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3
[유우지]passion 3권
8. T&R Inc.
따가웠다. 창가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가운데 오른쪽 뺨에 똑바로 내리쬐는 노오란 햇살이, 거의 저물어가는무렵인데도 얼굴 반쪽을 뜨겁게
달군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신문만 넘기던 정태의가 고개를 든 것은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뜨거운 볕보다는 간질간질한 시선이 더욱 견뎌내기 힘들다.
정태의는 신문을 짚어나가던 눈을 들어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의 끝을 더듬어 보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를 흘끔거리며 앉아 있던 여자가 정태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고개를 든 순간 약간 비껴 있던 여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정태의에게 닿았고, 그제야 그는 그녀가 바라보던 게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 끝이 닿은 곳은 정태의가 앉아 있는 옆에 우람하게 서 있던 각진 기둥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기둥의 사면에 붙어 있던 거울이다.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매무새를 살피고 있었던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무의식적으로 기둥으로 시선을 준 정태의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주 가관이구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 여자가 놀라서 몸을 사린 이유가 거울안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흉측하게 부풀어오른 얼굴은 부정형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두덩이며 관자놀이, 턱, 고루고루 빨갛고 노랗고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딱지가 맺힌 정도는 애교다.
원래의 생김새는 과히 흉하지 않아 어딜 가도 못생겼다는 소리 듣지 않고 고개 들고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원래 생김새가 온 데 간 데 없어 찾아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부어터진 얼굴 아래에는 어슬픈 양복이다. 이래서야 어느 흑사회의 총알받이 말단이라고
하면딱 될 법한 차림새였다. 이 주위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않을 테지만 한나절 전까지만 해도 정태의의
얼굴은멀쩡했다. 정규과정 가운데 피치 못하게 생긴 멍이나 상처 한두 군데 정도는 있었지만 오늘 아침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못 봐줄 얼굴은 아니었다.
원래 몸이라는 게 낫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려도 망가지는 건 한순간인 법이다.
정오를 한 시간 가량 남겨뒀던 느지막한 오전, 일은 터졌다. 휴게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쉬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서 별달리
친하지도 않은 동료 두 놈이 싸움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치고받는 놈들은 그 책임을 본인이 질 일이라 정태의는 추호도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싸우던 와중에 정태의가 앉아 있던 의자가 세차게 부딪혀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어도 그만 싸우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라.'라고 했을
뿐이다.
블똥은 엉뚱하게 튀었다. "이놈, 그 유럽 새끼 종놈이잖아."라는 말이
시발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게도 자기네들끼리 잘 싸우고 있던 그 두 놈은 정태의에게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고,
부지불식간에 몇 방 얻어맞은 정태의는이 부당한 상황에 순식간에 울컥해 그 주먹질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부당한 사실은 한둘이 아니다. 멀쩡히 잘 싸우던 두 놈이 갑자기 합심해서 정태의를 공격하는
것도 그렇지만, 정작 그들이 미워하는 건 '그 유럽 새끼'이면서도 그쪽으로 덤벼들 배짱은 없어 그 차선책으로 정태의에게 덤벼드는 이 상황도 부조리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못 먹을 걸 먹었나, 어디 갖다 버렸는지 몰라도 내다버린 이성 좀 도로 주워 와라, 엉?!'
정태의가 그들을 두들겨 패면서 외쳤던 그 고함은 정작그 둘에게만 고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 부조리함을 번연히 보면서도 말릴 생각은 않고서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던 다른 부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구경꾼들가운데엔 정태의와 같은 팀원이었던 동료들도 몇 섞여있었다. 그게 더 울화가 치밀었다.
결국 신나게 두들겨주고 나니 그만큼 얻어맞기도 했다.의무실에서 대충 처치를 받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면서 울긋불긋 멍이 들었다.
날 좋은 토요일 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하루만 더 있다가 치고받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얼굴을 한 번쓰다듬었다. 손끝이 닿기만 했는데도
시퍼렇게 부어오른 턱이 욱신거렸다. 오늘은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예전에
알타의 소개를 받고 만났던 브로커가 정태의의 주문품을 구했다는 연락이 와서 지난주에 약속을 잡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놀다가 오후에 홍콩으로 나가는 배편으로 잠깐 나가서 만나고 오려고 생각했던 참이다.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만 하는 상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만날 상대였다. 게다가 약속 장소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의 로비ㅡ만나서 자리를 옮기겠지만ㅡ다. 어느 싸움판에서 뒹굴던 얼굴을 내밀기에 어울릴 상황과 장소는 아니었다.
"젠장. 공연히
싸움을 할 거면 차라리 내일 할 것이지."
정태의는 혀를 차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잘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못생겼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 걸 위안으로 삼았던 얼굴인데,
이거야 못생긴 정도를 넘어서 인간의 얼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거울 앞에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정태의의 뒤로 한 남자가 그림자처럼
다가섰다. 귀신처럼 사나운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는 남자와 거울 안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거 사람꼴도 안 갖춘 얼굴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
요모조모 살피고 있어."
"화장실에서 정신 팔고 있다가 바지자락에 줄줄 흘리기라도
했냐? 왜 갑자기 시비야."
말을 하려고 입만 움직여도 관자놀이가 욱식거린다. 얼굴이 망가지긴 망가졌나 보다. 정태의가 도로 거울을 쳐다보며 심상하게
중얼거리자 남자는 험상궂게 그를 노려보다가 옆의 일인용 카우치에 앉았다.
"사람을 다짜고짜 홍콩까지 끌고 나와놓고선 만날
사람은 코빼기도 안 비치니까 이러지. 너 혹시 약속 따위는잡지도 않고 나갖고 노는 거면, 정말로 죽일 줄 알아."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너를 가지고 놀란
말이야? 미안하지만 사양하고 싶다."
나는 총기를 끌어안고 제 애인입네 하며 죽고 못사는 놈과 그렇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거든, 마니아가 옳으면 어떡해, 라고 덧붙이며 정태의가 손을 절레절레 젖자 그 총기 마니아, 모러는 눈이 쌍심지를 켰다.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냐?! 나도 우리 이쁜이들에 대한 사랑은 네 놈에게 한 터럭이라도 나눠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젠장, 이 금쪽 같은 토요일에, 우리 이쁜이들 깨끗하게
닦아주고 정비해줘도 모자랄 이 시간에 왜 네놈이랑 같이 여기까지 나와야 하는 거야. 얼른 콜트나 내놔!
그것만 챙기면 난 바로 돌아갈 테니까!"
"있어 봐, 곧 그 아저씨가 올 테니까. ……아야야."
멱살을 움켜쥔 모러의 손길에 마구 뒤흔들리던 정태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이 턱턱 부딪히자
그 충격이 얼굴까지 전해져 와 낯을 찌푸렸다. 호되게 얻어맞아 인간의 형상이 아닌 얼굴이 아프다.
모러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문지르며 아이고 아파라, 하고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보고
모러는 그가 왜 아프다고 하는지 이내 깨달았는지순순히 손을 놓으려 혀를 찼다.
"나야말로 너랑 있고 싶지 않다니까.
모난 돌 옆에 있다 정 맞는 그 체질 옮으면 어떡하냐."
비록 자신이 먼저 던진 부메랑이라지만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정태의는 얼굴을 감싸쥔 채 허리를 푹 굽히고 말았다. 자신이 원래는 그런
체질도 아니었고, 지금도 좀 (많이) 운지 없다곤 하지만 체질이 그렇게 변한 건 아니라고 목청껏 주장하고 싶었지만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모처럼 주말이라 모난 돌 근처에도 안 가고
괜찮은 휴일인데 왜 그 이야기를 꺼내고 그래, 모러 이 빌어먹을 놈아."
정태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평일 내도록 모난 돌 옆에 있는 건 자신이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모난 돌은 금요일 오후 정규일과를
마치기가 무섭게 늘상 홍콩으로 가버렸다가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때로는 월요일 새벽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서 주말동안에는 모난 돌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곤 하는 정태의였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모난 돌을 떠오르게 만드는 건 다른 놈들이다. 계속 유럽놈 미친놈
하면서 정태의만 보면 모난 돌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가급적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하는 정태의는 그런 동료들을 볼
때마다 내심 '사실 네놈들, 그놈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견딜 수 없는 거로구나. 그러니 만날 화제에 끄집어내며 되새기는 게지. 이 애증으로 굴절된 놈들아.'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치명적인 멍석말이를 당하리란 걸 알고 있기에 결코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모러는 딱하다는 듯 정태의를 보며 혀를 찼다.
"너는 보면 말야, 나름대로 똘똘해 보이는데 가끔 이해를 할 수 없는 멍청한 짓을 한단 말이야. 안개 한 점 없이
해맑은 날에 앞이 훤히 보이는데도 절벽으로 자박자박 걸어가거든."
"내가 뭘."
"보니까 너는 출세를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그러면 일신의 안녕을 위해 마땅히 모난 돌에게서 떨어져 자갈들 사이로 숨어들어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왜 굳이 모난 돌 옆에 가서 자갈들한테도 얻어맞고 모난 돌한테도 깨지냔 말이야. 지금
네 주위에 네 편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나 한 번 둘러봐라. 동료 좋다는 게 뭔데, 그것도 다 날아간 셈이잖아. 그렇다고 리그로우 그 미친 놈이 널 아군이라는 개념으로 여길 것
같아? 어림없지, 어림없어."
모러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태의는 허리를 굽힌 채 고개만 돌려 모러를 곁눈으로 올려다보았다.정태의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모러였지만 그래도 정태의의 상황이 가엾긴 했는지 눈매를 찡그린 채 내려다보는 눈길에 동정이 서린다.
"내가 내 발로 절벽으로 걸어갔냐.
등 떠밀려 갔지. 왜 골백번 말해도 믿어주는 놈이 없어."
"내 보기에 너는 네 발로 절벽에 뛰어드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니까. 제 발로 호랑이굴로 걸어 들어가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밀거든. 봐, 지금도 그렇지. 왜 하필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았어?
호텔 로비라면. 달리 특급 호텔이 널려 있는 게 홍콩인데 왜 고르고 골라 이 호텔이냔
말이지."
"이 호텔에 호랑이 사냐? 호텔 뒤가 절벽이야? 그럼 저기 저 퍼시픽 플레이스는 뭐야? 저 쇼핑몰에서 절벽과 호랑이를 세트로 파는가 보지?"
"호텔 바로 옆에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서 호랑이가
아가리 딱 벌리고 있잖아, 이 멍청아! 네 눈엔 저 길 건너 리포센터
안 보이냐?!"
정태의가 못마땅하게 소리치자 모러도 질세라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 기세에 눌려 정태의는 입을 다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샹그리라.
홍콩섬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인 곳에 있는 특급호텔이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모여들어
마천루가 즐비한 번화가에 자리 잡은 이 국제적체인망을 둔 호텔에는 오늘도 그렇고 예전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었지만, 고급 상점가가 늘어선 이 애드머럴티에 호랑이가 기거하는 절벽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게다가 모러가 손가락질한 방향에 굳건하게 서 있는 리포센터는 아무리 봐도 벼랑 끝에 세운 것처럼 보이진않았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리포센터를 보았다. 꼭 닮은 건물 둘이 나란히 붙어 있는 쌍둥이 빌딩은 숱한
공 · 사기업이 들어가 있었다. 풍수지리로 보아 흉한 건물이라고 꺼리는 홍콩인들도 제법 많은 모양이었지만
모러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저게 뭐 어때서――――."
리포센터를 가리키며 고개를 돌리던 정태의는 저만치에서 기다리던 인물이 다가오는 걸
보고 손을 내렸다.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브로커였다. 그 역시 정태의를 보곤 가볍게 손을 들어 아는 체했다.
"하하, 내가
조금 늦었군. 미안하네, 귀한 분을 좀 뵙고 오느라."
"아닙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정태의는 소개를 시켜준 알타라 이 남자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아부를 늘어놓았던 걸 떠올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은 자신을 흰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라지만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 말도 없이 멀뚱하게 브로커를 쳐다보기만 하는 모러의 옆구리를 한 번
쿡 찔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손을 대고 있는 업이 업인 탓인지 브로커는 낯선 얼굴을보자 못마땅한 빛에 가까운 경계의
표정을 띠며 슬며시 물었다. 정태의는 최대한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모러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이 친구가, 그 물건을 찾은 사람입니다. 취미로 그쪽에 방대하게 손을 대고 있지요."
"아하……."
브로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러는 친한 척 어깨를 두드리는 정태의를 몹시 불편하게 쳐다봤지만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는지 거기서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지는 않았다.
"그래,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위에 방 잡아두었으니 잠이 올라가세."
먼저 일어서며 말하는 브로커의 뒤를 따르며, 정태의는 냉큼 자신의 손등을 꼬집는 모러의 손을 떨쳐내며 손을휘휘 털었다. 모러는 혼잣말처럼 툴툴거렸다.
"그냥 처음부터 방에서 만나든가 칸막이가 세워진
음식점 같은데서 잡으면 됐을 걸 왜 굳이 이 호텔이래."
이 호텔이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까부터 계속 호텔 불평을 하고 있는 모러의
옆구리를 꼬집어주려는 차에, 그 목소리가 들렸는지 두어 걸음 앞서가던 브로커가 흘끔
돌아보았다.
"왜, 마음에
안 드나? 허허, 그러면 다음 번엔 다른 곳으로 잡도록 하지.
오늘은 말이야, 바로 요 옆에서 선약이 있었거든. 내가 전에 얘기했었지? 홍콩에 대규모 지사가 들어왔다고. 그게 저 리포센터에 들어왔거든. 저기서볼일 보고 바로 오려니 여기가 제일 적당하지 뭔가."
모러의 불평에도 별 불쾌한 기색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남자의 그 말에 모러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정태의는 흘끔 모러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중국인들의 풍수지리에 대해 아는 건 쥐뿔도 없지만 저 건물이 흉하다는 의견엔 아주
동감할 것 같다.
"아하. 무슨
지사인데요?"
"음, 그게
말이지,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군수업체야. 납품과 제조 쪽인데,
그쪽 업계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회사지. 아마 이름을 들으면 자네도 알 텐데……."
중국의 풍수지리 따위 엉터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대단히 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무득 들었다.
정태의는 슬쩍 모러를 보았다. 모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세상만사가 다 짜증스럽다는 얼굴을 하고서 부루퉁하게 걷고 있었다.
"어이, 모러.
저기 들어와 있다는 그 군수업체―――."
정태의가 막 입을 열려던 차에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브로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런데 자네는 얼굴이 왜 그런가.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UNHRDO에 있는 인재를그렇게 후려갈길 만한 배짱 좋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정태의는 입을 다물며 말을 꿀꺽 삼켰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같이 UNHRDO에 있는 인재들이지. 비록 정태의의육체적인 고난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하나 심적인 고난에는
훌륭하게 일조하고 있는 모러는 정태의의 우울한 얼굴을 보곤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정태의를 걱정하는 척
했던 그 얼굴도 잠시, 어마 안 있어 도착한 객실에서 브로커가 콜트를 꺼내기 무섭게 정태의 따윈 저만치 뒷전으로
돌려두고 형형하게 눈을 반짝이며 총에 달려들었다.
T&R Ine
1층 로비 한쪽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현판들을 훑던 시선이
심플하고도 세련된 글자체의 한 현판에 가서 멎었다. 아마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듯 길이 들지 않은 현판이
칼날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집단 폭행의 현장에서 막 튀어나온 듯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현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태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쁘게 오가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은 때로 정태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전화에 대고중얼거리며 옆을 스쳤다. 정태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제복을 말끔하게
갖춰입은 경비 정도일까.
"어디를 찾아오셨습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태의를 살피던 경비는 시간이 몇 분 가량 지나도 정태의가 생각에
잠긴 채 거기서 비켜날 생각을 않는 눈치이자 가만히 다가서 물어보았다. 정태의는 경비에게
잠깐 심각한 시선을 주었다가 그 현판을가리켰다.
"저것 말이죠. T&R
Ine……."
"아, 네.
얼마 전에 들어온 곳이죠. 저곳에 볼일이 있으십니까? 누구를 찾는지 알려주시면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오, 뭐 그렇게까지는……. 볼일이 생각나면 직접 올라가 보겠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대단히 수상쩍은 대답을 평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조금 뜨악하게
쳐다본 경비는 목소리를 조금 굳히며 말했다.
"층마다 안전 장치가 설치되어 보안 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만."
"그렇군요……. 마침 마땅히 생각나는 볼일도 없네요."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경비의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시선을뒤통수로 고스란히 느끼며 돌아섰다.
브로커와 모러는 대단히 죽이 잘 맞았다. 이제 보니 브로커도 상당한 마니아 기질이 있었다. 총기나 무기류를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놓으니 십년지기가 따로 없는형국이었다. 콜트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 결에 정태의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 지경까지 번졌다. 나름대로 무기류에 대해서는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역시 마니아의 세계는 깊었다.
결국 의기투합해서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그들 두 사람을 놔두고 정태의는 먼저
방에서 나왔다. 어차피 모러에게 돌아갈 콜트는 이미 몇 달 전 주문 단계에서 지불이 완료된
참이라 거기에 정태의가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호텔 정문 앞에서 멈춰선 정태의는 도어맨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올 때까지 묵묵히 발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머리 위로 글미자를 드리운 건너편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빼곡하게 솟은 마천루 사이에 얼핏 똑같아 보이는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건물로 걸음을 옮긴 건, 딱히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뭔가 아주 사소하게 신경쓰인 탓이다.
그게 무너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사소하게.
사실 그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예전 그의 숙부가 말했던 바도 있듯이, 그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제법 감이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현판을 봤을 때 정태의는 거기에 시선을 못박았다.
T&R Ine.
달리 정태의가 모르는 회사명을 새긴 현판이 빼곡하게 걸려있었으니 그 가운데 다른 군수업체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정태의가 알고 있는 군수업체의 이름은 저것 하나였다.
하긴 굳이 정태의가 아니라도 이쪽에 한쪽 발 정도라도 담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름이다. 대인무기보다는 대물무기를 주로 다루는 쪽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으니 상당히 내실 있는 회사였다.
정태의도 사관학교에서 무기학을 배웠을 때들은 바 있었다. 들었다 뿐 아니라 저 회사를
거친 무기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T&R Ine. 공동창업자의 이름을 딴,
명목상으로는 주식회사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족벌경영이라는 평을 듣는회사다.
Tarten & Riegrow Ine.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이 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이에 문득 떠올랐다.
"리그로우라는 게 영 없는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흔한 이름도 아니란 말이지……."
건물 밖으로 나와 문 바로 옆, 간소하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화단 옆에 몇 개 비치된 휴게용 벤치에 걸터앉았다. 생각해 보면 군대 장교로 있었다는 인간이 여태 몰랐던 게 우습다. 게다가 그 남자는 자기 입으로
가업인 무기중개업ㅡ중개만 하는 건 아니었지만ㅡ을 돕는다고 말도 했었는데.
"하지만 말야, 내 주위에 누구든 티엔알티엔알하고 부르지 타르텐 앤 리그로우사(社)라고 정식 명칭으로 부른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고."
정태의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뒤적여봐야 담배가 나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가슴주머니를 두드렸다. 젠장. 다이아몬드 손가락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가업을
이은 형을 도와서 무기업을 약간 돕는다고 가벼운 어조로 말을 하길래 그냥 조그만 무장단체 같은 데에 무기 팔아먹고 개인상대도 조금씩 위험한 일에손대는
정도려니 했었다. 하지만 저 회사라면 틀림없이 다이아몬드 손가락이다. 연간 수십 수백억대 이윤을 내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경제 쪽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조차 모르는 곳이 허다하다.그런 일반적인 사람이 이름을 알 만한 기업이라면 그들의 머리가 상상조차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록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곳이라고
보면 되는데, T&R Inc.은 관련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일개 군인까지도 한 번 정도는그
이름을 들어봤을 곳이었다.
"그나저나 절벽에 호랑이라……. 분명 저 이름이 내게 있어서는 역신이나 마찬가지인 건 사실이지만, 내가 뭐 저 가문이랑 척을
진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치를 떨 것까지는 없었는데."
모러 그놈도 참, 하고 중얼거리며
반대쪽 주머니도 더듬거리던 정태의는 잠깐 그 손을 멈칫했다. 일레이가 저 가문 아들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잘
알려진 사실인가 싶었다. 그야 흔치 않은 성 인건 분명하지만 숙부의 눈치로는 그리 대놓고 이야기할 만한 거리는
아닌 것 같았는데.
"왜냐면 모러는 UNHRDO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회사에한쪽 발을 담그고 있었거든. 그 무기광이 달리 어디에서 일할 생각이나
했겠어. ――――자, 여기. 네
취향은 던힐이었지?"
속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집어 봤자 나올 리가 없는 담배를 끈질기게도 더듬고 있던 정태의의
어깨 너머로 하얀담배가 딱 한 개비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래. 모러 네가 옳았다.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이놈이 어슬렁거릴 만한 곳 근처라면 분명 호랑이 아가리가 맞지. 기껏 모처럼 맞은 휴일에 홍콩에 와서까지 이 근처에서 노닐었던 나를 구박한 네 참뜻을 이제야 알겠다. 정태의는 돌아볼 생각도 않고 떨떠름하게 담배를 받아들어 입에 물었다. 곧 이어 라이터까지 어깨
너머에서 불쑥 다가와 불도 붙여준다.
"얼굴은 왜 그 꼴이야. 못 본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얼굴이 너무 많이 바뀌었는걸."
"칭송이 자자한 교관님을 새로 모시게 된 뒤부터야
뭐 일상다반사가 된 일인데."
"아하."
뭐가 우스운지 어깨 너머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고맙게도 입맛에
잘 맞는 담배를 던져 준 그 남자는,정태의로서는 처음보는 차림인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남성 패션지에서 뽑아내기라도 한 듯 물 흐르듯 보기 좋게몸에 감기는 진회색 양복을 걸친 그 모습이, 어느 잘 나가는 기업의 신진 중역이라도 되는 성싶다.
아. 하긴 다이아몬드
손가락이었지. 생각해 보면 재벌집 아드님 아니신가.
"? 왜."
지그시 쳐다보는 정태의의 시선이 의아했는지 일레이가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태의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를 주욱 훑어보았다.
"아니, 양복
입은 건 처음 봐서. 그렇게 입고 있으니 꼭 회사원 같은데."
"하하, 그야
회사원이니까."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쿨럭,담배연기를 잘못 들이켜 두어 번 숨을 컥컥거린 정태의는 농담을 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자기도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며 일레이는 왜 그러냐는 얼굴로
쳐다본다.
"언제부터 UNHRDO가 정장 필수인 기업체가 되었어. 난 양복 없는데."
"양복이 필요하다면 한 벌 사 줄까?"
"그런 말이 아니라……. ……사 준다면 거절은 안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벤치에서 엉덩이를 들 기색은 보이지 않으며 정태의는 담배를 뻐끔거렸다. 일레이 역시 그 옆에 앉는다.
"모러가 그러던가, 여기에 가면 날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우연히 왔다기엔 홍콩 바닥이 그렇게까지 좁지는 않을
테고."
"네가 내려올 타이밍에 내가 여기에 있었던 건 명백한
우연이 맞지."
정태의는 순식간에 반 너머 줄어든 담배를 안타깝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회사원. 회사원이라. 대체 이 남자를
고용한 그 미친 회사가 어디란 말인가. 아무리 족벌 기업이라지만 이런 걸 회사 안에 놔둘 생각이 든단 말이야?
"주말마다 홍콩으로 나온다 했더니,
'가끔 시간이 날 때에만 형님의 일을 조금씩 돕는'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천만에. 가끔 시간이 나는 주말에만 올 뿐이지. 이쪽 일이 그렇게까지 만만하진 않거든.
우리 집안이 좀 의심이많아서, 나는 그저 지부 경영자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감시만
할 뿐이야. 아무래도 형님이 유럽에서 꼬박꼬박 날아와 챙겨보기는 힘들지 않겠어?"
"하아……. 홍콩에 지사가 들어서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동생이 홍콩으로 영전되어 왔단 거로군."
회사원은 무슨……, 정태의는 '이건 혹시 소시민으로서 빈정이 상해도 괜찮은 상황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면서 날이 거의 저물어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보랏빛하늘을 등지고 건물이 어둑하게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일레이 역시 같은 쪽을 보고있다가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접속사가 좀 틀렸어. 지사가 들어서는데 홍콩으로 왔다기보단, 지사가 들어서서 홍콩으로 왔다는 게 옳겠지."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얼굴로 담배 연기를 후우 뿜어내는 그에게 손을 내밀자그는 이내 새 담배를 한 개비 건네주었다.
"그냥 갑째로 줄 것이지 재벌집 자제분이 치사하게."
"유해한 물건을 그렇게 막 줄 수야 없지."
저 말이 저렇게 안 어울리는 입도 없을 거다. 정태의는 그 밉살스런 입을 잠깐 노려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니 겁나잖아.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사람을 잡아먹을 듯니 노려보시네, 그래."
안 어울리는 말만 잘도 뱉어내는 입을 쳐다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별 대단치도 않은 생각을 잠깐 했지.
유럽과 아시아 지부 사이에는 직통으로 사람이 오가는 일이 없다더니 왜 난데없이, 심지어 원성이 자자하기 짝이 없는 놈이 교관으로 튀어나왔나 하는 거라든가. 무기상과 기구의
유착관계라든가……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하하, 알아서
하등 좋을 게 없는 걸 생각해서 뭘 하게. 관둬, 관두는 게 심신이
편할걸."
심신이 편치 않게 된다면 그건 네놈이 편치 않게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냐, 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하긴 그의 말마따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낌새를 눈치챈 척이라도 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이트'가 붙는 사건이 수십 가지도 넘도록 넘쳐나는 세상인데 그 정도는
1분 뉴스거리도 안 된다. 정태의는 두 개비째의 담배를 뻑뻑 피우며
'이러다 반년지나기 전에 골초 돼서 돌아가겠다'고 잠시 한탄했다.
모러 이놈의 자식. 이야기를 하려면 애매하게 돌려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했어야지. 그럼 이 근처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것 아냐.
그때였다. 점점 남청색으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턱 아래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움칫, 보일듯 말 듯 어깨를 움츠린 정태의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일레이가 정태의의 턱을 손끝으로 붙잡은 채 비스듬히 기울여 들여다보고 있었다.
턱에서 입가, 뺨,
콧날에서 눈매, 이마에 이르기까지 찬찬히 닿아오는 시선의 뒤를 쫓아 턱을 쥐고 있던
손도 얼굴을 가만히 쓸어올린다. 찢어진 입술을 쓰다듬는 손길에 다소 힘이 실려, 피가 말라붙은 입가를 스칠 때엔 뜨끔하게 아팠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찡그리자 이내 알아차렸는지
손끝에서 힘이 빠진다.
"쯧쯧……. 볼 거라곤 하나 없는 얼굴이 그나마 이 짝이 나서야 이거 어디 쓸 수나 있을까. 언제야.
내가 어제 오후 나올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으니, 어젯밤? 오늘 아침? 요 몇 시간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가만있자…….
오전쯤 다쳤나?"
"말 안 해도 혼자서 잘 알아맞히는 주제에 물어보긴
왜 물어봐. ……아. 아파. 누르지
마."
정태의는 일레이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잠시 힘을 줘 얼굴 위에 머무르려나 싶던 손은 곧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일레이는 미묘하게 웃으며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 번쯤 날잡아서 한 놈 정도, 시비 거는 놈을 아예 꺾어버리지 그래. 제대로만 하면 다시는 널 안 건드릴 거라고는 못해도,
그렇게 가볍게 툭툭 건드려대지는 않을 텐데."
정태의는 혀를 찼다. 이것은 이 남자의 친절이다. 그는 옳은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의 방식에서 보았을 때 옳은 조건이다. 분명 예전 언젠가 그가 했었을 행동대로가볍게 시비를
거는 놈 하나를 찍어서 '꺾어버린다'면 지금보다 싸움의 횟수는 반 이하로
줄어들 거다. 어쩌면 1할 이하로 떨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드물어질 싸움은 죄다 목숨 걸고 해야 하게 될 거다. 이 남자의 예를 봐도 그렇다.
"나는 폭탄 들고 떼지어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할
만한 배짱도 용기도 능력도 없거든……. 게다가 어쨌거나 아직은 동료이기도 하고."
"동료."
일레이가 정태의의 말을 따라했다. 미묘한 웃음이 담겨 있는 그 어조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네 얼굴을 그 꼴로 만든 데에 그 동료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나?"
"뭐 딴에는 그렇지."
"인간 관계 몇 정도는 가지치기 좀 하지 그래.
거기에서 말뚝박을 생각도 아닌 눈치던데, 그럼 적당히 버리라고."
누구 말야, 너?
ㅡ라고 순진한 얼굴로 말해줄 수 있다면그 또한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그 말은 애써 삼켰다. 나날이 보신의 기술만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꾹 다문 입술을 꿈틀거리며 말을 머금고 있는 정태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라도 갔는지, 일레이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보신. 보신해야지. 퇴역ㅡ이미 정태의의머릿속에서
UNHRDO는 군대나 다름없었다ㅡ까지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이 시점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서야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정태의는 최대한 순진하게빙긋 웃어주곤 벤치에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가지치기라,
그 말 역시 일레이의 방식에서 보았을 때 옳은 조언이며 그 나름의 친절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뿐 아니라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역시 이 남자는 정태의와 사고 방식이 여러 모로 달랐다.
물론 저 기구에는 처음부터 반년이라는 시간을 전제로 두고 오긴 했지만, 그것과 가지치기와는
관계가 있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없다.
"내 참……. 나도 남에게 썩 잘해주는 편은 아니지만."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설교할 생각도 없고 질책할 생각도 없었지만 잠시 입맛을 다시다가 한숨을
쉬었다.
"흉터 하나 없는 관계가 어디 있어."
"하하아."
정태의의 짧은 말에 일레이는 더욱 짧게 의미없는 대답을 했다. 정태의는 어디서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긁적이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나도 성격이 썩 좋지는 않아서 나랑 오래 사귈
친구놈들에게는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화가 나는 기억이 있단 말이야. 하다못해 예닐곱 살의 원한 중에서도 기억나는게
있거든. 뭐 나만 그렇겠어, 그놈들도 나한테 화나는 기억이 있는 건
마찬가지겠지. 오래 될수록 더 그러잖아."
어지간히 사려깊지 않은 한 사람이 오래 사귀어가다 보면 마음 상하는 일 한두 번이야
어떻게 없을까. 흉터가 하나, 둘,
셋, 그렇게 덮여가면서도 계속 만나왔고, 앞으로도
만날 거다.
"난 그놈들의 사소한 부분들을 미워하지만 그러나
분명그놈들이 좋거든. 즉 말이지……, 내가 비록 지금 내 주위녀석들의
사소한 부분을 밉게 여긴다 하더라도, 앞으로 최소 30년은 반드시 그놈들을
어떻게든 내 삶과 더불어 끌고 갈 거다."
정태의는 제법 오래 못 본 친구들까지도 모처럼 하나씩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김소위 같은 놈만 아니라면속 좀 썩인다 하더라도 딱 몇 년만 지나면
다시 무던한 관계로 돌아온다. 일레이는 톡, 톡, 손끝으로 벤치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재미있다는 듯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그 웃음 서린 시선에서
정태의는 일레이가 자신의 의견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애초에 설득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다만 너와 나는 다르다, 라는 속뜻만 알아차렸으면
됐다. 그 정도도 못 알아차릴 만큼 둔하거나 멍청한 놈도 아니었다.
"30년이라. 그럼 30년 뒤엔?"
"바보냐. 물어볼 필요가 뭐 있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일레이는 입가에서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묻는다.
"계속 이끌고 갈 거라고? 저 지부 녀석들을?"
"글쎄……. 굳이 그 녀석들을 짚어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뭐 알 수 없는 일이지, 그거야."
"알 수 없다니, 조금 전에 한 말과 다른데."
"할 수 없잖아. 아직 미워하거나 좋아할 만한 부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녀석이 대부분인데."
정태의는 인상을 썼다. 살아가면서 마주치고 부대끼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삶과 더불어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렇게 끌고
갈 사람은, 기실 정태의가 혼자서 택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미워하거나
좋아할 부분이 보이는 것은 아주 짧은 일순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자아내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이 알아온
모든 시간이 아닌, 몇몇 찰나의 순간들인지도 몰랐다.
……뭐 비록 지금은 최소 몇 달째 못 만나고들 있지만. 다들 뭐 하고 있으려나.
정태의는 해지는 반대편 바다 너머에 있을 친구들을 멍하니 떠올렸다. 그때, 재미나다는 얼굴로 정태의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손을 들어 그 커다란손으로 정태의의 얼굴을 덮다시피 해 천천히 한 번 쓸어내렸다. 그 얼굴의 숱한 상처들을
하나하나 짚어내린다.
"지부 놈들의 미워할 부분이라면 이미 충분히 보이지
않았나? ㅡ봐, 이것도."
"아, ……아야!
누르지 말라니까!"
관자놀이의 멍을 일부러 가운데손가락으로 꾸욱 누르고내려가는 그 손길에 정태의는 울컥
소리쳤다. 일레이는 웃으면서 손을 뗐다. 네놈의
미워할 부분이라면 이미 충분히 보인다 못해 넘쳐흘러서, 때로는 손에 칼 하나만 쥐어주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분이든다, 이놈아. 내 생명이 아까우니 차마 말은ㅡ실행도ㅡ못하지만.
정태의는 사나운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북북 문지르면서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이건 미워할 부분이라기보다는……한 대 확 때려주고
싶은 부분이지."
그래서 나도 얻어맞고만 있지는 않고 같이 때려주잖아,라고 정태의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일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몹시 유쾌한 듯 즐겁게, 상쾌하게, 한참을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그래,
그런거군', 하고 간간이 중얼거리면서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런 그를 희한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일레이가 이런식으로 웃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비웃음인지뭔지 의미가
알 수 없는 웃음을 피식 흘리는 모습이야 자주 보았다. 소리내어 웃는 것도 가끔 봤다. 그러나 유쾌하고 상쾌한 빛이 대부분인 저 모습은 의외로 티없는소년처럼 보이기도 해, 정태의는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는 몰라도 웃고
싶으면 웃어라. 눈가를 살짝 접으면서 웃는 얼굴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본성을 훤히 알면서도, 부드럽고 푸근한 웃음이라고 속아넘어갈 것 같았다. 늘 저런 식으로 웃기만 한다면 칼 백 번 날아올 것도 아흔아홉 번 정도로 줄어들 텐데. 그래,
이 녀석이 성격은 아주 극악하지만 외모는 나름대로 성격에 반비례하잖아.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일레이는 웃음이 잦아들자 여전히 웃음기가 서린 눈으로 정태의에게 눈짓했다.
"그러면 난 어때.'
"응?"
뭐가, 라고 되물으려던
정태의는 바로 조금 전까지 흘러왔던 대화의 맥락을 떠올리곤 움찔했다. 이 남자의 미워할 부분은 당장 말해
보라 해도 열두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거다. 좋아할 만한 부분은 그 열두 가지를 말하는 동안 내도록 생각해야
겨우 한 가지쯤 나올까.
"……. 꼭
말해야 하나?"
정태의는 심각하게 물었다. 최대한 가벼운 척 말하려고해도 스스로의 얼굴이 비장하고 어두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걸로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본심을 그대로 말했다간 그리 좋은 꼴은 못 볼 테지. 일레이는 이번엔 조금 전처럼 유쾌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우습다는 듯 나직이 웃었다.
"뭐 좋아. 오늘은 기분도 좋으니, 다음에 다시 물어보도록 하지. ――――그럼 가 볼까."
그렇게 말하며 선뜻 일어서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딜? 하고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갯짓했다.
"양복. 사
주겠다고 했잖아. 구룡 쪽에 괜찮은 곳을 알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이 뒤에 바로 약속이 있어서 거기까지
갈 시간은 없고, 퍼시픽 플레이스에서 그럭저럭쓸 만한 걸로 해 주지. 아니면 선호하는 곳이라고 있나?"
일레이가 묻는 말에 정태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눈만깜빡이면서 아니, 그건 아닌데, 하고 고개를 저었다. 갑자게 웬 양복,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정태의는 거절할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 * *
잠이 제법 깊이 들었나 보다. 정태의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흘끔 눈동자를 돌리자
삼촌이 가운 차림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곤한가 보지. 사람 들어와서 샤워까지 하고 나오는데도 깨지 않은 걸 보니."
"그렇게 피곤할 일은 없었는데……,
잠깐 눈 좀 붙이려 했는데 그새 잠이 깊이 들었었나 봐요. ……몇 시에요?"
"10시 좀 넘었어. ……우와. 너 얼굴 아주 화려하다. 그새 또 무슨 일
있었어?"
정태의가 졸린 숨을 내쉬며 부스스 일어나 앉자 그를 마주본 숙부가 얼굴을 찌푸렸다. 출장으로 이번 주 내도록 없었던 숙부는 이제 막 돌아온 참인지 방 한구석에 캐리어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늘 그렇죠 뭐. 칼침을 맞아도 한참 맞아야 할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니 이럴 수밖에요. 그래도 이거 나름대로
치료받은 거에요."
정태의는 손등으로 조심조심 볼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얻어터지고 나서 바로 의무실에서 교호에게 약이며 거즈 등등도 받아서 바로 처치했고 심지어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일레이도 정태의에게 약을 쥐어주었다.
퍼시픽 플레이스에서 나와 '저녁에 약속이 있어 난 가봐야겠어. 같이 돌아가면 좋을 텐데 유감이군.'이라며 헤어질 때에 약국에서 약을 사서 굳이 정태의에게 쥐어주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딱 맞는
속담이 우리나라에 있었지, 라고 정태의는 내심 생각하며 일레이가 연고를 짜내어 찢어진 입가에 톡톡 두드려주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정태의의 입매를 문지른 일레이는 그제야 흡족한 듯
가볍게 손을 들곤걸어가버렸다.
저놈도 참 알 수 없는 놈이다. 어쨌든 병을 줬지만 약도 준 놈을 마냥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상황에서는 이 상황을 만들어낸 사람을 탓하는 게 고작. 정태의는 볼을 문지르며 이 모든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삼촌. 이
빚은 큽니다. 나 앞으로 한 20년은 줄기차게 기억할 거에요."
"나한테 그러지 말고 때린 놈들한테 그래라.
어이구, 그 철없는 놈들. 찍어뒀다가 한 번쯤
박살을 내주지 그래."
정태의는 픽 한숨을 쉬었다. 이 숙부도 누구랑 비슷한 말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 누구는 진심이고 숙부는 반만 진심이라는
점이다. 정태의는 뻐근하게 기지개를 켜며 '완력이든 실력이든 여기에
있는 놈들이랑 붙어서야 오히려 제가 박살나지 않을까요.'라고 증얼거렸다. 별로 탐탁지 않은 주제라 화제를 옮긴다.
"남미 쪽은 괜찮으셨어요? 일은 잘되셨구요?"
"같은 기구 내부의 일인데 잘되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어.그냥 위에서 보내니까 갔다온 거지."
"으음. 총관
영전이나 승진에는 다른 지부랑도 다 연관되어 있는 거죠?"
"그런 셈이지."
그럼 같은 기구 내부의 일이니 잘되고 말고 할 게 없다는 대답은 안 먹히는데요, 삼촌, 하고 정태의는 눈으로말했다. 숙부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대답없이 빙긋 웃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정태의는 부외자다. 비록 지금 당장은이 기구에 몸담고 있다 하나 그 의도도 잘 모르겠고,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해서 들어온 게 아닌 탓이다.
"뭐 삼촌이 하시는 일이니, 알아서 잘 하시겠죠."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운수 좋은 형과는 다른 의미로 이 숙부는 어디에 던져둬도 별로걱정이 되지않았다. 게다가 UNHRDO 총관이 바뀌든 미 대통령이 바뀌든 세상이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알 게 뭔가.
당장 윗자리의 교관만 바뀌면 참 좋겠다 싶은 열망은 있지만.
"너는 주말이 나갔다 왔다면서.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어?"
"아, 홍콩이요?
어제 나갔다가 어제 바로 들어왔는걸요.재미있는 일이 뭐 있었겠어요."
"왜.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매다 들어간 골목에서 근사한 고서점을 발견했다든가 할 수도 있는 거지. 아니면 길 가다가 우연히
아는 얼굴이라도 만났다든가. 설령 그 얼굴이 딱히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야."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털어내고 있던 숙부는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인다. 정태의는 여전히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로뚱하게 숙부를 보다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셨다.
"거 소문 한 번 빠르네요. 발 없는 말이 남미까지 날아갔나 보죠."
"들어오는 배를 리그로우와 같이 탔거든."
숙부는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며 '맥주 마실래?'라고 정태의에게 물었다. 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캔 하나를 꺼내어 던져준다. 정태의는 거품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풀탑을 땄다. 성대하게 뿜어나오지는 않았지만 부글부글 새어나오는 거품을 후루룩 마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 정도면 다이아몬드 숟가락이더군요."
"아? 그놈?
그렇지. 다이아도 아주 상질의 다이아지."
"……. 글쎄요…….
그건 과연 어떨지."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는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 때 재산이나 집안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조건이겠지만, 저 남자쯤 되면 그 모든 조건들을 다 깎아먹고도 남을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정태의는 맥주를 꼴깍꼴깍 마시면서 가만히 숙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차를 끓이기도
귀찮은듯 컵에 물만 따라 마시던 숙부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마주본다. 의아한 듯 쳐다보는 숙부에게 정태의는
심상하게 말했다.
"확실히 T&R이면 이쪽 업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회사이긴 하죠. 규모로도 그렇고, 내실로도 그렇고."
"그렇지. 이쪽에 관련된 사람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지금 그곳을 경영하는 사람이 사업
수완이 대단히 좋은 놈이거든."
"아아, 삼촌
친구분이라는 그 분이요?"
"맞아. 리그로우의
형이기도 하고."
"음. 확실히
사업을 하려면 여러 가지로 수완이 좋아야하긴해요. 인맥도 넓어야 하고, 그쪽 업종은 특히나 체제에 민감할 테니 정계에도 늘 신경을 써야 할 테고, 로비 활동도 보통이
아닐 테고. 그 업계에서는 정경 유착도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맥주에서 입을 떼고 잠시천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집안이 로비를 잘 하긴 잘 하나 봐요.
그래도 UNHRDO라면 일단은 국제기구인데 그렇게까지 편의를봐줄 정도면.
굳이 일레이를 아시아 지부로 옮겨놓을 이유가 대체 뭘까 했었는데."
"……."
숙부는 대답 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 맥주만 홀짝이는 정태의를 쳐다보던 시선이 이윽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달각, 물컵을 내려놓은 숙부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다.
"군수업을 하면서 로비 능력이 안 따라줄 수야 없는
노릇이지. 리그로우가 이 지부로 온 거라면 네 생각과는 약간 다르지만."
"……?"
"뭐 그거야 민감한 문제니까 다음에 기회 생기면
이야기하도록 하고……. 지부 내에서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릭은 지부 일도, 회사 일도 제대로 양립시키고 있으니 상관없잖아."
아니오, 크게 상관있죠,
삼촌. 지부 내의 사소한 문제란게 결코 사소하지 않잖아요, 지금 제 얼굴을 보고 그런말씀을 하시죠.
정태의는 말끄러미 숙부를 바라보았다. 그 원망섞인 눈빛에 숙부도 켕기는 게 있었는지 으음, 하고 난처하게 웃는다.
곳곳이 멍들고 찢어져 거즈를 붙인 모습을 보니미안하긴 한가 보다. 그 눈치를 보자
정태의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 픽 웃고 말았다.
"뭐, 됐어요.
살아가면서 몇 달 정도 죽어라 고생해보는경험도 있어야죠. 쇳덩이도 두들겨 맞아야
강해진다는데. ……물론 저는 강철 같은 인생 필요 없고 그냥 연철처럼 살아가도 좋지만."
두들겨 맞아야, 라는 대목에서 약간
말을 흐린 정태의는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말이 씨가 된다고, 강해지기
위해 험난한 삶의 굴곡은 줄줄이 겪어야 하는 인생은 사양이다. 그는 여기에서 나가면 얼른 평화로운 내 나라
내 집으로 돌아가 소박하고 온건한 삶을 살아갈 예정이었다.
"연철이라……. 뭐 가능하다면 그것도 좋겠지. 나도 현실이야 어쨌든 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거든.
세상사에 부딪혀 막히지 않고 그냥 흘러흘러가는."
그런데 그렇게 안 되더라, 너도 힘내보렴, 생략된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아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어쩐지 반갑지 않은 말인데요, 라고 입 속으로 투덜투덜거리는 정태의를 보고 숙부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예전에 일레이는 형의 일을 약간 거드는
정도라고 말했었는데, 주말마다 일을 볼 정도면 단순히 거드는거라고는 할 수 없겠는걸요. 하긴 가업이라니당연한가."
"으음―――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래?"
숙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정태의는 깨달았다. 이 화제는 이제 그만.
숙부가 오래 끌고 싶어하지 않는 화제는 적당히 끊어내는 게 상책이다.
"아, 그렇지.
너 곧 생일이잖아. 재의한테 연락은 있었어?"
"그런 게 있었더라면 남미 지부에서도 홍콩의 길거리
소식을 다 듣고 있는 삼촌이 모르실 리가 있겠어요."
정태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생일이 이제 곧이었다. 정태의가 전화할 요량이 있다면 슬슬 전화가 와도 괜찮을
즈음이다. 바로 오늘 오전에도 시간이 남는 김에집으로 전화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쩌면 저 집은 정태의가 돌아갈 때까지 방치될는지도 모르겠다. 걱정할 일이야 없지만,
어디에 박혀있는 건지 궁금하긴 했다.
"뭐하고 있으려나 몰라요. ……연락 오면 삼촌한테도 전화 한 번 하라고 말해둘게요."
형 안부를 묻는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그들에게 일일이 전화하라고 했다간 정재의의 전화비가 못 버텨낼 지경이었다. 하긴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한다 해도 기꺼이 받을 이들이었지만. 몇 모금 남지 않은 맥주를 주욱들이키는데
숙부는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생일 선물은 뭐 받을래?"
"에?"
입에 담긴 맥주를 꿀꺽 삼키면서 정태의는 눈을 깜빡였다. 퍽 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원래 생일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가끔 형제끼리 서로 뭔가 사주기도 했지만 생일선물 운운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게다가
매년 챙겨주던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는 몇 년간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생일 선물은무슨.
정태의는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요. 새삼 선물은 뭘요."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지. 오늘 지나면 또 언제 네가 내게 생일 선물을 받겠냐."
"음……. 그럼, 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기각."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청을 넣은 정태의의 말이 끝까지 떨어지기도 전에 숙부는 딱부러지게
고개를 저었다. 쳇,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로 필요 없어요.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아. 그래서 그랬나?"
정태의는 문득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고 불쑥 중얼거렸다. 숙부는 그 말만 들어서는 이해할 방도가 없는 그 말에 응?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어제 일레이가 갑자기 양복을 사주겠다고 옷집으로 끌고 가더라구요. 왜 그러나 했더니,
나름대로 생일 선물이었나 보군요. 그런 걸 챙겨줄 성격이라곤 생각 안 했는데."
"……. 나도
그 녀석이 그런 걸 챙겨줄 성격이라곤 생각안 했다."
숙부는 대단히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정태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의심쩍은 시선에 정태의는 공연히 당황스러워져 거짓말이 아니라는 의미로 손을 저었다.
"아니, 저도
이상했다니까요. 이놈이 왜 갑자기 옷을 사주겠다고 그러나 싶어서."
오죽하면 헤라클레스의 죽음이 다 떠올랐겠어요, 라고 정태의는 우울하게 덧붙였다. 숙부는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픽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어떤 옷인데 그래."
"아―――맞춤복이라서 가봉하러 다시 가봐야 해요.
치수만 재고 왔거든요. 뭐더라. 샵매니저가
명함을 주던데."
정태의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아무렇게나 구겨진 명함을 내밀었다. 숙부는 그 명함을 받아들며 묻는다.
"아하. 맞춤으로
했어?"
"네. 시간이
없다고 아무데나 대충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가자 길래 그냥 대충 기성복일 줄 알았는데, 맞춤이더라구요."
영 부담스러웠는데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그 부담이 아주 조금은 줄어드네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나도 뭔가 해줘야 하나, 하고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숙부는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한 번 휙 뒤집어보기도 하다가 다시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렇게 받은 게 카라체니?"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긴 한데…….
아, 삼촌도 아는 가게인가 봐요."
"……. 글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 거기에서 옷을 맞춘 적은 없어서."
숙부는 명함을 팔랑팔랑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 왜 그러세요."
"아니……. 릭이 왜 네게 양복을 갖다 안겼는지를 잠시 생각하는 참이다. 그놈이 돈 개념이 일반인과 퍽
다르긴한데,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돈을 막 퍼주진 않거든."
그놈이 너한테 빚진 거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놈이 아니지, 숙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숙부에게 넘겨받은 명함을흘끔
쳐다보았다. 어쩐지 줄어들었던 부담이 다시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삼촌……. 이게 비싼 거라곤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받은 대로 갚아주기엔 전 모아놓은 돈도 없이 빈곤한
서민이라구요. ……하긴 여차하면 받은 거 그대로 돌려주고말죠, 뭐."
"글쎄다……. 갑가기 웬 선물 공세라냐."
"그러게요. ……혹시 또 알아요? 그놈이 알고 보면 제게 첫눈에 반했는지."
정태의는 생각하려니 답도 안 나오고 귀찮아져 머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놈은 그렇게인간적인 놈은 아니라도 본다, 라고 심각하게 말하는 숙부에게 질린 듯 손을 내젓고 말았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 감 좋은
숙부가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정태의는 빈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가뿐히 일어났다. 시간도 늦어졌으니 이제 슬슬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6층으로
내려가면 또 복도에서 마주치는 면면들마다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쳐다보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상관을 잘못 만난 죄이려니. 모쪼록 이곳에서 나가는 그날까지만 이 이상 탈없이 지나가길 바랄
따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태의는 또 한 번의 파란이 닥쳐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건수를 떠올렸다.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숙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곧 남미 지부와 합동 훈련을 하겠군요."
"그렇지. 이번에 가서 나눈 이야기 중에 거기에 대한 것도 있었어. 타지로 인솔해갈 교관의 인선이라든가."
"남미에서 이쪽으로 반수가 온다면,
여기에서는 어디로가는 거에요?"
"호주."
"삼촌은 이번 훈련에 여기 남으세요,
아니면 호주로 가시는 건가요?"
"지난번엔 남았으니 아마도 이번엔 가게 되겠지."
"우음―――. 호주랑 남미라……. 그쪽 지부와는 사이가 좋은가요, 여기."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정태의가 심각하게 묻자 숙부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손을 젓는다.
"사이좋은 지부란 건 없어. 하지만 아시아 지부와 유럽지부만한 관계는 없으니 그리 걱정할 것도 없지. 뭐,
안심해. 어쨌든 다른 쪽에는 온 지부에 악명이 자자할 정도의 살인마는 없거든."
"아니, 그
살인마가 우리 지부에 있다는 점도 좀 문제가된다고 보는데요, 저는."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익히 체감하지 않았던가. 같은 편이라고 해서 일레이를 든든한 아군으로 여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게다가 합동 훈련을 틈타서 같은 지부내에서도 원한에 의한 살상 사건이 드물지않게 일어난다고 들었다.
같은 지부내의 원한 관계라면지금 현재, 이곳 아시아 지부만큼 위험한 곳이 또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더 우울해졌다.
"삼촌. 일레이는
호주로 가게 될까요."
"아마 안 가겠지. 이곳으로 전출된 지 얼마 안 된 교관을타지로 보내는 일은 통상적으로 없으니까."
"그렇다면 전 꼭 호주로 가고 싶은걸요."
"너는 안 되지. 교관에 교위는 필연적으로 따라붙거든.호주로 가고 싶으면 리그로우가 가게 되길 빌어 봐."
"제가 바라는 건 호주가 아니라 일레이의 반대 방향이라구요."
"그놈이 앓아눕기라도 하도록 기도해 보든가."
숙부는 별 도움은 되지 않는 조언을 해 주었다. 정태의는 믿을 구석도 없이 외딴섬에 홀로 떨어진 기분으로, 침울하게 방을
나섰다.
사람이 살아가는 어떤 사회든 인간 관계라는 게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다못해 집안에서만 자라는 서너 살짜리 어린애라도 아주 간단하나마 인간 관계에 얽혀 있는바에야.
정태의는 숙부의 방에서 꺼내어 온 맥주를 홀짝이면서 건물 현관 옆에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담배만 한 개비 손에 들면 딱 퇴폐적인 모습이다.
"내가 인간 관계로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가……아니,
없었던 것 같아."
원한이 켜켜이 쌓인 인간 개개인 때문에 속에 천불이 났던 적이라면 있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들의 복합적인 관계 사이에서 속을 끓였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고 웃고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안 된다.
모난 돌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는 말이 딱이었다. 사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만한 모난 돌도 흔치 않다. 세상에 비상식적인
인간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거야 알고있었지만 설마하니 저런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도못했다. 그 옆에 떨어지게
된 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 남 탓이라도 할 수는 있지만, 생각해 보면 참 희한한ㅡ몸쓸ㅡ인간상이다.
얼굴 멀끔에, 머리 좋아,
힘도 좋아, 능력 있어, 집안 좋아,
성격은 작살이야…….
나열된 말들만 보면 흔하디 흔한 부잣집의 성격 나쁜 자식놈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 있는 인간도 아니었다. 죽일놈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수없이 많지만, 불특정 다수에게서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실 뭐……그렇게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전에 이 말을 했더니 토우가 진지한 얼굴로 '인간적인 면모 가운데 어떤 점을 두고 그런 생각을
했지?'라고 물어왔는데, 대답은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대답은 할 수 없지만, 정태의는 실제로어느 정도는 저렇게 생각했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개잡듯 때려잡는'
모습을눈앞에서 그리 자주 본 적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피해다녀야 할 대상이기는 할지언정 싫어하고 증오스러운 대상은 아니었다.
언젠가 형이 스치듯이 '너는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담백한 데가 있다'고 말했던 게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심정이 드는 걸 어쩌라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물론, 여전히 백 리밖에서라도 그의 모습이 보이면 냅다 도망가버리겠다는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이 형."
아무리 맥주는 술도 아니라지만 이러다가 알콜 중독이라도 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정태의가 나머지 맥주를 비웠을 때, 문득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태의는 멈칫하곤 천천히 돌아보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은 들렸지만 흔하게 드나드는 누군가이려니 생각하며 돌아보지도 않았었다.
"신루……."
"이런 밤중에 바깥에 계시면 위험해요.
벌레 같은 것도 많이 다니거든요."
신루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정태의의 옆에 따라 웅크리고 앉았다. 자리는 널찍해 딱히 비켜줄 필요 없었는데도 정태의는 괜히 한두 걸음 옆으로 옮기는 시늉을 했다.
공기가 움직이자 비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정태의는 흘끔 신루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씻고 나온것 같지도 않은데, 보슬보슬한 머리에는 비누 냄새가 배어 있었다.
두 손을 모아쥐고 그 위에 턱을 괸 신루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역시 사랑스럽다. 요 얼마간 까끌까끌한 공기가 감돌아어색하기도 하지만 역시 정태의는
이 청년을 보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시간에 나와 계세요."
"그냥 바깥 공기도 좀 쐴 겸…….
너는?"
"형이 여기 있으실 것 같아서요."
신루는 할끗 눈동자만 굴려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눈이마주치자 얼른 다시 우울한 듯 시선을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답답해졌다.
정태의는 뭐가 문제일까 생각해 보았다. 신루는 정태의에게 좋아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말로도, 표정으로도,행동으로도. 정태의 역시 신루를 좋아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청년은 또 보기힘들 거다. 그러니 서로의 감정이통한다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어딘지 까끌한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형. 저는요."
정태의가 가만히 하나하나 짚어보는데 신루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요 근래 신루는기운이 없었다.
기운이 없다고 할까, 뭔가 생각에 잠긴것 같았다. 맡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빈틈이 없었지만틈만 생기면 골똘이 눈만 깜빡인다고, 의무반 교호에게전해들었다.
어쩌면 신루는 그 나름대로 이 상황의 타개책을 찾으려고 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론을 지어 정태의를 찾아왔을 수도 있었다.
"젊은 때에 감정에 치우쳐서 사랑 때문에 명예고
미래고생각지도 않고 팽개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사람이 최소한의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것부터 다져두어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그리고
저는 UNHRDO에 들어오면서 이제 제 미래는크게 걱정할 것 없겠다고 생각했지요. 위로 올라갈 자신은 있으니까요. 아마 형도 힘들여 UNHRDO에 들어오셨을 테지요."
신루는 혼잣말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늘어놓았다. 정태의는 신루의 마지막 말에 부정하는 대답을할까 했지만 사뭇 진지한 그 얼굴은 기분 탓인지 며칠 전에 보았던
때보다 더욱 야위어 보여, 가볍게 '아냐아냐, 난 그냥 어쩌다 보니'하고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요, 형. 형한테는 미안한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형이
여기에 있는 게 싫어요. 여기에 있는 한 형은 계속 그 남자의 교위로 있을 텐데,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그래서 전, 형이
UNHRDO를 그만뒀으면 좋겠어요.그래도 형이 절대 앞일 걱정은 할 필요가 없도록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 혹시 그게 싫으시면, 저도 그만둘게요.
형을 위해서라면 UNHRDO 따위는 얼마든지 그만둘수 있어요."
신루는 또박또박, 하지만 단숨에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태의는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뜻밖의 제의에 멍하니 신루를 마주보기만 했다. UNHRDO를 그만둔다.
너무도 당연하게 안배된 미래인데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에서
벗어날 텐데도.
생각해 보면 그렇다. UNHRDO에서 나가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저 골치 아픈 관계들과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비록 거주지의 문제라든가 여타 사소한문제들이 생기게 되긴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까끌하지는 않을 거다. ……. 뭐야. 지금 이렇게 애매하고 거북한 공기가 흐르는 탓은 다 이 내부의 인간들 때문인가. 돌이켜 보면
대놓고 신루와 정태의의 관계를 질타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는데도 언제부터인가 모래처럼 까끌한 분위기가 사이에 감돌았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신루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조금만 더 지나면 UNHRDO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면 모든게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태이 형. 그렇게 해 주세요. ……저는 형이 그 남자와.리그로우와
같이 있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낮에 일을 하면서도 지금쯤 형은 그 남자의 옆에 있겠지 생각하면속이 치밀어
올라서 숨도 안 쉬어져요. 너무 괴로워요. 형, 나랑만 같이 있어주세요."
신루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에 매달려왔다. 흙바닥위에 무릎을 짚은 신루는 정태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뺨에 조심스레 입맞춘다. 그 순간. 정태의는 머릿속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ㅡ나랑만 같이 있어주세요.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자 불현듯 떠오른 기억. 일레이와 함께 얽혀 있던 유연한 몸. 그 거칠고 뜨겁던 공기.
싸늘하게 날이 선 목소리. 그 순간 정태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던 그 새카만
눈.
신루를 마주 끌어안으려던 손이 그의 어깨에 닿기 직전에 멈칫했다. 얼마 전의 그 언젠가, 서늘하게 웃음 지었던 그 남자가 이 어깨를 베어물었다.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일레이가 어령에서 나와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밤―――――."
정태의는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마치 절로 흘러나오는것처럼, 불쑥 말이 스며나온다.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이 움칫 떨렸다. 뺨에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진다.
신루는 천천히 정태의에게서 떨어져 그를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눈이 정태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핀다. 탓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사실은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말이 저절로 의지를 가진듯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야.
너와 그 남자가 몸을 섞었다는 데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정태의는 그때 문득 깨달았다. 미묘하게 까끌거리며 버석거렸던 이 느낌은, 무심결에 정태의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신루와 일레이가
몸을 섞었던 탓이 아니었다. 그때, 신루는 정태의가 모르는 곳에서 정태의의
삶을 건드리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루의 욕심이다. 그는 정태의와 시간을
나누고 싶어하는 게 아니었다. 정태의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알았는데도, 이렇듯 갑작스럽게ㅡ이제야ㅡ알아차렸다.
정태의는 말끄러미 신루를 바라보았다. 그를 탓하려는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아아, 그렇구나'라고 깨달은기묘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형."
신루가 정태의를 불렀다. 금세라도 사라질 듯 가느다란목소리는 잠시 이어지지 않았다. 다급하고 당황한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형, 나는,
―――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요……!"
화급하게 팔꿈치를 붙잡는 손에 힘이 실렸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금세라도 흩어져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세차게 움켜쥔 그 손아귀의 악력은 뜻밖에도 세었다.
"형, 정말이에요,
나는 형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마음주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형을 빼앗길까봐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태이 형 ……!!"
신루는 다급하게 외쳤다. 팔꿈치며 어깨를 지나치게 세게 움켜쥔 손길에 아파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려 했지만 그 몸짓을 거절로 느꼈는지, 신루는 더더욱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신루! ……신루!"
정태의는 다소 초조하게 신루를 불렀다. 팔을 뻗어 신루의 등을 쓸어내리며 두어 번 이름을 부르자 신루는 입을다물었다. 그리고 불안스레 정태의를 바라본다.
"형. 나는
형이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계속."
여전히 정태의의 팔을 꼭 움켜쥔 채 신루가 속삭인다. 정태의는 신루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신루가 얼굴을 흐렸다.
"싫으세요? ……그렇게 난처하게 보지 마세요. 형. 내가 싫어졌어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신루가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형, 나는――――."
"태이가 네 옆에 있는다 한들 그는 네게 복록을
갖다주진 않아. 그의 축복은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거든."
신루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등 뒤, 약간 위쪽에서 느릿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가볍게 연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뒤따른다.
정태의는 그렇지 않다고 내젓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신루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당혹스럽고 초조하게 정태의에게 매달리던 신루의 표정이 돌변했다.
표정 없이 서늘하게, 어쩌면 일말의 잔인함조차 띠며, 신루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정태의의 어깨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시퍼런 칼날
같다. 그래, 마치 그 언젠가 열락이 감돌던 공기 안에서 내뱉던 목소리와
같이.
"리그로우."
새파랗게 맑은 물 위로 독액이 뚝뚝 떨어져 번지는 듯한목소리. 정태의는 그 순간 신루가 얼마나 저 남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 못 견뎌하도록 끔찍하게 싫어하고 있었다. 어쩌면 영역 다툼을 하는
맹수와도 같이.
정태의는 가만히 신루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물이 사악 번져가는 느낌이다. 그는 신루를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조금도 알지 못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태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건물의 창문이 두어 뺨만큼 열려있었다. 그 사이에서 담배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연기 아래에 일레이가 서 있었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조금 의외였다. 재미있다는 듯한
그 목소리와는 달리 일레이는 웃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 눈가에문득 희미하게 웃음기가 스민다.
"너는, ……거기서
뭐해."
그 웃음을 보자 어쩐지 뜨끔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머뭇거리다 불쑥 중얼거렸다. 말하고 나서야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나긋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이 누군가를 바삐 찾아다니기에
한 번 유혹해 볼까 하고 뒤를 쫓았지. 다른 사람과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그 동안 담배를 한 대 태우던
참이야."
일레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 나긋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을 돌아보았다. 신루는
일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없이, 그가 미워 견딜 수 없다는 눈으로.
문득 신루는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일순 허를 찔린 얼굴을 한 그는 이를 악물었다.
"네게 날아온 조사서에도 적혀 있었을 것 아냐.
정태이와 함께있어 그 운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정재이 외에는확인된 바 없다ㅡ고. 그래도 확인해보고 싶었나?"
일레이가 심상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감이 솟았다. 그러나
그 불쾌감은 비단 신루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레이에게 사나운 시선을주었다.
"신루."
정태의는 일레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신루를 불렀다. 신루가 얼른 고개를 젓는 모습이 시야 끝에 들어온다.
"형, 그렇지
않아요. 난 그런 것 따위는―――."
"내가 길상천이라는 말을, 너는 언제 들었어."
"형, 상관없어요,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
"언제 들었냐고 했잖아."
정태의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잘랐다. 신루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일레이가 뜻하는 바가 옳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 일로 일일이 화를 내며 실망하기엔,
지나치게 잘난 형을 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는다. 눈뜬 장님이라도 되었던 기분이 들어, 조금 낙심했다. 그것은 신루의 잘못이 아니다. 굳었던 표정을 풀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는 정태의를 말없이 쳐다보던
신루는 조금 전 그렇게 격앙된 듯하던 게 언제냐는 듯 조용히 말했다.
"형이 여기에 오신 뒤예요. 형이 이곳에 도착한 다음날,알았어요. 집에서 연락이 왔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어요."
ㅡ하긴 그놈 집안 자체가 욕심이 많은 집안이긴 하지. 그래도 길상천을 얻어보고 싶다고 덤빌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들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정태의는 그 말을 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서 신루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에 어렴풋이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빤한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다는 듯.
정태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긁적였다. 우울해졌다. 이러다가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하게 될지도 모를 것 같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여간 사람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정태의는 침울하게 발치를 쳐다보다가 괜히 맥주캔을 툭 걷어찼다. 동그르르 굴러간 빈 캔이 벽에 부딪혀 멈춘다.
"……일레이."
정태의는 톡톡, 눈앞에서 재를 떨어내는
하얗고 기다란손가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대답 없이 눈썹만 치켜올리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는 왜――――."
말을 꺼내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옆에서 신루가 말 없이 서 있었다. 정태의는 다시 성가신 듯 머리를긁적였다.
"너는 왜――――뭐?"
정태의가 입을 다물자 일레이가 거들었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왜 시비를 걸고 그래. 분명히 말했잖아. 신루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그래, 말했지.
그리고 난 그 말대로 하고 있는데. 내가 그놈에게 손대는 것처럼 보였나?"
일레이는 신루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때다. 신루가 울컥한 듯 서슬이 퍼렇게 되어 짓씹어 말했다.
"말했었지. 다시는 태이 형 건드리지 말라고. 다시는 형 근처에 가지도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분명히 너는 알았다고 했었잖아."
정태의는 낯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류의 대화는 좋아하지도 않았거니와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게다가 이 대화의
주체와 요점도 짚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려 막 입을 열던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짚어보듯이,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젓는 바에야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입매를 찡그렸다.
일레이는 생각을 마쳤는지, 혹은 그 표정을 본 탓인지, 피식웃었다. 그리고 신루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래, 분명
그랬지. 일부러 그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군. 그것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말해두건데 나는 태이를 건드리지 않았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신루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서 있던 정태의는 일순 울컥했다. 신루는 보지 못했을 테지만 일레이는 정태의의어이없다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았을 거다. 푹, 소리내어웃었으니까. 입가를 슬쩍 가리긴 했지만 웃고
있다는 게 뻔한 얼굴로 그는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의 기준에서, 그는 정태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기준이 타인과ㅡ적어도 정태의와는ㅡ동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그가 제일 가까이에 만만하게 땅따먹기를 하고 놀 수 있는 인간이 정태의였을 뿐, 반드시 정태의여야 하는 이유는없었다.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한 마디 쏘아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여기서 괜한 말을 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 좋을 대로 해라.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거라곤 점점 울적해지고 있다는사실뿐이다.
"하지만 말이지……, 이렇게 귀엽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살짝 꼬인단 말씀이야. 꼭 한 번 건드려보고
싶거든."
문득 일레이가 나직이 말했다. 입에 문 담배를 아무렇게나 뱉어내곤, '너 불 제대로 안 껐다가 다른 데 불이라도붙으면…….'하고 중얼거리려던 정태의의 멱살을 잡았다. 곧바로 끌어당기며 다른 손으로 정태의의 뺨을 넉넉하게
감싸는가 싶더니, 턱을 붙잡고 억지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입에 혀를 밀어 넣었다.
"……!"
"……!!"
거의 동시였다. 정태의가 반사적으로
일레이의 아래턱에 주먹을 휘두를 때, 신루가 달려들었다. 일레이는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어렵잖게 정태의의 주먹을 피하곤 흘끔 신루를 곁눈질했다. 아주 짧은 시간,
어느샌지도 모르게 다가선 신루가 일레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멱살을
잡힌 순간 일레이는 눈썹을치켜올렸다. 그 입가에 웃음과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때다.
정태의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일레이의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느 때에 일레이가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좁히는지.
"하지 마, 신루!"
멱살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려 할 때, 간발의 차이로 정태의가 끼어들었다. 신루의 주먹을 후려갈기듯이 내리친
정태의는 그의 손에서 일레이의 멱살을 풀어낸다. 동시에 내지르는 신루의 다른 쪽 주먹도 철썩 후려쳐 비껴내며,
그 앞을 막아섰다. 바싹 붙어선 것과 다름없었다.
창가에서 몸을 반 너머 바깥으로 내민 일레이, 그 바로 앞에서 일레이를 감싸기라도 하는 듯이 그를 등진 채 신루를 마주보고 선 정태의. 그리고 한두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마터면 정태의에게 주먹질을 할 뻔한신루. 신루는
일순 깜짝 놀란 얼굴로 정태의를 보았다. 정태의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일레이를 감싼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뚫어지도록 정태의를 바라본다.
"태이 형……, 왜……."
"멍청아, 상대를 보고 싸워라!"
정태의는 다급하게 날뛰었던 심장이 가라앉지 않아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태 한 번도 정태의에게 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신루는 더욱 눈을 크게 뜬다. 정태의는 이내 혀를 차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쩌면 신루는 정태의가 생각하는 것만큼 허약하거나 가냘프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상상을 뛰어넘는 정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신루가 이 괴물 같은 남자를 넘어설 만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보였던 일레이의 표정. 만일 그대로들어갔더라면 십중팔구 신루는 지금쯤 성한 몸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신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울컥한 얼굴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 설령 제 힘이 못 미친다 해도 어떻게 이런 때에 가만히 있으라고요! 전 그렇게 못 합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태이와 겨루게 되겠군. 어쨌거나 태이는 내 교위이거든."
신루의 외침에 섞여, 일레이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뒤돌아서 저 얼굴에 주먹을 딱 한 방만 먹였으면 좋겠다싶은 마음은 결코 신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말마따나 자신이 그의 교위인 탓도 있었지만, 정태의는
상대를 보고 덤비는 미덕을 갖추고 있었던 탓이다. 신루는 일레이에게서 정태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
"형, 저
말이 맞나요?"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 신루가 나랑 비슷하다고 쳤을 때 과연 여기서 신루와 편을 먹고 이놈 자식을 갈겨버리면 승산이 있을까. ……아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만 위험해진다면
모를까, 신루까지 위험하게 된다. 한숨이 절로 났다.
"그래, 맞아.
네가 나 있는 곳에서 굳이 일레이를 치겠다면 내가 막을 수밖에 없겠지."
정태의가 대답하자 신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루는 이윽고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여전히 분하고 납득이
안 가는 얼굴이었지만 정태의와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깊이 심호흡을 하곤 몸에서 힘을 뺀다.
"태이 형.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진지하게 정태의를 마주보며 신루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긴장했다. 부디 그가 대답하기 곤란한 물음을 묻지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신루는 더없이심각하게, 긴장된 얼굴로, 정태의에게 물었다.
"태이 형. 내가 더 좋으세요, 아니면 리그로우 쪽인가요."
쿨럭, 정태의는 헛숨을
들이켜 크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는 여유로운 태도로 새로담배를 꺼내고 있던 일레이가 아연한 얼굴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그 역시 신루의 물음이 몹시 의외였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뭐라고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어이없는 정도를 뛰어넘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 나이에, 이 정도 나이가
되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입을 우물거리다가
머리를 벅벅 긁는 정태의를 앞둔 신루는, 그럼에도 몹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난처한 빛을 띠고 신루를 바라보았다. 사실 난처할 것은 없었다. 답은 쉽게 나왔다. 그러나 지금 이때. 신루에게조차 조금은
지친 기분이 든 이때, 말을 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과연 자신은 이 청년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여전히 좋아했다. 여전히 신루는 사랑스러웠고 또 애처로웠다. 더 이상은 종전과 같이 아슬아슬하고불안하기까지 한
그 유리구슬 같은 두근거림은 아니었지만, 한층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봐도 정태의는 신루를 싫어하지
않았다. 설령 신루가 정태의에게 다른 뜻으로 다가왔다 하더라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신루는 정태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일레이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끄러미 신루를
바라보던 정태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물론 나는 너를 좋아해.
그렇게 대답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마음이 갖추어지지 않은 탓이다. 정태의가 한동안 그렇게 신루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신루는 천천히고개를 숙였다.
한참동안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본다.
"형……. 난 형이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태의의 어깨 너머로
담배 연기가 번졌다. 소리 없이 연기를 내뿜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흘끗 시선을돌렸다. 일레이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시선이,
평소와는 달리 아주 조그만치의 웃음조차 띠지 않고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향한다.
우습냐. 누구에게든 별 대단한
의미 따위는 주지 않는 네 눈에는 이 모습이 우습게 보여?
정태의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화가 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해서, 묵묵히 신루의 정수리만 쳐다보았다.
어깨 너머에서 다시 한 번 담배 연기가 다가왔다 흩어졌다.
9. 앓음
일이 벌어진 것은 정태의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실상 정태의는 UNHRDO의 부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무엇보다도 마음가짐이 그랬다. 주어진 일이니 맡은 바에
충실하게 임하고는 있으나, 그는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늘 부외자의 기분으로 기구를 보고 있었다.
아시아 지부도 유럽 지부도 그에게 있어서는 별다를 것 없었던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렇기에 정태의는 기구 내부에서 은근하게 흐르는 기류도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차관들 사이에서 암투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심정적으로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실세로 아시아와 유럽이 치고받았을 때에도 아시아 지부 쪽에서 싸우긴 하나 마음은 가운데 선상에 있었다.
스스로 원하고 선택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거니와 처음부터 기간이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태의는
동료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증오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동료들의 그
심정을 정태의도 모를 바가 아니었다. 동료를 죽인 남자. 죄의식이라곤
없는 남자. 언제든 자신들을 해칠 수 있는 남자. 그럼에도 자신의 상관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미워하지 말라는 편이 무리다. 정태의가 아시아 지부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정태의 역시 저 남자를 싫어했을 거다.
정태의도 동료를 잃어본 적이 있었다. 사고였다. 정태의보다 두어 살 어린 풋풋한 놈이었다.
해마다 군에서 사고로 생명을 잃는 젊은 목숨은 몇이나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정태의가 속했던 부대에서 나왔다. 정태의와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같은 부대에 있으니 나날이 얼굴 마주치고 인사를 주고받고, 때로는 보초를 서고 있던 그놈에게 초고바 따위를 집어주곤 했던 정도다. 그럼에도 그 청년이
사고로 죽었을 때 정태의는 부대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 아시아 지부에서 일레이 리그로우는 지부원을 몇이나 죽였다. 정태의가 들어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다. 그것이 규율에 맞추어보았을 때 정당방위건 그렇지 않건, 저 남자는 자신의 의지로 상대를 죽였다. 아마 죽이지 않고자 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나라도 싫겠다. 저런 놈이 상관이라고 위에 있으면. 아무런 원한이 없어도 싫을 판에, 원한이 절절이 맺힌 놈이 윗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기분 정말 더럽지, 암."
정태의는 두어 걸음 앞에서 걸어가는 남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오전 일과에서도 어김없이 또 한 놈이 의무반으로 실려갔다.
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덤벼드는 그놈들도 그놈들이었지만, 사실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가아니기에 욕도 못한다.
"왜, 직접
나서서 몸을 풀고 싶었던 모양이지?"
정태의가 투덜투덜하고 있으려니 앞서가던 일레이가 돌아보며 어깨 너머로 말을 던졌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은 귀도 좋아서,
무슨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
"천만에. 손수 처리해주셔서 저야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교관님."
만날 의무반 교호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만 제외한다면. 일레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은 늘 스스로 맞이하곤 했다. 정태의가
괜히 참견이라도 할라 치면 오히려 정태의부터 후려갈겨 치워버리겠다는 뜻이 노골적으로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정태의는, 비록 교호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해도 환자로서 만나는 것보다는부축자로 만나는
게 훨씬 나으려니 하고 결코 끼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요전에 신루가 덤벼들려고 했을 때는 용케도 얌전히 있었다 싶다. 평소라면 자기 일에 멋대로
끼어들었다고 송곳니를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변덕도 심한 놈, 하고 내심 투덜거리며 정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어 걸음 앞에서 일레이가 걸음을 멈춘 탓이다.
정태의가 따라 멈춰 멀뚱치 쳐다보고있자 일레이는 가까이 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이놈이 왜 이러나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며 정태의가 다가가자 일레이는 픽 웃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정도로 줄어든 거리 뒤에서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하며
따라갔다. 요 얼마간 기분이화창한 날이 없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하다.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기분이 암울해졌다. 그건 비단 지난밤에 또땅따먹기를 한 탓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몹시 컸다. 어제는 저 빌어먹을 놈이 어디서 발정유발제라도집어먹고
왔는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한 주제에 자정이 훨씬 넘어서 갑자기 찾아와선 잘 자는 사람을 깨워서그 위에
올라탔다. 오늘도 평일이고, 내일도 평일이고, 너는 산더미 같은 일을 이 자정이 넘는 시간이 되어서야겨우 마친 참이고, 내일 아침에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일해야 하고, 네놈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 말을줄줄이
늘어놓았지만 소용 없었다.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다 보니 몸이 뻐근해서 말이지.
생각해보니 오늘은 운동도 제대로 못했는데 사람이 몸도 좀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하루 정도는 안 자도 괜찮거든.'
잠이 눈꺼풀에 들러붙어 제대로 눈도 못 뜨고 잠에 취해 몸을 뒤척였지만 일레이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졸리면계속 자. ―――잘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 따위 소리나 중얼거리며 정태의의 파자마를 손쉽게 걷어내어 버리고다리를 벌렸다.
그의 말을 따라 정태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말든 아랑곳 없이 꿋꿋이 자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계속되는 자극 앞에서 깨어나려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아서 '나는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피로로 나가 떨어질 거라고'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일레이가 가슴께를 세게 꼬집은 순간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상반신을 반쯤 일으키다가
밀려서 다시 누워버리고 말았지만.
'어이, 아프잖아!
싸고 싶으면 대충 혼자서 아무데나 문지르고 싸란 말이야, 사람 억지로 깨우지 말고!'
'6시에 교관 회의가 있었지? 다섯 시간쯤 남았군. 괜찮아, 자도 돼.
나도 그 동안 적당히 몸을 풀 테니까.'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정태의의 시들어 있는 성기를 쥐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의 악력이 제법 세어 정태의는 흠칫 몸을 움츠리고말았다. 잠이 점점 더 달아나고 있었다.
젠장.
입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정태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힘이 빠져 중얼거렸다.
'네가 나나 신루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 입으로 다시 확인했던
게 엊그제라고 기억하는데.'
정태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예상했던 대답을 했다. 이 정도로 건드렸다고 하기는 너무 약하지 않나, 라는. 그 남자 나름대로는 진심이었을 테지만 정태의는 두통이 올 것 같아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너 설마 신루에게도 이런 걸…….'
'신루? 글쎄,
지금 그놈이랑 이랬다간 어느 순간 물건을 물어뜯길 것 같은데. 게다가 별로 내키지도
않고.'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태의와 자신의 성기를 한 손에 겹쳐쥐고 천천히 훑어올리고 있었다.정태의는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침대위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잠자기는
물건너 간 것 같았지만, 이렇게 된 것 기운이라도 좀 아껴보자는 심산이었다.
벌컥 화를 내려다가 만 이유는 첫째로 화를 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서였고, 두 번째로는 신루에게는 내키지 않는다는 말에 다소 안심했기 때문이다. 이놈이 그래도 마음을 돌려먹어 그 귀여운 아이에게서는 흑심을 거둔 모양이다.
그래, 네 맘대로 땅따먹기나
하고 놀아라.
정태의는 물건을 같이 쥐고 세차게 문질러 올리기만 하는데도 침대 시트 위에서 몸이
뒤흔들리는 그 기운도 좋은 남자에게 어울려주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란 없는 법이라고, 이러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서 나중에 자신까지 이렇게 기본적인 모럴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얼핏 들었다. 우울해졌다. 이러다 껍질
벗겨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참 문질러대던 남자가 정태의의 배 위에 첫 번째로 사정을 마친 뒤에도 그는 비키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에서 한 번 더, 그리고 엉덩이의 골 사이에 문지르다 한 번 더 마칠 때까지 정말로
스포츠라도 즐기는 듯 유쾌하고 힘차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그러는 동안, 의외로 거칠거나
숨막히지 않게 기분 좋을정도로 몸을 흔들어대는 리듬감에 노곤해진 정태의는 비몽사몽간에 몽정이라도 하듯이 어느 결에 잠들어버렸다. 한두 시간, 그리 깊지는 않지만 쉽게 깨지도 않을 정도로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정태의는 7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한 없이 우울해졌다.
남미 지부와의 합동 훈련을 앞두고 바빠진 교관들의 새벽 회의가 6시에 있었다. 교관 회의가 있으면 마땅히 그 옆에는 교위도 따라붙는다.
완벽한 지각이었다.
설마 일레이가 정태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테지만ㅡ상식은 없었지만 그 정도로 양심마저
없지는 않았다ㅡ나중에 다른 교관이나 교위에게 눈총 좀 받겠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옆에 일레이는 없었다. 물론 한 침대에서 나란히 눈을 떴더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몹시 우울할 일이지만,
혼자 상큼하게 땅따먹기를 해먹고 사라져버리는 꼴도 과히 유쾌하진 않았다.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닦아놓은 뒤 알몸 위에 이불만 덮어두고 나간 점도 어쩐지 '저놈과 또
그 짓을 했구나'라고 노골적인 인식이 들어 더욱 우울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그 뿐만 아니다. 여느 때와 다른 우울함은 이날 또 하나 겹쳐졌다. 침대에서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한 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푹 퍼질러 누워버린 순간, 정태의는알아차렸다. 오늘은
비가 억수같이 오나 보다.
무릎과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그나마 옆구리는 신경성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만했지만 무릎은 침대 밖으로 나가기가 싫을 정도로 지끈거리고 있었다. 어디 가서 말하면 노친네 같다고 비웃음을 듣겠지만, 비가 오면 이렇다. 좀 지나면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날이 좀 궂어지거나 습해지기만 해도 무릎이 아팠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아직 수술한 지 1년도 안 됐다.
군대에서 망할 김소위와 대판 붙고서 무릎이 박살나서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었다. 다행히 회복 속도는 의사가 감탄할 정도로 빨라 그리 오래지 않아 좀 걸을 만하게 되고, 평범하게 움직이고 뛸 만하게도 되었다. 평소에는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래도 날씨가 안 좋으면 꼭 욱신거리곤 했다.
'어차피 지하에서만 지내면 볕이 들건 비가 퍼붓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기분상의 문제란 말이야……. 기분 처지게 비가 오고 그러냐.'
아침 댓바람부터 욱신거리는 무릎에 더운 물수건으로 찜질을하며 정태의는 우울한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나마 찜질을 하고 서포터를 두르자 좀 나아졌다. 몸이 좀욱신거리고 뻐근하다고 맘 편히 놀 수 있을 만큼 팔자가 편하지도 않아, 정태의는 더
늦어지기 전에 하루를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규 일과 전에 마주치는 교관과 교위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들의 곱지 않은 시선 따위는 코웃음으로 튕겨낼 수 있을 만큼 험악한
얼굴로 그들을 똑바로마주보았다. 왜 교관을 제대로 안 모시냐고 꾸짖기라도할 요량이면,
그냥 잘라버리라지. 교위 그만두라고 소리친다면 정태의는 언제든 만세를 부르며 냉큼
물러설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태의에게 일레이의 교위를 그만두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혹시, 상관에게 성희롱당하면서도 권력의 횡포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 가엾은 부하직원의 모습이 아닐까.
정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태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공식에 끼워맞춰 보면 그에 다름 아니다.
이거야 상부에 보고하고 정식으로 항의해도…….
"……이, 태이."
우두커니 서서 넋을 놓고 있던 정태의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돌아와 기묘한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왜."라고 부루퉁하게 말한다. 일레이는 어깨를
가볍게 추어올렸다.
"아니, 오늘은
한층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 반대겠지, 정태의는 한층 더
얼굴을 구겼다. 일레이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제대로 쉬지도
못해, 마음은 꺼림칙해, 몸도 안 좋아, 우울할 요소는 고루고루 갖췄다. 정태의의 우울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층구조로 반층쯤위에 난간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 있는식당에서는 한창 점심식사 중인 동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며 말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다투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청력이 뛰어난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그러는 사이사이에 난간 아래를 지나는 정태의와 일레이를 본 녀석들이 모른 척 욕설을 내뱉는 말들이나 비꼬는 소리 따위도 고스란히
들렸다. 이미 일상다반사이니화낼 일도 아니고, 사실 화낸 적도 없다.
하지만 몸 상태가 안 좋으니 평소보다 좀더 불쾌하긴 했다.
"……쯧……."
정태의는 걸음을 늦추었다. 제대로 감는다고 감았는데 오전 내도록 움직이다 보니 서포터가 느슨해졌다. 기분탓인지 무릎이
더 욱신거리는 것 같다.
정태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을 짚었다. 누가 보면 전력달리기를 하고 지치기라도 한줄 알겠다고 생각하며,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해져 다시 한숨을 쉰다.
"왜 그래. ……무릎?"
정태의가 묵묵히 무릎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는데, 앞서 가던 일레이가 돌아왔다. 세 번째나 되돌아오는 터이니 왜 그러냐고
짜증스레 말할 법도 한데도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기만 하다가, 잠시 정태의를 살피곤 물었다.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다.
"음……뭐. 가서 밥 먹어. 난 별로 생각도 없고, 차라리방에 가서
쉬다 오는 게 낫겠다. ……밥 먹는 데까지 내가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교관님?"
"그러고 보니 수술했다고 했었지. 어디."
정태의는 몸을 일으키며 일레이에게 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일레이는 정태의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그 앞으로 다가와 어차, 하고 웅크리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말릴 틈도 없이 정태의의 바짓단을 돌돌 걷어올린
그는 무릎에 어설프게 감겨 있는 서포터를 보고 혀를 차더니 벗겨낸다.
"쯧쯧. 몸을
축내면서까지 군에 충성을 바칠 필요가 있던가? 군인이야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리석은 짓을 했다며 일레이는 무심하게 정태의의 무릎을 꾹꾹 눌렀다. 누르는 부위에 따라 욱신거리기도 해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을
붙잡고 치워내며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내 의지로 들어갔던 곳인데 거기서 꾀를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게다가 이건 군 사고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어디서 다쳤어, 그러면."
"전역하기 전에 김소위랑. ……. 지금쯤 그놈은 갈비뼈랑 필꿈치 언저리가 욱신거리고 있을걸."
말하고 보니 참 멋쩍었다. 일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싸움질 하다가 이 꼴이 난 거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흘끔 일레이의 눈치를 보았다.일레이는 어이없다는ㅡ혹은 한심하다는ㅡ눈으로 잠깐정태의를 쳐다봤지만 곧 말없이 바짓단을 도로 내려주고 일어섰다.
"김소위라면 전에 말했던 그놈인가,
너랑 주먹다짐을 했다는 그 동기?"
"아――――응."
그러고 보니 말한 적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
정도 상처를 아직껏 끌고 있다니 의외로 약골이었군."
정태의는 울컥해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 남자는 자신보다 최근에, 자신보다 더한 상처를 입었었다. 클러스터가 벌집처럼 박혔던 어깨는 현재,
실제로는 어떻든, 겉보기에는 말짱했다.
"내가 약골이라기보다는 네가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것같은데."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가 볼까, 그럼. 무릎 외에도 손을 봐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으니."
정태의와 함께 돌아설 기미를 보이는 일레이의 발걸음도 거슬렸지만 그보다 그의 말이
더 신경 쓰인 정태의는기대어 선 벽에서 떨어질 생각도 않고 미심쩍게 그를 쳐다보았다. 더 손을 봐야 할 부분이라. 무릎 말고 아픈 곳은 없는데. 사실 무릎도 좀 유난히 욱신거릴 뿐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다. 더 손을 본다면,
……'너오늘 손 좀 봐줘야겠다'라는 의미의
그 '손본다'인가. 하지만 최근
이놈에게 뭔가 걸릴 만한 것을 한 기억은 없는데. 정태의가 의심스럽게 그를 쳐다보기만 하려니 일레이는 픽
웃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귀밑, 목덜미 위를 톡톡 두드린다.
"내가 실수하기도 했지만, 밴드라도 하나 붙이고 오지 그랬어."
"밴드? ……?
……!"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정태의는 이내 눈을 부릅뜨더니
자신의 목덜미를 짚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 찍었어?"
"찍혔군."
"……. …….
눈에 많이 띄는 데에?"
"딱 지금 네 가운데손가락 셋째마디가 닿은 곳인데."
빌어먹을. 정면에서 봐도 딱
보이는 위치다. 바깥에서라면 흔적 한둘 보이는 데에 달고 다녀도 그리 꺼릴 것 없겠지만, 사내놈만 드글거리는 이 안에서 어느 날 아침 그런 걸 달고 나타났다면 그건……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선 절대로 안 될 사람도 있었다.
"오늘 신루……안 마주쳤지."
정태의는 퍼런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어쩐지 바람 피우는 남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어쩐지 신루에게는 이런 걸 보이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레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는 정태의의 얼굴을 미묘하게 웃는지 생각하는지모를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그놈 귀에 들어갈 게 그렇게 겁나나?"
"당연하지."
삼촌 귀에 들어가도 땅 파고 들어가고 싶어질 판데, 라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위치면어지간히 둔하거나
눈썰미가 없는 놈 아니면 죄다 봤겠구나, 아주 환장하겠다, 정태의는
시뻘개진 얼굴로 땅바닥을 노려보다가 사나운 시선을 그대로 일레이에게 향했다.
"넌 이거 언제 봤어."
"아침에 네가 교관실로 왔을 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일레이는, 즉 정규 일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봤었다는 소리다.
"야, 그럼
그때 말했어야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늘은 아예 아침부터 운이 없으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숙부라도 봤더라면 알려주었을 텐데, 숙부는 일이 있어 한 발 먼저
교관실을 떠난 뒤였다.
정태의는 머리카락이 뽑힐 정도로 쥐어뜯으면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얼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로를 가로막다시피 서있는 일레이를 사납게 밀어내었다. 어쨌든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그때였다.
촤악――――.
"……. 어……?"
한두 걸음도 옮기기 전이었다. 정태의는 몇 초 가량 눈만 껌뻑거리며 다시 멈춰섰다. 속눈썹 위로 흘러내려 맺힌 물방울이 눈속으로
새어들어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손등도 물기로 젖어 있었다. 손등뿐
아니라 머리도, 얼굴도, 옷도 흠뻑 젖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난간 위에서 한 남자가 칫, 하고
혀를 차더니 빈 양동이를 일레이에게 내던졌다. 한 걸음 물러서 양동이를 피한일레이도 그 남자를 올려다본다.
정태의는 머리카락에 흠뻑 배어 줄줄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몇 번이나 훔쳐내면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교관님은 좋으시겠군. 물벼락을 대신 맞아주는 교위도거느리고."
젠장. 오늘은 하루에 두
건이냐. 역시 아침부터 재수에 옴 붙은 날이었다. 무슨 핑계를 대건
방에서 이불 덮어쓰고 나오지 말 걸. 심지어 지금은 정태의가 일부러 일레이를 감싸려고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길 막지 말라고치워버린 건데 딱 그 타이밍에 물벼락이 쏟아질 줄은.
"시비를 걸어도 꼭 이렇게 고전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걸어야겠냐……."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저놈이 시비를 걸려고 한 건 필경 일레이일 텐데 결과적으로
물벼락을 맞은 건 자신이니, 이 경우 누가 저 시비에 응해줘야 하는 걸까. 역시 나일까. 귀찮은데. 하지만저 비열한 죽상을 한 방
갈겨주긴 해야겠지.
그 남자는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일레이가 강의에 들어갈 때마다 따라 들어간 정태의는 지부 사람들의 얼굴은 대충 익히고있었다.
남자는 어지간한 성인의 키보다 높은 위치인 난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시비를 거는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일레이를 노려본다.
"어이, 네가
쳐다봐야 할 사람은 그쪽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나 아냐? 사람에게 물을 뒤집어 씌워놓고 왜 딴청이야."
정태의는 팔을 훌훌 털어 물방울을 떨어내며 남자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잖아도 우울한 가운데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노릇이다. 일레이가 이 남자를 곤죽으로 만들어놓기 전에 자신이 끼어들변명거리가 분명히 생긴 거다. 눈앞에서
사람이 거꾸러져 나가는데 그 모습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고스란히 구경한 하는 기분도 몹시 더러웠다.
"넌 저리 가 있어. 싸우고 싶으면 나중에 싸워줄 테니까.난 우선 이놈에게 볼일이 있다고."
남자는 사납게 정태의를 노려보며 일레이를 고갯짓으로가리켰다. 저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왜 다들 자기 생명줄을 일부러 끊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지 몰라……,
정태의는 먼저 나서서 죽겠다고 난리치는 인간을 과연살려두어야 할 것인지 고민했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를 막아보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나갈 무렵엔 몸에 사리가 그득히 쌓이겠다.
그때였다.
"태이. 넌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무릎 찜질이나 해. 같이가줄까 했는데 나는 볼일이 생긴 모양이니 안 되겠군."
정태의를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일레이다.
자신에게 걸려드는 일에 정태의가 참견하는 것은 두고보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정태의는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할 말이 있었다. 흠뻑 젖은 자신을
가리키며 정태의는 인상을 썼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건 난데. 이 상황에서는 네가 내일에 끼어드는 거라고 생각지 않나?"
"닥치고 가."
그러나 정태의의 주장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는 듯 일레이는 가차없이 고갯짓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이놈이 오늘 오전에도 한 놈 골로 보내더니 오후가 되기도 전에 한 놈 더 잡을 셈인가 보구나. 정태의는 흘끗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험상궂은 인상 그대로, 뭔가 대단히 의외로운 것이라도 보는 듯이 정태의의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주욱 훑고 있다. 머리에서 발로 내려간 시선은, 내려갈 때보다
조금 느리게 천천히 다시 위로 기어올라왔다. 물기만큼이나 축축하게 들러붙는 시선이 묘하게 불쾌하다.
제가 물 뿌려놓고 뭐가 좋다고남이 흠뻑 젖은 걸 빤히 쳐다보고 있어.
"정태이. 안 가? 이대로 점심 시간 지나면 그 꼴 그대로 오후내내 다닐 셈인가 보지."
"그래도 이놈은 내가―――."
미약하게나마 인정에 매달리며 주장하려던 정태의는 일레이가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위험하다. 이 이상 더 말하려 들면
저 미친놈은 틀림없이 정태의를 먼저 때려눕힌 다음에 그 뒤에 저 남자의 시체를 얹어놓을 게 틀림없었다.
젠장. 이 미친놈아.
그래, 너 좋을 대로 또 사람 하나 조져나라. 난 할 만큼 했다.
정태의는 못마땅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혀를 차곤 돌아섰다. 그리고 이제 곧 의무반으로 실려가게 될남자에게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저 남자는 어디가 망가질까. 팔 한 대쯤 부러질까, 아니면
다리일까. 갈비뼈일지도 모르지. 재수없으면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를
수도있고. 하지만 그나마 다행히 물벼락은 내가 맞았으니 비효적 양호하게 끝나겠다.
정태의는 몸에 축축하게 들러붙은 셔츠자락을 잡아당겨탈탈 털었다. 뭐가 묻기라도 했는지 정태의의 얼굴에서목덜미, 가슴과 허리 언저리를 오가는
시선이 기분 나쁘게 스멀거렸다.
"……?"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자신에게도 뭔가 불만이 쌓인 놈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곤 돌아섰다. 일레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어서 꺼지라는 듯고갯짓으로 복도 너머를 가리켰다. 정태의는 '네, 네, 갑니다'라고 중얼거리곤 걸음을 옮겼다.
정태의가 걸음을 옮기는 뒤로 발자국 모양의 흔적이 축축하게 복도에 남았다. 어디에 담겨 있던 구정물을 갖다부었는지 퀴퀴한 냄새도 난다.
"젠장. 아까
몇 방울 입에 들어간 것 같은데. 우웨ㅡ…."
오만상을 찌푸린 채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지만 손을 적신 물도 어차피 마찬가지다. 정태의는 자신이 그나마 비위가 좋은 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6층으로
내려갔다. 지금쯤 그놈은 처참한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겠지. 아니면
의외로 깔끔하게 팔 정도만 꺾어서 의무반에 도착한 참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간이면 한창 밥 먹고 있을 텐데, 의무반 교호도 참가엾다. 한방중이라도 일이 터지면 당장 끌려와야 하지않은가.
이러니 볼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지……, 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우울하게
다리를 끌었다. 차가운 물벼락까지 맞고 나니 무릎이 더 아픈 성싶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보다 더 아픈 건 조금 전 그 망할놈이 무릎을 아무렇게나 꾹꾹 눌러대서 그런지도
몰라,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주얼거렸다.
그러나 의외이긴 했다. 그렇게까지 티를 낸 것도 아니니 무릎이 안 좋다는 걸 알아채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더욱이 그거야
워낙 눈치가 빠른 인간이니 이해할 만하다고 쳐도, 그렇게 거침없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다리를 살펴볼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한쪽이나마 무릎을 꿇긴 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을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물론 그가 고개를 숙인 모습을정태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나름대로 동료의 건강 상태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놈일지도 몰라. ……. ……그럴 리 없지."
정태의는 실낱같은 희망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보니 더욱 허무해진다.배려심이라는 게 있는 인간이었더라면 의무반
교호가 귀신 같은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볼 리가 없었다.
찬물에 젖어 욱신거리는 무릎을 질질 끌고 겨우 방에 도착한 정태의는 에고고,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홀로 쓰는 방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태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신발부터 벗어던졌다.
그나마 신발까지 푹 젖지는 않았지만 양말이 젖어 개운치 않았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것도 믿을 게 못 돼.
다 뻥이야. 별치사한 놈이 다 있질 않나, 살인마가 있질 않나, 그렇다고 또 무모한 놈이나 없길 하나……."
양말을 벗어 바구니에 집어던지면서 정태의는 소리내어 투덜거렸다. 속아서 이곳에 들어오는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 실태를 찍어서 시사 르포 프로에 투고를 해야 돼,
정태의는 공동욕실로 가면서도 그치지 않고 중얼거렸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아무도없는
욕실문을 열자 공기가 움직이면서 퀴퀴한 냄새가 확 코끝을 스쳐,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욕실문 정면, 커다란 반신 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거울 안에는 생쥐처럼 흠뻑 젖은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나마 살갗이나 정수리 언저리는좀 말라
있었지만 옷깃이며 소맷자락에는 여전히 물기가 고여 있었다.
"……."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채 거울을 노려보았다. 으아……하고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 꼴을 하고 걸어왔단 말이지…….
오늘 아주 골고루한다. 정태의."
정태의는 벌게지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맨 살갗 위에 그대로 걸친 제복 셔츠는 흠뻑 젖어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평소에는 약식으로 문양이 들어간 제복 셔츠 한 장만 입지만 정식으로는 그 위에 상의한 장을
더 걸치는 터라 셔츠는 재질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 보통 와이셔츠보다 약간 두꺼울 뿐이다.
물에 젖은 셔츠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몸에 붙었다. 쇄골에서 흉근, 복근까지 고스란히 비친다. 보일건 다 보이면서도 옷 한 꺼풀이 붙어 있다는 게 도리어더 외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거야 원……무슨 게이 포르노 잡지에서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내놈들만 있는 곳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태의는 얼른 단추를 풀어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얼른꺼지라고 한 일레이가 고마울 지경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친절한지도 모르겠다. 피부에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옷을 벗겨내고 샤워장으로 들어가며 정태의는 흘끔 시계를 보았다.
씻고 나가면 밥 먹기는 힘들겠다. 설령 밥 먹을 만한 시간이 남는다 해도 교위된 도리로서 의무반에는 한 번 얼굴을 비추어야겠지.
그놈은 얼마나 다쳐서 누워 있을지 확인해서 보고해야 했다.
또 의무반 교호에게는 욕을 바가지로 듣겠구나.
이즈음 되자 교호의 욕설은 비단 일레이와 정태의만을대상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 뻔히 깨질 걸 알면서도ㅡ혹은 제 분수도 모르고 능력을 과신하고서ㅡ괴물에게 덤벼드는 얼간이들은 왜 끊이질 않냐고
토로하기 시작했다. 클러스터를 던져도, 예닐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맨손인 놈에게 흉기를 들고 담벼들어도 당해내지 못한 전적이 저 정도로 쌓여 있으면 알아서 제 몸을 제가 챙겨야 하지 않느냐고
교호는 애꿎은 정태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그러게 말이다'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정태의는 그들을 진지하게 탓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당해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그 맺힌 마음도 모를 바는 아니었던 탓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십중팔구는 일레이가 죽일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의가 일레이의 앞을 감싸며 막아서는 것은 임무도 임무이거니와, 사람의 마음이란 객관적인 판단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까닭이다. 저놈은 그냥 얌전히 죽는 게
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겠다는 생각은 숱하게 있지만, 일레이리그로우라는 인간이 정말로 죽어버리기를 진지하게
바란 적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아무래도 나는 그놈을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거든. ……음. 하긴 그놈도 그놈 나름대로는 내게 많은 아량을 베풀어주고
있는 셈이지."
그 옆에 붙어 다니면서도 그놈에게 맞아죽지는 않았잖아, 의무반 침대 신세를 진 적도 없지, 그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라도 예전에
숙부가 농담 단 진담 반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숙부는 정태의를 위로할 심산이었는지 정태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었다.
'릭이 그래도 네게는 한 수 물러주는 것 같거든.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 아니냐.'
길상천이라는 딱지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 라고 덧붙이면서 중얼거렸던 말을 아직도 기언한다. 그때 분명자신은
'별로 기쁘진 않는데요, 삼촌.'하고 대답했었다.
분명 기쁘진 않지만 어떠한 이유이든 일레이가 최소한아까 시비 걸었던 그놈보다는 자신에게
더 관대하다는건 사실이었다. 가까이 있으니까 더 친절하게 대해줘야한다는 류의 인간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놈이니 몹시 의외로울 정도였다. 정태의는 비누거품이 덮인 몸을 씻어내며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리문 밖으로 시계가 보였다. 밥은 못 먹더라도 빵조각 하나라도 먹으려면 슬슬 나가서 얼른 의무반에 들렀다가 식당으로 가야겠다. 아니, 차라리 식당에 가서 빵을 들고 먹으면서 의무실로 가는 게 좀더 효율적이겠다.
"이번 녀석은 어디가 부러졌으려나…….
오전에 해치운놈이 팔이었으니까 균형을 맞추자면 역시 다리일까."
열 명 중 일고여덟은 그나마 가볍게 팔다리이고 재수 없는 두 셋 정도가 좀더 심하게
의무반 신세를 지곤 했다. 조금 전 그놈은 그래도 일레이에게 시비는 걸었으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건 정태의이니, 가볍게 팔다리 정도로 넘어갈 성싶었다. 어쩐지 자신의 몸을 희생해 그놈을 구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죽은 뒤 사리가 나와도 당연하겠다.
정태의는 그다지 기쁘지 않은 생각을떠올리며 샤워장에서 나갔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아 좀 나아진 듯도 한 무릎에 다시 서포터를 단단히 감았다. 씻고 나니 개운한 기분도 들어, 오전 나절의 우울했던 기분이 손톱만큼
가셨다.
수건으로 닦아내어도 말끔히 다 마르지는 않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내며 욕실에서 나선
정태의는 시계를보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가서 빵 두어 조각 집어서 먹으면서 의무반에 들렀다가
오후 일과에 들어가면딱 맞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계획에 예상치 못한 오류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상황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어쩌면 덤벼든 사람조차 예상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태의가 식당에 이르렀을 때 그곳은 미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정적은 아니었다. 낮고 불온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수근수근 들려오고
있었다. 여느 점심때의 그 시끌시끌한 소란이 아니라서 정적으로 느껴졌을뿐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짐작이 가는 거라곤 하나뿐이었다. 일레이와 그남자다.
어지간히 다친 게 아닌 모양인데……, 정태의는 혀를 찼다. 손속에 인정이라곤 두지 않는 그 잔인한 자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자들을 어떤 꼴로 만드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이머다하고 그런 자들이 끊이지 않고연달아 나와,
이제 어지간히 다쳐서는 이야깃거리조차되지 못했다.
이렇게 삭막하고 서늘한 분위기라니.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빵이고 뭐고 의무반으로 먼저 가 볼 걸 그랬나 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왕 온 김에 먹을거리는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태의는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다. 식사를 다 마쳤는지 식판을
반납구에 밀어넣고 나오던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정태의가 일레이의 교위를 맡은 이후로 같은 팀의 동료들과는 소원해졌다. 개중에는 안됐다는 시선을 보내며가끔 스치거나 할 때면 정태의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지나가는 놈도 있었고,
아예 무시하는 놈도 있었고, 일레이보다 오히려 정태의에게 더 분개하며 고함을 지르는
놈도 있었다. 지금 마주친 얼굴은 무시하는 쪽이었지만 전자에 약간 치우쳐 있었다.
"토우."
정태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며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분위기가 왜 이래.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죽인 건 아니지?"
늘 그렇듯이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건 말건 예전에 동료들에게 하던 대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 정태의는, 그 시점에서 이미 이상을 감지했다.
여느 때라면 토우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별 대답 없이 지나가거나, 혹은 답변이 되기에는 부족한 한두 마디 말을 던지는 둥 마는 둥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딘가 미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실로 미묘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것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유쾌한 듯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웃음기는 비치지 않았고, 어둡게 가라앉았나 하면 또 들뜬 것 같기도 했다. 혹은 불안과 걱정이 깃든 듯도 하다.
"어이, 뭐야."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토우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뒤로 또하나의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토우와 마찬가지로 같은 팀이었던 노부오였다. 정태의와 그렇게 자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팀인 만큼의 친분을유지하고 지냈던 노부오는 일레이를 극렬히 미워했다.
그래서 정태의가 그의 교위가 된 뒤로는 정태의에게 마저 서슬 퍼렇게 욕설을 퍼붓는
부류였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 상대였지만 이 기묘한 분위기에 가슴속이 불안하게
일렁여, 정태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노부, 무슨
일이 있었어. 그놈이 결국 사람을, ……죽였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치명적인 수준으로 사람을 해쳤다는 분위기와도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뭐지, 이 선뜩한 느낌은. ――아니, 선뜩한 게 아니다. 이건,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한다. 음울하고 불쾌한 기분이
발목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다. 대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노부오가 불쾌한 듯 불쑥 내뱉었다.
"죽이진 않았어. 평생 앞을 못 보게 만들어놨을 뿐이지."
"뭐……."
정태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태의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울컥한 듯 혀를 차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결과만 말해줄까, 아니면 경위가 궁금해? 내가 그때 마침 난간 안쪽에 있었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봤어. 그 녀석이 어느 쪽 눈을 몇 번째 손가락으로 긁어놨는지도다 봤다고.
얼마든지 말해주지. 뭘 더 말해줄까?"
정태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토우에게 돌리자 토우는 씁쓸하게 입매를 찡그렸다.
이 망할 놈이 또 일을 치는구나. 눈, 이번엔 눈이냐. 팔다리처럼
진부한 곳이 아니니 참 잘도 예상을 피해갔다. 정태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럴 때다. 저 식당 안의 숱한 동료들의 심정에 동조하고 싶어지는 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눈이라면 팔다리 정도와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거나 치료를 받으면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라면 생활을 제대로 영위해나갈 수도 없다. 지부내의
사고로 지부를 그만두게 될 경우 남은 생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위로금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런
류의 배상으로 해결될문제도 아니다.
"이 미친놈……."
입에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또 한 번 절실히 느껴졌다. 정태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갑자기 멀쩡한 사람 눈은 왜 망가뜨려?
평소 하던 대로 팔다리나 부러뜨리고 말 것이지 왜 또 눈이냐고! 젠장,교관이건 말건 그놈은 어령에서 좀 썩어야 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의 눈에, 그렇다면 사람은 뭘로 비치는 걸까. 예전부터 그게 궁금했었다.
이상론을 말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정태의는 일레이라는 인간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이러한 부분은 싫은 일면임에는 틀림없었다.
빵이고 뭐고 당장 의무반으로 달려가 봤어야 했다. 아니, 구정물을 뒤집어쓰건 말건 그 자리에 그냥 남아서끝까지 지켜봤어야
했다. 혹은 자신이 선수쳐서 그놈의얼굴에 주먹 한 번 박아넣고 당장 의무반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래놓고 이 망할놈은 유유자적 어디에 박혀서 밥이나
먹고 앉아 있겠지. 그 상판이 눈앞에 있다면 한 방 갈겨줄 텐데.
"일레이는……그놈은 어디 있어."
그들이 알 리도 없건만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의외로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의무반에 누워 있겠지. 하, 꼴좋게 됐다. 이 김에 아예죽어버리라고 해,
그 새끼."
노부오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통쾌하게 웃는 듯하면서도 그는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분에 젖어 있었다.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그 말이 이해가 가지않았다.
"의무실……, 일레이가?"
그 남자가 아니라 일레이가 의무실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전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정태의가 다시 물었다. 토우가 옆에서
'둘다 의무실에 있겠지'라고 덧붙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태의는 대답을 구하며 토우를 보았다. 토우는 속이 편치 않은 얼굴로 혀를 차더니 성가신 듯 내뱉었다.
"옆구리를 찔렀어. 칼을 가지고 있었거든. 릭에게 눈을찔리면서 그놈은 자기 몸도 안 돌보고 옆구리를 그어버린 거야.
그 덕에 눈은 그 꼴이 돼버리고. ……바보 같은 놈."
토우의 분노가 전해져왔다. 반은 일레이에 대한 분노,그리고 반은 동료에 대한 분노다. 그를 해치기 위해 자신이 그보다 더한 해를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동료의 어리석음에 화를 내고 있었다.
정태의는 아직 좀체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일레이가 그 남자의 눈을 망가뜨렸다.그 남자는 일레이의 허리에 칼을 박아넣었다.
노부오는'이 김에 아예 죽어버리라'고 말했다.
"……. 깊이
찔렸나 보지."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렸다. 어쩌면 일레이는 생각보다깊이 다친 건지도 몰랐다. 이 미묘하게 술렁거리며 불안스레 들떠 있는
분위기는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일레이가, 위험하리만치,
중상을 입었다.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농담을 하거나 혹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자 노부오는웃는지 고함치는지
알 수 없도록 소리를 높여 외친다.
"하, 그래,
찔렸지! 그렇게 깊지는 않았어. 자상만으로
따지면 생명에는 위험이 없을 정도거든. 그 괴물 같은 놈이니 죽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고생 좀 할 거다. 지금쯤은 칼에 묻어 있던 독소가 그 몸 안에 한 바퀴 돌았을 테니까.
그래, 아예 그 김에 그 미친놈 죽어 나자빠지는 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겨우 사태를 이해하겠다. 남자는 눈이 망가졌다. 그 대가로 일레이를ㅡ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ㅡ위험에 빠뜨렸다.
정태의는 토우의 분노에 공감했다. 정태의가 그 남자와 아는 사이건 아니건, 일레이와 아는 사이건 아니건
그런 관계를 떠난 문제였다. 그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자신의 분을
터뜨리기 위해 자신의 나머지 삶을 내던지는그런 행위가 주위 사람을 얼마나 안타깝게 만드는지, 그는 생각지
않았다. 정태의는 이를 악문 채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눈 잠시 뗀
사이에 이런 일이 꼭 한 건씩 터져주지. 오늘은 정말로 뭐에 씌기라도 한 것 같다.
정말이지 운수 나쁜 날이다.
기운이 빠졌다. 닻이라도 단 듯이
몸이 무거워진다. 몇번이나 거듭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다.
"왜. 그놈이
다쳤다니까 못마땅하냐? 그놈이 찔렸다니까 마음이 편치 않아? 눈이 망가진
놈도 있는데?"
정태의의 앞에서, 노부오는 점점 악이
받쳐오르는 듯 빈정거리며 외쳤다. 정태의는 대꾸할 생각도 기운도 없어 그를 흘끔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노부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옆구리에 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 새끼한테 가서
말하든가. 노부오란 놈이 시퍼렇게 노려보더라고. 그러면또 알아,
그 새끼가 내 눈알까지 찍어버릴지."
"……. 노부.
화난 건 알겠지만 나한테 화풀이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노부오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의 비웃음이 한층 커진다.
"왜. 네놈이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미친 새끼가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면서 눈을 찍어버리던데. 그 미친 새끼도 네놈도,
쳐다만 봐도 안 되는 신분이신가 보지, 응? 그 이유는 뭔데?"
"노부, 그만해."
노부오를 말리려는 듯 혀를 차며 짧게 외친 건 토우였다. 그러나 노부오의 팔을 잡아 세우려는 토우의 손을거칠게 뿌리치며 노부오는 정태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악의로 가득한 그 얼굴을 쳐다보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섞어 괜한 싸움으로
번지게 하고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 미친 유럽놈 아래에서 벌벌 기면서 일하니까
좋냐?좋아, 이 배일도 없는 새끼야?!"
"노부!"
토우가 나직이 소리쳤다. 아마도 심정적으로는 노부오의 말에 동감했을 테지만 그래도 토우 역시 이런 상황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노부오는 토우마저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그에게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씨근거리던 그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래도 도무지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고개를 반쯤 돌리며 악의가 절절히 느껴지는
말을 내쏘았다.
"그놈의 교위가 된 게 네 뜻이 아니었다고?
그런 말을 하려면 그 목덜미에 그 자국이나 남기지 말든가. 씨발,네놈들이 무슨 농탕질을 치는지 모를 줄 알아? 지저분한 새끼들."
"노부!"
토우의 목소리가 좀더 험해졌다. 노부오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버리고 말았다. 토우가혀를
차며 흘끗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노부오의 뒷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토우는 머쓱하고 복잡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신음 같은 한숨을 쉬곤 돌아서 버렸다.
뭐야. 그런 식의 말이
돌고 있었구나.
정태의는 벽에 기대며 가볍게 머리를 부딪쳤다. 무겁던머리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소문이란 실제보다 부푸는 법이다.
사소한 꼬투리 하나가 엄청나게 커다란 뭉치가 되어 돌아오는 게 소문이란 것의 정체였다. 그러니 아마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정도면 그보다 더한거지 분하고 악질적인 말들도 어디선가
돌고 있을거다.
"……."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려니 싶었다. 새삼 이 지부 안에서 더 치질 것도 없다.
"아……하지만 기분 더럽네, 진짜……."
진짜 저 유치하고 속좁은 놈들을 한데 묶어다가 따귀를몇 대씩 갈겨주고 정신차리라고
냉수를 확 들이부어주면 좋겠다. 그런 다음에는 원한을 헤아릴 수도 없이 쌓아올린 그 장본인을
묶어다가 따귀를 부어터지도록 갈겨주고 정신차리라고 냉수에 확 머리를 처박아 넣었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서 저런 놈들만 잘도 골라서 모아놨지,
UNHRDO.입부전에 치른다는 그 빌어먹을 인성검사는 저런 놈들만 일부러 모아놓으려고 받은 거냐."
정태의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면서 벽에서 몸을 뗐다. 여전히 몸에 기운은 없었고 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그래도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한데 모아다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렸으면 좋겠다 싶은 놈들이라도, 얼마나 다쳤는지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태의는 손등으로 마른 눈가를
한 번 훔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너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들만 줄줄이 겪어와서 그런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다치지도 죽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찔렸다는 남자보다도 오히려 일레이가 더욱 심각한 상태라는 말을 교호에게서 전해들었을 때에 정태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한쪽 눈이 좀 위험하긴 한데 그래도 실명까지 가지는않을
거다. 여기에서는 손쓰기 힘들어서 바깥으로 보냈어, 그놈은.
문제는 릭 저놈인데ㅡ….'
교호는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칼에 위험한 걸 묻혀놓은모양이야.
칼로 옆구리를 뜯기고도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온 저 독한 놈이, 의무반에 도착하자마자
거꾸러졌거든. 상황이 별로 좋진 않아.'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중얼거리는 교호의 뒤로, 침대에누워 있는 일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있는곳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이 몹시 낯설다.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빛이 마치 죽은사람 같다.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뇌리에 떠오르자마자 정태의는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남자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인 탓일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늘상 '저 미친놈 좀 어디로
안 사라지나'를 입에 달고 살던 교호도 이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는듯 했다. 그렇다고 그리 내키거나 유쾌하지는 않는지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쩌면 할 일이 늘어나서그런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뭔가 더물어보려 했지만, 교호는
번잡스럽다며 정태의를 마구밀어내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알아, 봐 봐야 알지! 넌 가서 네 일이나 해, 가뜩이나 좁은데
여기서 진치고 있지 말고!'
그런 호통과 함께 의무반에서 밀려난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그 앞에 서 있었지만, 곧 한숨을 쉬곤 오후의 정규일과를 받기위해 걸음을 돌렸다. 자신이 거기에
있어봐야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오후 내도록 지부 안은 불온스럽게 들떠 술렁거렸다. 정작 정태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과를 해나갔지만 가는 곳마다 여기저기서 릭, 리그로우라는 이름들이 귀에들어왔다. 반향이 크긴 컸는지, 정태의는 일과를 마친 뒤 교관 회의에도 불러가야 했다. 그래봐야 정태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별 것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지 시비가 붙은 와중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말밖에는, 정태의가 더 아는 것도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여전히
일레이는 아무 일 없이 멀쩡히 어디선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자꾸 다른 사람들이이상한 말을 듣고 와서 정태의를 붙잡고 떠드는 기분이었다.
교관 회의가 끝나고 그날의 모든 의무를 다 마친뒤에야 정태의는 다시 의무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또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대로 일레이가 어떻게 잘못되거나
혹은 상태가 심각해서 바깥 병원으로 호송된다고 한다면 정태의로서는 편해지는 셈이었다. 한동안 동료들과는 여전히
삐걱거리겠지만 어차피 그 원인이 저 남자였던 바에는, 그가 사라지면 다시 예전처럼 원상복귀될 거다.
더 이상 교위 일에 떠밀려 다닐 필요도 없었고, 흉포한 괴수 옆에 맨손으로 붙어다닌다는
불안감을 느낄 이유도 없게된다. 그럼에도 딱히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아 의무반으로 간 정태의는 거기에서 빈
침대만을 발견했다.
뭐야. 그새 멀쩡해져서
돌아간 건가. 역시 별 거 아니었잖아.
정태의는 교호도 아무도 없이 비어 있는 의무반을 앞두자 갑자기 맥이 풀렸다. 가슴속에서 뭔가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괜히 바지춤에 손을 두어 번 닦듯이 두드렸다. 손바닥이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날 정도가 됐으면 교관 회의에나 나오지.
괜히 귀찮게 내가 불려갔잖아."
정태의는 낮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설령 멀쩡하지 않다 해도 일어날 수 있을 정도라면 됐다. 정태의는 방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돌아섰다. 그때 의무반 문이 열리며 교호가 들어왔다. 교호는 안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어차, 하고 잠깐 놀란 듯 했지만 누군지를확인하곤 왜
여기에 있냐는 얼굴을 했다.
"일레이는 일어났나 보지. ……젠장. 그것도 모르고 괜히 나만 귀찮게 불려다녔잖아. 언제 일어난 거야?"
정태의는 빈 침대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교호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전히
혼수 상태다. 여기에 놔 둬도 별 수 없어서, 제 방으로 옮겨다 놨어."
"방? ……일레이의
방?"
정태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다시 어둑한 기분이 닥쳐온다. 오후 내도록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놔 둬도 별 수 없을 정도라면 바깥의 병원으로 실어나가는 게 보통이다. 아무런
시설도 설비도 없는 개인 방으로 옮겨둔다니, 그런 경우는 들은 적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정태의에게, 책상에서 몇 가지를 챙겨든 교호는 귀찮다는
듯 손짓하며 다시 의무반 바깥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그놈에게 가 보려는 참이니까 따라오든가.
……쯧. 하여간 나도 나지만 너도 그놈 때문에 이게 왠 고생이냐. 하여간 넘어가도 곱게는 안 넘어간다니까."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는 사이에 성큼성큼 걸어 저만치 앞서 간 교호를 뒤늦게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교호는 돌아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다음 분기 때에도 일손을 더 늘여주지 않으면 내가 이놈의 직장 때려치우고 말겠다고.
'네 마음대로 때려치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나은
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은 교호가 걸음을 걷는 내도록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레이의
욕설을 늘어놓아서였다. 금세라도 숨이 넘어가도록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내가 평소에도 저놈이 인간이 아닌 성싶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인데, 아무래도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이거난 인간일
수가 없어."
교호가 어찌나 딱부러지게 이야기하는지 정태의는 진지한 얼굴로 묻고 말았다.
"본 적 없는 혈액 구조나 세포형이라도 나왔나?"
아니면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기생충이라든가, 라고 덧붙이는 정태의를 바보 취급하는 얼굴로 쳐다본 교호는 끄트머리의 색깔이 변한 지시약 용지를 팔랑팔랑흔들면서
말했다.
"살아 있잖아. 응? 멀쩡하게."
교호가 용지로 가리키는 일레이를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와 이마며 얼굴, 목 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신음 소리는 한 마디도 없었지만 아주 가끔 입매나 눈꺼풀이
꿈틀 움직일 때가 있다. 시체처럼 창백한 낯이었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지하 1층,
일레이의 방에 두 사람이 들어섰을 때 방 안은 시커먼 암흑으로 감싸여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 그 안에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을 켜고, 침대 위에서 이불에 파묻혀 조용히눈을 감고 있는 일레이를 보았을 때 정태의는 섬뜩할 만큼 위화감을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히 잠들어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불빛에 물기가 번들거리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얼핏 보아서는 평소와 별다름없는 새하얀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일레이는 타인이 있는 곳에서 저렇게 소리 없이 잠들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정태의의 앞에서 눈을 감고 잠든 듯이 있다가도 정태의가뭐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하면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 듯잠기운이라곤 조금도 없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곤 했다. 하물며 다른 사람 앞에서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모습 따위, 꿈속에서조차도 본 적이 없다.
그때가 되어서야 정태의는 절절하게 실감했다. 저 남자가 정말로 앓고 있다는 사실을.
"왜. 인간이라면
즉사해야만 하는 독이라도 돼, 저게 멀쩡해 보이게?"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느냐고 하는 교호에게 그렇게 되묻고 나서야 정태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가 초조하고 짜증스러워졌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교호를붙잡고 화를
낼 계제의 일도 아닌데, 뭉근히 들끓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시체같은 얼굴로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도록 혼절해 있는데 저 모습이 어떻게 보면
멀쩡해 보인단 말인가.
교호는 정태의의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렸는지 말았는지, 인상을 찡그린 채 지시약 용지를 노려보다가 꾸깃꾸깃 뭉쳐 어깨 너머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즉사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비등하거든.
지금 저놈 열이 몇 도까지 올라갔는지 알아? 지금 저놈은 독도 독이지만 저 상태로는
저렇게 얌전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아예 혼절한 걸 넘어서 죽네사네 해야 한다고. 그런데――――안 죽잖아."
정태의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알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이 교호의 입을 주욱 잡아당겼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죽으면 인간이고 안 죽으면 인간 아닌 거라면, 나라도 인간을 포기하고 사는 편을 택하겠다.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인간 아니라도 좋으니 살기나 하라지.
"그래서 결론이 뭐야. 죽는다는 거냐?"
정태의는 혀를 차며 물었다. 길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태세이던 교호는 정태의가 사납게 쏘아보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 속으로 무어라 투덜투덜거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세균성 독소다. 엑소토닌 계열인데, 외독소는 그 매커니즘상균체 밖으로 쉽게 유출되기 때문에―――.
……. 간단하게 말하면, 정제된 독소라서 아무
처치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면서 죽을 때만 기다려야 되는 놈은 아니야."
뭐라고 나름대로 자세하게 설명을 하려던 교호는 정태의의 조금 더 사나워진 얼굴을 보곤
입맛을 쩝쩝 다신뒤 결론부터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만만한 물건은 아니라서.
몸이 좀 약하다 싶은 놈은 목숨까지 걱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독이거든.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일반인이라면 한 일주일 심하게 앓다가 체력이 따라주면 일어날 거고 체력 떨어지면 좀 심각한 상황이 될 거고.
뭐 저 괴물쯤 되면 죽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 들여다 봐 줘."
어느 순간 싸늘하게 식은 채로 발견되면 시체처리반에연락해야 하니까 바로 알려주고, 라고 덧붙이며 교호는걸음을 옮길 눈치를 보였다. 정태의는 다급하게 교호의소맷자락을
덥썩 붙잡았다.
"어이,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더 할 처치도 없어. 한 일주일 앓다가사람이 반쪽쯤 되면 깨어날걸. 그 동안 의식이라도 돌아오면 좋은데 아니면 링거로 연명하는 거지. 누가 어떻게 할 방도는 없어.
스스로의 체력을 믿고 깨어나야지."
이 이상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교호는 그렇게 말하며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바깥으로 옮기면. 시설이 갖춰진 병원으로 옮겨가면 어때."
정태의가 물었지만 교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 봐야 뾰족한 수도 없을 거고,
괜히 옮긴다고 부산떨어 봐야 악화만 될걸. 그냥 놔 둬. 아주 엄청나게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독감으로도 사람 죽을 수 있잖아."
"그렇지. 난 안 죽는다고 말한 적 없어. 하지만 저 괴물같은 놈의 체력쯤 되면 독감으로는 죽기도 쉽지
않을걸. 독감이 아니라 독감 할애비에 걸린다 한들, 네 생각엔저놈이
죽을 것 같냐?"
"……."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 없는 게 좀 분했다. 정태의는일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하다. 원래부터 창백한 편이었지만 앓는다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정말로 시체처럼 보였다. 아마도 피부
위로 은근히 배어 나온 땀이아니었더라면 정말 시체는 아닌가 뒤흔들어 봤을지도모른다. 정태의는 묵묵히 그를
쳐다보다가 가만히 손을뻗었다. 그의 이마에 손이 닿기 직전에 잠시 멈칫하며손을 거두었지만 그 야수는 이를
드러내지도 않고 물어뜯으려 들지도 않았다. 정태의는 망설이다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뜨겁다. 저 창백한 낯빛에서
어떻게 이런 열기가 나올 수 있는 지 의아할 정도로 고열이었다.
"열이 심한데."
"아까 말했잖아. 열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아냐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몇 도만 더 올라갔다간 이놈은 살아난다
해도 천치가 되게 생겼다고."
무서운 말을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린 교호는 혀를 차며머리를 긁적이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에야말로 방에서 나가려하는 교호를 정태의는 다시 붙잡았지만, 교호는
신경질을 내며 소매를 뿌리쳤다.
"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열이 펄펄 끓는 놈을 두고 그냥
가 버리냐!"
"그럼 여기서 너랑 나란히 앉아서 두손 놓고 저놈
구경하면서 인생에 대한 담론이라도 나누라고? 그렇잖아도 저놈 때문에 바빠죽겠는데 그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일은
누가 하는데, 네가 대신 할 거야? 오늘 밤 안에 인간 열두 명 차트
다 분석해서 보조하고 바깥 병원 쪽에도 팩스를 한 꾸러미 작성해서 보내야 하는데 그거 네가 할 수 있냐고?!"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교호는 머리를 감싸쥐며 '내가 이놈의 곳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왜 저딴 흉신악살이 여기에
또아리를 틀어서'라며 한탄을 시작했다.
정태의는 질린 얼굴로 교호를 보다가 얼른 그를 돌려보내버렸다. 생각해 보면 저 교호도 참 가엾은 사람이었다. 괴물 같은 남자와 그에게
철천지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지부에서 의무반을 맡은 그는 정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란 걸 정태의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잘라 말한다면 그 말이 옳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시체와 같은 모습으로
늘어진 저 남자의 모습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이다.
"……. 어이,
일레이."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 하나만을 켜두어 어둑한 방 안에서, 정태의는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봐……. 일레이 리그로우. 좀 일어나 봐."
그러나 여전히 일레이는 조그만 움직임 하나 없이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태의는 침대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일레이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타인이
이렇게까지가까이 다가오는 걸 방치해 둘 인간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이미 눈을 떠 거리를 두었을 거다.
아니, 애초에 이런 모습을 보이지조차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일어나 있었을 테지.
지금 그는 힘 하나 없이 잠들어 있는 인형 같았다. 창백하고 핏기 없는 밀랍인형 같다. 이대로 칼을 꽂아넣으려 한다 한들
일어날까. 마치 대낮에 발견된 흡혈귀처럼, 모든 이의 공포와 불안을
한몸에 받는 이 막강한 남자는 아주 사소한 공격에도 치명적인 위협을 받도록 힘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정태의는 문득 소리를 낮추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늘 사람을 쥐잡듯 잡아대던 놈이 이러고 있으니까 이상하잖아."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그 손이 이마를 짚는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땀이 나면 체온이 내려가야 할텐데도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놈도 인간은 인간인가 보네, 열이 다 나고."
정태의는 얼굴이며 목 따위에 배어나온 땀을 손등으로대충 닦아내고 다시 손을 거두었다. 침대에 앉을 생각도 않고 물끄러미 일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기묘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광경도 없을 거다.
"어이, 언제
일어날 거야. 아니면 아예 확 나빠져서 바깥으로 호송되든가. 어중간하게
지부 안에서 이렇게 아프니까 괜히 신경만 더 쓰이잖아. ……내 참."
정태의는 혀를 찼다. 여태 일이 터질 때마다 이놈도 한번 당해봐야 한다고 푸념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그리 좋은 꼴도 아니다.
"그러게 멀쩡한 사람 눈은 왜 망가뜨려,
이 악질 같은 놈아. 널 쳐다보는 그 눈이 몹시 마음에 안 들던? 내 보기에도 딴놈과 다를 것도 없더만. ……하긴 쳐다보는 게 좀 기분 나쁘긴 하더라니."
정태의는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어보던 그 불쾌한 시선을 떠올리곤 입매를
찡그렸다. 하지만 불쾌하다 해도 그 눈을 못 쓰게 만들어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역시 이놈은 정상적인 사고 방식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이러니 칼 맞아도 독 맞아도 이상하지 않지.
정태의는 가만히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주욱잡아당겨 보았다. 제정신일 때는 죽어도 못할 짓이다.그래서 해 봤다. 이 남자가 일어나면 언제 또 이런 짓을해볼 수 있을까.
"불만이면 일어나 보든가. ……자업자득이다, 멍청한 놈."
정태의는 잡아당기던 손을 놓았다.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재수에 옴이 붙어도 단단히 붙었구나. 젠장.어차피 붙으려면 나한테나 붙고 말 것이지 왜 다른 사람까지 끼워놓고 이래. 재수 한 번 엿같다.
* * *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옆방 문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멀어졌다.
지하 6층에 비해 현저히
인구밀도가 낮은 이 1층에서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를 듣기란 흔치 않은일이다. 일부러 누군가를 만나러 오지 않는 한은 다른사람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하긴 이 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교도관들과 교호들 정도다. 방과 방 사이의 방음은 잘되어 있는 편이었지만 복도 쪽으로 가로막힌 벽은 얇은지 복도 방향의 소리는 제법 멀리서부터
들려오곤 했다. 듣기로는 보안문제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층에 사는 인간들은 괴한의 침입을 받고 호락호락 당할 만한 인물들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지금쯤 이 블록 안쪽에있는
방에서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인물을 떠올린 탓이다.
"제일 안 당할 것 같은 인물이 그렇게 쓰러져 있는
걸 보면, 누군들 안전할까."
정태의는 침대에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다시 헝클어져 혀를 차고 말았다. 시계를
보자 10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요 얼마간 숙부를 비롯한 교관들은
무척 바빠 보였다. 합동 훈련을앞두고 한창 바쁠 때에 귀중한 일손 하나가 쓰러져 버렸으니, 그 몫의 일을 하느라 더욱 바쁜지도 모르겠다.그 덕분에 교호들도 말 붙이기가 무섭도록 바삐
오가곤했다.
"그래도 사람을 불러놨으면 시간은 맞추셔야죠,
삼촌……."
오전에 우연히 숙부와 마주쳤다. 역시나 바쁜지 어깨와귀 사이에 폰을 끼고 옆에서 교위가 내미는 종잇장을 차례로 받아들었다가 돌려주곤 하던 숙부는,
정태의를 보자 손짓해 부르더니 밤에 잠시 들르라고 했다. 몇 시에 갈까 묻자
'대충 10시쯤이면 되겠다'고 무성의하게 대답한
숙부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바빠죽겠다는 얼굴로 걸어가버렸다.
합동 훈련이란 게, 그냥 각 지부의 사람들을 나누어 모아놓고 훈련을 한 뒤에 다시 돌려보내면 끝이라고 쉽게생각할 만한 게 아니었다. 심할 경우엔 죽는 사람도 나오는 바에야ㅡ실상은 지난 번 훈련처럼 네댓 명이나 죽는 일도 드물고, 부상자만 여럿 나오는 정도라고 한다ㅡ그리 허술하게 채비할 건은 아니다. 게다가 훈련에 소요되는
비용만 해도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금액이었다. 남미 훈련까지 일주일 남짓 남은 현재, 숙부는 나날이 정구 외업무에 치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또 한동안은 여기에 오면 안
되겠네."
합동 훈련 동안은 부원의 1층 출입을 금한다는 규칙을떠올리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10시 반이다. 이야기했던 시간에서 이 정도로 늦어지면, 아무리 방에서 편하게 누워 기다린다는걸 안다고 해도 연락 한 통 정도는 할 텐데.
바쁘긴 엄청 바쁜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럴 때였다. 책상 위에서 불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낮고 부드러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전화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입매를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이 방에서 전화음이 울리면 습관적으로 일레이를떠올리게 된다. 화면에 떠오르던 하얀 손과 함께,
뻔뻔하게 고서 중개상인척 유연한 대화를 이끌어나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긴 그놈이 자기 입으로 고서 중개상을 한다고
했던 적은 없지……어차."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전화가 울리고있었지만 모니터는 켜지지 않았다. 이제 보니 깜빡이는램프가
초록색이었다. 내선이다. 어쩌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태의에게 숙부가
전화를 한 건지도 몰랐다.
"네, 정창인
교관님 방입니다."
정태의는 램프를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숙부가 아니라도 어차피 지부 안에 있는 누군가다.
'…….'
전화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웃했지만 혹시 전화선에 문제가 있거나 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했다.그러나 잠시 사이를 둔 뒤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교관은 아직 안 들어갔나?'
친숙하지는 않지만 낯익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정태의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림슨 교관이다.
정태의는 아주 잠깐 침묵하다가 네,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사람이 어쩐 일일까. 게다가 요즘처럼 쉴 틈도 없이 일하려면 종종 마주칠 텐데,
따로 일하기라도 하나. 하긴 모시는 부관이 다르다면, 이경쟁 체제 안에서는 일도 따로 한다 해도 별로 이상할 건 없겠다. 설마 그렇게까지 비효율적으로
일하랴 싶긴했지만.
그림슨은 별 말 없이 끊었다. 정태의는 잠시 수화기를쳐다보다가 내려놓았다. 그림슨. 강의야 매주마다 듣고있다. 사적으로는 아니지만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느낌을 잘 알 수 없다. 몇 번 스친 정도로 그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나쁜 소문이 돌진 않았고, 정태의도 나쁜 기억을
가질 만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허물없이 가까이 대하기는
힘들겠다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느는 픽 웃고 말았다. 이곳 교도관쯤 되는 인간 중에 허물없이 대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 숙부만 해도, 정태의야 어릴 적부터 알아온 친척이니 이렇게 지내는 거지 만일 성인이 된
뒤에 타인으로 처음 만났더라면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진 않았을 거다. 사람이 나쁘거나 한 문제가 아니라,
속에뭐가 담겼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삼촌도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내가 뭘?"
정태의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돌아보자 숙부가 문을 열며 들어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하필이면 삼촌 험담을 하고 있을 때돌아오실 게 뭐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부터 발소리로 다 알았을
놈이."
"발소리가 다가오는 거야 들렸지만 설마 삼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일부러 방문 앞에서 걸음이 멈춘 순간 입을 연
걸 누가모를 것 같냐."
"무슨 그런 말씀을. 오해이시랍니다, 삼촌."
대단히 진지하고 성실한 얼굴로 꼬박꼬박 대답한 정태의는 피곤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웃옷을 벗어내는 숙부를 보며 표정을 풀었다.
"일이 바쁘긴 바쁘신가 봐요. 얼굴이 좀 과장해서 반쪽이 되셨네요."
"이게 다 어떤 놈이 한창 바쁠 때에 칼 잘못 맞고
쓰러진 탓이잖아. 아, 오래 기다렸겠구나."
"뭘요. 30분 정도야 잠깐 눈 붙이고 놀 시간이죠."
정태의는 늘 그렇듯이 웃옷을 벗자마자 냉장고로 가 물을 꺼내며 정태의에게 맥주캔을
권하는 숙부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리고 이미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빈 맥주캔 두 개를
가리켰다. 숙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몫의 물만 꺼내었다.
"아. 전화
왔었어요."
"전화? 누구."
"그림슨 교관이요."
숙부는 컵을 기울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림슨?"
"네, ……생각해
보니 이름을 말 안 했네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선으로
걸려온 전화인데다 그 목소리는 아무래도 그 분 맞는 것 같은데요."
"흐음. 그래."
숙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무표정한 얼굴로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숙부는 문득 떠올랐다는듯이 고개를 돌렸다.
"릭은, 좀
나아졌나?"
정태의는 잠깐 침묵하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아지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여전히 일레이는 잠든 것처럼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 하루가 넘도록 그가 깨어난 모습은 보지 못했다. 틈이 있을때마다ㅡ오늘만 해도 예닐곱 번은 가 봤지만ㅡ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숙부는 그래,
하고 중얼거리더니 1인용 카우치에 몸을 던지듯이 앉았다.
"그렇잖아도 아까 그 녀석 형에게 연락이 왔더군."
"아, 집에도
연락이 갔겠군요. 걱정 많이 하던가요?"
일레이와 같은 성격이라면 걱정이라는 단어와도 대단히 거리가 멀겠지만, 예전에 그의 형은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인간이라고 들은 바가 있는 것 같다.
"음, 아니
다른 일 때문에 연락을 했다가 그 결에 릭 이야기가 나왔는데, 웃던걸."
"……."
정태의는 어이없는 얼굴로 숙부를 쳐다보았다. 동생이사경을 헤맨다는데 웃는 경우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뜻을 담고 쳐다보자
숙부는 정태의의 속내를 알았는지손을 저으며 친구를 변호해주었다.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일차적으로 생사를 확인하고 나자 웃더라고. 별 희한한
일을 다 본다면서."
그 심정은 이해할 만도 하다. 아마 정태의도 어디 다른곳에 가 있는데 일레이가 칼을 맞고 쓰러져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냐며 웃을지도
몰랐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것뿐이다.
"그 형님이란 분은 동생을 대단히 잘 알고 계시는군요.하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조금 안심이되는 듯도 하다. 그렇게 웃는다는 건 동생이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그래, 하긴 저 독하고 질긴
놈이 저 정도로 잘못될 일이야 없지않은가. 정태의는 묵직한 심장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숙부는 생각에 잠긴 채 그런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 살피기라도 하는 시선이다.
"? 왜요?"
"아니, 별로.
리그로우의 인간적이지 않은 면모를 생각하다 보니 좀 신기하기도 하다 싶어서."
"저도 일레이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생각하면 늘 신기해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는 그런 인간이 현실에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숙부는 소리내어 웃었다. 당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몹시 재미난 말이라도 들었다는 투다. 정태의가 미심쩍게 숙부를
쳐다보자 숙부는 한동안 나직이 웃다가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렇다만, 그래도 나름대로 네게는 파격적으로 잘해주고 있던데."
"그런가요."
"그럼."
"언제는 그 근처에도 가지 말고 시야에만 들어와도
무조건 도망가라면서요."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게다가 그 건에 대해서라면넌 이미 늦었잖아."
"……. 별로
유쾌하진 않네요."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숙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정태의가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저 괴물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나름대로 정태의에게 한 발 물러서주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눈치를 살피며 언행
하나하나에 고심하는지 모른다. 한발 물러서 준다 한들, 한 치만 어긋나면
당장 목뼈를 꺾어놔도 이상하지 않을 게 저 남자임을 아는 탓이다.
"신루와는 요즘 좀 어때. 아. 하긴 신루도 바쁠 테니 같이 지낼 시간이 별로 없었겠구나."
숙부가 안부를 물으며 새로이 던지는 화제에 정태의는좀더 우울해졌다. 신루와는 그날 이래 제대로 만나지도못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스쳐갈
일은 있지만따로 연락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태의 역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전호를 내려놓곤 했다.
무엇 하나 빠질 바 없는 총체적 난국이다. 삼재가 들었다.
정태의는 내심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부르셨어요, 삼촌."
화제를 돌리는 게 낫지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자꾸 들어봐야 정신 건강만 피폐해진다. 숙부는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낀 채지그시 정태의를 보고 있다가 뭐 좋지, 라며 담담히 웃었다.
"이제 곧 남미 지부와 합동 훈련이 있잖아."
"네, 그렇죠."
"너 여기에 남아라."
숙부는 간결히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는 가만히 숙부를쳐다보았다. 숙부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정태의는 이곳 아시아
지부에 남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십중팔구는 이곳에 남게 된다. 교관에게
붙어 있는 교위인 바에야 교관이 이곳 지부에 남는다면 정태의도 따라남게 된다.
"네, 그럴게요."
정태의는 선선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숙부는 다시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 맥킨을 좀 도와주렴."
이번에는 제법 한참동안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맥킨이라면 숙부와 함께 루돌프 장틸의 아래에 있는 교관이다. 그러니 그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겠지만, 대관절 어떻게 도와주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합동훈련이라는 게 팀플레이와 개인플레이가 적절히 섞여 있긴 하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도와주고 말고 할 게 아니었다. 게다가 교관이 부원과 같은 입장에서 훈련에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줄
입장은 못 된다. 숙부는 정태의의 의아한 시선을 받곤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어려운 얼굴 할 것 없어.
그저, 맥킨이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때 도와주면 돼."
"글쎄, 그
분이 제게 도와달라고 청할 일이 있을까요."
정태의는 무뚝뚝한 맥킨의 얼굴을 떠올리며 개운치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그의 교위도 있을 텐데 왜 자신에게 청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정태의는 한참동안 숙부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숙부는 더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난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노 코멘트?"
"노 코멘트."
정태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람을 죽이거나 개인적으로 해를 입힐 만한 건이 아니라면."
"아하하, 그렇지는 않을 거다. 좋아, 도와주겠다고 해서 고맙다."
천만에요, 라고 말하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감이 좋지 않았다. 응낙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후회했다. 어차피 이곳에 오게 된 이유도 숙부의 편의를 위해서였으니,
나갈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시점에서 숙부가 원하는 바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리 내키지는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뭔가 개운치는 않다.
삼촌도 상당히 구렁이 같은 데가 있는 사람이란 말야…….
숙부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거절 했을 거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더 볼일 있으세요?"
"아니, 아냐.
그럼 푹 쉬려무나."
"네. ……아.
그런데 훈련 기간 동안 교관이 앓아서 누운 경우, 교위는 어떻게 하나요?"
자리에서 일어서 문으로 향하던 정태의는 갑자기 생각이 나 물어보았다. 숙부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흐음, 하고 잠깐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숙부도 정확히는 모르는 모양이다.
"글쎄,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나 교관과관련되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다른 부원들과 완전히 같으니,
아마 그대로 훈련에 참가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놈이, 합동 훈련이 시작될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저도 동감이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곤 걸음을 돌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말하고 막 문을 나서려는데 입매를 찌푸리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숙부가 갑자기 불렀다.
"태의야."
정태의는 숙부를 돌아보았다. 숙부는 그를 부르고 나서도 잠시 동안 더 침묵하고 있다가 애매하게 말했다.
"내 생각에, 넌 좀더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요? …….
제가 많이 게으른가요?"
정태의는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성실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야 휴일이나 쉬는시간에는
마음껏 게으름도 피우고 틈만 나면 눈을 붙이기도 하고 따분한 강의같은 건 눈치를 봐서 슬쩍 빼먹기도 하지만, 게으르다는 평을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부분이 그렇게 게을렀던 걸까 하나씩꼽아보는
정태의에게, 숙부는 알 듯 말 듯한 말을 했다.
"너는 감도 좋고 판단력도 좋은데,
행동력이 좀 떨어지는 구석이 있어. 아니, 판단력이 좀 엇나간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사람이 얽힌 문제에 있어서는 더. 누가 옆구리를 찔러대면 좀 피하는 척하다가 결국은 귀찮아서 네맘대로 하라며 그냥 눌러앉아 버리거든."
"제가 그런가요?"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자신이 그랬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별로 짚이는 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게 옆구리를 찔린 적도 없었다. 굳이 말하면 저 빌어먹을 김소위이겠지만
그때는 되갚아줬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정태의를 앞두고 숙부는 뭐라고 더 말을 할까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다물었다.
"뭐 남의 속내를 일일이 짚어보기엔 한정이 없는
노릇이고. 너라면 괜찮겠지. 영 까다롭고 골치 아픈 인간이랑 재수 없게
얽히더라도 너라면 뭐……."
"무슨 뜻이에요, 삼촌."
"네가 워낙 사교성이 좋다는 거지."
"아닌 것 같은데. 왜 앞날에 먹구름을 갖다놓는 것 같은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불길하게."
정태의가 짐짓 눈살을 찌푸리자 숙부는 손을 저었다.
"아냐아냐, 내가 좀 과민해졌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걱정만 늘어서."
나 머리 센 것 좀 보려무나,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한 흑발이었는데 이제 흰머리가 하나씩 나기 시작했지 뭐냐,하고 토로하는
숙부를 마주하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나가시면 염색약 하나 사오세요.
이제 삼촌도 젊지 않아요."
마음은 창창한데 몸이 안 따라주니 이것도 참 서글픈 일이로구나, 라며 슬퍼하는 숙부를 다독여주고, 정태의는 방에서 나왔다.
* * *
그 친구가 그렇게 웃을 줄 알았다. 하하, 하고 유쾌한 듯이 부드럽게. 아마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을 거다.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됐어. 그렇게 쉽게 죽을 놈 같았으면 이미 옛날옛적에 죽었을걸. 하지만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을
다 보는군. ……하하하.'
"이봐, 이봐,
아무리 그래도 동생이 죽어간다는데 그렇게 웃어서야 못 쓰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정창인 역시 별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 죽어, 안 죽어.'
친구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하는 그 말을 정창인 역시굳건히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당연스럽게 말하면 한번 찔러보고 싶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네 동생은 무슨 불사신이라도 되나,
세균 묻은 칼에 찔리고도 안 죽게?"
'그 녀석은 악운에 강하거든. 정재이와는 격이 다르지만 그놈도 상당히 운이 강한 놈이라서 말이야. 그 정도로 죽을 놈 같았으면
수백 번은 죽었을 거라니까.'
"것도 그렇군. …ㅡ재의 소식은 좀 있나?"
그러자 갑자기 친구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씁쓸하게혀를 차며 아니,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안타깝다.
정창인은 손가락 끝에서 볼펜을 빙글 돌렸다. 악운에 강하다는 친구의 동생과는 비교도 안 되고 운이 좋은 그 조카가 어디서 위험에 처했을 리는 없을 테지만,
걱정과는 다른 불안감이 흐릿하게 자리 잡았다.
UNHRDO의 정보망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어지간한 정보 기구에 뒤지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친구 역시 그런
쪽에서는 얕볼 수 없다. 겹쳐지는 부분도 있다지만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 훨씬 더 큰두 가지 집단에서
사방으로 손을 써 알아보고 있는데도몇 달째, 조카에 대한 정보는 꼬리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조카가 자신의 행방이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그 타고난 운이 그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카는 정창인이 아는 한 그런 면에서는 그렇게까지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몇 년 전 UNHRDO 본부에서 그에게 접촉했을 때에도 '그쪽에서 날 찾아요? 많이 귀찮아지겠죠? 싫은데.
그래도 나를 찾는다면 얼굴은 비쳐줘야겠죠.'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무심하게 말했던
아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이유도 없이 새삼 세상 만사에 염증이 났다는 식으로 모습을 감출 까닭도 짚이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어딘가 몇 달 정도 여행이라도 갔으려니 했지만 이렇게까지 소식이 잡히지 않을 줄이야.
이런 경우는 본인이 들키길 원치 않는 경우 한 가지 외에…….
"전에 알아본다고 했던 쪽에도 짚이는 데는 없고?"
'코스타리카 쪽은 아니었어. 남은 건 두 군데인데, 이쪽은 소식이 늦어지는군. 소식
들어오는 대로 알려주겠어. ――――너무 초조해하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재이잖아.'
"정재의니까 더 곤란한 거지."
정창인은 혀를 찼다. 이 정도로 소식이 잡히지 않는다면 기구나 어지간한 세력은 손이 닿지도 않는 곳에서 그를 보고하고 있거나 안 좋은 경우는 감금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럴 리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정재의가 어느 곳의 무기 개발에 잘못 참여하기라도
하면 상황이 골치 아파진다.
"그렇잖아도 조약에 간당간당하게 걸릴까 말까 하는
녀석이라서 신경 쓰이는데."
정창인이 투덜거리자 친구는 늘 그렇듯 사람 좋게 웃었다.
'걸고넘어지고 싶어도 못 걸고넘어질걸. 다들 찔리는 데가 많은 족속들이니.'
정창인은 웃었다. 이 친구와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짚어내어 가장 적합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래, 어쨌든
그쪽은 네게 맡길게. 릭은, 원한다면 독일로 호송해 줄 수도 있는데."
'아니, 그럴 것 없어.
여기에 온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깨어나면 회사나 제대로 나가라고
전해 줘.'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회사 일 보라면서 홍콩으로
쫓아내라고?"
'창인, 무슨 약한
소리를 하고 있어. 몇 년 전 내가 수술을 받았을 때,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본 게 일레이가날 겨누고 있던 총구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래, 그랬었지."
정창인은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가족에게도 가차가 없는 놈이었다. 듣기로는 당시 사업문제로 피치 못하게
리그로우가 소속되어 있던 집단에손을 대게 되어 그 집단이 와해되었을 때, 친구는 동생이 날뛸 걸 뻔히 짐작하고는
미뤄두었던 만성 충수염 수술을 받고 병원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 주위에는 경호원들이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고 동생이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손가락에 권총을 걸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타협안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놈은 틀림없이나를 쏘고도
남았을걸.'
"그랬겠지, 그 녀석의 흉수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해 봐야 재의 정도일 테니."
정창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재의의 운이좋다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지만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던 때에 그 미친놈이 얽혀
있었다.
몇 년 전, 정재의가 심심풀이
삼아 개발한 소형 단총이친구의 회사에서 상품화되었던 적이 있다. 그 무렵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가장
위험할 때였다. 아직어린 치기는 다 빠지지 않았고, 이성을 덮어주지
못하는 지성은 본성을 감추어줄 수 없었다.
상품화되기 전의 시범 발사 단계에서 그 총을 손에 든 리그로우는 몇 번인가 그립을
쥐거나 공이치기를 당겨보곤 하더니 하하아, 하고 감탄스러운 듯 웃었다. 사격장도 아니고 사람들도 여럿 있는 실내에서 아무렇지 않게 방아쇠를 당겨 샹들리에의 종모양 유리 장식을 정확하게 맞혀 깨어먹은 그는,
마침 그 자리에 있던ㅡ아마도 그때가 리그로우와 정재의의 첫대면이었을 거다ㅡ정재의를 보곤 피식 웃더니 그를 겨누었다.
ㅡ네가 길상천을 달고 다닌다며. 그 운수가 얼마나 굉장한지 소문에 귀가 따갑더란 말야. 그럼 이건 어떨까.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리그로우는 정재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말릴 틈도 없었다.
아마도 죽일 생각은 아니었던 듯 머리나 심장을 노리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탄환에 맞아 그 자리에서 거꾸러진다 해도 아무 상관도 없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몇 분 전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발사되었던 그 총이 리그로우의 손 안에서 폭발했다.
그 자리에 흘렀던 정적을 정창인은 아직도 기억한다. 잠깐 놀란 얼굴을 했던 정재의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라고 중얼거렸고, 이미정밀한 점검으로 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정창인과 그 친구, 그리고 몇몇 관계자는 아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미리 총을 건드리며 그 총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을 리그로우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재의를 쳐다보았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그 시선에 이윽고 어이없다는 빛이 섞이더니 하,하고 그가 웃었을 때, 정창인은 들이켰던 숨을 겨우 내쉬었다.
그때 리그로우는 뭔가 조금 더 시험이라도 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황급하게
달려온 주위사람이 병원으로데려가려고 하자 단념한 듯 순순히 따라갔다. 과연, 이거야 당해낼 수가 없겠군. 하고 웃으면서.
그리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그 길상천이라는 동생도 어디 한 번 보고 싶어, 라고.
"……. 너희
집은 교육이 잘못됐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창인이 중얼거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친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너무한데. 다른 사람의
집안 교육을 운운하다니. 그런곤란한 녀석을 배출해낸 집안으로서 세상에 사죄해야 하는 입장이니 반박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굳이 변명하자면 나나 헬레나는 정상적으로 자랐다고.'
"물론 네 여동생은 미인에 나무랄 데 없는 재원이
분명하지만, 릭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점에서 네 판단력은 어딘가 문제가 있어."
'하하, 그래도 그
녀석이 회사를 말아먹을 만큼 무능한놈은 아니거든. 성격에 다소 문제가 있을 따름이지.'
"그 성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니까."
정창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회사를 걱정할 필요도없고 별달리 걱정되지도 않았지만, 잠시 세상의 불공평함을 맛본 기분이었다.
'왜. 그래도 덕분에
홍콩 지사는 순조롭게 잘 크고 있는데. 가족이니 횡령을 걱정할 일도 없고.'
그래도 동생이라는 건지 나름대로 변호를 하려는 친구에게 정창인은 별 구박도 되지 않을
구박을 중얼거려 보았다.
"회사돈을 유용해서 동료에게 인심을 쓰는 것도 일종의횡령아니던가."
"……? 물론
그렇지.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그건 그 녀석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항목인데.'
친구는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웃었다. 자네도 나이를 먹더니 실없는 말을 잘 하는군, 하고 덧붙인다.
"음……하긴 반드시 회사카드를 썼다고 할 수는 없겠군.
비록 주말에 회사일로 나가 있는 동안 썼다고는해도."
'이상한 말을 하는군. 마치 그 녀석이 누구한테 뭘 사주기라도 했다는 것 같잖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아니, 없어.
그 녀석은 여자를 꼬실 때에도 장미 한 송이 사준 적이 없는 놈이라고.'
여자를 꼬시기 위해 그놈이 산 거라곤 칵테일에 탈 이완제뿐이었지,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당당해서 정창인은 일순 말을 잃었다. 성격도 모럴도 바닥이란 걸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정창인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보지. 하긴 그놈이 내 조카에게 양복을 왜 사주겠어."
'……. 네 조카?
아. 둘째?'
"그래. 본
적 있던가?"
'아니, 없지.
……일레이가 네 조카에게 양복을 사 줬대? 그놈이 제 입으로 그래?'
"아냐, 조카에게
들었어.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하군."
친구에게 거짓말쟁이로 찍히고 싶지도 않았고 되새겨 생각해도 정창인 본인 역시 별로
믿어지지는 않아 그는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스쳐가듯이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
정재이의 동생을 봤다고.'
"봤다, 가
아니라 릭의 교위가 그 녀석이야. 다른 말은안 하던가?"
'아니, 안 하던걸.
주위사람 이야기나 하고 다니는 녀석이 아니잖아.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설마. 내
조카는 대단히 눈치가 빠르고 현명하기 때문에 제 목숨은 잘 챙길 줄 알거든."
정창인은 수화기 너머까지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실 운수와 두뇌를 제외하면 둘째는 첫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인물이었다. 적어도 정창인이 보기엔 그랬다. 그러나 역시 운이라는 건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요전의 일이었다.
리그로우와 일 관계로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홍콩에서 그가
정태의와 만났었다는 이야기가 어느 결에 나왔다. 그러고 보니, 라며
정창인이 양복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리그로우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말야, 대체
조카를 어떻게 키운 거야.'
정창인은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로 어느 조카를 말하는 건지 잠깐 생각해야 했고, 두 번째로 조카를 키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 떠올랐고, 세 번째로 '어떻게'라는 게 어떤 의미의 '어떻게'인지 짐작해봐야 했고,네 번째로 눈앞의 남자가 그런 식으로 웃기도 한다는 사실이 제법 의외였던 탓이었다.
갑자기 뭔가 우스운 이야기라도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피식 웃는 얼굴이 대단히 정상인처럼
보였다. 그 낯선얼굴에 어라, 싶었다.
이 남자가 웃는 얼굴은 여러 번 봤다. '저놈은 웃으면 더 위험해'라고 운운하는 말들도숱하게 들었고, 그 말들의 반 너머에 공감했다. 웃으면서 태연하게 미친 짓을 저지르는 놈이라 웃는다 해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마주치다 보면 그 웃음도 구별이 가게 마련인데, 지금 이 웃음은 좀 낯설다.
'태의? 그 녀석이
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가능하면 좀 너그럽게 봐주면 고맙겠군, 그래도 내 사랑스런 조카아이거든, 하고덧붙이며 정창인도 덩달아 웃었다.
그 똘똘한 아이가 제 목숨 허투루 내놓을 짓을 하진 않았을 거고, 이 미친놈이 또
뭐에 심사가 뒤틀렸을까.
돌이켜 보면 이 남자와 알고 지낸 것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알고 지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처음 본이후로 10년이 훌쩍 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일로 관련되어 마주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친구와 교류하고 종종 그 집을 찾거나 들려오는소문들을 접하면서, 정창인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정상인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미치광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상인의
기준에서 한없이 벗어나 있지만 정신 감정 따위는 웃으면서 속여넘겨 정상인인 척할 수 있는 미치광이라고 해야겠다.
친구나 가족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개념이 달랐다. 그래서, 이 남자의 앞에서는 어제 만난 사람이나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나 같이 지내온시간만으로는 달리 대우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런류의 인간과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예 스치지도 않는 게 좋다. 저 조카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정도로 똑똑한 녀석인데, 어째 그렇게
운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자신의 방에서 리그로우와 통화를 했다는 말을들었을 때에도 놀랐지만, 몇 번 통화한 정도로 리그로우가 누군가에게 흥미를 느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은 그 이유만은 아니었을 거다. 재수 없게 마주치기도 종종
마주쳤다. 정창인이 아차 싶었던 것은, 리그로우가 새로운 교관 후임자로
내정되고 이곳으로 옮기기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그가 정창인에게 지나가는 말로 '교위는당신 조카가 좋겠군'하고 말했을 때였다.
그때 정창인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태의, 이 운 없는 녀석. 비록
자신에게도 이 사태의 책임이 약간은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찍힐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그 녀석, 머리가
좀 이상한 것 아냐?'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그로우가 그렇게말했을 때, 정창인은 이런 미친놈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조카도 갈 데까지 갔구나 내심 한탄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왜. 네게 덤비기라도
하던가? 그렇다면 분명 머리가 이상해진 게 맞겠지.'
'아니, 그런 게 아냐.
뭐라고 해야 할까……, 전두엽이 없는 것 같아.'
'……. 뇌가 없는
것 같다고?'
나중에 태의에게 일러줘야지, 정창인은 그렇게 마음먹으며 슬쩍 웃음이 나오는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의외로 리그로우는 진지한
얼굴로 약간 눈살을 찌푸리더니손을 젓는다.
'아니아니. 불안감이란
게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별로 앞일을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그 녀석이 좀 현실에 충실하게 살긴 하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정창인은 아,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조카에게는 그런 면모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정창인이 의외였던 건, 이 남자가다른 사람의 성격에 대해 말한다는 점이었다.
정창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지그시 리그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별 말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식거리기만 했다. 어쩐지 저 낯선 웃음을 보니 정창인은 점점 탐탁지 않아졌다.
생각해 보면 조카는 이런 면에서 좀 재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예전부터 질이 안 좋은 놈들이 주위에 얼쩡거리곤 했다. 사실 둘째보다는
첫째와 더 종종 이야기를나누었던 터라 자세히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 첫째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태의도 큰일이에요……'라고 영문 모를 소리를 이따금 한 마디씩 중얼거리곤 했다.
사막에 던져둬도 잘 살아남을 것 같은 둘째를 두고왜 저런 걱정을 할까 싶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조금 알것도 같다. 둘째는, 과연 그 천부의
특질 탓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좀 질 나쁜놈들과 부딪히는 경향이 있었다.
'하긴 여기에 오자마자 그날로 곧바로 신루랑 마주친 것도
그렇지.'
정창인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문득 리그로우의 시선이 흘끗 날아왔다. 잠깐 허공을 떠돌며 생각에 잠기는듯싶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필 마주쳐도 그런 질 나쁜 놈과 마주치다니,
그놈도어지간히 사람 운이 없나 보군.'
리그로우가 혀를 차며 안 됐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창인은 그 말 자체에는 공감했지만,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슬쩍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어쨌든 신루도 그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으니
그나마…….'
'그러니까 더 안 됐지.'
'…….'
이번에도 정창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이번에도 리그로우의 말은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았다. 신루도 똑똑하고
나름대로 착한 구석이 있긴 한데, 가끔보면 좀 치기가 있다고 할까,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정창인은 조카를 위해 가장 나으면서도 나름대로가능성도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신루는 네 취향에 꽤 맞지 않았던가? 상당히 곱게 생겼잖아. 그래도
태이가 한눈에 반할만한 얼굴인데.'
'그래……, 예쁘지.
얼굴도 예쁘고 몸도 제법 감칠맛이났어.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랑 한창 하고 있을
때당신 조카가 그 모습을 봤었지.'
리그로우는 예전을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느리게 중얼거렸다. 이 손 빠른 녀석, 하고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정창인은 조카를 애도했다.
그러나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그로우가 신루에게 손을 뻗어 두 놈이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면 정태의는 어부지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때였다.
'그런데 그때 그놈이 날 쳐다보던 눈매가 영 마음에 안들더란
말야.'
리그로우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창인은 한숨 섞어 말했다.
'좋아하는 녀석이 다른 놈과 몸을 섞고 있는데 라이벌을 고운
눈으로 볼 놈이 어딨어. 화내지 말고 그냥 웃어넘겨 줘, 그 정도는.'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글쎄……, 뒷맛이 좀 안 좋았지. 게다가 그래도 여전히 그 꼬맹이를
좋다고 그러고 있더군. ……멍청한 녀석.'
리그로우는 코웃음을 쳤다. 정창인은 물끄러미 리그로우를 바라보았다. 이건 뭐랄까……,
어쩐지 별로 안 좋은데.
그는 짐짓 웃으며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요즘 여기저기서 치이는 가엾은 놈이니까 너무 험하게굴지
말고 좀 잘해줘, 우리 조카.'
정창인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조카를 거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놈이
특별히 그를 더 잘 봐주거나 할 것 같지도 않았고수틀리면 제 형제라도 태연하게 쏘아버릴 놈이니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도
아니다. 리그로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픽 웃었다.
'별로 험하게 군 적 없는데. 가끔 그놈이 삐딱선을 탈 때가 있긴 한데 그 태평하니 어벙한 얼굴을 보면 기운도 안 나.'
'……너도 나이 좀 먹더니 성격 유해졌나 보군.'
정창인이 중얼거린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리그로우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긴장감 없이 유쾌하게웃는 소리도 낯설어, 정창인은 희한한 눈으로
리그로우를 쳐다보았었다.
정창인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놈은 제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늘 '저놈은 사람
되기 글렀다'면서 한탄하는 이친구는, 그래도 가족이니까 나름대로 리그로우의
인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있기야 할 거다. 정창인으로서는 상상도 안 가는 일이었지만.
정창인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조금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다. 태의를 이리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지부내의 일 때문에 치여서 부루퉁한 얼굴을 한다거나, 동료들과 불화가 있다거나 다쳐가면서 고생을
한다거나 하는 건 이미 데려올 때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그러리란 걸 감수하면서 그를 데려왔다.
……하지만 저렇게 질 나쁜 놈에게 걸릴 줄은 몰랐지.
'일레이가 쓰러져 누웠으니 네 조카는 좀 편해졌겠군.'
정창인이 내심 고개를 내젓는데 수화기 안에서 친구가말했다. 글쎄 뭐 그렇지도 않아, 라고 대답하면서 정창인은 기억을 접었다.
사랑스런 조카다. 아무렴,
어떻게 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창인은 담담히 웃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있었다.
* * *
방은 어두웠다. 문을 열자 복도에서
쏟아진 불빛이 방안을 네모 모양으로 채운다.
문 모양을 따라 기다랗게 들어선 빛 말고는 어둠만 까맣게 자리 잡은 방 안에는 그
어둠과 같이 정적이 머무르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자 낮은 숨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아직 죽지는 않았나 보네."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을 닫자 다시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어둠이 몰려와 문앞만 비추는 노오란 등을 켰다.
그 어슴푸레한 등만으로도 방 안을 살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 일레이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백 리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져도 예리하게 알아챌 남자가 방 안에 사람이 들어와도 꼼짝도 않고 있다니 희한한
기분까지 든다. 게다가 아까 정태의가 와 봤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양새다. 덮고 있는 이불의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혹시 죽었나."
정태의는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침대로 한 걸음 다가섰다. 손에 들고 있던 미음 그릇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일레이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대었다.
역시 가느다랗긴 하지만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망설이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겁다. 체온계를 물려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도록뜨거웠다.
그러나 그렇게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도록 조용히, 평온하게,
일레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원래부터가 놀랄만큼 하얗게 생겨먹은탓에 지금은 유령처럼
창백했지만, 그것만 빼면 그냥 잠들어 있다고 봐도 될 정도다.
'몸이 좀 약하다 싶은 놈은 목숨까지 걱정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독이야. ……뭐 저 괴물쯤 되면 죽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 들여다
봐 줘. 어느 순간 싸늘하게식은 채로 발견되면 시체처리반에 연락해야 하니까 알려주고.'
태평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입매를 찡그리던 의무반 교호가 머리를 스쳤다. 이 괴물 정도 되면 죽지는 않는다해도, 그래도 이놈도 일단 인간인 이상에야
멀쩡할 리는 없는 노릇이다. 이만큼 열이 나고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어쩌면 이 정도나마 반응이 있다는 것에 '이놈도 인간이긴 했구나'라며 감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살아 생전, 이놈이 이렇게 열이 펄펄 끓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꼴을 다시 볼 날이 있기나 할까.
"그러니까 사람이 원한도 좀 작작 사야 한다니까.
내 언젠가 이런 꼴이 날 줄 알았지."
해열제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아까 오후에도 비슷한 상황이라 이미 해열제를 먹였었다. 정량 이상으로 해열제를 먹이는 것도 그리 좋은 수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면차라리 일어나서 좀 움직이기라도 하면 몸이 제 구실을하면서 약간이나마 균형을 찾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을 봐선 도무지일어나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이……, 일어나서 미음 몇 술이라도 좀 마셔 보지……?"
혹시나 싶어 조용히 말을 걸어보긴 했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이럴 때 어느 흉한이 들어와서 칼이라도
한 번 휘두르면 그대로 골로 가시겠다. 그런데 문을 잠그지도 않고 열어두는 이놈도 이놈이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저 아래층의 수많은 흉한 후보들도 좀 안됐다. 어찌
되었건 본인이 앞장서 흉한이 되어 칼질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정태의는 '본인의 힘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겠네'하고 투덜거리면서도 비닐주머니에 얼음을 채워넣고 얇은 수건으로 감싸 일레이의 이마 위에 얹어주었다.
동료들 중 누군가 봤더라면 이 김에 아예 수건을 적셔서 얼굴 전체를 덮어주라고 했을 거다. 그렇게 한다면 정태의는 일약 영웅 대접을 받으며 동료들의 원성 대신 환성을 한 몸에 받을 테지.
그러나 그 망할 동료라는 놈들도 요즘은 그저 밉상일 뿐이다. 정태의는 웃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곤 욕실로 들어갔다. 교관실은 욕실이
붙어 있어 그것 하나는 좋다. 바지를 벗다가 문득 샤워 부스 앞에 전면으로붙은 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이놈의 낯짝은 날이 갈수록 화려해진다. 울긋불긋 채색된 모양새가, 얼굴이 그냥 도화지다. 멍이 좀 사라질 만하면 또 얻어터지고, 상처가 좀 나을 만하면 또 찢기고의 연속이다보니 얼굴이말끔할 날이 없었다. 요 근래 계속 이러니
이제 자기 얼굴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지경이다.
뜨거운 물줄기를 머리 위로 맞으면서 정태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도 정규 일과를 마쳤다.또 하루가 끝났으니 방으로 돌아가면
달력에 가위표를또 하나 쳐야겠다. 그런데 설마하니 정태의가 방에 돌아가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찾아오면 저
남자가 저 모습 그대로 침대 위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는 건아닐 테지. 앓아도 저렇게 티 안 나게 앓다니,
죽어도 어느 순간 티 안 나게 죽는다 한들 이상할 것 없을 성싶었다.
일레이 리그로우의 죽음.
가만히 그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그리고 이토록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괴물
같은 남자에게 죽음이 가당키나 할까. 더욱이흉수의 독에 당해서 허무하게 죽었다는 죽음이라면 너무 의외성이
없어서 도리어 의외다.
설마 그렇게 죽을까 싶기는 하지만, 언제쯤이면 자리 털고 일어나려나. 살아 움직여서 남에게 위협만 되는 남자라곤
해도 저렇게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으니 은근히 불편한 데가 많았다. 당장 교관직을 맡고 있다는 걸제외하더라도
가업을 돕는다는 부분에 있어서도 애로 사항이 제법 생겨나는 모양이다.
정태의 역시, 이 남자가 죽으면
죽는 대로 편해질 테지만 살면 사는 대로 마음 편할 일도 분명 있었다.
"적어도, 죽기를 바라진 않는다는 거지……."
비누거품을 적당히 씻어낸 정태의는 살갗의 물기가 증발하면서 서늘해져 몸을 움츠리곤
바스타월을 머리에뒤집어쓰고 욕실에서 나갔다. 난방이 되어 있는 방은 욕실보다 한결 따뜻했다.
몸의 물기를 먼저 닦아낸 뒤에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면서 정태의는 다시 침대로다가갔다. 협탁의 미음도 그대로였고 누워 있는 모습도변함없었다.
"이 봐. 언제쯤 일어날 거야. ……이 정도로 죽어가는 꼴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잖아."
정태의는 머리를 닦던 수건을 목에 걸치면서 혼잣말을중얼거렸다. 무엇에나 본연의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고한다면, 이 남자는 이렇게 누워
있는 것보다 차라리 남의 목을 비틀고 있는 편이 훨씬 어울렸다. 그것이 사회정의에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이상한 걸로 따지자면 내 방에 무방비하게 드나드는
너도 결코 범상하지는 않은데."
나직한 목소리가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움찔, 저도 모르게 수건을 움켜쥔 정태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일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말 한 마디라도 했느냐는 듯 나무토막같은 그 모습은 여전했다.
사흘만이다.
잔뜩 잠긴 목소리는 정태의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도 비교도 안 되게 미약하고 나직했지만, 틀림없이 일레이의목소리였다.
"뭐야, 언제
일어났어."
"……."
"일어났으면 미음이라도 좀 넘겨. 묽게 끓여왔으니 그냥 마시기만 해도 되니까."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창백하게 누워 있는 모습은 변함이 없어, 혹여 조금 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어이. ……일레이."
정태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의 머리 위로 가만히 허리를 구부려 두어 뼘 위에서 그를 내려다본다. 평소보다 한층 창백한
얼굴은 이따금 고요한 숨소리를 들려줄 뿐이었다.
"이렇게 힘없이 누워서 뻗어버린 녀석의 방에 무방비하게
드나든다고 말할 처지냐."
"그놈은 어떻게 됐어."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다. 꼼짝도 않는 채로 눈도 감은 그대로, 입술만 잠깐 움직였지만 분명 목소리가 나왔다.
나른하고 지친 듯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또렷하고선명한 목소리다.
정태의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는 이내 깨달았다. 일어나자마자 제 몸을 챙기기 전에 제일 먼저 묻는 게
자기를 찌른 놈의 소식이라니, 이놈답다면다운 일이라 한숨이 나왔다.
"눈이 망가져서 홍콩으로 나갔어. 실명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다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던데. 그 뒤로는 소식을 알아보지 않았지만, 아마 다시 돌아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나중에 따로 찾아봐야겠군."
"……. 찾아서
뭐하게."
"그놈 옆구리도 한 번 찔러줘야지.
독소에 재워뒀던 칼로."
잠에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는 꿈 이야기라도 하듯이 평연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이놈이기운은 좀 없어도 그놈 맞구나, 하고 질리고
말았다.
"그러고 싶으면 그 전에 기운부터 좀 차리시지?
사흘 내내 링거만으로 연명했을 테니 몸에 힘도 하나 없을 텐데, 미음으로 입술이라도
축이는 게 어때."
그래도 죽네사네 사경을 헤매던 놈이 말을 하니 저으기안심이 된다. 어쩌면 의외로 자신은 이 남자가 살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정태의는
침대가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문득 시선 끝에 일레이의 손이 들어왔다. 어둑한 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보일 만치 새하얀 손이 이불 위에서 손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손 끝의 손가락이 살짝,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달리 움직이는 곳 없이 손가락 끝만 불규칙하게 가끔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손가락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아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뭘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늠해보고 있는 거다.
"며칠 내도록 움직이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는데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어? 근육은 풀리지 않았나 몰라."
정태의는 그의 움직이는 손끝을 가볍게 톡 튀기며 말했다. 피식, 일레이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입가에만웃음 비슷한 게 돌다가 이내 사라진다.
"글쎄……확실히 다른 때보다 힘이 좀 없긴 하군.
숟가락 들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 미음 기왕 들고 온 김에 네가 먹여주지 그래."
이제 의식은 완전히 돌아왔는지 말은 썩 잘 하지만 그 목소리에도 평소만큼의 힘은 없었다. 금세라도 꺼질 듯하지는 않다 하나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정태의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듯 입매를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핏기 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일레이를 내려다보다가 흠, 하고 한숨을
쉬곤 미음 그릇을 집어들었다.
"예, 예.
교관님 말씀하시는데 힘없는 교위는 얌전히 따라야지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어쩌고 했던 모러의말이 슬쩍 뇌리를 스쳤지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고삐를 조금 늦추었다. 죽어가도 호랑이는
호랑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여차하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미음 그릇에 저 창백한 얼굴을 박아버리고튀어야지.
아마 그렇게 되면 이 섬 자체에서 튀어 어느 오지 구석으로 도망가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만다.농담이 아니다. 원래 이 남자의 안색이 이렇게 창백한편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정말로 시체 한 구가 누워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나마 이 남자이니까 '다른 때보다 힘이 좀 없다'고 하지, 자신이었더라도 며칠간
제대먹지도 못하고 고열로 앓아누웠던ㅡ지금도 열이 펄펄끓는ㅡ상황에서는 '지금 바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했을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가 미음 그릇을 집어들고 다시 돌아보았을 때, 정확하게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일레이가 눈을 떴다.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암흑이 뻥 뚫린 듯 짙은 눈동자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빙글, 눈동자만 약간 아래로 향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마치 밀랍인형이 눈동자만 움직이는 것 같아 섬뜩했다.
"……너는 얼굴에 너무 핏기가 없어.
어디 가서 드라큘라라고 해도 믿을걸."
정태의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일레이는 웃었다. 이번엔조금 전보다 약간 더 오래 웃는다.
"그래, 그래서
네 목을 물어뜯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잔뜩 몸을 사리고 있나?"
"내가?"
"아니야?"
"……. 네가
나라면 어떻겠어."
아니라고 허세를 부릴까 하는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역시 호랑이는 죽어가도 호랑이다. 여기서 깝죽거렸다가 나중에 저 괴물이
말짱히 다 나은 뒤를 생각하면 입은 그저 조심하고 볼 일이다. 일레이는 다시 웃었다.
"때로 너는 나보다 훨씬 현명하게 처신하거든.
지금처럼."
안 깝치길 잘 하는 짓이다, 이 뜻이렷다.
정태의는 칭찬을 받아도 칭찬 받은 기분은 들지 않아 씁쓸하게 숟가락으로 미음을 휘휘
저었다. 그때 문득 일레이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만 까딱, 까딱하던 손은 이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그 모양새에 혀를 차곤, 정태의는 미음을 한 숟갈 떴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긴 하지만 꽤 식은 듯했다. 약간 마셔보자 적당하게 따끈하다.
"딱 좋네. 자."
정태의는 말간 미음을 떠 일레이에게 가져갔다. 눈을 뜬 뒤로 줄곧 정태의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던 일레이의눈매가 희미하게 구부러졌다.
"같은 그릇의 음식을 먹더라도 한 사람만 중독시킬
수있는 방법을 나는 일곱 가지 알고 있지."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에 정태의는 멈칫했다. 일레이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괜한 말이 많은 걸 보니 이놈이 아프긴 한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이 새끼가 지금 이 말이…….
정태의는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비치면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가져가던 숟가락을다시 거둔다. 절로 목소리가 차게 굳었다.
"내가 널 죽일 생각이었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 손더럽히지 않고 남의 손 빌려서 이미 사흘 전에 죽였을 거고, 혹은 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정도로라도
생각했더라면 이 미음을 굳이 내가 끓이지 않고 아무에게나 끓여달라고 부탁했을걸."
"……아하. 그 말은 즉, 내가 죽지 않길 바라신다……?"
"30초 전까지는 그랬지.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네놈이마음에 들었거든."
이런 걸 두고 배은망덕이라고 하던가, 정태의는 머릿속한구석에 그런 말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주위사람에게들었을
때 가장 기분이 불쾌해지는 류의 말을 지금 들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흙탕물에 내팽개치는 말을 들어서
좋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만.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호의는 고사하고 설령 애정이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구정물에
내버려버릴 수 있는 남자가 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 특유의 현명함으로그런 점을 대놓고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는데, 열로 살짝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정태의는 "기운 나면
네 놈이 알아서 먹든가 버리든가 해."라고 중얼거리곤 미음 그릇을 내려놓은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 손목을 턱 잡는
손길이 가로막았다. 조금전까지 힘겨운 듯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던 그 손이 손목을 쥐는 감각이 의외로
대단해, 정태의는 움칫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까만 눈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곤란한 듯도, 실수했다 싶은 듯도 한 눈길 같기도 하다.
"……."
뭐라고 말을 하려는지 살짝 벌어졌던 입술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잠시 멈추어
있다가 다시 닫혔다.저 일레이 리그로우에게서는 본 적이 없었던 의외로운모습에 정태의는 일순
불쾌감도 잊어버렸다. 저 인간 같지 않는 놈이 설마 인간 같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정태의는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힘이 없는 듯 보였는데 의외로떨쳐내기 힘든 손이었다. 정태의가 그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그 시선을 그대로 일레이에게 옮기자 여전히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 실수했어. ……가지 마. 지금 바로 저 미음을 먹지 않으면
난 죽을 것 같다고."
"……그래서?"
"……. 미안해.
태이."
이 남자가 고열 때문에 정신이 제대로 나가버린 게 분명하다. 목소리가 좀 나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또렷해서 정신은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이 남자의 이성은 아직 의식의 혼돈 저 너머 어딘가를헤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태의는 무표정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써 노력하며 말없이 미음 그릇을 집어들었다. 혹시 열이 옮아서 자신의 귀가 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의심도 해 봤다. 미음이 담긴 숟가락을 가만히 그의 입술에 대었다.일레이는 순순히 입을 열어 그 미음을 받아마셨다.
이렇게 얌전한 이놈이라니, 너무나 예상밖의 모습이라 불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쁘진 않다.
"싱거운데."
천천히 목울대를 울린 일레이는 맛이 퍼질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중얼거렸다.
"그 몸 상태에서 짠 걸 잘못 먹어서 재수 없게
탈수까지겹치면, 아무리 너라도 정말 죽어."
"아하, 아무리
나라도."
일레이는 미묘하게 웃었다. 정태의는 내심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얼른 미음을 퍼서 그 입에 쑤셔넣듯이 억지로 흘려넣었다. 어떻게든 저 입을막아보려는 속셈이었지만 말없이 두 숟갈째의 미음을받아마신 일레이는 잊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죽지도 않을 것 같나?"
"글쎄……. 이 정도로 열이 나면서도 이렇게 멀쩡하게이야기할 정도라면, 적어도 고열로 사경을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정태의는 빈 숟가락을 든 채 살짝 일레이의 이마에 손등을 대었다 뗐다. 여전히 평열을 훨씬 웃도는 열기가느껴졌다. 이 정도 열이 나면 어지간해서는
거의 혼수상태로 제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만 가끔 할 텐데, 역시 범상치 않다. 범상치 않은 남자다.
"아."
세 숟가락째 미음을 뜨려는데 갑자기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시선만 들어 일레이를 쳐다본다. 일레이는 눈을 감으며 나직이
말했다.
"한 번 더."
"응?"
"손이 시원해서 좋아. 지금 좀 덥거든."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손등을 그의 이마에 대었다. 정태의의
손도 굳이 따지자면 따뜻한 편이었지만 분명 그의 이마는 훨씬 뜨거웠다.
"얼음주머니 새로 만들어다 줘?"
"아니, 손이
더 나아. 시원하고 부드러우니. ……미지근하다. 다른 쪽 손."
예, 예,
인간냉각기로 얼마든지 써먹으십시오, 정태의는 미음 그릇을 도로 내려놓고 다른 쪽
손을 얹었다. 일레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태의의 손을 이마에 얹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약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손에 뺨을 댄다. 뺨 역시 뜨거웠다. 이렇게 뜨거운데도이토록 창백하다는 것이 너무도 이상해 정태의는 그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문득 일레이가 눈을 떴다. 새카만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럴 이유도 없는데 몸이 굳어진다.
"내가 없는 동안."
"……?"
"힘없는 정 교위는 잘 지내셨나? 그 얼굴 꼴을 보니 또누군가와 단단히 붙은 모양인데, 이번엔 누구야."
일레이의 시선이 정태의의 관자놀이 언저리를 훑었다.굳이 관자놀이뿐 아니라 온 얼굴이 멍투성이다.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누군지 알면 힘없는 교위 대신 교관님이 복수라도
해주시려고? 주먹빚을 목숨으로 받아서야 후환이 너무 두려워서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원. 뭐……교관이 혼수상태로 넋을 잃은 동안 좀 쉬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유감스럽게도 그러지도 못했어. 매시간마다 혹시 그새죽지는 않았나 상태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거든.
잠도제대로 못 자고 죽나 안 죽나 지켜봤으니."
"하하아. 사흘 내도록ㅡ. 교위도 할 짓이 못 되는군."
"그렇게 따지자면 말이야, 천지사방에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인간과는 친분을 맺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정태의는 말하고 보니 우스워 잠깐 천장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친분을 얼어죽을. 인간 관계라는 건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설령 정태의가 나름대로 인연이 닿는 관계라고 여긴다 해도 상대가그렇지 않으면 인간 관계고 뭐고 애초에 없는 셈이다.
아무리 자신이 일레이의 교위가 아니었더라도 필경 하루에 한두 번 가량은 그의 소식을
물었을 테지만, 그 뿐이었다. 이 남자와의 양방향적인
인간 관계란 성립할 수가 없다. 일레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친분이라."하고 중얼거리며 미묘하게 웃는다.
다른 손, 하고 다시 말하는
그의 말을 따라 얌전히 다른손을 바꿔 이마에 올린 정태의는 이미 그의 손의 온도나 그의 얼굴 온도나 별 차이가 나지도 않게 되었는데,라고 생각하며 손을 탈탈 털었다. 얼음주머니보다 시원한 손이 낫다면, 차라리 얼음을 가져와서 손에 쥐고 있을까.
"정태의."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태의는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드물게도 분명한 발음으로 이름을 부른일레이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허공 어디쯤에 시선을 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사흘간.
너였단 거지……."
"……? 말해두는데
죽지 않았나 보기만 했을 뿐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뭔가 흉악한 꿈이라도 꿨다면 그건 내가 아냐.
누가 네게 미수를 뻗쳤다 한들 혼수상태의 환상이라고."
혹시라도 이상한 불똥이 튈까 정태의는 얼른 말했다. 사흘간 온몸이 아프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게 다 너 때문이었다는 둥 하는 말이라도 들었다간 곤란하기도 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레이는 정태의를 탓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저 뭔가 생각에 잠겨 허공을 바라보다가 정태의의 말을 듣곤 천천히 시선을 되돌렸다. 그 눈이
웃고 있었다.
"나는 방어 본능이 다른 사람보다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서 잠이 들더라도 완전히 의식을 잃는 일은 없거든.몸이 불편할 때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반드시 의식의 한부분은 깨어 있지.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개로."
느릿한 그 말을 듣고 정태의는 재빨리 사흘간의 기억을더듬어 보았다. 규칙적으로 일레이를 찾아와 상태를 살피기만 했을 뿐, 그가 원한을 가질
만한 어떤 일이든 한적은 없었다. 뭔가 듣기에 좋지 않은 험악한 욕설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일단
기억 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다행이다. 어쩌면 나야말로
방어 본능이 투철한지도 몰라. 정신을 잃고 있는 일레이를 보러 올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내가 너 언제 한 번 이런 꼴 날 줄 알았다, 사람들한테 그렇게 못할 짓을 하니까 이 꼴이
나지, 멍청아.꼴 좋다'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던 정태의는 입 밖으로 그 말들을 내지 않았다는 데에 안도했다.
"늘 사람을 쥐잡듯 잡아대던 놈이 이러고 있는 게
그렇게 이상했어?"
일레이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레이의 이마에대고 있던 손이 살짝 움찔했다. 그 손길을 느꼈는지 일레이의
웃음이 짙어진다.
이런 망할. 들었구나.
정태의는 눈동자를 반 바퀴쯤 빙글 굴리며 슬쩍 시선을피했다. 분명히 고열로 까무룩하게 정신이 없었을 텐데그런 말은 어느 결에 들어서 이제 와서 그래.
"그래도 어쨌든 네가 일어나란 대로 일어났으니,
됐지?"
정태의가 뭐라고 대답할까 고심하는데 그 머릿속이 훤히 보였는지 일레이가 피식하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그런 말까지 했었나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리던 정태의는
이대로 입닫고 있어봐야 더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아 얼른 선수칠 셈으로 말했다.
"그래, 잘
일어났다. 어울리지 않게 앓아눕지 마. 아직도 열이 끓는 놈이."
그러나 말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기묘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나자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평소에 늘 팔팔하다 못해 무시무시하던 인간이 이렇게 축 늘어져 있으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 지경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스스로를 비웃을 마음이 들었다.
정태의는 그의 이마에 대고 있는 손이 너무 데워졌다 싶어 다시 손을 바꾸어 짚으며
한숨처럼 물었다.
"번연히 다 듣고 있었으면 대답 한 마디라도 해주지
그랬어. 왜 걱정을 시키고 그래."
일레이는 문득 기묘한 얼굴을 했지만 별 말 없이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떠올렸다. 그리고 뭔가 대단히 희한한 생물이라도 보는듯 정태의를
빤히 쳐다보다가 픽 웃는다.
"대답까지 할 만큼 의식이 또렷하진 않았거든.
어쨌거나 어릴 적에 홍역에 걸린 이후로 이렇게 앓아누웠던 건 처음이니까. 주위의
말을 알아듣는 게 고작이었다고."
"홍역에 걸리긴 했던 모양이지."
홍역도 네게선 비껴갈 줄 알았는데, 라고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는 정태의에게 일레이가 우습다는 듯 대답했다.
"아까부터 실례되는 말을 하는데 나도 앓을 것 다
앓고정상적으로 자라난 평범한 인간이라고. 홍역이야 어릴적엔 대부분 한 번 정도는 걸리지 않던가?
너도 걸렸을것 아냐."
정태의는 제일 앞 문장은 굳이 못들은 척하며 대답했다.
"음. 세
살 때였나, 호되게 앓았다더군. 나는 기억나지않지만 어릴 적에는 병을
달고 살았다고 하니까 뭐, 홍역에 걸렸다고 해서 대단할 것도 없지."
"홍역은 이병률도 높으니까. ……정재이와 나란히 누워서 앓았겠군."
"글쎄.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아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은, 나도 형도 건강하게
자랐지."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형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맹수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길상천이니 뭐니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해도,
다 정상적으로 앓기도 하고 뛰놀기도 하면서 자랐다고. 형도,나도. ……정말로 복덕을 주는 자라면 옆에 있는 자가 앓아눕도록 하지는 않을 테지."
뒷말을 마치 혼잣말 같았다. 뭔가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니 실제로도 혼잣말이다.
정태의는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의미를 알 수 없는 까만 눈이 문득 부담스러워져, 그의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이미 이마의 열이 고스란히 옮겨와더
이상은 서늘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그래. 분명
너는 내 길상천은 아니지. 너와 함께 있다해서 독을 마셔도 말짱하다거나 독을 아예 안 마시게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니. 내게 있어선 그저 평범한 보통인간에 지나지 않아."
도로 미음 그릇을 집어들던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생각에 잠긴 듯 나직나직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너는 아무데나 널리고 널린 인간이다'라는 투의말을 들어서 불쾌해질 만큼 여리고 예민한 마음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오늘은 답지
않게 말이 많다.
"마저 먹기나 해. 먹고 자. 지금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내일쯤엔 훨씬 나아지겠는걸."
아니면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멀쩡해지거나, 라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미음을 떠서 입가에 대어줘도
입을 열 생각은 않고 말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는 문득 피식 웃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반대편 손목이며
팔을 주무르는 그 새하얀 손이 묘하게거슬렀다. 갈작갈작, 조그만 벌레가
신경을 갈작거리는것 같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쁘다기보단 오히려――――."
일레이는 여전히 혼잣말인 양 중얼거리다가 문득 입을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생각이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깜빡, 눈꺼풀이 한 번
움직였다. 굳은 근육이라도 풀 듯이 천천히 팔을 주무르던 손도 멎는다. 생각을 더듬던사고가 벽이 부딪힌 듯 잠시 허공의 한 점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일레이는 이윽고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렸다.그리고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쳐다본다.
안 좋다. 뭔가 안 좋아.
늘 평연하게 웃으면서 사람 목을 따는 놈이 얼굴에 표정 하나 없다는 것도 징조가 과히 좋지 않고, 무엇보다도 몹시 낯설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까만 눈이 기묘하게 낯설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 목을 움켜쥘 때보다 더욱.
"……. 안
먹어?"
정태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오래 머물러서 좋을 일이 결코 없을 것 같았다. 더욱이 생각해 보면 이놈은
지금 제정신도 아니지 않은가. 지극히 정상처럼 보이긴 하지만 언뜻언뜻 말하는 게 분명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이러다 언제 갑자기 미쳐 날뛰며 사람 목구멍에 숟가락을 꽂아넣을지, 아니면그릇을
깨부숴서 그 파편으로 목줄기를 그어버릴지…….
"난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는데."
정태의가 그릇을 내려놓자 일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낯설게 정태의를 살피던 까만 눈에 얼핏 웃음 비슷한 것이 어렸다. 천천히,
천천히, 한순간이라도 숨을 돌렸다간 그 순간 숨통이 끊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아주 천천히 그릇에서 손을 놓았다. 태연하게 말한다곤 하나 자신의 귀에도 어렴풋이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고한다.
"움직이는 걸 보니 솓가락 들 힘은 있는 모양인데,
그럼스스로 먹어. 어쨌든 살아있는 건 알았고 난 이만 가 볼테니까."
"어차피 오늘 일과는 다 마쳤을 테니 별 일도 없을
텐데뭘 그렇게 서두르고 있어."
일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마치 마녀가 어린애를 꾀어낼 때에 내는 목소리 같다.본성을 짐짓 저 밑바닥에 감춘 소리다.
이놈이 왜 이래. 왜 갑자기 사근거리는
고양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그러나. 역시 징조가 아무래도 흉하다.
정태의가 느리게 손을 거두고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주려는 찰나, 일레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사흘 고열에 시달린
지치고 힘없는 모습이 그 창백한 얼굴 위를 덮어,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 좀
앉아 볼래?"
베개를 세워서 기대어 앉혀놓으면 밥을 먹기도 편할 테니, 그 정도는 도와주고 물러설까.
머뭇머뭇 망설이다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다시 눈을 떠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않은 터라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 허리를 굽혔다.
귓가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였다 희미하게 웃음서린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귓불을 스쳤다.
"감 하나는 정말이지 좋은 녀석인데……가끔 이렇게
판단력이 못 따라주거든."
"어……?"
기운 없이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어느 정도로 움직일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듯 천천히 손목과 팔 언저리를 주무르는 손도 느리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일레이를 부축해 일으키려고어깨 아래로 손을 들이민 순간, 여유롭게
팔꿈치를 움켜쥐는 그 하얀 손에는 압도적인 힘이 배어 있었다.
"……!!"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정태의는 팔꿈치를 잡는 것과 동시에 턱 바로 아래를 우악스레 틀어쥔 손이, 그의 균형을 뒤흔들었다.
허공에 매어 몸을 가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태의는 숨을 들이켰다. 등 뒤로 부딪힌 침대는 분명
푹신했지만 그 스프링은 갑작스런 충격을 다 흡수해주지는 못했다. 침대 위로 정태의를 메어친,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꼼짝도 못하고 죽어가던 남자는, 정태의가 콜록,
한 번 숨을 뱉어내고 눈을 떴을 때는이미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아니다 싶었나?"
일레이는 피식 웃고 있었다.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없어서 눈을 한 번 깜빡인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위험하다, 딱 느낌이 왔어? 그러면 그 순간 바로 튀었어야지."
정태의는 여전히 알 듯 말 듯한 말을 던지는 일레이를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뭐가
못마땅해서 그래. 미음이 싱거워서? 아니면 나랑 있어도 운이 좋아지지
않아서? 전자라면 아주약간은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후자라면 그건 내 소관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유도 없이 미친 짓은 잘도 하는 놈이니 여기서 '그냥.'이라고 한 마디로 대단한다 해도 어쩔 도리야 없겠지만 말이라도
한 마디 더 시키면 그 사이에 치고나갈 기회가 아주 기적적인 확률로나마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레이의 귀에는 정태의의 목소리가 닿지도 않는지,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되물었다.
"전쟁 당시에 작전에 투입되어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못하고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군인에게 밥과 여자를내밀었단 말이지. 통계적으로 그들은 뭘 택했을까……요."
장난스럽데 덧붙이는 한 마디와 함께, 웃는 숨결이 얼굴 위로 바싹 내려왔다.
설마, 하고 생각했다.
사흘간 앓아누워 거동도 못했다. 먹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도 겨우 의식만 차렸을 뿐 고열로 끓어오르는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손목을 움켜쥔 손이, 목덜미에 맞닿은 이마가,
가슴에 불어내는 숨결이, 탈 듯이 뜨거웠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가늠하기 위해 손가락부터 손목, 팔을 차례로 천천히 움직여보아야 했을
정도니 몸을 자유로이 가누는 것도 힘들어야 했다.
정태의는 손목을 움켜쥔 우악스런 손을 몇 번이나 흔들어 보았지만 꿈쩍도 않았다. 손아귀에 온몸의 힘을 다 몰아넣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몸 위를
짓누른그의 몸도 손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레이! ―――야!"
정태의는 초조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웃음만이 돌아왔다. 귓가에서 움직이던 입술이 뺨을 타고 기어와
입술에 닿는가 싶더니, 사나운 송곳니가 입술을 깨문다.
"악! ―――어이,
아프다고! 젠장, 갑자기 왜 또 발정이 나고
난리야, 피죽도 못 얻어먹은 놈이 무슨 힘이 이렇게……, 어이,
나은 다음에 해라, 나은 다음에!"
이 빌어먹을 놈이 또 땅따먹기를 해먹을 참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몇 차례나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일레이는 귀라도
먹은 사람마냥 아무런 반응도없이 가끔 피식 웃기나 하면서 정태의의 몸 위를 훑어내렸다. 다른 때와는 다르다.
다른 때에는 여유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초조한 기색이 비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때에는 웃어가면서, 가끔 농담도 해가면서, 이야기도 해가면서,
그렇게 정태의의 몸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묵묵부답, 홀로 느긋하게 정태의를 쓰다듬었다. 마치 정태의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듣겠다는 듯.
"이봐, 나은
다음에 하라니까. 기운도 하나 없이 죽어가던 놈이 지금도 열이 펄펄 끓으면서 뭐 하는 짓이야.
열내리고 기운 찾고 나서 해. 내가 언제 거절한 적 있었냐 ……."
말하고 나니 좀 한심했지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일레이는 몇 번인가가끔 생각난 듯이 정태의 위에 올라앉았었지만 정태의는 진심으로 거부한 적은 없었다. 사실 거부해봐야 그 거부가 저놈에게 먹히기나 할까 싶은 마음도 컸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지분거리다 보면 정태의도 절로 그런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이렇게 보면 나도 상당히 정조 관념이 희박하구나,
하고 내심 짧게 한탄하면서 정태의는 다시 한 번 움켜잡힌 손을 흔들어 보았다.
역시나 꿈쩍도 않았다.
가슴속이 약간 서늘해졌다. 위기감이 느껴진 건 아니었다. 이러다 여느 때처럼 적당히 문지르고 싸고 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니, 이미 몇 번이나 해온 땅따먹기를 한 번 더 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괴물 같은 힘이라니. 며칠이나 혼수 상태로있다가 갓 일어난 사람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심지어 지금도 고열로 앓고 있는 상태라고는,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태의의 두 손을 그러쥐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손 하나였다. 정태의 자신도 남보다월등하다고는
못해도 표준적인 성인 남자만큼의 힘은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손 하나,그 힘을 못 당해내다니.
미친놈이 힘이 세다더니, 역시 그 말이 맞았구나. 옛말에 그런 것 없다니까.
"어이, 일레ㅡ…."
"거절하지 않겠다고?"
처음으로 일레이가 정태의에게 대답을 했다. 대답이라기보단 확인이나 물음이라고 하는 게 옳았겠지만, 희미한 비웃음이
섞인 그 물음에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 네놈이 덤벼들었을 때 내가 피한 적이 있긴
했냐.없었잖아."
"흐음. 과연
거절하지 않을까. …ㅡ이래도?"
귓가에서 그가 웃었다. 그의 손이 정태의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이미 엉덩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을 뿐이었던 바지가
허벅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오히려다리가 바지에 묶인 겪이되어 더욱 움직이기 힘들다.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공기에 맞닿아 서늘해야 했을 테지만 도리어 더욱 뜨거워졌다. 바로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일레이의
체온이 똑바로 닿아온 탓이다. 어느 결에 벗었는지, 일레이의 하반신이
맨 살갗 그대로 정태의의 몸을 눌렀다. 다른 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건기분 탓만은 아니다.
몸 전체가 불덩이 같았다. 정태의의 가슴께를 갑자기 덥썩 깨물더니 혀로 세게 핥아올리는
그 입도, 정태의의 손을 움켜쥔 손도, 무릎 뒤를 잡아밀며 허벅지를
크게 벌리는 다른 손도, 그리고 그 사이를 문지르는 성기도.
정말로 화상을 입을 것 같다. 정태의는 더럭 겁이 났다.정말로 화상을 입을 리는 없겠지만 이 정도로 뜨겁다면…….
"야. 진짜로,
나중에 하자. 너 지금 네가 얼마나 뜨거운지 모르지? 너 이 새끼, 제정신 아냐……. 그렇잖아도 몸이 불덩이
같은 녀석이, 이러다가 열이 더 오르면 몸완전 망가지는 거 몰라?"
"하하아, 나 때문에 그만하자……?"
"나중에라도 안 내친다고 그랬잖아.
이 미친놈아, 몸 좀생각해라!"
정태의는 더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욕설을 얻어먹고도 일레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ㅡ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ㅡ나직이 소리내어 웃었다.
다리 사이에 끄트머리를 문질러대던 살덩이 역시 더욱 고개를든다.
"열이 약간 날 뿐이지 내 정신은 아주 말짱하거든.
자는동안 무슨 꿈을 꾸었는가까지 고스란히 다 기억날 정도로 아주 생생하단 말이야."
일레이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꿈……? 꿈자리가 사납다고 지금 나한테 이 짓이냐."
"음―――그런 셈이지.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지만, 흥이 돋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래가 당겨서 아플 지경이란 말이지. ……그런데 역시 손 하나가묶여 있으니 불편하군."
일레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정태의의 손목을 옭아매었던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 문득 선뜻 몸을 일으킨 그는 옆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한쪽 끝을 입에 물더니 어렵잖게 지익 찢어낸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눈을 크게 뜬 채 쳐다보고만 있는 정태의의 눈앞에서, 이불의 천을 기다랗게 찢어낸 일레이는 어렵잖게 한 손과 입으로만 몇 겹으로 묶어내더니 그걸로 정태의의 손을
묶기 시작했다.
여태껏도 손이 부자유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잡혀 있는것과 묶여 있는 것은 느낌이 판이하게
달라, 정태의는낯빛을 굳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부으며 손을 휘둘렀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어렵잖게 손목을 묶어 침대머리에 고정시킨 일레이가 정태의의 가슴 위에올라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을 때,
정태의는 가슴속에 자욱하게 번져가는 불길한 예감에 창백해졌다. 위험하다.
좋지 않아. 버둥거리던 정태의의 손에 긁혀 핏기가 배어나온 손가락을 낼름 핥으며
진하게 웃음 짓는 일레이를 본 순간 그 느낌이 현실로 확 다가왔다.
게다가 정태의의 가슴을 올라타고 앉아 그의 손목을 묶는 동안, 필연적으로 일레이의 사타구니가 쇄골 근처에바싹 다가왔다. 턱 아래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흔들리는성기가 싫어도 시야에 들어왔다.
소름이 끼쳤다. 역시 보는 것도
두려울 만큼 굵었다. 검붉은 물건을 길게 뻗고 있는 그 물건은 조금만 허리를앞으로 내밀면 정태의의 턱을 찔러댈
것 같았다.
손 끝에 맺힌 피를 핥아낸 일레이는, 정태의가 갑자기 왜 불쾌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지 그 까닭을 짐작한 것 같았다. 갑자기 웃는다.
"그렇게 싫은 얼굴을 하면 곤란한데.
오늘 너는 이거랑아……주 친해져야 할 판이거든."
그는 자신의 성기를 가볍게 움켜쥐더니 정태의의 가슴에서 허리를 들었다. 턱 아래에 있던 물건이 코 앞으로다가왔다. 한 치만 더 다가와도 얼굴에
닿을 것만 같은그 살덩이가 가까이서보니 더욱 흉측하다.
그러나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고 일레이를 쳐다보았다.지금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해석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뭐……, 친해지긴 뭘 친해져, 그 따위 흉물이랑!"
"흉물이라. 너무한데. 그래도 여태 네 물건이랑 머리 맞대고 서로 비벼대면서 잘 놀았던 녀석인데,
그런 말을하면 가엾잖아. 게다가 그 흉물을 위아래로 사이좋게 먹어치울 네 입장도
생각해야지. 응?"
"이ㅡ…!"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욕설을 잔뜩 뱉어내려고 했다.그러나 정태의는 벌리던 입을 다시 다물어야 했다.
입을 열자마자 일레이가 자신의 성기를 밀어넣으려 한 탓이다. 입술 안쪽으로 물건이
스치자마자 정태의는 경악해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이지만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입 안으로 귀두의 끝부분이 살짝 들어왔던 느낌이 남아, 정태의는 고개를 돌린 채 침대 아래로
침을 뱉었다. 그 귓가에 태연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입을
크게 벌려야지. 그래서야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있는 대로 다
벌려도 반이나 들어갈까 싶은데."
"미친 새끼ㅡ…! 할 짓이 없어서 이 따위 짓이나 하고 있냐, 이 미친 놈아! 그래, 넣어라, 어디 넣어 봐! 물어뜯어도 안 잘리나 한 번 보자, 네놈의 그 빌어먹을 좆이랑내 이빨이랑, 어느쪽지 더 질긴지 보고 싶으면 넣어보라고!"
정태의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손만 멀쩡했더라면길길이 날뛰었을 거다. 무릎을 휘둘러올려 저 미친놈의등짝이라도
찍어내려 했지만 손을 뒤로 돌려 아랫배를누르는 묵직한 손에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정태이. 제대로 빨아주지 않으면 아픈 꼴을 보는 건 너야.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윤활제로 쓸 만한 게
아무것도 없거든. ―――아, 그래, 네가 좋아하는 맥주라면 몇 캔 있지만, 그건 윤활제로는 역부족이지."
"윤ㅡ…."
미쳤다. 이놈이 열로 앓고
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원래도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미친 놈은 아니었는데,
이건 제정신이 아니다.
말을 잃고 뚫어져라 일레이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아쉬운 듯 엄지로 정태의의 입술을
덧그렸다. 흠칫 정신이 들어 그 손가락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살짝 손을 피해버린다.
"아픈 꼴이고 뭐고, 나한테 그 흉측한 거 들이댈 생각 마라. 난 진짜로 물어뜯을 테니까. 평소 하던 대로 땅따먹기나 하고 치울 것이지 갑자기 왜 이 지랄이야, 이 미친놈아!"
정태의가 악을 쓰자 일레이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증스럽게 귓속을 파고든다.
"태이, 머리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 여태 내 옆에 있으면서 왜 내 성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야.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는 더 해볼 맛이 난단 말이야."
"이 미친놈……! 물어뜯겨도 그 말이 나오나 어디 보자!"
"뭐 좋아. 그렇다면 순서를 좀 바꾸어야겠군. 말해두는데 태이, 이건
네가 초래한 일이다. 빨라고 할 때 순순히 빨았으면 덜 고생했을 텐데. 후회하지 마."
"뭐ㅡ…!"
일레이는 정태의의 가슴 위에서 비켰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성기를천천히 주무르며 침대 아래쪽으로 돌아가는 일레이의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롭고 냉담하다. 그것이 오히려
더욱 섬뜩했다.
그의 손 안에서 끄덕거리는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그 물건은 이미발기할 만큼 발기해 있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욱 바싹 올라선 그 물건은, 정태의의 기억 속에 있던 것보다도 현실 속에서
더욱 컸다.
말도 안 된다. 저런 게 인간의
몸에 붙어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저놈은 인간이 아니었지.
질려서 굳어진 정태의의 얼굴을 흘끔 본 일레이가 픽 웃었다. 그렇게 웃는 얼굴 그대로, 그는 천천히 정태의의 위로 올라왔다.
그 결에 그의 성기 끝이 허벅지에 스쳤다. 그 순간, 정태의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이 미친놈이, 농담이 아니었다.
문지르고 끝낼 셈도 아니다.
"하, 하지ㅡ…!"
"늦었어."
정태의가 얼어붙은 혀끝으로 겨우 내뱉은 말을 일레이는 간단히 잘랐다. 그리고 정태의의 허벅지를 크게 벌렸다. 무릎 뒤를 쥔 손은 마치 천근만근이나
되는 바위같다.
"아하. 과연."
일레이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시선이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향하고 있었다. 퍼렇게 질려서 낯빛이죽은
정태의의 얼굴과 별 다름없는 상태일 사타구니를샅샅이 핥듯이 쳐다보고 있던 그는 문득 고개를 떨어뜨렸다. 맹수
같은 송곳니가 민감한 살 끝에 닿는 걸 느낀순간, 정태의는 숨을 들이켰다. 그대로 물어찢는가 싶었다. 뜨거운 점막으로 둘러싸였다. 정태의는 사타구니위로 뜨거운 물이라도 부은 듯한 감각에 움찔 몸을 움츠렸다.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다리 사이에서 일레이가 정태의의 성기를 낼름 핥아올리더니 그대로빨아 머금었다.
"윽ㅡ…."
정태의는 몸을 움츠렸다. 델 것 같았다. 열기를 품은 입안이 너무도 뜨거워 괴로울 지경이다. 성기를 세차게 빨아대는 그 힘에, 자칫하면 물건이 뽑힐 것 같다. 그 아플 정도로 강렬한 자극에 숨이 막혔다.
"악, 하,
ㅡ…으ㅡ…!!!"
발 끝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움찔, 움찔, 발가락이 그의의지와는 상관없이 꿈틀거린다.
이렇게 거센 자극은 처음이었다. 힘을 조절하지도 않고,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젓을 빨 듯이 마구 먹어치운다. 쾌감조차도 없었다. 쾌감으로 느끼기도 힘든, 그저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강렬한 자극'일 뿐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자극에 물건이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신기할 지경이었다. 쾌감으로 와 닿지도 않는 자극에도 성기는 일어서고
있었다. 고통과도 닮은 그 감각 탓에 정태의는 얼마 동안은 또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성기에서 조금 아래, 오목하게 움츠러든 입구를 몇번 덧그리며 문지르는 듯하던 엄지가 어느 틈에
뿌리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몸속에서 꾸물거리면서 안쪽을 넓히며 파고드는 그 섬뜩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일레이는 정태의의 성기를 잘근거리면서 세차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 하지
마, 그만, 아, 하악,
ㅡ…."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신을 차리려 해도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거센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군. 사내놈 물건을 빨아본 건처음이라서, 좀더 불쾌한 맛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거라면 매일 밤마다 빨아대도 괜찮겠어. ……이런, 태이.
벌써부터 그렇게 허덕거리면 안 되는데. 이제부터 조금 아플 거거든.
그렇다고 죽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할 건 없고. 자아ㅡ…."
일레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겨우 그세찬 감각이 사라졌다. 아직도 저릿저릿한 감각 속에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자신의 성기가 아련한 시야 끝에 잡혔다. 미친놈. 미친 새끼.
흐린 머릿속에 그 말만 메아리쳤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허덕이며 정태의는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나 그나마의 사고는 다시 하얗게 사라지고 말았다.일레이가 정태의의 몸 위로 엎드렸다. 정태의의 두 무릎을 붙잡고 위로 밀어올린
일레이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타구니를 보며 낼름 입술을 핥았다. 그의
숨결이 들떠오르는가 했다.
"아주 절경이군. 이쪽 취미가 있는 놈은 그냥 보기만 해도 싸겠어. ……이런. 나도 위험한걸. 안 되지, 안 돼. 태이, 숨 들이쉬어."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낮고 부드러웠지만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그 다음 순간, 정태의는 숨을 멈추었다. 호흡이 턱까지 차올라 머릿속이 하얘지는데도 숨을 쉴 수가없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억눌린 신음만 간간이 나왔다. 그조차 귀에 들리지 않을 만치 작다.
정태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낯선 것이 있었다. 무엇이든 나간 적은 있을지언정 들인 적은 없는 좁은 구멍 속으로, 일레이의
성기가 주름을 벌리며 밀려들었다. 처음엔 귀두의 반도 채 들어오지 않았다. 입구는 주름하나하나까지 다 벌어진 게 아닌가 싶도록 벌어졌지만귀두 아래가 걸렸다.
"일, 일레,
이, 살, 살려ㅡ…."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고 말 거라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고통보다도 먼저 공포에 질려,
정태의는 눈을 흡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일레이는 문득 입매를 찌푸렸다.
열기에 들뜬 얼굴로 허리를밀어붙이던 그는 낮게 혀를 차더니, 한숨을 쉬며 몸을굽혔다.
정말로 죽일 셈이었다. 한껏 입을 벌려도 숨을 쉴 수가없는데, 그는 정태의의 입에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혀를 들이민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아. 괜찮으니까. 자, 숨. 들이쉬랬잖아. ㅡ…이제 내쉬어 봐. 천천히, 내 호흡에 맞춰서."
무서울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허리 아래에서 사타구니를 난도질하는 그 흉측한
물건은 상상도 가지 않도록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다.분명 일레이의 목소리인 그 소리는, 절대로 이 악마 같은 남자가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그 환청 같은 목소리에 매달렸다. 입술을 핥으며 혀를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그 입이 불어넣는 숨결에 호흡을 맞추었다. 인공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숨을 불어낼 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혀를 빨아당길 때 숨을 내쉬었다. 몇 차례나 그렇게 하는 사이에 호흡은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아래를 반 너머 파고든 물건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아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정태의는 숨이 돌아오자 다음엔 그 위화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츠렸다. 입구에서 그 뜨거운 물건이 밀려나갔다. 하, 일레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물에 빠진 놈을 건져줬으면 보따리 정도는 사례로
바쳐야 하지 않겠어, 응?"
상냥한 목소리는 이미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 냉혹한 목소리만큼이나 거침없는 손길이 정태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벌려 입구를 넓히더니,못을 박아넣기라도 하듯 사정없이 허리를 추어올렸다.
"ㅡ…!!!"
벌어진 입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투둑, 살점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음이 틀린 것 같다. 탄성과도 같은 그 짧은 신음은 저 찢어죽일 놈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끝……내주는군. 하아, ㅡ…아주…… 죽이……는데."
드문드문 내뱉는 말과 함께 쏟아지는 광기 어린 시선.아득하게 흐려져 오는 뇌리에도 그 시선은 선명하게 들러붙었다.
"죽……인……다……."
간신히 그 말만 했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일레이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몹시
유쾌한 듯, 상쾌하게, 커다랗게,그는 웃었다.
"그래, 그럼
얼마나 죽여주는지 볼까. ……이런, 벌써 울면 어떡하나."
그의 손이 다가와 정태의의 눈가를 훔쳤다. 그제야 정태의는 자신의 눈가가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리적으로 배어나온
눈물이 그의 손끝을 적시는 걸 보자 미칠 듯한 분이 솟았다.
"이 씹새끼야, 빼!! 당장 빼란 말이다, 이 미친 놈아!!
당장 못 나가?!"
정태의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날뛰었다. 묶여 있는 손이 이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몸을 마구 뒤흔들며날뛰었지만,
일레이가 장딴지를 움켜쥐고 가로막자 그움직임은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 원하는
대로 나가주지. ……하. 너무 세게 물고놓아주지 않아서 빠지지도 않잖아.
아주 달라붙는군."
일레이는 몇 번인가 허리를 흔드는 시늉을 하더니 낮게웃었다. 그 웃음에 열기가 어렸다. 몇 번 가볍게 허리를뒤로 빼내자 몸속을 파고들어
살점에 붙어 버린 것 같던 살덩이가 뻑뻑하게 빠져나왔다. 정태의는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겨우 귀두만 남기고 바깥으로 빠져나간 성기는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허리를 잔뜩 굽혀 불편한 자세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눈 앞에 두고, 정태의는 눈을
감고 말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정경이 비친 탓이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벌어져 있는 자신의 몸에 자칫하면 얇은 살갗을 찢어먹을 듯이 빡빡하고 아슬아슬하게 채워넣고 있는 그흉기를,
누가 보고 싶을까.
"어서 마저 빼, 이 새끼야……."
이미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빠져, 정태의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나 한심하고 분해서 울고 싶었다.
"사흘 동안 자면서 꿈을 꿨거든."
그러나 일레이는 빼낼 기미도 보이지 않고 엉뚱한 말을시작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와 정태의의 몸이 겹쳐진 부분을 가만히 덧그리며 문질렀다. 정태의가 흠칫몸을 움츠린다.
"꼬맹이랑 네가 새롱거리면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그것참 즐거워 보이더란 말이야. 별로 맛있어 보이진 않는데 그 꼬맹이가 네 다리
사이에서 어찌나 좋아하면서 허리를 흔들어대는지, 얼마나 맛있길래 그런지 한 번 빼앗아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란 말이지."
"뭐……."
"일어났는데 눈 앞에 네가 보이는데,
안 따먹을 재간이있어야지. 어디 한 번 맛이나 보자 싶은 마음이 생기는건 어쩔 수
없잖아?"
"……미친 놈."
정태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개꿈을 꾸고 와서 그 화풀이를 자신에게 하는지 몰랐다. 이런 미친놈이
그래도 죽을까 봐 마음 졸였던 스스로가 바보 같다.
"그런데 말이지, 곤란하게도……."
문득 일레이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찬 그는 지그시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지금 한 번 침을 발라보고 나니,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아주 끝내주게 맛있을 것 같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였다. 끄트머리만 아슬아슬하게걸려 있던 흉기가, 순식간에 다시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퍼억, 벌어질 대로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그의 아랫배가 부딪치는 살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자신의 비명 소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들리는지,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퍽, 퍽, 마치 입구를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만 같은 충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입구의 감각이 점차 사라졌다. 그 대신 배가 아팠다. 내장을 뚫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뱃속을 가득 채우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넓혀대고 있었다.
아마도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기절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일 수도 있고, 혹은 제법 오래 지났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태의는 목놓아 울고 있었다.
피냄새가 날 정도로 터져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으로 소리내어 울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버둥거린다고는 해도 힘이 빠져 간간이 바르작거리기만 하는 다리 사이에는 여전히 일레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흉기가 몸속에 깊숙이 꽂히더니 잠시
그 안에 머물렀다. 몸 속에서 팍 터지며 불처럼 뜨거운 물이 뱃속을 뜨끈하게 채웠다. 몸의 기억력이란 놀라운 것이라, 정태의는 조금 전 자신이 제법 오래 넋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미친놈이 몸 속에 사정하는 건 이게 처음이아니었다. 정태의는
울었다. 끔찍하게 아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워서 목놓아 통곡하듯이 울었다.
이 미친놈아, 이 새끼 죽여버리고
만다, 이 금수보다 못한 놈,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주르륵, 아래가 선뜩했다. 몸 밖으로 일레이가성기를 빼내었다. 그렇게나 싸발기고도 아직 다 안 시들었잖아,
정태의는 또 울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순서대로 가는 게 좋다고."
일레이가 속삭였다. 이마 위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어쩐지 비현실적이라 정태의는 눈물이 그렁한눈으로 멍하니 그를 노려보았다. 일레이는 곤란한 듯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면 안 되지.
네 몸 생각도 좀 해야지, 태이. 응?"
노려보는 눈초리가 맘에 안 들어서 목을 꺾어버리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좋을 대로 해라.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물러설 게 뭐 있다고.
정태의는 축 늘어져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입을 모양만 내어 움직였다.
죽일 놈.
그 모양을 일레이는 읽어낸 모양이었다. 잠시 소리내어웃더니, 정태의의 몸 위에 엎드렸다. 반사적으로 움칫몸을 움츠리는 정태의의 뺨을 덥썩 깨물면서 그가 말했다.
"내가 원래는 아래구멍이 너덜해지도록 원없이 박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네 입에도 반드시 한 번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정태의는 몸을 굳혔다.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굳었다. 그렇게 하기만 해 봐라. 남은 힘을 다 짜내어서라도 그 물건 반드시 물어서 잘라내어버리고 말테다. 그 시퍼런 기색을
알아채고 일레이가 또 웃었다. 손을 아래로 내려, 조금 전까지 그의
물건을 한참 동안삼키고 있느라 벌겋게 부어올라 약간 벌어져 있는 입구를 쓰다듬었다. 움찔, 정태의의 몸이 튀어올랐다.
"여차하면 손가락 정도야 이빨 자국 좀 날 각오하고,
네 입을 벌려놓고 그 안에 담가줄까 싶기도 했는데……. 이런,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도 측은지심이란 게 있는인간이거든."
몸에 기운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크게 소리쳐 매도하며 비웃었을 텐데, 그럴 기운도 없었다. 정태의는 눈물만 줄줄 흘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뭐 오늘만 날도 아니고……,
아무래도 몸이 정상적이지 않으니 아까부터 영 기운도 없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더란 말이야. 게다가 입도 좋겠지만 아래쪽도 아주 감촉이 좋았고. 그러니 오늘은 입에 넣는 건 봐 주도록
하지."
일레이가 정태의의 뺨을 핥았다. 선심이라도 베푼다는듯한 그 어조에 부아가 치밀어 이 미친놈의 죽상이라도갈겨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손목은 침대
머리맡에 묶여있었다. 손목의 살갗이 벗겨졌는지 약간 스치기만 해도따가웠다. 일레이는 계속 정태의의 뺨이며 턱, 입술 따위를 할짝였다. 양지가에서 기분 좋아진 고양이가 한 마리 옆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치고는 너무 끔찍하게
징그러운 고양이였지만.
이 새끼 이 손목만 풀리고 기운만 좀 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당장 죽여버리고 말아야지, 정태의는 깜빡깜빡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줄줄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아직도 미처 다
시들지 않고 있던 일레이의 물건이 슬금슬금 다시 정태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흐려지던 의식이 다시 바짝
긴장했다. 이미 감각도 없는 사타구니를 문지르면서, 그의 성기가 다시
밀려들었다.
"악……."
수십 수백 차례 드나든 탓에 이미 제대로 오므라들지도않을 정도로 벌어져 있는데도, 식은땀이 솟을 만큼 아팠다. 정태의의 몸이 굳어지자 이 미친놈은 괜찮아,
괜찮아, 라고 어린애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입을맞추었다.
미친 새끼야, 네가 깔려 봐라,
괜찮은지!
정태의는 이 순간 아픔보다는 분노로 기절할 것 같아 시퍼렇게 그를 노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먹잇감을배불리 먹은 야수처럼 느긋하게 웃으며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 속으로 적당히 자신의 성기를 채워넣자, 한숨을 쉬며 다시 정태의의 위로 엎드렸다.
그 순간 열기가 후끈 살갗에 와 닿았다.
"쯧. 앓아본
적이 없으니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있어야지.이거야 기운이 없어서 원……."
기운 두 번만 없었다간 난 백 번은 죽었을 거다, 정태의야말로 기운이 다 빠져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기운 없으면 아래의
빌어먹을 그 물건이나 빼라, 라고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말하려고 하는데, 몸 위에 엎드린 일레이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 야,
무거워. 자지 말고 비켜……."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 일레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 미친놈아, 라고 다시 한 번 불러봤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않았다. 뜨겁고 거친 숨소리와 맞닿은 살갗이 익어버릴만한 고열이 느껴졌을 뿐이다.
몇 번이나 그를 더 불러보고 욕도 던져보던 정태의는 잠시 뒤 깨달았다. 일레이는 잠든 게 아니었다. 다시 기절해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순간 정태의는 머리가아득해졌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세포 하나하나가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을 반죽음시켜놓고 오히려 제가 기절하는 법이 어딨어.
분통이 터져서 기절한다는 것을, 정태의는 그날 처음으로 경험했다.
* * *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처음 의식 위로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정태의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인가 깜빡였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을까, 아니면 이대로 좀더 깜빡여 볼까 멍하니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하는 것도 네 번째였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주위가 새카맸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눈을 떴던 기억도 희미하다.
두 번째로눈을 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때는 두어 번눈을 깜빡이긴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다시 의식을 잃었다.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그래도 시선을 돌려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켜졌는지 협탁 위의 스탠드가 가장어두운 밝기로 불빛을 비추고 있어 벽시계가 어렴풋이보였다. 새벽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그 시계를보다가
다시 어느결인지도 모르게 까무룩하게 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네 번째, 정태의는 천근처럼 무거워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면서 다시 시계를 보았다. 6시를
약간 넘겼다. 세 번째로 눈을 떴던 때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난 듯한 감각인데 실제로는 한 시간 반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호되게 앓을 때면 그랬던 것 같다. 아플
때는 유난히 밤이 길어, 한참 동안 잠들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었다.
좀더 잘까. 그런데 그 전에
생각해야만 할 일이 있는 것같은데.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혼곤하게 멀어지려는 의식을 그대로 놔두고 싶었지만 약간이나마 정신을 되찾은 머리는 역시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의식은 잠깐 떨어졌다가 돌아왔는지, 다시 눈을 뜨자 십여
분이 또 지나 있었다. 이번엔조금 전보다는 그래도 눈꺼풀이 좀 가벼워졌다.
가만있자. 뭔가 생각을 해봐야
하긴 하는데, 그게 뭐더라. 한 번, 두 번, 천천히 눈을 깜빡였지만 머리가 멍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처음 든생각이 익숙한 와중의 위화감이었다.
이곳은 정태의의 방이 아니었다. 낯설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때마다 익숙하게 보았던 자신의 방이 아니다. 이곳은……아, 그래. 일레이의 방이다.
정태의는 한 치쯤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반대쪽으로도 시선을 돌렸지만 그쪽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 안에는 자신만 있는 것 같았다. 왜 주인도 없는 방에 나 홀로 누워 있을까, 정태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 들었을 뿐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에서 사고 기능이반쯤 멎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일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의는 나른하니 힘이 잘 안 들어가는 몸을 지탱하려고 팔로 바닥을짚었다. 아니, 짚으려고 했다. 그러나 팔을 움직인 순간어깨부터
상완, 팔꿈치, 하다못해 손목까지 욱신거려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야야……."
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조차 제대로흘러나오지는 못했다. 목에서 바람 소리 같은 쉰소리가새어나왔다.
입을 열자마자 맹렬한 갈증과 목구멍이 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입술도 입 안도
바싹 말라 있었다. 이제 보니 목이나 팔뿐만이 아니다. 허리며 배,
다리, 한 번 아파본 기억도 없는 엉덩이 근육까지 근육통이 생긴 듯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정태의는 잠깐 당황했다. 움직이기가 겁날 정도로 지독한 이 근육통이라니, 근육만 아니라 뼈마디까지 쑤시는이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린 채 아야야, 하고 쉰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어쨌든 일어나 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온통 삐걱거리며 아파죽겠다고 난리는 피우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다시 스르륵 눕고 말았다. 몸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다리 사이에 감각이 없었더. 허벅지 안쪽의 살이 쓸리는 느낌이, 꼭 자기 살이 아닌 것 같았다. 마취되어 있는 살갗을 쓰다듬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안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아픔이란 인식을하는 순간 더 깊이 체감되는 법이라 그런지, 아프다고 생각하자마자
다리 안쪽이 끔찍하게 아팠다. 불로 지진것 같다. 그래,
딱 화상 입었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눈물이 찔끔 새어나오는 그 고통 속에서 기억과 사고를 되찾았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이 망할 새끼.
기억이 되살아나마자마 울분이 치솟았다. 가슴속을 억하게 치고 올라오는 분노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이걸 진짜 죽여버릴까.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어서 목숨 걸고 이걸 정말로 죽여버릴까. 아무리 그래도 내 목숨 하나
바치면 저놈을 설령 죽이진 못하더라도 그 몹쓸 물건을 쥐어뽑아버릴 수는 있지 않을까.
정태의는 울컥울컥 치미는 가슴 때문에 호흡도 자유롭지 못해 헐떡거리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목을 옭아매었던 줄을 끊어내어 보려고 어찌나 긁어내렸는지 손톱마다 피가 맺혀 말라 있었다. 손목에 줄 모양으로 멍이 들다 못해 그 자리의 살갗이 벗겨져 핏기가 배어 나와 있다. 그 흔적을
보자 다시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 어디 갔어……."
지난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던지, 몇 마디 중얼거리니쇳소리와 함께 피맛이 아련히 입안에 퍼졌다. 목에도
핏기가 배어나온 게 틀림없었다.
"이 망할 새끼 어디 갔어……!"
지금 눈앞에 있다면 힘의 차이고 그놈의 개 같은 성격이고 아랑곳 않고 그냥 달려들
것 같았다.
"이 망할 새끼, 이걸 찾아내서 그냥 요절을……!"
머리 한쪽에는 이성이 살아 있는데 나머지 한쪽에는 이성이 아예 날아간 것 같았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온몸이 아파 죽을 것만 같은 이런 상황에 그가 일레이를 요절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성은 그런계산을 하길 거부했다. 감정이 복받쳤다.
정태의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하다못해 어찌나 울었는지 눈까지 퉁퉁 부어있다.
그래도 그렇게 울었는데 눈물이 말라붙어 얼굴이 따갑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정태의는 힘없는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그러다가 어라, 하고 멈칫했다.
뺨이 말끔했다. 틀림없이 엉망진창으로
끈적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퉁퉁 부어 있는 것 말고는 보송보송하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움찔, 고작해야몇 센티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몸이 망가지는 것처럼 찌릿한
격통이 등줄기를 덮쳤다. 다시 원한이 욕설이 되어 입에서 새어나왔다. 하지만 다리도 그렇다. 질척거리거나 불쾌한 촉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이상하다. 온몸이 눈뜨고 못 볼 꼴이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말끔한 느낌이지.
끈적하고 질척거려서 욕이 절로 나와야 할 텐데. 설마 이상황이 모두 다 꿈…………일
리는 없지.
고개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욱신거리는 고통을 다시느끼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또 있다. 이 짐승 같은 미친놈은 어딜간 걸까.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그 짓을 했으니 다시 열을 올리며 기절해 있어야 하는데 이
침대는 물론 방 안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설마 그 결에 죽어버린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어디론가 치워버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몸이 고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자꾸 헛생각만 하는구나.
정태의는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자신의 몸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팔을 움직이기만 해도 아팠다. 몸이 평소보다 뜨끈뜨끈한 걸보니 열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도 앓아눕지 않으면 나도 인간이 아니다.
손 끝으로 몸을 천천히 훑어내리자, 손이 닿는 곳마다 살갗이 아팠다. 호되게 몸살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아프다.
예민한 손 끝에는 잇자욱으로 부어오른 살갗이며 물어뜯긴 가슴 따위가 걸려 따끔따끔했다. 갑자기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 손이 닿는 곳마다 일레이의 손이며입술이 닿았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몸에 그손이 닿지 않은 곳이 있기나 할까.
"……젠장……."
기운을 차리고 나면 먼저 이 몸부터 피부가 벗겨지도록박박 문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쓸어내린 손은 이윽고 사타구니에 닿았다. 움찔, 절로 손이 움츠려들었다. 지난밤의 그 끔찍했던 고통이 생각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았다.
조심조심 손가락으로 더듬어갔다. 화끈거리며 부어오른 국부에 손이 닿았다.
따가워서 몸이퍼뜩 튀었다. 손이 닿기 무섭게 화끈화끈 불을 지를 듯 상처가 아파,더 건드려 볼 엄두도 못 내고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역시나 손은 말라 있었다.
오물이나 점액 따위도 묻지 않았다. 정태의는 지그시 자신의 손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문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렸다. 삐걱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고개만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일레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분명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정신 나간 체력을 자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이 펄펄
끓었었는데 지금은 언제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걸어들어왔다.
"아, 일어났군.
앞으로 몇 시간은 더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
평소와 전혀 다름없었다. 서늘하고 무심한 얼굴에 희미하게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띤 그 얼굴은 여느 때의일레이 그대로였다.
"너……."
정태의는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저 뻔뻔한 얼굴을 보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덕분에 나았어.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도 가뿐하고 열도 평열로 내려왔더군. 평소보단 힘도 좀 없어 하루이틀 정도는
죽만 먹어야겠지만."
일레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뭐든 내던지려고 손에 잡히는 대로 베개를 움켜쥔정태의가 손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위ㅡ정확히 정태의가 움켜쥔 베개 위에내려놓았다.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식당에서 적당히 몇 가지
들고 왔어. 플레인 요거트랑 치즈 야채 샐러드 좋아했었지? 그건 두
개씩."
"……."
벌컥 화를 내려던 정태의는 입을 연 채로 얼어붙어 뚫어져라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일레이는 침대가에 앉아포크를 정태의 앞으로 돌려주다가 왜 그러냐는 듯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몹시 가증스럽다.
"너."
정태의는 나직이 말문을 뗐다. 부들부들 떨리려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그 허여멀건한 얼굴을 서슬 퍼렇게 노려보았다. 언제
그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픽 웃었다.
입가에 조금 더 진하게 웃음을 피워올리며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고갯짓한다.
"왜."
그 뻔뻔한 면상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이제 열 다 내려서 몸은 괜찮다고?"
대단히 사나운 얼굴을 하고 더없이 못마땅한 어조로 시비 걸듯 묻자, 일레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에
표정을 지운 그는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럼 여기에 열이 펄펄 끓어서 몸 안 괜찮았던
놈이 너말고 누가 있어."
현재는 정태의 자신도 몸이 안 괜찮았지만 적어도 열이펄펄 끓지는 않는다. 더더욱 사납고 못마땅하게 말하자일레이는 조금 더 침묵을 지키며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고민이라도 생긴 듯 한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곤란한 상황을 고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잠시 그를 지켜보던 정태의는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울컥하고 말았다. 손가락 사이로
나직이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은 탓이다. 고민이 아니라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야, 이…ㅡ!!"
정태의가 벌컥 고함을 지르려고 하자 일레이는 여전히웃음띤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비웃듯이 말했다.
"왜. 내가
여전히 열이 끓고 몸이 불편하면, 네가 그 몸을 이끌고 간호라도 해 주려고?"
"내가 정신나간 등신이냐! 나를 강간한 놈을 죽였으면죽였지 간호를 왜 해 줘!"
"그런데 왜 첫마디로 그 따위 거나 물어 봐."
이놈은 도대체 머리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일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계속 웃었다. 저 남자에게
머리 구조 운운하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절절하게 느끼면서,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머리에 뭘 넣고 살길래 강간 따위를 하냐고! 죽일 셈이냐?
죽일 셈이었어?! 내가 정말 어제 인생 종치는 줄 알았다, 알아?!"
"아―――미안. 열 때문에 몽롱해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종족 보존의 본능이 발동된다고. 내 씨를 남겨야한다는 그런 류의
본능이, 제정신이 아닌 가운데서도 일어났나 보지. 내가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야."
일레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좀 심각한 상태이긴 했지, 며칠이나 혼수상태였던데다가
열도 안 내려가서 정상적은 상태가 아니었잖아,라고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흠칫 정신을 차리곤 손 닿는 데에있던 쿠션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 빌어먹을 씨를 똑같은 남자한테 남기는 게 무슨
얼어죽을 종족 보존의 본능이야!"
"하하, 하긴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면 아플 텐데. 게다가 겉을 닦는다고 닦아주긴
했지만 여전히 속에는 남아 있을텐데, 흘러나오지 않아?"
손등으로 가볍게 쿠션을 쳐낸 일레이가 빙글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쿠션 던진다고 몸을 움직여봐야 얼마나 움직였다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정태의는 침대 위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벌어진 다리 사이로 끈적하게 주르륵 새어나오는 느낌이 몸서리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으윽, 이게
뭐야……."
난생 처음 맛보는 낯선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정태의가 얼어붙은 채 웅크리고 있으려니 일레이가 쟁반을 협탁 위로 치워놓고 이불을 훌쩍 걷었다.
"그대로 두면 오늘 하루종일 탈이 날 테니,
슬슬 빼내어볼까."
태연하게 중얼거린 일레이는 정태의의 가슴을 밀었다.힘이 없어 벌렁 드러누워버리고 마는 그의 무릎을 잡아양쪽으로 벌리며,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수건을 그아래에 깔았다. 정태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에서 불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레이를 노려보았지만 일레이는 그런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지그시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는 열불이 치밀었다. 이 남자에게 진지한 사과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반성을 할 놈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을 우습게 보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
"일레이. ……일레이! 놔!"
정태의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분노가 스미자 그제야 일레이는 흘끗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잠시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정태의의 무릎을 놔 주었다.
그 순간, 정태의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있는 힘껏 일레이의 가슴팍을 걷어차고 말았다. 명치에 발꿈치가 맞아들어갔다. 일레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한 걸음 정도 물러서 앉은 일레이는 서너 번 기침을 했다. 명치께를 쓰다듬으며 정태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섬뜩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명치를 정확하게 걷어찬 순간 아주 약간 후회했다. 잘못 맞으면 죽기도 하는 데였다.
다행히 조금 나가떨어지자마자 기침만 몇 번 쿨럭거린 일레이는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분명히 제대로맞았는데, 이 괴물 같은 놈,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하나의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저 괴물 같은 놈을 무슨 정신으로 걷어차 버렸을까.
그야 물론 갈아마셔도 시원치않을 만큼 원한이쌓였지만 역시 저 흉흉한 시선을 앞두고 보니 등골이 서늘하긴 하다.
그래서 뭐, 사람을 반죽음시킨
주제에 이 정도로 네가 날 죽일거냐, 정태의는 입 속으로 투덜투덜하면서 발목을 까닥거렸다. 명치를 걷어차긴 했지만 자신에게도 타격은 있었다. 몸을 거세게 움직이고 나자 근육통이 급습해왔다.
으으윽, 하면서 정태의는 다시 엎어지고 말았다.
"……이걸로 속은 좀 풀렸나?"
그때, 예상 밖의 말이
들렸다. 여전히 걷어차여 넘어져앉은 그대로, 일레이가 못마땅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조금만 수가 틀려도 눈 하나 까딱 않고 상대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저 야수
같은 남자가 무슨 말을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눈만 깜빡였다. 일레이는 혀를 차더니
'역시 맞는 건 익숙치 않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갈 뻔했거든'하고 투덜거렸다.
뜻밖이었다. 이놈을 죽여버리고
말 거라고 생각할 때부터 이미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놈이 남에게 얻어맞고도 이렇게
순순히 나올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정태의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나도 이번에는 안 죽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스스로가 얼마나 소심한 인간이었는지 깨달은 정태의는 우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일레이는 한두 번 더 기침을 해 속을 가다듬더니 다시 정태의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무릎을 쥐었다. 조금 전까지 스스로의 소심함을 탓하고 있었던 정태의는그
순간 소심함이 날아갔다.
"이 새끼가 방금 얻어맞고 또……!"
"얌전히 있어! 두 번은 얌전히 얻어맞아 줄 생각 없으니까! 순순히 맞아준 것도 내 생에 처음 있는 일이니
목숨건진 줄 알아!"
그러나 정태의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적반하장으로 일레이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얻어맞은 게 어지간히 분했는지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누가 누구한테 고함을, 하고 생각했지만 다시 순식간에 돌아온 소심함으로 차마 대거리는
못하고 일레이를 노려만 보는 정태의를 마주보면서, 일레이는 못마땅한 신음을 내뱉었다. 괜히 소리를 질렀다 싶은 얼굴로 혀를 차더니 무뚝뚝하게 정태의의 다리를 벌렸다.
일레이는 그의 사타구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무릎을 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다리를 한 번 흔들었지만 일레이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을 뿐이었다.
정태의는 미친 척하고 이걸 한 번 더 걷어찰까 말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상황이 한심하고 꼴사나워맥이 풀리고 말았다. 푸욱,
한숨이 기력과 함께 새어나온다. 그래, 이
미친놈아. 맘대로 해라. 어차피 어제 네놈이 핥고 빨고 다 한 곳인제
새삼 뭘 멋쩍어할 게 있다고. 만사 귀찮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힘이 다 빠져, 정태의는 침대 머리맡에 풀썩 기대었다. 반쯤 눕다시피 한채 널브러져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이 민망한 모습이라니, 꿈에 볼까 두려웠다.
빌어먹을. 저 미친놈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나. 거기에 금덩이라도 박아뒀나.
정태의가 내심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는데, 문득 일레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좀 심하군……."
"뭐?"
정태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야 지금 살짝 이성이 혼돈된 상태라 스스로의 감정이 제어가 안 되는 정태의로서도 일레이가 쳐다보고 있는곳이
얼마나 처참한 상태일지는 익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태 네놈이랑 잔 사람들은 다 멀쩡했나 보지?"
무슨 새삼스러운 소린가 싶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저 흉흉한 걸 박고 무사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러나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울컥해질소리를 했다.
"아니, 자고
난 뒤에 다시 볼 일이 없었거든."
"……그럼 내 것도 보지 마!"
다른 사람은 안 본다면서 굳이 정태의는 다리까지 벌리면서 쳐다보다니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싶어 버럭 소리를 쳤다. 다시 한 번 이놈 자식을 걷어찰까 싶어 다리를 들어올렸지만
일레이는 무릎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않았다. 그는 혀를 찼다. 그리고
어둑한 눈으로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쳐다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누워 봐. 빼내지 않으면 하루종일 고생한다고."
정태의의 다리를 좀더 벌리며 그 사이로 다가앉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미안하게 됐다.
조금 전의 '아―――미안'과는 달랐다. 정태의의 귀가 잘못 되었는지, 어렴풋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남자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진지하게 나올 리가 없는데. 정태의가 의심쩍은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보는 사이에 일레이는 정태의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그의 하얀 손이 사타구니에 닿는 순간 정태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튀어오르는 몸을,
일레이가다시 밀어 눕힌다.
"가만히 있어. 좀 아플 테지만 하루종일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것보단 나을 것 아냐. 그 몸으론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들 텐데."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정태의를 가로막은 그는 다리사이를 건드리는가 싶더니, 정태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안쪽으로 손가락을 쑤욱 밀어넣었다. 퉁퉁
부어 뭔가 닿기만 해도 쓰라린 통증이 화끈거리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손가락을 구부리며 안쪽을
벌리자마자 질척거리며 안쪽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몹시 소름끼쳤다.
"윽, 으윽,
뭐, 뭐야, 뭐냐고…ㅡ."
"내 씨. 아, 나온다."
정태의가 거의 사색이 되어 몸서리를 치는 모습을 앞두고 태연하게 중얼거린 일레이는, 자신의 손가락을 적시며 그의 몸 속에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액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빨갛고 통통하게 부어올라 손가락 하나도간신히 삼키고 있는 곳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질척한 액체가 조금씩 천천히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려 해도 일레이가 손가락을 구부려 입구를 벌리면 정태의의 의자와는
관계없이 줄줄흘러내리는 그 감각에 정태의는 파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붓고 찢어져서 아픈
것 말고는, 그 흘러내리는 감각만으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아픈 게 나았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아'하고 울고 싶은 기분으로, 정태의는 침대 시트만 움켜쥐었다.
"……됐어. 대충 다 나온 것 같군."
손에서 흘러내려 아래에 깐 수건까지 흥건하게 적신 뒤에야 흐름은 잦아들었다. 나머지를 긁어내려는 듯 정태의의 몸 속을 몇 번 더 손가락으로 훑어낸 일레이는 어딘지 아쉬운 듯 손을 빼내었다.
정태의가 거의 탈력 상태로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동안 일레이는 말없이 정리를 했다.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놓고 새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가져와 꼼짝도 하지 않는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을 닦은 뒤 정태의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다. 정태의는 오후 내내 울다가 제풀에 울음을 그치고 히끅거리는 어린애 같은 기분으로 참담하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아마 오늘 새벽에도 정태의가 잠든 동안 이런 식으로 뒷정리를 했을 이 남자가, 조금 전 눈앞에서
보고도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 괴물 같고 짐승 같고 인간 같지 않은 미친놈은 의외로 그런 면에서는
매너가 좋은 모양이다.
그러나 정태의의 우울한 심경에는 그조차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익숙하시군."
사납게 중얼거리자 일레이가 음? 하고 돌아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인다.
"익숙한 것처럼 보였나? 다른 놈 뒤처리를 해준 건 처음이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니 다행이군."
픽 웃으며 그렇게 말한 일레이는 정태의가 덮고 있는 이불자락 위에 앉았다. 순식간에 이불에 갇혀버린 정태의가 얼굴을 찌푸리는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태의의 얼굴에서 한 뼘가량 떨어진 위에서 멈추었다.나직한 목소리가 믿어지지
않는 말을 한 번 더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 미안한
줄 알긴 아는 모양이지. 하긴 남을 강간하고도 미안한 줄 모른다면 그게 인간이냐."
생각해 보니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정태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일레이는일순 기묘한
얼굴을 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다. 그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표정이 돌아왔지만 정태의는 그 짧은 순간의 얼굴을 놓치지않았다. 미심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뭐야.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그럼."
"아니……, 보아하니 앞으로 하루이틀은 제대로 못 다닐 테니까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네가
말한 점도 좀 미안하긴 하군."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게 고스란히 보이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해봐야 전혀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정태의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 속이 턱턱 막혀, 입을 벌린 채 숨도 못 쉬고 일레이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기만하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버렸다.
쳐다보고있으면 화만 더 날 것 같았다.
"미안하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웃음기가 섞인다. 이 빌어먹을새끼야, 내가 언제 한 번 반드시 내 손으로 널 작살을 내주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리겠다.
정태의는 피눈물이 날 것 같은 심경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이불 너머로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얹혔다.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이라도 할 셈인지 잠시 머리 위에서 오가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렇게 화낼 문제도 아니잖아. 평소에 하던 걸 좀더 진하게 했을 뿐인데. 게다가 좀 익숙해지면 그 편이 훨씬더 즐거울걸,
너도."
"익숙해질 생각 없어, 새끼야!"
"그럼 안 되는데."
태연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이불과 함께 일레이를 걷어찼다. 갑자기
그렇게 반격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쿠당,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일레이가 바닥위로 떨어쳤다.
"이 빌어먹을놈의 새끼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너 이 새끼, 두 번 다시 나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봐라,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그 망할 좆 집어넣기만 하면 콱 물고 찌부러뜨려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이성의 실이 끊어진 정태의는 침대 위에서 길길이 뛰며소리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멍하니 정태의를 쳐다보는 일레이의 얼굴에 대고 움켜쥔 주먹을 뒤흔들어 보인뒤,
정태의는 씩씩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렸다.
"……."
"……."
그러나 잠시 뒤, 지난밤 그렇게 혹독하게
당한 탓에 몸살이 나서 열이 오른 참이던 정태의는 서늘한 팔뚝을 문지르며 묵묵히 일어나 침대 아래에서 일레이와 함께널브러져 있는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올렸다.
그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뒤돌아 눕자, 등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정태의는 쉬어터진 목으로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냉큼 꺼져, 이 새끼야!"
냉큼 꺼져, 라고 기세 좋게
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방은 정태의의 방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태의는 저렇게 외치고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하게 잠들었다.마음에 걸리던 일을 떠올리고 나름대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나자 머릿속이
개운해졌는지, 찝찝하게 깨는일 없이 오후 늦게까지 잤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던 정태의가 깬 것은 저녁이 깊어진 어느 때였다.
문득 눈을 뜨자 바로 몇 초 전까지 그렇게 깊이 잠들어있었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졸음기가 말끔하게 가셨다. 정태의는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 움켜쥐고 있던 이불 속에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하루종일 아무 일도 안 했다. 정규 일과도 모조리 다 빼먹었다. 어떡하지, 라고 성실하게
걱정한 것도 잠시, 정태의는 곧 아무렴 어떠냐고 생각하며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뭐가 있을까. 게으르다고 교관들이 화를 내든, 멋대로 쉰다고 동료들이 구박을 하든, 이불 속에 뜨끈하게 누워 있는 지금 이 상황과 하루종일
일과에 치인 그들의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정태의는 당장 기쁘게 바꿔줄 수 있었다.
성실하지 못한다고 쫓아내려면 쫓아내라지. 바라는 바다. 정태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문득 희미하게 삑삑,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동시에 벽시계가 낮게 울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여덟 번, 벌써 여덟 시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입맛도 없다. 몸살은 여전히가시지 않아 열도 여전했고 몸도 변함없이 욱신거렸다.힘없이 쌕쌕 뿜어나오는 숨결이 뜨겁다.
젠장. 이게 뭐하는 짓이람.
타지에 나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이유는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다. 몸살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테지만 이 씁쓸한 기분은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 남을 테지.
그 원흉을 생각하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지만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가쁜 숨결과 함께
그 분노도 흐려졌다.화내기엔 기력도 딸리고 귀찮기도 하다.
문득 숙부가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너는 감도 좋고 판단력도 좋은데, 행동력이 좀 떨어지는 구석이 있어. 아니, 판단력이 좀 엇나간다고 해야할까. 특히나 사람이 얽힌 문제에 있어서는 더. 누가 옆구리를 찔러대면 좀 피하는 척하다가 결국은 귀찮아서네 맘대로 하라며 그냥 눌러앉아 버리거든.
아. 이래서 그런 말을
한 건가. 정태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졸리진
않았지만 몸에 기운이 없었다. 욱신욱신 아프고 춥다.
젠장. 바보냐.
억지로 당하고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만사 귀찮다고 원한까지 내팽개칠 마음이 들다니. 게다가그냥 얻어맞거나 조롱을 당한 것과는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정태의는 그 원한을 품는 데에 벌써 지쳐버렸다.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정태의에게는
그럴 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 듣는다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난밤의 행위와 일레이를 동시에 떠올리면 돌로 때려죽여 마땅하다는 생각이 원망스럽게 피어오르긴 했지만 일레이라는 인간
하나만 떼놓고 보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아마 누가 일레이를 묶어놓고 자신에게돌을 쥐어준다면 너 잘 만났다
하면서 아주 꼼꼼하게 후려패 줄 것 같기는 했지만, 빈사 상태까지 가면 그래도 그놈을 끌어다가 살려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
정태의는 혼자 상상하다가 그 상황을 떠올리고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실제로 저런 일이벌어질 가능성은 만분지일도 안 될 테지만, 머릿속에서이미
일레이가 불쌍해졌다.
"……."
문득 정태의는 자신의 인생, 패인을 알 것 같았다. 저런놈을 한순간이라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이 나사 빠진정신머리가 잘못된
거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방 바깥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숨죽이고 있으려니 그 기척은 방문 앞에서 멎었다.
문이 열리면서 조용한 발걸음이 안으로 들어선다.
"뭐야, 아직
자?"
일레이다. 잠들어 있다면 거슬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곤 천천히 다가왔다. 정태의는 일어난 기척을 낼까 어쩔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든 척해봐야 못 알아챌 남자가 아니었다.
"심심하면 책이라도 갖다 줄까. 그러고 보니 형이 정 교관에게 전해주라고 보낸 책이 도착했는데, 너도 좋아하지 싶던데."
정태의가 잠들어 있다고는 조금도 여기지 않는 그 말에정태의는 한숨을 쉬고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책장 앞에서 '어디 뒀더라……'라며 책등을 훑고 있던
일레이가 흘끔 돌아보았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책이 싫으면 영화라도 보든가."
책장 옆의 벽에 액자처럼 걸린 스크린을 손마디로 톡톡두드렸다.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필요 없어'라고 중얼거리곤 다시 누웠다. 잠시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피식 웃더니 다가왔다.
그리고 정태의의 옆, 널찍한침대의 빈 공간에 누워버렸다. 정태의가 험악하게 눈을부릅뜨고 쳐다보는 건 아랑곳도 않는 모양이다.
"오늘은 말야, 오랜만에 나갔더니 아주 일이 그득하게쌓여 있더란 말이지. 사경을 헤매며 앓다가 갓 일어난사람에게도
봐주지 않고 일을 떠넘기는데, 그렇잖아도병석에서 겨우 일어나 기운도 없고 머리도 몽롱한 차에일에 파묻혔더니
꽤 피곤해졌어."
일레이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라도 든 듯이 입을 다문 채 길고고른 숨결을 내쉬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신기한 일이다. 하기 싫은 일이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은 누가 뭐라고하든말든
내팽개칠 것 같은 느낌인데, 일단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어지면 제대로 해내었다. 그런 류의책임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의외란 말이야…….
물끄러미 일레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천천히 원한 비슷한 마음이 들썩였다. 바로 코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단정한 얼굴은 지난밤 죽이고 싶었던 얼굴과 동일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참 밉살스럽겠다.
문득 협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침에 일레이가 들고 들어왔던 쟁반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버터나이프와 포크 따위가 그 가운데서
반짝이고 있었다. 저거 하나만있어도 자는 사람 죽이기는 아주 쉬운데. (물론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있겠지만.) ……기왕무기도 바로 곁에 있고 원한도
스멀거리는 참에, 그냥콱 목줄기를 한 번 찔러나 볼까.
사뭇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포크와 목을 번갈아 보던 정태의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라. 되지도않을 거고, 그런
쓸 데 없는 일에 힘쓰기도 귀찮다. 그냥 재수 없게 된통 걸렸다고 생각하고 말지. 정태의는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베개 위에 풀썩 누웠다. 얼핏일레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것
같았지만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몸이 아팠다. 특히 허리 아래는 거의 하루가 다되어가는데도 욱신거리며 감각이 멀었다. 살갗끼리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오늘 하루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는데, 과연 침대 밖으로 나가
걸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제기랄. 거시기가 무식하게 큰 놈들은 세계
평화를위해 죄다 축소 수술을 받아야 돼. 그러면 여자들도 잠자리에서 아파할 일 없고 남자들도 서로 비교하며
위축될 필요 없잖아. 게다가 이런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데미지가 훨씬 줄어들 테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다시 도끼눈을 떴다. 불의의 사고는 무슨 얼어죽을. 역시 포크로 목줄기…ㅡ는좀 그렇고 이마라도
콱 찔러버릴까.
정태의가 다시 갈등하며 쟁반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바깥의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에서 나온 모양이라 이 앞을
스쳐가려니 했던 그 걸음은 이 방의 문 앞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달칵 열렸다.
"릭. 들어간다."
이미 발을 들여놓은 뒤에야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정태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복도의 끝 가까이에위치한 방ㅡ정태의가 곧잘 가서 뒹굴다 오곤 하는ㅡ의주인이었다. 높다랗게 베개를 고쳐베고 있던 정태의와눈이 딱 마주쳤다. 깜빡, 깜빡, 둘 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무표정하게 눈만 깜빡였다.
"……. 너,
오늘 아파서 방에서 쉰다더니."
"네. 아파서
하루종일 이 방에서 쉬었는데요."
지금도 아파요, 라고 정태의는 덧붙였다.
숙부는 어, 그래, 하고 무심하게 중얼거리더니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못마땅하달까,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가만히 기울인다. 숙부의 시선이 정태의의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일레이에게로 옮겨갔다.
"저놈은 왜 자는 척이야."
숙부가 중얼거렸지만 일레이는 그런 말을 듣고도 눈을뜨지 않았다. 숙부는 정태의를 보며 혀를 찼다.
"어제까지는 저놈이 죽느니 마니 하더니 오늘은 네가
아프냐. 그 세균성 독소라는 게, 전염성이었다던?"
"아니……, 그건 아닐 거에요……."
뭐라고 대답하기가 애매해 정태의는 중얼중얼 말을 흐리고 말았다. 숙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하지는 않고묵묵히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남의 냉장고를아무렇지 않게 열더니 평소 자신의
방에서 하던 습관대로 그 안에서 맥주 캔을 꺼내어 정태의에게 던져주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눈은 퉁퉁 부었고.입은 바싹 말라서 다 터졌고. 그거라도 마시고 목이나 축여라."
"예, 고맙습니다."
맥주를 보니 갑자기 갈증이 솟았다. 이거라도 마시고 개운하게 속 좀 차리면 좋겠다 싶어 정태의는 풀탑을 뜯었다. 그러나 그 때였다.
"앓아누운 놈한테 술을주는 경우가 어딨어.
마시지 마."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맥주가 무슨 술이야. 럼주도 그냥 들이붓는 놈이."
정태의는 코웃음을 치며 맥주를 넘겼다. 시원하고 알싸한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렸다. 숙부는 마뜩찮은 눈으로의자에
앉아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아픈 사람에게 술 주지 말라는 건전한 충고가 네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처럼 숙부가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귀찮은 듯 일어나 앉더니, 제일 먼저 정태의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부터 빼앗아갔다. 어, 하고 중얼거린 정태의가 손을 다시 뻗기도
전에 그는 단숨에 캔을비워버렸다. 숙부는 문득 혀를 찼다. 이내 어깨를
으쓱하더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연하게 웃음 지었다.
"사람이 한 번 호되게 앓고 일어날 만도 하군.
아프고 나더니 성격이 몹시 유해졌나 보지, 릭. 네 침대에 남을재우는 꼴을 다 보고."
일레이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던 그는 잠시 그대로 침묵하다가 픽 웃었다.
"정창인 교관. 어떤 재미난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난 기절한 사람을 쫓아낼 정도로
박정하진 않거든.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조카가 아니던가. 무려 길상천이시기도 하고. 마땅히 잘해드려야지."
개뿔.
일레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태의는 내심 중얼거렸다. 마땅히 잘해주긴 뭘 마땅히 잘해 줘. 사람을 억지로 덮쳐서 죽을 지경까지
몰아가 놓고, 그렇게 기절해버리자 당장 방에서 내 쫓아버린다면 그게 인간이냐.
어이없는 눈을 하얗게 뜨고 일레이를 쳐다보던 정태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하러 왔어."
일레이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내며 물었다. 숙부는길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화제를 돌렸다.
"카일한테서 조금 전에 연락이 왔거든.
그래서 네게 목록을 좀 받아보려고."
숙부는 느리게 말을 맺으며 흘끔 정태의를 보았다. 맥주를 빼앗긴 순간부터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정태의는 숙부와 눈이 마주치자 곧 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전 슬슬 제 방으로 가 볼게요."
여기서 6층까지 내려갈 생각만
해도 진이 빠졌지만, 6층에 내려가 방까지 가는 동안 복도에서 마주칠 동료들의 면면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진이
빠졌지만,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일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지부에 소속감도 없고 곧 떠날 예정으로 있으면서 내부 이야기를 들어서 좋을게
없었다. 침대 밖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한숨이 났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아래가 욱신하고 아프다. 가라앉았던 원한이 되살아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침대에 약간 허리를띄우고 앉은 채 잠시 원한을 되씹던 정태의는 입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일어섰다. 그래도 다행히 느리게나마걸어갈 만은 했다.
"좀 걸을 만해? 몸이 안 좋다고 쉴 정도면서."
숙부가 물었다. 정태의는 대답하기도
귀찮아 손을 저었다. 어차피 이 눈치 빠른 사람들 앞에서 멀쩡한 척 생생하게 웃으며 '그럼요'라며 뛰어나가도 헛짓이었다. 차라리 순순히 아픈
대로 아픈 티를 내면서 가는 게 덜 어색할 거다. 일레이가 그를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눈치였지만 도로
입을 다물었다. 숙부의 시선이 참 따갑구나, 이 현실을 개탄하며 정태의는
삐걱삐걱 걸어나갔다. 언젠가 정태의 수난사 같은 걸 적는다면 틀림없이 요 얼마간 있었던 일들만으로도 한 챕터를
두텁게 채우고도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0. 징조
ㅡ남미 지부 녀석들은 머리가 좀 이상하고, 아프리카 지부 녀석들은 종잡을 수 없고, 호주 지부 녀석들은 좀재수 없고,
유럽 지부 놈들은 아주 빌어먹게도 재수 없어.
숙부가 언젠가 즐거운 듯 말했었다. 유럽과 합동 훈련을 하기 얼마 전의 일이다. 적어도 유럽에 대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분히 사감이 들어간 판단이긴 하지만, 분명 유럽 지부
놈들은 빌어먹을 정도로 재수 없었다.
당장 그 대표 케이스를 주위에서 꼽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과연 남미나 아프리카, 호주에 대한 말도 맞아떨어질까.
그 점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마 아프리카나 호주 지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거다. 남미와의 합동 훈련이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태의는 UNHRDO를 뜨게 될 테니까. 요즘은 부디 멀쩡한 몸으로 그날을 맞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미 지부라. 거기 놈들이 머리가 좀 이상하긴 하지. 남미 놈들이 좀 그런 구석이 있잖아. 축구하는 거 보면모르겠어? 머리에 꽃 한 송이 핀 다혈질이잖아, 딱."
카를로가 하는 말을 들은 정태의는 무릎을 치며 고개를끄덕였다. 과연, 그런 의미로 '머리가 머리가
이상하다'였구나. 대단히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긴 했지만 갑자기 확 이해가
갔다. 그 말을 들으면 머리에 꽃 한 송이 핀 그 다혈질들은 엄청나게 화를 낼 테지만.
대각선 앞자리에서 알타가 인상을 구기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남미……. 내가 거기 놈들한테 원한이 좀 있지. 작년 합동 훈련 때 내 방을 썼던 남미 놈이 내가 아까뒀던
대나무 베개를 쪼개놓고 갔다고. 그놈 자식 이번에 오기만 해 봐라. 내가 작년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단 말이야."
"그놈이 여기에 오고 너는 호주로 가게 된다면 별러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토우가 지극히 타당한 말을 했지만 알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오늘 밤에 제비뽑기를 하고 나면 알타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있겠지. 저쪽에서 누가 올지는 봐야 알겠지만."
"원한 풀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게다가 재수 없으면 원한을 훌려다가 도리어 원한을
더 품게 될 수도 있지. 전제 칭이 그랬었잖아. 대련에서자기를 패대기친
놈이랑 다시 마주친 것까진 좋았는데,설욕하려고 메어치기로 들어올렸다가 그놈의 무게를 못 버티고 쓰러져서 깔리고
말았었지."
"아. 기억난다.
발목 삐어서 한동안 절뚝거리고 다녔던그때 말이지?"
강의를 하는 중이었는데도 키들키들 수근거리는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 소리를 들은 칭이 왈왈거리면서 뭐라고 했지만 아랑곳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남미와의 합동 훈련이 다가오자 정태의는 한결 편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외부의 적이 다가오면 내부적으로는 뭉치게 마련이라
저 틱틱거리던 동료들이 지금은 정태의에게 날을 겨눌 겨를도 없이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그래, 좋구나.
이대로 합동 훈련이 끝날 때까지 괜히 나한테 날을 세우지 않으면 나야 편하겠다. 게다가 훈련이 끝나면 이 거친 풍파도 같이 끝나게 되고.
정태의는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욱이,분위기로 금세 알 수 있었다. 남미와의 합동 훈련은 요전에 있었던 유럽과의 합동 훈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때는 훈련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잔뜩 곤두서서흉흉한 면면들로 오갔었는데 이번에는 공식 체육대회를 앞둔 것처럼 건전하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경쟁 상대임에는 틀림없어 오랜만이니 반갑다는 류의 언행은 일절 볼 수 없었지만,
유렵에 비하면 남미는 죽고 못 사는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거기. 나대다가
괜히 어디 한 대 부러지지 말고 자료에집중하도록."
그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앞에서 교관이 엄중하게 말했다. 부원들은 모른 척 입을 다물며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영상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정태의도 편안한마음으로 자료를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보아도일레이 같은 미친놈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투력으로 싸움에 임하는 모습들이다. 정태의는 정상치 안에서 험상궂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제 오늘 밤이면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지 제비뽑기를하게된다. 그리고 내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면 남미 지부원들이 찾아든다. 정태의는
제비뽑기를 할 필요가없었다. 교위는 교관이 가는대로 따라간다. 그의
직속교관이 떠나면 같이 따라 떠나고, 남으면 같이 남는다. 출장을 가더라도
어지간한 경우는 대부분 함께 다녔다.이번 훈련에서 일레이는 이곳에 남는다. 자연히 정태의도 남게 되었다. 정태의는 스크린 옆에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교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ㅡ너 여기에 남아라. 그리고 맥킨을 좀 도와주렴.
정태의는 숙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맥킨과는ㅡ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ㅡ그리 이야기를나눌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단순한교관과 부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면 된다고 숙부는 말했지만, 과연 그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할 일이 있을까. 숙부가 그에게 뭐라고
귀띔하고 갈지는 모르지만, 그가 자신의 도움을 청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뭐, 누구라도 상관은 없지만 입이 무거운 부원을 찾아야 할 만한 일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게다가 곧 지부를 떠나기로 예정된 사람이라면 부려먹기가 더 편할 수도 있다.
모쪼록 힘 안 쓰고 편한 일이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옆에서 은근히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가 턱을 괴고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몸만 아주 약간 정태의 쪽으로 기울이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루가 UNHRDO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눈치던데…ㅡ,싸우기라도 했나?"
카를로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앞에 둔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태의는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금시초문이었다.
흘끔 정태의를 본 카를로는 그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도 잘 몰라. 집무실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우연히스쳐가면서 들은 말이니까. 잘못 들었을 수도 있고."
카를로는 공연히 말했나 싶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곧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정태의는 여전히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만둔다니 왜."
"나도 모른다니까. 그냥 얼핏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아서너라면 알까 물어본 거지, 난 몰라."
카를로는 혀를 찼다. 정태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를로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는 못 본 척 눈길 한 번 주지않았다. 신루가 그만둘까 고민한다. 정태의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 기색을 비친 적도 없었다.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말을 듣고 당황했다. 톡, 톡, 습관처럼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면 요 얼마간 신루와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정태의는 신루에게 남미 훈련이 끝난 뒤
UNHRDO에서 나갈 거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정태의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졌다. 신루가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놀랄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말하는 걸 잊고 있었을 뿐이지만, 이제 보니 자신도 이곳을
그만둘 예정이라는 말을 신루에게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듯이 긁적였다.
이곳에서는 잠시만 있을 거라고 만인에게 떠들고 다녀서 하나 좋을 것 없었지만, 적어도 신루에게는 말해야 했다. 그건 사귀는ㅡ건지 아닌지 좀 애매했지만ㅡ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신루를 만나면 그 말을 해야겠다. 그런 뒤에,
그가 그만둘까 고민하는 눈치라는 말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쩐지 갑자기
해결해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다음 총관은 거의 루돌프로 결정난 것 같더군."
정태의가 물을 홀짝거리고 있는데 문득 일레이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물 따위보다는 벌써 며칠이나 구경도 못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결정나려면 아직 멀었잖아. 남미 훈련을 마치고 그 뒷정리를 다 한 뒤에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었던가?"
정태의는 자신이 들었던 바와는 다른 그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루돌프 장틸이 된다면 정태의는 별 나쁠 것 없었다. 사실 정태의로서는
이곳의 차기 총관자리에 루돌프 장틸에게 돌아가든 마오 리 인에게 돌아가든 아무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숙부가
모시는 사람이루돌프라고 하니 심정적으로 아주 약간 루돌프에게 기울어 있는 것뿐이었다. 일레이의 말대로 다음
총관이 내정되어버리면 정태의가 더 이상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도 없어지니 좋은 일이다. 정태의가 이곳에서
떠날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숙부에게서 들었던 대로 남미 지부와의 합동 훈련이 끝나고 뒷정리를
마칠 즈음이면 총관이 내정될 테고, 그러면 정태의는 숙부가 말했던 기한을 채우고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레이는 이미 책 목록을 다 외우고 있을 정태의의 책장을 습관처럼 훑어보며 대수롭잖에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그런데 중간 평가를 해 보면 루돌프가 더 우세해. 아마 이번 합동 훈련에서 어지간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결과는 바뀌지 않을걸."
"그래?"
숙부에겐 잘 된 일이군, 하고 덧붙이다가 문득 정태의는 일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마오 리 인의
휘하에 있지 않았던가. 루돌프가 총관이 된다면 자연적으로 마오 리 인 쪽에 붙어 있는 그는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질 텐데.
정태의는 책으로 입가를 가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슬그머니 물었다.
"그렇게 되면 네겐 별로 좋지 않겠군.
출세에 지장이 있을 것 아냐."
"음?"
책장을 휘이 쓸어보고 있던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하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몇 초 지난 뒤에야 그는 아하, 하고
웃었다.
"출세라. 그래, 그렇군. 이 지부 안에 있는 동안은 아마교관 위로
올라가긴 어렵겠지. 줄을 잘 서지 않으면 몇년 허송세월하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일레이는 남 말을 하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뭐야, 별 상관없나 보지'라고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그말에 확답은 하지 않고 뭐가 우스운지 소리내어 웃기만했다.
그 웃음을 듣고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바보같은 질문을 했나 보다.
하긴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놈에게 알량한 승진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놈은 제 형네 회사에서도 이미 한 자리 꿰어차고 있지 않았던가.
"하긴 출세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지.
더욱이 반드시능력과 출세가 비례하는 것만도 아니고."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말하며 책을 들어올렸다 못마땅한 얼굴을 그의 시야에서 가려버린다.
"그 말은 맞아. 아무리 본인에게 능력이 있다 한들 거기에 걸맞은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출세하기는 힘들지.그
조건이란 게 또 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레이의 목소리가 책장 앞에서 떨어져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본인의 능력과 사회에서의 위치가 비례한다면 세상의모습은
지금과 판이하게 다를걸. 어쩌면 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독재자의 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독재자의 동생……. 형이? 그건 능력과 출세의 문제가아니라 성격의 문제인데. 내 생각에는 그렇게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것 같다."
정태의는 본인의 능력으로 따지자면 정말로 세상의 탑에 위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성격상 그런 자리는 거저 줘도 도망가버릴 형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정태의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일레이는 정태의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책을 잡더니 휙 들어올려 버렸다. 눈이 마주친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일레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렇게 인상을 쓰다니, 너무한데. 그렇게 노골적이어서야
쓰나."
"너라면 안 그랬을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그날로부터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다가 겨우 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을 가거나 냉장고를 뒤지거나 하다가 그조차 힘들어 다시 침대로 돌아와 엎어진
며칠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욱하고 가슴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발작적으로 순간순간 '아무래도 저놈을죽여버려야 성이 풀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이런 정태의의 입장이 된다면 누가 인상을 쓰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젠장, 밟아도 아주 독하게 밟았구나'하고 투덜거리면서 슬렁슬렁 넘어가는 스스로를 보고 정태의는 자신의
인격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만일 일레이가 자신의 입장이었더라면ㅡ상상하기도 두려웠지만ㅡ상대는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거다.
천불이 날 만도 했다. 그 뒤로 일레이는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겸연쩍은 기색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론 더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도 아니다. 지나가다가 어깨를 살짝 부딪히고서
'어, 부딪혔어? 미안'이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좀 더 깊이 사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태의는 잠시 동안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인격은 스스로도 모르는 새 대단히 엉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자기 성격은 스스로는 잘 모른다고 하니까,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걸 보다못한 숙부가 정태의의 인격 수양을 위해 이곳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는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그렇게 인간이 덜 됐었나…….
이제 여기에서 나가면 저 김소위조차도 하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하군."
스스로의 과거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종교에 귀의할까진지하게 생각하는 정태의의 귀에, 합동 훈련을 코앞에두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정태의의 방으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자리 잡고 앉은 일레이가
불쑥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정태의도 잠깐 바깥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6층은 교관들이 사는 1층에 비할 수도 없이 사람들이 많이 머무르는곳이다.
숙부나 일레이의 방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당히 번잡스러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지금은 평소보다는 조용했다. 사람들이 반이나 빠져나간 탓이다. 그저께 밤 제비뽑기를 마치고 어제 아침
부원의 반수가 섬에서 떠났다. 아마 지금쯤은 캔버라에서 호주 지부로 입성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응, 아무래도
사람이 평소의 반이니까."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끄럽고 목소리큰 걸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알타 같은 놈들도다 호주로 빠져나갔으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엾은알타. 대나무 베개의 원한을 그토록 곱씹고 있었건만.
"그러고 보니."
일레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그는 탁상 달력을 짚고 있었다.
"며칠 전이 네 생일 아니었던가."
"응? 아…ㅡ."
잊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전……, 이제 보니 올해 생일날은 하루종일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에게 당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달력을 보고 날짜를 확인한 정태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또다시 슬쩍 원한이 솟았지만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내면서 원한을 캐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언짢은 신음만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연락은?"
정태의의 원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이는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했다. 정태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연락이라니 무슨 연락……. 아, 아아, 맞다. 그래, 고마워. 그렇잖아도 연락 왔더라.
양복 다음 주 중에 다 될거라던걸. 샵매니저가 직접 방문해서 전해주겠다는 걸 거절했어.
내가 나중에 가지러 가겠다고. 어차피 여기엔 외부인은 들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택배라면 몰라도 직접 가지고 오다니 부담스럽잖아, 라고 뒷말을 덧붙이는데 이번에는 일레이가 어리둥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정태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한 듯 아아, 하고 중얼거렸지만 찌푸린 눈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아니, 양복
얘기가 아니라."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하얀 손으로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전화 말이야, 전화. 정재이에게서. 생일 무렵이면 서로들 연락 한다면서."
"재이 형? 아니, 연락 없었는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보니 그렇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뭐 반드시 생일날에는 연락을 한다고 약속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암묵적인 약속처럼
그런 날에는 꼭 서로를찾곤 했다. 자칫 당일날 잊어버리더라도 그 근처 며칠 사이에 연락을 하곤 한다.
같이 살 때에도 그랬고, 학교나 직장 문제로 따로 떨어져 살때에도 그랬다.
"올해는 연락이 없으려나……. 그 말을 들으니까 보고 싶네.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정태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먼저연락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연락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멍하니 쌍둥이 형을 떠올리고 있던 정태의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흘끔 눈동자를 굴렸다. 옆에서 일레이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이 가라앉은눈을
하고서.
"……."
아, 하고 생각했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깨달았다. 일레이는 지금 약간 실망하고 있었다.
아마도 정재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정재의에게서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정태의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일레이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 그 역시 깨달은 눈치였다. 정태의가 그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조금은 겸연쩍은지, 그는 턱을 문지르며 혀를 찼다. 정태의는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듯이 기대었던 몸을 바로세우며
물었다.
"재의 형에게 볼일이 있었어?"
일레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짤막하게 대답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는 사람이."
"아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재의를 찾는 사람은 온 사방에 산재해 있는 모양이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 일에 흥미를 두지 않는 이 남자마저 정재의의 행방에 관심 있어 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없겠다. 십중팔구는 전화든 컴이든 정태의에게 연락이오는 모든 회선이
다 체크되고 있을 터였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뭐야. 요 며칠 계속 근처에
얼쩡거린다 했더니, 그런 건가. 어쩐지 답지 않게 눈에 자주 띄더라
했더니만.
일레이가 말끔히 회복되고 그 대신 정태의가 앓아누웠던 그날 이후, 일레이는 하루 두세 번은 정태의의 방을들여다보곤 했다. 끙끙거리며 누워
있을 때면 마치 몸상태를 살피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돌아가곤 했고, 그나마 좀 움직일 만해져 다시
교위의 본분을 다할 때에도 밤마다 정태의의 방에 이유도 없이 머무르며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다가 가곤 했다.
그래서 내심, 이놈이 겉으로 아무런
표를 안 내어서 그렇지 어쩌면 사실은 미안해하고 있는지도 몰라, 라고 좋게좋게 생각하면서 원한을 다독이던
참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이거였구나.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따져묻기도 귀찮고, 어차피 이놈의 인성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새삼 화낼 것도 없다. 기분이 좀 가라앉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연락 없었어……. 어차피 다 체크하고 있었을것아냐?"
정태의는 턱짓으로 전화를 가리키며 한숨 섞어 말했다.일레이는 잠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돌려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이내 평소대로 웃었다.
"워낙 특이한 쌍둥이들이니 뭔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연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글쎄, 그런
게 있다면 나도 익히고 싶긴 하군. 뭔가 시험칠 때라든가 면접볼 때라든가 대단히 유용할 것 같아."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정재의와 의사 소통이 된다면 이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데에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침대에서 훌쩍 일어섰다. 아무래도 맥주가 고프다. 숙부의 방에 가서 몇 캔 훔쳐와야 할 성싶었다.
잘 뒤적여 보면 소주도 있을지 몰라. 소주는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기분 찝찝할 때면 나름대로괜찮기도 했다.
"그래, 형이랑
연락이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기 만들어 달라고? UNHRDO에서 나간 뒤로는 안 만든다는 것 같던데."
숙부는 호주로 떠났으니 방은 당연히 잠겨 있겠지만 정태의의 서랍에는 숙부에게 직접
받은 열쇠가 있었다. 열쇠고리를 손에 걸고 짤랑, 한
번 흔들며 정태의는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선한 마음으로 조언해준다.
"재의 형, 한 번 안 한다고 했으면 안 하는 사람이야. 말수도 적고 성격도 순한 편이라서 만만히 보고
재의 형 뜻에 어긋나는 설득을 하려고 드는 사람이 종조 있는데, 성공한 사례가 없어. 협박이 통할 사람도 아니고."
그 운 좋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협박을 하는 게 가능이나 할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방에서 나갈 낌새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눈치에
맞추어 같이 방에서 나갈 기미를 보여야 할 일레이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꿈쩍도 않고,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 나
잠깐 삼촌 방에 갈까 하는데. 계속 여기 있으려고?"
"……. 아니.
같이 일어나지."
정태의가 말을 꺼내자 일레이는 선뜻 일어나 그 뒤를 따라왔다. 그래, 이놈 방은 삼촌 방 지척에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레이를반걸음 가량 뒤에 달고서 걸어가는 동안
가끔 지나다니는 동료들과 마주쳤다. 일레이를 보자마자 험악한 얼굴을 하는 동료들의 그 시선을 정태의도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이제는 익숙할 대로 익숙한 일인데도 한숨을 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고 나서야 겨우 그 험상궂은 시선들에서 벗어난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말야. 괴물 같은 놈이 적진에 있다면 두려워하고 미워해야 마땅하지만 우리 편에 있다면기꺼이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전력이 늘어나는 거잖아."
"괴물 같은 놈의 전적에 따라 다르겠지.
그런데 그 괴물같은 놈이 누구지?"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정태의는 글쎄……, 하고 입을 다문다. 하긴 동료에게 숱하게흉기를 휘두른ㅡ그 괴물 같은 놈은 맨손도 흉기였다ㅡ놈이 우리 편에 들어온들 그리 미쁘게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놈이 유럽 지부에 있을 때에 유럽 지부원들도 이놈을 믿고 따르며 존경하지는않았다. 문득 안타까운
마음이 설핏 스치고 지났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안타까움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한 올 한 올 얽혀나가는 것이 삶인데, 그 가운데서 이 남자는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홀로 있는 그는
안타까운 줄도 모른다. 그 허전함도 모른다. 애초부터 그런 건알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런 감상들을 비웃으며 살아가는 그 무심한 마음이 그에게는 도리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여태 알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줄곧 알지 못하도록, 그렇게 바라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다. 그것이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이 남자에게 말하면 웃을테지만.
"네가 어느 지저분한 골목에서 불시에 칼을 맞고
쓰러졌는데 구해주는 사람도 하나 없어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나만은 슬퍼해줄게."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서기 직전,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위안인지 조롱인지
얼핏 구분하기 싫은 그 무뚝뚝한 목소리에, 일레이는 몹시 희한한 얼굴을 했다. 황동한 듯 정태의를 쳐다보던 그는, 하, 하고 웃었다.
의외로 화는 내지 않았다. 도리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투로 소리내어 웃으면서
'그것 고맙군'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걸 보니 나도 이 동네에 들어와 여기저기 치이면서 성격이 많이 대범해졌달까, 까칠해졌달까,
뭐 나름대로 좋은 방향의 변화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멈춰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걸음을 내딛던 정태의는 멈칫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 서 있었던 탓이다. 그나마 사람수가 많은 지하
6층에서라면 모를까, 사람이 몇 살지도 않는지하 1층에서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사람, 루돌프 장틸도 그렇게 마주친 게의외였는지 잠깐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정태의와 일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곤 담담히 웃는다.
"오늘 저녁부터 수고하겠군, 두 사람 모두."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일레이 역시 의례적인답변을 건넨다.
"수고랄 것 있겠습니까. 별 탈 없이 끝낼 수 있도록 살피는 게 당연한걸요."
교위라는 신분상 그들 사이에 말을 섞을 수 없는ㅡ섞을생각도 없는ㅡ정태의는 묵묵히 옆에서
그 판에 박힌 몇마디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대단히 놀라고 말았다. 저 남자가 저렇게 정중하고 전형적인 문구를 입에 담을 수도 있구나. 어쩌면 회사라든가 여타
딴 데 가서는 정상인인 척 행세할지도 모르겠다.
일레이와 짧은 대화를 나눈 루돌프는 정태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진다.
"이곳 생활은 좀 익숙해졌나? 가족과 자주 만날 수 없으니 그립겠어."
"아…ㅡ, 뭐 그렇게 살갑게 지냈던 것도 아니라서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태의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형 소식을 은근히 물어보는 사람들은 참 많기도 하다. 루돌프는 그런가, 하고 웃더니 적당히말을 마무리 짓고 걸음을 옮겼다. 정중하게 그를 배웅한 그들은 루돌프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슨 행사 주간인가, 요즘 따라 형을 찾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몰라."
정태의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웃었다.
"요즘이 아니라 원래 그랬어. 네가 몰랐을 뿐이지. 게다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기도 하니 더 그럴 테지."
"흠……. 형에 대한 소식이 짚이면 삼촌이 어련히 알아서 보고할 텐데."
정태의는 손톱 끝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툭 두드리곤 걸음을 돌렸다. 숙부의 상관인 장틸은 여전히 알 수 없는사람이었다. 정태의로서는 알 필요도
없었지만,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 맥주 캔을 몇 개쯤 꺼내올까 중얼거리며
숙부의 방으로 향하는데, 정태의의 옆에서 걸으며미묘하게 웃음 짓던 일레이는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창인 교관은 장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정태의는 약간 걸음을 늦추었다. 흘끗 일레이를 보았지만 그는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느긋하게 앞을
보며 걷다가 슬쩍 시선을 맞춘 일레이는 픽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농담."
"……."
상관없다는 의미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속뜻을 깊이 생각해서 좋은 결말이 난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군대에서도 그랬다.
뭐, 상관을 좋아하는
부하가 얼마나 될까, 정태의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숙부의 방 앞에 이르렀다. 일레이의 방은 여기서 조금 더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열쇠로 숙부의
방문을 열던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가 자신의옆에 멈춰 선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 왜?"
열쇠로 잠긴 문을 따긴 했지만 자기 방도 아닌 곳에 함부로 남을 들여놓기는 뭣해서, 정태의는 문고리를 잡은채 물었다. 더 볼일이 남았냐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방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레이는 문득 빙긋 웃더니 팔을 뻗어 정태의의 얼굴 옆으로 조금 떨어진 벽을 짚었다. 벽과 일레이 사이에서 반쯤 갇힌 꼴로, 정태의는 살짝 낯을 찌푸린다.
이건또 뭐 하자는 짓이냐.
"이제 몸은 괜찮아진 모양이지."
일레이가 미묘하게 말꼬리를 끌며 속삭였다. 정태의는도끼눈을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좀 멀쩡하게 걸어다니면서 일과도 무난히 마칠 만해
보이니까 마음에 안 드시나 보지."
열쇠를 짤랑거리며 대단히 못마땅하게 말하자 일레이가 웃었다.
"오늘 밤부터는 한동안 남미 놈들과 부대끼느라 정신없을
텐데, 가볍게 몸이라도 풀까 싶은 거지. 게다가 너무뜸하게 사이를 둬서야
익숙해질 여지가 없을 것 아냐."
"익숙해질 생각 전혀 없습니다."
정태의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거칠고 혹독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하나도 없었던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오죽하면 지난밤에는
꿈에서 팔뚝만한 소시지를 보고공포에 질렸을까. 화장실에서 핏빛 대변을 구경하고 사색이 되었던 며칠 전을 생각하며
정태의는 얼굴을 굳혔다. 또 그 꼴을 볼 수야 없지, 땅따먹기 정도라면
모를까……, 라고 생각하다가 제풀에 흠칫해서 고개를 휘휘저은 정태의는 난처한 듯 웃는 일레이를 경계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정태이.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는데…ㅡ, 별로 감칠맛도 없어 보이고 딱히 나긋나긋 끌리지도 않게 생겨먹은몸이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주 끝내주는 명기더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뭐……."
"어찌나 찰기 있게 오물거리는지, 잡아먹히는 줄 알았거든. 아파죽겠다고 울면서도 그 모양이라니 대체 익숙해지면 어떤 물건이 될지,
생각만으로도 뻐근해질…ㅡ어어차."
정태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일레이는 웃으면서 슬쩍 몸을 뒤로 비켰다. 열쇠를 쥔 손을 그대로 그의 관자놀이를 노려 휘두른 정태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놈이 미친놈에서 변태놈으로 업종을 변경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챈일레이는 그에게 바싹 붙어섰다. 문을 등 뒤에 둔 정태의의 앞으로, 두툼하게 솟구친 일레이의 샅이 닿았다.
"이 새끼,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질 나쁘네……. 지금 그게, 네놈이
힘으로 누른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소리냐,이 개새끼야?!"
"새겨듣는 게 좋을걸. 남자치고 명기에 환장하지 않는 놈 없으니, 몸 놀릴 때는 상대를 잘 봐가면서 하라고 조언해주는
거다. 재수 없게 하룻밤 가볍게 놀 작정이었는데 스토커 같은 놈이 붙어버리면 곤란할 것 아냐,
응?"
웃으며 속삭인 일레이는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정태의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었다기보다는 입 속을삼키려 들었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혀뿌리까지
거세게 빨아들이면서 이에서 잇몸, 입술까지 농밀하게 핥고서야 떨어졌다. 바싹 맞대어붙인 허리를 한 번 느릿하게 돌리듯이 비빈 다음에야 반걸음 물러선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고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는 정태의를 보며 낼름 입술을
핥은 일레이는, 아쉬운 듯 자신의 사타구니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했잖아.
아는 사람의 손을 빌려 서로 가볍게 욕구를 풀어내는 일이야, 여태 너랑 나도 몇
번이나 했잖아?"
"그거야 손만 빌렸을 경우지. 이쪽은 몸이 두 쪽 나서 죽을 뻔 했는데 욕구는 무슨 얼어죽을 욕구야. 너 혼자만 풀면 그만이냐?"
정태의가 사납게 쏘아붙이자 일레이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그거 미안하게 됐군, 하고
한참을 웃는 그 면상에 헛방으로 돌아간 주먹을 한 번 휘둘러주고, 정태의는 신음처럼 한숨을 쉬었다.
"누구든 욕구를 풀고 싶으면 딴놈 찾아보면 되잖아.
네말마따나 동료들끼리 가볍게 욕구를 푸는 놈들이라면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여럿 되니까."
그러자 일레이는 문득 웃음을 멈추었다. 마치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정태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그 말도 맞군, 하고.
이렇게까지 자기 위주인 인간도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생각하며, 정태의는 저리 가라고 일레이를 마구 쫓아내고는 숙부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속이 편치 않았다. 잊어가던 원한을 저 빌어먹을 놈은 정말이지 잘도 끄집어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 캔 여남은 개를 몽땅 꺼내어 한꺼번에 들이키자 속이 좀 풀리는가
싶었다. 그 대신 배가 불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지만.
* * *
어느 건물에나 사람의 걸음이 잘 닿지 않는 곳은 없는 법이다. 군대에서도, 사관 학교에서도, 고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하다못해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정태의는 그런
곳을 찾아내는 게 취미였다. 그런 곳을 잘찾아내어두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 뒷산에 덤불로 둘러싸인 공터였다. 형에 대해서 물어보면 귀찮게 구는 어른들이나 친구들을 피해 마음에 맞는 친구 몇 명과 노는 데에 유용하게 썼다.
중학교 때에는 도서실의 고자료 보관실 안쪽 서가 사이였다. 따분한 수업을 빼먹고
낮잠 자는 데에 좋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폐쇄된 별관의 미술실이었다. 가끔 담배를 한 대씩 태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울이 늦어지면 찬바람이 불어 들어와 맥주 몇
캔 재어두기에도 딱이었다. 사관 학교에서 군대로 넘어가면서 생도에 장교라는 입장도 입장이고 수시로 순찰이
돌아다녀 좀 어려웠지만, 그때도 못 찾아낼 건 없었다. 구석진 구멍을
찾아들어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곤 했다.
몇 번 걸려서 호되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곳을 찾아내는 재미를
즐겼다. 그 습관이 어딜 가나 따라다녀, 하다못해 전역하고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도 정태의는 옥상 물탱크 뒤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고 가끔 올라가 홀로 노닐다 오곤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다를 리 없다. 아시아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슬슬 돌아다니면서 건물 내를 탐색한 정태의는 두어 군데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뒀었다.
이곳도 그 중 하나다. 지하 3층과
2층 사이를 잇는 서편의 조그만비상 계단.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다릴까 말까한 폭
좁은 계단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계단의 존재 의의가 의심될 정도로, 정태의는 이곳에 있는 동안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정태의 외에도 이곳에서 노닥거리다 가는
놈들이 간간이 있는 듯 가끔 휴지조각 따위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직접 마주치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계단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하아, 하고 기분 좋게 입맛을 다셨다. 다른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동안 이렇게 한구석에 숨어서 놀고 있자면 뭘 먹든 꿀맛이다.
머리에 꽃 한 송이 핀 다혈질 한 무리가 저 어딘가에서 떠들고 있었다. 같이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도 섞여 들린다. 합동 훈련이 시작된 지 며칠째,
탄성과 고함이 뒤섞인 저 시끄러운 소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남미 지부의 부원이 아시아 지부로 찾아들어온 날, 그날도 신고식이라도 하듯이 곧바로 한바탕
패싸움이 벌어졌다. 복도가 아수라장이 되고 기물 여럿 파손되었다. 그러나
유럽 지부 때의 그, 진짜로 죽여버리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빛마저 감도는 듯이보였던 그 흉흉한 싸움은 아니었다.
유렵 때에는 '너 한번 죽어봐라'였다면 이
경우는'너 한 번 당해봐라'였다.
첫날 밤 한바탕 싸움을 벌인 아시아 지부원과 남미 지부원들은 싸움판 뒤 의기투합해서
술판을 벌였다. 경쟁체제인 지부간의 합동 훈련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그 이유는, 그 싸움을 중재하러 나선 교관이 일레이였던 탓이 9할쯤은 될 거라고 정태의는 생각했다.
'교관이란 불편하군, 저 개떼 같은 놈들을 손속에 사정을 둬가면서 갈겨줘야 하다니', 지하 6층에서 벌어진 싸움판을 보고 일레이는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곤 쇠파이프를 하나
집어들고 셔츠를 벗어 그 파이프에 둘둘 감더니 '이거라면 얻어맞아도 직통으로 죽지는 않겠지'라고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 싸움판에 들어섰다. 그 뒤는 말할 것도 없다.
서로 멱살을 쥐고 싸우던 아시아 지부원과 남미 지부원은, 복도 끝에서부터 피보라를 일으키며 천천히 나아가는 일레이의 악귀 같은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 그에게 달려들었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집단들이라도 공통의 적이 생기면 절로 뭉치게 마련이다.
정태의는 그런 정치적인 짜임새를 그날 두 눈으로 보았다. 복도의 반도 채 나아가지 않아 다른 교관들이 달려와서 그들을 뜯어말리며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UNHRD O의 전 지부 및 본부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던 일레이가 공공이 적이 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원한을 한가득 심어놓는 것도 쉽지 않지,
쉽지않아……."
어떤 의미로 일레이는 정말이지 걸출한 인물이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놈을 쫓아내긴커녕 교관으로
삼는 이곳도 나름대로 대단하다. 저런 교관 아래에서 양성되는 인재를 대체 어디로 보낼 수 있다고.
"아. 아니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과굳건한 맷집을 기르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우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 시련 속에서 과연 자신은 정신이 강인해지고 맷집이 좋아졌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주머니에 들어 있던 호출기가 진동했다. 정태의는맥주캔을 옮겨쥐며 호출기를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이 형, 지금 갈게요.'
발신자의 번호를 확인할 것까지도 없었다. 정태의는 다시 호출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합동 훈련이 시작되자 평소보다
더욱 바빠진 교위와 교호가 만나기란 매우 어려워졌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만나서 말을 좀 해봐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만 하던 차에 지난밤 신루에게 내선으로 전화가 왔다.
그래서, 오늘 낮에 잠시 짬을 내어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신루에게 알려준 적이 있는 인적 드문 이곳에서.
정태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얘기부터 먼저 시작해야 할까. 고민에 잠겨 있는데 저만치 대련장에서
누군가 성대하게 한 판 당하기라도 했는지 우렁찬 고함 소리가 멀찍이서 터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정태의도
저기에 섞여 있었다. 교위는 늘 교관에게 붙어 다닌다고는 하나, 교관이
정규 일과에 들어가지 않고 교관실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교위도 다른 부원들과같이 일과에 들어갔다.
오늘은 오후 3시까지 일레이는
일정이 잡힌 게 없었다.그래서 정태의는 여느 때와 같이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오후에는 자유대련에 들어가 있던
참이다. 한 30분 지나면 슬슬 교관실로 가봐야 할 테지만,
그 전까지는 대련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에 땡땡이를 쳐주지 않으면 달리 땡땡이칠
시간이 없었다. 오후에 잡힌 일대일 자유 대련에서, 정태의의 순서는
앞쪽이었다.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얻어맞을까 고민하며 대련장 앞으로 나가자, 정태의보다 한 발 먼저 나와 있던 대련 상대가 정태의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남미라기보다는 아랍 계열로 보이는 그 남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정태의를 살폈다. 정태의는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키가 큰 저 남자에게 어떻게 하면 덜 얻어맞고 대련을 끝낼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글쎄, 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 남자는 정태의를 본 적이 있었다. 정태의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들이 어디서 마주쳤었는지
이야기 했다간, 한 대 얻어맞을 걸 두 대 얻어맞게 될 공산이 컸다. 그는 아시아 지부로 찾아든 첫날밤, 일레이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제일 먼저 맞고 나가떨어진 놈이었다.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 남자를 정태의가 질질 끌어다가 복도 가장자리에 눕혀줬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연이어 쓰러지는 놈들을 줄줄이 끌어다 눕혔었다. 그날 웨이트 트레이닝하나는 확실하게 했다.
그 뒤로 가끔 식당이나 복도 따위에서 스칠 때 이 남자가 이를 갈며 일레이의 욕을
하는 걸 수 차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너랑 나랑 첫날 봤던 적 있잖아. 내가 리그로우의 교위거든.'하고 아는 척했다간 대련이 혈투로 변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노력은 동료들의 배신으로
깨어졌다.
'그놈이 릭의 교위거든. 방심하지 말라고.'
키들거리며 소리치는 저 목소리는 카를로, 칭, 제임스다. 빌어먹을 놈들.
기대한 바는 없지만 이렇게 앞길을막아주시냐. 정태의가 흘끔 고개를 돌리며 사납게
노려보자 휘파람 소리까지 성대하게 일어난다.
'…ㅡ아하. 네가 그
빌어먹을 놈의 교위라? 그래, 잘 만났다. 오늘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
순식간에 그 남자는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정태의에게다가왔다. 그러는 와중에 한쪽에서 교관은 태평하게 시작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태의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쳤다. 소용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알량한 이성에 호소해 본다.
'잠깐. 왜 나랑 붙어.
일레이에게 원한이 있으면 그놈에게 직접 가서 풀라고.'
'? 그게 누구야?'
'……. 리그로우.
그놈에게 원한이 있으면 그놈한테 가서 풀어야지, 왜 애꿎은 나한테 그래.'
정태의가 잠시 침묵하다가 정정하자, 남자는 좋은 꼬투리라도 잡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면 네놈이 그놈을 말리기라도
했어야지. 방조죄다. 내가 그 썩을 놈만 생각하면이가 갈려서―――.'
이가 갈려서, 에서 남자는 정태의의
멱살을 잡아채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정태의는 아차,
하고 혀를 차며 외쳤다.
'야, 하지만 네가
쓰러졌을 때 곱게 널 끌어다가 한쪽 구석에 얌전히 눕혀준 게 누군데, 그건 고맙지도 않냐?!'
그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남자가 메어쳐 허공을 한 바퀴 부웅 돌던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낙법을 구사하려했지만, 예상했던
충격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주 사뿐하게, 공기가 쿠션이 되어준 것처럼
몸이 약간 뜨는가싶더니 탈싹, 바닥이 발꿈치에 가볍게 와 닿았다.
'응? 네가 그랬어?
물수건으로 핏자국 닦아줬던 거?'
눈앞에서는 여전히 정태의의 멱살을 비틀어 쥔 남자가미심쩍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남자가 손을 놓으면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을 뒹굴 애매한 자세로, 부루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눕혀놓고 닦아놓고
약상자도 네놈들 옆에 놔뒀었잖아.'
'아. 그게 너였어?
그래, 그래, 그건 고마웠지.
그때는 의무반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거든.'
남자는 음, 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랬냐는듯 남자의 얼굴에서 험악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얼굴에 헤벌쭉 웃음을 달고ㅡ사실 그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흉악해 보이긴 했다ㅡ정태의는 제대로 세워주더니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정태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만하면 무난하게 잘 넘어가겠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선행을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정태의도 남자를 따라 빙긋이 웃었다. 남자는 심지어
정태의에게가엾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쩌다가 그런 놈의 교위가 되었냐며 정태의를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정태의는
UNHRDO에는 이상한 놈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이렇게 친절한 놈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태의에게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럼 다시 한 번 제대로대련해 볼까.'라며 소매를 걷어붙였고, 바로 몇 초 뒤 정태의는 이번에야 말로 대련장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젠장, 좀 살살 던져주지,
라고 중얼거린 정태의였지만남자는 미안, 미안, 하고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여전히 호탕하게 웃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험악한 사태까지는 가지 않고 대련은 끝났고,정태의는 허리와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로 들어왔다.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도 남자는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여어, 친구, 라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며 환하게 웃었고 정태의는 카를로가 했던
말을 약간 다른 방향으로이해하고 말았다. 저래서 머리에 꽃이 피었다고 한 거구나. 몇 번째인가의 대련이 거듭되고 사람들의 주의가대련장 앞쪽으로 향해 있을 때 정태의는 슬쩍 눈치를 보며 '잠시 화장실'이라며 대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삐걱거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이 인적 드문 휴식처를 찾아온 것이다.
남미 지부원들은 그리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다혈질에거칠지만 음험하지 않고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지부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면,남미는 그랬다. 카를로의 표현이
딱이었다. 머리에 꽃한 송이 핀 다혈질들. 아마 경쟁관계가 아닌 상황에서만났더라면
정태의는 아주 재미있는 친구들을 만났다고 좋아했을 거다. 사실 관계들이 좀 꺼여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정태의는
UNHRDO의 생활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갖가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대끼며 살아가는이런
삶을 그는 제법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 웬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와서 인생이 꼬여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애초에 약속했던 반년이 지나더라도 계속 이곳에 말뚝박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삶이란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노력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원치 않지만 해야 하는 것도 있다.
"뭐……, 진인사대천명이라."
정태의는 맥주 캔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때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고개를뒤로 꺾었다.
내려오는 신루의 모습이 거꾸로 뒤집혀 보였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데 하늘의 뜻씩이나 기다려야
해요."
정태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신루가 웃으며 말했다. 정태의도 웃었다.
"세상 만사."
"하하, 태이
형, 그런 말씀 하시니까 꼭 운명론자 같아요."
그건 내가 아니라 일레이지, 라고 말하려다가 정태의는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저 얼굴이 어떻게 흐려지는지 이미
익히 아는 탓이다.
오랜만에 보는 신루는 여전했다. 풋풋하고 뽀얗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요 얼마간 바빴던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딱 좋게 살이 올라 있던 뺨이 야위었다.
"신루. 말랐구나."
정태의가 안쓰럽게 중얼거리자 신루는 예? 하고 되묻더니 쓸쓸하게 웃으며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냥,
요즘 일이 많아서 그렇죠, 괜찮아요, 라고
중얼거리는목소리에 정태의는 괜히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서 그래요'라는 말이라도 들은 듯이 가슴이 무거워졌다.
"신루. 혹시
UNHRDO, 그만둘 거야?"
정태의는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의 옆에 앉으려고 허리를 굽히던 신루가잠시 멈칫했다.
"……. 어디서
들으셨어요?"
머뭇머뭇 말을 꺼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사실이었나, 하고 씁쓸해했다.
"그런 건……아니에요. 그냥 그러면 어떨까 생각만 해봤어요."
신루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곤란해하는 듯한그에게 정태의는 손을 내저었다.
신루가 그만둔다면 혹시 자신의 탓일까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런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오래 있을 작정도 아니었던 자신 때분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에 반해 이곳을 그만둔다면, 그건 미안하다는 말로도 다할 수 없는일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면, 그러지 마. 내가 나갈 거니까."
정태의는 맥주 캔을 입에 댄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신루가 놀란 듯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쉬곤 그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바꾸려는 앞날에 자신이 관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알려줘야정당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반년이었어. 삼촌이랑…ㅡ이야기한 바가 있어서 들어오게 된 거라, 애초에 오래 있을 요량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거든."
"반년……."
신루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반년, 하고 따라 말하며고개를 끄덕였다.
신루는 그 반년을 꼽아보는 눈치였다. 신루도 정태의도알고 있다. 반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나가려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신루는 말이 없었다. 정태의는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릴없이 맥주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몇 모금 남지 않아, 이걸 다 마시면
어떡해야 하나 다시 고민한다.
"그럼, 여기서
나가시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신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아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지. 돌아가서……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호구지책을 세워 봐야지."
내가 여기서 잠깐 이러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백수 신세거든,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몇 모금 남지 않은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군대 생활만한 자신에게 뭔가 달리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숙부는 이곳에있다 나가면 그것만으로도 구직하기는 손쉬울
거라고했지만, 정태의가 여기서 익힌 거라곤 몸속에 켜켜이 사리가 쌓일 만큼의 인내심뿐이었다.
인내심으로 사람을 채용하는 회사라니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었다.
"형……! 그럼, 그러면 제가 좋은 곳을 소개해드릴게요.저희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 중에 괜찮을 곳으로 소개해드릴게요. 거기로 가면 안전할 거예요."
신루는 갑자기 정태의의 어깨를 붙들더니 초조한 듯 외쳤다. 정태의는 이 영문 모를 반응에 당황스레 눈마 깜빡이다가 손을 훌훌 저었다.
"아니, 집으로
돌아갈 거라니까. 우리 집으로. 별로 위험한 데로 가는 것도 아니야."
"그 남자가 거기까지 쫓아가면 어떡해요……!"
신루는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다시 당황스레 눈만 깜빡였다.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어긋난 기분이 든다.
분명 처음에 이야기를 꺼낸 것은신루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그가 정태의 때문에 원하는 길을 포기해서야 안 될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신루는 자신의 일은 뒷전으로 돌리고 정태의를 붙잡고서 엉뚱한 말만 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신루가 한 말을 이해하고 나자 어이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거길 왜 쫓아와.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다."
"……형은 몰라요."
신루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기만 해도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릴것 같은 저 얼굴에 정태의는 약했다. 정태의는 안절부절 못하며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휴지나 손수건처럼 쓸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뭘 몰라. 나 그놈한테 원한 진 거 없다. 빚진 것도 없어. 뭐가
위험하다고 그래."
"형한테 흑심을 품고 있잖아요! 그 남자가 형 좋아하잖아요!"
신루는 답답한 듯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소리를 질렀다.그리고는 제풀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괜히 말했다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신루를 쳐다보았다. 예전에도뭔가 이 비슷한 느낌으로 대화가 오갔던 것 같은데, 또이 꼴이다.
저 말도 안 되는 오해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아니면 혹시 그놈이랑 땅따먹기를 한다는
소문이 신루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놈이 침대 위에서 사경을
헤맸던 일이 퍼져나갔을 수도 있고.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경이었다.
"신루. ……신루.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너보다는내가 그놈을 조금 더 잘 알 거라고 보는데,
그놈은 그렇게 인간적인 놈이 아니야."
정태의는 한숨처럼 말했다. 말하고 보니 입맛이 씁쓸하다. 아마도 앞으로도, 더 이상
이들과 만나지 않게 되더라도, 그 남자 본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정태의는 그렇게 씁쓸하게
그를 떠올릴 거다.그래도 그가 평안하길 기원하며.
신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쩌면 우는지도 모른다. 정태의의 시선이 닿는 뺨은 젖어 있지 않았지만그의
침울한 마음이 어쩐지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정태의는 손을 뻗었다. 그 보드라운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움찔, 신루가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나 피하지도 않고 꼼짝 않는 그의 조그만 머리를 정태의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역시 사랑스러운 아이다.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아이일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루는
여전히 풋풋하고,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신루. 나가려는
건 나 때문이야?"
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희미하게 정태의 쪽으로 조금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무거웠다.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의 선택지가 자신의 위에 얹힌다고 생각하니 그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형. 나는
그 남자가 너무 미워요. 그 남자가 만에 하나라도 형에게 손대려고 들면 어쩌나,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혀요."
신루가 중얼거렸다. 정태의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 아직 그런 류의
소문이 이 아이의 귀에는 안 들어간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나중에라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신루가 어떻게 나올까 생각하니 가슴속에 묵직한 돌이 하나 더얹혔다.
"형이 원한다면 난 여기에 있어도 좋아요.
나는 이곳 일도 좋아하니까. 형이 여기에서 나간다면 내가 여기에 있어도 괜찮아요.
그 남자에게서 멀어지겠다면."
신루는 맥락이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든지 생각나는대로 다급하게 말하는 것처럼, 정태의의 옷자락을 꼭 붙잡은
채 계속 그렇게 주절거렸다.
정태의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신루는정태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놓이면 잃을세라 정태의를 꼭
붙잡은 채 그의 바람만을 언제까지고 토로할 따름이었다.
* * *
존재 자체가 사기인 인간이란 게 있다. 그 의미는 몇 가지 있을 수 있는데, 정태의는 그런 인간을 이미 하나
알고 있었다.
그의 형은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고 좀 멍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실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끼적이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멍했는데, 하늘이나 허공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 멍한 얼굴 뒤로 보통 사람은 계산기를 들고 쫓아가도 따라잡기 힘든 생각들이 번개처럼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저런 애가 그렇게 천재라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정태의도
여러 번 들었다.
다른 의미로, 숙부도 어쩌면 그런
류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숙부는 딱 보기에도 만만찮은 인상이긴 했지만평소의 편한 차림으로 햇빛을 받으면서
한가하게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순하고 무던해 보였다. 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독설을 내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될 거다. 아마 같은 교관들 가운데서도 그 본성을 아지껏 모르는 사람이
있지싶었다. 저렇게 차이가 큰 사람도 흔치 않지, 라고 정태의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 두 사람 덕분에 정태의는 사람이 겉보기와 성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도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저 남자를 능가하는사기꾼은 절대로 없을 거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집어던진 장갑을 집어들며 인상을찡그렸다. 분명 아침에는 밝은 남색이었던 장갑은 한 나절도 다 지나기 전에 시커먼 빛으로 물들어 딱딱하게굳어 있었다.
정태의의 손끝에 말라붙어 바삭바삭하게부스러져 내리는 시커먼 가루가 묻는다. 응고된
핏가루다.
"진짜 사기라니까, 사기……."
정태의가 질린 듯 중얼거리자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던 일레이가 돌아보았다.
"뭐가?"
짧게 되묻는 그의 코앞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너 말이다, 너,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정태의는 으음, 하고말을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손을 닦은 물수건에도 벌겋게 피가 묻어나왔지만 정작그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하며 살펴보는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갓씻고
나온 듯 새하얀 얼굴은 말끔하고 단정했다. 그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제복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주름조차 지지
않았다. 말쑥하고 성실한 청년이라 해도 아무런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차림새였다. 수건을 가지런히 접는 손길도 얌전하다. 이렇게 보면 조용하고 인상좋은 청년이었다.
이게 사기가 아니면 뭐가 달리 사기겠어. 정태의는 주머니에서 새 장갑을 꺼내어 건네주며속으로
투덜거렸다.
교관은 대련이나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기본적으로 일대일로 맞선다고 할 때 부원이 교관을 당해낼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교관의 역할은 대련을 지켜보고 부족한 점을 짚어주는 것이지 대련에 맞서주는 것이 아니다. 가끔
참여한다고 하면, 시범 경기를 보여주는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는 교관이었다. 정규 일과에서 부원과맞설 일은, 원칙적으로는 없었다. 정중하게 격에 맞춰시범 경기를 구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피에 절어 있었다. 사실 평소에도 강의에서 느닷없이 달려드는 부원이 가끔 나오곤 해 부원과 겨룰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겨룬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참상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지만, 적어도정식으로 짜여진 일과
시간 안에서 그가 부원과 맞겨룰일은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럼에도 자유 대격 훈련중인 현재,
일레이는 열네 사람째의 피를 손에 묻혔다. (그 중 반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정도가 좀 심한걸……."
정태의는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깔끔하게 접은 것도 무색하게, 물수건을 쓰러진 남자 중 하나의 얼굴 위에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일레이는 새 장갑을 끼고 두어 번손을 움직여 보더니 정태의를 흘끔 돌아보았다.
"정도라. 어떤 정도가."
"글쎄, 뭐
이 참상도 그렇고……."
정태의는 말을 흐렸다. 뒷말을 이을까 했지만 그랬다간일레이의 이 잔혹한 행각을 비호해주는 듯한 기분이라도 들 것 같아 그만뒀다.
하지만 실제로 정도가 심한 것은 일레이의 대응만은 아니었다. 교관은 타깃이 아니라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마치 뒤를 쫓은 것처럼 다가와
습격을 한 부원은 일레이의 몸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 안에 숨겨두었던 칼을 내밀었다.
정태의는 피에 흠뻑 젖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그 손가락만한 칼을 주워들었다. 검지보다도 약간 짧아 일견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칼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사람의 손목 정도는 갖다대기만 해도 잘려나가겠다. 정태의는
질린 얼굴로 그 칼을 쳐다보다가 날을 집어넣고 주머니에 넣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일레이를 죽이려
드는 남자는 많았다. 그러니 드문 일도 아니라고 웃으며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점점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합동 훈련이 시작된 지 4, 5일 남짓.
훈련의 분위기나 긴장감은 지난 번의 훈련에 비할 데 없이 느슨했지만 정태의 개인적으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아주 사소한 빈틈을 노려 일레이에게 살수를 쓰는 사람이
갑자기 급증이라도 한 것 같았던 탓이다.
"일레이. 남미 쪽에도 어지간히 원한을 샀나 보지."
정태의는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남자들의 면면을살피며 중얼거렸다. 낯익은 얼굴도 있지만 낯선 얼굴도많았다.
"글쎄, 유럽에
있는 동안 남미 지부와도 몇 번 합동 훈련을 했었으니까. 아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미 놈들이랑도 가볍게 몸을 좀 풀긴 했었지."
일레이는 평연한 어조로 말했다. 정태의는 눈치채이지않게 일레이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안 봐도 알 만하다.
가볍게 몸을 푼답시고 사람을 개 잡듯 때려잡았겠지. 인간 백정도 저런 인간 백정이
따로 없을 거다.
정태의는 피웅덩이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는 남자를 발끝으로 살짝 뒤집었다. 한동안 병원 신세 깨나 져야 할법한 꼴로 기절한 그 남자는 안면이 아주 박살나 있었다. 이러면 원한을 품고 죽이려 든다 해도 할 말은 없겠다.
하지만…….
"……."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마뜩찮은 기분이들러붙어 찜찜했다. 훈련이 시작되자마자 타 지부의 부원이
교관을 노려 덤벼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이다. 물론 저 미친놈쯤 되면 온 세상에 심어놓은 원한이
한둘이 아닐 테니 어디서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않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
일레이에게 달려들면서 이 남자가 외친 말이었다. 그 외침을 들은 순간 정태의는 멈칫했다. 잠시, 자신이 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말을 듣고 일레이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더니 하아, 하고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번뜩 깨달았다.
일레이의 풀네임을 부르는 사람을 정태의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이 미친놈의 가리키는 말은 리그로우, 혹은릭이었다. 물론 풀네임이 비밀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알려진 이름이 후자인 탓인지,
아는 사람도 일레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의 성격까지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입에 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째서 정태의 자신은 '일레이'라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여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이외에는 일레이라는 말을 들은 바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일레이가 아시아 지부의 교관으로임명되어 이곳으로 찾아든 첫날,
총관실이라는 공식 석상에서 총관과 숙부가 그를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풀네임으로 부르긴 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정태의는 남미계의 외모가 고스란히 드러난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는 일레이를 모르는 사람이다. 신상명세를 훑어본 정도로만 알지는
몰라도, 그는 일레이라는 인간을 직접 접한 적은없는 사람이었다.
"원한도 없는 인간까지 칼을 들고 달려들 정도라면,
정말 갈데까지 갔군……."
정태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워낙 조그만 목소리라서 못 들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 제법 떨어져 있기까지하던
일레이는 용케도 듣고 되물었다.
"나 말인가?"
……. 귀도 더럽게 좋기는.
"그럼 원한도 없는 인간에게 칼을 맞을 인간이 너
말고이 안에 누가 또 있겠어."
정태의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애매한 어조로 수수께끼처럼 중얼거렸다.
"글쎄, 틀림없이
더 있을걸……. 뭐 하긴, 이렇게 노골적이고 유치한 수를 쓰는 것도
아주 보기 드문 일이긴하군. 이렇게 대놓고 공격해 들어와서 뭘 어쩌겠다고 이러나."
정태의는 자신에게 살수가 몰려드는 이 상황에서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ㅡ어떻게
보면 유쾌하기까지 한듯이ㅡ말하는 일레이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보지."
"여럿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 시점이라면 하나겠지."
"이 시점……."
정태의는 원한을 푸는 데에 시점을 따져야 할 필요성에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원수는 절대로 겨울에 노리면 안 돼. 반드시 여름에 노려야만 해.
그래야 상처가더 쉽게 곪아서 고생을 바가지로 하지', 그런 생각들을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총관 자리가 빌 날이 다가오니 여기저기서 난리군.
엊그제 밤에는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 드는 골빈 놈이 한밤중에 전화질을 하더니."
누가 들으면 한낱 재물 따위에 의리를 팔지 않는 훌륭한 마음가짐이라고 오해하겠다, 이 다이아몬드 숟가락아. 그런 삐딱한 생각이 불쑥 치솟는 와중에도 정태의는
일레이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꽤나 어이없는 얼굴을 했던 모양이다. 몇 걸음 앞서가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뒤따라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자 흘끗 돌아보다가, 그의 넋놓은
얼굴을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왜 갑자기 벌레씹은 얼굴이야."
"총관 자리가 빌 날이 다가오니 난리라니,
지금 이 상황이 자리다툼 때문이라는 소리냐?"
"아―――뭐 비슷하지."
"아니 총관 자리가 무슨 벼슬이라고……."
정태의가 허, 하고 헛웃음을 웃으며
중얼거리자 이번엔일레이가 잠깐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정태의도 입을 다문다.
UNHRDO의 지부 총관쯤 되면 엄청난 벼슬이긴 하다.
어느 호화로운 자리에 가든 어지간해서는 허리 굽힐 일이 없을 자리다. 알량한 동네
깡패 자리다툼에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하물며 이 정도 규모가 되는 기구의 탑 자리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도리란 게 말이지……. 아무리 세상이 썩어간다곤 하지만……."
정태의는 앓는 소리처럼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눈살을 찌푸렸다.
"총관 자리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거라면……,
장틸이 이런단 소리냐?"
일레이는ㅡ그의 정확한 출신 성분은 불분명했지만ㅡ키펜한의 후임으로 들어왔다. 그 자리의 줄을 타고 올라가 보면 그 끝에는 마오 리 인이 있었다. 루돌프
장틸과총관 자리를 두고 다투는 남자다. 그렇다면 뭔가 복잡한 속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은 일레이를 없애려 한다면마땅히
그 상대 파벌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빤한 수를 쓰다니 오히려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정태의가
미심쩍게 일레이를 바라보자, 일레이는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손을 저었다.
"틀렸어. 아니 뭐 장틸일 수도 있겠지만, 장틸만 의심할수는 없는 거지. ……태이. 별 대단한 벼슬자리도 아닌이 UNHRDO의
총관 자리에는 말이지, 비단 그 지부의권력 관계만 관련되는 게 아니거든."
별 대단한 벼슬자리도 아닌, 이라는 대목을 미묘한 뉘앙스로 말하며 슬쩍 비웃음을 띤 일레이는 울컥 노려보는 정태의의 시선을 못 본 척 넘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다고 생각해?"
왜냐면 내가 올해 삼재거든, 하고 속으로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정태의는 납득했다. 한 곳의 자리가 비면 그 지부 내부의
인원만으로만 그 자리를 메워넣는 게 아니었다. 타 지부들과 본부의 인선이 모두 얽혀 돌아가게 된다.
이번의 경우는 비게 될 총관 자리에 적임인 두 사람이 우연히 다 같은 지부 내에 있었지만, 그들중 누군가 올라가고 남게 될 차관 자리 역시 마찬가지이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곳도 나름대로의
야욕이 얽혀돌아가는 동네였다. 홍진에 뭇친 분네 참 많기도 하다.
멀리서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모퉁이 너머에서도 대격 훈련이 한창인 모양이다. 그쪽을 향해 걸어가는
일레이의 뒤를 못마땅하게 쫓아가던 정태의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도 그 기척을 느낀 일레이가 돌아본다.
"그럼 지금쯤 호주에 가 있는 삼촌도 안전하지는
못하다는 소리겠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했다. 일레이는 다시금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흠, 한숨을 쉬었다.
"정창인 교관은, 누가 노린다고 호락호락 당해줄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누가 노리면 그걸 꼬투리 잡아서 잘됐다고
이용해먹을걸."
듣고 보니 그 말도 대단히 그럴 듯했다. 그러나 어쩐지칭찬이라기보다는 험담에 가까운 말을 들으니 친지로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확하게 파악은 했다만…….
정태의는 떨떠름한 기분이 가시기 전에, 다시 내디디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울컥할 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즉 교도관의 직위 교체가 있을 시기가 되면 내부는 음험한 암투가 벌어져, 그 관계자는
제법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숙부는 딱 그럴 시기에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심지어는 ㅡ이건 반드시 숙부가 꾸몄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ㅡ교위까지 떠넘겨버렸다.
삼촌, 내가 무슨 재의
형도 아니고, 이러다 재수 없으면꼼짝없이 죽는 건데!
정태의는 숙부가 지금 이 지부에 남아 있기만 했더라면당장 달려가 그 멱살을 붙들고
짤짤 흔들어줬을 거라고생각하며 속으로 외쳤다.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험한 꼴만 보게 되는 동네였다. 이 동네에서 그렇게 오래굴렀다니 숙부가 저런 성격이 된 것도 이해
못할 바는아니다. 문득 정태의는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저놈이 저런 성격이 된 것이 이 환경 탓일까. 원래는 좀더 건전한 성격이었는데 이 천박한 환경에 치이다 보니살아남기 위해 저렇게 되었다면 그건 가엾이 여길
만도하다. 하지만……역시 그럴 리가 없지.
예전에 얼핏 들었던 일레이의 옛모습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이런 웃기지도 않은 장난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일레이는 바닥에 널브러져 발치에 걸리는 몸을 귀찮다는 듯이 걷어차 치우며 말했다.
"죽여서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놈은,
적어도 자리다툼에 관련되어 있을 만한 위치의 인간 중에는 없어.그런 바보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지. 아마도어떤 놈의 옆에 붙어 있는 멍청이가 바보짓을 한 거겠지."
"하아……. 하긴 죽여서 없애지 않아도 치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테니."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군에 있으면서곁귀로 듣거나 혹은 그 한 귀퉁이를 직접 보기도 했었다. 그쪽은 지위의 상하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긴 했지만, 파벌이나 자리에 따른 신경전은 여느 곳
못지 않았다. 한때는 평생 말뚝 박으리라고 생각했던 군대를 떠나오면서 분명히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더러운꼴을 다시 볼 일은 없으니 그것만큼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던 참인데. 이제 보니 홍진에 뭇친 인간은 나였구나.
정태의는 우울하게 생각하며 일레이의 뒤를 따랐다. 점점 소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모퉁이만 돌아들면 여남은 명은 되는
놈들이 떼로 영겨붙어 싸움박질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가급적이면 까마귀 노는 데에 가고 싶지 않았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일레이는 새로 장갑을 낀 손을 쥐락펴락하며 서슴치 않고 그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걸려오는 싸움이라서 그냥 받아주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냥 싸움판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백로랑 놀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까마귀 중에서도 상까마귀가 붙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가는 삼재가 지독하더니, 올해가 그 해인 게 틀림없다. 정태의는 앞서 걷고 있는 일레이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모퉁이를 앞두고 있었다. 그 옆 동편 강의관으로 이어지는 지름길 삼아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넓이로 뚫려 있는 길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정태의와 일레이의 사이였다. 고작해야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그 사이로, 한 사람이 끼어들며 팔을 휘둘렀다.
"……!"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일레이가 돌아보는 것보다먼저, 정태의는 자신보다 두어 뼘은 더 큰 그 거구의 품에 뛰어들듯이
달려들었다. 퍼억, 그의 가슴에 온 체중을 실어 어깨를 부딪친 정태의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 푸르스름하게 은색으로 번쩍이는 걸 머리 위로얼핏 보았다. 그 흉흉한 은색 물건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일레이의 머리 위로 똑바로 떨어져내리는 그 날카로운
빛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달려든 정태의와 함께 거구는 벽에 등을 거세게 부딪혔다. 그 결에 그가 휘둘러내린 흉기가 퍼석, 벽에 박힌다. 정태의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벽을 찍은 그물건을 확인한 순간, 소름이 주욱 끼쳤다.
은색으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손도끼였다. 손도끼라고는 해도 어른의 손바닥만한 그 흉기는 잘만 휘두르면 황소도 쳐죽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에게 먹힐 만한 무기를 써야 하긴 하지만, 저런 건너무 심하잖아.
정태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달리 더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 새끼가……!!"
정태의가 달려들어 도끼를 헛방질한 거구는 두 손을 깍지 낀 주먹을 그대로 내리쳤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다급하게 주먹을 휘둘러 올려 거구의 손목을 후려갈겼지만,
쳐내리는 힘이 정태의의 힘을 상쇄하고도 남았다.주먹이 정태의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젠장, 도끼로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이것도 곱게 끝나진 않겠구나……!
순간적으로 각오를 굳히고 얼굴을 찌푸렸다. 팔로 머리위를 가리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주먹에 맞으면 팔목뼈도 틀림없이 아작날 거라고 각오를 굳히며머리를 보호하는 데에 급급했던 정태의는,
주먹이 날아올 때를 지나도 날아오지 않자 흘끔 고개를 들었다.
"왜 사서 매를 벌어."
머리 위엔 거구 대신 일레이가 있었다. 길게 팔을 뻗은일레이의 손에는 거구의 머리가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그
머리는 벽에 부딪혀, 하얀 벽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끔찍하게 튀어 있었다.
"일……."
"흐음……. 모가지 하나쯤 쳐내는데에는 쓸 만하겠다."
일레이는 무심한 얼굴로 허리를 구부려 벽에 반쯤 박힌도끼를 어렵잖에 뽑아내었다. 자루를 손에 들고 한두 번 흔들어 무게를 가늠해본다. 도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붕, 붕, 섬뜩한 소리가 났다.
"넌 가끔 보면 사서 매를 벌거든.
왜 그래."
진지하게 묻는 그 얼굴은 농담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자식아, 너 도와주겠다고 그런 거잖아, 네가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을 줄 내가 알았냐, 어디.
등 뒤에서 덮치는 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발이 정확하게 그놈의
가격할 만큼 상식에서 벗어난 놈일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앞으로 눈앞에서 누가 이 남자에게 칼을 휘두르든 도끼를 휘두르든 못 본 척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정태의에게,일레이는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아픈 걸 즐기는 체질인가?"
저 도끼를 빼앗아서 저놈의 머리를 콱 찍어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시에, 만일 자신이 그런 체질이었더라면 이놈에게 시달리다가 기절하고
앓아누운 그날 몹시 즐거웠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생각 모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모퉁이에서 벌어진 사소한 소란을 들었는지, 그 너머에서 싸우던 놈들이
몰려왔다. 몰려왔다기보다는 그쪽에서 벌어지던 싸움이 일레이를 보자마자 당장 이쪽으로 번져왔다고 하는 게 옳겠다.
불행히도 일레이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돌벽에박혀도 날 하나 상하지 않는 아주 예리하고 훌륭한 물건이다. 그나마도
다행스럽게 그 괴물의 손에 도끼까지들려있는 걸 본 남자들은 흠칫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바로 옆에,
얼굴을 벽에 박고 핏물을 흥건하게 흘리고 있는 본보기도 있었다.
"악마 같은 놈……."
누군가 불쑥 중얼거렸다. 공포와 불안에 젖은 그 목소리는 아무래도 쓰러져 있는 남자와 도끼의 상관 관계를오해한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구태여 정정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악마 같은 놈이라고 인식하고 다들 물러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세상 일은 정태의가 바라는 대로 그리 호락호락흘러가주진 않았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그 남자들은마치 거국의 침입을 받아 뭉치기로 한 부족 국가의 양상을 띠었다.
옆에 있는 놈을 후려갈기던 무기로 일레이를 겨누었다. 남미 놈들이 태반이나 섞여
있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얼굴을 보니 아주 솜털도 보송보송하게남아 있는 게, UNHRDO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딱 보였다. 싸움을 하는 자세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몸에 익지는 않았다는 것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저렇게 당당하게일레이에게
무기를 겨누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의 소문이 온 지부 곳곳에 퍼졌다고 들었는데, 저놈들은 아직 그 진면목을 제대로 못 본 모양이었다. 그 진면목을 번연히
알고 있는 아시아 지부원들은 그런 남미 부원들을 흘끔 쳐다보며 '너네도 이 기회에 한 번 죽어봐라'라는 얼굴을 했지만, 도망가는 편이 낫다고 알려줄 만한 의리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역시 도끼까지
갖춘 일레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게 뻔했기에 사서 전력을 줄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아홉 대 하나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시작되자마자 싱겁게 끝났다.
하나, 둘,
셋, 딱 세 명째의 남자가 쓰러진 순간 그들은전의를 잃었다. 세 명째에 쓰러진 남자가 좀 혹독한 꼴을 당하긴 했다. 어린놈들이 달려들자 일레이는 믿어지지
않게도 그 나름대로 귀엽게 봐 줄 셈이었는지 도끼자루로 콧잔등을 찍어 코뼈를 부러뜨리는 정도로 치웠다. 그러나
세 번째 놈은 어설프게 실력이 좋았다. 그게자신의 발등을 찍었다.
강한 놈일수록 더 확실하게 박살을 내는 일레이는 세 번째가 도끼자루를 피하며 일레이의
허리께에 파이프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팔꿈치로 그놈의 손목을 찍어 파이프부터 걷어내었다.
그리고 픽 웃더니, 도끼를쥔 손을 늘어뜨려 아래에서 휘익 호를 그렸다.
가볍고 아무렇지 않은 움직임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끼가 둥글게 호를 그리며 공기를 가른 순간, 세 명째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허벅지에서 피가 터져나오며 갈라진 살점 안으로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비명을 지르는 세 명째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그 뒤로 연달아 다려들던 자들은 얼굴을 굳히며 멈춰섰다.
"야, 이
미친 새끼야……, 훈련을 하면서 사람을 이 꼴로 만드는 놈이 어디――――!"
"다음 놈은 팔이다. 팔은 다리보다 얇으니 가뿐하게 잘려나갈 걸."
일레이를 향해 시퍼런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레이는 평연하게
말했다. 그에게도피가 제법 튀었는데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조금 전막 갈아꼈던 장갑이 다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그곳엔 정적이 흘렀다. 일레이는 도끼를 장난감처럼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휘두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놈은 수직으로 어깨야.
재수 좋으면 살 수있을 거다."
"…ㅡ."
"그 다음 놈쯤 되면 목으로 할까……."
어쩌면 그들은 일레이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는지도모른다. 농담으로 여기면서도 눈앞에서 피투성이 다리를 움켜쥐고 나뒹구는 동료를 보며, 그에게 담벼들길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는ㅡ그리고 다른 아시아 지부원도ㅡ일레이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훈련을 하다보면 불가피하게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한다고 기구에서는 표면적으로 말하고는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이 남자를 놔둔다면 '불가피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사라지고 말 거다.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달려들려는 걸붙잡아 멱살을 쥐어 가로막고 있던 남자를 놓아주었다.
세 번째 남자의 다리가 반쯤 잘려나가 너덜거리기 전에태평하게도 '도끼를 들고 있는 놈이라면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지. 저런 걸 들어봤자
함부로 휘두르지도 못할 텐데, 그럼 오히려 저런 흉기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방해가 되거든.'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달려들려던 놈이었다. 그의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여느 사람이라면 도끼를 함부로 휘두르다가 사람이 잘못 맞아 크게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금 삼가는 경향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말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 남자는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내가 오늘 너 목숨 구해준
줄 알아라, 정태의는 더 이상 일레이에게 달려들려고 하지 않는 그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선행을 많이 했으니 죽으면 천당 가겠다. 대신 살아 생전 내 몸에는 사리가 켜켜이 쌓이겠지만.
"교관은 원칙적으로 시범 경기 외에는 대련을 받지
않는다는거, 알지."
정태의가 뒤에서 슬쩍 말문을 텄다. 일레이가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정태이.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새 잊었나?"
"천만에. 하지만 지금은 대련 시간이거든. 좋은 게 좋은거지. 안
그래?"
대련 시간과 좋은 게 좋은 것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정태의는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레이는 못마땅한 듯 입매를 찡그리다가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오늘은 마음을 곱게 먹기로 결심이라도 했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좋을 대로 해라,
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도끼를 치켜올리더니,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도끼를 내던졌다.
"…ㅡ!"
섬뜩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세차게, 바로 귓가를 비껴나가 머리카락에 몇 올 스친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윽고 파삭, 커다란 타격음을 내며 정태의의 옆에 박혔다.
돌기둥에 날 끄트머리가 박힌 도끼는 잠시 그대로 멈추는가 싶더니 곧 파삭파삭 부서져 흘러내리는 돌가루와 함께 바닥 위에
떵 하고 떨어졌다. 두어번 뒹굴다가 멈추는 도끼가 섬뜩하게 번쩍이며 정태의의 발 옆에 멎었다.
정말로 마음 곱게 먹을 결심을 했나보지. 그래도 옆으로 비껴 던지다니.
그런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조금 슬퍼졌지만, 어쩔 도리 없었다.
정태의가 침울하게 도끼를 주워 다시 주머니에 챙겨넣는 동안, 현명하게도 남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부러 느릿느릿 도끼의 핏자국까지
닦아서 넣고 보니 복도에는 일레이와 자신, 둘만 서 있었다.
비뚤어지게 생각하자면, 저놈들 저 삭막한 살인광과 나를 둘만 남겨두고 도망친 거잖아. 마음이 침울해진 정태의는 우울한
방향으로 사고를 돌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저, 어서 이 망할 합동
훈련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남미 지부와의 합동 훈련은 유럽 쪽에 비해 상당히 무난하게 흘러간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무엇보다 부원들의 피해 상황에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요전의 훈련에는 사망자도 몇이나 나왔고 부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매일같이 의무반이
넘쳐날 정도였지만이번에는 부상자는 끊임없어도 아직 죽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사나흘 정도면 합동
훈련이 끝나고, 짜여진 프로그램 구성상 이제 생명이 위험할 만한 훈련은 거의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사망자
제로를 점쳐도 될 만했다.
교관의 심부름꾼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교위인 정태의는 정규 일과가 시작되기 전의
이른 시간부터 잡일을 해야 했다. 중요한 일들은 아니다. 지부 내의 중요한일들은 교도관과 교호가 처리하고, 교위는 단순히 교관이 시키는 사소한 잡무를
하면 되었다.
일레이는 유능한 교관이었다. 성격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일레이의 교위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적어도 정규 일과
외의 업무에서는 거의 할 일이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침에는 종종 눈치를 봐서 교위 일을 빼먹기도 하는
정태의는, 아침부터 일레이가 전화를해 서류 따위를 챙겨달라고 했을 때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흔쾌히 승낙했다.
(사실은 승낙이 아니라 마땅히그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이 기건 동안 오가는 서류는 대부분이 각 지부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합동 훈련의
경과에 관한 것들이었다. 정태의는 가끔 자신의 손을 거쳐가는 서류들을 보면서 다른 쪽에서도 별다른
탈은 벌어지지 않고 무난하게 훈련을 마쳐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숙부가 가있는 호주 쪽의 자료는 몇
초쯤 더 주의깊게 읽었는데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아주 훌륭한 인선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나름대로 부작용을 낳긴 했지만."
정태의는 현재까지 사망자가 없음을 알리는 통계를 짚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괴물 같은 살인마가 교관이 되더니 사람을 안 죽이게 되었다고, 섣부르게
말을 해도 일단은 될 것 같았다. 나중에 사고가 터지게 된다 해도 지금으로선 그런 변명을 할 여지는 있었다.
혹시 이럴 걸 예측하고서 교관 자리에 빈곳이 생기자마자 저 녀석을 집어넣은 거라면
누군지 몰라도 그 인선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줘야 하겠다. 비록 유럽 지부
내에서는 들끓는 원성을 사고, 인간 인생 여럿 피폐하게말아먹었지만. 그리고 피폐하게 말아먹은 인생 중 하나인 정태의는 잠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우울에 잠겼지만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저놈 옆에 붙어 있으면서 아직 죽지는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의외로 정태의도 운이 좋은지도 몰랐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어쩐지 서글픔을 느끼는 정태의였다. 일레이가 말한 서류를 집무실에서 받아 그걸로 부채질을 하며 교관실에 도착했을 때는 8시도 채 안 된시간이었다. 정태의가 한 뼘쯤 열려 있는 교관실 문을열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두 명의 교관이 있었다.
호주 지부로 부원들을 인솔해 간 두 명과 교관실에는 거의 있지 않고 어령을 맡아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한 명을 제외해도 한 명이 비었다. 누가 비었느냐면,
정태의에게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한 일레이였다.
아마도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그의 자리에는 조금전까지 누군가 앉아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직 덜 마친 일거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두 교관ㅡ그림슨과 맥킨ㅡ은 들어오는 사람을 흘끔 시선으로만 확인하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컴을 앞두고 뭔가를 확인하며 틈틈이 신문을 읽는 조금 한가해 보이는 그림슨이
제일 안쪽 자리, 그 옆이 숙부의 빈자리였고 그 건너편에 맥킨이 앉아 있었다. 그 옆이 일레이다.
"보고서인가? 잠시 보여주겠나?"
사람을 불러놓고 어딜 갔나, 하고 입 속으로 투덜거리며 정태의가 일레이의 자리 위에 서류를 가지런히 올려놓는데, 그 옆에서
맥킨이 손짓했다. 파티션으로 가려져 있었는데도 정태의가 들고 들어오는 서류를 용케 보았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아, 네, 하고 대답하며 맥킨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어차피 일레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런 류의 서류는 다 같이 공유하는 터였다.
맥킨은 고맙네, 라고 짧게 말하곤 서류를 받아들었다.
정태의는 그가 다 훑어본 뒤 다시 서류를 돌려주기를 그 옆에서 기다리며, 서류에 시선을 주는 맥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UNHRDO 지부의 교관이라고
해서 특이하게 생겼을 까닭은 없지만, 맥킨은 제복만 벗으면 여느 동네의 아저씨나 다름없었다.
눈꼬리가 처지고 얼굴 윤곽이 둥글둥글한 편이라 그런지 얼핏 보기엔 다정해 보기이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교관들 가운데서도 가장 성격을 맞추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나마 숙부와는 같은 차관을 모시는 탓인지 이야기도좀 하고 지내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과 편하게 농담을 나누며 웃는 모습을 못 봤다.
――――지금 교관실로 오게.
지난 밤 자정도 넘은 시간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정태의가 전화를 받아들자, 수화기 안에서는 전화 특유의
기계음이 한꺼풀 입혀진 맥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을 넘어서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를 보며 정태의는 아하, 하고 생각했다. 숙부는 맥킨을 도와주라고
했었다. 도와준다고 말을 유하게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시키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숙부가 그 말을 했을 때부터 뭔가 수상쩍고 번거로운 느낌이 풍겨 내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이 와서야 더욱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맥킨이 시킬 일이 어떤 류의 일인지 짐작가는 바가 있기도
했다.
방식은 알 수 없지만 이것도 틀림없이 '자리다툼'과 관련된 일일 게 틀림없었다. 일레이가 스치듯 했던 말도그렇거니와, 요즘은 교관실에 가면 가끔 칼날 같은 분위기가 정태의에게도
느껴졌다. 파랗게 긴장되었다고해야 할까, 좀더 험악하게 말하자면 흉흉하다고
해야 할 공기가 감돌았다. 그나마 지금은 교관의 수가 반으로 줄어서 나은 편이다. 훈련이 시작되기 전, 교관들이모두 있을 때에는 웃는 와중에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날카로운 공기가
노골적으로 와 닿을 정도였다.
권력욕이라는 것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이끌어간다고는 하지만 그 욕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건 사양인데,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정태의는 약속한 바가 있으니 맥킨이 부르는 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넘은 교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딱 한 사람, 맥킨만이 자리에 앉아 정태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없는 한밤중의 교관실은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정태의는 들어서자마자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맥킨은 다른 생각을 했는지 '교관실에는 기록 카메라가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의심할
것 없어'라고 말했다.
정태의는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오래 끌지 않았다. 정태의가 교관실로 가는 동안 내도록 걱정했던
것처럼 험악하거나 위험해 보이는 이야기도 아니었다.어떻게 보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하고 손쉽다고 할 수도있는
일이었다.
―――모레, 아니 이제 자정이
지났으니 내일이라고 해야겠군, 27일 새벽 4시 반부터
4시 40분까지 10분 동안.
반드시 그 시간이어야 하네. 그 시간 동안 이쪽으로 접속해서 자료 하나를 받아주게.
자료명은 거기 적어뒀지만 혹시 모르니 받은 뒤 내용을 한 번 체크하도록 해. 내용은
아마도 그냥 봐서는 모를 테니, 제일 위의 서너줄과 제일 아래의 서너 줄만 맞는가 보면 될 거야.
거기적어놓은 것과 일치하면 돼. 그리고 그 자료를 제일 아래에 있는 주소로 전송하도록.
맥킨은 메모를 건네면서 말했다. 맥킨에게 흘끗 시선을주고 그 메모를 펼쳐본 정태의는 몇 개의 주소오 패스워드 따위가 적힌 몇 줄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곤 다시 집어넣었다.
과연.
여기에 오면서도, 맥킨의 말을 들으면서도
의아했었다.아무리 자신이 정창인 교관의 조카라고 하고 정식 지부원도 아니라고는 하지만, 분명 비밀로 취급되어야 할 건에 이렇게 연루되어도 괜찮은 건지. 일을 돕다 보면 그 내용도
자연히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게 될 텐데 이렇게 함부로 일을 맡기겠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만일 숙부가 말을 꺼낸 일이 아니었더라면 정태의는 '일 다 마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메모를 보고는 납득했다. 틀림없이 이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비밀로 지켜야
하는 게틀림없지만, 그 일을 하면서 정태의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짐작만 할 뿐 자신이 어떤 것에 손대고 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내용을 확인하라며 몇 줄 적어준 문자는, 그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맥킨이 뚫어져라 보고 있어 그 자리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들지 않아 금방 집어넣고 말았지만, 알파벳과 숫자가 복잡하게 조합된 수열과 부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과연, 어딘가에서 기밀을
빼내어 어디론가 넘기는 것 같긴 한데……어디인지도 모르고 무슨 내용인지도 알도리가 없는 거군.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뭔지 모르면서도 뭔가 수상쩍다싶어 내가 이걸 빼돌려 버리면――――까지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세계 안보사 강의에서 들었던, 뭔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내돌렸다가 목숨 잃은 케이스를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섯가지는 들수있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갈무리했다. 맥킨은오래 머물 생각은 없는 듯 정태의가 메모를 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지 말고 시간을 반드시 엄수하게.'라는 말만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못 박은 뒤 맥킨은 먼저
교관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려 천천히 뒤따라 나섰다.
그것이 바로 지난 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시간도채 지나지 않았다.
맥킨은 어젯밤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정태의가 건넨 자료를
훑어보았다.
"흠. 호주
지부에서 마카디가 다친 모양인데."
맥킨이 무심하게 말하자 파티션 건너편에서 그 소리를들었는지 그림슨이 '마카디가? 쯧쯧. 그 자료 이리로도좀
가지고 오게나.'라고 말했다.
철마나 각 지부 사이에 합동 훈련이 벌어지고 그 외에도 UNHRDO 총회의가 달마다 있어 교도관들은 다른 지부에서 근무하더라도 서로들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른곳에 있지만 예전에는 한때 같은 지부에서 근무했다는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 다른
지부의 교도관이 다쳤다고 하면 그들은 잘 모르는 남이 다친 것과 친한 친구가 다친 것의 가운데쯤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나 잠시 안쓰러워하는 정도이다.
평소라면 '다쳤나?
그것 안 됐군.' 정도로 그치고 말 텐데 굳이 그 자료를 보겠다는 건,
교관들 사이에 흉흉한기운이 흐르는 요즘의 이 기류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모양이지.
정태의는 속으로 중얼거리자 맥킨에게 돌려받은 자료를 이번에는 그림슨에게 배달했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놓고 자리를 비운 이 망할 놈은 언제쯤 오려나 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 * *
오래 전의 느낌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영화연구부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물론 영화연구 같은 거창한일은 하지 않았고,
그냥 매주마다 적당한 영화를 한 편씩 보았을 뿐이었다. 그나마 연구다운 일을 하는
건 한학기에 한 번, 학기말이 되면 학생 활동 평가가 있기 때문에 영화 감상문 같은 걸 써서 제출할 때뿐이었다.
영화는 서너 명이 주제를 정해 하나의 영화를 두고 썼다.
그때 정태의가 속했던 모임은 그 또래 사내아이들의 어린 치기가 섞여 하드고어를 주제로
잡았었다. 일요일 낮에 집이 빈 녀석의 집으로 찾아 들어가 어렵게 구했다는 하드고어를
두 시간 동안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정태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액정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합동 훈련이 끝나가고 있었다. 훈련기간 동안의 자료를 편집해 쓸 만한
부분을 추려서 마지막 날부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지막 일과였다. 그리고 그일을 떠맡게 된 교관 일레이가
귀찮다며 정태의에게 넘겨버려, 정태의는 하는 수 없이 열흘치의 기록을 넘겨보아야 했다.
열흘치라곤 해도 이미 교호가 한 번 추려내어 편집도 거의 마친 것들이라 서너 시간쯤
보면서 정리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영상들을
보기 시작한지 두어 시간째.
정태의는 보기도 싫은 영상을 감상문 때문에ㅡ사실은 감상문 따위 제출하지 않고 그냥
평가점수를 안 받고 말리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친구들과의 합동 점수가 걸려 있기 때문에 차마 그들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ㅡ보아야 했던 오래전의
그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고있었다. 훈련기간 동안의 자료라며 넘겨받은 영상 안에서는 피와
살이 튀고 있었다. 그나마 일대일 대련 자료같은 건 낫다. 팔이 부러지거나
뇌진탕을 일으켜 의무반으로 실려가는 모습은 하도 많이 봐서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무차별 자유 대련은 저도
모르게 으윽, 하는소리가 나오는 영상이 제법 있었다.
특히 일레이가 잡힌 영상은 십중팔구 그랬다.
사람이 죽지만 않았다 뿐이지 거의 핏덩이가 되어서 실려나가는 장면을 세 번 연속으로
보고 나니 입맛이 뚝떨어졌다. 정태의는 열흘치의 자료들을 고스란히 훑으며 편집해나갔을
교호를 가엾이 여기며 영상을 정지시켰다. 아직 반 정도밖에 보지 않았지만 피가 벌건 화면만 보고 있자니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안 되겠다.한숨 돌리고 온 다음에 대충대충 넘겨가면서 보고 돌려줘야지.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정규 일과를 마친 저녁 시간,
모처럼 한가하게뒹굴 수 있을 때에 저런 영상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니스스로가 좀 가엾었다.
잠깐 위로 올라가서 바깥 공기나 좀 마시고 올까, 목덜미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막 일어나는데 전화가 울렸다.
빨간 색 램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외선이다. 지금 외부에서 정태의에게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라면 짐작 가는곳은
하나뿐이었다.
"여보세요."
'잘 지내고 있어?'
역시나, 숙부였다.
십중팔구는 숙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의외성을 기대했던 정태의는
어쩐 일이세요, 라고실망스레 중얼거렸다.
'글쎄, 별 일은 없는지
전화해 본 거지. 무사히 살아 있지? 훈련은 받을 만하고?'
"어차피 이쪽 기록도 그쪽에 다 갈 것 아니에요.
죽은 사람도 없고 다친 사람은 좀 많고, 그냥 그렇죠. 그래도지난 번 합동 훈련보다는 낫네요.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웃는 기척이 들렸다. 그래, 그 녀석치고는 훌륭한 성과구나,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수없는 대답이 들려온다.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 숙부가 뭔가 달리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했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무엇보다 전화로
이야기하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사람도 아니다.
"…ㅡ아, 그렇지. 거기서 연락 왔었어요."
정태의는 문득 생각난 듯 심상하게 말했다. 숙부는 아주 잠깐 사이를 두고는 곧 아하, 하고 웃었다.
'슬슬 그럴 때가 됐지.'
그 말만 짧게 하는 숙부에게 정태의는 그런가요, 라고만 대답했다. 그럴 때라. 과연,
시간을 지정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있었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자세하게 물을 생각은
없어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오래 얘기해서 좋을 문제도 아니고, 숙부가
전화한 이유도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용건도 없으면 슬슬 전화를 끊을까 하고 생각하며 숙부와 시덥잖은 말 몇 마디를
나누던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일레이가 들어왔다.
정태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나오는 시뻘건 화면을 본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말끔한 실물을 보니 그 느낌이 또 각별했다. 각별이 괴리감처럼 느껴졌다.
"일레이……."
어쩐 일이냐고 물으려고 입을 열던 정태의는 아직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 너머에 있는 숙부에게도 그 소리는 들린 모양이었다.
'아하. 그놈이 왔어?"
"아, 예,
뭐……."
애매하게 중얼거리며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전화를 하고 있는 정태의를 보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개의치 말고 계속 통화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자기 방인 양 침대로 가 드러눕는다.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정태의는
입맛만 쓰게 다시고 말았다.
'그래, 그러면 조만간에
보자꾸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직통 번호는 기억하지?'
숙부도 이미 볼일은 다 마친 듯 전화를 끓을 기미를 보였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적어뒀어요.
그런데 뭐 연락할 일이 있겠어요. 며칠 안 있어 볼 건데. 모쪼록 남은 날도 몸조심하셔서 성하게 돌아오세요."
정태의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성치 않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상정하고 있는 듯한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 드는구나'라고 웃으며 대답한 숙부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도 전화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고 나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가 나른하게 말했다.
"정창인 교관?"
"음."
"어쩐 일이래, 그 사람이 전화를 다 하고."
"……조카가 무사히 살아 있는지 걱정이 되셨나 보지."
저 말 앞에 '살인마가 활보하는
곳에 남은'이라는 말을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정태의
자신이 생각해도 숙부는 그런 이유로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그 대답으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의자를 반 바퀴 돌려 일레이를 마주보았다. 어쩐 일이냐고 물어볼 셈이었지만 일레이의 시선은 이미 정태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책상 위,
정지 화면으로 멎어 있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하. 기록
체크를 하고 있었나 보군."
남 일처럼 말하는 그 말을 들으니 뭉근하게 부아가 솟는다. 이 일은 원래라면 일레이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달리 할 일이 있다고 건성으로
말하며 정태의에게 기록자료들을 떠넘긴 주제에 이렇게 편하게 찾아온 모습을보니 심사가 뒤틀리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넘겨도 넘겨도 빨간 화면인데 그때마다 꼭 화면엔
네얼굴이 비치더군. 네 전기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일차적으로
편집이 됐으니 저 정도겠지."
부루퉁하게 한 마디 해주고야 말았다. 그러면서 정태의는 생각했다. 저 살인광 미친놈을 상대로 이렇게 자유롭게
지껄이다니 자신도 대단히 배짱이 좋아졌다. 누가보면 자포자기한 줄 알겠다. 나갈 날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저 손에 죽기라도 하면 억울하기 그지없을 테니 더 이상 위험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원치는 않았지만 자신의 방에 온손님이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묻는다.
"뭐 마실래? ……아니, 생각해 보니까 물밖에 없다. 물마실래?"
"아니, 됐어."
일레이는 고개를 젓곤 정지되어 있던 화면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다시 피와 살이 튀는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원들이 대련하는 화면을
마치 스포츠라도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일레이를 보며 정태의는 물을 통째로 꺼내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옆모습을 구석구석 살폈다. 이렇게 보면 정말이지 범상하고 말쑥한 청년이다. 저 화면 안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광인과 같은 인물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당장 눈앞에서
그 두 가지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정태의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정태의는 물병을 손에 든 채 떨떠름하게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린 순간 딱 들어온 광경은 일레이가 그 자신보다도 몸집이 커다란 남자의 머리를 움켜쥐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그 머리를 돌벽에 처박아버리는 장면이었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벽에 박힌 남자의 머리를 중심으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태의는 으, 하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 정도야 우습지도 않을 정도로 흉한 꼴을 숱하게 봤지만 그래도 역시 봐서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다.
차라리 스플래터를 보는 게 낫겠다, 하고 생각하면서 화면을 보다가 정태의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본
것 같다 했더니, 그때 그 남자였다. 도끼를 들고 설치던.
아니나다를까 남자의 조금 옆에 정태의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일레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벽에 박혀 있는 도끼를 뽑아내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 저 남자에게 한 방 거하게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일레이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 되어버렸다. 아마 저때 일레이가 자신에게 했던말이…….
"사서 매를 버는 놈이란 말야……."
그래, 그래,
딱 저런 말이었다. 정말이지 말 한 마디라도 곱게 할 줄은 모르는 녀석이다.
정태의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일레이가 비치고 있었다.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참
잘 어울렸다. 그 모습에 친숙함마저 느낄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불쑥 말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역시 말한 기억이 없었다.
고심하는 기색으로 말을 도중에 끊은 정태의를 일레이가 흘끗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다시 무표정하게 화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때, 도와줘서
고마웠어."
"……. 도와줘?"
일레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정태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러나 정태의의 시선을 쫓아
다시 화면을 쳐다본 그는 그제야 이해했는지 아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천만에."
물론 천만에, 겠지.
정태의는 고맙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정태의가 저 거구에게 얻어맞기
직전에 일레이가 그를 벽에 처박아버린 건 정태의를 도와두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거구가 원래 일레이를노렸던
탓이란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정태의는 불현듯 요전에 신루가 금세라도 울듯한 얼굴로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ㅡ형한테 흑심을 품고 있잖아요! 그 남자가 형 좋아하잖아요!
"……."
정태의는 슬쩍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엄지로 입매를문질렀다. 누가 머릿속을 들여다볼 것도 아닌데 몹시 머쓱했다. 사실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그런 발상을 해낼 수 있었던 신루의 머릿속을 들여다봐야겠지만, 정태의는 자기가 말한 것도 아닌데 괴로울 정도로
민망한 심경이 되어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안간힘썼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화면 안에서는 도끼를 가볍게 놀리는 일레이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런 연후에야 드디어규율 대련 영상이 나오기 시작해 정태의는 겨우 핏빛 영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정태의는 영상에서 숨을 돌리다가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는 용건이 있으면 대체로 전화를 하거나 자기
방으로 불러내었다. 가끔 찾아와서 용건을 전할 때엔 할 말만 하고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들어와서 느긋하게 뒹굴고 있다는 건 별 볼일 없이 그냥 왔다는 뜻이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정태의의 책장을 뒤적이다가 고서 따위에 대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갈 때도
있었고 냉장고를 뒤적이다 갈 때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 때때로 생각난 듯이정태의를 지분거리다가 자위에
가까운 페팅을 하고 갈때도 있었다. 그 빌어먹을 밤 뒤로 그런 일이 미묘하게늘었다. 이 미친 새끼가 손쉬운 땅따먹기 친구로 아무래도 자신을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대충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 사람을 강간해놓고서별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 놈을, 그 뒤 하루이틀
침대에서 거의 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안 틈날 때마다찾아와 고개를 디밀며 괜찮냐고 뻔뻔하게 묻는 게 그래도 저 성격치고는 기특하다 싶어서 요절도
내지 않고 지나갔었다. (사실 보다 진실에 가깝게 말하자면, 요절을
내버리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 저에도 그랬지만 그 뒤에도, 이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감각으로 정태의의 몸을 빌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태의는 처참했던 기억이 떠올라 분노하지만, 결국은 일레이의 손이나 입 따위로
허덕이며 절정의 선을 넘곤 했다.
이렇게 얼빠진 강간 피해자가 있을까 자괴감이 쌓여가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신의 욕망에 이렇게 약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나름대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인간 관계에 무르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죽여버릴까 했던 놈이랑 이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는 걸보면 무르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지…….
아주 뇌수가 흐물흐물한 것 같다.
정태의는 백년은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아. 갑자기
힐센의 십자군을 읽고 싶어져서, 빌리려고."
일레이는 정태의가 물음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정태의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난 그 책 없는데."
"정 교관이 가지고 있어. 올봄에 내가 구해다 줬었거든."
정태의는 곤란한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숙부의방 열쇠가 바로 손닿는 데에 있는 협탁 서랍 안에 들어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내가 주인 없는 방에 막 들어가서 뒹굴다 오긴
하는데……그래도 주인 없는 방에서 물건을 막 꺼내다가 남에게 빌려주기는 좀 그런데. 삼촌에게 말은 했어?"
"아니. ……음.
딴에는 그렇군. 좋아, 정 교관이 온 뒤에보도록
하지."
일레이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념했다. 정태의는 잠시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 않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고맙다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네게 그 인사를받을
수 있는 거로군, 생각해 보니."
갑자기 일레이가 흐름에서 다소 비껴간 말을 꺼내었다.영상이 앞으로 몇 분이나 남았나 체크하던 정태의는 응? 하고 돌아보았다.
이내 그 말이, 조금 전 정태의가 일레이에게 했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괘씸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여태껏의전적을 보자면 정태의는 이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골백번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몇 번이나될까.
그 말을 할까말까 하다가 말을 꺼내면 자신만 치사해질 것 같아 정태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었다.
"인사라면 뭘 바라는데."
"글쎄……. 그렇게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네게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군."
일레이는 제법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눈치였지만 결론은 그거였다. 정태의는 흰눈으로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하긴 저 남자는 남에게 얻어야 할 만한 부족한 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욕도 별로 없는 편이고, 남에게 도와달라고 할 일도 거의 없고, 줄수만 있다면 인간성을 좀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맘대로 안 되고. (줄 수 있다고 해도 저 남자가 받으려 할것 같지도 않고.)
"제일 손쉬운 건 몸인가. 하지만 그건 굳이 인사치레로받지 않아도 언제든 맛볼 수 있는 거니 새롭지도 않은데."
저런 말을 듣고 화내지 않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를 생각하며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쳐다보았다.ㅡ그러나 본인은 이미 익숙해진 탓인지 새삼스레 화가 나지도 않았다ㅡ.
이 남자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상하게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성이 좀 결여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화법 정도는
얼마든지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꼭가끔 이렇게 사람을 확 뒤집는 말을 하는 건, 자신이 그만큼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다.
사람의 인상이라는 게 한 번 각인되면 어지간해서는 바뀌기가 힘들었다. 사람을 한 번 우습게 보면 그 사람이설령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다 해도 그 시각은 바뀌기 어려운 법이다.
어쩌다 이렇게 만만하게 찍혔나 정태의가 내심 한탄하는 동안, 새롭지도 않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던 주제에 일레이는 회가 동안 듯 정태의의 머리를 그러쥐더니 그 뺨을 핥고 빨았다.
다른 손이 셔츠 위로 가슴께를 문지른다.
"……."
신루. 이놈이 내게 흑심을
품은 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말했던 의미랑은 좀 다른 것 같지만, 이렇게 만만하게 찍접거리는 걸 보면 흑심도 제대로 품었나 보다.
또 다시 원한이 살아나려 했다. 좀 잊어가려 하고, 또 이 남자를 여전히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다 해도,
이러는 순간이면 발작적으로 울컥 원한이 솟았다가 사그라들곤 했다. 순간적으로 이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어 주먹을 움켜쥔 정태의는 몇 초 가량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늘 그렇듯이 결국은 한숨을
쉬며 주먹을 풀어버렸다. 그러면 보지 않아도 그 기척을 느끼는 모양인일레이는 피식 웃는다.
"야. 아파."
뺨에서 입으로 옮겨가 입술을 물고 빨던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셔츠자락위에서 가슴을 꼬집듯이 주무르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탓이다.
요 얼마 들어 이놈이 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가슴을, 정확히는 유두를 제법 세게 문지르다가
잡아당기곤 했다. 물고 빠는 건 예사다. 그 탓에 하루종일 부어 있었던
적도 있다. 정태의가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가 있는 일레이의 손을 치우려 들자,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미묘하게 웃으면서 순순히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처음에는 여기, 별로 느끼지 않았었지. 빨아도 그냥 아프다고만 하고."
"뭐?"
"원래 성감이라는 건 예민한 방향으로 단련되기 마련이라서……,
너 스스로는 못 느꼈나?"
정태의는 일레이의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무슨 뜻으로 말을 하는 건지 얼핏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픽
웃더니 손바닥으로 가슴을, 셔츠자락을 사악 쓸어내렸다. 얇은 셔츠 위로
몸의 윤각이 떠오른다.
"젖꼭지가 섰단 말이야. 아주 또릿하게."
일레이가 귓바퀴를 혀와 이로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들어 머리에 전해진 순간, 정태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럼, 건드리지 마!"
정태의가 나직이 외치자 일레이는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려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쓰다듬었다.
"왜 화를 내, 불쾌한 일도 아닌데. 몸이 더 예민해지면말이야, 젖꼭지만
만져줘도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게 되거든. 즉 쾌감에 민감해진다는 건데, 그러면 더욱 즐거워지지 않나?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공들여서 너를 위해주고 있는 셈인데.
……그냥 무작정 박아버리지 않고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일은 여태 없었다고."
너는 특혜를 입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 말에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어느결에 자신을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그 위에 반쯤 올라타다시피 한 일레이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주먹은 도중에 잡히고 말았지만.
"나는 별로 안 민감해져도 좋으니까,
치워!"
정태의는 울컥해서 외쳤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사실은순간적으로 선뜩했다. 천천히
자신의 몸을 길들여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떠한 의미로든 예민하게 살아가는 건 둔감하게 살아가는것보다 몇 배로 힘들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정태의가 휘두른 주먹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가로막은일레이는 살짝 입매를 찡그렸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숨을 노리든 혹은 사소하게 주먹을
날리든, 정도의 차와 관계없이 일레이는 자신에게 해꼬지를 하려 드는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게 없었다.
정태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이놈이 팔을 부러뜨리든다리를 부러뜨리든 흉악한 성격을 드러낼 텐데, 가장 적게 다치고
가장 빨리 달아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은 뭘까, 그 궁리로 머릿속이 찼다.
"두 번은 맞아줄 생각 없다고 했었지.
잊어버렸나?"
순식간에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정태의의 가슴을 누른 손에 무게가 실린다. 그대로 후려갈겨 갈비뼈를 부러뜨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중에 가로막았으면서 뭘 맞아주냐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문과 침대의 거리, 자신이 도망칠 수 있을 타이밍을 가늠했다.
그러나.
칼날같은 눈으로 잠시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어느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둣 심기 불편한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다가ㅡ죽일까말까 고민하는 걸로 보였다ㅡ문득 마뜩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마. 지금은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고 했잖아."
정태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한숨과 함께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일순 얼음처럼 시퍼렇게 날이 섰던
그 목소리가 평소와 같이 돌아오면서, 나직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곤 정태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뺨과 입술에 번갈아 입 맞추는 그 몸짓이무서울 만큼 부드러워서,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한바탕 야단친 뒤에 마음이 안쓰러워져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일이 어울릴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나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 남자만큼은 절대 아니다.
정태의는 갑자기 기운이 빠져 누운 채로 축 늘어졌다. 셔츠를 풀어헤치고 바지도 벗겨내는 손길을 좀 난감하게 생각하면서도 딱히 말리려 들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 맞든 말든 젖꼭지도 서 있었고, 그가 주물거린 사타구니도 서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점점 욕망에 약해지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금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나중에 싸우려고?"
그게 언제쯤인지 알려 줘, 그때가 되기 전에 나는 백 리밖으로 도망칠 테니까, 라고 속으로만 덧붙였다. 그러자 정태의의 속옷을 끌어내리며 그 안에서 반쯤 단단해진 채 튀어나온 살덩이를 손끝으로 문지르던 일레이는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무심하게 말한다.
"글쎄. 그럴
만한 상황이 되면 그렇겠지. 하지만 어쨌든지금은 그럴 마음이 안 드는걸."
"왜.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정태의는 사타구니 안쪽, 회음 아래의 입구 쪽에 일레이의 엄지가 닿자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조금 전에 신루의 말을떠올렸던 탓이다. 말한 것 자체가 실수에 농담이었지만말하고 보니 엄청나게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입구를 파고들던 손마디가 멈칫했다. 살덩이를 물고 있던 일레이가 정태의만큼이나 황당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 없이 성기를 뱉어낸 일레이는 약간 몸을 일으켜 기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널?"
"아니……, 농……."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뜨악한 얼굴을 할지는 몰랐다. 농담도 잘 하는 놈이 그냥 농담으로 흘려버리면 되지.
정태의가 혀를 차며 손을 저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일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아하,
하하하하, 그거 멋지군. 내가 들어본 가운데가장
훌륭한 말이야. 그래, 널 좋아한다고 하면 쓸데없이 빼는 척 않고 얌전히
다리를 벌려줄 건가? 그걸로 번거로운 절차가 생략된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태이,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걸로는 좀 약하군."
태이, 사랑해,
라고 말을 이으며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그리고 다시 정태의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기시작했다. 정태의는 대단히 기분이 씁쓸해졌다. 아니,씁쓸해졌다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잠에서 깬 기분이다.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를 떠나 있었다. 싫어한다고 해도 좋았다.차라리 싫어한다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일레이의 말을 들은 순간, 이미 알고 있다고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체감하지는 못했던 사실을 확실하게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손쉬운 자위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정태의 역시 욕망만으로 일레이와 살을 맞대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일레이가 그런 것처럼,그를 자위도구쯤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그저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런 류의 접촉도 하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레이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교위. 정창인의 조카.
정재의의 동생. 자위도구.그 네가지였다.
"……."
이건 화도 안 난다. 슬픈 것도 아니다. 괴롭거나 원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울컥거리던 속마저 가라앉았다. 감정이라는 게 수면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이런. 이건 안 좋은데.
차라리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를 기분이 들거나 원통하다고 엉엉 울 기분이 드는 게 더 나은데. 맑은 물처럼 서늘해지는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며 정태의는 혀를 찼다. 이런 느낌이 아주 약간만
더 심해지면 마음이 떠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어차피 이놈에게 실망한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 그저 실망 위에 무거운
돌이 한 덩이 더 얹힌 것뿐인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독였다. 이건 일레이를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다. 사람을 아예 없는사람인 듯이 잘라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과 최후의 보루다.
그래, 저 빌어먹을 김소위도
참아냈는데. ……아니, 이제는 일레이가 능히 김소위를 넘어서고도 남을것
같다.
정태의는 몸을 일으켰다. 정태의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파묻고 있던 일레이도 몸을 일으켰다. 바지와 퍼스너를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로 속옷마저 들추고 고개를 쳐든 성기가 튀어나왔다. 하얀 손이 성기를 슬슬문지르며 훑어올렸다. 검붉게 치켜선 살덩이가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넣어도 되지."
일레이가 은근히 물었다. 정태의는 대번이 낯을 찌푸렸다. 그리고 딱잘라 말한다.
"안 돼."
"태이, 사랑해."
웃음 섞인 속삭임. 그리고 자칫하면 그 속삭임이 진짜인 줄 속아넘어가도록 달착지근한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미친놈. 전혀 기쁘지 않았다.
계속 감정이 가라앉으려고 한다. 정태의는 묵묵히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일레이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먼저 이놈에게
손을 뻗은 건 처음이었던가, 얼핏 생각했다.
팔 안에서 일레이가 아주 어렴풋이 굳는 게 느껴졌다.어쩌면 이런 것도 공격과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가. 그러나 아무렴
어떠랴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 그러나 마음 역시 몸을 따라간다. 이제 이놈에게 실망을 하다못해 원한의 마음마저 식어질 지경이니,
몸이라도 이놈을 바라서 마음을 되끌어오는 수밖에. 마음은 무덤덤하지만 입맞춤은 달았다.
잠깐 굳었던 일레이가 문득 정태의에게 싸움이라도 걸듯이 혀를 감아 당겼던 것이다. 그 감각이 아플 정도로짙고 달았다. 자신의 욕망에 어물어물 넘어간 건
이 남자 탓도 있다. 언제 어디서 익혔는지 사람의 약한 부분을 기가 막히게 잘 짚어내었다. 호흡이 막혀 입을 떼려했지만 그의 입술이 계속 쫓아왔다.
"어이, 잠깐,
숨 좀……."
그러나 띄엄띄엄 말하던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억, 하고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방심하고 넋을 놓은 사이에,분명히 조금 전 딱 부러지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레이가 정태의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입구를 문지르며 근처를 지분거리던 성기가 빈틈을 잡아내어 푸욱, 밀고 들어온다. 끝부분을
밀어넣은 일레이가 다시 허리를 추어올리려고 하기 직전에 정태의는 일레이의 목을 붙잡고 황급히 밀어내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별이 보였다. 예전에도 한 번 봤던 그 별이다.
"안 된다고 했잖아! 전에도 죽는 줄 알았는데 또 그럴까봐서…ㅡ, 빼! 절대
못해! 아직 합동 훈련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앓아누우라고?!"
"처음에 좀 힘들더라도 종종 해서 넓혀야 익숙해진다니까."
"내일도 당장 훈련 있는데 어쩌라고!
불참도 안 되니 열병에 걸려도 나가야 할 판인데, 엉금엉금 기어나갔다가당장 딴놈들한테
얻어터지고 의무반에 실려가라고?! 오늘은 절대 못해!"
정태의는 일레이가 뭐라고 하든 말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버둥거리고 몸을 구부리자 끝이 약간 들어와 있던 살덩이가 잠시 뻑뻑하게 머무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미끌하고 빠져나갔다.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아팠다. 일레이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이대로 다시 묶어놓고 덮쳐버릴까
어쩔까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퍼렇게 불을 뿜고 있는 정태의의 단호한 시선을 보더니 다행히도
단념하기로 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알았어.
그럼 오늘은 삽입은 하지 않도록 하지.그 대신."
삽입은 하지 않겠다는 말에 일단은 한숨 돌리던 정태의는 그 뒤에 붙은 '그 대신'이라는 말에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나직이 속삭였다.
"사정은 시켜 줘. ……네 몸 안에다."
엉덩이를 부드럽게 움켜쥐는 커다란 손이 몹시 뜨겁게느껴졌다. 정태의는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사정은 시켜 줘,
……그건 당연하다. 이렇게까지 발기했는데ㅡ정태의 자신도 섰는데ㅡ사정을안 하고야 마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뒷말을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노려보았다.
"절대 못 넣는다니까. 삽입 안 하겠다며."
"그래. 예전에
제법 고생도 했던 것 같고 네 말마따나 아직 훈련이 끝난 것도 아니니, 오늘은 삽입까지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네 몸 속에 싸고 싶거든."
그러니까 끝만 살짝 넣겠다는 거지, 라고 덧붙이면서 일레이는 다시 정태의의 위로 엎드렸다. 그 이상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투다.
정태의의 표정이 확 굳었다.
물론 저 흉기를 꽉 채워 넣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편하겠지만, 끝만 약간 넣는다 해도 결코 만만한 질량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흘끔 시선을
떨어뜨려 다리 사이에서꿈틀거리는 흉측한 살덩이를 보곤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안 넣을 거면, 끝만 넣으나 그냥 쥐고 비비기만 하나 별 차이 없잖아. 그런데 왜 꼭 몸 속에 그래야겠다는
건데."
정태의가 불안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레이가 정태의를 쓰러뜨리며 그 위에 엎드렸다. 더 이상은 이의를 듣지
않겠다는 듯 목덜미 아래로 입술을 미끄러뜨린 그는, 턱 아래에 뾰족하게 닿은 유두를 잘근거렸다.
정태의의 몸이 튀어오르는 걸 끌어안으며 한참 뒤에야 말한다.
"글쎄, 생각해
보니 왜인지는 모르겠군.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그 무심한 말에 정태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았구나 싶었다. 끄트머리만이라도는 해도 저런 게 들어왔다간,
내일도 고생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게 좋더란 말야. 전에 네 몸 속에 쌌던 걸 빼냈을 때, 그게 흘러나오는 걸 보니 좀 아쉬웠거든. 뭐, 빼내지
않으면 하루종일 배가 아프다고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네 몸 속에 쌌다는 그 느낌이 좋아서."
그러나 일레이의 말이 이어졌을 때,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이런 미친놈. 진짜로 이놈이 미친놈에서 변태놈으로 업종 변경을 한 모양이었다.
어디에 싸든, 남자의 몸은 싸는
것 자체로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었다. 그게 어디냐는 상관 없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할 때의 심적인 차이는 있을 테지만, 육체적인 차원에서는 어디에 싸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태의가 항의하기전에 일레이는 벌써 정태의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바싹붙이고
있었다.
"싫으면 밖에 싸도 좋아. 대신, 그렇게 하면 뿌리 끝까지 다 박고."
어느 쪽이든 네가 바라는 대로 하지, 라며 마치 선심쓰듯이 말하는 일레이를 보며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말을 잃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일레이를 한참동안 노려보던 정태의는, 결국 침대 위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그럼, 자위도구쯤으로 생각하는 놈인 데 어련하실까. 이 망할 새끼.
"……. 안에다
해……. ……젠장……. 대신 내가 먼저 사정한 다음에."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봉사 좀 받아보겠다는 심보로 그렇게 대자로 뻗어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뭐가 우스웠는지는 잠시 동안 나직이 웃던 그는 그래,
그렇게 하지, 라고 속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11. 비밀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만치서 아련하게 울리는 기계 소리가 몹시 신경에 거슬러 정태의는 눈을 떴다. 이중으로 겹쳐져 보이던 시야가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제대로 돌아왔다.
눈을 뜨고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머리가 몽롱해 멍하니 시계를 노려보았다. 귀에 거슬리는저 소리는 자명종 소리였다.
"……."
기계 소리에 잠을 깨는 게 질색이라 평소에는 자명종을쓰지 않았다. 가끔씩 이른 시간에 반드시 시간 맞춰 일어나야 할 경우에만 만에 하나를 위해 시계를 맞춰놓고자는데,
그때에도 자명종 소리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본능 탓인지 시계가 울리기 1, 2분
전에 눈을 뜨곤했다.
반사적으로 알람을 끄고 난 뒤 이놈의 시계가 왜 울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대답을 떠올린 건 멍하니 쳐다본 시계의 초침이 거의 한 바퀴를 돌아간 다음이었다.
"……아."
정태의는 짧게 중얼거렸다. 27일 새벽 4시 반부터 4시 40분까지 10분 동안.
ㅡ반드시 그 시간이어야 하네.
단호하게 못 박는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 정태의는멍하니 잠에 취해 있는 동안 몇 분 가량 시간이 흐른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4시 15분에 맞춰두었던 시계가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자명종을 맞춰두길 잘 했다. 하마터면 세상 모르고 잘 뻔했다.
정태의는 시계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컴퓨터를 켜놓은 뒤 얼른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와 정신을 좀 차려야할 것 같았다. 영 머리가 몽롱하다.
"……어윽."
그러나 침대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정태의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 위에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도 했거니와, 사타구니가 지끈거려 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세수하러 안 가도 되겠다. 정신이 확 들었다.
정태의는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다가 눈을 떴다. 입에서 절로 욕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그는 흘끔 침대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빈 침대의 시트 위에는 끈적이며 말라붙은 흔적이 부옇게 남아있었다. 그 흔적이 일레이 본인이라도 되는 양 사납게 노려보았다.
젠장. 아파 죽겠다.
그나마 예전처럼 끝까지 우겨넣지는 않은 덕인지 그때보다는 한결 견딜 만했다. 백속까지
후벼 파놓아 찢어질 듯 욱신거렸던 그때에 비하면 입구 부분만 뻑뻑하게 벌어진 느낌인 지금은 그나마 살것 같았다. 정태의는 침대에 이마를 대고 신음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은 일레이를 원망하면 어불성설이겠지.
비록 질질 끌려서 말려들어간 느낌이 들긴 하지만 묶어놓은 것도 아니고, 정태의가
변변하게 제대로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나름대로 협력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니,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 사람을 덮쳤다고 원망하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몸이 힘드니 원망스런 마음이 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진짜 바본가……."
학습 능력이란 게 없는지도 몰랐다. 전에도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왜 그놈이랑 또 그 짓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몸을 섞고 나면 허무한 후회만이 남는 이런 불모의관계에서.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허무하고 씁쓸했다. 바에서 만나 하룻밤 지내고 마는 상대라해도 저 남자만큼 허무한 느낌이 들지는 않을 거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기본적인 인간성이 결여된 놈을, 그래도 인간 자체가 싫어지진 않는다며 납득해버리고 마는
스스로가 참 어리숙하다는 생각이든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성격에 가까운 문제라 본인이 인식하고 고치려 든다
해도 잘되지 않았다.
푸, 다시 한 번 무겁게
숨을 내쉬던 정태의는 문득 번뜩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았다. 몸의 고단함에 잠깐 늘어진 사이에 몇 분이 더
지나 있었다. 정태의는 허겁지겁 컴 쪽으로 기어가 전원을 켰다. 기껏
부탁받은 일인데ㅡ사실 말이 부탁이지, 암묵적인 의무나 다름없었다ㅡ제대로 못하면 낭패다. 게다가 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숙부나 맥킨에게는 중요한 일일 텐데.
정태의는 컴을 켜고 의자 위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올라가 앉다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의자에 앉는 순간 엉덩이가 욱신했다. 더욱 소름끼치게도 일전에 한 번
맛보았던 그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얼른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셔츠를 깔고
앉았다. 이 셔츠는 버려야겠구나.
생각해 보니 괘씸하다. 저 빌어먹을 놈은 제 욕심을 다채우고나자 거의 제정신을 잃고 혼미하게 널브러져 있는 정태의를 놔두고 상쾌하게 제 방으로 돌아갔다는
소리다. 물론 옆에 나란히 누워서 잤더라면 그 또한 기분이 매우 미묘했을 것 같지만, 욕구만 채우고 볼일 끝이라는 태도도 마치 자신이 자위 기구라도 된 느낌이라서불쾌했다.
……그래도 지금은 갔으니 다행이다.
정태의는 맥킨에게서 받은 메모지를 펼쳤다. 일레이가 죽치고 있었더라면 곤란할 뻔했다.
시계를 보니 지정받은 때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정태의는 맥킨에게서 받았을 당시에 건성으로 대충 보고 접어 넣었던 메모를 훑어보았다. 제일 위에는 웹주소처럼 보이는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제대로 된 주소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길고 긴 그 주소 옆에는 짧은 주의사항이 첨부되어 있었다. 자칮 주소를 미묘하게 틀리면 자동으로 접속이 타단되고
막혀버리니 주의하라고.
여기서부터 귀찮아지는군,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래에는 패스워드가 두 가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파일명이 하나. 그 아래에 몇 줄 가량 알 수 없는 수식이 적혀
있었다.
"……. ……?"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수식이 어딘지 낯익었다. 정확히는 수식이 아니다.숫자와 알파벳, 부호 따위가 섞여
있는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화학식에 가까웠다. 길게 이어지는 화학식은 설령 고교 때에 시험 공부를 하느라
밤을 새며 외웠다고해도 지금은 다 까먹고도 남았을 만큼 복잡해 낯이 익은 까닭이 없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식을 어디선가 보고 그 형식이 비슷해서 낯익다고 느끼는건지도 몰랐다.
정태의가 고개를 기울이며 메모를 손톱 끝으로 톡톡 치는 사이에 시간이 되었다.
그는 한 글자라도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메모에 적혀있는 주소를 옮겨 쳤다. 그리고 접속을 누르자, 화면이바뀌었다. 일종의 프로토콜 화면이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목록이 끝없이 주르륵 늘어졌다.
흘끔 시계를 보았다. 저 목록을 일일이 찾아보기엔 지나치게 시간이부족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일이 너무많았다.
곤란하네……, 혀를 차며 중얼거렸지만
바로 다음 순간정태의는 안심했다. 목록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정렬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급할 게 없어졌다. 파일 하나만 찾아서 받으면 된다. 컴이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여유롭게 마칠 수 있었다.
메모에 적힌 파일명은 금세 찾았다. 파일을 지정하자 다시 뜨는 암호창에 두 번째 패스워드를 넣었다. 곧 파일이
전송되기 시작했다.
10분 동안이라니 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파일을 다 받기까지 시간은 그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 프로그램을
종료한 정태의는다시 메모를 보았다. 이게 옳은 파일인지 체크하고 다른 곳으로 전송만 하면 끝이었다.
정태의는 책상을 톡, 톡, 천천히 두드렸다. 파일을 체크하기 전에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싶었다. 사실 담배라든가 맥주가 더 나았지만 둘다 지금은 없었다.
하라는 일은 거의 무사히 마쳤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 상황의 구조가 대충 짐작이 가는 탓이다. 예전에도 정태의는 이것과
같지는 않지만 짜임새가 흡사한 류의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도왔다기보다는 우연히 목격하고도 모른 척한 거지만,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도왔다고 해야 할 거다.
"그것도 방조죄지……."
아련한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이번에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방조죄다. 본인의 손으로 돕기까지 했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십중팔구는 기밀 유출 및 매매다.
숙부와 맥킨이 둘이서 공범으로 단순 착복을 노린다고보기는 어려웠다. 짐작컨데 자금 확보를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어느 곳이나 그렇다.
소위 '자리다툼'이란 걸 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UNHRDO의 요직이 끼어 있다면 그 금액은 어지간한액주는 아닐 거다.
위험 요소가 다분한 이런 일을 자주할 리는 없으니, 저 파일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할 물건이어야 했다. 몇 분만에 내려받은 파일 하나의 가치는아마도 정태의로서는 평생 숫자 개념으로밖에 인식할수
없는 금액일 거다.
"삼촌……,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태의는 숙부가 들을 리도 없는데 푸념조로 중얼거리며 탄식했다. 숙부가 들었더라면 이미 처음부터 짐작을하고서도 승낙하지 않았냐고 했을 테지만, 정태의는 숙부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다. 도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시간을 따로 지정한 걸 보면 보안 쪽은 따로 안배가
되어 있었을 테고, 적어도 숙부의 말을듣고 한 일이니 이번 일이 정태의에게 위험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건너고 싶지 않은 위험한 다리였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물이라도 들이켜 답답한 속을 좀 씻어내고 싶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잊고 있던 고통이 되살아나 책상을짚으며 으윽, 하고 다시 신음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엉거주춤하게나마 움직일 수는 있었다.
정태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ㅡ굳이 따지자면 일레이를 향한 게 대부분이었지만ㅡ욕설을 무더기로 뱉어내면서 물을 꺼내어왔다.
"……."
물통에 입을 대고 천천히 물을 마시면서 멍하니 천장을쳐다보았다. 누가 물에 약이라도 탔나 보다. 물맛이 유난히 썼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물통을 내려놓았다. 역시 입맛이 쓰다. 이런 류의 일은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가 관련되었다는 점을 떠나서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UNHRDO에서 숙부는 이런 일도 했었나.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의자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숙부에게 도덕적인 성실성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내부에 산재한 비리들에서
숙부만큼은 멀리 떨어져 고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해 주길 바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고, 스스로가 그렇게 성실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눈앞에 들이대고 보여주지는 말았으면좋았을텐데, 하는 마음은 들었다.
"뭐……할 수 없지."
정태의는 짧게 중얼거렸다. 씁쓸한 기분은 씻겨나가지않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유쾌하지 않은 일은 얼른 해치우고 잊어버리는 게
편하지. 어디 보자……."
정태의는 다시 컴 앞에 앉았다. 옳은 파일을 받았는지메모에 적힌 몇 줄만 비교해 보고 그 파일을 아래에 적힌 주소로 보내면 끝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파일을 잘못 받았다면 끝장인데……,
시간도 지났잖아'라고 중얼거리면서 파일을 연 정태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과문자 나열에
어이쿠,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줄을 바꾸면서 보기 편하도록
정리는 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그 파일의 내용물을 정태의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긴 누가 봐도 알아보기 힘들게 생겼다. 하지만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익숙하긴 했다.
정태의는 형과 같이 살 때 거실에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던 낙서 같은 종잇장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형은 그런 걸 제대로 정리해두는 법이 없었다. 우연히그걸 본 숙부는 '아니 이거 하나만 얻어도 애지중지 보물처럼 가져갈 놈들이 수두룩한데, 이것들을 이렇게 펼쳐
두냐'라며 혀를 찼지만 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정태의는 거실을 정리할 때면 거의 언제나 그 숱한 종잇장들을 모아놓곤 했지만 결국
거기에 적힌 내용이 뭔지는 알지 못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또 우울해졌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메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화면가득 떠오른 문자들과 맞춰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의몇 줄,
그리고 제일 마지막의 몇 줄이라고 메모지에 적어둔 그 문자들은 일치했다. 다행히
잘못된 파일을 받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제 이 파일을 재전송만 하면 끝인데…….
정태의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낯이 익다. 단순히 형이 휘갈겨놓았던
종잇장들과비슷하게 생긴 문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이렇게 들여다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으니, 꼭 퍼즐 책이라도 보는 것 같다.
모러 같은 놈이 이걸 본다면 굉장히 좋아하지 않을까.물론 퍼즐과 달리 이건 해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고, 아는 사람들에겐 이 자체가 설명문이나 다를 바 없을 테지만.
"3…7…7…0…2…. …….
어라……."
정태의는 규칙적으로 나열된 식을 쳐다보며 화면 위를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익숙하다. 아니,
익숙한 게 아니라 어쩌면 정태의가 본적이 있는 식인지도 몰랐다. 평소 늘 즉흥적으로
수식을 써내리다가 곧 싫증난 듯 내던지곤 하는 형이지만 가끔 며칠 정도 똑같은 종잇장을 붙잡고 생각에 잠기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 언젠가, 똑같은 종이를 닷새나 붙잡고 있기에 정태의는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종이를
형의 맞은편에 앉아 거꾸로 들여다봤었다. 아무리봐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세로줄로 제일 앞글자만 따서 거꾸로 읽어 내리니까 우리 집 전화번호가 나온다며 벌 것도 아닌 우연으로 형에게 시시덕거렸던 기억이
났다. 그때 형은, 어차피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동생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그 내용에 대해 설명해 줬지만 정태의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형은 정태의가 멍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정태의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마무지를 지었다.
'가운데에 비워둔 몇 줄만 채워 넣으면 되는데 그게 잘안
풀려. 그런데……사실은 안 풀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기본으로
잡아서 설계를 하면 좀 많이 위험한 게 나올 테니까.'
약간 낯을 찡그리며 말한 형은, 안 풀리는 게 나을지도모르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수식을 다 채우지 못하는 건싫었는지 그 뒤로도 며칠 더 그 종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때는 그걸 기본으로 잡아서 뭘 설계한다는 건지,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 정태의는 스스로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니터에 떠오른 파일에 못 박힌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일까. 혹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알아볼 수 없는 그 문자들의 나열을 눈으로 더듬는 동안, 정태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이 내용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하."
정태의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당혹스러워 시선이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만일 그의 추측이, 그의 확신이 옳다면. 숙부도 맥킨도,그리고 이 일에 관련되어
있을 또 다른 사람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밀 유출도 기밀 나름이다.
이건 외부에 유출되어도 좋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수신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물건을 구하고자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뻔했다. 이 자료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곳ㅡ즉 훌륭하게 악용할
수 있는 곳이다.
정태의는 시계를 보았다. 5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기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정태의는 무작정 수화기를 집어들다가 그가 지금 캔버라에 있다는 걸 떠올랐다. 그나마 그쪽은 지금쯤 아침 8시 가량 되었을 테니 자는 걸 깨우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예전에 번호를 적어두었던 수첩을 뒤적였다.
그러나 한참 신호가 가도 전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못할 상황인 건지, 혹은 전화를 두고 나간 건지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결국 통화할 수 없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정규 일과 시간 외에는 언제든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거의 없는 숙부였다. 어쩌면 일부러 안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초조해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초조할 이유는 없었다. 지정해 준 시간은 보안에 걸리지 않고 접속해 무사히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을
뿐, 그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이미 그 지정
시간은 지나기도 했다. 파일을 즉시 송신하라는 말은 없었으니 일단 놔뒀다가 통화가 된 다음에 어떻게든 하면
될 거다. 여차하면 지울 수도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당장이라도 연락을 해야만 할 것같던 초조감은 다소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불온한 불쾌감이 부풀었다. 숙부가 몰랐을 리는 없다.
이런 일을 함께 벌일 정도면 당연히 맥킨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ㅡ최악의
경우라 하나 능히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ㅡ저 식을 화학무기 따위에 응용하기라도 한다면.
정태의는 파일의 내용이 어떤 물질의 구성식인지 알지못했다. 어쩌면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상상이 나쁜 쪽으로 치닫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거래되는 물건이 안전하고 만만한 물건일 리는 없다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러나컴 앞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며 머리만 쥐어뜯고 있어도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어, 그는
한숨을 쉬며 창을 닫았다. 뻑뻑한 눈을 엄지로문질렀다. 젠장.
얼른 처리해버리고 조금 더 자려고 했는데, 잠은 다 잤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평소에 비할 바 없이 일찍 방에서 나왔던 건 잠시 오지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어쩌면 교관실에 맥킨이 가장 이르게 나올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탓이다. 침대에 앉아 한참 동안 발끝만 노려보다가 그 생각을 한 정태의는 훌쩍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숙부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정태의는 신발을 신으며 문 앞 현관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 보아도 낯빛이 퍽 안 좋아 보였다. 병자 같다. 하긴 잠도 제대로 못 잤지, 나날이 미친놈에게 시달렸지, 심신은 피폐하지, 머릿속에는 골치 아픈 일이 끊이지 않지, 이러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인간이 아닐 거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이었다.다른 사람들은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다.
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정신이 고달픈 때엔 몸을편하게 두면 좋지 않았다. 몸이 편하면 자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별로 좋지도 않은 생각들이다.
사실 지하 2층 정도까지 올라왔을
때 약간 후회하긴 했다.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걸, 난간을
붙잡고매달리다시피한 채 허리 아래가 욱신거리는 고통을 한참 동안 참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다.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지상층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내가 두 번 다시 그놈이랑 그 짓을 하나 봐라. …….
아니, 또 질질 끌려서
하기는 할 것 같다. 말을 바꾸자.내가 두번 다시 그놈이 삽입하도록
놔두나 봐라.
정태의는 복잡한 머릿속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일레이에 대한 원한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도 지상층에 오를 때까지만이다. 교관실이 저만치 보이는 복도
끝에 선 정태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교관 회의가 아침 일찍 있는 날이면 교관뿐 아니라 교위와 교호까지
일찍부터 오가곤 했다. 합동 훈련 기간 동안에는 거의 늘 아침저녁으로 교관 회의가 있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태의는 시계를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가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 시간부터제복을 차려입고 나온 자신이 어색할 지경이다. 우두커니 복도에
선 채 묵묵히 앞만 바라보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회의 때문에 교관 외의 사람들까지 동원된다 하더라도, 아직 한 시간은 족히 더 있어야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할 거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실낱같이 바랐던 대로 맥킨이 교관실에 나와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맥이 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 끊어질 듯 긴장된 불안감이 조금 더 연장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욱신거렸을
뿐이다.
어떻게 할까. 만일 자신의 추측이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다. 답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발 아래에서나무바닥이 희미하게 끼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무 소리만 끼익거린다.
마치 깊은 숲속의 폐옥에 들어선 것처럼 기묘한 기분이었다.
불현듯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이 어둑한 복도 가운데 홀로 서서.
교관실 앞에 이르렀을 때 정태의는 잠시 망설였다. 천천히 문을 열자 그 안에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만에
이런 빛을 보았을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층에는 자연광이 들어오지
않았다. 밝은 빛이 켜져 있거나, 혹은 암흑이다. 작은 스탠드를 켜놓으면 어둑하게 빛이 잦아들긴 하지만, 이렇게 푸르게 어두운 새벽빛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새벽이 그리워졌다. 줄곧 땅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럴 때 가끔 느낀다. 저 바깥으로나가고 싶었다. 나갈 때가 다가오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교관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불도 켜지 않고, 응접용으로 조그맣게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난 창문을 내다보았다.
당연하지만 창문이라는 것도 아래층에는 없었다.
널찍널찍한 구조와 완벽한 공조장치, 부족함을 느낄 것이 하나 없었던 그곳이 갑자기 숨막힐 듯 답답하게 생각되었다. 정태의는 고요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토록 조용하고 푸르스름한 새벽에는 소리가 들릴
것같았다. 문득 형을 떠올렸다. 언제였던가, 이런 새벽이 있었다. 형은 베란다에 마련된 흔들의자에 앉아 묵묵히 눈을 감고 있었다.
베란다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키우셨던 화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꽃이 핀 것은
하나도 없었다.모두 이파리만 무성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눈이 떠져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왔던 정태의는 그런 형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었다. 형은 푸르고 울창한 잎사귀들 사이에 묻힌 듯 앉아 있었다.
'형. 안 잤어?'
정태의는 졸린 눈으로 시계를 흘끔 보곤 형에게 다가갔다. 형이 눈을 뜨고 정태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전에 일어났어.'
'음……. 안 추워?'
잠에서 갓 깨어난 정태의는 가을이 늦어지는 날의 새벽공기에 팔을 문질렀다.
'조금.'
형은 짧게 대답하며 몸을 움츠렸다. 어둑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형은 입술이 파래져 있었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하나 가져나왔다. 그리고 형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옷이라도 챙겨입고 있지. ……또 잘 안 풀리는 문제라도 있어?'
정태의는 베란다의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가끔 시간을 들여 고심할 일이 있으면 그렇게 인형처럼 앉아 있곤 했다.
'아니. 여기에 앉아
있으면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옷을 걸친 형은 의자에 다시 등을 기대었다. 흔들의자가 두어 번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형은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 입을 다물고다시 눈을 감았다. 정태의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졸리기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형을 이제는 익숙하게바라보며 돌아섰었다. 어쩌면 형은 그때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요하고 푸른 새벽의 어둠 속에서, 형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문득 형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 살뜰하지도 않아 평소에는 거의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형제이지만, 지금 이 순간 정태의는
그를 보고 싶었다. 목소리 한 마디라도 좋았다. 정태의는 가만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어두운 새벽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밝아진 새벽이다. 푸른 빛이 점차 옅어지고 사물은 제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숙부의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적당히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주인의 부재를 알리는 책상은,
그 주인의 성격을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떤책을 좋아하는지, 성격이 허술한지 치밀한지, 저 책상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홀로 조용히 앉아서 상념에 젖은 동안 숙부를 떠올리면 자연히 형도 같이 생각나곤
했다. 정태의가 이곳으로 오기전까지 숙부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주로 형과 이야기를 나누곤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어쩌면 닮은지도 몰랐다. 어느 부분인가가 닮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몹시 다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렇다.
형은 절대로 정태의를 저버리지 않을 거다. 그것은 그가 정태의를 사랑해서라든가, 가족이라서라든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그냥 그랬다. 그가 정태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이유도 까닭도 없이 너무도 당연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저버린다는 단어를 떠올리지도
않을 거다. 정태의가 형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괴로운 상황에서 선택지가 생기게 되면 고민하게 될 거다. 그러다가 결국은 형을 저버리지
않는 쪽을 택할 테지만, 형은 그렇지 않았다.
숙부는 굳이 따지자면 정태의와 비슷한 쪽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 숙부는 정태의와도달랐다.
숙부는 아끼는 사람이 슬프고 힘들어하더라도 그에게서 등돌릴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그가 원치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숙부였다.
"삼촌도 똑똑한 것 같으면서 아니라니까……."
정태의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설령 숙부 때문에 힘들어하게 되더라도, 그는 결국 숙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태의는 눈을 떴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멀찍이서 다가오는 발소리다.낡은 나무 바닥이 희미하게 삐걱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소리가 무겁다.
정태의는 교관실 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른 시간에 나온 교호일지도 몰랐다. 혹은 바깥 공기를 마시려고 올라온 부원인지도 모른다.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 소리는 출입문 앞을 스치고, 집무실 앞도 스쳤다. 정태의는 그 소리가 교관실앞에서 멈춰 설 때까지 지그시 문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있던 남자는 어두운 교관실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정태의를 보고 멈칫했다. 정태의가
앉은 쪽이 역광이라, 누가 앉아 있는가 가늠해보는 눈치이다.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 남자를, 정태의는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맥킨이다.
바라던 사람이 찾아왔다. 우연히 그가 가장 먼저 교관실로 나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했었지만, 그 역시 정태의와 마찬가지로
달고 긴 잠을 자지는못한 모양이다.
교관실 안으로 들어와서야 정태의를 알아본 맥킨은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일찍 나왔군. 리그로우 교관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인데."
맥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정태의는 파티션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로우가 있으면 도리어 곤란하다.
맥킨은 평소 교관실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대로 신문을 펼쳤다. 무심하게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칸막이너머로 들렸다. 한 장,
두 장, 천천히 신문을 넘긴 뒤에야 그는 평연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래, 할
일은 마쳤나?"
"네……, 도중까지는요."
정태의는 무릎 위에서 깍지끼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어렴풋이 초조감이 일렁였다.
신문을 넘기던 소리가 멎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맥킨이 되물었다.
"도중까지?"
그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날이 서 있었다. 경계와 불안이 어린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태의는 자신의 초조감이 다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말씀하신 대로 다 마쳤는데, 아직 마지막에 적혀 있는주소로 전송하지 않았습니다."
"……. 왜지."
맥킨이 짧게 물었다. 정태의의 초조가 가라앉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어조는 조금씩 더 불안정해졌다.
그는 몇 장 넘기지도 않은 신문을 다시 접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나와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비어 있는건너편 자리에
앉아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도 그를 마주보았다.
정태의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상황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졌다. 처음에 그의 일을ㅡ정확히는 숙부의일을ㅡ도와줄
때부터 그 일이 합법적인 일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태의가 그에게 도덕을 운운할 수는 없다.
정태의가 여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해도,성사될 일은 결국 성사된다. 유출된 문서는 누구의 손을 통해서든 유출되고, 이용할 사람은 누구의 손을 빌려서든 이용한다.
그런 일을, 애초부터 알면서 발을 들여놓았던 자신이 이제 와서 괜히 고결한 척해
봐야 우스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가기에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까끌까끌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그 파일이 어떤 건지는 알고 계셨습니까?"
정태의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리고 맥킨을 정면으로바라본다. 맥킨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움칫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정태의는 웃음거리가 되어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누가 중동 무장단체에 핵을 팔아넘긴다고 해도 정태의는 상관없었다.그런 데에 비분강개해서 나설 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맥킨이 어딘가에 뭘 팔아넘겼다 해도 괜찮다.
그것이 정재의가 손을 댄 물건이라도, 그 물건이 대단히 위험한 물건이라 해도,
그런 것까지도 상관없다.
그러나 숙부가, 형이 개발해 낸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불법으로 빼돌린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중 하나만이라도 비껴나간다면 정태의는 모른 척할거다. 괜한 지레짐작으로 소란을 부렸다면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 파일을 전송해도 괜찮았다.
나중에 숙부에게 핀잔을 들어도 좋았다.
어째서 숙부는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사소한 이유일지도 모르는 그 사실조차 불안하게 다가왔다.
맥킨은 가만히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정태의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언짢은 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이 일이 주위에 말할 만한 건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겠지."
"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지금 문제 삼지는 않을 테고……, 자네 형이 구안한 것이 유출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맥킨은 창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재떨이를 하나 집어들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 옆의 소형 서랍장 아래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서 담배를 한 갑 꺼내었다. 정태의에게도 담뱃갑을 내밀며 권한다. 거절할까하다가 한 개비 집어들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고가만히 재떨이 홈에 끼워 내려놓았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웃었다.
과연. 형이 적은 식이었다.
형의 손이 닿은 물건이라는걸 맥킨이 알고있다면 당연히 숙부도 모를리가 없었다.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 자네 형이 고안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전공이 그쪽이었나? 군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알았던 건 아닙니다.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역시 형이 만든 게 맞았습니까?"
정태의가 무심히 중얼거리자 맥킨은 두 번째로 눈살을찡그렸다.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제부터는 말을 신중하게 고를 테지만,
이미 정태의는 자신이 듣고 싶었던 중요한 것을 들었다.
자아…….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원천적으로 유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맥킨이나 다른 사람들끼리 이 일을 꾸몄다면 정태의는
문제 삼지 않았을 거다. 아니, 사실 이 일의 향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숙부가 이 일에 관련되어있다는 것이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씁쓸함때문에, 정태의는 이 일을 돕고 싶지 않았다.이 일을 폭로해서라도 중단시키고 싶은 생각도 머리를스쳤다. 비록 지금 당장만 떠들썩해지고 나중에
말들이 가라앉아 잠잠해지면 누군가 다시 같은 일을 꾸민다 하더라도.
"이 일이 탄로 난다면 교관님과 정창인 교관님은
곤란해지실 테지요."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협박의 의도는 없었다.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맥킨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담배를 빨아들이던 맥킨은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재를 털어내며 중얼거린다.
"정교관 그 친구, 일을 그르칠 리는 없다고 그렇게 자신하더니 결국 이 꼴이군. ……탄로 나더라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쪽이 곤란해질 일은 없을 거다. 오히려 곤란해진다면 네가 더 곤란하게 될 테지.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협박거리는 되지 못해."
"협박?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어쩔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낸 건가."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쩔 생각이라. 그게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신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군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숙부에게 토로하는 것뿐이었다.
왜 그랬어요. 왜 하필이면 형이었어요.
왜 형이 기구에준 것을 삼촌이 다른 곳으로 빼내려고 했어요. 왜 하필이면 삼촌이
그랬어요.
이유를 듣고 싶었다. 정태의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숙부는 분명히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면 이렇게 마음이무겁지도
않을 터였다. 대답을 하고 나면 숙부는 대단치도 않은 걸로 투정하지 말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글쎄요, 대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나는.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 말의 주체는
숙부였지만 맥킨에게는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맥킨은 일순 어이없는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숫제 머리가 이상한 놈을 보는 듯한 눈이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란하단 빛이
스쳐갔다. 똑똑한 인간을 구슬리는 방법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약간 이상한 놈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미리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더 귀찮은 탓이다.
정태의에게 맥킨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태의는힘없이 맥킨을 보면서, 숙부에게 묻고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왜 그러셨어요……. 이런 짓을 왜 했어요……."
"……."
맥킨을 뚫어져라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머리가이상한 놈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푹,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억누르고 있던 웃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것처럼, 문 밖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호쾌하게 복도에 울렸다.
맥킨의 낯빛이 굳었다. 정태의 역시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맥킨에게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마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문에 기대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며 들어서는 그 남자를 낭패한 얼굴로 돌아보기전부터, 이미 정태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주 걸작이야, 태이."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일레이였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태의와 같이 있었던 그 남자다. 들켜선
곤란한 말을 들켰다는 생각보다 먼저, 정태의는 왜 그가 거기에 있었는지 멍하니 떠올렸다. 아직 교관이나 다른 교위, 교호들이 나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 우연히 일찍 나왔던 걸까.
……우연?
그럴 리 없다. 정태의는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부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서 걷지 않았더라면 낡은 나무 복도가 인기척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교관실에 그들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있었다.
"일레이. ……너…ㅡ."
정태의는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을 열었지만 말이 곧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의 눈가에 얼핏 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곧 정태의에게서 떨어져 맥킨에게 옮겨갔다. 짐짓 난처한
얼굴로 맥킨을 바라보며 일레이는 이것 참……, 하고 애매하게 입을 열었다.
맥킨을 점점 얼굴이 굳었다. 그 얼굴에 점차 성난 빛이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사납게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그렇군, 리그로우와 함께 꾸민 짓이었어."
"정태의는 울컥해 눈을 부릅떴다.
"그렇지 않…ㅡ."
그러나 맥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박하려던 그는 도중에 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는 일레이와 같이 일을 꾸민 바 없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짐짓 놀랐다는 얼굴을 하고있었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웃음 띤 눈을하고서.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석연찮은 시선을 들어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일레이는 희미하게 웃었을 뿐 정태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보다 한층 상냥한 목소리로 맥킨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맥킨 교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요. 어제 미처 다 마치지 못한 일이 있어서 일찍나왔을 뿐인걸요. 들어서는 곤란한 대화를 하시는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늦게 왔을 텐데요.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요……."
"…ㅡ."
맥킨은 벌레 씹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과연, 하고 정태의는 아직도
혼란스런 머리 한구석으로어렴풋이 생각했다. 일을 그르칠 경우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마련해두었을 거다.
그러니 설령 정태의가 상부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협박거리가 될수는 없도록 이미 상황이 짜여져 있을 터였다.
증거 따위도 남겨두었을 리 없었다. 도리어 정태의가 곤란해지기 십상이었다.
적어도 저 숙부는,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도관의 증언이 덧붙여진다면이야기는 달라진다. 설사 직접적으로 파급되는 효과는없다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입장이 그리 당당할 수는 없을 테지.
정태의는 그런 어렴풋한 생각을 하면서도 멍하니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애매한 미소와 함께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하고 중얼거리면서 일레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찰칵, 라이터 소리와 닮은 기계 소리가 짧게 울린다. 모르는 척 느긋이 다시 주머니에 넣는 그 손가락 만한 은색 레코더를, 정태의는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정태의는 더 이상 맥킨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시야에는 일레이만이 들어와 있었다.
푸른 새벽의 어둠이 자욱하게 끼어 있는 것만 같은 머릿속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밝아지는 것 같았다.
빛을 몰고 오는 것은 자주 사소한 말들이었다. 무심하게 스쳐버린 말들이, 사실은 그들이 정태의에게 던져준 언질이었다.
ㅡ정창인 교관은 장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불현듯 언제가 일레이가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곧 웃으며 말했었다. 농담, 이라고.
정태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아직도 어슴푸레한 어둠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일레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
정태의를 찾아왔던 그때에도.
숙부가 처음부터 모든 걸 예측했던 것처럼, 그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오해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제 권한으로 해결될
일도 아닌 것 같군요. 별 일 아닌 걸로 맥킨 교관님과 낯을 붉히고 싶지는 않고. ―――우선 제 교위는 제 권한으로 어령에 잠시 보내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할까요."
일레이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흘끗 일별했다.
그 눈매에 서늘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 * *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끼니가 나올 때뿐이었다. 불을 밝히면 시계를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정태의는 들어와서 자리 잡고 앉아 거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식사가 나오면 어둠 속에서 위치를 가늠해 몇 술 뜨다가 말았다.
예전에 들어왔을 때에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간절하게 바랐었지만 지금은 필요치 않았다. 어느 곳을 짚으면 불을 밝힐 수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정태의에게
불빛이 필요할 일이 없었다. 오로지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령은 여전했다. 하긴 고작해야 몇 달 사이에 바뀔 리도 없다. 어둡고 음침한 그 감옥 안에서, 정태의는 캄캄해서 보이지도 않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끼손가락 뿌리 부분을 만져보았다. 약한 살갗이 손끝에 닿았다. 그 조금 아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지만 손가락은 아직 보드라웠다.
"어이. 자냐?"
목소리는 벽 하나 건너에서 들려왔지만 벽이라고 해도 몹시 얇았고, 게다가 전면에는 철창살이 듬성듬성하게뚫려 있었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아니,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바로 옆에 이웃한 옥에 갇혀 있는 그남자는 아까부터 계속 정태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별로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끔은 아예 대답 없이
무시하기도 했는데 남자는 아랑곳 앉았다. 자기 입으로 '어령에서
한참 썩었더니 심심해죽겠다, 말동무도 마땅찮아 입부터 곰팡이가필 것 같다'고 말한 만큼 심심하기는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지금 조용히 있고 싶었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모든 감각을 닫아두고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그러기에
어령은 딱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불은 일부러 찾아서 켜지 않으면 새카만 어둠 속에 잠길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이 아니라면 다른 소리가 거슬릴 일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옆방에 저런 복병이 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저 남자와 같은 방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럼 저놈의 아구창에 수건이라도 쑤셔넣어 입 좀 막아줬을 텐데. 점심
식사가 나오기 전에 정태의는 옆방 남자가 쿠일라룸푸르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공부를 하러 혼자 상해에 건너갔다는 것,
상해의 친척집에서 지내며 무사히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 때 해외봉사캠프를 간 게 UNHRDO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 남자의 위로 각각 회계사와 무역업자인 형이 둘 있고
아래로 아직 학생인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데여동생의 이름이 레칭이라는 것, 레칭은 어찌나 예쁜지우연히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TV 광고에도 한 번 나온 적이 있다는 것 등등을 알 수 있었다.
불행히도 옆방이 이쪽 복도의 제일 안쪽 방이고 건너방은 비어 있어서 남자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정태의였다. 견디다 못한 정태의는 점심이 나왔을 때 밥을몇 술 뜨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밥 먹고 잘 거니까 말걸지 말라고. 그러자 그 말대로 옆방의 남자는 좀 조용해지는가
싶었다. 한숨을 쉬며 조용히 침묵에 잠겨 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옆방 남자가 불쑥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자냐고.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다.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가 나올 때까지 남자는 몇 번인가 더 말을 걸었지만, 정태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아,
그나마 점심 때에는 몇 술이나마 뜨는 시늉을 했지만 저녁때엔 배식판에 손도 대지 않았다. 새벽, 일과가 시작되기도 전의 그 시각, 일레이는 곧바로
정태의를 어령에 집어넣었다. 정태의가 뭐라고 말을 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지하 7층에 이르러 어령의 문 안쪽으로 정태의가 들어가기 직전에야 그는 옅에 웃으며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데리러 올 때까지 편히쉬고 있으라고.
편히 쉬고 있으라고 그랬다. 편히 쉬고있으라고.
"편시 쉬긴 개뿔이……. 빌어먹을 새끼."
정태의는 낮게 중얼거렸다.
쉬려고 든다면 분명 이곳은 쉬기에 좋았다.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숨을 돌릴 수도 있었다. 아마 하루 전에만 이곳에
넣어줬더라도 정태의는 웃으면서 고맙다고인사할 수도 있었을 거다.
"어. 일어났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옆방에서 말소리가날아왔다. 이런 젠장.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참 잘도 잔다. 점심때부터 계속 잤지?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그런데
너도 어디서 원한 지고 들어왔나 보지. 누구야, 그 빌어먹을 새끼는?"
남자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정태의는 그를 무시할까 어쩔까 하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있어.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놈이."
"아하. 그건
진짜 빌어먹을 새끼지. 내가 아는 놈 중에서도 그런 놈이 하나 있어. 저만 잘나서 남은 다 깔아뭉개는 놈이 있거든.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잖아."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서리서리 원한이맺힌 투로 말이 이어진다.
"내가 여기에 들어오게 된 원인도 딱 그렇지.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놈. 맨손으로 인간을 때려잡는 백정 같은 놈.
사람 피를 뒤집어쓰고 웃는 미친 살인마!"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막 남자가 말한 것 같은사람을 정태의도 하나 알고 있었다. 세상에 둘 있으면절망스러울
인간이었다.
"그것 참……, 상종하면 안 될 놈이겠군. 그런데 너 어쩌다 여기 들어왔다고 했지?"
정태의가 은근슬쩍 묻자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풀죽고 분한 투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미치광이가 내 동료를 죽였거든.
그래서 리볼버로 좀 큼직한 놈을 구해서 그걸로 쏴갈겼는데……."
"음……."
정태의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자라고 상해에서 대학을 나온, 아름다운 레칭의 셋째 오빠인
이 남자가 누군지 정태의는 알 것 같았다.
"갓 입부한 어떤 멍청한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서
실패했다고! 빌어먹을. 빈 총이나 들고 설친 그 골빈 애송이,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당장 찾아내서 주리를 틀어줄 테다!"
"으음……."
그때의 미친놈이 이놈이로구나. 사람들 한가득 모여 있는 식당에 50구경짜리 리볼버를 들고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난사해댔던 그
미친놈. 네놈은 나중에 살아서 만나면 나한테 좀 맞아야겠다고 읆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태의는 흘끔 시선을 주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뭐가 보일 리도 없었지만,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말끄러미 노려보았다.
정태의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놈이랑 같은 방에 들어앉지 않아서 다행이다.
같은 방에들어앉았더라면 수건을 목구멍에 처박아두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아예 수건으로
목을 콱 졸라버렸을 거다.그러면 살인죄로 골치 아파졌을 테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태의가지금 겪고 있는 현재의 이 모든 불행은 저 남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저 망할 놈이 복수를 하려면 혼자 있을 때를 노려서 덮칠 것이지 괜히 식당 같은 데로 난입해들어서 정태의가 엉겁결에 거기 휘말리게
됐고ㅡ그때 끼어들었던 게 못내 후회스러웠다ㅡ,그래서 결코 마주치지도 말고 말 한 마디도 섞지 말고 백리 밖에서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도망다녀야만 했던그 미치광이 살인마에게 찍히는 신세가 되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태의가 생각건데 9할 정도는 저 망할 놈 탓이었다.
잠시 원망스러운 분노가 열화처럼 밀어닥쳤다. 옆에 있었더라면, 설마 진짜로 죽이기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목정도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졸라줬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람이 운이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이게 어떻게 모두
저 남자 탓일까.
어쩌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모든 불운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혹은 그 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정태의는 어둠 속에서 습관처럼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문질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곳에 원래는 빨간 실이 묶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느낀 적도 없지만 그곳에는 정태의와
쌍둥이 형을 이어주는 빨간 실이 묶여있었다. 형이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을 거다.
그 말을 듣고 봐도 여전히 빨간 실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잘려버린 건지도 몰랐다. 형이 집에서 나가기 전에 싹둑,
손가락 사이에 그 실이 있을 허공에 가위질을 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실이 잘린 뒤부터 내 운수가 나빠진
것같기도 하거든……."
정태의는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길상천은 형이었을 거다. 정태의에게 자신의 운을나누어주면서, 그가 불운을 만나지 않도록 형이 복록을가져다주었던 거다.
그러다가 형과 이어진 실이 잘리고더 이상은 그의 행운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편이 더 이해하기 쉽네. 이치에도 맞고."
길상천 같은 건 형처럼 운 좋은 사람이 맡을 일이다. 스스로도 운이 넘쳐나고 그 운을 주위에 나눠주기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납득할 만도 하지 않은가.
"그 빨간 실은 사실 내 운수였다니까…….
아, 정말 얼른 형을 만나서 다시 묶어놓든가 해야지 원."
조용히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저 옆방까지 들릴 만한 목소리였던 모양이다. 정태의가 듣지 않는 동안에도홀로 그 미치광이에 대한 욕을 하고 있던 남자는, 정태의의 말을 들었는지 불쑥 물어왔다.
"형이랑 생이별이라도 했나?"
"아…ㅡ뭐 비슷하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뭘하는지도 모르고……."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만날 수도 없다. 여태 이런 적은
없었다. 언제나 형은 연락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립다고 생각하는 때면 오래 지나지 않아 형을 만나거나 통화할수 있었다.
그래. 보고 싶었다.
지금은 더욱.
한숨까지 그에게 전해졌는지,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 묵묵하다.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태의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침묵을 들이쉬는데,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날 수 있을 거야. 살아만 있다면.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친구는 죽었지만."
정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도 아무 말 하지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떠들던 남자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친구를 생각하며 침묵에 잠겼다. 그것이 어쩐지 안타까워 정태의는
뭐라고 말을 걸려다가 잠시 망설인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 남자에게 침묵이 필요한 때였다.
어쩌면 그 친구가 일레이의 손에 죽었다는 동료일까. 혹은 다른 친구일까.
정태의는 이름 모를 그의 친구를 위해 애도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뒤에 남는 자에게는, 앞서간 자에게 주어지지 않은 삶이 남는다. 삶은 상실감과 함께 남는다. 그 상실감을 정태의는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몸 위를 덛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화낼 거에요, 삼촌."
한숨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하루종일 생각했다.
지난밤부터ㅡ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ㅡ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럴 듯한 결론은 하나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듯은 하지만 그러길 바라지 않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다시 하고 또다시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속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까마득하게
지쳐버린다.
정태의는 생각을 정리하려다가 단념하고, 묵직한 머리로 벽을 천천히 두어 번 두드렸다. 지친 몸이 늘어진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형을 만나고 싶다. 이 번잡한 관계들을 벗고 싶다. 원하는
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멀찍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때도 이미 지났으니 바깥에서 찾아올 일은 없었다. 있다면
교관이둘러보는 정도일까. 그러나 돌계단을 내딛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태의는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인기척은 점점 다가왔다. 이 어둠 속에서도 앞이 또렷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다가오는 발소리에는 망설임이없었다. 나는
어슴푸레한 의혹조차도 걷어낼 수가 없어헤매고 있는데 저 남자는 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구나.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태이."
이윽고 발소리가 멈추고 낯익은 목소리가 바로 몇 발짝앞에서 들려왔을 때에도, 정태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발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달각, 희미한 소리가 들린
것과 머리 위에서 빛이 쏟아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등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하루꼬박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는 태양보다 눈부셨다.
흠칫 눈살을 찌푸린 정태의는 손으로 눈을 덮었다. 빛이 눈에 익어 천천히 눈을 뜰 수 있게 되기까지,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앞에서 그 남자도 조용히 기다렸다.
"잘 쉬었나? 데리러 왔어."
정태의가 눈을 뜨자 일레이가 그 앞에 있었다. 철장을열고 정태의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정태의는 잠시 동안 꼼짝도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했다. 그는 채근할 생각은 없는 듯 끈기 있게 정태의를기다렸다.
"어이, 벌써
나가는 거야? 누가 데리러 왔나 보지."
그때 옆방에서 침묵이 그치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일레이가 흘끗 눈동자만 돌려 그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위치에서는 옆의
철창 안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않았을 거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도 일레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지척에 있는 사람이 일레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기묘한느낌이 들었다.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저 남자는 일레이를 죽이려 했었다.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목숨까지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일레이에게
덤벼들었다. 어쩌면 순간적인 울화나 치기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 그는 분명 일레이를 세상누구보다도 증오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일레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발소리도, 인기척도, 하물며 목소리마저도 분명히
일레이라는 남자의 것이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몰랐다.
"하루도 안 되어 나가다니 너무 빠른걸.
하하, 나가서 보자고."
남자가 유쾌하게 인사했다. 정태의는 그 인사를 듣고서야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일레이가 문을 열고 기다리는 옆으로 나갔다.
정태의는 남자에게 다시 만나자는인사는 하지 않았다. 나올 때까지 잘 지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등 뒤로 지하 7층의 출입문이 닫혔다.
고작해야 반 뼘도 채 안 되는 문이 하나 사이에 있을 뿐인데 그 안에는새카만 어둠이 자리 잡고 밖에는 빛이 내리쬐고있었다.
정태의는 시계를 보았다. 10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정규 일과를 마치고 몇 시간이나 지난 때다.
"바로 10분 전에 오늘의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바로 달려온 길이야."
시계로 시선을 주는 정태의의 뒤에서 일레이가 말했다.늦었다고 화내지 마, 최대한 빨리 온 거거든, 하고 덧붙이며 입끝을 약간 올린다.
정태의는 잠시 시선으로 그웃음을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태껏 본 가운데 가장마음에 안드는 웃음이었다. 새벽에 보았던 것과 같은
웃음이다. 정태의는 못마땅한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곤 한숨을 쉬었다.
"합동 훈련 때마다 어령 신세를 지게 되는군."
"마음에 들지 않았나? 오늘은 거기서 보내는 게 네게도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레이가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정태의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 하루를 어령에서
보낸 것은 나쁘지 않았다. 몸도 편치 않았던 상황에서 대련에 참가해서 좋은 꼴을 볼 리도 없었고,
지금과 같은 정신으로 하루를 탈없이 보냈을 것 같지도 않다. 오늘만큼은 캄캄한 곳에
묻혀서 하루를 보낸 것이 일상에서 하루를 보낸 것보다 나았다.
"그래, 평소대로
지낸 것보다 나았지. 비록 날 위해서 어령에 집어넣은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고 해도."
정태의가 무심하게 말하자 일레이는 픽 웃었다.
정태의는 출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 옆의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서는가 싶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두어 계단 아래에서 따라
올라가며 물었다.
"계단으로 가려고? 힘들지 않아?"
"힘들어. 편두통까지 일기 시작했거든."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몸은 그나마 나아졌다. 하루종일 어령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더니 이제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지나치게 움직여 몸이 피로에 절거나 과도하고 정신을
혹사시키면 편두통이 일곤 했다.편두통은 약도 잘 안 들었다. 자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일레이는 계단으로 걸어올라가는 정태의의 뒤를 따르면서도 고갯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 엘리베이터 있는데."
"한 층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릴걸,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코웃음을 쳤다. 일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한 층이라. 네 방으로 가려고?"
이번에는 정태의가 침묵했다.
서로 생각한 행선지가 달랐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일레이가 당연히 가고자 했던 곳은 지하 1층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그리고 정태의가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한 층 위에 있는 자신의 방. 정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뒤에서 일레이도 멈추었다.
두통은 저절로 가라앉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이대로는점점 더 심해져 잠도 쉽게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방으로 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정태의에게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미 어렴풋이 알 것 같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짚고 넘어가야 했다.
"내 방으로 가도록 하지. 오늘 낮에 냉장고에 맥주를 잔뜩 채워뒀거든."
"……. 그렇게
할까."
얼마나 채워뒀는지는 몰라도 그 맥주 죄다 동이 내어줄까 보다. 정태의는 곱지 않은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보곤, 이번에는 그가 앞서가는
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따라갔다. 맥주조차도 별로 끌리지 않았다.
나중에 방으로 가기 전에 의무반에 들려 두통약이라도 받아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늦은
시간을 떠올린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이 시간에 교호의 방으로 찾아가약을 달라고 했다간 또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뻔했다.
모쪼록 두통이 더 심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길 바랄 뿐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하 1층에있는 일레이의 방에 다다를 때까지 정태의는
한 마디도하지 않았다.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흘끔 보긴 했지만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태의의 기분이 좋아질 리 없는 건 당연했다.
"……꼭 심통난 어린애 구경하는 것 같군."
열쇠를 꺼내는 일레이의 옆에서 정태의가 언짢게 중얼거리자 그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태의는 말하고나서야 그 말 자체가 심통 난 어린애와 다를 게 없다는걸 깨달았지만 이미 나온 말이었다.
"천만에. 심통 난 어린애는 그냥 놔둬도 하룻밤 자고 나면 기분이 풀려 있지만, 너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않거든. 하긴 너는 제풀에 기분이 풀리는 경향이 있긴 하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인간이 첫단추를 잘못끼우면 안 된다. 화를 내는 것도 귀찮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면
주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건 그 사람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다.그
말이 꼭 틀린 말도 아닌 까닭이다. 설령 굉장히 속이뒤틀리고 울화가 치미는 일이 있어도 과연 그게 며칠이나
갈까.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으면 자신의 기력이 더 심하게 소모되는 탓에 그걸 따라갈 수가 없어 늘 에이,
하고 묻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에 화가났었는지, 어떤 점에 괴로움을 느끼는지도 잊어버리는건 아니다.
"내 기분이 상할 짓을 하긴 모양이지……."
정태의는 혼잣말했다. 하루종일 어령에 있으면서 생각해낸 결론은 거의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몹시 마음에 안 드는
결론이었다.
일레이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 정태의에게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을 뿐이다.
적막한 방 안에 들어선 정태의는 잠시 서 있다가 책상 앞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평소라면 침대에 걸터앉았을테지만 지금은 사소한 것 하나도 마음에 내키지않는다.
"……. 삼촌은?"
정태의가 묻자 일레이는 웃옷을 벗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창인 교관이라면 캔버라에 있지."
"그게 아니야. 새벽엔 연락이 안 됐는데 지금은 연락이되느냐는 말이지."
일레이는 웃었다. 그 웃음과 짧은
침묵에서 정태의는 숙부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우연히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정태의가 알아차렸다는
걸 일레이도 알았다. 그는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 듯 냉장고로 가 자신의 몫과 정태의의 몫으로 맥주를
꺼낸다.
"자아, 그럼."
정태의에게 가볍게 맥주를 던져주며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손안의 맥주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풀탑을 뜯었다. 뜯는순간 거품이 끓어올러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혀를차며 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털어내었다.
어차피 마실 생각도 별로 없었던 터라, 맥주는 그대로 집어들지 않았다.
그런 정태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자기 몫의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일레이는 벽에
기대어 고개를 기울였다.
"원인부터 말할까, 결과부터 말할까."
"삼촌에 대한 것만."
정태의는 짧게 말했다. 하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 하나였다.
일레이는 잠시 정태의를 바라보며 웃다가 난데없이 불쑥 물었다.
"너, 정창인
교관의 아들이라고 했었지. …ㅡ아, 유전적으로."
일레이는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정태의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게 뭔지 금세 알아차렸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사람이 그렇게 알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 삼촌이
그러던가 보지."
그가 말한 일 자체는 별 의미도 없었다. 정태의는 자신의 피와 살을 물려준 사람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고 숙부는 숙부였다.
"그가 직접 말한 적은 없어. 어쩌다 알게 되었을 뿐이지. ……하지만 정말이지 안 닮았단 말야. 하긴 정재이라해서 닮은 건 아니지만, 너는 정말로 그 남자랑 성격이 딴판이거든."
일레이는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팔걸이를 탁, 탁, 천천히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아주 잘 아는 모양이군. 그래서, 너랑 삼촌이 같이 손잡고 일을 꾸몄나 보지?"
그러자 일레이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 라고 고개도 젓는다.
"일을 꾸몄다니 듣기 거북하게 말을 하는데.
물론 틀린말은 아니지만. …ㅡ그와 내가 잘 아는 사이인 건 맞아.정확히는 그와 내 형이 잘 아는 사이라고 해야겠지만. 여러 가지로 같이 하는 일이 있으니 교관들
가운데서는그나마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의 조력가에 지나지 않아. 그가원하는 일을 아주 살짝―――――도왔을 뿐이지."
일레이는 손가락으로 아주 약간을 가리켜 보였다.
조력자.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그 파일을 보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 줄 미리 알았나?"
정태의는 더 듣고 싶지 않아 곧바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일레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평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반 이상의 확률로는. 그러나 이렇게까지 바랐던 대로 해주지는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했었지."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까지 같이 끌어넣어 맥킨의
발목을 잡아챌 생각이었어?"
그러자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태이. 넌
이미 끌려들어갔어. 비록 이번 일은 교도관들이 다 알게 되고 타 지부나 본부에 보고가 되긴 하겠지만 알려져서는
곤란한 치부이니까 크게 말이 나가지는않고 내부에 적당히 무마될 거다. 하지만 너는 십중팔구 책임은 지게 되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정태의는 '그렇게 걱정할 건
없어. 퇴출까지 가지는 않도록 손을 써 줄 테니.'라고 말하는 일레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어차피 애초에 올 때 말했던
기한도 다 되어간다.
문득, 혹시 숙부가 기한을
그렇게 잡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태의는
의자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었다.
"……. 그래서,
결과는."
목소리에 피로가 깃들었다. 일레이는 맥주를 비우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침대로 가 앉았다. 그리고 대수롭잖게 고개를
저었다.
"별 것 없어."
"뭐?"
"별 것 없다고. 이 일은 '장틸과, 장틸의 관리하에 있는사람들이 야기한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이 일 하나만으로
데미지가 되지는 못하는 거야. 이건 사실, 표면적으로는
'일어날 수없는 사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운 없이 불거져 나온 사건'이니까.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말이지. 뭐 물론――――맥킨은 승급은 포기해야겠지. 보기에 따라선
UNHRDO에서 나가는 편이 본인을 위해선 더 좋을 수도있고."
정태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가 잠시 말을 끊자 조용히 말했다.
"맥킨뿐만이 아니잖아."
"흠……?"
"이 일은 삼촌도 도왔어. 네가 말하는 '실질'이라는 게어떻든 삼촌은 맥킨의 일을
도왔지. 아니, 맥킨이 삼촌의 일을 도운 건가."
그리고 나는 바보 같이 꼭두각시처럼 춤추고. 정태의는쓰게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일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유쾌한 웃음이다.
"아하, 하하하,
그렇지, 분명 맥킨과 정창인은 어쨌든 손을 잡고 있었어. 증거도 모으려면 얼마든지 모을 수있지. 그런데 말이야, 태이."
일레이는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 교관은 UNHRDO를 그만둘 수 없어.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인간이거든."
"……. 마오
차관에게?"
비웃을 생각은 없었지만 비웃는 셈이 되어버렸다. 일레이는 고개를 젓는다.
"틀렸어. 그는 UNHRDO에 필요한 인간이지."
아무렇지 않은 듯하나 미묘한 빛을 띤 그 말을 들으면서, 정태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뭔가 빙 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게 아니다.
숙부가 마오의 사람인지, 장틸의 사람인지,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지, 정태의가
알 바 아니었다.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것도 정태의가 알 바 아니었다.그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권력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태의는 다만 숙부가 자신을 여차한 경우 험하게 잘려나가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렇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머리가
울려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다.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 두통을 찢어발기듯이, 고요한 공간에 기계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시계를 보곤 아아, 하고중얼거렸다. 누군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일어서 책상으로
다가온 그는, 정태의의 옆에 있는 전화 액정에 비친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곤 정태의에게 고갯짓했다.
정태의는 액정을 보았다. 국제통화 연결 번호 뒤로는 61-2라는 숫자가 이어지고 있었다. 캔버라다. 이 시간에 캔버라에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문득 정태의의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그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
여보세요, 라든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언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수화기를 쥐고 가만히 있자 마찬가지로 잠시 침묵하던 저편에서 말이
돌아왔다.
'릭?'
"……. 태의에요,
삼촌."
'아. 태의구나.
네가 왜 거기 있어. 내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아닌데.'
번호를 확인하는지 목소리가 잠깐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았다. 숙부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심상하게 정태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숙부는 모르는지도 모른다.
아니,처음부터 숙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태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안타깝게 매달렸다.
"언제 오세요? 저 오늘 하루 내도록 어령에 갇혀 있었지 뭐에요."
마치 어린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정태의는 숙부에게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전화 안에서 숙부가 웃었다.
'일레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숙부가 말했다. 조금 전화 마찬가지로
평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정태의의 낯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다.
"……. 삼촌.
처음부터 그랬어요?"
정태의는 조용히 물었다. 숙부는 잠시 사이를 두고 '뭐가.'라고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의 어떤 점에 대해서,
라는 의미다.
정태의는 침묵했다. 몇 번이나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도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않았다.
숙부는 알고 있을 거다.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것까지 이미 예츠가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는 정태의가 지금 어떤 심경인지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가슴에서 불덩이 같은 게 울컥 치밀어 올라 목을 막았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났다. 조금 전의 그 안타깝게 매달리는 마음이 모두 울분으로 바뀌어버렸다. 숙부에게
바랐던 사소한 것이었다. 어쩌면 숙부도 자신에게 사소한 것을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생각하는 사소한 것은 달랐다.
"처음부터."
'…….'
"…ㅡ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맥킨에게든 장틸에게든, 어쨌든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다고.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제가 삼촌 일을 방해했을 것 같아요?
삼촌이 어떤 수단을 쓰든, 제가 삼촌을 훼방 놓았을 것 같냐구요. 왜 사람을 이렇게…ㅡ."
말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분이 피밀어올랐다. 심장이지독하게 아팠다. 두통은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맥박친다.
미리 언질을 줬으면 좋았다. 그러면 설령 숙부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정태의는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을거다.
이렇게 마음 아프지도 않았다. 정태의의 손을 어떻게 빌렸건, 얼마나 더렵혔건, 괜찮았다. 숙부가 도와달라고 한 마디만
했더라면 정태의는 그렇게 했을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친 듯 화내며 소리치듯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울컥 치밀어오른 울화로 목이 메었던 탓이다. 그렇게 한번 입을 다물자,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숙부도 아무 말도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수화기를 움켜쥔 채
가쁜 숨만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던 일레이가 정태의의 손에서 가만히 수화기를 빼앗아들었다. 아주잠깐 수화기를 놓지 않으려던 정태의의
손에서 이내 힘이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음, 나. …ㅡ어, 약간. 뭐, 나중에 와서 얘기해. ……음. 그쪽은 당신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어. 그래.
음."
정태의를 대신해 수화기를 넘겨받은 일레이는 짧게 몇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곤 정태의를 돌아보며 심상하게 말했다.
"진정해. ……아니, 이젠 진정됐나?"
워낙 진정이 빠른 녀석이니,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속을 꽉 메운 그 불덩이가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너는."
"…ㅡ."
"너는 알고 있었지. 어제 내 방에 왔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도 이미."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웃는듯 마는 듯한 그 얼굴은 긍정을 답하고 있었다.
"어제 나와 같이 있으면서, 몇 시간만 더 있으면 이녀석이 꼭두각시 짓을 하겠구나, 내일 몇 시쯤에 교관실로 나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 날 건드리면서는,
끝까지 다 박아넣으면 이놈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텐데 그러면 일에 차질이 있겠지, 약간 참아줘야겠어, 그런 생각을 했어?"
"태이. 너
지금 지나치게 흥분해 있어. 진정해."
정태의의 말에도 일레이는 전혀 화나거나 불쾌한 빛을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태연한 얼굴이 더욱 울분을 자아내었다.
"진정. …너라면
진정하겠냐, 이 개새끼야!"
정태의는 옆에 놔뒀던 맥주캔을 집어던졌다. 맥주가 들어차 무거운 캔은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던 일레이에게 세차게 날아갔지만, 일레이는 약간 고개를기울여 피해버렸다. 그의 낯빛이 불쾌한 듯 약간 굳어졌다.
정태의는 이것이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일의 시초는 일레이가 아니다.
그러니 이 울분은 온전히 일레이의 탓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모든것을
알면서 일부러 정태의를 찾아왔었다. 정태의가 어리숙하게 휘둘리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면서 자신의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에게 뭔가를 기대한 바는 없었다. 별다른 친분이
있는 것도, 정태의를 다독여줄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이 치미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태이, 그만
돌아가. 앞뒤 분간도 못하고 누구에게 달려드는지도 모르는 놈과 있으면 그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어질 테니."
일레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분노로 낯빛이 질린정태의를 붙잡고 자신의 방 밖으로 끌어내었다. 복도로밀려나간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그럼.'하고 말하곤 문을 닫았다.
달칵, 눈앞에서 굳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정태의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어나기 전부터 머리가 아팠다. 자면서도 깊이 잠들지 못하고 비몽사몽간에서도 머리가 아프다고
끙끙거리며 자다깨다 했다.
결국 개운하지 못한 머리로 일어났을 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시간이었다.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계를 쳐다보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눈꺼풀도 무거웠지만 다시 잠이들 것 같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침대에 축 늘어져 앉은채 눈을 감고 잠깐 꾸벅거리다가, 역시
제대로 잠이 오지는 앉아서 눈을 뜨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맹렬하게 몰려와 정태의는 머리를
붙잡고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아야야……, 아스피린, 아스피린,"
어젯밤, 일레이의 방에서
쫓겨난 뒤 그 길로 정태의는 의무반 교호의 방으로 찾아가 마구 문을 두드렸다. 이미 몇 시간도 더 전에 일과를
마치고 방에서 느긋하게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그는 젖은 몸에 수건 한 장만감고 나와 방문을 열자마자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 목욕하는데 닦달을 하냐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그는 문 앞에 선 정태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입 속으로 무어라 투덜투덜 군소리를 하면서도 얌전히 옷을 꿰어입고 의무반으로 가서 정태의가 바라는 대로 진통제 반 시트를
던져주었다. 그 까탈스런 교호가 대놓고 신경질을 내지 않은 걸 보면 아마 자신의 몰골이 어지간히 험하긴 했었나
보다고, 정태의는 뒤늦게 생각했다.
하긴 그렇기도 했을 거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아예낯빛이 죽어 있었고 입술은 파리했다. 살짝 건드리기만해도 픽 쓰러졌을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진통제 중에서도 아스피린이 위벽 제일 많이 깎아내는거 알지?
꼭 밥 먹고 먹어.'
무뚝뚝하게 말하며 약을 건네는 그에게 적당히 대답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규정량의
두 배는 되는 약을 무작정 씹어삼켰다. 머리가 아파서 두 알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약을 먹자마자 바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는데, 그래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은 족히 지난 다음에야 약효가 겨우 약간 들어서 살짝 의식이 흐려졌다. 그러나 아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 잠든 가운데서도 '머리 아파,
머리 아파……'하고 중얼거리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여전히 두통이 남아 있는 머리로 깨어난 것이다.
"어제 먹고 남은 아스피린을 요 어디 뒀던 것 같은데……."
정태의는 속이 쓰렸지만 그보다는 두통이 더 시급해,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진통제 시트를 찾았다. 컵 뒤쪽에서 시트는 찾았지만,
그 안에는 약이 없었다. 어, 하고 눈을 깜빡이던
정태의는 지난밤 잠결에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신음하며 약을 마저 삼켰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젠장, 혀를 차며 정태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머리가 아팠다. 아직
6시도 안 된 이 시간에 저 교호를 다시 찾기는 좀 미안했지만 어젯밤부터 끊이지 않은 두통 때문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아예 두통약을 통째로 달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다 씹어먹고 싶은 판이었다.
한숨을 쉬며 대충 옷을 꿰어입은 그는 비척비척 방에서나갔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평소라면 몇 명 정도가 오가고 있을 복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끔 저만치서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지런한 녀석들
가운데에는 새벽마다 트레이닝 룸에서 땀을 흘리는 녀석도있었다. 일레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개운하게 땀을 빼지 않으면 하루종일 몸이 찌뿌듯하다고 예전에 말했던 적이 있다.
"……."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름을 생각해버렸다. 더 안 좋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인식하자마자 그 이유와 더불어 또 다른 불쾌한이름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젠장. 그냥 이놈의
UNHRDO 본부에 폭탄 하나 던져넣으면 기분이 좀 개운해지겠구만. 기왕이면 지부에까지몇
덩이 더 던져주면 아주 상쾌해지겠다. 생각해 보면어차피 이놈의 기구에게 곧 나가게 될 건데,
정말로 테러라도 하고 떠나버릴까. 능력만 되면 판을 깨어버리고가버리겠는데.
정태의는 처음으로 형의 천재성을 부럽다고 여기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트레이닝 룸에서 돌아오는 건지 땀을 흠뻑
흘린 개운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부원 하나가 정태의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가 내린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정태의는 내부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이거야 원, 갓 죽은 시체 같은
얼굴이다. 새벽이라곤 해도 아직 어둑어둑한이 시간에 이런 얼굴과 마주친다면 그야 무섭기도 하겠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웃었다. 웃다가 다시 아야야, 하며 머리를 감싸쥔다.
약, 약이 필요해,
마약중독자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교호의 방까지 한달음에 다다른 정태의는 처음에는 조용히 노크했다.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깊이 잠들었나 싶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정태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곤 초인종을 여러 번 연달아 누르며 동시에 문도 두드렸다. 그 정도쯤 되면 저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교호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튀어나올 만도 한데,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야……, 루터에게 볼일이 있나? 이 시간이라면 트레이닝 룸에 있을 거야. 그리로 가 봐."
문을 두드리고 있으려니 나오라는 사람은 안 나오고 대신 옆방 문이 열리면서 짜증스런
얼굴로 다른 교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가 두들겨 맞고 깨어난 듯 불쾌한 얼굴에는
'시끄러워'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 문을 부숴볼까 아니면 기왕 문을 부술 거 의무반으로 가서 거기 문을 부술까 잠시
고민하던 정태의는, 한번만 더 문을 두드렸다간 울컥 소리를 지를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곤
조그만 목소리로 미안, 하고 속삭였다.
교호는 여전히 불쾌한 얼굴을 지우지 않고 대답도 않은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의외다. 그 꼬장꼬장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교호가 새벽마다 운동을 할 만큼 건전하고 활기찰 줄은 몰랐는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야
안 될 말이지만, 그는 의무반 교호치고는 대단히 건강치 못한 인상이었다.
"하긴 그렇게 살인적인 업무를 소화하려면 어지간한
체력으론 안 되지. 어쩌면 이 지부 내에서 제일 건강한 사람은 그 녀석일지도 몰라."
정태의는 관자놀이를 콩콩 두드리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행선지를 새로 정하자마자 또 욕지기가 치밀었다.아파 죽겠는데,
기껏 지하 1층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5층의
트레이닝 룸으로 내려가야 한다. 거기서 교호를 찾으면 다시 2층 의무실까지
올라와야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평소에 별로 아프지
않더라도 집마다 약상자는 하나씩 꼭꼭 챙겨두나 보다. 정태의는 이 두통만 가시고 나면 자신도 약상자를 하나
공수해다가 방에 챙겨둬야겠다고 결심하며 다시 5층으로 내려갔다.
"……. 으……,
속쓰려."
지하 6층에서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그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릴 시간도 아까워 계단으로 내려가던 정태의는
지하 5층을 목전에 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두통만 해도 심경이
편치 못한데 위장까지 아팠다. 꾸욱 조여드는 느낌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정태의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좀 살 만해지자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정태의는 약한 편이 아니었다. 평소에 위가 상할 만한일도 없었고 어지간한 두통이라면 그냥 눌러삼킨다. 그러나 지금은 유난히
아팠다. 실제로 지독하게 아픈 건지, 혹은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폭발한
건지, 아니면정신이 약해져 아픔을 더 과장되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다 좋아……. 어차피 조금만 더 버티면 여기도 안녕이다. 그때까지 설마 죽기야 하려고."
정태의는 이를 갈면서 중얼거렸다. 숙부와 약속했던 반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 반년이 지나가는
것보다 정태의가 UNHRDO에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진답시고 쫓겨나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하더라.
불쾌하고 언짢긴 하지만 화를 내기에는 기력이 부족하고, 곰곰히 생각해 자신의 마음속에서나마 사태의 시시비비를 가리려 해도 그조차 귀찮고.
분명 이런 기분을 표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리려고 해도, 그 전에 두통부터해결하는 게 먼저다. 저만치 트레이닝 룸이 보였다. 정태의는 저기에 가면 약이 있다는 말만 최면을 걸듯이 줄기차게 스스로에게 들려주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에 하나 저기에도 교호가 없다면, 이것저것 다 필요 없다. 그냥 의무반으로 가서 문작을 부숴버리고 말겠다.
정태의는 흘끔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를 이제 막 넘어서고 있었다. 의무반에 가서 약을 받아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면, 정규일과 전의 아침 일과 따위 배 째라고 해버리면 두 시간은 더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비몽사몽이라도 누워 있을 요량이었다.
아니면 아예 수면제까지 받아다가 같이 삼켜버릴까. 그러나 약물 오남용으로 실려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눈앞이 괴로우니 뒷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다. 정태의는 어쩐지 자포자기 같다……하고 생각하면서
뒷목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머리속이 텅텅 흔들려 아픔이 좀 흩어지는 느낌이다.
정태의가 트레이닝 룸의 몇 걸음 앞까지 다가섰을 때,문이 열렸다. 반투명한 유리의 자동 슬라이드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이제
막 운동을 끝내고 샤워까지 마친 뒤 나오는 듯 머리카락이 젖어있는 남자가 걸어나왔다.
"……."
"아."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정태의는 보이지 않을만큼 얼굴을 찌푸렸다.
일레이 리그로우. 하긴 이 남자는
새벽마다 운동을 했으니, 여기서 마주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거워졌다.
그렇잖아도 두통이 심한데결코 반갑지 않다. 게다가 지난 밤 그렇게 속이 뒤집혔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정태의의 불쾌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지만 일레이는 정태의를 보자
입매를 약간 올리며 웃음 지었다.
"드문 일이군. 이 시간에 네가 여기에 오다니. 운동하려고?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으니 여유롭게 뛸 수 있을 거다."
그는 안쪽을 턱짓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태의는 말없이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정태의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던 것도 정태의가 그토록 화를 내었던 것도 없었던 일이거나 아주 오래 전에 해결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일레이에게는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정태의가 어떤 기분이었건, 그토록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그에게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이런 남자인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마음 상할 일이 뭐 있을까.
"아니, 사람을
찾으려고. 루터, 안에 있어?"
"루터? 왜.
아침부터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두통이 좀."
정태의는 무뚝뚝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걸음을 멈추었던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그러다가
문득 피식 웃더니, 두어 걸음 다가왔다. 정태의에게서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약간 굽혀 정태의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가까이 댄 그가
새끼고양이처럼 상냥하게 속삭였다.
"태이. 넌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예민한 게 문제야. 보나마나 어제는 잠도 개운하게 못 자고 설쳤겠지.
어깨에서 힘을 좀 빼. 사소한 문제를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지 마. ……아, 그래. 여기까지 온 김에 차라리 운동이나 하고
가면 어때. 땀을 쏟고나면 머리속도 개운해질걸."
말을 마친 그는 친밀한 가족에게 애정을 담아 인사라도하듯이 정태의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걸음 물러서더니 설핏 웃었다.
"뭐 좋아. 루터라면 안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걸 본 것 같군. 지금은 몸을 풀고 있거나 아니면
샤워장에 있지 않을까. 모쪼록 볼일 잘 보도록 해, 태이."
일레이는 정태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그가 자신의 옆을 스쳐가 발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꼼짝도 하지않았다. 이윽고 그 소리가 모퉁이를 돌아 복도 너머로사라질 때까지.
"……."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일순 두통을 잊었다. 머릿속이 시커멓게 달아오른 탓이다. 욱하고 속에서 덩어리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그 덩어리가 목을 막아 잠시 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
정태의는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 참……."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는데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기분 더러운 것도 오랜만이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귀로 들으니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별 대단한 걸 기대했던 건아니다.
사람을 강간하고도 성적인 농담을 하는 놈인데, 설마 사과를 하거나 미안한 기색을
보일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따지고 본다면
그사과를 자신이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지도 몰랐다.
저놈이라면 당연히 저렇게 호고도 남지,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저 아무렇지 않은 낯짝을 보니 울화가 덩어리처럼 치밀어 올랐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최소한 겸연쩍은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스쳐가는 정도의 빛은 보여주는 게 인간의 도리잖아.
정태의는 심장이 꽉 막히는 것 같아 주먹으로 가슴 위를 두드렸다. 세차게 두드려 그나마 가슴에 아픔이 느껴지자 숨이 좀 돌아았다. 동시에
잠시 의식을 떠났던 두통도 맹렬하게 다시 엄습해왔다. 그 두통을 느낀 순간 정태의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한숨인지 탄식인지모를 숨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온다.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솟구쳤던
울화가 일시에 발 아래로 사악 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아까의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그 기분이 머릿속을 덮는다.
우울함과도 닮은 그게 뭐였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점점 두통이 심해져, 정태의는 트레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루터는 한눈에 발견되었다. 마무리 운동을마치고 막 샤워장으로 들어가려던 참인
듯 운동화의 끈을 풀고 있던 루터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똑바로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태의를 보고는
어, 어, 하고 중얼거렸다. 네가
이 새벽에 여기는 웬일이냐, 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참 같았지만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정태의를 보고는 어물어물
입을 다문다.
"어, 태이…….
좋은 아침……이 아닌 것 같네. 어젯밤에도 그렇더니 너 얼굴이 왜 그 꼴……,
어, 어? 야! 잠깐! 나 아직 안 씻었단 말이다!!"
정태의는 흘끔흘끔 안색을 살피며 인사 겸 안부를 묻는루터의 목덜미를 콱 붙잡아 끌어당겼다. 인형처럼 훌쩍끌려온 루터의 코 끝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그는 금세라도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약 내놔."
루터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트레이닝 룸에서 운동복도 못 갈아입고 땀에 흠뻑 젖은 차림 그대로 의무반으로 질질 끌려가는 동안,
루터는 아슬아슬하게 육두문자의 경계선에서 벗어난 험악한 욕설을 옹골지게 퍼부었다. 의무반에 도착해 그 안에서 약을 찾는 동안에도마찬가지고, 약을 받아들자마자 그대로 씹어삼킨
뒤 정태의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돌리는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던 탓에 그 욕설 중 태반이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무슨 정신으로 방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태의는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 위에 뻗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니 시야도 덩달아 욱신거렸다. 흐려졌다 말다 하는 시야 구석에 전화기가 들어왔다.지난밤 잠들기전에 코드를 뽑아놓은 그대로, 지금은 단순한 고철에 지나지 않는 기계다.
전화선을 뽑아놓은 동안 누군가 저리로 전화를 했을까.전화를 했다면 십중팔구는 숙부일 테지. 아니, 어쩌면전화는 그대로 꽂아놓았다 한들 한 번도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숙부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쿵저러쿵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해명 없이 그대로 나쁜 사람으로 남는 쪽을 택할 사람이었다.
옳은 일을 했는데 오해를 받았다면 또 모를까ㅡ그러나 숙부 정도 되는 사람이 오해를 살 만한 실수를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ㅡ, 좋지 않은 짓을했으면 차후 그 일에 대해 추궁을 받아도 변명하거나 덮으려 하지 않고 담담히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나서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거지?'라고 물을 사람이었다.
ㅡ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래,
재의야.
문득 오래 전에 들었던 숙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지금보다 더 젊은 목소리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때의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정태의는 동네 친구들과
여름 캠프니 뭐니 번잡하게 어울려 놀기 바빠서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었다. 학교 소년단에서 주최한
2박 3일의 캠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숙부가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웠다고 하면
어폐가 있다.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고, 숙부는 묵묵히
그 분노를 맞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정태의의 아버지는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었다. 감정을크게 드러내거나 폭발시키는 일도 별로 없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대단히 아껴, 외국에서 뭔가 엄청나게 유명하고 훌륭한 국제기구ㅡUNHRDO였다ㅡ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동생이 가끔 휴가를 얻어 귀국하면 늘따뜻하게 보살펴주곤 했다.
그래서 정태의는, 아버지가 숙부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모습은 그날 처음 보았다.
정태의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 말고 우두커니 멈춰서아버지와 숙부를 번갈아 보고만 있는데, 아버지는 분노를 쏟아내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숙부는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말도하지 않고,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래, 재의야.' 라고.
아버지는 일순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버지의 보기 드문 분노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탓인지 그때 형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아버지가 그토록 화를 내었는지도 듣지못했다.
하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눈치로 뒤늦게 정태의가 알게된 것은, 형이 가진 특출한 재능을 숙부가 악용했다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때 숙부는 형이 무기를 개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두통이 아주 조금 둔해졌다. 숙부는 끝까지 아버지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태의가 모르는데에서 사과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다물고 있던 숙부의 모습 위로 또 하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몇 년 전 아버지의 장례에서 숙부는 빈소 한쪽 구석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끔씩 생각난 듯이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보곤 했다. 영구차가 나갈
때까지, 숙부는 계속 그렇게 앉아 있었다.
숙부는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저 똑똑한 척하면서도 서투른 사람이 스스로에게
내린 벌인지도 모른다고, 정태의는 생각했다.
"삼촌……. 난 사과받지 않으면 평생 동안 기억하면서 삼촌이랑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끈질기게 끄집어낼 거라구요……."
정태의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화를 내기에도, 울분을 터뜨리기에도 기운이 딸린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이라니.
정태의는 머릿속에서 머리를 두드리는 두통이 언제쯤 사라질까 신음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때였다.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방문이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그사람을,
정태의는 이불을 코 아래까지만 끌어내린 채 노려보았다.
"태이 형."
그러나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정태의는 험악한 시선을 거두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생각지도 못한 방문자에게 의아하게 물었다.
"신루……, 어쩐 일이야."
"형……."
방문 앞을 가로막듯이 우두커니 선 방문자는 정태의를 한 번 부르기만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굳어 있었다.
"신……."
그러나 정태의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신루는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정태의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바싹 끌어당긴다. 정태의는 살짝
낯을 굳혔다.
"신루. ……왜
이래. 무슨 일이야."
한 뼘도 채 되지 않도록 가까이에 신루의 얼굴이 있다.핏기를 잃어 파란 입술이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움찔,움찔,
떨리다가 멎었다.
정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신루는 처음 보았다.신루가 자신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보다도, 그 낯선 표정에 더욱 이질감이 든다. 마치 정태의가 모르는 사람 같다. 아니……이건 모르는 사람이다.
"……은 안 돼요."
신루가 무어라 속삭였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라서 미처알아듣지 못했다.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하얗게 질린 신루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밀랍 인형처럼 굳어, 생기도 감정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정태의는 이런 얼굴을 알고 있었다. 위험한 얼굴이다.
"신루. 이것
놔."
정태의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신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거칠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하지만 신루는 아랑곳 않았다. 정태의의 목소리가 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정태의가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다.
"형. ……리그로우와,
……일레이 리그로우, 그 남자와,……잤어요?"
새파란 입술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람 소리처럼 가늘고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정태의의 고막에 선명하게 와 박혔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어째서 하필이면 그가 지쳐서 무너질 것 같은 이런 때여야 하는지
몰랐다. 신루의 말을 인식한 순간 정태의의 얼굴이 굳었다. 갑자기 잊고
있던 울화의 덩어리가 가슴을 가로막았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일레이 리그로우와 몸을 섞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냉혹한 성격, 잔인한 손속, 무심한 눈,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여 가슴을
일그러뜨리는 불쾌감을 자아내었다.
정태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신루는 말을 잃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윽고 차차 일그러졌다.
"……왜 그랬어요."
"신루."
"안 돼요……, 그 남자는 안 돼요.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내가,
나만 보라고 했잖아요. 나랑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신루!"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목을 조르려는지도 모르겠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든 다음 순간, 정태의는 가슴속이 선뜩해졌다. 신루는 정말로 정태의의
목을 조르려 들고 있었다. 반쯤은정신이 나간 눈을 하고.
눈이 새빨갛게 보였다. 물기가 어려 번들거리는 눈이 똑바로 정태의를 보며 소리 없는 악을 쓴다.
"신루, 정신차려!
신루!"
정태의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들리면서도 안 들리는 척하는 건지도 몰랐다.
손아귀의 힘이 무시무시했다. 정태의가 온힘을 다해 그손을 뜯어내려 했지만 정태의의 멱살을 쥔 손을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형이 왜 그 남자랑 잤다는 건지, 왜 그런 불쾌한 소문이 도는 건지 알 수 없었어요. 형은 날 좋아하잖아요? 나도 형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나랑도 그렇게 안 했는데,
왜 그 남자랑? 말도 안 되잖아요!"
신루의 목소리는 이미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이 갑자기 정태의를 밀었다. 바로 뒤에 있던 침대에
걸려 정태의는 그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래도 멱살을 쥔 채로 놓지 않았던 신루도 같이 넘어진다.
"……!"
정태의는 신음을 삼켰다. 다리가 엉겨 뚜둑, 소리가 났다. 일순 눈앞이 아찔했다.
무릎 아래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수술을 받았던 데다.
정태의가 소리도 못 내고 아픔을 눌러참는 사이에 신루는 정태의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형, 날
좋아하지 않아요?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 남자에요?
그 남자는 안 돼요. 그 남자가 싫다고, 내가
그랬잖아요!"
정태틔의 허리 위에 앉은 신루는 옷깃을 잡아당겼다. 툭, 투둑, 앞섶이 손쉽게 뜯겨져나갔다.
서늘한 공기에살갗이 맞닿는다. 신루는 정태의의 몸이 드러나자 마치먹잇감을 둔 맹수처럼
무작정 달려들었다. 정말로 뜯어먹으려는 것처럼 쇄골을 물어뜯었다.
"신루. …ㅡ신루.
진정해. 잠깐 비켜 봐."
정태의는 신루의 머리를 그러쥐고 말했다. 그러나 신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듯 정태의의 드러난 몸을 무턱대고
깨물어댔다. 정태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입에서탄식이
나오거나, 욕설이 나오거나,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몸 위에 올라앉은 이낯선 남자가 몹시 무거웠다. 심장이 콱 막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끔찍하도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신루……, 하지 마."
정태의는 띄엄띄엄, 간신히 속삭였다.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울고 싶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대면서 '이제 난 몰라,
될 대로 되라지,'하고 모든 걸 다 팽개치고 싶었다. 어느 구석에 숨어서영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이 남자가 몹시 낯설긴하지만 신루인 탓이다.
정태의는 분명 신루에게 미안해해야 했다. 그의 몸은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저버렸다. 다른 사람과 거듭해몸을 섞었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정신 역시, 신루를 저버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순간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신루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지만, 신루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신루가 바라는 만큼의 마음이 아니었다.
마음은 퇴색하고 감정은 빛바랜다.
정태의는 한숨처럼 조그맣게 신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신루는, 이미 낯설어진 그 사랑스러웠던 청년은,정태의의 어깨를 깨물며 이를 갈듯이 짓씹어 말했다.
"그놈은 안 돼요. 그 남자만큼은 내가 싫어요. 나를 속이고 비웃었어요. 그런 남자가 형을 얻는 걸 보고 있으라고……? 그럴 수는 없어요.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그놈만큼은 절대로 안 돼요……!"
그 말이 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정태의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다.
예전 언제였던가, 이런 느낌을 맛보았던
적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희미하고 조그마했지만, 그 감정의 색깔은
분명 지금가 같았다. 신루가 정태의의 삶을 걸고일레이와 거래를 했던 때다. 정태의를 위해서가 아니라신루 자신을 위해서, 정태의의 삶에 관여하려 했을 때.
"……!!"
짤막하게, 신루의 외마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정태의는 자신이 무슨 정신이었는지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ㅡ아니, 실상은 제대로 정신을 차린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엔 새하얀 불빛이 번쩍거렸고 귓가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북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렸다ㅡ정태의는 침대 위에 반쯤 걸터앉아 신루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신루는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신루의 머리를 후려친 모양이었다. 가벼운 뇌진창이라도 일으켰는지 신루는 흔들리는시선을 바로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설마 정태의가 자신을 후려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불안정한 눈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정태의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메마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바삭바삭하게 메마른 까칠한 목소리가 핏기 잃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러가 그 씁쓸한
웃음은 입가에 떠오르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가 다 왜 이래……. 다들, 나를 그렇게 하찮게 여겼어? 나는 내 의지도 없는
것 같아? 편할 대로 휘두르고 좋을 대로 다뤄도, 나는 감정도 없을
것 같아? 화도 안 내고, 상처도 안 받고? ……나는 그렇게 강하지않아."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마지막 한 마디는 거의입 속에서만 머물다 녹아든다. 그러나 힘이 빠지는데도, 희한하게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조용하게 시들어버린 몸 안에서 울분은 불씨처럼 천천히 주위의
감정들을 태운다.
"……안 되겠다. 나는 이제 여기서 더 있고 싶지 않아.나가야겠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루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창백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정태의의
말이 마치 끔찍하게 두려운 꿈이 현실이 되기라도 한 듯, 얼굴이 새하얗게 허물어진다. 뭐라고 달싹거리던 입술이 잦아들더니,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속삭였다.
"못 나가요……. 못 가요. 총관님의 허가도 안 받았잖아 ……. 그러니까
못 나가요. 혼자서 마음대로 UNHRDO의 부원을 그만둘 수 있는 법은
없어요."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목소리는 고작해야 그런 말밖에못했다.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총관. 허가.
UNHRDO. 그게 다 뭐란 말인가. 자신의 마음이 이곳을 떠났는데 무엇이 자신을
묶어둘수 있다고.
"그래……? 그럼 총관에게 직접 말하면 되겠군. 그러면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겠지."
"태이 형!"
신루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그 목소리를 뒤로하고 정태의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방을 박차고 나섰다.
* * *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은 사실 신루의 탓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화를 토해내는 것은 실상 하나의 사실 때문만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때까지 쌓이고 쌓였던 일이 아주 작은 계기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여태살아오면서 정태의가 폭발한
몇 안 되는 때는 대부분이그런 경우였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은 억누를 수 없게 될 무렵이 되면, 어느 순간 정말로 사소하고우습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 분노는 터지고 말았다. 나중에 생각하면 어이없어지기도 한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뭐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냐고도
했다. 울화의 물꼬를 튼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쩌면 그런 경우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렇게 화를 폭발시킬 정도로 신루라는 대상에게 분노한 건 아니었다. 그 분노는 신루가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단 일레이의 때문만도 아니었고 다른 동료들이나
숙부 때문도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모두의탓이었다. 정태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초조해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가며 잇새로 내뱉었다. 약으로 좀 잦아드는가 했던
두통이 다시 몰아닥쳤다. 아까 침대에 넘어지면서 엉겼던 다리는 발목을 접질렀는지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욱신거렸다.
이쯤 되면 분을 넘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잖아. 머릿속도 엉망이고 몸도 엉망이다. 자기 자신을 추스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대신 추슬러줄 만한 사람도 없다. 정태의는 홀로 이곳에
버려져 있었다.
"하. 정태의.
이게 뭐야……. 화풀이나 하고, 스스로를 다잡지도
못하고. 인간 되려면 멀었다.
그러나 인간 되려고 백날 노력하면서 참아봐야, 그것이 쌓이면 결국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다. 요는 평소에안 쌓아두고
사는 게 제일인데, 그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지상층까지 올라간 정태의는 잠시 멈춰 서서 한숨을쉬었다. 고작해야 몇층 오른 정도로
숨이 찰 리도 없었지만 정태의는 몇 번이나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불현듯 그는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이제 이 느낌의 이름을 알겠다.불쾌하고 울화가 치밀면서도 어디에 호소할 만한 힘이없고,
울부짖거나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도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들어 기거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정태의는 지쳐 있었다.
정말로 너덜너덜하도록 지쳐버렸다.
고작해야 그런 일들로 약한 소리를 하냐고 누군가 탓한다면, 나중에 기운을 차린 뒤에 그 빌어먹을 자신의 멱살을 쥐고 그 면상을 흠씬 두들겨 줄 수도 있었다.
몸이 지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정신이 지치는 건 참기힘들다. 심지어 지금은 지쳐서 돌아가면 집에서 그를 말없이 맞아주며 함께 마주앉아 못 마시는 술을 대작해줄 형제도 없다.
기댈 곳도 없고, 토로할 곳도 없고, 자기
옆에 미덥게 앉아줄 사람도 없었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 손등으로 마른 눈가를 훔치곤 걸음을 내디뎠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숙부가 뭐라고 하든, 다음 번 총관이 누가 되든, 누가 어느 지부로 옮겨가든, 더 이상은 정태의가 알 바가 아니다. 사람의 삶도 일도, 되어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누가 조력을 하든 누가 방해를 하든, 그렇게 이루어졌다.
되지 않을일이었다면 어떤 도움이 있어도 안 되는 것처럼.
"삼촌이라면, 삼촌이 모시는 사람이 저멀리 어딘가 좌천을 가게 되더라도 홀로 무사히 살아남을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왜 필요하담."
아무도 듣지 않는데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불쑥 말 해놓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 말이 맞다. 저 숙부는 누가 돕거나
안 돕는다고 자신의 인생길을 어지럽힐 사람은 아니었다. 어떠한 새 길을 찾아서든 훌륭하게 잘 헤쳐나갈 사람이다.
욱신거리는 발목을 질질 끌면서 복도를 걷는 사이에 저만치 총관실이 다가왔다.
예전, 일레이의 임관식
때 딱 한 번 와봤던 곳이다. 일개 부원이 이렇게 함부로 들이닥쳐서 될 곳이 아닐 테지만 이미 정태의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숙부와의 약속은 끝났다. 알량하게 남은 기일 따위 이제는 상관없었다. 숙부에게도 상관없을 거다. 이곳에서 나가도 되게끔 그 '허가'라는 걸 해줄 권한이
총관에게있다면, 총관을 만나서 직접 말하겠다. UNHRDO를 그만두고
이곳에서 나가겠다고.
원래라면 정태의가 직접 총관을 만날 일이 아니었다. 부원이 청하면 그 위의 교관이 그 뜻을 수렴해 총관에게는 형식적인 승인만을 얻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절차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총관실 앞에서 정태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한순간숨을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두껍고 육중한 나무문이 낮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정태의는 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들어오라는 소리가들리길 기다렸지만 잠시 그대로 있어도 아무런 소리도들리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정태의는 총관실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아니,
사실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아직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이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총관실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한데도 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저 머리끝까지 울화로 가득 차 무작정 달려왔을 뿐이다.
정태의는 하,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우습과 바보같다.
그는 한동안 총관실의 문고리를 쳐다보기만 가만히 밀어보았다.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문은 쉽게 열렸다.
"……실례합니다. 교위 정태의입니다."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문 밖에서 낮게 고했다. 문이 열린 상태에서 말을 했으니 틀리엄이 방 안에도 들렸을 텐데,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게 맞는가 보다.
정태의는 망설이다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어쨋든 총관이란 인간을 만나, 여차하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이 지부에서
기쁘게 쫓겨날 각오가 되었다. 총관실 아니라 총관의 침실이라도 뛰어들어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총관이 머무르는 곳은 총관실과 이어져 있지 않았던가.
총관실 안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것처럼, 커다란 책상 위의 스탠드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저 스탠드는 밤새 사람이 없는 동안에도 켜놓는 걸까. 그러고보니 총관이 워커홀릭이라고 할 정도로 밤낮없이 일에 골몰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어쩌면 아직 나오지 않을게 아니라 근처 어딘가에 잠시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그의 눈에 총관실 안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문이 들어왔다. 하나는 화장실 문,
하나는 총관의 개인실로 향하는 문이다.
주저 없이 그 문을 향해 걸어가며 정태의는 잠시 이렇게까지 해서야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바레야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즈음 되자 약간 머리가 식어 아주 조금은 후회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대로 돌아서다가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그게 더 우스운 꼴이 될 뿐이었다.
사실 일개 부원이 사소한 개인의 청원으로 총관실에 들이닥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다. 당장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일이다. 물론 정태의가 바라는 바는 잘리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은 거지만, 이 상황이 비상식적이고 무례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마주치면 사과부터 먼저 해야겠지, 그런데 혹시 방 안에 들어갔더니 벗고 있다든가 여타 멋쩍은 상황에 부딪치는건 아닐까, 당연하게 떠오르는 고민을 하며 정태의는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총관님, 교위 정태의입니다. 뵙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문을 두드린 뒤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렷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개인실에도 없는 건가. 하긴 불도 켜놓은 채이니 역시 어딘가 다른 곳에 잠시 간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힘이 빠졌다.
지쳐 있던 차에 일순간 울화를 폭발시키고 그 결에 단숨에 여기까지 한달음에 찾아왔는데 총관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힘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 없는 나무문을 다시 두드렸다. "총관님……." 하고,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힘없이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문 옆의 버튼으로 시선을 주었다. 조금
전 까지는 머리에 핏발이 서 있어 주위를 둘러볼 여지도 없었는데, 이제 보니 문 옆에 버튼이 있었다.
처음엔 초인종이라고 생각했다. 정태의는 그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누르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거니와, 이 감촉은 초인종이라기보다는 꼭…….
정태의가 그 뒷말을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나무문으로 보였던 그 문이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문안쪽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다.
정태의는 멈처 선 채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엘리베이터가 여기에 있는
걸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여기는 총관의 방이었다. 다른 층으로 이어지는 직통 엘리베이터 하나쯤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게다가 이 엘리베이터 아래로 곧바로 총관의 개인실과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태의가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에 보통의 방문처럼 생긴 나무문은 다시 조용히 닫혔다.
정태의는 입매를 찌푸렸다.
뭔가가 걸렸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뭔가 걸렸다. 그리 좋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어쩐지 이 엘리베이터가,
이 나무문 자체가 불길한 느낌이었다. 이 안에는 타고 있어선 안 될 무언가가 타고
있을 것만 같았다.
"……."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태의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과 같이 나무문이 미끄러지면서 엘리베이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용했다. 정태의는 그 순간
갑자기 정적을 들었다. 이 방에는 아무도 없이 정태의 혼자만 있었다.
나무문은 다시 한 번 미끄러지며 닫히려 했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 문을 손으로 막았다. 장애물에 걸린 문은 도로
입을 벌리며 열렸다.
정태의는 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정태의는 엘리베이터를 돌아보았다. 여느 엘리베이터와 다를게 없었다. 층을 가리키는 형광관이 있고,
목적층을 누르는 버튼이 있다. 딱 하나 다르다면, 그버튼은 하나였다. 오로지 한 곳으로만 가는 엘리베이터다. 이 엘리베이터로는 지부 안의 다른곳으로는 갈 수 없었다. 단지 목적층 한곳과 총관실,
두 군데만을 오가는 기계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태의는 숫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잠시 발치를 감돌고,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튼에는 아무런 숫자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총수를 가리키는 형광판에는 숫자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숫자는 하나씩 올라간다. 지상층을 나타내는
알파벳 G에서부터 시작해 1, 2, 3, 지하로 향한다.
그리고 그 숫자는 4에서 멈추었다.
숫자가 정지하면서 엘리베이터도 함께 멈추었다. 발 아래에 묵직한 무게감이 잠깐 다가왔다 사라진다.
정태의는 형광판의 숫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하 4층이다.
입구도 없이 가로막혀 있다는 곳. 층계에서 이어지는 입구에는 출입금지 표시가 걸려
폐쇄되어 있고, 엘리베이터는 서지 않는 층이었다. 그곳에서 이 엘리베이터는
멈추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곤란한데, 라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정태의는 이곳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알아서는 좋을 게 없는 류의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의 감은 명백하게 고하고 있었다. 이곳도 그런 류의 장소중
하나라고.
엘리베이터 앞은 몇 걸음 가량 떨어진 곳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으면 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올라가면 없었던일로 돌릴 수 있다.
정태의는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문이 저절로 닫히면 지상층의 버튼을
누를 참이었다. 이곳에서 내리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뭔가가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기다려도 문이 닫히지 않았다. 한참 기다린 뒤 다시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스물까지 숫자를 세고 나서도
문이 닫히지 않자, 정태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 층에서는 닫힘
버튼을 눌러야만 문이닫히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정태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엘리베이터의 하얀 형광등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여전히 엘리베이터 앞에는 벽이 간막이처럼 시야를 막고 있었다.
"알아서 좋을 것 없지. 알아. 안다니까."
정태의는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편으로는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 안은 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처럼
꾸며져, 거기에서 총관이 여유롭게 생활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고. 거의
백에 가까운 부원이 지하6층을 같이 나눠 쓴다고 하지만, 총관쯤 되면
한 층 전부를 혼자서 쓴다고 해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설마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곳이일반인에게ㅡ물론 일반 부원에게도ㅡ금지되어 있다는건 명백하다. 그런
곳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내렸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내리지 않으면 적어도 여태껏과 같은
안전이 보장되고, 내리면 그 앞에는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내기를 정태의는 싫어했다.
그럼에도내렸던 것은 인간의 본능 속에 담긴 상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태의가 내리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무게까지 인식하도록 지정된 엘리베이터를 고작해야 두 지점을 잇는 데에만 쓰다니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태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2천 평 면적이라고 했었다. 그런 넓이의 한 층 전체가통으로 트여 있었다. 저만치 멀리에 반대편 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벽과 정태의의 등 뒤에 있는 벽 사이를 드넓은 공간에는 크고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대형 창고였다.
"이거야 원……, 첫눈에도 수상쩍은 냄새가 이렇게 풀풀 나서 어떡하려고……."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컨테이너를 실어놓은 철제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어지간한 건물의 2층 높이는 될 법한 이곳의 천장까지 철제 선반이 닿아 있었다.
철제 선반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육중한 쇠기둥이 바닥과 천장에 붙박혀, 그
사이사이로 빼곡하게 연결된 쇠그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물 위에 컨테이너 박스들이 줄지어 있다.
컨테이너는 갖가지였다. 서랍장만큼 작은 것에서부터조그마한 가건물만큼 커다란 것까지, 크기에 따라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재질도 목재와 철제로 나뉘어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겉에 아무런
표식도 되어 있지 않은 정도일까.
"안 좋은데……. 역시 그냥 올라가야 했나."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그는 돌아가기를 포기한 것과 같았다.
저벅,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은 소리를 흡수해주지 못했다. 꽉
차 있는 공간이니 소리가 크게 울릴 까닭이 없는데도, 당당하지 못한탓인지 혹은 혼자 있어서 그런지 자신의
발소리임에도귀에 거슬렸다. 정태의는 몇 걸음 앞에 있는 조그만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뚜껑을 손마디로 툭툭 두드렸다. 안에서 뭔가 소리가 날까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컨테이너를 손끝으로 밀어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않았다. 몸 전체에
힘을 주고 가볍게밀자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선반 제일 아랫단에 들어 있는 상자는 못질이 되어 있었다. 그리나 그 바로 위,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모양인상자는 뚜껑이 덮여 있긴
하지만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잠시 그 상자를 바라보던 정태의는 뚜껑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가만히 밀었다.
묵직한 뚜껑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는 듯 잠시 무게감을 지켰지만 이윽고 천천히
옆으로 비껴갔다. 상자안의 내용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
이런 제길.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삼켰다.아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상자 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 옆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똑같은 게 들어 있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상자의 크기가 요 앞의 것보다 두 배가량 컸다.
그 크기의 상자들은 대부분 다 뚜껑에 못질이 되어있어 열 수 없었다. 그 근처의
철제 선반을 한동안 둘러본 뒤에야 겨우 열려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정태의는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들어있으리라 예상했던 내용물
그대로였다.
"……점입가경이군……."
정태의는 걸음을 옮겼다. 상자의 뚜껑을 닫지도 않았다. 어차피 틀림없이 이 창고의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곳에 들어선 시점에서이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여유가 생겨나기까지 했다.
창고의 제일 안쪽까지 곧바로 걸어갔다. 그 사이사이에가끔 생각난 듯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혀 내용물을 확인했다. 정태의의 걸음이 멎은 곳에는 방 만한 크기의 컨테이너가 놓여 있었다. 창고의 제일 깊은 곳이었다.그 컨테이너는 크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닫혀 있지 않았다. 마치 가건물의 벽면 하나를 뜯어낸것처럼, 컨테이너의 옆면 하나가 통째로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덩그러니,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들어올리기 조차 힘들 쇳덩이가 누워 있었다.
넋을 잃은 듯, 정태의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컨테이너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새카맣고 윤기나는 쇳덩이를. 매끄러운 곡선이 뾰족하고도 완만하게이어진 그 철기는 금세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윽고 정태의의 입에서 짧은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 안에 붙박혀있었다.
"내 참……, 환장하겠네……."
정태의는 바보 마냥 해설피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그럴 수밖에, 그 외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사고가 엉망으로 뒤섞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참, 환장하겠는 건 나다.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어깨 너머에서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태의는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고 돌아보았다. 조금 전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졌기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려 들지도 않고 걸어온 그 목소리는, 정태의에게서 여남은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때는 되어야 오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제트기라도 타고 오셨어요?"
"너랑 통화했을 때 이미 공항이었거든.
지부에 불미스런 일이 터졌다는데 훈련이고 뭐고 즉시 마무리하고 소집됐지."
정태의가 심상하게 묻자 숙부 역시 심상하게 대답했다.그는 한 발짝 더 걸어오더니, 정태의가 조금 전까지 바라보았던 컨테이너로
시선을 주었다. 마치 조각상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한동안바라보던 그는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동체지?"
"예. 내가
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폭탄이군요."
정태의는 감탄한 듯, 혹은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그 지친 목소리에 애틋한 한숨이 어린다.
"이게, 재의가
마지막으로 만든 거야."
숙부는 저벅, 저벅,
천천히 그 거대한 동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멈춰 서,
새카만 철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숙부와 그 철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컨테이너에 들어 있는 것들도 형이 만들었어요?"
숙부는 잠시 말없이 새카만 윤기를 더듬다가 애매하게고개를 기울였다.
"그 중 일부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일반적으로 팔려나가는 상품일 뿐이지."
"상품이라……. UNHRDO의?"
"정확히는 합작품이라 해야겠지. 게다가 반이 상품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반은 기부품이라고 해야 할까."
숙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쉬운 듯 철제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시선이 마주친다.
정태의는 미간을 문질렀다. 힘없는 웃음이 나온다. 웃는 수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건 뭐,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이네……. 상품에 기부품이라."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숙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뜻을 모를 정도로 정태의는 멍청하지않았고,
그렇게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UNHRDO 본부가 미국에 있던가요."
정태의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숙부가 대답 대신 눈썹을치켜올렸다.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거기, 또
이란에 무기 팔아서 남의 나라 공산정권 반군에 몰래 대줘요?"
정태의가 힘없이 농담을 하자 숙부는 희미하게 웃었다.
"UNHRDO는 미국에 소속된 기구가 아니야.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여섯 개의 나라가 고루 힘줄을나누어 쥐고 있는
곳이지."
"과연. 여섯
개의 나라가 고루―――힘줄을 나누어 쥐고 있는 국제기구란 말이죠.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
숙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 정태의가 아까 열어젖히고 뚜껑을 닫아두지 않은 상자로
걸어가 도로 뚜껑을 덮어두면서 숙부는 짧게 말했다.
"그 이상은 노 코멘트."
정태의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컨테이너가 쌓여 있었다. 이 창고 안 가득,
컨테이너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그 너머까지 컨테이너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바로 지금이라도 꺼내어 쓸 수있는 무기들이 잠들어 있었다.
"모러 같은 놈이 보면 아주 환장하면서 좋아하겠군요."
정태의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웃으려 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대단하다. 아주 확실하게 넉아웃이다.
"어느 선까지가 비밀인가요."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숙부는 그가 열어젖혀 두었던 상자의 뚜껑을 하나씩 덮어가며 그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네가 알고 있을 만한 사람 가운데 선 위에 있는
사람은열 손가락 안이지. 총관, 차관, 교관 가운데에는 나와 릭만. 그 외에는 아마도 재의가 알고 있을걸. 직접 말한적은 없지만."
"……아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끄덕, 아직도 의식은 꿈을 꾸는 것 같았고 상황을 제대로 납득할 수도 없었는데도 고개만은
오뚝이처럼 끄덕끄덕, 계속 움직였다.
총관과 차관, 교관 가운데서는
숙부와 릭. 그리고 아마도 정재의.
그 나열에 정태의는 잠시 생각을 되짚었다. 총관과 차관, 그리고 개발자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교관 가운데 굳이 두 사람만 짚은 이유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섞여 있는 이유가 이내 쉽게 짐작이 갔다.
과연 그런 거로군. 이제야 일레이의 그 기묘한 특혜를알겠다. 과연, 이래서
숙부는 'UNHRDO에 필요한 인간'이었어. 문득 정태의는 픽 웃었다. 그걸 시작으로, 웃으려 해도
도무지 나오지 않던 웃음이 멈추지 않고 새어나왔다. 낮고 메마른 웃음이 한창동안 이어졌다.
이 정도쯤 되면 웃을 수밖에.
국제연합 인적자원 양성기구.
만인이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그 국제기구가 암암리에앞장서서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면 누가
믿을까. 이걸 터뜨리면 특종도 다시없을 특종이다. 물론 터뜨리기 전에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든가, 혹은 지상에 한 글자 게재되기도 전에
유야무야 무마되어버릴 테지만. 이거야, 맥킨 따위는 비할 수도 없었다.
"국제 조약을 국제기구에서 어기면 어떻게 하란 거에요.
……아니, 어쩌면 애초에 이걸 위해 설립된 걸까……,아하. 그러고 보니 아시아 지부가 UNHRDO의 지부
가운데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했던가요."
"태의."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자르며 이름을 부른 숙부는 잠시 침묵하다가 곤란한 듯 고개를 내저으며 짐짓 난처한 척 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으로 짐작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아주다른 문제야. 상상이 현실로 바뀌게 되거든."
이번엔 정태의가 침묵했다. 숙부의 경고를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던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묵묵히 발치만 쳐다보다가
다시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얼간이가 된 기분은 처음이다. 정태의는 어느결에 그 스스로가 모르는곳에서 춤추고
노래부르며 어릿광대가 되어 있었다.
"형은요."
정태의가 불쑥 물었다. 그러나 모든 걸 알고 있을 것만같던 숙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아직 실마리도 찾을 수 없어."
정태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지쳐서 축 늘어진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여기서 화석이 되어도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스운 꼴이다. 정태의는 스스로를
비웃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는 남보다 특별히 더 도덕적이지도 않았고 양심적이지도 않았다. 세상을 그리 순수하게 볼 만큼 꿈 많고 풋풋한 청년도 아니었다. 세상 어느 구석에서 무슨 비리가
터졌다는 말이 들려와도 사람 사는 곳이 그러려니, 스쳐 넘겼다.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지친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화를 내거나 혹은 핀잔을 주고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후, 입김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있었다. 이곳에 스스로가 있다는 사실조차수백
톤의 철추가 되는 듯 그를 짓눌렀다. 하물여 이곳의 시스템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신도 연관되어버린 바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마 네 집으로 찾아갔을 때 재의가 같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재의보다 너를 데리고 왔을 거야. 처음부터 도움을 청할 사람은 너라고 생각하고 데리러 갔었다."
뚜걱, 구두 소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한 번 더 다가온다.
"너는 틀림없이 실력도 있고, 똑똑하지. 설령 주위가 네노력과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아니야.
적어도 이 환경에서는, 이 환경에 처할 만큼 너는 뛰어났던 거지."
"삼촌……, 그거 궤변이에요."
정태의는 힘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상황에 처한 것이 그의 불운 탓이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혹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알량한 재능 탓이라면,
그 따위 것은버려도 좋았다. 정태의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숙부가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에게
사과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을 거다.
"삼촌. 난
이만 돌아갈게요."
정태의가 말했다. 숙부는 잠시 생각하다가
무릎에 손을짚으며 허리를 굽혔다. 조그만 어린애를 살피듯이 정태의의 머리 위로 숙부의 얼굴이 다가왔다.
"너라면 이곳에서도 네가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텐데."
"높게 평가해주셔서 고맙지만 삼촌.
저는 이곳에서 원하는 자리가 없어요."
정태의가 픽 웃었다.
원하는 자리라.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사람을 때려잡고도 별 처벌도 받지 않는 저 미친놈이나 눈앞의 이 능구렁이 숙부와 같은 교관 자리?
자리다툼을 하며파벌을 짓는 차관 자리? 아니면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세상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일조하는 총관?
그 어디에도 정태의가 올라갈 자리는 없었다.
"지쳤어요."
"……."
"집으로 돌아가 한 일주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부터 자고 싶어요. 여기는 잠자리가 너무 뒤숭둥해서,깊이 잠들 수가
없지 뭐에요."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숙부는 힘없이 화내는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장난스럽게,농담처럼, 사실을 말한다.
"한동안은 네 집도 잠자리가 썩 좋지는 못할 거다.
원치않은 손님이 드나들지도 몰라. 이번에는 재의가 아니라태의 너를 찾는 손님일 테지만."
"그게 뭐에요……."
정태의는 정말스럽게 중얼거리며 다시 무릎에 얼굴을파묻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숙부의 저런 말이 틀린 적은 없었으니 십중팔구는 그렇겠지. 어쨌든정태의는 차관직의
불미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평화롭게 돌아갈 집도 사라졌다. 마음은 이미 이곳에서떠났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갈 데가 없었다.
"순식간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네요…….
삼촌, 너무해요."
정태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그 말이 숙부의 귀에 제대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숙부는 한동안 정태의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태의야. 원래 이곳으로 올 때 나와 약속한 건 반년이었지."
"이제 별로 남지도 않았잖아요."
혹여라도 반년은 채우라는 말이 나올까,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설령 반년 채우라고 하더라도 정태의는 나가버릴
생각이었다. 더 이상은 이곳에서 있고 싶지 않았다. 숙부와의 약속도
그를 묶어둘 수 없었다.
"그러면 남은 기간 동안, 여기가 아닌 곳에서 나를 위해일해주렴."
숙부의 진지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태의는잠시 대답 않고 묵묵히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숙부는 끈기있게 정태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힘없는 눈으로 숙부를 바라보며 탄식처럼 속삭였다.
"삼촌. ……진짜
뻔뻔하시네요."
숙부는 웃었다. 숙부의 눈이 오늘
처음으로 부드럽게 굽어지는 걸 보고, 정태의는 한숨을 쉰다.
"삼촌. 난
형이 어디 있는지 짐작 가는 곳도 없어요. 여기저기에서 온갖 정보망을 동원해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찾아내겠어요."
정태의가 말하자 숙부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가 소리내어 웃고 만다. 뜻밖에 한 방 먹기라도 한 것처럼 나직이
웃음을 터뜨린 숙부는 그 웃음을 그치지도 않고 정태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숙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조카는
더욱 영특하고 감이 좋았다. 얼마 안 되는 단서가 주어져도 놀랄 만큼 정확하게 그 핵심을 짚어낼 줄 알았다.
"결과까지는 바라지 않으마. 과정만으로도 좋아.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기 전까지 너는 UNHRDO의 특수부원이라는 신분으로 있을 수 있고, 그에 소요되는 경비도 물론 전액 청구할 수 있지.
하다못해 지나가는 걸인에게 던져준 돈까지도. 무슨 말인지 알겠니?"
숙부는 아주 어린 조카에게 하는 것처럼, 정태의가 아주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보드랍게 감싸며 쓰다듬었다. 정태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얌전히 숙부를 바라보았다.
"한두 달. 그 정도면 내부에서는 일이 정리될 거다. 좌천을 당할 사람은 당하고, 전출 나갈 사람은 나가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는 데에도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그 뒤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렴.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종종 들를 테니까."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3년 동안 한 번도 안 오셨으면서, 뭐가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종종 들르겠다'는 거에요."
정태의는 힘없이 늘어진 가운데서도 숙부의 말에서 걸리는 부분을 넘기지 않고 움켜쥐었다. 숙부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귓가를 스친다.
정태의는 숙부의 손을 뺨에 댄 채로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한 백여
년은 깨어나지 않을 것같았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두 달. 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찾아봐 드릴게요. 나도 형을 보고 싶어졌으니까."
정태의는 잠에 취한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쩌면 알아듣기 힘들 법도 한 그 목소리를, 숙부는말없이 듣고 있었다.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UNHRDO의 특수 부원이라는 신분을 필요 없어요. 정태의라는 신분도 위험하겠지요. 제게 새 이름을 주세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ㅡ실제로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ㅡ신분. ……삼촌조차도 알 수 없는 이름을 주세요."
이곳에 남겼던 흔적이라곤 무엇 하나 남긴 없이 버려버리도록. 정태의라는 인간을 찾을 단서는 남기지 않고.누구도 모르는ㅡ숙부초자도 알아낼
수 없는ㅡ새 이름을 가지고.
숙부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서 멈추어 있던 손이 이윽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그 녁넉한 손길은 기분 좋았다.
"그래. 그렇게
하자. 네가 원하는 이름과 네가 원하는 국적, 나이, 인적 사항으로 신분을 만들어주마. 그런 뒤그 기록은 나도 보지 않고 봉투에 넣은 채 그대로
소각시키도록 하지. ……하지만 너까지 재의처럼 종적이 묘연해져버리면 나는 좀 슬플 것 같구나."
"가끔 연락 드릴게요. 어쨌든 형을 찾는다는 명목이니,경과 보고는 해야죠."
정태의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숙부는 한동안 더 그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만 일어날까. 오늘 하루는 다시 시작해야할 시간이 되었으니."
정태의는 숙부가 한 걸음 물러서며 내민 손을 잡았다.그리고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영 그곳에서못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
어쨌든 지금은 일어나 걸어야 했다. 앉아 있기만 했다간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탓이다.
숙부의 두어 걸음 뒤를 따라가며, 정태의는 멀찍이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저 엘리베이터가 올라타고
그 문이 다시 열리면, 그곳은 바깥이다. 더 이상은UNHRDO의 지부가 아닌 바깥이, 저 문의 바깥에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지겨웠고, 또한 지쳤다.정태의라는 인간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제 그것들을 벗어내고, 정태의는 나갈 준비가 되었다.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숙부는 말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곳에 미련을 가지지도않았다. 이제 다시는 그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지친 마음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지금
이 순간, 지쳐 너덜너덜하게 헤어진 마음을 쉬일수만 있다면 나중의 안식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베이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숙부는 열린 나무문안으로 들어가 정태의를 기다렸다. 그 안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이면, 정태의는 정태의에게 안녕을 고해야 한다.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망설였다. 숙부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망설일 게 있을까. 그를 잡아둘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정태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친 마음을 다독이려는 듯. 그리고 다른 곳에 머무르기 위해,
걸음을 뗐다.
3권 끝. 4권으로
계속.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