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mine 2
Table of Contents
13. 세계의 적 (2)
몸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은총’을
만졌을 때 기절해버렸던 정황도 있고 해서 자세한 설명은 다음 날 듣기로 하고 그날은 우선 파했다.
물론 나는 게임을 플레이했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고 있긴 하지만……. 게임의 전개와 많은 부분이 달라져서 안심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마법사 중에 정화의 힘을 가진 나, 그리고 나와 같은 팀이라고 할 수 있는 벨키나와 루민스가 최종적으로 진정한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의 참여자로 선정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벨키나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 자체는 변함없었다. 그 사실이 그나마 나를 안심하게 했다.
유고와 칼트가 나를 걱정하며 이야기하는 걸
몇 마디 더 받아주고, 정신없이 처소로 돌아왔다. 우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흰둥이는 사정을
듣자마자 무척 나를 걱정했다.
“태초부터 부여된 힘이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은 그것만으로 위험 소지가 있다, 세네핀. 나는 부디 그대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란다.”
“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진. 저도 너무
뜻밖이지만……. 그래도 왕세자 저하가 대륙의 명운까지 언급하셨을 정도면, 보통 사태는 아니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죠.”
“나는 이미 그대에게 등을 바친 몸. 그대의
의지가 나의 의지이니 모쪼록 뜻대로 하라.”
흰둥이의 목을 끌어안고 나는 끄덕였다.
“나도 힘낼 거야. 이대로는 안 돼! 얼마
뒤에 마법사 승급 시험 있으니까, 거기서 승급할 거구! 무슨 일이 있어도 세네핀을 지킬 거야!”
벨키나가 경쟁하듯 내 어깨를 껴안으며 다짐했다.
“호호, 고마워요. 벨키나. 저도 벨키나를
지킬 거예요.”
“히잉……. 힘이 부족해서 미안해.”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이 ‘정화의 힘’도
네가 지닐 힘이었는걸. 뭐가 잘못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건너편에 조용히 앉아 있던 루민스가
입을 뗐다.
“일단 저녁 먹자. 세네핀도 영양 보충하는 게 좋을 거고. 너희도 그만 세네핀 괴롭히고 쉬게 해줘.”
“아, 응! 맛있는 거 먹자, 세네핀!”
나는 끄덕이면서도 루민스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처럼 어두운 표정은 아니지만, 아직도 어딘가 그늘이 있는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어라?’
그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이 조여들었다. 딱히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뭔가 병인가! 오늘 기절한 거 후유증인가?
‘아니면, 루민이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 무의식중에 우울했나?’
내가 기절하는 바람에 이래저래 날 걱정해서
그런 거겠지만, 루민이가 내내 그늘진 얼굴인 게 역시 마음 쓰였다. 에휴, 그러게 왜 기절은 해
가지고.
정신 차리자. 오늘 루민이의 사망 플래그는
뛰어넘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잖아.
오늘 진정한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을 위한
인원이 우리 셋으로 압축되었고, 내일 다시 자세한 설명을 들을 것이다. 보안을 위해서 밝히지 않은
진정한 계획의 전모가 드러날 테지.
그 이후에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하다. 장기 여행은 처음이라 좀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나저나 유고 왕자는 진짜로 우리 쫓아 오려나?
소드 마스터님이시니 전력으로는 든든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왕자 신분으로 따라오는 거 오버 같은데…….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나는 미래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
아침에 멍하니 일어나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5시쯤이었다. 어두컴컴한 걸 보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나 보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냥 자버렸네.
슬슬 해가 뜰 시간이니 동트는 거 보면서
산책이나 할까 하고 숙소를 뒤로했다.
현관문을 닫고 하늘을 보니, 이제 해가 조금씩
뜨기 시작하는지 새카만 동쪽 저편으로 주홍빛의 띠가 넓게 어른거린다.
지평선이 보이는 곳은 아니기에 일출을 보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별채에서 동쪽에 있는 왕성의 실루엣을 따라 주홍빛의 범위가 넓어져 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 깜짝할 새에 경계가 밝아졌다. 남색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의 기세가 점점 빛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커다란 해가 풍경을 반사하며 왕궁의 탑 너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페이넌스 왕궁 특유의 푸른 성채도 이슬을
머금고 있는 정원의 장미도 햇빛을 받아 눈부셨다. 그 조용하고도 이채로운 광경에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네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내가 누구보다 좋아해 마지않는 루민스 할데르프가, 밝게 웃으며 나를 향했다.
지금까지 보고 있던 풍경의 그 어떤 수려한
색채보다도 뚜렷하게 그가 존재했다.
주홍색 태양을 받아 조금 짙은 색으로 흔들리는 보랏빛 머리도 미소를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도 요즘 야위어서 걱정되는 얼굴선도 나보다
한참 큰 키도 회색빛으로 몸을 감싼 세련된 의상도.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저 선연하여 방금
보았던 풍경의 아름다움 따위는 어느샌가 머리에서 날아가 있었다.
“……세네핀? 울어?”
“아…….”
루민스가 지적하고 나서야, 내가 얼굴을 뜨겁게 적시며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어제부터 무슨 일일까, 저도 모르게
뚝뚝 흐르는 눈물에 당황하여 나는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고 보면 처음 이 세계에 왔던 날도 그랬지. 루민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격해서 울어버렸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났다.
루민스를 바라보면 새어 나오는 이 감정은 그 첫 만남 때처럼 여전히 뜨겁고 강렬하다.
그러나 이렇게 애달프고 괴로운 기분은 느낀
적 없었다. 그가 게임에서 죽는 걸 보고 슬프고 안타깝긴 했지만 이런 심정은 아니었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세네핀. 슬퍼할 일 아무것도
없어.”
조용히 나를 위로하며 그가 양팔을 벌려 품을
내주었다.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마주 안으며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어째서일까, 안심되면서도 그 목소리를 들으면
더 울고 싶어지는 건.
“……네, 루민스.”
루민아, 네가 살아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나는 그걸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해.
언제나 이 말을 속으로 읊고 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4. 신이 하사하는 것
“루민스 너, 세네핀한테 2헤르 이내 접근
금지야!”
벨키나가 나를 꽉 껴안고 루민이를 노려보며
선언했다.
2m 접근 금지라니 내가 루민이를 감상하기에는 지장 없지만 미묘하게 쪼잔한 거리구나, 벨키나.
일의 발단은, 아침에 루민이를 붙잡고 엉엉
울고 있는 걸 벨키나와 흰둥이에게 들킨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숙소 현관 바로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으니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던 두 사람이 내 소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우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벨키나가
“세네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루민스에게 따져 물었다.
나는 눈물을 어떻게든 삼키면서 “아니, 루민스는,
안 나쁘,”라고 변호를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대체 세네핀에게 뭘 강요한 것인가!”라고 흰둥이가
펄펄 뛰었다.
얘들아, 진정해…….
거기에 정작 장본인인 루민스도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정도로 얼버무리는 바람에, 사태는 더 꼬여갔다.
아마 루민이는 내가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에 울었다고 생각해서 배려를 해준 것 같은데, 이럴 거면 그냥 “세네핀이 갑자기 울었어.” 정도로 답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냐, 근데 그렇게 말했어도 딱히 벨키나랑
진이 믿어줄 것 같진 않구나. 모로 가든 꼬이는 거였네.
여하튼, 줄줄 흘러나온 눈물을 어떻게든 수습한 다음 나는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루민스와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고,
아침 해를 보고 났더니 감수성이 풍부해진 건지 갑자기 눈물이 나왔던 것뿐이라고.
“……세네핀, 아무리 루민스랑 친구라지만
굳이 그렇게 감쌀 건 없어.”
“그렇다, 세네핀. 그가 우리와 친교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사람은 사람이고 죄는 죄다.”
“아니, 감싸는 게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오해를 받고 있는 루민스 쪽을 봤는데, 정작
그는 뭐가 즐거운지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쳐!
그치만 그 틈을 파고들어서 위로한답시고 세네핀을 안고 있었다는 건 엄벌에 처할 음흉함이라고
500년 전부터 정해져 있어. 루민스 할데르프, 유죄!”
“옳다, 내가 허락한다. 루민스 할데르프,
유죄!”
대체 이 별채 안의 법률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보다 주로 루민스를 향한 원망이 저기에
몰려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알았어, 알았어. 흉악사범인 내가 저녁
사겠습니다.”
“최소 3성급 레스토랑.”
“흠. 밖에서 먹는 거라면 나도 인간 모습으로
가겠다. 옷을 조달해라.”
“네에, 네에.”
애들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루민스가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세네핀도 좀 진정된 거지? 이제 왕궁 갈
준비 하자.”
“아……. 네!”
이제야 애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운 것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더 오버해서 농담을 했던 거구나. 아마 내가
운 게 심각한 이유에서가 아닌 것도 금세 눈치챘을 테고.
항상 두 사람이 날 생각해주는 마음씨가 너무 따뜻했다.
“아, 그래도 오늘 하루 루민스 너 세네핀한테
2헤르 이내 접근 금지.”
……농담이었던 거 맞지?
◇◇◇
오늘 추가적인 ‘신의 그릇 회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따로 불려간 곳은, 대회관이 아니라 왕궁 내에 있는 가장 깊은 궁전, 즉 국왕 전하 가족이 사는 내궁전이었다.
게임상에서 벨키나 일행이 들어갈 때야 그냥
스토리가 그렇게 진행되는구나 하고 넘겼지만, 내가 직접 그곳에 들어가는 건 실감의 정도가 달랐다.
경비도 삼엄하고,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각종 장식의 화려함도 장난 아니고,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건지, 무척 길을 잘못
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벨키나도 마찬가지로 조금 위압된 건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손을 맞잡아주며, 나는 먼저 앞을 걸어가고
있는 루민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본인이 이미 높은 신분의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항상 초연한 모습이었다.
그게 멋있기도 하지만,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걸 두고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공존한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묘하게 내궁전 안의
구조에 익숙해 보여서 작게 물어보았다. 그는 잠깐 뒤를 돌아보며 (벨키나와 약속대로 2헤르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답했다.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잠깐? 실은
어린 시절에 왕자님들하고도 잠깐 뵌 적 있어. 그쪽은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지만.”
조금 주눅 들었던 게 회복되었는지 벨키나가
놀리듯이 반응했다.
“후계위도 포기한 몸이니 별로 의미 없지만.
그래도 부모님 돈으로 편히 먹고사는 입장이니까, 그건 감사하고 있어.”
“거참 현실적이네. 그러고 보니 후계위는
언제 포기한 거야?”
“성년 되기 전이니까 꽤 오래전이네.”
게임상에서도 자세히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라 나도 루민스의 과거가 흥미진진했다. 뺨에 손을 올리며 질문했다.
“왕세자 저하 말로는 아버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다면서요.”
“실은 그때 한 번 의절 당했었거든. 공작위 안 잇는다느니 그런 소리 할 거면 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그래서 짐 챙겨서 바로 나갔지. 마법 연구원에는
그때 들어갔어.”
“행동력…….”
벨키나가 혀를 찼다. 루민스는 턱을 괴며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러다가 결국 소식이라도 전하라고 항복하신
게 2년 전쯤이던가……. 그 이후로는 휴전 상태야. 아버지도 포기 안 했지만, 나도 후계위 받을
생각 없고. 공식적으로는 그래서 할데르프 소공작 자리가 공석이긴 한데, 저러다 10년쯤 있으면 포기하시겠지.”
루민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복도 끝에 있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왕실 시종이 그곳 소파에 잠시 앉아 대기해달라고
요청해서, 우리는 푹신한 소파에 각각 앉았다. (여전히 벨키나가 경계해서 루민스는 우리와 2헤르 이상
떨어졌다)
화려한 금장식이 벽을 수놓고 있는 응접실은
책에서나 접한 유럽 왕실의 살롱 같은 분위기였다.
나와 벨키나가 입을 벌리고 주변을 살펴보는
것과 달리 루민스는 역시나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루민스가 후계위를 고사한 건 저런 부분에
미련이 없어서일까. 보통 이런 판타지 세계관이라면 정치 권력 투쟁하느라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안달인데 말이다.
“보통은 다들 높은 자리를 선망하지 않나요?
루민스는 왜 공작 후계 자리를 고사한 건가요?”
“세네핀은 그런 자리에 관심 있어? 그야
마법사 중에도 자력으로 작위를 따는 게 목적인 사람이 많지만.”
“아, 아뇨! 설마요!”
나는 두 손을 들고 휙휙 저었다. 세계 멸망을
막은 다음 루민스만 행복해진다면 나도 그 뒤에는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벌어 먹고사는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받을 수 있는 선망의
자리를 굳이 부모님과 싸워가면서까지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구요.”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호화롭게 살다
보니 지루해지고 배가 불러서 그랬어?”
“벨키나 네가 그렇게 말하면 웃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가난한 고아로 자라온 벨키나가 찌르는 건 좀 아팠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루민스가 팔걸이를 두드렸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니까. 제대로 하려면 시간을 무척 많이 투자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런 일에 맞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봐.”
“과연. ‘부잣집 도련님의 자아와 낭만을
찾아서’가 결론이었던 거네.”
“오늘 너 흉악사범이니까 포기해.”
아침의 원한이 생각보다 깊었나 보다. 옆에
앉아 있던 벨키나가 나를 꽉 안으며 볼을 부풀리고는 루민스에게 야유를 보냈다.
나는 벨키나의 머리 세팅이 망가지지 않는
범위에서 그녀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호호, 하지만 루민스의 마음도 알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 여러분과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긴다면, 작위 같은 건 선택하고 싶지 않거든요.”
“나도 그렇긴 하지만. 물론 돈은 충분히
있다는 전제하에.”
벨키나의 현실적인 타협안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후 몇 마디 잡담을 더 나누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오늘은 무척 단출한 복장을 한 칼트가 문을
열고 모습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하!”
“영광된 저하의 존안을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영광입니다.”
“딱딱한 인사는 그쯤 하지. 바로 본론을
위해 이동하도록 하겠네.”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다시 열며 칼트가
그렇게 말했다.
이런 안내역 같은 것을 왕세자가 직접 하는 걸 보면, 이후로는 시종들조차 들이지 않는 보안 경계 범위라는 것이 쉬이 짐작
가능했다.
왕세자의 뒤를 따라가며, 마치 미로와 같은
복도를 몇 번 돌았다.
방향감각이 슬슬 사라질 것 같은 시점에서,
왕세자가 아무것도 없는 벽을 불규칙한 박자로 툭툭 쳤다.
그러자 벽이 움직이며 어두운 계단으로 향하는
문이 나타났다.
“……이건……. 마법 장치가 아닌가요?”
“그래. 마법 장치는 아무리 잘 숨겨놔도
마나 흔적으로 찾아내기 쉬우니까. 이런 장치는 고전적일수록 좋지.”
‘따라오게’라고 칼트가 다시 주의를 환기한 후 묵묵히 먼저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
한참 계단을 내려가고 곰팡내 나는 좁은 통로를
지나자, 마치 동굴과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좁은 통로와 다르게 사방이 넓게
트여 있는 그 공간에는, 마치 고대의 제단 같은 것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됐든 제단에 ‘바쳐져 있어야 할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후우.”
칼트는 불량한 자세로 제단에 기대앉은 후
어깨를 으쓱했다.
“루민스 공자. 혹시 모르니 소리 차단 방벽을 걸어줄 수 있겠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짧고 나직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루민스는
금세 스펠을 외워 주변에 얇은 막 같은 것을 형성했다.
그쪽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한 왕세자는 우리를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흔히 신이 내린 유물을 ‘은총’이라고 표현하네만,
그건 나무를 숨기기 위한 숲에 불과하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칼트를 바라보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 진정한 의미로,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이 시작된다.
“나머지는 가짜, 혹은 정말로 신이 내렸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찌꺼기 같은 것들이야. 실제로 아란다스트 대륙에 신이
하사한 물건은 딱 세 개뿐이지.”
“하긴, ‘은총’은 신이 주신 것 치고는 귀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하. ……그 중 페이넌스 왕가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 <별을 향한 초대>라는 유물이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올려져 봉인되어 있어야
하네만.”
게임에서 그가 설명하던 장면이 겹쳐졌다.
습하고 차가운 동굴 안에서, 담담한 얼굴로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는 입을 열었다.
신이 직접 내린 유물, 그 특별한 존재의
행방불명.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편히 묻게나, 공자.”
“저하의 말씀이나 ‘신의 그릇 회수’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별을 향한 초대>라는 유물을 찾는 것이 저희에게 맡겨진 소임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 이해가 빠르군.”
“그런데 저하께서는 어제 이 계획을 두고
‘대륙의 존망’이라는 말까지 꺼내셨습니다. ……단순히 없어진 유물을 찾아온다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
일이라고 느껴집니다만.”
벨키나도 그 말을 듣고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혹시 신이 직접 하사하신 물건이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노해서 인간에게 천벌이라도 내리시는 건가요?”
“후후, 차라리 그런 거면 신에게 싹싹 빌기라도
하겠네만.”
“일반적인 ‘은총’은 별다른 힘이 없는,
오래된 유물에 불과하지. ……그러나 신이 직접 하사한 세 개의 유물은 특별해. 그 세 개는 ‘소원의
조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어.”
“소원의 조각…….”
게임 <아란다스트 사가>에서 매번
모아 와야 했던 그 물건들.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되어, 감격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신의 그릇 회수’니, ‘은총’이니 ‘유물’이니,
암막을 펼치느라 쓸데없이 빙빙 돌린 표현들로 가득했지만, 핵심은 그것이었다.
게임에서는 가장 중대하게 모아야 하는 세 가지 아이템, ‘소원의 조각’을 벨키나가 회수해야 했다.
또한 그 이름, ‘소원의 조각’이 뜻하는
바는…….
“그 ‘소원의 조각’을 세 개 다 모으면 신이 강림하여 소원을 이루어준다. ……라고 왕가에서는 대대로 이야기를 들어왔네.”
그 설명을 들은 우리 셋은 다시 침묵했다.
이번에 먼저 반응한 것은 벨키나였다.
“……그런 황당한 물건이 존재한다고요?”
“솔직한 감상 고맙네. 나도 동의하는 바일세.
애초에 분쟁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는 물건이니까, 존재를 공표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이번에 대대적으로 마법사를 모아서 ‘은총’을
정화한 것도 실제 정보를 감추기 위한 암막이셨습니까.”
루민스가 묻자 칼트는 손가락으로 톡톡 제단을
치며 긍정했다.
“그래. 기량이 뛰어난 마법사 중 ‘정화의
힘’을 가진 자를 찾아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임시로라도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지 않으면 정보 통제가 되지 않으니까. 뭐, 그 실상이 싸구려 물건이라고 해도 오염된 ‘은총’을 그대로 놔두는 건 신전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니 겸사겸사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네만.”
“……‘소원의 조각’이라는 그 세 개의 유물이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페이넌스 왕국에서는 사라진 그 ‘소원의 조각’ 세 개가
모여 함부로 신을 향한 소원이 발동되는 것을 경계해서 찾아내려는 것입니까?”
이미 알고 있는 정보긴 했지만, 사실 확인을
위해 나도 질문했다.
“그래. 그리고 이번 일에 대륙의 존망이
걸렸다고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번 <별을 향한 초대>가 사라진 일에 마정령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네.”
“마정령……! 얼마 전에 세네핀을 공격한…….”
벨키나가 놀라며 내 팔을 꽉 붙들었다. 루민스는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말했다.
“저하께서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겠습니다.
마정령왕이 ‘소원의 조각’을 세 개 다 모은다면, 당연히 그 힘을 이용해 인간을 찍어 눌러 아란다스트
대륙에 있는 지성체들의 역학 관계를 뒤집고자 할 테니…….”
“그래. 인간이 마정령의 노예가 되고 이
대륙이 지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겠지.”
나야 게임을 통해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예상 밖의 스케일을 접한 루민스나 벨키나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아 보였다.
“저어, 왕세자 저하.”
“……시초룡 알페이넌스는요? 인간을 가호하는
그 파란 용님은 안 도와주시나요?”
그 질문은 무척 덧없게, 혹은 유약하게도
들렸다. 벨키나 본인도 정답을 알고 있으나 직면해야 할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은 것처럼 들렸다.
칼트는 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후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마정령들이 레이디 세네핀을 덮쳤을 때, 내 우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시초룡이 먼저 불가침 조약을 깼다고 주장했다 하지.
사실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시초룡이 마정령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건 사실로
보이네.”
“그, 그럼 시초룡이 도와주시는 건가요?”
“글쎄. 레이디 벨키나. 여기서만 듣고 잊어주었으면
하네만, 시초룡 알페이넌스나 신에게 있어서 이 대륙의 주도권을 인간이 잡느냐, 마정령이 잡느냐는
별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세.”
그것은 마치, 너의 부모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에게 말하는 듯한 잔혹한 말이었다.
다름 아닌, 그 부모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계속 속여온 당사자가.
원래는 게임에서 칼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마정령이 얽혀 있는 연유로 대륙이 멸망 위기니까 소원의 조각을 회수해오라고
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게 시초룡 알페이넌스가
움직여서인지, 혹은 원래 게임 시점보다 칼트가 자기 원래 성격을 터놓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나 역시도 이 세계의 신이 이렇게까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기에, 조금 오싹하게 느껴졌다.
“물론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시초룡이 힘을 보태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현재로서 그 정도는 아니기에 알페이넌스의
조력을 바라기는 어려울 걸세.”
벨키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축복을 받으러 갔을 때 신전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벨키나의 어깨를 감쌌다. 부외자인 나에게는 그냥 ‘게임상에 그런 설정도 있었다니 오싹하네.’ 수준의 남의 일이지만 이
세계를 직접 살아 숨 쉬는 사람에게는 그 체감이 다를 것이다.
심지어 세뇌 수준으로 유일신 종교를 주입하고 있는 곳이니 오죽할까.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저하.
이어서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원래부터 신에 대해서 시니컬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까, 루민스는 벨키나와 달리 그다지 동요하지 않은 얼굴로 칼트를 향했다.
칼트가 질문을 허락하자, 끄덕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마정령을 배후로 지목하셨습니다만, 그렇게 추측한 이유는 ‘은총’이 오염된 것 때문입니까?”
“정확하네. 처음에 말했듯이, 우리 왕국은
숲에 나무를 숨기기 위해, ‘소원의 조각’ 외에도 수많은 ‘은총’을 각종 제단에 모시고 있지. 그리고
마정령 측이 ‘소원의 조각’을 뒤지는 과정에서 ‘은총’들이 오염되었다.”
“그럼 이미 <별을 향한 초대>는
마정령 측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인지요?”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주변의 페이스에 맞추어 질문했다.
“아니. ‘소원의 조각’에는 우리도 명확한
구조를 알 수 없는 방어 체계가 갖춰져 있다. 마정령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라는 것이 현재 마나 흔적을 분석한 결과네.”
마정령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사라진 <별을 향한 초대>를 회수하여 제단에 다시 봉인해두는 것.
일차적인 목표는 그것뿐이기 때문에, <아란다스트 사가>에서도 ‘소원의 조각’이 세 개 다 모이는 것은 진히어로인 알프 루트뿐이다.
다른 루트에서는 딱 그 목표만 해결하거나, ‘소원의 조각’ 중 두 개만 모으는 정도.
“현재의 최대 목표는 두 가지일세. 이 대륙
어딘가로 모습을 감춘 <별을 향한 초대>를 마정령 측보다 먼저 찾아내는 것. 두 번째는, 많든 적든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물을 정화하는 것.”
우리 셋은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칼트가 설명했다시피 <별을 향한 초대>는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에, 게임에서 벨키나 일행은 여러 가지 단서로 ‘소원의 조각’의 위치를 추측하여
대륙 각지를 돌며 찾아다니게 된다.
그 과정에 갖가지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고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도 잔뜩 있으니 이동 경로를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야 게임을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별을 향한 초대>가 어디로 모습을 감추었는지 알고 있다. 거길 찍어서 한 번에 가면
그뿐이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소원의 조각’은 정체불명의 방어 체계를
통해 순간 이동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 데나 랜덤으로 찍어서 이동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규칙성이 있는데, 그 규칙에는 바로
‘자연 마나가 충만한 곳’이라는 조건이 있다.
자연 마나……. 어디서 많이 들어 보았던 이 단어…….
<별을 향한 초대>는 마치 동화
파랑새와 같이……. 실은 이 게임이 시작되는 가장 첫 번째 장소, 마법 연구원 북쪽에 있는 ‘고요의 호수’로 이동해 있었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자연 마나는 박살 나 있다…….
당연한 귀결로 현재 <별을 향한 초대>는
‘고요의 호수’를 빼고 다른 자연 마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 자신이 한심하다.
어떡하지.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눌러 참고 있는 내 앞에서 칼트와 루민스가 대화를 나누었다.
“알겠습니다, 저하.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 저도 이 부근을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편히 그러도록 하게. 춥고 누추한 곳이라
레이디들을 대접하지 못하는 점, 무척 아쉽군.”
칼트가 대답하자 루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민스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단에 남아 있는 마나 흔적을 채취하고,
<별을 향한 초대>가 이동했던 전후 상황의 단서들을 수집하여, 그 자료를 기반으로 우리의
향후 목적지를 결정할 것이다.
운이 좋아서 첫 번째 목적지에 소원의 조각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없다면 대륙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고요의 호수’가 아니라면 어느 곳으로
<별을 향한 초대>가 이동했을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게임 내에서 이런 케이스가 없었으니까.
루민스 루트에서 호수가 부서지기는 하지만 이미 <별을 향한 초대>를 얻은 다음이라 문제는 없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 와서 보니 호수가 사라진 건
매우 심각한 일인데 당시의 내 태도는 이상했다. 고요의 호수가 날아갔어도, ‘나중에 구해야 할 아이템을
여기서 못 구하겠네,’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애초에 왜 그때는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던 거지……?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자.
루민스의 첫 번째 사망 플래그도, 원래대로라면
벨키나가 먼저 ‘은총’의 오염을 제거하면 그만이었는데 벨키나는 ‘정화의 힘’을 발현하지 못했다.
엉뚱하게 내가 그 힘을 가지게 되었지.
이게 혹시 다 고요의 호수 때문인가? 초반부터 너무 변화가 큰 사건이 벌어져서?
그렇다면 그놈의 고요의 호수는 진에게 영향을
끼친 것도 모자라서 여기에서까지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리고 고요의 호수가 그렇게 된 것은 내 탓이
가장 크니, 이 모든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괴로운 마음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와 달리,
벨키나와 루민스는 빠르게도 조사에 착수했다.
“도, 도와드릴 것 없을까요?”
“괜찮아. 다 됐어.”
무릎을 꿇고 제단을 조사하던 루민스가 허리를
폈다.
조사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과연 루민이, 유능하다…….
“루민스, 주변 공간들 흔적도 수집했어!”
주변을 돌며 재빠르게 스펠을 읊던 벨키나도
본인 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우리 벨키나도 유능해…….
벨키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던진 후 루민스는
칼트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저하, 끝났습니다. 오늘은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후 저희가 이동해야 하는 루트를 정하겠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자네 정말 일 처리가 빠르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칼트는 제단에서 몸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의 능력은 이번 방위 체계 구축 건으로도 충분히 경험했던 바이니. 그럼 나는 내일까지 자네들의 여행에 필요한
제반 처리를 마무리해두겠네. 사흘……, 아니, 이틀 뒤라도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지.”
“영민하신 저하의 크나큰 배려에 감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하!”
이제 우리의 본격적인 여행이 눈앞이었다.
◇◇◇
어둑한 동굴을 빠져나온 후 칼트는 우리를
다시금 격려했다.
“그대들에게 큰 과업을 맡기게 되는 점에
진심으로 감사와 사죄를. 대신 우제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걸세. 어리석긴 하나, 위험한 일에 대처할
때는 그럭저럭 전력이 되겠지. 부디 본인들의 동생처럼 생각하고 귀여워해 주게나.”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을 모시고 가는
건 너무 망극한 일 아닌가요?”
다시 생각해도 오버 같다. 하지만 칼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에게만 위험한 과업을 떠맡기는 형태가
되지 않도록, 왕실의 혈육을 붙여 면피하려는 의도도 물론 있으나……. 유고 본인의 희망이 가장 컸던
부분이니, 불평은 우제에게 하도록.”
역시 마정령 침투 사건 때 나를 지키지 못한 게 본인 안에서 트라우마로 남은 건가……. 소드 마스터에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었는데도 적에게
빈틈을 허용한 거니까 충격은 컸겠지.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굳이 더 캐묻기도 뭐했다. 아니, 유고가 있었더라도 본인의 트라우마를 돌직구로 묻기엔
곤란했겠지만.
그 외에 이것저것 보안에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몇 마디를 나누며 칼트와 우리는 내궁전 밖으로 나왔다.
내궁전을 지나쳐서 군사 훈련에 쓰이는 너른
공터 옆을 걸어가면서 왕세자가 설명했다.
“이곳은 정기적으로 있는 무투 대회 때도 쓰이는 곳이지. 참고로 신분을 숨기고 참가했었네만, 2년 전 우승자가 우리 우제일세.”
“역시 유고 왕자님 보기보다 대단하시네요.”
“레이디 벨키나, 다음에 우제 앞에서 직접 칭찬할 때는 ‘보기보다’라는 어절은 빼도록.”
“헤헤, 넵!”
어느샌가 벨키나 안에서도 하찮은 취급인 유고에게
마음속으로 묵념을 보냈다.
그나저나 왕세자 바쁘지 않나? 그야 우리한테 중요한 일 맡기는 거니 제대로 케어하고 싶겠지만 신분도 높은 애가
여기까지 배웅 나와줄 필요는 없지 않나?
“저하, 바쁘실 텐데 이제 들어가 보심이 어떠신지요? 저희 숙소까지 길은 알고 있습니다.”
“후후, 곧 재미있는 구경을 할 예정이라.”
“재미있는 구경이라 하시면…….”
내가 채 되묻기도 전에, 재빠르게 스펠을 읊은 루민스가 우리 앞으로 나서며 방어벽을 만들어냈다.
간발의 차로 그 방어벽에 부딪힌 새파란 오러가
흩어졌다.
그 오러가 날아온 방향에서, 짙은 흙먼지가 흩어지며 인영이 드러났다.
“여어, 할데르프 가의 후계놈.”
몸 밖으로 내뿜는 오러만으로 그 흙먼지를
휩쓸어버리는 청년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둘째 왕자, 유고 페이넌스였다.
“송구합니다만, 후계위는 반납하였으니 그
명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왕자님.”
“알 게 뭐냐. 그것보다 내가 너한테 갚을
빚이 있어서 말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조금의 시간 차도
없이 검기가 루민스를 향해 두 번 꽂혀왔다. 방어벽을 그대로 우리 쪽에 두고 재빠르게 점프하여 공터 중앙으로 이동한 루민스가 짧게 끄덕였다.
“빚 청산을 거칠게 하시는군요.”
“내숭 떨지 마라.”
……대체 쟤네 뭐 하는 거야?
그것보다 진짜 죽일 기세로 루민스만 노려서
검기 날리지 않았어, 비둘기 왕자?
뒤늦게 찾아온 경악에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벨키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쯧쯧. 조만간 이럴 거 같더라니.”
“그게, 세네핀이 마정령한테 당해서 쓰러졌던
숲에서 말인데.”
내가 쓰러졌던 숲? 아, 그날 마나 흔적으로
루민스와 벨키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 그 뒤로 의식을 잃어서 몰랐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루민스가 유고 왕자를 반 죽여놓을 기세로
덤벼서, 그만.”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도 나중에 보고받으며 전해 들은 이야기라 그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네만, 대략 정리하자면.”
어느샌가 강 건너 불구경 분위기로 공터 가장자리의
관전석에 앉은 칼트가 말했다.
“자네가 마정령의 촉수에 묶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우제는 당연하게도 그걸 해체해서 풀어주려고 했네. 그런데 타이밍이 무척 안
좋아서…….”
“나랑 루민스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좀, 오해할 만한 구도였거든. 유고 왕자님이 세네핀을 묶어놓고 난도질하는 느낌으로? 나도 처음엔
착각해서 깜짝 놀랐어.”
“…….”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유고는 정말 1g의 사양도 없이 스치기만 해도 사망할 것 같은 오러를 루민스에게 퍽퍽 쏘아대고 있었다. 루민스는
딱히 거기에 반격하는 기색도, 방어하는 기색도 없이 몸을 굴리거나 점프하며 피하기만 했다.
그 움직임에 슬슬 짜증이 난 건지 유고가
외쳤다.
“어이, 후계놈. 내숭 떨지 말고 한 판
하자니까? 그 정도 빚은 갚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
“왕자님의 귀하신 몸에 상처를 내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얼씨구.”
붉은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오러가 유고의 검에
모였다. 유고는 멀리서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살기가 어린 오러를 휘둘러 루민스 쪽을 겨냥하며, 오러보다
더 타오르는 눈으로 분노의 목소리를 냈다.
“사람을 어디까지 우습게 보는 거지? 이제
정말 사양 않고 팔다리를 절단해주마.”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루민스가 유고 쪽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일방적인 건 재미없으니 저도 보조 방어
스펠은 쓰지 않고 공격 스펠로만 가기로 하죠. 그 정도 핸디캡은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유고의 일갈과 함께 검기와 전격 계열의 공격
스펠이 맞부딪쳐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듯 공중에서 폭발했다.
너까지 도발하면 어쩌자는 거냐, 루민아아아아아아!
아니 그것보다 이거 위험하지 않아? 원작에
없던 이벤트지만 세계관 최강자 둘이 죽일 기세로 싸우는 거 위험하지 않아?
“응응, 루민스가 그때도 저 정도로 꼭지가
돌아갔었지. 아무튼, 유고 왕자님이랑 세네핀을 보자마자 쟤가 공격 스펠을 써버렸거든. 근데 그게 충격파로
왕자님이 10헤르 정도 굴러가서 구석에 처박힐 정도의 위력이었던지라.”
나의 위기의식과 동떨어지게 벨키나는 어느새
칼트 옆에 자리를 잡아 앉아서는 느긋하게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유고 왕자님은 무사하셨나요?”
“후후, 우제는 무척 튼튼하니까 걱정할 것
없지. 기습에 그대로 당하다니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긴 했네만.”
“루민스가 너무하긴 했어요. 사람 말도 안 들어 보고 일반인이면 즉사할 수준의 스펠부터 다짜고짜 날리는 건 심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제도 오늘 똑같이 돌려준 모양이네만,
루민스 공자는 빈틈이 없었지. 아쉽게도 우제가 한 수 아래였군.”
저 앞에서 서로를 죽일 기세로 검기와 스펠을
치고받는 두 청년을 앞에 두고 너무도 태평한 대화였다.
“저, 저기!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상황은 알겠습니다만, 지금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흠. 말리고 싶은 겐가, 레이디 세네핀?”
“당연하죠! 저러다 크게 다치면 어떡해요!! 저하, 말려주세요!”
“흐음. 저 둘이 내 말을 들을 위인일지가
의문이군.”
괜찮은 거냐, 페이넌스 왕가 정통 후계자의
권위……? 아니, 형으로서 권위도 문제잖아?
그 와중 벨키나가 양손으로 턱을 괴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찔렀다.
“근데 물리적으로 어떻게 말려?”
“그…….”
그게 문제네…….
시초룡 알페이넌스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이
나라에 저 둘을 막을 사람이 존재하긴 하나? 벨키나 마나 먹인 흰둥이로도 둘을 동시에 말리는 건 역부족일 거 같은데.
이쪽의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민스가 화염구를 생성하여 시간 차 없이 10개 정도 쏴댔다.
순수하게 검기만으로 그 화염구를 베어버린
유고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사이를 파고든 다음 검으로 땅을 찍어냈다.
바닥이 갈라지며 튀는 파편을, 루민스는 방어
스펠이 아니라 물리계 공격 스펠로 튕겨내 버렸다.
얘들아, 진정해! 늬들은 연애 게임 캐릭터지, 소년 만화 캐릭터 아니야!
그리고 루민아, 너는 이제 사망 플래그 조심해야
하는 몸이야!
유고의 검에서 튀어 나간 검기가 공터의 사방을 장식하는 기둥에 부딪혔다. 기둥의 머리 일부가 부서지면서 거대한 기둥이 위태롭게 기울었다. 그걸
보자 깜짝 놀라서 가슴이 벌렁거렸다.
루트 진입을 못 했으니 우리 루민이는 지금 ‘개복치’ 상태다. 쓰러지는 기둥 같은 것에 깔리면, 아니 파편이 튀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다.
어이없을 정도의 사망 플래그가 사방팔방에서
꽂힌다고!
나는 결국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고 관전석
아래로 달려갔다.
“……루민스! 유고 왕자님! 일단 진정하세요!
쌓인 게 있으면 말로 풀자고요!”
왕세자의 명령조차 듣지 않을 녀석들 상대로 내가 이런 소리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싶지만, 나는 일단 최대한 큰 소리로
둘을 말렸다.
“……세네핀? 위험하니까 물러나!”
방금까지 유고를 상대할 때만 해도 침착하던 루민스가 내 목소리에 크게 동요한 듯 보였다.
“한눈팔지 마라!”
루민스가 내 쪽을 보며 걱정되는 얼굴로 외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유고가 검을 휘둘렀다.
“루민스!!”
그전까지야 집중해서 피하고 있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의 달인을 상대로 그 빈틈을 완전히 무마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순간, 루민스가 내린 판단은 눈을
의심할 만한 것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잠깐의 적막 후, 유고가 어이없다는 듯이
뱉어버렸다.
루민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러로 둘러싸여
있는 유고의 검을 손으로 쥐어버렸기에.
동시에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루민스! 루민스!!”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게 루민스의 곁으로 달려갔다.
“피, 피 나요! 지, 지혈! 지혈해야 해요……!”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상처 축에도
못 들어가는데.”
어깨를 잡고 흔들면 피가 더 나올 것 같아서 손을 대지도 못하고 있는데, 루민스는 아픔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스펠을 입에 담았다.
“……온기로 감싸는 치유의 숨결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그가 가장 정통적이고 고전적인 치유 주술을
입에 담는 동시에 갈라졌던 상처 부위가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 자국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손에 남아 있는 피를 대충 소맷자락으로 닦아낸 다음, 루민스는 환하게 미소 짓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유고 쪽을 향했다.
“보조 스펠을 써버렸으니 제가 패배한 것으로 치고 넘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왕자님.”
유고는 검을 든 손을 오른쪽으로 털어내었다.
날에 흐르는 피가 사방으로 튀어, 서늘한 검신에 핏방울 하나 남지 않았다.
그는 불쾌해진 기색의 목소리로 고했다.
“흥이 식었다. 돌아가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리고 유고는 빠르게
왕궁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착각이 아니라면, 유고 역시 마지막 순간에 검기를 최대한 억눌렀던 것 같다.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로 루민스의 손이 그대로
잘려서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
지금까지 유고와 루민스가 서로 목숨을 빼앗을 듯 망설임 없이 강력한 기술을 맞부딪친 것은, 상대방이 그걸 능숙하게 받아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의 대응을 믿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상황에서 맨손으로 검을 잡아버리는 짓을 했으니 유고가 ‘미친 새끼’라고 뱉어버린 심경도 알 만했다. 그리고 나도
심경만큼은 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짜 뭐 하는 거예요!”
“귀청 떨어지겠어, 세네핀.”
“위험했잖아요! 마지막에 유고 왕자님이 검기를
눌러 줬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팔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고요!”
“안 날아갔어, 안 날아갔어.”
검을 잡았던 손을 팔랑팔랑 앞뒤로 저으며
루민스가 실없이 웃었다.
“맞아 맞아, 루민스. 그리고 너 지금 세네핀한테
2헤르 거리 두기 안 지켰어.”
뒤에서 따라온 벨키나가 툴툴거렸다.
“다쳤던 사람 상대로도 아주 냉철한데, 벨키나 대법관님.”
“솔직히 방금 그건 네가 나빴다, 야. 그냥
유고 왕자님한테 몇 대 맞아주고 말지 꼬박꼬박 도발하고 있냐.”
“후후, 우제의 성격상 그냥 맞아주면 그건 그거대로 화를 냈을 것 같네만.”
이 자리에서 가장 즐거워 보이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뒤따라와서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평가를 내렸다.
“저하도 참 성격 좋으신 것 같아요.”
“순수하게 칭찬으로 받겠네, 레이디 벨키나.”
‘좋은 구경도 했으니 나도 이만 밀린 집무를
처리하러 돌아가 보기로 하지.’라고 인사를 한 후 칼트는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허리를 숙이고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앞으로도 자네 탓에 저 둘이 함께하는 여행에 수난이 많을 것 같네만, 고삐 잘 붙잡게.”
“저기, 저 두 분이 싸운 건 자존심 싸움이지
저랑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만.”
왜 굳이 저를 끼워 넣어서 악담을 하시는지.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칼트는 오히려 더욱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뒷전개가 재미있을 것 같군. 나와 직통 연결되는 수정구는 딸려 보낼 테니 종종 소식 전해주게나.”
……직통 연결 수정구? 이거, 회사 사장님한테 정기 보고서 쓰라는 소리를 들은 거랑 비슷한 거지? 우울한 기분이 되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홱 벨키나가 나를 끌어당겼다.
“왕세자 저하도 바쁘실 텐데 20타헤르 정도 세네핀에게서 물러나세요!”
“……20타헤르면 수도 밖으로 나가라는 건가?”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으로 살벌한 결투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
칼트와 헤어져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친
손 쪽의 소맷부리를 붙잡은 채 나는 루민스를 계속 노려보았다.
“……다음에 이런 짓 하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러시라고요! 제가 진짜 심장 떨려서…….”
“그렇지만.”
벨키나와 약속을 지키려는 건지 내 쪽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며 루민스가 입을 열었다.
“세네핀이 자꾸 위험을 무릅쓰니까 그러지.”
“네?”
“나로서는 최대한 온건하게 끝낼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라도 안 하면 유고 왕자 성격상 승부욕에 불붙은 거 안 꺼졌을 테고, 공격
규모가 커지면 주변까지 휘말려서 다칠 위험이 커지잖아.”
“보통 세상 사람들은 그런 방법을 온건하다고
안 그래요!!”
“내 생각엔 루민스 저 녀석, 겉포장만 멀쩡하고
머리에 나사가 빠져 있다고 봐.”
“영광인데, 벨키나. 잘생겼다고 인정해주는
거야? 물론 나도 너를 겉포장만 멀쩡하다고 생각해.”
“넌 2헤르 밖으로 물러나기나 해라.”
애정이라거나 두근거림이라거나 설렘 등의 아리따운
단어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엇이 잘못되어 루민스 루트 진입을 추구하던
흐름이 여기까지 온 걸까.
역시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오면서 벨키나와
루민스의 중요 이벤트를 뭉갠 게 잘못이었나……. 아니면 내 존재 자체?
“세네핀, 어디 아파?”
“뭐? 약 가져갈까?”
“……루민스는 자기 몸 걱정이나 해요!!”
15. 엇갈리는 다짐
노도의 하루가 저물고, 숙소로 돌아온 루민스는
바로 지하 제단에서 수집한 마나 흔적 분석 작업을 하러 방에 박혔다. 우리도 도울까 물어봤지만 혼자서도
괜찮으니 쉬라고 거절당했다.
하긴, 루민이의 능력을 생각하면 벨키나나
내가 같이 있는 게 오히려 방해일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연유로 할 일도 없었던 남은 세 명(나, 벨키나, 진)이 평화롭게 잡담이나 하며 정원을 산책하게 되었는데, 문득 벨키나가 다소 불길한 말로 서두를
열었다.
“나 이번 여행에서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는데 말이야.”
벨키나의 날카로운 지적은 때때로 핵심을 꿰뚫을
때가 있었으므로, 나는 조금 긴장하여 물었다.
“어떤 게 걱정인가요, 벨키나?”
“아.”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지적이었다. 지금까지야
마법연이니 왕궁 안이니 진이 당당하게 인간화를 하고 돌아다니기 곤란한 장소라서 숨기고 있었지만, 앞으로
여행을 할 때 굳이 진이 강아지 모습으로 수화를 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흠, 오늘 루민스와 결투를 했다던 이 나라의
둘째 왕자 말이로군. 몇 번 얼굴밖에 본 적 없어 인물 됨됨이까지는 모르겠다만.”
유고의 인물 됨됨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찌르면 반응이 재밌다? 입은 하나도 안 솔직한데
몸……, 아니 태도는 솔직하다?
“그게, 나쁜 분은 아닌데요. 좀 까다롭다고
할까요.”
설명이 쉬우면서도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으려니,
벨키나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런 동생이 있어서 왕세자 저하가 그딴 성격이 된 걸까? 싶은 왕자님이야!”
……벨키나야.
“뭐지. 둘 다 성격이 파탄 났다는 의미인가?”
진한테도 파탄 난 성격을 인증받은 제비 왕자라는
존재…….
벨키나는 깔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유고 왕자님은 아니야. 나도 마정령 사건
때 수습하느라 몇 마디 나눈 정도인데, 조금만 놀려도 10배 정도로 반응하거든. 그렇게 재미있는
동생이 있어서 왕세자 저하가 남 놀려먹는 데에 정열을 다하는 성격으로 굳어진 거 아닐까?”
무시무시한데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아니,
제비 왕자 성격은 원래 이상한 거 맞는 거 같지만 비뚤어진 성격이 박차를 가하는 데에 유고 왕자가
큰 역할을 한 것 아닐까.
그것보다 제비 왕자에 대한 분석이 너무 정확한데,
벨키나.
“잘은 모르겠지만 그 유고라는 자가 불쌍하다는 건 알겠군.”
“응,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될 거 같아!
진의 정체를 알고 나서 어떻게 반응할진 나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진이 너그럽게
받아줘.”
“그런 불쌍한 자를 상대로 진심으로 발끈해서
상대한 루민스 쪽의 인격 수양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러게 말이야!”
너네 루민이가 최애인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이
심한 거 아니니, 우리 루민이가 그럴 수도 있지. 왜 루민이 기를 죽이고 그래.
냉정하게 생각하면 선빵도 먼저 쳤고 미친 짓까지 했으니 루민이 잘못이 맞긴 하다는 양심의 외침은 슬그머니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원래 최애 쉴드는 피의 쉴드니까, 뭐.
“아무튼, 벨키나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봐요. 정식으로 출발하기 전에 진과 유고 왕자님이 대면할 기회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민스가 내일 오후쯤 마나 흔적 분석 결과
정리해서 말해준다고 했잖아. 그때 유고 왕자님도 불러오면 어때?”
“나는 이견 없다.”
“그래요, 그럼 왕세자 저하 통해서 연락해두죠.”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나
왁자지껄한 모임이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내일은 ‘소원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함께
여행할 풀 멤버가 처음으로 다 모이는 자리가 되는 셈이다.
워낙 다들 개성적이다 보니 걱정도 되지만, 큰일이 없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
다음날 오후, 인간화한 진의 머리를 반묶음으로
다듬어준 벨키나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진의 등을 밀었다.
“짠! 어때, 진 귀엽지!”
정말 새삼스럽지만 엄청난 외모다. 소년의
형태라 어딘지 중성적인 모습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도 그렇고, 신성하기까지 한 얼굴 조형도 그렇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은발도 그렇고.
뾰족 솟아나 있는 동물 귀가 무척 이질적이긴
하지만.
“호호, 진이 귀여운 거야 새삼 오늘뿐만이
아니지만요. 옷이 잘 어울려서 진의 외모가 더 살아나네요.”
지금 진이 입은 옷은 조금 이국적인 분위기의
무늬가 아로새겨진, 보라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의상이었다. 은발에 색이 정말 잘 받는다. 눈이 즐거운걸.
오늘 저녁에는 이 숙소의 독자적 법률로 유죄를
선언 당한 흉악사범 루민이가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고도 초대한 자리라, 그동안 강아지 모습의 진만 보았던 유고에게 인간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수인이라는 정체를 알릴 좋은 기회였다.
덕분에 진도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이왕 사람 모습을 할 것이라면 꾸며야 한다며 벨키나가 의욕을 불태웠다. 나도 벨키나 의견에 대찬성이었고.
“흠. 세네핀의 마음에 든다면 나도 무슨
옷이든 상관없다.”
앳된 외견인데도 평소처럼 낮은 목소리로 진이 대답했다. 내 가슴밖에 안 오는 키로 저런 목소리라니 언밸런스하다니깐.
“에이, 아무리 진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
의상에 눈이 안 간다고 해도, 역시 본인한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어줘야 한다니까?”
“맞아요, 맞아요. 그러니까 진도 본인의
의상 취향이라는 걸 찾도록 해요. 여러 가지 옷을 입는 재미가 있으니까 말이죠!”
건너편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우리를
바라보던 루민스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서 오전부터 지금까지 진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저 산더미 같은 옷을 사 왔다, 이거군.”
현관 옆에는 백화점과 각종 옷가게에서 배달되어
온 옷상자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쪽으로 흘끗 눈길을 주는 루민이의 얼굴이 차가웠다.
참고로 저 옷들은 모두 루민스의 돈으로 구매한 것들이다. 아침에 쇼핑 간다니까 루민스가 상점용으로 쓰는 명패를 넘겨줬다. 그걸 보여주고
외상을 달아두는 건데, 말하자면 신용카드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공작가 아드님 이름이니 블랙 카드쯤
되겠다.
“아, 아이참. 저는 루민스 돈으로 너무
사치하는 것 같다고 말리긴 했는데요. 역시 진이 제대로 된 본인 옷이 없는 게 좀 아쉬워서 말이죠.”
“응! 명패 빌려줘서 고마워, 루민스! 나중에
너네 본가 주소로 알아서 청구된다니까 따로 가게에 지불하러 갈 걱정 안 해도 돼!”
“……그거참 고맙구나.”
블랙카드를 건네주며 여주가 마음껏 옷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재벌 2세 로맨스다운 전개인데, 그게 남사친의 옷을
사는 결말이 될 줄 아무도 몰랐겠지…….
흰둥이 옷 고르는 게 재밌어서 같이 희희낙락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흠, 인간에게 금전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들었다만, 나를 위해 제공해준 점 고맙게 생각한다. 루민스.”
미간을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루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어차피 여행 떠나려면 필요한
일이니까. 그나저나 진 옷은 그렇다 치고, 두 사람은? 여행 전에 너희한테 필요한 물건도 사 오라고
그랬잖아.”
“아차. 여성복 가게 가는 걸 까먹었다.”
“어머나, 맹점이었네요.”
대답을 듣자마자 루민이가 생긋 웃었다. 동시에 응접실 안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하지만 벨키나는 서늘하게 웃는 루민이
앞에서도 태연했다.
“너무 그러지 마, 루민스. 어차피 여행에서
돈만 있으면 웬만한 건 대충 해결되잖아. 빼놓은 거 있으면 현지에서 사지, 뭐. 돈도 많으면서 쪼잔하게
군다.”
“아주 내 돈이 네 돈이구나, 벨키나. 사람
지갑 취급이 능숙해서 좋겠어.”
“자, 자자. 둘 다 진정해요! 어차피 왕세자
저하께서 이번 ‘신의 그릇 회수’ 계획으로 발생하는 경비는 지급한다 하셨으니까 앞으로 루민스 신세를 지는 일이 그렇게 많진 않을 거예요.”
식은땀을 흘리며 두 사람을 말렸더니 루민스가
조금 난감한 듯이 말했다.
“아냐, 세네핀. 내 돈이야 아무래도 좋은데,
네가 필요한 걸 못 챙겼나 싶어서.”
“제 개인 물품이야 살 것도 별로 없고,
저축해둔 돈으로도 충당되니까요!”
씩씩하게 대답하자 루민스가 어째서인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엉뚱하게 벨키나를 겨냥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벨키나. 내가 돈 쓰라고 명패도 일부러
줬는데 너 정말…….”
“알았어, 미안해! 다음에 세네핀이랑 같이
나가서 예쁜 옷이랑 장신구 잔뜩 사 올게! 이번에는 진 옷 사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라서 그랬던 거야.
쇼핑이 얼마나 시간 많이 걸리는데.”
“말을 말자.”
진은 내 옆에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내가 잘못한 건가?”라고 눈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민이가 저렇게 성질 낼 줄 알았으면 벨키나
옷도 이것저것 사올 걸 그랬네. 확실히 벨키나 옷이 허름하긴 하지.
슬슬 저 둘이 싸우는 거 말려야 하나, 뭔가
분위기 전환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앗, 네! 누구세요?”
“유고 페이넌스다.”
……아니, 이런 분위기 전환 말고.
◇◇◇
소파의 상석을 권했으나 유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끝자리에 털썩 앉았다. 정확히는 루민스에게서 가장 먼 위치였다. 둘이 아직 저 상태구나. 앞으로의
험난한 미래가 그려진다…….
“저기, 왕자님.”
“여기 공적인 자리 아니다.”
“네?”
“이름.”
으으음.
주변을 둘러보니 진은 유고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고, 벨키나는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루민스는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존칭 떼고 자기 이름 부르기를
강요하는 비둘기 왕자가 원망스러웠다.
……다들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달라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정녕 자기 자신뿐이란 말이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언제나의 패턴으로
드라이브했다.
“그런 건 천천히 하시죠. 그것보다 유고
왕자님, 오늘도 잘생기셨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런 뻔뻔한
소리 하지 말란 말이다!”
“호호, 그러니까 잘생긴 얼굴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된다니까요.”
평소처럼 마음의 평화를 이끌어내는 인사 멘트를 꺼냈더니 역시나 100% 뻔한 반응이 돌아온다.
휴, 대충 넘어가서 다행이다.
그런데 그 순간, 효과음으로 표현하자면
‘챙’이라고 소리가 날 듯한 차가운 공기가 응접실에 서렸다. 어, 어라……?
“흐음.”
양손을 깍지 끼고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앞으로
내민 루민스에게서 엄청나게 한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랬구나, 내가 몰랐네. 세네핀 취향이 유고 왕자님 같은 얼굴이었다니.”
“……네에?”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건데!?
“하긴, 나도 세네핀이 직접적으로 얼굴이
잘생겼다고 칭찬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
벨키나 너마저!?
“이 여자의 단골 인사 문구가 아니었나?
사람만 보면 잘생겼다느니 운운하며 부끄러운 소리를 읊는다만.”
“그렇습니까, 왕자님. 세네핀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니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루민스가 어절을 하나씩 끊어서 발음하는 게
무척 박력 있었다. 아니, 박력 있다고 두근거리는 건 됐고. 분위기 어쩔 거야.
인간 사이의 섬세하고도 오묘한 분위기를 파악해주지
않고 진이 옆에서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흠. 그렇다면 유고 페이넌스가 잘생겼다는
세네핀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것이군.”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당황하여 손을 젓자 유고가 무척 삐친 얼굴로
나를 흘겨보았다.
“……역시 놀리려는 거였나.”
“그것도 아니에요! 그야 유고 왕자님은 정말
잘생겼죠, 그건 누가 봐도 진실…….”
나의 변명과 동시에 루민스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더 그윽하게 변했다. 응접실 온도는 더 떨어져 갔다.
우리 루민이, 얼굴부심 있었는데 누나가 칭찬
안 해줘서 삐친 거니? 좀 귀엽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루민아, 오해야! 내 원픽이자 최애는 너뿐이라고!
나의 진심 어린 루민이 앓이를 입 밖으로
냈다가는 평생 절교당할 수준으로 주접을 떨까 봐 자제하는 것뿐이야!
……근데 나 진짜 루민이한테 직접 잘생겼다는
소리 안 했나? 대단하다, 내 자제력.
그렇게 내 자제력을 칭찬하는 와중에도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왕자님이랑 얼굴 계통이 다르니 루민스는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 거 포기하는 게 좋겠네. 세네핀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
뭐. 난 너 잘생겼다고 생각해. 힘내.”
“오늘 산 옷 다 네 이름 앞으로 외상 돌려놓으라는 거지, 벨키나?”
“와, 치사하게 돈으로 사람을 협박해! 그래
봤자 세네핀 취향은 유고 왕자님―”
“아, 아니에요!”
“루, 루민스 정말 잘생겼고 제 취향 맞다고요!
부, 부끄러워서 말 못 하는 거지, 단정한 얼굴이라거나,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라거나, 깊은 눈매라거나, 하나하나 빼놓을 거 없이 무지무지 잘생……”
까지 말하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걸 깨달았다.
……진짜 망했다.
벨키나는 웃다가 숨이 넘어간 건지 소파에
상반신을 파묻어버렸다. 진도 조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유고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민스는.
당황하는 얼굴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간 붉어진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루민이……. 신선한데……. 난
울고 싶다……. 사고 쳤다…….
“그, 그리고 진도 잘생겼고요! 벨키나도
세상 최고 예쁘고요! 그렇다고요!”
허무하게 수습해 보았지만 내 취향이 유고
얼굴이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루민이 외모를 찬양하는 부끄러운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자기 덕후인 걸 눈치채고 루민이가 절교하자 그러면 어쩌지!
“아, 힘들다. 응, 고마워 세네핀. 나도
세네핀이 세상 최고 예쁘다고 생각해!”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며 겨우 웃음을 수습한 벨키나가 망해버린 상황의 마무리를 해주었다.
“벨키나, 사랑해요……!”
“세네핀의 사랑을 받았으니 오늘 승자는 나다~!”
벨키나는 의기양양하게 팔로 승리 포즈를 지어 보이며 다른 손으로 루민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루민스는 여전히 시선을 저쪽으로
둔 채 그대로 손가락에 찔리고 있다.
“네놈들은 모여서 촌극을 벌이는 게 취미인가?”
“부정할 근거가 부족한 것 같긴 하군.”
그건 부정을 해줘, 흰둥아…….
유고는 “정말 피곤한 놈들이네.”라고 감상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만, 지금
같이 있는 이 은발 소년은 뭐지? 너희 친척인가?”
“아.”
정작 유고를 굳이 별채로 부른 이유에 대해
모두가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오후였다.
◇◇◇
유고가 진의 움직이는 동물 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수인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건 나도 금시초문이네.”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존재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말기를 바란다.”
비둘기 왕자가 저런 면에서는 쿨하지. 자기
형한테 시시콜콜 이야기할 타입도 아니고.
“너희가 더더욱 이상한 집단이라는 것만은 잘 알겠다.”
저렇게 얄미운 말을 덧붙이는 점은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고치는 게 좋겠지만 말이다.
그 얄미운 말이 부정하기 어려운 명제라는
사실은 치워두자.
“그런데 왠지 안정감이 있지 않아? 이렇게 다섯 명이 모이니까 말이야!”
벨키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도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엇인지 알 것 같군. 이렇게 다섯 명이 이제부터 함께 행동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그야 게임 내에서 같이 움직이던 파티니까…….
무의식중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확히는 나는 그냥 엑스트라 꼽사리고, 저
네 명이 풀멤버인 건데. 뭐, 한 명 더 껴도 안정감이야 느낄 수 있겠지.
아무튼, 그렇게 진의 정체와 진이 우리랑
같이 지내게 된 사연을 전달하고 나자, 그동안 묘하게 조용했던 루민스가 고개를 들었다. 루민스는
주변에 소리 차단 스펠을 건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정리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마나 분석 결과를 공유하겠습니다.”
유고를 의식한 것인지 루민스의 말투는 매우
정중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왕세자 저하께 받은 자료와 저희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자면, 마정령은 왕실 지하까지 직접 침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보안 때문에도 세심하게 확인했습니다만, 저번에 세네핀과 왕자님을 덮쳤던 마정령들도 관계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럼 직접 마정령과 닿지도 않았는데 ‘소원의
조각’이 자취를 감춘 건가요?”
이 부분은 게임 내에서는 꽤 은근슬쩍 넘어갔기에
확인차 질문했다. 루민스는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하께서도 언급한 ‘구조를 알 수 없는
방어 체계’가 관계한 것으로 보여. 다른 은총들이 오염당하는 위기 상황을 미리 알고 몸을 감췄다고
해야 하나.”
마치 ‘소원의 조각’이 생물이라도 되는 듯한
표현이었다. 몸을 감춘 것이 유물 자신의 의지였던 것처럼. 그러나 의지가 있건 없건, 결론적으로
유물이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방어 체계는 나도 무척 흥미롭지만, <별을 향한 초대> 본체가 없는 이상 지금 연구해볼 수는 없고. 결론적으로
해당 ‘소원의 조각’이 지금 마정령왕의 손아귀에 있을 확률은 무척 낮다고 생각해. 물론 저쪽이 먼저
찾아내면 그건 큰일이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만, ‘소원의 조각’에
자신의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면 이후 마정령이 찾아다닌다 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다시 도망갈
테니까.”
진이 타당한 질문을 했다. 물론 그렇게 쉽게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게, 그렇지가 않아. 방어 체계의 구조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스펠이나 마법에는 절대적인 법칙이 있거든. 벨키나. 마법의 제1 법칙은?”
“모든 마법은 마나를 요구한다?”
“그래.”
마치 선생님과 제자 같은 문답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법칙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법이니 스펠이니 초자연적인 현상이 가득한
판타지 동네지만, 열역학 법칙처럼 이 세계도 나름대로 돌아가는 규칙이 있다. 그중 마법과 관련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법칙이 바로 마나 없이는 어떤 마법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별을 향한 초대>가 신이 직접
하사한 물건인 이상, 일반적인 마법 법칙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하긴 했어. 그렇지만
분석해 보니까, 대량의 마나가 사용된 흔적이 있었거든. 즉, 그 방어 체계라는 것도 마나를 소모한다는 기본 법칙은 지키고 있다는 거지.”
“그렇구나. 이미 대량의 마나를 소모했으니,
마나가 다시 채워지기 전에는 순간 이동을 못 하겠네.”
벨키나가 지적한 대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
행방불명된 유물은 무방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우리가 마정령보다 먼저 찾아내는
수밖에.
“맞아, 그래서 현재 유물은 위험한 상태―”
“그래서? 마법학 강의를 하려고 모인 건 아닐 테고, 발이 달려 도망간 ‘소원의 조각’을 찾는 게 먼저 아닌가?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
유고는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루민스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루민스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가, 꾸며낸 듯한 친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루한 서론이 길어 송구합니다, 왕자님.
그래서 흔적을 읽어낸 결과,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날아간 방향입니다.”
순간 이동 마법이긴 하지만, 마지막 궤도
같은 것으로 방향은 추측할 수 있었다.
여행의 목적지가 정해지는 거다 보니, 벨키나는 흥미진진해 보였다.
“어느 쪽으로 날아갔어?”
“서쪽인 것 같아.”
“우와! 나 대륙 서쪽 처음 가 봐!”
역시 고요의 호수가 망가지면서 다른 쪽으로 갔구나……. 원래대로라면 마법연이 있는 동쪽이었는데.
“그럼 서쪽으로 무작정 가야 하는 건가?”
유고의 질문에 루민이가 고개를 저었다.
음? 게임에서는 방향만 알아내고 끝이었는데
뭐가 더 있어?
“그건, ‘소원의 조각’이 순간 이동한 행선지가
자연 마나가 풍부한 장소라는 점입니다.”
“어째서지?”
“순간 이동을 하면서 남긴 마나 흔적이,
이전에 진이 자연 마나를 잃고 본능적으로 마나를 갈구했을 때의 마나 흐름과 유사했습니다. ‘소원의 조각’이 소실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이동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가설이었습니다만, 실제 증명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었을지요, 유고 왕자님?”
와, 루민이 유능해.
원래 이 시점에서는 ‘소원의 조각’의 행선지가 자연 마나와 관계있다는 게 밝혀지지 않는다. 날아간 방향 정도만 더듬어서 하나하나
단서를 모아 겨우 자연 마나랑 관계있다는 걸 알아내는 고행을 거치는데…….
진이랑 동료가 되어서 마나 흐름을 읽어봤다는
경험 하나로 대체 게임 과정 몇 단계를 뛰어넘은 거야?
“황송한 말씀 감사합니다.”
자연 마나라는 말에 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
“고요의 호수 말고도 자연 마나가 남은 곳이
있는가?”
자연 마나는 수인족이 몰살한 원인이 된 ‘자연 마나 고갈 현상’으로 대륙에서 거의 모습을 감췄으니, 진이 흥미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게임에서야 안 나왔지만, 어쩌면 진 외에도
숨어 사는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몇 군데 없긴 하지만, 존재하기는 해.
200년이나 흘렀으니 자연적인 복원력으로 살아난 곳도 있는 모양이고.”
“헤헤, 다행이다. 진! 나중에 일 다 해결되면 다른 곳들도 같이 돌아다녀 보자!”
“맞아요, 진. 꼭 그래요.”
진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조금 기뻐 보였다.
솔직히 희망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마음은 다 같으니까.
내가 어떻게든 절망의 미래를 피해서 루민이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싶은 것처럼.
조금 따뜻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루민스가
프로젝터처럼 마법으로 지도 화면을 공중에 띄웠다.
“현재 존재하는 자연 마나 보유지 중 수도
홀르나의 서쪽에 위치하는 장소는 딱 하나…….”
지도상에서 수도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 반짝였다.
“라터체니령에 있는 유적, ‘공중낙원의 미로’가
되겠습니다.”
◇◇◇
그렇게 브리핑이 끝나고,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라터체니령까지의 여행에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한 후 회의는 끝났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출발할 때
다시 보도록 하겠다.”
“아, 왕자님! 저희요, 루민스가 사주기로 해서 밖에서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같이 안 가실래요?”
친화력 만렙 소녀답게 벨키나가 유고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유고는 루민스 쪽을 한 번 쳐다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식사 따위는 이후에 질리도록
같이 할 텐데 미리 얼굴 보며 질릴 필요는 없지.”
역시 둘이 친해질 길은 요원할 것 같다…….
유고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 직접 와주셨는데 저희가 배웅이라도
하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유고는
“필요없…….”까지 말했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내 쪽을 응시했다.
“그럼, 세네핀 크롬웰.”
“네?”
“너만 따라와라.”
유고의 명령과 동시에 뒤에서 한기가 돌아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에게 반항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유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뒤를 돌아보는 게 약간 두려웠지만,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저기, 그럼 잠시 왕자님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알았어, 빨리 와야 해!”
“조심해서 갔다 와라.”
“……다녀와.”
다른 건 둘째 치고 목소리에서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루민스가 마음에 걸렸지만,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유고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
정원을 가로질러 내궁전으로 향하는 길에 도착할 때까지 유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말도 안 할 거면 대체 왜 나를 데려온 거지,
서열 잡기인가,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세네핀.”
“네, 네에. 왕자님.”
“……. 이름.”
끈질긴 이름 공방이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럼 여행 다니는 곳에서도 남들 듣는데
왕자왕자 부를 셈이냐?”
음, 그건 곤란하겠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다른 애들도 다 유고한테
존칭 붙이면 안 되겠네. 괜히 나 혼자 쩔쩔맸잖아.
“아, 알겠어요. 유고.”
약간 더듬거리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만난
이후 처음으로 유고가 옅게 웃었다.
“그래.”
제 형이 의례적으로 잘 웃는 사람이라 웃으면
칼트랑 비슷할까 상상했는데, 유고 본인이 원래 잘 안 웃어서 그런지 어딘가 수줍고 어색한 느낌이라
풋풋했다.
신기한 구경이라 빤히 보고 있으려니 그가
얼굴을 붉혔다.
“뭐, 뭐냐.”
“아뇨.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데 역시 잘생겼다
싶어서.”
당연히 평소처럼 쑥스러워하면서 펄펄 뛸 거라
생각했는데, 유고는 어딘가 불쾌한 듯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왕자님?”
“이름.”
“……. 어차피 좋아하는 얼굴이 따로 있는
주제에 아무한테나 잘생겼다느니 하고 다니지 마라.”
“네?”
“할데르프 가의 후계놈 말이다.”
헉. 그러고 보니 아까 유고 얼굴이 취향이라는 걸 강하게 부정하면서 루민이 얼굴 멋있다고 신앙 고백을 하고 말았지…….
상황이 대충 넘어가서 안심했는데, 설마 했던
유고한테 루민이 덕후인 걸 들키는 플래그?
“아니, 저기, 그게…….”
“그래. 말 나온 김에 일부러 너를 부른
이유를 말하도록 하지.”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며 유고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그에 맞춰 멈춰 서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했다.
“루민스 할데르프. 그놈, 정상이 아니니까
조심해라.”
돌아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순간 뭔 소린가 하고 뇌가 기동을 멈췄다가 다시 그 말을 읽어냈다.
루, 루민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저기, 왕자님. 아니, 유고.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왜 우리 루민이를 정상 아닌 애로 만드시는
건가요!?’ 하고 진상 부모가 되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최대한 정중하게 따졌다.
“내가 검 수련을 받은 지 대략 15년 정도 되는데.”
그러자 엉뚱하게 튀어나온 것은 유고의 검술
경력 자랑이었다. 아니, 자랑하려고 꺼낸 말은 아닐 테고. 일단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 나조차도, 상대의 검기가 실린 칼날을 그대로 잡아야 한다면, 아주 잠깐이지만 주저할 거다.”
그제야 유고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루민스는 흉흉한 살기마저 감도는 유고의 검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잡아버렸으니까.
“그건, 저기……. 그렇게 하면 유고가 검기를
멈춰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따위 도박에 자기 손을 걸었다면, 그건 미친 새끼 이전에 머저리 같은데.”
돌려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놈의 눈에는 그런 잡념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지. 지금 당장 자기 손이 완전히 잘려나간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고.”
“…….”
“정말로 미친 새끼야.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길래
저런가 해서, 형님을 통해 이력도 받아봤는데. 심지어 행위 마법 전문이 아니라 연구자 출신이더군?”
“네에, 맞아요. 본인도 행위 마법보다는
연구가 더 체질이라고 했어요.”
유고는 소리 없이 몇 발자국을 떼어 앞으로
나선 후 검을 뽑았다. 그 검을 가로로 한 번 휘두르자, 잔상만 남아 오러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대부분의 무예가 그렇지만, 검에 있어서
가장 높은 경지는 무(無)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이른다고요……?”
“해석은 여러 가지다만, 가장 직관적인 건
‘잡념을 버린다.’라는 것이겠지.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이는 단계 같은.”
확실히, 판타지나 무협 소설에서 자주 나올
법한 개념이었다. 유고는 다시 칼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상대를 베는 것에 잡념을 버린다, 상대에게
베이는 것에 잡념을 버린다. 말로 하면 쉽지만, 대단히 오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한 인간의 생명을
끝장내는 것이든, 반대로 자신의 생명이 끝장나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든, 거기에 잡념을 배제하는 건
쉽지 않아.”
“그야 그렇겠죠. 살아 있다면 누구나 다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할데르프 가의 후계놈은 그게 없었다는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건.”
“그런 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의 수는
딱 두 개뿐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 인간의 목숨을 뺏고 빼앗기는 경험이나 훈련을 했든지. 혹은 선천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삶에 대한 무게를 느끼는 감각이 망가졌든지.”
하지만, 루민이는…….
“놈의 이력을 봤을 때, 그런 지옥을 헤쳐온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선천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그리고
그런 부류의 인간은 어떤 방식이든 타인을 크게 상처 입힌다.”
“…….”
“그걸 말해두고 싶었다. 네가 오늘 내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자유다만, 나는 이 목숨을 바꿔서라도 너를 지키는 검이 되기를 맹세한 자. 그놈이 너에게 해를 입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베겠다.”
“……그, 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누르며 강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루민이는 무엇보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따스하고 상냥한 마음에 얼마나 위로받아 왔던가. 그렇기에 게임상에서도, 이 세계에
와서도, 나는……!
“됐어, 그냥 조심해두라는 거지 너랑 같이 그 자식 욕하자는 의미는 아니었어.”
“조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너는 그래라. 난 계속 경계할 거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몸을 돌리더니 더는 따라올 필요 없다고 말하고 유고는 그대로 내궁전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나름대로 내 염려를 해서 저러는 건
안다. 성격상 상대가 걱정되면 미움받을 정도로 세게 말하는 타입인 것도 알고 있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루민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지는 않았다.
루민스의 그 어딘지 초연한 듯한 분위기를,
나도 불안하게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루민스가 나에게 위협이 될까 봐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아무런 미련 없이 훌쩍 사라질까 봐 생겨나는 불안함이었다.
손 하나 사라지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검을 잡았던 것처럼.
“…….”
실은 그런 두려움을 형태 있는 언어로 듣고
싶지 않아서, 유고가 한 말에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막연한 불안함이, 감촉이 있는 현실로
옮겨진 것 같아서.
“으으으, 우울한 생각 하지 마!”
나는 세차게 내 양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세네핀 크롬웰!
어차피 이 세계에 와서 쉬운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고, 혹시 루민스에게 사망 플래그가
꽂히는 것 아닐까 전전긍긍하다가 오히려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루민스한테는 별일 없었잖아.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단 하나!
루민스 할데르프가 살아서 행복한 엔딩을 내
눈으로 보는 것뿐!
그 이정표만 잃지 않으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것만을 위해 이 세계에 있었다.
머리가 안 굴러가도, 능력이 부족해도, 실수가
잦아도, 앞만 보며 달려왔다.
다시 뺨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듯 때리며 정신을 통일했다.
이러고 우울할 시간에 이후 루민이의 사망
플래그를 피할 일이나 고민하자!
◇◇◇
너무 때려서 얼얼한 뺨을 어느 정도 식혔을 무렵에는 어느샌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늦기 전에 준비하고 저녁
먹으러 외출해야 할 텐데!
서둘러 별채로 돌아와 보니, 응접실에 루민스의 뒷모습만 보였다.
“다녀왔어요. 어라, 다른 분들은……?”
“벨키나는 옷 갈아입는다고 방에. 진도 본인
옷 정리하러.”
“그렇군요. 아, 유고 왕자님은 잘 돌아가셨어요.”
“……으응.”
아까 엄청나게 찬 바람이 쌩쌩 불어서 혹시
내가 유고와 무슨 이야기를 했나 꼬치꼬치 캐묻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루민스의 반응이 담백했다.
사실
루민스 본인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안심하면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루민스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뒤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이름부터 뱉어버렸다.
이게 시방 무슨 일이야.
루민이가 안경 쓰고 있잖아!?
“……왜?”
“루, 루민스가 안경 쓰고 있어서……. 책 읽고 계셨어요?”
“아니, 음……. 정신 안정 중이라고 해야
하나.”
안경다리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루민스가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했다.
오랜만에 루민이 안경 모습 본 건 좋은데 말이지! 이 누나 쪽이 정신 안정이 안 되는구나, 루민아!
밖에서 뺨 두드리며 정신 통일 하고 왔는데
그런 모습으로 누나를 유혹해서 정신을 해이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니? 그야 그건 아니겠지만.
“안경을 쓰면 정신이 안정되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경에 시선이
일단 한 번 차단되는 느낌이라.”
루민이 네 얼굴이면 안경을 쓰든 안 쓰든,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볼 거야.
잠깐, 그런데 밖이 아니라 안에서 안경을
쓰고 있는 거면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별채 안에서 시선이 신경 쓰인 거라면, 설마 그 원인은…….
“아, 저기. 혹시 제가 아까 한 말 때문에
신경 쓰이셨던 거예요?”
“응?”
“제, 제가 루민스 얼굴 가지고 부끄러운
소리 해서…….”
“……그건.”
입가로 손을 가져가더니 루민스가 시선을 피했다.
……아니, 진짜였냐!?
“죄, 죄송해요! 루민스를 놀리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고요!”
“아냐, 괜찮아. 좀……, 놀란 건 사실이지만.”
루민아, 오해하지 말아줘! 내가 덕질하는
당사자 앞에서 주접떨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일기로 적으면 눈물로 30페이지를 채울 거다.
“아무튼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야. 세네핀도
외출 준비해야지? 나도 방에서 옷 갈아입고 올 테니 조금 이따가 보자.”
오해가 풀린 듯 안 풀린 듯 미묘한 상황에서
루민스가 그렇게 대화를 끊어버렸다.
으으, 역시 루민이 얼굴 찬양하면서 주접떠는
거 아니었나 봐……. 앞으로 진짜 조심해야지.
그렇게 앞으로도 자제력을 발휘하여 루민이
얼굴 잘생겼다느니 입 밖으로 떠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16. 신이 안배하는 것
대륙 서부에 있는 라터체니령으로 떠나기 위한
여행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어차피 마법연에서 수도로 이동해 오느라 정리해두었던 짐이 약간 늘어난
정도라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떠나기 전날, 칼트가 우리를 집무실로 불렀다.
“약식이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네만, 자네들이
떠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하여.”
그는 그렇게 사과의 말로 서두를 열더니 내 쪽을 향해 손짓했다.
“레이디 세네핀, 이쪽으로 가까이 와주겠나?”
“네, 저하.”
칼트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자, 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세네핀 크롬웰. 그대가 지닌 태초부터 부여된
‘정화의 힘’을 인정하는바, 쉐이런 리코위 페이넌스의 이름을 대신하여 3급 마법사 칭호를 내리노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칼트는 나의 6급 마법사
표식을 직접 떼어낸 다음, 3급에 해당하는 표식을 걸쳐주었다.
와, 4급도 아니고 심지어 3급이라니…….
거저먹는 게 너무하지 않나?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조아렸다.
“국왕 전하와 왕세자 저하의 깊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음. 다음으로 레이디 벨키나도.”
“와아, 감사합니다. 저하!”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나야말로 다행이네.”
어라, 마법사 승급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여행 이후일 텐데?
그런 의문이 담긴 눈으로 두 명을 번갈아
보자 벨키나가 생긋 웃었다.
“혹시나 하고 떼 좀 써봤어! 같이 가는
사람들이 태초의 힘의 보유자니 특급 마법사니 이런데, 나 혼자 수습 마법사인 건 좀 슬프잖아. 그래서
따로 시험 쳤어.”
얼마 전부터 시간 나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렇게나!
게다가 원래 게임대로라면 벨키나가 처음 4급으로 승급하는 건 정화의 힘 덕분이었다. 그런데 자력으로 4급에 뛰어오를
정도면 우리 몰래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헤헤, 세네핀도 축하해!”
포옹하며 벨키나가 내 등을 두드렸다. 나야
원래 벨키나가 가지고 있어야 할 힘이 멋대로 내게서 발현된 것뿐이라, 축하를 받으면서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떻게든 이 언니가 노력할게!
“축하한다, 벨키나. 세네핀 깜짝 놀라게
해준다고 공부할 때 나만 괴롭히더니 승급해서 다행이네.”
뒤에서 가볍게 박수를 보내며 루민스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흥, 내 목표는 특급 마법사니까 말이야!
넌 내 라이벌이야!”
“그래그래, 꿈은 크게 가져야지. 세네핀도
축하해.”
“호호, 고마워요. 루민스.”
우리 벨키나는 세상을 구하고 나서 특급 마법사가
될 몸이니까 별로 큰 꿈도 아니라고!
……하고 혼자서 속으로 벨키나 편을 드는데,
칼트가 조금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목을 끄는 일은
피해야 하다 보니 겉으로 눈에 띄는 지원은 제한되는 점, 양해해주었으면 하네.”
“양해할 문제도 아닙니다. 마정령이 수도에도
침입한 이력이 있는 상황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됩니다, 왕세자 저하.”
원래 왕실이 직접 지원하는 계획이라면 시종을
잔뜩 붙여준다거나, 전용 이동 수단을 준비한다거나, 대대적으로 축복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등 화려한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은, 보안과 은밀함이 생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명목상으로 우리의 여행은 ‘아란다스트
대륙의 과거 유적으로 알아보는 마나 흐름 분석과 그 응용 범위’ 따위의 이름이 붙은 논문을 쓰기
위한 여행이 되었다. (루민이는 실제로 가는 김에 논문 쓸까? 이랬다. 루민아…….)
“저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소식 가져올게요, 저하!”
“언제나 왕세자 저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셋을 돌아보던 칼트는 평소보다 훨씬
꾸밈을 덜어낸 웃음을 보였다.
“자네들에게 시초룡 알페이넌스의……, 아니.”
고개를 젓고 그는 오직 인간의 말로 우리를
축복했다.
“자네들의 실력과 의지로 그 소명을 다하길
바라네. 신의 가호가 없더라도.”
◇◇◇
다음날 새벽, 다소 수상해 보이는 남녀
5명은 대륙 서부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새삼 이 멤버 무지무지 눈에 띄지
않나? 은밀한 계획 따위가 가능한 건가?
터번처럼 머리 쪽을 천으로 칭칭 감아서 동물
귀를 감춘 특이한 패션을 자랑하는 은발 미소년이 한 명.
옷은 정말 허름하게 집어 입고 왔는데 귀티가
좔좔 흘러서 높은 신분 도련님이라는 게 티 나는 백금발 미청년이 한 명.
금발 벽안이라는 흔한 컬러링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낸 듯한 미모를 자랑하는 수수한 차림의 절세미인이 한 명.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우리 루민이가
한 명…….
“……걱정이 되네요.”
얼굴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나마 평범한
낯짝인 누나가 힘낼게……. 너희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이동 패션쇼 같으니까 자제하자.
“괜찮아, 세네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망설임 없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단언하는
벨키나가 멋있어서 조금 반할 것 같았다.
벨키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방향이 아니야…….
“호호, 고마워요. 벨키나. 아무래도 장거리
여행이다 보니 신경이 곤두섰나 봐요. 얼른 가죠!”
“세네핀, 오늘도 같이 카드놀이 하자꾸나.”
“헤헤, 이번에도 내가 챙겨온 보드게임들이
열차 탁자에서 불을 뿜겠군!”
우리 셋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다르게 뒤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조용히 따라오는 약 두 명, 루민스와 유고 사이의 공기는 여전히 살벌하다.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앞날이 순탄치
않겠구나 한숨을 푹 내쉴 따름이었다.
◇◇◇
라터체니령은 수도에서 서쪽으로 마법 열차를 타고 꼬박 사흘이 거리는 구석에 위치했다. 그것만 해도 진이 빠지는데, 우리의 목적지인
유적 ‘공중낙원의 미로’는 열차로 도착한 곳에서도 또 한참을 더 이동해야 했다.
라터체니령의 중심도시인 론허에 도착하자마자
지쳐서 한동안 호텔에 널브러져 있었던 우리는, 저녁에 그 동네 선술집에 모여 다음 이동 루트에 대해
논의했다.
“‘공중낙원의 미로’는 론허에서 또 남쪽으로
가야 하는 거였지?”
벨키나가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며 서두를 열었다.
“맞아.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까지 마차를 타고 온종일 이동한 다음에, 거기서 하루 묵고 또 이동해야 해. 참고로 마을에서부터는
마차용 포장도로가 없어. 그러니 노숙하면서 도보야.”
루민스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벨키나가 씩씩한 포즈를 취했다.
“노숙쯤이야 뭐! 부뚜막 태워 먹었다고 고아원
원장님한테 욕먹고 밖에서 잔 세월을 생각하면 거뜬하지.”
“벨키나……. 아무렇지 않게 과거에 힘들었던 이야기 하면 제가 가슴 아파요.”
“어어, 나 의도하지 않게 세네핀한테 동정표
얻은 거야? 해볼 만한데, 사연 팔이.”
나는 벨키나의 목을 껴안으며 그런 슬픈 소리 하지 말라고 징징거렸다. 아무래도 맥주를 마셨더니 약간 알딸딸해져서 더 감정이 격해지나
보다.
우리를 바라보며 논알코올 음료수에 치즈를
갉작이던 진이 끄덕였다.
“나는 원래 자연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 없다.”
“검술 수련 때를 생각하면 그 정도야 고생
축에도 안 들지. 오히려 귀한 집 책상물림 도련님이 문제지 않냐?”
턱을
괴고 증류주를 마시던 유고가 노골적으로 한 사람을 겨냥하여 이죽거렸다.
저격당한 루민스는 주변 온도를 떨어뜨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세상만사에 불평 많은 고귀하신 분에 비하면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온 편이라 걱정은 불필요할 듯합니다.”
“하, 태어날 때부터 딱딱한 곳에 등도 대본
적 없는 것 같은 놈이 입만 살아서.”
저러다 쟤들 또 계급장 떼고 덤비겠다…….
그것보다 둘 다 금수저 오브 금수저 주제에
저런 다툼 해 봤자 허무하지 않나? 아란다스트 대륙의 모든 은수저 이하 사람들한테 사과해라.
“에이차암, 유고도 루민스도 그만둬.”
어느샌가 유고한테 존칭을 까다 못해 말까지
까버린 벨키나가 중재에 들어갔다. 무섭다, 친화력 만렙…….
“지금 중요한 건 너네가 어떻게 자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해야 세네핀이 고생을 안 할까 하는 문제라고.”
“호호. 걱정 안 해도 돼요, 벨키나. 저도
노숙 같은 건 얼마든지 괜찮답니다. 좀 춥긴 하겠지만 모포 열심히 끼고 자면 되죠.”
물론 고르자면 푹신한 이불 덮고 침대에서
자는 게 제일 좋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도 아니고 말이다.
“괜찮다, 세네핀. 내 모피는 따뜻하니 나하고 같이 자도록 하자.”
“어머나, 신세 져도 될까요. 진.”
수화한 진의 털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지.
쓰다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인데, 끌어안고 잔다면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한 강아지나 대형견을
끌어안은 기분일 것이다. 잠도 정말 잘 올 듯한데?
묘안이라고 생각하며 그 제안을 받으려고 했는데, 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루민스와 유고가 동시에 진의 뒷덜미를 붙잡아서 내 옆에서 떼어 놓았다.
“지금 어려 보이는 외모를 은근히 이용해
는 놈부터 처리하는 게 선결 과제 같습니다만, 유고 님.”
“어이, 세네핀 크롬웰. 왜 동행하는 놈들이
하나같이 틈만 나면 기어오르는 놈들뿐이냐?”
기어오른다고 하셔도…….
“다들 염려하지 마. 세네핀은 내가 한 침낭 안에서 몸으로 덥혀줄 거니까. 크흐흐.”
“쟤도 끌어내라.”
웬일로 유고의 명을 따른 루민스가 벨키나까지
질질 끌고 가서 결국 선술집의 테이블에서 내 양옆만 비어버린 썰렁한 배치가 되어버렸다.
벨키나가 항의하며 술잔을 탕탕 두드리고,
진도 자신에 대한 취급에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루민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가게 온도를 떨어뜨리고,
유고가 얄미운 소리를 뱉기 시작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이 일행들……?
나는 맥주가 든 유리병을 기울여 자작하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
공중낙원의 미로는, 원작 전개대로 따지자면
지금 시점에서 등장할 던전은 아니었다. 게임 중후반부쯤 레벨 노가다를 하러 오는 장소니까.
본인 루트에도 사망 지뢰가 깔려 있는 루민이답게,
이 던전에서도 선택에 따라 그가 사망하는 플래그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이 유적에 온 목적도 바뀌었고 시기도 다르다 보니, 사망 플래그가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하게 발동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눈 부릅뜨고 루민이가 위험할 일 없나 낮이나 밤이나 조심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마차로 ‘공중낙원의 미로’와 최단
거리에 있는 마을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중간 채비를 하고 다음 날 새벽 유적을 향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에 더해 아직 여름은 아니다 보니, 우비를 입었어도 조금 쌀쌀했다.
“이 비라면 진로가 방해되어서 원래 일정보다
길어질 것 같은데 문제없는가?”
우비 입기 귀찮다고 수화 상태로 돌아간 진이 내 어깨에서 루민스를 향해 물었다.
“그건 괜찮아, 돌발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짠 일정이니까. 이상적으로는 하루에 30타헤르씩 움직이는 게 목표지만, 무리는 하지 말자.”
진을 홱 들어 올려 자기 품에 안으며 루민이가
대답했다. 버둥거리며 싫어하는 걸 보다가 이번에는 유고가 진을 데려가더니 정수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쓰다듬었다. 실은 유고가 동물 좋아하는 걸 난 잘 알지……. 루민이보다는 안는 자세가 성의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흰둥이가 반항하지 않았다.
“체력이 부족한 놈들이 있으니 그에 맞춰주는 건 상관없다만, 중간 거점이 그렇게 이쪽 사정 맞춰서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을 거다.
특히 이쪽은 미개척지나 다름없으니까.”
유고의 지적대로 ‘공중낙원의 미로’는 미개척지 안에 있는 유적이었다. 물론 조사를 위해 왕실에서 조사대를 파견했던 역사도 있으니
미지의 영역까지는 아니지만,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은 없는, 그런 쓸쓸한 장소였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늪지대를 지나 험준한
협곡을 올라가면, 그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모서리만 걸쳐 매달린 듯한 거대한 큐브 모양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게 바로 ‘공중낙원의 미로’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 건축물이 절벽 밖으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게 믿기지 않는데, 자연 마나가 그 기이한 존재 형태를 유지해주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없어서 별로 도움이 못
되네. 미안해!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갈게.”
벨키나가 양 주먹을 쥐며 씩씩하게 말했다. 나도 끄덕이며 메고 있던 가방을 꽉 쥐었다.
“저도 괜찮아요. 일부러 신발도 튼튼하고
발에 길들인 것들로만 챙겼고, 무리하다가 괜히 짐이 되지 않도록 힘들면 그때그때 말할게요.”
업혀 가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도와주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자기 객관화가 잘되니까 문제없지.
“추위 때문에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마법으로
온도 유지는 할 거지만, 그래도 자기 체력을 과신하지 말 것. 그럼 출발하자.”
◇◇◇
비 오는 상황에 늪지대라는 특수성까지 합쳐져서
무척 힘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루민스는 우리의 신발에 특수 마법을 걸어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을 굳히도록 처리했다.
거기에 온도 조절 마법이 몸을 적시는 빗물을
불쾌하지 않을 수준으로 증발시켜주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시야를 방해하는 게 번거로운 정도지,
행군은 생각보다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렇게 한 10타헤르쯤 걸어갔을 때, 유고가
무척 시비 거는 목소리로 루민스를 불렀다.
“어이, 할데르프 후계놈.”
“이제는 후계자 아니라고 정정하는 것도 지칩니다만, 네, 유고 님.”
“좀 더 편리한 마법은 못 쓰는 거냐?
‘소원의 조각’이 순간 이동한 것처럼 인간을 운반한다거나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의 마법은 꽤 규격 밖의
위력을 갖고 있는데, 묘하게 물리법칙을 벗어난 마법은 드문 편이었다.
“행군하면서 마법학 강의를 듣고 싶어 하시는
취향인지는 몰랐군요. ‘기존의 마법 체계로는 불가능하다.’라고 증명되어 있습니다. ‘공간, 시간,
개념을 마법으로는 뛰어넘지 못한다.’라는 법칙이죠.”
“앗, 그럼 ‘소원의 조각’은 그 법칙에서 예외인 거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벨키나가 선생님에게
질문하듯이 손을 들며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법은 신이 허락한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락된 기술이야. 즉, 신이 허용한다면, 혹은 신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다면, 마법의 범위를 벗어난 기적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소원의 조각’은 아마 그중에서 ‘신이 허용한’ 기적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리라. 그러면서 마나는 자연법칙에 따라 대규모로
사용한 점이 좀 재미있지만.
……하지만, 신의 눈을 피한다고 하면. 꽤 예전 일이지만, 미혹의 골짜기에서 루민스가 쓴 마법이 떠올랐다.
하얀 공간의 절대 안전지대라고 했던가. 거기에서라면
신의 눈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서 마법의 범위를 벗어난 기적을 펼친다면…….
에이, 말도 안 돼. 신의 눈을 피한다니,
아무리 루민스가 먼치킨이어도 힘들 것이다.
“……그렇군. <별을 향한 초대>의
권능은 신이 허락한 것이라 가능한 건가.”
무언가 생각하던 유고가 납득한 듯 중얼거렸다.
“권능?”
유고의 어깨에서 흰둥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되물었다.
“그건 ‘소원의 조각’으로서 가진 힘 말씀이신가요?
세 개를 모으면 신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뭐지. 형님이 너희에게 따로 말하지 않은
거냐?”
“왕세자 저하는 ‘소원의 조각’이 세 개
모이면 신이 소원을 이루어주니까, 마정령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하셨거든. 그 외에 <별을
향한 초대>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벨키나의 설명을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유고가
대답했다.
“형님도 사람이 나쁘군. 어차피 사람 부려먹느라 사정을 알려줄 거면 그냥 까놓고 전부 알려주면 될 것을.”
“그 말씀은, <별을 향한 초대>
자체에도 어떤 힘이 있는데 왕세자 저하가 일부러 숨기셨다는 건가요?”
“우와, 뭔데? 궁금하다!”
벨키나가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에 캐물으려고
하자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 하시죠, 유고 님. 저하께서 일부러 밝히시지 않은 걸 보면 왕실에서만 공유하는 극비사항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저희에게
알리는 건 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 국가 기밀을 들었다가 나중에 목숨이라도 잃을까 봐 겁먹었냐?”
또, 또 둘이 싸운다…….
그나저나 ‘소원의 조각’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별을 향한 초대>에도 고유한 힘이 있었다고? 그건 게임에서도 안 나온 이야기인데.
진히어로 엔딩을 보다 말아서 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소원의 조각’ 세 개는 모두 그냥 상징적인 유물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무언가
마법을 쓴다거나 힘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대들, 자기들끼리 싸울 여유가 있으면
주변을 둘러봐라.”
바닥에 사뿐히 뛰어내린 진이 경고했다.
시선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같기도
한 것.
한 무리의 마물들이 우리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피부에 닿는 찌르르한 공기가 우리가 사냥감이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런 긴장된 공기를 무시하듯 상냥한 목소리로
루민스가 진을 달래듯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진. 아까부터 경계하고 있었는데
태평한 왕실 말단 님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길래 상대한 것뿐이야.”
“곱게 자란 미친 새끼한테 그런 소리 들을
여지 없다. 어이, 여기는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주변 방벽이나 굳히라고.”
“방어가 안 되는 유고 님은 뒤에서 쉬고
계시죠?”
그만 싸우라고 슬슬 말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유고가 툭 하고 던지듯 말했다.
“―좋아, 내기를 걸지. 이 마물 새끼들을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쓰러뜨린다면 왕실의 극비사항이고 뭐고 다 까발려버리겠다. 겁쟁이 놈,
막고 싶으면 어디 비벼보시든지?”
“유고 님께서 무슨 이상한 비밀을 털어놓으시든 제 알 바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걸어온 승부에서 일부러 져드리는 것도 뭐하니.”
수십 마리의 마물이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거대한 검은색 덩치의, 곰과 코끼리를 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생김새의 마물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승부, 받아드리죠. ―파괴의 땅울림을
사랑하는 전격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오러 블레이드!”
유고의 검기가 불을 뿜으며 좌측을 횡으로
베어버렸다. 동시에 눈 깜짝할 새 우측으로 이동한 루민스가 쏘아대는 전격 스펠이 마물들과 나무를
넘어뜨렸다.
루민스는 쓰러지는 나무에 다시 물리 스펠을
써서 반대편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밀어버리며, 연속으로 화염 스펠을 썼다. 그에 질세라 유고가 다시 레이저빔이라도 되는 양 쾅쾅 검기를 때려 박았다. 검기와 마법이 사그라든 자리마다 검게 그을린 마물의 시체만 남았다.
“……저기, 우리가 손대면 쟤네 화내겠지?”
“내기 종료 후에 숫자 계산하기 귀찮을 테니 아마도요……?”
벨키나와 얼굴을 마주 보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마물 사냥이라기보다 일방적인 도륙이다.
공격할 상대의 역량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이쪽에 시비를 건 마물들이 바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방적이면
뭐랄까, 좀 불쌍하다는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루민스가 저렇게 내기에 적극적으로 응할 줄이야. 원래 내가 알던 것보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는지, 유고랑 상성이 안 맞아서
나쁜 쪽으로 발현이 된 건지…….
보통은 웬만한 일들을 온화하게 넘기는 편인데 유고가 거는 시비는 왜 저렇게 하나도 안 넘기고 되돌려주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방에는 불꽃놀이라도 하듯 펑펑 전격과
화염이 터졌고, 연기와 그을음이 교차하며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비 오는 날이니 괜찮긴 하겠지만 나중에 산불
안 나게 주변 확인 잘하고 가야겠어…….
그렇게 준법 시민다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좌측에서 유고가 외쳤다.
“야, 그쪽 조심해!”
고개를 드니 유고가 베어낸 마물의 거대한
팔 부분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쯤이야 물리계 마법으로 튕겨내 버리면 그만이지, 하는데.
- 쾅!
갑자기 내 앞으로 이동한 루민스가 그 팔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건 5초 뒤였다.
“루, 루민스?”
“이 정도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데 뭘 과보호하고 있어.”
스펠을 캔슬하며 벨키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내 어깨로 올라와 있던 진도 끄덕였다.
“벨키나의 말이 옳다. 그대는 유고와의 내기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았는가?”
“으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루민스가 애매하게 웃으며 내 쪽을 보았다.
음……. 내가 좀 못 미덥긴 하지. 정화의 힘 덕에 3급으로 올라갔다곤 해도 원래 가지고 있는 마법
실력이 뛰어나진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괜히 루민스를 신경 쓰이게 한
건가 좀 미안했다.
그사이에 남은 마물들을 끝장내고 검신에서 피를 털어낸 유고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쪽으로 걸어왔다.
“……제대로 안 하냐?”
“죄송합니다, 유고 님. 제 패배인 것으로
하죠.”
루민스는 생글생글 웃을 뿐 딱히 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승부에서 지게 만든 것 같아서 찔렸는데,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소 찝찝하게 둘의 내기가 끝나고, 나의
제안으로 혹시 모를 산불의 위험을 막기 위해 수(水) 속성 마법을 이용해 주변을 적셨다. 마물들의 시체도 그대로 놔두면 부패하여 주변을 오염시킬까 봐, 루민스가 마법을 이용하여 정리했다.
그 사이에 비가 서서히 그쳐서 시야가 조금
트였다.
오늘 행군 목표까지 20타헤르는 남았다. 시간이 지체된 만큼 보충하기 위해 다시 이동하는데, 벨키나가 명랑하게 아까 화제를 끄집어냈다.
“결론적으로 내기는 유고가 이긴 거잖아!
그럼 들려주는 거야, 왕실의 거대한 음모? 정보가 유출되면 우리의 목숨이 위험한 극비사항!”
“아니, 딱히 그 정도는 아니다만.”
벨키나의 흥 넘치는 가락에 맞춰주지 않으며
유고가 냉정하게 끊어냈다. 아무튼 저런 면에서도 사회생활 못하는 애야…….
그렇지만 게임에서 나오지 않은 정보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궁금했던 나는 쫑긋 귀를 기울였다.
“……아뇨. 언제가 되었든 유고 님께서 그
말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 같으니. 편하신 대로 하시죠.”
신경 쓰지 말고 말하라는 듯 루민스가 손짓했다. 유고는 앞쪽으로 몸을 돌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마 루민이가 순순하게 말하라고 하니까 역으로
기분이 애매해진 모양이었다.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입을 뗐다.
“황당무계한 소리라서 나도 반쯤은 믿지 않으니까 그냥 그런 소리도 있구나, 하고 흘려들어라. 세 개의 ‘소원의 조각’에는 각각 특수한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무척 상식 밖의 힘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고 조건이 있지만.”
“어떤 조건인가요?”
“신이 사용을 승인할 것. 그런 힘을 쓸
정도로 현재 세계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걸 해결하기 위한 경우에만 신이 승인한다고 들었다.”
“직접 신이 내린 물건이라 할 만하군.”
진의 말대로 신이 내린 물건……, 무기라고
해야 할까?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걸 해결하는 최종 병기라는 느낌일지도.
판타지 세계관에 흔히 있는 설정답다. 게임상에서는
그 힘이 언급되는 일도 쓰일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숨겨진 설정인가?
“그렇다면 무지무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나 보네! 어떤 힘이야?”
“페이넌스 왕실이 알고 있는 건 <별을
향한 초대>의 힘뿐이다. 다른 두 개는 영역이 달라서.”
“그건 어떤 힘을 가졌는데? 이름처럼 하늘에 있는 별로 이동이라도 할 수 있어?”
벨키나의 질문에 유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
“반대?”
“별세계에 있는 인간을, 우리가 있는 이
세계로 데려올 수 있다고 한다.”
◇◇◇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나머지 일행들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별세계? 정말로 별에 사는 사람을 데려온다는
거야? 밤하늘의 별 같은?”
“정확하게는 이 세계랑 아예 별개의 세계라느니 그런 소리였는데……. 어이, 할데르프 후계놈. 그런 마법물리학은 네놈
전문 아니냐. 네가 설명해라.”
조용히 있던 루민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벨키나도 알고 있지? <세계>의
정의는 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컫는다는 것.”
“응! 마법물리학 과정에서 배우잖아.”
“그걸 뒤집어서, 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세계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있어. 이 세계의 신이 만든
법칙과 인과가 작용하지 않는, 이곳과는 전혀 별개의 세계가 있다는 거지.”
벨키나에게 안겨 있던 진도 흥미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물론, 그다지 지지를 받는 가설은 아니야.
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무척 불경하게 느껴지니까. 일반적인 아란다스트
대륙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하지만 실제로, <세계의 바깥>은
존재하는 것이군. <별을 향한 초대>가 가진 힘이 정말이라면.”
유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별세계에 있는 인간을, 이 세계로.
“저, 저기. 유고.”
“뭐지?”
“왕실에 그런 사실이 알려져 있다는 건,
과거에 <별을 향한 초대>가 사용된 적 있다는 건가요?”
내 질문에 벨키나가 옆에서 “그러게, 궁금하다!” 하고 호기심 넘치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끼면서 침을 삼켰다.
“사용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자세한 이력까지는 나도 모른다만……. 꽤 과거의 일이었을 거야.”
꽤 과거의 일이라면 내 이야기는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이 게임을
하다가 소원을 빌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별을 향한 초대>가 원인일 수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역시, 이곳은 단순히 게임 속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은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하는 다른 세계고, 그곳의 신이 남겼다는 힘이 나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인물도 그저
게임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그녀의 의식은 지금 어디로 간 것이지?
설마 내가, 그 사람의 몸을 빼앗았다거나…….
그렇다면, 이 몸은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
마치 무언가가 머리를 휘젓는 것처럼 의문들이 샘솟았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이 세계에
온 경위와, ―원래 세계에 돌아갈 방법……,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강렬하게 머리가 아팠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그것보다, 다른 걸 생각하자.
따끔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정신을
가라앉혔다.
“그치만 별세계의 사람을 굳이 우리 세계에 데려오는 이유가 있나? 그 사람이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뭔가 도움이 되는
거야?”
벨키나의 질문에 루민스는 눈을 내리깔고 설명했다.
“……추측이지만, 별세계의 사람은 신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존재잖아. 그렇다는 건, 상식 밖의 힘을 쓸 수 있다는 의미도 될 거야.”
무거운 화제가 아닌 듯한데도 그의 표정이 어딘지 그늘져 보였다. 내 착각일까. 하지만 내리뜬 그의 눈 안쪽,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사그라들
듯 미약해져 있었다.
루민스가 왜 저러지? 뭔가 마음에 걸리나? 방금까지의 맥락에서라면 루민스가 걱정할 만한 게……,
“상식 밖의 힘이요?”
내 질문에 일순 얼굴을 굳히는가 싶었던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래. 비유하자면……. 별세계의 사람은 이 세계의 어떤 마법사보다 강력한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할 뻔했다. 별세계에서
온 인간이라고는 해도, 나는 아무런 힘도 없으니까.
이 세계의 어떤 마법사보다 강력하다니. 정화의
힘은 본래 벨키나의 것이고, 게임상의 설정이긴 했지만 아란다스트 세계의 최강 마법사는 우리 루민스다.
그렇다면 내가 루민이보다 더 강한 마법사라는 얘기?
말도 안 돼. 내 능력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우리 루민이도 워낙 독보적이라서 이 세계의 존재 같지 않은 강력한 마법사라는 설정이었는걸.
차라리 루민이가 별세계에서 온 인간이라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쪽이 더 타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상식 밖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을 사람도 있겠지. 그런 사람들이라면, 별세계에 있는 사람을
굳이 데려오려고 시도할 만하다.
“그래, 내가 듣기로도 그렇다고 알고 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별세계 인간의 힘을 빌려 세계의 위기를 바로잡는다는, 그야말로 허황된 이야기지만.”
유고는 본인이 말을 꺼내 놓고도 그다지 믿지
않는 듯 잘라버렸지만, 벨키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뭐 어때, 낭만이 있는 이야기잖아. 멋지다,
별세계에서 온 사람은 어떤 분위기일까, 진?”
“우리와 생김새가 다를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아, 그러게! 옛날 동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키가 큰 거인이라거나, 반대로 난쟁이라거나!”
만약 ‘내가 그 별세계에서 온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다들 친절하고 착한 애들이니까, 황당하게
느껴지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나를 이것저것 챙겨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네핀? 다들 잠깐만.”
뒤쪽에서 나와 나란히 걷고 있던 루민스가
모두를 부르며 내 이마에 손을 댔다.
“역시 열이 있네. 세네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오늘은 쉬었다 가자.”
나는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 아직 오늘 목표 행군 거리 반도 못
채웠는데요!”
“세네핀 본인이 떠나기 전에도 말했잖아?
무리하지는 않고 힘들면 그때그때 말하겠다고. 그래놓고 무리하면 못써. 바로 치유 마법 걸게.”
다정하지만 엄격한 말투로 꾸짖듯이 루민스가
말했다. 벨키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끄덕이고, 유고 역시 동의했다.
“맞아맞아! 세네핀, 푹 쉬어! 내가 바로
노숙 준비할게!”
“비 오는 날 장시간 이동은 원래 체력을
빼앗기는 일이야. 괜히 폐 끼쳤나 눈치 안 봐도 된다.”
흰둥이도 걱정이 되는지 내 목을 따스하게
감싸는 것처럼 어깨에 올라 뺨을 비볐다.
“세네핀, 다들 네가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고
걱정하고 있다. 어서 푹 쉬고 몸 상태를 회복하도록 해라.”
모두가 나를 따뜻하게 격려한다. 내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봐 주고, 오로지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나에게 맞추어 준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나
모르는 척해왔다.
루민스가 춤을 권하여 마법처럼 스텝을 밟을
때도, 여기 있는 이들의 친구 행세를 해도 될까 고민할 때도, 아니, 매시간 숨을 쉴 때마다.
내가 받는 애정, 과분할 정도의 관심, 따뜻한
감정.
그 모든 것이―
내가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이의 삶을 멋대로 빌려 쓰고 있기에 성립된다는 것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어떤 별세계의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지독하게 아파져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견디며,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
흐릿한 날씨에 해가 지는 것은 빨랐다. 노숙을
위해 간이 천막을 세우고 준비해온 보존식을 먹고,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내 몸 상태를 배려하여
다들 내가 불침번 순서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밤이 되어 침낭에 누워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깨어 있는 것인지 졸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길고 긴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옆에서 자고 있는 벨키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여 침낭에서 몸을 뺀 후,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아.”
구름에 가려 달도 없는 밤을, 마치 반딧불 같은 빛이 환하게 비췄다.
노란색으로도 연두색으로도 때로 붉은색으로도
보이는 그 주먹만 한 마법의 빛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미혹의 골짜기에서 해가 떨어지자 루민스가 주변을 밝히기 위해 사용했던 마법이었다.
“루민스…….”
“응, 세네핀. 깬 거야? 추울 텐데.”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을. 잠이 안 와?”
그 말에 작게 끄덕이자, 루민스는 바위 위에
모포를 덮으며 그 위에 앉기를 권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계속 흐릴 것 같아. 비도
간간이 오지 않을까 싶고……. 무리는 하지 마, 세네핀.”
나는 양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
입을 뗐다 붙였다 하며 망설이다가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 순간 흥얼거리는 듯한 작은 스펠이 들려온다.
“……태초를 뒤집어 무가 되고, 무가 뒤집혀
영원으로 이르는 태초. 단절의 기쁨에 모두 비명을 지르리.”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그 스펠과 함께, 온 세상이 눈부시게 하얘진다.
“앗……?”
“유고 왕자님도 참, 사람을 귀찮게 만든단
말이야. <세계>한테 의심받을까 봐 이 마법은 자주 쓰고 싶지 않은데.”
그림자도 무엇도 없는 끝없이 새하얀 공간
안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루민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강렬한 물결 같은 것이 머리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그 감각을 견뎠다.
이윽고 파도가 쓸려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잠잠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루민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공간을 기억하고 있다. ‘세계의 적’을 이야기하던 루민스의 모습도.
……어째서 나는, 잊고 있었던 거지?
“아……!”
외마디 비명과 같은 소리가 절로 목에서 튀어 나왔다. 나의 기억을 지우던 그의 마지막 모습 또한 생생히 떠올랐다.
“왜……, 기억을 지우신 거예요!”
“미안, 미안. 정확히는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을 이 공간에 쑤셔 박아두는 거긴 하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흘러들어오는 기억이 선명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이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용 또한.
“……사람이, 걱정하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러게, 멋있는 척 온갖 소리를 다 해두고
이렇게 다시 보는 건 좀 부끄럽긴 하다. 아무튼, 세네핀. 지금 <별을 향한 초대>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지?”
지금껏 가슴을 쥐어뜯는 기분으로 고민해왔던
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내어 물었다.
“세네핀이 별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거라면,
맞아.”
“그래서…….”
그동안 그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들도, 느껴졌던
위화감도, 그 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루민스 할데르프는, 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고.
“루민스는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죠? 세계의
적이라는 건요? 어떻게 루민스는 기존의 체계에서 벗어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대답할 생각 없으니까 질문해도 그다지 의미는
없어.”
“어째서 그렇게 멋대로 구는 거예요!”
“세네핀이야말로 항상 멋대로 위험해지려는
사람처럼 굴면서.”
“……무슨…….”
“항상 예측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어가잖아. 고요의 호수도, 왕세자 저하의 시험을 받아들인 것도, 유고 왕자와 접촉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널 보면서 얼마나 불안한지 알고 있어?”
“됐어, 그걸 세네핀에게 따져 무엇하겠어.
내가 커버해야 할 문제지. 어찌 되었든, 본론으로 돌아오자. 세네핀. 존재가 흔들려서 불안한 마음이라는
거 알아.”
나의 불안도, 두려움도, 죄책감도, 모두
꿰뚫어 보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로.
그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원래 말이지, 별세계에서 이곳에 건너올
때는 기본적으로 신이 정신적인 보호 처리를 해.”
“정신적인 보호?”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곳과 근원부터 전혀 다른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다면, 사람은 극심한 공포 상태에 휩싸일 수밖에 없어. 잘못하면 정신에 큰 타격을 입을 일이지.”
그야 그렇겠다, 라고. 나는 어쩐지 남 일처럼
머리 저편에서 생각했다.
아무리 게임을 많이 하고,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를 많이 읽는다고 해도, 그건 ‘간접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죽는 소설을 보고
익숙해졌다 해도, 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실제로 죽었을 때 담담할 수 있을까?
“이곳의 위기를 처리하는 편리한 심부름꾼으로 써먹기 위해서는, 정신적 결함이 없는 편이 좋다고 신은 생각했던 모양이야. 별세계 인간이
타격을 입는 걸 막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고 보호하는 과정을 추가했어. 본인이 살던 세계의 기억을
숨겨두기도 하고, 원래 느낄 불안이나 공포 같은 감정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이 세계의 지식이나 상식을 흡수시키기도 하면서.”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이름. 이 세계에 강림한
이후 기이하게 빨랐던 적응력. 현실을 떠올리려고 하면 토할 것 같이 머리가 아팠던 것. 그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차치하고. 세네핀 안의 그 정신 보호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지극히 기계적이며 효율적인, 이 세계 신의
안배였다.
◇◇◇
“응. 나는 그게 걱정돼. 완전히 보호가
풀렸을 때 너의 불안이나 공포가 얼마나 클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까……. 옳고 그른 것 이전에, 당분간은 네 정신 보호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껏 태평하게 이 세계에서
살아왔던 것도, 즐겁고 행복했던 것도 사실이다.
루민스가 저번처럼, 나의 기억을 이 공간에
박아두고 암시를 건다 한들,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불안과 의심의 바퀴는 계속 굴러갈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요, 루민스. 그런 고민을 완전히
놓아도, 괜찮은 걸까요?”
“어떤 것?”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빌리고 있죠. 그에 대한 죄책감, 이후 몸을 돌려줄
방안…….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루민스는 조금 흐릿하게 웃었다.
“이건 아직 가설이지만, ‘세네핀 크롬웰’ 자체가 너를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붙잡아두는 너의 분신체라고 생각해.”
“……분신체?”
“신의 안배인지, 오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 어쩌면 이런 가설이 틀리고 너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어떤 인간의 삶을 빼앗은 것일지도 몰라.”
“…….”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기적으로 굴어야
할지 계속 죄책감을 가져야 할지, 그건 온전히 본인이 짊어질 문제라고 생각해. 기도해봤자 이 세계의
신조차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까.”
“……루민스.”
“네가 결정할 문제라는 걸 아는데도, 나는 역시, 나의 이기심으로 이 선택을 하겠어.”
그가 다시 이마에 손을 댄다. 곧 현실로
돌아가리라는 예감을 느끼고 나는 다급하게 루민스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요!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루민스, 있잖아요……!”
“―다시 없을 평안과 안식을, 태초와 영원에게.”
조용히 읊는 그의 스펠에 서서히 정신이 멀어져
갔다. 전하고 싶었다. 발버둥치듯, 그 말만이라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어떻게든
그 말을 뱉어냈다.
“나도 당신이, 죽지 않고, 행복……하기를……, ……니까 목숨과 바꾸…… 그런 슬픈……,”
다시 의식은 음영이 돌아온 세계에 삼켜졌다.
◇◇◇
“……아…….”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다. 불안한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뭔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고민했지? 루민스의 두 번째 사망 플래그가 다가올 거라 긴장했나?
괜찮아, 괜찮아. 이번에는 같이 있는 동료도 많고,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루민스를 옆에 두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민이가 이상하게 여길까 싶어 얼른 옆을 보고 잡담을 붙이려다가
나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루민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루, 민스?”
루민스가 내 쪽을 보려다 눈을 찡그렸다.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손가락으로 대강 물기를 훔쳤다.
“왜, 울었어요?”
“졸면서 꾼 꿈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별거 아냐.”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이전에
내가 다쳤을 때 루민이가 울었던 것이 떠올라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 울지 말아요. 루민스. 분명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런 걸 거예요. 그게, 비도 오고 오늘 행군도 늦어졌지만, 앞으로 별일 없을 거예요.”
“……세네핀.”
“저도 이후로는 걱정 끼치는 일 없도록 건강 관리 잘할 테니까요! 내일 또 힘내서 ‘공중낙원의 미로’까지 가는 길, 열심히 걸어가
봐요.”
모든 것이 서투른 위로였지만, 루민스는 그렇게 초라한 나의 말에 안심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 웃음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나도 열심히 할게.”
그 미소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
다음날은 흐렸지만 다행히 비가 내리지는 않아서 진행이 빨랐다. 중간에 마물들을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이 일행에게 덤비는 건 자살 시도니까.
덕분에 첫날과 다르게 순조롭게 이틀의 시간만을
더 소요하여, ‘공중낙원의 미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산악지대 절벽의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 유적은 황토색으로 빛이 바랜 듯한 외견을 지닌 큐브 모양이었다.
유적이지만 입구라고 할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아, 유고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렇게 뱉었다.
“저기, 제가 읽었던 기록에 의하면 왕실이 조사단을 보냈을 때, 마나를 벽에 쏘이면 입구가 열렸다는 것 같았어요.”
게임 덕분에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하자 벨키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얼른 가보자! 나, 이런 유적은 처음 와 봐서 두근거려!”
유적 특유의 마물이 숨어 있으니 그렇게 소풍
온 기분을 느낄 만한 장소는 아니지만, 만사에 긍정적인 벨키나의 자세는 본받을 만했다.
그런데 벨키나가 달려가 유적의 벽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루민스가 빠르게 스펠을 읊었다.
반투명한 연기가 공중에서 발생하더니 바람을 타고 ‘공중낙원의 미로’에 닿았다. 동시에 그 부분부터 유적에 구멍이 넓게 뚫리기
시작했다.
“뭐야, 루민스! 내가 하고 싶었는데!”
벨키나와 진의 비난을 무시하며 루민스는 손짓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까. 얼른 들어갔다
나오자.”
오늘따라 무척 과묵한, 그렇지만 날카로운, 루민스를 보며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루민스의 두 번째 사망
플래그를 피해야 했다.
◇◇◇
‘공중낙원의 미로’는 말 그대로 미로의 형태를 띠고 있는 던전이었다. ‘공중낙원’이라는 이름은 산악지대의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려나.
공중은 맞지만 어째서 낙원인지, 가장 처음 이 유적의 이름을 붙인 사람의 센스에 의문을 표하고 싶었다. 낙원이라기엔
터무니없는 난이도의 던전인데. 안에 들어가 보기는 한 걸까.
‘공중낙원의 미로’는 들어갈 때마다 형태가 바뀌는데 입구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현재 미로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미로를 중도 포기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바깥으로 다시 나가려면 미로의
중심부에 있는 귀환석까지 도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히도 까다로운 던전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조사대를 다섯 번 정도 파견하고
나서야 공략되었다고 알고 있어.”
루민스가 어두운 던전 안에서 시야를 밝히기
위해 빛을 피워내며 설명했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그 말인즉슨, 가장 처음
네 번에 걸쳐 찾아온 조사대는 이 미로 안에서 길을 잃고 귀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오싹했다.
“저, 저기. 움직이기 전에 저희요! 위험하고
잘 모르는 곳이니까, 분석부터 꼼꼼히 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그렇게 제안했다. 사망 플래그로 인한
루민스의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공중낙원의 미로’는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밟으면 갑자기 바닥이 뚫리는 타입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즉, 함정에 걸렸다간 이
유적이 걸치고 있는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조사를 철저히 하고 최대한 조심해서 공략하면,
루민스도 공중낙원의 미로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 분기에 따라 그 사전 조사가 부족했다고
판정되면 루민스는 함정을 밟고 실족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미로에 들어왔던 대부분의
루트에서 루민스의 실족사를 보아야 했고.
“그래, 그러자.”
루민스가 내 제안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유적이기도 하고, 어차피
<별을 향한 초대>가 이 유적 어디로 떨어졌는지를 확인하려면 마나 흔적을 살펴야 하니까.”
우리 루민이, 이 누나의 마음을 알아주다니
정말 고맙구나! 루민스도 허술하게 조사를 넘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정말 다행이야.
벨키나도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근처 마나 흔적 수집해올게!” 하고 의욕을 보였다. 나는 두 명을 보조하기로 하고, 진과 유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모아 온 마나 흔적을 다시 분석한 루민스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몇 가지 스펠을 심은 다음
일어났다.
“고전적인 몇 가지 함정이 있어. 밟으면
바닥이 사라진다거나 벽이 밀리면서 구조가 바뀐다거나 장애물이 튀어나오는 종류의 것들이야. 패턴을
읽어서 그런 함정이 근처에 있으면 감지하도록 스펠을 걸었으니까, 주의하면 괜찮을 것 같아.”
짧은 시간에 사후 처리까지 마친 듬직한 루민이가 우리에게 그렇게 일러 주었다. 미혹의 골짜기 때도 그랬지만, 루민스가 본 실력을
다 하느냐 차이로 이렇게까지 던전 공략 난이도 달라지는 건 대단했다.
“<별을 향한 초대>는 어디 있지?”
“자연 마나의 흐름이 너무 격렬해서 정확한
위치까지는 파악해내기 어려웠습니다, 유고 님.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고, 중앙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계속 탐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뭐, 됐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니. 다들 출발하지.”
◇◇◇
‘공중낙원의 미로’는 함정만 까다롭지 마물은 그다지 많지 않은 던전이었기에 그 이후는 순탄대로였다.
복잡한 미로를 뚫는 것이 꽤나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지만, 이것도 루민스의 추적 스펠로 쉽게 탐지되었다. 이렇게 치트키를 쓴 기분이 될 줄이야.
하지만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항상,
무언가 생각지 못한 위기가 있었는데.
일행들과 함께 미로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루민스가 수시로 내 쪽을 살피고 있어서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지만, 해소되지 않는 긴장감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는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미로를 돌아다녔을까, 우리는
느낌이 미묘한 공간에 도달했다. 게임으로 따지면 뭔가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듯한 배경이라고 해야 할까.
왠지 원래는 여기쯤에서 함정이 있었을 것만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아니, 나, 진짜로 붕 떴잖아!?
“세네핀!”
멋대로 공중 부양한 몸을 낮추려고 본능적으로
손발을 파닥이자 내 의지와 다르게 몸이 오히려 둥실 떠올랐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발음으로 스펠을 외운 후
루민스가 그 마법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벨키나! 내가 걸어둔 추적 스펠은 유효하니까
흩어지더라도 그걸 따라 귀환석까지 가!”
“으, 응. 루민스는!?”
“난 알아서 갈 수 있어!”
소리치며 루민스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루민스의 몸이 그 공간에서 모습을 감췄다.
◇◇◇
“……으응.”
무언가로 온몸을 얻어맞은 듯한 피로감과 함께
서서히 눈을 떴다. 바로 보이는 건 어두운 황토색의 실내 천장. ‘공중낙원의 미로’ 내부였다.
아, 루민스! 루민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초조한 마음에 허둥지둥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루민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내 위치로부터 5헤르, 그러니까 5미터쯤
떨어진 곳에 그가 쓰러져 있었다. 다가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너머에.
낭떠러지의 폭은 3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데다 마치 개울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형상 빙 둘러서 건너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도움닫기를 해도 3미터가 넘는 낭떠러지를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다.
“루민스, 루민스!”
크게 외쳐 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서 보기에는 루민스의 주변에 피
같은 건 보이지 않지만, 혹시 그가 추락했던 거라면? 머리를 잘못 부딪쳤다면?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불길한 상상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용
가능한 스펠을 머릿속에서 헤아려보았다. 그렇지만 내가 지닌 스펠로는 공중을 날거나 낭떠러지 사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부족한 마법 실력이 뼈저리게 원망스러웠다.
“안 돼, 루민아…….”
어느샌가 축축하게 뺨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 박자 늦은 타이밍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마주 쥐었다. 으스러질
듯 이를 악물었다.
“제발, 신이시여, 정말로 나를 이 세계에 불러온 신이, 당신이 존재한다면……”
처음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들은 그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신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목소리는 내 소원을 접수했다고 했다. 분명히 그래놓고, 이래서는 안 되잖아.
“……루민이를 살려내서, 행복하게 해달라는
내 소원을 이루어달라고요!”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텅 빈 유적 안에 메아리쳤다.
나는 줄줄 흐르던 눈물을 참지 못하고 결국
엉엉 울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마를 땅에 댄 채 볼썽사납게 오열했다.
그 순간, 이변이 느껴졌다. 당장 눈에 띄는
무언가가 바뀐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느껴졌다. 본능이 알려주고 있다고 해도 좋았고, 예감이 들었다고 해도 좋았다.
무언가가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흐려진 시야에서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시야를 방해하는 눈물을 훔쳐냈다.
“아…….”
새카만 덩어리가 빛을 뿜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마치 깃털과도 같이
가볍게 떨어지고 있는 그것은,
정육면체의 여섯 면에 새겨진, 하얀색의 눈금.
―게임상에서 본 적이 있기에 나는 확신했다.
이 기묘한 주사위가 바로 <별을 향한
초대>였다.
떨어져 내려오는 주사위를 향해 나도 모르게 양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견뎌낼 수 있을까?】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전파를 잘못 잡은 라디오처럼, 기묘한 노이즈가 직접 머릿속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기대하고 있어. 네가 나에게 도달할
그 순간을 즐겁게 기다……】
말소리는 끝맺어지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눈부신 빛이 퍼져 나갔다.
“세네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낭떠러지
건너편에서 막 몸을 일으킨 루민스가 필사적인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빛 때문에 사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그 얼굴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내 손 위로
<별을 향한 초대>가 사뿐히 내려왔다.
“……윽!”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해일이 밀려오듯. 땅거미가 내려오듯.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괜찮아? 왜 갑자기 멍해졌어?”
“어?”
눈을 떴다. 화려한 샹들리에, 우아한 삼박자 왈츠. 사람들의 담소.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알아보자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무도회장이었다.
“배고파서 그래? 오믈렛 갖다 줄까?”
‘나’에게 말을 거는 여성을 돌아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금발의 곱슬머리가 아름다운, 나의 친구 벨키나였다.
그런데 그 벨키나가 싹둑 자른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놀라서 왜 머리를 잘랐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나’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됐어, 벨키나 몫까지 빼앗아 먹을 수 없지.”
“사람을 무슨 먹보처럼 그런다! 흥이야.”
“그건 먹보가 아니라고 부정을 해줘…….”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이건 꿈이다.
‘나’라는 사람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내가 숨어들어 관찰을 하는, 그런 꿈인 것이다.
꿈이라서일까, 나는 ‘나’의 감정에 동화해
있었다. ‘내’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손에 잡히는 것처럼 와 닿았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금 실망한 다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루민스는?”
“걔야 뭐, 이런 자리 거북해하니까 구석에 숨었지. 가서 볼래? 테라스에 가 있어.”
벨키나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벨키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테라스로 나갔다.
조금 조급한 마음으로, ‘나’는 루민스를 찾았다. 테라스 가장 구석에 있는 인영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민스!”
―다듬지 않아 덥수룩한 보랏빛 머리, 헐렁하고
촌스러운 옷,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두꺼운 안경, 고양이처럼 등이 굽어 있어 자신감 없어 보이는
자세.
내가 알고 있는 루민스의 어떤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는 그가, 내가 알고 있는 루민스의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나 님?”
두꺼운 안경 너머로도 그가 황금빛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루민스의 얼굴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왜 이런 데서 이러고 있어. 밤에 추운데.”
“아예 회장을 나가려고 했더니 왕세자 저하가
붙잡으셨거든요. 그래서 사람 없는 다른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로……. 진 님도 사람 싫다고
밖에 나갔는데, 왜 저만 붙잡으신 건지 모르겠어요.”
우물쭈물하며 루민스가 조리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루민스를 구석에서 끌어내는 대신 물었다.
“왜 그렇게 사람 없는 곳을 좋아해?”
“그야, 저 같은 게 저렇게 화려한 곳에
껴 있어 봤자 방해만 되니까요. 남들 눈에 안 거슬리는 곳에 있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야 하나…….”
루민스의 말에 ‘나’도, 또한 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렇게 구석에 숨어 남의 시선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반짝이고 눈부신 루민스에게
이런 초라한 곳은 어울리지 않았다.
“루민이 말이야.”
“네.”
“실은 엄청나게 잘생겼단 말이야.”
“……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책 읽을 때 말고 평소에도 안경 쓸 정도로
눈이 나쁜 건 아니잖아? 왜 항상 쓰고 있어?”
“그게, 정신이 안정된다고 할까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그가
다음에 할 말을 어쩐지 예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안경에 시선이 한 번
차단되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네? 아니, 아니요! 그건 아니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루민스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것을 무척 귀엽다고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나 역시 그런 루민스의 모습이 신선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에잇!”
‘나’는 안경다리를 잡고 그의 안경을 벗겨
냈다. 아직 빨개져 있는 루민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칼을 다듬지 않아 다소 앞머리가 무거워
보였으나 안경을 벗은 그는, 내가 무엇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나의 루민이였다.
“거봐, 잘생겼잖아. 진이나 유고나 칼트보다도 잘생겼다고.”
“세나 님 취향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이상하다고 쳐. 루민이가 안경 벗은
게 내 취향인 것으로 치자.”
“그만 놀리세요…….”
얼굴을 더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루민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끄러워요…….
이 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름을 줄여 부르지 않아요, 세나 님.”
“왜, 귀엽잖아. 우리 세계에서는 남자 이름
끝에 ‘민’ 자를 자주 붙이거든. 친근감 솟는단 말이야.”
‘나’는 웃으면서 루민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겁이 많은 고양이처럼 흠칫거리면서도 루민스는 그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얼굴을 내 손에 맡겨두었다.
“자, 그럼 안경 벗은 채로 연회장으로 돌아가자고.
우리 루민이 얼굴 보여줘야지!”
“오늘 내 첫 춤은 루민이랑 추고 싶은데?
부탁하면 안 돼?”
“……으.”
‘내’가 손을 내밀고, 루민스가 주저했다.
그러나 곧, 그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달빛보다도 소박하고 예쁜 미소로 답했다.
“세나 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그림자도 무엇도 없는 하얀 공간.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루민스!”
이 공간으로 두 번 나를 데려왔던 사람의
이름을 불렀으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루민스 없이 나 혼자만 여기에 있는 걸까? 루민스가 이동시켜 준 것이 아니라면,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을까. 어쩌면
<별을 향한 초대>가 내뿜었던 빛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돌아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공간에 들어와서인지 여기에서 루민스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세계의 적, 정신 보호, 루민스의 알 수 없는 언동, 모든 것이 하나하나.
“루민스…….”
거기에, <별을 향한 초대>를
건드렸을 때 꿨던 꿈의 기억까지 뒤섞여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세나. 김세나.”
입밖으로 내자 자연스럽게 수긍되었다. 나의
이름.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꿈속에서의 내 이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꿈속에서 본 어떤 것도 내가 겪고 있는 현재와 같지 않았다.
절로 의문이 솟았다. 왜 벨키나와 루민스의
외모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른지. 또한, 어떻게 ‘나’는 별세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터놓고 있었는지.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 그렇지만 루민스나 벨키나는 외견상 지금의 나이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회귀, 평행 세계.”
판타지 소설의 단골 소재들을 입밖에 담아 보지만, 무엇하나 확증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개꿈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잊고 싶지 않아…….”
이 하얀 공간에 박아두었던 기억도 포함하여, 잊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내 의지로, 이 복잡한 내용의 실타래를
풀고 싶었다.
지금 이 공간에 루민스가 없는 상태로 들어온
것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잊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고 싶었다.
실은 망각해버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남의 몸을 빼앗고 있다는 죄책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 대한 괴로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
모르는 채 다정하고 행복한 세계를 그저 걸어
나가며 게임의 엔딩을 맞이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갓 자신의 이름을 떠올린, 세계의 적이자,
별세계의 인간으로서.
서서히 하얀 공간에 음영이 스며들었다. 깨어난다는
것을 자각했다.
루민스의 그 모습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야.
◇◇◇
“…….”
일어나보니 다시 <별을 향한 초대>
옆이었다. 혹시나 해서 <별을 향한 초대>를 다시 조심스럽게 건드려 보았으나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 루민스는!”
<별을 향한 초대>를 받아들던
순간에 루민스가 나를 부르던 것이 떠올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근처에 그가 쓰러져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다행히 루민스는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낭떠러지 너머에 있던 루민스가 어떻게
내 쪽에 와 있는 걸까? <별을 향한 초대>가 내 손에 떨어지는 순간 루민스가 뭔가 마법을
썼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걸로 이동했을지도…….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루민스.”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실체가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이곳은 게임의 세계가 아니고, 나의 현실이었다. 내가 헤쳐나가야 할 세계였다.
이 세계에서 이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왜 내 기억을 지우고 마음대로
희생하려 했느냐고 루민이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리고 꿈속에서의 내 이름, ‘김세나’를 아느냐고도.
하지만 그랬다간 그는 다시 그 미지의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 내 기억을 지워버릴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루민스의 모습들도 잊어버리겠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후로도 평소처럼 ‘기억이
봉인된 세네핀’으로 행동해야 했다. 루민스가 내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것은 루민스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세계의
적’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세계’가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죽는 건 나도 사양이니까.
<별을 향한 초대>가 내게 기억을
돌려준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나머지 두 개의 ‘소원의 조각’도 뭔가 나에게 힌트를 줄지 모른다. 다른 ‘소원의 조각’도 적극적으로 모아야겠어.
‘소원의 조각’을 세 개 다 모으면 신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허황된 이야기도 확인해보자. 뭐가 되었든 실마리가 필요한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 루민스의 사망 플래그도 여전히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건,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나를 지키겠다고 했던 루민스의 선언이었다. ‘세계의 적’이 되어버린 나 때문에
그가 어떤 위험을 무릅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루민스의 희생 따위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세계의 위기 때문에 소환된 건지 뭔지, 지금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설령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내가 필요하다고
해도.
내가 세계를 위기에서 구하는 건 루민스를 구한 다음 일이다.
루민스가 목숨을 잃어버리면 세계를 구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으응.”
루민스가 깨어나려는지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뗀 다음 두 손을 꼭 쥐었다.
신의 목소리 따위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대단히 큰 힘도 없었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구해야 할 루민스조차 상황에 따라서는 내 기억을
빼앗아 가는 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걸어가고, 걸어가고, 걸어갈
것이다.
“……아, 세네핀!”
루민스가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어디 이상한 데는 없고?”
걱정스레 물어오는 루민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굳어지는 얼굴에 어떻게든 웃음을 붙이며 나는 평소의 세네핀 크롬웰이 되려 노력했다. 지금부터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네핀 크롬웰이 되어야 했다. 루민스가 대신 목숨을 걸었던 사실은 잊어버리고 김세나라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네핀 크롬웰이.
“네, 네에. 저도 방금 일어났어요. 루민스야말로
괜찮아요? 방금은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한 세네핀의 반응을
연기하면서, 나는 루민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별을 향한 초대>를 받아들기 직전의
순간, 루민스는 빛에 감싸인 내가 위험에 처한 줄 알고 낭떠러지를 건너왔다가 폭발하는 빛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 빛의 정체를 두고 유적의 함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는 루민스에게, 나는 모르는 척 대꾸하며 내가 발견한 <별을 향한 초대>를 가리켜 보였다. <별을 향한 초대>의 외형이 검정 주사위 모양이라는 자료 설명을 보았다는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그리곤
<별을 향한 초대>에 루민스가 확인차 마나 분석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마나 분석으로 저게 ‘소원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루민스는 나를 데리고 미로의 귀환석에 먼저 도착해 있을 일행들에게로 합류하겠지. 그 후, 확보한 <별을 향한 초대>를 가지고 수도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또, 그다음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마나 형태의 분석을 끝낸 루민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세네핀, <별을 향한 초대>가 맞는 것 같아. 다른 애들이 기다릴 테니까 우리도 얼른 귀환석이 있는 곳으로 합류하자.”
“네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항상 죄송해요.”
처음과 무엇하나 바뀐 것은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나의 최애 캐릭터 루민스 할데르프를 위해 살아나갈 것이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생각할 것 없어. 세네핀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나는 무척 기운이 나니까.”
“……나도 그래요, 루민스.”
“응?”
“아뇨. 벨키나가 폭발할지 모르니 얼른 돌아가요!”
……아니, 그만 자신을 속이도록 하자.
나는 이 세계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
루민스 할데르프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Ⅰ. 다른 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아란다스트 대륙은 크게 인간의 영역인 페이넌스
왕국과 마정령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마정령들은 자신의 영역을 ‘신성한 대지’라고 부르고 있으나,
인간들은 모멸감을 담아 ‘추악한 대지’라고 불렀다.
마정령의 영역 가장 중심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인간들은 마정령왕이라고 부르는 모든 마정령의 우두머리인 정령왕이 머무는 거처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짙은 남색 피부와 머리칼을 가진 여성체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마정령의 2배 정도 되는 체구, 단단하고 신비로운 외견이 그녀가 보통의 마정령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들이 ‘소원의 조각’을 회수했다는 것이
사실이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회수 후 다시 봉인을 강화하러 그것들의 수도로 돌아갔습니다.”
[흐음…….]
“어쩔까요? 태초의 어머니시여.”
정령왕은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남색 눈을
깜빡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우리가 움직였으면 다음은 인간의 몫이겠지.
분명히 그들은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서 방해되는 그들을 먼저 제거하고, 그다음 인간 영역의 ‘소원의 조각’을 회수하면 그만일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만……. 인간들은 본인 영역의
‘소원의 조각’만 보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후후…….]
긴 손톱으로 벽에 검은 자국을 그려내며 그녀가 답했다.
[알페이넌스가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갔으니,
분명히 우리를 치러 다시 올 것이야.]
“높으신 정령왕의 뜻을 몰라보고 망언을 뱉어 죄송합니다.”
[됐다. 신성한 대지의 방벽을 단단히 하라
일러라.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그 공간에서 수하 마정령들이 모두 모습을
감춘 후, 그녀는 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에서 두둥실 투박한 술잔 모양을 한 유물이
떠올랐다.
[분명히 알페이넌스는 <엿보는 자의
신음>을 원할 테니까 말이야.]
◆◆◆
세네핀 크롬웰은 긴장하고 있었다.
<별을 향한 초대>를 회수한 것으로 임무가 종료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정화의 힘’을 이용해 본인이 직접 그것을 봉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이거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왕세자 저하.”
“레이디 세네핀은 별걱정을 다하는군. 자네의
힘이라면 문제없을 것이네.”
칼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세네핀으로서는 작은 불안요소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의식에 실패하여 ‘소원의
조각’을 봉인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만약 마정령에게 ‘소원의 조각’을 빼앗기게 된다면? 안 좋은
방향으로 사고가 자꾸자꾸 튀어갔다.
“세네핀, 내가 같이 손잡아줄까?”
“어머나, 벨키나. 마음만으로 고마워요.
그래도 제가 혼자서 해내야 할 테니까…….”
세네핀은 결심하고 제단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처음 지하 동굴에 들어왔을 때 주인이 없었던
제단에는 이제 <별을 향한 초대>가 돌아와 있다. 평범한 검은색 주사위처럼 보이는 그
신의 유물은 얌전히 제단에 놓여 있었다.
세네핀은 제단 앞으로 다가가 양손을 내밀고
왕실에 전해지는 봉인의 스펠을 천천히 읊었다.
“잠드는 시련이여, 온화한 한숨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정화의 힘이 봉인의 주문에 반응하였는지 세네핀의
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빛은 <별을 향한 초대>가 놓인 제단을 감싸듯 퍼져 나갔다.
정상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덕분에 세네핀은
무척 안심한 얼굴로 마지막 구절까지 스펠을 끝냈다. 그와 동시에 은빛으로 은은하게 <별을 향한 초대>의 주변을 감싸던 띠 같은 것이 사라지고 제단이 통째로 투명해졌다.
“엄살 피우더니 잘만 하는군.”
뒤에서 쳐다보던 유고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핀잔처럼 들리지만 사실 칭찬이었다. 세네핀은 떨리던 손을 얼버무리듯 저으며 웃었다.
“유고 왕자님도 처음 검을 잡을 때는 손이
떨리지 않았나요? 검술의 천재라서 안 그랬나요?”
“하하, 우제라면 처음으로 검술 배우러 갈 때 가기 싫다면서 내 허리에 매달렸지.”
“형님!”
유고의 훈훈한 과거를 멋대로 까발리던 칼트는
세네핀에게 예를 표했다.
“레이디 세네핀에게 감사하네. 이제 봉인이 강력해졌으니, 당분간 위험은 사라졌겠지.”
“황송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하.”
“어떤가, 레이디 세네핀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나와 함께…….”
칼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벨키나가
세네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왔으니 세네핀은 쉬어야
하거든요, 저하!”
그동안은 조용하던 루민스도 반대편에서 압박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저하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세네핀도 원치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세네핀?”
루민스가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자 잠깐 당황하던 세네핀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렇게 됐으니 저하.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그래도 오늘 자네들을 초대한 석찬에는 꼭 참석해 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겠네. 우제와 함께 즐겁게 기다리도록
하지.”
“형님, 저도 이만…….”
그러나 칼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유고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우제가 없는 동안 할 일이 무척 쌓였지.
우리 착한 유고는 오랜만에 만난 형의 부탁 정도는 들어주는 착한 동생일 거라 나는 의심하지 않는단다.”
“……형님, 하오나.”
“뭐, 우리 유고가 정 싫다면, 나는 레이디들과
루민스 공자에게 우제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라도…….”
“가겠습니다.”
형제의 먹이사슬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광경을
보며 세네핀은 안쓰러운 눈으로 유고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럼 저녁에 보겠네.”
최후의 승리자 칼트는 손을 흔들며 동생을 다정하게 연행해갔다.
◆◆◆
원래 일행이 숙소로 쓰던 왕궁 내의 손님용
별채는 여전히 깨끗하게 청소된 채 그들을 맞이했다.
봉인 의식이 끝날 때까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이 반색하며 세네핀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렇게 모두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는 차에 벨키나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갑자기 지목받은 세네핀은 물론이고, 루민스도
아무 언질을 못 들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둘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벨키나가 세네핀을
루민스 쪽으로 밀었다.
“베, 벨키나? 쇼핑이라면 다 같이 가도
되지 않을까요?”
“있잖아, 나. 저번에 세네핀이 우리 선물
사주려고 나갔었다는 소리 들었단 말이야.”
벨키나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세네핀은 알아차렸다. 수도 마정령 침투 사건 때문에 흐지부지 되었던 일을 꺼내는
모양이었다.
“마정령 놈들 때문에 세네핀한테 받을 수
있었던 내 선물이 날아간 게 너무 분해……. 진도 그렇지?”
“음, 벨키나의 말에 동의한다.”
세네핀의 어깨에서 벨키나의 머리 위로 위치를
옮겨가며 진도 그 말을 긍정했다.
“그, 그런 거라면 굳이 루민스와 같이 갈 필요 없이, 제가 혼자서라도…….”
“어허. 저번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누가
혼자 보낼 줄 알고? 그러니까 루민스가 세네핀 경호원 역할이야.”
“그럼, 저랑 루민스만이 아니라 벨키나하고
진도 같이 가면 취향에 더 맞는 선물을…….”
루민스와 단둘이 된다는 사실에 세네핀은 무척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벨키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선물인지 모르는데 두근거리면서
상자를 여는 감각을 즐기고 싶다구!”
“나도 동의한다. 선물이 무엇이든 세네핀
본인이 직접 고민하고 우리를 생각해서 골랐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진과 벨키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세네핀으로서도
거절할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기세에 눌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잠시 벨키나와 진을 번갈아 쳐다보던 루민스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꾸민다니 남 듣기 안 좋게. 말 그대로라니까? 세네핀이랑 같이 외출하기 싫다 이거야?”
“당연히 그건 아니지. 그런데 벨키나 너…….”
“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다녀오기나
해.”
“죄, 죄송해요. 루민스. 저는 정말 혼자서
나가도 괜찮아요.”
“아니, 그건 애초에 선택지에 포함되지도
않아. ……후우.”
“너 갔다 와서 이야기 좀 하자.”
“난 할 말 없네요. 다녀오기나 해.”
결국 잠시 후, 떨떠름해 보이는 루민스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의 세네핀이 별채를 나섰다.
둘을 눈으로만 배웅하고 나서 턱을 괴고 있던
벨키나가 중얼거렸다.
“하, 정말 보고 있기 답답해서.”
벨키나의 머리 위에서 옆으로 내려온 진이 재미있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그대의 마음이 변한 게 신기하긴
하군.”
“그야 영원불멸 세네핀은 내 거지만 말이야!
그거랑 별개로 세네핀 요즘 분위기가 바뀌었잖아?”
“그래, 그랬지. 아마도 루민스에 대한 애정을
자각한 것인가.”
“분하지만 그렇단 말이야~. 그런데 루민스는
오히려 전보다 사양하면서 거리를 두질 않나. 분위기 좋으면 진도나 팍팍 나갈 것이지!”
“그대는 성격이 급하지. 다만, 그 둘도
나름대로 고뇌하는 것이 있지 않겠나.”
벨키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진은 달래는 듯 꼬리로 툭툭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오래 살아온 이의 통찰력이라고 해도 좋다만.
무언가 둘 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나름의 고민이나 깊이 깔린 사연이 있으리라 본다.”
“그건 그렇겠지. 특히 루민스 녀석은 안에
뭘 담고 있는지 끝이 안 보이는 놈이기도 하고.”
“그런 걸 알면서도 친구로는 잘 지내고 있군?”
“난 기본적으로 직감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이야.”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접대용 쿠키를 집어 올리며
벨키나가 말했다.
“가장 처음 고아원으로 알프 씨가 날 스카우트하러
왔을 때도 그랬어. 직감적으로 이 사람을 따라가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마법
연구원에 들어간 건 나한테 좋은 일이었잖아?”
“음.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대와 만나지 못했겠지.”
“루민스도 마찬가지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직감적으로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세네핀을 보호하거나 지킨다는 점에서도 그래. 쟤 이상
세네핀의 안전에 집착하는 사람은 없을걸? 유고는 들으면 화낼 것 같지만.”
“과연, 그런 거군.”
다리를 쭉 뻗으며 벨키나는 옆에 있는 진을
품에 안고 쿠키를 와그작 씹었다.
“둘이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뭐가 되었든 행복한 결말이 좋아.”
“나도 그러하다. 그러니 벨키나의 방침을
지지하도록 하지.”
◆◆◆
“……저기 루민스. 생각해보니 진과 벨키나뿐만
아니라 루민스 선물도 사야 할 것 같은데요!”
마차 없이 도보로 걸어가던 중 새삼스럽게 세네핀이 말을 꺼냈다.
“응, 세네핀이 준다면 나도 받고 싶긴 해.”
“뭔가 갖고 싶은 것 있으세요?”
“으음.”
이제 여름에 접어든 수도 홀르나의 푸른 거리가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였다. 수수한 색상의 리넨 천 드레스를 입은 세네핀을 보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벨키나가 말했던, 선물이 무엇인지 두근거리면서
상자를 여는 재미를 나는 못 느끼게 되는 거네.”
“엇! 죄, 죄송해요.”
“아냐. 그럼, 발상을 바꿔서 말이야. 물건
대신 세네핀이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앗, 네. 뭐든지요!”
반색하며 세네핀이 그렇게 말하자 루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덥석 뭐든지라고 말하지는 마, 세네핀.
내가 나쁜 마음 먹으면 어쩌려고.”
“어머, 그 이야기를 하자면 루민스야말로 전에 제 부탁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하셨잖아요.”
“그야 뭐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저야말로 루민스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
“……나쁜 마음 먹고 싶어지니까 그러지 마.”
“그야 ‘갑자기 저 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와라’ 그런 건 어렵겠지만요. 그래도 루민스 부탁이면 고려는 해볼게요.”
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 어떻게든
심란한 심경을 정리한 것인지 루민스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 부탁. 오늘 내가 어떤 걸 사자고 하든 세네핀이 무조건 따라줄 것.”
세네핀이 눈을 크게 뜬 채 깜빡였다.
“그게 부탁의 축에 드나요? 그 정도야 부탁
안 하셔도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는데요.”
“글쎄, 어떠려나. 난 분명히 세네핀이 안
들어줄 거라 생각해.”
의미심장한 그 말투에, 겨우 쇼핑에 무슨
그리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것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튼, 들어줄 거야?”
“겨우 그런 거로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요.”
“좋아, 무르기 없기야?”
푸른 벽돌의 이국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살며시 웃는 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세네핀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보도블록이 깔린 길은 중앙 광장으로
이어졌다. 중앙 광장 가장자리에는 푸른 날개의 도시 홀르나가 자랑하는 역사 깊은 백화점이 푸른색
돌을 쌓아 올려 장식한 고급스러운 외견을 뽐냈다.
마침 휴일 낮인 탓인지, 중앙 광장과 백화점
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가족, 연인, 친구……. 그 인파에 섞인 두 사람도, 마치
연인처럼 보였다.
“자, 그럼. 여성복 가게부터 가볼까.”
“네?”
루민스의 쇼핑에 함께하는데 왜 여성복 가게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던 세네핀이 의문을 표했다. 루민스는 빙긋빙긋 웃으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세네핀의 옷이랑 장신구랑 구두를
잔뜩 살 거거든.”
“네에?”
기겁하는 그녀를 보며 루민스는 뻔뻔하리만치
반짝반짝 웃는 얼굴을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내 부탁. 무르기 없다고 했지?”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도 저렇지만도 안돼. 얼른 가자.”
필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팽팽 돌고
있어 포화 상태가 틀림없어 보이는 세네핀이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한참 무언가 생각하던 그녀가 겨우
질문했다.
“……저기, 왜 이게 루민스를 위한 선물이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그는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며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세네핀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나한테
즐거운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
일방적으로 자기한테만 좋은 일인데 괜히 루민스의
돈을 쓰게 하는 것 아닌가 세네핀은 처음에 생각했으나 자신이 많은 것을 얕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곧
실감했다.
결론적으로 장시간 쇼핑은, 특히 옷을 반복해서
갈아입는 쇼핑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세네핀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벨키나와
함께 진을 데리고 가서 잔뜩 옷을 갈아입히며 쇼핑했을 때 진이 막판에 앓는 소리를 잠깐 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은 무척 인내심이 강한 것이었다.
여름에 딱 맞는 연하늘색의 청순한 드레스와
오팔 장식, 거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세팅을 받아 반짝반짝한 모습과 다르게 지친 얼굴로 세네핀은
의자에 기댔다.
“……뭔가, 미안하네. 나 혼자 신나서 너무
열중했나 봐.”
세네핀을 장시간 인형 놀이 상태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무척 미안한 얼굴로 아이스 커피가 든 유리잔을 들었다. 차게 우린 홍차를 마시며 세네핀은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냥 체력의 문제로 지친 것뿐이니까…….
오늘 루민스가 사준 것들, 모두 무척 예뻤어요. 죄송하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나 좋자고 한 건데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민망해.”
그제야 안심한 듯 루민스의 눈이 스윽 미소를
그리며 가늘어졌다. 더워진 바깥 날씨와 대조되게 냉기 마법이 들어 서늘한 카페에서 세네핀은 자세를
바로 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음, 역시 아이스 홍차는 마법연 부속 식당에서
나오는 게 제일이네요.”
“마법연은 정말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이상할
정도로 퀄리티가 높았지.”
“후후, 벨키나가 항상 식사 시간을 고대했죠.”
조금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세네핀이 홍차의
붉은빛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신의 그릇 회수’도 끝났으니 마법연으로
돌아가겠죠?”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게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척 예전
일 같네요.”
“……그러게.”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눈으로 루민스가 창밖을
보았다.
“그때, 결국 환희의 숲에서 피크닉 못했잖아요.
진을 주워 오느라고.”
“응.”
“그러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다 같이 피크닉 가요. 철이 지났으니 히아신스는 없겠지만요.”
창으로 두었던 시선을 다시 세네핀 쪽에 고정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를 즐겁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창밖으로 보이는 중앙 광장은 초여름 특유의
햇살이 맑게 그 풍경을 비춰내고 있었다.
미래를 향한 기대의 말은, 진심을 담지 않아 아무런 무게를 지니지 못하고 무더운 풍경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대로 그저 평화만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낙관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최악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Ⅱ. 신이 유희하는 것
“낮에는 무척 맑았는데, 그랬던 날씨가 무색하게
비가 엄청나군.”
조금씩 젖어서 만찬장에 도착한 일행을 보며
마중을 나온 칼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비가 심해서 취소할까도 했네만, 그래도
모처럼 이것저것 준비해준 사람들도 있으니. 자네들이 너그러이 양해하게나.”
“괜찮아요, 왕세자 저하! 세네핀이 선물해준 브로치는 빗물 하나 튀기지 않도록 사수했으니까요!”
“레이디 벨키나가 그 브로치를 무척 자랑하고
싶었다는 마음만은 잘 전해지는군.”
“저하께서 불러주신 이 영광된 자리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저희 일행이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모두 저하의 은공에 감사할
일이지요.”
“루민스 공자는 얼굴에 살기를 지우고 말해야
진정성이 전해질 것 같네. 레이디 세네핀, 불편은 없었는가?”
셋 중에서 가장 초췌해 보이는 세네핀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 실수로 구를 뻔한 바람에 비를 더
맞은 것뿐이랍니다. 바로 루민스가 붙잡아 줬고, 보온 마법도 걸어줘서 별일은 없습니다, 저하.”
칼트의 옆에서 무척 못마땅한 얼굴을 하던 유고가 시녀들의 시중이 끝나자마자 세네핀의 팔을 잡고 끌고 가더니 연회장 식탁 가운데에
앉혔다. 일반적으로 무척 무례한 행동이지만, 이 자리에서 왕세자를 제외하면 그에게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지적이 가능한 사람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 장면을 즐기는 듯 자신의 자리에 앉을 뿐이다.
“아, 맞다. 유고 왕자님. 왕자님께도 이번 여행에 신세를 많이 져서 작게 선물을 사왔답니다. 부디 받아주시면 기쁠 거예요.”
그가 세네핀을 앉히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렇게 그녀는 유고를 붙잡았다.
“뭐……, 굳이, 이딴 걸…….”
붉어진 얼굴로 점점 짧아지는 말을 뱉는 유고를
약 1명을 빼고 모두 훈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 약 1명이 분위기를 싹둑 잘랐다.
“세네핀이 정성을 들여서 고른 물건이 그딴
거로 느껴지신다면, 받지 말고 돌려주시죠.”
“루, 루민스! 왕자님께 실례되는 말씀 하시면
안 되죠……. 아하하, 죄송해요, 유고 왕자님. 말씀대로 별건 아니니까 편하게 버리셔도 돼요.”
“안 그런다.”
유고는 세네핀에게 받은 선물꾸러미를 소중하게
품 안에 간직했다.
그 광경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칼트가 기회를 틈타 끼어들었다.
“나에게는 선물 없는가? 레이디 세네핀.”
“네? 음……. 제가 딱히 저하하고 같이
여행을 다녀온 건 아니라서요?”
솔직한 대답에 칼트가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의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군……. 자네들 여행의 무사 귀환을
빌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나의 보잘것없는 마음 따위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나.”
“저하의 은혜에는 그거 아니더라도 항상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나라에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으로 보답할게요!”
“레이디 세네핀은 정말 나에게 차갑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라터체니령에 있는 론허
특산물 메밀 빵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봐요.”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답변을 하며 세네핀이 멋쩍은 듯 웃었다.
◆◆◆
그렇게 시작된 석찬은 왕실 주최인 것치고는
소박하고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소박하고 조촐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에 한정된 것으로, 식탁으로 운반되는 메뉴들은 모두 왕실의 체면에 걸맞게 으리으리한 음식들이었다.
미리 맛이 들도록 염장을 해두어야 하기 때문에
조리하는 시간이 총 2주 정도 걸리는 숲도마뱀 구이를 비롯하여 왕실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묘기를
부린 음식들이 식탁을 장식했다. 그 고생을 생각하니 준비해준 사람들을 고려해서 석찬 일정을 미루지 않았다는 왕세자의 말이 다들 이해가 갈 정도였다.
메인 코스까지 음식들이 마무리되고 슬슬 디저트
타임으로 들어갈 무렵, 칼트가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다.
“자네들은 수도에 더 머무를 생각 없는가?”
벨키나와 세네핀, 루민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둘의 시선이 세네핀에게 꽂힌다는 것에 가까웠다.
“저어, 마법 연구원은 평화롭고 좋은 직장이라서요…….
크게 문제없다면 돌아가서 다시 조용히 고문서 해석이나 할까 합니다.”
세네핀의 말을 듣고 늦을세라 벨키나도 손을
들었다.
“저도 마법연 돌아가서 공부 배우면서 저에게
맞는 적성 찾을래요!”
“저도 연구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셋의 대답을 듣고 칼트는 쓴웃음을 보였다.
“나라의 유수한 재원들을 그대로 시골로 보내는
건 나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이네만. 물론 개인의 의사를 강요할 수는 없으나, 다시 생각해줄 순 없는가?
우제도 무척 섭섭할 테고. 그렇지, 유고?”
“저야 수련을 위해 떠도는 몸이니, 어디라
한들.”
“내가 가출하면 차기 왕위 계승자는 우제가 될 테니 너무 그렇게 마음 놓지 말도록.”
“농담이시죠?”
“하하. 우제도 참.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어도
진담이었던 여러 경우를 잊은 모양이군?”
“……농담이라고 해주세요.”
일방적으로 말려들고 있는 유고를 모두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연회장 밖에서 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세자도 참석한 석찬연을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노크라기에는 거칠고 침입이라기에는 차분한
자기주장이었다.
그 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유고와 루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언제든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시간
차를 두지 않고 문이 열렸다.
한 명의 남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특이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어깨에 닿을 정도의
애매한 길이의 머리칼은 비에 젖어 뚝뚝 바닥으로 물기를 흘렸다. 물감으로 덧댄 듯한 새파란 머리칼은 끝부분으로 갈수록 초록빛이 섞여 기묘함을 자아냈다. 머리칼처럼 새파란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옛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치렁치렁한 로브는 물을 잔뜩 먹어 그가 걸어올 때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 무거운 자국을 그렸다.
키는 작지도 크지도 않고 언뜻 보면 소년처럼도
보이지만, 또 어찌 보면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청년처럼도 보였다. 그가 풍기는 인상이 근원부터
기묘해 보이는, 그런 남자였다.
이질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와중 가장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벨키나가 외쳤다.
“어, 알프 씨 맞죠? 젖어 있어서 순간적으로
못 알아봤어요.”
그녀가 부른 ‘알프’라는 이름은, 벨키나의
마법 재능을 가장 처음 알아채고 마법 연구원으로 그녀를 스카우트한 사람의 것이었다.
알프는 조금 음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벨키나.”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마법 연구원에
저를 초빙해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는 무슨 일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시초룡이시여.
당신의 가호로 이어져 온 페이넌스 왕가의 말예, 칼트 아스한 페이넌스입니다.”
“…….”
푸른 날개로 수도 홀르나를 덮어 축복했다는,
페이넌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위대한 신의 피조물.
시초룡 알페이넌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칼트가
표하는 과도한 예를 묵묵히 받았다.
◆◆◆
“갑자기 방문하게 된 점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었으니 양해해주면 좋겠군요.”
“이 나라에 당신의 의지를 거역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초룡이시여. 부디 편히 대해주시옵소서.”
“당신의 입장은 알겠으나, 일어나세요. 그런
자세를 고수해서야 이야기를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배려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알페이넌스는 칼트에게 명했다. 그 말을 받아 칼트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알페이넌스가 눈짓하자 다른 이들도 엉거주춤
다시 본인 자리에 앉았다.
가장 호기심 많고, 또한 가장 겁도 없는
벨키나가 질문했다.
“알프 씨가 시초룡 알페이넌스였어요? 그럼
본모습은 정말 용이에요?”
“네, 벨키나. 지금은 사람의 모습으로 방문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 그리했습니다.”
신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친절한 태도로 그가 답했다.
“혹시 왕세자 저하, 그럼 제가 마법 연구원에
이례적인 방식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저를 스카우트했던 알프 씨가 시초룡이셨기 때문인가요?”
“그 추측이 맞네, 레이디 벨키나. 알페이넌스께서 하시는 일을 무엇이든 보조해드릴 수 있도록, 머나먼 과거에 왕실에서는
특별한 표식을 바쳤다고 하지. 알페이넌스께서 그 표식을 내밀면 왕과 동등한 권위의 명령권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그리고 그 명령권이 사용되면 당연히 왕실에도
연락이 갈 테니, 알페이넌스께서 직접 지명하여 마법 연구원에 데려다 놓은 벨키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도 그럴 만하군요.”
루민스가 정리한 추측에 칼트는 별 부정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알려져 있었던
루민스 할데르프는 그렇다 치고, 소질을 떠나서 수습 마법사에 불과했던 벨키나가 가장 초기부터 ‘신의
그릇 회수’ 계획의 중요 인물로 낙점되었던 이유가 그렇게 드러났다.
알페이넌스는 조금 놀란 듯한, 혹은 호기심 어린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젖은 로브를
끌고 천천히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묘하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알페이넌스가 세네핀의 곁에
섰다.
“세네핀 크롬웰.”
“앗, 네, 네에! 시초룡 님!”
놀라서 뒤집힌 듯한 목소리로 세네핀이 답했다.
옆에 있던 루민스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당신이 미혹의 반지……, 아니, 미혹의
심지를 갖고 있는 건 무슨 연유입니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알프를 올려다보았다.
알프는 여전히 속이 읽히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로 세네핀을 응시했다.
“어, 저기. 무슨 연유라고는 하셔도…….
모처럼 얻은 미혹의 백합 구근을 해체하면서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반지같이 생긴 부위가 나온 것뿐인데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장식품치고 기괴한
생김새의 그 물건을 굳이 몸에 지니고 있었던 이유는?”
“반지같이 생긴 게 재미있어서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루민스가 끼어들었다.
“연구 계열 마법사가 다양하고 엉뚱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해낸다는 건 시초룡께서도 잘 아시는 일 아닌가요.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찾아오시자마자 세네핀을 책망하듯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지요.”
“……루민스 할데르프.”
파란 눈이 서늘하게 그의 모습을 비춰냈다.
“뭐, 좋습니다. 세네핀 크롬웰. 당신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가기로 하지요.”
“황송합니다. 알페이넌스 님…….”
딱딱하게 얼어 있는 세네핀을 보며 원래 알고
있었던 ‘알프’ 덕분에 ‘알페이넌스’에게 친근감이 있었던 벨키나도 약간 적의가 생겨 버린 표정을
지었다. 알프는 무표정하게 벨키나 쪽을 보았다가 다시 칼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영광된 시초룡이시여.”
“왕실의 조치는 그것으로 끝입니까?”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암시하는 듯한 알페이넌스의
발언에 칼트가 얼굴을 굳혔다. 그 반응에 개의치 않고 알페이넌스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줄줄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다른 두 ‘소원의 조각’도 회수하여
봉인해야 합니다.”
<별을 향한 초대>만 되찾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서 그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아까부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유고가 툭 던졌다.
“……마정령이 세 종류의 ‘소원의 조각’을 모두 입수하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중 하나가 저희 인간 영역에서 굳건히 지켜진다면,
다른 두 개가 어떻게 되든 문제 없을 텐데요.”
“아뇨.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당신들은 알 수 없겠군요.”
물을 머금은 파란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신이 하사한 ‘소원의 조각’은 세 개가
있지요. 하나는 페이넌스 왕실이 대대로 보호하고 있고, 하나는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푸른색의 긴 속눈썹이 눈을 덮는 것처럼 그는
살짝 눈을 내리떴다.
“잠시만요, 시초룡 님. 마정령왕이 강탈해간
게 아니라 보호하고 있다고요?”
벨키나가 타당한 의문을 뱉었다. 알페이넌스는
작게 끄덕였다.
“알다시피 ‘소원의 조각’이 세 개 모이면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거대한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각들이 쉽게 모여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렇기에 공평하게 흩어져 있는 겁니다.”
세네핀은 언젠가 칼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대륙의 주도권을 인간이 잡든 마정령이 잡든 그건 신에게 그다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소원의 조각이 공평하게 나뉘어 있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정령왕은 이미 본인 영역의 ‘소원의
조각’을 확보한 채로 다른 유물들을 모으려고 한 것이었군요.”
루민스가 중얼거린 말을 알페이넌스는 조용히
긍정했다. 여전히 표정이 안 좋은 유고가 질문했다.
“그렇지만 시초룡이시여. 결론적으로 저희가
<별을 향한 초대>를 빼앗기지 않도록 방비를 굳히는 한 마정령왕이 ‘소원의 조각’을 세
개 다 모을 수 없다는 건 변함없지 않습니까? 굳이 그들 영역의 유물, 또한 행방을 알 수 없는 유물을
회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마정령왕 소유의 ‘소원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알페이넌스의 머리칼 끝에서 다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엿보는 자의 신음>. 그 유물은,
모든 것을 비추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
“태초의 어머니시여, 기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랜만에 일어나 계시는 당신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 마정령에게는 크나큰 기쁨입니다.”
남색의 거체를 부스스 일으키며 정령왕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좋은 꿈을 꾸셨습니까?”
[좋은 꿈……. 글쎄, 좋은 꿈이 맞을까.]
정령왕이 다소 애매한 의문형으로 답하자,
그녀의 시중을 들던 마정령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즐겁고 행복한 꿈일수록 깨어났을 때의 격차가
고통스러운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는 조금, 힘든 꿈이었던 것 같다.]
[괜찮다, 나의 아이야. 그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시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저, 내가 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뿐이니까…….]
“태초의 어머니의 의지가 곧 저희의 의지입니다.
무엇이든 명령해주십시오.”
[그래……. 알페이넌스는 지금쯤 인간들의 도시에 도착했을 것 같구나. 후후. 알페이넌스에게 설명을 들은 인간들의 얼굴이 기대되는걸.]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며
그녀는 속삭였다.
[신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가 즐거운 것을 우선시하는 존재니까.]
◆◆◆
“모든 것을 비추어낸다고요?”
세네핀이 되묻자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알페이넌스가 천천히 설명했다.
“네. 미래를 제외한 그 무엇이든. 옛 동화에
나오는 천리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즉, 마정령왕이 다른 두 유물이 있는 위치를 알아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알페이넌스
님.”
칼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소원의
조각’이 개별적으로 가진 힘은 ‘세계의 위기’가 닥쳤을 때 신께서 허락해야만 발동되는 것 아닙니까?
<별을 향한 초대>도 그래서 현재는 아무런 힘이 없는 유물에 불과한 것이구요.”
알페이넌스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자 그 손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걸 귀찮은 듯 털어내며 그는 여전히 억양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세 개 있는 ‘소원의 조각’이 세계의 위기를 막으려는 보호 장치인 것은 맞습니다. 인간, 마정령, 미지의 공간, 이렇게 세
곳에 흩어져 있는 것도 그래서죠. 가령 마정령이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획책을 한다면 인간 영역의
<별을 향한 초대>를 이용해서 제압하는 식으로요.”
“네. 그러니 지금이 세계의 위기가 아닌
이상…….”
“다만, 신이 ‘소원의 조각’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건 딱히 세계의 위기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냥 신의 의지입니다.”
조심스럽게 벨키나가 되물었다.
“……그럼, 소원의 조각을 사용하려 했을
때 신께서는 세계의 위기와 관계없이 허락을 해줄 수도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 때문에, 마정령왕이
<엿보는 자의 신음>을 사용했을 때 신이 허락해 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너무 애매하잖아요! 뭔가 법칙 같은 거 없어요?”
“법칙……. 글쎄요.”
스스로 대답하면서도 논리와 이성의 알페이넌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그냥, 신이 내키실 때입니다.”
◆◆◆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위대한 알페이넌스시여.
이 말을 토대로 하면, 당장에라도 마정령 영역부터 가서 <엿보는 자의 신음>을 탈취하여
봉인해야 한다는 당신의 말뜻도 이해가 됩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칼트가 상황을 정리했다.
“네.”
“다만,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의문이라고 생각하고 부디 너그럽게 받아주시옵소서.”
“본론만 말해도 괜찮습니다.”
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눈으로 알페이넌스를 응시했다.
“알페이넌스께서는 신의 대리인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알페이넌스의 의지라는 말도 됩니다.”
“네.”
“……그렇다는 건, 마정령 측의 <엿보는 자의 신음> 사용을 신이 허락한다면 그 역시 신의 의지 아닌지요? 위대한
시초룡께서 저희에게 일부러 찾아와 마정령을 방해하라고 하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의문일 수 있겠군요.”
이제는 물기가 많이 사라진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신의 피조물로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조정합니다. 그런 역할을 부여받았지요. 다만, 그 방향성이 반드시 신의 의지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일치하지 않는다……?”
“네. 200년 전에 있었던 자연 마나 고갈
사건도 그렇습니다. 나는 당연히 조화를 위해 그 일을 막으려 했으나, 신은 방치했습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내 행동을 막지도 않았지요. 신은 그런 분입니다.”
만찬장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벨키나가 질문했다.
“저어, 그렇다면 알프 씨는 이번 일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판단하신 거죠? 불가침 조약을 깨고 마정령의 영역으로 갈 정도로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마정령왕이 ‘소원의 조각’을 다
모으려고 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파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감정 없는 특유의 어투로 그는 대답했다.
“그 이유는, 이 세계가 한 번 회귀하여
과거로 돌아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귀,
일반적으로는 허무맹랑하기만 할 그 단어가 알페이넌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현실감을 가진 ‘실재’가
되었다.
주변의 시선에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알페이넌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이어갔다.
“제3의 영역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소원의
조각’의 힘입니다. 그 이름은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세계를 되돌립니다.”
별세계의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도,
모든 것을 비추는 천리안 같은 존재도, 어찌 되었건 가까스로 상식의 범위에서 허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과거로 세계를 되돌린다.’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세계를 커다란 하나의 양피지라고 생각합시다.”
차가우며 친절한 시초룡은 천천히 설명했다.
“세계의 모든 변화는 이 양피지에 기록됩니다.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은 그 양피지의 어느 시점 이후로 쓰여진 변화를 모두 없던 일로 만들고, 그 시점부터 다시 변화를 기록하게 만듭니다.”
“……없던 일로 만들었는데, 어째서 알페이넌스께서는
회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십니까?”
루민스가 묻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되돌아가는 것은 세계뿐입니다. 세계보다 상위에 있는 신은 회귀의 영향을 받지 않지요. 나 역시 신의
영향으로 이 회귀를 같이 인지한 것뿐입니다.”
“…….”
“지난번에 기록되었던 세계는 정상적이었습니다. 회귀라는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끼어들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되돌아왔죠.”
“되돌아 왔다…….”
“나는 되돌아왔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회귀의 경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돌아온 시점은 내가 벨키나를 찾아가기 바로 전쯤이었죠.”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진 가운데, 혼자만 담담해
보이는 얼굴의 알페이넌스는 말을 이었다.
“굳이 그런 애매한 시점으로 지난 세계를
회귀시켜서 이득을 볼 인물이라고 하면, 본인의 목적에 실패한 마정령왕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나는 추측했습니다.”
알페이넌스의 말로 다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번의 세계에서 마정령왕은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 이후, 세계는 한 번 과거로 되돌아온 상태다.
“다시 한번 그런 부자연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알페이넌스는 이제 거의 다 마른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린 후, 담담히 말했다.
◆◆◆
석찬 자리의 인간들에게 다른 두 가지 ‘소원의
조각’을 회수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며, 알페이넌스는 딱히 가부를 묻지도 않았다.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지시한 것처럼.
칼트가 딱딱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시초룡이시여. 당신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추악한 대지’로 진입하는 것은 저희로서도 각오가 필요한 일입니다. 대대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괜찮다는 것입니까? 인간과
마정령의 대지가 피로 물든다고 해도.”
소년 같은 얼굴을 갸우뚱하며 알페이넌스는
답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어차피 인간과
마정령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닙니까? 불가침 조약을 맺기 전까지는 자주 있었던 전쟁인데,
새삼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 당신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딴 인간의
자식들에게 참으로 정이 없으시군요.”
“그 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로서는 당신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습니다. 내 이름을 따서 인간의 나라를 만들고, 지배자의 성으로 삼고,
마치 신의 정의가 온전히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 신단을 운영하고, 내가 인간만의 아군인 양 행적을 포장해도 문제 삼은 적 없습니다. 내가
무슨 정을 더 주어야 합니까?”
“…….”
그 모든 것이 칼트가 직접 한 일은 아니었더라도,
페이넌스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말예로서는 더 이상 항의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나는 몇 가지 일만 정리하고 행적이 묘연한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이 어디 있는지 위치를 추적하러 떠나겠습니다.
당신들은 부디 마정령왕이 보호하는 <엿보는 자의 신음>을 확보하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시초룡 알페이넌스여.”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만을 남기고 알페이넌스는
문을 향하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벨키나.”
“……?”
“……아닙니다. 부디 다음에 다시 볼 때까지 살아서 만납시다.”
어둠 사이로 알페이넌스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창밖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 그가 무겁게
남긴 카펫의 물자국이 없었다면 뜬 눈으로 꿈을 꾼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될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한때였다.
◆◆◆
“……뭔가,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이제는
텅 비어 버린 것 같아.”
별채로 돌아와 진과도 정보를 공유하고 나서, 벨키나가 한숨을 내쉬듯 그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바다.
물론 회귀 운운은 무척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만, 이 세계의 신이라는 게 제멋대로라는 부분은.”
“맞아 맞아, ‘소원의 조각’ 사용을 승인하는
기준이 내키는 대로라니 정말 장난하나 싶었어.”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듯이 앉아 있던 루민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신의 관심사가 즐거움뿐이라고 한다면, 웬만한
것들은 설명이 되니까.”
“크으, 진짜 성격 나쁘네. 그 신. 회귀라니 소름 돋지 않아? 만약에 말야, 지금 세계가 또 회귀된다고 생각해 봐.
그때도 지금과 동일한 흐름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세네핀이 한숨을 쉬듯 긍정하자 벨키나가 열을
올리며 목청을 키웠다.
“그럼 세네핀이랑 친하지도 않고, 진이랑도
인연이 없고, 루민스하고도 말 안 붙이게 될지 모르잖아. 상상만 해도 끔찍해.”
진은 동의한다는 듯 꼬리로 벨키나의 목을
감쌌다. 루민스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세네핀은 자신의 양손을 꽉 쥐었다가 강한 시선으로
벨키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렇게 만들지 않도록…….
저희가 힘내야겠죠.”
“응! 마정령왕이 또 세계를 되돌리는 일이
없도록! 그렇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도록! 꼭 막아내자.”
◆◆◆
“이 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목표라고 할 수 있네.”
다음날, 전날의 세찬 비는 온데간데없이 맑게 갠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칼트가 무겁게 입을 뗐다.
“간밤에 모왕 전하와도 이야기를 해보았네만,
역시 같은 의견이셨네.”
“네. 지난번 마정령의 수도 침입도 사실 실제보다 훨씬 피해가 커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어떻게든 무마했으나,
이번에 저희가 마정령의 본거지로 침투하여 ‘소원의 조각’을 탈취했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보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루민스가 냉정하게 정리하는 이야기를 칼트는
가만히 듣고 끄덕였다.
“저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마정령 쪽하고 이야기를 나눠서 최대한 타협할 수 있도록 힘내볼게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다르게 방긋 웃으며
벨키나가 손을 들었다.
“마정령왕도 목적이나 생각이 있을 것 아니에요. 어쨌든 전쟁이 일어나면 그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건 피하고 싶을 테고요.”
“후후. 지나친 낙관이다 싶지만, 나도 레이디
벨키나의 낙관을 믿고 그 가능성에 걸어보고 싶군.”
“네!”
“그리고 회귀라는 것도 막아야겠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유고가
뱉어냈다.
“난 말이야, 지금까지 마정령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그게 가장 속이 뒤집혀.”
“회귀를 사용한 것 말인가요?”
세네핀의 질문에 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
“사람들이 쌓아온 시간과 가능성을 뭉개는 거잖아. 그걸 마정령왕이 독단적으로 해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사용하도록 승인한 게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인간을 정말 우습게
보는 거네.”
“……유고.”
칼트는 점잖게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유고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적당히 타일렀다.
그런 형제를 잠시 바라보다가 평소에는 유고에게 까칠하게 구는 루민스가 담담하게 그 말을 긍정했다.
“왕자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회귀하기
전에 쌓았던 그 사람들의 시간, 가치 있는 것들, 생명, 열기……. 그 모든 것을 지우는 건 무척
잔인한 일이죠.”
“흥, 아부 떨어도 뭐 안 줄 거다.”
“하하. 그냥, 왕자님께서는 역시 올곧은
사람이구나 생각한 것뿐입니다. 제 말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손을 저으며 루민스는 칼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마정령을 자극할 만한 군사를 일으켜 양동 작전을 행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나와 모왕은 결론을 내렸네.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네만……. <별을 향한 초대>의 때처럼 자네들끼리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그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엿보는 자의 신음>을 회수해오도록.”
“말은 쉽지만, 왕세자 저하. 마정령들의
‘추악한 대지’ 자체가 미지의 영역입니다.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로는 더욱요.”
세네핀이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칼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그러나 알페이넌스께서 자네들을
지목한 이상, 승산이 있으리라 나는 생각하네.”
“……시초룡은 회귀되기 전의 세계를 알고
계시니, 이번에도 괜찮으리라 판단하시는 걸까요?”
“그래.”
알페이넌스의 말에 의하면 회귀 전의 세계는 마정령왕의 야욕이 꺾여 좌절되었던 세계였다. 그렇다는 건, 마정령왕의 적인 인간들이 그녀를 압도한
적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네들에게 일방적인 짐만 계속 떠맡기게 되는 점, 깊이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만큼 자네들을 희망으로 여기고 있네. 절실히.”
◆◆◆
여행에서 복귀하자마자 떠나는 것은, 짐을
다시 싸기는 편하지만 여독을 풀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일행들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예감은 했지만 루민스가 잔뜩 사준 옷이나 장신구가 역시 쓸모없어지는구나 생각하며 세네핀은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고 나자 오후와 저녁식사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 남았다. 그녀는 잠시 심란함을 정리하기 위해 정원을 산책했다.
“……회귀라.”
세네핀 역시 루민스 몰래 쥐고 있는 기억으로
그 가능성은 생각했던 바였다. 갑자기 알페이넌스가 이 시점에서 들이닥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남은 두 개의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으러 가는 흐름이 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불안함은 누군가 해소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기반 없이 불안한 상태였으니까. 이름은 기억해냈으나 여전히
기억은 불분명했다.
기억이 불분명하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확신
또한 없었다. 잠을 자다가 몇 번이고 악몽을 꾸고 새벽에 깨어나곤 했다. 때때로 세네핀 크롬웰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꾸었다.
즐겁게 웃는 현재의 모습을 가장하면서도 죄를 짓는 듯한 무게감이 그녀를 짓누르는 걸 감내해야 했다.
목적하는 바는 명확하지만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그녀는 너덜너덜했다.
별세계에서 온 인간을 위한 정신 보호라는 장치를, 그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런 생활은 확실히 사람을 미치게 할지도 모른다.
‘신은 재미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걸까.’
혼자만 생각해 본 가설이었다. 하지만 그 가설은 적어도 세네핀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신에게는,
혹은 이 세상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존재들에게는 재미있는 유희거리로 느껴질까. 애초에 <별을
향한 초대>는 누가 사용한 걸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아직 높이 떠 있는 해를 바라보는데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었다.
주변이 질척질척하고 습한 공기에 둘러싸인 것 같은 갑갑함이었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고 세네핀은 눈을 크게
떴다.
“세네핀 크롬웰.”
자연스러움과 조화의 수호자이나 정작 본인의
외견은 부자연의 극치인 시초룡이 어느샌가 나타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시초룡 님.”
“그 이름은 지금 좀 부담스럽군요. 알프라고 불러주겠습니까?”
“아, 알프 님.”
가볍게 끄덕이며 알프가 그녀에게 벤치에 앉기를
권했다.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그 말에 따르자 알프도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떠나신 줄 알았어요.”
“정리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마무리되어,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고 가려고 합니다.”
“…….”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세네핀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바쁜 와중에
따로 시간을 들여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당신을 직접 해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죄, 죄송합니다. 긴장되어서요.”
“그저, 당신이 이질적이라서. 당신이라는
변수가 나는 걱정됩니다.”
그 대답을 어쩐지 알 것 같으면서도 세네핀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어제와 다르게 물에 젖지 않은 알프의 푸른
머리는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햇살에 비춘 머리색은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이 세계가 한 번 회귀했다고 말했지요.”
“네.”
“이전 세계에서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
“회귀 전에도 마정령왕은 ‘소원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인간 측은 그에 대항했지요. 그때 벨키나도, 루민스 할데르프도,
유고 페이넌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별로 놀라지 않는군요.”
“저는……, 원래 벨키나를 괴롭혔던 사람이에요. 이번에는 운 좋게 풀려서 사이가 좋아졌지만. 이전 세계에서 사이를 메우지 못하고 끝났어도 이상할 건
없겠죠.”
세네핀은 ‘공중낙원의 미로’에서 보았던 꿈과
같은 환상을 떠올렸다. 머리가 짧은 벨키나, 소심하고 안경을 쓰고 있던 루민스, 또한 김세나라는
이름을 대고 있던 자신.
김세나라고 이름을 대고 있었던 자신이 세네핀의
몸에 그대로 빙의되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그때는 또 다른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실뭉치처럼 마구 엉켜 있는 생각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렇게 보면 회귀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그렇지만 반대로 지금이 회귀되는 건 싫기도 해요.
사람 마음이 참 이기적이네요. 알프 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의미 없겠지만.”
“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적절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습니다.”
소년 같은 얼굴에는 어떤 종류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조율하고 판단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어떤 변수가 될지.”
“……저를 직접 해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지만.
배제하시나요?”
그녀는 언젠가 루민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계의 적.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배제한다.
바람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당신의 존재가 그들 곁에 존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어째서요?”
“그들이 당신을 많이 애착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벨키나는 당신에게 많은 애정을 품은 것 같더군요. 그런 애정은 긍정적인 방향의 힘이 된다고
예로부터 증명되어 있지요. 그걸 굳이 막을 이유는 나에게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푸른 용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네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나의 판단과 별개로, 당신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최근에 목숨의 위협을 많이 받았지요?”
“……네.”
“길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알페이넌스가 ‘세계의 적’을 설명하려는 것을 세네핀은 금세 알 수 있었으나,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알프 님은 어째서 그런지 아시는 건가요?”
세네핀이 별세계에서 온 자라는 것을 알페이넌스는
모른다는 의미였다.
신에 가까운 시초룡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구나,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또한, 당신을 해치려는 필연이 발동하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신이 만든 수많은 장치 중 하나이며, 그 필연들 역시 장치로서 동작하는 것이니까요.”
세네핀은 그가 마치 온라인 게임의 운영자 캐릭터 같다고 생각했다. 게임 내에서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게임
메커니즘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위치의 캐릭터.
“……‘자연 마나 고갈’ 사건을 알프 님은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막지 못한 것처럼요?”
“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정원에 감돌았다.
할 수만 있다면 세네핀은 더 많은 것을 그에게
묻고 싶었다. 회귀 전 세계의 구체적인 모습, 거기 있던 김세나라는 존재, 세계의 적, 수수께끼로
가득한 루민스…….
그러나 의심을 받고 싶지 않은 그녀는 그
모든 의문을 자신의 안에 갈무리한 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한 시간이 지나고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름다운 푸른 비늘로 만들어진 펜던트였다.
“이건……?”
“이후 당신에게 더 혹독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이미 힘을 잃은 미혹의 심지 정도로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시초룡 알페이넌스의 비늘이라면
어느 정도 부적이 될지도 모르죠.”
“……!”
“신께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이해하려 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나도 이번 회귀는, 인간의 감정으로
말하자면 조금 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얼굴을 마주한 후 처음으로, 알페이넌스는 조금 웃었다. 부자연스러운 그의 외관처럼, 평소에 웃지 않던 사람이 겨우 짓는
녹슨 듯한 웃음이었다.
“벨키나를 잘 부탁합니다. 그 사람은 무척 정이 많아서 당신을 잃으면 슬퍼할 거예요. 나는 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뒤를 돌았다.
“알프 님, 혹시 당신은 회귀 전의 세계에서 벨키나를…….”
그러나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람의
모습을 한 푸른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Ⅲ.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출발의 새벽이 밝았다.
아란다스트 대륙에서 남쪽은 인간의 영역,
북쪽은 마정령의 영역이었다. 열차로 갈 수 있는 최북단의 도시까지 가서, 거기서 또 도보로 일주일을
걸어야 겨우 마정령의 영역인 ‘추악한 대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불가침 조약이 있어도, 정기적으로 조사는
진행되었던 모양이다만.”
최북단의 도시 ‘올센느’까지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나서 유고가 말을 꺼냈다.
“여전히 그들의 숲은 새카맣게 오염되어 있고,
환경 자체가 인간의 영역과 다르다는 모양이다. 바꿔 말하자면, 마정령왕이 있는 곳까지 그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식량과 물을 조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소리지.”
“그건……, 확실히 어렵겠네.”
벨키나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루민스는 덧붙여 설명했다.
“조사 관련 기록은 나도 찾았는데, 일단
마지막으로 관찰된 기록에서 마정령 외의 생물들이 포착되긴 한다나 봐. 문제는 독이 있느냐 여부.”
“그리고 마정령은 나와 상극인 존재다. 그
영역을 지나갈 때는 나도 벨키나나 루민스의 마나를 받는 편이 안전하리라 본다.”
진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세네핀이 살짝 손을 들었다.
“저어, 그거 말인데요.”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했다가 그녀는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앗! 정화의 힘 말이구나!”
벨키나가 반색했다. 작게 끄덕이며 세네핀은
설명했다.
“물론 저는 벨키나나 루민스만큼 마나가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힘을 사용해야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적어도 식량이나
물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려나요.”
“응응! 역시 우리 세네핀이야!”
그녀를 껴안으며 벨키나가 활짝 웃자, 세네핀은 멋쩍게 웃었다.
“아뇨, 벨키나……. 저는 평소에 무척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이런 일로나마 도움이 되어 드린다면 다행인 거죠.”
“무슨 그런 말을 해!”
볼을 부풀리며 벨키나가 항의했다.
“세네핀 그대는 항상 자신을 과하게 낮추는
면이 있다.”
“애초에 정화의 힘 없으면 유물 정화도 안 되고 봉인도 안 되는데 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진과 유고도 책망하는 말을 했다.
“그만큼 다들 세네핀을 아끼고 있다는 거야.”
“네. 저도 그래요. 이상한 소리 해서 죄송했어요! 우리 카드 게임 하죠!”
세네핀은 본인의 복잡한 심경은 접어두고 최대한
밝은 소리를 냈다.
이 다정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 또한,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결말로 이끌어나가야겠다고.
◆◆◆
최북단의 올센느는 무척 쓸쓸한 도시였다.
행인도 많이 보이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대도 전체적으로 높았다. 상업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외부에서 방문객이 그다지 오지 않는 도시이기에 하룻밤 묵을 숙박업소를 찾는 것도 꽤 큰일이었다. 도시 곳곳을 돌아다닌 끝에 원래는 하숙집이지만
방이 비어 있는 노파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런 말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생기가
부족한 도시네…….”
“올센느는 원래 채광이 주산업이던 곳이니까.
마법 혁명 이후로 광석 수요가 줄어들어서 자연스레 도시도 쇠퇴한 거지.”
벨키나가 뱉은 말에 루민스가 성실하게 답변해주었다.
두 사람을 보던 유고가 턱을 괸 채 말했다.
“그 때문에 노령화가 가속되어 점점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관광 산업을 발전시킬 요소가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산업이 들어오기에는
‘추악한 대지’에 가까운 최북단이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형님도 이 문제로 꽤 골머리를 앓고 계신
것으로 안다.”
유고가 뱉은 답에 세네핀이 조금 놀란 얼굴로
손을 뺨에 가져갔다.
“어머나, 유고가 마치 공부를 열심히 한
왕자님처럼 보여요.”
“……시비 거는 거냐?”
그녀는 헤헷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수화하여
세네핀의 무릎에 앉아 있던 진이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도시 전체의 기운도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필시, 마정령의 영역에 가까운 곳이라 영향을 받는 것이겠지.”
“아. 마정령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원천으로
하는 것 때문에요?”
“그렇다.”
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네핀은 잠시 생각했다.
신의 장치. 소원의 조각. 세계의 적…….
“그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서 생각하는 건데요. 이 세계의 신은 뭐랄까……. 좀 특이하잖아요?”
“특이하다기보다는 성격이 나쁜 거겠지.”
루민스가 딱 잘라 말하자 벨키나가 손가락질을
하며 “그러다 천벌 받는다!” 하고 장난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좀 웃으며 세네핀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나. 일부러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조장하는 느낌이 들어요. 마정령 역시 존재를 유지하려면 인간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잖아요.”
인간의 목숨과 부정적인 감정을 원천으로 하는
종족.
처음부터 인간과 대립하지 않고는 존재를 유지할
수도 없는 그들에게 의문을 가지며 세네핀은 그렇게 말했다.
“세네핀의 말도 알 것 같긴 해. 나도 만약
마정령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의 생명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빨아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네……. 그래서 마정령도 마정령대로 힘들지
않을까, 그들이 굳이 소원의 조각을 모은다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간 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잠시 세네핀을 빤히 쳐다보던 루민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세네핀. 지금부터
대립해야 하는 적을 상대로 너무 온정적인 시선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
“그,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랄까,
일단 말이 통하는 생물이긴 하잖아요? 그러니까 의사소통을 먼저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구요.”
벨키나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외쳤다.
“피 튀기는 상황, 누구든 싫잖아. 그렇다면
말로 해결할 여지가 있는지 살펴봐도 되지 않을까!”
“……흥, 인간을 보자마자 죽이려고 안달이 난 놈들 상대로 태평한 소리나 하는군. 나는 이쪽에 해가 된다면 사정
봐주지 않고 벨 거다.”
실제로 마정령을 벤 적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는 무게감이 달랐다.
세네핀 역시 유고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렇게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자신이 그렇게 착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원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 이래, 힘들고 괴로워도 계속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를, 계속 생각했다.
“처음부터 바로 베어버리면 대화의 가능성이
없어져 버리지만요. 대화로 시작하면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루민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 쓰게 웃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조해주었다.
“……교섭에서 쓸 수 있는 카드는 우선 하나하나 다 써본 다음에 최후의 수단을 쓰는 게 맞긴 하지. 알았어. 나는
세네핀의 의향을 존중할게.”
“나도 그들과 상극인 종족이라고는 하나, 무조건 적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세네핀의 의견에 따르겠다.”
벨키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고 쪽을 돌아보았다.
“어때, 다수결로 이쪽이 위인데!”
“……네가 낸 의견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당당하냐, 넌.”
투덜거리면서도 유고도 조금 표정을 풀었다.
“말해두지만 이쪽이 위협을 받으면 난 주저하지
않고 썰어버릴 거다. 그 전제는 바꾸지 않겠지만, 우선은 참아주도록 하지.”
“고마워요, 유고!”
세네핀이 반색을 하자 유고는 고개를 돌리며
“흥, 어차피 소용없는 짓일 거다.”라고 밉살스러운 소리를 덧붙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세네핀은
그냥 피식 웃었다.
“그럼 내일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들 점검하고
모레 출발하기로 하자.”
세네핀이 보았던 게임의 내용으로는, 벨키나
일행은 마정령들을 그저 공격하고 쓰러뜨려서 길을 통과하고 마정령왕과 대적했었다. 대화라는 제3의 길을 꺼낸
적이 없었다.
또한 알페이넌스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정체를
바로 밝히고 나타난 적도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무엇이 옳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찾아내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고 세네핀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었다.
미래를 훤히 들여다보며 정답만 골라 찍을 수 없는 불확실성은, 원래 모든 인간의 삶에 동등하게 적용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없던 것으로 만들며 회귀되지
않기를 바라니만큼, 더더욱.
그렇게 많은 고민을 안고, 최북단의 도시 올센느에서 세네핀의 밤은 저물어갔다.
◆◆◆
올센느를 떠난 이후 ‘추악한 대지’까지의
여정은 ‘공중낙원의 미로’ 때 늪지대를 가로질렀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소요했지만, 날씨도 지형도
험하지 않았기에 진행 자체는 순조로웠다. 그때 처리해야 했던 것보다 더 강한 마물들이 무리를 지어 덤볐으나 일행의 무력이 상식 밖이기에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봐, 저기가 ‘추악한 대지’야.”
흙탕물이 흐르는 강 너머에, 새카맣게 덧칠을
한 듯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띄엄띄엄 서 있으나 역시 검게 오염되어 있고, 풀의 푸른빛은
듬성듬성 흔적만 남았다.
루민스는 손을 들어 강 위에 마법으로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
기척을 감지하고 은색의 전신을 늘씬히 펴며
진이 고했다. 오랜만에 성체 늑대의 모습을 한 그의 머리를 세네핀이 쓰다듬었다.
“그럼, 매복의 가능성은 없는 건가?”
“진의 기척 감지는 정확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이전에 나도 미혹의 골짜기 시험 때 신세 많이 졌고.”
“……수상한데.”
벨키나의 설명에도 유고는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다리를 가장 앞장서서 건너가던 루민스가 ‘추악한 대지’에 들어서기 전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마법적 처치는 되어 있지 않지만, 유고
왕자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아무래도 이 일대에 저주를 펼쳐놓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마정령왕에게
도달하는 길 끝까지. 귀찮아졌군요.”
“저주라면, 설마 이 근방이 까맣게 물들어
있는 거…….”
“응, 다 마정령의 피일 거야.”
세네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만큼 그들도
필사적이다. 위력이 높은 대신, 자신의 피와 맞바꾸어 저주라는 힘을 쓰는 것이 마정령이라는 종족들이다.
목숨까지 써서 자신을 노렸던 적도 있었다.
이대로 대화의 여지 없이, 오염되어 있는
길을 뚫고 가며 대적하는 수밖에 없나?
“응, 어떤 거?”
“이 일대에 최대한 제 목소리가 퍼지게 부탁할게요.”
이판사판이었다. 최대한 무력으로 부딪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알겠어.”
“고마워요!”
세네핀은 숨을 들이켰다. 루민스가 주문을
발동하고 주변에 빛이 돌기 시작하자 입을 열었다.
“정령왕님. 아마 능력 있는 분이니 전해지겠죠?
저는 페이넌스 왕국에서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자, 벨키나가 생긋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저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무언가 대단한 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무시당할 가능성이 더 컸다. 다리에 선 채 까맣게 물들어 있는 흔적들을 보는 것만으로 세네핀은 자신감이
사라져갔다.
게임에서도 저주에 물들어 있는 대지를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종족의 각오와 피가 스민 땅을 직접 보는 것은 감각이 전혀 달랐다. 안일하게 대화를
청하는 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입술을 달싹이던 세네핀은 눈을 꾹 감았다.
벨키나의 손을 힘주어 감쌌다. 다시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루민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그 일념만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알페이넌스는 당신이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이용해서 회귀했다고 의심하고 있어요.”
유고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진이 꼬리로
툭 그녀의 허리를 쳤다.
하지만 세네핀은 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다시 회귀가 되는 건 아무도 원치 않아요.
당신도 원하는 걸 이루면 회귀는 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뭔가 타협의 여지가 없을지 이야기해보면 안 될까요?”
그
말을 끝내자마자 일행의 눈앞에 회색빛 안개가 휘몰아쳤다.
유고가 본능적으로 칼을 빼 들며 앞을 막았고
루민스는 순식간에 마법 쉴드를 쳤다. 벨키나는 세네핀의 어깨를 감쌌고 진은 뒤쪽을 경계했다.
[공격하려는 게 아니니 겁먹을 것 없다,
인간의 아이들아.]
높은 것 같으면서도 낮고, 청아한 것 같으면서도
거칠게 마모된 목소리였다.
묘하게 그 목소리에 기시감을 느끼면서, 세네핀은 작게 되물었다.
“……정령왕님인가요?”
[그렇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러나
너희는 왕국에서 파견된 한갓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을 텐데. 타협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느냐?]
“…….”
그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여기서 멋대로 결정한다고
해서, 정말 그 결정이 힘을 가질지 세네핀이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짧게 한숨을 내쉰 유고가 입을
열었다.
“유고 페이넌스의 이름을 걸고 페이넌스 왕가의
의지를 대리 보증하겠다.”
“유고!?”
[페이넌스의 말예인가. 나의 아이들이 신세를
졌다지.]
“그건 그쪽도 우리 목숨을 노렸으니 피차
목숨을 걸기로 합의된 결투였다고 치고 넘어가도록 하지. 아무튼 중요한 건, 나는 정식으로 쉐이런
리코위 페이넌스와 그 후계자의 보증 하에 페이넌스 왕국의 결정을 대리한다는 것이다. 그 권위에 따라, 나는 세네핀 크롬웰의 교섭권을 인정하겠다.”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왕자의 신분으로
일행들의 수호자 노릇을 해온 유고의 이면에 있는 역할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형님이 전쟁을 각오하고 있다는 건 그쪽도 알 것이다. 이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것 같다만, 수도에서 이미 올센느로 파병을
시작했고, 아마 지금쯤이면 선발대가 도착했겠지. 오늘 교섭이 결렬되고 유혈 충돌이 이루어지면, 그
뒤는 보장할 수 없다.”
[후후,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나열했을 따름이다.
세네핀 크롬웰은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 거짓 없이 그쪽에 모든 패를 열었다. 나도 그 의지에 따라
최선의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한다만.”
형체 없는 안개를 붉은 눈으로 쏘아보며,
페이넌스의 의지를 대리하는 유고 페이넌스가 일갈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쪽이 성의를 보일
차례 아닌가?”
회색 안개가 꿈틀거리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아마도, 웃음에 가까운 소리인 듯했다.
[좋다, 페이넌스의 말예여.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이 교섭에는 세네핀 크롬웰, 그리고 수인족의
마지막 생존자 진의 참여만을 인정하겠다. 그 외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
가장 먼저 소리친 것은 루민스였다. 마치
그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회색 안개는 루민스 쪽을 향해 짙게 꿈틀거렸다.
“마정령왕!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참여도 인정해주십시오.”
[그대는 혼자서 능히, 약해진 나를 없앨
수 있다. 그리고 난 그대를 믿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신도 세네핀을 충분히 해칠 수
있습니다!”
[거기 있는 수인이라면 아슬아슬하게 나와
호각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대는 동료를 믿지 못하는가?]
둘의 이야기를 듣던 진이 초록빛 눈으로 루민스를
올려보았다. 루민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저어, 루민스. 괜찮아요! 저희 정말로 대화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정령왕님이 이쪽을 해칠 것처럼
전제하고 이야기하면 실례죠.”
기세에 눌려 있던 세네핀이 루민스를 달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진하고 함께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루민스. 그대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나 역시 그녀에게 등을 바친 몸이다. 그대보다 각오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화를
내도 되겠는가?”
“…….”
루민스는 무언가를 씹어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회색 안개를 향했다.
“1시간. 그때까지만 기다리겠습니다. 그
시간이 초과할 때까지 세네핀과 진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나는 1초의 지체도 없이 당신네 대지를 지도에서
없앨 겁니다.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건 당신도 아시겠죠?”
[그야 물론.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이 상황을 간신히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처럼 눈을 꽉 감았다가 루민스가 다시 세네핀을 응시했다.
“……세네핀. 잘 다녀와.”
“네! 열심히 이야기 나눠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노력해볼게요!”
“진, 세네핀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라.”
“세네핀 크롬웰. 너의 무모한 도박에 맞추어
준 우리 왕가의 의지를 생각해서라도, 부끄러운 결과가 없길 바란다.”
“후후, 그럴게요.”
일행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회색 안개가 주변을
감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시야를 가렸다.
약 10초 후, 주변에 안개 따위는 없었다는 것처럼 주변이 다시 맑게 트였다.
그곳에 진과 세네핀의 모습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
루민스 할데르프는 추악한 대지의 지평선 너머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불사를 듯한 눈빛으로.
◆◆◆
“……아.”
눈을 뜨자 푹신한 풀 위에 몸이 앉혀져 있었다.
바로 옆에 진도 있었다. 세네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나무의 색상과는 다르게 어두웠으나,
커다란 나무둥치 안과 같은 모양새였다.
“순간이동……?”
[정확히는 다르단다. 눈에 보이지 않게 모든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게지. 미혹의 골짜기에서 보지 못했느냐?]
화들짝 놀라며 세네핀이 앞을 보았다.
거대한 남색의 여성체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게임에서 최종보스로 몇 번이고 접했던
마정령왕이었다.
“……저, 정령왕님. 교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실례하지, 정령왕.”
[와주어서 고맙다, 수인족의 후예여. 또한
나도 그대를 직접 보고 싶었단다. 별의 아이야.]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간의 아이’라고 부르던
그녀의 달라진 호칭에 세네핀은 눈을 크게 떴다.
별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별을 향한 초대.
또한, 별세계에서 온 자.
“설마, 당신은…….”
[후후, 꽤 둔한 아이로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두 번 만났었지. 기억하고 있느냐?]
―미혹의 심지를 지닌 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세네핀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을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다. 태초의 어둠, 심연의 나락 속에서.
“항상 제 이름을 묻던 그 목소리였군요.”
[그렇다. ‘미혹의 골짜기’는 예전에 정령의 영역이었던 곳이지. 미혹의 백합 역시 근원적으로는 나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대의 존재를 알았단다.]
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진이 초록빛
눈으로 정령왕을 쏘아 보았다.
“세네핀에게 해를 끼쳤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해를 끼치겠다는 이야기인가?”
[글쎄. 나는 인간을 믿지 않아. 애초에
서로 동등하게 존재할 수도 없지. 알페이넌스와 인간들은 근원부터 나와, 우리 종족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오싹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진은 세네핀을 보호하듯 그 앞에 섰다.
세네핀은 떨리는 것을 참으며 진의 갈기를
쓰다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저와도 대적하실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란다, 별의 아이야.]
마정령왕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세네핀은
눈을 홉떴다.
[페이넌스 왕국과 대립할 각오였다. 하지만……
어쩌면, 신과 접촉해서 좋게 풀릴 방법이 없을까도 생각했지. 그러다가 세네핀 크롬웰. 그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단다.]
“세네핀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인가?”
진의 질문에 마정령왕은 끄덕였다.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녀가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이 관여한 것이리라 확신했지. 그래서 별의 아이의 근원에 접하면 신과 대화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패하신 건가요?”
[그래. 애초에 그대가 답하여 근원에 달했다고
해도, 정말로 신이 모습을 드러냈을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신은 변덕쟁이니까.]
“…….”
[그대를 해칠 뻔한 나를 원망하는가?]
“지금 저를 해치실 건가요?”
세네핀의 질문에 맞춰 진이 경계하며 정령왕을
쏘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직접 얼굴을 봤으니 이제 됐다. 세네핀 크롬웰. 그대에 대해서 더 캐낼 마음도 없으니, 그렇게 새파란 얼굴 하지 말아라.]
가뜩이나 ‘별의 아이’ 운운이 마음에 걸리던 세네핀으로서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녀가 별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녀의 의식에 접근했다고는
해도, 정령왕은 더는 캐묻지 않겠다고, 또 해치지 않겠다고도 단언했다. 그렇다면 세네핀으로서는 충분했다.
[미쳐버린 마법사가 우리의 대지를 불태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별의 아이야.]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난 회귀는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다.]
세네핀은 천천히 숨을 흘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회귀 이전의 세계를 기억은 하시는 거죠?”
[그렇다. 나 역시 알페이넌스와 동위의 존재니까.]
인간 측의 알페이넌스, 마정령 측의 정령왕.
서로의 종족에 동위의 존재를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는 건 역시 이 세계 신의 취향인가 세네핀은 생각했다.
“그리고 회귀 후에 소원의 조각을 모으고
계신 거고요. ……무엇 때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후후. 조금 전에 루민스 할데르프에게,
‘내가 약해졌다’라고 한 걸 기억하느냐?]
그 질문에 끄덕였다. 약해진 자신을, 루민스라면
쉽게 없앨 수 있다고 정령왕은 표현했다.
[그것은 내가 오래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약 200년 만에 말이지.]
“200년……?”
[그래. 자연 마나가 고갈되었던 그때. 또한,
정령과 인간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진 그때부터.]
남색의 거체를 가진 정령왕은 표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로 고했다.
[정령은 수인족처럼, 멸망의 절벽을 향해
굴러떨어져 가고 있다.]
회색의 안개가 사라진, 인간과 마정령의 경계
영역에서 세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루민스도 유고도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유고는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것에 가까웠으나, 루민스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터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시 루민스의 눈치를 보던 벨키나가 유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고, 하나 물어봐도 돼?”
“뭐지.”
“아까 세네핀한테 교섭권 넘긴 거. 함부로
정한 것 때문에 나중에 왕궁 돌아가면 혼나는 거 아냐?”
“그렇지만 왕국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거잖아.
작위도 없는 세네핀에게 함부로 결정하게 했다가 뒤탈 있지 않나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지.”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페이넌스 왕국 입장에서
어떤 경우의 수라 한들 전쟁에서 패배할 일은 없다.”
“어, 그래? 중앙에 마정령이 침투했을 때는 방어 체계 만드느라 루민스도 못 돌아오고 난리였잖아. 그런데 전쟁 승리를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그건 좀 이야기가 다르지. 소수 인원에 의한 테러를 경계하는 거니까. 모왕을 비롯한 나라의 요인들이 피살당할 위험성을 막은 거야.”
“음, 그러니까 소규모의 테러를 막을 수
있다면 전쟁 규모의 항쟁은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거?”
“그래.”
검으로 호를 그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정기적인 조사로 이미 저쪽의 전력은 모두
파악하고 있다. 마정령은 그 숫자도, 세력도, 체계도 쇠약하여 페이넌스 왕국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이
전무하다.”
“……그 정도였구나.”
“다만, 마정령이 가진 저주의 힘을 감안하면
저쪽에서 전력을 다해서 저항했을 때 수많은 희생자를 낳게 된다는 건 상상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인간의 희생만이 아니야. 그건 즉 마정령이라는 종족의 괴멸을 뜻해.”
새카만 피가 물들어 있는 대지를 응시하며 벨키나가 작게 끄덕였다.
“페이넌스 왕가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생각했던
방식은 소수정예인 우리가 그들의 머리인 마정령왕을 최대한 빠르게 없애는 것. 그러면 전쟁으로 비화하기
전에 제압이 가능할 테니까. ……이 방식으로도, 결국 마정령이라는 종족은 끝나게 된다.”
“…….”
“그러니, 세네핀의 도박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페이넌스 왕국으로서는 마찬가지인 거야.”
“새삼스럽지만, 왕세자 저하는 철저하구나.
너한테 권한을 위임하면서도 결국 어떤 결과든 상관없어서 그런 거였으니.”
“뭐, 그런 분인 건 맞긴 하다만. 형님께서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세네핀이 교섭을 청하는 거 말이야?”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아니지만, 세네핀
크롬웰이라면 무언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때 루민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야기
중인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눈을 약간 찌푸릴 뿐 그에게 반응하지 않으며
유고는 추악한 대지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그러셨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상대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세네핀 크롬웰은 자각 없이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건 좀 동감이려나.”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는 분인 주제에, 정말로
모호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그녀가 택할 길을 믿어보고 싶다고 하셨지. 그냥 그뿐이었고, 딱히
그녀를 페이넌스 왕가의 권한으로 지원하라고 말씀도 없으셨다.”
“하지만 아마, 칼트 왕세자 저하도 여기
계셨으면 그 교섭 조건을 그대로 받으셨을 것 같아.”
“동감이다.”
어딘지 비어 보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민스를 쏘아보며 유고는 가시 돋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정작 너는 세네핀 크롬웰을 믿지
못하는 건가? 루민스 할데르프.”
“…….”
평소라면 바로 그 도발에 맞서 발끈했을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세네핀은 그 어느 때라도 믿습니다.
제가 믿지 못하는 건…….”
한숨처럼 그는 중얼거렸다.
“신과 이 세계입니다.”
◆◆◆
정령은 수인족처럼, 멸망의 절벽을 향해 굴러떨어져
가고 있다.
정령왕의 그 충격적인 말이 울려 퍼지자마자, 진이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먼저 반응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정령왕.”
[수인족의 유일한 생존자여. 내가 세네핀
크롬웰과 함께 그대를 지목한 것은, 물론 나와 호각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대에게는
이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뭣.”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만, 들어주겠느냐? 나의 어리석은 과거와, 수인족이 멸망한 경위를.]
세네핀은 진을 내려다보았다. 진은 초록빛
눈을 형형하게 뜬 채 정령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씀해 주십시오. 정령왕님. 그게 당신이
‘소원의 조각’을 추구하는 이유인 거죠?”
“나도 남김없이 듣겠다.”
[좋다.]
정령왕이 손톱으로 벽을 긁자, 삽시간에 검은색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 조각의 빛도 없는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도 기묘하게 서로의 존재는
인지되었다. 세네핀은 진의 갈기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200년 남짓 예전 일이다. 당시 페이넌스
국왕은, ‘소원의 조각’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의구심이요?”
[왕가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이긴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급기야,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게지.]
[당시에 알페이넌스 또한 오래도록 인간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숨어 있었다. 기록이 남아 있지만, 거짓이나 공상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충분히
긴 시간이었지. 그래서 페이넌스 국왕은 실험해본 것이다. <별을 향한 초대>가 정말로 신의 권능에 의한 물건인지.]
마치 은하수처럼, 암흑 저편으로 빛가루가
흩뿌려졌다.
“……그리고 신이 허락한 거군요.
<별을 향한 초대>의 사용을.”
[그래. 자신의 권능을 믿지 않는 인간에
대한 괘씸죄였는지, 평소와 같은 변덕인지는 알 수 없다만. 나는 아마 변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째서지?”
[별세계에서 찾아온 인간이 떨어져 내려온
건, <별을 향한 초대>가 있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정령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상대방이 인지되는 기묘한 어둠 속에서,
세네핀은 정령왕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를 무척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척 쓰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소년이었다. 며칠을 굶은 듯한, 왜소한
소년. 정령들이 그를 나에게 데려왔을 때, 나는 그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재밌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그를 키우기로 했다.]
세네핀은 입을 달싹였다.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온 사람이었을까. 국적은 똑같이 한국일까.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인 그 소년의 결말은, 처음부터 비극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었다.]
“그 사람이 무언가 나쁜 짓을 저질렀나요?
별세계의 인간은 강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일반적인 인간보다도
힘이 없는 자였다. ……처음에는 그랬다.]
“……?”
[별세계의 인간이 근원적으로 이 세계의 근원과
법칙을 무시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 이 세계의 신이 정해놓은 법칙과
인과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건 즉, 별세계에서 온 그 소년이 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손을 뻗어 정령왕은 어둠에 흩뿌려둔 빛의
조각을 자신의 손으로 모았다.
[소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란다스트 대륙의
자연 마나를 모조리 자신의 몸에 흡수하는 체질이었다. 신이 균형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든 장치는 그가
세계를 위협할 거라 보고―]
정령왕이 주먹을 꽉 쥐자마자, 빛의 잔해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그를 마땅히 없애야 할 오류로 판정했다.]
세계의 적.
세네핀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 소년이 자연 마나 고갈의 원흉이었단 말인가.”
[잔혹하게도, 그랬다. 본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네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걸 모르고, 이상할 정도로 죽을 위기에 자주 처하는 약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키우며 정도 들었으니, 열심히 보호했지.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얄궂게도 그대의 종족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과정이었다.]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알페이넌스가 움직였을
때, 이미 수인족은 원래도 많지 않던 수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 자리한 침묵은 진의 비통함을 비추는 듯했다.
세네핀은 차마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를 원망하나?]
“……글쎄. 당시 나는 잠들어 있었던 덕에
운 좋게 살아남았으니까. 오히려 혼자서 살아남은 죄책감이 더 컸다. 별세계에서 온 그 인간을 원망한다
해도, 달라지는 게 무엇이겠나.”
“진…….”
“하지만 그건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풍화된
나의 감정이다. 당시에 깨어 있었다면 죽도록 증오했을지도 모르지. ……어떤 생물이든,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은 동일하지 않다.”
[후후, 철학적인 관점이로구나.]
유쾌하다기보다 조금 쓸쓸하다는 듯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알페이넌스는 조사 과정에서 <별을
향한 초대>가 사용된 것을 알았다. 그 소년의 존재 역시 알게 되었지. 언제나 냉정한 자이니만큼,
그는 요구했다. 소년의 죽음을.]
“우리 종족이 적은 수조차 남지 않았다는
건,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겠군.”
[그렇다. 그러니 그대에게는 권리가 있다. 나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가.]
정령왕의 뒤로 다시 별 같은 빛이 흩어져갔다.
그것을 조금 눈부신 듯 바라보며 세네핀은
진을 꽉 붙들었다.
이대로 진이 종족의 복수를 위해 정령왕을 공격하는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대화의 여지는 그것으로 끝이고,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가능하면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비통한 심정을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막아도 되는 것일까?
그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 순간, 진이 이름을 불렀다.
“……세네핀.”
“네, 네에. 진.”
“나는 궁금했다. 그대는 마정령에게 목숨을 위협당했지. 실제로 죽을 뻔했다. ……그런데도 대화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낮고도 강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녹아들면서도 잔향을 남겼다.
사방에 펼쳐지는 별빛을 쥐려는 것처럼 세네핀은
잠시 손을 들었다가, 친애하는 벗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저도 평범하게 무서웠고, 원망스럽기도 했고 그래요. ……하지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왜 신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렇게 만들었다니?”
“신은 균형을 중요시했죠. 일단은 세계가 멀쩡하게 굴러가도록. 그렇지만 대륙에 있는 생물들이 대립할만한 장치를 여럿 만들었어요. 인간의
희생 없이는 존재가 유지되지 않는 마정령, 다른 종족의 영역을 침략해야 ‘소원의 조각’들을 다 모을
수 있는 구조…….”
“……그래, 그렇지.”
“그래서 생각하는데요. 신은, 피조물들이
자기에게 휘둘리는 걸 보는 게 재밌는 거 아닐까요?”
“휘둘리는 걸 보는 게, 재미있다…….”
“네. 그러니까 여기서 또 ‘소원의 조각’을
둘러싼 투쟁에 휘둘려서 마정령의 위기에 박차를 가하면, 자연 마나 고갈 때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알페이넌스 님과 정령왕님이 결국 골을 메우지 못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어 그녀는 진과 눈을 맞추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게 진 본인의 의지라면 어쩔 수 없어요.
진이 신에게 휘둘린다는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친구인 나는……. 진이 슬픈 굴레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작은 강아지 모습일
때처럼, 그는 코를 그녀의 목에 묻었다.
“……나의 소중한 벗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 무의미한 항쟁을 하지 않겠다.”
“그게 진의 행복으로 이어지길 바라요. 진심으로.”
잔잔한 침묵과 어둠의 장막이 조금씩 걷혔다.
마치 아침이 오는 것처럼 주변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대의 선택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보내겠다. 수인족의 명예로운 후예여.]
“그런 과찬을 받을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세네핀 덕분이다.”
[물론, 별의 아이에게도 감사하마.]
“……아, 아니요! 그, 그런 건 됐고……. 저기, 그래서.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마저 이야기 들려주셔야죠!”
몸 둘 바를 모르는 심정으로 세네핀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녀를 조금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정령왕이 미소했다.
[그래. 소년의 이야기였지. 나는 소년을
끝까지 지켰다. 그 애에 대한 정이나 사랑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 애는 나의 종족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알페이넌스나, 이제는 사라진 수인족의 수호자에 대해 깊게 쌓인 원한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도 있겠으나, 역시 그것만은 아니다.
딱 잘라 논리적인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다. ……나는 각 종족의 수호자 중 가장 인간에 가까운
성격이니까.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조화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알페이넌스, 자신의
종족을 최우선으로 품는 감정적인 마정령왕…….
그렇다면 수인족의 수호자는 어떤 타입이었을까,
세네핀은 홀로 생각하며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알페이넌스와 대립하여 싸우고, 또 싸웠다. 결국, 호각으로 싸우다가 둘 다 치명상을 입고 끝났지. 누구도 얻은 것이 없는, 그런 싸움이었다.]
그 싸움이 일어나는 사이에 결국 수인족은,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어린 수인만을 남기고 멸종된 것이라는.
그렇게 슬프고도 허무한 이야기였다.
[나와 알페이넌스는 그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 후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졌지.]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나요?”
[자신이 이 세계의 자연 마나를 거의 다
흡수했고, 어떤 종족을 멸망으로 몰았다는 사실을 종국에는 알게 되었다.]
“…….”
그건 어떤 기분일까.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고, 어떤 악의가 없었는데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생명체가 자신 때문에 말살되었다는 걸 알게 되는 기분은.
[별세계에서 오는 인간은 정신이 튼튼한 편이지.
……허나, 그것으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깨졌다.]
결말을, 어쩐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감이 공간을 짓누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의 결말에 세네핀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유해를 확인하고, 더 버티기 힘들어 잠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단다. 무엇이 정답이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편히 죽을 수 있게 가장 처음 내 손으로 보내주는 게 좋았을까?]
“…….”
[그 무엇도 정답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긴 잠에서 얼마 전에 깨어났지.]
켜켜이 쌓인 세월처럼 눅진한 움직임으로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1/10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는 나의 아이들과, 이대로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우리 종족의 운명이었다.]
“……그건 어째서지?”
[불가침 조약을 맺기 전에, 인간과 우리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투쟁을 벌였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목숨과 부정적인 감정’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는 의미다.]
세네핀은 숨을 들이켰다. 200년이 인간에게는 평화로운 기간이었으나, 마정령에게는 산소가 한정된 밀실에 갇힌 기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우리 종족은
인간에 대적할 전력조차 없었다. 페이넌스 왕국이 사력을 다한다면 아마 우리 종족이 멸망하는 건 채
두 달도 걸리지 않겠지.]
“…….”
[하지만 대체 무엇을 원망할까? 확실하지 못한 애정과 뚜렷하지 못한 증오심으로 알페이넌스와 대립하여 잠이 든 건 순전히 내 선택이었다.]
“그래서, ‘소원의 조각’을 마지막 수단으로
택하신 거군요.”
◆◆◆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통해
회귀하려고 한 건가?”
[아니. ……사용했다고 해도, 아마 재미없다고 생각한 신이 승인하지 않았을 테지. 그리고 회귀해봤자 소용없었을 거다. 별의 아이의 말대로
신은 또다시 우리를 휘두를 장치를 마련할 테니까.]
“정령왕님이 ‘소원의 조각’에 빌고 싶은 소원은 무엇인가요?”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지금 수준만
유지해도 좋으니 우리 종족이 조용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까, 아니면 인간을 완전히 압도할 만큼
세력을 성대하게 만들어달라고 빌까.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어차피 나 역시 신이 만든 장치 중 하나일 따름인 것을.]
“…….”
마정령이 거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커다란 손가락을 세네핀에게 가져갔다.
진이 경계하는 기색이었으나, 세네핀은 고개를
저었다.
곧 정령왕이, 뺨을 쓰다듬는 것처럼 세네핀의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별의 아이야. 그대에게 걸어보아도 괜찮겠느냐?]
“네?”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 그대가 신과
대면하는 그 순간에 걸어봐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세네핀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부터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을 생각이긴
했다. 그녀에게는 흩어져 있는 자신에 대한 수수께끼를 모으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루민스가 살아서
행복한 모습을 볼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았을
때 신에게 어떤 것을 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종족의 안위를 건 항쟁 외에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유예를 준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그대가 해낼 수 있다고 걸어보고
싶구나.]
“……저는.”
[그대가 계속 고민하여 결정하면 족할 것이다.
신에게 무엇을 빌어야 할지.]
세네핀의 뺨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뒤로 물리며,
정령왕은 자신의 가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투박한 술잔이
두둥실 떠올랐다.
마정령의 영역에서 보호되고 있는 ‘소원의
조각’인 <엿보는 자의 신음>이었다.
세네핀이 알고 있는 게임 내용에서라면, 정령왕을
죽이기 전까지 얻지 못했던 그 아이템.
정령왕이 <엿보는 자의 신음>을
툭 밀자, 느릿한 속도로 세네핀에게 흘러가듯 도달했다.
[그대에게 태초의 어머니, 정령왕의 가호를.]
강렬한 예감과 함께 세네핀은 손으로
<엿보는 자의 신음>을 쥐었다.
다시 정신 안으로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해일처럼, 땅거미처럼.
동시에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갔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지만, 또한
궁금했다.
흐릿해지는 세네핀의 정신이 완전히 어둠으로
잠겨 들었다.
Ⅳ. 잔해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공존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와중, 세네핀은 자신이
다시 누군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꿈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울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꿈의 ‘나’라는
것도.
무언가 상황을 판단하고 싶어도, 눈앞이 뿌예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세네핀은 ‘나’와 공명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앉아서, 바닥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때로는 엎드려서 울었다.
사람의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것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울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갑자기 방문 밖을 ‘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년! 조용히 할 줄도 모르나!”
그와 동시에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세네핀
역시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심장이 졸아드는 기분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침대에 기어 올라가
입안을 이불로 꽉 틀어막았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조금 새어 나왔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울음소리가
줄어든 것에 ‘나’는 만족했다.
서서히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내’가 눈을 떴을 때, 블라인드를
쳐서 어두운 방 안으로도 햇살이 조금씩 들이치고 있었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이고, 세네핀은 그럭저럭 크기가 있는 그 방을 보고 놀랐다.
컴퓨터, 책상, 침대, 책장, 벽지……. 그 모든 형태가 익숙했다.
이곳은 한국이었다.
‘나’의 생활은 단조롭고 느슨하게 이어졌다.
컴퓨터를 켜고 온종일 놀면서 발작처럼 웃는가 하면, 갑자기 울면서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집에 사람이 없는 낮 시간을 골라 조심스럽게
1층에 내려가 냉장고에서 아무 음식이나 챙겨 먹고, 사람이 있을 때는 방 안에 틀어박혔다.
‘나’는 충동적으로 울고, 웃고, 화내고,
괴로워했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세네핀에게도 흘러들어왔다.
세네핀은 ‘나’의 일상을 보면서 점점 물이
차오르는 수조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을 느꼈다. 가능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나’에게 욕지거리를
뱉는 인물은 때로는 노파이기도 했고, 때로는 노인이기도 했다. 욕을 먹으면 ‘나’는 부들부들 떨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너를 낳아놓은 잡년이 또 뻔뻔하게 돈을
달라 그런다. 그년 있는 데로 같이 나가버려!”
“함부로 몸 굴리며 양공주가 된 니 애미나, 너 같은 미친년이나 아주 쏙 빼닮았구나!”
들려오는 폭언과 때때로 끊기는 것처럼 들어오는
‘나’의 기억으로, 세네핀은 대략 ‘나’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미혼모로 낳은 ‘나’를
자신의 부모에게 맡기고 도망갔고, 때때로 돈을 달라고 부모한테 요구하는 것 외에는 행방이 묘연했다. ‘나’의 외모로 보았을 때 아버지는 서양인이었고, 그게 ‘나’의 조부모에게는 더 더럽고 집안의 수치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집안에 해가 될까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돈 주며 혼자 살게 하기에는 집안에 누가 되는 짓을 저지를까 염려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가라느니
욕을 내뱉지만, 실제로 조부모는 ‘나’를 가둬두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가끔 폭언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했다.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 걷어차여서 내장 파열을 일으킨 다음에는 병원에 데려가는 게 남 눈 부끄럽다고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있으니까.
‘나’ 역시 제 발로 밖에 나갈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끔찍한 일상 중 약간의 ‘괜찮음’을 건져내는
작업을, ‘나’는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공상이 좋고, 픽션이 좋다. 게임도, 영화도, 드라마도, 책도, 세상에 넘치는 온갖 창작물들만이 ‘나’를 풍요롭게
했다.
건져낸 ‘괜찮음’의 잔량이 고갈되면, 다시
끊임없이 울었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
‘나’의 일상을 일방적으로 흡수하며 완전히
수조 안에 물이 꽉 찬 것처럼, 세네핀은 고통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켰으나,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도피가 임계치에 도달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부 ‘김세나’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어질어질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세네핀은
가슴을 붙들었다. 물리적으로 신체가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알페이넌스가 주었던 비늘 펜던트가 손에 잡혔다.
동시에 조금씩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으로
돌아갔다.
육체적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효능이 있었구나. 굉장하다, 시초룡의 비늘. 상황과 맞지 않게 세네핀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실감은 없었다.
자신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도,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도 분명히 그곳에 있는 끔찍한 일상이 가짜는 아닐 거라고 세네핀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신이 안배한 정신적 보호 장치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녀는 아란다스트 대륙에 온 이래 현실을 떠올리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무의식중에 저 끔찍한 일상을 거부하고 싶어서
현실을 떠올리기 싫었던 것 아닐까. 그렇게 남의 일처럼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아, 돌아가고 싶다.
세네핀은 먹먹한 기분을 담아 속으로 되뇌었다.
어느샌가 ‘돌아가야 할 장소’를 저곳이 아닌,
아란다스트 대륙의 사랑스러운 이들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세네핀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누워있던
‘나’는 부스스 일어나 욕실로 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나’는 세면대
앞에 섰다.
세네핀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거울에 비춘 ‘김세나’의 얼굴은, 눈물에
조금 부어 있긴 했으나.
무의식중에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세네핀은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하지만, 어째서…….
세네핀의 의문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
“…….”
정신을 차렸을 때, 세네핀은 이전처럼 하얀
공간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떴다.
남색의 거체를 지닌 정령왕과 은빛 늑대의 모습을 한 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네핀, 괜찮은가? 잠깐 멍해 보였다만…….”
이전에 <별을 향한 초대>를 만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네핀 본인의 인식만 긴 시간으로 느껴질 뿐 잠깐의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세네핀은 ‘소원의 조각’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품에 있는 알페이넌스의 펜던트를 꾹 쥐었다. 정신이 한층 맑아지는 것 같았다.
[별의 아이야. 그럼 <엿보는 자의
신음>도 봉인하도록 하려무나.]
“알겠습니다.”
복잡한 생각을 치워두고, 세네핀은 눈앞의 일에 우선 집중하고자 했다.
“잠드는 시련이여, 온화한 한숨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별을 향한 초대> 때도 사용했던
그 스펠을 입에 담자 투박한 술잔이 빛을 내뿜으며 세네핀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진이 물었다.
“정령왕이여, 궁금한 점이 있다만.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야 한다면, 현재 페이넌스 왕국에 안치된 <별을 향한 초대>도 꺼내와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유물이라는 형태의 물체는
어디까지나 매개체에 지나지 않으니까. 의식체라고 해야 할까……. 신을 부르기 위한 핵심적인 ‘조각’은
별의 아이 안에 이미 들어 있다.]
“…….”
세네핀은 가슴을 누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게임에서도, ‘소원의 조각’은 일반적인 아이템 탭과 다른 인벤토리에 특수 아이템으로 분류되었다.
[그대에게 무운이 있기를 바란다. 세네핀
크롬웰. 너의 가능성을 믿겠다.]
“……네. 혹여 실패하더라도, 최대한 페이넌스 왕국의 왕세자 저하나 국왕 전하를 설득해서, 정령왕님과 좋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게요.”
주변이 점차 회색 안개로 둘러싸여 갔다.
정령왕이 자신들을 원래 장소로 되돌려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네핀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엇이지?]
“정령왕님도 알페이넌스 님과 마찬가지로 회귀하기
전 세계를 기억하시죠?”
[그렇다.]
“……정령왕님도 그때 보지 못하셨나요? ‘제 얼굴’을?”
흐릿한 안개 너머로도 조금 의아해 보이는
정령왕이 속삭이듯 답했다.
[보지 못하였다.]
“……아.”
주위를 둘러싼 회색 안개가 사라지고, 세네핀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추악한 대지’와 인간령의 경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네핀! 진!”
“세네핀, 진……!”
“……왔나.”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루민스, 반색하는 벨키나,
그리고 유고의 모습이 세네핀의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대하여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그들의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알, 페이넌스?”
햇빛이 비치면 초록빛으로 반사되는 푸른색의 비늘을 덮은 거대한 용이 조금 떨어진 뒤쪽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떻게 되었어?”
“저, 저랑 진은 별일 없고……. 그것보다 저 용은 알페이넌스 님이죠? 대체 어떻게 된…….”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잖아!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니지!?”
루민스가 잡아먹을 기세로 세네핀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아, 아하하. 괜찮아요. 저기, 실은 제가
<엿보는 자의 신음>을 받아왔는데요.”
“뭐? 정령왕을 쓰러뜨리고 온 거냐?”
“그건 아니고요!”
◆◆◆
[그랬습니까. 마정령왕이…….]
진과 세네핀의 설명을 들은 알페이넌스는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알페이넌스를 올려다보며 세네핀이 물었다.
“알페이넌스 님은 정령왕을 원망하시나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알페이넌스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용의 모습은 그다지 멀쩡하지 않았다. 날개 한쪽이 사라져 있었고 남은 날개도
꺾여 있다.
그게 200년 전에 있었던 투쟁의 결과라는
건 세네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뇨. 필요해서 싸웠던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일 역시 그렇지요. 그들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소원의 조각’을
이용하려 하는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내 위치에서는 그걸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의도해서 나쁜 짓을 한 건 아닌데,
결론이 상처뿐인 거 슬프네.”
벨키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며 세네핀이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당장은 소원의 조각을 마지막 하나까지 모아 신과 대면할 때까지 마정령과 휴전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나.”
“네, 유고. 아직 어떤 소원을 빌지는 모르겠지만요.
저, 그렇지만 제가 함부로 그 소원을 정해도 될지……”
세네핀은 알페이넌스의 눈치를 보았다. 푸른
몸과 푸른 눈을 가진 용이 입을 열었다.
[제가 소원의 조각 세 개를 다 모으자고 했었지만, 그건 마정령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미였습니다. 마정령왕이 당신에게 <엿보는 자의 신음>을
맡긴 이상, 위협도 사라졌지요. 딱히 어떤 소원을 빌라고 당신에게 지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괘, 괜찮나요? 제가 막 엉뚱한 거 빌면
어쩌시려고요. 부자 되게 해달라거나…….”
그녀의 말에 일행은 실소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루민스가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세네핀이 원한다면 별로 상관없지만, 아마
세네핀은 그러지 못할 사람일 테니까.”
“루민스…….”
“마정령이 너에게 맡긴 신뢰를 배신하지 못하겠지. 다들 네가 그런 사람인 걸 잘 알아.”
루민스의 말대로 세네핀은 그 소원으로 최대한
좋은 길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과 마정령을 평화롭게 공존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이 세계의 신이 모호한 소원도 모두에게 이롭게끔
적용해 줄 것이라고는, 세네핀은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정확한 단어로 무엇을 요구할지
생각해야 했다.
“네. 제 나름대로 마정령도 인간도 만족할
만한 답을 낼 수 있도록 고민해볼게요.”
[그럼 다음으로 내 용건을 이야기해도 될까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알페이넌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이 있는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예전에 수인족의 본거지였던 <해저도시 포마르디>입니다.]
‘예전 수인족의 본거지’라는 말에 모두 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의외로 덤덤해 보였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곳이다. 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이미 ‘고요의 호수’ 쪽에서 살고 있었다.”
“……그랬군요.”
“혹시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은
원래 수인족이 관리하던 유물이었다거나?”
[맞습니다. 그래서 수인족과 연이 있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확인했죠.]
벨키나의 의문에 답해주며 알페이넌스가 설명했다.
[수인족이 관리하던 유물이니 수인족에게 중요했던
지역에 있을 거라는 예상은 맞았습니다만, 회귀 전 세계와 위치가 달라져서 약간 애를 먹었습니다.]
아마도 ‘고요의 호수’가 지닌 자연 마나가
박살 난 나비효과가 여기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세네핀 역시 게임에서 <해저도시 포마르디>에
가본 적이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치고는 언제나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알페이넌스가 말을 이었다.
[<해저도시 포마르디>는 기반이 불안정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당장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회수하지
않으면 세 번째 소원의 조각이 바다 밑에 영영 묻힐 거라는 뜻이죠.]
“아…….”
그렇다는 건, 일단 수도로 들러서 보고하거나
체제를 정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우선은 양 종족의 충돌을 막았어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지금 이 결정을 바로 올센느와 수도에
전달하겠다. 수정구로도 연락하겠지만, 이 정도의 결정은 내가 직접 전하는 게 신뢰도가 있겠지. 어찌
되었거나 ‘소원의 조각’을 일개 마법사에게 위임한다는 것 역시 모왕과 형님께 설명이 필요할 테고.”
그건 유고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네핀은 새삼 그에게 받았던 도움이 얼마나
컸던가 깨달았다.
“유고……. 고마워요. 저를 믿어주고, 힘든
결정을 해준 거 모두요.”
“내가 판단하여 선택한 길이니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그 말을 남긴 후 유고는 루민스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차진 않지만, 네놈 정도면 호위로
부족하진 않겠지. 세네핀 크롬웰을 끝까지 지켜라.”
“굳이 왕자님께 말씀 들을 일도 없는 사안입니다.”
“대답 한마디면 끝날 것을, 말이 많군.”
다른 이들에게 짧게 인사를 남기고 유고는
빠르게 올센느 방향을 향해 모습을 감추었다.
알페이넌스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경계를 지킬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페이넌스 왕국이 쓸데없이 마정령을 자극하지 않게끔 하는 의미로도.]
페이넌스 왕국에서 군사 경계 지역으로 군대를
보낼 여지를 차단하겠다는 의미였다. 감시역을 자처하겠다는 알페이넌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는 그냥 듣고 넘길 수 없군.]
정령왕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목소리와 함께
회색 안개를 꿈틀거리며 존재를 드러냈다. 정령왕의 목소리를 실은 안개는 주변을 감싸듯 퍼져 나갔고,
알페이넌스는 그게 마치 정령왕 본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요. 정령왕.]
[후후. 얼마 전에 봤던 얄미운 얼굴 아닌가.]
정령왕이 도발하듯 말했으나, 알페이넌스는
담담하게 답했다.
[무슨 일이지요? 아니…… 의미 없는 질문이군요.
다 듣고 있었을 테니. 제가 이곳에 머무는 게 유쾌하지 않은 겁니까?]
[그래. 나는 세네핀 크롬웰을 믿고 있는
거지 시초룡 알페이넌스나 페이넌스 왕가를 믿지는 않는다. 네놈이 신성한 대지의 코앞에서 버티고 있는데
나와 정령들이 평안히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무엇을 원합니까? 나 역시도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알페이넌스가 대꾸하자 회색 안개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침묵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우리 쪽에 인질을 남기도록 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들이 숨을 삼켰다.
당황의 기색을 감지한 것인지 회색 안개가 물결처럼 요동쳤다. 어쩐지 불온하게 움직이는 안개는 요구가
무시당했을 때의 대응을 준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건…….]
정령들의 안전을 위해 시초룡과 페이넌스 왕국에
대항할 수단을 확보하려는 정령왕의 요구에도 일리는 있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면 정령왕이 말한
대로 인질을 보내는 것이 가장 평화로운 해결법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알페이넌스는 선뜻 정령왕의 요구를 수락하지 못했다. 일행 중에서 인질로 남을
만한 사람이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벨키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갈게요!”
“베, 벨키나?”
세네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벨키나는 씩씩하게 웃었다.
“지금 여기에 인간은 세 명뿐이죠. 그런데 세네핀은 세 번째 소원의 조각을 회수하러 가야 하고, 루민스는 세네핀의 호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외에 유일한 인간인 제가 적임이겠네요.”
[벨키나…… 하지만.]
알페이넌스가 그답지 않게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벨키나는 알페이넌스를 올려다보았다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살다 보니 볼모 노릇도 했다고 평생 이야깃거리 생기겠네요!”
[후후. 발랄한 아이로구나. 이런 아이는
나도 싫어하지 않지.]
“헤헷! 잘 부탁드려요, 정령왕님!”
알페이넌스가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알페이넌스의 분위기를 읽어 보려던 세네핀은 그가 인간 모습을 하고 있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
인간 모습일 때로 따지자면, 조금 씁쓸한 얼굴을 하는 상태일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벨키나와 함께 있겠다.”
은빛 늑대의 모습으로 벨키나를 바라보던 진이
그렇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진까지요?”
“내가 함께 있는 편이 안전할 테니까. 딱히 정령왕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만.”
“뭐어야, 진이 언제부터 날 그렇게 생각해줬어?
그런 사랑을 몰라줬다니 내가 후회되잖아!”
벨키나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과장되게 장난을
쳤다. 진은 또렷하고 맑은 에메랄드색 눈동자로 루민스를 응시했다.
“그래, 모든 사랑은 표현해야 하는 거지.
―루민스.”
“……진.”
“이 여행에서 단순히 무력 면을 따지자면
그대 혼자만 세네핀을 호위해도 충분하고 남았을 거다. 유고 페이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아까 그런 말을 한 거겠지. 그럼에도 우리가 세네핀과 함께하고 지키려고 했던 그 마음을 그대도 모르지는 않을 거다.”
“…….”
진의 털에 뺨을 비비던 벨키나도 루민스를
올려다보며 말을 보탰다.
“뭐가 되었든 해결하고 와. 있잖아, 나는
물론 세네핀이 가장 좋지만, 루민스 너도 그럭저럭 좋아하고 소중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다 털어버리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구.”
“……그래. 나도 네가 그럭저럭 좋고 소중해.
벨키나.”
“그럭저럭이라니 너무하네 얘가?”
“자기가 먼저 그럭저럭이라면서, 왜 성질이야?”
“내가 그럭저럭 좋아해도 넌 날 많이 좋아해야지!”
“그건 무슨 도둑놈 심보인데.”
“……그대들, 적당히 해라.”
비장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평소처럼 긴장감 없이 싸우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세네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얄미운 말로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감사와 미안함을 대신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정령왕이 세네핀을 신뢰하고 있다고 해도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페이넌스 왕가는 결국 전쟁을 택할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볼모가 된 진과 벨키나의 안전이 완전히 보장된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무거운 역할을 감내해주며 격려하는
길을, 결코 망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벨키나. 진. 되도록 빨리 다녀올게요.
즐거운 마음으로 재회해요!”
그러니, 잠깐의 이별은 웃으면서 나누자.
활짝 웃으며 양손을 흔들어주는 벨키나, 따뜻한
눈으로 배웅하는 진의 모습이 회색 안개에 휩싸이는 것을 바라보며 세네핀은 각오를 다졌다.
Ⅴ. 그녀와 그의 간격
‘해저도시 포마르디’는 아란다스트 대륙 최남단
바닷가에 위치한다는 것이 알페이넌스의 설명이었다. 알페이넌스로부터 포마르디에 관한 대략의 정보를 얻은
세네핀과 루민스는 곧바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여유 없는 일정이었던 터라 세네핀은 페이너스
왕국 최북단의 도시 올센느에서 대륙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을 때에서야 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고, 올센느까지는
행군과 노숙이 고달파서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그녀는 루민스와 단둘이 여행 중이었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라니……. 아침부터 계속 굶었으니까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아! 맞다! 그랬죠! 먹겠습니다…….”
“응, 주문할게.”
물론 포마르디까지의 여정이 지금까지 고생한
과정의 마지막 관문이 남은 중요한 여행이고 다른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세네핀 역시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애이자 목하 짝사랑을 자각한 상대와
단둘이 여행이라는 건 파괴력이 상당했다.
처음 루민스를 만난 이래 세네핀의 주변에는
항상 떠들썩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녀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벨키나, 마나 때문에 세네핀을
등을 바친 대상으로 선택한 진. 후에 합류한 유고.
물론 가끔 루민스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있긴 했으나, 둘뿐이라는 사실을 세네핀이 의식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둘이서만 보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짝사랑의 상대와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에 세네핀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설렘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 세네핀의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업무의 연장선, 직장 생활 중에 흔히 발생하는 출장 같은
것이었다.
‘긴장해라, 세네핀 크롬웰…….’
그렇게 그녀는 정신통일을 시도했다.
“……세네핀? 어디 아파?”
이마에 양손을 대고 기라도 모으는 듯한 동작이
기묘하게 느껴진 것인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루민스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말 열차 여행
실컷 한 것 같아요. 루민스가 처음에 그랬잖아요, 처음에만 신기하고 나중에는 지겨울 거라고. 정말
그 예언대로 될 줄 몰랐지 뭐예요.”
“음……. 난 지금 무척 설레고 좋지만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그가 미소했다. ‘심장에
무리 가니까 그러지 마라, 루민아!’라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세네핀은 창으로 몸을 홱 기울였다.
루민스에게 온갖 신경이 쏠려서 별 관심도 없던 바깥 풍경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으음. 그렇지. 아, 콜시언 산이다.
나도 마법 사진으로밖에 못 봤는데.”
세네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민스는
창문으로 몸을 가까이하며 다시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세네핀은 재차 마음속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휴, 휴화산이었죠? 열차에서 지나가는 거로
봐도 멋지네요.”
“응. 새삼스럽지만, 대륙 전체를 동서남북 다 돌아다니는 여행이 되었네.”
“그러게요. 마법연구원은 동쪽에 있었고,
‘공중낙원의 미로’는 서쪽 라터체니령이었고, 마정령의 영역은 북쪽이고, 이번에는 남쪽…….”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더 즐거웠을 텐데.”
“맞아요. 진이랑 벨키나랑 다 같이, 대륙
횡단도 하고 종단도 하는 여행을…….”
그러자 루민스는 조금 쓴웃음을 보였다.
“……나는 세네핀이랑 둘이 와서 즐겁다는
건데.”
“그……. 그게, 저기, 저, 저도 물론
그렇죠! 그렇지만 지금 진이랑 벨키나는 마음고생 하고 있으니까요!”
딱히 루민스를 책망하려는 말이라기보다, 상황을
가리지 않고 쿵덕대는 세네핀 자신의 심장을 채찍질하는 말에 가까웠으나, 루민스의 표정이 살짝 흐릿해졌다.
“그러게. 너무 오래 뻔뻔하게 살았더니,
무감각해졌나 봐.”
“……?”
“……포마르디까지 들어가는 방법, 다시 확인하자.
입구는 해안동굴 지대를 통한다고 알페이넌스 님이 말해줬으니까―”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간 루민스가, 자기 자리
쪽으로 몸을 바로 하며 ‘해저도시 포마르디’로 진입하는 방법을 세네핀에게 확인해주었다.
세네핀은 그런 루민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설명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루민스가 조금 전처럼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가
끝맺지 않고 얼버무리는 상황은 이전에도 몇 번씩 있었다. 루민스가 입에 담은 말들의 의미를 세네핀이
완전히 추론해내기 전에, 루민스는 대화를 끊고 꼬리를 숨기듯 진실을 감추곤 했다.
덕분에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세네핀에게 루민스와의 대화는 대체로 수수께끼나 다름없었다. 많은 기억을 되찾으면서 세네핀은 루민스가
남긴 수수께끼의 대부분에도 답을 얻었으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은 남아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세네핀은 알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딜 용기가 부족했다.
대륙 정세와 관련된 무모한 결정도 했고, 루민스를 살리기 위해 온몸을 바쳐 과감한 짓들도 저질러 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을 향하는 길이, 다른
모든 것보다 어려운 과정처럼 느껴졌다.
◆◆◆
최남단의 도시 티살에 도착한 루민스와 세네핀은
포마르디로 떠나기 전에 도시에서 하루 묵으며 정비를 하기로 했다.
문제는 티살이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였고,
마침 휴양철인 한여름이라 바다로 휴양 온 사람들로 도시가 북적거린다는 점이었다.
즉, 도시에 호텔이 아무리 많아도 형편 좋게
묵을 수 있는 방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앞선 네 군데에서 허탕을 치고 다섯
번째 호텔까지 찾아갔을 무렵에는, 오랜 열차 여행과 인파에 밀리며 숙소를 사냥하러 다닌 피로가 세네핀의 어깨에 누적되어 있었다.
“마침 취소된 방이 딱 하나 있습니다만,
이용하시겠습니까?”
“네. 가격은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으니 부탁드려요!”
호텔 지배인의 대답이 세네핀에게는 마치 천국의
나팔소리처럼 들렸다.
세네핀이 재깍 반색하자, 친절한 영업 미소와
함께 지배인이 말했다.
“네, 손님들께서 운이 좋으셨습니다. 당
호텔의 자랑이기도 한, 최상층 스위트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스, 스위트룸…….”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굳어 있는 세네핀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더니 루민스가 지배인의 뒤를 따라갔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녀도
결국 그 뒤를 따랐다.
◆◆◆
도착한 방은 지배인이 ‘당 호텔의 자랑’이라고
단언할만한 곳이었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어서 석양으로 붉게 물들고 있는 바다를 중심으로, 엄청난
풍광이 커다란 창을 가득 채웠다. 응접실과 침실이 따로 분리된 구조,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우아한 인테리어도 과연 스위트룸다웠다.
그렇게 세네핀은 루민스와 스위트룸에 단둘이
묵는다는 사실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분리하여 머리에 집어넣었다. 노력이 효과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네핀이 어떻게든 일상적이고도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쓴 것만은 사실이었다.
스위트룸의 시설 안내를 마치자 지배인이 따사로운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저희 호텔에서 편안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간 순간까지 세네핀은 한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래도 노숙은 피해서 다행이네. 한동안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지붕 있는 숙소가 그리웠……, 세네핀?”
“……공주님 침대가 있네요.”
“재미있는 표현이네. 우리 본가에도 있는데,
공주님 침대야?”
세네핀이 말하는 ‘공주님 침대’라는 것은
천개가 달린 침대를 뜻했다. 고급 호텔답게 깨끗하게 손질된 시트와 드리워진 하얀 천은 노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하하!”
루민스가 드물게 소리를 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큭큭거리며 웃음을 진정시키는 모양이었다.
웃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신혼여행 같은 분위기의 방을 안내받아 살짝 패닉 상태였던 세네핀은 자신이 왜 긴장했던 걸까 허무해졌다.
“공자님 침대니까 루민스 쓰세요. 저는 응접실
소파 쓰면 되니까…….”
“으음, 공주님 침대니까 공주님이 쓰셔야죠.”
“네?”
농담조 같은 그 말과 동시에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왕이면 이동도 공주님처럼 해서?”
생글생글 웃으며 흔들리는 기색도 없이 그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침대까지 걸어갔다.
세네핀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계속된 노숙에, 쉴 틈도 없는 장거리 열차 여행에, 오늘 호텔을 찾느라 피곤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대체 이 체력 차이는 무엇인가.
특급 마법사와 6급, 아니 3급의 차이인가.
거의 기절할 것처럼 당황한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전혀 없는 현상들을 굳이 하나하나 놀라워하며 필사적으로
현실도피를 시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네핀의 지근거리에서 루민스의 얼굴이 보였다. 몸은 완전히 밀착되어서, 침대로 운반되는 중이었다. 그 모든 현실이 머릿속에서 엉키는데
도피하지 않는 것이 무리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공주님.”
루민스가 몸을 숙이며 세네핀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보랏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세네핀의 얼굴을 스쳤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루민스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대신,
여전히 누워 있는 세네핀의 위쪽으로 몸을 숙인 채 다정한 미소로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이치는 석양 때문에 온 방이 붉은색이라
다행이라고 세네핀은 생각했다. 분명히 지금 얼굴이 한계까지 새빨개져 있을 테니까.
침대에 눕혀지면서 자세가 바뀐 것 때문에
약간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을, 루민스가 손가락으로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동시에 세네핀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자각했다. 그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세네핀은 차라리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몸을 떼지 않은 채 세네핀의 머리칼을 장난치듯
만지작거리던 루민스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이어서 목덜미를 더듬었다.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지, 하고 그녀는 기억을 떠올렸다. 왕궁 파티에 참석하여, 며칠간 얼굴도 보지 못했던 루민스와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어째서 그때는 루민스를 앞에 두고 최애 타령만 하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세네핀은 과거의 자신이 놀라운 것을 초월하여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동시에 여유로워 보이는 루민스가 원망스러웠다.
혼자만 안달 내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현재가 괴로웠다. 원래 이런 게 짝사랑인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처음인 세네핀으로서는
지금 순간의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루, 민스야말로.”
“응……?”
“치, 친구한테 거리감이 너무 없는 것 아니에요……?”
원망을 담아, 그녀는 왕궁 파티에서 루민스가
입에 담았던 소리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지금, 그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 하나에 애달프고 우연히 가까워진 거리에 가슴이 뛰었다.
명백히 선을 넘어버린 지금 이 상황이 그녀 안에서 제대로 소화될 리 없었다.
“세네핀은, 친구한테 거리낌 없이 곁을 내주는
사람일지 몰라도.”
루민스의 몸이 더 기울어졌다. 숨결이 닿는
것보다 먼저, 부드러운 그의 머리칼이 뺨에 닿았다.
“나는 친구랑 이런 거 안 하는데.”
“……윽.”
그를 그저 최애 캐릭터로만 보던 예전이었다면,
세네핀은 그럼 자기는 루민스에게 친구도 아닌 거냐며 새파랗게 질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세네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가 깔고 있는 뉘앙스, 닿아 있는 온기의
은근함, 조금 무섭게도 느껴지는 그의 표정.
루민스의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날 밀어내지 않는
건, 기대해도 된다는 걸까?”
그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루민스는 부드럽게 미소하고 있지만, 그녀는 어쩐지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세네핀.”
“루, 민스……,”
“키스해도 돼?”
그 말과 동시에 세네핀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의 어깨를 잡고 홱 밀어냈다.
루민스는 그녀를 만난 이래 가장 당황한 얼굴로
몸을 떼었다.
“……세네핀?”
이름을 불러도 눈물만 뚝뚝 흘릴 뿐, 그녀는 답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루민스가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 장난이 지나쳤어. 사과할…….”
“그게 아니죠!”
“저, 이런 거, 하나도 모르고, 처음이라,
다 불안한데…….”
“…….”
“말로,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감정이라거나,
관계라거나, 세상에 넘치는 말들……. 흔해도 좋고, 뻔해도 좋아요. 저 같은 사람이 알아듣게 해주세요…….”
태도라거나, 분위기라거나, 호흡의 간격 같은
것으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네핀에게 있어서 언제나 그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친밀하게 구는 것 같으면서 절대로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붙들기 위해서는, 흔하디흔하고 이 세상에 넘쳐나는 단어들을 모아, 확실한 형태로 고착시켜야 할 것만 같았다.
“……아녜요, 그냥 투정이었네요. 그냥 제가
하면 그만인데.”
“있죠, 루민스. 저는 루민스를…….”
“미안, 세네핀. 내가 나빴어. 먼저 말하게
해줘.”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그가 고개를 숙였다. 세네핀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네핀을 좋아해. 무척 오래전부터.
……앞으로도 변함없이.”
마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 그 간결한 단어에 담긴 무게감에, 세네핀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흘렸다. 떨리는 입술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답했다.
“루민스……. 저기, 저도 루민스를, 무,
무척 좋아해요.”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세네핀의 눈가를 더듬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루민스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기묘하다고 느꼈다.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루민스는 무언가를 쓰게 삼키는
듯한 얼굴로 옅게 웃고 있었다.
“……고마워. 앞으로도 세네핀이 좋아해 줄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린 후 루민스는 살며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야말로 그래. 어떤 세네핀이든, 다 좋아해.”
하늘의 남색 영역이 오렌지색 노을을 삼키기 시작하며 침실 안에도 어둠이 드리워졌다.
입술이 마주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세네핀은
눈을 감았다.
◆◆◆
긴 밤이 지나고 티살에서의 아침이 밝아왔을 때, 세네핀은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내 매력이…… 부족했나? 분명히 어제 그
흐름이라면 뭔가가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날 밤의 루민스가 세네핀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여준 다음 깔끔하게 응접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상 진도를 뺐다면 그건 그거대로 좀 무서웠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담백한 것 아닌가, 뭔가 좀 더 있었어도, 아니 더 있는 건 뭐람,
그런 고민들로 세네핀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침대 귀퉁이에 머리를 쾅 박았다.
“……아냐, 정신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네핀은 루민스와
여행을 시작한 목적이 결코 둘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일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세 번 정도 머리를 더 박은 다음, 세네핀은
자꾸만 딴생각으로 빠지려는 정신을 통일했다. 정말로 이럴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해저도시 포마르디’로
출발하는 본격적인 첫날이었다.
◆◆◆
“가장 빠른 루트는 역시 해안선을 가로지르는
거지만, 곳곳이 절벽이라 길이 험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아, 저는 길이 험한 정도는 상관없는데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야. 다치거나
지치지 않도록 마법을 활용하면 되긴 하지만, 험한 길이 길어지면 마나 낭비가 제법 되거든.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마나는 아껴두고 싶어.”
대체 어제의 고백과 입맞춤은 무엇이었나 싶을
정도로, 세네핀을 대하는 루민스의 태도는 여전히 담백했다.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오면서 앞으로의
이동 경로를 설명하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세네핀 본인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
머릿속 꽃밭에서 그만 나와서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를 꾸짖긴 했다. 루민스도 여행 중에는 사적인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어제 눈 뜬 채로 꿈을 꿨나 싶을
수준의 담백함이었다.
철저히 사무적인 대화 끝에 직선 경로를 좀
돌아서 가게 되더라도 평탄한 루트를 통하기로 결정짓고, 둘은 그 길을 한참 걸었다. 하지만 그사이
루민스는 의례적인 대화 외에는 딱히 핑크빛 무드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전혀 건네지 않았다.
‘정말로 꿈이라도 꾼 걸까? 아니, 그건
아닐 텐데.’
세네핀은 이게 화를 내야 하는 일인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고백받고 고백한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어디부터가 불만을 터뜨릴 일인지 어디까지 요구해도 되는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스물스물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은,
세네핀이 묻어두었던 불안을 떠올리게 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존재도,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루민스의 태도도.
환상처럼 지켜본 회귀 전의 김세나가 어째서
‘세네핀 크롬웰’과 동일한 생김새를 지녔는지, 어째서 알페이넌스나 정령왕은 회귀 전에는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 적이 없다는 것인지.
막연하게 시작했던 이 길의 끝이 정말로 별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또한,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사랑스러운 아란다스트 대륙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공포도.
세네핀은 알페이넌스가 준 비늘을 꽉 움켜쥐었지만,
불안이 썩 깔끔하게 사라져주지 않았다.
“세네핀? 어디 아파?”
걸음의 속도가 느려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세네핀을 돌아보며 루민스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
“……손.”
“응?”
“손, 잡고 가도 돼요?”
“되고 뭐고, 그건 내가 기쁜 일이지.”
오른손을 내밀며 루민스가 그녀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세네핀은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실은, 세네핀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가리고 싶어 했고, 그녀
역시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숨겼다. 서로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겉을 핥는 듯한 이 소꿉놀이는
끝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기쁘니까.
세계와, 신과, 초월적인 힘과, 운명 따위의――,
거창한 그 무언가를 떠나서.
손에 잡힌 부드러운 온기,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그의 눈이 얼마나 예쁜지, 그런 것들을.
세네핀은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계속 느끼고
싶었다. 계속 공유하고 싶었다.
허락된다면, 아마 영원히라도.
욕망을 삼키며 세네핀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린다.
“힘들어? 뭣하면 어제처럼 안고 가도 되는데요, 공주님.”
“……놀리지 마세요! 다음에는 내가 마법
써서 루민스를 공자님 침대에 옮겨 놓을 거예요!”
“아하하하.”
그러나 어디에도 영원은 없기에,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을 그저 사랑스럽게 더듬기로 했다.
꽃밭에는 결국, 겨울이 오니까.
그렇게 마지막 ‘소원의 조각’을 향한 길을
세네핀은 걸어갔다.
◆◆◆
약 3일 정도 도보로 이동한 후, 세네핀과
루민스는 목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해안
동굴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밧줄이라도 내려야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애매한 위치의 동굴이었지만, 마법을 써서 가볍게 동굴 안으로 진입한 두
사람은, 주변을 살폈다.
“감싸오는 빛의 숨결이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루민스가 스펠을 읊자, 익숙한 빛 덩어리가
그들을 감쌌다. 주변을 비추어줄 빛이 필요할 때마다 종종 그가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으음, 마물은 없는 것 같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는 것도 좀 으스스하지만.”
“없는 게 좋은 것 아닌가요?”
“반대로 말하자면, 마물이 생존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라는 뜻이니까?”
“그러게요, 으스스하네요.”
“그렇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웬만한 건
다 대처할 수 있으니까.”
스펠로 동굴의 내부를 확인한 후, 루민스는
약 10타헤르만 동굴을 따라 걸으면 ‘해저도시 포마르디’로 통하는 구조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금 상황이 조금 기시감이 든다고 생각했다가
세네핀은 ‘아’ 하고 깨달았다.
미혹의 골짜기 때도 그랬었다. 그때도 루민스가
스펠로 주변 지형을 확인하고, 출구까지 10타헤르 정도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주변을 비추는 빛덩어리의
마법을 본 것도, 그와 손을 잡고 걸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짧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길다고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세네핀은 그 일이 무척 예전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그립네요.”
“응?”
“미혹의 골짜기 때가 생각나서요.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엄청난 일에 휘말릴 줄 몰랐잖아요.”
게임으로 ‘소원의 조각’과 관련될 미래를
알고 있긴 했으나, 자신이 그 모험의 중심인물이 될 것은 물론이고 이런 식으로 상상하지 못할 전개가
펼쳐질 것도, 세네핀은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또한, 눈앞의 최애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애달프게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도.
“……응. 평화롭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는데.”
“그러고 보면, 루민스는 수도로 오라는 왕세자
저하의 청을 거절하셨죠. 마법연에서 그냥 계속 연구만 하고 싶다고.”
“맞아. 세네핀이랑, 벨키나랑, 진이랑―,
그냥 조용하고 사건 없이 가끔 피크닉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었어.”
“…….”
이들이 모험을 떠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할 테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움직이자고 당시의 세네핀은 생각했었다.
인간계를 뒤엎고 자신들이 대륙의 주도권을
쥐려는 마정령에 맞서서, 최종 보스인 마정령왕을 쓰러뜨리고 인간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그런 엔딩,
무척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했었다.
마정령은 멸망해가는 와중 최후의 발악을 한
것이었고, ‘소원의 조각’을 모으고자 하는 마정령의 도박은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었으며, 어느 쪽으로
흐르든 그들이 멸망하고 인간이 승리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의 그릇 회수고 뭐고 다 무시하고 그냥
마법연구원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전란이 일어나 북쪽이 소란스러워져도, 마정령은
멸망하고 인간은 승리하며 세네핀과 루민스는 평화롭게 일상을 영위해갔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어떤 형태의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그 가정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다시 침묵이 이어지고, 둘의 발소리만이 동굴 안을 울렸다.
마물도 없고, 지형도 그렇게 걷기 불편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동굴의 최심부에 도착하는 데에는 그렇게까지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다.
“입구가 보이지 않네요.”
“아마 ‘공중낙원의 미로’랑 비슷한 구조려나.
마나가 닿으면 열리는.”
그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공중낙원의 미로에서와 같은 스펠을 읊었다. 흰색 연기가 벽을 감싸자, 조금 전까지 그곳이 벽이었다는 흔적도 없이 스르르 길이
이어진다.
“가자.”
“네.”
분명히, 이 한 걸음이 길고 긴 여정의 끝에 닿을 것이다.
세네핀은 각오를 단단히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
동굴이 끝나고 도달한 곳에서, 세네핀은 번개가
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해저에 만들어진 도시이니 하늘 같은 것은
없을 텐데도, 새카만 공간 너머로 회색 구름이 똬리를 틀며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회색 구름을 둘러싸는 것처럼 푸른빛의 섬광이 끊임없이 번뜩이면서 번개를 만들어냈다. 구름과 번개가 한 덩어리가 된
거대한 형체가 건물의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는 도시, 포마르디의 한가운데를 지배하고 있었다.
“……알페이넌스 님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
조금만 더 있었으면 완전히 무너졌겠어.”
“설마, 저 구름 안에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이……?”
번개구름은 엄청난 규모였다. 그 너비가 족히
1타헤르를 초과할 정도였다.
세네핀은 언젠가 사진으로 본 적 있는 태풍의
눈을 떠올렸다.
“……바로 가자. 이대로라면 우리까지 도시가 무너질 때 휘말릴지 모르니까.”
“괘, 괜찮을까요? 저렇게 엄청난 자연 현상
같은 것을 상대로…….”
“괜찮아. 서두르자.”
루민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을 마주 쥐며 세네핀은 앞장서서 뛰기 시작하는 루민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화의 힘으로 봉인된 두 개의 소원의 조각은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곳 포마르디에서 마지막 세 번째 조각까지 손에 넣으면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신에게 어떤 것을 요청할지, 세네핀은 아직도 할 말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에게 할 말만은, 확실하게 정해놓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안위여, 땅끝이 더듬는
무지개여, 그대에게 고하노라.”
망설임 없이 고위 스펠 두 개를 연달아 발동한 루민스가 시야를 방해하는 구름을 갈라냈다. 번개를 방어해내며 구름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세네핀이 생각했던 태풍의 눈처럼 그 안은 그저 고요했다.
“아…….”
번개구름 한가운데의 단상 위에, 단검이 놓여
있었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투박한 모양의 단검이었다.
“이 단검이,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
“응.”
조금 떨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세네핀은 그의 손을 놓고 마지막 ‘소원의 조각’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로, 이것으로 끝.
어떤 것을 보게 될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든 것이 두렵지만.
“……루민스.”
“응?”
단검에 손을 뻗기 직전, 세네핀은 그를 돌아보았다.
“실은 나,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세계의 적이라는 것도. 별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도. 원래 이름도.”
“―뭐,”
“숨겨서 미안해요. 하지만 피차 마찬가지잖아요.
루민스도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걸요.”
“세네핀, 잠깐,”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세네핀은 단검을 쥐었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 루민스가 무언가 고함쳤다.
“……그러, 니까, ……제대로 이야기해요, 모든 걸…….”
짧은 중얼거림 같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암흑 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울부짖는 소리, 굉음 같은 것도 그대로
사라졌다.
??. <추억하기 - 이벤트01>
【――별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온, 어떤 여성이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어떤 남성이
있었다.】
그는 페이넌스 왕국에 존재하는 가문 중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 할데르프 공작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축복받은 환경이었다. 그에게 약속된 삶은 빛과 성공과 행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았다.
그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환생하기 이전의 그는 한 소년이었다. 전혀
다른 별세계에서 아란다스트 대륙으로, 약 200년 전에 소환되었던 소년이었다.
그는 별세계에서도, 아란다스트에서도 불행했다.
한국이라고 불리는 어떤 별세계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흘 동안 굶었던 아침, 그 소년은 아란다스트에 소환되었다.
인간의 적 취급을 받는 종족들에게 둘러싸였으나
그들은 모두 친절했다. 소년은 잠깐의 평온을 얻었고 조금은 행복했다. 죽을 위기에 조금 많이 처했지만, 그를 비호해주는 정령왕 덕에 완전히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바이러스의 숙주 같은 존재였다.
그도 알지 못한 동안 그의 속에 들어있었던 것을 말하자면, 수인족이라는 특정 종족만을 효과적으로
말살시키는 바이러스. 수인족이라는 하나의 종족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소년은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무런 가치 없는, 아니, 최악의 가치를 지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부모나 다름없었던 은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소년이 목숨을 끊는다는 방식으로 도피를 선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는 200년 후, 전생을 기억한
채 다시 태어났다.
자상한 부모님, 풍족한 환경, 뛰어난 외모, 넘치는 마법 재능.
그를 불행하게 만들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전생의 기억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전생의 일이다, 나와는 관계없다,
라고 끊어내기는 쉬웠을지 모른다.
객관화하고, 타자화하며, 측량하고, 소거하는
일들.
그러나 자기 합리화를 반복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악몽이 자아를 갉아먹어 갔다.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아도 온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소심해지고, 침울해지고, 정서가 불안정해졌다.
눈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방어했다.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부모는 꾸짖기도
했고, 실망도 했으나, 그는 어떤 기대에도 보답할 수 없었다.
공작가의 후계자 같은 훌륭한 자리도 완수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부모에게 반항하여
도피했다. 시골구석의 마법연구원에 들어간다는, 일반적인 명문가 자제가 절대로 걷지 않을 길을 선택했다.
그곳에서의 목가적인 일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숨죽이고, 누구에게도 피해 입히지 않고, 연구를 하며 영원히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몇 년 후, 벨키나라는 마법사가 마법연구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낙하산이라는 딱지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피당하던
그녀가, 침울하고 어두우며 인간관계를 제대로 쌓지 못해 경원시 당하던 루민스와 친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랬던 두 사람에게, 큰 전환기가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산책하며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고요의 호수에 평소에 본 적 없는 커다란 검은색 주사위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석한 결과 마나 형태가 특이하여 경계하였지만,
연구자 특유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은 그 주사위에 마나를 주입했다.
주사위의 정체가 <별을 향한 초대>라는
것을 모른 채.
사방을 불사르는 듯한 눈부신 빛과 함께 한
여성이 그곳에 나타났다.
‘고요의 호수’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을 살피러 온 진도 그곳에서 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것이, 세 사람과 김세나의 만남이었다.
“뭔가 그때 발생한 충격파 때문이었는지, 머리카락 절반이 홀랑 타버렸지 뭐야. 루민스는 방어 스펠 칠 거면 나한테도 쳐주지.”
그렇게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벨키나는 단발을
한 자신의 모습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발랄하고 꾸밈없이 별세계에서 온 세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루민스는 전생의 자신과 같은 처지인 세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아낌없이 쏟았다. 진은 종족 중에 홀로 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먼 세계에서 찾아온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다정하게 대했다.
세나는 정체불명인 데다가, 이름 말고 다른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을 감싸고 아껴주는 세 사람의 친구들을 무척 좋아했다.
◆◆◆
그러나, 그녀를 몰래 숨기며 마법연구원에서
지내던 평화로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정령의 침투 때문에 <별을 향한 초대>가 고요의 호수로 이동했다는 것, 또한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 그 사실을 파악한
알페이넌스는 빠르게 김세나를 찾아내어 공격했다. 200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세나를 감싸며 루민스와 벨키나, 진은 알페이넌스에게
대항했다. 물론, 당시에는 시초룡을 이길 만한 힘이 없었기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 사람이 쓰러지고 마지막에 남은 세나는 잠재된 힘을 해방하여 알페이넌스를 능가했다.
알페이넌스는 그녀의 위험성을 바로 깨달았다.
200년 전의 소년이 자연 마나를 흡수하는 타입이었던 것처럼, 김세나는 인간의 마나를 흡수하는 타입이었다.
이대로 가면 마법 문명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인간계에 큰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페이넌스는 대신 그녀를 설득하기로 했다.
200년 전에 자결한 소년의 이야기를. 유일한
생존자를 남기고 멸망해 버린 종족의 이야기를.
세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진의 종족이 멸망한
것처럼 자신이 인간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지만, 죽는 것은 무서웠다.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 신에게 당신을
원래 세계로 되돌려 보내 달라 부탁하자고.
◆◆◆
페이넌스 왕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나는 유고와도 함께 여행하고, 얄미운 칼트 왕세자를 알게 되는가 하면, 많은 사건을 겪게
되었다. 원대한 힘을 가지긴 했으나 그 탓에 세계에게 적대시 당해 목숨을 잃을 만한 일들도 자주
일어났다.
자신처럼 별세계로 떨어져 내려와 세계의 적으로
판정받은 상황에서도 의연하며, 자신을 동생처럼 아껴주는 그녀를 루민스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끝이 약속된 여행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물심양면 돕는 것뿐이었다.
그녀도 때로 루민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별세계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뭔가 그런 거 있잖아. 이 세계의 법칙과
인과에 맞는 몸을 만들어서, 아란다스트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이름이 너무 튀어서 싫은데. 세나 킴―,
도 이상해. 역시 좀 변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세……, 세라핌 같은……. 아, 세네핀은 어때?”
“좋았어! 다음으로 성은……. 킴은 역시
이상하고, 대충 그럴싸한……. 아, 뭔가 역사책에 멋있는 성 있었는데. 크롬웰이었던가.”
“그렇게 되면 이 세계에서 세나 님의 이름은 세네핀 크롬웰인 건가요?”
“응!”
그렇게 헛된, 현실 도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다가올 끝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전생의 비극을 기억하는 그는, 그녀가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
그렇기에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으며, 전생의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정령왕의 최후를 지켜보았고.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 신에게 소원을
빈 그녀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묵묵히 배웅했다.
끝까지 바란 것은 그녀의 행복이었다.
이대로 이 세계에 머물러도 그녀는 행복하지 못할 테니까. 본인 때문에 벌어지는 인간계의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녀를 보내는 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자격이나 역할 같은 게 없어도 좋으니, 곁에
있어 달라는 그 말이 기뻤다.
어딜 보나 못난 외모에 대고 잘생겼다느니
격려해주는 자상함이 따스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감정이었다. 그녀가
원래 세계에서 행복하다면, 자신의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기에 루민스는 아무런 감정도 고백하지 않고, 세나가 홀가분하게 털고 돌아갈 수 있도록, 웃으면서 보내주었다. 친구로서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정말로?】
Ⅵ. 흑막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세네핀은 몇 번 눈을 깜빡이며, 눈을 뜨려
노력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별이 잔뜩 흩뿌려져 있는 밤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은, 하늘이 뚫려
있지 않은 해저 도시였다. 그런데 어째서, 별빛이 뚜렷하게 보이는 밤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눕혀져 있는 몸을 틀며 세네핀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울고 있었다.
“루민스.”
그 목소리에 흠칫 몸이 떨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엉망진창으로 닦아내며 그가 쉰 목소리를 냈다.
“……세네핀.”
잠시 울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던 루민스가
천천히 말했다.
“해저 도시를 지탱하던 축이 무너졌어. 세네핀이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렸고. 어떻게든 대처했지만 그 과정에서 네가 물에 빠졌고…… 물을 잔뜩 먹어서…….
진짜로 죽는 거 아닌가 하고, 나는…….”
두서없이 설명하는 그의 말에 세네핀은 어쩐지
납득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에 들린 굉음의 정체와 루민스가 크게 외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아마 <세계의 적> 판정이 더
엄격해졌기 때문일 거야. 세네핀이 자기 정체를 깨달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바람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루민스가 처음으로
하얀 공간이 아닌 현실에서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소꿉놀이의 끝이 왔다는 것을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입을 뗐다.
“……‘소원의 조각’을 만질 때마다, 꿈을
꿨어요.”
“그랬구나…….”
“나의 정체를 조각조각 깨달아가는 듯한, 그런 꿈이었어요. 그러다가 루민스와 있던 하얀 공간에 혼자 가게 되어서, 거기에 박혀 있던
기억도 찾고……. 그랬던 거예요.”
그녀는 팔을 올려, 아직도 눈물 자국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척 그리운 감각이었다.
김세나로서 이곳에 있던 시절, 루민스는 자주
울었다. 그의 눈물을 닦아 주는 건, 자신의 역할이었는데.
“루민스.”
“응.”
“……루민아.”
그 호칭에, 루민스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떨렸다가, 다시 물기를 머금고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세나, 님?”
“응.”
“기억, 다 찾은 거예요?”
예전처럼 존대하는 그에게 어쩐지 실소가 나왔다.
엄지로 그의 눈가를 훑어 물기를 지워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대충은. 그런데 존대하지
마, 간지럽잖아.”
“……세네핀도 계속 존대했으면서.”
“그건 뭐라고 해야 하나, 수상해 보일까 봐 캐릭터를 유지하려고, 아니 왜 변명하고 있는 거지.”
그럴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물을
먹었던 것 때문인지 코도 목도 따갑지만, 세네핀은 쿨럭거리며 웃음을 뱉었다.
“그것보다 너무하잖아. 그때 나도 너 좋아했는데.
고백이라도 해주지.”
“……뭐?”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손 흔들길래 나 혼자만 목매달았나 했네. 금세기 최고 억울한 사건이야.”
대단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루민스는 자신의
머리를 쥐었다.
“……세네핀이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뭐지? 우리 루민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내
앞에서 욕하는 거야? 시비 거는 건가?”
“진짜 부끄러우니까 그만하자…….”
그 말대로 얼굴이 붉어진 루민스를 보며 세네핀은 다시 웃었다.
아아, 이대로만 있고 싶다. 그냥 별이 떠
있는 하늘 아래에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네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글썽거리고
있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렇게 제대로,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거, 나도 기뻐.”
언젠가 그가 울면서 세네핀에게 전했던 그
말을 똑같이 전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기뻐하기에는 아직 의문점이
많아. 루민아. 나는 꿈을 꾸면서 네 전생도 알게 되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 않아.”
“…….”
“너는 대체, 무얼 더 숨기고 있는 거야?”
루민스는 소매로 젖어 있던 눈가를 마저 닦아냈다. 곧 그는 조금 고집스럽고도 이지적인, 특유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세네핀. ……나는 너를 좋아해.”
“고마워. 그렇지만, 네가 좋아하는 건,
나의 어떤 일부인 거야.”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설마 예전의 그 꼴사나운
모습까지 좋아해 줬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이라고 조금 쑥스러운 듯 그가 덧붙였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여유롭고, 능력 있고,
포용력 있고, 정의롭기도 한, 그런 모습 말이야. 여성들이 이상적인 남자를 그릴 때 떠올릴 만한,
그런 형태. 많이 노력했어.”
“…….”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 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응, 그게 정확하겠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
세네핀.”
입술을 꽉 다문 채 자신을 노려보는 세네핀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는 눈빛을 흐렸다.
“너의 정신을 보호하는 장치라느니, 행복해지길 바란다느니 지껄이면서……, 실은 그냥, 모든 걸 알아버린 네가 나를 경멸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뿐이야. 그래서 기억해내지 말았으면 했던 거고.”
“…….”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야? 왜 내 감정을
멋대로 재단하지? 네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에, 무게 같은 거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거 실례 아니야?”
“응, 이 말을 꺼내면 세네핀이 화낼 것도
알았어.”
억지로 눈물을 참는 것처럼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모든 걸 알게 되는 게 행복한
걸까? 전생을 떠올린 나보다는, 전생 따위 몰랐던 내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
“세네핀. 지금이라면 돌아갈 수 있어.
‘소원의 조각’으로 신 따위 부르지 않고, 그냥 여기서 묻어둘 수 있어. 마정령의 존속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건 나도 어떻게든 힘써볼 테니까.”
“……루민스.”
“물론 ‘세계의 적’ 판정이 남아 있긴 하지.
너뿐만 아니라 이제 나도 위험할 거 같긴 해. 그래도 너랑 나랑 조심하면서 살아가면……, 그럭저럭
행복하지 않을까?”
그건 곤란한데.
힘없는 가정과 허무한 망상을 뱉어내는 그가
너무도 왜소하고 가엾어 보였다.
루민스가 필사적으로 마지막 벽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세네핀은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그의 간청이기에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에 대한 일이기에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루민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만을
사랑해.”
“세네핀…….”
“내 사랑을 믿어줘.”
세네핀은 검은 단검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들어 올렸다.
김세나로서의 삶을 떠올렸다. 또한 세네핀
크롬웰으로서의 삶을 떠올렸다.
“잠드는 시련이여, 온화한 한숨이여,”
김세나로서 이 세계를 떠날 결심을 한 것은 루민스 때문이었다. 그가 사는 이 세계가 계속 평화롭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세네핀 크롬웰로서 이 세계에서 발버둥 친 것 역시 루민스 때문이었다. 그가 죽는 일 없이 끝을 맞이하기 바랐으니까. 그래서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대에게 고하노라.”
그러니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고.
그 마음 하나만으로, 세네핀은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훌륭한 마음가짐이었다.
역시, 사람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멋진 사건을 선사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닿았다.
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걸 목격하고 싶었다.
아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켜보고만 있느라 지겨웠다고.
드디어 내 차례가 온 거네!
소원의 조각이 공명하며 밤하늘을 가득 채울
듯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모든 조건은 달성되었다. 소원의 조각이 드디어
나를 불렀다.
그들을 열심히 바라보고만 있던 내가, 그녀의
소환에 응하여 답했다.
【소원의 조각을 다 모아 왔구나! 자, 너의 소원은 뭐야?】
“……신, 님?”
그 질문에, 나는 끄덕이며 답했다.
【응! 내가 이 세계의 신이야.】
◆◆◆
내 외모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신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격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거든.
그렇지만 인간과 대할 때는 인격이라는 틀 안에 넣어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잖아? 그래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인격을 바꾸고 있어.】
“……그, 그렇군요.”
【좀 더 중후한 인상이 좋았니? 하긴, 예전에는
지구에서 유명한 종교의 신이랑 비슷한 분위기의 인격이었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해준 그녀에게 꽤
정이 많이 들어서 나 혼자 친근감이 넘쳤는데, 세네핀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나는 반성했다.
그나저나 뒤에서 루민스가 엄청나게 째려보고
있는데, 저쪽 세계 표현으로 적반하장 아닌가? 내가 너한테 원한이 많으면 많은 사이인데, 왜 저러고 보는 거래.
“……저는.”
【아직 정하기 어려운 거야? 그럼 천천히
정해도 돼!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고. 나, 너 되게 재밌어서 좋아하거든!】
세네핀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망설였다.
내 얼굴을 바라봤다가, 루민스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돈했다.
“신께서 창조한 종족 중, 수인족이 멸망했잖아요. 그때 왜 막지 않으셨나요?”
【꼭 막아야 할 이유가 있어?】
“신의 입장에서는 자식 같은 존재 아닌가요?”
【아하하, 지구 쪽 종교랑 착각하면 안 돼. 뭐, 수인족 중에서 나중에 재미있는 사건을 보여주는 애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 그 가능성이
사라진 건 아쉬울지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세네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으음, 나는 정이 많이 들었는데 미움받기 시작했나 봐…….
“그럼, 마정령이 사라지는 것도 별생각 없으신가요?”
【아, 그거 말인데. 마나 고갈 사건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역시 불가침 조약이 나빴어. 그렇게 시시하게 숨죽여 지내다가
세력이 줄어들다니, 너무 얼빠진 최후잖아.】
루민스보다는 세네핀의 눈빛이 훨씬 격렬한 경멸을 담기 시작했다. 하긴, 루민스야 미우나 고우나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니 이제
와서 새삼 나를 더 싫어할 구석도 없겠지.
【좀 참신한 질문 없어? 이 관련으로는 질문해 봤자 비슷한 답변밖에 못 해줄 것 같은데.】
“……. 대륙에, 인간만 남게 되면. 만족하시는
건가요?”
【아니, 딱히? 오히려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새로운 대립 종족이라도 넣어야 하나 고민되긴 하지만, 공들인 만큼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지 확신할 수가
없거든.】
비슷한 질문 싫다고 했는데, 하고 입을 삐죽이자
세네핀이 속으로 분을 삭이며 이를 갈았다.
역시 인간을 대하는 건 어려워. 친근감 넘치는
인격보다는 권위적인 인격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재미없는 세계에서 신께서 손을 떼면, 인간도 멸망하나요?”
【멸망 시나리오로 인간들이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을 즐기는 신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냥, 방치하겠지? 자원이 고갈되면
멸망하긴 하겠네. 대충 계산하면 한 10만 년 뒤쯤?】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녀가 가슴을 꽉 눌렀다. 딱히 이제 와서
알페이넌스의 비늘이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되진 않을 텐데 습관성일까.
자, 이제 슬슬 소원을 나에게 말하겠지.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세네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상상해보았다.
역시 나올 법한 소원이라면, 마정령을 인간과 대등하게 만들어달라거나? 아니면 아예 수인족까지 세트로 부활을 바라려나?
이미 사라진 종족을 다시 생성하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못 해줄 건 없으니 자연스럽게 끼워 넣을 방법을 고민해야겠네.
종족들이 북적댈수록 사건 사고도 잦고 극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 구경하기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두근두근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세네핀이 고개를 들었다.
“신이시여.”
【응!】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무척 냉정했으나
나는 밝게 응대했다. 봉사 정신이 투철한 인격이었나 보다, 이거.
“제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이 세계에, 신께서 혼자 즐겁자고 뿌려놓은
설정을 모두 회수하고, 이후 일절 아무것도 추가하지 말아주세요.”
【……뭐?】
“소원의 조각. 타 종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령의 생존 구조. 자연 마나에 의존하여 독립할 수 없는 수인족의 생존 구조. 세계의 적에 의한
강제적 균형 설정. 전부.”
무슨 건방진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를 대하면서 처음으로 화가 났다. 공들여서
설정한 장치를 ‘나 혼자 즐겁자고’라는 표현으로 폄하하는 것도 그렇고 멋대로 그걸 없애 달라는 것도
화가 났다.
【세네핀 크롬웰. 신이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했지, 기어오르라고 하진 않았는데?】
“들어주실 수 없는 건가요. 그 신 참, 무능하네요.”
【…….】
신을 상대로 도발이라. 역시 재미있는 아이이긴
했다.
나는 참 마음 착한 신인데. 정말 성격 이상한
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보구나.
눈 깜짝할 새에 네 존재 따위는 지울 수
있다고 협박하면 그만이지만, 역시 그런 방식은 우아하지 않다.
그러니 그냥, 마음 착해서 묻어두고 넘어갔던 일들이나 끄집어내자. 어쩌겠어, 자초한 거지.
루민스 할데르프에 대해서 전부 알고 싶다고
생각한 건, 바로 너잖아?
【저 장치들을 모두 부정하고 비난하고 싶은
거야?】
“그래요.”
【그래? 난 나보다 더 저 장치들을 알뜰하게
써먹은 녀석을 알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루민스가 어느샌가 달려와 내
멱살을 잡았다. 오랜만에 봐도 이 성질은 여전하네.
“……그만 지껄여.”
【말본새는 여전하네. 그때랑 달라, 루민스
할데르프. 너한테는 이제 신을 쓰러뜨릴 만한 힘이 없다. 너도 알 텐데?】
나는
루민스를 살짝 걷어찼다. 10헤르 저편으로 굴러가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깡다구만 세서는. 언젠가 쟤가 유고 페이넌스한테 한 짓을 똑같이 돌려준 셈이 됐네.
“루민스!”
【괜찮아, 저 정도는 끄떡없어. 그냥 이야기하는
데에 방해되어서.】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 장치를 알뜰하게 써먹은 놈 이야기였지. 말로 하나하나 설명하긴 귀찮으니까,
<엿보는 자의 신음>을 쓰자.】
손가락을 휘휘 저어서 세네핀 안에 봉인되어 있던 술잔 모양의 유물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알다시피, <엿보는 자의 신음>은
미래만 빼고 원하는 모든 상황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 미래를 보여줄 수 없는 건 가변적인 상황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인데, 대충 그런 원리는 넘어가고.】
설계 장인으로서 전문적인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장치를 공들여서 만드는 편이야.
<엿보는 자의 신음>도 그랬어. 모든 사람한테 다 같은 형태를 보여주는 건 재미없잖아?
그래서, 대상자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을 고르도록 제작했다 이 말씀. 누군가한테는 소설처럼 보이고,
누군가한테는 영상처럼 보이고, 또 누군가한테는 노래처럼 들리도록.】
“……?”
나의 장인 정신에 대한 자랑이 세네핀에게는
뜬금없이 느껴졌나 보다. 이해받지 못하는 장인의 고집이란 이렇게 외롭다.
하지만 분명히 세네핀도 ‘이것’을 보면 반가워할
테니, 힘차게 가보자.
인간들이 쓰는 화면 영사 마법처럼, 나는
커다란 화면을 공중에 펼쳤다. 루민스나 세네핀에게 익숙한 비유를 쓰자면, 영화 스크린 크기?
화면에서 바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소녀가, 의미도 없이 초원을 달리는가 하면, 그 옆을 은빛 늑대가 따라갔다.
보랏빛 머리에 금색 눈을 한 청년, 똑같이 붉은 눈을 한 흑발과 백금발의 형제, 의미심장하게 스쳐 지나가는 푸른색 머리 푸른 눈의 청년.
흔히 업계 용어로 말하는 오프닝 영상이 모두 흘러간 후, 분홍빛으로 장식된 로고가 공중을 수놓았다.
<아란다스트 사가>
【세네핀은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갑지? 자,
그럼 ‘아란다스트 사가’로 알아보는 루민스 할데르프의 과거, 시작해볼게☆】
둘 다 경악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엿보는 자의 신음>이
여성향 연애 게임의 형태까지 대응할 거라고는 보통 예측하지 못하겠지. 놀라는 걸 보니 흐뭇하네.
역시 나의 장인 정신!
아마 경악의 의미가 두 사람 다 각각 다를
것 같지만, 그 차이점을 고찰하며 즐기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할까.
화면에는 게임 로고와 함께 ‘게임 시작’
‘로드하기’ ‘추억하기’ ‘설정’ ‘게임 종료’라는 메뉴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나는 터치하는 것처럼
공중에 대고 손을 움직였다.
【자 그럼, 메뉴 중에서 우선 ‘추억하기’를
고를게! 세네핀이 몰랐던 대목부터 봐야 할 테니까.】
“……당, 신은…….”
세네핀이 입술을 떨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벌써 이러면 뒤에는 어쩌려고 그러지?
정신 강화라도 다시 걸까 생각하다가 그렇게까지
서비스해주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추억하기를 선택하자, 이런 게임 특유의
‘뾰로롱’ 효과음과 함께 화면이 전환되었다.
??. <추억하기 - 이벤트02>
『1주차 엔딩이 끝나고, 후일담이 시작됩니다.』
김세나가 돌아간 이후에도 루민스 할데르프의
일상은 반복되었다. 알맹이는 죽고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일상이었다. 그녀가 남겨주고 간 삶의 의미,
가르침 같은 것을 잔여 연료로 삼아 가까스로 죽지 않고 버티는 모양새였다.
벨키나는 친구인 그가 세나를 연모했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많이 걱정했다. 또한, 루민스만큼 그녀도 세나가 떠난 일로 커다란
마음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진 역시 그들을 걱정하며 다독였지만, 본인도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벨키나는 두 사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엿보는 자의 신음>을 쓰자고?”
“응. 어디에 봉인해놨는지 알고 있고, 우리 마나면 조건도 충분할 테니까.”
세나가 멀리 이사를 간 거라면 편지라도 보낼
수 있지만, 세계가 떨어져 버린 이상 서로에게 접촉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이쪽에서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벨키나가 그렇게 루민스와 진에게 제안했다.
“효력이 발동할 거란 보장이 없지 않으냐.”
“그러니까 해보는 거지. 안 되면 포기하는 거고, 되면 행운인 거고. 어때?”
왕실에 들켰다가는 꽤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할 범죄행위를 제안한 셈이었다.
과거에는 우호 관계였던 칼트 왕세자나, 유고, 시초룡 알페이넌스를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이나 법, 인간관계 같은
것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루민스는 세나를 다시 보고 싶었다.
진 역시, 두 사람의 뜻에 따랐다.
위험하고도 애처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
그들은 ‘소원의 조각’들의 봉인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보호 장치가 발동하여 소원의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한번 힘든 과정을 거쳐, 왕실의 추격도
따돌리며, 세 사람은 가까스로 <엿보는 자의 신음>을 손에 넣었다.
그 유물에 마나를 주입하고 세 사람은 단
한 명만을 그렸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단 한 사람만을.
<엿보는 자의 신음>은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받아, 화면을 펼쳐 주었다.
【여기서 내가 사용을 승인하지 않았으면 별일
없었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승인했어!】
그쪽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는, 김세나의
밝은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은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보여지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김세나는 현실에 신음하며,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채로 아주 약간의 ‘괜찮음’을 건져내어 생을 연명하고 있었다.
아란다스트에서의 추억은 그녀 안에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이쪽에서 껍데기만 남아 지내던 루민스
할데르프가 훨씬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의 안에는, 세나와의 추억이 존재했으니까.
세나가 끊임없이 우는 모습을 보며, 진은
벽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별을 향한 초대>는 말이야, 내 영향력이 미치는 바깥 세계 사람을 데려오는 거잖아? 일방적으로 강제력을
발휘할 수는 없어.】
세나가 듣는 폭언에 귀를 막고, 벨키나는
오열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래서 자기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후보가 된다 이거지. 전생의 루민스도 그렇고, 세네핀도 그렇고, 자신의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이었잖아? 별세계로 와달라는 신호에 재깍 반응한 거야.】
세나가 자해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루민스는
견디지 못하고 구토해버렸다.
【원래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인간들이다 보니, 정신 보호, 강화 처리가 필수적이었어. 내가 고심해서 장치를 짜뒀다는 거 이해하겠지? ……아, 감상하는
데 방해되니? 미안미안, 잠깐 조용히 할게.】
<엿보는 자의 신음>을 통해 목격한 김세나의 잔혹한 현실을 눈앞에 둔 세 사람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루민스였다.
“……벨키나. 진.”
“응…….”
“<별을 향한 초대>로는, 누군가
한 명을 지정해서 데려올 수 없어.”
“…….”
“그러니까,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쓰자.”
벨키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제안에 찬성했다. 진은 침묵으로 그에 동조했다.
그것은 세나를 다시 이 세계에 데려와 인간의
마나를 없애는 원흉이 되는 걸 감내하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세나만을 혼자 외롭고 비참하게 놔두지 않아도 되었다.
이기적이라 해도, 선택하고 말았다.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멈출 방법이
없었다.
◆◆◆
그들은 추격을 따돌리고, 다시 험한 과정을
거쳐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손에 넣었으나.
그 유물의 회귀 효과는 발동되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소원의 조각을 다 모아서
소원을 비는 거네.”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수밖에 없겠지.”
“……알페이넌스가 여기까지 따라붙었다. 내가 잡고 있을 테니, 그대들은 빨리 가도록 해라.”
진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걸 아는데도 그 제안을
두 사람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진의 희생마저 발판으로 삼아, 그들은 <별을 향한 초대>까지 마지막으로 입수했다.
정신과 몸이 완전히 너덜거리는 가운데, 그들은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으고, 신을 불렀다.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왔군. 그대들의 소원은 무엇인가?】
“신이시여. 우리는 작년 봄 김세나가 아란다스트에
왔던 시기로 시간을 되돌리기를 원합니다.”
【불가능하다.】
“……어째서!”
【크큭, 그대들의 생각은 흥미롭군. 특히,
루민스 할데르프. 신이라도 쓰러뜨리면 권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해볼 수 있다면, 어디 해보아라.】
원래대로라면 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 따위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은 김세나와 함께 있었고 그녀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며 남긴 마나를 흡수했기에
거대한 힘을 지닐 수 있었다.
군대 단위의 전력을 상대로도 페이넌스 왕가의
추격을 피하여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호각을 이루면서도 신을 완전히 능가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이어지던 그때.
아주 찰나의 순간, 벨키나가 자신의 생명력을
전부 희생하여 틈을 만들고, 루민스가 신을 완전히 쓰러뜨렸다.
【이때는 나도 겉멋이 들어서 그랬어. 인간한테
지는 신은 꼴사나운데.】
루민스는 신을 자신 안에 봉인했다. 전생에
자연 마나를 흡수하는 체질이었던 영향인지, 신을 자신의 안에 가둔다는 감각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울면서 벨키나의 시체를 안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그는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집어들어 자신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희생한 그의 친구들과,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녀가 존재하고 있을 과거로 회귀하기 위하여.
신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 <로드하기>
『로드하기 > 슬롯0002』
『SENA_KIM.dat 파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디버깅하시겠습니까?』
> 네
< 아니오
루민스가 회귀한 시점은, 김세나가 나타나기
바로 직전, ‘고요의 호수’로 벨키나와 산책하러 가던 도중이었다.
“루민스? 얼굴이 왜 그렇게 심각해?”
“……벨키나.”
그의 시간으로는 조금 전까지 시체였던 그녀를
다시 본 루민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어? 얘 왜 이래? 또 누가 너 보고
뭐라 그랬어?”
“……아냐. 아니야.”
회귀 전의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은 루민스뿐이었다.
고통을 공유하던 친구들에게는, 기억이 없었다.
그 끔찍한 경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이 회귀는 나를 아예 흡수해서 자기 권능하에
둔 루민스가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알페이넌스나 정령왕도 회귀 이전을 기억하지 못했지.】
떨리는 손으로 울면서 고요의 호수로 다가간 루민스는, 주사위 모양을 한 <별을 향한 초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아, 윽!”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는 고요의 호수에 빠지고, 호수의 마물이 그를 움켜쥐었다.
죽음은 순식간에 그를 잠식했다.
『로드하기 > 슬롯0003』
『로드하기 > 슬롯0004』
『로드하기 > 슬롯0006』
…………
………
……
【이때는 정말 지독했어. 진짜 숨만 쉬어도
위험할 정도로 세계가 루민스를 죽이려고 했거든. 회귀하고 10분도 안 되어서 죽은 것만 세어도
20번은 넘지 않나?】
루민스는 한참을 죽고 시간을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그 끝에 겨우 <별을 향한 초대>에 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주사위는 그가 신의 권능을 동원해도
반응이 없었다.
신의 권능을 발동하는 그를 두고 볼 리 없는
세계는, 또 그를 죽였다.
【이쯤 되니 얘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 것도 지루해서, 내가 말을 걸었어. 네가 회귀 전의
<헛되이 돌아가는 전율>을 나랑 같이 몸 안에 봉인해 버려서, 회귀 이후 ‘소원의 조각’들이
죄다 맛이 가버렸다고.】
네가 신의 권능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회귀뿐이라고 신이 비웃는 소리를 들으며, 루민스는 이를 갈았다.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김세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엿보는 자의 신음>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였기에.
그는 생각을 바꾸어, 회귀로 돌아가는 시점을
바꾸기로 했다. 이미 김세나가 소환된 후인, 그 다음 날이었다.
『로드하기 > 슬롯0032』
몇 번의 죽음을 또 겨우 반복하여, 루민스는
세나의 얼굴을 발견했다.
어째서인지 마법연구원의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세나를 향해 루민스는 반색하여 달려갔다.
“세나 님!”
그러자 세나의 얼굴을 한 여성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김세나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쓰겠다고 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회귀 끝에 알게 된 것은,
세네핀 크롬웰은 처음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이며 세나와는 얼굴만 똑같을 뿐 성격도 배경도
‘포지션’이라 해야 할 것까지도 모든 것이 딴판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바보라니까~. 김세나가 있는 과거로 돌려달라고
소원을 빌고 나서 내가 불가능하다고 답했을 때 눈치챘어야지. 별세계의 인간은 내가 관장하는 법칙과
인과에서 벗어나 있는걸.】
신이 비웃는 소리와 함께 루민스는 절망했다.
별세계에 있는 김세나라는 인물에게는, 아란다스트라는
세계의 회귀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루민스의 전생이랑 김세나가 있던
한국은 비슷한 시간축이었잖아? 그런데 아란다스트에서는 200년의 시간 차가 있었고. 그렇다면 두 세계의 시간축이 완벽히 다르게 돌아간다고 추론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똑똑하면서 이상한 데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놈이야.】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존재에 걸었던 희망도
반복되는 회귀와 함께 없어졌다. 그녀는 매번 같은 반응을 보이고 같은 방법으로 벨키나를 괴롭히다가
같은 결말로 마법연구원에서 사라졌다.
【너희 세계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게임의 NPC라고 해야 하나? 회귀 전 과거에 김세나가 있긴 했는데 회귀하고 나니까 없어져서 존재가
뻥 뚫리잖아. 세네핀 크롬웰은 그 모순을 채우기 위해서 자리를 메꾸는 NPC인 거지. 그냥 설정대로
반응하는 로봇.】
그는 절망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친구를 희생하고 신념을
버리고 과거의 동지와 싸우며 도달한 길이었다.
완전히 절망하고 생을 포기하려는 그에게 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대의 끈기에 감복하여 내가 하나 제안하지.
소원의 조각을 온전히 모으고 나를 해방한다면. 신의 권능으로 그녀를 데려와 보도록 하마.】
그에게는 그 말에 매달리는 것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세계의 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으기 위한 까마득한 여정을 내달리는 것 외에는.
◆◆◆
【중간 내용은 스킵 눌러도 되지? 왜냐고?
예전에 봤던 내용이잖아. <아란다스트 사가>의 각 캐릭터 루트들 말이야.】
『로드하기 > 슬롯0094』
【아마도 ‘엿보는 자의 신음’이 루민스 때문에
맛이 가면서 발생한 오류였던 모양인데, 루민스가 네 모습을 보고 싶어하던 욕망이 거꾸로 작용해서,
그의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게 바뀌었나 봐.】
『로드하기 > 슬롯0211』
【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냐고 묻는다면, 네가 이해하기 쉬운 형태였던 ‘여성향 연애 게임’이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이나 생략은 있었다고 답할게. 루민스가 죽은 횟수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고, 벨키나와 다른 애들
사이에서 크게 애정 행각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로드하기 > 슬롯0230』
【게임과 가장 큰 차이는, 루민스가 죽은
이후에 이어지는 해피엔딩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다시 회귀가 일어나면 모두 지워지고 끝이니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네가 ‘루민스 루트’라고 생각했던 그 회차도 결국 루민스가 죽고 끝났는걸.】
『로드하기 > 슬롯0262』
【루민스는 본인이 반복해서 회귀할 때마다,
아란다스트 대륙의 모든 인구를 죽여온 거야. 상상이 가? 그곳에서 탄생한 수많은 이야기와, 행복과,
긍정적이며 가치 있는 것들과 극복해야 할 시련과, 의미 있는 비극과 아픔까지도 자기 목적 이루자고 말살한 놈이라고.】
『로드하기 > 슬롯0278』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전생의 어머니였던
존재를 죽이는 것도,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수많은 인간이 자기 때문에 존재가 지워지는 것에도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지.】
『로드하기 > 슬롯0300』
【아, 찾았다. 여기가 마지막 회차다. 스킵이
느려서 미안해! 바로 가자!】
―이 회차에서는 알페이넌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루민스의 경험 중에 가장 이상적인 진행이 이어졌다.
세 개의 소원의 조각을 모으는 것도 순탄했고,
언제나 지뢰처럼 깔린 죽음 트랩을 피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신을 봉인하고 있는 것에 대부분의 힘을 소모하고
있던 루민스는, 되도록 벨키나를 보조하여 힐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나를 아끼려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그는 무기력했다.
<엿보는 자의 신음>을 계속 쓰지
못했기에 무척 오랜 시간 세나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했다.
어쩌면, 전생의 자신처럼 그녀가 이미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런 불안함과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에, 정령왕과 대면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 그녀를 쓰러뜨리고 <엿보는 자의
신음>만 얻으면, 소원의 조각이 모두 모일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사건은 희망찬 전개일 때 닥쳐왔다.
무의식이었을까, 혹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소모해온 양심의 부스러기가 남았던 걸까.
정령왕의 공격에 벨키나가 심장을 관통당할
뻔한 바로 그 순간에 저도 모르게 루민스는 몸을 움직였다.
“……아.”
루민스는 벨키나 대신 그 공격을 맞았다.
그 빈틈을 노려 다른 이들이 정령왕을 쓰러뜨렸다.
자기가 대신 죽어주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을 알기에 ‘낭패로군.’ 하고 루민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벨키나가 울며 치유 마법을 쓰려 하고 진이 그를 걱정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쓰러져 있는 정령왕이 눈앞에
보였다.
전생의 먼 기억 속에 가치 없는 자신을 지키다
치명상을 입었던 정령왕의 모습도.
알페이넌스를 막아서며 두 사람을 재촉하던 진의 뒷모습도.
싸늘하게 식어가던 벨키나를 껴안고 흘렸던
눈물의 감촉도.
완전히 무감각하게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겨우 그 정도의 의지밖에 갖추지 못한 자신을
깨달으며, 루민스는 삶에서 처음으로 세나를 구해내겠다는 목표를 손에서 놓았다.
회귀를 발동하지 않고 신을 해방시켜주자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몸 안에 갇혀 있던 나를 구해줘서
고맙다.】
참으로, 허무한 끝이었다.
【――소원의 조각을 모두 모아왔군.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내 루민이 살려내! 우리 루민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또한 시작이었다.
∞. 그리하여, 세계는
【신의 서비스 끝! 짝짝짝!】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을 마주치며 나는
분위기를 발랄하게 고조시켰다.
메인 메뉴로 돌아간 게임 화면을 끄면서 나는 손을 흔들었다.
【우연하게도 세나가 외친 소원이 이쪽이랑
공명했지 뭐야. 너무 재미있지 않아? 루민스가 완전히 삶의 의지를 잃은 그 순간에 세나가 그를 구할
의지를 발동하다니. 너무 극적이어서 두근두근했어.】
세네핀은 고개를 떨군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다시 즐겁게 보라고 게임 화면까지 제공했는데 끝까지 본 거 맞나?
【그래서 착한 신인 나는, 소원을 이루어주었어.
살려내는 건 회귀를 하면 그뿐이고, 루민스가 행복해지는 거야 김세나가 곁에 있어 주면 그만이니까.】
아까
내가 걷어차서 피가 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피를 내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되게 자신의 입술을 깨문 상태로 루민스가 나를 노려봤다. 내 앞에서
끝까지 울지 않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전과 다르게 이미 이 세계에는
김세나의 구멍을 메우는 세네핀 크롬웰이라는 존재가 있었잖아. 억지로 그걸 지우고 김세나를 데려오느니 이미 있는 몸을 활용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영혼만 데려왔어. 어차피 얼굴도 같잖아?】
타박타박 걸어서 세네핀에게 가까이 갔다.
그걸 보자마자 루민스가 기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저 녀석 안에 갇혀 있던 원한이 떠올라서
한 번 더 발로 차 주려다가 참았다. 본인의 부끄러운 역사 전시회까지 펼친 마당에 그건 너무 잔인하지. 난 역시 착해.
【봐봐, 루민스 할데르프에 비하면 내가 그 장치들을 쓴 횟수는 몇 번 되지도 않는다고. 심지어 너희는 그 장치 덕분에
이렇게 눈물겨운 재회도 한 거 아니야? 자기 좋을 때는 편리하게 써먹고, 착한 척하고 싶어지니까
장치를 회수하라니, 뻔뻔하지 않아?】
나는 무릎을 굽혀 세네핀과 눈높이를 맞췄다.
울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짝!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네핀이, 내 따귀를 때렸다는 사실이 무척
초현실적이었기에.
“……너는, 그저 그렇게, 매사가 재미있고 재미있지 않고로 나뉘지?”
이제는 신에 대한 존대조차 소멸시킨 그녀가
노성을 냈다.
“저 모든 과정을 봤으면서 어떻게 그따위 생각을 할 수 있어? 재밌어? 즐거워? 남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데도 고통받는 모습이 좋아?”
그녀가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계속 관찰하고 있었던 건데.
루민스만 해도 그렇다. 나는 나름대로 호감이
있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신의 호감을 인간은 똑같이 돌려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친절한 서비스가 이런 결과로 돌아와서 나도
무척 안타깝다.
신의 권능을 최대로 발휘하여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사방에 번개가 튀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영창도 없이 발동된 쉴드가, 세네핀을 감싸며
내 공격을 튕겨냈다.
“웃기지 마!!”
【……어라?】
저도 모르게 놀라서 중얼거렸다. 방금, 정말로 세계에서 소멸시킬 생각으로 공격했는데.
하지만 그녀는 무릎이 꺾인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우는 상태에서도, 그곳에 존재를 유지한 채 나를 노려보았다.
“수인족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걸 보면서 남은 숫자를 카운트다운이라도 했어?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는 알페이넌스를
비웃었어? 고뇌하면서도 그 애를 지키자는 선택을 한 정령왕이 바보 같았어?”
마치 소드 마스터처럼, 세네핀은 아무런 스펠도
발동하지 않고 불그스름한 빛을 몸에서 발산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네핀은 그대로 내 가슴을
붙잡고 땅에 내동댕이쳤다.
“옳지 않은 방법이었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모독하지 마! 뻔히 보이게 유혹해서 그 방법에 매달리게 한 주제에,
그 절박한 마음을 짓밟지 말라고!”
그녀의 팔에 불길이 스며드는 걸 보았을 때, 이건 좀 위험하겠다 직감했다.
“네가 만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다뤄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야!”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사방으로 튀는 충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타격을 입은 나는 바닥을 뒹굴며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자연 마나, 다음에는 인간의 마나.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강림한 세네핀 크롬웰은, 신의 마나를 흡수하는 체질이었다.
【잠깐, 미안, 항복.】
처음으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루민스의
몸 안에 갇혔을 때는 이런 기분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답답하긴 하지만 얘가 삽질하는 꼴이 흥미로우니까
지켜보자 정도였지.
그러나 이건 정말로 위험했다. 이대로 힘을
흡수당하면, 신으로서의 껍데기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질지 모른다.
【알았어. 아까 말했던 소원. 이루어줄게.】
“이루어줄게? 되게 뻔뻔하네. 너도 간절하게
빌어 봐. 왜, 신이라 못하겠어?”
세네핀이 아까 루민스에 대한 복수를 대신하려는 듯이 내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일단은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네.
세네핀이 울면서 계속 나를 공격했다. 세네핀이
간섭할 수 없는 차원으로 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붙들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처음으로, 인간들이 가끔씩 말하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공격을 당한다고 딱히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으로서의 존재가 깎여나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경험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과 비슷한 감각 아닐까.
【잠깐, 미안, 아니, 정말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거 다 들어드릴게요.】
나는 납작 엎드렸다. 신으로서의 권위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왜? 이제야 좀 아쉬운 게 느껴져? 내가 지금 네 마나를 흡수하니까?”
이런, 전지 능력까지 흡수되고 있나 보다.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건가?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도 대답해주니 편리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두렵다고 해야 하는 건지.
물론 내 생각 따위는 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세네핀은 푸른색의 전격을 휘둘렀다.
콰르릉 소리와 함께 내 몸에 충격이 퍼졌다.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는 건가. 신의 말로로는
가장 비참한 꼴 같은데.
역시 제어 불가능한 외부 요소 같은 건 넣는 게 아니었……
그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세네핀이 내 복부를
불길로 가격했다. 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슬슬 이 인격의 형체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세네핀.”
이제 정말로 사라지겠다 각오한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루민스였다.
“……루민아.”
나에게 걷어차인 상처를 회복했는지 천천히 일어난 루민스가 세네핀 곁으로 다가왔다.
나한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감정한
눈으로 나를 향했다.
정말로 끝장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대로는 정말로 신이 소멸해버릴 거야. ……이쯤 하자, 세네핀.”
뜻밖에도 나를 제일 증오할 그가 나의 최후를
감쌌다.
“그렇지만, 저 개자식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있잖아, 세네핀. 아까 신이 했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수많은 사람을 소멸시켜온 나 역시 존재하고 있을 자격 같은 건 없어.”
“윽…….”
“그런 나를 경멸해도 될 텐데, 오히려 화내줘서 고마워. ……그러게, 세네핀의 사랑을 흔들림 없이 믿었어야 했는데.”
분노와 다른 의미의 눈물이, 세네핀의 눈에서
흘러 떨어져 내렸다.
조심스럽게 그 눈물을 닦아준 다음, 루민스는
나에게 다가와 자세를 낮추고 엎어져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말이 맞아. 우리는 모순에 빠져 있는
생물이야.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했던 주제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자기는 편리하게 써먹었던
주제에, 이후에는 그걸 없애자고 해. 감정이 이성을 앞서기도 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방법이 최악의
결과를 낳아.”
【…….】
“……회귀를 반복하던 내가 모든 비극에 무감각해진
것처럼, 너는 그저 긴 세월 신 노릇을 하면서 자극만을 원하게 된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 적어도
나한테는 널 비난할 자격 같은 건 없어.”
【그게 방금 날 구해준 이유라는 거?】
“아니, 그건……. 고마워서 그래. 과정이
어찌 되었든, 네 의도야 어찌 되었든, 신이 일으켜 준 기적 덕분에 세나를, 세네핀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은 순수하게 감사하고 있어.”
루민스의 말이 그대로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딱히 신의 전지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의 안에 그럭저럭 오래 있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네가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졌으니까. 세네핀의 소원대로 이 세계에서 장치들을 없애고 손을 떼어줘.”
뒤에서 우리 둘을 지켜보던 세네핀이 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그녀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빼앗아 간 네 힘을 완전히 돌려주진 않을
거야. 언제 장난질을 칠지 모르니까. ……널 완전히 없애서 내가 신을 대신해도 되지만, 그러지 않겠어.”
【완전한 주인공도 흑막도 다 할 수 있는
건데, 욕심 안 나?】
“그따위로 말하면 루민이 부탁 무시하고 한 대 치고 싶어질 테니까 닥쳐.”
어차피 말로 안 해도 내 생각이 다 읽힐
텐데 굳이 말로 하지 말라고 하는 면은 참으로 인간답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한 후 나는 두 손을 들어서 더는 반항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난 약속은 지켜.
너희가 원하는 대로 내가 일부러 추가한 이 세계의 장치들을 풀고, 이후에 손대지 않을게.】
“……좋아.”
【하지만 기억하도록 해. 딱히 신의 장치가
없더라도 어차피 갈등도 증오도 불행도 존재할 수밖에 없어. 마정령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페이넌스
왕국은 권력욕에 따라 뿔뿔이 분열될 위험이 커. 마정령도 바뀐 체계에 적응하며 인간과 공존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고. 신의 기적이 사라진 신단은
위장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치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택해서 인간이 나아가는
삶이니까 충분히 의미가 있어. ……네가 휘저어 놓은 장난감들의 삶이 아니라.”
자유 의지의 존중이라니 세계관 중에서도 참으로 고리타분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물론 내
생각을 읽은 세네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더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게 상책 같아서,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시작할게. 작업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내 힘을 돌려줘.】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세네핀은 성의 없이
나를 만졌다. 그녀에게 흘러간 힘이 일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다 돌려주지는 않고, 세네핀이 나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정도에만 그쳤다. 치사해라.
감시당하는 작업이라니 무척 신선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잠시 인과를 멈추었다.
만드는 것에 비해서 없애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전체 얼개에서 이질적인 구조였으니까.
손을 들어 세네핀 안에 있던 ‘소원의 조각’을
모두 회수하고 소멸시켰다. 마정령이나 수인의 종족 특성을 변환시키는 것이 약간 까다로웠지만, 인간에
준거했으니 그 뒤의 혼란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장치들도 사라져갔다. 이제 알페이넌스와 정령왕도 힘을 잃고 평범한
개체로 돌아가리라.
과정은 쉬웠지만, 공들여 만든 설계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해체하여 부수는 작업은 가슴 아팠다.
◆◆◆
정돈을 끝내고 다시 인과를 움직였다. 별문제
없이 세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묘한 섭섭함과 후련함을 느끼며
세네핀을 돌아보았다.
【끝났어.】
여전히 노려보면서도 세네핀은 끄덕였다. 그녀가
붙들고 있던 나를 서서히 놓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보지 말자.”
【네에, 네에.】
루민스는 인사도 무엇도 없이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관찰하는 것 외에, 더는 이 세계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격을 회수하여,
빠른 속도로 아란다스트 대륙을 벗어났다.
역사에 기록되는 주인공은 되지 못하겠지만,
이후 대변혁을 일으킬 후폭풍만을 남긴 채.
역시, 사람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멋진 사건을 선사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사랑이 이룩한 기적이라니, 뻔하고도 눈물
나는 결말 아닌가.
……라고 납득해야 나도 수지가 맞을 것 같으니 그렇다고 치자.
에필로그. 이후로도 이어진다
어느샌가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와, 루민스 너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오랜만에 그와 얼굴을 마주한 벨키나가 겉옷을
벗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루민스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을 돌려주었다.
“필요할 정도로는 자고 있어. 얼굴색 보니
넌 잘 먹고 잘 잔 거 같네.”
“뭐야, 불만이야?”
더 화를 내려고 했다가 예상 밖의 반응에
벨키나가 주춤했다.
“……얘가 요즘 들어 사람 맥 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생겼어.”
“하하.”
책상에 앉아 있던 루민스는 서류를 옆으로 치워두고 벨키나가 앉아 있는 건너편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정령 쪽은 어때, 벨키나?”
“여전히 혼란스럽지, 뭐. 솔직히 정령 입장에서야 평생을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는 게 어디 그리 쉽겠어. 저하가 파견한 실무단이랑 진이랑 알프 씨랑 내가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아마 짧게 잡아도 1년 반 이상은 대응이 필요할 것 같아.”
“그렇군. 이쪽도 정령의 자치권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것저것 하고 있어. 저하께서 이런 부류의 법안은 반발이 일기 전에 빨리 도장을 찍어야 뒤탈 없다고 밀고 나가고 계시니까, 문제없겠지만.”
“알아서들 잘 아시겠지요~.”
버릇없는 자세로 소파에 완전히 기댄 벨키나가
루민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벨키나가 한 손을 펼치며 내놓으라는 듯한
건달 자세를 취했다.
“나 너한테 돈 빌린 거 없어.”
“그야 보통은 내가 너한테 빌리겠지! 그게 아니고, 너네 결혼 준비 안 해? 청첩장 언제 줄 건데.”
“아…….”
손을 입에 가져가더니, 루민스가 시선을 피했다.
쑥스러워서 저런다는 걸 알지만, 벨키나는 좀 울컥했다.
“설마 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다는 소리만은
안 나오길 빈다.”
“…….”
“아직이야!?”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벨키나는 ‘내가
미쳐버리겠다’ 하고 신음을 내며 거의 드러누울 기세였다.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아니, 음……. 나랑 세네핀이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우리 나이가 결혼하기에 이른……”
“페이넌스 왕국에서는 차고 넘치는 나이고! 내가 세네핀한테 들은 바로는 그 세계에서 결혼 연령이 늦는 건 돈 모으느라
그런 거고! 너는 부자고!”
“진정해라.”
“진정하게 생겼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벨키나는 눕히고 있던
몸을 다시 번쩍 세웠다.
그녀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루민스는 화제를
돌렸다.
“우리보다 네 연애 사업이나 신경 써. 괜찮은 분위기인 사람 없어? 알프 씨는 너한테 은근히 마음 있는 눈치던데.”
“그런 거 없으니까 말 돌리지 마. 너 자꾸
그러면 우리나라 법을 개정해서라도 내가 세네핀이랑 결혼할 거야.”
그 타이밍에 시종이 손님을 위한 차를 내왔다.
씩씩거리면서도 따뜻한 차를 입에 대며 벨키나는 루민스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실은 내년 봄에 프러포즈하면서 약혼식은 미리 할까 계획하고 있어. 결혼은 세네핀 의향 듣고 천천히 하려고.”
“진짜 얄미워…….”
투덜거리던 그녀는 푹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진지하게 바꾸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자기를 몰아가듯이 일하는
거 좀 관둬. 세네핀 진짜 걱정하겠다. 내가 보기에도 해쓱해 보이는데.”
“……응, 알긴 하는데.”
허브티를 반 잔 정도 넘겼을 때, 루민스가
조용히 말했다.
“이 말 또 하면 화낼 것 같지만. 벨키나. 난 너하고 진한테 가장 미안해.”
그가 어떤 의미로 하는 소리인지 그녀는 바로
알아채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지금’의 너희에게 그런 마음 가져봤자
의미 없다는 건 알아. 그래도 미안해.”
“그야 뭐, 솔직히 사정 다 들은 나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니까. 넌 그것도 슬프지?”
“…….”
“내가 괜찮고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잖아. 예전에 정령왕님한테 갔을 때 진이 그랬다며.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은 동일하지
않다’라고. 연속된 과거도 그럴 정도인데, 지워진 세계의 나는 이미 남이나 다름없지.”
‘지금’의 그들이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이 삶이 행복하게 이어진다 해도.
수백 번 지워진 세계의 벨키나가, 진이,
유고가, 칼트가, 알페이넌스가, 정령왕이…….
루민스 할데르프를 용서할지는 알 수 없고,
용서받을 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세계에 오류라도 생겨서 말이야,
너 때문에 지워진 벨키나 무리가 전부 나타나서 너한테 복수극을 펼치려고 하면, 네 편 들어줄게.”
루민스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감동했지? 그러니까 우리의 우정을 기념해서
나 옷이나 사줘. 코트 필요해.”
“2급 마법사로 올라가서 연봉도 늘어난 주제에,
사람 지갑 취급하는 건 안 변했냐.”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실은 마음이
쓰렸다. 이 고통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도 정답이 없기에, 평생을 괴로워하면서도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
“아, 그럼 진이랑 벨키나는 얼마 전에 유고를 만났던 거야?”
“그렇다. 일부러 우리가 있는 ‘신성한 대지’까지
발을 옮겨준 모양이었다.”
“안 그래 보여도 정이 많으니까 말이지,
우리 비둘기 왕자님.”
“……그거 본인 앞에서 말하면 발끈하는 별명
아닌가.”
“당사자 없는데 뭐 어때.”
은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한 청년은 늑대
귀를 그대로 드러낸 채 카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신기한 듯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미 시선에 익숙해진 눈치였다.
“왕세자 저하는 유고가 왕궁에 남아서 자기
일을 보조해주길 바랐던 모양인데 말이지, 본인이 외부로 도는 업무를 자진했으니, 별수 있겠어.”
“아마 한동안 수도에서 너나 루민스와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만.”
“……아하하.”
세네핀이 뺨을 긁적이며 약간 난처한 표정을
했다. 둘 사이에 고백과 거절로 이어지는 무언가의 사건이 있었음을 알기에 진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정령왕님은 잘 계시지?”
“그래. 꼭 놀러 오라고 전했다. 시간 나면
가도록 해라.”
“응, 루민이랑 갈게.”
“……루민스가 장기 여행을 위해 낼 시간이
있긴 한가?”
“그야 억지 부리면 시간이야 낼 수 있지.
아마 내가 부탁하면 거절 안 할걸?”
“……부탁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군?”
“당분간은 그래. 내가 고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해도, 당사자가 편하게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진은 작게 끄덕였다.
오랜 기간 회귀를 반복하며 루민스 안에 뿌리내린 죄책감은 타인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대상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세네핀 역시 김세나로서 겪었던 상처나 아픔을
내면에 깔고 있기에 그 마음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나마 이해해줄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외롭지 않게, 언제나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자 구원이 되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일이라도 열심히 해서 마음 편해지고
싶은 루민이 의사를 존중하고 싶어. 난 얼마든지 기다릴 거야.”
세네핀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열불 나긴 하지만. 일할 때 얼굴 보기
힘들어서 무~~~지무지 열 받지만.”
“걔 그럼 내 눈치 본다고! 그건 싫어…….”
“그대들도 참 복잡하게 연애하는군.”
진의 지적에 “어차피 나나 걔나 복잡한 사람들이네요~”
하고 농담 투로 돌려준 다음 세네핀은 테이블을 탁탁 쳤다.
“그나저나, 넷이 모이면 되는데 굳이 따로
떼어서 약속 잡은 거 이유 있는 거지? 뭔데?”
“흠. 나는 섣불리 찔러보지 말자고 반대했다만, 벨키나에게 떠밀렸으니 그냥 물어보지.”
“……짐작은 가지만, 뭔데?”
“그대들, 결혼은 언제 하는가?”
“역시 그거일 줄 알았지―”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하는
거랍니다…….”
“해석하자면, 세네핀은 결혼할 마음이 충만한데
루민스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억지로 덮치고 싶단 의미는
아니야.”
“……나는 거기까지 묻지는 않았다만.”
“농담은 이쯤 하고. 말했잖아. 난 얼마든지
기다릴 거야. ……루민이가 나를 기다려 준 시간에 비하면 얼마를 기다려도 부족하지.”
“…….”
진이 조금 서글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루민스와 이해를 공유할 수 있다면, 하고 나도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그저 피상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응. 참 힘들지. 함부로 타인을 완전히 안다고 단언하는 건 어려워.”
“……그렇지만 상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대나 루민스를 진심으로 친애한다. 그러니, 답답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은 언제든지 말해줬으면
한다.”
세네핀은 그가 강아지였던 시절의 버릇대로
팔을 뻗어 자신보다 한참 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상대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다는 거 정말 멋진 것 같아.”
“……그래. 그리고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만.”
“응?”
“루민스가 아니라, 세네핀 그대는 어떤가.
……불안이나, 공포는 없나?”
“…….”
세네핀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진한테는 못 당하겠네.”
“그대의 마나를 오랜 기간 공유하던 자의
감이라고 해두지.”
“……그렇구나. 글쎄, 잘 모르겠어. 이곳에서
완전히 육체를 가지고 사망했다가 환생한 루민스하고 다르게, 지금 나는 영혼만 이 세계로 온 거잖아. 그럼 원래 세계의 내 몸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이곳에서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종결되는 걸까.
그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어.”
“…….”
“하지만 음, 생각해도 소용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관두기로 했어. 당연히 돌아가기 싫긴 하지. 그렇지만, 죽은 후의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인걸. 루민스가 전생을 기억한 채로 환생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진은 평소에 보기 드문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대는, 강하군.”
“그럼요, 우리 루민이를 지켜야 하는걸요. 물론, 벨키나랑 진도 말이야.”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세네핀. 항상 그래.”
“응! 고마워!”
진의 손을 꽉 잡아 감사를 표하던 세네핀이, 창밖을 보고 소리를 냈다.
“아! 첫눈이다!”
“그랬군. 우리가 있던 북쪽은 이미 눈이
내렸다만, 홀르나에서는 첫눈인가.”
세네핀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도록 해라. 나와 벨키나는 우리가 항상
머물던 왕궁의 별채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필요하면 방문하고.”
“그럴게!”
세네핀은 겉옷을 챙겨입고 급하게 진에게 인사한 후 엄청난 기세로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따뜻하게 웃은 후 진은
코코아가 든 컵을 감싸 쥐었다.
◆◆◆
세네핀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열심히 뛰어갔다. 그녀의 표식은 3급 마법사 자격에서 변하지 않았다. 칼트는 그녀에게 특급 마법사
승급을 권했으나, 자신이 신을 견제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힘은 일반적으로 절대 쓸 일이 없다고 거절했다.
바쁘게 살고 있는 루민스와 달리 세네핀은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가 쉴 수 있을 때 토닥여줄 수 있도록, 언제 어느 때나 양팔을 활짝
뻗어서 그를 안아줄 수 있도록.
할데르프 공작저에 도착하여 그녀는 정원에
들어섰다.
첫눈인데도 제법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아직 낙엽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나무를 하얗게 장식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늦가을의 정원이
눈을 맞고 있는 모습이 서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뛰어난 풍경보다도 그녀의
관심을 끄는 그가, 저편에서 보였다.
“루민아―!”
크게 외치자 그가 활짝 웃으며 세네핀을 향해
달려왔다. 얼른 달려가서 그 품에 안기자 루민스는 세네핀을 번쩍 들어 올려 두 팔로 꽉 감쌌다.
남들이 보면 반년 만에 만난 연인의 재회인
것처럼 보일 것이나, 약 3시간 만의 재회였다.
2층의 집무실 창문으로 그 꼴……, 아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벨키나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쟤들은 어디가 모자라서 결혼은
안 하고 있는 거래. 하이고, 진한테 가서 세네핀이랑 뭔 얘기 나눴는지 들으러 가야겠다.”
아마도, 결혼할 마음이 차고 넘친다는 세네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벨키나가 펄펄 뛰며 겨울이 지나기 전에 약혼식을 추진하자고 발 벗고
나서리라.
그런 건 딱히 예상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흔하디흔한 전개였다.
오랜만에 다시 둘러봐도 역시 예상대로였다.
지루하도록 행복한 이야기와, 뻔하도록 당연한
순리가 그 후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계속 지켜보며 흥미를 느낄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 역시 미련 버리고 새로운 세계나
보러 가자.】
나는 화면을 닫았다.
악녀는 들러리를 희망합니다 2권
전자책 발행 2019년 7월 18일
지은이 | 걸검
발행인 | 홍영태
발행처 | 엠노블
등 록 | 제313-2011-96호(2011년 3월 24일)
주 소 | 03991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6길 3 이노베이스빌딩 7층
전 화 | (02)338-9449
팩 스 | (02)338-6543
e-Mail | mnovel_cp@naver.com
홈페이지 | http://www.mnovel.co.kr
ISBN 979-11-967415-1-8 [05810]
전자책 정가 3,500원
* 잘못된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꾸어 드립니다.
* 엠노블은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디어와
원고 투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고가 있으신 분은 mnovel_cp@naver.com으로 원고의 시놉시스와 일부 원고, 연락처 등을 보내 주세요.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시에는 형사/민사상의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mments
Post a Comment