더니 쪽지를 건네주며 귓속말로 무언가 속삭였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회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엄청난 트러블이 생긴 모양인데, 의전 담당 부서가 나중에 위에서 한 소리 듣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으로 상황을 관전하고 있으려니, 사회자가 목을 가다듬고 음성 확대 마법을 써서 회장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모두 결례가 되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응……?”
오늘 올 손님 중에 왕족 방계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격을 갖출 필요는 없을 텐데?
의아한 얼굴로 루민스 쪽을 쳐다보자,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이런 공식 파티 자체가 처음인 벨키나는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때 바로 눈치를 챘어야 했건만.
입구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빛을 머금은 금색 휘장. 목을 감싸는 칼라에도 금사로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 와인색의 망토 위로 검은 모피가 왼쪽 어깨로부터 아래를 향해 우아하게 걸쳐졌다. 검은색과 짙은 남색이 지극히 화려한 정복을 균형 있게 감싸고, 정복의 곳곳에 자리한 커다란 보석 장신구가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장식과 디테일이 천박하지 않은 사치를 묘사해냈다. 그런 엄청난 복장에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가진 그가, 붉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품위 있게 웃었다.
“―시초룡 알페이넌스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 번영한 페이넌스의 직계 후예.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 왕세자 저하 납시옵니다!”
일시에 회장 전체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배경을 채우고 있는 실내악도 순간 음정이 삐끗하지 않았나?
그야 그렇겠지. 아…….
“알페이넌스의 가호를. 신경 쓰지 말고 모두 편하게 앉으십시오.”
회장 안을 둘러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다들 그에 따라 의자에 앉으려 하는데, 칼트 왕세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 또라이 새끼, 어제 잡상인 아저씨 소리 들은 거에 꽁해서 신비주의고 뭐고 벗어 던지고 변방 촌구석 마법 연구원에서 사교계 신고식을 하는 거냐?
◇◇◇
“……저, 저 사람 어제 우리가 만난 잡상인 맞지……? 왕세자 저하였던 거야?”
벨키나가 소곤거리면서 묻는 말에 끄덕이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야 저놈이 첫인상을 만회하기 위해 오늘 뭔가 할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그렇지만 옷을 더 말끔히 차려입고 정식으로 인사 나눌 때 벨키나에게 추가로 작업을 걸겠거니~ 수준이었지 저런 또라이 같은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단 말이다.
“잡상인? 무슨 말인데?”
옆에서 듣던 루민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아, 산책하다가 마주쳤거든. 근데 희한한 소리를 해서 세네핀이 잡상인은 출입금지라고 하고 돌려보냈어.”
……친절한 설명 고맙구나, 벨키나.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왕세자가 한 짓은 정말 또라이 짓이다. 단 한 번에 불과한 사교계 정식 데뷔를 이런 데서 한 것도 또라이 같고, 왕세자급에 맞추는 의전도 준비 못 한 우리 연구원에 들이닥친 것도 또라이 같고, 쟤랑 같이 와서 왕세자 정복을 준비해 입혀줬을 시종들의 위장 건강을 생각하니 또라이 같고, 이 소식을 듣고 뒷목 잡을 국왕 전하 부부를 생각해도 또라이 같고…….
아무튼 또라이다.
내가 칼트를 얕보고 있었다. 이 정도 또라이일 줄 알았으면 어제 그렇게 도발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으윽, 으으윽…….
왕세자 다음에 다른 손님들이 차례로 들어오고 호명되고 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을 기세로 고뇌하고 있는 걸 보고, 벨키나가 걱정했다.
“어쩌지, 루민스? 왕세자 저하가 죄를 물으실까?”
“글쎄, 왕세자 저하는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분이라 인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루민스가 나에게 눈높이를 맞추듯 어깨를 숙이더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네핀, 괜찮아. 고의였던 것도 아니잖아. 저하께서도 이치가 통하는 분이면 이해하실 거야.”
우리 루민이의 말이 너무나 다정한데 미안, 고의였어.
그리고 저 제비 왕자가 이치가 통하는 놈……이라고 나도 생각했는데 오늘 또라이 짓 하는 거 보니 자신이 없어.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도 없으니 나는 그냥 창백한 얼굴로 끄덕이며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벨키나도 내 손을 꽉꽉 잡으며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해준다.
유일한 위안은 벨키나의 반응이 ‘어멋, 저 사람이 왕세자였다니 다시 보여……♡’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놀란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 벨키나의 마음만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감방에서 썩더라도 괜찮……, 아냐 안 괜찮아……. 아직 이 게임 엔딩 보려면 한참 멀었단 말이야…….
역시 죄를 물으면 자존심을 버리고 싹싹 비는 한이 있더라도 벨키나 옆에 남아주마.
오너라 제비 왕자……!
◇◇◇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고 나자, 단상에 칼트가 섰다. 원래대로라면 우리 연구원 원장님이 환영사를 하는 순서인데, 왕세자가 오는 바람에 모든 식순이 꼬여버렸다. 이 골치 아픈 상황에 대응하고 있는 의전 담당에게 그저 동정심이 든다.
“친애하는 왕립 마법 연구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다들 놀랐을 줄 압니다. 이는 갑자기 예정을 바꾼 내 책임이니, 여러분이 베푸는 대접은 그 어떤 것이라도 최대한의 환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의전 허접해도 문제 안 삼을 테니 안심하라는 소리였다. 그래,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
“원래대로라면 신분을 밝히지 않고 돌아볼 예정이었으나, 마법 분야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여러분에게 나도 최대한의 마음으로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기량을 충분히 펼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여러분이 보여준 결실 이상으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연구 결과가 괜찮으면 상정한 것 이상으로 예산을 끌어와 주겠다는 소리 같은데……, 너희 부모님이랑 합의는 된 사항이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아마 각 연구 담당 부서들의 계산속이 복잡해질 것 같다.
마찬가지로 연구 발표 담당인 루민스에게 소곤소곤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내일 연구 발표회장이 더 살벌해질 것 같네요. 루민스도 참석하지요?”
“응. 우리 부서 결과물은 실용성이 높아서 괜찮지 않으려나? 준비도 만전을 기해 놨으니 별일 없겠지.”
역시 우리 루민이는 걱정할 것도 없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내심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그야 파티 때문에 긴장한 게 아니라 루민이 얼굴에 당한 거였으니까…….
“호, 호호. 사람이 한계치가 넘어가면 모든 고뇌를 초월하게 된다고 할까요? 그런 거겠죠.”
“그렇군. 세네핀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초반에 사라지는 악역 캐릭터치고는 변화무쌍한 나날이긴 했다. 일관적인 캐릭터성……. 고민해야 하나.
입을 다물고 있는 내 반응을 오해한 것인지, 루민스는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나쁜 뜻은 아니야. 모쪼록 마음 가는 대로 매일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
……뭐지? 마음 가는 대로 깝죽거리는 건 좋은데 벨키나한테 이상한 짓 하면 썰어버릴 테다, 그런 건가?
괜찮아, 루민아! 누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고 너희 편이라니까!
그렇게 루민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칼트의 연설은 끝나 있었다.
요약하자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예산은 최대한 당겨줄 예정이고, 굳이 이런 촌 동네에서 처음 얼굴을 내민 건 근간 마법 학문이 국력을 증강하는 힘이라서 높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었다.
……누가 저런 헛소리를 믿을까 싶긴 하지만, 저런 헛소리라도 믿지 않으면 오늘의 또라이짓이 이해되지 않겠지. 저런 애가 차기 왕위 계승자라니 페이넌스 왕국의 미래가 암울했다.
그렇게 형식적인 식순이 끝나고, 식사가 차려져 있는 홀에서 더 넓은 댄스용 홀로 자리 이동을 안내받았다. 이제 인사를 나누고 댄스 타임이 올 것이다. 칼트가 바로 나한테 앙갚음하러 올까? 올 것 같긴 한데, 높은 사람들이랑 인사하느라 바쁘지 않을까? 그 전에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벨키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고, 행사장에서 일찍 퇴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니 칼트가 있는 이곳에 그녀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체념했다.
“왕세자 저하가 우리를 몰라보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 미모로 남이 몰라본다는 미래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 얼굴 정도는 화장발로 몰라보면 좋을 텐데, 아까 단상에 올랐을 때 눈이 마주쳤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게 구석 자리에 어정쩡하게 셋이서 서 있는데, 우아한 동작으로 칼트 왕세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딸꾹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자진 납세를 해야 하나? 아니면 저쪽에서 시비 걸 때까지 말 안 해야 하나?
온갖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빙빙 돌리고 있는 와중, 왕세자가 우리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전혀 뜻밖의 사람을 먼저 지명했다.
“……페이넌스의 광휘, 왕세자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루민스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나와 벨키나도 눈치를 보고 묵언으로 함께 인사했다.
“자네가 소가주 자리를 고사하고 마법 연구의 길을 걷게 되어 할데르프 공이 원통해했다 들었네. 소문의 천재를 직접 보게 되어 나야말로 영광이군.”
“가문을 더럽힌 누추한 이름입니다. 모쪼록 없는 자로 여기고 저하께서도 귀를 씻어 주시옵소서.”
잘난 여성향 연애 게임 캐릭터답게 우리 루민이는 사실 후계위를 버리고 순수 마법사의 길을 선택한 공자님이라는 설정도 있었다.
진도 그렇고 칼트도 그렇고 이 게임 전반적으로 캐릭터들이 설정 과잉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닌데, 우리 루민이는 멋있으니까 괜찮아! 흰둥이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제비 왕자 너는 용서 못 해.
“후후, 아직도 자네 부친은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니 자네가 체념하게나. 이쪽 레이디들은 자네의 벗인가?”
아, 루민스한테 먼저 인사하는 훼이크 넣고 이제 발동 들어가나요……. 나는 주먹을 꾹 쥐며 공격을 각오했다.
“네, 저하. 이쪽은 벨키나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세네핀 크롬웰입니다.”
루민스의 소개에 따라 인사하고 고개를 들자, 칼트의 붉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건 분명, 쥐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하면 잘 가지고 놀다 잡아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고양이의 눈이었다.
“……실은 내가 어제 길을 잃고 이 연구원 부지에 들어왔었네만.”
돌리지 않고 바로 치고 들어오겠다 이거지.
“이 두 레이디와 우연히 마주쳐서 말이지. 그때 큰 실례를 저질러버린 것 같네.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높은 신분인 내가 먼저 사과하는데 어떻게 나올래? 작전인 모양이다. 성격 나쁜 놈…….
나는 허리를 푹 숙였다. 자존심 따위는 버리기로 한 마당에 뭐가 어떤가.
“주, 죽여 주시옵소서, 저하. 왕세자 저하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만 경솔한 입을 놀린 죄, 천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저하…….”
사실 이 세계관은 정통 서양 판타지보다는 캐주얼한 편이라서 정말로 왕세자한테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고 죽을 일은 없는 법치 국가에 가깝지만, 오버를 떨어놔야 저쪽도 만족할 거 같길래.
고개를 숙인 나와 벨키나를 번갈아 보는 것 같던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하하, 둘 다 고개를 들게나. 특히 레이디 세네핀. 자네는 본인의 직장에 접근하는 수상한 이를 경계했으니 칭찬받아 마땅할 일을 한 거야. 수상한 차림을 한 내 잘못인 게지.”
콕 집어서 나를 지명하기냐……!
그때 입은 비싼 옷 보고 수상하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는 뜻이었다.
속으로 이를 갈며 나는 다시 한번 오버스러운 사과를 입에 담으려 했다.
“저, 정말……. 죽을죄를…….”
“저하, 그쯤 하시죠.”
내 어깨와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며 루민스가 제지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는 깜짝 놀라 루민스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안은 채 손을 쥐고 칼트를 향해 말했다.
“그녀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영민한 저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하의 영광된 존안을 뵙는 것만 해도 저희같이 미천한 자들에게는 분수에 넘치는 일입니다. 어제 일을 바로잡고 싶은 저하의 마음도 이해하나, 저하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서열 정리하면서 갈구는 짓 그만하고 적당히 좀 가라는 뜻이었다.
루민이가 이렇게 정치적인 수사를 늘어놓는 애던가……? 게임에서는 루민스가 정치적인 장면에 얽힐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뜻밖의 모습이다.
거기에 더해 옅은 회색에 가까운 밝은 의상의 루민스와, 검은색과 남색이 섞여 있는 어두운 정복의 칼트가 대비되어 더욱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만든다.
덕분에 루민이가 너무…… 멋있긴 한데…… 하필이면 중심에 내가 붙들려 있어서 되게 분위기 이상하고…….
주변에서 다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도망가면 안 되나?
“흠. 공자의 마음이 정히 그렇다면 내 알아두도록 하지. 나중에 또 인사 나누도록 하세.”
“망극합니다, 저하.”
“마, 망극합니다, 저하.”
“그리고, 레이디 벨키나.”
칼트가 벨키나의 손을 잡으며 정중히 청했다.
“괜찮다면, 댄스 타임에 그대의 첫 상대가 되는 영광을 허락해주겠나?”
저, 저, 저, 저 자식! 이게 목적이었어!! 내 입을 다물게 하고 이게 목적이었어……!!
상류층의 물밑 싸움에 기가 눌려 있었는지 조용하던 벨키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민하는 것 같다가, 작게 끄덕였다.
“……세네핀의 일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신다면, 얼마든지 받들겠습니다.”
벨키나아……!
이 언니는 감동하긴 했는데 안 돼, 그런 놈한테 팔려가지 마……!
“하하, 그건 내가 실례했던 일이니 용서하고 말 것도 없네. 그럼, 레이디도 이따 다시 보지.”
웃음소리도 유쾌하게 칼트는 다시 다른 사람과 인사하러 자리를 떠났다.
완벽한 패배였다.
“잘됐다. 세네핀. 그래도 저하께서 용서해주셨어!”
“세네핀, 놀랐지? 저하께서도 좀 놀리려는 거지 큰 의도는 없었을 거야. 안심해도 돼.”
다정한 위로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아 나는 벨키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어, 역시 놀라고 긴장했던 거지? 루민스, 얼른 세네핀 방에 데려다줘.”
“그래. 너도 저하랑 춤추다 드레스 찢어먹지 말고.”
“하여간 한마디를 해도……. 방에서 기다리는 진한테 안부 전해주고.”
영혼 없이 루민스에게 끌려가며 나는 그저 벨키나가 왕세자 버프를 받은 칼트와 춤추고 뿅 가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
회장에서 나와 정원을 이동하는 도중, 댄스 타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삼박자 왈츠였다.
아아, 왕세자가 바로 벨키나한테 댄스 신청하러 갔겠지. 방해도 못 하다니 분하고 원통하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아쉬운 마음으로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아쉬워?”
“네, 그야 그렇죠…….”
루민스의 질문에 별생각 없이 속마음 그대로 대답했다가, 아니 잠깐, 루민이가 물은 뜻은 그게 아닐 텐데, 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럼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루민스가 그렇게 청했다.
“……네?”
“아하하. 세네핀, 얼굴 빨개졌어.”
그야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자각이 있을 정도니 오죽하겠나!
오늘 이미 내 덕질 세포는 포화 상태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두근거리는 걸 진정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게, 저기. 제,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의 회색 재킷은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는 은색에 가까워 보였다. 이미 그 부분부터 이 공간이 비현실적이었다.
“네가 아쉬워 보이길래. 실은 연회장에 남아서 더 즐기고 싶은 것 아니었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쉬운 건 춤추는 게 아니라 벨키나가 칼트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염려되는데도 훼방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코, 이런 과분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저는, 벨키나 쪽이 마음 쓰여서…….”
그렇지만 지금은 계속 잡혀 있는 손이 신경 쓰이고, 표정 관리가 안 되고, 나와 달리 여유롭게 웃고 있는 루민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 모든 상황을 처리해야 하는 머리가 펑크를 일으켜서 정보 처리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다.
“세네핀도 왕세자 저하와 춤추고 싶었어?”
“네? 설마요.”
저도 모르게 나온 대답의 목소리 톤이 너무 냉정했던지, 루민스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네핀은 별로 춤추고 싶었던 게 아니구나.”
“그런 셈이죠…….”
“……곤란하게 됐네.”
“앗,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요……?”
걱정하면서 올려다보자, 루민스가 조금 쓸쓸한 얼굴을 했다.
“내가 세네핀이랑 춤추고 싶었는데, 핑계 댈 거리가 사라져서.”
“…….”
내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 있자, 루민스가 쓸쓸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싫어?”
“아, 아니요. 설마요!”
그런 얼굴로 싫으냐고 물어보는 건 반칙이잖아……!
“그럼 문제없겠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긴장할 일도 없고. 어때?”
“…….”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 대신 그가 내민 다른 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거기에 만족한 듯 루민스가 예쁜 미소를 흘렸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다음 가락으로 들어가는 소절에 맞추어 루민스가 먼저 한 발을 내디뎠다. 그 흐름에 따라 나도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이름 모를 꽃, 바스락거리는 풀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작은 꽃, 그 사이를 빙글빙글 돈다. 달빛을 받은 루민스의 보라색 머리가 반짝반짝 잔영을 남기며 나풀거린다.
아무도 없는 밤의 정원에서 풀벌레 소리가 왈츠 선율 가운데 어우러져 마치 이 공간만 단절된, 동화 속 세계 같았다.
뺨을 스치는 봄 특유의 약간 쌀쌀한 바람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나는 이곳에서 너무 과분한 것들을 받는 것 아닐까. 마음이 술렁이듯 불안해진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불안함을 지워내듯이, 다시 스텝을 밟았다.
◇◇◇
한 곡이 끝나는 타이밍에 맞추어 루민스가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에 맞춰 나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끈질긴 청을 내치지 않고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부, 부끄러우니까 그 정도로 해요. 루민스. 춤이 서투른 바람에 발 밟아서 죄송해요.”
“별말씀을. 이제 어깨에 힘 들어간 거 좀 풀렸어?”
“네?”
“아까, 연회장에 나오기 전에 왕세자 저하한테 책망을 들은 것 때문에 잔뜩 얼었었잖아. 그전에도 많이 긴장했었고, 울고 싶다고도 했고. 좀 마음이 편해졌을까 싶어서.”
그제야 루민스가 나에게 엉뚱하게 춤 신청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내 모습이 정서불안 상태로 보였을 테니, 그 마음도 모를 바는 아니었다.
정작 내가 긴장한 것도, 왕세자를 상대로 과하게 굽실거린 것도, 마지막에 아쉬워했던 것도 루민스가 생각하는 이유와는 다를 테지만.
“물론 세네핀과 춤추고 싶었다는 마음이 더 컸지만 말이야.”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답하며 루민스가 살짝 윙크했다.
뭐랄까 루민아……. 오늘 덕질적으로 마음속에 영구 보존해야 할 모멘트가 이미 포화 상태니까 귀여운 것도 작작 해주지 않을래……?
“가, 가죠! 루민스도 방에서 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역시 루민이를 위해서도 계속 의기소침해질 수는 없다. 어차피 왕세자가 강적일 거라는 건 처음부터 각오한 바 아닌가.
나는 다시 한번 ‘타도 제비 왕자!’의 의지를 불태웠다.
◆◆◆
기숙사 앞까지 세네핀을 바래다준 루민스는 세네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기숙사 문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시선은 자신의 손바닥으로 옮겨갔다. 어째서인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로, 루민스는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춤을 추는 동안 내내 세네핀과 닿았던 손이다. 오늘 하루 동안의 세네핀이 모두 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만 같다. 긴장한 나머지 싸늘하게 굳어 뻣뻣했던 감촉부터,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그의 손에 전해 왔던 온기까지. 물론 전부 착각이겠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낯설게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마른 한숨과 함께 뱉어내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세네핀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따뜻한 기색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복잡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중이었다.
루민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조금 어둑한 색으로 가라앉았다. 가닥가닥 뒤엉키는 감정의 갈래 중 몇 가지는 잡아 누르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몇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도무지 머릿속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한참을 굳은 것처럼 멈추어 있던 루민스는 어느 순간 홱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머뭇거림 없는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마법 연구원의 남성 기숙사였다. 거침없이 들어선 건물 내부는 고요했다. 기숙사의 마법사들이 모두 파티장에 참석한 탓에 복도의 등불도 꺼진 상태였다.
루민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작게 스펠을 외웠다. 흰 빛덩어리가 나타나 그의 주변을 돌며 주변을 밝혔다. 그는 마법의 빛으로 발밑을 비추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기숙사로 쓰이는 탑에서도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방. 급수가 높은 마법사에게만 주어지는 그 방은 웬만한 저택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크기였다. 하지만 그 사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루민스는 무심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방에 딸린 응접실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진이 인사를 보내 왔다.
“루민스, 다녀왔는가.”
“응.”
목에서 무성의하게 크라바트를 떼어내는 루민스를 잠시 바라보던 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었나?”
“왜.”
“어렴풋이 살기가 느껴진다만.”
재킷까지 벗은 루민스는 진을 일별했다. 진은 드물게 인간의 형태였다. 그를 바라보는 진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하긴, 넌 인간의 기척에 민감했지.”
“파티에서 살기를 느낄 만한 사건이라도 있었던 건가? 세네핀에게 별일 있는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
셔츠의 커프스 버튼을 풀며 루민스는 진의 건너편에 앉았다.
“가망 없는 일에 계속 농락당했던 주제에, 어쩌면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는 점이.”
“글쎄…….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포를 잃고 홀로 살아왔다만.”
“…….”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자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내 동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놓지는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루민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무언가를 짓씹는 것처럼 그는 고개를 숙였다.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진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마도 ‘희망’이라는 거겠지. 그 끝에 세네핀이나 그대들을 만났으니, 초라하게 연명한 삶에도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도.”
“?”
“세네핀이 특별한 거구나.”
“삶을 홀로 보내다 오랜만에 인간을 접하게 되어 느낀 착각일지도 모른다만. 어딘지 그립고 편하다는 느낌은 있다.”
“그래…….”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다시 표정을 지우며 루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그 희망이라는 걸 조금 믿어볼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좋다고 본다. 후회하는 것보다는.”
“……응. 너희는 항상 올곧네.”
“항상?”
루민스가 항상이라는 말을 쓸 만큼 이런 대화가 잦았던가 생각하며 진이 되물었다. 얼버무리듯 고개를 저으며 루민스는 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것보다 마나는 안 부족해? 임시로 내 거 줘도 되는데.”
그 손을 진은 단호하게 쳐냈다.
“그건 싫다.”
“……그런 점도 한결같다니까.”
루민스가 중얼거리며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06. 변수는 마음먹은 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환영 파티 다음 날부터 사흘간은 발표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법연의 발표회는 일종의 학회 같은 건데……. 중간중간 식사 자리를 겸한 교류회도 있고 보통 학회라고 부르는 행사들보다는 전반적으로 느슨한 일정이다.
물론 왕세자의 등장으로 식순이나 의전 제반 사항을 다시 체크해야 하는 담당 부서는 죽어나고 있겠지만. 발표 담당들도 그렇겠지만.
그렇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발표나 담당 업무가 없는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다른 부서의 연구 발표회를 청취하는 등, 연구원 부지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행동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동안 나오는 음식들도 맛있으니 금상첨화고.
즉, 나같이 최첨단 연구와 거리가 먼 말단 마법사에게는 거의 사흘 내내 놀 수 있는 꿀연휴 기간이 바로 발표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직 잡무밖에 없는 수습 마법사인 벨키나도 운신이 자유롭고!
그 발표회의 첫날, 나는 3일간 제비 왕자로부터 벨키나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아침부터 얼른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세네핀. 오랜만이다!”
……그 전에 들이닥친 건 흰둥이 쪽이었지만.
초인종을 못 누르는 진은 기숙사 문을 발로 다섯 번 두드리는 것으로 본인의 존재를 어필하는데, 오늘은 무척 이른 시각부터 찾아왔다.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로 얼굴을 못 봤던가요? 만 하루는 안 된 것 같은데…….”
“마음이란 것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빠르게도 한다. 나에게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상대성 이론 강의를 듣게 될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내가 흰둥이에게 마나를 제공하는 사람이니 먹이가 필요한 그에게는 절실한 일이겠지.
나는 진을 들어 올려 입가에 내 손을 대주었다. 그러자 진이 내 손바닥을 핥아왔다. 여느 때처럼 마나를 섭취하는 모양이었다.
만족할 만큼 마나를 섭취한 것인지 몇 번 내 손바닥에 코를 박은 다음 진이 질문했다.
“아침 먹으러 갈 건가?”
“그렇군. 루민스는 아침부터 바쁜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겠지……. 초엘리트인 루민이는 한가한 나와 다르게 아마 사흘 내내 발표 관련으로 붙들려 있을 것이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보는 게 좀 아쉽지만, 어제 과잉 수집한 마음속 루민스 할데르프 화보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으니까 괜찮았다.
흰둥이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올라타고, 나는 그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후, 벨키나의 방으로 출발했다.
◇◇◇
아침부터 어딜 간 걸까? 기숙사 벨키나의 방은 비어 있었다. 외출할 예정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설마. 제비 왕자 이 자식이 불러낸 것 아니야? 놓쳤다면 큰일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그녀가 있을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을 먼저 가봤는데 벨키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가본 곳은 현재 그녀가 소속된 부서의 연구실 쪽. 다행히 벨키나는 그곳에 있었다.
다만, 그쪽 부서 동료들이 벨키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해하는 것도 뭣해서 입구 근처에서 흰둥이랑 대기하고 있으려니 말소리가 들렸다.
“자기, 어제 저하하고 춤도 추고 좋겠더라~. 이제 꽃마차 타고 왕궁 가는 거 아니야?”
“그야 누가 봐도 그림 같은 미모니까 말이지. 부러워, 역시 미인으로 태어나면 이득이네.”
음……. 게임 초기 세네핀처럼 뻔히 보이게 갈구는 건 아니지만, 칭찬하는 척 돌려 까고 있네.
벨키나는 수습 마법사라는 입장상 여러 부서를 몇 주씩 돌아가며 전전하면서 그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세네핀한테 괴롭힘당하던 때는 고문서 해석 부서에서 일을 배울 때였고, 현재는 다른 부서로 옮겨가 일을 배우는 중이다.
명분이야 다양한 업무를 체험해보고 가장 적합한 부서를 알아본다는 것이지만, 신입 입장에서 한 부서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건 매번 새로운 스트레스를 받는 행위다. 거기에 얼굴 반반한 낙하산 아니냐고 은근히 꼬아보는 시선이 많으니 더더욱.
“아하하, 괜히 루민스 옆에 있다가 얻어걸린 거죠, 뭐. 저 말고도 다른 분들하고 춤 많이 추셨잖아요. 왕세자 저하는.”
“그래도 저하께서 가장 먼저 지목한 건 자기잖아?”
“벨키나 씨 나중에 높은 사람 되면 우리 잊지 말기다?”
아무래도 이야기 끝나는 걸 기다려봤자 갈굼 무한 루프일 것 같았다. 진도 동감인 듯 작게 속삭여 왔다.
“인간들도 참 귀찮게 살아가는군.”
“그러게요……. 이러다 끝이 없겠어요. 진, 먼저 들어가 줘요.”
한숨을 내쉬며 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이 평범한 강아지처럼 연구실 안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앗, 진……. 세네핀!”
“오호호, 벨키나. 오늘 일찍 나왔네요. 기숙사 갔더니 없어서.”
“오늘 좀 일찍 일어나서! 에헤헤, 둘 다 와줘서 고마워!”
자기에게 말을 걸던 남녀 사수에게 눈인사로 양해를 구하며 벨키나가 반색하고 진을 안아 올렸다.
“아아, 고문서 해석 부서의 그…….”
“안녕하세요. 세네핀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나를 보자마자 벨키나를 갈구던 이들이 굉장히 비웃는 얼굴로 성의 없이 까딱 인사를 했다.
뭐……. 세네핀이 예전에 하던 짓은 이래저래 소문나 있었을 거고, 그런 주제에 요즘 벨키나나 루민스랑 친한 척하는데 뒤에서 좋은 말 들을 리가 있나.
“세네핀 씨도 보셨나요? 어제 벨키나 씨가 저하랑 춤을 췄는데 정말 그림 같았어요.”
“어머나, 아쉽게도 어제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가느라 그걸 못 봤어요. 정말 아쉽네요.”
“벨키나 씨 같은 미인은 드무니까 말이지. 역시 왕세자 저하 정도 되는 사람 눈에 들려면 얼굴 예쁜 게 필수요소려나? 하하.”
아마 내가 자기들이랑 같이 속으로 벨키나를 밟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거겠지?
벨키나의 얼굴이 무언가를 참는 듯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냥 온화하게 끼어들어서 온화하게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거 참……. 상황이 안 도와주네.
“호호, 설마 왕세자 저하께서 외견 같은 것으로 관심을 가지셨겠어요? 분명히 벨키나가 가지고 있는 넘치는 마법 재능을 사전에 언질 받으신 거겠죠.”
그녀의 얼굴에 관심 가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 시점에서 칼트 왕세자의 속셈은 벨키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이용할까에 더 관심 있었단 말이지.
“네?”
“여러분도 벨키나와 같이 일해보셨으니 아시지 않나요? 여기 있는 그 누구랑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다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는데……. 어머나, 설마 그것도 못 알아보실 정도로 실력이 부족하셔서?”
“……저기요, 세네핀 씨.”
“설마~ 그 정도 얼치기가 저희 마법연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일부러 바보 취급하는 듯한 말투를 골라서 사용해봤는데 역시나 빡쳐 하는 얼굴이었다.
쟤네 심리야 뻔하지. 자기들보다 압도적으로 마법 재능이 있는 벨키나가 거슬리니까, 너는 그냥 얼굴이나 반반한 왕세자 장난감이라고 후려치는 거 아니겠어.
그런 니들 마법 실력은 알 법하다고 긁어주니 정곡을 찔려서 발끈한 거겠지.
에헷, 어제 왕세자한테 당한 걸 괜히 여기 와서 화풀이하는 것 같지만 나는 나쁘지 않으니 제비 왕자를 원망해라.
“……세네핀 씨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우습네. 자기야말로 벨키나 씨 질투해서 음습하게 괴롭혔다는 거 우리 마법연에 모르는 사람 있던가?”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건……!”
벨키나가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는 걸 제지하고 나는 활짝 웃었다.
“오호호, 네 그런데요. 그게 댁들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뭐?”
멍청한 얼굴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손을 뺨에 대고 상대를 바보 취급하는 듯한 포즈를 일부러 만들어 보였다.
“그건 저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생각해서 벨키나에게 사과했고. 우리 사이에 정리 끝난 문제인데 남이 뭐라 그럴 자격 있을까요? 그렇죠, 벨키나?”
“으, 응!”
“바보도 아니고 누가 그딴 걸 믿……!”
“그래요, 자기 열등감 인정하는 거 어려운 일이죠. 저도 그래서 예전에 그랬던 거구요. 하지만 인정하니까 편하더라구요. 여러분도 인정하는 게 어떨까요?”
진을 안지 않은 다른 쪽 팔로 벨키나와 팔짱을 끼면서, 약 올리듯이 최대한 얄미운 말투를 동원했다.
“비루하게 후배 재능 질투해서 갈구지 말구요. 인격 수양 노력하세요. 제가 좀 인격이 성장한 사람이라서 그 심정은 잘 모르겠지만요! 호호, 그럼 저희는 이만 식사하러!”
되는대로 퍼부어준 다음 나는 걸음도 상쾌하게 벨키나와 연구실을 나섰다.
……그나저나 캐릭터 일관성을 지키자고 얼마 전에 노력하기로 했는데 너무 내적 자아를 드러낸 거 아닌가?
“……아하하하!”
연구실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빠져나온 순간, 벨키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베, 벨키나?”
나도 깜짝 놀라고 벨키나 품에 안겨 있던 진도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벨키나가 웃느라 새어 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아니, 세네핀이 한 말이 재밌어서. 세네핀은 나한테 열등감 같은 거 없잖아. 아까 그 사수들 한 방 먹여주려고 더 세게 말한 거지? 고마워.”
“……예전에는 제가 그 사람들보다 더 당신을 괴롭힌 건 사실인데요.”
“으음~. 그렇지만 처음에 내가 이 마법연구원에 왔을 때 직장 생활을 잘 몰라서 건방졌던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세네핀이 벨키나를 괴롭힐 이유는 되지 않겠지만, 저렇게 너그럽게 넘어가는 건 벨키나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재능이라느니 뭐니 잘 모르겠어. 얼굴도 남들보다 괜찮긴 한 모양이지만, 어릴 때부터 이것 때문에 좋은 일 하나 없었고.”
넘치는 재능을 가졌지만 그게 별 쓸모가 없다니. 벨키나의 이야기는 보통 경우라면 다 가진 사람의 푸념처럼 꼬아 듣기 좋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녀 본인이 워낙 털털한 성격이라서인지 나는 그냥 순순히 그랬겠구나, 하고 공감하며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것들보다, 내가 세네핀에게 좋은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인 걸 실감할 때 무척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져. 방금 나를 감싸줘서 기뻤어.”
“무, 무슨 말씀을요! 저야말로 예전의 부끄러운 일들을 다 용서해준 벨키나가 정말 천사 같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벨키나가 칭찬해주니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얼른 대답을 돌려주는데 벨키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에헤헤, 아까 그 사수 마법사들이 더 기어오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무난하게 넘어갔으니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세네핀에게 감사해야겠네!”
……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대체 무슨 수단과 방법?’이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답을 듣기 무서워서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것보다 사수들 보고 기어오른다는 표현이라니, 벨키나, 게임 내에서 볼 때랑 캐릭터 달라지지 않았어?
“그, 그건 그렇고……, 어제 왕세자 저하와는 별일 없으셨나요?”
“별일이랄 거 있나? 춤추고 이야기 잠깐 나눈 다음에 나도 금방 돌아왔어. 너도 없고 루민스도 없어서 심심했는걸.”
그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칼트에게 반했다거나 특별한 썸씽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아침 먹으러 가지요. 손님들이 오셔서 평소보다 메뉴를 신경 썼다는 모양이랍니다.”
“흠. 나도 먹어주지 못할 건 없지.”
먹을 의지가 충만한 친구들이라 참 동질감도 들고 행복했다.
◇◇◇
벨키나의 부서 사람들에게 한바탕 쏘아주고 나왔지만 다행히도 그 후 한동안은 별일 없었다.
딱히 누군가가 벨키나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없었고, 경계대상 1호인 칼트도 자기 공무가 바빠서인지 멀리서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발표회가 진행되는 첫날 동안 나는 벨키나랑 진과 함께 먹방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노닥거렸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루민스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었다는 정도일까.
그래서 방심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발표회 이틀째, 오후에 루민스의 연구 발표를 듣고 벨키나와 수다를 반찬으로 저녁을 먹은 후 기숙사 방에 돌아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루민이 덕질 메모리를 되새기고 있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나 싶어 의아하게 여기며 문을 열어보니, 처음 보는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세네핀 크롬웰 님이시지요?”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갖춰 입은 품위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마법사 지정 케이프를 걸치지 않은 걸 보면 연구원 사람은 아니고, 이번 시찰단 손님 중 하나인 것 같다.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뭐? 무슨? 아니? 대체? 왜?
내 경악이 얼굴로도 전해진 것인지, 침착한 표정으로 여성이 답했다.
“죄를 묻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하셨으니, 긴장 푸시지요. 자세한 것은 직접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애초에 왕세자가 호출한 건데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나는 겉옷과 케이프를 챙겨 걸친 다음 여성을 따라 방을 나섰다.
귀빈들의 숙소까지 그녀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다.
왕세자가 나를 부를 이유가 있나? 대체 왜지? 굳이 이유를 예상해보자면 역시 며칠 전에 불경하게 굴었던 사건에 대해 왕실 모독죄로 벌을 내리는 정도인데, 죄를 물을 목적은 이미 아니라고 했지.
그렇다면 벨키나를 꼬시기 위해서 친구 포지션인 나에게 협조를 구한다거나……? 즉석에서 꿰어맞춘 추론이지만 그럴싸해서 조금 오싹해졌다. 어쩌지, 협조하는 척 망쳐놔야 하나?
그런 내 고뇌를 끝마칠 여유도 없이, 여성을 따라온 내 발걸음은 어느샌가 왕세자의 숙소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호화로운 응접실을 지나, 안쪽에 위치한 방문을 두드리며 여성이 말했다.
“음. 들라 하라.”
여성이 작게 끄덕이며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원래 서재로 쓰이는 곳인 듯, 책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문서를 작성하고 있던 칼트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정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현재는 굉장히 수수한 검은 셔츠만을 입고 있다. 워낙 잘생긴 얼굴이라 옷이야 뭘 입든 빛나고 있다만…….
“……왕국의 자랑이자 빛의 현신, 왕세자 저하를 다시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딱딱한 인사는 됐고. 일단 저쪽에 앉지.”
테이블을 가운데 둔 소파를 가리키며 칼트가 짧게 지시했다. 나는 치맛자락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입구에 가까운 소파를 골라 얌전히 앉았다. 그 건너편에 풀썩 앉으며 칼트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 30초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이게 대체 뭐 하는 걸까. 왕세자가 상대니 무시하고 나가버릴 수도 없고.
그렇게 어색하고도 세상에서 제일 긴 것 같은 30초를 보내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
“……넌 대체 정체가 뭐냐?”
“넵?”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첫마디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는 반응밖에 돌려주지 못했다.
“저, 정체라고 하시면……. 크롬웰 가 출신이고, 이 연구원의 6급 마법사인…….”
“아니, 그건 됐고. 그 정도 호구 조사는 다 해놔서 나도 알아.”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칼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쏘아보았다.
“이딴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사람을 한둘 상대해 보는 게 아니라서 뻔히 보여. 처음에 산책로에서 만났을 때 느낌이 왔단 말이야. 너, 무척 사람을 시험하는 눈이었거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이후 왕세자 자격으로 나타나 봤더니, 이것 봐라? 다른 애들한테 보호 당하는 척, 나한테 미안해하는 척하면서 실은 조금도 날 무서워하지 않더란 말이지.”
“…….”
“대답해. 너, 처음부터 내가 왕세자인 걸 알고 있었지?”
◇◇◇
이래서 내가 제비 왕자가 싫었던 거다…….
좀 편하게 가게 해주면 안 될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상대로 아닌 척 가증을 떨어봐야 인상만 나빠질 거다. 그냥 각오하자.
“……시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건 사과드립니다, 저하. 딱히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수도에서 저하의 존안을 확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하를 알아뵐 수 있었던 것이고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알면서도 나를 모른 척 한 건 무슨 의도지?”
속으로 끙, 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반쯤 솔직하게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하의 여성 편력에 대해 소문을 들었습니다. 순진한 벨키나가 저하에게 마음을 빼앗겨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금 방벽을 치고자 했지요. 넓으신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그것참 뜻밖의 말이군.”
내 대답에 칼트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뭐 어쩌겠나. 이미 엎어진 물인데 배 째야지.
그건 그렇다 치고, 겨우 이런 걸 확인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내가 자기 정체를 미리 알았던 사유를 더 꼬치꼬치 캐려나? 단순히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롭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자세를 바로 하더니 칼트는 말투를 왕세자답게 가다듬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으나, 현재 수도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기량이 뛰어난 마법사를 엄선하여 불러들이고 있네.”
나는 뜨끔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처음 듣는 소리인 척 표정을 관리했다.
수도의 상황은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다름 아닌 <아란다스트 사가>의 본격적인 모험이, 바로 마법사들을 수도로 모아들이는 이벤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칼트는 무척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이 마법연구원 인원 중에 내정된 것이 2급 마법사 루민스 할데르프. 그리고 수습 마법사인 벨키나였지.”
“……그랬습니까.”
“루민스 공자는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레이디 벨키나 쪽은 이번 시찰회 때 겸사겸사 그 역량을 확인할 예정이었네.”
그것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게임의 흐름으로 따지면, 이 둘은 얼마 뒤 마법 연구원을 떠나 수도 홀르나로 가게 된다.
“그 산책로 때 일 말이네만, 사실 나는 비공식적으로 루민스 공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시찰회 중에는 이래저래 바쁠 것 같아 사전에 확인해둘 생각이었거든.”
“……아.”
어쩐지, 내가 왕세자한테 벌 받지 않을까 벨키나가 걱정해줄 때 루민스 반응이 묘하게 여유롭더니만. 이미 만나서 그랬던 거구나.
“그런데 말이야, 당연히 수도로 떠나는 걸 응낙해 주리라 생각했던 공자가 말하더군. 조건이 있다고.”
“조건이요……?”
“세네핀 크롬웰. 자네를 선발 인원에 포함하는 조건이면 받아들이겠다고.”
“……네???”
“그래. 나도 처음에 자네처럼 그렇게 기막힌 반응이었다.”
손가락으로 내 쪽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곤 칼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자네가 혹시 우리가 놓친 우수한 인재였나 조사도 해봤지. 그러나 자네를 조사해봐도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소질을 가진 마법사로, 특기할 만한 내용이 없더군.
“……송구스럽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왜 루민스가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 무게도 없던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존재는 그냥 초반에 반짝 등장했다가 끝이다.
수도로 떠나는 것은 루민스와 벨키나 두 사람뿐. 그런데 나까지 동행하는 조건을 걸었다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조사 보고서의 마법 사진을 보니 산책로에서 나에게 시비를 건 그 여성 아닌가. 아무래도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싶어 왕세자로서 정체를 드러내 보았으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자네는 내가 왕세자인 걸 알고 시비를 걸었고, 그 이후에도 나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희한한 존재였다.”
나는 치맛자락을 쥐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거기에, 댄스가 끝난 후 레이디 벨키나한테도 해당 건에 대해서 언질을 주었는데, 그녀도 똑같이 말하더군. 세네핀 크롬웰과 같이 가는 게 아니면 싫다고.”
“……네?”
“이러니, 자네의 정체를 수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게 무리 아닌가?”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비 왕자를 도발한 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다.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칼트를 도발했든 도발하지 않았든,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되는 결과는 동일했겠지.
왕세자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라의 중대사를 위해 필요한 두 사람의 목줄을 쥐고 있는 듯한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저하께서는 믿어주시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무언가 의도가 있어 저하를 도발하고 두 사람의 수도행을 막은 것은 아닙니다.”
대륙 멸망의 위기를 구할 두 사람의 첫걸음인데, 내가 수도행을 막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떠나기 전에 루민스 루트 확정을 위해서 다른 캐릭터를 배제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자네 말대로 믿기 어려운 말이군. 나에게 두 사람을 보내는 대가를 원하는 것 아닌가?”
“송구하오나.”
스스로 생각해도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알페이넌스에 맹세코, 저하를 상대로 무언가 거래를 걸거나 두 사람을 이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이 수도로 떠나는 문제를 저와 상담한 일도 없었습니다.”
“흐음.”
이 나라의 시초룡에 대고 맹세하는 건 거의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위력이 있었다. 물론 사기꾼이라면 시초룡의 맹세도 쉽게 써먹을지 모르나, 사기꾼이라도 굳이 왕세자를 상대로 그런 불경을 저지를 메리트는 없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서인지, 칼트도 팔짱을 끼며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자세를 보였다.
“저하께서 말씀하시는 수도의 일도, 벨키나와 루민스가 기량을 인정받아 활약할 기회를 얻은 것이라면 저는 오히려 기쁘게 응원하고 두 사람의 등을 밀어줄 것입니다.”
“그럼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두 사람이 그저 자네가 함께 가기를 원하는 것뿐이라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긴 하나, 그들에게 있어서 저는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타인에 불과한데…….”
마법연의 엑스트라로서 두 사람을 잘 붙여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수도로 떠나기 전까지 루민스 루트를 확정시키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그 역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원작의 흐름이 어디까지 꼬였는지 나도 알기 어려웠다.
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칼트가 웃었다.
“글쎄, 방금 그건 그들이 들으면 섭섭해할 것 같은데.”
“네?”
“뭐, 자네 말은 반쯤 믿도록 하겠네. 아직 의문은 남아 있으나 그건 나도 자네를 차차 알아가면서 풀도록 하지.”
“네……. 네?”
“밤이 깊었으니 이만 들어가게나.”
더 가타부타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칼트는 그렇게 대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다시 예를 표하고 왕세자의 숙소에서 물러나 기숙사로 돌아갔다.
◇◇◇
“……뭐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 대체 뭐지 싶었다.
루민스와 벨키나의 수도행은 나로서도 어떻게 대처할지 좀 고민하던 이벤트였다. 모험의 시작을 위해 두 사람은 수도로 떠날 테고, 마법 능력이 미천하여 선택받지 못한 일반인인 나와는 관계없는 무대에서 활약을 시작할 테니까.
그래서 가능하면 벨키나가 수도로 떠나기 전까지 루민스 루트를 확정 짓고 싶었다. 내 임무를 완수한 다음 두 사람의 러브러브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수도행을 배웅해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벨키나와 루민스는 러브러브라기보다는 친구 사이의 모습이고, 호감도 창을 볼 수 없으니 잘 되어가는 건지 판단하기도 어렵고…….
그런 와중 별안간 두 사람이 내가 없으면 수도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 그보다 저 두 사람이 수도로 안 가면 대륙이 멸망하잖아. 이게 무슨 일이야.
호수가 파괴되어 그 영향으로 엉뚱하게 일찍 동료가 된 진도 그렇고, 원래 게임 시점보다 빠르게 왕세자라는 정체를 밝힌 칼트도 그렇고, 플래그를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게임의 원래 흐름과 달라져서 종잡을 수 없어졌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덜컥 겁이 났다. 벨키나가 이대로 세계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때문에 루민스나 벨키나, 진이 목숨을 잃거나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흰둥이에게는 실제로 목숨의 위협까지 있지 않았는가.
“아냐, 정신 차려야 해.”
이미 원작 게임의 흐름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내 역할이 크다. 열심히 고민해서 올바른 흐름으로 끌고 가야 하니까.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인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루민스를 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벨키나가 루민스와 맺어지는, ‘루민스 루트’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니 나는 앞으로도 두 사람 사이를 응원하고 그 흐름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요 이벤트를 뭉개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최악의 경우 벨키나가 다른 공략 캐릭터 루트로 가거나 게임에서 겪어보지 못한 엉뚱한 흐름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 대책을 생각해야 했다.
루민스가 어느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죽는지는 알고 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사망 플래그들을 막을 수 있는 강점이 된다. 흐름이 바뀌었어도, 다가올 사건들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마법연을 그만두고 수도로 거처를 옮겨서 일을 새로 얻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서 케어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튼 당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을 설득하여 수도로 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수도로 떠나지 않으면 루민스 한 명만 죽는 게 아니라 인간 종족 전체가 멸망하게 된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내일 루민스도 오랜만에 점심 식사 같이하면서 얼굴 비추기로 했으니까, 다 같이 자리에 있을 때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
다음날 점심, 그렇게까지 오랜만은 아니었으나 심정적으로는 아주 오랜만에 네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루민스는 정말 바쁜지, 품에 잔뜩 자료 뭉치를 들고 와서는 옆에다가 내려놓았다.
“루민스 발표, 어제로 끝 아닌가요?”
어제 오후에 들었던 발표 내용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너무 고차원의 연구 내용이라서 솔직히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친구의 발표니까 벨키나, (품속에 숨겨놓은) 진과 함께 발표를 참관하러 갔었다. 내용은 못 알아들었어도 스마트 섹시한 루민이를 잔뜩 봐서 좋은 시간이었지.
“내 발표는 끝인데, 다른 부서 발표 자료 검토를 계속 요청받고 있어서.”
다 제비 왕자 때문이구나. 까마득히 높으신 분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다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표를 준비하고 있겠지. 그 영향으로 루민스는 남의 것까지 자료 검토를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루민이 이렇게 착해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헤쳐나가려고……!
나와 같은 마음인지 벨키나가 반쯤 아이스크림을 떠먹은 아포가토를 휘휘 저으며 볼을 부풀렸다.
“애초에 돈 보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뭐.”
“크~. 돈 많은 집 아들이다 이거지. 더럽다 더러워.”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우리의 마나와 같다 했다. 얻을 수 있을 때 많이 얻는 것이 이득 아닌가?”
……요정 비슷한 존재가 저렇게 세속적인 소리를 해도 되는 거야?
“뭐가 되었든 루민스가 필요 이상으로 혹사당하는 건 우리 모두 원하지 않으니까요. 다들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건강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쉬엄쉬엄해요.”
“그러게, 얼굴도 못 보고 왜 이러고 있나 화가 나서 나도 슬슬 걷어차려고.”
내 쪽을 보고 애매하게 웃으며 그가 대답했다. 루민이가 자기 입으로 화났다고 할 정도면 다들 정말 심하게 부려 먹었나 보다.
“아, 그런데 세네핀. 오늘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남아 있는 아포가토를 한입에 꿀꺽한 벨키나가 입가를 닦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돌직구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실은 어젯밤에 왕세자 저하가 부르셔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뭐!? 별일 없었어, 세네핀!?”
벨키나가 바로 내 손을 잡으며 걱정해왔다. 아, 아니. 걘 나한테 관심 없단다. 언니는 네가 더 걱정인데…….
“무슨 용건이었을지 짐작은 가는군.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하라고 했는데.”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루민이가 아까보다 더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아, 그게요. 어제 저하한테 들은 바로는, 조만간 왕실에서 기량이 뛰어난 마법사들을 엄선해서 데려간다는 모양인데요……. 벨키나와 루민스, 두 분이 내정되었다죠?”
그 말에 벨키나는 ‘난 또 뭐라고.’ 하는 얼굴로 시시하다는 듯 빈 잔을 두드렸고, 루민스는 어딘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을 펴지 않고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왕세자 저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두 분 다 세네핀 크롬웰을 지명하여 동행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뭐야, 루민스도 그랬어?”
“너는 예상대로였군.”
거기까지 듣고 나서 혼자 소외당하는 화제가 못마땅했던지 진이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벨키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솔직히 난 별로 관심 없어. 소질이 뛰어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햇병아리 마법사인걸. 마법연에서 몇 년 더 공부하는 게 낫지 않나?”
“왕실이 주체가 되어 정예 마법사를 뽑는다는 것부터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 일이지. 난 행위 마법보다 연구가 더 체질에 맞는 사람이고, 마법연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어서 욕심 없어.”
근미래에 대륙의 희망이 될 인간들이 포부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유를 들으니 안심이 되긴 했다.
“전 또 뭐라고. 두 분 다 개인 사정으로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냥 핑계로 제 이름을 댄 것이었군요? 오호호,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저하께서는 제가 두 분을 조종하고 있는 거 아닌지 의심하셨다고요.”
“그야 조종은 아니지만…….”
“저는 아깝다고 생각해요. 두 분이 수도에 가서 활약하면 멋질 것 같거든요.”
벨키나와 루민스가 서로 마주 보더니 조금 미묘한 얼굴을 했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고 먼저 질문을 한 건 벨키나였다.
“세네핀은 계속 마법연에서 일하지 않아?”
“그렇지요, 저야 그렇게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선발 인원에 뽑힐 수도 없고요. 하지만 저는 두 분이 본인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곳에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조금 망설였다. 같이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도 않은 주제에, 이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벨키나와 루민스는 제 자랑스러운 친구니까요.”
내 말을 듣고 벨키나는 턱을 괴며 “좋긴 한데 얘랑 동급…….”이라고 무언가 실망하고 있었고, 루민스는 의미 모를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다른가?”
거기에 더해 흰둥이가 강아지 상태로도 울상인 얼굴을 해서 “어머나, 당연히 진도 제 자랑스러운 친구죠.”라고 대답해주었다. 안심했는지 품으로 파고드는 진을 토닥토닥 쓰다듬어주자 그걸 보던 벨키나가 중얼거린다.
“나 조금 살의 들었어.”
“우연인데, 벨키나. 나도 그래.”
뭐, 뭐야, 벨키나? 아니, 루민스까지?
좋은 봄 날씨에 어째서인지 천둥우를 몰고 오는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 나는 말을 잘못 꺼냈나 쩔쩔맸다.
“미, 미안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했나요?”
“아니야, 세네핀! 그것보다 음……. 네가 원한다면 나도 가고 싶긴 한데, 세네핀이랑 떨어지는 건 쓸쓸해.”
“호호, 그건 저도 그래요, 벨키나. 그래서 실은 어제 왕세자 저하께 이야기를 듣고 고민했어요. 저도 수도 쪽으로 거처를 옮겨보는 건 어떨까 하고.”
그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과 한 마리가 일시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수도까지 이사가 쉬운 일은 아니고, 거기서 일을 구하기도 어렵긴 하겠죠. 친구 따라 너무 충동적 아닌가 싶지만……. 수도의 신학문을 접해볼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께 폐만 아니라면…….”
“수도 갈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루민스였다. 벨키나가 볼을 부풀렸다.
“앗, 치사하게 먼저! 세네핀, 나도 갈 거야! 가서 공부하지 뭐!”
“어머, 그런가요! 벨키나와 루민스는 정말 멋진 콤비로 활약하실 수 있……”
“그딴 건 됐고! 그래, 수도 가서 나랑 같이 살자, 세네핀.”
“은근슬쩍 흑심 드러내지 마라, 벨키나. 거처는 걱정할 필요 없어. 수도에 우리 본가가 있으니 정식으로 초대하지.”
“가소롭군, 인간들. 나는 원래 세네핀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자꾸 그러면 억지로 루민스나 내 마나 먹여서 납치하는 수가 있어, 진.”
“아,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게 뭐가 중요해!”
“저하께는 내가 이야기해놓을게. 앞으로 너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소리도 다시 한번 단단히 박아두도록 하지.”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벨키나와 루민스의 호흡이 척척 맞는 데다 결과적으로 세계를 구하는 여행의 첫걸음을 떼었으니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으음……, 음……?
이 석연치 않은 기분이랄까 예감은 칼트 왕세자의 폐회사 때 뒤통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
사흘간의 발표를 마무리하는 폐회식은 오후 3시부터 진행되었다.
페회식장에서는 환영 파티 때와 다르게 부서별로 자리가 배치되었고, 내 자리는 어쩔 수 없이 루민스나 벨키나와 떨어지게 되었다. 혼자가 된 기분으로 덩그러니 앉아 폐회식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게 좀 아쉬웠다.
몇몇 높은 분들 말씀이 이어지고, 드디어 마지막인 칼트의 폐회사 차례였다. 뻔한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고, 나는 테이블에 앉은 채 지루하게 그가 단상에 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폐회식이기 때문인지 칼트는 첫날처럼 정복을 입지는 않았으나, 금술로 된 화려한 휘장과 망토는 여전히 두른 채였다. 옷 무겁겠네.
예상대로 왕세자의 폐회사는 그간의 환대에 감사하며 놀라운 연구 성과를 보게 되어 기뻤다는 이야기였다. 무난하게 끝나겠다 싶어 하품을 참고 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한편, 일부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나, 현재 페이넌스 왕실에서는 중대 과업을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 인재들을 엄선하여 모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연구원에서도.”
저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지? 극비리에 모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이 연구원에서는 누가 뽑혀갈지 이미 내정되어 있다. 굳이 그 이야기를 모든 연구원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 과업의 성공을 위해 다양한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페이넌스의 명운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고귀한 계획 ‘신의 그릇 회수’에 참가하여 자신의 이름을 떨쳐 보고 싶다면, 모쪼록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주십시오.”
칼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듯, 마법 빔이 만들어 낸 커다란 화면이 허공에 떠올랐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지도로, 수도에서 멀리 동쪽에 있는 연구원 부근을 강조해서 보여주었다.
“마법 연구원 서쪽에 있는 미혹의 골짜기. 이곳에서 일정 시기에만 피는 ‘미혹 백합’.”
화면은 미혹 백합의 자료 사진으로 넘어가 있다. 백합의 형태이지만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아이러니하고 판타지 세계의 식물다운 외견이었다.
“이 백합을 구근째로 가장 먼저 가져온 세 분에게, 본 계획의 참가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사교적인 미소를 띤 얼굴로 자신의 용건을 마친 후, 칼트는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이쪽을 향해 웃어 보인다.
이게 뭐야. 저 제비 왕자가 지금……?
마법연구원에서 차출될 예정이었던 인원은 벨키나와 루민스, 두 명뿐. 특별 취급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두 명이던 인원이 세 명으로 변경된 것은 루민스와 벨키나가 나를 지목했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런데 칼트는 그들의 희망대로 순순히 나를 동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해두었던 두 명의 자리조차 공석으로 만들어버리고 나한테 선언한 것이다.
―정말로 그 두 명과 동행할 자격이 있는지 너 스스로 증명하라고.
그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내 말의 진정성을 확인하려던 것이든, 혹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명의 입에서 공통으로 언급된 나라는 존재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든.
그러니 세 명이라는 숫자부터가 나를 향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도발은 나에게 현실을 일깨우게 했다.
이번에 내가 수도로 이사해서 벨키나와 루민스를 쫓아간다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본격적인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이 시작되면, 루민스와 벨키나, 그리고 진 역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그들이 수도에서 첫걸음을 떼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무슨 명분으로 쫓아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친구라는 핑계로 함께할 수 있을까?
그들이 세상을 구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기한은 내일 오전 9시까지. 미혹 백합을 들고 내 거처로 찾아오면 됩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이 마법 연구원에서의 인원은 공석으로 하겠습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뭘 아냔 말이다. 나는 루민스도, 벨키나도, 진도……, 정말 얄밉기 그지없는 제비 왕자 너조차도 살아남는 엔딩을 보고 싶을 뿐인데.
왕세자의 폐회 선언이 끝나고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벨키나와 루민스에게로 달려갔다.
‘미래를 안다’는 힘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07. 자리와 역할
폐회식장에서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어서, 세 사람을 내 방으로 불러들였다. 먼저 찾아온 벨키나와 함께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윽고 루민스도 진과 함께 도착했다.
나는 한자리에 모인 그들에게 말했다. 미혹 백합을 가져와 왕실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세 명 중 한 명의 자격을 얻겠다고. 단순히 친구로 수도까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내 결심의 무게를 모두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루민스였다.
“솔직히 말하면, 반대하고 싶어. 칼트 왕세자가 저렇게 나온 건 괘씸죄도 있었다고 보거든. 그러니까 나와 벨키나 자리마저 날려버린 거겠지.”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일까, 루민스의 목소리에서 영혼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빡침이 느껴졌다. 그것보다, 방금 왕세자한테 저하 존칭 빠지지 않았니…….
“맞아, 맞아. 어차피 나랑 루민스는 수도 가는 거 별로 미련도 없었다고. 이쪽에 굽히고 싹싹 빌면서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왜 우리 세네핀한테 시비 거는 거래?”
내 어깨를 옆에서 감싸 안으며 벨키나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마나만 충분하면 저런 인간의 왕자 정도, 목숨을 쓱싹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건 정말로 큰일 나니까 관둬요, 진…….”
한숨을 내쉬며 발밑에 있는 흰둥이를 말렸다.
어느새 이 공간에서 왕세자에 대한 형식적 존중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설마 이러다 왕실 모독죄로 다들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뭐, 그건 그렇고.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의 내용상, 칼트 입장에서도 루민스와 벨키나를 얻지 못하는 건 엄청난 손해일 거다. 그걸 감수하고 이런 갑작스러운 도박을 걸어온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 역시 이 도박에서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벨키나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진을 향해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찌푸린 얼굴의 루민스에게는 설득하듯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건 바꿔 생각하면 기회라고 생각해요. 수도에 가면 신학문을 접한다느니 그런 소릴 했지만, 사실 그런 건 다 핑계고…….”
고마워, 칼트. 그래도 네가 계기를 준 덕분에 이 말을 입에 담을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어.
“당당하게 그 계획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걸요.”
아까부터 까칠해 보이던 루민스가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 눈이 가늘어지며, 서서히 미소를 만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민이의 웃는 얼굴이다.
“……세네핀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함께 있고 싶은 거구나.”
“당연하죠!”
내가 굳건하게 끄덕이자 루민스도, 벨키나도, 진도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도 그래! 솔직히 그냥 이 마법연에서 계~속 세네핀이랑 평화롭게 지내도 상관없지만…….”
“세네핀 그대가 원한다면 우리도 그대가 가는 곳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여러분…….”
저도 모르게 조금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면, 나, 이 세계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지. 또 그렇게 울어버리지는 말자. 그때와 지금은 눈물의 이유가 좀 다르겠지만.
이 세계에 왔던 초기에는, 여기가 게임 세계라는 생각뿐이라 나 자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실감하지 못하고 한 발 건너 방관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하지만 여러 사건을 겪어오며 서서히 그 마음은 바뀌었다. 이곳은 그저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NPC만 있는 게임 세계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내 친구들이 있는 현실이었다.
내가 빙의한 이 몸은 보잘것없는 들러리 악녀 역할에 불과하고, 대단한 능력도 없다. 하지만 뭐 어때. 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의욕이 솟았다.
게임 진행이 꼬여서 내가 알던 미래와는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가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도, 어제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함께 힘내요!”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그들도 나를 아껴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마음이 벅찼다.
◇◇◇
방침을 정하고 나서 행동은 빨랐다. 폐회식이 끝난 시점은 오후 4시였고, 아직 봄이라 낮이 짧기에 해가 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벌써부터 미혹 백합을 가져오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낮았지만 최대한 빠르게 미혹의 골짜기로 진입할 필요가 있었다.
각자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 공터에서 일행들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나와 벨키나였다.
그러고 보니 이건 벨키나와 루민스를 붙여줄 기회!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벨키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미혹의 골짜기에는 반드시 2명이 짝을 지어 들어가야 해요. 안 그러면 골짜기가 튕겨내거든요.”
칼트 왕세자가 이번에 조건으로 내건 미혹 백합은 게임 진행 중간에 구해야 하는 퀘스트 아이템이다. 미혹의 골짜기는 <아란다스트 사가>에서 벨키나의 초반 레벨업 노가다 장소이기도 했다. 여러 번의 반복플레이 덕분에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이 던전에 오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일지도.
하지만 애초에 ‘3명’을 뽑는데 2명씩 짝을 지어 들어가야 하는 던전을 고르다니. 제비 왕자, 진짜 성격 보여…….
이번 일에 관심이 생긴 다른 마법사들도 팀을 만드는 데 고민 좀 하고 있을 것이다. 고생은 같이 했는데 둘 중 한 명은 선발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빈자리 하나를 채워줄 진이 있으니 별반 문제는 없지만 말이다.
“호호, 그래서 말인데요. 벨키나와 루민스가 같이 가고, 제가 진과 함께 가는 게 어떨까 해요.”
나는 착실한 공략 플래그 세우기를 잊지 않았다고!
실제로 게임상에서도 벨키나는 루민스와 짝을 이뤄서 미혹의 골짜기를 탐색했으니까. 원래 던전에서 서로에게 등 뒤를 맡기면서 애정이 싹트는 게 클리셰 아니야?
“그거 말인데, 세네핀.”
잠시 망설이다가 벨키나가 결심한 얼굴로 끄덕인 후 말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내가 세네핀이랑 가고 싶어. 그렇지만 나도 아직 햇병아리거든. 세네핀한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내가 원망스럽고 화가 나.”
“벨키나……?”
“그러니까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을게!”
“그게 무슨,”
“세네핀.”
진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러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옷을 갈아입고 온 진이 인간 형태로 모습을 보인다.
흐르는 듯한 은발, 고혹적인 에메랄드 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훌쩍 커져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키는, 다름 아닌 청년 모습을 한 성인체였다.
“……지, 진이에요!?”
“이 모습으로 보는 건 처음이군.”
진은 연두색 눈을 깜빡이며 뒷말을 이었다.
“나도 그대와 함께하고 싶지만, 이번 도전만은 전력을 다해야 할 터. 벨키나는 기술적으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나, 마나 보유량으로는 루민스도 능가한다. 이번에 한해서 나는 그녀의 마나를 받아 내가 지닌 능력을 총동원할 셈이다.”
“응, 그렇게 됐어. 나는 진이랑 호흡 맞춰서 백합 구근 꼭 가져올게. 루민스랑 세네핀은 합격했는데 나만 남는다거나 하는 볼썽사나운 꼴 보이기 싫으니까!”
그게, 아니, 얘네들 나 없는 새 언제 이야기 맞춘 거야?
그보다 진이 성인체가 되어서 저렇게 완전 짱 멋있어졌는데 (물론 누나는 너뿐이야, 루민아) 벨키나랑 같이 던전까지 뚫는다면, 어딜 봐도 사랑~이 시작~되는 플래그 아니야?
루민스와 벨키나를 붙여 놓으려던 나의 주식이 이렇게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다니이…….
아냐, 그보다 잠깐.
진과 벨키나가 짝을 맺어 들어간다는 것……,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와 짝이 되는 건…….
한 박자 늦게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을 채 소화할 시간도 없이, 내 어깨에 살며시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그렇게 됐으니까, 세네핀.”
다정하고도 단호한 그 목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민스의 목소리였다.
◇◇◇
짝이 정해지고 서로의 건투를 기원한 후, 우리는 둘씩 골짜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미혹의 골짜기는 입구에 사람이 들어서는 순간, 2명 단위로 잘라서 독립된 공간으로 데려간다. 2의 배수로 4명이나 6명이 동시에 들어간다고 해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고 2명씩 나눠진다는 소리다.
먼저 골짜기로 진입한 것은 진과 벨키나 2명. 두 사람이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일종의 워프 같은 느낌?
<아란다스트 사가> 덕분에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먼저 걸음을 옮긴 진과 벨키나가 갑자기 사라지는 건 좀 놀라운 경험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진이 해주었던 설명에 의하면 골짜기의 이런 현상은 자연 마나의 마법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인간과 대립하는 종족인 ‘마정령’의 영향이라던가. 으스스한 이야기다.
새삼스럽지만 북쪽에 있던 고요의 호수도 그렇고 미혹의 골짜기도 그렇고 이 마법 연구원 위치, 뒤숭숭하지 않아?
……라고 냉정하게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지만 골짜기 안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전혀 냉정해지지 못했다.
바깥과 분리된 공간에…… 루민이와…… 단둘……. 으아아‥….
탈출한 정신이 돌아온 건, 골짜기에 진입하자마자 루민스가 바로 스펠을 발동한 덕분이었다.
영창이 시작되자 루민스의 손바닥 위에서 푸른빛의 줄기가 서로 얽혀 사슬 모양을 만들었다. 루민스가 앞쪽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 빛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지금 그건……?”
“우선 전체 지형을 파악하려고. 미혹의 골짜기는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지형 구조가 변하니까.”
루민스의 설명대로, 미혹의 골짜기는 사람을 2명씩 따로 떼어 놓는 것도 까다로운 던전인데 들어갔을 때의 구조마저 랜덤이었다. 골짜기라는 특성상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개천을 따라 걸어가면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주변에 어떤 귀찮은 트랩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형 파악이 끝났는지 손을 저어 스펠을 해제시키고 루민스가 설명했다.
“특수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10타헤르 정도 개천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올 거야.”
정확히 표현하자면 출구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온 골짜기 입구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분명히 입구로 들어왔는데 어느새 골짜기 한복판으로 이동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판타지 세계관이었다. 호수가 마물인 시점에서 딴죽 걸 것도 없지만.
그나저나 타헤르면 지구의 km랑 비슷한 단위니까 10km를 걸어야 하는 건가. 게임상에서야 거리가 얼마라고 나와도 내 다리로 걷는 게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10km를 실제로 걸어야 한다니 조금 심란했다.
“……미혹 백합은 바위 사이에서 서식했죠?”
“응. 바위 사이의 좁은 틈새로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밀어내며 자라는 강인한 식물이지.”
그런 꽃을 ‘구근까지’ 가져오라고 한 점에서도 이번 시험은 난제였다. 구근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바위를 절묘하게 갈라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니까.
“벨키나랑 진은 괜찮을까요…….”
“마나 탐지와 컨트롤이라는 면에서는 진이 나보다 본능 레벨로 뛰어나고, 벨키나도 경험만 부족하지 자질은 충분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무력 면은 말할 것 없고.”
하긴 그간 강아지 상태라서 무시하고 있었지만, <아란다스트 사가>의 공략 캐릭터답게 흰둥이도 먼치킨이었다. 마나 제공자가 나라서 약해졌던 거지……. 미안하다, 흰둥아.
“세네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루민스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금씩 기울어가는 해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더 깊이 반짝였다. 평소 마법연에서 보던 차림보다 여행복에 가까운, 마치 검사와 같은 느낌의 복장도 색다르다.
우리 루민이, 학자 타입인데 몸도 좋구나. 사기캐인가…….
이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닌데. 하지만 루민이의 모습은 그저 멍하니 30분 정도 바라보고만 싶을 정도로 멋져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무척 달콤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저쪽 말고 이쪽만 생각해줘.”
그 말에 3초 정도 렉이 걸렸다가, 나는 황급히 정신줄을 붙잡고 대답했다.
“아……, 네, 네에! 진이랑 벨키나는 제가 걱정 안 해도 잘 하겠죠! 오히려 제가 루민스 발목 잡기 십상이니까, 정신 바싹 차리고 집중할게요!”
“으음, 그 의미가 아니었는데.”
루민스는 눈을 휘게 만들며 웃었다.
“괜찮아, 가망성 없는 기대에 걸어 보기로 했거든.”
“……?”
“그냥, 전에 진이랑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혼잣말 같은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끄덕이자 그가 손을 내밀며 “길이 험해서 위험하니 잡고 가자.”라고 덧붙였다. 망설이며 그 손을 쥐자, 변함없는 미소로 그가 어딘지 장난스럽게 말했다.
손을 잡는 순간, 험한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던전이 마치 마법의 궁전으로 통하는 계단인 양.
―이 공간을 강렬한 색채로 물들이는 그는 완전무결한 마법사였다.
◇◇◇
그 이후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뭐라고 해야 하나, 산책이었다.
<아란다스트 사가>에서 쪼렙이었던 벨키나야 열심히 싸워서 레벨업할 의욕이라도 있겠지만, 먼치킨 루민스의 입장에서 미혹의 골짜기는 시시할 수밖에 없었다. MMORPG로 비유하자면 만렙 유저가 초보자 존에서 학살을 하는 느낌이겠지…….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업혀 가도 되는 걸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중간에 혹시 미혹 백합을 놓칠세라 주변을 탐색하며 보조 마법으로나마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은하수의 끝자락에 담긴 열기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마물들이 반경 100m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감지해서 루민스가 유도 미사일처럼 스펠을 쏴대고 있는데 위험하고 어쩌고 할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루민스가 되는대로 스펠을 마구 날려대는 것도 아니었다. 쓰러진 마물의 잔해를 지나가다 봤는데, 피떡이 된 게 아니라 정확하게 급소만 노려서 상처 자국조차 깔끔하게 쓰러져 있었다. 한 방에 하나씩. 지극히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루민스, 행위 마법보다는 연구 체질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거대 개구리같이 생긴 마물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하자, 루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호도 문제지 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하긴 그도 그러네요.”
애초에 사방 1km쯤 되는 호수를 전부 얼려버렸다가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어 무엇 하나.
이 소리 계속하는 거 같지만, 루민이가 주로 힐러 역할만 했던 <아란다스트 사가>의 묘사는 대체 뭐였나 싶다. 역시 여주인공 벨키나를 띄워주기 위한 개발사의 농간…….
“뭔가 마음 쓰이는 거 있어?”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덕분에 새삼 루민스와 계속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얼버무리며 나는 겨우겨우 대답했다.
“저기, 너무 도움이 안 되는 게 죄송해서요.”
“그런 생각 할 필요는 없어.”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그가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펠을 외웠다. 어른 주먹만 한 빛덩어리가 우리 주변을 호위하듯 감싸며 주변을 밝혔다.
“와, 이건……?”
“조금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 같아서.”
“그러게요, 벌써 일몰…….”
“춥진 않아?”
“네, 전혀.”
네가 잡아주고 있는 손에서부터 열기가 온몸으로 뻗쳐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루민아. 이 누나의 마음은 맞잡은 손바닥보다 더 후끈하단다…….
“있잖아, 세네핀.”
심부름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인 양 씩씩하게 대답해버렸다. 루민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건 아니고. 세네핀이 지금 뭔가, 눈에 불을 켜고 제 할 일을 찾고 있는 것 같아서. 좀 편하게 있어도 돼.”
“아니에요. 저한테 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뭔가 해야 될 상황인걸요!”
“어째서?”
“미혹의 골짜기에 온 것도 제 고집 때문에 다들 도와주신 거잖아요. 그런 상황인데 제가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건 너무…….”
잠깐 사이에 해가 넘어간 것인지, 주황빛 하늘은 산 너머에 흔적만 남기고 남색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루민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다음, 바람에 헝클어진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루, 루민스……?”
마음속 덕질 앨범 확장하기 힘드니까 멋있는 거 작작해줄래…….
내 마음의 비명은 아랑곳없이, 머리를 정리해주고 나서 만족한 건지 그는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한테 도움이 된다는 건 뭘까?”
“어, 아무래도 자기가 맡은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역할을 다한다는 것도, 딱 잘라 이거다 하고 정의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딱히 명확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다시 조심스레 내 손을 쥐며 루민스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실은 말이지. 난 예전에 무척 유약하고 소심했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나는 귀를 의심하고 루민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웃고 있지만, 농담하는 기색은 없다.
“의식해서 고친 것도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으니까. 나도 예전에는, 세네핀과 같은 고민을 많이 했어.”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루민스가 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민.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 자신감 있는 모습. 그 모든 것을 루민스는 처음부터 타고났을 것이라고, 그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믿고 있었다.
내가 게임으로 보던 루민이는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소극적이고 툭하면 우는 자신이 무척 가치 없게 느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
“그랬는데, 무척 존경하는 사람이 해준 말 덕에 용기를 얻어서 바뀐 거야. 그때 나를 바꾸어 준 말은 지금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고 있어.”
목소리에 담긴 온도가 무척 따스했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협곡에서 루민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마법의 빛덩어리가 비추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눈에 일렁이는 감정이 몹시 복잡해 보였지만, 감정의 가닥들을 완전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무척 그리운 듯, 행복한 듯, 루민스는 자그마한 미소를 얼굴에 올려놓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어딘지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기이한 위화감.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의 분위기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칼트 왕세자 말이야. 마법 소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법만으로 따지면 세네핀보다도 약할 거야. 그럼 그 사람은 아무런 역할도 하고 있지 않은 걸까?”
“아……. 아뇨.”
맨날 제비 왕자라느니 마음속으로 놀리고 있지만, <아란다스트 사가>를 플레이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워커홀릭인지 알고 있다.
나한테 거북한 사람인 것과 별개로,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는 이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세네핀이 결심하지 않았다면 나도 벨키나도 이곳에 안 왔어. 아마도, 칼트 왕세자가 벨키나와 나를 수도로 데려가는 게 목적이라면 거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다름 아닌 너겠지. 그 사람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
완전히 저물어버린 어둠 사이로 루민스가 만들어 낸 예쁜 빛덩어리만이 주변을 비췄다.
“이제 좀 알 것 같네. 세네핀이 그 ‘계획의 참가자’로서 우리랑 함께 있고 싶다고 한 이유. 그것도, 네 안에서 뭔가 이름 붙일 만한 역할을 찾고 싶어서였겠지?”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곁에 있고 싶은 나는, 그들과 동등하지 않은 나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찾고 있었으니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괴로웠던 때 존경하던 그 사람이 해줬던 말을, 똑같이 돌려줄게.”
“어떤…….”
“그런 ‘역할’ 같은 거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우리는, 나는 네가 계속 곁에 있어 주면 좋겠어.”
“루민스…….”
“벨키나 녀석이 들었으면 섭섭하다고 엉엉 울었을걸?”
조금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한 후 그는 내 손을 놓았다.
“……잔소리는 이걸로 끝. 밤이 되어서 마물도 슬슬 센 녀석들이 나오는 것 같으니까, 세네핀도 조심해.”
다시 루민스가 스펠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밤이라서 더 현란하게 빛나 보이는 그의 스펠이 어두운 공중을 가로지른다.
그 빛을 삼키듯 심호흡하며, 나는 그저 루민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아, 루민스. 찾았어요! 미혹 백합이에요!”
밤이라 시야가 어두워져 낮일 때보다 찾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해가 저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혹 백합 자생지를 찾을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굳건해 보이는 바위 사이로 튼튼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미혹 백합은, 자료로 본 것처럼 새카만 외견을 하고 있었다. 꽃이라면 연상되는 보라색이나 남색에 가까운 색상이 아니라 정말로 콜타르라도 입힌 듯 새카맸다.
자연에 있는 꽃이 가지기에는 으스스한 색상이다. 밤이 아니라 낮에 봤으면 더 소름 돋지 않았으려나.
“세네핀, 잠시만 내 뒤로.”
내가 물러서자마자 그가 바로 스펠을 입에 담았다. 빠른 속도로 보호 실드를 발동한 후 바위를 깔끔하게 깨뜨려 버렸다. 모래 먼지처럼 바위가 바스라지고 미혹 백합 구근들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꽃 부분은 일반적인 백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크기였으나, 구근은 웬만한 성인 머리 정도 크기였다. 색깔부터 구근까지 이렇게 징그러울 일인가…….
나는 루민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얼른 구근 쪽으로 달려갔다. 바위가 부서지느라 묻은 먼지를 털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혹 백합에 손을 댄 순간,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 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곧바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의지대로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마치 먹물과 같은 아우라가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졌다.
“……어?”
찐득하고 불쾌한 아우라가 내 몸을 둘러싸려 했다. 당황하여 무언가 스펠을 입에 담으려고 해도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내 뒤에서 빠르게 주문 영창이 들려왔다.
“……태초를 뒤집어 무가 되고, 무가 뒤집혀 영원으로 이르는 태초. 단절의 기쁨에 모두 비명을 지르리.”
루민스가 입에 담은 스펠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계통과도 달랐다. 기존 스펠 체계의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 독자적인 방식이었다.
그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그가 영창을 끝내자마자 사방이 하얗게 변했다.
그림자도 무엇도 없는, 끝없는 흰색. 하얀 빛이 밀려든 것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한 듯했다.
안개처럼 시야를 가득 메운 순백색으로만 이루어진 공간.
미혹의 골짜기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다. 아니, 게임에서도 이런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디로 옮겨온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여, 여기는……?”
루민스를 돌아보자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치 방금 거대한 마력을 쏟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었다.
“절대 안전지대라고 해야 할까.”
대답하는 안색도 좋지 않다. 잠시 고통을 참는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은 루민스가 시선을 내 쪽으로 향했다.
“……있잖아. 세네핀은 이전부터 이렇게 위험에 처하는 일이 많았어?”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가 꺼낸 질문의 의미를 생각했다.
방금 내가 엄청나게 위험했다는 소리인가?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기는 했는데…… 그런 일이 이전부터 많았느냐고?
하지만 애초에 루민스는 언제부터를 이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 세계의 엑스트라 악녀로 빙의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는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려고 하는 순간,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더 생각하지 않아도 돼. 잠시만 여기 있어 줘. 저쪽은 시간이 멈춘 상태라서. 이쪽 시간으로 30초쯤 후에 풀릴 거야.”
그 말만을 남기고 루민스는 눈 깜짝할 새에 하얀 공간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치 이세계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덕분에 내가 이 공간으로 이동해온 것도 루민스의 마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쪽’은 시간이 멈춘 상태라고? 이쪽 시간만 따로 흘러?
“이런 마법이 가능하던가?”
게임에서도 루민스가 이런 마법을 쓰는 것은 본 적이 없을뿐더러, 세네핀에 빙의한 덕분에 떠올릴 수 있게 된 이 세계의 지식을 머릿속으로 뒤져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법이라도 물리법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무언가를 구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세계로, 혹은 다른 차원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한 마법 아닌가.
역시 먼치킨이라서인가. 역시 능력 있는 마법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미혹의 골짜기에 서 있던 그 상황 그대로였다.
“어…….”
시야가 돌아오고, 루민스는 소환한 빛 덩어리 가운데에서 미혹 백합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내 쪽을 보며 그는 생긋 웃었다.
“이제 안전해.”
“루민스, 방금 그―”
하얀 공간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을 때, 루민스가 재빨리 내 입을 막았다.
“미안, 조금 전에는 아무것도 못 본 것으로 해주면 고맙겠어.”
빠르게 그 말을 뱉은 후 그가 어째서인지 간절한 눈빛을 했다.
“…….”
방금 그게 흑마법이라 해도 게임에서는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설정이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이 세계는 이렇게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와 다른 부분이 많은 걸까?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두통 때문에 생각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으, 이럴 게 아니다. 흑마법이든 뭐든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괜히 좋지도 않은 머리 굴리지 말고 진정해야겠어.
루민스가 이유 없이 비밀을 만들 리 없다. 실제로 방금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아우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는걸. 그럼 됐지.
내가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는 동안 루민스는 바닥에서 미혹의 백합 구근 두 개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중 가장 큰 구근을 나에게 안겼다.
“고마워요, 루민스.”
“그럼 얼른 가볼까? 벨키나랑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할지 내기했거든.”
휴, 다행이야. 나 모르는 새에 둘이서 내기도 할 정도로 역시 사이가 좋구나.
그래, 꼭 원작 루트 그대로 가야만 한다는 법은 없잖아!?
내기로 싹트는 사랑, 도박으로 싹트는 사랑…….
음…….
이건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군.
“세네핀?”
아무 대꾸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루민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호호,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출발해요. 그나저나 돈으로 내기하면 벨키나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 아닌가요?”
“그야 돈으로 내기 안 했으니까.”
“어머, 그럼 어떤 걸 걸었나요?”
루민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을 알 수 없는 분위기의 웃음을 보였다.
“……수도에 갔을 때 가장 먼저 세네핀이랑 데이트할 권리 같은 거?”
“네?”
“자, 그럼 돌아가자. 어느 쪽이 이겼을지 정말 기대되는데.”
“농담이죠!?”
루민스의 웃음소리만 골짜기에 울려 퍼질 뿐, 결국 그 농담의 진위는 알 수 없었다.
벨키나와 루민스가 동시에 골짜기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한숨짓는 것으로 내기의 결론이 허무하게 끝났기 때문에.
08. 취향 위에 최애 있다
“루민스 할데르프. 세네핀 크롬웰. 벨키나.”
마법연 귀빈실의 서재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칼트 왕세자는 완벽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자네들의 노고를 치하하네. 약속했던 대로, 자네 셋에게는 수도의 ‘신의 그릇 회수’ 계획에 참가할 권리는 물론, 경비 및 체류비 일체, 참가 보수를 왕실에서 지급하지.”
정작 노고를 치하받는 당사자들은 표정이 다들 별로 좋지 않았다. 내기에 비겨서 기분을 잡쳐버린 벨키나, 내기에 비겨서 마찬가지로 저기압인 루민스, 제비 왕자한테 원래 감정이 좋지 않은 나까지 합쳐서 표정만으로 왕세자 불경죄에 천 번쯤 해당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쟤네 진짜 내기에 뭘 걸었길래 저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아진 거지?
“자네들 형식적으로 기뻐하는 얼굴이라도 할 수 없나?”
“왕세자 저하의 혜안으로 지켜보시면 표정 같은 얄팍한 꺼풀 말고 저희의 충심과 환희를 전달받으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네, 감사합니다. 왕세자 저하. 덕분에 힘들었어요.”
평민이라 예의범절 모른다는 핑계로 막 나가는 절세미인도 한 명…….
“호호, 저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난제를 풀 기회를 받은 것만으로도 저희에게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사옵니다.”
인사치레 의욕조차 없어 보이는 루민이 대신 왕세자 네가 준 엿 맛있게 먹었다고 정치적 수사를 대충 던졌다.
“확실히, 세네핀 크롬웰. 자네에 대해서는 나도 여러모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네.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줘서.”
쓸데없이 색기를 띠는 미소와 함께 칼트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대놓고 사람을 시험한 왕세자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기에 인정을 받아도 기쁘지는 않았다. 나도 그렇지만, 벨키나한테도 앞으로도 관심 꺼주면 좋겠어.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뜻밖에 왕세자를 향해 루민스가 묘하게 뾰족한 말투로 받아쳤다.
“저하께서 내리신 영광된 시험을 통하지 않았더라도 세네핀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저하의 영민하신 안목이 이전에는 그녀를 지목하지 않았으니, 저하께는 그뿐인 이야기겠습니다만.”
루민아……, ‘시험씩이나 치고 나서야 사람을 다시 보다니 네 안목 알만하구나.’라는 도발 같이 들리는데 착각이니?
“솔직히 저랑 루민스는 세네핀의 권유가 없었으면 수도에 갈 생각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저하야말로 좀 더 세네핀에게 감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벨키나야! 일단 얘는 이 나라 왕세자라고……!
“하하. 알겠네. 이번 일은 내가 다소 강압적이었다는 것도 인정하는바. 정식으로 인사하도록 하지.”
얘네 둘이 이래도 되나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칼트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갑자기 몸을 숙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비명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는데, 옅게 웃으며 내 손을 놓은 제비 왕자가 말했다.
“자네를 시험하는 듯한 행동을 한 나의 경솔함에 사과를. 또한 자네의 벗들을 설득해준 점에도 깊은 애정을 담아 최대의 감사를 보내겠네.”
“……아……, 그……, 화, 황송……합……니다?”
이 상황에서 내놔야 하는 답변을 머리가 제대로 도출해내지 못해서 버퍼링 걸린 동영상 같은 소리를 내고 있으려니 뒤에서 홱 내 어깨를 낚아채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 팔짱을 끼고 왕세자를 잔뜩 노려보며 벨키나가 말했다.
“사과랑 감사 인사는 그냥 말로만 하셨어도 될 것 같아요, 저하!”
“저하의 분에 넘치는 인사를 받고 미천한 저희는 물론 당사자인 세네핀도 감탄과 경외를 금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특히 세네핀은 정신적 영향이 심대한 것 같으니 바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반대쪽에서 내 어깨를 안아 뒤로 물리게 한 루민스는 무언가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즐거운 얼굴로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다니 자네 두 사람에게도 무척 고맙군. 좋네, 자세한 내용은 차후 보좌관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지.”
“……저하의 배려, 망극합니다.”
“후후, 수도에서 다시 보는 날을 기대하겠네.”
◇◇◇
드디어 축객령을 받고 귀빈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것처럼 흉흉했다.
“벨키나 네가 왕세자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왕세자 먼저 도발한 건 루민스 너거든!?”
어째서인지 루민스와 벨키나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자기들끼리 싸움을 시작했다.
얘들아, 왕세자 저하거든! 존칭! 존칭 빼먹었어!
나는 쩔쩔매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미, 미안해요. 두 사람 다. 제가 괜히 처음에 왕세자 저하한테 미운털이 박히는 바람에, 두 사람까지 말려들어서…….”
“세네핀은 안 나쁘거든!?”
“네, 네에…….”
동시에 힘주어 말하는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끄덕였다.
“아, 아무튼. 왕세자 저하도 사람 놀려먹는 게 너무 심하시네요. 짓궂으세요.”
“그건 놀렸다기보다……, 아니다. 그냥 놀렸다고 치고 앞으로도 계속 왕세자 저하를 멀리하도록 해, 세네핀.”
진지한 얼굴로 루민스가 조언했다. 옆에서는 어쩐지 씩씩거리는 얼굴로 벨키나가 내 손등을 계속 문지르고 있다.
“방에 가면 손을 꼭 비누로 10번쯤 씻어내야 해, 세네핀.”
아예 세균 덩어리 취급이니……? 벨키나가 왕세자에게 악감정을 가져 플래그가 꺾인 기색인 건 기쁜데, 예상 이상으로 반응이 격렬했다.
헉, 이거 재벌 남주 드라마에 나오는, 처음에는 서로 극혐하다가 나중에 사랑으로 반전되는 전개인 건가? 앞으로도 긴장해야겠어…….
그렇게 위기를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수도에서도 타도 제비 왕자!’라는 구호를 가슴에 굳건히 새겼다.
◇◇◇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어쩐지 어깨에 힘이 풀린다. 미혹 백합의 구근을 성공적으로 가져왔는데도 칼트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꽤 많이 했었나 보다.
“휴, 해방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로써 귀찮은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여러 가지로 홀가분해졌지만 가장 기쁜 건 합법적(?)으로 벨키나와 루민스, 진의 여행에 함께할 수 있는 보증을 받았다는 점이다.
미혹의 골짜기에서 루민스가 해주었던 말, 역할 같은 거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건네어 온 말은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루민스도 벨키나도 나와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그 말은 너무나 따스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함께 나누어 부담하는 위치라는 게 중요하니까 말이지. 선 밖으로 물러나서 말뿐인 응원만 전달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같이 싸우고 행동하는 위치 말이다. 나는 바로 그 위치에서 모두와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민폐라도 안 끼치기 위해서 이 누나가 노력해볼까 하는데요…….”
왕세자가 “자네들이 가져온 거니 처분도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라고 해서 가져온 커다란 미혹 백합 구근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미혹 백합은 그 자체로도 연금술 재료로 귀중하게 쓰이니 이대로 팔아도 그럭저럭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건 다른 용도에서의 값어치였다.
이 백합의 구근과 줄기 사이의 경계에는 마치 반지와 같은 모양의 둥그렇고 딱딱한 부위가 있다.
그 반지 같은 부위만 잘라내 몸에 지니면, 외부의 심각한 대미지를 몇 번 막아주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지식이라는 설정이지만, 게임의 히든 루트에 진입하면 이 정보도 풀린다. 다름 아닌 알프 루트에서 말이다.
알프. 벨키나를 스카우트해온 수수께끼의 남성이자, <아란다스트 사가>의 진히어로.
정작 네 얼굴은 이 세계에 와서 한 번도 못 봤는데 네가 준 지식만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고 있구나. 고마워,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알프!
애초에 진히어로 겸 히든 캐릭터라 등장 플래그도 까다로워서, 아마 게임 후반 이벤트쯤 가지 않으면 얼굴 보기 힘들겠지. 나중에 보자꾸나.
알프가 게임에서 ‘미혹의 반지’라고 명명한 이 부적은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지만, 애초에 이걸 사용할 일이 없는 쪽이 제일 좋다. 언제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라 치명상을 막아주는 아이템을 들고 다니기보다, 공격당할 일을 미리 방지하는 게 최고 아닌가.
그러니 나도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미혹의 반지’가 필요할 만한 상황은 피할 생각이다.
다만, 저번 고요의 호수라거나, 미혹 백합 구근의 검은 아우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말이지……. 보험이라고 치자.
바위를 밀어내는 억센 식물의 구근이라 해체 작업에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지만, 겨우겨우 미혹의 반지 부분을 떼어냈다. 실제로 손가락에 끼우기에는 색이 시커멓고 사이즈도 너무 커서 흉측한 모양새라, 서랍 구석에 박아 두었던 목걸이 체인을 꺼내서 끼운 다음 목에 걸기로 했다.
만약을 위한 준비까지 마치니 어쩐지 든든하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일도 다 좋게 풀렸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아?
벨키나와 왕세자 사이의 플래그도 착실하게 꺾은 것 같으니까 이제 남은 일은 수도로 떠나는 것뿐!
◇◇◇
……인 줄 알았는데, 수도로 떠나기 전에 마법연 업무의 인수인계 및 마무리 작업을 맡게 되었다. 수도에 도착한 뒤에도 곧바로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새로이 터를 잡은 도시에서 이것저것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명목하에, 개인별 준비 기간으로 2주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나.
게임에서는 이런 인수인계 과정이나 유예기간에 관한 설정은 생략되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이 과정이 디테일했다. 게임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공백을 내가 직접 채워 넣고 있는 듯해서 기분도 묘했다.
뭐,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 세계니까 말이야. 나도 최선을 다하는 게 좋겠지.
내가 마법연에서 담당했던 업무는 분담이 잘 되어 있어서 인수인계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벨키나야 수습이라 이관할 업무가 없었고 반려동물(?)인 진도 논외였으나, 문제가 된 건 루민스였다.
아무래도 2급이라는 고위 마법사로서 마법연에서 큰 축을 담당하던 인재다 보니, 마법연 원장님을 비롯하여 동료들이 루민스의 빈자리에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는 모양이다. 정작 본인은 무척 홀가분해 보였지만.
그렇게 정리를 위한 2주가 지나고, 우리는 수도로 떠나게 되었다. 우선 마법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는 마차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마법 열차를 타고 수도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마법 연구원이 워낙 깡촌에 있다 보니 열차 여행에만도 총 이틀이 소요된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열차에서 이틀간은 먹고 자게 된 셈인데, 이렇게 열차를 오래 타보는 건 처음이라 두근두근했다.
“이거, 처음에만 신기하고 나중엔 지겨우니까.”
두근거린다는 내 감상을 루민스가 대단히 현실적인 말로 꺼트려 버렸다. 너무해.
루민스는 침대차의 우리 짐들을 머리 위쪽 짐칸에 올려준 다음,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루민스도 차암~. 처음부터 김을 뺄 건 뭐야. 걱정하지 마, 세네핀! 내가 카드도 가져오고 보드게임도 마법연에 있는 거 싹싹 긁어왔으니까! 이틀은 충분해!”
“벨키나, 나는 도둑잡기를 희망한다.”
요즘 혼자 있는 시간에 심심하다고 벨키나에게서 각종 게임을 배우기 시작한 진이 리퀘스트를 던졌다. 점점 우리 요정님이 세속적으로 변하고 있어…….
먼 길을 이동하는 여행이 지루하다고는 해도, 이 멤버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지내면 지루함을 느낄 틈도 없을 것 같았다.
◇◇◇
밤이 되어 루민스는 건너편 침대칸으로 돌아가고, 셋만 남아 또 한참 보드게임을 했다. 벨키나가 꾸벅꾸벅 졸며 항복을 선언해서 벨키나를 침대에 눕히고 보니, 진도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내 의자 위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잘 때는 편하게 자는 게 좋겠지? 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다음 건너 쪽 남자 침대칸으로 갔다. 혹시 먼저 들어간 루민이가 자고 있으면 실례일까 싶었는데, 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깨어 있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누구세요?”라고 평소보다 약간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저예요, 세네핀. 잠깐 진을 데려다주려고요.”
“……세네핀? 응, 안 잠겨 있으니까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는 중이었던 듯한 루민스가 고개를 들었다.
“진은 이리 주고. 내가 침대 쪽에 눕혀 놓을게.”
루민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루민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완벽히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저 얼굴에 걸치고 있는 아이템은, 안경이라는 물건이 맞는지요……?
지금까지 3D로도 2D로도 안경 캐릭터가 취향인 적 없지만, 오늘 개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안경의 매력을 몰랐던 것뿐이었군요……. 죄송합니다, 전 세계의 안경 신자 여러분…….
“세네핀?”
내가 그대로 입구에서 굳어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루민스가 일어났다.
최대한 침착해 보이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말하자 루민스가 “아아, 이거…….” 하고 안경다리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문자를 오래 읽을 때는 피곤해서 쓰는 편이야. 원래 눈이 별로 안 좋거든.”
“어, 그럼 계속 안경 쓰고 계시는 게 좋지 않나요? 왜 평소에는 안 쓰시는 건가요?”
나한테서 건네받은 진을 침대에 눕혀준 다음, 그는 내 질문을 듣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 안경 안 쓴 게 세네핀 취향일 것 같아서?”
“……네?”
내가 혹시 환청을 들었나? 내 목구멍에서 멍청하게 들리는 소리가 나와버렸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루민스가…… 사르르 녹을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경 안 쓴 쪽이 세네핀 취향 아닐까 하고.”
“그, 저기, 그게, 잠깐…….”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스톱 표시를 취했다. 내, 냉정해지자.
“저는 그런 종류의 취향 어필을 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래? 그럼. 어디 보자. 벨키나는 안경 쓴 게 좋아, 안 쓴 게 좋아?”
금발에 푸른 눈이 매력적인 우리 벨키나……. 안경을 쓰든 안 쓰든 우리 예쁜이는 예쁜이지만,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둘 다 예쁘겠지만, 안경으로 얼굴을 안 가리는 쪽이 나으려나요.”
“그럼 진은?”
“으으음~~~. 그쪽도 안경이 색다른 맛이라 아깝긴 하지만 역시 얼굴을 가리지 않는 쪽으로…….”
“칼트 왕세자는?”
“아, 그 사람은 얼굴에 뭘 걸치든 달든 제가 알 바는 아니고요.”
칼트의 이름을 듣자마자 냉정하게 잘랐더니 루민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안경 쓴 상태에서 루민이가 폭소하는 모습까지 봤어……. 오늘 마음속 메모리얼 앨범 폭발해 버린다…….
“거봐, 역시 전체적으로 따지자면 세네핀은 안경 안 쓴 쪽이 취향인 거잖아.”
“……그, 그건.”
그야 난 원래 안경 취향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잣대를 루민이한테 대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렇다고 최애에 대한 열정을 장본인 앞에서 변론할 수는 없어서, 나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쿡쿡 웃으며 루민스는 안경다리를 잡고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 그게 묘하게 관능적이라서,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판단을 믿고, 앞으로도 안경은 되도록 쓰지 않을게.”
평소처럼 안경을 쓰지 않은 상태로 그가 생긋 미소했다. 가슴속이 감동으로 차오른다.
그래……. 안경의 유무가 아니다. 그저 존재가 루민스 할데르프냐 아니냐의 문제다!
그, 그렇지만 쪼끔……, 아쉽기도 하고…….
“아뇨, 그게!”
“응?”
“뭐가 되었든 루민스 본인이 편한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요…….”
가끔은 간식처럼 안경 루민이도 즐기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했다.
“……하하, 그래. 나도 눈이 더 나빠지는 건 싫으니까 문자 읽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쓸 것 같기도 하고.”
좋았어, 앞으로 안경 루민이도 볼 기회가 더 있다!
“아무튼, 세네핀도 이만 들어가서 푹 쉬어. 수도에서도 이래저래 바쁘고 힘들 테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야지.”
“네, 네에! 루민스도 책 그만 보고 얼른 쉬세요!”
“응. 잘 자.”
문을 닫고 나오면서 오늘의 루민스 메모리얼을 자기 전에 잘 정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결국 평소에 안경 안 쓰는 이유를 제대로 못 들었네. 안경 안 쓴 게 내 취향일 것 같아서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야 물론 아닐 거고.
하여간 루민이도 은근히 사람 놀려먹는 구석이 있어.
그런 점도 귀엽지만!
어찌 되었든, 수도에 가면 루민스의 말대로 바쁘고 힘들어질 것이다. ‘신의 그릇 회수’ 계획도 그렇지만, 내 개인적인 용건 때문에.
……벨키나에게 꽂히는 다른 공략 캐릭터의 플래그 파괴.
드디어 네 번째 캐릭터, 유고 페이넌스가 수도에서 등장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09. 무언가 잘못되었다
유고 페이넌스. ‘페이넌스’라는 성만 봐도 딱 감이 오겠지만 유고는 제비 왕자의 동생으로, 페이넌스 왕국의 둘째 왕자다.
공략캐 중 왕자가 둘이나 되다니 이 게임은 설정이 과한 것뿐만 아니라 공략 캐릭터 밸런스조차 안 맞는다. 음. 같은 왕자에다 형제이긴 하지만 제비 왕자랑 유고는 캐릭터성이 전혀 다르니까 괜찮나…….
유고는 한마디로 업계 용어 ‘츤데레’를 구현해 놓은 녀석이었다. 자기 형을 존경하면서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벨키나에게 솔직하게 굴지 못하는데 호감이 있는 건 뻔히 보인다거나……. 정말 알기 쉬워서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이다. 사실 나는 칼트의 100배 정도 얘가 더 좋았다.
아, 물론 내 최애는 루민이뿐이지만. 루민아, 이 누나의 사랑은 변함없으니 오해하지 말렴.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유고는 가장 직선적인 녀석이기도 하다. 남사친 위치가 너무 확고해서 본인 루트도 우정 같은 루민스나,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느낌인 진, 플러팅을 잔뜩 걸지만 초반에는 진심이 아니었던 칼트, 히든 캐릭터라 애초에 공략이 힘든 알프랑 다르게 초반부터 벨키나 좋아한다는 냄새를 너무 풍기고 다니기 때문에…….
게임에서 볼 때야 그냥 귀엽구나 하고 말지만, 플래그를 꺾어야 하는 이쪽 입장에서는 아주 고약한 상대였다. 그리고 호감이 직선적이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서 좀 양심에 찔리는 구석도 있다. 미안하다, 얘야…….
왕궁에서 우리의 거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자그마한 별채였다. 방이 네 개에 응접실이 딸린, 왕궁치고는 소박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수도에 도착해 그 별채에서 짐을 풀고 이후 진행을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유고의 플래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한참 고민했다.
결국, 이쪽도 첫 만남 이벤트를 뭉개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첫 만남 이벤트 날 벨키나를 붙잡고 온종일 왕궁 안에서만 지내면서 바깥의 유고를 피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지만 왕궁 밖으로 아예 안 나가는 것도 애매했다. 유고 첫 만남 이벤트 때 발생하는 작은 사건이 마음에 걸렸다. 그 이벤트에서 벨키나가 구해줘야 할 엑스트라가 있기 때문이다.
이벤트를 완전히 무시했다간 다칠 위기에 처한 사람을 방치하는 결과가 된다. 인적도 없는 곳에서 다치게 되는데, 혹시 나 때문에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렇다면 벨키나는 유고와 만나지 않도록 왕궁에 붙잡아 놓고, 나 혼자만 바깥으로 나가서 다칠 예정인 사람을 몰래 구해주고 빠져나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문제는 다른 애들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나 혼자만 수도 번화가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벨키나의 경우에는 내가 바깥으로 나간다고 하면 무조건 같이 놀러 가자고 조를 게 뻔하고.
아아, 이벤트가 당장 내일인데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고민에 잠겨 있으려니, 책을 들고 바깥에서 돌아온 루민스가 말을 걸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민스는 도서관 다녀온 건가요?”
“응, 맞아. 흥미로운 책이 많아서.”
“그렇군요. 역시 루민스는 책 때문에 여기에 머물기로 한 모양이네요?”
공작님의 아들이고 본가가 수도에 있으니, 왕궁의 비좁은 별채가 아니라 본가의 편한 자기 방에서 지낼 수 있을 텐데. 굳이 이곳에서 지내기로 한 이유는 역시 책 때문일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루민스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공작가가 왕궁과 떨어진 곳에 있나요? 확실히 출퇴근하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면 피곤하긴 하겠네요.”
“음~,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렇다고 치는 건 뭔가 싶지만, 루민이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더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벨키나랑 진은?”
“왕궁 정원에 산책하러 갔어요. 저는 조금 피곤해서 나중에 같이 가자고 했고요.”
루민스가 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듯 가까이 다가왔다. 끄아악, 딱히 이런 걸 노린 건 아니었어, 루민아!
“그렇게 걱정하실 건 아니구요! 차만 다 마시면 들어갈게요.”
“피곤한 거 내버려 두면 감기 같은 것으로 이어지니까. 저번에 열차에서도 말했지만, 휴식은 충분히 취하도록 해.”
다정한 말을 건네며 루민스가 다시 거리를 두었다. 휴, 클로즈업을 낭비하면 이 누나 심장이 떨리니까 예고부터 해주렴, 루민아.
“네, 조심할게요.”
나도 나지만 다른 애들도 감기나 건강 조심해야 할 텐데……. 모과 절임 같은 거 뜨거운 물 부어서 차로 만들어 마시면 목감기 예방된다고 했는데, 애들한테 나눠줄 겸 사러 갈까.
그 생각을 했다가 나는 한 가지 실마리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루민스!”
“응?”
방으로 들어가려던 걸 내가 붙잡자 루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포즈 귀엽, 아니 지금은 정신 차리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세네핀 부탁이면 무엇이든.”
나한테 그렇게까지 스윗하게 반응할 건 없어, 루민아! 그런 스윗함은 벨키나한테 보여주렴…….
“……아, 네. 고맙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듣고 정하셔도 되는데요.”
“괜찮아, 뭐든지. 그래서 어떤 건데?”
“실은 저기. 이번에 미혹의 골짜기 건으로 도움받았던 것도 있고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할까 하거든요.”
내가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앉으며 루민스가 끄덕였다.
“본인한테 뭔지 보이면 김이 새니까, 내일 혼자 사러 갈까 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벨키나나 진은 제가 어디 가면 같이 가고 싶어 해서요.”
“……그렇군. 그래서 내일 혼자 외출하는 동안 그 두 사람을 붙잡아놔 달라는 건가?”
역시 루민스, 이해가 빠르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크게 자신은 없어. 세네핀도 알다시피, 벨키나는 고집이 세잖아. 진도 남 말 안 듣는 편이고.”
“저번에 했던 것처럼은 안 되나요? 미혹의 골짜기 일로 두 분이 내기도 했었다고 그랬잖아요. 내일 벨키나랑 진한테 다시 뭔가 내기라도 걸면서 보드게임 승부라도 한다거나?”
“흠……. 그거 좋은 생각인데.”
어쩐지 루민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못다 한 승부에 갑자기 의욕을 보이는 눈치다. 그러니까 대체 너네들 저번에 뭘 걸고 내기를 한 건데…….
“그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응. 그렇게 할게.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민스가 묘하게 섭섭한 듯한 얼굴을 한다.
“나한테는 선물 없는 거야?”
“……!?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당연히 있죠!”
“그래도 다른 둘한테는 비밀로 해서 깜짝 놀라게 해줄 거면서, 나한테는 미리 말해버렸잖아.”
그렇게 말하는 루민이의 말투가, 마치,
그……, 내 착각이 아니면 이거…….
삐친 건가?
뭐지?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운 거지?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내 심장을 폭행하기 위해??? ‘세네핀 크롬웰’로서 유지하고 있는 나의 캐릭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 아뇨 루민스! 차별하려거나 그런 게 아니고! 루, 루민스를 가장 의지하고 있어서 그래요. 이런 거 부탁할 사람이…….”
“흐음.”
턱을 괴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루민스는 여전히 어딘가 새침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대답했다.
“알았어. 세네핀의 말을 믿고, 내일 선물 기대하고 있을게.”
“네, 네!”
루민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는 걸 보자마자 맥이 풀려서 소파에 기댔다.
루민아……. 너 그렇게 귀엽게 삐칠 수도 있단 소리 누나한테 한 적 없잖아.
그래, 누나가 귀여운 너를 위해 뭔들 못하겠니. 내일도 플래그 파괴 힘낼게…….
그렇게 유고 페이넌스에 대한 마지막 양심을 날려버리며 나는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
다음 날 아침, 루민스가 두 사람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왕궁을 빠져나갔다. 수도에 와서 관광 겸 다 같이 외출했던 것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수도 나들이는 오늘 처음인 셈이었다.
페이넌스의 수도, 푸른 날개의 도시 홀르나. 별칭인 ‘푸른 날개의 도시’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도시 전체의 건물이나 보도블록, 장식물이 모두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시초룡 알페이넌스의 푸른 날개에 덮여 축복받은 땅이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오래전부터 홀르나의 도시 조경 핵심 색깔은 계속 푸른색이었다고 한다. 왕궁도 푸른색이고.
그런 홀르나의 중심가를 살짝 비껴간 곳에 이른바 ‘뒷골목’이 존재했다. 뭐, 대도시마다 흔히 존재하는 번화가 이면의 어두운 얼굴이랄까……. 유흥업소나 도시 빈민들이 많은 일종의 슬럼가였다.
치안이 안 좋으니 나도 보통 때라면 용건도 없으니 들를 일이 없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유고와의 첫 만남 이벤트 발생 장소가 여기라서 말이지.
장소가 이래서 더더욱 다른 애들이랑 같이 올 수 없었다. 내가 이 ‘뒷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 합심해서 나를 질질 끌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을 테니까.
혹시 나중에 문제 될까 싶어 마법사 정식 복장의 케이프도 벗고 평범하게 외투만 입고 왔지만, 역시 무서웠다. 시비 걸리기 전에 용건만 빠르게 처리해야겠어.
게임상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고민했다.
원래 오늘 발생할 이벤트대로라면, 벨키나는 길을 잃고 번화가 외곽으로 갔다가, 나무에서 떨어질 뻔한 10대 후반 소녀를 구해 준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무에 올라가서 찾아보고 있었다는 사연을 듣고 물건을 같이 찾아주기로 하는데, 하필 소녀가 지나왔던 동선에 이 뒷골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다가 불량배한테 시비가 걸리고, 그걸 또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유고 페이넌스가 구해준다는…….
“흠, 다시 떠올려도 정말 첫 만남 스토리가 뻔하군.”
하지만 연애 전개야 뻔한 정도가 좋지. 나는 벨키나를 잘 알고 있다. 그녀라면 생판 초면인 남의 일이라도 성의를 다해서 도와주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벨키나에게 유고가 호감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 반해 유고가 괜찮은 놈인 걸 알면서 친구의 연애 플래그나 꺾으려고 하는 나는…….
미안하다, 벨키나. 그치만 우리 루민이도 좋은 애니까 말이야! 적극적으로 검토해보는 게 어떻겠니!?
그렇게 뇌내 회의를 하면서도 나는 열심히 소녀가 떨어뜨린 물건을 찾았다. 내 계획은 소녀의 분실품을 먼저 찾은 다음에 소녀가 등장하는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소녀가 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물건을 찾아주면 이후의 전개도 바뀔 테고, 유고 페이넌스랑 만날 일은 없어질 테니까.
이렇듯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이 떨어진 물건을 못 찾겠다는 점이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목걸이였는데……. (참고로 소녀가 나무에 올라간 건 까마귀가 반짝이는 걸 잘 물고 가니까 나무 위 까마귀 둥지에 목걸이가 있을까 하고 올라간 거였다.)
당장 뒷골목에 주점이 한두 군데 있는 게 아니고, 대낮부터 뒷골목에 들어와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 수상해 보였나 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날 보고 수군수군했다.
우리 개인주의 사회 합시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신경 꺼주기!
그냥 걸으면서 바닥만 보다가 놓친 걸까 싶어, 나는 엎드려서 쌓여 있는 상자 사이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았다. 잘 안 보이는데, 빛 마법이라도 써야 하나…….
“……어이, 여자.”
으음, 그렇지만 마법을 써서 더 주목받긴 싫……, 응?
“거기 여자, 귀머거리냐?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
히익, 어쩌지. 게임에서 벨키나가 걸리던 시비 미리 걸렸나. 마법 쓰고 튀어버리면 되나. 근데 목걸이는 찾아야 하는데 어쩌지.
웃으면서 설설 기면 어떻게 해결 안 될까 하는 마음으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 오호호. 부르셨나요.”
“그래. 너 아까부터 이 근처에서 수상하게 뭐 하는 거냐?”
“그…….”
고개를 들고 나서 나는 입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칼트의 흑발과 반대로 백금발에 가까운 머리칼,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는 붉은 눈. 아직 어린 인상이 남아 있는데도 묘하게 섹시하고 귀티가 나는 생김새의 초절정 미남.
그리고 그 얼굴 조형과 붉은 눈은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아, 아니 딱히 원수인 건 아니지만.
왕자라는 정체가 짐작되지 않게 무척 단출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타고난 기품은 숨길 수가 없구나……. 굉장하다, 페이넌스 왕가 유전자.
“? 대답을 해. 왜 사람을 보고 굳어 있는 거냐?”
“……어, 그.”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머리가 제대로 변명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해버렸다.
“너무 잘생겨서?”
“뭐?”
내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가 귀 끝까지 새빨개진 유고가 한 발짝 물러나며 팔로 얼굴을 가리고 버럭 외쳤다.
“이, 이 여자가 무슨 헛소리야!?”
앗.
나왔다, 유고의 전매특허, 자기가 부끄러우면 벌컥 화내기…….
너무 노골적으로 츤데레라 보고 있는 나까지 부끄러워지는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니까 귀엽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치유되고 평화로워진다고 할까?
그래서 유고를 일컫는 내 안의 애칭은 ‘비둘기 왕자’였다.
“호호, 잘생긴 얼굴에 좀 더 자신을 가지셔도 돼요! 그럼 이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오래 얽히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대충 대답하고 퇴장하려 했다.
쯧……. 대충 얼버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건을 찾고 있어서 그래요. 그것만 찾으면 바로 사라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고개를 홱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여기 낮에도 위험하니까 혼자 돌아다니는 건 좀…….”
와……. 세상에, 이렇게까지 템플릿 츤데레일 필요가 있나.
“걱정해주신 거예요?”
“거, 걱정은 무슨! 내가 거슬려서 그렇다!”
아, 반응마저 예상대로야! 평화로워! 아무리 생각해도 제비 왕자는 제 동생의 1/100이라도 본받아서 귀여워지는 게 좋지 않을까!?
“거슬리니까 빨리 찾고 나가라. 그래서? 뭐 찾으려는 건데?”
심지어 도와주려는 거냐…….
“어머.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저한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여기 위험하다니까!”
“오호호, 역시 걱정해주시는 거 맞죠?”
무한 루프로 들어갈 것 같은 내 질문에 새빨개진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다가 유고가 버럭 뱉었다.
“아, 그래. 걱정한다고 치고! 빨리 뭐 찾는지 말이나 해.”
“그게, 은색 목걸이예요. 진짜 은은 아니지만…….”
더 놀려먹는 것도 미안하다 싶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휴, 너무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애라 그만 본래 목적에서 탈선할 뻔했네.
가능하면 얽히지 않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만나버린 마당에 어쩌겠나. 빨리 용건 끝내고 헤어져야지.
“알았다. 그럼 넌 저쪽부터 뒤져. 난 이쪽을 보지.”
“네에, 감사합니다.”
예전 칼트 왕세자와 마찬가지로 유고 역시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설정이었다. 칼트의 경우에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대외 활동을 자제해 온 것이지만, 유고는 단순히 본인이 반항기라서 그럴 것이다. 지금 평민이나 다름없는 복장을 하고 잠행 나온 것도 그렇고.
하여튼, 함께 묵묵히 주변을 뒤지고 있는데 유고가 질문했다.
“어이, 여자. 넌 이름 뭐냐. 언제까지 여자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어……, 세네핀 크롬웰이라고 해요.”
“흐응. 세네핀이라.”
엎드려서 벽돌 사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던 나도 유고에게 되물었다.
“그…….”
대답을 만들어내느라 엄청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야 이런 데서 왕자님 행세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만 놀려먹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얘는 타격감이 좋은 거지.
“유고, 라고 하는데.”
“어머, 멋진 이름이네요.”
성을 숨기고 그냥 이름만 말해서 평민 행세를 하는 노선으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옷만 허름하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돈 들인 티가 나게 단정한데 씨가 먹힐 거짓말이냐 싶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너, 너는 아까부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생겼다느니 멋지다느니……!”
“호호, 사실을 말하는데 부끄러울 게 있나요?”
제 형한테 콤플렉스가 있어서 자기 평가가 낮은 놈이지만, 솔직히 유고 정도면 여러모로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다.
“……낯 두꺼운 여자.”
“여자라고 안 부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말꼬리 잡지 마라……!”
◇◇◇
약 15분 후. 유고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하수구로 굴러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목걸이를 찾았다. 더러워진 목걸이를 치마에 쓱쓱 닦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고마워요, 유고 씨. 덕분에 무사히 찾았어요.”
“벼, 별로……. 그보다 씨라느니 필요 없으니까 그냥 유고라고 불러라.”
명색이 왕자님이니 애초에 저는 당신을 님 붙여서 부르는 게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너 왕자님인 거 안다고 할 수도 없으니,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알겠어요, 유고. 고마웠어요.”
“그 목걸이, 중요한 거였냐?”
“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도둑질을 하는 상황으로 오해한 건가. 나는 손을 저었다.
“아, 그게, 어떤 아가씨가 한참 찾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좀 도와줄까 하고…….”
뭐, 그 어떤 아가씨의 사정을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게임에서 봤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그럼, 그 아가씨 있던 곳으로 가볼 테니, 저는 이만…….”
그리고 바로 내빼려고 했는데, 유고가 내 옆으로 따라왔다.
“같이 가지.”
“아, 아뇨. 이제 이 골목도 바로 떠날 거니까 신경 쓰실 건…….”
유고가 찌릿 나를 째려보았다. 거짓말하고 남의 물건 가져가는 거로 의심하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그 목걸이 잃어버린 아가씨는 정신없이 울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목걸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걸. 내가 그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겠지.
“가요, 그럼. 저쪽 교외 숲 옆에 있는 개천 근처였어요.”
◇◇◇
숲 근처로 가보자, 역시 게임에서 보았던 그 아가씨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터 바닥에 지쳐버린 듯 앉아서는 훌쩍거리는 중이었다.
아마 이 근처를 쥐 잡듯이 뒤졌는데 안 나와서 그런 거겠지. 그러다가 나무 위까지 올라가서 까마귀 둥지를 찾고 싶어지는 간절한 심정도 모를 바는 아니었다.
“저기, 아가씨!”
“네……?”
“아까 아가씨가 목걸이 찾는다는 소리 들었는데요, 혹시 이거 아닌가요?”
내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자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아……! 마, 맞아요!”
“호호, 다행이에요. 소중한 물건 같은데 수리해서 잘 보관해요. 아무래도 이음새가 끊어진 것 같더군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것보다 아가씨야말로 힘들어 보이네. 들어가서 푹 쉬어요.”
그녀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몇 번이고 감사한다는 말을 한 후 고개를 숙이고 마을로 돌아갔다. 휴, 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해결! 사람 안 다치고 잘 끝내서 다행이다!
“흐응. 남 돕자고 위험한 데서 어슬렁거리다니 이상한 여자.”
유고 페이넌스를 맞닥뜨린 건 계산 착오였지만 말이다…….
“네, 호호! 이상한 여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럼 잘 가요!”
나중에 왕궁에서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선 오늘은 대충 찢어지는 게 상책이다. 재빨리 인사하고 도망치려는데 그가 갑자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 죽고 싶지 않으면.”
“네? 무ㅅ……”
제대로 되묻기도 전에 유고가 먼저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내 앞으로 이동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오러 블레이드!”
횡으로 베어내듯 움직인 검이 시야를 가로지르고 푸른색의 전격을 닮은 검기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검기가 날아가는 방향은, 그늘진 숲 쪽이었다.
검기가 수풀에 닿기 직전에, 누군가가 수풀 사이에서 공격을 피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큭, 어떻게 알아낸 거지?”
“기척도 지우지 못하는 놈을 못 알아채는 게 더 어렵지 않나?”
유고가 여유 있는 자세로 검을 들어 날카로운 검 끝으로 적을 겨누며 대답했다.
아, 그랬지.
설정 과한 게임 <아란다스트 사가>의 등장인물답게, 유고 페이넌스 역시 설정 과잉이었다.
검의 극한에 달해 마법과 다름없는 ‘검기’를 방출할 수 있는 존재.
이 대륙에 일곱 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인 것이다…….
소드 마스터 같은 과잉 설정을 가진 주제에 제 형한테 열등감을 느끼다니 말이 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 따져 봤자 소용없으니 대충 넘기자.
검술 재능도 받쳐주고 자기한테는 검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검의 극한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유고 본인은 자신의 검 재능이 야만스럽다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뭐 그런 복잡한 설정이다.
아마 제 형처럼 매사에 침착하고 머리 좋고 유들거리는 사람이 부러웠나 보다.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 지지야!
혼란스러워서 잠시 생각이 다른 데로 워프했는데, 사실 지금 상황이 좀 심각하다.
유고의 검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 때문에.
초록색을 띠는 피부와 머리칼.
인간의 언어를 뱉고 인간과 비슷한 외견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존재.
마정령(魔精靈).
<아란다스트 사가>에서 인간과 대립하는 종족의 이름이었다.
‘정령’이라고 하면 수인인 진이 먼저 떠오르지만, 애초에 마정령과 수인은 존재의 기원이 다르다. 우리 흰둥이는 오히려 시초룡 알페이넌스랑 비슷한 존재고 마정령과는 상극이었다.
<아란다스트> 대륙의 마정령은 쉽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속의 마족과 비슷했다. 본인들은 자기네를 ‘정령’이라고 칭하지만, 인간의 목숨과 부정적인 감정을 삶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정령이라기엔 좀.
인간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족이며, 마왕 같은 ‘마정령왕’(역시 자기들끼리는 ‘정령왕’이라고 부른다)이라는 보스의 명령을 따르면서 인간 세계의 뒷면에서 살아가는 존재.
그게 마정령이다.
유고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빙빙 돌렸다.
“수련 여행 때 가끔 봤지만, 수도까지 들어오다니 아주 배짱 좋은데? 최선을 다해 죽여주마.”
선언과 동시에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르게 그가 이동했다. 마정령은 이를 갈며 검은색의 연기를 흩뿌렸다.
얼핏 연기처럼 보이는 저건 마정령족 특유의 검은색 피를 통해 나오는 힘이었다. 자신의 피와 맞바꾸어 파괴력과 독기로 상대를 압도하는 주술.
그 연기가 몸에 닿으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혀 목숨을 위협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독에 당하는 건 치명적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유고, 조심해요!”
그러나 내 외침도 무색하게, 유고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둘러 오러를 사방으로 뿌렸다.
그 검기만으로 검은색 연기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흩어졌다. 일부는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스러져 버렸다.
진짜 대단하구나, 소드 마스터라는 거……. 검을 휘둘러서 기체 같은 연기를 무력화한다니 눈으로 봐도 안 믿어지고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새삼스럽지만, 이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다 먼치킨이라 내가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어쩌고 할 깜냥이 안 된다. 걱정한 내가 머쓱하네…….
일단 한숨 돌렸다. 유고 쪽은 압도적인 검술 실력 덕에 위험하지 않으니까.
유고를 상대로 몸을 피해가며 반격을 꾀할 수 있는 걸 보면, 저 마정령 쪽도 꽤나 강력한 존재겠지.
다만, 상대가 나빴던 것뿐. 유고가 워낙 상식 밖의 괴물이라 마정령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유고가 우세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밀어두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예전에 있던 불가침 조약 때문에 마정령은 인간의 영역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는 설정이라, 아직은 마정령이 등장할 때가 아닐 텐데……?
◇◇◇
마정령이 본격적으로 <아란다스트 사가>에 등장하는 건 게임 중반부터다. 게임 시점으로 유고가 막 등장한 지금은 겨우 등장 캐릭터가 다 얼굴을 비춘 초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마정령이 나타나다니.
왜 쟤네들이 아직 등장 타이밍도 아닌데, 심지어 수도에까지 잠입해서 설치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깨물며 복잡해진 머리를 추스르는데, 문득 으스스한 기운이 목 뒤에 서렸다.
불길하고 끈적끈적한 시선과도 같은 것. 나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너도 저 인간과 한패?”
동시에 나는 최대한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두었다.
내가 경솔했어, 얘네들도 무리 지어 다닐 수 있을 텐데……!
어째야 하지? 지금 내 마법 실력으로 쟤들에게 대항하는 것은커녕,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유고가 오러를 휘둘러 이쪽의 마정령을 견제했다. 하지만 나를 노리는 마정령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여유롭게 검기를 피했다.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유고도 곤란해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유고가 저쪽 마정령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나 때문이었다.
마정령들이 내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또한 나까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검기를 조절하느라 유고가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아란다스트에서 ‘지키는’ 검술과 ‘공격하는’ 검술은 다르다. 어느 검술을 배웠느냐에 따라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도 다르다.
유고는 분류하자면 공격형 검술의 소유자였다. 내 안전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정령이 몇이나 되건 전부 쉽사리 썰어버렸을 유고이지만, 나 같은 혹을 달고 지키면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야 하는 상황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유고 혼자였다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검기를 방출해서 얘네들을 전부 해치우고도 남았을 텐데. 압도적으로 약한 내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어서 모든 상황이 꼬여버리는 것이 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내 쪽으로 한 명이 더 붙어 버렸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어이, 정신 차려!”
맞아,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야.
나 같은 거 무시해도 되는데, 유고는 굳이 나를 지켜주며 귀찮은 싸움을 하고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 정신도 못 차려서야 그게 무슨 바보짓인가.
유고가 펑펑 쏘아대는 검기에 맞춰 마정령들과 거리를 벌리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약하다는 걸 안다. 민폐가 되고 싶지 않지만, 민폐라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라도 받는 게 주제 파악을 잘하는 행동 아닐까?
“―전령의 숙명을 지닌 바람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마법을 쓰기 시작하자 당연히 경계 당했다. 내 쪽으로 팔을 뻗는 마정령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뒤로 뛰어 물러서며, 나는 발동을 시작한 스펠이 꺼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하앗!”
유고가 이쪽으로 거리를 좁히며 나에게 닿지 않지만 마정령에게는 피해가 갈만한 아슬아슬한 라인을 잡아 검을 튕겼다. 푸른색과 하얀색 검기가 혼합되어 땅을 가르고, 키가 작은 쪽 마정령의 왼팔에 깊이 상처가 파였다.
동시에 나는 팔을 위로 뻗었다.
하얀색의 덩어리 같은 것이 뭉글거리며 나비와 같은 모양으로 변모했다.
이윽고 나비 모양을 한 그 메신저는, 빠른 속도로 왕궁을 향해 날아갔다. 현재 상황을 긴급하게 알리는 마나 흔적이다.
미안해, 유고. 나한테는 힘이 없어서 왕궁에 있을 친구들한테 도와달라고 요청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걔들이 올 때까지만 부탁해.
그러나 의도치 않게, 나의 이 마법이 마정령의 허를 찌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언가 공격적인 마법을 쓸 거라고 짐작했는지 몸을 보호하는 듯 뒤로 뺐다가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고가 다시 검기를 흩뿌린다.
“오러 블레이드!”
작은 마정령은 나머지 오른팔마저 깊이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거의 팔이 날아가 버릴 기세로 상처가 깊었다. 검은색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빌……, 어 먹을 인간, ……불가침 조항을 깬 건 너희의 시초룡이 먼저다. 우리는……”
“헛소리는 연옥에서 마저 하시지.”
번개와 같은 눈부신 붉은빛과 함께 한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유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마정령은 무력하게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마치 황산이라도 뿌린 것처럼, 그가 흘리는 검은 피가 대지를 녹여갔다.
“그쪽이 먼저 죽이려고 달려든 거니까 불만은 없지?”
싱긋 웃으면서 유고는 검을 털었다. 저런 표정 보면 칼트 왕세자 동생 맞네……. 또라이 포스가…….
아니,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시초룡 알페이넌스가 불가침 조항을 깼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저 마정령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지만, 애초에 게임과 다르게 마정령이 수도에까지 잠입한 시점부터가 이상했다. 만약 시초룡이 먼저 움직여서 마정령 세력이 그에 대항하려고 이러는 거라면, 다소 이해되는 상황이긴 하니까.
……하지만 어째서? 왜 이렇게 게임과 다르게 돌아가는 거지?
“야, 조심해!”
유고의 일갈에 깜짝 놀라 몸을 굴렸다. 그 사이를 다시 유고의 오러가 갈라냈다. 검기를 피하지 못한 마정령의 오른 다리가 깨끗하게 절단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 마정령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실성했나?”
다리를 당해버린 이상, 피할 수는 없겠지. 압도적인 오러 앞에 저 생명은 스러질 것이다.
두 번 연속이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할 자신이 없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목숨을 바쳐 태초의 어머니, 정령왕께 도달하나이다.”
마정령이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와그작, 하는 출처를 알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가 나고 사방은 조용해졌다.
“…….”
“어이, 처리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동도, 흥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적을 제거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처럼.
이 판타지 세계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사회의 구조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려줬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사방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비린내 같기도 하고, 불쾌한 썩은 내 같기도 한 냄새가 그곳에 존재했던 어떤 생명체의 흔적을 전달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지탱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체 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바닥을 뒹구느라 붙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괜찮냐?”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했던지 유고가 물었다. 그제야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제대로 된 답례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별것도 아닌데, 뭐. 그것보다 마정령 놈들이 수도 영역까지 들어온 건 큰일인데. 형님께도 말씀드려야 하나.”
이러니저러니 반항아인 척해도 성실한 비둘기 왕자다운 반응이다. 마정령이 침입했다면 확실히 왕실 선에서 대책이 필요한 일이었다. 시초룡이 불가침 조항을 깼다는 말에 대한 진상 조사도 필요할 것이다.
먼지를 완전히 털어낸 다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정령의 시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우리를 향해 웃어 젖히며, 기도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던 마정령은 눈을 크게 뜬 채 이쪽을 노려보고 쓰러져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 야, 잠깐!”
시체에서부터 시커먼 촉수 같은 것이 몇십 가닥이고 생겨나 재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한다.
그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미혹의 골짜기. 백합 구근에 손을 대려고 했을 때의, 나를 덮쳐왔던 그 검은 아우라와 꼭 닮은―,
“하압!”
내가 채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유고가 검을 휘둘렀다.
유고의 검이 촉수를 갈라냈으나, 재생하며 다시 촉수가―
“아, 윽.”
내 몸을 휘감았다. 미끈미끈한 줄기가 뿜어내는 검은 액체가 내 몸을 물들였다.
“……크으, 아.”
고통이 덮쳐 오는 순간 냉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원혼을 담은 마정령의 피.
자신의 피와 맞바꾸어 파괴력과 독기로 상대를 압도하는 주술.
그 마정령은 피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대가로 주술을 걸고 죽은 것이다.
“……세네핀!!”
무력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그녀는 어둠 속에 있었다.
태초의 어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연의 나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공간 속에.
세상의 모든 단어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며, 세상의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혼자 몸을 웅크린 채, 그저 새카만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혹은 잠깐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소리 없는 말을 걸었다.
[―미혹의 심지를 지닌 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미혹의 심지. 미혹의 백합에서 해체해낸 ‘미혹의 반지’를 일컫는 것일까.
그렇다면 미혹의 심지를 지닌 자란, 자신을 말하는 것이리라고.
“세네핀, 크롬웰…….”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이름을 댔다.
그러나 곧바로,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 물었다.
[그것은 그대가 이 세계에 녹아들기 위한 분신체. 진정한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진, 정한 이름……?
그런 건……,
[그대의 세계에서의, 그대의 이름을.]
‘나의 세계. 지구의 한국.’
그 생각을 하자마자 세네핀은 자신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대의 이름을.]
그런 그녀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소리 없는 말의 주인은 물었다.
‘나의 이름. 분명히 있었을, 한국에서의 이름…….’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그녀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내 이름이 뭐였지?’
바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구역질이 심해지고 그걸 참느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윽, 하는 소리를 냈으나 어둠 속에서 소리는 전달되지 않았다.
【정신 강화, 보호 조치……】
어디에서부터 울리는지도 모르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방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캐묻던 목소리와는 또 다른 존재 같았다. 세네핀은 그에 대해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처음 들려온 건 울음소리였다.
훌쩍거리는 소리, 오열하는 소리,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여서 공중을 떠돌았다.
팔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서서히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이 흐린 시야 너머로 보였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다음 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정수리만 보이는 은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진……?”
“아!”
그가 바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신성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 얼굴이 아깝게, 눈과 코가 형편없이 퉁퉁 부어 있다. 볼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세네핀……, 세네핀!”
청년체의 모습을 한 그가,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꽉 안았다.
“여기, 는?”
“우리 거처다. 괜찮나? 머리는 안 아프고? 나는 사람을 부를 수 없는데, 이럴 때 루민스가 없다니…….”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나는 진이 말한 한마디에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루민스가 없다니요?”
“아.”
진이 조금 난처한 듯한 얼굴을 했다가 대답했다.
“약간 일이 있었다. 우선 세네핀은 안정을 취하고…….”
스펠로 왕궁을 향해 마나 흔적을 남겼으니, 내가 있는 곳으로 다들 달려왔을 것이다.
괜히 나를 도우러 왔다가 마정령의 저주 때문에 루민스가 말려들었다면? 그게 내가 몰랐던 사망 플래그라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 그런 게 아니다. 진정하거라, 세네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자기도 눈물 때문에 얼굴이 엉망인 상황에서, 진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민스는 잠시 용건이 있어서 나갔고, 나와 벨키나가 교대로 그대를 간호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완전히 기력을 다해서 방에서 자고 있다.”
호수에 빠졌을 때도 울면서 나를 걱정해주었던 벨키나였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얼마나 슬퍼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나중에 꼭 그녀에게 건강한 얼굴 보여주도록 해라. 그대를 걱정해서 식음도 전폐하고 있다.”
“……네.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라…….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이다…….”
다시 볼을 타고 주르륵 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에서 떨어져 내린 눈물방울이 은발을 적셨다.
“이틀 꼬박, 그대는 안 일어나고……. 다들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렇게, 심각했군요.”
“그래. 일단 눈을 뜬 건 다행이다만, 무슨 후유증이 있을지 모르니 역시 사람을 불러와야겠다. 나는 나갈 수 없으니 벨키나를 깨워서…….”
저는 괜찮으니 벨키나는 쉬게 놔두세요, 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타이밍을 가로막듯이 문이 열렸다.
“됐어, 진. 내가 확인할게.”
“아…….”
어딘지 수척한 얼굴, 평소와 다르게 단정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보라색 머리. 피곤해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
루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꺄, 루민이의 우수 깊은 얼굴이야!”라며 속으로 난리라도 피울 타이밍이지만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루민이가 나를 걱정했기 때문에 저런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 쉬어. 아무리 수인이라도 그렇게 안 자다가 몸에 이상 생긴다.”
“세네핀 상태 좀 보고 나서 잘 테니까. 들어가.”
진은 마지막으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 다음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진의 뒷모습을 잠시 묵묵하게 바라보던 루민스가 교대하듯 진이 앉았던 의자에 몸을 걸쳤다.
“잠깐 실례할게.”
루민스는 내 손목을 잡았다가 이마, 목 같은 부분을 한 번씩 손끝으로 눌러보듯 확인했다. 이성에게 닿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사무적인 동작이었다.
뭔가, 쌩쌩 찬 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주로 루민스가 원인인, 묘하게 차가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물었다.
“그게, 저기. 루민스가 용건 때문에 자리 비웠다고 진이 그랬는데요…….”
“좀, 이것저것. 왕실 요청으로 협조해서 조사하거나 처리할 것도 있고 해서. 마침 한차례 끝냈던 참이야.”
“마나 순환은 문제없어. 혹시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아직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피로한 것 외에는 정상으로 판단해도 되겠군.”
“아, 네! 제 걱정은 마시고, 그런데 루민스도 잠을 못 잔 거죠? 이만 주무시……”
“잠이 올 리가 없잖아.”
원망하듯 뱉어낸 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민스는 실수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니. 됐어. 신경 쓰지 마. 세네핀이야말로 더 쉬어야 하니까 자도록 해. 쾌면 주문 걸어줄게.”
“그…….”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펠을 외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긁힌 듯한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스펠이, 마치 자장가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대로 루민스를 보내버려선 안 되었다. 쾌면 마법이 작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전에,
“저, 기요……. 루민스.”
“왜.”
“있잖아요, 루민스. 저는 괜찮아요.”
뭐라고 해야 좋을지 잘은 알 수 없지만, 괜찮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루민스가 조금도 괜찮지 않아 보여서, 나라도 괜찮다고 강조해서 말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아주 씩씩해요! 튼튼해요! 배도 조금 고프고, 자고 일어나면 밥도 잘 들어갈 것 같아요!”
“세네핀…….”
“그러니까 저기……. 용서해주세요.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친 거, 정말 죄송해요.”
내 말을 듣고 루민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 않아, 세네핀. 네가 그렇게 위험할 때 네 곁에 없었던 내 잘못이야. 나도, 벨키나도, 진도……, 모두 잘못을 통감하고 있어.”
“아니에요, 그건……!”
“내 잘못이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너는 왜 수도 외곽의 숲 같은 곳을 찾아갔던 걸까? 나한테는 선물을 사러 나가는 거라고 했는데.”
루민스의 자책 어린 목소리에 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목적지를 숨길 생각만 했지, 그게 루민스를 속이는 짓이라는 점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았을 때 루민스가 내 거짓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같은 것도 역시…….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숲에는 왜 마정령이 있었던 걸까? 그것들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데. 거기다 쓰러지기 전의 너와 같이 있었던 사람은 왜 하필 유고 페이넌스였을까? 응? ―세네핀.”
루민스는 한마디 한마디 속을 긁어내듯 의문들을 쏟아냈다. 평소와 달리 전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어 루민스의 목이 쉬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질문 하나하나에 위태하기까지 한 간절함이 담겨 있어서, 마음 같아서는 루민이가 간절하게 쏟아낸 질문에 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머릿속이 그저 혼란스러웠다.
내가 입술만 달싹이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려니,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실은 계속,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어떤, 건가요?”
“세네핀은…….”
이어져야 할 말 대신, 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루민스가 보여주는 간절함의 근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작은 숨 삼키는 소리만으로, 무겁게 공간을 짓누르는 루민스의 감정이 내 피부에 닿을 듯이 느껴져 왔다.
이윽고 그가 나지막하게 질문했다.
“세네핀은, 우리에게……, 나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 같은 거 없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내 반응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딱히 지적하지는 않으며, 루민스가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밀. 루민스에게, 벨키나에게, 진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
당연히 있다. 이곳이 그저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 속의 세계라고, 너희는 거기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나는 그 게임 덕분에 미래를 알고 있다고.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인, 그런 비밀이라면 있다.
그 비밀을 털어놓으면 루민스에게 대답이 될까? 하지만,
“……그, 게.”
입술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을 말한다고 의미가 있을까? 지금 내 앞의 루민스는 이토록 진지하고 간절한데. 정작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왔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면 진심을 놀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말할 수 없어?”
“……네.”
간신히 토해낼 수 있었던 한 마디가 마치 거대한 죄악처럼 내 가슴을 짓눌렀다. 도저히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건 너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정체와 관련되어 있어서?”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루민스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그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소리 없는 눈물.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루민스는 흐르는 눈물을 그저 방치한 채로 울고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도, 이곳에 와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루민스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강하고, 여유 있고, 어딘지 의뭉스러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실은 말이지. 난 예전에 무척 유약하고 소심했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미혹의 골짜기에서 들었던 루민스의 말이, 지금 다시 떠올랐다. 예전의 루민스는 저런 얼굴로 울었던 것일까.
어떻게든 저 눈물을 멎게 해주고 싶었다. 루민스의 우는 얼굴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속 메모리얼 앨범에 저장한다느니 그런 헛소리 따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단지 그가 눈물을 그쳤으면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간절했다.
“저, 정체라느니 뭐라느니 대단한 건 아니지만,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가 미안한 게 많지만,”
중언부언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뱉어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루민스의 눈이 어쩐지 조금 커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채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도, 루민스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루민스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채로 조용히 웃었다.
그 표정은 기묘하게도, 지금까지 보았던 루민스의 그 어떤 얼굴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가망성 없는 희망이 기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해.”
루민스가 걸어준 쾌면 마법의 효과가 돌기 시작한 것인지, 눈꺼풀이 급격히 무거워졌다.
“너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뻐.”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10. 과보호 안 해도 돼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처럼, 이후의 시간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특별히 아프거나 불편한 곳도 없어서, 나는 얼마 안 있어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무척 멀쩡했지만, 아무래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기, 벨키나. 이 정도로 과보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오랜만에 정원에 나와 앉은 것은 좋은데, 벨키나가 내 입을 향해 딸기를 집어주며 “아~” 하고 먹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다들 호들갑을 떨며 말리는 통에, 요 며칠간은 정말 남에게 사육당하는 인형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다.
심지어 레이스가 잔뜩 달리고 자수가 놓인, 앤티크 인형이나 입을 만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이렇게까지 나를 받들어 모실 필요가 있는지 다시 한번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세네핀이 걱정되는걸! 우리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도 모르고!”
저 말을 꺼내면 마음이 약해진다. 어떻게도 반박할 수가 없는걸. 결국, 나는 입을 벌려 그녀가 내민 딸기를 받아주었다.
내 어깨에 앉아 있던 진도 맞장구쳤다.
“맞다, 세네핀. 내 생각에는 향후 1년 정도는 완벽하게 안전한 환경에서 그대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1년 동안 사육당하기는 싫은데.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도 피해야 하고.
……그렇지. 루민스.
루민스를 떠올리니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어, 왜 그래, 세네핀! 딸기 맛없어?”
내 표정을 보고 진과 벨키나가 깜짝 놀라 황급히 얼굴을 들이댔다. 아니, 그렇게 과잉 반응할 거 없다니깐…….
“아뇨,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루민스가 생각나서. 걱정 많이 끼쳤고.”
루민스가 나를 찾아와 울면서 속삭였던 그날이 벌써 3일 전이었다.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실은 그날 일이 꿈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 루민스는 쾌면 마법을 걸어주고 밖으로 나갔을 뿐인데, 혼자 남은 내가 아프고 잠에 취한 나머지 꿈을 꾼 게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눈물에 젖은 그의 얼굴, 간절한 듯 무언가 짜내는 목소리는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날 루민스는 나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다. 또한,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도 했다.
그가 어째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루민스 할데르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임을 하면서 내 최애의 모든 것을 보아 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 세계에 빙의한 후, 쌓여 가는 것은 의문뿐이었다.
자기가 원래는 소심하고 눈물이 많았지만 노력해서 바뀐 거라는 루민스의 말이나,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색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마법이라든가…….
위화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 보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식은땀이 손바닥 안쪽에 축축하게 고여 들었다.
3일이면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몸이 안 좋은 걸까?
나는 벨키나와 진이 눈치채지 못하게 혼자 아픔을 삼켰다. 아픈 내색을 했다간 두 사람 모두 잔뜩 걱정할 게 분명했다. 다행히 두통은 곧 가라앉았다.
“저기……. 루민스는 오늘도 못 오는 거죠?”
“응, 아무래도 이번에 마정령이 수도에까지 침투한 게 심각한 상황이라……. 왕실 측이랑 협조해서 차후 대책까지 짜느라 고생이 많은 것 같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얼굴이 말이 아니었는데……. 왕실은 사람을 너무 혹사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묻자, 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게, 루민스 본인이 희망해서 일하는 것에 가까워. 왕세자 저하조차 좀 쉬는 게 어떻겠냐고 난색을 보이셨거든. 그런데 걔가 고집부리는 거라…….”
내 안전이라니. 제일 중요한 건 루민스의 안전인데.
마정령 침입 대비 같은 일을 맡았다가 마정령하고 마주쳐서 사망 플래그가 뜨거나 하지는 않겠지? 내가 마정령과 만난 것도 원래의 게임 전개를 생각하면 발생할 이유가 없는 사건이라서, 루민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크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에는 엮이지 않도록 말리고 싶지만, 나도 겨우 병상에서 일어난 참이라 적극적으로 루민스의 현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벨키나가 매일매일 소식은 확인해주고 있지만…….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에 공통 루트의 진행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는 것도 문제다. 이제 곧 다가올 위무 파티 이벤트만 끝나면 공통 루트는 끝이었다.
공통 루트가 끝날 때까지 루민스 루트를 확정시키지 못하면 노말엔딩 루트가 되어버린다. 루민스 루트로 넘어가야 이후의 진행이 그나마 안전해지는데…….
초조했지만 시간이 부족한 데다 애초에 벨키나랑 붙여줘야 할 루민스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역시, 루민스 루트 진입은 포기하고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를 직접 관리하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마지막에 어떻게든 호감도를 대폭 올리면 루트 진입이 되지 않을까?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며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오해한 것인지, 벨키나가 우울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나도 힘이 부족한 게 원망스러워, 세네핀. 내가 더 마법 실력이 있었다면 지금 루민스랑 같이 세네핀이 안전할 수 있도록 여러 조처를 할 텐데.”
“나도 쉽게 다른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인 것이 지금만큼 분한 적은 없었다.”
나는 진과 벨키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 그런 의미로 한 소리는 아니에요! 둘 다 정말……,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조심성이 없었던 게 잘못인걸요.”
“세네핀 잘못 아냐!”
“세네핀 그대의 잘못은 없다.”
……방금 이거 데자뷔가 드는데.
나는 멋쩍은 기분으로 두 사람을 토닥토닥한 다음 목걸이 체인을 만지작거렸다.
정신을 완전히 차리고 나서 들은 설명에 의하면, 정통으로 대량의 독에 당했기 때문에 정말로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모양이었다. 유고가 바로 촉수들을 해체해서 분리했고, 얼마 안 있어서 현장에 달려온 루민스가 응급조치를 취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목걸이 체인에 꿰여 있는 ‘미혹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새카맣던 미혹의 반지는 새하얗게 색깔이 전부 빠져 있었다. 눈을 뜬 뒤에 혹시나 확인해보니 반지의 색이 이렇게 바뀐 뒤였다.
당시의 나는 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부적으로 가지고 다녔던 이 반지 덕분일 것이다.
……가능하면 이 반지가 도움이 될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목숨을 건진 마당이니, 왠지 이 반지가 은인처럼도 느껴졌다. 그래서 색이 바래서 효력이 사라진 반지를 줄에 꿰어 계속 목에 걸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세네핀. 손님이 오셨어.”
“손님?”
“응.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사과를 받을 일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는데, 정원의 아치 너머로 두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칼의 귀공자,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이는 금발의 귀공자. 두 사람은 똑같이 고혹적인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제비 왕자와 비둘기 왕자, 조류 형제잖아.
“세네핀 크롬웰. 자네 얼굴을 본 지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무척 오랜만처럼 느껴지는군. 이제 몸은 거의 회복되었다고 들었네.”
먼저 다가와 무척 고풍스럽게 망토를 들어 예를 갖추며 칼트가 내 안부를 물었다.
칼트가 입고 나타난 옷은 공식 행사의 정복 수준은 아니지만, 자수와 보석으로 장식하고 짙은 남색으로 세련되게 마무리된 것이라 칼트의 외모와 무척 잘 어울렸다.
한낮의 소박한 티타임용으로는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게 문제였지만.
“……여, 염려해주신 덕분이옵니다, 저하.”
“내 우제(愚弟)가 폐를 끼쳤다지. 같이 정식으로 사과하러 왔네.”
어딘지 우울한 기색으로, 유고가 들고 온 꽃다발을 말없이 나에게 넘겼다. 제라늄처럼 자그마한 분홍빛과 보랏빛 꽃들과 덩굴장미 같은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꽃다발을 만든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허름한 옷차림은 흔적도 없이, 유고 역시 자기 형처럼 왕자다운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칼트의 남색과 대조되는 붉은색이 산뜻했다. 저 형제 둘 다 얼굴만은 최상급이니까 뭘 입든 안 멋있겠냐마는.
“……미안하다, 정체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 나라의 제2 왕자, 유고 페이넌스라고 한다.”
아냐, 난 알고 있었으니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단다, 비둘기 왕자!
그리고 어차피 진하고 벨키나에게 그때 같이 있었던 너의 정체가 둘째 왕자였다는 설명도 사전에 들었는걸…….
이쪽으로 걸어올 때부터 노골적으로 시무룩한 얼굴이었던 건 아무래도 미안해서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기로는 내가 더하지 않겠니?
유고의 정체를 이 자리에 와서야 알게 된 척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왕자님이셨어요?”하고 놀라는 연기까지 하기엔 내가 지금 좀 힘들거든…….
“친구들한테 이야기는 들었답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왕자님 상대로 실례가 많았던 것 같네요.”
“그렇지 않다. 나야말로 곁에 있으면서 너의 사고를 막지 못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어떤 말로도 부족하겠으나…….”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유고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라는 것보다 먼저 그가 자신의 검을 검집째로 마치 나에게 바치듯 올렸다.
“시초룡 알페이넌스에 맹세코, 이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대를 지키는 검이 되리라.”
“……네?”
유고와 칼트와 벨키나와 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굳어버렸다.
아니 잠깐……, 이 검을 바치는 맹세는 게임상 유고 루트에서도 후반부에 나오는데?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앞으로 너희가 참가하게 될 ‘신의 그릇 회수’ 계획에 나도 함께하여, 너를 호위하겠다는 의미다.”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일어선 유고가 그렇게 고했다.
엄청난 선언에 입을 뻐끔거리고 있으려니, 칼트가 옆에서 웃었다. 웃을 때냐, 제비 왕자! 안 말리고 뭐 해!
“후후, 우제는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
“……형님. 그런 게 아닙니다.”
“유고가 자네에게 이번 건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최선의 성의를 다하고 싶은 모양이라. 편하게 받아주게나. 모왕(母王)께서도 기꺼이 허가하셨네.”
페이넌스의 국왕이자 조류 형제의 어머니인 쉐이런 리코위 페이넌스마저 허가했다면, 이미 결정된 사항이란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 둘째 왕자를 정식으로 보디가드 삼아 데려가는 건 과하지 않아? 게임의 유고 루트에서는 자기 정체 안 밝히고 멋대로 벨키나를 따라가는 거였는데.
그야 유고 입장에서는 옆에 있는데 사고를 못 막아서 책임감을 느끼긴 하겠지. 나름대로 검술 실력에 자신이 있는데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도 쇼크겠고.
그렇다고 굳이 이렇게 오버스러운 결론을 내릴 건 없잖아?
“유, 유고 왕자님.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황송한 일 아닌지…….”
“전처럼 유고라고 해도 된다.”
“내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그런 것뿐 다른 의미는 없다. 나중에 다시 오지. 몸이나 잘 추슬러라, 세네핀.”
그러고서는 뚜벅뚜벅 먼저 정원 밖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덕분에 이렇게까지 오버 안 해도 된다고 설득할 틈도 없었다.
어째서인지 벨키나가 옆에서 내 팔짱을 꽉 끼면서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지? 유고가 갑자기 멋있게 나와서 신경 쓰이나?
진도 내 어깨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어깨를 발톱으로 꽉 누르고 있다. 흰둥아, 너 발톱 은근 아프니까 그만…….
칼트는 유고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집안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사고뭉치를 이렇게나 훌륭하게 길들여주다니 자네에게 고마울 따름이군. 어리석긴 하나 나에게는 소중한 동생이니 모쪼록 귀여워해 주게나.”
딱히 길들이고 어쩌고 할 만큼 쟤랑 오래 만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사적인 견해지만 제비 왕자 얘는 제 동생 그만 놀려먹고 나름대로 아끼는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형제 관계가 개선된다고 보는데…….
물론 유고가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아 참, ‘신의 그릇 회수’ 계획에 앞서, 참가자들의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며칠 후 위무 파티가 있을 예정이네. 그때면 몸 상태도 완전해졌을 테니 자네도 꼭 참석하도록.”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공통 루트의 마지막 이벤트가 눈앞으로 다가왔구나.
“네, 마음 써주셔서 황송합니다. 저하.”
대꾸하며 인사를 보내자 칼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때, 레이디 세네핀과 첫 춤을 추는 영광을 내게 주었으면 하네만.”
“……네?”
옆에서 벨키나가 으스러뜨릴 기세로 내 팔을 당겨 더 꽉 팔짱을 꼈다.
아파, 아파! 그리고 아까부터 가슴 엄청나게 닿고 있어, 벨키나!
진 너도 어깨에 발톱 진짜 아프니까 그만하자!
그리고 그 통에 너무 직설적으로 거절해버렸다!
명색이 왕세자인데 마음속 취급이 건성이다 보니 본심이 튀어 나와버렸어…….
“소, 송구합니다……! 왕세자 저하께 무례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같이 춤을 춰줄 텐가?”
대답하기도 전에 벨키나가 끼어들었다.
“그런 식으로 약점 잡고 신청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하!”
“레이디 벨키나도 나에게 무척 적대적이지. 나의 부덕의 소치라 생각하겠네.”
“레이디 세네핀. 언젠가 자네의 자비가 나에게도 떨어져 내려올 날을 고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나무랄 데 없는 포즈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칼트는 정원을 뒤로했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벨키나가 내 팔을 놓아주며 입을 삐죽거렸다.
“얄미워죽겠어! 나 다음 파티 때 남장할까 봐!”
“어, 어머나.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하나요, 벨키나.”
“여자끼리는 춤 안 추잖아. 내가 남장하면 세네핀이랑 제일 먼저 춤출 수 있을 거 아냐!”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호호, 벨키나도 차암. 어쩌면 그날에는 루민스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두 분이서 춤추는 게 어때요?”
“……내가 루민스랑? 대체 왜?”
“그게, 선남선녀라서……?”
나의 조악한 핑계는 먹히지도 않는 것이었는지, 벨키나는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소리가 또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벨키나……. 역시 호감도 글러 버린 거니. 루민스 루트 물 건너간 거니…….
“그래, 이렇게 된 거 드레스 입고 나랑 같이 춤추자, 세네핀!”
“네에?”
“남들 눈이야 뭐 어때. 나, 세네핀이 예쁜 드레스 차려입는 거 꼭 보고 싶어!”
“물론 그건 저도 그래요, 벨키나.”
마법연 시찰단 파티 때 벨키나한테 예쁜 옷 못 입힌 게 아직도 미련으로 남아 있다. 이번에야말로 벨키나의 미모를 1000% 받쳐줄 만한 옷을 입혀줄 생각이었다.
“그럼 꼭 같이 춤추기야?”
벨키나가 화악 밝아진 얼굴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얼굴을 실망시킬 수도 없어, 나는 끄덕였다.
“네, 그러도록 해요.”
“너무 신난다! 에헤헤! 나도 세네핀의 드레스 엄청 엄청 기대돼!”
“……나는 매우 섭섭하다, 세네핀.”
“어머, 그게. 아무래도 진은 파티에 참석하기 어려우니까요. 대신 나중에 다 같이 놀아요. 인간의 파티 같은 건 아니더라도요.”
“약속하는 건가?”
“약속하고 말고요!”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진이 기분 좋은 듯 몇 번이고 뺨을 비볐다. 벨키나도 왠지 경쟁하듯이 다시 팔짱을 끼더니 머리를 내 어깨에 비볐다. 귀여운 녀석들. 나는 벨키나의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지금도 일하고 있을 루민스를 생각했다.
무척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를.
11. 그는 언제나, 현실감 없는 달밤에
결국, 파티 당일까지 루민스는 우리의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루민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반, 공통 루트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간다는 초조함 반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진이나 벨키나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각오하기로 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루민스 루트에 진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되면,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를 내가 직접 나서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두고 각오를 다지니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은 더 미련 두지 말자.
그보다 지금 내 앞에 예쁜 드레스를 갖춰 입은 벨키나가 있는데, 벨키나의 미모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호호, 우리 벨키나는 뭘 입어도 예쁘지만, 오늘은 정말 눈부시네요!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벨키나일 거예요.”
나는 끄덕이며 벨키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색 드레스는 별이라도 뿌려놓은 듯 크리스털로 옷자락을 장식했고, 고급스러운 레이스가 목과 어깨, 가슴 부분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디자인이 무척 보기 좋았다. 심플한 티아라와 땋아 올린 섬세한 머리 스타일도 잘 어울렸다. 마법연 파티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고급스러운 구두까지 신길 수 있었다.
벨키나의 세팅을 도와준 왕궁 하녀들도 모두 뿌듯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보아 나와 같은 마음일 테지.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고 세네핀한테 예뻐 보이면 됐어!”
드레스에 어울리는 푸른 부채를 손에 쥐여주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농담 아닌데……. 그리고 세네핀도 예뻐!”
“어머나, 고마워요.”
내가 입은 것은 짙은 초록색의 조금 금욕적인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가슴 크기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목이랑 어깨 부분만 약간 파인 정도.
대신 화장과 머리 스타일, 액세서리를 화려하게 꾸민 편이라 내가 봐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하나, 런웨이의 모델 언니들 비슷한 느낌? 인상이 강해 보이는 얼굴도 이렇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드레스 디자인은 등을 더 확 파버려서 과감한 게 좋았을 것 같지만.”
“벨키나도 참 대담한 취향이었군요.”
“세네핀이니까 보고 싶은 거야!”
벨키나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이 언니는 남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벨키나를 사랑한단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응! 첫 춤은 꼭 나랑 추는 거야!”
그 말을 듣더니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신사가 레이디에게 춤을 신청할 때의 포즈 같아서 나까지 웃음이 터졌지만, 천천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가시죠, 레이디 세네핀.”
“네에, 레이디 벨키나.”
음악이 가득한 파티 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와 벨키나의 춤은 역시나 주목을 받았다. 언제 남자 쪽의 스텝을 연습했는지 벨키나의 댄스는 완벽했지만, 아무래도 여자끼리 춤춘다는 자체가 희한하게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뭐 어떻담. 우리 벨키나의 완벽한 미모를 구경하라지! 그렇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한 곡을 끝낼 수 있었다.
“자네들은 항상 예측을 벗어나서 재미있군.”
우리의 춤이 끝나고 다가온 칼트가 칭찬인지 뭔지 미묘한 발언을 했다.
“호호, 왕세자 저하께 기쁨을 드렸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옵니다.”
“자네에게 거절당한 초라한 사내의 질투라고 생각해주게. 그만큼 레이디 두 명의 춤사위가 근사했으니까.”
“저하는 세네핀 말고도 춤추고 싶어 하는 여성이 많으니까 충분하시지 않을까요!”
내 팔짱을 끼며 벨키나가 끼어들었다.
“그건 반대로 레이디 벨키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네만. 모두 자네를 선망의 눈으로 보고 있네. 나 역시 한 곡 부탁하고 싶고.”
“헤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세네핀이랑 춤춘 것으로 만족해서요.”
“흐음.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이렇게나 차가우니 내가 마음이 상하는군.”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과 포즈를 과장되게 취하며 칼트가 그렇게 말했다.
“자네들의 벗, 루민스 공자 말이네만. 오늘 드디어 업무가 마무리되었다네. 가능하면 오늘 파티에 바로 와달라고 전했는데, 늦는군.”
루민스가 온다고? 칼트가 입에 올린 이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들고 있던 부채를 놓칠 뻔해서 허둥거리며 다시 쥐는 동안 내 옆의 벨키나가 반갑게 대꾸했다.
“와, 루민스가 드디어 오는군요! 그렇지만 피곤할 텐데 파티에 오는 것보다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게 낫지 않나…….”
벨키나가 기뻐하면서도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다. 나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러게요! 저하도 그냥 쉬라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루트 진입의 마지막 가능성을 생각하면 루민스가 파티장에 와서 벨키나를 만나는 게 좋다는 건 알지만, 순수하게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건강 해치면 안 될 텐데…….
“그렇지만 레이디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루민스 공자로서도 아쉬운 일 아니겠는가? 정히 몸 상태가 안 좋다면 본인이 자제하겠지.”
“아무튼 정말 기쁜 소식 맞네요. 처음으로 저하에게 긍정적인 인상이 생겼어요!”
“레이디 벨키나는 요즘 나에게 너무 사양이 없지 않나?”
“에헤헤! 기분도 좋으니까 사과의 의미로 한 곡 하실까요?”
혀를 내밀며 벨키나가 춤 신청하듯 칼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헉, 설마 시작되는가, 재벌 남주 드라마의 레퍼토리, ‘극혐이 사랑으로 넘어가는’ 단계? 이대로 벨키나가 극혐하던 칼트에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거야?
“저, 저도 저하와 춤춰도 괜찮습니다!”
급박한 마음으로 손을 들며 끼어들자 칼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루민스 공자 덕에 오늘 내가 무척 자비를 많이 받는군.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정이니, 이따가 부탁하겠네.”
“안 돼요, 잠시만요! 벨키나……!”
그 손을 붙들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빠르게 홀 가운데로 걸어가 버렸다.
어떡하지, 끼어들지 못했어, 이러다 칼트 루트로 빠져버리는 거 아니야?
아냐, 지금까지 칼트는 벨키나에게 밉보이기만 했잖아. 오늘은 그냥 춤만 추는 거고 괜찮을 거야.
루민스가 도착하고 나서 벨키나랑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다면, 아직 루트 회생의 기회가…….
손수건을 물어뜯고 싶은 마음으로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고뇌하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이.”
“아, 어머나. 유고 왕자님.”
오늘은 푸른색의 망토와 밝은 색상의 의상을 갖춰 입은 유고였다.
“호호,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공적인 장소에서 그런 불경한 짓은 못 하죠.”
그나저나 비둘기 왕자, 원래 사교계니 파티니 이런 거 엄청 두드러기 있지 않았나? 용케 답답한 옷까지 갖춰 입고 이런 데에 왔네. 정식으로 신분을 알리고 왕자로서 행차한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럼 공적인 장소가 아니면 꼭 이름만 불러라. 꼭이다?”
나는 유고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유고가 항의했다.
“뭐, 뭐지.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잘, 잘생……, 그러니까 넌 수치라는 게 없는 거냐……!!”
하, 좋다. 이 평화로운 반응. 이미 몸은 다 나았지만 치유되는 거 같다. 역시 비둘기 왕자.
하긴,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도 없이 아웃사이더인 녀석이니까 자기한테 막 대하는 나한테 친근감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 벨키나랑 다리는 못 놔주겠지만 이 누나가 친구 정도는 해줄 수 있단다!
“이상한 여자니까 어쩔 수 없죠, 호호. 그나저나 왕자님은 춤 안 추시나요? 아가씨들의 눈길이 뜨거운 것 같습니다만.”
이번 파티는 우리 마법 연구원 쪽 말고도 왕실의 계획을 진행할 예정인 마법사들이나 관계 귀족들이 다 모인 자리라 젊은 여성들도 제법 있었다. 그중에는 유고 쪽을 흘끗거리는 눈이 상당히 많았다. 유고의 정체를 알지 못할 텐데도 말이다. 하긴 척 보기에도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엄청나게 잘생긴 청년이 있는데 다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어머나, 그럼 뭐 때문에 참석하셨나요? 왕자님, 이런 모임 즐기시지 않을 것 같은데.”
“난 너한테 검을 바치는 맹세를 한 몸이다. 네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만.”
“그……. 왕궁 한가운데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굳이 그런 걸 걱정하실 건?”
“수도 홀르나 안에서 마정령에게 공격당하는 악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지 않냐.”
듣고 보니 그럴싸하긴 했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공격당한 것도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긴 하네.
“너야말로 춤은 더 안 추는 건가?”
“왕세자 저하께서 청하셔서요. 이따 추지 않으려나요? 저는 이미 벨키나랑 춰서 만족했지만요.”
“형님이…….”
중얼거리는 유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아차, 형한테 콤플렉스 있는 녀석인데 괜히 제비 왕자 화제를 꺼냈나?
“네?”
“춤 말이다. 형님과 출 수 있으면, 나도 괜찮겠지?”
어색하게 유고가 손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춤 신청이라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형을 향한 대항 의식이 뻔히 보이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는 미소하며 그 손을 잡았다.
“제가 춤을 못 춰서 발을 좀 밟을 것 같지만요. 잘 부탁드립니다, 유고 왕자님.”
“흥, 내가 발을 밟히리라 생각하냐? 결투 신청으로 받아들이지.”
하여간 공격적인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유고와 손을 맞잡고 스텝을 옮겼다. 음악의 한 마디가 끝나고 다음 소절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홀 중앙으로 빙글빙글 스텝을 밟으며 합류하고는, 천천히 리듬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어려운 박자가 아닌데 몇 번 스텝을 놓칠 뻔했다.
실은 계속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칼트 말로는 루민스도 파티에 올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아직 안 온 걸까. 피곤할 테니까 파티는 포기하고 쉬러 갔을까. 바쁘다던 게 끝났댔으니 내일은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루민스 생각 때문에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이 파티장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로 맛있는 걸 먹고, 따뜻한 대접을 받고, 즐거운 수다도 떨었지만, 내 머리 한구석은 항상 루민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최애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다니 중증이구나……. 심지어 액정 너머 2D가 아니라 입체 서라운드에 4D로 펼쳐지는 최애니 어쩔 수 없긴 하지. 장난스럽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넘기려 하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지고 마음이 술렁거렸다.
무척, 루민스를 보고 싶었다.
◇◇◇
연주가 종료되는 동시에 스텝이 멈추었다. 천천히 내 허리에서 손을 뗀 유고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상대와 춤출 때 딴생각 하는 거 실례 아니냐.”
“어머……, 그……. 제가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오호호, 설마요. 그래도 정말 발 안 밟히셨네요.”
“흥, 그 정도쯤이야.”
으쓱하고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게 귀여웠다. 지적하고 놀려먹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순간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는 숨을 훅 들이켜고 말았다.
마치 가장 어두운 새벽녘의 하늘로 자아낸 듯 새카만 예복이 눈에 들어왔다. 옷의 요소요소에 흑진주와 흑요석, 오팔 같은 보석들이 장식되어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모양새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단정한 이마가 드러나게 뒤로 넘긴 보랏빛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고, 그 머리칼을 살며시 걸어둔 얼굴과 황금빛 눈동자에서 예민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빠져들 듯한 새벽 같은 그 의상에 묻히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는, 내가 정말 잘 아는 사람이었다.
“루민스…….”
아니, 여전히 잘생기긴 했는데 우리 루민이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애 밥은 먹이면서 부려먹으라고, 페이넌스 왕가!
온갖 각도로 루민이 얼굴을 감상하며 찬양하고 싶으면서도, 애가 지나치게 피폐한 분위기인 게 안쓰럽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마음을 지배한다.
이 누나 마음이 너무, 다각도로 괴롭구나…….
한차례 왈츠가 끝난 타이밍과 겹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었지만, 별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루민스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마침 댄스가 끝난 벨키나도 루민스에게 다가가 반색했다.
“루민스! 정말 걱정했다구. 잠은 제대로 잔 거야? 밥은 챙겨 먹었어?”
“걱정 끼쳐서 미안, 벨키나. 얼굴색이 좋은 걸 보니 넌 잘 먹고 잘 잤나 보군.”
“보자마자 시비냐?”
나누고 있는 대화 내용은 지극히 털털한 친구 사이였다. 연애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친구……. ……역시, 루민스 루트 물 건너간 건가?
그렇지만 둘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져서 보면 둘 다 선남선녀 맞다.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리지, 응…….
순간 묘하게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이 잘 되는 게 제일 좋은 일인데 왜 이런담.
“다시 뵙습니다, 유고 왕자님.”
벨키나와 가볍게 환담을 끝낸 루민스가 내 쪽으로 다가와 유고에게 먼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래.”
“일전에는 실례 많았습니다. 세네핀을 데려가도 괜찮을지요?”
유고가 노골적으로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을 하더니, 춤을 끝내고 나서도 놓지 않고 있던 내 손을 꽉 쥐었다. 루민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고를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얘네 저번에 얼굴 마주쳤을 때 싸웠나? 분위기가 왜 이래.
“오, 오랜만이에요. 루민스. 저기, 저보다는 벨키나랑 먼저 이야기 나눌 일 없으신가요?”
루민스 루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다, 뭐.”
벨키나가 입술을 삐죽거린 후 혀를 내밀더니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루민아……! 호감도 깎는 짓을 왜 골라 하니!
이 와중에도 유고는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이 손을 뿌리치고 벨키나를 쫓아가서 다시 데려오면 분위기 엄청 이상해지려나?
“세네핀. 시간 내줄 수 있을까?”
게다가 어딘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최애가 부탁하는데 거절하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저기, 유고 왕자님. 저도 루민스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
유고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없이 내 손을 놓아 주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그는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듯했다.
역시 저번에 루민스랑 싸웠나? 내가 마정령 때문에 쓰러졌던 때일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고 왕자랑 춤도 추고, 그동안 많이 친해졌나 봐, 세네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루민이의 표정이 묘하게 뚱해 보였다. 목소리도 어쩐지 까칠한 것 같다. 많이 피곤한가……?
나는 손을 저으며 그의 오해를 풀었다.
“친해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루민스, 그것보다 피곤해 보이는데 이런 곳까지 오고, 괜찮아요?”
루민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어딘지 기운 없어 보이던 얼굴에 옅게 미소가 돌았다.
“노, 농담은 적당히…….”
놀리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의 말에 동요하는 마음이 더 컸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황금빛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가늘게 휜 눈꼬리 안에서 반짝였다.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보고 싶었어.”
아니, 루민아. 그런 과도한 서비스 나한테 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손을 파닥거리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걸 식히고 나는 말을 돌렸다.
“아, 아이참. 사람은 그만 놀리고요. 저기,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군.”
그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팔을 내밀었다. 팔꿈치를 살짝 굽혀 든 채로 팔을 내게 내미는 자세였다.
어, 뭐지?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오늘 파티장에서도 지나가듯 몇 번 봤다. 잘 차려입은 남성이 딱 저렇게 팔을 내밀면, 귀부인 같아 보이는 여성이 남성의 팔꿈치 쪽에 살포시 손을 얹거나 아예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어가곤 했다.
근데 루민스가 왜 그렇게 팔을 내밀고 있지?
“……?”
그 팔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의 팔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잡을 거야?”
“네? 어, 저기…… 잡다니요?”
“이야기하고 싶다며. 테라스까지 에스코트해야지 싶어서.”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파티. 에스코트. 흔히들 하는 행동이 맞기는 한데.
내가 어버버거리며 채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내 손을 끌어 그의 팔에 얹게 했다. 발밑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루민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 어디로 가기로 했더라? 백지처럼 하얗게 되어버린 머릿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
루민스의 팔에 이끌려 테라스까지 에스코트 받았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채 몽롱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다행히 테라스에 도착했을 때쯤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어,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파티장이라고 이렇게 매너 넘치는 신사 모드가 되어서 물 흐르듯 에스코트까지 해주다니, 우리 루민이는 정말 멋있기도 하지. 하지만 이 누나는 머릿속이 터질 뻔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조금 자제해 주지 않을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테라스의 문을 열자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약간 서늘하다고 해야 할까, 춥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다. 슬슬 늦봄에 가까워져 가는 날씨다웠다.
테라스로 나온 루민스는 달을 등지고 난간에 소리 없이 기댔다. 검은빛 착장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에 달빛이 부딪쳐 반짝거린다.
부서지듯 흩어지는 그 빛이 없었다면, 일순 눈을 떼는 순간 어둠 속에 녹아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루민스의 모습은 달밤과 어우러져 있었다.
루민스의 황금빛 눈이 또렷하게 나를 응시해 왔다. 언제나, 어두운 밤에 루민스와 함께할 때마다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저도 모르게 이 말부터 꺼내고 말았다. 말해놓고 이게 아닌데 싶어 아차 했다. 그치만 수척해진 게 팔을 잡고 오는 동안 직접 느껴져서.
“도축용이 아니니까 고기가 없어도 상관없지 않나.”
“농담할 때예요?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본인 건강이 최고잖아요.”
“괜찮아, 걱정할 만큼 혹사한 건 아니니까.”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았지만, 루민스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이젠 더 일 안 하는 거죠? 괜찮은 거죠?”
“응. 전반적인 체계 구축은 끝나서 이후에는 자잘한 실무뿐이라…….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체계 구축이요……?”
“마법 방위 체계, 라고 해야 하나. 적의 경계부터 보고 전달까지 전반적으로. 원래 왕세자 저하께서도 관심이 있던 분야라 승인이나 실행이 빨랐어.”
“…….”
마법 이론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나조차도 루민스가 엄청난 규모의 일을 하고 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국방부 보안 시스템을 혼자 기획 설계 뼈대 만들기 다 했단 소리 아닌가……?
“……그,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는데! 왕실에서는 뭐 안 주나요! 무료 봉사 같은 거 하면 안 돼요, 루민스!”
그거 열정페이다! 재능 착취라고! 이 누나는 그런 거 용서 못 한다……!
“뭐더라, 특급 마법사 자격 준다는 거 같긴 하던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
아무래도 좋은 게 전혀 아니잖아…….
페이넌스 왕국의 마법사 급수 체계는 일종의 공무원 직급 같은 느낌인데,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도 승급 시험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급수는 2급까지다. 그래서 현재 루민스가 2급 마법사인 거고.
1급은 페이넌스 왕국에 헌신한 공로를 따져서 인정을 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고, 작위가 없는 경우에는 작위와 영지를 같이 받게 된다. 그래서 1급 마법사만 해도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수준인데, 심지어 특급 마법사……?
특급 마법사는 정말로 엄청난 공훈을 세웠을 때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페이넌스 왕국 역사상 20대에 특급 마법사가 된 예가 없지 않나?
애초에 최초 20대 특급 마법사 타이틀은 원래 세상을 구한 벨키나가 얻을 예정인데, 대체…….
“아, 일할 때 귀찮은 마법사 표식 떼고 훈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건 편하겠군.”
“……특급 마법사가 된 감상이 그 정도인 사람은 루민스밖에 없을 거예요.”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하자 루민스는 그저 쿡쿡 웃을 뿐이었다.
하기야, 공작 후계 자리도 차버린 공자님인데, 돈이나 작위나 영지가 루민이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마는.
“아무튼, 내 근황은 됐고. 세네핀은 잘 지냈어? 고비는 넘긴 것 같아서 뒷일은 왕실 의료진한테 맡겼는데.”
“너무 과보호 당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예요. 그거 알아요? 저, 깨어나고 나서 3일 정도는 제 손으로 밥 먹는 것도 금지당했다고요, 진하고 벨키나한테.”
“그 녀석들답네.”
오랜만에 보는 루민이가 눈물 나게 예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 화도 난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심정으로 지내 왔는지, 루민스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그간 줄곧 마음이 어디 멀리 가버린 것처럼 눈앞의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툭하면 루민이에 관한 것들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엇보다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고, 찾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고 저는 별로 잘 지내지 못했어요.”
“응?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심각해진 루민스가 나에게 시선을 맞추듯 얼굴을 가까이했다.
“루민스가 없었잖아요! 몸 상태 때문에 과보호 당해서 직접 보러 가지도 못하는데 건강 염려될 정도로 과로하고 있단 소리나 들리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
“그러다가 오늘 겨우 봤더니 이렇게 앙상해져서는! 앞으로 세 끼 꼬박 먹는 거 감시할 거예요! 영양가 넘치는 음식으로만!!”
거기까지 쏟아냈다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욱했던 감정이 가라앉자 저질러버렸다는 후회도 조금 생겨났다. 마법연 동료이자 친구인 세네핀 크롬웰이 루민스에게 이렇게까지 말해도 괜찮았던 걸까? 방금은 무지무지 소중한 최애를 대하는 본심을 너무 그대로 뱉어낸 것 아닐까?
내 말을 잠시 놀란 얼굴로 듣고 있던 그가, 조금 흐릿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니 내 뺨을 쓰다듬었다. 서늘한 밤공기로 차가워진 뺨에 닿은 온기가 어색했다.
“세네핀도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피둥피둥 살찔 만큼 잔뜩 먹었어요.”
“독을 해독시키는 과정에서 몸이 많이 상하지. 그래서 말랐나 보네.”
“제 이야기는 됐고, 루민스가 걱정된다고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투정을 뱉었다. 그러자 루민스가 내 얼굴선을 확인하는 것처럼 뺨을 어루만지며, 달콤하리만치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보고 싶었어.”
……나대지 마라, 내 심장! 도대체 루민이는 왜 사람을 놀려먹는데 저렇게 전력을 다해서 순정만화처럼 구는 것인가……!
그러잖아도 오랜만에 루민이를 본 데다 에스코트까지 받아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몹시 곤란하다. 최애의 꿀 같은 다정 모먼트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사람 그만 놀리고요! 이제는 그렇게 무리하지 않기예요? 꼭이에요?”
“마법 방위 체계 유지보수도 해야 하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되도록 그럴게.”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은 답변이었지만, 앞으로 내가 감시하면 되지. 우선은 이 정도 답을 들은 것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으면서 내 뺨을 만지작거리던 루민스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목을 더듬는다.
“세네핀이 내 걱정을 했다니 기쁜데. 왜 그렇게까지 걱정했어?”
“그야……!”
너는 내 최애고 네 목숨을 구하는 게 나의 지상과제니까!
……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으니, 나는 소심하게 대답했다.
“루민스는 제 소중한 친구잖아요. 당연히 걱정하죠.”
“…….”
목을 감싸던 루민스의 손이 딱 멎었다. 어쩐지 표정도 그대로 굳었다.
루민스는 그대로 손을 물리고 턱을 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친구……. 친구라.”
“루, 루민스……? 호, 혹시 저 혼자만 친구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쩌지, 나 혼자 내적 친근감 쌓으면서 친구 타령한 건가?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쩔쩔매는 표정을 했던 건지 “그렇게 불안한 얼굴 하지 말고.”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루민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친구한테 너무 거리감이 없는데, 세네핀. 다른 친구들한테도 다 이래?”
“그야 그렇죠. 진이야 노상 어깨에 붙어 다니고, 벨키나도 이야기할 때 팔짱 끼면서 딱 달라붙는걸요.”
“네에?”
어딘지 찬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어서.”
“호호, 그야 당연하죠.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랑 친하지도 않은걸요.”
“그런 것 치고는 유고 왕자랑 금세 춤도 췄잖아.”
“춤이야 별것 아니지 않나요……? 이따가 왕세자 저하와도 한 번 추기로 했어요.”
“…….”
무겁게 침묵하던 루민스가 턱에서 손을 떼었다.
“알았어. 앞으로 절대로 세네핀 옆에서 떨어지지 않기로 하지.”
“역시 걱정하는 마음 알아주신 거죠!?”
“그래, 뼈저리게.”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이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줬다면 됐다. 앞으로 굶기만 해봐라, 루민아! 이 누나가 가만 안 둔다!
그나저나, 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루민스야말로 벨키나와 춤 안 추나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대체 왜?”
맥이 풀린 얼굴로 그가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쩌면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루민스가 벨키나를 따라가서 호감도를 따라잡아 루트에 진입할 기회.
“저기, 벨키나는 좋은 아이니까요……. 두 분 원래 친하기도 하셨고.”
“그게 춤까지 출 이유는 아니잖아.”
못 출 이유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루민스는 나와는 생각이 전혀 다른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둘러대야 좋을까.
“그러니까 음, 더 적극적인 의미로요! 두 분이, 로, 로맨틱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하는, 그런……?”
아, 내 입으로 말하고 있는 거지만 내 표현력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멍텅구리 같다고 해도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겠다. 말하고 있는 나조차도 이런데, 듣는 당사자인 루민스는 오죽할까 싶었다.
과연 루민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군.”
“나는 벨키나를 전혀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루민스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어도, 본인의 입으로 단정 짓는 사실을 직면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99%의 확률로 망해버렸구나, 루민스 루트 진입.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사살 받은 것이 어딘지 시원섭섭했다.
“그, 죄송해요. 제가 괜히 오해한 모양이네요.”
“응. 나는…….”
왠지 물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루민스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괴로워 보였다. 그 얼굴에 서린 감정에 의아해지는 찰나,
“……아니. 아니야.”
고개를 젓고 그는 뒤로 물러났다. 난간에 몸을 기대는 루민스는 어느샌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내고 있었다. 무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눌러 참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방금까지 괴로워 보였던 표정이 내 착각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말끔했다.
“……?”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화제를 전환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거, 그것뿐이었어?”
“아……. 아뇨.”
가장 중요한 화두는 벨키나 이야기긴 했지만, 실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아래로 두 손을 모아 꽉 쥐었다. 마음에 계속 담아두고 있었던 말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낼 각오를 하고 정리하려니 쉽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빙빙 돌리는 거 싫어하니까, 그냥 말할게요. 루민스, 저번에 저를 잠깐 찾아 왔었잖아요. 제가 마정령 때문에 쓰러졌을 때.”
“응.”
“그때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숨기고 있는 비밀이 없느냐고, 루민스가 저한테 물었었죠.”
수면 마법 때문에 끊어졌던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날 루민스는 왜 그렇게 울었던 것인지, 또 내 ‘정체’라니, 무엇을 생각했던 것인지. 이후에 루민스가 얼굴도 못 비칠 만큼 바빠지지 않았다면, 나는 루민스에게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
당시에 루민스는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루민스가 나에게서, 내 행동과 태도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을 가능성 자체는 없지 않았다.
그야 그렇지. 원래 템플릿 악녀 같던 애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벨키나랑 절친 먹고 있으니까. 작정하고 사기 치는 중이라고 오해받지 않는 게 이상하지.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루민스가 나를 수상히 여기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 의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설마하니 내가 ‘너희는 게임 속 등장인물이고 나는 다른 세계에서 너희가 주인공인 게임을 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루민스가 그 사실을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인 루민스는 어떻게도 상상해낼 수 없는 발상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리고 루민스는, 제가 숨긴 비밀이 제 ‘정체’와 관련 있는 것이냐고도 했었죠.”
나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울었던 루민스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무겁게 감돌았던 당시의 분위기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랬었지. 그게 왜?”
“……루민스는, 저의 ‘정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서도, 루민스와는 껄끄러울 일이 하나도 없었으면 했다.
루민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그때 난 네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세네핀이 언젠가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말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별생각 없어.”
“그래도, 오해받긴 싫으니까요. 전혀 엉뚱한 의심을 산 건 아닌가 하고.”
그러니까 말씀해주세요, 라고 말하자 루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인간을 가장한 마정령의 앞잡이라거나, 바다 건너 외국의 스파이라거나.”
“그럼 신고하고 잡아가실 건가요?”
루민스가 진지하게 늘어놓은 말이 아니라는 건 장난스러운 말투로도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장난처럼 받아치자, 이번에는 그가 진지하게 대답한다.
“안 그래.”
“애국심 넘치게 나랏일 하느라 얼굴까지 상해서 오신 분치고는 허술하네요.”
“별로 애국심의 발로는 아니었으니까.”
“…….”
“춥겠네. 슬슬 들어가자.”
루민스가 이쯤에서 대화를 일단락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마음의 의문을 묻어도 되는 걸까?
망설이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세네핀.”
“……네?”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찝찝하지 않으세요? 뭘 속이고 있는지도 모를 사람이 친구 행세하고 있어서.”
말로 꺼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실 내가 가장 불안했던 것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내가, 가장 근본적인 것을 속이고 있는 내가, 그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도 되는지. 그들의 소중한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어도 되는지.
루민스나 벨키나의 지척, 그들의 바로 옆이라는 위치가 주는 거리감을 기분 좋게 여기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내내 그 불안이 깔려 있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루민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무척 따스했다. 마치 밤하늘에 녹아 들어갈 것처럼 어딘지 안쓰럽던 인상이 지금은 지워진 것만 같았다.
숨조차 삼키지 못하고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루민스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밤보다 짙은 존재감으로 그곳에 서 있는 그가 어둠 속의 모든 빛을 그러모은 듯 환한 미소로 말했다.
그 말의 여운을 채 곱씹을 새도 없이, 루민스는 왠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이어서 물었다.
“그것보다, 파티장으로 돌아가면 나하고도 춤춰주겠어, 세네핀?”
“무, 물론이죠……!”
“첫 번째는 놓친 것 같으니, 가장 마지막이라도 장식하게 해줘.”
내 손을 다시 자신의 팔로 끌어당겨 에스코트하며 그가 말한다.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춤이든, 세네핀이 설명해줄 날이든.”
가장 원했을지도 모르는 그 말을, 그는 너무도 쉽게 나에게 내밀었다.
그 간결한 단어의 나열이,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듯.
모든 것을 용서받은 기분이 들어, 그의 팔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감 없는 달밤에 사람을 눈물 나게 했다.
12. 신의 그릇 회수
위무 파티는 그렇게 루민스 루트 진입을 향한 원대한 희망을 꺾어버리며 끝났다.
파티의 종료 시점에 무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친절한 루민스와 평소처럼 나를 따르는 벨키나와 함께하는 며칠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혹시나 했지만 그사이 뭔가 다른 연애 이벤트가 발생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본격적인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이 시작되면 시기적으로 루트 진입이 불가능하다. 이제 정말 미련은 버려야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루민스 본인이 부정한 이상, 또한 벨키나도 그에게 관심 없는 이상 루민스 루트 진입은 99% 글렀다고 해도 좋았다.
진이나 칼트나 유고는 내가 첫 만남 이벤트 자체를 폭파했으니 그렇다 치고, 알프는 히든 캐릭터니까 넘어가고, 정성 들여 남겨놓은 루민스 루트 하나로 직진만 하면 되는데, 그 길이 이렇게 험난할 일인가……?
과거의 노력들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루는 마음이 답답해서 벨키나를 붙잡아 놓고 물은 적이 있었다.
“있죠, 벨키나. 저희 뭔가 친구답게 알콩달콩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아, 아뇨. 그러니까 남자 중에 좋아하는 사람…….”
“남자는 됐고, 세네핀! 그것보다 세네핀이야말로 설마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야!?”
……대충 이런 상황이라. 벨키나가 당장은 친구들과 노는 게 가장 좋고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만 잘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 친구 이름을 대더라도 루민스 이름을 대면 안 되었던 걸까? 나보다 루민이랑 친구 끈이 길지 않니, 벨키나?
아무튼, 벨키나가 루민스 루트로 진입한다는 안전한 전개가 되지 못한 이상, 지금 상황은 노멀 엔딩으로 가는 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루민스의 첫 번째 사망 플래그가 곧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
내 옆을 따라 걸어오며 진이 물었다. ‘루민스 루트를 향한 1%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해서 벨키나랑 루민스를 둘만 두려고’라고 솔직히 답변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과장되게 답했다.
“오호호호, 요즘 벨키나가 부쩍 공부 욕심을 내고 있잖아요? 루민스와 같이 있으면 제가 방해 안 되고 둘이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세네핀도 같이 하면 그만 아닌가?”
“에이, 저야 실력이 부족한걸요. 두 사람에게 방해만 되지요. 뭐예요, 진은 저랑 산책하기 싫은가요?”
무릎을 꿇어 진을 안아 올리며 묻자 진은 바로 부정했다.
“아니다, 나는 기쁘나……. 흠, 사람이 오는군.”
입을 다물며 진이 내 어깨로 올라가 얌전히 강아지 행세를 했다. 나도 혼자 떠드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한 후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코너를 돌자 여성 마법사들 2명 정도와 마주쳤다. 표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3급, 4급 마법사였다. 젊은 나이에 저 정도 급수까지 올랐으니 다들 잠재 능력이 출중할 테지. 아마 십중팔구 이번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을 위해 뽑힌 사람들일 것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세네핀 양.”
“반갑습니다! 세네핀 크롬웰 양이죠?”
아, 아니. 왜 들러리 같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네, 네에.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저는 여러분 성함을…….”
“후후, 세네핀 양은 유명인이라 그래요. 저는 호리 믹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으로 이번 왕실 계획에 초빙된 렘마 요시빈이에요.”
“바, 반갑습니다. 호리 양, 렘마 양.”
내가 유명인이라니 그건 무슨 불길한 소리냐.
“실은, 위무 파티에서 왕세자 저하와 춤추시는 것을 봤거든요! 다들 감탄했답니다.”
“저하와 꼭 닮은 백금발의 그분도 궁금하던걸요. 소문이 무성한 둘째 왕자님 맞으시죠?”
“할데르프 공작가의 루민스 공자와도 같은 마법연 동료 이상으로 친근한 분위기던데요!”
……별생각을 못 했는데 그 세 명이랑 다 춤을 췄으니 튀어 보인다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시 벨키나하고만 춤추고 모르는 척했어야 했는데, 벨키나가 칼트 왕세자랑 춤추는 바람에 둘 사이를 끊으려고 발버둥을 친 게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역시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제비 왕자.
“어, 어머나.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제가 벨키나의 친구다 보니 그분들하고도 안면을 트게 된 것이죠.”
“아아! 벨키나 양이라는 분 정말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시더군요. 잠재 마법 능력도 상당하다지요?”
호리라는 여성 쪽이 뺨을 물들이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으음……. 이 대화, 계속해도 괜찮은 건가? 보아하니 둘 다 차림도 그렇고 꽤 부잣집 아가씨들 같은데. 마법연 때 벨키나를 갈구던 사수들과 느낌이 다르긴 했다. 우리 벨키나한테 보이는 관심이 순수한 쪽이라면 벨키나 얘기를 좀 더 같이 해도 괜찮겠지?
“네, 벨키나는 정말 대단해요. 저도 그녀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아!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요. 실은, 조금 있다가 저와 렘마랑 다른 아카데미 출신분들하고 조촐하게 티파티를 하기로 했거든요. 세네핀 양을 꼭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어, 어머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호호호. 저는 보시다시피 보잘것없는 6급 마법사랍니다.”
벨키나가 아니라 내가 타깃이야? 그, 그건 좀. 표식을 흔들며 급수를 강조하자, 렘마 쪽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어머, 마법 연구원 쪽은 왕세자 저하께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친히 시험도 내리셨다고 들었는데요. 그걸 통과할 정도면 대단한 인재이신 거죠.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아니야! 그 시험은 루민스한테 업혀 간 거 외에 한 게 없어! 그걸 통과했다고 인재라고 올려쳐주면 부끄럽단 말이다……!
얘들이 나를 비꼬려고 이러는 건지 순수하게 선망의 의미로 이러는 건지 인맥을 뚫고 싶은 건지 구별이 안 되는데, 아무튼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어깨에 있던 진을 내려서 품에 꽉 안으며 부드러운 털로 마음의 안정을 도모했다.
“저어, 죄송합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말고 벨키나라거나 루민스에게 직접 말씀 거시면 더 학구적이고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는 잠깐 급한 용건이 있어서! 라고 다급히 덧붙인 후 나는 재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숨듯이 구석 장미원에 주저앉아 헉헉거리고 있으려니, 얌전히 듣고만 있던 진이 물었다.
“그대와 친해지고 싶은 것 같았다만, 왜 피하는가?”
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라구.
“내가 생각하기에, 세네핀 그대는 자기 평가가 낮은 구석이 있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된다고 해주세요.”
내 말에 진은 조금 불만을 가진 기색이었다. 내 품에서 빠져나와 옆에 앉더니, 빤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가 항상 무언가를 감내하며 자신을 뒷전으로 물리는 것 같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내 인생의 지상과제는 루민스의 목숨 구명이며, 그를 구할 지름길인 루민스 루트를 위해 벨키나와 루민스의 러브러브를 응원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이 게임의 주역은 저 두 명이다. 거기에 내가 앞으로 나설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무언가를 감내한다’라는 말뜻과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무척 과분한 것을 받으며 매일매일을 즐겁게 보내고 있는걸.
“그런 생각할 것 없어요, 진. 저는 뭔가를 억지로 참고 있거나 하지 않아요. 걱정해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요.”
“나는 항상 그대의 편이다. 잊지 말았으면 한다.”
연두색의 눈동자가 햇빛에 비추어 예쁜 빛깔로 반짝였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털을 쓰다듬었다.
“호호, 저도 진 편이에요. 능력이 부족해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얼마 없긴 하지만요.”
흰둥이는 내 말에 항의하는 듯 발을 올려 내 무릎 부분을 긁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한국이었으면 폰으로 잔뜩 사진으로 남기는데.
“그대는…….”
진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타이밍을 끊듯, 누군가가 장미 수풀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늘에서 고개를 숙이며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루민스였다.
넝쿨 사이를 뚫고 얼굴을 비추느라 장미를 머리에 얹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는데도 꿀리지 않는 그 미모 정말 경탄스럽……, 아니, 잠깐만, 루민스라고?
“루, 루민스!? 어떻게 여기를…….”
“위치 추적 마법. 벨키나가 세네핀 찾아오라고 펄펄 뛰고 있으니까 돌아가자.”
그, 그렇구나. 우리 루민이 정말 다재다능하기도 하지. 그런데 한국 기준으로 그 마법 범죄 아닐까, 루민아?
그것보다 기껏 둘만 남겨줬는데 좋은 분위기는커녕 산책 나온 지 30분도 안 되어서 다시 끌려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서 머뭇머뭇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두, 두 분이 오붓하게 계시면…….”
“걔랑 오붓해서 뭐해. 그것보다 내일 계획 설명회에 앞서서 오늘 저녁에 신전에 들러서 다들 축복받고 가라고 왕실에서 연락 왔거든. 외출 준비나 하자.”
칼같이 자르는 루민이에게는 빈틈이 전혀 안 보였다. 역시 1%의 가망도 없었던 거니? 벨키나랑 친구 감정에서 싹트는 사랑 정말 시작되지 않는 거니? 이 누나 너무 속상하다, 루민아.
몸을 일으키며 진을 품에 안자, 루민스가 홱 진을 낚아채더니 자기가 한 손으로 안았다.
루민이 털 달린 짐승에 관심 없지 않았나? 흰둥이 처음 봤을 때 제대로 쓰다듬지도 않더니. 요즘 들어서 애정이 싹텄나? 그런 거라면 좀 긍정적인 변화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루민스의 팔 안에서 흰둥이가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희망 안 받아주니까 버둥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별로 애정이 싹튼 것 같진 않았다.
◇◇◇
신전은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도보로 금세 갈 수 있었다. 푸른색 건물이 대부분인 홀르나에서 드물게 붉은색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본관의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 우리 말고도 축복을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좀 떨어진 곳에 있던 마법사 무리가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가끔 우리 쪽을 흘끗거리는 게……. 저거 누가 봐도 우리 얘기하는 거 같지? 이런 곳에서까지 알아보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주목을 받고 있나 보다.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벨키나의 무릎에 있던 진이 주변에 들키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은 처음 와보는군.”
“하긴, 진은 신전에 올 일이 없었겠군요. 존재 자체가 신성한 종족이면서.”
“글쎄다, 신성하다고는 해도 나는 신의 목소리 같은 것 들어본 적 없다. 시초룡 알페이넌스의 존재가 곧 신을 증명하고 있으니 부정할 생각은 없다만.”
진의 반응이 의외로 신에 대해 시니컬한 게 좀 재미있었다.
<아란다스트 사가>의 세계관은 꽤 근대화된 편인데 (열차도 있고, 마법을 과학 문명처럼 쓰는 느낌이라) 그런 것 치고 종교관은 꽤 고전적이다. 절대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 하나를 국교로 삼고 있기도 하고. 전능한 초월자의 존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 이유는 신을 대리하는 피조물인 시초룡 알페이넌스 덕분이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직도 현실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신을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벨키나도 진의 태도가 신기했는지 그렇게 질문했다. 진은 벨키나의 손에 코를 묻었다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인간 사이에 전해지는 교리대로 신이 자비롭고 모두를 굽어살핀다면 우리 동포가 모두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테지.”
그건 무척 아픈 말이었다. 게임상에서는 진 루트에서 잠깐 언급되는 정도지만, 200년 전에 있었던 자연 마나 고갈 현상이 원인으로 수인들이 몰살당했다던가……. 그 비극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진은 조용히 모습을 숨기고 자연 마나가 충만한 고요의 호수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호수를 부숴놓게 된 현재까지의 경위는 일단 치워두고.
진이 마음 아파하는 걸 신경 쓰는 것인지 벨키나가 “괜한 걸 물어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며 진을 꼭 안아주었다. 진은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죽어간 동족들과 혼자 남은 자기 처지를 떠올린 것이 역시 좋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어쩐지 냉정한 목소리로 루민스도 한마디를 보탰다.
“나도 진에게 동의해. 신은 그냥 존재하는 거지, 무언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루민스까지……. 예배당에서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해도 괜찮은 건가요?”
“불경한 말 해도 안 죽고 멀쩡한 걸 보니 신도 신경 안 쓰나 보지.”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갖가지 플래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사람 앞에서 꺼내기에는 무서운 말이니까 자제해주렴.
그런 내 마음을 알 길 없는 루민스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신은 그냥 존재하는 것뿐인데, 지배 계층의 인간이 본인들 입맛에 맞게 각색한 거라고 봐. 수인족의 존재와 멸종 경위가 인간의 역사에서 지워진 것만 해도 그래. 신에 대해서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 정보 자체를 차단한 거지.”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둘이 이런 주제에서는 또 의견이 일치하는 게 신기했다. 벨키나는 둘의 말을 듣고 헤헤 웃었다.
“나도 딱히 신에게 로망이 있진 않은데! 그래도 이번 계획 이름이 ‘신의 그릇 회수’라는 이름이니까 신이랑 관계있는 건가, 좀 궁금하긴 해.”
벨키나의 지적은 정확했다. ‘신의 그릇’이라는 이름은 멋있어 보이라고 그럴싸하게 지은 이름이 아니니까 말이지…….
루민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해주었다.
“그건 내일 설명회에 가보면 알 일이겠지. 뭐, 이 행사는 좀 우습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건 믿어도 신의 축복은 믿지 않으니까.”
예배당에서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불경한 대화가 한차례 끝나고 침묵이 찾아들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 소원을 접수했다던, 소원을 들어주겠다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세네핀 크롬웰의 몸에 들어와 있었지.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신일까? 혹은 그냥 전부 내 착각일까.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래도 분명히, 신에 준하는 그 무언가의 커다란 힘이 나를 이곳에 강림시켰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래도 말이죠, 신에게 자비나 선의 같은 게 없었다고 해도요.”
루민스와 벨키나, 진을 한 번씩 응시하다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벨키나나, 루민스나, 진이나……. 그 외에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분명히 신이 마련해준 환경 덕이잖아요? 그건 좀, 감사하고 싶어요.”
루민스가 살아나기를, 그리고 행복해지기를 빌며 이 세계에 왔으니까. 아직 그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기회를 준 게 이 세계의 신이라면 감사하고 싶었다.
그래. 루민스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순간이 내게 무척 소중하다. 나한테 루민스는 엄청난 위안을 주는 존재였는걸.
루민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은 정말 좋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는 모습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 아주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루민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루민스가 반드시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왜냐면, 나와는 달리 루민이만은 모쪼록 해피엔딩을…….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눈을 꾹 감으며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뎌냈다. 잠깐 뒤 두통이 가시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뭐였지? 요즘 쓸데없이 두통이 잦은 것 같다.
방금 내 머릿속을 휙 지나가 버린 생각을 조금 멍하니 더듬어 보려는 찰나, 내 팔을 벨키나가 즐겁게 끌어안았다.
“후후, 그건 나도 그래. 세네핀! 너랑 만나게 해준 점에 대해서는 신한테 앞으로 연봉의 10분의 1씩은 기부할 수 있을 정도로 고마워한다고!”
“맞다, 나도 그 부분만은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할 수 있다.”
흰둥이 너도 동족 멸종될 때 아무것도 안 한 신을 더 원망해도 돼…….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루민스가 조용히 손을 모았다.
“기적이라는 이름의 우연을 신이 주관하는 거라면, 그것만은 신에게 감사해야겠지.”
마치 기도라도 올리는 듯한 그 옆모습을 보며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을 모았다.
부디 내일 있을 사망 플래그에서 내가 루민스를 지킬 수 있기를.
◇◇◇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의 설명회는 왕궁의 대회관에서 진행되었다. 대회관은 주요 국가 행사가 있을 때 밥 먹듯이 신문에 등장하고, 외부에서 왕궁을 볼 때 가장 정면에 드러나 보이는 건물로서, 왕궁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날 오전, 사전에 안내받은 대로 대회관에는 행사의 운영위원들, 그리고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을 위해 선별된 마법사만 모였다. 대대적인 규모의 행사였지만 외부 인원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아무래도 공개될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당연한 조치이긴 하지만.
수십 명의 마법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그것도 (나만 빼고) 전국의 아카데미와 마법 연구 기관에서 내로라하는 우수한 인력들만 모여 있는 모습이니.
모두 정해진 자리에 서자, 전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이넌스의 영광이자 빛, 쉐이런 리코위 페이넌스 국왕 전하 납시오.”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완벽한 타이밍으로 백금발에 회색 눈을 가진 이 나라의 국왕, 쉐이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의 머리색은 둘째 왕자인 유고와 같지만, 성격은 좀 다르다. 게임상에서 몇 번 보았던 기억으로는 첫째인 칼트에 가까웠다. 그럼 직접 등장한 적은 없는 국왕의 부군 아스한 공이 유고처럼 츤데레 성격인 걸까.
이윽고 국왕의 뒤에 정복을 차려입은 왕세자 칼트와 둘째 왕자 유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식 행사용인지 오늘은 둘이서 흰색 정복을 맞춰 입었는데 멀리서 봐도 흐뭇한 미모였다.
페이너스 국왕 부부님 좋은 일 하셨네요. 첫째 성격만 빼고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곧 다가올 사망 플래그 발동 타이밍 때문이었다.
막을 방법은 생각해 뒀다. 어제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도 돌려보았다. 그 방법이 제대로 먹힐지는 알 수 없지만……. 아냐, 무슨 나약한 생각이람.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했다.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막을 수 있다. 내가 있는 한 우리 루민이는 절대 안 죽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는 동안에도 불안이 수없이 반복하여 마음에 밀려들었다.
불안감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는 와중, 국왕의 간략한 개회사가 시작되었다. 이 계획을 위해 젊은 인재들이 모여줘서 마음 든든하고 고맙다는 말을 길고 장황한 수사를 섞어 풀어낸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려니 다음 식순으로 이어졌다.
“그럼 다음으로, 특급 마법사 임명 순서가 있겠습니다.”
전령이 그렇게 알리자 맑은 목소리로 국왕 쉐이런이 선언했다.
“―루민스 할데르프. 페이넌스 최대의 적 마정령의 수도 침입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처하며 이루어낸 공적을 치하하는바, 쉐이런 리코위 페이넌스의 이름으로 특급 마법사 칭호를 내리노라.”
소리 없이 옆에 있던 루민스가 일어나고 모두 경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작 본인은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지만.
국왕의 앞으로 나가 루민스가 무릎을 꿇자, 긴 홀을 들고 있던 그녀가 루민스의 양어깨를 쓸어내는 듯 한 번씩 홀을 내리 들었다. 루민스의 2급 마법사 표식을 떼어내고, 국왕이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다.
“17년 만에 탄생한 페이넌스 왕국의 특급 마법사를 모두 박수로 맞이하시오!”
전령의 선언과 함께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수갈채 사이에서 역시나 무표정하게 루민스는 카펫이 깔린 길을 지나 자리로 돌아왔다.
벨키나가 작은 소리로 “축하해!”라고 하자 고맙다고 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대로 담담한 표정을 짓던 루민스가 별안간 내 쪽을 향해 살며시 속삭였다.
“서, 설마요! 정말 축하해요, 루민스!”
그 말에 만족한 듯, 처음으로 활짝 웃고 루민스는 앞을 보았다.
으윽, 루민이가 멋있어서 심장 아프다.
그래, 우리 루민이를 위해서 내가 뭔들 못하겠어. 심지어 게임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급 마법사가 된 멋진 루민이의 모습까지 이렇게 눈에 새겼는데 말이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듯 꾹꾹 누르며, 나는 결심을 굳혔다.
행사는 이어서 본격적인 ‘신의 그릇 회수’ 계획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현재, 정확한 원인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은총’들이 오염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국왕은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사항부터 언급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나는 게임에서도 똑같이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란다스트 대륙에는 신이 직접 하사했거나 혹은 신이 축복을 내렸다고 일컬어지는 유물들이 존재한다. 이게 바로 국왕 쉐이런이 언급한 통칭 ‘은총’이다.
바로 게임 시작 시점쯤 해서, 페이넌스 왕국이 보관하고 있던 이 ‘은총’들이 일부 오염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이 시작되어 마법사들을 모은 것이었다.
물론 진정한 목적은 저게 아니고 더 중요한 사항은 나중에 언급되지만, 그에 앞서…….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나, 앞으로의 대책이 더 중요하다. 이 나라 마법의 정점에 선 그대들에게, ‘은총’의 오염을 제거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간결한 상황 설명이 이어진 후, 지체 없이 단상 앞으로 평평하고 길쭉한 테이블이 놓였다. 그 위에 검붉게 녹이 슨 듯한 물체들이 운반되었다. 겉이 파손되어 있어 물체의 정확한 원형을 확신하기 어렵지만, 뿔피리, 물병, 등잔 등 규칙성 없는 각종 물체가 약 10종 정도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그대들의 가능성에 걸도록 하지. 알페이넌스의 가호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국왕과 왕자 두 명은 퇴장했다. 대회관에 남아 있는 운영위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마법 협회의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설명을 이었다.
“국왕 전하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은 본인이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여기 있는 ‘은총’을 복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염된 원인은 같으니, 어떤 ‘은총’이든 상관없습니다. 인원을 나눠 하나씩 맡아 주십시오.”
운영위원들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인솔해서 오염된 ‘은총’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벨키나가 먼저 움직이고, 루민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동시에 루민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세네핀?”
앞으로 가려던 루민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려보았다.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할게요, 루민스. 오염된 ‘은총’에 손대지 말아 주세요.”
“응……?”
“위험해요.”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앞에 먼저 도착한 다른 마법사들은 벌써 오염된 은총을 만지며 여기저기 살펴보거나, 간단한 정화 주문을 시험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만지고 문제없는데, 위험하다고 말하는 내 말이 믿길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일종의 알레르기라고 해야 할까. ‘은총’에 스며들어 있는 오염에 과민하게 공명하는 체질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필 그런 체질을 지닌 불운한 사람이 루민스라는 것을, 나는 게임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루민스의 첫 번째 사망 플래그. 루민스가 아무리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회피할 수 없는 죽음 중 하나였다.
“벨키나는 괜찮을 테니까요! 그 애는 아마 ‘은총’을 복원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만이라도, 은총에 손대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벨키나가 먼저 ‘은총’을 정화한 다음에는 괜찮다. 하지만 루민스가 먼저 오염된 ‘은총’을 만지면 그 오염에 공명하여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는 루민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은총’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끄러미 바라봐오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루민스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세네핀의 부탁인데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
“네……!”
먼저 테이블 앞으로 나가 있던 벨키나가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제자리에 남아 있는 나와 루민스를 향해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며 손짓을 해 보였다. 얼른 와서 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를 막은 것에 안도하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이거 가까이서 보니까 꽤 징그럽다. 다른 사람들도 아직 복원 못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는 되려나?”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벨키나를 향해 굳게 끄덕이며 나는 강하게 말했다.
“있죠, 벨키나. 벨키나가 먼저 한 번 해봐 주세요!”
“그럴까? 으음~.”
벨키나는 검붉게 훼손된 뿔피리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어라? 벨키나가 손에 들자마자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왜 잠잠하지?
“흐음, 이걸 정화하는 스펠……. 얼마 전에 배운 거로 되려나?”
그녀가 두 손으로 뿔피리를 든 채 정화 주문을 입에 담았다. 주변이 맑아지는 듯한 기운이 퍼지면서 빛이 깜빡였다 사라졌다.
하지만 뿔피리에는 여전히, 기분 나쁜 검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전혀 정화되지 않은 것이다. 벨키나가 정화를 시도했는데도.
“어, 째서……?”
“에헤헤, 역시 나 같은 햇병아리 마법사한테는 무리였나 봐.”
벨키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게임에서는 벨키나가 오염된 ‘은총’을 손에 들자마자 사방으로 빛이 뻗어 나가며 자동적으로 뿔피리가 신성한 본연의 모습을 찾았다.
그런데 정화되지 않다니?
정화의 힘 각성. 이 과정은 앞으로 벨키나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가장 기초가 되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절대 스킵할 수 없는 이벤트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래도 그쪽의 동행은 역부족 같군요. 특급 마법사 루민스 할데르프. 당신이 해보겠습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운영위원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루민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양쪽 다 꽉 쥐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 잠시만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오염에 민감 반응을 일으키는, 목숨이 위험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면 될까?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믿게 하지? 지금 당장 다른 사람들 다 멀쩡한데, 내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운영위원이 믿어줄까? 과거에 그런 예도 없었을 텐데.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안 좋은 머리로 고민했다. 루민스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살려야 해.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꾀병을 부리자. 내가 먼저 오염된 ‘은총’을 만진 다음에 발작을 일으키는 척해서 아무나 만졌다가는 큰일 난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절실하게 외치자, 운영위원은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가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허가해주었다. 루민스가 난감한 얼굴로 나와 ‘은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다가섰다.
“세네핀, 괜찮아. 내가 해도.”
“안돼요, 루민스! 안 된다면 안돼요……. 정말, 부탁할게요.”
이유를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렇지만 설명할 시간도, 믿게 할 만큼 잘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아이처럼 간절하게 매달렸다.
루민이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거의 애원을 하자, 루민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이거 놔도 돼, 세네핀. ‘은총’ 안 건드릴게.”
“고마워요!”
루민스의 손목을 놓은 후 나는 몸을 돌려 오염된 ‘은총’에 다가갔다.
괜찮아,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어. 지금까지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남의 인격도 계속 연기하고 있었는걸. 이쯤이야!
숨을 들이쉰 다음 ‘은총’에 손을 뻗었다. 자, 이제 닿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어……라?
검붉은 뿔피리에 손을 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혹은 멋대로 폭주하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아, 윽…….”
설, 마.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지며 의식이 흐려졌다.
세네핀 크롬웰 역시, 오염에 과민 반응하는 체질이었나?
주변에서 마구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나를 붙들고 흔드는 감각이 어딘지 멀리 느껴졌다.
연기할 필요도 없이 몸으로 증명한 건 좋지만.
루민이도 이제 위험성을 알아주었겠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못하고 완전히 어둠 속으로 잠겼다.
◆◆◆
―그녀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것은 태초의 어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연의 나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단어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며, 세상의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세네핀 크롬웰은 눈을 떴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익숙하다기보다, 겪어본 감각이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건…….
[색바랜 미혹의 심지를 지닌 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똑같은 질문. 언제 또 이런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생각해냈다.
유고의 플래그를 분쇄하려고 나갔던 그날. 벌써부터 등장할 리가 없었던 마정령과 만났던 그날. 그리고 마정령의 공격을 받았던 그날.
바로 그날에 그녀는 이런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정체 모를 목소리로부터 질문을 받았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이처럼 기이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묶여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기억이 쏟아진다.
역시 그랬다. 이전의 상황과 같았다. 마정령의 독에 당해 쓰러져 사경을 헤맬 때와 마찬가지였다.
“……세네핀, 크롬웰.”
그녀는 그렇게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뭘까, 이건? 그때처럼 거의 죽을 뻔한 상태라서? 아니면, 다 꿈이었나?’
왜 똑같은 질문을 받고 있는 걸까? 똑같은 상황을 다시 체험하는 이유는?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와중, 그때와 마찬가지의 질문이 돌아왔다.
[그것은 그대가 이 세계에 녹아들기 위한 분신체. 진정한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담담하고 차분한 어투로, 하지만 재촉하듯 더해지는 질문은 이전처럼 세네핀의 ‘진정한 이름’을 묻고 있었다.
진정한 이름. 그때도 대답하지 못했던 이름. 어째서인지 생각해낼 수 없었던 이름.
[그대의 세계에서의, 그대의 이름을.]
한국에서의, 그녀의 이름.
세네핀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엔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강하게 바라고 집중해서 떠올려 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능적인 무엇인가가 그걸 거부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이름 따위, 없었던 것처럼.
[그대의 이름을.]
“싫어, 대답하고 싶지 않아!”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껍데기 안으로 틀어박혔다.
그와 동시에 다시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으로 느낀 것은 사방이 정말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어, 라……?”
주변의 사람들이 마치 박제된 것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경악하는 얼굴, 놀라는 얼굴,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 고함치는 얼굴, 그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있었다. 마치 동영상을 멈춰둔 듯한 어색함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덜컥 무서워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니까 나는, 루민스 대신 오염된 은총 때문에 발작을 일으킨 연기를 하려 했고, 그런데 연기가 아니라 정말 쓰러지고 말았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건……?
잠깐만. 그럼 루민스는, 루민이는 어떻게 되었지?
그 순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세네핀.”
“루민스……?”
다행이다. 루민이는 무사한 것 같았다. 다만 몸을 돌려 얼굴을 보고 싶은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시간이 없으니 용건부터 말할게. 세네핀, 지금부터 내가 거는 스펠에 무조건 동의해주겠어? 네 동의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마법이거든.”
무조건 동의? 의아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하려는 일이니 뭐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목이 메는 것을 삼켜 참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무조건 동의할게요.”
“……태초를 뒤집어 무가 되고, 무가 뒤집혀 영원으로 이르는 태초. 단절의 기쁨에 모두 비명을 지르리.”
루민스가 입에 담은 스펠은 전에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미혹의 골짜기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루민스가 사용했던 그 주문이었다.
그림자도 무엇도 없는, 끝없는 흰색.
―비유하자면, 태초의 어둠이나 심연의 나락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듯한 곳이었다. 이 공간에 들어선 덕분일까. 나는 풀려나듯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돌리자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루민스가 눈에 들어왔다. ‘은총’ 때문에 쓰러지거나 하지 않은, 멀쩡히 두 발로 서 있는 루민이가.
얼굴까지 확인하자 안도가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루민이가 안전해 보인다는 거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대로 루민이만 안전하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나는 다 좋았다. 내가 ‘무조건 동의’해서 성립된다는 마법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쯤이야 뭐.
루민스가 손을 휘젓자, 하얀색의 무언가가 의자 비슷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림자가 없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하얀 물체가 무척 기괴했다. 하지만 루민스가 앉기를 권해서 나는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그곳에 앉았다.
“여긴…… 저번에 그곳인가요?”
“응.”
“……저, 또 위험했던 거죠?”
반대편에도 마찬가지로 의자를 만들어내 앉은 루민스가 서글프게 웃었다.
“그러게. 그래도 구해내서 다행이었어.”
“항상 폐 끼쳐서 죄송해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그것보다…….”
그가 표정을 지우고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금빛 눈동자가 뿜어내는 온도가 무척 차갑고 날카로웠다.
“세네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하리라 생각해. 그렇지만,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해.”
“너를 계속 관찰하면서 나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어. 처음에는 어렴풋한 의심이었지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높게 느껴졌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민스가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리고 오늘 일로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어.”
가늘게 숨을 내쉬며 루민스는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세네핀. 나는 네가―”
그의 말은 한마디 문장으로, 무척 간결하게 떨어져 내려왔다.
13. 세계의 적 (1)
세계의 적.
그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수많은 물음표였다. 계산기에 숫자를 넣고 합계를 두드렸더니 갑자기 라틴어가 튀어나온 정도의 황당함이었다.
SF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그 단어가 지금 루민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 밖이었다.
“저, 기.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결국 솔직하게 감상을 뱉었다. 루민스는 심각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끄덕였다.
“알아,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세계의 적>이라는 건 그냥 내가 편의대로 만든 표현이고, 개념을 이해하기는 좀 어려워. 그래도 최대한 설명해볼게.”
어느샌가 우리 둘 사이에 생겨난 하얀색 테이블에 팔을 괴며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세계는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이 세계를 만든 신의 취향이었겠지만, 그 형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장치를 마련했어.”
“자연스러운 상태…….”
“신의 피조물인 시초룡 알페이넌스도 그래. 지극히 논리적으로 만사를 판정하고 해결하고 있잖아? 신전에서야 자비로운 신의 은혜니 알페이넌스의 가호라느니 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알페이넌스가 움직인 사건들을 봐. 거기에 인간에 대한 온정 따위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어. 그냥 냉정하게 대륙의 균형을 잡아준 것뿐이야.”
그건 알고 있었다. 게임상에서도 초기에 알페이넌스는 논리와 냉철의 화신 같았으며, 인간에게 어떠한 애정도 주지 않던 존재였다.
“……거기까진 이해했어요.”
“그런데 알페이넌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과’라고 해야 할까. 우연이라고 해도 좋고, 운명이라고 해도 좋겠지. 그런 것들도 마찬가지야. 현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즉,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거지.”
자연스럽지 않은 것.
그제야 루민스가 말한 ‘세계의 적’에 대한 갈피가 잡혀서 나는 침을 삼켰다. 그건, 설마…….
“세네핀. 세계는 너를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그래서 너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려고 해. 나는 그걸 <세계의 적>으로 판정받았다고 부르고 있어.”
그야 그렇다. 나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고, 미래를 알고 있고, 그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상황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이 세계가 ‘자연스러운 것’을 가장 큰 가치로 둔다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 당연할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어? 오랜 기간 문제가 없었던 고요의 호수가 갑자기 폭주한다거나. 미혹의 골짜기의 검은 아우라가 덮친 일. 일반적인 사람은 평생 볼 일도 없는 마정령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기도 하고. 정화의 힘에 눈뜨면서 그 반동으로 심장이 멈추는 일들을.”
“……네? 저, 잠깐 기절한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내가 지금 안전지대로 불러오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전신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고비를 건넌 거라니…….
“……제가 <세계의 적>이라서 그런 거예요?”
“응.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숨만 쉬어도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정도는 아니니까. 말하자면 세계는 너를 지금 ‘적일 수도 있다.’라고 1/10 가능성 정도로 의심하는 상태라고 생각해.”
“…….”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앞으로 네가 가진 힘에 눈뜨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초월적인 힘을 하나씩 얻으면 얻을수록, 세계는 너를 더 의심하고 경계하게 될 거야.”
“제가 힘이 더 있다고요……?”
“그래. 지금 봉인해둘 거지만.”
“봉인……?”
그와 동시에 루민스가 나의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곧이어 마나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고,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정신이 흐려졌다.
“이제 돌아가자. 슬슬 <세계>도 이상하게 여길 거야. 이 공간을 없애야 해.”
루민스가 말했지만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계의 적’이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공포보다, 이해할 수 없는 개념에 대한 혼란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뱅뱅 도는 상태였지만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저, 저기요. 루민스!”
“응, 세네핀.”
“어떻게 루민스는 그런 걸 알고 계시는 거죠? 세계의 적이니, 제가 가진 힘이니…….”
내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루민스는 단호하게 잘라내듯 말했다.
“그건 답할 수 없어.”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흰색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세계에 검은색이 스며들며 음영을 만들었다.
“……어째서요?”
“마음이 약해질 거 같아서?”
어딘지 멋쩍은 듯 루민스가 웃었다. 그가 무슨 의미로 저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감지할 수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괜찮아, 세네핀.”
나에게 다가온 루민스가 뺨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를 지킬게.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는 살릴게.”
나는 흠칫하여 몸을 떨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박자 늦게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한 순간,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것보다 먼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싫어요, 전 그런 거 허락할 수 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뭘 위해 노력해 왔는데. 나는 루민스를 살리기 위해 이 세계에 온 게 아니었어? 그런데 왜 루민스가 나를 지킨다는 거야. 왜 오히려 나를 살리려고 목숨을 건다는 거야. 왜 나를 대신해서 죽을 것처럼…….
그러나 루민스의 얼굴에서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도 세네핀의 허락은 필요 없어. 네 의사를 묻는 게 아니야. 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금 이곳에 존재해.”
“루민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눈앞이 부예졌다. 눈물이 마구 흘러내려, 이윽고 루민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을 닦는 것보다 그를 말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의 왼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마치 눈물을 닦아주려는 것처럼, 그가 오른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그 커다란 손이 닿자마자, 의식이 점점 저편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네가 무조건 동의해줬으니, 지금 이 기억은 지워질 거야.”
“싫, 어요, 당신은 뭐 때문에……!”
악을 쓰듯 목소리를 냈지만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 무언가가 흩어져갔다.
“세네핀. 나는 네가 모쪼록 마음 가는 대로 매일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
언젠가 시찰단 파티에서 들었던, 그 다정한 말을 그가 다시 입에 담았다.
“―네가 살아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것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은 어둠에 삼켜졌다.
◇◇◇
“아……”
“세네핀!!!”
이건……, 눈물?
내가 왜 울고 있지? 눈물 때문에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벨키나처럼 보이는 인물이 손을 내밀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이 가시자 그제야 앞이 보였다. 역시 벨키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하얀색?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내 손으로부터 투명하고 커다란 날개 같은 것이 여러 겹 겹쳐져 마치 방패와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방 4m는 될 것 같은 커다란 날개가 펄럭이자, 상 위에 있던 다른 ‘은총’들도 검붉은 색상이 사라지고 점차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건…….”
모든 ‘은총’들의 오염이 사라지자, 날개가 모습을 감췄다.
“세네핀, 세네핀……!”
그와 동시에 흐느끼며 벨키나가 나를 꽉 껴안았다.
“진짜 놀랐잖아……. 뭐야, 이게. 허엉, 으아아아아앙!”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네핀. 괜찮아? 아프거나 속 안 좋은 곳은 없고?”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루민스의 것이다. 나를 뒤에서 안아 부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괘,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정신을 잃었나요?”
“그래, 30초 정도.”
누군가 내 쪽으로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개요를 설명하던 마법 협회의 높은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태초부터 부여된 ‘정화의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세네핀 크롬웰 양이라고 했던가요?”
태초부터 부여된 ‘정화의 힘’이라니, 그건 게임에서 벨키나한테 있던 힘인데?
“보아하니 아직 6급 마법사군요. 정화의 힘을 인정하여, 당신을 승급 조치하겠습니다. 전하께도 관련 상황은 정리해서 보고 드리죠.”
웅성거리는 소리 가운데에서도 멍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정화의 힘은 원래 벨키나의 것이다.
타고난 정화의 힘으로 이 자리에서 모든 ‘은총’을 한꺼번에 정화시키는 것은 본래 그녀의 역할이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증명하였기에 마법사 등급이 올라가는 것도, 주인공인 벨키나에게 주어져야 하는 기회였다.
지금 이곳에서 이 모든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엑스트라인 내가 아니라 여주인공인 벨키나다.
하지만 벨키나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았던 ‘은총’이 나에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정화의 힘은…… 믿을 수 없지만 나에게 있는 모양이다.
“세네핀, 너무 멋져!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그래도 정화의 힘이라니 세네핀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벨키나가 울먹였다.
“……벨키나. 그렇게 꽉 안으면 세네핀도 숨 막힐 거야.”
루민스가 말하자 벨키나는 얼른 내게서 몸을 뗐다. “미안, 세네핀!” 하고 사과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비비는 그녀에게 루민스가 덧붙여 주의를 주었다.
“기절했던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지.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으, 응! 그렇지만 왜 갑자기 세네핀이 기절한 걸까?”
“……본인이 모르던 힘이 갑자기 발동된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그렇게 답한 루민스가 아직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부축해주며 말했다.
“일단 천천히 일어나 볼래, 세네핀?”
“네, 네에.”
뒤에서는 웅성거리며 운영위원들이 다른 마법사들에게 퇴장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루민스의 부축을 받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천천히 일어났다.
너무나 혼란스러웠지만, 다행이다. 루민스가 죽지 않았어.
대신에 내가 죽어서 루민스 얼굴 두 번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나서 다행이야.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가 그렇게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황급히 루민스의 얼굴을 보고 싶어져서, 나는 바로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의식을 잃었던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얼굴. 내가 먼저 은총을 정화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말렸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얼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이 나왔다.
“거,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루민스.”
그는 고개를 젓더니,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나에게서 한걸음 떨어지며 그가 몸을 놓아 주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순간적으로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벨키나가 다시 팔짱을 껴오고,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으려니 뒤에서 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 들린다.
“……세네핀!”
“레이디 세네핀.”
칼트와 유고였다. 둘 다 급하게 온 것인지 조금 숨이 차 보였다.
“괜찮은 거냐!?”
“네, 네에. 죄송합니다, 유고 왕자님. 제가 괜히 걱정을 끼쳤나 보네요.”
유고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 뒤를 따라온 칼트가 조금 딱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레이디 세네핀. 무사한 모습을 다시 보아 다행이네.”
“나의 심려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자네가 이 나라의……, 아니, 이 대륙의 명운을 쥔 사람이라는 것만이 중요하네.”
“와, 왕세자 저하!?”
“세네핀 크롬웰. 자네에게 이 나라의 명운을―,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의 진정한 목적을 맡겨도 되겠는가?”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거지? 이럴 리가 없었다. 이 여행의 중심은 벨키나였으며, 이 대륙의 미래를 짊어진 것 역시 벨키나를 비롯한 그녀를 둘러싼 공략 캐릭터들이었다.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이 게임 초반에 사라지는 엑스트라 악녀인 세네핀 크롬웰이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화의 힘이 없으면 마정령으로부터 신의 그릇을 보호할 수 없어.’
마정령이 ‘신의 그릇’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려면, ‘신의 그릇’을 찾아 정화의 힘으로 봉인해야만 한다. 그게 ‘신의 그릇’을 마정령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봉인하지 못한 ‘신의 그릇’을 마정령이 모두 확보해 버리면 인간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정화의 힘을 얻은 사람이 손을 놓고 있었다간 발생하게 될 종말이었다.
결코 그런 엔딩은 바라지 않았다. 이곳은 루민스가 살아가는 곳인걸. 벨키나도, 진도, 그 외 페이넌스 왕국의 모든 사람들도 함께.
나중에라도 정화의 힘이 벨키나에게 돌아간다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내가 해낼 수밖에 없었다. 정화의 힘을 대신 받아버린 벨키나의 대리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지금까지도 게임과 달라진 상황에 당황할 때가 많았지만, 어떻게든 열심히 해왔다.
이곳에 루민이가 있으니까. 그가 행복하게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니까.
“알겠습니다. 그것이 아란다스트 대륙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또한, 루민이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망설일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자 칼트는 내 손등에 키스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중압감에 답답해지는 와중, 더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아까부터 어두운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루민스의 얼굴이었다.
2권에서 계속
악녀는 들러리를 희망합니다 1권
전자책 발행 2019년 7월 18일
지은이 | 걸검
발행인 | 홍영태
발행처 | 엠노블
등 록 | 제313-2011-96호(2011년 3월 24일)
주 소 | 03991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6길 3 이노베이스빌딩 7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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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67415-0-1 [05810]
전자책 정가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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